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즈음은 그리 많지 않지만, 전에는 마을 앞 정나나무 밑이나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곳에 무게가 150근(90Kg) 내외의 둥근 모양의 돌이 놓여 있는 마을이 많이 있었다. 이 돌이 사람들이 '들어올리는 돌'이란 뜻의 '들돌'이다.

  전에는 음력 정월 대보름이나 2월 초하룻날 마을 사람들이 많이 모인 자리에서 젊은이가 이 돌을 들어올리면, 그 때부터 그는 어른으로 인정받았다. 그래서 어른들의 품앗이에 끼게 됨은 물론, 품값을 받을 때에도 어른의 품값을 받을 수 있었다. 머슴들의 경우에는 들돌을 들어올리면, 어른 몫의 사경(농가에서 머슴에게 주는 일년치 품값)을 받을 수 있었다. 나이가 스물이 채 안 되었어도 들돌을 들어올린 사람은 어른 품값을 받았으나, 스물이 훨씬 넘었어도 들돌을 들지 못한 사람은 반품값밖에는 받지 못하였다.

  마을의 젊은이들은 자기 마을에서 들돌 들어올리기를 하는 정월 대보름이나 2월 초하루 전에 그 돌을 수없이 들어올려 보며 힘을 길렀을 것이다. 그래서 자신 있는 사람은 그 날 들돌 들기에 나서고, 그렇지 못한 사람은 그 자리에 참석하지 않거나, 참석은 하여도 들돌 들기에 나서지 않았을 것이다. 들돌 들기에 성공한 사람은 나이가 적어도 어른 대접을 받았지만, 그렇지 못한 사람은 평생 힘쓰는 일과 관련하여서는 어른 대접을 받지 못하였을 것이다. 이것은 일종의 농사꾼이나 머슴들의 성년식이었다. 이것은 요즈음 흔히 쓰는 말로 표현하면 성과급 제도였다고 할 수 있다. 이것은 체력을 매우 중요시하는 농경사회의 일면을 짐작하게 해 준다. 
   
  서울 경복궁 안에 있는 국립민속박물관에는 들돌이 전시되어 있고, 그 뒤에 그림이 붙어 있다. 그 그림에는 마을 사람들이 모여 있는 자리에서 한 젊은이가 들돌을 들어올리고 있고, 그 옆에는 젊은이의 어머니와 여동생인 듯한 여인이 마을 사람들에게 술을 따라 주는 모습이 보인다. 들돌을 들어올리는 젊은이의 아버지와 어머니를 비롯한 가족들은 체력 면에서 당당한 어른이 된 그의 모습을 보면서 자랑스럽게 여겼을 것이다. 아마도 젊은이의 애인은 나무 뒤에 숨어서 자기 애인이 그 돌을 들어올리는가를 지켜보며 가슴을 조이다가 성공하는 순간에 벅찬 감격을 느꼈을 것이다.

  세월이 변하면서 농사꾼이나 머슴들의 성년식의 성격을 지닌 들돌 들기 풍습도 사라졌다. 그에 따라 들돌의 의미도 퇴색하여 들돌은 담쌓기나 둑쌓기, 집짓기 등의 공사를 할 때 다른 잡석들과 함께 파묻혀 버려 지금은 찾아보기 어렵게 되었다. 그러나 들돌 들기의 의미를 되새기며 '들돌놀이'를 하는 마을이 있는가 하면, 들돌이 질병을 물리쳐 준다는 주술적 의미를 지니게 되어 '들돌제'를 지내는 마을도 있다.

  전남 보성군 노동면 거석리에서는 매년 정월 대보름날 당제를 마치고 들돌놀이를 한다. 이것은 전부터 해 오던 놀이인데, 한 때 중단되었다가 1986년 군민의 날에 재현되었다. 이것은 직경 50cm, 무게 80Kg 정도 되는 돌을 들어 넘기는 놀이인데, 장원으로 뽑힌 사람에게는 상으로 황소를 준다. 놀이가 끝나면 술과 음식을 나누어 먹고 노래부르고 춤을 추면서 마을 사람의 건강과 풍년을 기원한다. 이런 놀이는 전북 부안에도 있다.

