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속놀이는 대체로 특정 시기에 집중적으로 벌어지는 계절성을 지니며, 특정 지역을 바탕으로 전승되고 있다. 이것은 민속놀이가 전승 지역의 역사와 문화를 배경으로 발생하고, 전승하기 때문이다.

  이 글에서는 안동 지방에서 행해지는 놋다리밟기, 경남 창녕군 영산 지방에서 전승되는 쇠머리대기, 전라남도 남해안 일대와 도서 지방에 널리 분포 전승되는 강강술래를 간단히 살펴보려고 한다.   

                  안동놋다리밟기

  경북 안동 지방에서 전승되고 있는 놋다리밟기는 대보름날 저녁에서부터 수일 간 수백 명의 여성들이 모여 노래를 부르며 논다. 그 기원은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신라의 답교놀이가 변형, 발전했다는 가설이 설득력이 있다. 기록으로는 《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의 상원(上元) 조에 처음 보인다.
   
      유래

  이 놀이와 관련된 두 가지 전설이 안동 지방에 전승하고 있어 그 유래를 짐작하게 한다.

  첫째, 공민왕의 소야천 나루 건너기와 관련된 전설이다. 고려말 공민왕이 홍건적의 난을 피해 왕후와 공주를 데리고 조령(鳥嶺)을 넘어 안동 가까이에 이르러 소야천 나루를 건너게 되었다. 이 소식을 들은 부녀자들이 달려와 허리를 굽혀 왕후와 공주가 등을 밟고 건너게 해 주었다. 이를 계기로 놋다리밟기가 시작되었다고 한다.

  둘째, 공민왕 위무(慰撫) 전설이다. 공민왕이 공주를 데리고 홍건적의 난을 피해 안동에 머물렀는데, 난이 평정되기를 기다리는 동안 백성들이 왕 일행을 위무하기 위해 이 놀이를 놀았다 한다.

  이 놀이와 유사한 놀이로서, 의성의 '기와밟기'와 군위 지방의 '지애밟기' 및 영양의 '등다리밟기'가 있다. 명칭이 다소 다르긴 해도, 놀이 형태는 아주 비슷하다.

      놀이의 특색

  첫째, 이 놀이는 신앙성이 없고 승부를 목적으로 하지 않는다.
  둘째, 여성들만의 놀이이기 때문에 남성들의 참여를 일체 허용하지 않는다.
  셋째, 노래가 수반되기 때문에 부드럽고 정서적인 놀이라 할 수 있다.
  넷째, 다른 지방의 놋다리와는 달리 원형(圓形)의 '웅굴놋다리'로 가장행렬을 할 때 둥글게 원을 지어 거리를 누빈다.
  다섯째, 안동의 차전놀이처럼 동부 서부로 나누어 '꼬께싸움'을 벌인다.

        놀이의 구성과 내용

  이 놀이는 크게 구분하여 '둥둥데미-실감기-놋다리-꼬께싸움'으로 나눌 수 있으나, 놀이의 주된 내용은 세 번째의 '놋다리'이다.

1) 둥둥데미

  동서부의 부녀자가 삼삼오오 짝을 지어 노래를 제창하며 넓은 벌판에 도달하면 놀이가 시작된다. 각기 손을 잡고 원형으로 앉으면 선두부터 서서히 일어나 사람과 사람 사이의 잡은 손을 타넘고 '둥둥데미 노래'를 부른다. 노랫말은 다음과 같다.

어화유리 둥둥데미/ 둥둥데미 어화유리
저 달 봤나 난도 봤다/저 달 봤나 난도 봤다
저 달 봤나 난도 봤다(이하 생략)

2) 실감기

  둥둥데미 노래가 끝나면 와문(渦紋)처럼 겹겹이 원을 짓고 실감기 노래에 맞추어 다시 원을 푼다.

  집실로 감아라
  당대실로 감아라(이하 생략)

3) 놋다리

  놋다리에서는 놀이꾼들이 큰 원을 이루고 구경꾼들이 원의 주위에 무리 지어 모이면 놀이가 시작된다. 놀이꾼들은 머리를 숙이고 허리를 굽힌다. 그러면 어린 공주가 양곁에 선 시녀의 손을 잡고 원형의 사람다리[人橋] 위를 한 바퀴 돈다. 이 때 구경꾼들과 놀이꾼들은 놋다리 노래를 제창한다.

  어느 윤에 놋다리로 청계산에 놋다릴세
  이 터전이 뉘 터이로 나라임의 옥터일세
  이 기와가 뉘 기와로 나라임의 옥기왈세
  그 어디서 손이 왔노 경상도서 손이 왔네
  무슨 꼭께 싸여 왔노 어깨꼭께 싸여 왔네
  멧대간을 밟아 왔노 쉰대간을 밟아 왔네(이하 생략)

4) 꼬께싸움

  놋다리가 끝나면 꼬께싸움이 벌어진다. 꼬께란 안동 지방의 방언으로 두 사람이 서로 손목을 잡아 우물 정(井) 자 모양으로 만드는 것을 말한다. 이 꼬께 위에 공주를 태운 다음 동서부의 공주가 싸운다. 격렬한 싸움으로 한쪽 공주가 땅에 떨어질 때까지 싸운다. 승리한 쪽은 행렬을 정비하여 의기양양하게 돌아가고, 진 쪽은 길을 뺏기지 않으려고 길을 막는다.

                              쇠머리대기

  경남 창녕군 영산 지방에서 전승되는 민속놀이로, 중요무형문화재 제25호로 지정되었다. 목우전(木牛戰)', '목우희(木牛戱)'나 '무소 싸음'으로 불리며, '목우 붙인다', '쇠머리 댄다'고도 한다. 본디 정월 대보름에 행해졌으나, 현재는 3월 1일 거행하는 3·1문화재의 한 레퍼토리로 놀고 있다.

      유래

  쇠머리대기의 유래는 영산 지방의 지세와 관련된 풍수신앙으로 설명한다. 옛날 옛 고을 동헌의 자리가 축좌(丑坐)이기 때문에 나무쇠싸움이 시작되었다고 하는 것과 또 다른 하나는 부근 영취산과 함박산의 형세가 영산읍을 사이에 두고 두 마리의 소가 서로 마주 보고 있는 형상이기 때문에 두 산의 산살(山煞)을 풀어주기 위해 나무 소를 만들어 싸움을 시켰다는 것이다.

  또 안동 지방의 동채싸움과 비슷한 점이 많은 것으로 보아 쇠머리대기와 차전놀이가 상호간에 영향을 주고받아 형성되었을 것이라는 추측이 가능하다. 그러나 쇠머리대기의 특징은 소싸움을 모방하고 있다는 점에서 농우(農牛)의 중요성과 신성(神性)을 되새기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다. 이를테면 경기 지방의 소먹이놀이와 견줄 수 있는 민속놀이다.

    놀이의 구성

편제

  쇠머리대기는 두 패로 갈리고 이것을 각각 동부, 서부로 부른다. 동서의 구별은 지난날의 성을 중심으로 해서 성내에 위치한 성내리와 교리가 동부가 되고, 성밖에 있는 서리와 동리가 서부가 된다.
  다음에는 양군에서 각기 대장, 중장, 소장의 장군을 선출하여 지휘하게 한다. 장군들은 읍민의 중의에 따라 신망 있는 사람들로 구성된다.

전법

  싸움 방법은 단조롭다고 할만큼 간단하고 소박하다. 청장년들이 어깨에 맨 나무 쇠를 어르고 다니다가 세차게 맞부딪친다. 그러다가 상대방의 나무 쇠를 올라타 아래쪽에 깔리게 하거나 밀어내는 쪽이 이긴다.

놀이의 내용

  마산 등지에서 온 10여 개의 풍물패가 먼저 놀이 분위기를 돋운다. 양군이 진군할 때는 맨 앞쪽에 마을 수호신의 상징인 서낭대를 앞세우고, 그 뒤를 이어 총사령기를 비롯하여 대장기·중장기·소장기·동방청제장군기·서부호기·동부호기·필승기·농기 등이 늘어선다. 그 외에도 마을의 서낭대·영기 등 백여 기의 깃발이 늘어선다.

  본 놀이인 쇠머리대기 싸움에 앞서 진잡이 놀이가 벌어진다. 진잡이는 양편의 장군들(모두 6명)이 말을 타고 상대편의 진을 돌파하고 돌아오는 것으로, 과감한 돌파와 저지로 많은 부상자를 내기도 한다.

  앞놀이가 끝나는 저녁 무렵에 본놀이인 쇠머리대기가 시작된다. 수많은 장정들이 나무쇠를 어깨에 둘러메고 나무쇠 위에는 장군 셋이 올라탄다. 이 때 대장·중장·소장의 장군들은 구 군복을 입고 칼을 들어 지휘한다. 풍물패의 풍물 소리가 울리고 양군은 '오왜 증산이야' 노래를 소리 높여 외치면서 접근한다. 나무쇠를 서로 부딪히면서 상대편의 나무쇠 위에 올려놓으려고 일대 공방을 벌인다. 치열한 접전 끝에 한쪽이 뒤로 물러나거나 밑으로 깔리게 되면 승부가 판가름난다.

                        강강술래

  강강술래는 전라남도 남해안 일대와 도서 지방에 널리 분포·전승되어 오는 집단놀이다. 중요무형문화재 제8호로 지정되어 있다. 주로 8월 한가위에 행해지나, 지역에 따라서 정월 대보름에 행해지기도 한다.

      유래

  강강술래는 이순신 장군의 전술과 결부된 설이 있으나, 확실한 유래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여러 가지 정황을 종합해 보면, 고대 농경 시대의 파종 및 수확 때의 공동 축제에서 노래 부르며 춤을 추던 놀이 형태가 계속 이어져 내려오다가 임진왜란 때 이순신 장군의 전술로 이용되어 그 이름을 널리 전하게 된 것으로 추측된다.

  이러한 강강술래는 우리 나라 여성 놀이의 대표적인 놀이이며, 여성의 정서가 넘친 율동적인 놀이로, 한가위 밝은 달 아래 펼치는 원무(圓舞)는 약동하는 생명력을 표상한다.

놀이의 구성

  강강술래는 여러 가지 놀이로 구성되어 있으나, 대체로 다음과 같은 14가지 놀이로 진행된다.

  1) 늦은 강강술래      2) 중강강술래     3) 잦은 강강술래          4) 남생아 놀아라     5) 고사리 꺾자     6) 청어 엮자          
    7) 청어풀기            8) 지와 밟기        9) 덕설몰이               10) 덕석풀기          11) 쥔새끼놀이    12) 문열어라               13) 가마등              14) 도굿대당기기


  이 외에도 수건 찾기, 품고동, 봉사놀이 등이 추가될 경우도 있으며, 또 놀이 분위기와 놀이자의 뜻에 따라 새로운 레퍼토리를 추가하기도 있다.

      놀이의 내용

1) 늦은 강강술래

  한가위 둥근 달이 동천에 떠오르면 넓은 들에 여성들이 모여 목청 좋은 선소리꾼이 느릿한 진양조로 매김 소리를 하면 다른 여성들은 손에 손을 잡고 원무를 추면서 뒷소리로 '강강술래' 하고 받는다. 강강술래 중 가장 아름답고 여성적인 멋이 드러나는 부분이다.

2) 중강강술래

  선소리꾼이 흥겨운 중중모리가락으로 매기면 이에 맞추어 동작이 조금 빨라지며 어깨놀림이 가볍게 시작된다.

3) 잦은 강강술래

  선소리꾼의 자진모리가락에 맞추어 양팔을 쭉 뻗치고 뛰며 돈다. 원이 커지고 발놀림이 빨라져 흥이 절정에 오른다.

4) 남생아 놀아라

  잦은 강강술래를 하다가 지치면 선소리꾼이 중중모리가락의 '남생아 놀아라'를 부른다. 다른 사람들은 이를 되받으며 발걸음을 늦추고 놀이꾼 중 재주가 있는 사람이 원 안으로 들어가 갖가지 춤을 춘다.

