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615일에 아내와 함께 아들과 딸의 가족을 만나기 위해 미국에 갔다. 뉴욕 케네디공항에 도착하니, 연구년을 맞아 펜실베니아대학교(U. Penn) 동아시아센터 연구원으로 와있는 큰아들이 마중을 나왔다. 아들과 함께 필라델피아로 간 우리는 아들이 사는 아파트에서 하루를 쉬었다.

 

   그 다음날 아들과 함께 서울교대 1회 동기인 윤 선생 댁에 갔다. 윤 선생은 아내와 중고등학교 동기동창이기도 하여 가깝게 지내며 연락하는 사이이다. 윤 선생 댁은 주변 환경이 아주 좋은 주택가에 있는 단독주택이었다. 윤 선생과 부군(夫君)인 한 사장이 반갑게 맞아 주었다. 넓고 깨끗한 집에는 가구와 장식물이 잘 정돈되어 있어 주인 내외의 고상한 기품과 취향을 알 수 있게 해 주었다. 윤 선생은 5~6년 전에 한국에 왔을 때 만난 적이 있지만, 한 사장은 처음 만났다.

 

   우리 부부는 윤 선생께 아들이 U. Penn의 초청을 받도록 도와준 일, 좋은 아파트를 얻게 해 주고, 아들네 가족이 이곳 생활에 익숙해지도록 여러모로 도와준 일에 대해 감사의 인사를 하였다. 아들과 손자 손녀는 윤 선생 댁에도 왔었고, 함께 식사한 적도 있어 윤 선생 내외분과 친근감을 느끼고 있었다. 윤 선생은 우리 가족을 위해 여러 가지 한국 음식을 준비하였으므로, 맛있게 먹었다. 식사 후에는 다과를 나누며 여러 가지 이야기를 하였다.

 

   윤 선생은 서울교대를 졸업 후 7년 반 교사로 근무하고, 1971년 말에 부군과 함께 미국 필라델피아에 왔다. 처음에는 취직하여 일하다가 개인 사업을 하여 생활의 기반을 다졌다고 한다. 딸과 아들은 대학을 졸업하고, 회사원으로, 변호사로 일하고 있다. 미국에서 44년을 사는 동안 고생도 많았겠지만, 성공하여 노년을 여유롭게 지내는 모습을 보니, 정말 흐뭇하고 자랑스럽게 느껴진다.

 

   나는 윤 선생에게 서울교대 1회 동기인 최 선생이 캐나다에 사는데, 서로 연락이 있느냐고 물었다. 윤 선생은 연락이 없었는데 소식을 알게 되어 기쁘다면서 어떻게 해서 알게 되었느냐고 하였다. 최 선생이 인터넷 네이버에 개설한 서울교대 1회 카페에 자주 들러 글을 주고받았는데, 내가 캐나다에 갈 예정이라고 하니, 오면 연락하여 만나자고 하였다고 하였다. 윤 선생은 캐나다에 중고등학교 동기동창인 김 여사도 살고 있다고 하면서, 두 친구 모두 만나보고 싶다고 하였다. 나와 아내는 윤 선생에게 두 친구를 만날 겸 함께 캐나다에 가자고 하였다. 윤 선생은 다음날 처리할 일도 있고, 부군을 혼자 두고 여행을 가는 것이 마음에 걸려 망설였다. 그 때 한 사장이 자기 걱정 하지 말고 다녀오라고 하여 함께 여행을 떠나기로 하고 헤어졌다.

 

   이튿날 우리는 큰아들이 운전하는 9인승 소형승합차를 타고 캐나다로 향하였다. 나와 아내는 윤 선생과 함께 여행하는 것이 꿈만 같다면서 좋아하였고, 윤 선생 역시 우리와 함께 여행하게 되어 기쁘다고 하였다. 오전 11시에 필라델피아를 떠난 우리는 오후 830분경에 미국 쪽 나이아가라 폭포에 도착하였다. 9시간 30분이 걸린 긴 여행이었다. 나는 아들이 장거리 운전을 할 때 교대해 주겠다는 생각으로 국제운전면허증을 준비해 가지고 갔다. 그러나 낯선 곳에서 운전할 엄두가 나지 않아 아들 혼자 운전하게 하여 미안하였다.

