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서부 지역에는 경관이 빼어난 협곡 즉 캐년(Canyon)이 여러 곳 있다. 캐년은 붉은 사암층이 수만 년 동안 물의 침식작용에 의해 형성된 좁고 깊은 골짜기를 말한다. 로스앤젤레스에 있는 한인(韓人) 관광회사들은 여러 캐년 중 경관이 빼어난 다섯 곳을 골라 관광객을 모집하여 단체관광을 하고 있다. 나는 지난 10월 하순에 아내와 함께 딸을 만나러 LA에 갔다가 삼호관광에서 모집하는 관광단에 끼어 5대 캐년을 탐방하였다.

 

            그랜드 캐년(Grand Canyon)

   애리조나 주에 있는 그랜드 캐년은 미국 국립공원 중 가장 규모가 크고 웅장하다. 세계적으로 널리 알려져 있어 많은 사람들이 죽기 전에 꼭 가 볼 곳 제일순위로 꼽히는 곳이다. 그동안 한국인이 다녀간 수만 하여도 800만 명이 넘는다고 한다. 이 지역에는 원래 원주민인 아파치족이 살았는데, 스페인 사람이 이곳을 서방세계에 알렸다. 이 협곡을 처음 발견한 스페인 사람은 이곳의 웅장하고 거대한 모습을 보고, 스페인어로 그랑데(거대하다)라고 하였다. 이 말이 영어로 바뀌니 그랜드(grand)가 되어, ‘그랜드 캐년이라고 한다.

 

   그랜드 캐년은 아주 오랜 역사를 가진 협곡으로, 지질학의 교과서와 같은 곳이다. 이곳은 길이 약 470km, 평균 넓이 약 16km, 깊은 곳의 깊이 약 1,700m라고 하니, 정말 거대한 협곡이다.

 

   이곳의 탐방로는 콜로라도 강을 사이에 두고 사우스 림(South Rim)노스 림(North Rim)으로 나뉜다. 나는 남쪽 포인트로 가서 기묘한 바위들로 이루어진 협곡의 웅장하며 위엄 있는 광경을 보며 크게 감탄하였다. 20013월에 처음 갔을 때에는 장엄한 광경에 가슴이 뛰는 벅찬 감동을 느꼈었다. 이번에는 그 때처럼 가슴이 뛰는 감동을 느끼지는 못하였으나, 장대한 광경에 감탄하고, 또 감탄하였다. 더 오래 보고 싶었지만, 다음날 아침에 콜로라도 강과 그랜드 캐년의 장엄한 광경을 하늘에서 보기로 하고 발길을 돌렸다.

 

   이튿날 아침 일찍 관광용 경비행기 탑승장으로 갔다. 탑승권을 구입하여 체크인(check-in)하고, 대합실에서 김밥으로 아침 식사를 하며 대기하였다. 그런데 출발 예정시간 임박하여 날씨관계로 경비행기 운행을 중단한다고 하였다. 그래서 쉬운 마음을 안고 발길을 돌려 다음 목적지로 향했다.

 

 

                  자이언 캐년(Zion Canyon)

   자이언 캐년은 유타 주에 있는 협곡이다. 이곳에는 웅장하면서 기묘한 바위들이 많다. 그래서 신들이 노니는 곳이란 뜻으로 자이언(Zion)이라고 이름하였다.

 

   차를 타고 꼬불꼬불한 산길을 달리면서 길 양편에 이어지는 바위들의 모습을 보았다. 한참 올라간 뒤에 길옆에 차를 세우고 협곡의 장관을 내려다보면서 사진을 찍었다.

앞을 건너다보니, 큰 바위를 깎아내리면서 돌로 온갖 기묘한 모양을 만들어 붙이고, 사이사이에 문양(紋樣)을 넣은 것 같은 바위비탈이 이어 서 있다. , 시루떡을 켜켜이 쌓아놓은 것처럼 보이는 바위산도 이어져 있다. 비탈진 바위를 뚫고 뿌리를 내려 살고 있는 크고 작은 나무들을 보면서 나무의 끈질긴 생명력에 감탄하였다. 이런 협곡을 바라보고 있으니, 신비스런 분위기가 느껴지는 듯하다.

 

   이곳은 아주 먼 옛날에 바위산이 바다에 잠겨 있으면서 침식작용을 일으켜 이런 장관이 되었다고 한다. 지금 해발 약 2,800m나 되는 이곳이 바닷물에 잠겼었다니, 상상하기 어렵다.

 

 

 

                   브라이스 캐년(Bryce Canyon)

        브라이스 캐년은 유타 주에 있는 계단식 분지 형태의 협곡이다. 선셋 포인트(sun set point)로 가서 협곡을 내려다보았다. 이암(泥巖)과 사암(砂巖)으로 된 붉은 색 바위들이 첨탑(尖塔)처럼 높이 솟아오르며 기묘한 모양을 뽐내고 있다. 이곳을 첨탑의 향연이 펼쳐지는 곳이라고 하는 말이 허언이 아님을 알겠다.