5) 고사리 꺾자

  선소리꾼이 '고사리 대사리 꺾자'를 부르면 다른 사람들은 '유자콩콩 재미나 넘자'로 받아 부르면서 원무 형태 그대로 앉아 어깨만 들썩인다. 그러다 선두가 일어나 왼쪽으로 돌아 다음 사람과 맞잡은 팔 위를 넘으며 다음 사람도 선두를 따라 꺾어나간다.

6) 청어 엮자

  '고사리 꺾자'가 끝날 때 선소리꾼이 '청청 청어 영자 위도 군산 청어영자'를 매긴다. 놀이꾼들은 이 소리를 되받으며 멈춰 선 채 어깨만 들썩인다. 그러면 선두가 둘째 사람과 셋째 사람의 맞은 팔 밑으로 꿰어가서 고사리 꺾자와 같이 차례로 꿰어 가는데, 이 때 오른손은 왼쪽 어깨 위에 감기게 되어 마치 청어를 엮은 모습이 비슷하게 된다.

7) 청어풀기

  청어 엮자가 끝나면 선두가 엮을 때와는 반대 방향으로 꿰어간다. 그러면 어깨가 풀려 원대형으로 돌아간다.

8) 지와 밟기

  선소리꾼이 '어디골 지완가'를 부르면 놀이꾼들은 '장자골 지와세'를 부르며 일렬로 늘어선다. 선소리꾼이 '봅자 봅자 지와를 봅자'를 선창하면 일제히 허리를 굽혀 뒷사람이 앞사람의 어깨를 밟고 지나간다. 이 때 양쪽에서 두 사람이 손을 잡아준다. 어깨를 밟고 지나간 사람은 다시 엎드려 다른 사람이 지나가도록 한다.

  9) 덕설몰이

  선소리꾼이 중중모리가락으로 '몰자 몰자 덕석을 몰자'를 선창하면 놀이꾼들은 모두 일어선다. 선두는 왼쪽으로 원을 그리며 돌면 다른 놀이꾼들은 차례로 멍석을 말듯 돌돌 말아간다.

10) 덕석풀기

  다시 선소리꾼이 '풀자 풀자 덕석을 풀자'를 선창하면, 다른 놀이꾼들은 이를 되받으며 덕설몰이의 반대로 풀어간다.

11) 쥔새끼놀이

  선소리꾼이 '쥔쥔새끼 찔룩찔룩 가사리 고부야'를 노래하면 놀이꾼들은 이를 되받으며 일렬로 선다. 이 때 선소리꾼이 '쥔새끼 잡세-'를 외치면 일제히 앞사람의 허리를 잡는다. 선두는 재빨리 되돌아 맨 끝의 사람을 잡으려 쫓는다. 힘들여 끝 사람을 잡으면 잡힌 사람을 맨 앞에 세우고, 잡는 데 공헌한 선두를 목마 태워 행진한다.

12) 문열어라

  선소리꾼이 '문지기 문지기 문 열어 주소'를 선창하면, 맨 앞사람 둘이 마주 보며 손을 맞잡아 들고 문을 만든다. 이 문을 놀이꾼들이 허리를 잡은 채 노래하며 꿰어간다.

13) 가마등

  두 사람이 마주 서서 손목을 잡아 우물 정(井)자 형을 만들면 이 위에 한 사람이 타고 앉아 마당을 돌아다닌다. 편을 갈라 일정한 거리까지 갔다오는 경주를 벌이기도 한다.

14) 도굿대당기기

  놀이꾼을 두 편을 갈라 중앙에 도굿대(절구공이)를 옆으로 놓고 양편에서 힘센 사람이 나와 양끝을 잡는다. 양편의 놀이꾼들은 절구공이를 중심으로 종대로 늘어서서 앞사람의 허리를 잡고 맨 앞사람은 절구공이에 발을 버티고 양손을 잡는다. 서로 손이 잡히면 끌어당기기 시작하는데, 만약 앞사람의 손이 빠져 엉덩방아를 찧으면 진다.





  민속놀이는 우리 민족의 공동생활 속에서 형성되어 생활을 통하여 전승되어 오는 놀이이다. 민속놀이에는 싸움을 뜻하는 경쟁성(競爭性), 흥을 뜻하는 유희성(遊戱性), 즐김을 나타내는 오락성(娛樂性),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예술성(藝術性) 등이 복합적으로 녹아 있다.

  사람들은 누구나 유희와 놀이를 좋아하는데, 그것은 재미있고, 즐겁기 때문이다. 놀이의 즐거움을 통하여 생활 속에서 마주치는 여러 가지 정신적 고통을 잊어버리고, 생업에 종사하는 동안 지쳐 있던 육체적 피로를 풀어내기도 한다. 놀이는 자발적으로 참여하는 무목적(無目的)의 활동으로, 즐거움과 흥겨움을 동반하는 가장 자유롭고 해방된 인간 활동이다. 육체적 정신적 활동을 전제로 하는 민속놀이를 통하여 한국인은 정서적 공감과 정신적 만족감을 얻어 왔다.

  이 글에서는 한국의 민속놀이 중 지금도 널리 행하여지고 있는 윷놀이, 널뛰기, 연날리기, 그네뛰기, 줄다리기 등에 대하여 간단히 알아보려고 한다. 

                        윷놀이

  윷놀이는 정월의 대표적인 놀이로, 전국적으로 분포되어 있다. 이 놀이는 신라 이전부터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와 비슷한 것으로 중국에는 저포(樗蒲)가 있다.    윷놀이의 기원에 관하여는 확실하지는 않지만, 몇 가지 설이 전해 온다.

  ① 부여 시대에 다섯 가지 가축을 다섯 마을에 나누어주고, 그 가축들을 경쟁적으로 번식시킬 목적에서 비롯되었다. 거기에서 연유하여 도는 돼지[豚], 개는 개[犬], 걸은 양(羊), 윷은 소[牛], 모는 말[馬]에 비유하기도 한다.
  ② 삼국 시대에 생겼다고 하는 민간 전설이 있다. 그래서 신라 시대에 궁녀들이 새해 초에 즐기던 놀이라고 하기도 하고, 백제의 관직명인 저가(猪加), 우가(牛加), 마가(馬加), 대사(大使)에서 유래된 것이라고 하기도 한다. 또 고구려의 오가(五加, 동·서·남·북·중앙)에서 나온 것이라고 하기도 한다.
  ③옛날 어느 장수가 적과 대진 중 적군의 야습을 경계하여 진중의 병사들의 잠을 막기 위하여 이 놀이를 창안하였다고 한다.

  윷판의 유래에 관하여는 상대(上代) 오가(五加)의 출진도(出陣圖)에서 나왔다는 설, 부여의 관직을 모의한 사출도(四出圖)에서 나왔다는 설, 조선 선조 때 김문표(金文豹, 1568∼1608)가 말한 사도설(柶圖說) 등이 있다. 사도설에서는 윷을 사(柶)라 하고, 윷판은 천체를 상징한다고 한다. 그에 따르면, 중앙에 있는 것은 북극성이고, 둘레에 있는 것은 28숙(宿)의 별들이라고 한다. 그리고 네 행로(行路)는 동지(冬至), 하지(夏至), 춘분(春分), 추분(秋分)에 비유한다. 일본에는 한국의 윷놀이와 비슷한 '우쯔무끼사이(府向采)'가 있는데, 이것은 8세기경에 한국에서 건너가 15세기까지 전승되다가 최근에는 쇠퇴하였다.

  윷에는 장작윷, 밤윷 등이 있다. 장작윷은 박달나무, 통싸리나무, 밤나무 등을 길이 15∼20 센티미터, 지름 3∼5 센티미터 크기로 만든 것인데, 서울을 비롯한 중부 지방에 분포되어 있었다. 밤윷은 밤알 크기의 나무 조각 4개를 조그만 밥공기 등에 담아 내젓다가 바닥에 내던져 노는 것인데, 주로 남부 지방에 분포되었었다. 북부 지방에서는 콩으로 만든 콩윷, 팥으로 만든 팥윷을 놀기도 하였다.

  놀이 방법으로는 말판쓰기, 덕대놀이, 모다먹기 등이 있다. 윷을 세 번 던져 각기 나온 결과를 그에 따른 점사(占辭)로 풀어 윷점을 치기도 하였다. 윷점에 관하여는 유득공의 {경도잡지(京都雜誌)}와 홍석모의 {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는데, 예를 들면 다음과 같다.

  도 도 도 : 아견자모(兒見慈母, 어린아이가 자애스런 어머니를 만나다.)
  도 도 개 : 서입창중(鼠入倉中, 쥐가 곳간에 들어가다.)
  도 도 걸 : 혼야득촉(昏夜得燭, 어둔 밤에 촛불을 얻다.)
  도 도 모(윷) : 창승우춘(蒼蠅遇春, 쇠파리가 봄을 만나다.)

  위에서 보는 것처럼 윷점의 점사는 긍정적인 내용이 많다. 이것은 정초에 재미로 하는 윷점이 이를 행하는 사람에게 한 해 동안 희망을 갖고 노력하며 살도록 권장하는 기능을 하였음을 말해 준다. 

  요즈음에는 각 가정에서 정초에 윷놀이가 많이 행해지고 있고, 마을이나 기관, 친목 단체가 주관하는 윷놀이 대회가 성행한다.

                  널뛰기

  널뛰기는 음력 정초, 5월 단오, 8월 한가위 등에 주로 부녀자들 사이에서 행하여지던 놀이이다. 이것은 고려 이전부터 전해 온 듯하다. 조선 시대 유득공이 쓴 {경도잡지(京都雜誌)}에는 널뛰기를 "항간의 부녀자들이 긴 널조각을 짚단 위에 가로로 놓고, 양쪽 끝에 갈라서서 굴러 뛰기를 하는데, 몇 자 높이까지 올라간다. 그 때 패물 울리는 소리가 쟁쟁하다. 지쳐 떨어져 나가는 것을 낙으로 삼는다. 이것을 '초판희(超板戱)'라고 한다."고 적어 놓았다.   

  일본 오끼나와(琉球)에는 널뛰기와 비슷한 '板舞'가 행해지는데, 이것은 우리 나라에서 전해진 것으로 추정된다. 긴 널판을 상하로 움직이는 유희는 지구상에 한국의 널뛰기와 일본의 판무밖에는 없다. 널뛰기를 시이소우와 관련시키면 세계성을 띤 놀이라고 할 수도 있다.

  널뛰기는 그네뛰기와 함께 몸을 활달하게 움직이는 놀이로, 조선 시대 여인들에게 활달한 자기 발견의 계기를 제공하였다. 널뛰기의 유래에 관하여는 다음과 같은 속설(俗說)이 전해 온다.

  ① 죄를 짓고 옥 속에 갇힌 남편의 얼굴을 보고 싶은 죄수의 아내가 다른 죄수의 아내와 공모하여 널을 뛰면서 담장너머로 남편의 얼굴을 보았다.
  ② 부녀자들이 널뛰기를 하면서 담 밖의 세상 풍경과 남자의 모습을 보았다.
  ③ 처녀 시절에 널뛰기를 하지 않으면 시집가서 아기를 낳지 못한다.
  ④ 정초에 널뛰기를 하면 일 년 중 가시에 찔리지 않는다(경기도 용인).

  위에 적은 네 가지 중 어느 것이 타당성이 높고, 어느 것이 타당성이 낮은지는 말하기 어렵다. 이들 중에는 운동이 부족한 부녀자들의 건강과 관련된 것도 있어 흥미롭다.

              연날리기

  연날리기는 우리 나라에서 겨울철(농한기) 북서풍이 불 때에 행해지는 대표적인 놀이이다. 이것은 세계 곳곳에서, 예로부터, 성별, 신분의 구별 없이 즐겨 오는 놀이이다.