 

   나이아가라 폭포는 이리 호(Lake Erie)에서 흘러나온 나이아가라 강(Niagara River)이 온타리오 호(Lake Ontario)로 들어가는 도중에 형성된 큰 폭포이다. 염소 섬(Goat Island)을 기준으로 미국 폭포(American Falls)와 캐나다 폭포(말발굽 폭포, Horseshoe Falls)로 구별된다. 우리는 미국 폭포의 흐름을 살펴보고 사진을 찍은 후 바람의 동굴(Cave of the Wind)로 갔다. 입장권(14$)을 사니, 비닐 주머니와 슬리퍼를 주었다. 슬리퍼를 신은 뒤에 구두를 비닐주머니에 넣어 들고 엘리베이터를 탔다. 8층 깊이를 내려가서 내리니, 우의를 나눠주었다. 우의를 입고 밖으로 나오니, 수십 미터 위에서 내리쏟는 큰 물줄기가 바로 눈앞에 보였다. 물이 튀기는 곳을 지나 계단을 오르니, 폭포가 아주 가까이에 보이는데, 정말 장엄하였다. 절벽 아래로 떨어진 물줄기는 강물과 합류하여 도도히 흐른다.

 

   날이 어두워질 무렵에 다시 차를 타고 나이아가라 강위에 놓인 다리를 건넌 후 간단한 입국 절차를 거쳐 캐나다로 갔다. 호텔에서 하룻밤을 지내고, 이튿날 아침에 캐나다 폭포를 순회하는 배를 탔다. 나눠준 우의를 입고 배에 오르니, 미국 폭포 앞을 지나 캐나다 폭포로 다가갔다. 도도하게 흐르던 강물이 절벽을 만나 내리쏟는 모습은 정말 씩씩하고 웅장하며 위엄 있고 엄숙하다. 배가 폭포 가까이에 가니 물이 쏟아져 우의를 입지 않으면 옷은 물론 메고 있는 가방도 다 젖을 지경이었다. 폭포는 좀 떨어진 곳에서 볼 때에는 아름답고 부드러운 느낌을 주었으나, 가까이 다가가니 무엇이든 집어 삼킬 듯이 덤비는, 사납고 무서운 모습이었다.

 

  점심 식사 후에 얼음포도주(Ice Wine)로 유명한 이니스 킬린(Innis Killin)을 다녀서 최 선생이 사는 온타리오 주 리치몬드 힐(Richmond Hill)로 향하였다. 금요일 오후라서 그런지 교통체증이 심하여 오후 7시에야 도착하였다. 최 선생은 우리를 반갑게 맞아 주었다. 최 선생과 윤 선생과 아내는 반가움과 기쁨에 겨워 탄성을 발하며 손을 맞잡아 흔들고, 포옹하며 즐거워하였다. 나는 최 선생과 반갑게 악수를 하고, 최 선생과 윤 선생의 얼굴을 찬찬히 살펴보았다. 두 사람 모두 젊은 시절의 모습은 아련하고, 세월을 딛고 선 노련미와 교양이 쌓여 아름다움을 드러내는 원숙한 여인의 모습이었다. 정말 반갑고, 기쁘고, 뜻있는 만남이었다.

 

   거실로 들어가 잠시 쉰 다음, 한국인이 운영하는 낙원식당으로 가서 저녁 식사를 하였다. 캐나다에 와서, 오랜 동안 만나지 못하던 동기동창 4명이 대화하며 한국음식을 먹으니, 즐거움이 더하여 더욱 맛있었다. 우리들의 대화에 끼지 못하는 아들과 손자손녀는 자기들끼리 작은 소리로 소곤거리며 식사하였다. 아들과 아이들은 호텔로 가고, 우리 네 사람은 최 선생 차를 타고, 최 선생 댁으로 갔다.

 

   최 선생 댁 거실의 식탁에 둘러앉은 우리는 최 선생이 준비한 다과를 나누며 많은 이야기를 하였다. 우리는 교대 다니던 때의 일, 생각나는 사람의 안부와 근황을 이야기하였다. 그리고 최 선생의 지나온 이야기를 들었다.

최 선생은 초등학교에서 5년을 근무한 뒤에 사직하고 캐나다에 왔다고 한다. 처음에는 여러 가지 일을 하면서 힘들고 어려운 일이 많았다. 직장을 여러 번 옮긴 뒤에 도요다자동차 회사에 취직하여 30년 근무하였는데, 말단 사원으로 시작하여 캐나다 지사의 대표가 되어 일하다가 몇 년 전에 정년퇴직하였다고 한다. 지금은 고등학교 교사로 근무하는 아들과 함께 여유롭게 지내면서 여러 가지 봉사활동을 하는데, 병원의 환자를 돌보는 일에 많은 시간을 보낸다고 하였다. 이역만리에 와서 모든 고난을 이겨내고 성공한 삶을 사는 최 선생의 의지와 노력에 경의를 표하며 돌봐주신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한다.

 

   네 사람이 앉아 이야기꽃을 피우고 있을 때 아내와 윤 선생의 중고등학교 동창인 김 여사가 왔다. 볼일을 보고 오느라고 늦었다고 하였다. 밤이 늦은 시간인데도 40분 가까이 차를 몰고 찾아온 정성이 대단하였다. 대화를 하다 보니, 김 여사와 최 선생은 초등학교 동기동창이었다. 초등학교, 고등학교, 교육대학 동창으로 인연이 맺어진 다섯 사람의 이야기는 끝이 없었다. 새벽 1시가 넘은 뒤에 내일 다시 만나기로 하고, 김 여사는 자기 집으로 갔고, 우리들은 최 선생이 안내하는 2층 방으로 가서 잠을 청하였다.

