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속놀이는 우리 민족의 공동생활 속에서 형성되어 생활을 통하여 전승되어 오는 놀이이다. 민속놀이에는 싸움을 뜻하는 경쟁성(競爭性), 흥을 뜻하는 유희성(遊戱性), 즐김을 나타내는 오락성(娛樂性),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예술성(藝術性) 등이 복합적으로 녹아 있다.

  사람들은 누구나 유희와 놀이를 좋아하는데, 그것은 재미있고, 즐겁기 때문이다. 놀이의 즐거움을 통하여 생활 속에서 마주치는 여러 가지 정신적 고통을 잊어버리고, 생업에 종사하는 동안 지쳐 있던 육체적 피로를 풀어내기도 한다. 놀이는 자발적으로 참여하는 무목적(無目的)의 활동으로, 즐거움과 흥겨움을 동반하는 가장 자유롭고 해방된 인간 활동이다. 육체적 정신적 활동을 전제로 하는 민속놀이를 통하여 한국인은 정서적 공감과 정신적 만족감을 얻어 왔다.

  이 글에서는 한국의 민속놀이 중 지금도 널리 행하여지고 있는 윷놀이, 널뛰기, 연날리기, 그네뛰기, 줄다리기 등에 대하여 간단히 알아보려고 한다. 

                        윷놀이

  윷놀이는 정월의 대표적인 놀이로, 전국적으로 분포되어 있다. 이 놀이는 신라 이전부터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와 비슷한 것으로 중국에는 저포(樗蒲)가 있다.    윷놀이의 기원에 관하여는 확실하지는 않지만, 몇 가지 설이 전해 온다.

  ① 부여 시대에 다섯 가지 가축을 다섯 마을에 나누어주고, 그 가축들을 경쟁적으로 번식시킬 목적에서 비롯되었다. 거기에서 연유하여 도는 돼지[豚], 개는 개[犬], 걸은 양(羊), 윷은 소[牛], 모는 말[馬]에 비유하기도 한다.
  ② 삼국 시대에 생겼다고 하는 민간 전설이 있다. 그래서 신라 시대에 궁녀들이 새해 초에 즐기던 놀이라고 하기도 하고, 백제의 관직명인 저가(猪加), 우가(牛加), 마가(馬加), 대사(大使)에서 유래된 것이라고 하기도 한다. 또 고구려의 오가(五加, 동·서·남·북·중앙)에서 나온 것이라고 하기도 한다.
  ③옛날 어느 장수가 적과 대진 중 적군의 야습을 경계하여 진중의 병사들의 잠을 막기 위하여 이 놀이를 창안하였다고 한다.

  윷판의 유래에 관하여는 상대(上代) 오가(五加)의 출진도(出陣圖)에서 나왔다는 설, 부여의 관직을 모의한 사출도(四出圖)에서 나왔다는 설, 조선 선조 때 김문표(金文豹, 1568∼1608)가 말한 사도설(柶圖說) 등이 있다. 사도설에서는 윷을 사(柶)라 하고, 윷판은 천체를 상징한다고 한다. 그에 따르면, 중앙에 있는 것은 북극성이고, 둘레에 있는 것은 28숙(宿)의 별들이라고 한다. 그리고 네 행로(行路)는 동지(冬至), 하지(夏至), 춘분(春分), 추분(秋分)에 비유한다. 일본에는 한국의 윷놀이와 비슷한 '우쯔무끼사이(府向采)'가 있는데, 이것은 8세기경에 한국에서 건너가 15세기까지 전승되다가 최근에는 쇠퇴하였다.

  윷에는 장작윷, 밤윷 등이 있다. 장작윷은 박달나무, 통싸리나무, 밤나무 등을 길이 15∼20 센티미터, 지름 3∼5 센티미터 크기로 만든 것인데, 서울을 비롯한 중부 지방에 분포되어 있었다. 밤윷은 밤알 크기의 나무 조각 4개를 조그만 밥공기 등에 담아 내젓다가 바닥에 내던져 노는 것인데, 주로 남부 지방에 분포되었었다. 북부 지방에서는 콩으로 만든 콩윷, 팥으로 만든 팥윷을 놀기도 하였다.

