셀축은 이즈미르(İzmir)에서 남쪽으로 약 70km 떨어진 곳에 있는, 인구 약 25,000명의 도시이다. 셀축은 가까이에 에페스(에베소)가 있고, 많은 참배객이 찾아오는 아르테미스 신전이 있는 곳이어서 고대로부터 역사의 중심지로 이름이 있다. 셀축은 바울 사도가 전도 여행 중 가장 오래 머물렀던 곳이고, 성모 마리아의 집과 성 요한 교회 등이 있어서 기독교 역사에서도 매우 중요하게 여기는 곳이다.

   셀축은 아야슬룩 언덕에 자리 잡고 있는 평화로운 도시인데, 둘레에 있는 관광 명소를 찾기 위해 세계 여러 나라의 관광객이 찾아온다. 이곳은 활기가 넘치는 관광 명소라기보다는 관광객이 며칠 동안 머물면서 주변 관광을 하는 베이스 캠프(base camp)로 삼기에 아주 좋은 곳이다.

에페스 고고학 박물관(Efes Arkeoloji Müzesi)

   셀축 시내에 있는 이 박물관에는 에페스 유적에서 출토된 유물들이 전시되어 있다. 전시실은 모두 6개인데, 출토 장소와 종류에 따라 구분하여 전시하고 있다1전시실에는 테라스식 주택에서 캐낸 저울, 장신구, 화장품 상자 등이 전시되어 있다. 거기에 거대한 남근을 자랑하는 조각상이 있어 눈길을 끌었다. 그 조각상은 다산(多産)의 신 프리아포스(Priapos)이다. 프리아포스는 디오니소스와 아프로디테의 아들로 그 지역과 농토, 포도밭을 지켜주는 신이다. 과장된 남근은 풍요의 상징이다.

다산의 신 프리아포스

로마 시대의 주화

   다른 전시실에는 주화(鑄貨), 장례용품, 조각상 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한 전시실은 에로스(Eros)를 묘사한 조각들로 채워져 있다. 에로스는 사랑의 신으로, 활과 화살을 가진 나체의 어린이로 나타나는데, 그가 쏜 금화살을 맞으면 사랑에 빠지고, 납화살을 맞으면 증오하게 된다고 한다. 이 전시실에는 에로스의 역할을 드러내는 조각상이 많이 있다. , 거대한 도미티아누스 황제의 머리와 팔도 볼 수 있었다. 소크라테스 룸도 있어 소크라테스의 생활 모습을 짐작할 수 있게 해 주었다. 또 다른 전시실에는 검투사들이 사용하였던 무기와 훈련 방법, 이들이 주로 당했던 부상의 유형 등을 보여 주었다.

사랑의 신 에로스  

가장 관심을 끄는 것은 제6전시실의 아르테미스 상이다. 이 전시실에는 아르테미스 여신의 조각상이 양쪽에 하나씩 둘이 있는데, 좀 작은 것은 프리티네이온에서 발견된 것을 옮겨온 것이고, 조금 큰 것은 아르테미스 신전의 것을 축소하여 복제한 것이다. 여신의 조각상의 좌우에 있는 동물과 머리에 쓰고 있는 것은 아나톨리아의 지모신 키벨레를 떠올리게 한다. 여신의 가슴에는 둥근 알 같은 것이 20여개 달려 있다. 이것은 꿀벌의 알 또는 황소의 고환이라고 하는데, 풍요의 상징이다. 배 부분에는 사자, , 꿀벌, 장미, 그리핀(griffin, 머리·앞발·날개는 독수리이고, 몸통·뒷발은 사자인 상상의 동물) 등이 조각되어 있는데, 이것 역시 풍요를 나타낸 것이다. 나는 박물관을 둘러보면서 고대인들이 사랑, 풍요에 대한 갈망이 매우 컸다는 것을 다시 한 번 느꼈다

아나톨리아의 지모신 키벨레 여신상

프리티네온에서 발견된 아르테미스 여신상  

                       아르테미스 신전에 있던 아르테미스 여신상

요한 사도 교회

   예수의 열두 제자 중의 한 사람인 요한 사도를 기리기 위해 세운 교회이다. 요한은 두 차례에 걸쳐 에페스에 왔다. 한번은 서기 37년에서 48년 사이에 어머니를 보살펴 달라는 예수의 부탁을 받은 요한이 성모 마리아를 이곳으로 모시고 와서 살았다. 로마의 도미티아누스 황제는 요한이 자기의 신전에 참배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파트모스(밧모)섬으로 귀양 보냈다. 요한은 귀양에서 풀려나온 뒤인 서기 95년에 다시 와서 지금 요한 사도 교회가 있는 아야술룩(Ayasuluk) 언덕에서 복음서를 집필하며 살다가 세상을 떠났다. 요한 사도 교회는 4세기경에 요한의 무덤이 있던 자리에 세운 것이다. 이 교회는 6세기에 비잔틴 제국의 황제 유스티아누스(Emperor Justianus, 재위 A.D. 527-565) 황제가 대대적으로 증축하였다.

   이 교회는 가로 110m, 세로 140m 넓이의 땅에 6개의 돔으로 되어 있었다. 교회는 안뜰, 현관, 본당, 부속 예배당, 세례장의 다섯 부분으로 되어 있다. 본당의 제단에는 복음서의 저자들을 상징하는 4 개의 기둥과 삼위일체(三位一體)를 상징하는 3개의 기둥을 세웠다. 교회 안에는 4세기경에 나무로 지은 작은 예배당과 요한 사도의 무덤이 있다. 예전에 예배당으로 사용하였던 목조 건물 안에는 예수, 성모 마리아, 요한의 프레스코화가 그려져 있다. 요한 사도 교회는 지진과 약탈 등으로 오랜 세월 폐허로 남아 있다가 100여 년 전에 복원공사가 이루어졌다. 교회 뒤편에는 교회 평면도와 복원 모형이 있어 당시의 웅장한 모습을 짐작할 수 있게 해 준다.

 요한사도교회 입구에 있는 박해의 문 

요한사도교회

                               요한사도교회 복원도

  요한 사도 기념교회를 가기 위해서는 박해의 문을 지나서 올라가야 한다. 박해의 문이 세워진 데에는 깊은 사연이 있다. 기독교가 공인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이 지역의 기독교인들은 한편으로는 기쁨과 감사의 벅찬 감동을 느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사랑하는 가족과 친척, 친지를 박해하여 죽게한 사람들에 대한 분노와 복수의 감정이 끓어올랐다. 그들은 복수를 위해 돌멩이를 들고 원형경기장으로 몰려갔다. 그러나 그 돌을 던지지 않고, 요한 사도의 무덤 앞에 모아 박해의 문을 세웠다.

   나는 요한 사도 기념교회에 들어갈 때와 나올 때에 박해의 문을 지나면서 박해를 받아 죽던 옛 신도들의 처참한 모습을 그려 보았다. 그리고 복수를 위해 돌을 들고 원형경기장으로 달려가던 성난 신도들의 모습을 상상해 보았다. 성난 신도들이 복수를 위해 돌을 던지지 않고 자제한 뒤에 복수의 문을 쌓게 된 힘은 어디서 왔을까? 사랑하는 가족과 친척, 친지를 죽인 사람들에 대한 복수를 멈추게 한 것은 바로 요한 사도가 가르친 사랑때문이었을 것이다. 성난 신도들이 자제하지 않고 복수의 돌을 던졌다면, 유혈 사태가 벌어졌을 것이고, 기독교의 복음은 허구라는 비판을 받았을 것이다. 그랬다면 그 사건은 기독교 발전에 큰 변수가 되었을 것이다. 이렇게 생각하니 요한 사도가 힘주어 가르친 사랑의 힘은 위대한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요한사도교회의 세례소

                                요한 사도의 묘


아르테미스(Artemis) 신전

  
이오니아인들이 이 지역에 왔을 때, 전부터 살고 있던 렐레기안(Leleggian) 족은 풍요(豊饒)와 자연의 여신 키벨레(Cybele)’를 숭배하였다. 이오니아인들은 선주민들과 평화롭게 융화하면서 이 지역의 토속신앙인 키벨레 신앙을 받아들여 에페수스의 아르테미스신앙을 탄생시켰다. 이것은 사냥과 관계가 깊은 일반적인 그리스 신화 속 여신 아르테미스가 아닌 다산(多産)과 풍요를 상징하는 에페수스(에베소)만의 독특한 아르테미스 신앙이다. 사람들은 이 여신을 모시고 제사하기 위하여 아르테미스 신전을 세웠는데, 규모가 웅장하고, 아름답기로 유명하다. 원근 각지의 주민들은 이 신전에 와서 절하며 건강과 풍요를 기원하였다.

   이 신전은 B.C. 356년 헤로스트라투스(Herostratus)라는 사람이 불을 질러 불에 탔다. 그런데 그가 신전에 불을 지른 이유는 유명해 지고 싶은 마음에서였다고 한다. 이 신전이 불타던 날 밤에 알렉산더 대왕이 태어났다. 전설에 의하면 아르테미스 여신은 이날 밤 알렉산더의 출생을 축하하기 위해 마케도니아의 수도에 가 있었기 때문에 자기의 신전에 불에 타는 것을 막지 못하였다고 한다.

   알렉산더 대왕이 기원전 334년에 이곳에 도착하여 보니, 신전을 다시 짓는 공사가 한창이었다. 알렉산더는 공사비용을 자기가 부담할 터이니 신전을 자기 이름으로 바치게 해 달라고 하였다. 에페수스 사람들은 자기들이 진심으로 믿고 의지하는 아르테미스 신전을 알렉산더 이름으로 바치는 것에 동의할 수 없었다. 그래서 신이 또 다른 신에게 신전을 바친다는 것은 적절한 일이 아닙니다.’ 하는 재치 있는 말로 거절하였다. 신전은 알렉산더 대왕 사후에 완공되었는데, 그리스 아테네의 파르테논 신전보다 크고 웅대하였다. 이 때 지은 신전은 고대 세계 7대 불가사의의 하나가 되었다. 이 신전은 옛날의 웅장한 모습은 볼 수 없고, 기둥 하나만 외롭게 서 있다.

