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112일에 아내와 함께 창덕궁을 둘러본 후 창경궁에 갔다.

     

당지 가까이 가니, 고궁의 아름다운 가을풍경을 찍으려는 사진사들이 

유난히 많이눈에띈다.                                                                                                                                                                                                                                                                                                                                                                                                                                                                                                                                                                                                                                                                                                                                                                                                                                                                            

 

곱게 물든 단풍나무가 연못에 비친 모습이 정말 아름답다. 조선시대 같으면 임금님이나 볼 수 있는 풍경을 자유스럽게 볼 수 있으니, 참으로 좋다. 도심 속에서 곱게 물든 단풍을 마음껏 볼 수 있는 것이 기쁘고 감동적이다.

 

사진기를 가지고 가지 않은 것을 아쉬워하다가 스마트폰으로 몇 장 찍었다.

 

 

 

 

 

 

 

 

*수필집 <능소화처럼>을 도서출판 보고사에서 2015년 10월 25일에  출간하였다. 여기에 이 책의 머리말과 표지 사진을 싣는다.                                                    

 

머리말

 

수필은 다양한 소재를 바탕으로 자기의 생각과 느낌을 진솔하게 적은 글이다. 수필에는 글쓴이의 사람됨과 취향, 사상과 가치관이 드러나기 마련이다. 그래서 수필을 쓰는 것은 매우 조심스럽고, 힘든 일이기도 하다.

 

필자는 40여 년 동안 한국의 고소설, 구비문학, 민속학을 연구하고 강의하면서 틈틈이 일반 교양인을 대상으로 한 글도 썼다. 그 글들은 소재가 다양하여 생활 주변에서 가져온 것도 있고, 민속과 설화에서 고른 것도 있다. 그 중에는 수필도 있고, 기행문 또는 설명문의 성격을 지닌 것도 있다. 그러나 넓은 의미로 보아 수필의 성격을 지닌 글이 대부분이다.

 

그 동안 쓴 글 중 소재가 민속과 관련된 것은 민속적인 삶의 의미(1993), 일상생활과 관련된 것은 가을햇빛 비치는 창가에서(1994)로 묶었고, 전설의 의미와 현장 답사에 관한 글은 함께 떠나는 이야기 여행(2001)다시 떠나는 이야기 여행(2007)으로 묶어 출판하였다. 그 뒤에 쓴 글을 헤아려보니, 100여 편이 되었다. 그 중 63편을 골라 이 책을 엮었다.

 

좋은 글을 쓰려면 사물에 대한 관찰력과 감성이 남달라야 하고, 자기의 생각과 느낌을 제대로 표현하는 문장력이 있어야 한다. 필자는 이런 점에서 부족함을 느끼기에 이미 간행된 것은 어쩔 수 없지만, 또다시 책을 엮어 출판하는 것은 객기(客氣)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어 주저하였다. 그러다가 삶의 현장에서 느끼고 생각한 바가 담겨 있어서 필자의 삶의 궤적(軌跡)을 알게 해 주는 글들을 한 자리에 모아 놓는 것도 뜻이 있겠다는 생각에서 이 책을 엮기로 하였다.

 

이 책에 실은 글들은 청탁을 받아 쓴 글도 있고, 그때그때 떠오르는 생각을 적은 글도 있다. 최근에 쓴 글이 있는가 하면, 20여 년 전에 쓴 글도 있다. 그래서 주제나 소재 면에서 통일성이 없지만, 선택한 소재를 바탕으로 필자의 생각과 느낌을 표현하였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고 생각한다.

 

이 책에 실린 글의 소재 역시 주변에서 얻은 것도 있고, 설화나 민속에서 가져온 것도 있다. 선택한 소재를 바탕으로 생각과 느낌을 정리하면서 독자들이 공감하도록 표현하려고 애를 썼다. 이 책에 실린 글 중 한 편의 글에라도 공감하는 독자가 있었으면 좋겠다.

 

능소화는 꽃말이 명예이고, 품위와 기개가 느껴지는 꽃이다. 많은 꽃들이 다투어 피는 봄을 다 보내고, 뜨거운 태양이 작열(灼熱)할 때에야 자태를 뽐내는 이 꽃을 보면, 아름다움과 함께 도도함이 느껴진다. 손을 대면 떨어지고 말아 마음에 맞지 않는 누구의 손길도 허락하지 않는 절개가 있는 듯하다. 떨어져 지는 순간까지 활짝 피었을 때의 싱싱함을 유지하다가 그 모습 그대로 떨어져 추한 모습은 보이지 않는 자존심이 있다. 나는 능소화가 이런 특성을 지닌 꽃임을 알게 된 뒤부터 이 꽃을 좋아하기 시작하여 오늘에 이르렀다. 요즈음에 와서는 떨어질 때까지 추한 모습을 보이지 않는 결기에 마음이 쏠린다. 이러한 마음을 담아 이 책의 제목을 능소화처럼이라고 하였다.

 

이 책을 엮겠다고 하였을 때, “그동안 그렇게 많은 책을 펴냈으면 됐지, 왜 또 일을 만들어서 하느냐?”고 불평 섞인 잔소리를 하던 아내가 문장을 다듬어 주고, 찬찬히 교정을 봐 준 것을 감사한다. 마무리 단계에서 '글쓰기의 이론과 실제'에 뛰어난 실력을 지닌 최명환 교수가 바쁜 중에 틈을 내어 문단의 구성과 표현의 적절성을 살펴보고 조언해 준 것을 감사한다. 이 책을 출판해 준 보고사 김흥국 사장과 황효은 대리께도 감사한다.