  놀이 방법으로는 말판쓰기, 덕대놀이, 모다먹기 등이 있다. 윷을 세 번 던져 각기 나온 결과를 그에 따른 점사(占辭)로 풀어 윷점을 치기도 하였다. 윷점에 관하여는 유득공의 {경도잡지(京都雜誌)}와 홍석모의 {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는데, 예를 들면 다음과 같다.

  도 도 도 : 아견자모(兒見慈母, 어린아이가 자애스런 어머니를 만나다.)
  도 도 개 : 서입창중(鼠入倉中, 쥐가 곳간에 들어가다.)
  도 도 걸 : 혼야득촉(昏夜得燭, 어둔 밤에 촛불을 얻다.)
  도 도 모(윷) : 창승우춘(蒼蠅遇春, 쇠파리가 봄을 만나다.)

  위에서 보는 것처럼 윷점의 점사는 긍정적인 내용이 많다. 이것은 정초에 재미로 하는 윷점이 이를 행하는 사람에게 한 해 동안 희망을 갖고 노력하며 살도록 권장하는 기능을 하였음을 말해 준다. 

  요즈음에는 각 가정에서 정초에 윷놀이가 많이 행해지고 있고, 마을이나 기관, 친목 단체가 주관하는 윷놀이 대회가 성행한다.

                  널뛰기

  널뛰기는 음력 정초, 5월 단오, 8월 한가위 등에 주로 부녀자들 사이에서 행하여지던 놀이이다. 이것은 고려 이전부터 전해 온 듯하다. 조선 시대 유득공이 쓴 {경도잡지(京都雜誌)}에는 널뛰기를 "항간의 부녀자들이 긴 널조각을 짚단 위에 가로로 놓고, 양쪽 끝에 갈라서서 굴러 뛰기를 하는데, 몇 자 높이까지 올라간다. 그 때 패물 울리는 소리가 쟁쟁하다. 지쳐 떨어져 나가는 것을 낙으로 삼는다. 이것을 '초판희(超板戱)'라고 한다."고 적어 놓았다.   

  일본 오끼나와(琉球)에는 널뛰기와 비슷한 '板舞'가 행해지는데, 이것은 우리 나라에서 전해진 것으로 추정된다. 긴 널판을 상하로 움직이는 유희는 지구상에 한국의 널뛰기와 일본의 판무밖에는 없다. 널뛰기를 시이소우와 관련시키면 세계성을 띤 놀이라고 할 수도 있다.

  널뛰기는 그네뛰기와 함께 몸을 활달하게 움직이는 놀이로, 조선 시대 여인들에게 활달한 자기 발견의 계기를 제공하였다. 널뛰기의 유래에 관하여는 다음과 같은 속설(俗說)이 전해 온다.

  ① 죄를 짓고 옥 속에 갇힌 남편의 얼굴을 보고 싶은 죄수의 아내가 다른 죄수의 아내와 공모하여 널을 뛰면서 담장너머로 남편의 얼굴을 보았다.
  ② 부녀자들이 널뛰기를 하면서 담 밖의 세상 풍경과 남자의 모습을 보았다.
  ③ 처녀 시절에 널뛰기를 하지 않으면 시집가서 아기를 낳지 못한다.
  ④ 정초에 널뛰기를 하면 일 년 중 가시에 찔리지 않는다(경기도 용인).

  위에 적은 네 가지 중 어느 것이 타당성이 높고, 어느 것이 타당성이 낮은지는 말하기 어렵다. 이들 중에는 운동이 부족한 부녀자들의 건강과 관련된 것도 있어 흥미롭다.

              연날리기

  연날리기는 우리 나라에서 겨울철(농한기) 북서풍이 불 때에 행해지는 대표적인 놀이이다. 이것은 세계 곳곳에서, 예로부터, 성별, 신분의 구별 없이 즐겨 오는 놀이이다.

