지금으로부터 10여 전의 일이다. 은행에 볼일이 있어 갔다가 기다리는 동안 객장(客場) 안에 준비해 놓은 주간지를 보다가 '성업(盛業) 중인 사혼 예식장(死婚禮式場)'이라는 기사를 읽었다. 기사의 내용은 서울 우이동 도봉산 기슭에 죽은 처녀와 총각의 혼인을 주선하여 주고, 식을 올리는 사혼예식장이 있는데, 성업 중이라고 하면서 허름한 건물의 사진까지 실려 있었다. 나는 이 기사를 읽고 사혼(死婚)의 민속이 지금도 행하여지고 있음을 알았다. 주간지는 일반 독자들의 흥미 위주로 제작되기 때문에 기사 내용의 신빙성에 문제가 있기도 하고, 과장(誇張)하여 표현하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이러한 점을 감안하더라도, 이 기사는 사혼의 민속이 요즈음에도 행하여지고 있다는 사실을 말해 주고 있어서 나의 흥미를 끌었다. 그 후 사혼에 관심을 갖게 되었는데, 내가 만난 무당 한 사람은 몇 차례 사혼을 주관해 주었다고 하였다.

  사혼은 죽은 사람의 영혼끼리의 혼인을 뜻하는 말로, '명혼(冥婚)'이라고도 한다. 이것은 한국인의 영혼관(靈魂觀)을 바탕으로 하여 생긴 민속이다. 한국인의 전통적인 사고에서는 인간의 존재를 육신(肉身)과 영혼(靈魂)의 결합으로 본다. 이에 의하면 육신은 형체가 있어서 눈으로 볼 수 있는 가시적(可視的) 존재인데, 얼마 후에는 죽어야 하는 유한(有限)한 존재이다. 영혼은 형체가 없어서 눈으로 볼 수 없는 불가시적(不可視的) 존재인데, 오래도록 없어지지 않는 영원한 존재이다. 이러한 육신과 영혼이 결합되어 있는 상태가 삶이고, 육신에서 영혼이 벗어난 상태가 죽음이다. 육신은 이승에서 영혼이 거처하는 집이다.

  영혼은 편의상 생령(生靈)과 사령(死靈)으로 나눌 수 있다. 생령은 살아 있는 사람의 몸에 깃들어 있는 영혼이고, 사령은 사람이 죽은 후에 그 사람의 육신을 벗어난 영혼이다. 생령의 존재를 말해 주는 자료로는 [혼(魂)쥐 이야기]가 있다. 이 이야기에서는 아내가 낮잠을 자고 있는 남편의 코에서 콩알 만한 하얀 쥐가 들락날락하다가 방바닥으로 내려선 다음, 밖으로 나가는 것을 보고 그 뒤를 따르며 쥐의 행동을 눈여겨보았다. 얼마 후 남편이 잠에서 깨어나 꿈 이야기를 하는데, 그것은 쥐의 행동과 일치하였다고 한다. 또 다른 이야기에서는 아내가 잠자는 남편의 코에서 나온 작은 쥐를 자막대기로 때려서 죽였더니, 남편이 잠에서 깨어나지 못하고 그대로 죽어버려 그 여자는 과부가 되었다고 한다. 이러한 이야기는 사람의 몸에는 영혼이 깃들어 있는데, 그 영혼은 잠잘 때에 잠시 육체를 벗어나 돌아다닐 수 있다는 사고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

  사령은 선령(善靈)과 악령(惡靈)으로 나눌 수 있다. 선령은 수명대로 살다가 죽은 사람의 영혼으로 내세(來世)에 가서 평안히 지내는데, 가끔씩 세상에 나와서  자손이나 친척·친지들을 도와주기도 한다. 악령은 비명횡사(非命橫死)한 사람의 영혼으로, 생전의 원한이 남아서 저승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떠돌아다니며 살아있는 사람을 괴롭힌다. [아랑 전설]이나 고소설 [장화홍련전]·[김인향전]에서 사또 앞에 나타나 원한을 풀어줄 것을 청원하는 영혼은 비명에 죽은 원한을 풀지 못하여 저승에도 가지 못하고 떠도는 처녀의 영혼이다.

  악령의 대표적인 예는 시집·장가를 가지 못하고 죽은 '처녀 귀신', '총각 귀신(몽달귀신)'이다. 이들은 젊은 나이에 죽어 시집·장가도 가지 못한 한(恨) 때문에 가족들에게 나타나기도 하지만, 특히 행복하게 사는 옛 친구나 친척에게 나타나 이들을 못살게 군다고 한다. 그래서 전에는 처녀나 총각이 죽으면, 네 갈래 길의 가운데를 파고 이들의 시신을 엎거나 세운 다음, 그 위에 가시를 얹고 흙을 덮어 평평하게 해 놓아 오가는 사람들이 밟고 다니도록 했다고 한다. 이것은 한을 품고 죽은 처녀나 총각의 영혼이 육신을 벗어나 떠도는 것을 막기 위해 행한 비정한 매장법(埋葬法)이라 하겠다. 그러나 이렇게 한다 하여 이들의 한이 풀리는 것도 아니고, 이들의 떠돌음을 막을 수 있는 것도 아니므로, 이들의 한을 풀어줄 수 있는 방안이 강구되어야 했다. 그래서 찾아낸 방법이 이들의 영혼을 혼인시키는 사혼이었다.   

  사혼은 전국적으로 행하여 졌는데, 정혼(定婚)하는 과정이나 예식의 진행 절차는 지방에 따라 차이가 있다. 그러나 기본적인 것은 큰 차이가 없는 듯하다. 맨 먼저 죽은 처녀나 총각의 가족이나 친척이 중매쟁이이게 적당한 혼처(婚處)를 알아봐 달라고 부탁한다. 이 때 중매쟁이는 무당인 경우가 흔하다. 부탁 받은 중매쟁이는 이들의 나이를 알아서 궁합을 보아 중매를 서는데, 이들의 나이는 죽은 지 몇 년이 되었건 간에 죽을 때의 나이를 기준으로 한다고 한다. 혼처가 정해지면, 예식을 맡은 무당은 택일(擇日)을 하고, 신랑과 신부의 인형을 준비한다. 신랑과 신부의 인형에는 각각의 사주(四柱)를 써서 가슴에 붙이고 옷을 입힌다. 옷은 그 사람이 살았을 때에 입던 옷이 있으면 그 옷을 가져다 입히고, 없을 때에는 새 옷을 마련하여 입힌다. 준비가 되면 양가의 가족이 모인 자리에서 이들의 원한을 풀어주는 해원(解寃)굿을 한다. 해원굿이 끝나면 신랑 인형에는 사모관대(紗帽冠帶)를, 신부 인형에는 원삼 족두리를 입히고 혼인굿을 한다. 혼인굿을 마치면 신방을 차려 이들이 한 이불 속에서 하룻밤을 지내게 한 다음, 이들을 한 곳에 묻는다. 이렇게 하여 이들은 총각과 처녀로 죽은 한을 풀고, 저승으로 가서 함께 편안히 거하게 된다. 절에서 스님의 주관으로 하는 경우에는 불교식으로 진행한다.

  사혼에 의해 맺어진 사돈끼리는 아주 사이좋게 지낸다고 한다. 살아 있는 아들과 딸에 의해 맺어진 사돈의 경우에는 아들과 며느리(또는 딸과 사위)가 금실 좋게 살 때에는 사이가 좋다. 그러나 이들의 결혼생활에 문제가 생기면 자연히 그 부모들의 관계도 나빠지게 된다. 그러나 사혼에 의해 맺어진 사돈의 경우에는 죽은 아들과 며느리(딸과 사위)의 금실이 나빠져 속을 썩일 일이 없고, 참척(아들과 딸이 앞서 죽음)을 당한 슬픔과 고통을 서로 이해하고 위로하며 나눌 수 있기 때문에 아주 의좋게 지낸다고 한다. 

