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주일예배 시간에 목사님께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인생이란 제목의 설교를 하셨다. 예수님께서 실로암에서 날 때부터 앞 못 보는 장님을 고쳐주신 기사이적(9:111)을 바탕으로 하신 설교 말씀으로, 아주 은혜로웠다. 그 뒤에 함께 부른 복음성가 실로암은 설교 말씀과 연관되어 큰 감동을 느끼게 하였으므로 힘차게 불렀다. 그런데 옥에도 티가 있듯이 가사 중에 주여 당신께라는 표현이 마음에 걸렸다.

   실로암은 예루살렘에 있는, ‘보냄을 받았다라는 뜻을 지닌 연못이다. 구약 성경(열왕기하 18:17, 역대하 32:34)을 보면, 유다의 히스기야왕은 앗시리아 산헤립왕이 침공하여 예루살렘을 포위하면 성 안에 물이 끊길 것을 염려한다. 그래서 예루살렘 성 밖의 수원지 기혼샘에서부터 533m의 수로를 만들어 성 안의 실로암 연못까지 물이 흐르게 하였다(기원전 701). 그래서 실로암은 그 당시 성 안 사람들에게 물을 공급해 준 생명의 샘이 되었다. 신약 시대에는 예수님께서 장님의 눈에 침으로 갠 진흙을 발라준 뒤에 실로암 물에 씻게 하여 눈을 뜨게 한 곳이다. 이로써 실로암은 장님이 눈을 뜨게 한 기적의 연못, 어두움을 밝힐 빛을 비쳐주는 신성한 연못을 상징하는 말이 되었다.

   「실로암1981년에 신상근 목사가 작사 작곡한 복음성가이다. 이 곡은 신 목사가 젊은 시절에 고난과 좌절을 겪다가 주님의 은혜로 삶의 희망을 찾고, 그 은혜에 대한 벅찬 감동을 표현한 곡이다. 이 곡은 사람들에게 장님이 눈을 뜨게 한 실로암처럼 희망과 용기를 갖게 해준 은혜로운 찬양이다. 40여 년 동안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으며 불려 왔다. 아주 오래 전에 아코디언을 가르쳐 주시던 장로님이 악보를 주셔서 처음 알게 되었다. 나는 이 곡을 아코디언으로 연주하며 많은 은혜와 감동을 체험하였다.

   이런 곡을 은혜로운 설교 말씀에 이어서 부르니 가슴에 큰 울림이 왔다. 그래서 높은 음이 잘 나오지 않지만, 목청을 돋우어 큰 소리로 불렀다. 그런데 이 곡의 클라이맥스라고 할 수 있는 후렴 부분의 오 주여 당신께 감사하리라 실로암 내게 주심을이라는 대목에서는 크게 부를 수 없었다. ‘오 주여 당신께란 표현은 현대인의 언어감각에 맞지 않을 뿐더러 바른 표현이라고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전에 아코디언으로 연주할 때의 느낌도 되살아났다. 주님께 무례한 표현이라고 생각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주여에서 ‘-는 호격조사이다. 호격조사는 고유명사나 인칭대명사가 누구를 부를 때 쓰일 수 있도록 해 주는 조사로, ‘/가 있다. ‘는 자음 뒤에, ‘는 모음 뒤에 쓰인다. 호격조사는 대개의 경우 친구 사이에서나 아랫사람에게 사용할 수 있다. ‘/의 존대형으로 /이여이시여가 쓰이기도 한다. 그러나 일상 대화에서는 잘 쓰이지 않고, 기도문이나 시적 표현 등에서 쓰인다(국립국어원, 한국어 문법1, 432쪽 참조). 이렇게 볼 때 주여라는 표현은 문법적으로 틀린 것은 아니나, 일상의 언어로는 어색한 표현이다. 자기의 아버지나 어머니를 부를 때 아버지여’, 또는 어머니여라고 부르지 않은 것과 같다. 여기서는 ‘-라고 하는 호격 조사를 써서 주여하는 것보다는 주님이라고 하는 것이 더 좋을 것 같다.

   ‘당신이란 말은 2인칭대명사로 쓰일 때와 3인칭 재귀대명사로 쓰일 때에 상대방을 높이는 정도에 차이가 있다(국립국어원, 한국어문법1, 380쪽 참조). 당신은 누구십니까?”라고 할 때에는 조금 높이는 뜻이 있다. “당신 요즘 피곤하시죠?”라고 할 경우에는 부부 사이에 상대방을 높여 부르는 뜻이 있다. “당신이 뭔데 남의 일에 참견하는 거야.”는 상대방과 싸우면서 상대방을 낮추어 말할 때 쓴다.

