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에 아내와 함께 경북 영주시 부석면 복지리 봉황산 기슭에 자리 잡은 부석사를 찾았다. 부석사는 신라 문무왕 16(676)년에 화엄종의 종조인 의상 대사(義湘大師)가 창건한 절이다. 의상 대사는 중국 당나라로 가서 중국 화엄종의 시조인 지엄(智儼) 대사 문하에서 수학하고 돌아온 뒤에 왕의 뜻을 받들어 이 절을 창건하였다. 여기에는 고려 시대에 지은 무량수전(국보 제18)과 조사당(국보 제19), 신라 시대 유물인 무량수전 앞의 석등(국보 제17), 소조여래좌상(국보 제45), 주사당 벽화(국보 제46), 석조여래좌상(보물 제220), 삼층석탑(보물 제249), 당간지주(보물 제255) 등의 문화재가 있다.

   무량수전 서편에 큰 바위를 받침으로 깔고 앉은 넓고 큰 바위가 있다. 이 바위는 밑 부분이 받침에 완전히 닿지 않고 공중에 떠 있다고 한다. 그래서 이 바위를 부석(浮石)이라 하고, 절 이름을 부석사(浮石寺)라고 하였다고 한다. 여기에는 의상 대사가 부석사를 지을 때 이를 방해하는 이교도들을 선묘(또는 용녀)가 신통력으로 물리쳤다는 흥미로운 이야기가 전해 온다.

   의상 대사는 문무왕 1(661)년에 신라에 왔다 가는 당나라 사신의 배를 타고 중국으로 갔다. 그가 양주의 주장인 유지인(劉至仁)의 집에 머무를 때에 그의 딸 선묘(善妙)가 그에게 연정을 품게 되었다. 그는 선묘의 마음을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고, 법도로 대하여 그녀를 제자로 만들었다. 그는 안남성 종남산 지장사로 가서 지엄 대사의 문하에서 10년간 공부하였다.

   그는 일이 생겨 갑자기 귀국하게 되었다. 돌아오는 길에 양주에 들러 선묘를 만나려 하였으나 출타 중이어서 만나지 못하고, 급히 항구로 가서 배를 탔다. 이 소식을 들은 선묘가 항구로 달려가니, 배가 막 출발하였다. 선묘가 그를 위해서 준비해 두었던 가사와 법복을 배를 향해 던지니, 바람을 타고 배에 닿았다. 선묘는 자기 몸이 용이 되어서 의상 대사를 보호하게 해 달라고 발원하였다. 그래서 선묘는 용이 되어 그를 보호하며 신라에 왔다.

   의상 대사가 부석사 자리에 절을 지으려고 하자 오백여 명의 이교도들이 이곳은 우리들의 기도처이므로 절을 지을 수 없다며 막아섰다. 그래서 어쩌지 못하고 있을 때 용녀 선묘가 현신하여 커다란 바위를 공중에 세 번이나 들어 올리며 이교도들을 위협하였다. 이교도들이 놀라 겁을 먹고 물러서자 바위를 내려놓았다. 이 바위가 땅위에 떠 있으므로 부석이라 하고, 그 절을 부석사라고 하였다. (《삼국유사》. 유증선, 《 영남의 전설 》. 최운식, 《다시 떠나는 이야기 여행 》 참조)

   부석에 관하여 조선 영조 때의 실학자 이중환은 《택리지(擇里志) 》에 다음과 같이 기술하였다. 불전 뒤에 큰 바위 하나가 옆으로 섰고, 그 위에 큰 돌 하나가 지붕을 덮어 놓은 듯하다. 얼른 보면 위아래가 서로 이어진 듯하다. 그러나 자세히 살피면 두 돌 사이가 서로 눌려져 있지 않다. 약간의 빈틈이 있어 새끼줄을 건너 넘기면 나고 드는 데에 걸림이 없다. 그래서 떠 있는 돌인 줄을 알게 된다.

   이와 비슷한 이야기가 충청남도 서산시 부석면에 있는 부석사에도 전해 온다. 의상 대사가 도비산에 절을 지으려고 하였다. 그런데 그 산에 본거지를 둔 해적들이 방해하여 절을 지을 수 없었다. 이 때 그가 당나라에서 올 때 만났던 용녀가 도비산 꼭대기에 나타나 큰 바위를 들고 해적들에게 이 산을 떠나라고 했다. 도둑들이 떠나자 용녀는 들고 있던 바위를 앞바다에 던졌다. 그 바위는 간만의 차에 구애 없이 물에 떠 있는 것처럼 보이므로 뜬 바위’, 부석이라 하였다. 그 산에 지은 절을 부석사라고 했다. 그리고 그 산을 섬이 날아간 산이라 하여 도비산(島飛山)이라고 했다. (최운식, 《한국구전설화집 4 》).

