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도 동두천에 있는 소요산은 여러 봉우리와 바위들이 조화를 이루어 경관이 빼어나므로, ‘경기의 소금강이라는 별명이 붙은 산이다. 특히 진달래가 피는 4월과 단풍이 드는 10월은 경관이 아름답기로 유명하다. 10월의 마지막 날 교일산우회 남부모임 회원들과 함께 단풍이 곱게 물든 모습을 보기 위해 다시 소요산을 찾았다. 전철 1호선 소요산역에서 내려 소요산으로 가는 길은 평일인데도 사람들로 붐볐다.

 

   소요산에는 신라의 고승(高僧) 원효대사(元曉大師, 617~686)와 태종무열왕의 딸 요석공주(搖石公主)의 애틋한 사랑 이야기가 깃들어 있다. 두 사람의 사랑과 소요산과의 인연을 삼국유사(三國遺事)를 비롯한 문헌을 참조하여 본다.

 

   신라 태종무열왕 때 고승으로 이름을 떨친 원효대사는 속성(俗姓)이 설()씨이다. 수도에 전념하던 원효대사가 거리를 돌아다니며 누가 나에게 자루 없는 도끼를 주어 하늘을 떠받칠 기둥을 찍게 하겠는가(誰許沒柯斧 我斫支天柱)!” 하고 노래를 불렀다. 사람들은 이 노래의 뜻을 알지 못하였다. 그러나 태종무열왕은 대사가 귀부인을 얻어 현인(賢人)을 낳고자 하는구나. 현인을 얻는 것은 나라의 큰 이득이다.” 하고, 관리를 시켜 대사를 찾아 홀로 된 요석공주가 살고 있는 요석궁(搖石宮)으로 모시고 가라고 하였다. 관리가 대사를 찾아다니는데, 그때 마침 다리를 건너던 대사가 미끄러져 물에 빠졌다. 관리는 대사를 요석궁으로 데리고 가서 옷을 갈아입게 하였다. 대사는 요석궁에서 며칠을 묵은 후에 떠났다. 얼마 후 요석공주가 아들을 낳고, 이름을 설총(薛聰)이라 하였는데, 이 아이는 자라서 당대의 석학(碩學)이 되었다. 파계승(破戒僧)이 된 원효대사는 속인(俗人)의 옷을 입고 전국을 떠돌며 노래하고 춤추면서 중생(衆生)을 교화(敎化)다가 소요산에 와서 머물며 수행(修行)에 전념하였다. 대사가 소요산에 머물고 있다는 소식을 들은 요석공주는 설총을 데리고 이곳으로 와서 별궁을 짓고 살면서 수도하는 원효대사를 향해 매일 절을 올리곤 하였다고 한다.


   이처럼 이곳은 원효대사와 요석공주의 사랑이 깃든 곳이기에, 입구에 이를 형상화한 연리지문(連理枝門)’을 소요산 상징 아치(arch)로 세워 놓았다. 연리지(連理枝)는 두 나무의 가지가 서로 맞닿아서 결이 서로 통한 것을 말하는데, 화목한 부부나 남녀 사이를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이다. 아치의 왼쪽 원효목(元曉木)은 원각(圓覺)의 도를 깨우치기 위해 수도하는 원효대사를 형상화한 것이고, 오른쪽 요석목((搖石木)은 지순한 사랑을 품은 요석공주를 형상화한 것이라고 한다. 소요산을 원효대사와 요석공주의 사랑 이야기와 연관 짓고, 이를 연리지문으로 형상화한 것은 아주 좋은 착상(着想)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 문을 지나는 모든 사람이 연리지처럼 서로 화목하게 마음을 나누며 살았으면 좋겠다.

 

   연리지문을 조금 지나 자재암(自在庵) 쪽으로 올라가니, 요석공원이 있고, 통행로 건너편에 '요석궁터' 표석이 있다. 나는 요석공원과 요석궁터 앞에 서서 파계(破戒)하여 요석공주와 인연을 맺던 원효의 모습, 며칠 동안 꽃피웠던 아름다운 사랑과 그 열매인 아들 설총을 데리고 이곳에 와서 수도에만 전념하는 대사를 멀리서 바라보며 매일 예배(禮拜)를 올리는 요석공주의 단풍잎보다 더 곱고 예쁜 사랑을 떠올려 보았다. 이러한 공주의 지성과 사랑을 기리는 뜻에서 맨 오른쪽에 있는 산봉우리의 이름을 공주봉(公主峰)’이라고 하였다고 한다. 이 봉우리 이름을 원효대사가 지었다고 전해 오기도 하는데, 후세 사람들이 붙인 것인지도 모르겠다.

 

   일주문을 지나 자재암으로 가려면 해탈문(解脫門)을 지나야 하는데, 108계단을 올라가야 한다. 나는 108계단을 오르면서 벗어나야 할 108번뇌가 무엇인가를 생각해 보았다. 사람은 눈, , , , , (마음)의 여섯 감각기관이 사물을 접할 때 좋다/ 나쁘다/ 그저 그렇다는 세 가지가 서로 같지 않아 18가지 번뇌를 일으킨다. 괴로움/ 즐거움/ 그저 그런 것과 관련지어 18가지 번뇌가 일어난다. 이들을 합친 36가지 번뇌가 다시 각각 과거/ 현재/ 미래의 삼세(三世) 때문에 108가지 번뇌가 된다. 이러한 세속(世俗)의 백팔번뇌(百八煩惱)에서 벗어나야 해탈(解脫)의 경지에 이르게 된다고 한다. 나는 모든 번뇌에서 벗어나는 것이 쉽지 않다는 것을 알지만, 번뇌에서 벗어나기 위해 마음을 가다듬으며 108계단을 오르고, 해탈문을 지났다.

 

   해탈문을 지나니, 절벽위에 원효대(元曉臺)’가 있다. 옛날에 원효대사가 도를 깨치지 못해 자살을 하려고 절벽 아래로 뛰어내리려고 하는 순간 문득 도를 깨우쳤다는 이야기가 전해오는 곳이다. 원효대에서 아래쪽을 보니, 단풍이 물들어가는 산자락의 모습이 장관이다. 고개를 돌려 산 쪽을 바라보니, 산줄기를 따라 잘 자란 나무들이 가을 옷으로 갈아입고 자태를 뽐내는 모습이 매우 아름답다. 나는 이곳에 서서 사방을 둘러보며, 오랜 동안 간절한 마음으로 도를 닦고, 절박한 마음으로 큰 깨우침을 구하던 원효의 모습을 그려 보았다.