  연은 기원 전 400년대에 그리스의 알타스(Altas)가 처음 만들었다고 한다. 중국에서는 기원 전 200년경 한신(韓信)이 적의 형편을 탐지(探知)하기 위해 연을 사용하였다고 한다. 또 초(楚) 나라 항우(項羽)와 싸울 때 소가죽으로 만든 커다란 연에 바구니를 매달고, 그 안에 피리 잘 부는 군사를 태워 이것을 초 나라 군사의 머리 위에 뜨게 하고, 초가(楚歌)를 불게 하여 초나라 군사의 전의(戰意)를 상실하게 하였다 한다.

  일본에서는 전쟁 때 연을 이용하였고, 집을 지을 때 벽돌 등을 연에 매달아 올렸다고 한다. 태국에서는 성안의 군사를 정벌할 때 무서운 동물 모양의 연을 만들어 띄워 성안의 군사를 놀라게 하여 사기를 꺾은 뒤에 성을 함락하였다고 한다.

  우리 나라의 연에 관한 기록은 {삼국사기(三國史記)} 열전(列傳) 김유신전(金庾信傳)에 보인다. 서기 647년에 진덕 여왕이 선덕 왕의 뒤를 이어 즉위하자, 대신 비담(毗曇)과 염종(廉宗)이 여왕으로서는 나라를 제대로 다스릴 수 없다고 하며 반란을 일으켰다. 반란군은 명활성(明活城)에 진을 치고, 왕의 군사는 월성(月城)에 진을 치고 10여 일 동안 공방전(攻防戰)을 벌였으나, 승패가 나지 아니 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 한밤중에 큰 별똥이 월성 안에 떨어졌다. 비담 등이 별이 떨어지는 곳에 흉사(凶事)가 있을 것이라고 하니, 군사들이 크게 환호하였다. 이 소식을 들은 왕은 대경실색(大驚失色)하였다. 이 때 김유신 장군이 왕을 안심시킨 후에 허수아비를 만들어 큰 연에 매달고 불을 붙여 띄워 마치 별이 하늘로 솟아오르는 것 같이 하였다. 그리고는 "떨어졌던 별이 어제 밤에 다시 하늘로 올라갔다."고 소문을 내고, 별이 떨어진 곳에 가서 백마를 잡아 제사를 지낸 후 군사를 이끌고 나가 싸워 난을 평정하였다고 한다.

  연을 전쟁에 이용한 것은 최영 장군과 이순신 장군의 경우에도 나타난다. 최영 장군은 탐라국의 목호(牧胡, 목축하는 몽고인)의 난을 평정할 때(1374), 군사를 연에 매달아 병선(兵船)에서 절벽 위로 상륙시켰다 한다. 또 불덩이를 매단 연을 성안으로 날려보내어 불타게 하고, 성을 공격하였다고 한다. 이순신 장군은 임진왜란 때 섬과 육지를 연락하는 통신 수단으로, 또는 작전 지시의 방편으로 연을 이용하였다고 한다.       

  조선 시대에는 연날리기가 민간에 널리 보급되어 성행하였다. 특히 영조는 연날리기를 즐겨 구경하고, 장려하였다고 한다. 그래서 음력 정월 보름이면 서울 광교와 수표교에서 연날리기 전국 대회가 벌어지곤 하였다고 한다.

  한국의 연은 방패연, 가오리연을 비롯하여 여러 가지 형태의 창작 연이 있다.

  연날리기는 높이 띄우기, 손놀림에 따라 연을 왼쪽 또는 오른쪽으로 돌리기 급전(急轉) 급강하(急降下) 급상승(急上昇) 등 다양한 공중 곡예(曲藝)를 하는 재주 부리기, 연실의 질기고 약함 연의 조종 기술에 따라 연줄을 끊어 먹는 연싸움이 있다. 연 싸움에서 진 편은 이긴 편을 위하여 멀고 먼 하늘로 좋은 소식을 전하러 연을 날려보낸 것으로 여겨, 이긴 편이 진 편에게 한턱을 냈다. 얼레 하나에 얼마나 많은 연을 매달아 띄울 수 있는가를 겨루기도 하였다.