   ‘당신3인칭 재귀대명사로 쓸 때에는 아주 높이는 뜻이 있다. 재귀대명사란 체언을 도로 나타내는 삼인칭 대명사로, ‘자기당신따위가 있다. “할아버지께서는 생전에 당신의 책을 소중히 다루셨다.”라고 할 때에는 할아버지를 아주 높여 이르는 말이다. 실로암에서 하나님을 향하여 주여하고 불렀으니, ‘당신2인칭 대명사로, 낮추거나 조금 높이는 표현이다. ‘, 주님은 하나님 또는 예수님을 이르는 말이다. 따라서 주여 당신께는 아주 높여야 할 주님에 대한 표현으로 적합하지 않다. ‘주님, 주님께라고 하면 좋을 것이다.

   전해 오는 말 중에 아는 게 병, 모르는 게 약이라는 말이 있다. 국어에 대한 지식이 전혀 없어 몰랐더라면 주여 당신께란 표현이 마음에 걸리지 않았을 것이다. 감동적인 찬송을 부르면서도 적절하지 않은 표현이 마음에 걸리는 것은 어법에 관해 조금 아는 게 병이 된 탓이리라. 많은 사람들은 이 구절을 아무 저항감 없이 부를 것이다. 그런데 이 찬송 구절에 마음을 쓰는 것은 내가 편협한 때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기도 한다. 그러면서도 작사자는 조금 더 유의하여 가사를 쓰고, 그 곡을 부르는 사람은 잘못된 부분을 고쳐서 부르는 기본 지식을 가졌으면 좋겠다는 희망은 버리지 못한다

      <우리말 바로 알고 바로 쓰기(10)>

무데뽀, 앗싸리, 부락, 엑기스와 같은 말은 쓰지 말아야

 

  며칠 전에 사람들이 모여서 대화하는 중에 다음과 같은 말이 오가는 것을 들었다. “그렇게 무데뽀로 덤비지 말고 잘 생각해 봐./ 그 사람은 정말 무데뽀.” “그 사람 정말 앗싸리하더라./ 그 일은 질질 끌지 말고 앗싸리하게 거절해.” 이런 대화에 나오는 무데뽀앗싸리는 일본어이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우리말인 줄 알고 쓰고 있다.

 

  ‘무데뽀(むてっぼう)’무철포(無鐵砲)’라는 한자어에서 온 말로, 아무데나 마구 쏘아대는 대포를 뜻한다. 이 말은 그 방향과 시각을 정하지 않고 맹목적으로 마구 쏘아대는 대포처럼 앞뒤 생각 없이 무슨 일을 하거나, 분별없이 경솔하게 행동하는 것 또는 그런 사람을 빗대어 표현하는 말이다. 이에 해당하는 우리말로는 무턱대고/저돌적또는 무모한 사람이 있다. 그러므로 위의 대화는 그렇게 무턱대고(저돌적으로) 덤비지 말고 잘 생각해 봐./ 그 사람은 정말 무모한 사람이야.”로 바꿔 쓰는 것이 좋겠다.  ‘앗싸리(あっさり)’담박하게/산뜻하게/시원스럽게의 뜻을 가진 일본어이다. 이에 해당하는 우리말로는 산뜻하게/ 담박하게/ 시원스럽게/ 깨끗하게/ 간단하게가 있다. 그러므로 위의 대화는 그 사람 정말 시원스럽더라./ 그 일은 질질 끌지 말고 깨끗하게 거절해.”로 바꿔 쓰는 것이 좋겠다.

 

   요즈음에도 시골에 가면 자기가 사는 마을을 ‘00부락(部落)이라고 하는 사람이 많이 있다. 이 말은 일제강점기에 일본인들이 우리나라 사람들이 사는 마을을 격하시키기 위해서 의도적으로 부른 이름이다. 지금도 일본에서는 수준이 낮은 사람들이 사는 마을을 부락이라고 한다. 일본인들은 한국인들이 많이 사는 마을을 ‘00부락이라고 하는데, 그 마을을 얕잡아보려는 의도가 깔려 있다. 우리는 이러한 뜻을 지닌 부락이라는 말을 버리고 마을/동네로 쓰는 것이 좋겠다.