   영주 부석사 전설과 서산 부석사 전설은 부석사의 유래를 용녀, 부석과 관련지어 설명한다는 점에서 같다. 그러나 서산 부석사 전설은 바다를 배경으로 함에 따라 이교도해적’, ‘선묘용녀로 바꾸었다. 또 충남 서산시에 부석면이라는 행정 구역, ‘부석사라는 절 이름, ‘도비산이라는 산 이름, ‘부석이라는 바위가 있다. 이로 보아 서산 부석사 전설이 민간에 끼친 영향이 더 컸던 것 같다.

   불교가 이 땅에 들어온 것은 아주 오래 전이다. 고구려는 소수림왕 2(372)년에 전진의 왕 부견이 승려 순도를 파견하여 불상과 불경을 전해 왔다. 12년 뒤에 인도의 마라난타가 백제에 불교를 전하였다. 그로부터 훨씬 뒤에 고구려의 묵호자가 신라의 서북 지방인 일선군 모례(毛禮)의 집에 기숙하면서 불법을 전하였다. 그래서 모례는 신라인으로서 최초의 불교 신도가 되었다. 그 후 소지마립간 때에 고구려에서 아도(阿道. 고구려에 왔던 중국승 아도와는 동명이인)가 와서 불법을 전도한 뒤로 신봉하는 자가 늘어났다. 신라 왕실에서는 불교 공인을 위하여 노력하였으나 귀족들과 백성의 반대로 인해 실패로 돌아갔다. 법흥왕은 527년에 이차돈(異次頓)의 순교를 계기로 배불파를 제압하고 불교공인을 선포하였다.

   모든 종교는 전도에 뜻을 두고 이를 위해 온힘을 기울인다. 한 종교가 다른 문화권에 자리를 잡으려고 할 때에는 그 지역에 전해오는 종교 또는 민간신앙과의 충돌이 불가피하다. 그 충돌을 이겨내면 전도에 승리하는 것이고, 이기지 못하면 그 종교는 그곳에 뿌리를 내리지 못하고 말 것이다. 외래종교인 불교가 신라에서 유난히 전도하기가 힘들었던 것은 신라에 민간신앙의 뿌리가 깊어 저항이 컸기 때문이다.

   위 이야기에서 이교도해적은 민간신앙의 신도들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그리고 절터는 예로부터 전해오는 민간신앙 신도들의 기도처였을 것이다. 이들이 불교의 포교를 못마땅하게 여기는 것은 당연하다 할 것이다. 그런데 자기들의 성지(聖地)를 빼앗아 절을 지으려고 하니 이에 적극 반대하였다. 이 때 선묘, 또는 용녀가 큰 바위를 번쩍 들고 위협하여 이들을 굴복하게 만든다. 이것은 불교가 포교하며 절을 지을 때 민간신앙과 충돌하여 어려움을 겪었으나 신이한 법력을 보임으로써 민간신앙을 제압하고, 승리하였음을 드러낸다.

   선묘가 바다로 던진 가사와 법복이 의상 대사가 탄 배에 닿는다. 선묘가 소원대로 용녀가 되어 대사를 호위하고 신라로 온다. 용녀가 큰 바위를 들고 이교도들을 위협한다. 또 선녀가 내려놓은 바위가 바닥에 닿지 않고 떠 있다. 이런 것들은 실제로는 있을 수 없는 일로, 불교적인 법력을 영검하게 나타내려는 의도에서 차용한 설화적 수사이다. 승려나 불심이 있는 사람들은 이러한 이야기를 만들어 퍼뜨렸다. 그래서 불교를 민간신앙보다 우월한 종교, 포교에 승리한 종교라는 인식을 갖게 하였다.

영주 부석사 무량수전
무량수전 서편에 있는 부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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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등학교 1학년 때 국어과 정 선생님은 한문 공부를 많이 하신 분이셨다. 선생님께서는 가끔 한문 명구를 칠판에 쓰시고, 뜻을 설명해 주셨다. 그 중 가장 먼저 떠오르는 말은 정신일도 하사불성(精神一到何事不成)이다. ‘정신을 한 곳에 집중하면 이루지 못할 일이 없다.’는 뜻이다.

   이 말은 중국 남송 때의 유학자 주자(朱子, 1130~1200)가 한 말이라고 한다. 이 말은 그 의미를 곱씹어 볼수록 좋은 말이어서 꿈 많던 소년 시절의 나에게 용기를 주었고, 내 마음이 산란할 때마다 나를 일깨우는 명구가 되었다. 이 말을 책상 앞 벽에 써서 붙이고, 마음에 새겼다. 그로부터 먼저 목표를 설정하고, ‘하면 된다라는 생각으로 집중력을 강화하며 마음을 다잡곤 하였다. 설정한 목표 달성을 위해 노력하며 긴장이 풀리거나 나태해질 때에는 이 말을 되뇌며 마음을 다잡곤 하였다. 그래서 이 말은 나를 일깨우는 경구(警句)가 되기도 하였다.