  연은 기원 전 400년대에 그리스의 알타스(Altas)가 처음 만들었다고 한다. 중국에서는 기원 전 200년경 한신(韓信)이 적의 형편을 탐지(探知)하기 위해 연을 사용하였다고 한다. 또 초(楚) 나라 항우(項羽)와 싸울 때 소가죽으로 만든 커다란 연에 바구니를 매달고, 그 안에 피리 잘 부는 군사를 태워 이것을 초 나라 군사의 머리 위에 뜨게 하고, 초가(楚歌)를 불게 하여 초나라 군사의 전의(戰意)를 상실하게 하였다 한다.

  일본에서는 전쟁 때 연을 이용하였고, 집을 지을 때 벽돌 등을 연에 매달아 올렸다고 한다. 태국에서는 성안의 군사를 정벌할 때 무서운 동물 모양의 연을 만들어 띄워 성안의 군사를 놀라게 하여 사기를 꺾은 뒤에 성을 함락하였다고 한다.

  우리 나라의 연에 관한 기록은 {삼국사기(三國史記)} 열전(列傳) 김유신전(金庾信傳)에 보인다. 서기 647년에 진덕 여왕이 선덕 왕의 뒤를 이어 즉위하자, 대신 비담(毗曇)과 염종(廉宗)이 여왕으로서는 나라를 제대로 다스릴 수 없다고 하며 반란을 일으켰다. 반란군은 명활성(明活城)에 진을 치고, 왕의 군사는 월성(月城)에 진을 치고 10여 일 동안 공방전(攻防戰)을 벌였으나, 승패가 나지 아니 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 한밤중에 큰 별똥이 월성 안에 떨어졌다. 비담 등이 별이 떨어지는 곳에 흉사(凶事)가 있을 것이라고 하니, 군사들이 크게 환호하였다. 이 소식을 들은 왕은 대경실색(大驚失色)하였다. 이 때 김유신 장군이 왕을 안심시킨 후에 허수아비를 만들어 큰 연에 매달고 불을 붙여 띄워 마치 별이 하늘로 솟아오르는 것 같이 하였다. 그리고는 "떨어졌던 별이 어제 밤에 다시 하늘로 올라갔다."고 소문을 내고, 별이 떨어진 곳에 가서 백마를 잡아 제사를 지낸 후 군사를 이끌고 나가 싸워 난을 평정하였다고 한다.

  연을 전쟁에 이용한 것은 최영 장군과 이순신 장군의 경우에도 나타난다. 최영 장군은 탐라국의 목호(牧胡, 목축하는 몽고인)의 난을 평정할 때(1374), 군사를 연에 매달아 병선(兵船)에서 절벽 위로 상륙시켰다 한다. 또 불덩이를 매단 연을 성안으로 날려보내어 불타게 하고, 성을 공격하였다고 한다. 이순신 장군은 임진왜란 때 섬과 육지를 연락하는 통신 수단으로, 또는 작전 지시의 방편으로 연을 이용하였다고 한다.       

  조선 시대에는 연날리기가 민간에 널리 보급되어 성행하였다. 특히 영조는 연날리기를 즐겨 구경하고, 장려하였다고 한다. 그래서 음력 정월 보름이면 서울 광교와 수표교에서 연날리기 전국 대회가 벌어지곤 하였다고 한다.

  한국의 연은 방패연, 가오리연을 비롯하여 여러 가지 형태의 창작 연이 있다.

  연날리기는 높이 띄우기, 손놀림에 따라 연을 왼쪽 또는 오른쪽으로 돌리기 급전(急轉) 급강하(急降下) 급상승(急上昇) 등 다양한 공중 곡예(曲藝)를 하는 재주 부리기, 연실의 질기고 약함 연의 조종 기술에 따라 연줄을 끊어 먹는 연싸움이 있다. 연 싸움에서 진 편은 이긴 편을 위하여 멀고 먼 하늘로 좋은 소식을 전하러 연을 날려보낸 것으로 여겨, 이긴 편이 진 편에게 한턱을 냈다. 얼레 하나에 얼마나 많은 연을 매달아 띄울 수 있는가를 겨루기도 하였다.

  민간에는 겨울 동안 날리던 연을 음력 정월 보름에 연 바탕에 액을 멀리 보내고 복을 맞이한다는 뜻의 '송액영복(送厄迎福)'의 축원문을 쓰고, 연 날리는 사람의 생년월일과 이름을 써서 날려보내면 모든 액과 나쁜 운수가 일소된다고 믿는 풍습이 있었다. 이것은 복된 새해를 맞으려는 소망을 표현한 것이라 하겠다.

  연날리기가 많은 사람들이 즐겨하는 놀이였던만큼 연과 관련된 이야기도 많이 전해 온다. 그 중 재미있는 것 두 가지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조선 숙종 때 두 대감이 정월 보름이면 '연 끊어 먹기'를 하였다. 어느 해 정월 보름에 두 대감이 연날리기를 하는데, 돌연 연 하나가 와서 두 대감의 연줄을 끊었다. 두 대감이 알아보니 10세 소년이었는데, 그 소년은 비범한 아이였다. 그 후 두 대감은 정월 보름이면 소년과 함께 연 끊어 먹기를 하곤 하였다. 소년이 자라 장원급제하고, 대감이 되니, 해마다 세 대감이 연 끊어 먹기를 하였다고 한다.

  한 소년이 연날리기를 하다가 연줄이 끊어져 날아갔다. 그가 정신없이 연을 따라어느 마을로 가니, 연이 어느 집 옆에 있는 대밭의 대나무에 걸렸다. 그가 대밭 가까이 가니, 대밭에서 어떤 남녀가 이야기하고 있었다. 가만히 들어보니, 여인이 혼인날이 며칠 안 남았으니 어찌하면 좋으냐고 하니, 남자가 첫날밤에 신방에 든 신랑을 죽이고 함께 도망가자고 하였다. 그는 형의 혼인날이 그 여자의 혼인날과 같은 것을 알고 깜짝 놀랐다. 그는 할아버지와 아버지께 떼를 써서 형이 장가갈 때 후행(後行)으로 따라갔다. 그는 신방 마루 밑에 숨어 있다가 첫날밤에 신랑을 죽이러 온 중을 보고, 소리쳐서 형을 깨워 구해 냈다고 한다. 연과 관련된 이 이야기는 '신방 엿보기' 풍습이 생긴 유래담으로 꼽히기도 한다.

            그네뛰기

  그네뛰기는 씨름과 더불어 음력 5월 단오에 행해지던 대표적인 민속놀이이다. 북방 유목민에서 연유된 것으로 추정되는 이 놀이는 중국 춘추 시대의 제(濟) 나라를 거쳐 한(漢) 나라, 당(唐) 나라 이후 궁정(宮廷)과 민가에서 성행하였다.

  우리 나라의 경우, 그네뛰기에 관한 기록은 {고려사(高麗史)}에 처음 나타나는데, 고려 시대에 왕궁을 중심으로 한 귀족 사회에서 성행하였다고 한다. 고려 후기에 신흥 사대부들이 지은 경기체가 [한림별곡(翰林別曲)]에도 그네뛰기에 관한 것이 나온다. 그네뛰기는 조선 시대에 일반에게 보급되면서 단오놀이로 자리를 굳혔다고 한다. 조선 시대에는 상류층의 여인들에게는 억제되었다.

  그네의 명칭으로는 '그네', '근데', '근듸', '군듸', '군의', '그리', '구리' 등이 있다. {악장가사(樂章歌詞)}의 [한림별곡]에는 '글위', {역어유해(譯語類解)}에는 '그릐', {동문유해(東文類解)}에는 '그리'로 표기되어 있다. 어원은 '근의'인데, 이 말은 '끈의 희(戱)'에서 온 말이 아닐까 추정하기도 한다.

  그네는 온 몸의 탄력을 이용해야 하며, 팔과 다리의 힘이 있어야 한다. 그래서 널뛰기와 함께 과거 여성 체육의 쌍벽을 이루었고, 맵시 있는 여성의 놀이로 꼽혔다.

  그네와 관련되어 전해 오는 말에는 '그네를 뛰면 발에 무좀이 생기지 않는다.', '그네를 뛰면 여름에 모기에 물리지 않는다.', '그네를 뛰면 더위를 타지 않는다.' 등이 있다.

              줄다리기

  줄다리기는 예로부터 널리 행하여졌는데, 기록상으로는 {동국여지승람(東國與地勝覽)}에 '제주도에서 조리희(照里戱)가 행해졌다.'는 기록이 맨 처음이다. 중부 이남 지방에서 정월 대보름, 단오일, 팔월 한가위 등에 주로 행하여졌으나, 정월 보름이 가장 많았다. 지금까지 줄다리기가 큰 행사로 거행되는 마을은 경북 의성, 경남 영산, 전남 장흥, 충남 당진 등인데, 이들 지역에서는 그 지역에서 편리한 시기에 줄다리기를 한다.   

  줄다리기는 동남아시아 일대, 주로 해안과 평야 지대에 널리 분포되어 있는데, 농경(農耕)과 어로(漁撈)를 주로 하는 생활권에 많았다.

  줄다리기에 사용하는 줄은 짚, 또는 짚과 칡을 섞어 만든다. 줄다리기는 암수줄다리기와 외줄다리기가 있다. 암수줄다리기는 암줄과 수줄을 연결하여 당기는 것인데,  암줄과 수줄을 연결할 때에는 비녀목을 사용한다. 마을의 동부와 서부, 또는 남과 북, 내의 이쪽과 저쪽이 한 편이 되어 당기는데, 남성적인 지형의 마을에서 수줄을 만들고, 여성적인 지형의 마을에서 암줄을 만든다. 이 때, 줄다리기에서 이긴 마을은 풍년이 들고, 진 마을은 흉년이 든다고 한다. 그래서 마을 사람들은 줄다리기에서 이기기 위해 온 힘을 기울인다. 줄다리기를 마친 후에 줄은 썰어서 자기 논에 뿌리면 풍년이 든다 하여 썰어서 나누어 갖는다. 

  외줄다리기는 하나의 줄을 만들어 가운데에 표시를 하고, 편을 갈라 한쪽씩 잡고 당긴다. 외줄다리기는 한 마을에서 남자와 여자로 나누어 힘을 겨루는 것이 보통인데, 여자 편이 이겨야 풍년이 든다고 한다. 남녀가 편을 갈라 줄다리기를 하는 마을에서는 늘 여자 편이 이긴다고 하는데, 그것은 아이들과 총각은 여자 편이 되기 때문에 성년 남자들이 있는 힘을 다하여 줄을 당겨도 여자 편을 이길 수 없다고 한다. 줄다리기를 마친 줄은 그 마을의 수호신인 당신(堂神)에게 감아 주는 마을도 있다.       

  줄다리기가 널리 행해지던 정월 대보름날은 새해 들어 보름달을 처음 맞는 날로, 풍요(豊饒) 다산(多産)을 상징한다. 줄다리기할 때의 줄은 용(龍)을, 줄다리기는 용신의 성행위를 상징적으로 표현한다. 그러므로 줄다리기는 풍요와 다산을 상징하는 특별한 날에, 기후를 조절하는 신이한 능력을 지닌 용신(龍神)을 자극하여 풍년이 들게 하려는 제의적 성격을 띤 놀이라 하겠다. 울산, 진주 등지에서는 가물 때 기우제(祈雨祭)에서 줄다리기를 하였다고 하는데, 이것은 물을 주관하는 용신을 자극하여 비를 내리게 하려는 의식에서 나온 것이라 하겠다.







   한국인의 의식 속에는 명당(明堂)에 집을 짓고 살거나, 조상의 묘를 쓰면 자손이 발복(發福)하여 잘 된다는 의식이 있다. 그래서 예로부터 좋은 집터를 골라 집을 짓고 살고, 부모님의 상을 당하면 명당 자리를 찾기 위해 온갖 노력을 기울이곤 하였다. 또 집터나 조상의 묏자리를 보고 길흉(吉凶)을 점쳐서 이사를 하거나 이장(移葬)하기도 하였다. 우리 속담에 '잘 되면 제 복, 못되면 조상의 묏자리 탓'이란 말이 있다. 요즈음 가까운 사람과 주고받는 말 중에 "누구는 조상 묏자리 잘 써서 출세하였고, 누구는 할아버지 묘를 잘못 이장하여 망하였다."고 하기도 한다. 요즈음에도 민간에서는 집터나 묏자리를 보아 그 집에 사는 사람이나 후손의 운명을 알아보는 '풍수점(風水占)'을 치기도 한다.