 

   많은 사람들이 인삼 엑기스/매실 엑기스라고 하여 엑기스란 말을 우리말처럼 쓰고 있다. 이 말은 진액/추출액의 뜻을 가지고 있는 영어 엑스트랙트(extract)’에서 나온 말이다. 일본인들은 이 말을 제대로 발음하기 어려우니까 엑기스라고 줄여서 말하였다. 이를 그대로 받아들여 우리가 일상용어처럼 쓰고 있다. 한국인은 어떤 외국어도 자유롭게 발음할 수 있으므로 굳이 일본식 영어를 따라 하지 말고, 영어의 원음 그대로 엑스트랙트라고 하거나 줄여서 엑스라고 하는 것이 옳다. 그러나 영어의 엑스트랙트나 엑스보다는 같은 뜻을 가진 우리말 농축액/진수/진액이라고 하는 것이 좋겠다.

<기독교타임즈 제451, 2006. 11. 25.>

 

<우리말 바로 알고 바로 쓰기(9)>

다 같이 기도합시다예배 처음 시간이오니는 부적절한 말

 

 

  대개의 교회에서는 주일 예배 시간에 장로님이나 권사님이 회중을 대표하여 기도를 하는 순서가 있다. 대표 기도를 하는 사람을 보면, 앞에 나가서 바로 기도의 내용을 말한다. 그러나 다 같이 (경건한 마음으로) 기도합시다.’ 하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 이것은 적절하지 않다

 

   예배에 참석한 교인들은 사회자가 기도 순서임을 말하여 알거나, 혹은 말하지 않더라도 주보를 보고, 기도 순서가 되었음을 알고 있다. 그래서 모두 눈을 감고 기도하는 자세를 취한 뒤에 마음을 가다듬고, 기도의 말이 나오기를 기다린다. 그런데 한참 뒤에 들리는 첫 말이 다같이 (경건한 마음으로) 기도합시다.’라고 한다면 조금은 당황스럽게 된다. 이러한 엇박자는 교인들로 하여금 대표 기도자의 기도에 집중하지 못하게 하는 결과를 가져온다. 대표 기도를 맡은 사람은 이런 불필요한 말을 하지 말고, 바로 기도의 내용을 말하는 것이 좋겠다.

 

   기도 중에 지금은 예배 처음 시간이오니~또는 이제 예배를 시작하오니~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 이것은 잘못된 것이다. 예배는 예배 순서를 맡은 분들과 성가대의 입장에 이어 사회자의 예배 시작을 알리는 말로 시작된다. 대표 기도는 예배가 시작되어 조용한 기도(묵도), 성가대의 송영(頌榮), 예배에의 부름, 찬송, 성시 교독 다음에 하는 것이 보통이다. 그런데 대표 기도를 하는 사람이 지금은 예배 처음 시간이오니라고 한다면, 기도하기 전까지의 모든 순서는 예배가 아닌 것이 되고 만다. 그러므로 이것은 잘못 말한 것이다.

 

   또 어떤 사람은 예배의 시종(始終)을 주께서 주관하여 주시옵소서.’ 하고 기도하기도 한다. 예배는 이미 시작되었으므로 이 말 역시 적절하지 않을 뿐더러 할 필요가 없는 말이다. 꼭 하고 싶으면 이 예배를 마칠 때까지 주께서 주관하시고, 홀로 영광 받으시옵소서.’라고 하는 것이 좋겠다. 예배 시작 전에 부르는 찬송을 준비 찬송이라고 하는 사람이 있다. 찬송은 하나님을 찬양하는 노래이다. 하나님을 찬양하는 데에 준비 찬송이 있고, 본 찬송이 있을 수 없다. 예배 시작 전에 찬송을 부를 경우에도 준비 찬송이라 하지 말고, ‘몇 장 찬송으로 하나님을 찬양합시다.’라고 하면 좋을 것이다.

 

<참고문헌>

이송관김기창, 교회에서 쓰는 말 바로 알고 바로 쓰자, 서울 : 예찬사, 2000.

<기독교타임즈 제450, 2006. 11. 18.>

 

<우리말 바로 알고 바로 쓰기(8)>

 너무 좋아요(감사합니다/예뻐요).’는 잘못된 표현

 

   교인들 중에는 예배가 끝난 직후에 목사님께 설교 말씀이 너무 좋았어요.” 하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 어떤 사람은 자기에게 도움을 준 장로님께 너무 감사합니다.”라고 인사한다. 어떤 사람은 어린아이를 데리고 온 집사님께 아이가 너무 예뻐요.”라고 칭찬의 말을 한다. 이런 말은 교인뿐만 아니라 일반인들도 많이 쓰는데, 실은 잘못 표현한 말이다.