   교사로, 교수로 교단에 섰을 때에는 계제를 살펴 학생들에게 이 말을 써 주고, 설명하였다. 그리고는 내가 어렸을 때 들은 옛날이야기 <바위를 뚫은 화살>을 이야기해 주곤 하였다.

   옛날에 무과를 준비하는 젊은이가 산속에서 활쏘기를 비롯한 무술 훈련을 하고, 해가 진 뒤에 집으로 향하였다. 그가 어두움을 뚫고 고개를 넘으려고 하는데, 커다란 호랑이가 앞을 가로막았다. 그는 놀란 마음을 가다듬고, 호랑이를 활로 쏘아 맞히지 못하면 내가 죽는다는 생각에 혼신의 힘을 기울여 세 대의 화살을 날렸다. 화살을 맞은 호랑이가 더 이상 다가오지 않으므로 집으로 달려왔다.

   이튿날 그 곳에 가보니, 큰 바위에 자기 화살 세 대가 꽂혀 있었다. 그는 지난밤에 바위를 호랑이로 알고 화살을 쐈음을 알고 겸연쩍었다. 그러나 화살이 바위를 뚫은 것을 흡족히 여기며 다시 화살을 쏘아보았다. 그러나 화살은 바위에 튕겨나가곤 하였다. 이 이야기는 옛날부터 널리 퍼져 전해오면서 필사의 각오로 정신을 집중하고 혼신의 노력을 기울이면 이루지 못할 일이 없다는 교훈적 의미를 일깨워 주었다.

중국 사마천이 쓴 《사기(史記)》 「이광장군열전어느 날 이광(李廣, B.C. ?119)이 사냥을 나갔다가 수풀 속에 큰 호랑이가 있는 것을 보고 활을 쏘아 명중시켰다. 그런데 가까이 가서 보니 그것은 바위였다. 그리고 살촉이 바위에 깊이 박혀 있었다. 그러나 다시 한 번 활을 바위에다 대고 쏘았으나 살촉은 바위를 뚫지 못했다.”라는 이야기가 실려 있다. 내가 어렸을 때 들은 바위를 뚫은 화살이야기가 이 이야기를 모태로 하였는지는 알 수 없다.

  고등학교 때 정 선생님은 모사재인성사재천(謀事在人成事在天)’이란 말과 함께 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이란 말도 가르쳐 주셨다. 앞의 말은 계획을 세우는 것은 사람의 일이지만, 그 일의 성사 여부는 하늘에 달려 있다는 뜻이고, 뒤의 말은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을 다하고 하늘의 뜻을 기다리라는 말이다. 이 말은 계획한 일의 결과는 하늘에 맡기고 최선을 다하면 바라던 바를 이룰 수 있다는 믿음을 갖게 해준다. 혹시 일이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그냥 하늘의 뜻으로 알고 실망하거나 비관하지 말라는 뜻도 담겨 있다.

   이 말의 출처는 《삼국지연의》이다. 촉한의 제갈공명(諸葛孔明)은 유비가 사망한 뒤에 위나라와 싸울 때 계책을 세워 사마의(司馬懿)의 군사를 골짜기로 유인한 뒤에 화공(火攻)을 하였다. 그런데 뜻밖에 큰비가 내려 불이 꺼짐으로 큰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다. 이를 보고 제갈량은 모사재인 성사재천이라며 한탄하였다고 한다.

   이와 똑같은 뜻을 가진 말이 신약성경에도 있다. 잠언161절의 계획은 사람이 세우지만, 결정은 주님께서 하신다라는 말이다. 지혜의 왕으로 불리는 솔로몬의 이 가르침은 계획을 세우고 최선의 노력을 기울이면 하나님께서 이루어주신다고 한다. 계획을 세워 추진하는 일의 성격과 내용, 기울이는 노력의 정도를 보아 하나님께서 이루어 주신다는 믿음을 가지라는 뜻이 담겨 있다.