  민간에는 겨울 동안 날리던 연을 음력 정월 보름에 연 바탕에 액을 멀리 보내고 복을 맞이한다는 뜻의 '송액영복(送厄迎福)'의 축원문을 쓰고, 연 날리는 사람의 생년월일과 이름을 써서 날려보내면 모든 액과 나쁜 운수가 일소된다고 믿는 풍습이 있었다. 이것은 복된 새해를 맞으려는 소망을 표현한 것이라 하겠다.

  연날리기가 많은 사람들이 즐겨하는 놀이였던만큼 연과 관련된 이야기도 많이 전해 온다. 그 중 재미있는 것 두 가지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조선 숙종 때 두 대감이 정월 보름이면 '연 끊어 먹기'를 하였다. 어느 해 정월 보름에 두 대감이 연날리기를 하는데, 돌연 연 하나가 와서 두 대감의 연줄을 끊었다. 두 대감이 알아보니 10세 소년이었는데, 그 소년은 비범한 아이였다. 그 후 두 대감은 정월 보름이면 소년과 함께 연 끊어 먹기를 하곤 하였다. 소년이 자라 장원급제하고, 대감이 되니, 해마다 세 대감이 연 끊어 먹기를 하였다고 한다.

  한 소년이 연날리기를 하다가 연줄이 끊어져 날아갔다. 그가 정신없이 연을 따라어느 마을로 가니, 연이 어느 집 옆에 있는 대밭의 대나무에 걸렸다. 그가 대밭 가까이 가니, 대밭에서 어떤 남녀가 이야기하고 있었다. 가만히 들어보니, 여인이 혼인날이 며칠 안 남았으니 어찌하면 좋으냐고 하니, 남자가 첫날밤에 신방에 든 신랑을 죽이고 함께 도망가자고 하였다. 그는 형의 혼인날이 그 여자의 혼인날과 같은 것을 알고 깜짝 놀랐다. 그는 할아버지와 아버지께 떼를 써서 형이 장가갈 때 후행(後行)으로 따라갔다. 그는 신방 마루 밑에 숨어 있다가 첫날밤에 신랑을 죽이러 온 중을 보고, 소리쳐서 형을 깨워 구해 냈다고 한다. 연과 관련된 이 이야기는 '신방 엿보기' 풍습이 생긴 유래담으로 꼽히기도 한다.

            그네뛰기

  그네뛰기는 씨름과 더불어 음력 5월 단오에 행해지던 대표적인 민속놀이이다. 북방 유목민에서 연유된 것으로 추정되는 이 놀이는 중국 춘추 시대의 제(濟) 나라를 거쳐 한(漢) 나라, 당(唐) 나라 이후 궁정(宮廷)과 민가에서 성행하였다.

  우리 나라의 경우, 그네뛰기에 관한 기록은 {고려사(高麗史)}에 처음 나타나는데, 고려 시대에 왕궁을 중심으로 한 귀족 사회에서 성행하였다고 한다. 고려 후기에 신흥 사대부들이 지은 경기체가 [한림별곡(翰林別曲)]에도 그네뛰기에 관한 것이 나온다. 그네뛰기는 조선 시대에 일반에게 보급되면서 단오놀이로 자리를 굳혔다고 한다. 조선 시대에는 상류층의 여인들에게는 억제되었다.

  그네의 명칭으로는 '그네', '근데', '근듸', '군듸', '군의', '그리', '구리' 등이 있다. {악장가사(樂章歌詞)}의 [한림별곡]에는 '글위', {역어유해(譯語類解)}에는 '그릐', {동문유해(東文類解)}에는 '그리'로 표기되어 있다. 어원은 '근의'인데, 이 말은 '끈의 희(戱)'에서 온 말이 아닐까 추정하기도 한다.