2015109

의재(宜齋) 최운식(崔雲植) 적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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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615일에 아내와 함께 아들과 딸의 가족을 만나기 위해 미국에 갔다. 뉴욕 케네디공항에 도착하니, 연구년을 맞아 펜실베니아대학교(U. Penn) 동아시아센터 연구원으로 와있는 큰아들이 마중을 나왔다. 아들과 함께 필라델피아로 간 우리는 아들이 사는 아파트에서 하루를 쉬었다.

 

   그 다음날 아들과 함께 서울교대 1회 동기인 윤 선생 댁에 갔다. 윤 선생은 아내와 중고등학교 동기동창이기도 하여 가깝게 지내며 연락하는 사이이다. 윤 선생 댁은 주변 환경이 아주 좋은 주택가에 있는 단독주택이었다. 윤 선생과 부군(夫君)인 한 사장이 반갑게 맞아 주었다. 넓고 깨끗한 집에는 가구와 장식물이 잘 정돈되어 있어 주인 내외의 고상한 기품과 취향을 알 수 있게 해 주었다. 윤 선생은 5~6년 전에 한국에 왔을 때 만난 적이 있지만, 한 사장은 처음 만났다.

 

   우리 부부는 윤 선생께 아들이 U. Penn의 초청을 받도록 도와준 일, 좋은 아파트를 얻게 해 주고, 아들네 가족이 이곳 생활에 익숙해지도록 여러모로 도와준 일에 대해 감사의 인사를 하였다. 아들과 손자 손녀는 윤 선생 댁에도 왔었고, 함께 식사한 적도 있어 윤 선생 내외분과 친근감을 느끼고 있었다. 윤 선생은 우리 가족을 위해 여러 가지 한국 음식을 준비하였으므로, 맛있게 먹었다. 식사 후에는 다과를 나누며 여러 가지 이야기를 하였다.

 

   윤 선생은 서울교대를 졸업 후 7년 반 교사로 근무하고, 1971년 말에 부군과 함께 미국 필라델피아에 왔다. 처음에는 취직하여 일하다가 개인 사업을 하여 생활의 기반을 다졌다고 한다. 딸과 아들은 대학을 졸업하고, 회사원으로, 변호사로 일하고 있다. 미국에서 44년을 사는 동안 고생도 많았겠지만, 성공하여 노년을 여유롭게 지내는 모습을 보니, 정말 흐뭇하고 자랑스럽게 느껴진다.

 

   나는 윤 선생에게 서울교대 1회 동기인 최 선생이 캐나다에 사는데, 서로 연락이 있느냐고 물었다. 윤 선생은 연락이 없었는데 소식을 알게 되어 기쁘다면서 어떻게 해서 알게 되었느냐고 하였다. 최 선생이 인터넷 네이버에 개설한 서울교대 1회 카페에 자주 들러 글을 주고받았는데, 내가 캐나다에 갈 예정이라고 하니, 오면 연락하여 만나자고 하였다고 하였다. 윤 선생은 캐나다에 중고등학교 동기동창인 김 여사도 살고 있다고 하면서, 두 친구 모두 만나보고 싶다고 하였다. 나와 아내는 윤 선생에게 두 친구를 만날 겸 함께 캐나다에 가자고 하였다. 윤 선생은 다음날 처리할 일도 있고, 부군을 혼자 두고 여행을 가는 것이 마음에 걸려 망설였다. 그 때 한 사장이 자기 걱정 하지 말고 다녀오라고 하여 함께 여행을 떠나기로 하고 헤어졌다.

 

   이튿날 우리는 큰아들이 운전하는 9인승 소형승합차를 타고 캐나다로 향하였다. 나와 아내는 윤 선생과 함께 여행하는 것이 꿈만 같다면서 좋아하였고, 윤 선생 역시 우리와 함께 여행하게 되어 기쁘다고 하였다. 오전 11시에 필라델피아를 떠난 우리는 오후 830분경에 미국 쪽 나이아가라 폭포에 도착하였다. 9시간 30분이 걸린 긴 여행이었다. 나는 아들이 장거리 운전을 할 때 교대해 주겠다는 생각으로 국제운전면허증을 준비해 가지고 갔다. 그러나 낯선 곳에서 운전할 엄두가 나지 않아 아들 혼자 운전하게 하여 미안하였다.

 

   나이아가라 폭포는 이리 호(Lake Erie)에서 흘러나온 나이아가라 강(Niagara River)이 온타리오 호(Lake Ontario)로 들어가는 도중에 형성된 큰 폭포이다. 염소 섬(Goat Island)을 기준으로 미국 폭포(American Falls)와 캐나다 폭포(말발굽 폭포, Horseshoe Falls)로 구별된다. 우리는 미국 폭포의 흐름을 살펴보고 사진을 찍은 후 바람의 동굴(Cave of the Wind)로 갔다. 입장권(14$)을 사니, 비닐 주머니와 슬리퍼를 주었다. 슬리퍼를 신은 뒤에 구두를 비닐주머니에 넣어 들고 엘리베이터를 탔다. 8층 깊이를 내려가서 내리니, 우의를 나눠주었다. 우의를 입고 밖으로 나오니, 수십 미터 위에서 내리쏟는 큰 물줄기가 바로 눈앞에 보였다. 물이 튀기는 곳을 지나 계단을 오르니, 폭포가 아주 가까이에 보이는데, 정말 장엄하였다. 절벽 아래로 떨어진 물줄기는 강물과 합류하여 도도히 흐른다.