   ‘정신일도 하사불성’, ‘모사재인 성사재천’, ‘계획은 사람이 세우지만, 결정은 주님께서 하신다라는 말씀은 젊은 시절의 나를 일깨워주는 명구였다. 이런 명구를 가르쳐주시고, 진학지도를 바르게 해주신 정 선생님 생각이 간절하다. (2024. 3.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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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얼마 전 조선일보 일사일언(2023. 12. 28일자 제18)사람보다 나은 침팬지라는 제목의 기사가 실렸다. 침팬지의 어떤 점이 만물의 영장인 사람보다 낫다는 말인가? 호기심이 발동하여 필자가 누구인가를 살펴본 뒤에 찬찬히 읽었다. 에버랜드의 사육사 송영관 씨가 쓴 이 글은 제목과 내용이 적절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왼쪽 방에는 평범한 침팬지를 넣고, 나무 막대를 사용해야만 열 수 있는 먹이상자를 놓아두었다. 오른쪽 방에는 권위적인 대장 침팬지를 넣고, 먹이상자를 열 수 있는 도구만 넣어두었다. 침팬지는 도구를 이용하여 문제를 해결하는 능력이 있다. 이것은 2007년과 2009년에 독일과 일본에서 침팬지에게도 남의 사정을 이해하고 위하거나 이롭게 하는 마음, 즉 이타심이 있는지를 알아보기 위한 실험이었다고 한다.

   실험 결과를 보면, 상황을 파악한 오른쪽 방의 침팬지는 아무런 조건 없이 막대기를 왼쪽 방의 침팬지에게 건네주었다. 왼쪽 방의 침팬지는 건네받은 막대기를 이용하여 먹이상자를 열었다. 그리고는 그 먹이를 오른쪽 방의 침팬지에게 나누어 주었다. 이것은 침팬지가 자기만을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남을 배려하는 마음, 즉 이타심을 지니고 있음을 말해 준다. 이 글을 읽고, 침팬지가 이타심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을 처음 알았고, 큰 울림을 받았다. 만물의 영장이라고 하는 사람들은 어떠한가를 생각해 보았다.

   이 때 불현듯 세 도둑의 죽음이라는 옛날이야기가 머리를 스쳤다. 부잣집에서 큰돈을 훔친 세 도둑이 한적한 산골로 피신하였다. 그들은 목이 출출하였으므로 한 사람은 주막으로 술을 사러 가고, 둘은 거기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돈을 지키던 둘은 돈을 혼자 차지하려는 욕심에서 함께 있던 한 사람을 죽였다. 그리고 잠시 후에 술병을 들고 온 사람마저 죽였다. 그는 혼자 술을 마시며 호쾌한 웃음을 웃었다. 그러나 술을 사러간 사람이 돈을 혼자 차지하려는 속셈에서 술병에 독을 넣었으므로, 그 역시 죽고 말았다. 이 이야기는 자기의 이익만을 취하려는 인간의 이기심이 어떠한 결말을 맞게 되는가를 보여주면서 동시에 나쁜 짓을 한 사람은 반드시 벌을 받는다는 것을 일깨워 준다.

   사람에게는 자기를 가장 중요하게 여기고, 모든 것에 앞서서 자기 자신을 위하는 마음이 있다. 이를 이기심이라고 한다. 이것은 생명체의 생존과 번식을 위해 필요한 본능으로 누구나 지니고 있다. 그러므로 도를 넘지 않으면 아무런 문제가 없다.

   그런가 하면 사람은 본성에서 우러나오는 네 가지 마음씨를 지니고 있다. 그것은 불쌍히 여기는 측은지심(惻隱之心), 겸손히 남에게 사양하는 사양지심(辭讓之心), 옳지 못함을 부끄러워하고 착하지 못함을 미워하는 수오지심(羞惡之心), 옳고 그름을 가릴 줄 아는 시비지심(是非之心)이다. 이러한 인간 성정의 사단(四端), 즉 인지상정(人之常情)에서 이타심이 나온다.

   사람은 남을 배려하기에 앞서 자기의 삶을 우선으로 생각하며 행복을 누리고 싶어 한다. 그러면서도 도덕적이고 정의로운 것을 지향하며 부당한 일에 맞선다. 또 어려움에 처한 사람의 처지를 동정하고 마음 아파하며 도와주려고 한다. 이처럼 인간은 누구나 두 가지 마음 즉, 이기심과 이타심을 가지고 있다. 이 두 마음이 균형을 이루면 좋을 것이다. 그러나 선천적인 본인의 성향이나 환경 요인에 따라 어느 한 가지 특성이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사람이 있다.

   이기심이 강한 사람은 자기를 세상살이에 가장 밝고 똑똑한 사람으로 생각한다. 그리고 이타심이 강한 사람을 세상 물정을 모르는 호구(虎口)로 생각하고, 이용하려 든다. 거짓말을 하고, 속임수를 쓰면서 이익을 꾀한다. 요즈음에 많이 일어나는 묻지마 폭행이나 보이스피싱 등 사회의 크고 작은 사건이나 범죄행위는 이런 사람들의 소행이다.