성모 마리아의 집

   성모 마리아의 집은 셀축에서 약 11km, 에페스(에베소)의 아래쪽 정문(북쪽문)에서 약 8.5km, 위쪽 정문(남쪽문)에서 약 7km 거리에 있는 뷜뷜산(Bülbül Dağı)에 있다. 이 집은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가 에페스에 정착하여 세상을 떠날 때까지(A.D. 37-48) 살았던 곳이다.

   신약 성경 요한복음(19:26-27)을 보면, 예수께서는 돌아가시기 전에 어머니 마리아에게 어머니, 이 사람이 어머니의 아들입니다.” 하고 말씀하시고, 제자 요한에게 이분이 네 어머니시다.” 하고 말씀하셨다. 예수의 당부를 받은 요한은 그 때부터 마리아를 자기 집으로 모셨다고 한다.

   예수께서 돌아가신 뒤에 예루살렘에서는 기독교인에 대한 박해가 심하였고, 가뭄과 기근이 극심하였다. 그래서 많은 유대인들이 예루살렘을 떠났다. 그 때 요한은 마리아를 모시고 수리디아 안디옥 즉 지금의 터키 안타키아(안디옥)로 갔다가 에페스(에베소)로 왔다. 에페스에 온 요한은 마리아를 조용한 곳에 집을 짓고 사시게 하였다고 한다.

   마리아가 에페스에 온 것은 확실하지만, 그녀가 살던 집이 어디에 있었는지는 잘 몰랐다. 지금의 마리아의 집을 발견한 것은 독일인 수녀 캐더린 에머리히(Catherine Emmerich)1878년에 펴낸 성모 마리아의 생애라는 책에 의해서이다. 케더린 수녀는 이 책에서 병상에서 마리아의 환상을 보고, 꿈속에서 살던 집을 보았다.’고 하였다. 이를 근거로 1891년 이즈미르의 성직자들이 탐사(探査)하여 숲속에서 옛 집터를 발견하였는데, 이 책에 기록된 것과 거의 일치하였다고 한다. 그런데 캐더린 수녀는 태어나서 한 번도 독일을 떠난 적이 없었다고 하니, 정말 놀라운 일이다. 이곳에 있던 집은 6세기경에 지어진 것인데, 일부는 1세기경의 것으로 밝혀졌다. 마리아의 집에 대해서는 많은 논쟁이 있었다. 1961년 교황 요한 23세는 성모 마리아의 집의 위치에 대한 논쟁을 종식시키고, 이 집터를 성지(聖地)로 선포하였다. 1967년 교황 바오로 6세가 이곳을 방문한 뒤에 많은 기독교 신자들이 이곳을 방문하고 있다.

                           마리아의 집으로 가는 길가의 마리아상

   나는 200911월에 승용차를 빌려 타고 이곳에 갔다. 마리아의 집으로 올라가는 꼬불꼬불한 산길의 양편에는 올리브나무와 무화과 나무가 울창하였다. 올라가는 길가에는 성모 마리아의 동상이 에페스 유적지를 내려다보고 서 있다. 그 옆에는 마리의 집 방문 시간(08:00-19:00)을 적고, 그 아래에 앞으로 6km를 더 가라는 말을 적은 안내판이 서 있다.

   마리아의 집 입구에는 올리브나무와 키가 큰 소나무들이 늘어서 있었다. 기념품 가게를 지나 조금 더 걸어가니, 커다란 웅덩이가 보이는데, 옛날 세례를 행하던 곳이다. 깊이가 1.5m쯤 되어 보이는 이 웅덩이는 꽤 넓어서 한꺼번에 50여 명이 들어갈 수 있을 것 같았다. 거기서 조금 앞으로 가니, 두 길이 있었다. 위로 난 길은 들어가는 사람들이, 아래에 있는 길은 나오는 사람들이 이용하도록 만들어 놓았다. 위로 난 길을 따라 올라가니, 터키에 사는 교민들이 만들어놓은 한글 안내판이 서 있어서 무척 반가웠다.

                        마리아의 집 앞에 있는 한글 안내판

                                 마리아의 집 앞의 마리아상

교회는 규모가 그리 크지 않고 아담하였다. 교회 내부는 사진 촬영을 금하는 곳이므로 카메라를 가방에 넣고, 옷깃을 단정히 한 뒤에 안으로 들어갔다. 정면 강대상 뒤에는 성모 마리아의 그림이 걸려 있다. 은은한 불빛이 비치는 교회 안은 엄숙하고 경건함을 느끼게 하였다.

                                           마리아의 집

마리아의 집 앞에서 촛볼을 켜고 기도하는 사람들

                              마리아의 집 앞에 있는 소원의 벽

   교회 아래에는 성수(聖水)로 알려진 샘터가 있다. 그 옆에는 촛불을 켜놓고 소원을 비는 곳도 있고, 소원을 적은 쪽지를 걸어놓은 '소원의 벽도 있다. 소원의 벽에는 소원을 적은 종이와 헝겊이 잔뜩 걸려 있다. 그것은 외국인이 걸어놓은 것도 있지만, 무슬림인 터키인들이 걸어 놓은 것이 더 많다고 한다. 무슬림이 이곳에 와서 소원을 비는 것은 이슬람교 경전인 코란에 마리아를 선지자 예수(İsa Peygamber)의 어머니(Meryemana)’로 기록하였으므로, 마리아를 거룩한 여인으로 숭배하기 때문이라 하겠다.

   이곳에 온 사람들은 외국인인 듯한 사람이 많았지만, 터키인으로 보이는 사람도 많았다. 히잡을 쓰고 있는 것으로 보아 무슬림인 것이 확실한 여인들도 더러 보였다. 이러한 것으로 보아 이곳은 기독교인뿐만 아니라 무슬림들도 성지로 받드는 곳임을 알 수 있었다.

누가의 묘

   에페스(에베소) 유적지로 들어가는 주차장 옆에 누가의 묘가 있다. 누가의 묘에는 십자가 밑에 황소를 새긴 비석이 있다. 누가의 묘 앞에는 한글로 적은 안내판이 서 있다. 거기에는 누가의 행적과 누가의 묘 발견 경위 등이 적혀 있다.

   누가의 묘는 이오니아식 건축 양식을 따라 16개의 기둥을 세워 16m의 길이로 건축된 건물 옆에 있었다. 지금은 몇 개의 기둥만 보이는데, 원래 이 건물은 로마 시대에 유명 용사나 건강의 신을 숭배하기 위한 신전이었다. 이후 비잔틴 시대에 그 구조를 변형시켜 서쪽을 입구로 하고, 동쪽을 머리 방향으로 하여 예배 처소로 사용하였다. 1860년 영국의 고고학자 P.J. Wood가 오데이온을 발굴하던 중 귀가 길에 본건물의 일부인 십자가와 황소 모양이 그려진 비석을 보고 누가의 무덤임을 판정하였다. 누가의 묘는 잊혀져 있었는데, 이즈미르에 사는 교우들이 에페스 박물관에 누가의 무덤을 손질해 달라고 청하여 지금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누가는 헬라인으로 수리아 안디옥에서 살았다. 그의 아버지 엔자와 어머니 이리스는 로마의 판사 디오도로스 시리누스의 아버지인 푸리스쿠스의 종이었다. 푸리스쿠스는 누가의 아버지가 헌신적으로 일하다가 죽자 그의 가족을 해방하여 자유인이 되게 하였다. 누가는 디오도로스 시리누스의 딸 루불리아를 사랑하였는데, 그녀가 말라리아로 죽었다. 그는 자기의 애인을 앗아간 원수와 싸워 이기겠다는 생각으로 알렉산드리아로 가서 의학을 공부하였다.

   그는 거기서 감리엘이라는 유대인으로부터 하나님의 존재에 대해 알게 되었고, 예수에 깊은 관심을 갖게 되었다. 그 후 안디옥에서 복음을 전하던 바울을 만나 기독교로 개종하였다. 그는 바울의 친구이자 동역자, 개인 의사로 가까이 하면서 바울의 선교를 도왔다. 그는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을 기독교인으로 로마의 원로인 클레멘스 집정관에게 전해 주었다. 그는 데살로니가에서 복음을 전하다가 우상을 숭배하는 사람들에게 붙잡혀 올리브 나무에 목매달려 죽임을 당했다고 한다. 그후 누가의 시신은 요한 사도가 사역하는 에페스에 묻혔다고 한다.

                                   누가의 묘 비석

7인의 잠자는 동굴(Yedi Uyunlar Mağarası)

   마리아의 집에서 에페스로 가는 길에서 조금 들어가면 잠자는 7인의 동굴이 있다. 이 동굴에는 아주 재미있는 전설이 전해 온다.

   A.D. 3세기 중엽 로마 데키우스(Decius) 황제가 기독교를 몹시 탄압하였다. 7인의 기독교인이 박해를 피하여 파나이오르 산(Panayır Dağı) 북동쪽에 있는 동굴로 들어가 쉬다가 잠이 들었다. 데키우스 황제의 수하들은 이 동굴을 발견하고, 벽을 쌓아 동굴 입구를 막아버렸다.