 

   세상에서 벗어남을 뜻하는 속리교(俗離橋)을 지나고, 극락교(極樂橋)를 지나 자재암에 이르렀다. 자재암은 원효대사가 초가를 짓고 수도하던 곳에 선덕여왕 14(645)에 세운 절인데, 고려 광종 25(974)에 각규대사가 중창하였다. 고려 의종 7(1153)에 불에 탔는데, 이듬해에 다시 지었다. 조선 고종 9(1872)에 다시 지었는데, 순종 원년에 불에 타고, 그 후 다시 지었으나 625전쟁 때 불에 탔다. 지금 있는 대웅전은 1961년에 다시 지은 것이고, 스님들이 거처하는 요사(寮舍)1971년에, 포교당과 원효대는 1974년에, 삼성각은 1977년에 지은 것이다. 우리는 자재암의 이곳저곳을 둘러본 뒤에 원효약수에서 물을 마시고, 산행을 시작하였다.


   자재암 뒤에 만들어놓은 계단을 밟고 힘겹게 오르니, 해발 440m에 위치한 하백운대가 나왔다. 그곳에서 땀을 식히고, 백형이 가지고 온 찐 고구마로 시장요기를 하고, 다시 30분가량을 걸어 해발 510m에 위치한 중백운대에 도착하였다. 소요산은 하백운대, 중백운대, 상백운대(해발 560.5m), 나한대((해발 571m), 의상대(해발 587m), 공주봉(해발 526m) 6개의 봉우리가 말발굽모양으로 능선을 이루고 있는데, 거기서는 산봉우리들이 모두 보여 소요산 전체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우리는 중백운대에서 상백운대쪽으로 조금 가다가 오른쪽으로 난 선녀탕길을 따라 내려왔다. 상백운대까지 가보고 싶은 생각도 있었으나, 과로할 것 같아 자제하였다. 하산길은 가파르고 바위가 많아 지팡이를 짚고 조심조심 발을 옮겨야 했다. 그래서 매우 힘들고 시간도 많이 걸렸다.

 

   이날 우리가 택하여 걸은 등산코스는 일흔 살이 넘은 우리들이 걷기에는 적당하지 않은 길이었다. 소요산 등산 안내서에 소요시간이 1시간 30분으로 적혀 있는 것을 그대로 믿고 가벼운 마음으로 시작하였기 때문인데, 체력 면에서 부담스러웠다. 그러나 단풍이 곱게 물들어가는 소요산에서 원효대사와 요석공주의 숨결을 느끼며 걷는 길은 매우 뜻 깊고, 즐거웠다. 함께 한 회원들의 건강 증진에 도움이 되었기 바란다. (2014. 10. 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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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4년은 서울교육대학을 졸업한 지 50년이 되는 해이다. 지난 1024일에는 서울교대 1회 동기생 52 명이 모여 졸업 50주년 기념행사를 하였다. 아침에 모교와 총동창회를 방문 한 후 포천으로 이동하여 점심식사를 하고, 산정호수 둘레길을 걸은 뒤에 시내로 돌아와 모교 총장과 동창회장, 은사님을 모시고 간단한 기념식을 한 뒤에 저녁식사를 하는 순서로 진행한 조촐한 행사였다.

 

   오전 9시가 가까워지자 모교 교정에 동기생들이 모이기 시작하였다. 약속한 9시 가 되자 50여 명이 모여 반가운 인사를 나누었다. 그동안 자주 만난 사람도 있지만, 오랜만에 만나는 사람도 있었고, 졸업 후 처음 만나는 사람도 있었다. 졸업 후 처음 만나는 사람은 이름과 기억 속의 젊은 시절의 모습을 떠올리며 반가운 인사를 나누었다. 동기생들의 얼굴을 보니, 젊고 예쁘며, 늠름하고 패기 있던 모습은 원숙하고 품위 있는 노인의 모습으로 변하고 있었다.

 

   대학본부 건물 앞에 가니, 중앙현관 위에 교대 1회 졸업 50주년 기념 모교 방문 환영현판이 걸려 있었다. 우리의 방문을 환영하는 모교와 총동창회의 따뜻한 마음이 고마웠다. 7층 회의실로 가니, 총장 이하 보직교수들이 나와 반갑게 맞아주었다. 총장의 환영 인사에 이어 모교의 변화발전의 모습과 현재의 상황을 동영상과 파워포인트로 브리핑(briefing)해 주었다. 행당동 캠퍼스에서 시작한 모교가 서초동 한복판에 자리 잡아 크게 발전한 모습을 보니, 자랑스러운 마음에 가슴이 뿌듯하였다. 행당동 캠퍼스는 지금의 캠퍼스에 비하면 초라하기 짝이 없었다. 그러나 행당동 캠퍼스의 사진을 볼 때 더욱 정겹게 느껴지고, 감회가 새로운 것은 50여 년 전에 젊은 우리들의 꿈을 길러준 정겨운 공간이었기 때문이리라.

 

   모교와 총동창회 방문을 마친 우리는 중앙현관 앞에서 방문 기념사진을 찍은 후에 대학 내의 시설을 둘러보았다. 그리고 전세 버스를 타고 포천 산정호수로 향하였다. 버스 안에서 옆자리에 앉은 사람과 정다운 대화를 하였는데, 대화하고 싶은 사람이 다른 자리에 있을 때에는 자리를 바꿔 앉으면서 이야기하였다. 학창 시절의 이야기를 시작으로 그동안 지낸 일과 현재의 일들이 꼬리를 물고 화제로 이어졌다.

 

   포천에 도착하여 맛이 좋기로 유명한 식당으로 들어가 갈비로 점심식사를 하였다. 남암순 동기회장과 금년에 팔순을 맞은 이배춘 회원의 건배사는 졸업 50주년을 맞은 회원들의 건강과 평안을 기뻐하고 감사하며, 앞으로 더욱 도타운 정을 나누며 건강하게 지내자는 내용이어서, 모든 회원들의 공감을 얻었다. 오랜만에 와서 먹는 포천 이동갈비의 맛도 좋았지만, 오랜만에 만난 동기생들과 자유롭게 자리를 옮겨가며 나누는 정담은 더욱 맛깔스럽고 즐거웠다.

 

   점심 식사 후에 2014년도 하반기 정기총회를 가졌다. 총회를 마친 뒤에는 산정호수 둘레길을 걸었다. 그런데 남은 일정에 맞추느라 걷는 거리를 단축하는 바람에 정다운 친구와 단풍이 든 산정호수 주변의 아름다운 풍광을 보면서 걷는 즐거운 시간을 충분히 갖지 못하게 되어 아쉬운 마음을 안고 버스에 올랐다. 서울로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는 정창덕 회원의 진행으로 앞에서부터 차례로 졸업 50주년을 맞는 감회를 말하기도 하고, 자기의 감정을 드러낼 수 있는 노래를 부르기도 하며 즐거운 시간을 가졌다.