 

   날이 어두워질 무렵에 다시 차를 타고 나이아가라 강위에 놓인 다리를 건넌 후 간단한 입국 절차를 거쳐 캐나다로 갔다. 호텔에서 하룻밤을 지내고, 이튿날 아침에 캐나다 폭포를 순회하는 배를 탔다. 나눠준 우의를 입고 배에 오르니, 미국 폭포 앞을 지나 캐나다 폭포로 다가갔다. 도도하게 흐르던 강물이 절벽을 만나 내리쏟는 모습은 정말 씩씩하고 웅장하며 위엄 있고 엄숙하다. 배가 폭포 가까이에 가니 물이 쏟아져 우의를 입지 않으면 옷은 물론 메고 있는 가방도 다 젖을 지경이었다. 폭포는 좀 떨어진 곳에서 볼 때에는 아름답고 부드러운 느낌을 주었으나, 가까이 다가가니 무엇이든 집어 삼킬 듯이 덤비는, 사납고 무서운 모습이었다.

 

  점심 식사 후에 얼음포도주(Ice Wine)로 유명한 이니스 킬린(Innis Killin)을 다녀서 최 선생이 사는 온타리오 주 리치몬드 힐(Richmond Hill)로 향하였다. 금요일 오후라서 그런지 교통체증이 심하여 오후 7시에야 도착하였다. 최 선생은 우리를 반갑게 맞아 주었다. 최 선생과 윤 선생과 아내는 반가움과 기쁨에 겨워 탄성을 발하며 손을 맞잡아 흔들고, 포옹하며 즐거워하였다. 나는 최 선생과 반갑게 악수를 하고, 최 선생과 윤 선생의 얼굴을 찬찬히 살펴보았다. 두 사람 모두 젊은 시절의 모습은 아련하고, 세월을 딛고 선 노련미와 교양이 쌓여 아름다움을 드러내는 원숙한 여인의 모습이었다. 정말 반갑고, 기쁘고, 뜻있는 만남이었다.

 

   거실로 들어가 잠시 쉰 다음, 한국인이 운영하는 낙원식당으로 가서 저녁 식사를 하였다. 캐나다에 와서, 오랜 동안 만나지 못하던 동기동창 4명이 대화하며 한국음식을 먹으니, 즐거움이 더하여 더욱 맛있었다. 우리들의 대화에 끼지 못하는 아들과 손자손녀는 자기들끼리 작은 소리로 소곤거리며 식사하였다. 아들과 아이들은 호텔로 가고, 우리 네 사람은 최 선생 차를 타고, 최 선생 댁으로 갔다.

 

   최 선생 댁 거실의 식탁에 둘러앉은 우리는 최 선생이 준비한 다과를 나누며 많은 이야기를 하였다. 우리는 교대 다니던 때의 일, 생각나는 사람의 안부와 근황을 이야기하였다. 그리고 최 선생의 지나온 이야기를 들었다.

최 선생은 초등학교에서 5년을 근무한 뒤에 사직하고 캐나다에 왔다고 한다. 처음에는 여러 가지 일을 하면서 힘들고 어려운 일이 많았다. 직장을 여러 번 옮긴 뒤에 도요다자동차 회사에 취직하여 30년 근무하였는데, 말단 사원으로 시작하여 캐나다 지사의 대표가 되어 일하다가 몇 년 전에 정년퇴직하였다고 한다. 지금은 고등학교 교사로 근무하는 아들과 함께 여유롭게 지내면서 여러 가지 봉사활동을 하는데, 병원의 환자를 돌보는 일에 많은 시간을 보낸다고 하였다. 이역만리에 와서 모든 고난을 이겨내고 성공한 삶을 사는 최 선생의 의지와 노력에 경의를 표하며 돌봐주신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한다.

 

   네 사람이 앉아 이야기꽃을 피우고 있을 때 아내와 윤 선생의 중고등학교 동창인 김 여사가 왔다. 볼일을 보고 오느라고 늦었다고 하였다. 밤이 늦은 시간인데도 40분 가까이 차를 몰고 찾아온 정성이 대단하였다. 대화를 하다 보니, 김 여사와 최 선생은 초등학교 동기동창이었다. 초등학교, 고등학교, 교육대학 동창으로 인연이 맺어진 다섯 사람의 이야기는 끝이 없었다. 새벽 1시가 넘은 뒤에 내일 다시 만나기로 하고, 김 여사는 자기 집으로 갔고, 우리들은 최 선생이 안내하는 2층 방으로 가서 잠을 청하였다.