   그로부터 200여 년이 지난 뒤에 이 지역에 지진이 발생하여 동굴 입구를 막았던 벽이 허물어졌다. 그 때 잠들었던 사람들이 잠에서 깨어났는데, 그들은 배가 몹시 고팠다. 그 중 한 사람이 마을로 내려가 보니, 아는 사람이 한 사람도 없었다. 그는 먹을 것을 사려고 가게에 들어가 가지고 있던 돈을 꺼내 놓았다. 가게 주인은 이 돈은 옛날에 쓰던 돈으로 지금은 쓰지 않는데, 어찌 이 돈을 내느냐?”고 물었다. 그가 사실대로 말하니, 가게 주인은 지금은 데오도시우스 2세 황제 시대로 종교의 자유가 있다고 하였다.

   이 일이 알려지자 데오도시우스 2세 황제는 이를 부활의 증거로 받아들이고, 이곳을 방문하여 부활하는 곳이라고 하였다. 7인이 돈독한 신앙을 지키며 살다가 죽자 이 동굴에 매장하였다. 그 후에 이곳에 교회를 지었으나 허물어져 지금은 교회의 모습을 볼 수 없다. 동굴에는 수많은 구덩이가 보이는데, 수도사들의 무덤이라고 한다. 이 전설은 이슬람교의 경전인 코란1810절 주()에도 기록되어 있다. 그래서 무슬림들도 이곳을 매우 중요하게 여긴다.

7인의 잠자는 동굴

7인의 잠자는 동굴 

            * 이 글은 2012년 8월 25일에 도서출판 '민속원'에서 간행한 <<터키 1000일의 체험>> 중 <터키 여행의 즐거움과 보람>에 실려 있음.


 

   에페스는 이즈미르(İzmir) 주의 셀축(Selçuk) 지역에 있는 고대 도시이다. 터키에서 세 번째 큰 도시인 이즈미르에서 남쪽으로 약 74km, 셀축에서 남쪽으로 3km 떨어진 곳에 있다. 터키에서 그리스·로마 시대의 유적이 가장 잘 보존된 곳이다. 성경에 나오는 에베소가 바로 이곳이다.

   에페스는 기원전 6,000년경 신석기 시대부터 사람이 살았다고 한다. 청동기 시대 이후로는 히타이트인의 거주지였는데, 그들은 이곳을 아파사르라 하였다. 에페스는 기원전 1,200년경에 그리스 지역에 살던 이오니아인들이 이곳 해안 지역으로 와서 정착하여 살면서 프리에네, 밀레투스와 함께 건설한 도시이다. 이오니아인들이 이 지역에 왔을 때, 거기에는 렐레기안(Leleggian) 족이 살고 있었는데, 그들은 풍요(豊饒)와 자연의 여신 키벨레(Cybele)'를 숭배하고 있었다. 이오니아인들은 자기들이 전부터 숭배하던 아르테미스 여신에 키벨레(Cybele)’ 신앙을 결합하여 에페스의 아르테미스신앙을 형성하였다. 이는 그리스 신화에서 사냥과 관계가 깊은 여신 아르테미스가 아니고, 다산과 풍요를 상징하는 에페스만의 독특한 아르테미스 신앙이다. 사람들은 이 여신을 모시고 제사하기 위하여 아르테미스 신전을 세웠는데, 그 규모가 웅장하고, 아름답기로 유명하였다.

   기원전 600년 무렵 에페스에는 아르테미스 신전을 찾는 신도들과 항구에서 상거래를 하는 상인들이 많이 모였으므로 매우 번화하였고, 그에 따라 도시가 크게 발전하였다. 그러나 리디아(Lydia)의 왕 크로이소스(Croesus)의 공격으로 도시가 크게 파괴되었다. 그래서 아르테미스 신전 남쪽의 내륙 지대로 옮겨 새 도시를 건설하였다. 그 후 에페스는 알렉산더 대왕이 이곳을 점령할 때까지 페르시아의 지배를 받았다. 알렉산더 대왕이 죽은 뒤에 그의 휘하 장군이었던 리시마코스가 이곳을 통치하였다. 그는 인근의 멘데레스 강에서 흘러오는 토사(土砂)가 쌓여 에페스가 항구의 기능을 잃게 되자 주민들을 내륙의 언덕 지대로 이주시켰다. 이곳이 바로 지금의 에페스 유적이 있는 곳이다. 에페스는 로마의 지배를 받으면서 크게 발전하여 전성기에는 인구가 25만 명이나 되는 소아시아 지역 최대의 도시가 되었다. 로마의 집정관 안토니우스는 이집트의 클레오파트라와 결혼한 뒤에 이곳에 와서 선물을 샀다고 한다. 에페스는 아르테미스 여신 숭배의 신앙이 강한 곳이었지만, 기독교가 전파되어 많은 기독교인이 살았다 바울 사도는 이곳에서 3년 가까이 지내면서 선교활동을 하였다. 요한사도는 성모 마리아와 함께 이곳에 정착하여 살면서 요한복음을 기술하였다.

   에페스 항구에 토사가 계속 쌓이자 역대 통치자들은 준설공사를 하고, 강의 물줄기를 돌리기까지 하였다. 그러나 토사의 유입은 막지 못하고 개펄과 습지만 늘리는 결과를 가져왔다. 습지가 많아지니 모기가 기승을 부리어 말라리아가 널리 퍼졌다. 기독교인이 늘어감에 따라 아르테미스 신전을 찾는 신도들이 줄어들고, 그에 따라 신전의 재정 상태도 나빠졌다. 7세기 무렵에는 강에서 유입되는 토사가 바다를 메움에 따라 에페스는 항구도시의 기능을 잃게 되었다. 그에 따라 에페스는 급속도로 쇠락하면서 도시의 중심을 아야술룩 언덕 지금의 셀축으로 옮겨 오늘에 이르고 있다. 지금은 남아 있는 유적을 통하여 찬란하였던 당시의 문화를 그려볼 수 있을 뿐이다.

   에페스 유적 관람은 북문 매표소로 들어가 남문까지 올라가면서 보아도 좋고, 남문 매표소로 들어가 북문까지 내려가면서 보아도 좋다. 에페스 유적을 본 뒤에 성모 마리아의 집에 가려면 남문 매표소로 들어가 북문 매표소로 나가는 것이 좋겠다. 나는 200911월과 20116월에 이곳을 찾았는데, 두 번 다 남문 매표소로 들어가 북문까지 내려가면서 관람하였다. 내가 본 순서대로 기억에 남는 곳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남문 매표소로 들어가니, 제일 먼저 나를 반겨주는 것은 한글로 에베소의 역사를 적은 안내판이었다. 먼 나라 터키에서 삼성로고가 그려진 한글 안내판을 보니, 발전하는 대한민국의 모습을 보는 것 같아 가슴이 뿌듯하였다.

   바리우스 목욕탕(Varius Bath)


   에페스에 들어서면 목욕탕이 제일 먼저 방문객을 맞는데, 이것은 다른 고대 도시의 경우와 같다. 먼 길을 여행하는 동안에 묻은 먼지와 병균을 씻고, 피곤한 몸을 쉬게 하려는 뜻에서일 것이다. 목욕탕에서는 아는 사람들을 만나 때를 씻고, 맛사지도 받으면서 사교(社交)를 하는 장소로도 이용되었다.

   1926년에 발굴된 이 목욕탕은 A.D. 1세기에 건립된 목욕탕으로 내부에 냉탕, 온탕, 미온탕, 탈의실, 사우나 등의 시설과 공중화장실이 있었다. 이 욕장은 한국의 온돌처럼 바닥 아래로 온기가 통하도록 되어 있다.

   위층 아고라(Upper Agora)

   '아고라'는 넓은 마당을 뜻하는 말이다. 아고라에서는 정치적 회의나 종교 의식을 치르기도 하고, 상품을 거래하기도 하였다. 에페스에는 남문 쪽과 북문 쪽에 아고라가 있다. 남문 쪽의 아고라는 폭이 약 73m, 길이가 약 160m인데, 주로 시청에서 주관하는 모임이나 행사가 열렸다. 북문 가까이에 있는 아고라는 상품 거래를 주로 하던 곳으로 남문 쪽 아고라보다 그 규모가 크다.

   남문 쪽에 있는 위층 아고라 앞에는 토관(土管)들을 쌓아 놓았다. 이 토관들은 이곳에서 캐낸 것으로, 당시에 도시 전체에 물을 공급하던 수도관이라고 한다. 에페스가 건설되던 B.C. 280년경에 사용하던 것이니, 이 토관들은 2,000년이 된 것이다. 2,000여 년 전에 이런 토관을 만들어 사용하였다고 하니,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바실리카(Basilica)

   '바실리카'는 로마 시대에 법정, 교회 따위로 쓴 장방형(長方形)의 회당(會堂)을 뜻하는 말이다. 여기서는 시 청사에서 바리우스 목욕탕까지 뻗어 있는 약 165m의 길을 말한다. 아우쿠스투스 황제 때 건립되었는데, 길 양쪽으로 이오니아식 기둥 위에 황소 머리 모양의 조각이 있었다고 한다. 지금은 기둥과 기단(基壇) 부분만 남아 있어 이를 확인할 수 없다.

   소극장   


    산언덕에 부채꼴 모양으로 펼쳐진 소극장이 있다. 1,400여 명을 수용할 수 있는 이 극장은 A.D. 2세기에 귀족 베디우스 안토니우스와 그의 부인 플라비아 파피아나 세웠다. 소극장은 지붕을 덮었었기 때문에 극장 안에 물이 빠져나갈 배수로(排水路)가 없다.

   이곳에서는 음악회나 시 낭송회 등이 열렸고, 원로회의 같은 정치적 회합도 열렸다. 모든 시민이 참가하는 대규모 회의는 북쪽에 있는 대극장에서 열리고, 이곳에서는 소규모의 공연과 대표자 회의가 열렸다.

   시 청사(Town Hall)

   소극장 옆에 에페스 시청 건물이 있다. 3세기에 완공되었는데, 중앙의 광장을 중심으로 도리아식 회랑(回廊)이 있었다. 광장의 중앙에 성화(聖火)가 있었는데, 에페스의 번영을 상징하는 것으로, 1년 내내 꺼지지 않았다고 한다. 타오르는 불은 번영을 상징한다고 여겼으므로, 신전의 사제나 도시의 원로가 관리하였다고 한다.