   이타심이 강한 사람은 이기심이 강한 사람을 자기만 아는 약삭빠른 사람, 상종하기 어려운 사람으로 치지도외(置之度外)한다. 그리고 옳은 일에 힘쓰고, 남을 돕는 일에 앞장선다. 불의한 일을 보았을 때에는 참지 못하고 분연히 일어선다. 서울 강서구 방화동 임대아파트에 불이 났을 때 수차례 연기를 뚫고 고령자와 이웃 주민들의 대피를 도운 우영일 씨, 청주 오송 궁평2 지하차도 침수 당시 위험을 무릅쓰고 3명을 구한 유병조 씨, 동해안에서 파도에 휩쓸려 나가는 5명을 구한 이형태 씨 등을 비롯하여 의인, 애국자 등은 이타심이 강한 사람들이다.

   어린 아이가 우물에 빠지려고 할 때에는 누구나 아무 조건 없이 그 아이를 구하려고 한다. 이를 보면 사람은 누구나 이타심을 지니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마음속에 함께 있는 이기심이 이타심을 억누르고 마음을 지배하지 않고 균형을 유지하도록 마음 수양을 해야 한다. 저급하고 탐욕스런 이기심이 마음을 지배하면 침팬지만도 못한 사람이 되고 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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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동안 신문, 잡지, 학술지 등에 많은 글을 실었다. 그때마다 그 글에 대한 반응이 나타났다. 학술지에 실린 글은 전공분야가 같은 분들의 반응이었고, 신문이나 잡지에 실린 글은 일반 교양인이나 지인들의 반응이었다. 그런데 그 반응은 아주 다양하였다.

   한국의 고소설이나 민속, 신화·전설·민담에 관한 글일 경우에는 한국문화의 전통이나 가치관, 지혜에 관한 느낌을 말해 주었다. 교육에 관한 글일 때에는 교사들이 느낌을 말해 주었다. 기독교 신앙에 관한 글일 경우에는 기독교 교우들이 자기의 신앙 체험과 주님의 은혜에 관한 반응을 보여 주었다. 이러한 반응은 다른 글을 쓰는 데에 많은 도움이 되었다.

   요즈음에는 《기독교연합신문》은혜의 샘물코너에 신앙수필을 한 달에 한 편씩 실었다. 여기에 실린 글에 대한 반응은 감동을 받았다’, ‘주님의 은혜에 감사한다’, ‘깨달음을 얻었다등으로 다양하였다. 이것들은 모두 지인들이 대면이나 전화, 또는 카톡이나 문자 메시지로 받은 반응이다. 그런데 며칠 전에 의외의 인물로부터 반응이 왔다.

   지난 1월 첫째 주일에 일찍 교회에 가니, 모르는 사람한테 온 편지가 주보함에 꽂혀 있었다. 보낸 사람의 주소를 보니, ‘경북 포항시 흥해우체국 사서함이라 쓰여 있고, 발신인은 모르는 사람의 이름이 적혀 있다. 수신인은 장위교회 최운식 장로님께라고 쓰여 있는 것으로 보아 나에게 오는 우편물인 것은 틀림이 없었다. 그래서 뜯어서 사연을 읽었다.

   첫 구절은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시기에 여념이 없으실 장로님께 이렇게 번거로운 서신을 드리게 되어 정말 부끄럽고 죄송한 마음입니다.’로 되어 있다. 그리고 이어서 현재 경북 포항시에 있는 포항교도소에 수감 중인 사람이라면서, 나이와 수인번호와 이름을 적었다. 60대 중반인 그는 노안으로 인해 신문과 책을 보는 등 일상생활에 불편함이 많아 안경이 절실하게 필요하다. 그런데 가족과 지인이 없어서 경제적으로 힘든 처지라고 하였다. 그러니 안경을 구입할 돈 7만원을 보내달라고 하면서 교도소에서 사용하는 은행 계좌번호를 적었다.

그는 우연히 《기독교연합신문 》 을 보다가 은혜의 샘물난에 실린 목사 아들을 둔 부모란 제목의 내 글을 읽었다고 한다. 그는 내가 나가는 장위교회가 자기가 사는 곳 근처에 있다는 말도 하였다. 이로 보아 그는 서울의 북부 지역에 사는 사람인 것 같다. 그래서 내가 다니는 교회 이름에 친근감을 느꼈던 것 같다.

   나는 이 편지를 읽으며  기독교연합신문 》 이 교도소에 들어간다는 것을 알았고, 들어간 신문을 수인들이 찬찬히 읽는다는 것에 적이 놀랐다. 그가 이 글을 읽고 도움을 청할 대상으로 나를 고른 것은 맞다. 그러나 그는 부족한 내 글을 읽고 반가운 마음과 함께 공손한 마음이 들었다고 하였다. 이로 보아 목사 아들을 둔 부모와 목사가 된 아들의 마음과 신앙심이 그의 마음에 전달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겠다.