 

   최 선생 댁은 리치몬드 힐의 잘 정리된 주택가에 있는 2층 단독주택이다. 집 앞 길가에는 큰 나무들이 듬성듬성 서 있고, 뒤쪽에는 꽤 넓은 정원이 있다. 아침 8시에 일어나 아래층으로 내려가니, 최 선생은 주방에서 아침 식사를 준비하고 있고, 윤 선생은 정원에 있었다. 정원 한 가운데는 잔디를 심었는데, 잘 가꾼 잔디밭에는 잡초가 하나도 없다. 가장자리에는 장미를 비롯한 여러 가지 꽃나무를 심었는데, 잘 자란 꽃나무에 예쁜 꽃들이 피었다. 최 선생의 사랑스런 손길이 정원 구석구석에 배어 있었다. 잘 가꾼 잔디와 예쁜 꽃을 배경으로 기념사진을 찍었다.

 

   정원에서 들어와 집안을 둘러보니, 가구와 실내 장식에 최 선생의 높은 안목과 알뜰함이 배어 있는 것 같았다. 아침 식사 시간에는 최 선생의 아드님이 맛있는 빵과 과일, 커피를 내다 주었다. 우리는 식사를 하면서 지난밤에 다하지 못한 이야기를 이어갔다.

 

   우리는 식사 후에 자동차로 1시간 가까이 떨어진 곳에 있는 온타리오 호로 갔다. 온타리오 호는 나이아가라 폭포를 지난 나이아가라 강물이 흘러와서 이룬 넓고 큰 호수이다. 호수 옆에는 빽빽하게 들어선 건물들이 숲을 이루고 있다. 호수에는 커다란 유람선이 떠 있고, 크고 작은 보트들이 한가로이 오간다. 유람선을 타고 한 바퀴 돌고 싶었으나, 시간이 없어 김 여사와 만나기로 한 중국음식점으로 갔다. 온타리오 넓은 호수가 내다보이는 창가 좌석에 앉아 맛있는 딤섬 요리를 먹으며 지난밤에 못 다한 이야기들을 계속하였다.

 

   식사를 마치고 호수가로 나와 산책하고 사진을 찍은 후 아쉬운 작별을 하였다. 불시에 찾아온 우리를 반갑게 맞아 정성껏 대접해 준 최 선생의 따뜻한 마음에 깊이 감사하고, 금년 10월에 있을 교대1회 문화탐방 행사 때 한국에 와서 함께 하기를 바란다는 말도 하였다. 몬트리올로 가서 하루를 묵은 우리는 몬트리올 노트르담 대성당, 성 조셉 성당을 살펴본 뒤에 필라델피아로 돌아왔다.

 

   한국으로 돌아오기 이틀 전에 윤 선생 내외분을 대접하려고 간 중국식당에서 서울교대 교수로 재직하시며 우리를 가르쳐 주신 성악 전공의 조 교수님을 뵈었다. 조 교수님은 서울대 음대를 졸업하시고, 서울교대 교수로 재직하시다가 미국 유학을 가셨다. 줄리아드 음대에서 석사와 박사학위를 받은 후 템플대학의 교수로 재직하다가 정년퇴직하셨다고 한다. 조 교수님은 윤 선생이 출석하는 필라델피아 한인연합교회 성가대 지휘자로 오랫동안 수고하시다가 몇 년 전에 은퇴하셨다. 조 교수의 뒤를 이어 서울교육대학 교수가 되셨던 사모님과의 사이에서 15녀를 두었는데, 아들 1명은 연세대학교 교수이고, 다른 자녀는 모두 미국에 산다고 한다.

 

   80세가 되신 조 교수님과 사모님은 건강해 보이셨다. 한 학기 가르침을 받은 은사님을 50여 년 만에 미국에서 만나 뵈니, 무척 반갑고 기뻤다. 은사님은 함께 늙어가는 옛 제자 부부의 손을 잡고, 매우 흡족해 하셨다. 조 교수님을 뵙도록 주선해 준 윤 선생께 감사한다.

 

   필라데피아를 떠나기 전에 우리는 윤 선생 내외분을 몇 차례 더 만나 즐거운 시간을 가졌다. 우리를 위해 많은 시간과 노력을 아끼지 않은 윤 선생 내외분의 따뜻한 마음에 감사한다. 이번에 만난 윤 선생, 최 선생, 조 교수님과 그 가정에 하나님의 사랑과 은총이 늘 함께 하기를 기도한다. (2015. 7.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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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얼마 전에 한 지방의 노인대학 학장으로부터 옛날이야기를 소재로 강의를 해 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옛날이야기를 깊이 연구한 사람이니 재미있게 잘 할 수 있을 것이라는 말도 덧붙였다. 나는 수많은 옛이야기 중 어떤 이야기를 소재로, 무엇에 초점을 맞추어 강의할까를 노인대학 학장과 상의한 후 <옛이야기에서 행복 찾기>라는 제목으로 강의하기로 하였다. 그래서 먼저 옛이야기에 나타난 행복은 무엇인가를 생각해 보았다.

 

   옛이야기는 우리 조상들이 꾸며낸, 일정한 짜임새를 가진 이야기이다. 우리 조상들은 옛이야기를 생활 속에서 형성하여 말로 전해 왔다. 옛이야기 속에는 우리 민족의 역사, 신앙, 세계관, 꿈과 낭만, 웃음과 재치, 생활을 통해서 얻은 교훈, 역경을 이겨내는 슬기와 용기 등이 녹아 있다. 따라서 옛이야기를 주의 깊게 살펴보면, 우리 조상들이 무엇에 가치를 두고, 어떻게 살았는가를 알 수 있게 된다.

