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512일에 성동문인협회 회원들과 충청북도 옥천에 있는 정지용문학관과 육영수생가를 둘러본 뒤에 고려 시대에 놓았다는 진천 농다리에 갔다. 나는 천 년 의 세월을 견뎌온 농다리를 건너면서 우리 선조들의 뛰어난 건축기술에 감탄하고, 공경의 마음을 느꼈다. 농다리를 건넌 뒤에 뒤쪽을 보니, 높은 산마루에 정자가 있고, 그 아래에 생거진천이라고 커다랗게 쓴 흰 글자가 보였다


농다리를 건넌 뒤에 오르는 나지막한 고갯길은 초평저수지 둘레길과 이어진다. 이 길의 이름은 초평저수지농다리의 머리글자를 따서 지은 초롱길이다. 초롱길이 시작되는 곳에 진천군에서 세운 <생거진천(生居鎭川)의 유래>를 적은 안내판이 서 있다. 용고개(살고개) 성황당을 지나 왼쪽(시계반대 방향) 길로 조금 걸으니, ‘생거진천의 유래를 만화로 그린 안내판이 서 있다. ‘생거진천사거용인(死居龍仁)과 함께 널리 알려진 말로, ‘살아서는 진천이 좋고, 죽은 뒤에는 용인이 좋다는 뜻이다.


  나는 오래 전에 진천 지방의 설화를 조사하면서 이 곳 노인들한테 생거진천 사거용인이란 말의 유래를 설명하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 중 하나는 다음과 같다.


   옛날 진천 땅에 추천석이란 농부가 살았다. 어느 날 밤, 저승사자가 와서 그를 저승으로 데려갔다. 염라대왕은 용인의 추천석을 데려와야 하는데, 저승사자가 실수로 이름과 사주가 같은 진천의 추천석을 데려온 것을 알았다. 그래서 빨리 그를 돌려보내고, 용인의 추천석을 잡아오라고 하였다. 진천 추천석의 영혼이 집에 돌아와 보니, 이미 시신을 매장하였으므로, 들어갈 육신이 없었다. 염라대왕에게 이런 사정을 말하니, 염라대왕은 그를 방금 데려온 용인 추천석의 몸에 의탁하게 해 주었다.


  그가 용인 추천석의 몸으로 들어와 죽었던 몸이 다시 살아나니, 그 가족들이 매우 기뻐하였다. 그는 그 가족들에게 저승에서 있었던 일을 말하고, 자기는 진천 추천석이므로, 진천으로 가겠다며 진천으로 향했다. 가족들은 이를 믿지 않고, 그의 뒤를 따랐다. 그가 진천으로 가서 진천 가족들에게 겪은 일을 말하였으나, 그쪽 가족들도 이를 믿으려 하지 않았다. 이 일의 판결을 맡은 고을 원님은 자초지종(自初至終)을 자세히 듣고, 진천과 용인의 추천석에 관해 조사한 뒤에 생거진천 사거용인하라고 판결하였다. 그가 진천의 가족들과 함께 농사지으며 잘 살다가 죽으니, 용인의 가족들이 와서 그의 시신을 모셔다가 장사하였다.


  이것은 한국인의 생사관(生死觀)을 바탕으로 꾸며진 이야기이다. 한국인은 예로부터 육신과 영혼이 결합하여 있는 상태가 삶이고, 육신에서 영혼이 분리된 상태를 죽음으로 보았다. 저승에는 인간의 수명부(壽命簿)가 있는데, 저승사자는 수명이 다한 사람의 영혼을 저승으로 데려간다고 한다. 진천 추천석은 수한(壽限)이 다하지 않았는데, 저승사자의 실수로 저승으로 잡혀갔다가 돌아와 용인 추천석의 몸에 의탁한다. 그래서 용인 추천석의 몸에 진천 추천석의 영혼이 깃들은 진귀한 일이 생겼다. 이런 일을 당한 양쪽 가족들의 당황스러움은 이루 다 말할 수 없었을 것이다. 이 때 원님은 영육분리(靈肉分離)의 이원적 사고를 바탕으로, ‘생거진천 사거용인하라 하였다. 영혼을 중시한 판결이라 하겠다. 이 이야기는 <생거진천의 유래>를 적은 안내판에도 적혀 있고, <만화로 보는 생거진천 이야기> 설명판에 8장의 그림과 함께 적혀 있다.


  또 다른 이야기를 보면, 진천의 허씨녀가 용인으로 시집가서 아들을 낳고 행복하게 살다가 청상과부(靑孀寡婦)가 되었다. 그녀는 외로움을 달랠 길 없어 아들을 시동생에게 맡기고, 진천의 유생과 재혼하였다. 그녀는 진천에서 아들 하나를 낳아 기르며 단란하게 살았으나, 용인의 아들을 잊지 못하여 남몰래 눈물짓곤 하였다. 그녀가 환갑이 되던 해에 재혼한 남편도 세상을 떠났다.


  용인의 큰아들은 장성하여 결혼을 하고, 살림도 넉넉해 졌다. 그는 어머니를 찾으려고 사방으로 수소문한 끝에 어머니가 진천에서 살고 계신 것을 알았다. 그가 어머니를 찾아가 모시겠다고 하였으나, 진천의 아들이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용인의 아들은 생각다 못해 고을 원님에게 소송을 하였다. 원님은 어떻게 판결해야 좋을지 몰라 고민을 하다가 생거진천 사거용인이라는 말이 있지 않느냐는 손자의 말을 듣고, “살아 있을 동안에는 진천 아들과 함께 살고, 죽은 뒤에는 용인 아들이 모시도록 하라.”고 판결하였다. 이 이야기에서 생거진천 사거용인이란 말은 어린 아이도 알 정도로 당시에 널리 알려져 있던 말이라고 한다. 이 말이 원님의 판결에 영향을 끼쳤던 것이다.


  진천 지방은 옛날부터 평야가 넓고, 땅이 기름져서 농산물이 잘 자라고, 가뭄이나 홍수의 피해가 적어 농사짓기에 좋고, 인심이 좋아 살기 좋은 곳으로 꼽힌 곳이다. 그래서 생거진천이란 말이 생겼다고 한다. 용인은 경치가 아름답고, 산세가 좋아 묘를 쓰기에 좋은 명당자리가 많아 예부터 권력과 재력이 있는 분들의 묘가 많은 곳이다. 그래서 죽은 뒤에는 용인 땅에 묻히고 싶다는 뜻에서 사거용인이란 말이 생겼다고 한다.


  앞에 소개한 두 이야기는 생거진천 사거용인이란 말이 생긴 내력을 재미있게 꾸며낸 이야기이다. 고장의 특색을 살리는 말을 만들고, 그에 걸맞는 이야기를 꾸며 전파전승해 온 조상들의 문학적 형상력이 매우 뛰어났음을 알 수 있다. 진천 지방에서는 진천이 살기 좋은 고장임을 알리는 말로 생거진천이라는 말을 곳곳에 적어 놓아 널리 알리고 있다. , 진천 지방에서 나는 쌀을 생거진천쌀이라고 이름을 붙였는데, 밥맛이 좋아 소비자들에게 사랑을 받고 있다. ‘생거진천이란 말처럼 진천이 살기 좋은 고장으로 오래오래 기억되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2016. 7.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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