   1956년에 이곳을 발굴하다가 두 개의 아르테미스 여신상을 발굴하였는데, 여신상은 현재 셀축에 있는 에페스 고고학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쿠레테스 거리(Curetes Street)

   셀수스 도서관에서 헤라클레스 문까지 뻗어 있는 대로를 말한다. ‘쿠레테스는 원래 아르테미스와 아폴로를 낳은 레나 여신을 도왔던 반신반인(半神半人)을 가리키는 말이다. 그런데 에페스에서는 아르테미스 신전의 업무를 맡아보는 사제를 가리키는 말이 되었다. 이를 거리의 이름에 붙인 것이다.

   이 거리는 에페스의 중심 거리로, 양편에는 기둥으로 이어진 회랑(回廊)들이 있었고, 회랑 뒤에는 향료와 비단을 파는 상점들과 주택들이 즐비하였다. 줄지어 있는 원형 기둥 사이사이에 에페스 중요 인물들의 석상이 있다. 히드리아누스 신전, 공중화장실, 스콜라스티카 욕장(浴場), 트리아누스 샘 등도 이 거리에 자리 잡고 있다.

              도미티아누스 신전(Temple of Domitianus)

   이 신전은 A.D. 1세기에 로마의 도미티아누스 황제(재위 A.D. 81~96)에게 바친 신전이다. 도미티아누스 황제는 유능하였으나 독재 경향이 강하고, 남을 시기하고 의심하여 유력한 사람들을 처형하였다. 그는 2의 네로라고까지 불릴 정도로 포악한 정치를 하고, 기독교를 박해하였다. 그는 요한사도를 파트모스(밧모) 섬으로 귀양 보냈으며, 기독교에 관심을 가졌다는 이유로 자기 조카를 처형하였다. 그는 후일 가신들에게 피살당하였다.

   도미티아누스 황제는 자기를 신으로 받들어 모시도록 강요하였으므로, 그의 측근들이 이 신전을 지어 바쳤다. 이 신전은 가로 50m, 세로 100m의 큰 규모인데, 입구에는 7m의 황제 동상이 있었다. 황제가 죽자 신전은 바로 파괴되었다. 황제의 동상은 일부가 에페스 고고학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도미티아누스 황제는 자기를 신으로 받들어 모신 신전이 완성되자 신전 앞을 지나는 사람들에게 참배(參拜)하라고 하였다. 그런데 기독교인들은 신전 앞을 지나면서도 참배하지 않았다. 황제는 길 가는 사람들을 데려다 참배하게 하여 예수를 믿는 사람인지 아닌지를 구별하게 하였다. 예수님의 제자 요한도 이곳에 끌려와 참배를 강요당하였다. 요한이 끝내 참배하지 않자 요한을 기름 가마에 밀어 넣었다. 요한이 하나님의 섭리로 죽지 않자, 파트모스(밧모)섬으로 귀양 보냈다. 요한은 도미티아누스 황제가 죽은 뒤에 에페스로 돌아왔다.

   멤니우스 기념묘(Tomb of Memnius)

   헤라클레스의 문을 지나기 전에 있는 유적으로, 멤니우스를 기리기 위한 것이다. 멤니우스는 로마 집정관 술라(Sulla)의 손자로, 에페스의 발전에 큰 공이 있는 인물이다.

   헤라클레스 문(Gate of Heracles)

   쿠레테스 거리가 시작되는 곳에 사자 가죽을 어깨에 두른 남자를 새긴 기둥 2개가 있다. 이것이 헤라클레스의 문인데, 부조(浮彫)는 그리스 로마 시대의 영웅인 헤라클레스가 자신의 상징인 사자의 가죽을 어깨에 두르고 있는 형상이다. 원래 6개의 기둥에 아치가 있는 2층 문이었는데, 지금 남아 있는 것은 2개 밖에 없다. 이 문은 다른 문과 달리 폭이 좁은데, 이것은 수레의 통행을 제한하기 위한 것이다. 이 문을 지나면 대리석 도로가 나온다. 이 문 앞에 서면 도시가 한눈에 보인다.

   트라이아누스 분수(Fountain of Trajanus)

   A.D. 102~114년에 로마 트라이아누스 황제에게 바친 분수이다. 높이가 12m2층으로 된 이곳에 실제보다 3배쯤 더 크게 만든 트라이아누스 황제의 석상(石像)이 있었는데, 석상의 발끝에서 물이 흘렀다고 한다. 지금은 당시의 모습을 알 수 없고, 연못이 있었던 곳은 확인할 수 있다. 이곳에서 비너스, 세턴, 바커스 등의 신과 황실 가족의 조각이 발견되었는데, 에페스 고고학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스콜라스티카 목욕탕(Scholastica's Bath)

   하드리아누스 신전 뒤에 있는 큰 규모의 목욕탕이다. 3층 건물인 이 목욕탕은 2세기에 지어졌는데, 4세기까지 여러 번 수리되었다. 4세기에 스콜라스티카란 여인이 수백 명을 수용할 수 있는 규모로 증축하였다. 이 목욕탕의 이름 스콜라스티카는 이곳의 수리를 담당하였던 여인의 이름을 딴 것이다. 이 목욕탕에는 냉탕과 온탕 시설이 있었다. 공중탕과 함께 개인탕도 있었다.

   하드리아누스 신전(Temple of Hadrianus)

   A.D. 138년에 로마의 하드리아누스 황제에게 바친 신전이다. 이 신전은 에페스에서 셀수스 도서관 다음으로 널리 알려진 건축물이다. 이 신전은 도서관에 비하여 규모는 작지만, 코린트식 기둥과 아치의 조각이 아주 정교하여 인상적인 신전이다.

   건물 현관 입구에 4개의 기둥이 남아 있는데, 가운데에 있는 두 개의 기둥은 아치를 이루고 있다. 현관을 들어서면 정면 아치에는 행운의 여신 티케가 조각되어 있고, 그 안쪽에는 양팔을 벌린 메두사가 조각되어 있다. 그 아래에는 왼쪽부터 아테나 여신, 셀레나 신, 아폴로 신, 에페스를 건설한 안드로클루스, 헤랄테스, 데오도시우스 황제의 아버지, 데오도시우스 황제, 아르테미스 여신, 데오도시우스의 아내와 아들이 차례로 조각되어 있다. 신전 벽에는 에페스의 기원 전설이 새겨져 있다.

   이오니아를 다스리던 안드로클루스(Androclus)는 북쪽에 사는 도리아인의 끊임없는 침략에 시달리다가 남쪽으로 내려가서 새로운 왕국을 건설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는 떠나기에 앞서 델피(Delphi) 신전에 가서 어디로 가는 것이 좋을지 신탁을 내려 달라고 하였다. 그는 물고기, , 멧돼지의 도움을 받아 새 도시를 건설하라는 신탁을 받았다. 그는 백성들을 이끌고 터기의 서해안으로 왔다. 그가 바닷가에서 물고기를 굽고 있는데, 살아있던 물고기가 그릇 밖으로 튀어나오면서 숯불을 뒤엎었다. 이 때문에 근처 숲에 불이 나게 되었다. 그 때 숲에 숨어 있던 멧돼지가 놀라 뛰어나와 해변을 가로질러 도망갔다. 안드로클루스는 이 멧돼지를 뒤쫓아 가서 잡았다. 그는 멧돼지를 잡은 곳에 터를 잡고, 에페스를 건설하였다고 한다.

   하드리아누스 신전 맞은편에는 고급 주택의 터가 있다. 이곳은 고관들과 귀족들이 살았던 곳으로, 바닥을 모자이크화, 프레스코화로 화려하게 장식하였다. 7세기 무렵까지 사람이 살았던 흔적이 있다.

   공중화장실(Roman Man's Toilet)

   하드리안 신전 왼쪽에 50여 명이 동시에 사용할 수 있는 공중화장실이 있다. 중앙에 사각형 모양의 연못이 있고, 그 둘레에 대리석 변기와 작은 수로가 있다. 화장실 바닥은 모자이크가 있고, 수로에는 깨끗한 물이 흐르도록 설계되었다.

   자기 집에 화장실이 있을 터인데, 공중화장실을 지어놓은 것은 무슨 까닭일까? 공중화장실은 외출하여 거리에 나온 사람들을 위한 시설이겠지만, 당시에 여유 있는 사람들이 사교의 장으로 활용한 공간은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유곽(House of Love)

   고대의 매춘업소로 추정되는 유곽이 쿠레테스 거리와 대리석 거리가 만나는 모서리에 있다. 이 건물은 다수의 작은 방들이 정원을 둘러싸고 있는데, 4세기 무렵에 지어졌다. 매춘부들이 일을 하던 유곽에는 창문이 없었다. 당시의 방은 벽감(벽에 우묵하게 파놓은 부분) 위에 촛불을 두어 실내를 밝혔으며, 이 건물 바닥에는 사계절을 알리는 모자이크 들이 남아 있다. 대리석으로 만든 살롱에는 비너스 조각이 있었다.

   대리석 거리에는 유곽임을 알리는 안내판이 있는데, 대리석판에 머리를 단장한 여인의 얼굴, 하트 모양, 조그만 동그라미와 발 모양을 음각하였다. 이것은 인류 최초의 광고판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유곽의 안내판에 발을 그려놓은 것은 무슨 뜻일까? 이것은 대리석에 그려진 발보다 작은 사람 즉, 미성년자는 들어올 수 없음을 알리는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이곳을 찾은 남자들은 손과 발을 씻어야만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고 한다. 이것은 당시 사람들이 위생에 신경을 썼다는 것을 말해 준다.