 

   조선 후기에 널리 읽힌 한글 고소설 <삼사횡입황천기(三士橫入黃泉記)>에는 우리 조상들은 어떠한 삶을 행복하고 가치 있는 삶이라고 생각하였는가가 잘 나타난다.

 

   옛날에 세 선비가 봄철에 경치 좋은 곳에서 술을 마시다가 과음(過飮)하여 인사불성(人事不省)이 되었다. 그때 마침 그곳을 지나던 저승사자가 이들을 저승으로 잡아갔다. 이들은 저승의 문서를 관리하는 최 판관(判官)에게 살려달라고 애원하였다. 최 판관이 이들의 주소와 성명을 묻고, 수명부(壽命簿)와 대조해 보니, 이들은 10년 후에 잡아와야 할 사람들이었다. 이 사실을 염라대왕에게 보고하니, 염라대왕은 수명이 남은 사람을 잡아온 저승사자를 크게 꾸짖고, 이들을 즉시 이승으로 보내라고 하였다. 이 말을 들은 세 선비는 자기들의 육신이 썩기 시작하여 갈 곳이 없으니, 다시 태어나게 해 달라고 하였다.

 

   염라대왕은 원하는 대로 해 줄 터이니, 소원을 적어내라고 하였다. 첫째 선비는 좋은 집안에 태어나 공부를 많이 하고, 높은 벼슬을 하게 해 달라고 하였다. 둘째 선비는 부잣집 아들로 태어나 사업에 성공하여 부자가 된 후 호의호식(好衣好食)하며 살게 해 달라고 하였다. 셋째 선비는 좋은 집안에 태어나 효행과 예절을 바르게 익히며 올바르게 성장한 뒤에, 부모님께 효도하며 자녀를 길러 이들이 가정을 이루며 사는 것을 보고, 친척들과 화목하게 지내면서, 수명이 다할 때까지 근심걱정 없이 건강하게 살게 해 달라고 하였다. 이를 본 염라대왕은 첫째 선비와 둘째 선비의 소원을 들어주었다. 그러나 셋째 선비의 글을 보고는 이렇게 말했다. “인생의 참된 행복이 무엇인가를 아는 너는 참으로 생각이 깊구나. 이것은 그리 쉽게 얻을 수 있는 게 아니다. 그러나 힘써 노력하면 얻을 수 있을 것이니, 그리 알고 어서 가거라.”

 

   이와 비슷한 이야기가 조선 후기에 유재건(1793~1880)이 쓴 《이향견문록(里鄕見聞錄)》의 <삼사발원설(三士發願說)>에도 실려 있다. <삼사발원설><사횡입황천기>는 조선 후기에 널리 유포되던 이야기꾼들의 이야기 내용이 한문단편 또는 한글 고소설 작가에 의하여 소설적으로 구성된 것이다. 이들 작품은 모두 사람의 육신은 죽어도 영혼은 죽지 않는다고 하는 영혼불멸관(靈魂不滅觀)과 재생(再生)에 관한 의식을 바탕으로 하여, 사람의 전정한 행복이 무엇인가를 제시해 주고 있다.

 

  <삼사발원설>에서 옥황상제는 셋째 선비가 원하는 복을 청복(淸福)이라고 하는데, ‘청복은 쉽게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님을 탄식한다. 청복은 조선 선비들의 행복관을 나타내는 데 많이 쓰이던 말이다. ‘청복은 세상의 명리(名利)를 탐하지 아니하고, 근심 걱정 없이 쾌적하게 소요하며 한가로이 노닐고, 천수(天壽)를 누리며 건강하게 사는 것을 뜻한다. 이 이야기는 조선 시대 선비들의 행복관을 바탕으로 꾸며진 이야기인데, 높은 벼슬이나 재물에 가치를 두지 말고, ‘청복을 누리며 살 것을 일깨워 준다.

 

   문명화된 산업사회에 사는 현대인들은 위 작품에 나오는 첫째와 둘째 선비처럼 권력이나 재물에 지나치게 큰 가치를 부여하고, 이것을 추구하는 데에 온갖 노력을 다 바치는 경향이 있다. 권력이나 재물은 사람의 마음을 끄는 힘이 있어서 한 번 유혹을 받으면 그것에 집착하게 되고, 그것에 집착하다 보면 불을 보고 달려드는 부나비처럼 되고 만다. 그래서 마침내는 파멸의 늪에 빠지고 말게 된다. 지난 날 권력의 핵심부에 있던 사람의 풀죽은 모습, 탈법적인 행위를 한 재벌들의 구겨진 모습을 보면서 온갖 상념(想念)이 교차한다. 그들이 조상들의 행복관을 본받아 청복을 누리고자 했던들 권력과 재물에 눈이 어두워 법을 어기고, 자기의 이익만을 쫓는 일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랬으면 오늘날 저토록 처참한 몰골을 보이지 않을 것 아닌가! 생각이 여기에 미치니, 셋째 선비의 소원이 더욱 뜻 깊게 느껴진다.