 

   저녁 630분에 서초동 음식점의 넓은 방에 자리 잡은 우리는 간단한 기념식을 하였다. 기념식은 국민의례에 이어 동기회 회장의 개회사, 모교 총장과 총동창회장의 인사에 이어 재학시절에 우리를 가르쳐 주신 박붕배최병록 교수님의 말씀을 듣고, 서울교육대학교 교가를 제창하였다. 이 자리에서 동기생들은 졸업 50주년을 기념하면서 뜻을 모아 모교 발전기금과 장학기금을 총장과 총동창회장께 전달하였다. 남암순 회장은 개회사에서 우리를 올곧은 교육자로 길러주신 모교 은사님들의 노고에 대한 감사와 치하의 말씀을 올리고, 훌륭한 교사에 대한 꿈과 열정을 담고 생활하던 재학 시절의 아련한 추억과 감회, 40여 년 간 교단을 지키며 교육의 현장에서 겪은 기쁨과 보람, 힘들고 슬펐던 일들을 진솔하게 표현하여 모두의 공감을 얻었다. 오늘 이 자리에 참석하지 못한 회원들에 대한 그리움과 아쉬운 마음을 표현한 뒤에 유명(幽明)을 달리한 동기생들에 대한 아픔을 말할 때에는 먼저 세상을 떠난 동기생들의 얼굴이 떠오르면서 울컥 치밀어 오르는 감정을 주체할 수 없었다.

 

   심언녕 회원의 지휘로 <서울교대 교가>를 제창할 때에는 많은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식장에 들어갈 때 받은 악보를 보고서 교가를 까맣게 잊고 지낸 나 자신이 부끄럽고 미안하였다. 악보를 보니, 다행스럽게도 교가의 가사와 멜로디가 떠올라 반주를 들으며 심 회원의 지휘에 따라 교가를 부를 수 있었다. 나의 의식 속에 잠재되어 있던 서울교대와 교가에 대한 기억이 되살아난 것임을 생각하니, 서울교대와의 인연의 끈이 매우 질긴 것임을 느꼈다.

 

   저녁 식사 시간에는 이봉준 목사가 건배를 제안하였는데, 예배 시간의 축도(祝禱)처럼 지금까지 지낸 일에 대한 감사와 기쁨, 앞날에 대한 기원(祈願)의 내용을 담은 뜻 깊은 건배사여서 공감(共感)이 되었다. 저녁 식사 후에는 여흥(餘興)의 시간을 가졌다. 70이 넘은 나이에도 곱고 아름다운 목소리 또는 힘찬 목소리로 노래를 부르고, 맵시 있는 춤을 추는 남녀 동기들이 있어 모두 칭찬과 감탄을 자아내게 하였다. 즐겁고 유쾌한 시간이어서 오래 계속하고 싶었지만, 9시에 끝내기로 한 식당과의 약속 때문에 아쉬운 작별을 하였다.

 

   집으로 돌아오며 나는 서울교대와 맺은 인연을 생각해 보았다. 나는 대학입학지원을 할 무렵에 서울교대의 존재를 모르고 있었다. 그런데 고1 때 담임이셨던 정 선생님의 권유와 설득으로 법학과 지망(志望)의 뜻을 접고 서울교대를 지원하여 서울교대와 인연을 맺게 되었다. 이 인연으로 졸업과 동시에 교사 자격증을 받고 서울시내 초등학교 교사로 발령을 받았다. 이 인연이 끈이 되어 같은 학교에 근무하게 된 동기동창생과 연애하여 결혼하였다. 아내와 나는 재학 시절에는 소원(疏遠)하여 겨우 얼굴과 이름을 알고 지낸 정도였으니, 같은 학교로 발령을 받지 않았더라면 그저 평범한 동기동창생이었을 것이다. 서울교대와 맺은 인연의 끈이 평생 반려(伴侶)를 만나게 해 주었다.

 

   나는 아내의 도움으로 야간대학을 졸업하고, 대학원 석사과정과 박사과정을 마치고, 학위를 받은 후 대학의 교수가 되었다. 대학의 교수가 된 뒤에도 서울교대에서 배운 기본적인 지식과 소양은 나의 교수 생활의 기본이 되어 강의와 연구에 큰 도움이 되었다. 나는 서울교대와 인연이 있는 선배의 사랑과 도움을 받기도 하였다. 교수로 30년을 지내고 정년퇴직한 뒤에 터키에 객원교수로 파견되어 4년 동안 한국어와 한국문학, 한국문화를 가르칠 때에도 서울교대에서 배운 지식과 초등학교 교사 때에 얻은 경험은 큰 힘이 되었다.

 

   서울교대와 맺은 인연의 끈은 좋은 배우자를 만나 평생을 함께 할 수 있게 해 주었고, 어려운 여건을 극복하고 사회적 성장을 할 수 있게 해 주었다. 퇴직한 후에는 공무원연금을 받으며 교양 있고 수준 높은 동기생들과 교유(交遊)하면서 즐겁고 유익한 생활을 할 수 있는 여건을 마련해 주었다. 이처럼 서울교대와 맺은 인연의 끈은 정말 질기고 튼튼하다. 이러한 인연의 끈을 나에게 던져 주신 하나님의 섭리에 감사한다. 오늘따라 교대 진학을 권유해 주신 고등학교 때 담임선생님께 대한 존경과 감사의 마음과 함께 그리움이 크게 일어난다. 그러나 이 마음을 전할 길이 없으니, 이런 마음을 지그시 억누르며 아쉬움을 달랠 수밖에 없다. (2014. 10.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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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개암

   얼마 전 친구들과 서울특별시 강동구와 경기도 하남시에 자리 잡고 있는 일자산(一字山)에 갔다. 일자산은 경사나 굴곡이 심하지 않은 산등성이가 ()’ 자처럼 이어져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일자산에는 고려 말의 대학자였던 이집(李集, 1327~1387) 선생이 1368(공민왕 17)에 신돈(辛旽)의 비행을 비판하고, ()를 피하기 위해 숨어서 지냈다는 둔굴(遁窟)’이 있다. 이집 선생은 이 일을 잊지 않으려는 뜻에서 호를 둔촌(遁村)’이라고 하였다. 서울 강동구 둔촌동(遁村洞)의 동명(洞名)은 이집 선생의 호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한다.

 

   일자산의 산길을 걸을 때 유난히 나의 눈길을 끄는 것은 개암나무였다. 개암나무는 개암을 담은 파란 주머니를 다닥다닥 달고서 뽐내며 서 있었다. 요즈음 자주 가는 대모산에서 보지 못하던 개암나무가 몇 그루씩 무리를 지어 서 있는 것을 보니 무척 반가웠다. 함께 걷던 친구에게 이게 무슨 나무인지 아느냐고 물으니, 잘 모른다고 하였다. 나는 개암나무와 그 열매 개암에 관해 간단히 말한 뒤에 조금 떨어져 걸으면서 개암과 관련된 일들을 생각하였다.