  풍수지리설은 중국에서 시작되었는데, 신라 말에 우리 나라에 들어와 깊이 연구되고, 민간에 퍼지기 시작하였다. 이것은 고려 시대와 조선 시대를 거치면서 더욱 확산되어 민간에 넓고 깊게 파고들었다. 그래서 풍수 신앙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양택풍수(陽宅風水)와 음택풍수(陰宅風水)

  풍수에는 한 나라의 도읍이나 대궐, 마을이나 집터를 어디에 어떻게 잡느냐에 따라 그 나라나 마을, 집안의 운명이 좌우된다고 믿는 양택풍수와 선대(先代)의 묏자리를 어디에 어떻게 쓰느냐에 따라 그 자손의 운명이 좌우된다고 믿는 음택풍수가 있다.

  고려 태조 왕건의 조부가 송악산 기슭에 집을 지을 때 지나던 중이 조금 옮겨 지으면 그 집에서 왕이 날 것이라고 하는 말을 듣고, 중의 말대로 상량(上樑)까지 한 집을 뜯어 옮겨 지었다. 그 중은 신라 말에 풍수 연구로 이름을 떨친 도선(道詵, 596∼667) 대사였는데, 그 뒤에 그 집에서 고려 태조 왕건이 태어났다고 한다. 고려 중기 묘청은 송악은 지기(地氣)가 쇠하였으니 평양으로 도읍을 옮겨야 나라가 융성할 수 있다면서 평양으로 도읍을 옮길 것을 주장하였다. 조선을 건국한 이성계는 한양으로 천도(遷都)하기 전에 도읍할 자리를 찾아 전국을 돌아다녔다고 한다. 그러다가 한양(漢陽)이 풍수지리로 보아 가장 좋은 곳이라는 무학대사와 정도전의 말을 듣고 한양으로 도읍을 옮겼다고 한다. 무학대사가 도읍지를 한양으로 정하고 경복궁의 자리를 선정하여 건축할 때에도 풍수지리설을 깊이 고려하였다고 한다. 이러한 것은 모두 양택풍수와 관련된 것이다. 요즈음에도 유명 인사 누구의 집은 자리와 향(向)이 좋아 잘 되는데, 누구의 집은 자리와 향이 좋지 않아 궂은 일이 있었다는 이야기가 떠돌고 있다. 이것은 양택풍수에 관한 의식의 현대인의 마음속에도 깊이 자리잡고 있음을 말해 주는 것이다.

  누구네 집은 조상의 묘를 잘 써서 잘 되는데, 누구네 집은 묏자리를 잘못 써서 망했다는 이야기를 어려서부터 많이 들었다. 묏자리에는 자손이 우연히 잘되어 부자도 되고, 출세도 하는 명당자리가 있다고 한다. 명당자리에는 먼 훗날에 자손들이 발복(發福)하는 자리도 있고, 당대에 발복하는 자리도 있으며, 묘를 쓰자마자 금시 발복하는 자리도 있다고 한다. 그런가 하면, 아들이 죽거나 집안이 망하고 손이 끊어지는 나쁜 자리도 있다고 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자손에게 화가 미치는 나쁜 자리를 피하고, 자손이 발복하는 명당자리를 찾기 위해 온갖 노력을 기울였다. 명당을 얻기 위해 스스로 풍수지리를 공부하기도 하고, 풍수에 대해 깊이 연구하여 식견을 갖춘 지관(地官)을 찾기도 하였으며, 선행(善行)을 하면서 기원하기도 하였다.

  이번에 퇴임한 김 대통령은 몇 차례의 대통령 선거에서 낙선의 고배(苦杯)를 마신 뒤에 다시 도전하여 1997년 12월 선거에서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김 대통령이 선거에서 당선한 직후에 '몇 번씩 낙선하던 분이 당선된 것은 선대 묘를 명당(明堂)으로 이장(移葬)하였기 때문'이라는 소문이 퍼졌다. 그러자 많은 사람들이 김 대통령 선대 묘를 둘러보려고 모여들어 새로운 관광 명소가 되었었다고 한다. 지난해에는 한 야당의 총재가 선대 묘를 명당 자리로 옮겼다는 소문이 퍼져 그 곳 역시 한동안 관광객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고 한다. 몇 년 전에는 명당의 지기(地氣)를 억제하기 위해 남의 묘에 쇠붙이를 묻어 두었다가 그 일이 탄로나 벌을 받는 일이 생기기도 하였다. 이것은 한국인의 풍수(風水)에 관한 의식이 요즈음에도 매우 강함을 보여 주는 사례이다.

      풍수설(風水說)의 핵심

  '풍수(風水)'는 바람을 갈무리하고, 물을 얻는다는 뜻의 '장풍득수(藏風得水)'를 줄인 말로, '감여(堪輿)', '지리(地理)', '지술(地術)' 또는 '풍수지리(風水地理)'라고 한다. 생기(生氣)는 바람을 타면 흩어지고, 물을 만나면 멈추게 되기 때문에 바람을 막아 갈무리하고, 물을 얻는 데서 생기가 응결(凝結)한다는 뜻에서 풍수라는 말이 생겼다. 풍수설은 산수(山水)가 신비로운 생기(生氣)를 품고 있으면서 인간 생활의 배후에서 인간의 길흉화복(吉凶禍福)을 좌우한다고 믿고, 거기에 인간과 사령(死靈)을 일치·조화시킴으로써 인간 생활에 복리(福利)를 추구하려는 하나의 민간신앙이다. 그런데 이것은 음양오행설(陰陽五行說)을 원용한 생기론(生氣論)과 감응론(感應論)에 근거를 두고 있다. 

  우주에는 인간과 만물의 운명을 지배하는 생기가 있는데, 생기는 바람·구름·비로 나타나기도 하지만, 그 주류는 땅속에 흘러들어서 대지의 만물을 길러주고 있다. 땅의 생육력(生育力)은 토양 자체가 아니라 땅속을 흐르는 생기의 작용에 의한 것이다. 생기는 사람의 몸속에서 피가 핏줄을 따라 흐르듯이 땅속에서 지맥(地脈)을 따라 흐르고 있는데, 그것에 의해 사물이 생겨난다. 생기가 흐르다가 멈추는 곳이 명당(明堂)인데, 그 위에 집을 지으면 그 집에 사는 사람이 생기에 감응(感應)되어 발복하고, 조상의 뼈를 묻으면 생기가 그 뼈에 작용하여 그 뼈와 관계가 깊은 자손에게 감응하여 자손이 발복한다. 이것이 생기론과 감응론의 요지이다.

  생기론과 감응론을 바탕으로 한 풍수설은 산·물·방위·사람을 구성 요소로 하여 간룡법(看龍法), 장풍법(藏風法), 득수법(得水法), 정혈법(定穴法), 좌향론(坐向論), 형국론(形局論) 등에 구체화되고, 체계화되었다. 

  풍수설의 안목으로 서울의 경복궁과 성문의 이름을 보면, 매우 재미있다. 경복궁은 북한산에서 뻗어 내려온 북악(北岳)을 주산(主山)으로 하여, 낙산을 좌청룡(左靑龍)·인왕산을 우백호(右白虎)·목멱산(남산)을 내안산(內案山)·관악산(冠岳山)을 외안산(外案山)으로 하고, 청계천이 동으로 흘러 한강에 합류하여 유유히 흐르고 있어 풍수설의 요건을 잘 갖췄다고 한다. 그런데 한양에도 풍수적인 결함이 두 가지나 있어서 이를 비보(裨補)하였다. 

  첫째, 동쪽인 진방(震方)의 청룡(靑龍)에 허점이 있다. 서쪽의 백호는 인왕산에서 사직동으로 뻗은 내백호(內白虎)와 안산에서 만리동을 거쳐 효창공원까지 뻗은 외백호(外白虎)의 두 겹으로 되어 있어 장풍(藏風) 하기에 충분하지만, 동쪽의 청룡은 한 겹뿐인데, 그것도 동문 근처에서 끊어져 있고, 이 문에서 망우리에 이르는 사이에는 평야가 있어 장풍이 제대로 되지 않는다고 한다. 이를 인위적으로 보완하기 위하여 동문의 이름을 '흥인지문(興仁之門)'이라 하였다. 풍수설에서 '인(仁)'은 '목(木)'에 속하고, 목은 동쪽을 뜻하므로 '흥인'은 바로 동쪽을 반기는 뜻이 된다. '지(之)' 자는 산맥이 구불구불한 모양을 형상적으로 표시하는 문자이므로, 동쪽의 허한 것을 보완하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그래서 동문은 이름을 '興仁之門'의 넉 자로 하고, 산을 쌓아 비보(裨補)하는 대신 반월형의 석축의 울을 쌓아서 외풍(外風)이 들어오는 것을 인위적으로 막으려 하였다. 

  둘째, 남쪽인 곤방(坤方)에 있는 관악산이 음양설(陰陽說)로 보아 화기(火氣)가 왕성하다는 점이다. 그래서 남문의 현판 '崇禮門'을 세로로 붙였다. 풍수설의 오행을 보면, '예(禮)'는 불에 속하고, 불은 남쪽을 의미한다. '숭(崇)' 자의 예서(隸書)는 불꽃이 일어나는 형상이므로, '숭례(崇禮)'는 '염화(炎火)'의 뜻으로 불이 타오른다는 풍수문자가 된다. 그런데 그 글자를 세로로 쓰면 불이 붙지 않는다고 한다. 그래서 남대문의 현판을 세로로 써서 걸었는데, 이것은 관악산의 화기(火氣)를 마주 대하게 하여 불로써 불을 제압하여 불이 일어나지 않게 하려는 의도였다고 한다.

  조선 고종 때 대원군은 경복궁을 중건(重建)하고, 경복궁 정문인 광화문 앞뜰에 해태의 형상 둘을 만들어 세웠다. 이것을 두고, 민간에서는 관악산의 화기를 누르기 위한 것이라고 전한다. 해태는 수신(水神)을 상징하므로, 물로서 불을 제압하려는 의도에서였다고 한다. 그런데 이것은 『조선왕조실록』에는 없으므로, 민간에서 풍수와 관련지어 전해오는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풍수와 관련된 지명(地名)

  우리 나라에는 풍수와 관련된 지명이나 설화가 많이 있다. 이것은 풍수신앙이 넓고 깊게 퍼짐에 따라 일어난 자연스런 현상이라 하겠다.

  서울 풍수의 안산(案山)인 목멱산(남산)은 생김새가 누에처럼 생겼다 해서 '잠두봉(蠶頭峰)'이라고도 한다. 도시 풍수에서는 안산을 길러야 그 도시에 불행이 없고 번창한다고 한다. 잠두형은 누에가 뽕잎을 갉아먹고 사는 형세이므로, 양안술(養案術)은 누에를 먹이는 뽕나무를 심는 것이다. 그래서 남산의 동쪽에 보이는 당시의 사평리(沙坪里)에 많은 뽕나무를 심고, 여기를 '잠실(蠶室)'이라 하였다. 그래서 지금도 잠원동(蠶院洞) 일대를 '잠실'이라고 한다.

  서울 불광동 쪽에서 독립문으로 가는 고개를 '무악(毋岳)재'라고 한다. 태조 이성계가 도읍 터를 물색할 때 하륜(河崙)이 무악재 남쪽을 적극 주장하는데, 일부에서는 명당이 좁다고 반대하므로 태조 3년(1394년)에 태조가 몸소 무학대사를 데리고 가서 조사하였으므로 '무악재' 또는 '무학현(武學峴)'이라 했다고 한다. 서울 서대문구 북아현동에는 '굴레방다리[靭橋]'가 있고, 서강 쪽에 붕괴된 와우아파트가 있던 '와우산(臥牛山)'이 있으며, 무악재 남쪽에 안산(鞍山)이 있다. 풍수설에 따르면 큰 소가 길마는 길마재에다 벗어놓고, 굴레는 굴레방다리에다 벗어놓은 다음, 서강(西江)을 향하여 내려가다가 와우산에 이르러 누웠다고 한다. 그래서 '굴레방다리', '와우산', '길마재[鞍山]'이란 지명이 생겼다고 한다.