   에페스의 유곽은 항구와 가까운 곳에 있다. 그러므로 오랜 기간을 바다에서 보낸 뱃사람이나 상인들이 편리하게 이용할 수 있었을 것이다. 당시 매춘은 지극히 정상적인 직업의 하나로 여겼다고 한다. 역사가들은 당시 에페스의 도시 규모에 비하여 유곽 건물이 아주 작은 것에 놀라움을 표했다고 한다.

   셀수스 도서관(Library of Celsus)

 

   셀수스 도서관은 대리석 거리의 끝에 위치한 아름다운 건물로, 에페스의 상징과 같은 건축물이다. 이 도서관은 2세기 중반에 로마의 아시아 주 총독이었던 셀수스를 기념하기 위해 그의 아들이 지은 것이다.

   2세기 초반에 로마 황제는 셀수스 폴레마이누스(Celsus Polemaeanus)를 소아시아 총독으로 임명하였다. 그는 소아시아 주의 수도였던 에페스로 부임하여 임무를 마친 뒤에 70세에 이곳에서 죽었다. 그 후에 로마의 집정관이 된 그의 아들 티베리우스 율리우스 아쿠일라(Tiberius Julius Aquila)가 에페스에서 사망한 자기 아버지를 추모하는 뜻에서 이 도서관을 건립했다. 셀수스는 이 도서관 서쪽에 묻혔다.

   이 도서관에는 모두 12,000여 권의 두루마리 문서가 소장되어 있었다. 이것은 알렉산드리아와 페르가뭄(베르가마)의 도서관 다음으로 큰 규모였다. 도서관 내부를 보면, 외벽과 내벽 사이에 1m 가량의 틈을 두어 통풍이 되게 함으로써 책들이 극심한 온도와 습도의 변화에도 손상되지 않도록 했다. 이 도서관은 정교한 건축 기법을 적용하여 실제 규모보다 더 크게 보이도록 하였다. 전물 정면 하단은 볼록한 구조로 되어 있어 본관을 더 높게 보이도록 했고, 기둥과 기둥머리들도 끝부분보다 가운데를 더 크게 만들었다.

   건물 정면 1층 벽에는 4명의 여인의 석상이 있는데, 이들은 각기 지혜, 덕성, 학문, 지식을 상징한다. 지금 이곳에 있는 석상은 모두 모조품이다. 이 도서관은 오스트리아 고고학연구소의 지원으로 복원되었는데, 그 때 진품은 오스트리아로 가져갔다. 그래서 진품은 오스트리아 빈에 있는 에페수스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상업 아고라(Commerical Agora)

   대리석 거리 오른편에 위치한 가로 세로 110m의 넓은 터로 된 이 아고라는 기원전 3세기경에 설치되었다. 두 줄의 회랑(回廊)으로 둘러싸여 있고, 그 뒤에 상점들이 늘어서 있었던 것 같다. 이 아고라는 에페스의 중앙시장 역할을 하였다. 항구와 가까운 곳에 조성되어 있어서 유럽과 지중해 각지에서 몰려온 상인들이 식료품, 향료, 금은보석, 도자기, 고급 옷감 등 온갖 상품을 거래하였다. 이곳에서는 물건뿐만 아니라 잡혀온 노예들까지 거래하였다고 한다.

   이렇게 커다란 시장이 형성되면서 온갖 물자는 물론 각처에서 각종 직업을 가진 사람들이 몰려들어 매우 번화하였을 것이다. 바울 사도는 이곳에 와서 27개월을 지냈다고 하는데, 아마도 이 시장에서 천막을 만들어 팔면서 복음을 전파하였을 것이다. 바울 사도는 이곳에 모여 사는 각양각색의 사람들에게 그리스도인으로서 새로운 삶을 살아가는 데에 합당한 행동과 처신을 가르쳤다.

   대리석 거리(Marble Street)

   대극장에서 셀수스 도서관까지 대리석으로 된 길을 말한다. 원래는 아르테미스 신전까지 길이 뻗어 있었다고 한다. 길 아래에는 대형 수로(水路)가 있었다. 이 길 바닥에 여인의 모습과 왼발이 새겨진 돌이 있는데, 이는 유곽을 광고하기 위한 것이라고 한다.

   대극장(Great Theatre)

   피온 산의 경사면을 이용하여 지은 이 극장은 원래 리시마쿠스(Lysimachus) 황제 때 건설되었다. 지금 있는 극장은 A.D. 41년에서 117년 사이에 로마인들에 의해 개축된 것이다. 대극장은 지름 154m, 높이 38m의 반원형 구조로 되어 있다. 극장은 세 부분으로 되어 있는데, 18m 높이의 무대 정면 건물은 3층으로 되어 있고, 각종 부조(浮彫)와 조각으로 아름답게 장식되어 있었다. 중앙에는 지름이 약 40m인 무대가 있는데, 정교한 음향적 구조로 되어 있다. 관중석은 무대에서 멀어질수록 아래쪽 좌석보다 경사가 더 급한 구조로 되어 있다. 이것은 보다 나은 시야 확보와 음향 효과를 위한 것이었다. 이 극장의 최대 수용인원은 약 25,000명이다. 고대 극장은 전체 주민의 10%가 동시에 들어갈 수 있는 규모로 지었다고 한다. 이러한 점을 고려하여 고고학자들은 에페스의 전체 인구가 이 원형극장 수용인원의 10배인 250,000명이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이 극장에서는 민회(民會)를 열기도 하고, 연극을 비롯한 문화 예술 공연을 하였다. 로마 시대 말기에는 검투사와 맹수의 싸움도 벌어졌다. 기독교를 박해하던 시절에는 기독교인들이 사자와 결투를 하기도 하였을 것이다.

   신약성경 사도행전(19:21~41)에는 바울 사도가 에페스에서 전도할 때 이곳 대극장에서 일어난 소동에 대해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데메드리오라고 하는 은장이는 아르테미스 여신의 모형을 만들어 팔아서 많은 돈을 벌었다. 그는 바울의 선교로 기독교인이 늘어감에 따라 아르테미스 여신에 대한 신앙심이 약해지고, 여신의 모형도 잘 안 팔리는 것에 앙심을 품고 사람들을 선동하였다. 그러자 그의 말에 끌린 사람들이 바울과 함께 전도하는 가이오와 아리스다고를 붙잡아서 대극장으로 끌고 갔다. 바울이 군중 속에 들어가려고 하니, 제자들이 말렸다. 바울을 아는 몇몇 고관들도 바울에게 극장에 들어가지 말라고 하였다. 바울은 극장에 들어가지도 못하고 밖에서 시민들이 에베소 사람의 아데미 여신은 위대하다.”고 외치는 소리를 들어야 했다. 이처럼 기독교인들이 핍박을 받은 곳도 이곳 대극장이다.

   객석 위쪽에 오르니, 대극장에서 항구까지 나 있는 아르카디안 거리와 멀리 항구 목욕탕이 한눈에 들어온다. 이곳은 음향 효과가 매우 좋아서 현재 터키에서 1년에 한번 특별 공연을 한다고 한다.

   200911월에 이곳을 찾았을 때의 일이다. 나는 이곳의 음향 효과가 얼마나 좋은지 궁금해 하면서 이곳을 둘러보고 있었다. 그 때 유럽에서 온 것 같은 단체관광객 20여 명이 무대에 서서 손을 잡고 합창한 뒤에 한 남자가 독창을 하였다. 나는 객석 중간쯤에 앉아 이들의 노래 소리를 들었다. 마이크를 쓰지 않는데도 합창 소리는 물론, 독창 소리까지 잘 들리는 것을 확인하고, 음향 효과가 뛰어난 것을 알았다.

   20116월에 갔을 때의 일이다. 노래를 잘 부르는 이 사장에게 무대로 내려가 한 곡 부르라고 하고, 장위교회 교우들은 객석 중간 부분에 앉았다. 이 사장은 사양하다가 찬송가 한 곡과 가요 한 곡을 불렀다. 이 사장과 몇 십 미터 떨어져 앉아 있었지만, 이 사장의 곱고 아름다운 노래 소리는 우리의 귀를 즐겁게 해 주었다. 일행 중에 노래를 잘 부르는 사람이 여럿 있었지만, 시간이 없어 더 듣지 못하고 자리를 뜨게 되어 아쉬웠다.

 * 이 글은 2012년 8월 25일에 도서출판 '민속원'에서 간행한 <<터키 1000일의 체험>> 중 <터키 여행의 즐거움과 보람>에 실려 있습니다.

 


 

 

 

 

 


   사르디스는 이즈미르에서 동쪽으로 85km 정도 떨어진 곳에 있는 옛 도시로, 지금은 사르트(Sart)로 불린다. 사르디스는 신약 성경에 나오는 사데이고, 구약 성경에 나오는 스바랏(Sepharad)’이다. 사르디스는 트몰루스 산에서 갈라져 나온 여러 산줄기 중 헤무르스 강을 끼고 있는 산의 기슭에 자리 잡고 있던 전략적 요충지로, B.C. 7세기 당시 번성했던 리디아 왕국의 수도였다.

   사르디스는 B.C. 546년경 페르시아에 정복당하여 지배를 받았다. 페르시아가 알렉산더에게 패한 뒤에는 셀레우코스 왕조의 지배를 받다가 B.C. 133년 로마로 넘어갔다. 로마 제국의 지배를 받을 때에는 대도시권의 중심지이자 로마령 리디아 지방의 사법권 집행의 중심지였다. A.D. 17년 지진으로 파괴되었으나 재건되어 비잔틴 시대에 이르기까지 크게 번영하여 아나톨리아의 대도시 가운데 하나로 남아 있었다. 그 당시에 모직물, 양탄자, 금세공 등의 상공업이 특히 성하였다. 비잔틴 제국 시대에 사르디스는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7대 교회 가운데 하나에 속하였던 관계로 대교구가 설치되는 등 번성하였다. 그러나 잦은 지진과 터키 및 몽골 민족의 침입으로 폐허가 되었다. 지금 볼 수 있는 사르디스 유적은 1910~1914년에 발굴하고 복원한 것이다. 이곳에는 고대 리디아의 성채와 리디아인 무덤이 약 1,000개 정도 남아 있다.