 

  ‘너무정도나 한계에 지나치게/ 분에 넘치게/ 과도하게의 뜻을 나타내는 부사이다. 따라서 이 말의 한정을 받는 말은 부정적 의미를 지니게 된다. ‘참외가 너무 익었다.’고 하면, ‘참외가 지나치게 익어서 먹을 수 없다./ 참외가 곯아서 먹을 수 없다.’는 말이다. ‘오늘 날씨가 너무 춥다.’고 하면 날씨가 지나치게 추워서 견디기 어렵거나 활동하기가 어렵다.’는 말이다.

 

  위에 적은 설교 말씀이 너무 좋았어요.’는 설교 말씀이 지나치게 좋아서 오히려 문제가 된다는 말이다. ‘장로님, 너무 감사합니다는 장로님의 친절이나 호의가 지나쳐서 과잉친절을 하였다는 말이 된다. ‘아이가 너무 예뻐요.’는 아이가 지나치게 예뻐서 좋지 않다는 말이다. 지나친 것은 미치지 못하는 것과 같다(過猶不及). 그러므로 앞의 말은 설교 말씀이 매우 좋았어요.’, ‘대단히 고맙습니다.’, ‘아주 예뻐요.’라고 하면 말하는 사람의 뜻을 온전히 드러내는 바른 표현이 된다. 교인들 중에는 목사님의 말씀에 너무 은혜를 받았어요.’라고 하는 사람도 있다. 이 말은 은혜를 지나치게 많이 받아서 감당할 수 없어 문제가 생겼다는 말이다. 이런 인사는 목사님께 대한 치하라기보다는 걱정을 끼쳐드릴 말이다. 이때에는 너무 대신에 많은이나 을 넣어 많은() 은혜를 받았습니다.’라고 해야 바른 표현이 된다.

 

  어른들 중에 이 꽃은 너무너무 예뻐요.’라고 하거나, ‘걔는 너무너무 잘 생겼어요.’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 ‘너무너무너무를 강조한 표현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첩어(疊語)에 의한 강조는 아동 언어의 특징이므로 어른들이 이런 말을 쓰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 ‘너무너무란 말 대신에 매우/ 아주를 넣어 쓰는 것이 좋겠다. 이 말은 너무너무 미워.’, ‘홍수의 피해가 너무너무 비참하였다.’와 같이 한정을 받는 말이 가치개념으로 보아 부정적인 것일 때에는 써도 좋다.

<참고문헌>

박갑수, 우리말의 허상과 실상, 서울 : 한국방송사업단, 1983.

                                                                        <기독교타임즈 제448, 2006. 11. 4.>

<우리말 바로 알고 바로 쓰기(7)>

감사(축하)드립니다’는 감사(축하)니다’로 써야 

 

  손윗사람에게 고맙다고 인사하면서 감사드립니다라고 하는 사람이 많이 있다. 이런 언어 습관이 널리 퍼져서 교인들이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 베풀어주신 은혜와 복에 감사드립니다.”라고 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것은 적절한 표현이 아니다. 감사(感謝)는 한자어로 고맙게 여김. 또는 그런 마음. 고마움을 나타내는 인사의 뜻을 가진 명사이다. 여기에 접미사 하다가 붙어 동사가 되었다. 고마움을 나타내는 것은 내 마음의 표현이지 드리는 것이 아니다. 말씀은 드린다고 할 수 있지만, ‘감사는 드리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손윗사람이나 하나님께 고마움을 나타낼 때에는 감사합니다라고 말해야 한다. ‘드린다는 말을 넣어 말한다고 하여 공경의 뜻이 더해지는 것은 아니다.

 

   남의 좋은 일을 기뻐하고 즐거워한다는 뜻으로 인사할 때 축하드립니다하고 말하는 사람을 많이 본다. 그러나 이것 역시 적절한 표현이 아니다. ‘축하역시 드리는 것이 아니고, 내가 축하하는 마음을 드러내는 것이다. 그러므로 '축하드립니다'라고 말하는 것보다는 축하합니다라고 말하는 것이 적절한 표현이다. '축하'란 말 뒤에 '드린다'는 말을 넣어 말한다고 하여 공경의 뜻이 더해지는 것이 아니다. 

  

   기도할 때 감사하신 하나님이라고 하는 사람이 있다. 이 말은 기도하는 사람이 하나님께 감사한다는 뜻으로 한 말일 것이다. 그런데 말한 의도와는 다르게 하나님이 사람에게 감사한다는 말이 되었다. 그러므로 감사하신 하나님이라고 하지 말고, 고마우신 하나님이라고 해야 한다. '고맙다'와 '감사하다'는 같은 뜻의 말이지만, 쓰이는 자리에 맞게 구별해서 써야 한다. 기도할 때 고맙고 감사하신 하나님이라고 하는 사람도 있는데, 이것은 같은 말을 중복한 것이므로 적절하지 않다.