  몇 년 전에 대한항공 여객기가 소련 상공에서 격추되어 많은 사람이 불의의 죽음을 당한 일이 있었고, 괌도에서 사고를 당하여 많은 사람이 아까운 목숨을 잃은 불행한 일도 있었다. 두 사고가 있은 지 얼마 지나지 않아 그 때 그 비행기에 탔다가 세상을 떠난 처녀와 총각의 영혼을 혼인시킨다는 방송과 신문의 보도가 있었다. 그 기사의 제목을 보고 처음에는 두 사람이 서로 사귀던 사람들이겠거니 하였다. 그러나 그 기사를 자세히 읽어 보니, 두 사람이 전혀 모르는 사람이었는데, 대한항공 직원의 중매로 사혼을 한 경우도 있고, 혼인을 약속한 사람들이 예식을 올리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으므로 양가에서 협의하여 사혼예식을 한 경우도 있었다. 그보다 몇 년 전에도 겨울 산행을 하다가 눈사태가 나서 죽은 남녀 대학생이 사혼을 하였다는 기사가 신문에 실렸었다. 그 때 사혼을 한 젊은이 역시 전혀 모르는 사람들로 각각 산행을 하다가 불행을 당한 사람들인데, 어느 친지가 중매를 서서 사혼을 하였다고 한 것으로 기억한다.

  얼마 전에 100여 명의 어른을 대상으로 한 강의에서 자기 둘레에서 사혼하는 것을 보았거나, 들은 사람은 손을 들어보라고 하였더니, 20여 명이 손을 들었다. 이것은 지금도 사혼이 행하여지고 있음을 말해 준다. 요즈음에도 사혼이 행하여지고 있는데, 이 일이 눈에 뜨이거나 많은 사람의 관심을 끌지 못하는 것은 무슨 까닭일까? 이것은 사혼을 할 때 청첩장을 돌려 널리 알리지 않고, 아주 가까운 친족만 모여 하기 때문이다.

  사혼 민속의 시작은 처녀나 총각 귀신한테 괴롭힘을 당하지 않으려고 하는 산 자의 이기심(利己心)의 작용이 전혀 없다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보다는 죽은 자의 한을 풀어줌으로써 그들이 더 이상 이승과 저승 사이를 떠돌지 아니하고, 저승으로 가서 편안히 거하게 해 주려는 따뜻한 마음에서 나온 것이라 생각한다. 이것은 산 자와 죽은 자를 확연히 구별하기보다는 더불어 사는 우리 민족의 심성을 반영한 것이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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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즈음은 그리 많지 않지만, 전에는 마을 앞 정나나무 밑이나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곳에 무게가 150근(90Kg) 내외의 둥근 모양의 돌이 놓여 있는 마을이 많이 있었다. 이 돌이 사람들이 '들어올리는 돌'이란 뜻의 '들돌'이다.

  전에는 음력 정월 대보름이나 2월 초하룻날 마을 사람들이 많이 모인 자리에서 젊은이가 이 돌을 들어올리면, 그 때부터 그는 어른으로 인정받았다. 그래서 어른들의 품앗이에 끼게 됨은 물론, 품값을 받을 때에도 어른의 품값을 받을 수 있었다. 머슴들의 경우에는 들돌을 들어올리면, 어른 몫의 사경(농가에서 머슴에게 주는 일년치 품값)을 받을 수 있었다. 나이가 스물이 채 안 되었어도 들돌을 들어올린 사람은 어른 품값을 받았으나, 스물이 훨씬 넘었어도 들돌을 들지 못한 사람은 반품값밖에는 받지 못하였다.

  마을의 젊은이들은 자기 마을에서 들돌 들어올리기를 하는 정월 대보름이나 2월 초하루 전에 그 돌을 수없이 들어올려 보며 힘을 길렀을 것이다. 그래서 자신 있는 사람은 그 날 들돌 들기에 나서고, 그렇지 못한 사람은 그 자리에 참석하지 않거나, 참석은 하여도 들돌 들기에 나서지 않았을 것이다. 들돌 들기에 성공한 사람은 나이가 적어도 어른 대접을 받았지만, 그렇지 못한 사람은 평생 힘쓰는 일과 관련하여서는 어른 대접을 받지 못하였을 것이다. 이것은 일종의 농사꾼이나 머슴들의 성년식이었다. 이것은 요즈음 흔히 쓰는 말로 표현하면 성과급 제도였다고 할 수 있다. 이것은 체력을 매우 중요시하는 농경사회의 일면을 짐작하게 해 준다. 
   
  서울 경복궁 안에 있는 국립민속박물관에는 들돌이 전시되어 있고, 그 뒤에 그림이 붙어 있다. 그 그림에는 마을 사람들이 모여 있는 자리에서 한 젊은이가 들돌을 들어올리고 있고, 그 옆에는 젊은이의 어머니와 여동생인 듯한 여인이 마을 사람들에게 술을 따라 주는 모습이 보인다. 들돌을 들어올리는 젊은이의 아버지와 어머니를 비롯한 가족들은 체력 면에서 당당한 어른이 된 그의 모습을 보면서 자랑스럽게 여겼을 것이다. 아마도 젊은이의 애인은 나무 뒤에 숨어서 자기 애인이 그 돌을 들어올리는가를 지켜보며 가슴을 조이다가 성공하는 순간에 벅찬 감격을 느꼈을 것이다.

  세월이 변하면서 농사꾼이나 머슴들의 성년식의 성격을 지닌 들돌 들기 풍습도 사라졌다. 그에 따라 들돌의 의미도 퇴색하여 들돌은 담쌓기나 둑쌓기, 집짓기 등의 공사를 할 때 다른 잡석들과 함께 파묻혀 버려 지금은 찾아보기 어렵게 되었다. 그러나 들돌 들기의 의미를 되새기며 '들돌놀이'를 하는 마을이 있는가 하면, 들돌이 질병을 물리쳐 준다는 주술적 의미를 지니게 되어 '들돌제'를 지내는 마을도 있다.

  전남 보성군 노동면 거석리에서는 매년 정월 대보름날 당제를 마치고 들돌놀이를 한다. 이것은 전부터 해 오던 놀이인데, 한 때 중단되었다가 1986년 군민의 날에 재현되었다. 이것은 직경 50cm, 무게 80Kg 정도 되는 돌을 들어 넘기는 놀이인데, 장원으로 뽑힌 사람에게는 상으로 황소를 준다. 놀이가 끝나면 술과 음식을 나누어 먹고 노래부르고 춤을 추면서 마을 사람의 건강과 풍년을 기원한다. 이런 놀이는 전북 부안에도 있다.

  제주도에서는 청년들이 힘을 겨루기 위해서 들어올리는 돌을 '뜽돌'이라고 한다. 이 돌은 동네 어귀에 있어서 누구나 자유롭게 들어올릴 수 있다. 특히 추운 겨울에 젊은이들이 뜽돌이 있는 '뜽돌거리'에 모여 제각기 힘 자랑을 한다. 그 방법에는 두 손으로 잡아 들어올리기, 들고 허리를 펴기, 들고 일어서기, 땅에서 조금만 들기, 돌을 들고 몇 걸음 걷기 등이 있다. 이 중 뜽돌을 들고 가슴과 허리를 완전히 편 채 두 다리를 꿋꿋이 디디는 방식을 제일로 친다. 다른 마을의 청년이 지나다가 뜽돌을 보고 클 경우에는 '이 마을 청년은 힘이 세다.'고 한다. 그러나 작을 경우에는 '이것도 뜽돌이냐!'고 비아냥거리면서 집어던진다. 이를 본 그 마을 청년들은 그에게 뜽돌을 들어보라고 한다. 그가 뜽돌을 들어올리면 괜찮으나, 들어올리지 못하면 그는 마을 청년들에게 실컷 두들겨 맞고 빌거나, 술을 사서 대접하고서야 그 마을을 빠져나갈 수 있다. 이것은 들돌 들기가 마을 청년들이 신체를 단련하고, 힘을 겨루는 구실을 하였을 뿐만 아니라, 마을과 마을의 젊은이들이 힘을 드러내 보이는 잣대의 역할도 하였음을 말해 준다.

  충남 홍성군 구항면 황곡리 하대 마을에서는 '들돌제'를 지낸다. 이 마을 어귀에는 고려 때 심었다는 큰 정자나무가 있다. 이 정자나무 밑으로 난 길을 따라 마을 쪽으로 10미터쯤 가면 길 왼쪽에 높이 약 1.2미터, 밑 둘레 약 2미터, 위쪽 둘레 약 1미터쯤 되는 '선돌'이 있고, 50미터쯤 더 들어가면 길 왼쪽에 시멘트로 만든 받침대 위에 힘 센 장정이 들어올릴 수 있는 크기의 둥근 돌이 있는데, 이 돌이 '들돌'이다. 이 마을에서는 이 선돌과 들돌 앞에서 음력 2월 초하룻날 새벽 6시에 마을 공동제의를 올린다. 마을의 평안과 풍년 기원에 목적을 둔 이 제의는, 선돌은 마을을 지켜주는 남성신, 들돌은 여성신을 상징한다는 의식에서 나온 것이다.