 

   나바흐 루프(Navajo loop)로 내려갔다가 올라오면서 기묘한 바위들의 모습을 살펴보았다. 어떤 바위는 굉장히 큰 빌딩과 같은 모습을 보이고, 어떤 것은 첨탑처럼 하늘로 뾰족하게 솟아오르며 멋진 모습을 뽐낸다. 어떤 것은 수수하고 소탈한 모습을 보이고, 어떤 것은 섬세한 조각가가 만들어 놓은 것과 같이 정교하고 아름답다. 모두 다 경이롭기 짝이 없다.

 

             

           모뉴먼트 밸리(Monument Valley)

   유타 주 남부로부터 애리조나 주 북부에 걸쳐 있는 협곡이다. ‘메사(mesa, 원래 평평한 평지였으나 단단한 표면의 지층은 부식되지 않는 반면, 부식이 잘 되는 약한 부분은 물에 씻겨 내려가면서 단단한 표면은 상대적으로 주위보다 높은 언덕)라고 하는 테이블 모양의 바위가 여러 곳에 솟아 있는 곳이다.

 

   이곳은 인디언 보호구역으로, 원주민들의 생활 모습을 보여주는 곳이다. 원주민들이 운행하는 16인승 지프(geep)차를 타고, 흙먼지가 이는 길을 15분쯤 달려 계곡 안으로 들어갔다. 거기서는 원주민들의 생활용구와 관광용품을 전시판매하고 있었다.

 

   주위에는 세 자매바위’, ‘낙타바위를 비롯하여 이름 있는 큰 바위들이 곳곳에 있다. 이곳은 이런 바위들이 마치 기념비(monument)가 줄지어 있는 듯하다 하여 모뉴먼트 밸리(Monument Valley)라고 이름하였다. 이곳에서 <추적자>를 비롯한 여러 편의 서부영화가 촬영되었다고 한다.

 

 

                   안텔로프 캐년(Antelope Canyon)

   안텔로프 개년은 애리조나 주 파웰 호(Powell Lake) 근처에 있다. 콜로라도 강이 만든 예술품으로, 붉은 사암층(砂巖層)이 수만 년 동안 물의 침식작용에 의해 형성되었다. 1980년대 말부터 사진작가들이 모여 자유롭게 사진을 찍기 시작하였는데, 그 뒤로 널리 알려져 관광객이 모여들기 시작하였다.

 

   이곳은 인디언보호구역에 위치한 지하협곡(under canyon)으로, 탐방길이 복잡하다. 그래서 원주민들이 운영하는 두 개 관광회사에 소속된 가이드의 안내를 받아야 들어갈 수 있다. 우리는 켄스 투어(kens Tour)에 탐방 신청을 하였다. 15명이 한 조가 되어 원주민인 나바오 족 청년의 안내를 받았다.

 

   나는 설레는 마음으로 평지를 300m쯤 걸어간 뒤에 동굴 입구에서 철제 계단을 밟고 지하로 내려갔다. 20여 계단을 내려간 뒤에 바위 사이로 난 좁은 길을 이리저리 돌아 걸으며 바위들의 모습을 살폈다. 건물 34층 높이의 바위들은 깎아지른 듯이 곧게 또는 비스듬히 서 있기도 하고, 소라껍질 속처럼 둥글게 파인 채 서 있기도 하였다. 사람이나 동물의 모습을 연상하게 하는 바위도 있다. 이런 바위들은 바위틈으로 들어오는 햇빛이 비치는 각도에 따라 여러 가지 색으로 보였다. 같은 바위도 바라보는 위치에 따라 색감이 다르다. 눈으로 볼 때와 사진기에 찍어서 볼 때도 색이 다르게 보인다. 참으로 신기하다. ‘자연의 신비, ‘빛의 마술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를 안내하는 인디언 가이드는 앞장서서 걷다가 사진 촬영하기 좋은 곳에서는 멈춰 서서 사진을 찍으라고 하고, 직접 찍어 주기도 하였다. 지하협곡을 탐방하는 시간은 정말 즐겁고 황홀하였다. 그런데 철판으로 된 계단을 밟고 지상으로 올라오니, 조금 전에 지하에서 보던 황홀한 광경은 어디에도 없었다. 지하로 내려가기 전에 보던 광경 그대로였다. 아쉬움이 밀려온다. 남가일몽(南柯一夢) 고사에 나오는 주인공이 꿈을 깬 뒤에 느꼈을 허망함도 이와 같았을까!