  전남 곡성의 진산(鎭山)은 동락산(動樂山)인데, 봉(鳳)이 날아가는 형상이라고 한다. 봉이 날아가 버리면 곡성은 쇠퇴하게 되므로 이를 막기 위하여 땅이름으로 묶어 놓았다고 한다. 봉은 오동나무에 깃들이므로 봉이 쉴 수 있게 하기 위해 '오지리(梧枝里)'란 땅이름을, 봉은 대 열매만 먹으므로 남쪽에 '죽곡면(竹谷面)'란 땅이름을 지었다. 또 봉은 고양이를 싫어하므로 서쪽을 '묘산(猫山)'이라 하고, 봉은 메추리를 보면 멈추므로 북쪽에 '순자강(鶉子江)'을 두었다고 한다. 

  풍수와 관련된 땅이름 중에는 예언적인 성격을 띤 것도 있다. 충북 청원군 북일면에는 '비상리(飛上里)'란 마을이 있고, 청주시 강서동에 '비하리(飛下里)'란 마을이 있다. 그런데, 1997년 4월 28일에 개항한 청주 비행장의 이륙장(離陸場)이 설치된 곳이 비상리이고, 착륙장이 설치된 곳이 비하리라고 한다. 인천 국제공항은 서울 도심에서 52km 떨어진 곳에 위치한 영종도(永宗島)와 이 섬에서 5km 거리인 용유도(龍遊島) 사이를 메워서 만든 공항이다. 영종도의 옛이름은 '제비섬[紫燕島]'였는데, 조선 중기부터 '영종도'라고 부르기 시작하였다 한다. 제비는 비행기, 영종(永宗)은 긴 마루라는 뜻으로 광활하게 뻗는 활주로를 뜻한다고 볼 수 있다. 이 섬과 방파제로 연결된 용유도는 용이 구름을 타고 하늘에서 노닌다는 뜻으로 볼 수 있으니, 당초부터 비행기가 하늘을 날고 내리는 공항이 들어설 자리를 예견하는 이름이었다고 할 수 있다.

  충남 당진군 서해안에 '대호지면(大湖芝面)'이 있고, 그 옆의 석문면에 '교로리(橋路理)'라는 마을이 있다. 이 지역에 1981년부터 대규모 간척사업을 하여 큰 호수와 농지가 생겼다. 충남 당진군 신평면 '운정리(雲井里)'의 논과 밭은 삽교천 방조제 공사가 완공됨에 따라 삽교호(揷橋湖)로 변하여 아지랑이와 안개가 자욱한 곳이 되었다. 이것 역시 예언적 성격을 띤 지명이다.       

        풍수와 관련된 설화(說話)

  풍수신앙이 널리 퍼짐에 따라 명당자리를 얻기 위한 노력과 정성, 수단과 방법도 다양하여졌다. 그에 따라 크고 작은 일들이 수없이 발생하였는데, 이러한 일들이 풍수 설화의 소재가 되었을 것이다. 풍수 설화에는 유능한 지관(地官)을 만나 명당 자리를 얻은 이야기, 적선(積善)을 하여 좋은 자리를 얻은 이야기 등이 있는가 하면, 남을 속이거나 권력을 이용하여 좋은 자리를 차지한 이야기가 있다. 또 자기 선대의 유골을 명당자리에 몰래 묻은 암장(暗葬), 투장(偸葬) 이야기도 있다.

  풍수 설화 중에는 재미있는 이야기들이 많이 있다. 가난한 노총각이 '금시발복지지(今時發福之地)'에 아버지를 묻고 집에 오니 비가 내리는데, 청상 과부(靑孀寡婦)가 된 서울 재상가의 딸이 비를 피하기 위해 그 집에 들렀다가 함께 살게 되어 장가도 가고, 부자가 되어 잘 살았다고 한다. 어떤 사람은 장가도 들기 전에 죽은 외아들을 '죽은 아들에게서 손자 보는 묏자리[死子生孫之地]'에 묻고 그 옆에 여막(廬幕)을 지어 놓았는데, 죽은 아들의 영혼이 소나기를 피하기 위해 그 여막에 들른 처녀와 관계하여 아들을 낳았으므로, 그 아이로 대를 이었다고 한다. 어떤 나무꾼은 산에  가서 나무를 하다가 드러난 해골을 잘 묻어주고 복을 받아 잘 살았는데, 그 자리가 명당 자리였다고 한다. 효성이 지극한 사람에게 호랑이나 노루가 명당 자리를 잡아 주어 잘 살았다는 이야기도 전해 온다.   

  요즈음에도 묏자리를 놓고 벌어지는 싸움이 종종 일어난다고 하는데, 이것은 남남끼리 벌이는 싸움보다는 친족간에 벌이는 싸움이 더 많고, 또 심하다고 한다. 이것은 예로부터 내려오는 풍수 신앙과 좋은 자리를 차지하여 자기 직계 자손에게 궂은 일이 없게 함은 물론, 발복하여 잘 살게 하고자 하는 이기심(利己心)의 작용에 의한 것이다.

  지금 살아있는 우리들이 갈 만한 명당자리는 남아 있을까? 큰 산, 작은 산 가릴 것 없이 산세로 보아 좋다고 생각되는 곳에는 예외 없이 절이 들어서 있고, 명당이라고 할 만한 자리에는 왕릉(王陵)이나 한때 세력을 잡았던 양반들의 묘가 자리잡고 있다. 최근에도 돈 있고, 힘있는 사람은 좋은 자리를 골라 부모의 묘를 쓰고, 치산을 한다. 이런 판에 서민들이 명당 자리를 얻는다는 것은 기대하기 어렵다. 국가에서는 묏자리가 차지하는 면적이 점점 늘어서 효율적인 국토의 이용과 관리에 문제가 있다고 하여 화장(火葬) 후 납골(納骨)을 권장하고 있다. 우리 서민들은 과학적인 근거가 희박한 명당 관념에서 벗어나 국가 시책에 호응하는 것이 좋을 것이라 생각한다.     





          
         점(占)의 종류와 방법·점괘(占卦)

  한국인 중에는 요즈음에도 신년 초가 되면 그 해의 운세를 알아보기 위하여 {토정비결(土亭秘訣)}을 보기도 하고, 점쟁이를 찾아가 일생의 운세와 함께 그해의 신수를 보는 사람이 많이 있다. 그들은 신년 초가 아니더라도 일이 있을 때마다 점쟁이를 찾아가 점을 하는데, 그 경우는 아주 다양하다. 점쟁이를 찾아가 앞일을 알아보는 것을 '점친다', '점본다', '문복(問卜)한다'고 하는데, 이를 '점복(占卜)'이라고 하기도 한다. 

        점복의 종류와 방법

  점복(占卜)이란 인간의 생활에 따르는 모든 조짐을 신비적인 방법으로 미리 알아내어 인간의 생활을 유리하게 이끌어 가기 위한 정보라고 할 수 있다. '인간의 생활에 따르는 모든 조짐'이라고 할 때의 '조짐'은 한 개인이나 가족 또는 집단의 과거, 현재, 미래의 길흉화복(吉凶禍福)에 대한 조짐을 말한다. 이러한 조짐을 미리 알아보는 방법으로 점복을 한다. 요즈음에 주로 행해지는 점복에는 신점(神占), 역리(易理)에 의한 점, 상점(相占), 몽점(夢占), 풍수점(風水占) 등이 있다. . 

  신점(神占)은 신이 내린 무(巫)가 신의 영력(靈力)을 이용하여 하는 점이다. 그러므로 세습무(世襲巫)인 '단골'은 신점을 하지 못한다. 앞일을 알고 싶은 사람이 무당을 찾아가면, 무당은 손님의 생년월일시를 물은 다음, 자기의 몸주신을 부르는 주문(呪文)을 외우면서 신을 청하고, 사주를 말하면서 그 사람의 앞일을 알려 달라고 한다. 신이 무당의 청을 받아들여 그 사람에게 맞는 점사(占辭)를 알려주면, 무당은 그 점사를 손님에게 풀어서 설명한다. 무당이 신을 청하여 점사를 얻는 방법은 무당에 따라 다르다. 어떤 무당은 주문(呪文)을 외우며 방울을 흔들어 신을 부른 뒤에 신의 계시를 받아 점괘(占卦)를 말하고, 어떤 무당은 주문을 외우며 엽전 7개를 두 손안에 넣고 흔든 뒤에 엽전을 점상(占床) 위에 뿌려 엽전이 앉는 모양을 보고 점괘를 말한다. 어떤 무당은 점상 위의 쌀을 이용하여 점을 하고, 어떤 무당은 알이 큰 염주를 돌리며 신을 불러 신의 계시를 받기도 한다. 신점을 하는 무당들은 사람의 출생과 성장·혼인·자녀·부귀·건강과 질병·수명 등 인간의 모든 일이 신의 뜻에 따라 정해지고, 그 뜻대로 되는 것이라고 믿는다. 그래서 점복을 통하여 신의 뜻을 알아보고, 그에 맞는 대책을 강구해 준다. 점을 치러 온 손님에게 앞으로 좋은 일이 있을 것이라고 하면, 신의 뜻에 감사하고 근신(勤愼)하면서 그 일이 이루어지도록 노력하라고 한다. 그러나 앞으로 좋지 않은 일이 있을 것이라고 하면, '부적'을 써 주기도 하고, '비손'이나 '굿'을 하게 하여 질병과 재난을 물리치고, 복을 받게 해 준다. 

  역리(易理)에 의한 점은 역학(易學)에 관한 이론을 학습한 사람이 역리를 풀어서 하는 점이다. 역리를 학습한 사람을 흔히 '철학가(哲學家)', '역학가(易學家)', '역술인(易術人)'이라고 하는데, 이들 중에는 집안기도·산기도 등을 통하여 강신(降神) 체험을 한 사람도 있고, 강신 체험 없이 학습과 연구를 통하여 역리를 깨우친 사람도 있다. 강신 체험이 있는 사람의 경우에는 학습한 역학의 이론 위에 신의 계시가 겹침으로써 점사의 적중률이 높다고 한다. 이들은 모두 사람의 운명은 이 세상에 태어남과 동시에 정해지는 네 기둥, 즉 사주(四柱)에 의해 정해진다고 믿는다. 그래서 사주를 역리로 풀어서 정해진 운명을 미리 알아 좋은 일이 예정되어 있을 때에는 그에 순응하여 맞아들이고, 질병·재난이 있을 때에는 부적·독경(讀經)·비손·굿 등을 통하여 이를 예방하거나 물리쳐야 한다고 한다.

  상점(相占)에는 얼굴의 형상을 주로 보는 관상(觀相), 손의 모양과 손금을 주로 보는 수상(手相) 등이 있다. 상점은 관상과 수상을 공부한 사람이 보는데, 이들은 관상이나 수상뿐만 아니라 역리(易理)도 함께 공부한 사람들이 대부분이어서 상점과 역리점을 겸하는 것이 보통이다. 상점은 오랜 동안 사람의 관상과 수상을 보아서 얻은 경험과 통계를 바탕으로 한 것이어서 적중률이 높다고 한다.

  몽점(夢占)은 해몽(解夢)을 통해 조짐을 알아보는 것이다. 대개의 경우 꿈을 꾼 사람이나 가족이 꿈을 풀이하기도 하지만, 전문적인 해몽가에게 해몽을 의뢰하는 경우도 있다. 해몽가는 신점을 하는 무당이나 역리점을 하는 역학가, 상점을 하는 관상가 등이 겸하는 경우가 많다.