 

   개암은 모양은 도토리 비슷하며, 껍데기는 노르스름하고 속살은 젖빛이다. 맛은 밤 맛과 비슷하나 더 고소하다. 내가 어렸을 때 살던 마을의 뒷산에 개암나무가 유난히 많았다. 그래서 가을에 나무를 하러 산에 가서 나무에 달려 있는 개암을 따기도 하고, 땅에 떨어져 낙엽 속에 있는 개암을 줍기도 하였다. 그 때 겉껍질을 이로 물어 깬 뒤에 속껍질을 벗기고 먹던 개암의 고소한 맛은 지금도 잊을 수 없다. 개암을 생각하면 어렸을 때 들은 <도깨비 방망이> 이야기가 떠오른다.

 

   옛날에 한 나무꾼이 산에서 나무를 하다가 개암 하나를 줍자 이것은 아버지께 드려야지.” 하고 주머니에 넣었다. 다시 하나를 줍자 이것은 어머니께 드려야지.” 하고 주머니에 넣었다. 또 하나를 줍자 그제야 이것은 내가 먹어야지.” 하고 주머니에 넣었다. 그는 비를 피하려고 산속의 오두막집에 들어갔는데, 비가 그치지 않았다. 날이 저물자 도깨비들이 몰려와 방망이 하나를 세워놓고, “밥 나와라!” 하면 밥이 나오고, “고기 나와라!” 하면 고기가 나왔다. 그들은 이렇게 해서 맛있는 음식을 많이 차려놓고 잔치를 하였다. 다락에 숨어 있던 그는 배가 고파 개암을 먹으려고 이로 겉껍질을 깨무니, ‘-’ 소리가 났다. 그 소리에 놀란 도깨비들이 방망이를 놓아둔 채 도망하였다. 그가 도깨비방망이를 가지고 와서 금 나와라!” 하면 금이 나오고, “은 나와라!” 하면 은이 나왔다. 그래서 그는 부자가 되어 잘 살았다.

 

   이 소식을 들은 이웃마을의 한 젊은이가 일부러 도깨비가 나온다는 산으로 나무를 하러 갔다. 그는 개암을 줍자 이것은 내가 먹어야지.” 하면서 주머니에 넣고, 그 다음에는 이것은 내 색시 주어야지.” 하면서 주머니에 넣었다. 이처럼 그는 자기와 자기 아내 몫부터 챙기고, 부모는 뒷전이었다. 그가 외딴집에 들어가 있으니, 도깨비들이 몰려왔다. 그가 개암을 깨물자 도깨비들은 다락으로 올라와 지난번에 가져간 방망이를 내놓으라며 때렸다. 그래서 그 사람은 도깨비한테 매만 실컷 맞고 돌아왔다고 한다.

 

  이 이야기에는 효성이 지극한 사람은 도깨비도 도와주지만, 자기만 아는 욕심쟁이는 벌을 받는다는 교훈적 의미를 담고 있다. 나는 어렸을 때 산에서 나무하다가 개암을 줍게 되면 이 이야기를 떠올리면서 어른을 먼저 생각해야 한다는 마음을 다짐하곤 하였다. 그 후 나는 개암하면 고소한 맛과 더불어 도깨비방망이이야기가 떠오르곤 하였다.

 

   나는 부모님의 묘를 서울 가까운 곳으로 이장(移葬)하기 전까지 충남 홍성에 있는 선산(先山)에 벌초를 하러 다녔다. 벌초를 하러 가면, 선영(先塋) 가까운 산길 좌우에 늘어서 있는 개암나무가 나를 맞아주곤 하였다. 나는 개암을 주렁주렁 달고 있는 개암나무를 볼 때마다 옛일이 생각나서 반가운 마음으로 만져보곤 하였다. 그러나 개암이 여물지 않아 맛을 볼 수 없어서 아쉬워하곤 하였다. 개암이 익을 무렵에 다시 성묘를 갔으면 부모님도 찾아뵙고, 개암 맛도 볼 수 있었을 터인데, 그러지 못하여 죄송스러운 마음이다.

 

   작년에 김 교수 내외와 함께 강원도 춘천시 신동면 증리에 있는 김유정 문학촌에 갔을 때의 일이다. 김유정의 생가와 전시관, 동상(銅像), 디딜방아 등을 관람하고, 안내표지판을 보면서 금병산 실레이야기길을 따라 걸었다. 그 때 길 옆 산언덕에 개암나무들이 줄지어 서 있는 것을 보았다. 열매를 주렁주렁 매달고 있는 개암나무들은 키가 크고, 아주 튼튼해 보였다. 개암나무가 자생한 것인지, 정성들여 재배한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그동안 내가 국내에서 본 개암나무 중 가장 크고, 개암도 많이 열렸다. 얼마 전 경상남도 함양군 안의면 상원리 연암(燕巖) 물레방아공원에 갔었는데, 그곳에서도 개암이 열린 개암나무 여러 그루를 보았다. 연암 박지원이 1792년에 안의현감으로 부임하여 처음으로 물레방아를 설치한 것을 기념하여 만든 공원에서 개암나무를 보니 무척 반가웠다. 나는 국내 여러 곳에서 개암나무를 보면서 터키 흑해 연안에서 보던 개암나무숲과 맛있게 먹던 개암을 생각하였다.

 

   나는 터키 카이세리에 있는 에르지예스대학교 한국어문학과에서 객원교수로 2009년부터 4년 동안 근무하였다. 그곳에 간지 얼마 안 되었을 때 슈퍼마켓의 견과류 코너에서 유난히 나의 눈길을 끄는 것이 있었다. 함께 간 그곳의 G 교수에게 물으니, 영어로는 헤즐럿(hazelnut), 터키어로는 픈득(fındık)이라고 하였다. 헤즐럿은 우리말로 개암이라는 생각이 들어 사다가 먹어보니, 정말 고소하고 맛이 좋았다. 어렸을 때 고향의 뒷산에서 주워 먹던 개암의 맛이 연상되었다.

 

   개암에 대한 기록을 보면, 동의보감(東醫寶鑑)에 기력을 높여주며, ()과 위()를 튼튼하게 해 준다고 적혀 있다. 이것을 보면, 한국에서는 일찍부터 개암의 효능을 알았던 것 같다. 요즈음에는 개암에 대한 연구가 많이 진행되고, 그 장점이 널리 알려졌다. 개암에는 지방이 많이 포함되어 있는데, 단순불포화지방이어서 몸에 좋고, 항암물질인 택솔(taxsol)이 들어 있어 항암 작용을 한다고 한다. 또 개암에는 칼슘과 철분도 많이 들어 있어 골다공증(骨多孔症) 예방에도 도움을 주고, 콜레스톨 수치를 낮춰주며, 암세포 활동을 억제해 준다고 한다. 비타민 E가 많이 들어 있어 심장질환 및 고혈압, 고지혈증, 당뇨병 등의 대사성 질환의 예방에도 효과가 있다고 한다. 개암은 향()이 좋고 고소한 맛이 있어 커피와 초콜릿, 과자를 만드는 데에도 많이 넣고 있다. 얼굴과 피부에 영양을 공급해 주기 때문에 화장품으로도 이용하고 있다.