  2월 초하룻날 새벽에 마을 사람들이 마을 회관 앞에 용대기를 세운 뒤에 풍물을 치고 한 바탕 논 뒤, 용대기 앞에 흰무리떡과 삼색실과와 포를 놓고 술잔을 올린 뒤에 제관이 재배한다. 그 다음에 용대기를 앞세우고 풍물을 울리며 선돌 앞으로 가서 흰무리떡과 삼색실과와 포를 놓고 술잔을 올린 뒤에 제관이 재배한다. 다시 들돌 앞으로 와서 흰무리떡과 삼색실과와 포를 놓고 술잔을 올린 뒤에 제관이 재배한다. 그 뒤에 그 앞에서 간단히 음복을 하는데, 날씨가 추운 때이므로 가까이에 있는 마을회관으로 와서 음복하기도 한다. 제관은 한복 두루마기를 입으며, 축문이나 소지(燒紙)는 하지 않는다.

  전에는 정월 대보름날 4∼5미터쯤 되는 나무에 짚을 묶어 세우고, 세 가운데 말뚝을 박고 동아줄로 매어 볏가릿대를 세운 뒤에 풍물패가 집집마다 다니며 걸립을 하여 제의 비용을 마련하였으나, 요즈음은 볏가릿대 세우는 일도, 걸립하는 일도 하지 않는다. 이 마을은 모두 40여 호가 되는데, 들돌제에 참여하는 사람은 20명 내외이다. 마을 사람들은 오래 전부터 들돌제를 지내왔는데, 그래서 그런지 마을에 큰 일 없이 잘 지내고 있다고 한다. 전에는 아침밥을 먹고 나서 들돌제를 지냈는데, 일제 말기에 이를 못하게 하였으므로 몰래 하느라고 새벽 미명에 조용히 지냈다고 한다. 그 때부터 지금까지 새벽에 제를 지낸다고 한다.

  들돌제의 대상신인 선돌과 들돌에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해 온다.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에 의하면, 선돌과 들돌은 수백 년 전부터 있었다고 한다. 그 유래를 살펴보면 선돌의 경우, 이 마을에 아주 힘센 장사(壯士)가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그 장사가 전염병에 걸려 오랫동안 앓다가 완쾌한 후 자기의 힘을 시험해 보기 위해 나무로 만든 신을 신고 이 돌을 들다가 댕기가 발에 밟혀 뒤로 넘어지는 바람에 이 돌에 눌려 죽었다고 한다. 그 이후 죽은 장사의 영혼을 위로하고자 선돌을 위했다고 한다. 

  들돌은 모양이 둥글고 무게가 150근 정도 나가는 돌로서, 옛날에 오봉 마을 청년들과 하대 마을 청년들이 서로 돌 들기 놀이를 할 때, 서로 돌을 들어다가 자기 마을 앞으로 갖다 놓아야 질병이 없어진다 해서 서로 빼앗고 빼앗기는 놀이를 하였다. 그런데 하대 마을의 한 힘센 장사가 그 돌을 들어다가 하대 마을에 갖다 놓았다. 그 이후 오봉 마을에서는 이 돌을 들을 만한 장사가 나타나지 않아 지금껏 하대 마을에 있다고 한다. 그 이후 하대에서는 이 선돌과 들돌을 매년 음력 2월 1일 아침에 성의를 다하여 위하고 있다.

  위 이야기는 하대 마을 들돌이 마을 공동제의의 대상신이 된 유래를 설명하고 있어 흥미롭다. 하대 마을의 들돌 역시 전에는 젊은이들이 성년식에 쓰던 들돌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 후 이 돌이 질병을 물리치는 기능을 지니고 있다고 믿게 되어 두 마을의 장정들이 그 돌을 자기 마을 앞으로 가져다 놓곤 하였을 것이다. 마을 사람들이 모두 이 돌을 들 수 있을 정도로 건강하다면, 질병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될 것이니, 이 돌이 질병을 물리치는 주술적인 힘을 지니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었을 것이다.  옛사람들은 오래도록 변하지 않아 영속성을 지니고 있고, 특이한 모양이어서 특이성을 지닌 돌을 신성시하였다. 황곡리의 들돌은 암석을 신성시하는 암석 신앙과 질병을 물리칠 수 있다는 주술적 심성에 의해 신앙의 대상이 되었다.     

  마을 젊은이들이 신체를 단련하고, 힘을 겨루는 구실을 하였을 뿐만 아니라, 마을과 마을의 젊은이들이 힘을 드러내 보이며 화합을 강조하던 들돌 들기 풍습은 사라졌다. 이를 다시 돌이킬 수는 없지만, 들돌놀이나 들돌제가 행해지는 마을이 있다는 것은 다행스런 일이다. 이를 통해 그 의미를 되새겨 보는 것은 뜻 있는 일이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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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옛날이야기에 나타난 도깨비의 모습은 다양한데, 얼굴 생김은 괴물형이고 머리에는 뿔이 하나 돋아 있다. 눈과 코와 입이 특히 크고, 큰 송곳니 두 개가 빠져 나왔으며, 수염은 붉은 색이고, 몸에는 털이 숭숭 돋아있다. 그러나 언제나 이런 모습으로 나타나는 것은 아니고 때로는 동물의 모습, 선비나 농부 또는 여인의 모습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때로는 신이한 모자나 감투를 쓰거나 등거리를 입어 모습을 감추기도 한다.
 
  도깨비는 어둡고 조용한 곳의 동굴이나 빈 집, 빈 절, 우물, 옛 성, 계곡, 고목 나무, 공동묘지 등에 자주 나타난다. 도깨비가 나타나는 시간은 주로 밤인데, 동이 트거나 새벽을 알리는 종소리 또는 닭 우는 소리가 나면 사라진다.
 
  도깨비는 타고난 장난꾸러기이다. 그래서 남의 제사 음식을 먹어치우는가 하면, 하룻밤 사이에 잔칫집을 뒤집어 놓기도 한다. 또 남의 집 쇠솥 뚜껑을 종이처럼 꾸겨서 솥 안에 넣어 넣어놓기도 한다. 
  도깨비는 고지식하고, 생각하는 바가 단순하며 건망증이 심하다.

  옛날에 한 농사꾼이 열심히 일하며 돈이 생기면 항아리에 넣곤 하였다. 몇 년 뒤에는 모은 돈이 꽤 많았다. 그는 밤이면 벽장에 감춰둔 항아리를 꺼내어 돈을 세어보곤 하였다.

  어느 날, 그가 돈을 세고 있는데, 창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그가 창문을 열고 내다보니, 한 남자가 자기는 건너 마을에 사는 김 서방인데, 돈 한 냥만 꿔 주면 다음 날 밤에 갚겠다고 하였다. 그는 방바닥에 돈이 있었으므로 거절하지 못하고 김 서방에게 한 냥을 꾸어주었다.
 
  이튿날 밤, 김 서방은 전날 밤에 꾼 돈이라면서 그에게 한 냥을 주었다. 그 다음 날 밤에도, 또 그 다음 날 밤에도 김 서방은 꾼 돈이라면서 한 냥을 가져왔다. 이 일이 몇 년 동안 계속되었다. 그는 김 서방이 도깨비일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그 돈으로 좋은 논을 샀다.

    어느 날, 김 서방이 전과 같이  돈 한 냥을 주고 가자 그는 혼잣말로, 돈 한 냥을 꾸어갔으니 이자를 열 배로 쳐도 한 냥씩 열흘만 갚으면 되는데, 몇 년 동안 갚는 것을 보면 김 서방의 건망증도 보통이 아니라고 하였다. 잠시 후, 다시 창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나서 내다보니, 김 서방이 창문 앞에 서서, 자기가 건망증이 심하여 돈을 매일 갚았으니, 이자를 열 배로 쳐서 열 냥만 받고, 나머지 돈은 돌려 달라고 하였다. 그가 논을 샀기 때문에 돈이 없으니, 논을 떠갈 테면 떠가라고 하였다.
 