  풍수점은 풍수설을 연구한 사람이 집터나 조상의 묏자리를 보고 점을 치는 것이다. 풍수설을 연구한 사람은 집터나 조상의 묏자리가 그 사람과 맞으면 발복(發福)하여 모든 일이 잘 되지만, 맞지 않을 때에는 재난을 당하게 된다고 믿는다. 그래서 그 사람과 맞지 않은 집터에서 이사를 하거나, 조상의 묏자리를 옮겨야 재난을 물리침은 물론, 복을 받아 잘 살 수 있다고 한다.

  이 외에도 점복자가 대나 뼈로 만든 산가지를 넣은 산통(算筒)에서 산가지를 뽑은 뒤에 산가지에 적인 점괘를 읽어 점을 치는 산통점(算筒占), 점괘의 여섯 가지 획을 이용하여 하는 육효점(六爻占), 새에게 점괘를 적은 종이를 물게 하여 점을 치는 새점 등이 있다. 요즈음에는 컴퓨터를 이용한 컴퓨터를 이용한 컴퓨터점이 있다. 그러나 요즈음에도 널리 행해지고 있는 것은 앞에서 설명한 점이다. 

        점을 치는 마음

  한국인들이 점복자를 찾아가 문복하는 이유는 사람에 따라 다르지만, 장사·사업·이사·매매·취업·소송·입학·선거 출마 등을 하려고 할 때 그 일의 잘되고 못됨, 이로움과 해로움 등을 미리 알아보기 위해 점을 한다. 혼인을 하려고 할 때에는 배우자의 선택·택일(擇日) 등을 잘 하기 위하여 점을 하고, 개인의 이름·상호(商號) 등을 새로 짓거나 이의 좋고 나쁨을 알아보기 위하여 점을 한다. 병이나 재난이 있을 때에는 그 원인과 처리 방법을 알아보기 위해, 실물(失物)·가출자·도망자 등이 있을 때에는 그 행방을 알아보기 위하여 점쟁이를 찾는다. 또 자녀의 출산·건강·입학·입대, 선거 출마 등에 관한 것을 알아보기 위하여, 집터나 묘지를 새로 선택하거나 이의 좋고 나쁨을 알아보기 위하여 점쟁이를 찾기도 한다.

  사람은 앞일을 알지 못하므로, 앞일에 대해 궁금증을 갖는 것은 당연하다. 이 궁금증은 사회가 불안하고, 경제가 어려우면 더해진다. 외환 위기와 함께 다가온 경제적 불황으로 실업자가 늘기 시작하던 1997년부터 1999초에 점복자를 찾는 사람이 무척 많았었다고 한다. 북한 핵 문제로 인한 불안이 높아가고, 경기가 좋지 않은 요즈음에도 점복자를 찾는 사람이 늘고 있다고 한다. 이것은 미래에 대한 불안이 있을 때 잠복자를 찾는 사람이 많아진다고 하는 것을 말해 준다.

  21세기를 사는 현대인들이 점을 치는 마음은 어떠해야 할까? 점을 하는 점복자나 점복자를 찾아가 문복(問卜)하는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는 의식은 사람의 출생·건강·부귀·자녀·배우자·원만한 인간 관계 등 삶에 필요한 모든 사항들이 신의 뜻에 따라 결정되거나, 우주 운행의 이치에 따라 태어날 때 이미 정해 졌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옳지 않은 생각이다. 사람의 운명은 태어날 때 정해지는 것이 아니고, 그 사람의 의지와 노력에 의해서 얼마든지 바꿀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모든 것을 신의 탓으로 돌리거나, 사주 팔자를 지나치게 믿지 말아야 한다.

        점복에 대한 현대인의 자세

  운명은 자기의 성격, 의지, 노력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점을 하지 않는 것이 현대인이 취해야 할 가장 좋은 태도이다. 그러나 앞일이 궁금하여 점을 하였을 경우에는 그 점괘에 너무 마음을 쓰지 말아야 한다. 좋은 일이 있을 것이라고 하면, 그 점괘를 '자성예언(自成豫言)'의 자료로 삼아 그 일의 성취를 스스로 예언을 한 뒤에 그 일이 이루어지도록 최선의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노력하는 사람에게는 반드시 좋은 결과가 있게 마련이다. 나쁜 일이 있을 것이라는 말을 들었을 경우에는 그런 일이 생기지 않도록 말과 행동을 삼가고 조심하면 된다. 언행을 삼가고 조심하면, 실수를 막을 수 있을 것이고, 좋지 않은 일이 있을지라도 그 피해를 최소화할 수 있을 것이다. 

  옛날이야기 중에 점괘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 것인가를 일깨워주는 이야기가 있다. 옛날에 부지런히 일하여 살림 형편이 좋아진 중년의 농부가 이름 있는 점쟁이를 찾아가 많은 돈을 내놓고 점을 해 달라고 하였다. 점쟁이는 그에게 '지금처럼 살면 노년에는 누워서 먹을 팔자'라고 하였다. 그 사람은 점괘를 잘못 받아들여 '나는 누워서 먹을 팔자이니 일을 하지 않아도 된다.'면서 놀기만 하였다. 농사철이 되어도 제대로 일을 하지 않으므로, 아내가 나서서 농사일을 하였으나 일이 잘 되지 않았다. 몇 년을 그렇게 살고 보니, 그 사람은 살림이 어려워져 끼니를 걱정하게 되었다. 크게 깨달은 그는 다시 부지런히 일하여 살림을 일으킨 뒤에 편안한 노년을 보냈다고 한다.

  '금년 가을에 시집갈 것'이라는 점괘를 받은 노처녀가 있다면, 그 처녀는 그 날부터 적극적인 태도를 가지고 열심히 일하면서 친구나 동창 모임에도 빠지지 말고 나가고, 남의 혼인 예식에도 열심히 다녀야 한다. 그러다 보면, 다른 사람의 소개로 좋은 사람을 만날 수도 있고, 복잡한 전철이나 만원 버스 안에서 발을 밟거나 어깨를 부딪혀 얼굴을 붉히던 사람이 좋은 인연으로 바뀔 수도 있을 것이다. 그녀가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앉아서 점괘가 이루어지기를 기다린다면 그 점괘는 이루어지기 어려울 것이다.   

  운명은 불변의 것이 아니라 성공적인 삶을 살겠다는 의지를 가지고 노력하는 사람이 얼마든지 바꿀 수 있는 것이다. 운명을 자기편으로 만드는 사람만이 성공적인 삶을 살 수 있을 것이다.




   한국인은 예로부터 가택(家宅)의 요소마다 신이 존재하면서 집안을 보살펴 준다고 믿고 그 신에게 정기적, 또는 필요에 따라 의례를 행하며 신앙하여 왔다. 이를 가신 신앙(家神信仰)이라고 한다. 가택 신앙, 가정 신앙, 집안 신앙이라고 하기도 한다. 일부에서는 가신(家神)이라는 용어가 일제 강점기에 사용하던 일본식의 용어라 하여 비판적으로 보기도 한다. 그러나 집안 신앙이나 가정 신앙이라 할 경우, 집안에 존재하는 가신뿐만 아니라, 가정에서 신앙하는 종교 전반을 포함하는 뜻으로 확대 해석할 가능성이 있다. 가신(家神)은 가택신(家宅神)의 준말로 볼 수 있고, 집신은 가(家) 대신 집으로 쓴 것인데 익숙하지 않은 데다 쉽게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그래서 종전의 용어대로 가신 신앙이란 말을 많이 쓴다.  가신은 집안 곳곳에 존재하므로, 가신 신앙은 다신 신앙(多神信仰)이다. 가신에는 성주·조상·조왕·삼신·터주·업·철륭·우물신·우마신 등이 있다.

 
  성주신

  성주신은 그 집안의 으뜸 신으로, 집안의 길흉화복(吉凶禍福)을 관장한다. 집안의 으뜸 신답게 그 자리도 그 집의 중심이 되는 곳이다. 집의 모양에 따라 차이는 있지만, 대개 마루의 대들보 밑이나 상기둥의 윗부분과 같은 집안의 중심부가 성주신의 자리다.

  성주신을 상징하는 신체(神體)는 대청의 대들보 밑이나 상기둥의 윗부분에 백지, 또는 무명을 접어서 실타래로 묶거나 한지를 반구형(半球形)이 되게 만들어 붙인다. 한지를 직사각형으로 접어 붙인 다음 실타래나 띠풀로 매고, 대청 한 편에는 성주단지나 성주독을 놓기도 한다. 

  성주신의 신체를 봉안하는 것은 집을 새로 짓거나 이사한 뒤에 성주맞이굿을 하고 봉안하기도 하고, 대주(大主, 남자주인)의 나이가 7 또는 3이 드는 해에 봉안하기도 한다. 성주단지나 성주독에는 쌀이나 다른 곡식을 담는데, 이것은 농경 문화의 반영이다. 이 단지의 쌀은 주로 음력 10월 가을 추수 때 갈아넣는다. 이 속에 넣었던 곡물은 집밖으로 내보내지 않고, 밥을 지어 가족들만 먹는다. 그 곡물을 복이 담긴 신성물(神聖物)로 여겨 이를 내보내는 것은 복을 내보내는 것으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가신제는 설날·추석과 같은 명절에도 지내지만, 예전에는 특히 햇곡을 천신(薦新)하는 음력 10월 상달에 가신 단지에 들어있는 곡물을 갈면서 크게 고사를 지냈다.

                      충북 옥천군 동이면 적하리 박씨 댁 성주

 

                   충남 홍성군 갈산면 기산리 김씨 댁 성주

 

     경북 안동시 이천동 조씨 댁 성주



      조상신
  조상신은 후손을 보살펴 주는 신으로 자리는 안방의 윗목 벽 밑인데, 대체로 신체가 없다. 신체가 없이 모시는 가신을 '건궁'이라 하는데, 조상신은 건궁으로 모시는 경우가 흔하다. 조상신이 제석신(帝釋神)·세존단지 등 불교적인 명칭으로 불려지기도 한다.

  각 가정에서는 명절이나 기일(忌日)에 돌아가신 조상께 제사를 지내므로, 가신을 모시지 않는 가정에도 조상신이 있는 셈이다. 그러나 가신으로서의 조상과 제사를 받는 조상과는 차이가 있다. 유교식 제사를 받는 조상은 서열이 명확하다. 종가(宗家)의 경우에는 집에서 4대조까지 제사를 지내고, 5대 이상의 조상에게는 음력 10월에 묘에 가서 시향(時享)을 올린다. 그러나 가신으로 모시는 조상은 서열이 확연하게 정해져 있지 않다. 가신의 자리에 앉고자 하는 조상은 가족들에게 현몽(現夢)하거나, 현몽하기 전에 우환이 있다든지 혹은 좋지 않은 일이 계속되어 그 일로 점복자를 찾아가 점을 하고, 점사(占辭)에 따라 모셔지게 된다.

  조상신으로는 주로 한(恨)이 많거나 무언가 색다르게 살다가 돌아가신 분이 들어앉는다. 이들은 아주 윗대 조상부터 최근에 세상을 떠난 조상에 이르기까지 가정마다 다르다.

      조왕신
  조왕신(王神)은 부엌에 있는 신으로, 그 자리는 부뚜막이다. 삼신과 더불어 육아(育兒)를 담당한다. 간혹 재산신으로 여기기도 한다. 이는 부엌에 불이 있기 때문으로 보인다. 불은 재산을 상징한다. 그래서 화재가 난 꿈을 꾸면 재산이 생기는 것으로 여긴다. 새로 이사간 집에 성냥이나 양초를 가지고 가는 것도 불이 타듯 재산이 불어나라는 의미가 있다. 예전에 불씨를 꺼뜨리는 며느리는 집안을 망하게 할 것이라 하여 쫓아내기도 하였다. 이것은 불과 재산을 직접적으로 관련시키는 의식 때문일 것이다.


  조왕의 신체로는 '조왕중발'이라 하여 사기 종지에 정화수(井華水)를 떠올리기도 하지만, 신체가 없는 건궁 조왕도 흔하다. 조왕중발의 물을 매일 아침 갈아 올리고, 별식이 나도 올리는 것으로 신앙 의례를 표현한다. 부뚜막은 조왕신의 자리여서 주부들이 부엌에서 일할 때 아무리 피곤해도 부뚜막에는 걸터앉지 않는다. 꼭 앉아야 한다면 바닥에 나무토막 따위를 깔고 앉는 것이 고작이었다.
 