   그의 편지는 문장이 바르고, 표현이 적절하였으며, 맞춤법과 띄어쓰기도 잘 하였다. 글씨는 달필은 아니었지만, 읽기에 불편함이 없었다. 그리고 도움을 청하는 말의 앞과 뒤에 인사치레를 잘 하였다. 이로 보아 학력과 교양 수준이 높은 사람인 것 같다. 이런 사람이 무슨 일로 교도소 생활을 하게 되었는지 알 수 없다. 편지의 내용으로 보아 그는 예수를 믿는 기독교인 것 같지는 않다. 그러나 기독교에 관해 열린 마음을 갖고 있는 것은 알 수 있다.

   나는 그가 적어 보낸 계좌번호로 돈을 보내며 간절히 기도하였다. “하나님, 그가 이 돈으로 안경을 맞춰 쓰고 밝아진 눈으로 신앙에 관한 글과 성경을 읽고, 예수님의 사랑과 가르침을 받아들여 신앙생활을 하게 해 주십시오. 그리고 무사히 교도소 생활을 마치고 출소하여 새 출발하게 하여 주십시오.” 나는 이 기도가 이루어 질 것이라 믿는다.

   기독교 신앙에 관한 글은 많을수록 좋다. 그러나 정제되지 않은 글이나 신앙을 강요하는 느낌을 주는 글은 좋은 글마저 읽기를 회피하게 만드는 핑계를 만들어 준다. 읽는 사람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는 좋은 내용을 바르고 정확한 문장으로 표현한 글은 많이 써서 널리 보급해야 한다. 이런 글은 설교 못지않게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힘을 발휘할 것이다. <기독교연합신문 제1704, 2024. 1.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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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 연구실에는 한자로 斷金如蘭(단금여란)이라고 쓴 작은 액자가 걸려 있다. 은사이신 구용 김영탁 교수님께서 써 주신 휘호이다. 《주역(周易)》 「계사전(繫辭傳)에 나오는 二人同心其利斷金 同心之言其臭如蘭(이인동심기리단금 동심지언기취여란)에서 따온 말이다. 두 사람이 마음을 같이 하면 그 날카로움이 쇠도 끊고, 마음을 같이 하여 하는 말은 그 향기가 난초와 같다는 뜻이다.

   이와 같은 뜻을 지닌 말이 성경에도 있다. “땅에서 너희 가운데 두 사람이 합심하여 무슨 일이든지 구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그들에게 이루어 주실 것이다.”(마태복음18:19). 가족이나 어느 집단의 구성원이 합심협력하여 기도하면, 다 이루어질 것이라고 한다. 합심협력의 중요성을 주역》보다 더 구체적이고 적극적인 표현으로 일깨워 준다.

   우리 교회 여자 권사님이 오래 전에 쓴 글을 읽고 감명을 받았다. 그는 시부모님과 시누이, 시동생과 함께 잘 살았다. 그런데 몸이 아프기 시작하여 여러 병원을 다니며 유명한 의사의 진료를 받고, 좋다는 약과 식품을 다 먹었지만 효험이 없었다. 어느 날 아침에는 피를 토하기까지 하였다. 서울대학병원의 간() 전문의에게 오랫동안 진료를 받았으나, 역시 효험이 없었다. 그런데 얼마 뒤에는 담당 의사가 약도 주지 않고, 공기 좋은 곳에 가서 좀 쉬라고 했다.

   그는 이제 내 병은 고칠 수 없구나!’ 하는 생각에 눈앞이 아득하고, 하늘이 무너지는 듯하였다. 그는 병원 앞에서 통곡하였다. 그는 절망적인 마음을 추스르고 큰 교회 전도사로 일하고 있는 언니에게 전화를 하였다. 언니는 가까운 교회에 나가 새벽기도를 하라고 하였다. 교회에 다니지 않는 그는 그날부터 집에서 가까운 교회에 가서 새벽기도를 드렸다. 기도할 줄 몰라 하나님, 제 병을 낫게 해 주세요.”하고 간절히 기도하였다. 주일 낮에는 언니가 섬기는 교회에 가서 예배를 드렸다. 어느 날 새벽에 인사도 드린 적이 없는 목사님께서 안수기도를 해 주시고, 우리 교회에 나오면 특별히 기도해 주겠다고 하였다. 그래서 망설이지 않고 그 교회에 등록하였다. 그날부터 목사님은 매일 교인 한 분과 함께 그의 집에 오셔서 기도해 주셨다. 병원에는 일주일 간격으로 다니면서 검사를 받고 약을 먹었다.