   리디아 왕국의 수도인 사르디스의 아크로폴리스(Acropolis)는 난공불락(難攻不落)의 요새로 이름난 곳이었다. 그러나 약한 곳에 대한 방비를 게을리 하였기 때문에 두 번이나 점령당하는 비운을 맞이하였다. 한 번은 기원전 546년에 페르시아의 고레스(시루스) 왕의 공격을 받고 함락되었고, 그 다음은 기원전 218년에는 시리아의 안티오코스 3세에 의해 함락되었다기원전 546년 페르시아가 쳐들어왔을 때의 일이다. 리디아 군사들은 성 밖의 전투에서 패하자 성안으로 들어와 성문을 닫고 수비에 전력을 다하였다. 페르시아군은 난공불락의 요새인 아크로폴리스를 공격할 방법을 찾지 못해 여러 달 동안 지체하였다. 리디아 군사들은 적군이 쳐들어오지 못할 것이라고 안심하면서 긴장을 풀었다. 어느 날, 성 위에서 보초를 서던 리디아 군사 한 명이 깜빡 졸다가 투구를 성 아래로 떨어뜨렸다. 이를 본 페르시아 군사들은 얼른 몸을 숨겨 자취를 감추었다. 투구를 떨어뜨린 병사는 적군이 없는 것을 확인하고는 성이 맞닿아 있는 절벽 사이로 내려와 투구를 주워가지고 성안으로 들어갔다. 성의 약점을 알아차린 페르시아 군은 그곳으로 몰래 숨어들어가 성문을 열어 성을 함락시켰다고 한다요한계시록 3장의 사데교회에 보낸 서신에 만일 네가 깨어 잊지 않으면 내가 도둑같이 올 것인데, 어느 때에 내가 네게 올지를 너는 알지 못한다.(3:3)”는 경고의 말씀은 이 이야기와 관련된 표현이라 하겠다.

   사르디스 유적지에 도착해 보니, 산줄기에 끝에 요새벽(要塞壁)의 유적이 남아 있어 아크로폴리스의 흔적을 엿볼 수 있었다. 토물루스 산에서 아크로폴리스로 놓았던 로마풍의 수로교(水路橋)의 잔해 있고, 로마 시대의 극장과 경기장도 있다. 아크로폴리스 서쪽에는 거대한 대리석 기둥이 높이 서 있는데, 그곳이 아르테미스(Artemis) 신전이다. 남아 있는 기둥의 높이와 숫자로 보아 이 신전은 규모가 대단히 컸던 것을 알 수 있다. 이 신전에서는 아르테미스 신은 물론 소아시아 지역에서 풍요의 신으로 믿던 키벨레(Cybele) 신도 모시고 제사하였다고 한다. 이 신전은 로마가 기독교를 공인한 뒤에 교회로 사용되었다. 그러다가 신전 남동쪽 구석에 소규모 교회당을 지어 예배를 드렸다. 지금 신전 옆에 둥근 담과 아치형 창문이 있는 벽돌 건물이 있는데, 이것이 4세기경에 세운 교회 건물이다. 유적지에는 로마식 대규모 목욕탕, 체육관, 유대교 회당 등의 흔적도 있었다. 이러한 것으로 보아 이곳은 당대 최고의 물질적 풍요를 누렸던 도시였음을 알 수 있었다.

   아르테미스 신전의 규모가 매우 큰 것으로 보아 당시에 아르테미스 신과 키벨레 여신을 숭배하는 신앙이 매우 널리 퍼지고 성행하였던 것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기독교의 복음을 받아들여 신앙을 지키는 일은 쉽지 않았을 터인데, 이곳에는 참된 신앙을 지키는 사람들이 있었다. 성경에서는 이들을 자기 옷을 더럽히지 않은 사람이라 하였고, “그들은 흰옷을 입고 나와 함께 다닐 것인데, 그들은 그럴 자격이 있기 때문(3:4).”이라고 하였다. 로마 시대에 부()와 권세(權勢)를 상징하는 옷은 자주색이었으나 사데의 신앙인은 흰옷을 약속 받았다. 그리고 이기는 사람은 이와 같이 흰옷을 입을 것인데, 나는 그의 이름을 생명책에서 지워 버리지 않을 것이며, 내 아버지의 앞과 천사들 앞에서 그의 이름을 시인할 것이다(3:5).”라고 하여 칭찬과 함께 앞으로 받을 상을 말씀하셨다.


   사데 지역에서는 금이 많이 생산되었으므로, 세계 최초의 금화(金貨)를 만들어 사용하였다. B.C. 560년경 크로이소스왕은 엄청난 양의 사금(砂金)을 채취해 최대의 부()를 이룬 왕이 되었다. 당시에 순금을 제련하던 도가니가 이곳에서 무려 300여 개 발굴 되었는데, 도가니 밑바닥에는 순금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고 한다. 금이 많이 생산되다 보니, 이곳 주민들의 생활도 비교적 넉넉하였다. 그러다 보니, 사데 교회의 성도들은 우상숭배(偶像崇拜)와 물질문화(物質文化)에 빠져 도무지 신앙이 자라지 않았다. 그래서 너는 살아 있다는 이름은 있으나, 실상은 죽은 것이다(3:1).”라는 책망을 받았다.

   내가 사데 유적지에 간 20116월에도 이곳에서는 복원 작업이 진행되고 있었다. 현재는 거기에 작은 마을이 있는데, 마을 이름은 사르트(Sart)’라고 한다. 옛날의 영화를 뒤로 하고, 폐허로 남아 있는 사데의 모습을 보고 돌아서는 나의 발걸음은 쓸쓸하였다.

 * 이 글은 2012년 8월 25일에 도서출판 '민속원'에서 간행한 <<터키 1000일의 체험>> 중 <터키 여행의 즐거움과 보람>에 실려 있습니다.


 

   필라델피아는 이즈미르에서 동쪽으로 120km 정도 떨어진 곳에 있는 옛 도시로, 성경에 나오는 빌라델비아인데, 현지명은 알라셰히르(Alaşehir)이다. 필라델피아는 페르가뭄(Pergamum, 성서의 버가모) 왕국의 아탈로스(Attalus) 2(재위 기간 B.C. 159~138)가 세운 도시이다. 아탈로스 2세는 페르가뭄 왕국의 유메네스 2세 왕의 동생인데, 본래 이름은 필라델푸스(Philadelphus)이다. 그는 뛰어난 정치력과 군사적 지식을 갖고 있었는데, 형을 진심으로 도우며 충성하였다. 그는 뒤에 형으로부터 왕위를 물려받았는데, 동부 진출의 전초기지로 이 도시를 건설하였다. 그리고 도시 이름은 자기의 원래 이름을 따서 필라델피아라고 하였는데, 그 뜻은 형제사랑[兄弟愛]’이다.

   토모로우스산 기슭에 자리 잡은 필라델피아는 비옥한 평야를 끼고 있다. 서쪽으로는 페르가뭄과 사르디스(사데)를 잇고, 동쪽으로는 라오디게아와 히에라폴리스를 잇는 교통의 요지에 자리 잡고 있다. 그래서 크게 발달할 수 있는 요건을 갖추고 있었으나, 지진이 잦아 크게 발전하지는 못하고, 농민들이 포도 농사를 짓고 사는 작은 도시가 되었다. 필라델피아에는 사도 시대에 약 1,000명이 살고 있었다고 한다. 이곳은 A.D. 17년과 23년에 일어난 큰 지진으로 도시가 모두 파괴되어 남은 유적이 거의 없다. 옛 도시가 있던 자리에 마을이 들어서 있어서 발굴하는 일도 쉽지 않다. 이곳에는 다만 사도요한 교회의 육중한 돌기둥 두 개와 돌들이 빌라델비아 교회라는 이름으로 방문객을 맞고 있다. 이것은 비잔틴 시대에 세워져 사도 요한에게 바쳐진 교회의 유적이다.

   빌라델비아 교회가 언제 시작되었는지 알 수 없으나, 요한계시록(3 : 7~13)에 일곱 교회 중의 하나로 나타난다. 빌라델비아 교회는 믿음의 시련 중에서도 복음과 사도들의 가르침에 충실한 탓에 서머나 교회와 함께 책망 받지 않고, 칭찬을 받은 교회이다. 서머나 교회의 폴리갑이 순교할 때 빌라델비아 교회 성도 10명도 함께 순교하였다.

   빌라델비아 교회는 네가 힘은 적으나 내 말을 지키며, 내 이름을 모른다고 하지 않았다.”(3 : 8)는 표현으로 보아 규모도 크지 않고, 겉으로 보기에는 무력한 것 같으나 내실이 있는 교회였던 것 같다. 이 교회는 건실한 신앙을 가지고 이단을 물리쳤으며, 여러 가지 신앙의 시련이 닥쳐와도 조금도 요동치 않고 인내와 성실로써 현실을 잘 극복해 나갔다. 그래서 성전의 기둥이 되게 하고, ‘새 예루살렘의 이름을 그 몸에 써 두겠다는 약속을 받은 교회이다.

   버스에서 내려 빌라델비아 교회 터에 가니, ‘성 요한 교회라고 쓴 안내판이 붙어 있다. 주님의 칭찬을 받던 교회의 모습은 간데없고, 돌과 벽돌로 겹겹이 쌓은 육중한 기둥만이 쓸쓸히 서 있다. 교회 기둥 옆에는 주택들이 들어서 있고, 좁은 골목길 맞은편의 작은 자미(이슬람 사원) 앞에서는 아이들이 놀고 있다. 평화로운 모습이지만, 마음 한 구석에는 허전한 마음이 들었다.