  제주도에서는 청년들이 힘을 겨루기 위해서 들어올리는 돌을 '뜽돌'이라고 한다. 이 돌은 동네 어귀에 있어서 누구나 자유롭게 들어올릴 수 있다. 특히 추운 겨울에 젊은이들이 뜽돌이 있는 '뜽돌거리'에 모여 제각기 힘 자랑을 한다. 그 방법에는 두 손으로 잡아 들어올리기, 들고 허리를 펴기, 들고 일어서기, 땅에서 조금만 들기, 돌을 들고 몇 걸음 걷기 등이 있다. 이 중 뜽돌을 들고 가슴과 허리를 완전히 편 채 두 다리를 꿋꿋이 디디는 방식을 제일로 친다. 다른 마을의 청년이 지나다가 뜽돌을 보고 클 경우에는 '이 마을 청년은 힘이 세다.'고 한다. 그러나 작을 경우에는 '이것도 뜽돌이냐!'고 비아냥거리면서 집어던진다. 이를 본 그 마을 청년들은 그에게 뜽돌을 들어보라고 한다. 그가 뜽돌을 들어올리면 괜찮으나, 들어올리지 못하면 그는 마을 청년들에게 실컷 두들겨 맞고 빌거나, 술을 사서 대접하고서야 그 마을을 빠져나갈 수 있다. 이것은 들돌 들기가 마을 청년들이 신체를 단련하고, 힘을 겨루는 구실을 하였을 뿐만 아니라, 마을과 마을의 젊은이들이 힘을 드러내 보이는 잣대의 역할도 하였음을 말해 준다.

  충남 홍성군 구항면 황곡리 하대 마을에서는 '들돌제'를 지낸다. 이 마을 어귀에는 고려 때 심었다는 큰 정자나무가 있다. 이 정자나무 밑으로 난 길을 따라 마을 쪽으로 10미터쯤 가면 길 왼쪽에 높이 약 1.2미터, 밑 둘레 약 2미터, 위쪽 둘레 약 1미터쯤 되는 '선돌'이 있고, 50미터쯤 더 들어가면 길 왼쪽에 시멘트로 만든 받침대 위에 힘 센 장정이 들어올릴 수 있는 크기의 둥근 돌이 있는데, 이 돌이 '들돌'이다. 이 마을에서는 이 선돌과 들돌 앞에서 음력 2월 초하룻날 새벽 6시에 마을 공동제의를 올린다. 마을의 평안과 풍년 기원에 목적을 둔 이 제의는, 선돌은 마을을 지켜주는 남성신, 들돌은 여성신을 상징한다는 의식에서 나온 것이다.

  2월 초하룻날 새벽에 마을 사람들이 마을 회관 앞에 용대기를 세운 뒤에 풍물을 치고 한 바탕 논 뒤, 용대기 앞에 흰무리떡과 삼색실과와 포를 놓고 술잔을 올린 뒤에 제관이 재배한다. 그 다음에 용대기를 앞세우고 풍물을 울리며 선돌 앞으로 가서 흰무리떡과 삼색실과와 포를 놓고 술잔을 올린 뒤에 제관이 재배한다. 다시 들돌 앞으로 와서 흰무리떡과 삼색실과와 포를 놓고 술잔을 올린 뒤에 제관이 재배한다. 그 뒤에 그 앞에서 간단히 음복을 하는데, 날씨가 추운 때이므로 가까이에 있는 마을회관으로 와서 음복하기도 한다. 제관은 한복 두루마기를 입으며, 축문이나 소지(燒紙)는 하지 않는다.