 

   터키 속담에 한 줌의 픈득(개암)이 평생의 건강을 지켜준다.”는 말이 있다. 이 속담을 보면, 터키 사람들도 일찍부터 개암의 효능을 잘 알고 있었던 것 같다. 개암은 터키미국이탈리아스페인 등에서 생산되는데, 터키의 흑해 지방에서 전 세계 소비량의 70%를 생산한다고 한다. 나는 터키에 있는 4년 동안 개암을 떨어지지 않게 사다 놓고 먹었다. 내가 개암을 좋아하니, 나와 인연이 있는 터키 사람들과 터키를 오가는 한국 사람이 개암을 사다 주곤 한다. 그래서 터키에서 돌아온 지 1년이 넘은 지금까지 계속하여 개암을 먹고 있다.

 

   요즈음 젊은이들에게 개암을 아느냐고 물으면 잘 모른다고 한다. ‘헤즐럿을 아느냐고 하면, “헤즐럿 커피요?” 하고 반문한다. 커피에 헤즐럿 향을 가미한 헤즐럿 커피는 마셔보았지만, 견과(堅果)인 헤즐럿 즉, 개암을 통째로 먹을 기회가 없었기 때문에 이렇게 묻는 것이리라. 요즈음에는 터키에서 수입한 개암을 남대문시장에서 판다고 한다. 개암은 예로부터 국내 여러 지역에서 자생하는 식물이니, 우리나라의 기후와 풍토에 맞지 않아 재배하지 못하는 식물은 아닐 것이다. 건강에 좋은 견과류이니 수입해 오는 것도 좋지만, 국내에서 재배하여 많이 생산되었으면 좋겠다.

                                                   <청하문학 13, 서울 : 문예운동사,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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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며칠 전 교일산우회 남부모임 회원 7명은 서울시 동작구 현충로 210에 자리한 국립서울현충원을 찾았다. 이날 현충원을 찾은 것은 순국선열(殉國先烈)과 호국영령(護國英靈)이 영면(永眠)해 계신 국립현충원에 참배(參拜)하면서 이 분들의 나라를 위해 헌신한 뜻을 기리고, 묘역 전체를 한 바퀴 돌면 산행(山行)의 효과도 거둘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에서였다. 아주 오래 전에 다녀온 후 최근에는 가지 못하였으므로 조금 죄송스런 마음이 들기도 하였다.

 

   현충원 정문 안 종합민원실 뒤편의 쉼터에서 만난 우리는 계레얼마당을 지나 현충문 앞으로 갔다. 우리는 현충문 왼쪽에 있는 학도의용군 무명용사탑과 오른쪽에 있는 육탄 10용사비를 살펴보았다. 그 옆에 있는 호국종(護國鐘)을 살펴본 뒤에 장병묘역(將兵墓域)으로 갔다. 장병묘역에는 나라를 위해 싸우다가 숨진 많은 장병들의 계급과 이름이 적힌 비석이 가지런히 서 있었다. 1번 묘역을 지나 2번 묘역에 가니, 장병들의 비석 앞에 채명신 장군의 묘비가 보였다.

 

   채명신 장군은 516군사정변에 가담하였으나 정치에 뜻을 두지 않고 군으로 돌아가 군인으로서의 책무를 다하던 중 19658월부터 38개월 간 초대 주월한국군사령관 겸 맹호부대장으로 근무하면서 큰 공을 세웠다. 그는 부하 장교와 병사를 사랑하는 마음이 유별하여 많은 장병들의 존경과 사랑을 받았다고 한다. 채 장군은 박정희 대통령의 10월유신에 반대하였으므로, 대장으로 진급하지 못하고 전역하였다. 그 뒤에 스페인그리스브라질 대사를 지냈다. 채 장군은 장군묘역에 묻힐 수 있는 충분한 자격을 갖추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계급은 다르지만 생사고락(生死苦樂)을 같이 했던 전우들 곁에 묻히고 싶다.”는 유언에 따라 장병 묘역에 안장되었다. 채 장군은 살아서는 전쟁영웅, 죽어서는 참군인으로 추앙받는 분이다. 우리는 채명신 장군의 묘비 앞에 일렬로 서서 거수경례로 추모의 뜻을 표하였다.

 

   우리는 경찰충혼탑, 임정묘역(臨政墓域), 대한독립군무명용사 위령탑(慰靈塔)을 지나 장군묘역을 둘러보고, 맨 위쪽에 자리 잡은 박정희 대통령 묘소를 참배하였다. 박정희 대통령은 19171114일 경북 선산에서 출생했다. 1963년 대한민국 5대 대통령에 취임해 연이어 9대 대통령까지 역임하는 동안 수차례에 걸친 5개년 경제개발계획을 성공적으로 추진하여 산업입국(産業立國)을 다졌다. 그리고 근면자조협동을 기본정신으로 한 새마을운동을 범국민적으로 전개하여 가난을 극복하고, ‘하면 된다는 국민적 자신감을 일깨웠다. 그래서 우리 조국의 근대화와 산업화를 이룩하여 대한민국 선진화의 기반을 구축했다. 또 오늘날 우리 국군의 현대화를 위한 율곡계획을 집념 있게 추진하여 국방력 증강 및 자주국방의 기틀을 다지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19791026일 서거하여 113일 국장(國葬)으로 국립서울현충원에 안장되었다. 박정희 대통령 봉분 옆에는 영부인 육영수 여사의 봉분이 있었다. 19251129일 충북 옥천에서 출생한 육영수 여사는 영부인이 된 후 각종 사회사업과 육영사업에 앞장섰다. 1974815일 광복절 기념식 중 북한의 사주(使嗾)를 받은 괴한의 저격(狙擊)으로 서거(逝去)하여 819일 국민장으로 이곳에 안장되었다. 나는 박정희 대통령 묘소를 참배하고 내려오면서 박정희 대통령의 나라를 위한 공로는 인정하지 않고 독재자로만 보는 시각이 만연(蔓延)해 있는 현실을 개탄하였다.