  그날 밤, 도깨비들이 떼로 몰려와 그 논을 떠가려고 네 귀퉁이 말뚝을 박고 별 짓을 다 해 보았으나, 논을 떠 갈 수는 없었다. 동이 터 오자, 화가 난 도깨비들은 논에 돌멩이를 잔뜩 던져놓고 가 버렸다. 이를 본 그가 "논에 돌멩이 넣으면 내가 무서워할 줄 아나보군. 쇠똥이라면 몰라도 돌멩이는 무섭지 않다."고 하면서 집으로 돌아왔다. 그 다음 날 아침에 그가 논에 가 보니, 돌멩이는 하나도 없고 쇠똥이 가득하였다. 그 후 그는 부자가 되었다.

  위 이야기에서 주인공이 부자가 된 것은 도깨비의 건망증과 단순한 사고 방식 때문이라고 한다. 그러나 그 밑바탕에는 주인공이 부지런하고, 근검·절약하며 저축을 많이 하였기 때문이라고 하는 의식이 깔려 있다. 도깨비는 주인공이 부지런하고, 근검·절약하며 저축을 많이 하는 사람이기에 자기의 건망증과 단순 사고를 빙자하여 그를 도와 부자가 되게 해 준 것이다. 이 이야기에서 땅은 도깨비도 못 떠간다는 말이 나왔다.

  옛날에 한 남자가 내에서 게를 잡고 있었다. 그 때 한 남자가 와서 메밀묵을 먹고 싶으니, 메밀묵 한 동고리를 쒀다 주면 게를 많이 잡게 해 주겠다고 하였다. 그는 내일 메밀묵을 한 동고리 쑤어다 줄 터이니, 오늘 게를 많이 잡게 해 달라고 하였다. 그 남자는 자기가 내를 거슬러 올라가면서 게를 몰아줄 터이니, 뒤따라오면서 게를 주워담으라고 하였다. 그가 그의 뒤를 따라가니, 쇠똥 같은 것이 떠내려왔다. 그가 이상히 여겨 주워 보니, 모두 큰 게였다. 그는 그날 게를 많이 잡았다.

    이튿날, 그가 다시 게를 잡고 있는데, 그 남자가 와서 묵을 쑤어 왔느냐고 물었다. 그가 오늘 하루 더 게를 많이 잡게 해 주면 내일은 꼭 묵을 쑤어다 주겠다고 하였다. 그 남자가 대답하고 내를 거슬러 올라간 뒤에 게가 둥둥 떠내려 왔다. 그가 기뻐하며 게를 집에 바구니에 가득 담아 가지고 와서 보니 모두 쇠똥이었다.

  위 이야기에서 그 남자가 도깨비인 것을 안 주인공은 그 남자와 한 약속을 이행하지 않고 이용만 하려고 하다가 도깨비에게 골탕을 먹고 말았다. 이것은 도깨비가 약속을 이행하지 않는 사람, 의리를 지키지 않는 사람은 골탕을 먹이거나 벌을 준다는 의식을 바탕으로 한 것이다.

  도깨비는 원하는 것을 무엇이든지 얻을 수 있는 요술 방망이를 가지고 다니므로, 그것을 얻기만 하면 부자가 된다고 한다.

  옛날에 한 나무꾼이 산으로 나무를 하러 갔다. 그가 낙엽을 긁고 있는데, 개암 하나가 눈에 띄였다. 그는 그것을 아버지를 드리겠다며 주머니에 넣고, 다시 나오자 어머니를 드리겠다며 주머니에 넣었다. 다시 개암이 보이자 아내를 주겠다고 하고, 그 다음에 자기 것이라고 하며 주머니에 넣었다.

  그는 나무를 해 가지고 오다가 날이 저물어 빈 집으로 들어갔다. 밤중에 도깨비들이 떼를 지어 들어오므로, 그는 무서워서 다락에 숨었다. 그가 다락 문틈으로 내다보니, 도깨비들이 이상한 방망이를 가볍게 두드리며 "밥 나와라 똑딱!" 하면 밥이 나오고, "술 나와라 똑딱!" 하면 술이 나왔다. 도깨비들은 그 음식과 술을 배불리 먹은 뒤에 노래하며 춤을 추었다.  배가 고픈 그는 주머니에 넣어둔 개암 하나를 꺼내어 깨물었다. 개암 껍질 깨지는 소리가 크게 나니, 도깨비들은 천둥 소리라며 몹시 당황하였다. 그가 다시 개암을 깨무니, 도깨비들은 하느님이 노하셔서 천둥치는 것이라며 방망이를 그대로 두고 황급히 도망하였다.

  그가 그 방망이를 가지고 집으로 돌아와서 두드리며 금과 은과 돈을 비롯하여 필요한 것을 나오라고 하니, 그것들이 쏟아져 나왔다. 그래서 그는 큰 부자가 되었다.

  이 소문을 들은 욕심쟁이 부자가 그를 찾아와 부자가 된 연유를 물었다. 그의 말을 들은 부자는 도깨비를 만나 방망이를 얻을 욕심에서 산으로 나무를 하러 갔다. 부자는 개암 하나가 나오자 "이것은 내가 먹어야지." 하고 주머니에 넣고, 그 다음에는 아내와 아이를 주겠다고 하고, 그 다음에야 아버지와 어머니께 드리겠다며 주머니에 넣었다. 부자가 날이 저문 뒤에 빈 집 다락에 숨어 있으니, 도깨비들이 와서 방망이를 두드리며 술과 음식을 나오게 한 뒤에 실컷 먹고 노래하며 춤을 추었다. 그 때, 부자가 개암을 내어 깨무니, 도깨비들은 다락으로 올라와 부자를 끌어낸 뒤,  지난번에 속아서 빼앗긴 방망이를 내놓으라며 그를 때렸다. 그래서 부자는 도깨비한테 매만 맞고 돌아왔다.
             

  위 이야기에서 마음씨 착하고 효성이 지극한 나무꾼은 무엇이든지 얻을 수 있는 '도깨비방망이'를 얻어 부자가 되었다. 그러나 탐욕스런 부자는 도깨비한테 매만 맞았다. 이를 보면, 도깨비는 신통력이 있는 도깨비방망이를 가지고 다니는데, 마음씨 착하고 부지런하며 효성이 지극한 사람에게는 그것을 주어 부자가 되게 해 준다. 그러나 탐욕스런 사람에게는 벌을 내린다. 이 이야기에는 도깨비가 착한 사람에게는 복을 주지만, 악한 사람에게는 벌을 준다고 하는 의식이 깔려 있다. 이런 의식은 [혹부리 영감] 이야기에도 나타난다.     
  신통력을 지닌 도깨비는 무서워하는 것이 없을까?

  옛날에 한 젊은 여인이 과부가 되어 몇 년을 살고 보니, 남자 생각이 간절하였다. 어느 날 밤에 한 남자가 그녀의 집에 찾아와 하룻밤 재워 달라고 하였다. 그녀는 그 남자를 반갑게 맞이하여 술과 음식을 대접한 뒤에 즐거운 밤을 보냈다. 그 후로 그 남자는 밤마다 찾아와 그녀와 즐거운 시간을 가진 뒤에 새벽에 돌아가곤 하였다. 이런 일이 계속되자, 마을 사람들이 수군대기 시작하였다.

  그녀는 시댁 어른들이 알까보아 겁이 나기도 하고, 그 남자가 사람이 아니라 도깨비일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 그 남자를 멀리하려고 하였으나, 그 남자는 아랑곳하지 않고 밤마다 찾아왔다. 어느 날, 그녀가 그에게 무서워하는 것이 있느냐고 물었다. 그 남자는 개의 피를 무서워한다고 하면서 그녀에게 무서운 것이 무어냐고 물었다. 그녀는 떡을 무서워한다고 건성으로 대답하였다.
  이튿날, 그녀는 개를 잡아 개의 피를 대문과 방문을 비롯하여 집안 곳곳에 뿌려 놓았다. 그날 밤에 그 남자는 개의 피를 보고 집에 들어오지는 못하고 욕을 하면서 떡을 집 안으로 던졌다. 그녀가 돈이라면 몰라도 떡은 무섭지 않다고 하니, 이번에는 돈을 던졌다. 그 후로 그는 다시 찾아오지 않았다.
       
  위 이야기에서 도깨비는 여성을 좋아하고, 개의 피를 무서워한다. 다른 이야기에서는 말의 피를 무서워한다. 이 이야기에서도 도깨비는 단순한 사고 때문에 과부에게 이용당하고 만다.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도깨비는 장난을 좋아하고, 생각이 단순하며 건망증이 심하다, 그러나 신통력을 지니고 있어서 착한 사람에게 복을 주고, 악한 사람에게 벌을 준다. 이것은 민중들이 자기들의 사는 모습과 바람을 도깨비에게 투영한 것이라 하겠다.