  전에는 정월 대보름날 4∼5미터쯤 되는 나무에 짚을 묶어 세우고, 세 가운데 말뚝을 박고 동아줄로 매어 볏가릿대를 세운 뒤에 풍물패가 집집마다 다니며 걸립을 하여 제의 비용을 마련하였으나, 요즈음은 볏가릿대 세우는 일도, 걸립하는 일도 하지 않는다. 이 마을은 모두 40여 호가 되는데, 들돌제에 참여하는 사람은 20명 내외이다. 마을 사람들은 오래 전부터 들돌제를 지내왔는데, 그래서 그런지 마을에 큰 일 없이 잘 지내고 있다고 한다. 전에는 아침밥을 먹고 나서 들돌제를 지냈는데, 일제 말기에 이를 못하게 하였으므로 몰래 하느라고 새벽 미명에 조용히 지냈다고 한다. 그 때부터 지금까지 새벽에 제를 지낸다고 한다.

  들돌제의 대상신인 선돌과 들돌에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해 온다.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에 의하면, 선돌과 들돌은 수백 년 전부터 있었다고 한다. 그 유래를 살펴보면 선돌의 경우, 이 마을에 아주 힘센 장사(壯士)가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그 장사가 전염병에 걸려 오랫동안 앓다가 완쾌한 후 자기의 힘을 시험해 보기 위해 나무로 만든 신을 신고 이 돌을 들다가 댕기가 발에 밟혀 뒤로 넘어지는 바람에 이 돌에 눌려 죽었다고 한다. 그 이후 죽은 장사의 영혼을 위로하고자 선돌을 위했다고 한다. 

  들돌은 모양이 둥글고 무게가 150근 정도 나가는 돌로서, 옛날에 오봉 마을 청년들과 하대 마을 청년들이 서로 돌 들기 놀이를 할 때, 서로 돌을 들어다가 자기 마을 앞으로 갖다 놓아야 질병이 없어진다 해서 서로 빼앗고 빼앗기는 놀이를 하였다. 그런데 하대 마을의 한 힘센 장사가 그 돌을 들어다가 하대 마을에 갖다 놓았다. 그 이후 오봉 마을에서는 이 돌을 들을 만한 장사가 나타나지 않아 지금껏 하대 마을에 있다고 한다. 그 이후 하대에서는 이 선돌과 들돌을 매년 음력 2월 1일 아침에 성의를 다하여 위하고 있다.

  위 이야기는 하대 마을 들돌이 마을 공동제의의 대상신이 된 유래를 설명하고 있어 흥미롭다. 하대 마을의 들돌 역시 전에는 젊은이들이 성년식에 쓰던 들돌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 후 이 돌이 질병을 물리치는 기능을 지니고 있다고 믿게 되어 두 마을의 장정들이 그 돌을 자기 마을 앞으로 가져다 놓곤 하였을 것이다. 마을 사람들이 모두 이 돌을 들 수 있을 정도로 건강하다면, 질병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될 것이니, 이 돌이 질병을 물리치는 주술적인 힘을 지니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었을 것이다.  옛사람들은 오래도록 변하지 않아 영속성을 지니고 있고, 특이한 모양이어서 특이성을 지닌 돌을 신성시하였다. 황곡리의 들돌은 암석을 신성시하는 암석 신앙과 질병을 물리칠 수 있다는 주술적 심성에 의해 신앙의 대상이 되었다.     

  마을 젊은이들이 신체를 단련하고, 힘을 겨루는 구실을 하였을 뿐만 아니라, 마을과 마을의 젊은이들이 힘을 드러내 보이며 화합을 강조하던 들돌 들기 풍습은 사라졌다. 이를 다시 돌이킬 수는 없지만, 들돌놀이나 들돌제가 행해지는 마을이 있다는 것은 다행스런 일이다. 이를 통해 그 의미를 되새겨 보는 것은 뜻 있는 일이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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