 

   우리는 내려오면서 김대중 대통령의 묘소를 참배하였다. 김대중 대통령은 192416일 전남 신안 하의도에서 출생하여 1961년 민의원, 1963년 제6대 국회의원을 시작으로, 781314대 국회의원을 역임하였다. 세 번의 대통령 선거 패배를 딛고 1997년 대통령선거에 당선되어 1998225일 대한민국 제15대 대통령으로 취임하였다. 오랜 기간의 정치적 역경(逆境)에도 불구하고 민주주의와 자유, 평화를 이 땅에 정착시킨다는 일념으로 헌신했다. 취임 후 1997년부터 시작된 외환위기(外換危機)의 극복을 위해 금융기업공공노동 4대 분야 개혁을 단행하고, 정보화정책을 적극 추진하여 우리나라를 선진국으로 발전시켰다. 또한 국민기초생활보장과 자율적 문화정책을 통해 우리나라를 복지, 문화국가가 되게 했다. 20006월에는 분단 55년 만에 처음으로 남북정상회담을 하여 한반도에 평화를 정착시켰으며, 그해 12월에는 민주주의, 인권, 평화에 헌신한 공로로 노벨평화상을 수상하였다. 2009818일 서거하여 823일 국장으로 이곳에 안장되었다. 나는 김 대통령 묘소에 참배하고 내려오면서 김 대통령이 많은 실적을 남겼지만, 도를 넘은 햇볕정책으로 우리 사회에 많은 부작용을 남겨 놓았다는 점에서 비판을 받고 있는 것이 안타까웠다.

 

   우리는 김 대통령의 묘소를 참배하고 내려오다가 이승만 대통령의 묘소에 참배하였다. 이승만 대통령은 1875326일 황해도 평산 출신으로 일제 강점기 서재필 박사와 함께 독립협회를 조직해 독립사상을 전파하고, 민족계몽에 앞장섰다. 19193·1운동 이후에 상해 임시정부 초대 대통령을 역임하고, 미국으로 건너가 항일투쟁 외교활동을 펼치던 중 광복이 되자 귀국하여, 1948년 제헌국회의장과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이 되었다. 이 대통령은 해방 직후의 혼돈(混沌)을 극복하고 자유민주국가로서의 대한민국의 기틀을 다졌다. 6·25전쟁의 국난을 극복하고 인도적 차원에서 반공 포로를 석방하였으며, ‘한미상호방위조약을 체결하여 한미동맹을 구축하였다. 그러나 4·19민주혁명으로 대통령직에서 하야(下野)한 뒤 하와이에서 생활하다 1965719일 서거하였다. 같은 해 727일 가족장으로 영결식을 거행하고 국립서울현충원에 안장되었다. 이 대통령은 국립묘지에 최초로 안장된 국가원수(國家元首)이다. 이 대통령의 영부인 프란체스카 도너 리 여사는 이 대통령과 합장되었다. 1900615일 오스트리아 빈에서 출생한 프란체스카 여사는 1933년 스위스 제네바에서 열린 국제연맹회의에 대한민국 임시정부 대표로 참석한 이승만 전 대통령을 만나 1934108일 뉴욕시에서 결혼하고, 1948년 영부인이 되었다. 1992319일 이화장에서 향년(享年) 93세로 서거하여 323일 가족장으로 이곳에 합장되었다. 이 대통령의 묘소를 참배하고 내려오면서 이 대통령이 대한민국 건국과 국가의 기틀을 다진 공()은 속으로 묻히고, 독재자로만 매도(罵倒)되고 있는 현실이 참으로 안타깝게 생각되었다.

 

   나는 이어지는 장병 묘역을 지나 정문 쪽으로 내려오면서 두 가지 생각을 하였다. 하나는 우리 모두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애국선열과 호국영령들이 지녔던 애국 충정(忠情)을 잊지 말아야겠다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전직 대통령에 대한 인식이나 평가가 바람직한 방향으로 바뀌었으면 좋겠다는 것이다. 지금 우리나라에서는 이곳에 계신 세 분 대통령에 대한 인식이나 평가가 극단적인 대립을 보이고 있다. 세 분 대통령은 재직 시에 잘한 일도 있고, 잘못한 일도 있다. 잘한 일만을 확대하여 잘못한 일을 덮으려는 것도, 잘못한 일만을 확대하여 잘한 일을 폄훼(貶毁)하는 것도 올바른 태도가 아니라 생각한다. ()은 공대로 인정하고 치하하면서 과()는 과대로 지적하고 비판하는 태도를 갖는 것이 우리나라의 장래를 위해서도 올바른 태도일 것이다. 나는 터키에 있을 때 전 국민이 아타튀르크 대통령을 국부(國父)로 추앙(推仰)하고 있는 것을 보고 몹시 부러워한 적이 있다. 우리나라에서도 온 국민이 추앙하는 대통령이 속히 나오기를 바라는데, 이 마음이 지나친 사치가 아니었으면 좋겠다. (20147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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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주에 한 아파트 단지의 뒷동에 살던 딸이 아이들을 데리고 미국으로 떠났다. 지난 1월에 미국 LA로 직장을 옮긴 사위를 뒤따라갔으니 잘 된 일이다. 그런데도 딸을 떠나보낸 나와 아내의 마음은 세상이 텅 빈 것 같고, 허전하다. 3년 전 같은 아파트 앞 동에 살던 큰 아들네 가족이 직장 근처로 이사를 갔을 때에도 그랬는데, 이번에는 그 정도가 더한 것 같다. 마음이 여린 아내는 아파트 뒤쪽 베란다에서 딸이 살던 아파트를 내려다보면서도 눈물을 글썽이고, 딸이나 외손자손녀 이야기만 나오면 목이 메어 말을 잇지 못한다.

 

   딸은 1996년에 결혼하여 서울에서 2년 간 신혼생활을 한 뒤에 한국 기업의 주재원으로 미국에 가서 4년여를 지낸 뒤에 2002년 다시 한국으로 돌아왔다. 그 때 우리와 같은 아파트 단지에 자리를 잡아 지금까지 살았다. 딸은 12년을 사는 동안 두 차례 이사를 하였으나, 같은 아파트 단지 안에서의 이사여서 늘 우리 곁에 있었다. 그 동안에 미국에 가기 전에 낳은 외손녀는 고등하교 2학년 학생이 되었고, 미국에 있을 때 낳은 외손자는 초등학교 6학년이 되었다.

 

   사위는 성실하고 부지런하며 능력이 있는 사람이다. 그는 대기업에 근무하면서 능력을 인정받아 여러 차례 승진을 하였다. 그러나 임원으로 승진하지 못한 채 50세 가까이 되자 자원하여 명예퇴직을 하였다. 퇴직한 후에 두 번이나 새로운 회사에 취업하여 몇 달씩 근무하였으나 그의 능력이나 뜻을 펼 여건이 되지 않았다. 그래서 새로운 직장을 알아보던 중 중소기업의 미국법인 장으로 선발되었다. 한국에서 좋은 대학을 나와 미국 유학을 하였고, 전에 미국 주재원으로 근무한 경력이 있어서 발탁된 것 같다. 나이 50이 넘어 새로운 직장을 잡은 것도 다행스런 일인데, 자녀들의 학업 문제로 많은 사람들이 가고 싶어 하는 미국 LA의 법인장이 되었으니, 참으로 잘 된 일이다. 이 일을 아는 많은 사람들이 부러워한다고 한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사위의 간절한 기도를 들어주신 것이라 믿고 감사한다.