   얼마 후에 온몸에 멍이 생겼다. 그날로 병원에 가서 검사를 하니, 간수치가 1,000이 넘는다고 하면서(간수치 정상은 40미만) 바로 입원하라고 하였다. 그 날이 1231일이었는데, 입원하려고 하니 병실이 없을 뿐더러 13일까지 공휴일이라서 14일에 입원하기로 하고 집으로 왔다. 그날 밤 꿈에 한 노인이 그의 몸에 나쁜 못이 많이 있다고 하면서 다 뽑아주었다. 밤중에 언니한테 전화를 하였더니, 언니가 말했다. “너를 위하여 우리 교회 형제자매 여러분이 작정하고 철야기도를 하였는데, 오늘이 마지막 날이야. 이제 너는 다 나았다!”

   14일에 다시 서울대학병원에 입원하고 검사하였다. 의사 선생님은 검사 결과를 보시고, 그동안 무슨 일을 하였느냐면서 퇴원하라고 하였다. 그 말에 놀라 항의하면서 이 병원에서 할 수 있는 검사와 치료를 다 해 달라고 졸랐다. 그래서 1주일 동안 다시 모든 검사를 받은 뒤에 병이 다 나았다는 판정을 받았다. 그는 기도를 들어주신 하나님의 은혜에 깊이 감사하며 날아갈 듯이 가벼운 마음으로 집에 돌아왔다.

   그 뒤로 그는 새벽기도회는 물론 모든 예배에 빠지지 않고 참석하였고, 여러 교회의 부흥회에도 다니면서 은혜를 받았다. 그 뒤로 그가 교회에 나가는 것을 못마땅해 하시던 시부모님이 교회 출석을 허락하심과 동시에 분가하라고 하셨다. 그 뒤로 그는 마음 놓고 교우들과 함께 봉사전도활동을 하였다. 얼마 후에 그의 기도가 이루어져 남편도 복음을 받아들였다. 합심 기도의 위력을 안 그는 집안에 어려운 일이 있을 때마다 온 가족이 합심하여 기도함으로써 어려움을 타개하며 살아왔다고 한다.

   며칠 전에 척추 수술로 3개월간 입원 치료를 받고 퇴원한 남자 권사님과 식사를 하면서 이야기를 하였다. 수술하기 전 집도 의사는 그 수술의 성공 확률이 그리 높지 않다면서 결과가 좋으면 휠체어를 타고 움직일 수 있을 것이라고 하였다. 그의 수술을 전후하여 그의 부인 권사님과 두 아들 목사님은 물론, 전 교인이 합심하여 수술의 성공을 위해 기도하였다. 그 결과 지팡이를 짚고 걸어서 교회에 출석할 수 있게 되었다. 집도 의사는 기적과 같은 일이라고 놀라며 어찌된 일인지 모르겠다고 하더란다. 이것은 많은 사람들이 합심하여 기도한 결과라 생각하고 감사한다. 그가 지팡이를 던져버릴 날이 속히 오기를 기도한다. <기독교연합신문, 1696호, 2023. 11.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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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람들은 먼 옛날부터 크고 작은 재난이나 질병을 겪으며 살아왔다. 옛 사람들은 이것을 신의 노여움이나 징벌에 의한 것이라고 여겼다. 그래서 신에게 제물을 바치며 재난이 없도록 해 달라고 빌었다. 또 해를 끼치는 신들이 아예 접근하지 못하게 하려고, 여러 가지 방책을 강구하기도 하였다. 그 예를 보면, 이스라엘 민족은 유월절에 양의 피를 문설주와 상인방에 바른다. 한국에서는 동짓날 팥죽을 쑤어 대문에 바르고, 대문 앞에 뿌리는 풍습이 있다.