          <농지개량 제186호(서울 : 농지개량조합연합회, 1999. 8)에 수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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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 나라에는 재미있는 도깨비 이야기가 많이 전해 온다. 도깨비 이야기에는 도깨비불을 본 이야기, 도깨비와 씨름한 이야기를 비롯하여 도깨비를 만나 소원을 성취하고 부자된 이야기, 거짓말을 했다가 도깨비한테 혼난 이야기 등 많이 있다.
 
  도깨비 이야기는 어른들도 좋아하지만, 어린이들도 매우 좋아한다. 지금까지 나온 360여 권의 전래동화집에 여러 번 수록된 이야기 100화를 뽑아 수록 빈도수를 조사해 보니, [도깨비방망이], [도깨비감투], [혹부리영감] 등이 상위권에 자리잡고 있다. 이것은 어린이들이 도깨비 이야기를 매우 좋아한다는 것을 간접적으로 말해 준다.
 
  도깨비는 신이한 능력을 지니고 있지만, 귀신들과는 달리 사람들과 가까이 지내면서 도와준다, 도깨비는 거짓말 한 사람, 탐욕스런 사람을 골탕먹이고 벌을 주기도 하지만, 착한 사람을 해치는 일은 없다. 그래서 한국인은 어린 시절에 도깨비 이야기를 재미있게 들으며 상상의 나래를 펴기도 하고, 도깨비와 만나는 꿈을 꾸기도 한다. 한국인과 친근한 도깨비의 정체는 무엇일까?
 
  도깨비는 '돗가비', '도채비' '독갑이', '귓것', '망량(  )' 등으로 불리는데, 제주도에서는 '영감'·'참봉'이라고 부른다. 도깨비는 15세기에 쓰여진 {월인석보}나 {석보상절}에는 '돗가비'로 표기되어 있다. 국어학자의 해석에 의하면, 돗가비는 '돗'과 '아비'의 합성어인데, '돗'은 '도섭'을 뜻한다고 한다. '도섭'이란 능청맞고 수선스럽게 변덕을 부리는 것을 뜻하는 말이다. 이에 따르면, '돗가비'는 '돗아비'에 'ㄱ'이 첨가된 것으로, '수선스럽고 능청맞게 변덕을 부리는 아비'라는 뜻이 된다. 이것은 도깨비의 성격을 잘 드러내는 어원 해석이어서 흥미롭다.

  도깨비에 관한 문헌 기록으로 오래된 것은 {삼국유사}의 [도화녀와 비형랑] 이야기이다. 신라 25대 진지왕의 영혼이 죽은 뒤에 살았을 때 좋아하던 도화(桃花)를 찾아가 7일 간 교혼(交婚)한 뒤에 비형(鼻荊)을 낳았다. 26대 진평왕이 그를 데려다 대궐에서 기르고 집사 벼슬을 주었는데, 그는 밤마다 나가서 도깨비들과 어울려 놀다가 새벽 종소리가 나면 들어오곤 하였다. 진평왕이 이를 알고 비형에게 신원사 북쪽에 있는 내에 다리를 놓으라고 하였다. 비형이 도깨비들을 데리고 하룻밤 사이에 다리를 놓으니, 이를 '귀교(鬼橋)'라고 하였다. 또, 진평왕이 비형에게 도깨비 중에서 사람으로 출현해서 조정 정사를 도울 만한 자가 있느냐고 하니, 비형은 길달(吉達)을 천거하였다. 왕은 길달에게 집사 벼슬을 주었는데, 길달은 충성스럽고 정직하였다. 길달은 흥륜사 남쪽에 문루(門樓)를 세웠는데, 이를 길달문(吉達門)이라 하였다. 뒤에 길달이 여우로 변하여 달아나니, 비형이 다른 도깨비들을 시켜 길달을 잡아 죽였다.
 
  이 이야기에서 도깨비는 밤에만 활동하는 야행성(夜行性)이 있고, 하룻밤 사이에 다리를 완성하거나 문루를 세울 수 있는 신통력을 지니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진지왕의 혼령과 과부 도화 사이에서 난 비형은 인간과 신의 양면성을 지닌 신이한 존재로, 도깨비들을 통솔하고, 죽일 수도 있는 능력을 지니고 있다.

  도깨비의 형상에 관한 기록을 보면, 성현(1436∼1509)이 쓴 {용재총화}에는 "허리 위는 보이지 않고 허리 아래만 보이는데, 종이 옷을 둘렀고, 다리는 살이 없이 바짝 말랐는데, 검은 칠을 한 것 같다."고 하였다. 유몽인(1558∼1623)이 쓴 {어우야담}에는 모습은 보이지 않고 목소리만 내는 도깨비의 장난에 시달리던 사람이 모습을 보여 달라고 하니, 놀랄 것이라고 하면서 그려 주었는데, 무서워서 쳐다볼 수가 없었다고 한다. 도깨비가 스스로 그린 모습은 머리가 두 개, 눈이 네 개이고, 높은 뿔에 입을 벌리고 이빨을 드러냈는데, 코와 입이 터져 있고, 입과 눈동자는 모두 시뻘겋더라고 하였다. 이런 모습은 삼국 시대 이래로 전해 오는 귀면와(鬼面瓦)의 모습과 비슷하다.
 
  지금 생존해 있는 어르신들 중에는 도깨비불을 보았다는 사람이 많이 있다. 도깨비불은 흐린 날이나 보슬비가 내리는 밤에 홀연히 나타났다가 없어지고, 없어졌다가 다시 나타나서 이리저리 옮겨 다닌다고 한다. 내가 어렸을 때 자란 마을 앞에는 넓은 들이 있는데, 궂은 날 밤이면 들판 건너 산밑에서 도깨비불이 노는 것을 보았다는 사람이 많았다. 나도 어느 여름밤에 들녘 끝자락에서 불빛이 사뭇 움직이는 것을 보았는데, 그것이 도깨비불이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도깨비와 씨름하였다는 사람도 여럿 만나보았는데, 이들의 이야기를 종합하여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전에 어떤 사람이 장에 갔다가 친구를 만나 술을 마시고 해가 진 뒤에 집에 오게 되었다. 그가 마을 가까이에 있는 상엿집 근처에 왔을 때, 숲 속에서 한 장정이 나와서 씨름을 하자고 하였다. 그가 "이 밤중에 무슨 씨름이냐?"고 핀잔을 하고 지나쳐 오려고 하니까, 그 장정이 길을 막으며, "나와 씨름을 하여 이기면 집에 갈 수 있지만, 지면 집에 못 간다."고 하였다. 씨름을 시작한 그는 있는 힘을 다해 보았지만, 생각처럼 쉽게 이길 수가 없었다. 그가 잘 쓰는 왼다리감기 기술을 거니, 장정이 넘어졌다. 그가 손을 털고 오려고 하니, 장정은 한 판 더 하자고 하였다. 그는 다시 있는 힘과 기술을 다해 그를 메치고 오려고 하니, 장정은 한 번만 더 하자고 하였다. 집으로 오려고 하는데 또 씨름을 하자고 하므로 그는 그를 다시 업어 메친 뒤에 허리띠를 끌러 옆에 있는 밤나무에 묶어놓고 집으로 왔다. 이튿날 아침에 그가 허리띠를 찾으러 그 곳에 가보니, 허리띠로 밤나무에 묶어 놓은 것은 쓰다 버린 빗자루였다.   

    위 이야기에서 남자가 씨름을 한 장정은 도깨비이고, 그 본체는 빗자루이다. 그는 밤에, 술에 취한 상태에서, 마을 가까운 곳에 있는 상엿집 근처에서 도깨비를 만났다. 다른 이야기에서도 도깨비를 만나는 시간은 해진 뒤이고, 만나는 공간은 마을 가까운 곳에 있는 작은 고개, 서낭당 앞 등 다양하다. 도깨비의 본체로는 부지깽이, 절구공이, 키로 나타나기도 한다. 씨름을 하다 보니, 도깨비는 다리가 하나더라는 이야기도 있다.

  사람과 도깨비의 사랑에 관한 이야기도 많이 있는데, 조선 연산군 때 김안로가 쓴 {용천담적기}에는 좀 색다른 이야기가 나온다.
 