 

   딸네 가족이 미국에 가게 되었다는 말을 처음 들었을 때, 이 일은 하나님의 은혜로, 잘 된 일이라 생각하였다. 그래서 그들의 출국을 축하하고, 감사하며 그곳에 가서 잘 살기를 바라면서 즐거운 마음으로 보내기로 마음먹었다. 그런데도 이렇게 섭섭하고 허전한 것은 무슨 까닭일까? 그것은 그 동안 가까이 살면서 나눈 정이 깊고, 이번에 떠나면 언제 돌아올지 모른다는 안타까움 때문이다. 말은 아이들 공부가 끝나면 돌아온다지만, 그 때가 언제일지 모르겠다. 작은애가 대학을 마칠 때까지만 계산하여도 10년 넘게 걸릴 것이다. 대학을 마친 큰애가 학업을 계속할지, 직장은 어디서 잡을지도 확실하지 않으니, 돌아올 날을 쉽게 점칠 수 없다. 나와 아내는 나이가 점점 들어가니, 전처럼 가까이 살면서 오순도순 정을 나누며 살기는 어려울 것이라는 생각이 더욱 마음을 안타깝게 한다.

 

   가까이 사는 동안 우리는 외손녀와 외손자가 하루하루 자라는 과정을 보고, 재롱을 보며 즐거워하였다. 명절 때는 물론 시간이 맞으면 큰아들과 작은아들네 아이들까지 함께 어울려 노는 모습을 보면서 우리는 무한한 행복을 느꼈다. 딸은 수시로 드나들며 집 안팎의 대소사를 이야기하였다. 나나 아내가 몸이 아플 때에는 문병 와서 위로하였다. 자기 볼 일로 백화점이나 마트에 갔다가도 예쁜 옷이나 신발이 있으면 사다 주었다. 자기 볼일로 어디를 갔다가도 우리 부부가 좋아하는 과일이나 음식이 눈에 띄면 사서 들고 왔다. 우리 아파트 단지 안의 소식은 물론, 이웃 동네의 크고 작은 소식도 알려주었다. 딸은 우리의 눈과 귀의 역할을 해 주었다.

 

  사위와 딸은 미식가(美食家)에 가까울 정도로 맛에 민감하다. 외손녀 또한 그러하다. 그들은 맛있는 음식점을 가본 다음에는 우리 부부를 데리고 갔다. 그래서 가까운 곳은 말할 것도 없고, 다른 동네의 좋다는 음식점을 안내하곤 하였다. 음식 값은 우리를 대접하는 뜻에서 그가 내기도 하고, 좋은 곳을 안내받은 턱으로 내가 내기도 하였다. 그러는 동안에 딸네 가족과 정이 깊어졌다. 그런 딸네 가족이 멀리 떠나고 보니, 우리 아파트 단지, 아니 서울이 텅 빈 것 같다.

 

  아내는 경동시장의 과일과 채소의 값이 동네의 마트보다 훨씬 싼 것을 보고, 이것저것 사려다가 나눠줄 딸이 없음을 생각하고 주춤하였다. 시내 음식점에 가서 맛있는 음식을 먹다가도 딸네 가족과 함께 식사하던 생각이 난다며 눈시울을 붉혔다. 예쁜 옷이나 장신구(裝身具) 가게 앞을 지나다가도 이를 사다 주면 좋아할 외손녀가 없음을 생각하고 눈물을 훔쳤다.

 

  나는 아내에게 우리가 미국에 가거나 딸네 가족이 한국에 오면 만날 터이니 너무 아쉬워하거나 허전해 하지 말라고 위로하곤 하였다. 아내는 내 말에 공감하면서도 가슴이 아리고 텅 빈 듯한 것을 어찌 하란 말이냐고 대꾸하며 눈물을 훔치곤 한다. 이를 보는 나의 눈가에도 나도 모르게 눈물이 고이곤 한다. 나는 아내의 허전한 마음을 달래주려고 차에 태워 소요산으로 가서 산길을 걷기도 하고, 신북온천에 가서 쉬기도 하였다. 강원도 고성에 있는 콘도에 가서 쉬면서 온천욕을 하고, 통일전망대와 DMZ박물관을 관람하기도 하였다.

 

  미국에 있는 딸과 외손자손녀와는 자주 카톡, 보이스톡, 영상통화를 한다. 그러는 동안에 가슴이 텅 빈 것 같던 허전함과 아리던 상처는 조금씩 아물고 있다. 이제 그곳 생활에 잘 적응하면서 건강하게 지내기를 기도하는 것밖에는 할 수 있는 일이 없다. 자주 안부를 전하면서 지내다가 만날 날이 속히 오기를 기다려야겠다.

 

  며칠 후면 대학의 교수인 큰아들이 연구년을 맞아 가족과 함께 미국으로 떠난다. 아들네는 1년 후면 돌아오겠지만, 딸네가 떠난 뒤에 바로 떠난다고 하니, 더욱 허전하다. 남아 있는 작은 아들네 가족과나 자주 만나야 할 터인데, 아들과 며느리가 바쁘고 거리가 머니 자주 만나기도 어려울 듯하다. 텅 빈 것 같은 허전함과 아쉬움을 달래며 지낼 일이 걱정이다.

                                                                            (2014. 6.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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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며칠 전에 교일산우회 남부모임 회원 7명과 함께 강원도 춘천시 남산면 강촌리에 있는 구곡폭포와 문배마을에 갔다. 오전 950분에 상봉역에서 만나 춘천행 열차를 타고 1시간쯤 달려 강촌역에 도착하였다. 강촌역에서 내린 우리는 기다리고 있는 택시를 타고 구곡폭포 매표소 앞 주차장으로 갔다. 주차장에서 보니 왼쪽 길은 봉화산으로 가는 길이고, 오른쪽 길은 구곡폭포로 가는 길이다. 문배마을은 구곡폭포 입구에서 갈라진다고 하므로 구곡폭포 매표소 쪽으로 갔다.

 

   구곡폭포 매표소 앞에는 길 양쪽에 세운 목조 문기둥에 가로로 걸쳐놓은 현판에 자연이 살아 숨쉬는 구곡폭포 관광지라고 커다랗게 쓴 글자들이 우리를 맞아 주었다. 매표소에 가니 어르신들은 입장료를 받지 않는다고 하여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안으로 들어갔다. 우리는 길 양편에는 서 있는 아름드리나무들이 만들어 주는 그늘을 따라 황토 오솔길을 걸어 올라갔다. 길옆의 계곡에는 물이 조금씩 흐르고, 산에는 여러 모양의 바위들이 멋진 모습을 자랑하고 있었다. 계곡의 물이 많았으면 시원함과 산길의 운치를 느끼게 해주었을 터인데, 초여름의 가뭄이 심한 탓에 물이 거의 말라 아쉽게 느껴졌다.