 

   청복을 누리기 위해서는 먼저 권력과 재물에 집착하는 마음을 버려야 한다. 이들이 유혹할 때에는 뿌리쳐야 하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행복을 어디에서 찾을 것인가 하는 가치관을 정립해야 한다. 그 다음으로는 밖으로 드러나거나 요란스럽지 않은 가운데 참 행복을 느끼며 살려는 노력을 해야 한다. 자기의 능력과 처지를 바로 알고, 분에 넘치는 욕심을 갖지 않으며, 바르게 처신하며 노력하는 가운데 행복은 얻어지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얻은 복은 놓치지 않도록 노력해야 한다. 자기의 올바른 뜻을 펼 수 있을 정도의 지위와 권력, 의식 걱정을 하지 않으면서 자녀들을 가르칠 정도의 재물만 있으면 된다는 생각을 하면, 청복에 한 걸음 다가설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우리 조상들이 재미있는 이야기를 통해 알려 주는 청복, 참된 행복은 많은 재물이나 큰 권력을 얻는 것이 아니다. 참된 행복은 올바르게 성장한 뒤에, 부모님께 효도하며, 자녀를 길러 이들이 가정을 이루며 사는 것을 보고, 친척들과 화목하게 지내면서, 수명이 다할 때까지, 근심 걱정 없이 건강하게 사는 것이다. 한국인 모두 청복을 누리며 살기를 기원한다                                                                (2015. 05.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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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얼마 전에 말의 힘에 대해 실험한 결과를 적은 글을 읽었다. 국립국어연구원에서 발행한쉼표, 마침표(20149)에 실린 글인데, 고등학교 국어선생님이 학생들과 함께 실험한 내용이어서 매우 흥미로웠다.

 

   서울성수고등학교 권정은 선생님은 교실에 두 개의 유리병에 밥을 넣어놓고, 한쪽 에는 감사합니다.’, 다른 한쪽에는 짜증나!’를 써 놓았다. 두 개의 유리병을 교실 뒤에 놓고 학생들이 지나다닐 때마다 한쪽 병에는 고마워’, ‘사랑해’, ‘감사해등의 긍정적인 말을 하고, 다른 한쪽 병에는 미워’, ‘싫어’, ‘짜증나등의 부정적인 말을 하게 하였다. 3주 후에 그 결과를 본 선생님과 학생들은 모두 놀랐다. ‘감사합니다를 써 놓은 병의 밥에는 구수한 냄새가 나는 누룩곰팡이가 피어 있고, ‘짜증나를 써 놓은 병의 밥에는 숨이 막힐 정도로 지독한 냄새가 나는 시커먼 곰팡이가 피어 있었다.

 

   이 실험 결과는 한국교육방송(EBS)이 다큐멘터리로 제작해 소개하였는데, 학생들은 이를 믿으려 하지 않았다. 이를 안타깝게 여긴 정화여자상업고등학교 국어과 교사인 최태림 선생님은 말의 힘을 믿지 않는 학생들에게 직접 실험을 하여서 보여 주기로 마음먹었다. 그는 바나나 두 개를 골라 똑같은 모양의 플라스틱 통에 넣었다. 하나에는 예쁜아 사랑해’, 다른 하나에는 쓰레기 같은 놈이라고 써서 붙였다. 그리고 아침저녁으로 예쁜아 사랑해가 적힌 바나나에는 사랑의 말을, ‘쓰레기 같은 놈이 적힌 바나나에는 나쁜 말을 해 주었다. 열흘 후에 보니, ‘쓰레기 같은 놈이 적힌 바나나는 완전히 검은색으로 썩어 있는 반면, ‘예쁜아 사랑해가 적힌 바나나는 본연의 노란색을 어느 정도 유지하고 있었다고 한다.

 

   사람끼리 하는 말에는 힘이 있어 그 영향이 크다는 것은 전부터 알고 있었다. 재배하는 농작물이나 화초, 사육하는 가축이나 애완동물과 대화하며 칭찬의 말을 하면 긍정적인 효과가 나타난다는 것도 전부터 들어서 알고 있었다.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는 말은 널리 알려진 일이 아닌가. 그러나 말의 힘이 무생물인 밥이나 바나나에도 미친다는 사실은 얼른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그래서 실험 과정을 자세히 읽었다. 최 선생은 실험 대상으로 삼은 바나나를 고를 때 같은 송이에 붙은 것으로, 모양·익은 정도·껍질에 생긴 점의 개수까지 비슷한 것을 골랐다고 한다. 실험할 때에는 조건을 똑같이 하기 위해서 하루는 예쁜아 사랑해에게 먼저 말을 걸고, 다음 날에는 쓰레기 같은 놈에게 먼저 말을 걸었다고 한다. ()를 재가면서 똑같은 시간 동안 말을 하였고, 채광 조건이나 바람, 습도도 똑같이 맞추었다고 한다. 이렇게 엄정한 조건 아래에서 선생님과 학생들이 정성을 다해 실험한 결과라면 믿지 않을 수 없다. 말의 힘을 믿지 않던 학생들도 실험이 끝난 뒤에는 말의 힘을 믿고, 말 한마디 한마디에 신경을 쓰는 모습을 보이고, 남에게 상처를 주는 말을 하지 않으려고 노력한다고 한다. 그리고 전학을 가는 학생에게 반 학생 전원이 다른 학교에 가서도 학교생활을 잘할 수 있을 거라는 격려의 말을 써서 주었다고 한다.