  한 선비가 해진 뒤에 거리에 나섰다가 한 여인을 만났는데, 달빛에 비친 여인의 모습이 참으로 아름다웠다. 그가 여인에게 다가가 말을 거니, 여인이 상냥하게 받아주었다. 그는 여인을 따라 그녀의 집으로 갔다. 여인의 집은 골목길을 돌아 개천가에 있었는데, 흰 담장이 둘러있는 저택이었다. 방안에 들어가 보니, 단정한 병풍과 서화가 눈부시게 아름답고, 수놓은 자리와 꽃방석, 화장대와 화로 등이 세간에서 볼 수 있는 물건이 아니었다. 그는 그녀와 술을 마시며 이야기하다가 옷을 벗어 횃대에 걸고, 금침에 들어 즐거운 시간을 가졌다. 새벽녘에 천둥소리가 요란하여 잠을 깨어 보니, 호화저택은 간 곳이 없고 돌다리 아래에서 흙덩이를 베고, 가마니때기를 덮고 누워 있는데, 악취가 진동하였다. 옷을 찾으니, 돌 틈에 끼어 있었다. 
 
  이 이야기에서 선비를 홀린 여인은 도깨비인데, 남성을 홀린 것으로 보아 암도깨비였던 것 같다. 사람과 사랑을 나누는 도깨비 이야기는 대부분 여인이 남성인 도깨비를 만나 사랑을 나누고, 돈도 얻어 잘사는 숫도깨비 이야기이다. 그런데, 위 이야기는 암도깨비 이야기여서 흥미롭다.
 
  도깨비의 성정, 신이한 능력에 관한 재미있는 이야기는 많이 있는데, 이에 관해서는 다음으로 미루고, 도깨비의 정체가 무엇인가에 관해서만 잠깐 생각해 보자.
 
  도깨비의 정체를 한 마디로 말한다면, 도깨비는 한국인이 오래 전부터 내면 깊숙이 간직해 온 자신감과 열등감, 바라는 것과 한스러움 등의 복합심리가 만들어낸 관념적 형상이다. 그래서 도깨비에는 한국인의 꿈과 낭만, 생활의 멋과 지혜, 경험을 통해서 얻은 교훈, 가치관 등이 복합되어 있다. 도깨비는 풍농(풍農)과 풍어(豊漁)를 가져다주는 신으로 신앙되기도 한다. 도깨비는 먹고 마시고 춤추며 질펀하게 노는 것을 좋아하고, 가난하지만 착한 사람에게 복을 주고, 노총각이나 과부의 애인 노릇을 하기도 하며, 재물을 가져다주거나 명당 자리를 잡아 주어 잘 살게 해 준다. 신이한 능력을 발휘하여 다리를 놓아주거나 보(洑)를 막아주기도 한다. 그러나 거짓말하는 사람, 의리 없는 사람, 탐욕스런 사람에게는 벌을 준다. 이러한 도깨비의 성정은 한국인의 내면의식을 형상화한 것이라 하겠다.
          <농지개량 제185호(서울 : 농지개량조합연합회, 1999. 7)에 수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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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네뛰기는 예로부터 단오절에 널리 행하던 민속놀이다. 그네뛰기는 남성놀이인 씨름과는 달리 여성들 사이에서 주로 행해졌는데, 마을 어귀나 동네 마당의 큰 느티나무나 버드나무 가지에 줄을 매고 하였다. 그네를 매기에 적당한 나무가 없을 때에는 넓은 마당에 긴 통나무 두 개를 세우고, 그 위에 가로질러 묶은 통나무에 그네를 매었는데, 이를 '땅그네'라고 하였다. 그네뛰기는 4월 초파일 전후에 시작하여 오월 단오까지 전국적으로 행해졌다.
 
  강한 체력을 바탕으로 하는 그네뛰기는 긴장감과 박진감이 넘치므로, 재미와 함께 체력을 단련할 수 있는 놀이이다. 그네를 허공 높이 구르기 위해서는 온몸의 탄력을 이용하여야 하는데, 특히 팔 다리의 힘이 뛰어나야 한다. 그러므로 그네뛰기를 통하여 팔다리의 힘을 기르고, 온몸의 순발력과 민첩성을 기를 수 있다.
 
  녹음이 우거진 나무 사이에서 예쁘고 화려한 한복을 곱게 차려 입은 여성이 그네에 올라 하늘 높이 몸을 날려 오가는 모습은 새장에 갇혀있던 새가 풀려나 하늘 높이 나는 것처럼 활기가 넘치면서도 아름답다. 단오에 그네뛰기 하던 모습을 민요에서는 다음과 같이 노래하고 있다.

  오월이라 단옷날은 천중가절(天中佳節) 아니냐./ 수양청청 버들 숲에 꾀꼬리는 노래하네.//
(후렴)후여넝층 버들가지 저 가지를 툭툭 차자.
후여넝출 버들가지 청실홍실 그네 매고/ 임과 나와 올려 뛰니 떨어질까 염려로다.//
한 번 굴러 잎이 솟고 두 번 굴러 뒷이 솟아/ 허공중층 높이 뜨니 청산녹수 얼른얼른.//
어찌 보면 훨씬 멀고 얼른 보면 가까운 듯/ 올라갔다 내려온 양 신선선녀 하강일세.//
난초 같은 고운 머리 금박댕기 너울너울/ 오이씨 같은 두 발길로 반공 중에 노닌다.//
요문갑사 다홍치마 자락 들어 꽃을 매고/ 초록적삼 반호장에 자색 고름도 너울너울.//

    이 민요에는 그네뛰기의 정경은 물론 그 멋과 흥취가 잘 드러나 있다. 민요를 이야기하다 보니, "세모시 옥색치마 금박물린 저 댕기가 창공을 차고 나니 구름 속에 나부낀다.……한 번 구르니 나무 끝이 아련하고 두 번을 거듭 차니 사바가 발 아래라."고 노래한 가곡 [그네]의 노랫말이 떠오른다. 이 노랫말에도 그네 뛰는 모습과 함께 그 멋과 흥취가 드러나는데, 예로부터 불러오던 민요의 내용과 통하는 점이 있어 매우 흥미롭다.
 
  중국의 경우, 그네뛰기는 북방 유목민에서 연유되었다고 한다. 중국의 옛 문헌인 {형초세시기(荊礎歲時記)}에 "북방 민족이 한식날 그네뛰기를 하여 가볍고 날랜 몸가짐을 익혔다. 그 후 이것을 중국 여자들이 배웠다. 나무 기둥을 세우고 그 위에 나무 가지를 가로질러 맨 다음, 거기에 물감들인 줄을 매달고 선비와 부인들이 줄 위에 앉거나 서서 밀고 잡아당기며 놀았다. 이 놀이를 추천(추韆)이라고 일컬었다."고 하였다. 이 기록으로 보아 중국의 그네뛰기는 북방에서 시작되어 점차 남쪽으로 전해졌음을 알 수 있다. 일설에는 제(齊) 나라 환공(桓公)이 북방의 융적(戎狄, 북방에 사는 異民族)을 친 후부터 그들의 놀이인 그네뛰기가 중국에 전해져 청명절을 전후하여 성행하였다고 한다. 당 나라 현종은 이 날 궁정에 그네를 매고 궁녀들에게 그네뛰기를 하게 하였는데. 이 놀이를 '반선녀(半仙女) 놀이'라고 하였다고 한다.

    우리 나라의 그네뛰기가 중국에서 전래한 것인지, 아니면 생활 속에서 자연스럽게 형성된 것인지는 알 수 없다. 그네뛰기에 관한 기록은 고려 때부터 보인다. 중국 문헌 {송사(宋史)}에는 고려 현종 때 고려에 사신으로 왔던 곽원(郭元)이 "고려에는 단오일에 그네뛰기를 한다."고 하였다. 그네뛰기에 관한 기록이 보이는 우리 나라 최초의 문헌은 {고려사(高麗史)}인데, "단오절에 최충헌이 그네뛰기를 백정동궁(栢井洞宮)에서 베풀고, 문무(文武) 4품 이상을 초청하여 연회하기를 사흘 동안 하였다."는 기록과 최이(崔怡)가 "5월에 여러 관원들을 초청하여 연회를 할 때 그네를 매고 무늬 놓은 비단과 채색 꽃으로 꾸몄다."는 기록이 보인다. 또 우왕이 "거리를 순행하고, 수창궁으로 가서 그네뛰기를 하였다."는 기록도 보인다. 이로 보아 고려 시대에는 그네뛰기가 널리 성행하였고, 매우 호사스러웠음을 알 수 있다.