   빌라델비아 교회를 돌아본 뒤에 샤데 교회로 향하는 버스에 앉아 창밖을 보니, 올 때와 마찬가지로 포도밭이 많다. 키가 작은 포도나무 덩굴에는 알알이 익어가는 포도 알을 마음껏 매단 포도송이들이 주렁주렁 달려 있었다. 이것을 보면서, 나는 빌라델비아 교인들이 올바른 신앙을 지켜나갈 수 있었던 까닭을 조금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첫째, 이곳에는 지진이 유난히 많았다고 하니, 이곳 사람들은 잦은 지진을 겪으면서 삶에 대한 불안을 느꼈을 것이다. 삶에 대한 불안은 신앙을 뜨겁게 하고, 물질에 집착하지 않는 마음을 갖게 해 주었을 것이다. 둘째, 이곳 사람들은 도시보다는 비옥한 땅에서 포도 농사에 힘쓰면서 삶의 체험을 통해 교훈을 얻었을 것이다. 이들은 포도를 수확한 뒤에 다음 해의 포도 수확을 위하여 쓸모없는 가지를 잘랐을 것이다. 이들은 쓸모없는 가지 즉, 열매를 맺지 않은 가지, 앞으로도 열매를 맺지 않을 것 같은 가지를 잘라 땔감으로 쓰면서, 신앙인으로서 쓸모없는 자가 되면 잘라낸 포도나무 가지와 같이 된다는 것을 수없이 느꼈을 것이다. 그래서 열매를 맺어 농부의 보호를 받는 것과 같은 가지 즉, 온전한 믿음을 간직한 신앙인이 되기 위해 힘썼을 것이다.

 * 이 글은 2012년 8월 25일에 도서출판 '민속원'에서 간행한 <<터키 1000일의 체험>> 중 <터키 여행의 즐거움과 보람>에 실려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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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파묵칼레는 데니즐리(Denizli)l에서 북쪽으로 약 20km 들어간 곳에 있는, 인구가 2,500 명 정도 되는 작은 도시이다. 이곳은 자연이 만들어놓은 신기한 경치와 함께 고대 유적을 볼 수 있으며, 온천수에 목욕을 하고 쉴 수 있는 곳이어서 터키를 여행하는 사람에게 아주 인기가 있는 곳이다.

   파묵칼레(Pamukkale)‘Pamuk(목화)’‘kale()’가 합해진 말로, ‘목화의 성()’이란 뜻이다. 아주 오랜 옛날부터 칼슘 성분이 많은 온천물이 언덕 아래로 흘러내리는 동안 석회 성분이 침전되고 응고되어 장관(壯觀)을 이루고 있는데, 그 모습이 목화송이가 피어 있는 성()과 같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파묵칼레의 옛 이름은 히에라폴리스(Hierapolis), 성경 <골로새서> 416절에서 언급되는 고대 도시 히에라볼리이다. 히에라폴리스는 기원전 190년경에 페르가몬 왕국의 에우메네스 2(B.C. 197~159년 재위)가 세웠다. 이 도시의 이름은 페르가몬 왕가의 시조인 텔레포스(Telephos)의 부인 히에로(Hiero)’에서 따온 것이라고 한다. 한편, 이 도시에 유난히 신전이 많아 성스러운 도시라는 뜻으로 히에라폴리스라고 불렀다고 하기도 한다. 히에라폴리스는 B.C. 129년에 로마의 속주가 되었다. B.C. 17년에 지진이 있었고, 네로 황제가 다스리던 A.D. 60년에 더 큰 지진이 있어 크게 파괴되었다. 네로 황제는 재정적으로 지원하여 이 도시를 새로 건설하다시피 하였다. 지금 볼 수 있는 폐허의 유적들은 이 시대의 것들이다.

   히에라폴리스의 온천수는 심장병, 소화기장애, 신경통 등에 특수한 효과가 있다고 전해 온다. 그래서 로마 시대에는 황제를 비롯한 귀족층과 부유층의 휴양지로 이름을 날렸다. 로마의 황제들도 이곳을 찾았는데, A.D. 129년에는 하드리아누스 황제, 215년에는 카라칼라 황제, 370년에는 발렌스 황제가 이곳을 다녀갔다고 한다. 로마의 정치가이며 웅변가였던 키케로로 이곳에 와서 서사시와 연설문을 썼다고 한다.

   이곳은 온천 외에 구리 세공과 양모 산업, 카펫 산업, 염색 공업, 대리석 산지로 유명하였다. 그래서 비잔틴 시대에 크게 번영하였는데, 당시 인구가 약 10만 명이나 되었다고 한다. 그 후 아랍인의 침입, 비잔틴 제국과 셀주크 투르크 사이의 전투 등으로 쇠퇴하기 시작하였다. 12세기에 이곳을 점령한 셀주크 투르크는 이곳의 이름을 파묵칼레로 바꾸었다. 그리고 주민들을 이웃 도시인 데니즐리로 강제 이주시켰다. 1334년에 대지진이 일어나 도시가 파괴되고, 남아 있던 주민들마저 떠났다. 그래서 이곳은 완전히 폐허가 되어 잊혀졌었는데, 19세기에 시작된 발굴 작업으로 폐허는 다시 빛을 보게 되었다.


     석회붕(石灰棚)

   마을 뒤편에 계단처럼 형성된 하얀 석회층이 있는데, 이곳이 파묵칼레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이 석회층은 진 델리이라고 하는 굴에서 흘러내리는 온천수가 비탈진 언덕 아래 바위로 흘러내리면서 석회분이 침전되고 응고되어 바위 표면을 덮어 버렸다. 석회 성분이 많은 섭씨 33~36도의 온천수가 바위를 적시며 흐르는 동안 석회가 침전되고 응고되어 형성된 석회층이 마치 하얀 목화꽃이 겹겹이 피어 있는 것과 같다. 이 석회층은 약 4.9를 덮고 있는데, 해마다 1mm 정도 증가한다고 한다. 지금 있는 석회층의 두께를 거꾸로 계산해 보면, 14천년 정도 되었다고  한다.

   석회붕에 가는 길은 마을의 아래쪽에서 올라가는 길도 있고, 위쪽에서 내려가는 길도 있다고 하는데, 나는 마을 위쪽에 있는 매표소를 거쳐 들어갔다. 석회층 가까이 가니, 안내자가 신발을 벗으라고 한다. 신발과 양말을 벗은 뒤에 바지를 걷어 올리고 물에 들어가니, 넉넉하게 흐르는 물이 아주 따뜻하게 느껴진다. 아래쪽을 내려다보니, 하얀 석회층이 연이어 보이고, 온천수가 모여 이룬 파란 연못이 여러 군데 보였다. 석희층이 끝나는 곳에는 농작물이 자라는 밭이 있고, 그 끝에 집들이 보인다. 물길을 따라 내려가다가 뒤로 눈을 돌려 급경사를 이룬 언덕을 보니, 높고 긴 절벽이 빙벽(氷壁)처럼 보인다. 자세히 보니, 햇빛을 받아 반사하면서 온갖 모양을 자랑한다. 건너편을 보니, 흰빛의 석회암들이 정말 목화꽃이 만발한 성과 같다. 지금까지 여러 가지 모양의 바위들과 절벽을 보았지만, 하얀 석회층으로 이루어진 이런 장관은 처음 본다. 유네스코에서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할 만한 곳이다.

   서쪽으로 기운 해가 비친 석회층은 푸르스름한 빛을 띠며 아름다움을 자랑하였다. 우리는 아름다운 경관을 놓칠세라 사진기에 담고, 아내와 함께 온천수에 발을 담그고 앉아 쉬면서 경관의 아름다움을 이야기를 하였다. 호텔로 들어와 저녁 식사를 한 뒤에 호텔의 온천장에서 낮에 본 석회층의 광경을 떠올려 보며 온천물에 몸을 담갔다.


   로마의 목욕탕

   히에라폴리스 유적지로 들어서는 입구에 B.C. 2세기경에 지은 로마 시대의 목욕탕이 있다. 이 목욕탕에는 성스러운 샘이라고 불렸던 샘이 있는데, 깨끗한 온천수가 고여 있는 곳에 옛 건물의 잔해가 잠겨 있다. 이곳의 온천수가 심장병, 소화기장애, 신경통 등에 특수한 효과가 있다고 전해 왔으므로 많은 사람들이 모였을 것이다. 목욕탕은 이를 감안하여 많은 사람이 동시에 이용할 수 있도록 크게 지었던 것 같다. 현재는 목욕탕의 일부가 복원되어 박물관으로 활용되고 있다.

   로마의 개선문

   목욕탕 바로 앞에는 A.D. 84~85년에 세워진 도미티아누스(Domitianus, 재위기간 A.D. 81~96) 황제의 개선문이 있다. 개선문은 아치를 이룬 세 개의 통로와 두 개의 둥근 탑으로 되어 있다. 개선문 안으로 들어가면, 대리석으로 만들어진 중앙 도로가 있고, 도로의 좌우에 대리석 기둥들이 한 줄로 늘어서 있다. 그 옆에 중요 관공서와 건물들이 늘어서 있었던 것 같다. 개선문의 보존 상태는 비교적 좋은 편이다.

   공동묘지

   개선문 너머에는 1,200여 기()의 석관들이 있는 헬레니즘 시대의 공동묘지가 있다. 석관을 땅에 묻은 것이 아니라 단을 쌓고 그 위에 올려놓거나 건물을 짓고 그 안에 석관을 모셨다. 이것은 히에라폴리스에서만 볼 수 있는 무덤 양식으로, 다른 지방에서는 보기 어렵다.