 

   구곡폭포는 해발 526m의 봉화산 기슭에 있는 높이 50m의 폭포이다. 구곡폭포는 아홉 구비를 돌아서 떨어지는 폭포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구곡폭포는 1981213일 춘천시 관광지로 지정되는데, 옛 이름은 문폭(文瀑)’이라고 한다. 회원들과 대화하며 걷다가 길옆에 세워놓은 간판을 보니, 그 내용이 매우 흥미로웠다.

 

봉화산(해발 525.8m)이 품고 있는 생명수가 아홉 골짜기를 휘돌아 내리고, 선녀의 날개옷처럼 하늘거리는 아홉 줄기의 사뿐한 물 내림, 그 조화로운 물소리가 아름답고 단아한 폭포입니다. 폭포에 이르는 황토 오솔길과 시냇물을 벗 삼아 폭포에 이르면 , , , , , , , , 의 쌍기역() 아홉 가지 구곡혼(九曲魂)을 담아가실 수 있습니다.”

 

   쌍기역으로 된 낱말 9개를 제시하고, 이를 구곡혼이라고 한 발상이 매우 흥미로워 각 낱말의 뜻을 생각해 보았다. 각 낱말의 뜻과 나타내려는 의도가 얼른 떠오르는 말도 있지만, 무어라고 설명해야 좋을지 모르는 말도 있었다. 조금 올라가니, 작은 간판(leaflet)에 낱말 하나를 적고, 그 말이 지닌 의미와 지향점을 짧게 풀이하고, 영어 단어로 적어 놓았다. 이렇게 적은 아홉 개의 작은 간판이 폭포 앞까지 띄엄띄엄 서 있다. 나는 낱말의 뜻과 지향점, 그 말을 번역한 영어 단어가 궁금해 적으면서 올라갔다.

 

(희망은 생명. Dream), (재능은 발견. Talent), (지혜는 쌓음. Wisdom), (용기는 마음. Courage), (전문가는 숙달. Expert), (인맥은 연결고리. Connection), (태도는 됨됨이. Altitude), (맵시와 솜씨는 산뜻함. Freshness), (아름다운 마무리는 내려놓음. End).

 

   구곡폭포 가까이 오니, 문배마을로 가는 길을 안내하는 표지판이 나왔다. 구곡폭포를 보려고 경사가 급한 꼬부랑길 위에 놓은 나무계단을 한참 올라갔다. 수많은 계단을 힘겹게 올라가니, 50m 높이의 폭포가 보였다. 그러나 가뭄 탓에 흐르는 물이 적어 폭포로서의 이름값을 느낄 수 없어 아쉬웠다.

 

   구곡폭포 입구 갈림길에서 오른쪽 능선 쪽으로 길을 잡아 문배마을로 향했다. 널찍하게 닦아놓은 비탈길과 계단을 40여 분 걸어 올라가니 문배마을이 나왔다. 문배마을은 산 정상처럼 보이는 분지(盆地) 마을인데, 625 전쟁 때 전쟁이 일어난 것도 모르고 살았다는 평화로운 마을이다. 66,000넓이의 분지인 이 마을은 200여 년 전에 형성되었는데, 이 지역 산간에 자생하는 돌배보다는 크고 과수원 배보다는 작은 문배나무가 있었고, 마을의 생김새가 짐을 가득 실은 배 모양이어서 문배마을이라고 하였다고 한다. ‘문폭(구곡폭포의 옛이름)’의 뒤쪽에 있는 마을이라는 뜻에서 문배(文背)마을이라고 하였다고 하기도 한다. 구한말 춘천 의병장으로 유명한 이 마을의 선비 습재(習齋) 이소응(李昭應, 18521930) 선생은 그의 문집에서 구곡폭포를 문폭이라 하고, 문배마을에 관하여는 문배의 샘물은 달고, 토지는 비옥하며 둘러친 산으로 하여 마치 큰 배와 같이 생겼다.”고 하였다.

 

   문배마을 어구에는 자연생태 우수마을로 인정한 환경부장관의 인증서(2010. 1. 1.~2012. 12. 31.)를 확대하여 올려놓은 간판이 서 있다. 세움 간판을 지나 마을로 들어서니, 길옆에 심어놓은 여러 가지 꽃들이 개망초를 비롯한 야생화와 어울려 아름다움을 자랑하고 있다. 아주 조용하고 평화로운 느낌을 주는 마을에는 띄엄띄엄 집이 있는데, 모두 식당 간판이 붙어 있다. 각 집에는 주차장은 물론 족구장을 비롯한 작은 운동장과 간이 운동 시설이 보였다. 이로 보아 이곳은 우리처럼 잠깐 왔다가는 손님도 있지만, 단체로 와서 친목 도모와 함께 체력 단련을 하는 손님이 많은 곳임을 알 수 있었다.

 

   우리는 형이 서울에서 소개받았고, 이곳으로 오는 도중에 만난 서울 손님들이 소개한 신씨네 집을 찾아갔다. 야외에 마련된 넓은 마루에 앉아 닭백숙을 주문하고, 서비스로 주는, 칡가루로 부친 전을 안주로 이 집에서 담갔다는 술을 한 잔씩 마셨다. 우리는 문배마을에서 빚은 술은 문배주라고 하면서 이 술이 그 이름난 문배주와 관계가 있느냐고 물었다. 젊은 주인은 이곳에 오는 손님들이 이 술을 문배주라고 하지만, 이름난 문배주와는 관계가 없다고 하였다. 문배주는 원래 평양에서 밀좁쌀수수를 재료로 하여 만들던 술로, 술의 향기가 문배나무의 과일에서 풍기는 향기와 같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1986년에 국가무형문화재로 지정되었는데, 20006월 평양에서 남북정상회담이 열렸을 때 김대중 대통령이 김정일 위원장과 건배하여 유명해졌다. 우리는 문배마을에 와서 전통의 문배주를 맛볼 수 없어 아쉽기는 하지만, 문배마을에서 빚은 술이 곧 문배주라며 웃었다. 닭백숙을 기다리는 동안 여행, 건강, 사회문제 등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이곳에서 먹은 맛있는 닭요리와 유익한 대화는 고갯길을 넘어오느라고 쌓인 피로를 말끔히 날려 주었다.

 

 

   가던 길을 되돌아오는 동안 산세(山勢)와 길, 여러 나무와 풀의 어울림을 살펴보았다. 푸른빛을 자랑하는 나무와 하늘을 번갈아 보면서 70이 넘은 나이에 건강한 몸으로 이런 곳에 올 수 있다는 사실에 감사하였다. 가뭄으로 물이 적어 구곡폭포의 멋진 모습을 보지 못하고 내려오는 길이 못내 아쉬웠는데, 매표소 가까이에 예쁘게 지어놓은 구곡정(九曲亭)’이 아쉬운 마음을 어루만져 주었다. (20146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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