  조선 시대에 쓰여진 {경도잡지(京都雜志)}에는 "단오 날에 여염집 부녀자들 사이에 그네뛰기가 성행하였다."고 하였고, {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에는 "항간에서는 단오절에 남자와 여자들이 그네뛰기를 많이 한다."고 하였다. {송경지(松京誌)}에는 "5월 5일 단오절이 되면 여염집 여자들은 그네뛰기를 하고, 남자들은 씨름을 한다."고 하였다. {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에는 제주도에는 매년 8월 보름에 다른 놀이와 함께 그네뛰기를 하는 풍습이 있다고 하였다. {개성지(開城誌)}에는 "5월 5일에 여자들은 성장을 하고 경덕궁에 모여 그네를 뛰고, 남자들은 만월대에 모여 씨름을 한다."고 하였다. 이로 보아 조선 시대에도 그네뛰기가 널리 행해졌음을 알 수 있다.
 
  그네뛰기에는 한 사람이 뛰는 '외그네뛰기'와 두 사람이 마주 서서 뛰는 '쌍그네뛰기'가 있다. 그네뛰기 대회를 할 때에는 누가 더 높이 오르는가를 겨루는데, 높이를 재는 방법에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그네 앞 적당히 떨어진 곳에 긴 장대를 세우고 그 꼭대기에 방울을 매단 다음, 그네가 앞으로 높이 솟아오를 때 장대에 매달린 방울을 발로 차서 방울을 울리는데, 정한 횟수를 오가면서 울리는 방울 소리의 많고 적음을 계산하여 승부를 가리는 방법이다. 다른 하나는 그네의 발판에 긴 줄자를 매달아 그네가 높이 올라갔을 때 그 높이를 재는 방법이다. 그네뛰기 대회를 할 때에는 푸짐한 상품도 주어 많은 사람이 모였다고 한다.

  그네뛰기는 20세기초까지 전국 각지에서 널리 행해졌는데, 서울을 비롯하여 개성, 평양, 사리원, 수원, 남원, 김천 등에서는 대대적으로 행하였다. 1937년 중·일 전쟁이 일어나자 당시에 우리 나라를 통치하고 있던 일제는 전쟁을 승리로 이끌기 위해 국가가 총동원을 해야하는 때에 그네뛰기와 같은 한가한 민속놀이를 할 수 없다 하여 이를 금하였다. 그래서 한 동안 널리 행해지지 않다가 8·15광복 후부터 다시 전국에서 이 놀이가 부활하였다. 서울에서는 남산과 장충단 공원, 사직공원에서 그네뛰기 대회가 민간 단체의 주관으로 크게 열렸다. 1956년에는 이승만 대통령 82회 탄신 축하 기념 행사로 창경궁에서 그네뛰기 대회가 열리기도 하였다. 이 때 일반은 개인전을, 여자 중·고생은 단체전을 하여 대성황을 이루었다. 최근에 와서는 다양한 운동경기와 여가 선용 방법이 널리 보급됨에 따라 그네뛰기는 전처럼 널리 행해지지 않는다. 그래서 지금은 주부클럽연합회에서 신사임당 기념행사의 하나로 1970년부터 매년 5월에 하는 그네뛰기 대회와 밀양의 '아랑제(阿娘祭)'와 남원의 '춘향제(春香祭)' 때에 그네뛰기 대회가 열리고 있는 정도이다. 

    그네는 지방에 따라 '근데, 군데, 근듸, 군듸, 근의, 군의, 구리'라고 하는데, 한자로는 '추천( 韆)'이라고 한다. 고려 때 지어진 경기체가 [한림별곡]에는 "홍(紅)실로 홍(紅)글위 매요이다"라 하여 그네를 '글위'라 하였다. 그네를 조선 정조 때 이성지(李成之)가 지은 {재물보(才物譜)}에는 '근의'라 하였고, 숙종 때 신이행(愼以行)·김경준(金敬俊)이 지은 {역어유해(譯語類解)}에는 '그릐'라 하였다. 고소설 {춘향전]에서는 "이애 향단아 근듸 바람이 독하기로 정신이 어찔하다. 근듸줄 부뜰어라."라 하였다. 이로 보아 그네는 시대에 따라, 지방에 따라 조금씩 다른데, 원래는 '근의'였던 것 같다. 이렇게 보면, 그네는 '끈(繩)의 놀이(戱)'를 뜻하는 말이라 하겠다.

  그네뛰기는 단오에, [놋다리밟기]나 [강강술래]는 추석에 널리 행해온 여성의 민속놀이인데, 외출이 자유스럽지 못하던 조선 시대의 여성들도 이 날만은 자유롭게 외출하여 친구·친척·친지들과 함께 이들 놀이를 하면서 하루를 즐기곤 하였다. 그 중 그네뛰기는 녹음방초(綠陰芳草)가 꽃보다 아름다운 신록의 계절에 여성들이 자연 속에서 하루를 즐기면서 체력단련도 할 수 있었으니, 민속적으로나 정서 함양·체력 단련 면에서 큰 의의를 지니는 놀이이다. '그네를 뛰면 여름에 모기에 물리지 않으며 더위도 타지 않는다.'는 말이 예로부터 전해 오는데, 이 말에는 그네뛰기를 하여 체력을 기르면, 여름을 탈없이 날 수 있다는 뜻이 담겨 있다. 그네뛰기를 전처럼 널리 행하여 우리의 전통적 민속놀이를 계승하면서 체력도 기르는 계기로 삼았으면 좋겠다.

    <농지개량 제184호(서울 : 농지개량조합연합회, 1999. 6)에 수록하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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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며칠 전 동창회 모임에 참석하기 위해 고향에 갔었다. 초등학교와 중학교 시절에 학교에 오가면서 건너다니던 냇가에 이르니, 친구들과 '두껍아 두껍아/ 헌집 줄게/ 새집 다오.' 하고 노래를 부르며 두꺼비집짓기 놀이를 하던 기억이 떠올랐다. 그 때 우리는 두꺼비집을 다 지은 뒤에 두꺼비를 잡아다가 각기 지은 집에 넣고, 누구의 집에 든 두꺼비가 나오지 않고 오래 있는가 내기를 하기도 하였다. 우리 둘레에 많이 있어 친근하게 느껴졌던 두꺼비는 민속적으로 여러 가지 의미를 지니고 있다.

  지난 해 봄에는 정읍 지역의 민속을 조사하던 중에 정읍시 북면 마정리에 갔었다. 승용차를 타고 정읍에서 칠보 가는 길로 10분쯤 달리니, 4차선 도로변의 언덕에 두꺼비가 앉아 있는 형상의 바위가 있었다. 이 바위는 가로(길이) 1m 90cm, 가로 90cm, 두께 70cm, 땅에서 입까지의 높이 80 cm, 땅에서 궁둥이까지의 높이 50cm 가량 되는 자연석이다. 이 바위가 있는 곳은 풍수지리상으로 아름다운 매화꽃잎이 떨어지는 연못의 형상을 지닌 '매화낙지(梅花落地)'라고 전해 온다. 그래서 자연마을 이름을 '매타실(梅墮實)' 또는 '연지동(蓮池洞)'이라고 한다. 이 바위는 원래 칠보산 용추봉에 있었는데, 천지조화의 힘을 얻어 풍광이 좋은 이곳으로 왔다고 전해 온다. 그런데 이 바위의 꼬리 부분이 향하는 마을은 풍년이 들고, 좋은 일이 겹쳐 일어나지만, 머리가 향하는 마을은 여자들이 바람난다고 전해 온다. 두꺼비 바위가 있는 곳에서 건너다 보이는 마을은 북면 월천동, 연지동과 평촌, 태인면 태남리 장재울 등 네 마을인데, 전에는 이 마을 사람들이 몰래 두꺼비 바위의 꼬리 부분이 자기 마을을 향하도록 돌려놓곤 하였다고 한다. 그 일로 이웃 마을 사람들끼리 서로 싸우는 일이 있어서 몇 년 전에 북면 태곡리에 사는 정종구(남, 57세, 농업) 씨 등 몇 명이 두꺼비 바위의 머리 부분을 마을이 없는 부분으로 향하게 한 뒤에 시멘트로 고정해 놓았다고 한다.