 

   최 선생 댁은 리치몬드 힐의 잘 정리된 주택가에 있는 2층 단독주택이다. 집 앞 길가에는 큰 나무들이 듬성듬성 서 있고, 뒤쪽에는 꽤 넓은 정원이 있다. 아침 8시에 일어나 아래층으로 내려가니, 최 선생은 주방에서 아침 식사를 준비하고 있고, 윤 선생은 정원에 있었다. 정원 한 가운데는 잔디를 심었는데, 잘 가꾼 잔디밭에는 잡초가 하나도 없다. 가장자리에는 장미를 비롯한 여러 가지 꽃나무를 심었는데, 잘 자란 꽃나무에 예쁜 꽃들이 피었다. 최 선생의 사랑스런 손길이 정원 구석구석에 배어 있었다. 잘 가꾼 잔디와 예쁜 꽃을 배경으로 기념사진을 찍었다.

 

   정원에서 들어와 집안을 둘러보니, 가구와 실내 장식에 최 선생의 높은 안목과 알뜰함이 배어 있는 것 같았다. 아침 식사 시간에는 최 선생의 아드님이 맛있는 빵과 과일, 커피를 내다 주었다. 우리는 식사를 하면서 지난밤에 다하지 못한 이야기를 이어갔다.

 

   우리는 식사 후에 자동차로 1시간 가까이 떨어진 곳에 있는 온타리오 호로 갔다. 온타리오 호는 나이아가라 폭포를 지난 나이아가라 강물이 흘러와서 이룬 넓고 큰 호수이다. 호수 옆에는 빽빽하게 들어선 건물들이 숲을 이루고 있다. 호수에는 커다란 유람선이 떠 있고, 크고 작은 보트들이 한가로이 오간다. 유람선을 타고 한 바퀴 돌고 싶었으나, 시간이 없어 김 여사와 만나기로 한 중국음식점으로 갔다. 온타리오 넓은 호수가 내다보이는 창가 좌석에 앉아 맛있는 딤섬 요리를 먹으며 지난밤에 못 다한 이야기들을 계속하였다.

 

   식사를 마치고 호수가로 나와 산책하고 사진을 찍은 후 아쉬운 작별을 하였다. 불시에 찾아온 우리를 반갑게 맞아 정성껏 대접해 준 최 선생의 따뜻한 마음에 깊이 감사하고, 금년 10월에 있을 교대1회 문화탐방 행사 때 한국에 와서 함께 하기를 바란다는 말도 하였다. 몬트리올로 가서 하루를 묵은 우리는 몬트리올 노트르담 대성당, 성 조셉 성당을 살펴본 뒤에 필라델피아로 돌아왔다.

 

   한국으로 돌아오기 이틀 전에 윤 선생 내외분을 대접하려고 간 중국식당에서 서울교대 교수로 재직하시며 우리를 가르쳐 주신 성악 전공의 조 교수님을 뵈었다. 조 교수님은 서울대 음대를 졸업하시고, 서울교대 교수로 재직하시다가 미국 유학을 가셨다. 줄리아드 음대에서 석사와 박사학위를 받은 후 템플대학의 교수로 재직하다가 정년퇴직하셨다고 한다. 조 교수님은 윤 선생이 출석하는 필라델피아 한인연합교회 성가대 지휘자로 오랫동안 수고하시다가 몇 년 전에 은퇴하셨다. 조 교수의 뒤를 이어 서울교육대학 교수가 되셨던 사모님과의 사이에서 15녀를 두었는데, 아들 1명은 연세대학교 교수이고, 다른 자녀는 모두 미국에 산다고 한다.

 

   80세가 되신 조 교수님과 사모님은 건강해 보이셨다. 한 학기 가르침을 받은 은사님을 50여 년 만에 미국에서 만나 뵈니, 무척 반갑고 기뻤다. 은사님은 함께 늙어가는 옛 제자 부부의 손을 잡고, 매우 흡족해 하셨다. 조 교수님을 뵙도록 주선해 준 윤 선생께 감사한다.

 

   필라데피아를 떠나기 전에 우리는 윤 선생 내외분을 몇 차례 더 만나 즐거운 시간을 가졌다. 우리를 위해 많은 시간과 노력을 아끼지 않은 윤 선생 내외분의 따뜻한 마음에 감사한다. 이번에 만난 윤 선생, 최 선생, 조 교수님과 그 가정에 하나님의 사랑과 은총이 늘 함께 하기를 기도한다. (2015. 7.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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