 

   이 실험 결과를 받아들이기로 생각하니, 말의 힘이 무생물에까지 미친다는 사실이 참으로 놀랍다. 무생물에게까지 미치는 말의 힘이 감성을 지닌 사람에게는 더 큰 힘을 발휘할 것 아닌가! 옛사람들은 말에는 신령스런 힘이 있다.’언령관(言靈觀)’을 지니고 있었다. 이런 관념이 마음 바탕에 있었기 때문에 좋은 말만 골라서 하고, 상스러운 말이나 욕, 남에게 상처를 주는 말은 삼가도록 가르쳤다. , 자기가 이루고 싶은 일을 말로 표현하고, 기도하면 이루어진다고 믿었다. 다른 사람에게 축복의 말을 하고, 덕담(德談)을 나누는 것도 이런 관념이 마음 바탕에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 속담에 말이 씨가 된다.’는 말이 있다. 말한 것은 이루어진다는 의식을 바탕으로 한 것인데, 좋은 말은 입에 올리되 좋지 않은 말은 입에 올리지 말라는 경계의 뜻도 담고 있다. 긍정적인 생각을 가지고, 긍정적인 말을 하면 긍정적인 일들이 현실로 나타나게 될 것이다. 부정적인 생각을 가지고 부정적인 말을 많이 하면, 그런 일들이 현실로 나타나게 될 것이다. , ‘가는 말이 고와야 오는 말이 곱다.’, ‘말이 고마우면 비지 사러 갔다가 두부 사온다.’, ‘말 한마디로 천 냥 빚 갚는다.’는 속담도 있다. 이런 속담은 말에 힘이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한 속담들이다. ‘말이 마음이고, 마음이 말이다.’라는 말도 있다. 내가 먼저 마음을 열고 좋은 말을 하면, 상대방도 나를 좋게 말할 것이다.

 

   성경에도 말에 관한 가르침이 있다. ‘나쁜 말은 입 밖에 내지 말고, 덕을 세우는 데에 필요한 말이 있으면 적절한 때에 해서 은혜가 되게’(에베소서 4:29) 해야 한다. ‘경우에 알맞은 말은 은쟁반에 담긴 금사과’(잠언 25:11)와 같이 아름답고 품격이 있다. 사람을 더럽히는 것은 입으로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입에서 나오는 것’(마태복음 15:11) 즉 말이다. 말은 사람을 깨끗하고 품위 있게 하기도 하고, 더럽히기도 한다. 말은 사람의 마음에서 나오는 것’(마태복음 15:18)이므로, 먼저 마음을 가다듬고 깨끗이 해야 한다. 그래야 덕을 세우는 말, 분위기에 맞는 말, 좋은 말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창세기> 123절에는 너를 축복하는 사람에게는 내가 복을 베풀고, 너를 저주하는 사람에게는 내가 저주를 내릴 것이다.”라고 하였다. 다른 사람이 나에게 복을 빌어주면 그 말대로 되지만, 저주의 말을 하는 사람에게는 저주를 내린다고 한다. 이것은 말에 따른 축복과 저주에 관한 하나님의 말씀이다. 내가 다른 사람의 축복을 받으려면, 내가 먼저 다른 사람을 축복해야 한다. 다른 사람의 약점을 말하거나 비판하는 말을 하지 말고, 불평의 말, 저주의 말 대신에 축복의 말을 하여야 한다. 그래야 그 사람도 나를 위해 복을 빌어 줄 것이다.

 

   사람들은 말로 인하여 칭찬을 받거나 복을 받기도 하지만, 말을 잘못하여 다른 사람의 마음에 상처를 주거나 화를 불러오기도 한다. 다른 사람의 잘못을 꼬집고, 마음을 상하게 하는 말은 독이 되어 나에게 돌아온다. 그러나 다른 사람의 장점을 찾아 칭찬하고, 축복하는 말은 나에게 복으로 돌아온다. 말이 지닌 힘이 좋은 쪽으로 미치도록 다른 사람을 축복하는 말을 많이 하며 살아야겠다. <2015. 05. 16.>

 

  

 

서울 성동구 응봉동과 금호동에 걸쳐 있는 응봉산은 봄과 희망을 상징하는 개나리꽃의 명소이다. 이른 봄에 개나리가 활짝 피어 온 산을 샛노랗게 물들이는 응봉산은 강남에서 성수대교를 건너 북쪽으로 올 때에는 산의 남쪽을 보여주고, 독서당길을 지날 때에는 북쪽의 모습을 가까이에서 보여준다. 나는 1990년대 중반에 이곳을 지나다가 개나리꽃이 활짝 피어 있는 모습을 보고, 감탄하고 환호(歡呼)하였다. 그 후로 가끔 이 근처를 지나게 되었는데, 꽃이 하도 예뻐서 산 밑에 차를 세우고 올라가 개나리꽃의 아름다운 모습에 취했던 적도 있다. 이것이 인연이 되어 응봉산이 보이는 금호동의 아파트로 이사를 하였다.          