조왕신은 섣달 그믐 무렵 하늘에 계신 옥황상제를 찾아가서 지난 일 년 간의 일을 고한다는 말이 있다. 그래서 이 때 각별히 말조심을 한다. 때로는 부뚜막에 엿을 붙여두기도 한다. 혹 하늘에 가더라도 옥황상제에게 좋지 않은 말을 전하지 말아달라고 미리 입을 막는 것이다. 


  조왕신이 자녀들을 지켜준다고 믿기 때문에 경북 안동에서는 평소 조왕을 모시지 않는 가정에서도 아들이 군대에 가거나, 그밖에 자녀들에게 커다란 변화가 생기면 조왕을 모셔 정화수를 올리며 기도한다. 그러다가 아들이 무사하게 제대를 하게 되면 조왕중발을 거둔다. 매우 실리적이고 공리적(功利的)이라 할 수 있는데, 이러한 공리성은 조왕신에 대한 신앙 뿐 아니라 우리의 민간신앙 전반에 걸쳐 공통되는 요소이기도 하다.

             부뚜막 위 작은 선반에 정화수를 떠 놓는다. (왼쪽 사진은 온양민속박물관, 오른쪽 사진은 한국민속촌에서 찍은 것임)



        삼신
   삼신[胎神, 産神]은 자녀의 출생·육아·성장 등을 관장하는 신(神)이다. 그 자리는 안방 아랫목이다. 신체는 삼신자루라 하여 한지로 만든 자루 속에 쌀을 넣어 아랫목 구석의 벽에 높직이 달아 매 놓는다. 또는 쌀을 바가지나 동이에 담고, 시렁을 만들어 거기에 얹어놓기도 한다. 이를 각기 삼신바가지 또는 삼신동이라고 한다.

  삼신은 일반적으로 '삼신할머니'로 통칭되고 있으나, 지역에 따라서 달리 부르기도 한다. 전라도 지역에서는 삼신을 '지앙'이라 하고, 경상도와 강원도 일부 지역에서는 '세존할매'라 일컫는다. 집안에 따라서는 삼신할머니와 삼신할아버지 부부를 상정(想定)하기도 한다.

  삼신의 점지를 받아 아이가 태어나면 일곱 살 때까지 보호를 받는다. 그 후부터의 수명은 칠성신이 관장한다. 삼신은 아이를 관장하는 가신이기 때문에 아이를 낳으면 삼신상을 차린다. 유달리 깨끗한 신이라고 생각하여 정화수만을 올리는 경우도 있지만, 대체로 쌀밥과 미역국, 그리고 물을 떠올린다. 또 설·정월 대보름·추석·동지 등 주요 명절에도 삼신제를 지낸다. 다른 가신과 마찬가지로 새 밥을 올리는데, 특히 삼신에게는 비린 음식을 올리지 않는다.

  삼신은 그 가계(家系)의 여자 조상이 좌정(坐定)한 것이라고 하기도 하는데, 이 때에는 현몽, 또는 점사에 따라 삼신을 모신다. 삼신은 아이 갖기를 빌며 모시는 것이 보통이지만, 아이가 있더라도 섬기는 예가 있다. 


  삼신바가지 혹은 삼신단지에 담긴 쌀은 일 년에 한 번씩 햇곡이 나면 갈아넣는다. 묵은 쌀은 집안 식구끼리만 먹으며 절대 남에게 주지 않는 것은 다른 가신과 마찬가지다.

        터주신
  터주는 지신(地神)이라고도 하는데 집터를 맡아보며 집안의 액운을 걷어주고, 재복(財福)을 주는 신이다. 가정에 따라서는 터주대감, 또는 터대감이라고도 한다. 터주를 상징하는 신체는 집의 뒤뜰 장독대 옆에 '터주가리'를 만들어 신체로 모신다. 터주가리는 서너 되들이 옹기나 질그릇 단지에 벼(요즈음에는 주로 쌀)를 담고 뚜껑을 덮은 다음, 짚을 원추형으로 덮는다. 이 터주가리에 담았던 곡물은 해마다 추수 때에 갈아넣는다. 묵은 곡식은 집밖으로 내보내지 않고 가족들이 먹으며 복을 빈다. 가을에 햅쌀로 갈아넣을 때 메를 지어 올리는 경우도 있다.

  터주신에 대한 제의는 특별히 지신제(地神祭)를 올리는 경우가 있고, 정초나 그 밖의 명절에 떡을 한 접시 올리고, 별식(別食)이 있을 때에 한 그릇 올린다. 이것은 다른 가신에 대한 의례와 대동소이(大同小異)하다.

        업신(神)
  업신은 광이나 곳간과 같은 은밀한 곳에 머물러 있으면서 재복(財福)을 준다는 가신이다. 업·업왕신·업왕·업위신이라고도 하지만, 민간에서는 '업'이라는 말과 함께 '지킴이·집지킴이' 등으로 부른다.

  업신의 대상으로 구렁이·족제비·두꺼비 그리고 사람을 들고 있다. 업이 그 집을 나가면 패가망신(敗家亡身)하거나, 커다란 변화가 생긴다고 한다.

  업신은 대체로 신체가 봉안되지 않고 건궁으로 모시지만, 다른 가신과는 달리 업구렁이라든가 업족제비·업두꺼비와 같은 동물을 업신으로 상정한다. 또 사람에게 붙어 다닌다는 인업을 업신으로 삼기도 한다. 인업은 사람에게 붙어 다니면서 그 사람에게 복을 주는 신으로, 형상은 그 사람과 같다고 한다. 그래서 인업과 인업을 달고 있는 사람과는 별개의 존재인데도, 그 사람 자신이 인업으로 인식되기도 한다.

  업의 자리는 광·곳간과 같이 재물을 보관하는 곳이다. 이는 바로 업신이 재복신임을 말해준다. 업신을 대접하는 의례는 정기적으로 지내거나 필요에 따라서 수시로 지낸다. 정기 의례는 설날·추석·동지 등 주로 큰 명절에 다른 가신과 함께 올리고, 그밖에 사람 눈에 띄었을 때에는 단독으로 올리기도 한다. 업신이 눈에 띄는 것을 예사롭게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용단지
  경북 안동·예천·풍기·상주 등 경북 북부 지역에서는 용단지를 섬긴다. 특히 안동 지역에서는 용단지 신앙이 가장 보편적인 가신 신앙이다.

  용단지는 신체(神體)의 모양을 따서 붙인 이름이다. 원래 용신(龍神)은 바람과 비·물 등을 관장하고 있는 신으로, 하늘과 땅을 오가는 전능한 신인데, 가신으로 모실 때에는 농경신·재산신의 성격을 띤다. 재산을 맡고 있다는 점에서는 업신 또는 터주신의 성격을 지니고 있다. 그래서 안동 사람들은 용단지를 터주신이라고도 하고, 업신과 동일한 개념으로 보는 경우도 있는데, 후자의 경우가 더 많다.

  용단지는 용이 드는 곳에 자리잡고 있다고 하는데, 용이 든다는 말은 재산이 들고 가정을 잘 수호해 준다는 의미가 있다. 그래서 그 자리는 곡물이 드나드는 부엌·고방, 또는 돈궤를 두는 다락 등이다. 용단지에는 쌀이나 다른 곡식의 나락을 담아둔다.

 
  용단지를 위하는 까닭은 농경신인 용신을 받듦으로써 집안의 평안과 농사의 풍작을 빌고, 집과 재물을 보살펴주기를 기원하기 위해서다. 가신은 저마다 고유의 기능이 있지만, 다른 가신의 기능이 뒤섞여 있다. 가신은 대체적으로 농경신으로서의 성격을 지니고 있는데, 용단지는 보다 농경성이 강하다.

        기타 가신
  위에서 설명한 가신 외에도 여러 가신이 있다. 호남에서는 터주신으로 섬기지만, 장독신의 성격도 지니고 있는 '철륭'을 비롯하여 수명을 관장하는 '칠성신', 물을 마르지 않게 하는 '우물신', 소와 말을 지켜주는 '우마신(牛馬神)'을 섬긴다. 또 대문에는 '문신(門神)'이 있어 액살(厄煞)이 접근하는 것을 막아준다고 한다. 변소에는 '측간신(厠間神)'이 있어 항시 조심해야 한다고 한다. 가신은 대체로 집안의 평안을 돌보는 착한 신이지만, 측간신은 좀 사악한 성정이 있다 하여 우리 스스로 조심해야 한다고 믿는다. 충남에서는 '왕신단지'라는 사나운 가신을 모시기도 한다.

  가신은 생업과 관련된 직능신이기 때문에 필요에 따라 생성되기도 하고, 사라지기도 한다. 인삼 농사를 하는 경북 풍기 지역에서는 생업과 관련된 인삼신(人蔘神)을 상정하여 인삼 고사를 지내기도 한다.

  가신 신앙은 흔히 여성 신앙이라고도 한다. 전 시대(全時代)에 걸쳐 해당되는 것은 아니지만, 조선 시대부터 근대 초기까지도 여성은 대체로 유교적인 이념에 묶여 사회적인 제약이 많았다. 이는 가신 신앙이 여성 신앙화 할 수 있는 한 요소가 되기도 했다.

  가신 신앙에는 현실적인 고난과 결핍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생존적 욕구, 나아가서 인간답게 살려는 욕구가 투영되어 있다. 전통 사회에서 가신 신앙은 여성들의 힘든 삶을 극복하는 심리적 기제의 기능을 하기도 하였다. 여성들은 가신 신앙을 통해 현실에서의 고통스러운 상황을 극복하고 '풍요로운 삶을 영위하고자 하였던 것이다. 참고문헌   최운식 외, 한국 민속학 개론(서울:민속원, 2004)

 

 

     무속(巫俗)과 무교(巫敎
  무속(巫俗)은 민간 층에서 무(巫)를 중심으로 하는 종교 현상으로, 민간신앙의 한 형태인데, 무교(巫敎)라고 하기도 한다. '무속'이란 말은 이를 민속의 하나로 보는 용어이고, 무교(巫敎)는 이를 종교의 하나로 보는 용어이다. 

  무속을 종교로 보는 견해가 적절한가는 무속이 종교의 기본 요건을 갖추었는가를 따져 보면 알 수 있다. 종교의 기본 요건은 교리(敎理), 사제자(司祭者), 신도(信徒)라고 할 수 있다. 불교에는 불교의 교리를 적은 불경이 있고, 사제자인 승려가 있으며, 이를 믿고 따르는 많은 신도들이 있다. 기독교 역시 교리를 적은 성경이 있고, 사제자인 천주교의 신부나 개신교의 목사가 있고, 많은 기독교 신자가 있다. 이슬람교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무속의 경우에는 어떠한가?

  무속의 사제자는 우리가 흔히 '무당'이라고 하는 '무(巫)'인데, 현재 우리 나라에는 약 10만여 명의 무가 있다. 이들 무당에게는 1년에 한 번 정도 굿을 하고, 수시로 연락하며, 그들의 말을 믿고 따르면서 유대(紐帶) 관계를 유지하는 사람들이 있다. 무당들은 이런 사람을 '단골손님' 또는 '신도'라고 한다. 단골손님의 수는 무당의 영적(靈的) 능력에 따라 다른데, 많으면 수백에서 수천 명, 적어도 수십 명의 단골손님을 거느리고 있다. 그러므로, 무속의 신도는 대단히 많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교리는 체계를 갖추지 못한 채 관습(慣習) 또는 구전(口傳)으로 전해 오고 있다. 그래서 종교의 요건을 갖추고 있기는 하지만, 현대 종교와 같은 체제를 갖춘 종교로 보는 데에는 문제가 있다. 그래서 민속학자들은 '무교'라 하지 않고 '무속'이라는 명칭을 흔히 쓴다.