  지난 1995년 10월에는 경남 진해시 용원동 녹산공단 조성 공사장에서 공사를 하던 중에 땅 속에 묻혀 있던 두꺼비 모양의 바위가 모습을 드러낸 일이 있다. 가로 10m, 세로 8m, 높이 10m 가량의 이 바위는 두꺼비가 용원 앞 바다를 향해 뛰려고 움츠리고 있는 듯한 모습이었다. 이 바위가 발견되자 용원 마을 사람들은 이 바위가 마을의 수호신이므로 훼손하지 말고 보존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내가 신문 기사를 보고 이곳을 찾아갔을 때는 바위를 깨는 작업이 진행되어 몇 조각으로 깨진 뒤였는데, 이를 두고 마을 사람들은 여러 가지 이야기를 하였다. 바위를 깨는 작업을 맡은 중장비 기사의 꿈에 두꺼비가 나타나 다른 곳으로 옮겨 갈 터이니 며칠 만 기다려 달라고 하였는데, 이 말을 듣지 않고 공사를 강행한 기사가 교통사고를 당해 죽었다고 하기도 하고, 마을에서 뜻하지 않은 사고로 죽은 사람이 있었다고도 하였다. 

  나는 이런 일을 보며 두꺼비에 대한 한국인의 의식에 관해 생각해 보았다. 우리 민속에서 두꺼비는 족제비, 구렁이 등과 함께 집 지킴이 또는 재물을 관장하는 신을 상징한다. 지킴이란 한 집안이나 어떤 장소를 지키고 있는 신령한 동물 또는 물건을 말한다. 이 지킴이는 가신(家神) 또는 수호신의 성격을 띠는데, 재복(財福)을 관장한다고 믿는다. 그래서 두꺼비나 족제비, 구렁이는 부잣집에 꾄다고 전해 온다.

  무당의 굿거리 중 대감거리에서 부르는 <대감타령>에, "부자 되게 도와주마. 장자(長者) 되게도 도와주마. 곳간도 채우고, 단지도 채워서 멍의 노적 쌓아놓을 적에 노적 더미에 꽃이 피고, 금구렁이 굽을 치고, 업두꺼비 새끼치고, 금족제비 터를 잡아 밑의 노적 싹이 나고" 하는 구절이 있다. 여기에는 두꺼비가 재복을 관장하는 업신으로 나타난다.

  충북 청원군 오창에는 처녀를 구한 두꺼비 이야기가 전해 온다. 옛날에 한 처녀가 끼니때마다 찾아오는 두꺼비에게 자기의 밥을 한 숟가락씩 덜어주곤 하였다. 얼마 지나자 그 두꺼비는 커다랗게 자랐다. 그 마을에서는 일년에 한 번씩 당집에 처녀를 제물로 바치는 풍습이 있었는데, 그 해에 두꺼비를 기른 처녀가 제물로 뽑혔다. 제물로 바쳐진 처녀가 밤에 당집에 들어가 보니, 두꺼비가 먼저 와 있었다. 한밤중에 천장에서 지네가 파란 불꽃을 뿜으며 처녀를 잡아먹으려 하자 두꺼비가 빨간 불을 토하며 지네와 싸웠다. 밤새도록 싸움을 한 두꺼비는 지네를 죽여 처녀를 구한 뒤에 기운이 다하여 죽었다. <지네장터> 설화로 알려진 이 이야기는 전국적인 분포를 보이는데, 이 이야기에서 두꺼비는 의리가 있고, 희생 정신이 강한 동물로 나타난다.
 
  두꺼비와 관련된 이야기 중에는 <나이 자랑> 이야기도 있다. 옛날에 노루가 잔치를 베풀고, 여러 짐승을 초대하였다. 잔치에 초대받은 짐승 중 여우와 토끼, 두꺼비가 서로 어른이라면서 윗자리에 앉으려고 하였다. 먼저, 여우가 나이 많음을 드러내기 위해 자기는 천지개벽할 때 하늘에 별을 붙였다고 하였다. 이 말을 들은 토끼는, 여우가 별을 붙이기 위해 딛고 올라간 사다리를 만든 나무가 바로 자기가 심은 나무라고 하였다. 이 말을 들은 두꺼비가 눈물을 흘리며 슬피 울었다. 여우와 토끼가 왜 우느냐고 묻자 두꺼비는, 토끼가 심었다는 그 나무로 망치를 만들다가 죽은 손자 녀석이 생각나서 운다고 하였다. 이 말을 들은 여우와 토끼는 상좌를 두꺼비에게 양보하였다고 한다. 이 이야기에서 두꺼비는 의뭉스럽고, 지혜가 많은 동물로 나타난다.   

    평남 강서 고분의 천장에 있는 일월화(日月畵)의 달 속에는 두꺼비가 그려져 있다. 이것은 두꺼비를 달의 정령으로 보는 의식의 표현이라 하겠다. 중국 신화에는 천하 제일의 궁사(弓師) 예(羿)가 서왕모로부터 불사약을 얻어다 놓았는데, 아내인 항아(姮娥)가 이를 남편 몰래 먹고, 남편의 활에 맞아 죽을 것이 두려워 달로 도망가서 미운 두꺼비로 변했다고 한다. 이와 같은 이야기가 우리 나라에 전해지면서 두꺼비가 달의 정령으로 인식되었던 것 같다.

    경남 양산 통도사에 있는 자장율사의 사리탑 전설도 두꺼비와 관련이 있다. 자장율사의 사리를 보러 온 조정의 사신이 사리탑의 돌 뚜껑을 열게 하고 보니, 그 곳에 커다란 두꺼비가 앉아 있고, 그 뚜껑의 안쪽에는 뒷날 아무개 성을 가진 사람이 이것을 열 것이라고 쓰여 있었는데, 그 아무개 성이 바로 그 사신의 성이었다고 한다. 이것은 두꺼비를 신령스러운 동물, 영혼의 표상으로 생각하는 의식의 표현이라 하겠다. 


    《삼국사기》를 보면, 신라 애장왕 10년 6월에 벽사(碧寺)의 두꺼비가 뱀을 잡아먹었는데, 그 해 왕의 숙부 언승(彦昇)과 아우 이찬 제옹(悌邕)이 군사를 이끌고 대궐로 들어와 왕을 죽이고 정권을 잡았다고 한다. 또 백제 의자왕 20년 4월에는 두꺼비 수만 마리가 나무 위에 모였는데, 그 해에 백제가 망했다고 한다. 이들 이야기에서 두꺼비는 국가에 변란이 일어날 것을 알고 알려준 동물이다.
 
    강원도 영월군 주천에는 술이 나오는 술샘, 즉 주천(酒泉)이 있었다고 한다. 이 샘에서는 전에 술이 나왔는데, 양반이 오면 약주가, 상사람이 오면 막걸리가 나왔다고 한다. 어떤 상사람이 양반 차림으로 가서 물을 뜨니 막걸리이므로 샘물마저 사람 차별한다고 화가 나서 개를 잡아넣은 후로 술이 나오지 않는다고 한다. 그 곳을 가보니, 주천의 전설을 적은 비석이 서 있고, 그 옆에는 돌로 만든 두꺼비의 입에서 물이 흐르고 있었다. 두꺼비의 입에서 물이 흐르도록 한 것은 두꺼비가 물의 저장 및 조절 기능을 지니고 있다는 의식의 표현이다.   
 
  전기를 사용하는 가정에는 전기의 사용량과 전압이 적정량을 초과할 때 퓨즈가 끊어지게 함으로써 안전을 도모하는 장치가 있는데, 이를 '두꺼비집'이라고 한다. 전에 연탄불을 피울 적에 사용하던 철판 덮개를 '두꺼비'라고 하였다. 전기 안전장치나 연탄 덮개에 이런 이름을 붙인 것은 두꺼비가 불을 조절한다는 의식에 의한 것이라 하겠다.

  이처럼 한국인의 의식 속에 있는 두꺼비는 여러 가지 모습으로 나타난다. 이를 보면, 정읍에서 두꺼비 바위의 꼬리가 자기 마을로 오게 하려고 애쓰던 마을 사람들의 마음, 녹산공단 조성 공사 중에 나타난 두꺼비 바위를 보존해야 한다던 마을 사람들의 주장을 알 것 같다. 두꺼비 이야기를 많이 하였으니, 자녀 갖기를 원하는 분들께 떡두꺼비같은 아들을 낳아 잘 기르라는 덕담 한 마디를 하고 끝을 맺어야겠다. 

  <농지개량 제183호(서울 : 농지개량조합연합회, 1999. 5)에 수록하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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