 

응봉산은 해발 94m의 야트막한 산이지만, 경관이 빼어난 곳이다. 산 이름은 산의 모양이 매의 머리 모양을 닮았으므로, ‘매봉또는 응봉(鷹峯)’이라고 하였다고 한다. 조선 시대에 임금이 사냥할 때 이곳에서 매를 놓아 꿩을 잡기도 해 산 이름을 매봉 또는 응봉이라고 하였다고 하기도 한다. 조선 태조는 즉위 4(1395)에 이곳에 응방(鷹坊)을 설치하고, 매사냥에 쓸 매를 사육하는 일을 맡아 보게 하였다. 태종세종도 이곳에 와서 매사냥을 즐겼다. 조선 태조 때부터 성종 때까지 100여 년 동안 이곳에 와서 151회나 매사냥을 했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이곳은 매사냥터로 이름이 있던 곳임을 알 수 있다.

 

응봉산에 개나리를 심은 것은 1980년대 개발 이후 산자락의 흙이 흘러내리는 것을 막기 위해서였다. 서울시는 1987년에 88서울올림픽을 앞두고, 조림사업의 일환으로 1만 그루의 개나리를 심었다. 응봉산은 암반층으로 이루어진 바위산이이어서 땅이 기름지지 못하고 몹시 메마르다. 개나리는 이런 땅에서 잘 자랄 수 있는 수종(樹種)이어서 심은 것인데, 지금은 봄이면 많은 사람들에게 기쁨과 희망을 안겨주는 개나리 명산이 되었다. 응봉산 동쪽에는 석재(石材)를 채취하던 바위 절벽이 있는데, 이곳을 손질하여 인공암반등반시설을 설치하였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수시로 찾아와 등반 훈련을 하면서 체력 증진에 힘쓴다.

 

서울 성동구에서는 1997년부터 응봉산에 개나리가 활짝 피는 3월 말부터 4월 초순 사이에 개나리축제를 연다. 개나리축제 때에는 어린이 그림그리기대회, 글짓기대회, 사진전시회, 노래자랑, 먹거리장터 등이 열리는데, 많은 사람들이 와서 봄기운에 마음껏 취하며 즐긴다.

 

   응봉산은 내가 사는 아파트에서 마주 보이는 산이어서 거실에서 산빛이 어떻게 변하는가를 알 수 있다. 2014년은 터키에서 4년을 보내고 돌아온 후 처음 맞는 봄이어서 화신(花信)을 전해 주는 응봉산의 개나리가 어떤 모습일까 궁금하여 가끔씩 응봉산을 바라보곤 하였다. 320일 아침, 거실에서 응봉산을 바라보니, 나뭇가지에서 노란색이 조금 보이는 듯하였다. 반가운 마음에 달려가 보니, 개나리의 가지마다 노란 꽃망울이 맺혀 있다. 하루 이틀 지나는 동안 노란빛은 조금씩 짙어졌다. 꽃샘추위에 잔뜩 움츠리고 있던 꽃망울들이 예쁜 미소를 보이기 시작하였다.

 

   며칠 후 아내와 함께 응봉산에 가니, 온 산이 샛노란 개나리와 막 피어나는 목련, 벚꽃이 어우러져 새 봄의 아름다움을 한껏 자랑하고 있다. 터키에 가 있는 동안 봄이면 개나리가 활짝 핀 응봉산의 모습을 떠올리며 보고 싶어 하였는데, 4년 동안 보지 못하였던 꽃들이 나를 반겨준다. 응봉산의 개나리는 새봄의 정취를 마음껏 느끼게 해 주고, 한국에 와서 다시 봄을 맞게 된 기쁨을 느끼게 해 주었다.

 

   응봉산 정상에 있는 팔각정에 올라 북서쪽을 보니, 대현산과 금호산이 보이고, 그 뒤로 남산타워가 보인다. 남쪽으로는 바로 앞에 서울숲이 있고, 그 옆으로는 중랑천과 한강 본류의 시원한 물줄기가 자연스레 만나는 모습이 보인다. 한강 건너로는 무역센터, 잠실주경기장, 역삼동 스타빌딩, 압구정동 아파트 등의 건물이 보인다. 그 뒤로 관악산, 청계산, 우면산이 눈에 들어온다. 성수대교와 영동대교, 동호대교, 강변북로와 동부간선도로, 성수교와 두무개길을 연결하는 입체도로에는 차들이 꼬리를 물고 달리고 있다. 유유히 흐르는 물줄기와 힘차게 달리는 차들을 보니, 활기가 넘쳐나 역동적인 힘을 느끼게 한다. 팔각정에서 보는 서울의 경관은 정말 멋지고 아름답다. 응봉산을 남서울 조망의 명소, 별자리 관찰의 명소로 꼽는 이유를 알 것 같다.

 

   집으로 오기 위해 독서당길 위로 난 육교를 건너 우리 아파트 뒤쪽에 있는 대현산으로 향했다. 대현산으로 올라가는 길옆과 대현산공원에도 개나리꽃과 벚꽃을 비롯한 여러 꽃들이 환한 미소로 우리를 맞는다. 대현산을 거쳐 집으로 와서 거실에서 다시 응봉산을 건너다보았다. 응봉산의 개나리꽃들이 자기들의 예쁜 모습이 변하기 전에 다시 오라고 한다. 작은아들과 손녀들이 오면 이들과 함께 다시 가야겠다. 꽃이 지기 전에 애들이 와야 할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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