 

   기도할 때 하나님께 감사영광돌립니다라고 하는 사람이 있는데, 이 역시 옳지 않다. 이 말에서 감사영광을 받아 서술하는 말은 돌립니다’가 된다. 빛나고 아름다운 영예는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므로 영광을 하나님께 돌릴 수 있다. 그러나 감사는 기도하는 사람이 하나님께 감사하는 마음을 드러내는 것이므로 하나님께 돌린다고 하는 것은 옳지 않다. 이 말은 감사하옵고, 영광을 하나님께 돌립니다.’라고 해야 한다.

<참고문헌>

이송관김기창, 교회에서 쓰는 말 바로 알고 바로 쓰자, 서울 : 예찬사, 2000.

리의도, 말을 잘하고 글을 잘 쓰려면 꼭 알아야 할 것들, 서울 : 설필, 1997.

                                                                     <기독교타임즈 제447, 2006. 10. 28.>

<우리말 바로 알고 바로 쓰기(6)>

‘십팔 번’은 ‘애창곡’, ‘즐겨 부르는 노래’, ‘장기’로 써야

 

 

  어느 학술 발표 모임에 참석하였을 때의 일이다. 식사 후에 오락회가 열렸는데, 진행을 맡은 사람이 참석자에게 노래를 하라면서 이렇게 말했다. 다음에는 000님이 십팔 번 ×××을 부르겠습니다.” 진행자는 십팔 번(十八番)’이란 말을 그가 즐겨 부르는 노래의 뜻으로 쓴 것 같다. 이 말은 기독교인들의 모임에서도 흔히 듣는다. 교인 몇 명이 모여 예배를 드릴 때에 한 사람이 “000 집사님의 18번인 000장을 부릅시다.” 하고 제안하기도 한다교인들끼리 돌아가며 찬송가나 가곡, 가요를 부르는 자리에서도 십팔 번이란 말은 자연스럽게 나온다.

 

  전에 인기를 끌었던 대중가요 <라구요>의 가사 중에 우리 아버지 십팔번은 000이구요, 우리 어머니 십팔번은 000”이란 구절이 있다. 이 노래는 방송 전파를 타고 널리 퍼졌다. 이 말은 일부 국어사전에도 가장 자랑으로 여기는 재주’, ‘가장 잘 부르는 노래’, ‘장기(長技)’라고 설명되어 있다. 그러나 이 말은 일본에서 들여온 관용어로, 별로 달가운 연원을 가진 말이 아니다.

 

  십팔 번은 일본어 쥬우하찌방(十八番)’을 이르는 것이다. 후지이(藤井之男)가 엮은 <언어대사전(諺語大辭典)>에 보면, 이 말은 배우 이찌까와 단쥬우로우가(市川團十郞家)에 전하는 18종의 예()가 있는데, 무릇 자랑으로 하는 일을 이름이라고 되어 있다. 이찌가와 단쥬우로(1660~1704)는 이찌가와가(市川家)7세손으로, 17세기 에도(江戶) 전기에 일본 전통 희극인 가부끼(歌舞伎)의 대표적 배우였다. 그는 이찌가와가의 7대에 성공한 열여덟 가지 예()를 정리하였다. 이것이 가부끼 쥬우하찌방(歌舞伎十八番)’이라 하는 것이다. 여기서 일본 사람들이 가장 장기로 하는 예쥬우하찌방이라 이르게 되었다. 이 말이 우리나라에 전해지면서 십팔 번이 된 것이다.

 

  일본 가부끼에서 유래한 십팔 번을 우리의 노래나 연희에서 그대로 쓰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 노래를 말할 때에는 애창곡(愛唱曲)’, ‘즐겨 부르는 노래또는 잘 부르는 노래라고 하는 것이 좋겠다. 노래가 아닌 춤이나 연희일 때에는 장기(長技)’라고 하는 것이 좋겠다. 우리말을 아끼고 사랑하는 마음에서 불필요한 일본어는 쓰지 말아야겠다. 

 

참고문헌: 박갑수, 우리말의 오용과 순화, 서울 : 한국방송사업단, 1984.

박숙희, 반드시 바꿔 써야 할 우리말 속 일본말, 서울 : 한울림, 1996.

                                      <기독교타임즈 제446, 2006. 10.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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