        무(巫)의 성격과 구분
  흔히 '무당'이라고 부르는 무(巫)는 '신병(神病)'이라는 종교 체험을 통하여 신의 영력(靈力)을 흭득하여 신과 교통하는 신권자(神權者)로, 신의 영력에 의해 인간의 길흉화복(吉凶禍福)을 굿으로 조절하는 능력을 가진, 민간 층의 종교적 지도자이다. 이들이 겪는 신병은 며칠씩 음식을 먹지 못하고, 몸이 (대개는 몸의 한쪽이) 아파 움직이지 못하고 며칠 또는 몇 달씩 누워 있으며, 꿈 또는 환상 속에서 신을 만난다. 이들의 병은 약으로는 고치지 못하고, 내림굿을 하여 신을 받아 모시고 무당이 되면 씻은 듯이 낫는다. 

  무는 종교 의식을 집행하는 사제자의 역할, 신도들의 병을 고치는 의사의 역할, 점으로 앞일을 알아맞히는 점복(占卜) 예언자(豫言者)의 역할을 하는 외에 예능 오락적인 기능을 하기도 한다. 앞의 세 가지는 모든 종교의 사제자가 갖는 기능이다. 그런데 뒤의 예능 오락적 기능은 한국 무당만이 지니는 기능이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은 '굿 구경한다'는 말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굿이 신과 인간을 즐겁게 하는 내용이 많음을 말해 준다. 

  한국의 무는 ①무당형, ②단골형, ③심방형, ④명두형으로 구분한다. 무당형은 타고난 무당이 아니라 사는 동안에 신병을 앓다가 강신(降神) 체험을 하고, 내림굿을 통하여 된 무당이다. 주로 중부 이북 지방에 분포되어 있다. 이들은 노래와 춤을 배워 정통 굿을 주관할 뿐만 아니라, 몸주로 모신 신의 영력에 의해 점복도 한다. 이들이 무당 노릇을 하다가 그만두면 또다시 신병을 앓아 고통을 받게 되므로, 한 번 강신하여 무당이 된 사람은 자기 마음대로 그만둘 수가 없다. 

  단골형은 혈통을 따라 대대로 사제권(司祭權)이 계승되어 인위적으로 된 세습무(世襲巫)이다. 주로 호남 지역에 분포되어 있었다. 단골들은 사제권에 의한 일정 지역의 관할권을 계승해 왔다. 단골의 관할 지역을 '단골판'이라 한다. 사제권은 아버지에서 큰아들로 계승되지만, 실제 단골 노릇은 그 아내가 한다. 그래서 굿의 진행이나 가무(歌舞)는 시어머니에서 며느리로 계승된다. 이들은 어려서부터 친정어머니한테 노래와 춤을 배우고, 시집와서 시어머니를 따라 굿을 익히므로 굿은 잘 진행한다. 그러나 영력(靈力)이 약하여 점복은 하지 않는다. 이들은 무업(巫業)을 그만두어도 병이 나서 앓는 일이 없으므로, 무업을 그만두고, 자기가 단골이라는 사실을 속이는 사람이 많다. 그래서 최근에는 단골을 만나기가 쉽지 않다.   

  심방형은 단골형과 같이 무의 사제권이 혈통을 따라 대대로 계승되는 세습무이다. 이들은 무속에서 제도화된 일면을 보이면서, 영력을 중시하여 구체적인 신관(神觀)이 확립되어 있다. 이들은 가무로 굿을 주관할 뿐만 아니라, 무구(巫具)를 이용하여 점을 하기도 한다. 이들은 주로 제주도 지방에 분포되어 있다.

  명두형은 죽은 아이의 영혼이 강신(降神)하여 된 점복 전문의 점장이로, 가무(歌舞)에 의한 정통굿의 주관은 불가능한 무이다. 이들을 '명도', '명두'라고도 하고, '태주'라고 하기도 한다. 
요즈음에는 무당형의 무 중에 죽은 아이의 영혼이 내린 사람이 많아 ①의 무당형이 ④의 명두형을 겸하는 경우가 많다.

  요즈음 우리들이 흔히 볼 수 있는 무는 대개 무당형이다. 그런데 그 숫자를 정확히 알 수는 없다. 그러나 그들의 친목단체인 경신연합회에 가입한 회원이 전국 151,236명이고, 서울에만 37,500명이 있다는 것으로 보아 그 세(勢)를 짐작할 수 있다.  
   
        무속의 신과 제의의 종류
  무속에서 신앙되는 신은 성주신·조상신·조왕신·삼신·업신과 같은 가신(家神), 산신·서낭신·당신·부군신과 같은 동신(洞神), 천신·칠성신·시준신·제석신·용신·장군신·군웅신·신장신·손님신·창부신 같은 외계신(外界神) 등 민간신앙에서 신앙되는 모든 신들이다.

  한국 전역에서 전승되고 있는 무속 제의인 굿은 그 목적에 따라 무신제(巫神祭), 가제(家祭), 동제(洞祭)로 나눌 수 있다. 무신제는 무당 자신의 굿으로, 신이 내릴 때 하는 강신제(降神祭, 내림굿·신굿·명두굿이라고도 함)와 무의 영력을 강화시키기 위해 봄·가을에 주기적으로 하는 축신제(祝神祭, 꽂맞이굿·단풍맞이굿·진적굿·대택굿이라고도 함)가 있다.

  가제는 각 가정에서 가족의 안녕과 행운을 위해서 하는 제의로, 생전 제의(生前祭儀)와 사후 제의(死後祭儀)가 있다. 생전 제의는 주기적으로 하는 주기제(週期祭)와 수시로 하는 수시제(隨時祭)로 구분된다. 생전 제의로는 아들 낳기를 빌거나 아기가 건강하게 자라기를 비는 기자(祈子)·육아 기원(育兒祈願) 제의, 병 낫기를 기원하는 치병 기원(治病祈願) 제의, 혼인 축원 제의, 가옥 신축(또는 이사) 제의, 행운(幸運)·기풍(祈豊) 제의, 해상 안전·풍어(豊漁) 기원 제의 등이 있다. 사후 제의로는 장례를 치른 뒤에 하는 상가 정화 (喪家淨化) 제의, 죽은 사람의 영혼을 저승으로 보내는 망인 천도(亡人遷度) 제의, 물에 빠져 죽은 사람의 영혼을 건져 저승으로 보내는 익사자 천도(溺死者遷度) 제의 등이 있다.

  동제는 마을에서 공동으로 마을을 수호하는 동신(洞神)에게 해가 바뀔 때마다 봄·가을에 날을 잡아 올리는 주기적 제의이다. 내륙 지방에서는 제액(除厄)·기풍(祈豊) 제의가, 해안 지역에서는 제액·풍어 제의가 행하여진다.

        무속 제의의 구성
  무속 제의는 언어 위주의 '비손'과 행동 위주의 '굿'이 있다. 먼저, 비손의 절차를 간단히 적어보면 다음과 같다.

  '비손'은 제의를 올릴 사람이 무당을 찾아가 점을 치거나 상담하여 제일(祭日)을 잡는다. 날이 잡히면 제주(祭主, 제의를 올릴 사람)는 1∼3일 전에 출입문에 금줄을 치고 황토를 펴서 부정(不淨)을 가리며, 음식을 가려먹고 언행을 삼간다. 제일이 되면 무당의 말에 따라 제물을 장만하여 간단한 제상을 차린다. 무당은 밤이 되면 정결한 옷을 입고 제상 앞에 앉아 부정을 친다. 그런 뒤에 제상으로 신을 청하여 모셔놓고, 제주의 소원을 비는 축원(祝願)을 한다. 축원이 끝나면 소지(燒紙, 종이를 태우며 소원을 비는 것)를 올리고, 밖으로 나가 뒤풀이를 하여 모여든 잡귀를 돌려보낸다. 이렇게 하여 비손이 끝난 뒤에도 제주는 3∼7일 간 출입이나 다른 사람과의 접촉을 삼가며 근신한다. 이것이 비손의 전 과정인데, 비손은 노래나 춤 없이 무당이 신과 마주 앉아 언어 위주의 축원으로 진행하므로 '앉은 굿'이라고 하기도 한다. 

  '굿' 역시 제의를 올릴 사람이 무당을 찾아가 점을 치거나 상담하여 제일(祭日)을 잡는다. 날이 잡히면 제주(祭主, 제의를 올릴 사람)는 1∼3일 전에 출입문에 금줄을 치고 황토를 펴서 부정(不淨)을 가리며, 음식을 가려먹고 언행을 삼간다. 제일이 되면 무당의 말에 따라 제물을 장만하여 제상을 차린다. 무당은 밤이 되면 정결한 옷을 입고 제상 앞에 앉아 장고를 치며 부정굿 무가를 부르며 소지를 올리고 사방에 부정물을 뿌려 부정을 쳐낸다. 그 다음에는 각 신을 개별적으로 초청하여 그 신을 대접하면서 소원을 빈다. 소원을 빌 때에는 비손과는 달리 무당이 해당 신의 의복을 의미하는 무복(巫服)을 입고, 서서 노래 부르고 춤을 추면서 신의 동작을 흉내내기도 한다. 그러다가 신이 몸에 실리면, 무당은 신성(神聖)으로 몰입되어 자기를 잃고 신으로 화하여 황홀경(
惚境)에서 신의 말인 '공수'를 내린다. 이렇게 무당이 신과 하나가 된 뒤에 다시 자기 자신으로 돌아와 제주의 소원을 축원한다. 축원이 끝나면 소지(燒紙, 종이를 태우며 소원을 비는 것)를 올리고, 밖으로 나가 뒤풀이를 하여 모여든 잡귀를 돌려보낸다. 이렇게 하여 굿이 끝난 뒤에도 제주는 3∼7일 간 출입이나 다른 사람과의 접촉을 삼가며 근신한다. 그래서 굿은 '춤'과 '모의 동작', '공수'로 행동 위주의 형식이 된다. 이것은 강신무가 행하는 굿의 구성인데, 세습무의 굿은 '공수'가 없다. 그래서 공수 없이 무당이 신을 향해 일방적으로 기원하기만 한다.    

  이러한 무속 제의는 인간 존재의 영구 지속 욕구를 실현시키는 수단으로 행해진다. 이것은 존재를 영원한 것으로 보고, 영원한 존재가 미분적(未分的) 순환을 계속하며 지속된다는 '원본사고(原本思考)'에 기반을 두고 있다. 무속의 신관(神觀), 우주관, 영혼관, 내세관 역시 이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

        무속의 신관(神觀)
  무속의 신관은 다신적(多神的) 자연신관(自然神觀)이라 할 수 있다. 무속의 신은 자연신·인간신 모두 인격을 갖추고 있는 것으로 나타난다. 그런데 분담된 직능 분야에 관해서는 무한한 능력을 지닌 전능한 존재자이며, 공포의 대상이 된다.

  무속의 신도라고 할 수 있는 한국인은 인간의 삶과 죽음, 흥망(興亡), 화복(禍福), 질병 등의 운명 일체가 신의 의사에 의한 것이라 생각하고, 신에게 발원(發願)하여 복을 얻으려고 한다. 그런데 그 발원의 방법이 정신적이기보다는 물질적이어서 신에게 제물을 바치고, 그 제물의 양과 질에 비례하는 신의 보살핌이 있다고 믿는 공리적(功利的) 신앙이다. 또 현실에서 복을 받으려는 현실기복(現實祈福) 신앙이다. 

  한국인은 유일신이 아니라 여러 신을 믿는다. 그런데 모든 것을 신의 뜻이라면서 신에게 많이 바치고, 잘 위하면 큰복을 받을 수 있다고 믿는다. 그리고 착한 일을 많이 하면 신의 감응(感應)을 받아 복을 받고, 악한 일을 하면 신의 노여움을 사서 화를 당한다고 믿는다. 또, 점복을 통해 앞일을 미리 알아서 복을 맞이하고 화를 예방하려고 한다. 이것은 모두 무속적 사고에 바탕을 두고 있는데, 이것은 무속이 현대 한국인의 의식과 신앙에 중요한 기능을 하고 있음을 말해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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