   <출애굽기>를 보면, 이집트 총리가 된 요셉은 7년씩 이어지는 풍년과 흉년을 슬기롭게 대처하여 이집트의 구원자로 칭송을 받는다. 요셉의 인도로 이집트에 이주한 야곱의 가족 70명은 430년을 사는 동안 번성하여 큰 세력을 이루었다. 요셉을 알지 못하는 후세의 이집트 왕들은 이스라엘 민족을 종으로 부렸다. 이스라엘 민족이 고통을 호소하자, 하나님은 모세에게 이스라엘 민족을 이끌고 가나안 땅으로 가라는 명을 내린다. 모세는 이집트 왕에게 이스라엘 민족이 광야로 나가 하나님께 제사를 지낼 수 있도록 허락해 달라고 한다. 이집트 왕이 이를 거절하자, 모세는 이집트에 아홉 가지 재앙을 내렸지만, 허락하지 않는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열 번째 재앙을 내릴 것을 예고하고, 할 일을 알려준다. 이스라엘 백성은 모세의 명에 따라 일 년 된 수컷 양이나 염소를 잡아 그 피를 문설주와 상인방에 발랐다. 그리고 길을 떠날 차림으로, 그 고기를 불에 구워서 무교병을 쓴 나물과 함께 먹었다. 그날 밤 하나님의 사자가 이집트 사람의 집을 찾아다니며 사람과 짐승의 처음 난 것을 치셨다. 그러나 문설주와 상인방에 양의 피가 묻어 있는 이스라엘 사람의 집에는 아무런 해가 없었다. 열 번째 재앙을 당한 이집트 왕이 이스라엘 민족의 출발을 허락함으로써 이스라엘 민족은 탈출에 성공하였다. 유월절은 이를 기념하는 명절이다.

   한국에서는 예로부터 동짓날에 팥죽을 쑤어 성주신을 비롯한 가신들에게 바치고, 대문과 그 둘레에 뿌리는 풍습이 있다. 동짓날 팥죽을 먹는 풍습은 고려시대 이색의 《목은집》 이제현의 《익재집》에 이와 관련된 시가 있는 것으로 보아 고려 시대 이전부터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조선 후기에 홍석모가 쓴 《동국세시기》에는 동지팥죽은 역귀를 물리치기 위한 것이라 하였다.

   동지는 태양의 황경이 270° 위치에 있을 때로, 양력 1222일경이다. 밤낮의 길이는 하지로부터 낮이 차츰 짧아지고 밤이 길어지다가 동짓날에 극에 도달한다. 그리고 그 다음날부터는 차츰 밤이 짧아지고 낮이 길어지기 시작한다. 고대인들은 이날을 태양이 죽음으로부터 부활하는 날로 생각하고, 축제를 벌여 태양신에 대한 제사를 올렸다. 동짓날을 아세(亞歲)또는 작은설이라고도 하는 것은 동지가 태양의 부활을 뜻하는 깊은 의미를 지니고 있는 절기임을 말해 준다.

   팥죽의 주재료인 팥은 붉은 색을 띠는 곡식이다. 붉은 색은 밝은 태양, 활활 타는 불꽃을 상징하는 색이다. 이런 색을 귀신들은 무서워하고, 싫어한다. 그에 따라 민속에서는 붉은 색을 축귀(逐鬼)’, ‘축사(逐邪)’의 힘을 지닌 것으로 생각하였다. 옛사람들은 질병이나 재난의 원인을 잡귀잡신이 들은 때문이라 여겼다. 그래서 명절이나 특별한 날에는 붉은 색이 들어가는 음식을 만들어 신에게 바치고, 나누어 먹으면서 건강과 평안을 기원하였다.

   동지팥죽에는 쌀과 함께 새알심을 넣는다. 쌀의 흰색은 태양의 빛을 상징하는 흰색으로, 신성의 의미를 지닌다. 찹쌀이나 수수 가루로 동글동글하게 만든 새알심은 새의 알을 상징한다. 신화에서 알은 생명의 근원으로, 생산력을 상징한다. 따라서 팥죽의 쌀과 새알심은 흰색이 지닌 신성성과 새알심이 지닌 생산력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 그러므로 동지팥죽에는 팥의 붉은 색이 지닌 축귀축사의 의미, 쌀의 흰색이 지닌 신성성, 새알심이 지닌 생산력의 의미가 내포되어 있는 매우 특별한 음식이라 하겠다. 작은설인 동짓날에, 이러한 의미를 지닌 팥죽을 쑤어 성주신을 비롯한 가신들에게 바치고, 대문과 문 둘레에 뿌리는 것은 잡귀잡신이 가까이 오지 못하도록 막고, 건강과 평안을 기원하는 의미를 담고 있다.

   이스라엘 민족이 유월절에 양의 피를 문설주와 상인방에 바르는 것은 사람과 집짐승의 처음 난 것을 죽이러 다니는 천사에게 이스라엘 사람의 집임을 알려 재앙을 면하려고 하는 데서 시작된 것이다. 한국인이 동짓날 대문에 팥죽을 바르는 것은 잡귀잡신이 들어오는 것을 막기 위한 것이다. 두 가지 풍습은 재앙을 막기 위한 것이라는 점에서 일치한다. 그런데 이스라엘 민족의 풍습은 성경에 기록됨으로써 종교적 의미를 지니게 되었다. 이에 비하여 동지팥죽은 민속으로 전해 오다가 현대에는 그 의의가 약화되어 소멸의 위기를 맞고 있다.      <기독교연합신문 제1689, 2023. 10.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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