  그네는 온 몸의 탄력을 이용해야 하며, 팔과 다리의 힘이 있어야 한다. 그래서 널뛰기와 함께 과거 여성 체육의 쌍벽을 이루었고, 맵시 있는 여성의 놀이로 꼽혔다.

  그네와 관련되어 전해 오는 말에는 '그네를 뛰면 발에 무좀이 생기지 않는다.', '그네를 뛰면 여름에 모기에 물리지 않는다.', '그네를 뛰면 더위를 타지 않는다.' 등이 있다.

              줄다리기

  줄다리기는 예로부터 널리 행하여졌는데, 기록상으로는 {동국여지승람(東國與地勝覽)}에 '제주도에서 조리희(照里戱)가 행해졌다.'는 기록이 맨 처음이다. 중부 이남 지방에서 정월 대보름, 단오일, 팔월 한가위 등에 주로 행하여졌으나, 정월 보름이 가장 많았다. 지금까지 줄다리기가 큰 행사로 거행되는 마을은 경북 의성, 경남 영산, 전남 장흥, 충남 당진 등인데, 이들 지역에서는 그 지역에서 편리한 시기에 줄다리기를 한다.   

  줄다리기는 동남아시아 일대, 주로 해안과 평야 지대에 널리 분포되어 있는데, 농경(農耕)과 어로(漁撈)를 주로 하는 생활권에 많았다.

  줄다리기에 사용하는 줄은 짚, 또는 짚과 칡을 섞어 만든다. 줄다리기는 암수줄다리기와 외줄다리기가 있다. 암수줄다리기는 암줄과 수줄을 연결하여 당기는 것인데,  암줄과 수줄을 연결할 때에는 비녀목을 사용한다. 마을의 동부와 서부, 또는 남과 북, 내의 이쪽과 저쪽이 한 편이 되어 당기는데, 남성적인 지형의 마을에서 수줄을 만들고, 여성적인 지형의 마을에서 암줄을 만든다. 이 때, 줄다리기에서 이긴 마을은 풍년이 들고, 진 마을은 흉년이 든다고 한다. 그래서 마을 사람들은 줄다리기에서 이기기 위해 온 힘을 기울인다. 줄다리기를 마친 후에 줄은 썰어서 자기 논에 뿌리면 풍년이 든다 하여 썰어서 나누어 갖는다. 

  외줄다리기는 하나의 줄을 만들어 가운데에 표시를 하고, 편을 갈라 한쪽씩 잡고 당긴다. 외줄다리기는 한 마을에서 남자와 여자로 나누어 힘을 겨루는 것이 보통인데, 여자 편이 이겨야 풍년이 든다고 한다. 남녀가 편을 갈라 줄다리기를 하는 마을에서는 늘 여자 편이 이긴다고 하는데, 그것은 아이들과 총각은 여자 편이 되기 때문에 성년 남자들이 있는 힘을 다하여 줄을 당겨도 여자 편을 이길 수 없다고 한다. 줄다리기를 마친 줄은 그 마을의 수호신인 당신(堂神)에게 감아 주는 마을도 있다.       

  줄다리기가 널리 행해지던 정월 대보름날은 새해 들어 보름달을 처음 맞는 날로, 풍요(豊饒) 다산(多産)을 상징한다. 줄다리기할 때의 줄은 용(龍)을, 줄다리기는 용신의 성행위를 상징적으로 표현한다. 그러므로 줄다리기는 풍요와 다산을 상징하는 특별한 날에, 기후를 조절하는 신이한 능력을 지닌 용신(龍神)을 자극하여 풍년이 들게 하려는 제의적 성격을 띤 놀이라 하겠다. 울산, 진주 등지에서는 가물 때 기우제(祈雨祭)에서 줄다리기를 하였다고 하는데, 이것은 물을 주관하는 용신을 자극하여 비를 내리게 하려는 의식에서 나온 것이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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