   아폴로 신전과 플루토니온

   로마 목욕탕 뒤에 2세기에 건축된 아폴로 신전이 있었다. 아폴로 신전은 히에라폴리스의 주민들이 주신으로 모시던 태양신인 아폴로의 신전이다. 지금은 허물어져 기단(基壇)만 남아있지만, 당시에는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다. 히에라폴리에서는 아폴로신 외에도 아폴로와 쌍둥이 남매인 아르테미스(Artemis) 여신과 그들의 어머니인 레토(Leto), 지진을 관장하는 포세이돈(Poseidon) 등도 중요한 신으로 받들어 모셨다.

   아폴로 신전의 오른쪽 아래에는 지하세계의 신 하데스(hades)에게 바쳐진 플루토니온(Plutonion) 신전이 있다. 이 신전은 고대인들이 하데스의 왕국 즉, 지하세계로 통한다고 믿는 동굴에 세웠다. 이 동굴에서는 플루토니온(플루토니움)’이라고 불리는 유독가스가 솟아나왔다. 신관(神官)은 이 동굴에서 나오는 가스를 마시고 최면 상태에서 사람들에게 신의 계시를 전했다고 한다.

   원형극장

   히에라폴리스의 북동쪽 산자락에 12,000 명 정도를 수용할 수 있는 원형극장 터가 있다. 로마 셉티미우스 세베루스(Septimius Seberus, 재위기간 A.D. 193~211) 황제 때 건축된 이 극장은 일부 장식판, VIP를 위한 앞줄 박스 좌석과 함께 무대 대부분이 아직 그대로 남아 있다. 무대의 벽에는 아르테미스, 아폴로 등의 신상이 조각되어 있었다고 한다. 이 조각품은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고대 원형극장 가운데 아스펜도스의 극장 다음으로 보존상태가 좋아 지금도 여름 축제나 연극공연, 음악회를 열기도 한다.

   빌립 사도 순교 추모관

원형극장의 길 건너편 산 중턱에 빌림 사도 순교 추모관이 있다. 예수의 제자 중의 한 사람인 빌립 사도가 만년에 히에라폴리스에 와서 포교하다가 A.D. 80년에 딸과 함께 순교하였다. 기독교가 공인된 후인 A.D. 5세기경에 빌립이 딸과 함께 순교한 것으로 추정되는 자리에 빌립의 순교를 기념하기 위해 8각형의 건물을 지었다. 이것이 빌립 사도 순교 추모관이다. 빌림의 무덤은 발견되지 않았다.

   * 이 글은 2012년 8월 25일에 도서출판 '민속원'에서 간행한 <<터키 1000일의 체험> > 중 <터키 여행의 즐거움과 보람>에 실려 있음.



   라오디제아는 라오디키아(Laodikya)라고도 하는데, 데니즐리(Denizli)와 파묵칼레(Pamukkale)의 사이에 있다. 데니즐리에서 파묵칼레로 가는 길에 있는 코루주크(Korucuk) 마을에 라오디제아(Laodicea)행 표지판이 있었다. 그 표지판을 따라 1km쯤 가니 라오디제아 유적지가 나왔다. 이곳이 성경에 나오는 라오디게아, 요한 계시록에 나오는 초대 일곱 교회 중 하나인 라오디아교회가 있던 곳이다.

   라오디게아에는 기원전 2,000년경에 이오니아인들이 살았는데, 그들은 이곳을 디오스폴리스(Diospolis), 또는 로아스(Lhoas)라고 불렀다. 기원전 261~253년에 시리아의 셀레우코스 왕조의 안티오쿠스 2세는 이 지역에 도시를 건설하고, 아내의 이름을 따서 도시 이름을 라오디케아라고 하였다. 그 말의 뜻은 백성의 정의라고 한다. 라오디케아는 기원전 190년부터 페르가뭄의 통치를 받다가 A.D. 133년에 로마의 속주(屬州)가 되었다.

   옛날의 라오디케아는 리쿠스 강이 흐르는 산골짜기에 넓고 기름진 평야를 끼고 있었다. 이곳은 동서남북에 있는 도시들과 통하는 교통의 요지여서 경제적으로나 군사적으로 중요시되었다. 이곳 주민들은 넓은 평원에서 농사를 짓고, 양을 기르는 한편 인근 산에서 금을 캐내어 거래하였다.

   라오디게아에는 약 9km 떨어진 히에라볼리에서 온천수가 흘러오고, 바바 산의 만년설(萬年雪)이 녹아 흘러내리는 곳이었다. 이들 온천수와 냉천수(冷泉水)는 질병을 치료하는 데에 도움을 주었다. 인근에는 좋은 약재가 나는 곳이 많아 이를 이용하여 약을 생산하는 데에 힘을 기울였다 이곳에서 만든 귓병과 눈병 치료약은 치료 효과가 뛰어나서 아주 유명하였다. 그래서 이곳은 일찍부터 농업, 상업과 함께 의약이 발달하고, 은행과 고리대금업이 성행하였다.

   라오디게아는 A.D. 17년과 60년에 일어난 대지진으로 도시가 크게 파괴되었는데, 로마의 재정적 지원 없이 자체적으로 재건하였다고 한다. 이것은 라오디게아가 품질 좋은 흑양모 생산과 직조(織造), 염색업, 목화 재배와 면직물 생산, 의약품 생산, 금 생산 등을 통해 축적한 자본과 기술이 넉넉하였음을 말해 준다. 당시 이곳 사람들은 풍요로운 생활을 하면서 삶에 대한 자부심과 긍지를 가지고 살았다. 그러나 세속적인 만족에 이끌리어 영적인 문제에는 깊은 관심을 갖지 않았던 것 같다.

   라오디게아 교회에 대한 성경의 기록을 보면 다음과 같다.

    나는 네 행위를 안다. 너는 차지도 않고, 뜨겁지도 않다. 네가 차든지 뜨겁든지 하면 좋겠다. 네가 이렇게 미지근하여 뜨겁지도 않고 차지도 않으니, 나는 너를 내 입에서 뱉어 버리겠다. 너는 풍족하여 부족한 것이 조금도 없다고 하지만, 실상 너는 네가 비참하고, 불쌍하고, 가난하고, 눈이 멀고,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한다. 그러므로 나는 네게 권한다. 네가 부유하게 되려거든 불에 정련한 금을 내게서 사고, 벌거벗은 수치를 가려서 드러내지 않으려거든 흰 옷을 사서 입고, 네 눈이 밝아지려거든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라. <요한계시록 31518>

   이것은 라오디게아 교인들의 신앙이 차지도 않고, 뜨겁지도 않아 주님 보시기에 매우 못마땅하여 꾸짖은 말이다. 경제적으로 안정이 안 된 다른 지역의 교인들은 순수하고 열정적인 신앙을 간직하고 있는데, 경제적으로 안정이 된 이곳 교인들은 신앙적으로 게으르고 형식적인 신앙생활을 하였다. 그래서 이를 꾸짖고, “열심을 내어 노력하고, 회개하라.”고 명하셨다.

   위에 적은 성경 말씀에는 당시 라오디게아 사람들의 생활상을 반영한 표현이 여러 군데 나온다. 당시 라오디게아는 히에라볼리스에서 흘러오는 온천물을 사용하였는데, 9km를 흘러왔기 때문에 물이 뜨겁지도 않고 차지도 않았을 것이다. “차지도 않고 뜨겁지도 않다.”고 한 표현은 이를 빗대어 표현한 것 같다. “너는 풍족하여 부족한 것이 조금도 없다고 하지만은 당시의 라오디게아 사람들의 생활상을 반영한 표현이라 하겠다. 당시 라오디게아는 목화 생산이 많았고, 면직 공업이 발달하였다. 특히 흰색 면직물이 유명하였는데, 로마 상원의원들이 입던 흰옷은 이곳에서 만들었다고 한다. “흰 옷을 사서 입으라.”고 한 것은 이러한 상황을 반영한 것이다. “네 눈이 밝아지려거든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라.”고 한 것은 이곳이 안약의 명산지임을 반영한 것이다. 이렇게 보면 위에 적은 성경의 말씀은 당시 라오디게아의 지역적 특성과 생활상을 예로 들어 표현하여 교인들의 잘못을 일깨우려한 것이다.

   라오디게아 유적지에 와 보니, 넓은 산언덕에 여러 건물의 주춧돌과 벽을 쌓았던 돌과 건물의 기둥이 널려 있다. 아치형으로 된 건물의 잔해도 보이고, 원형극장과 교회 터 등도 있다. 잘 다듬어진 대리석 기둥이 서 있는 대로 양편에는 큰 건물들이 즐비하게 서 있었던 것 같다. 나는 양옆으로 건물의 잔해들이 즐비한 옛길을 걸으며 넓은 땅에 큰 규모의 화려한 건물들이 즐비하였던 거리의 모습, 그 거리를 오가며 풍요로움을 만끽하던 당시 사람들의 모습을 상상해 보았다.

   버스를 타기 위해 언덕길을 내려올 때 차지도 덥지도 않으니 뱉어 버리리라. 너는 풍족하여 부족한 것이 조금도 없다고 하지만, 실상 너는 네가 비참하고 불쌍하고 가난하고 눈이 멀고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한다.”는 말씀이 귀에 들리는 듯하였다. 라오디게아 교인들에게 하신 이 말씀은 풍족한 생활을 하면서 신앙적으로는 게으르고 형식적인 믿음을 가진 현대인, 특히 나에게 꼭 맞는 말씀이라는 생각이 든다. 꾸중을 들은 라오디게아 교인들의 모습과 나의 모습이 별반 다를 것이 없다는 것을 깨닫게 해 주신 주님의 은혜에 감사하며 길을 내려왔다.

 * 이 글은 2012년 8월 25일에 도서출판 '민속원'에서 간행한 <<터키 1000일의 체험>> 중 <터키 여행의 즐거움과 보람>에 실려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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