 

나는 5대 캐년의 풍광을 보는 동안 놀라움과 감탄이 연속되었다. 이런 장관은 이 세상의 예술가들이 모두 힘을 합쳐도 만들 수 없을 만큼 웅장하면서도 섬세하고 기묘하며, 아름답고 신비롭다. 이런 장관이 생긴 것은 메사 지질의 특성과 강의 침식작용에 의한 것이라고 한다. 이것은 협곡이 생긴 내력을 설명하는 이론일 뿐이다. 대자연의 예술품이 생긴 내력이 이런 말로 다 설명되지는 않는다. 나는 이를 위대한 신의 예술품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신비로운 신의 예술품을 감상할 기회를 갖게 된 것을 감사하며, 많은 사람들이 감상할 수 있도록 잘 보존되기를 바란다. (2018. 11.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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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1124일에는 다달이 만나는 초등학교 동창들과 마포구 상암동에 있는 하늘공원에 갔다. 원래는 단풍과 억새, 코스모스가 조화를 이루어 아름다운 모습을 뽐내는 10월에 가기로 하였었다. 그러나 공교롭게도 그 날에 비가 내려서 가지 못하고, 11월 모임으로 미루었다. 그래서 이번 모이는 날에는 날씨가 좋기를 바랐다. 그런데 전날 일기예보를 들으니, 첫눈이 내릴 것이라고 하였다. 나는 일기예보를 들으며 예년처럼 눈발이 흩날리다가 그치거나, 자국눈이 내리겠지하고 가볍게 생각하였다.

 

   그런데 아침에 일어나 보니, 뿌연 하늘에서 눈이 펑펑 쏟아지고 있었다. 현관을 나와 계단을 내려서니, 쌓인 눈이 신발의 반쯤 올라왔다. 나는 금년 들어 처음 내리는 눈이기에 가방에 있는 우산을 꺼내지 않고 그대로 맞으며 신금호역으로 걸어갔다. 아파트 단지에는 오가는 사람이 없어 내 발자국이 선명하게 남았다.

 

   지하철 6호선 월드컵경기장역에서 동창생 6명이 만났다. 두 사람은 감기가 들어 나오지 못한다고 하였다. 나는 친구들에게 눈을 맞으며 하늘공원에 갈 것인가, 아니면 찻집으로 가서 담소하다가 점심을 먹을 것인가를 물었다. 친구들은 올겨울에 내리는 첫눈을 밟으며 걷는 것도 좋고, 눈이 곧 그칠 것 같으니 하늘공원으로 가자고 하였다. 그래서 우리는 지하철역에서 나와 공원으로 향하였다. 월드컵경기장에서 공원으로 올라가는 넓은 도로에는 하얀 눈이 수북이 쌓여 있다. 길에는 우리보다 먼저 공원을 오간 사람들의 발자국이 제법 많이 나 있다. 우리는 넓은 도로에 쌓인 눈 위에 발자국을 남기며 걸어 올라갔다.

 

   도로 좌우에는 크고 작은 나무들이 흰색의 두꺼운 옷을 입고 서서 우리를 반기는 듯하였다. 한참 올라가니 누구인가가 만들어 놓은 작은 눈사람이 길가에 서서 웃으며 우리를 맞았다. 친구들과 눈길을 걷다 보니, 자연스레 어린 시절 눈을 맞으며 뛰놀던 일, 눈을 뭉쳐 던지며 눈싸움을 하던 일, 눈사람을 만들며 즐거워하던 일이 떠올랐다. 한 사람이 어린 시절의 기억을 떠올려 이야기하면, 듣는 사람 역시 아스라한 옛 기억이 떠올라 맞장구치며 즐거워하였다. 한참을 걷다 보니, 눈은 그치고 햇볕이 따사롭게 비쳤다. 그에 따라 쌓였던 눈이 녹아 흐르기 시작하였다. 우리는 눈이 적은 곳을 골라 밟으며 걸었지만, 운동화가 차츰 젖기 시작하였다. 그래서 공원의 정상 가까이 갔을 무렵에는 양말이 젖어 발이 축축해졌다. 그러나 어린 시절부터 함께 지내온 친구들과 금년 겨울의 첫눈을 밟으며 걷는 것에 감동을 느껴 발이 젖는 것에 마음을 쓰지 않았다.

 

   하늘공원은 한강과 접한 98미터 높이에 있는 58천 평의 넓은 공원이다. 서울에서 가장 높은 곳에 있는, 매우 넓은 공원이다. 정상에 오르니, 눈에 덮인 넓은 공원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텔레비전 화면에서 보던 설원(雪原)이 펼쳐진 듯 황홀하다. 형형색색의 아름다움을 뽐내던 꽃들도, 곱게 물든 단풍잎도 눈에 덮였다. 위용(偉容)을 자랑하던 나무도, 땅을 기던 덩굴도, 많은 사람이 밟아 더러워진 땅도 눈에 덮여 하얗게 되었다. 그러고 보니, 눈은 예쁘고 추함도, 잘나고 못남도, 크고 작음도 따지지 않고 다 덮어 순수하고 순결한 외양(外樣)으로 바꿔 놓았다. 사람들도 눈에 덮인 공원의 모습처럼 자기만을 내세우지 않으면서 순수하고 착하게 살면, 설원에 햇빛이 비쳐 찬란한 것처럼 살기 좋은 세상이 될 것이다.

 

   억새 단지에 가니, 억새들의 일부는 하얀 이불을 덮고 누워 있고, 일부는 눈의 힘에 눌리지 않고 곧게 서 있다. 억새가 하얀 꽃을 달고 곧게 서서 하늘거리는 귀엽고 멋진 모습을 볼 수 없어 아쉬웠다. 공원의 동남쪽 끝으로 가서 아래를 내려다보니, 장엄한 풍경이 환하게 펼쳐졌다. 건물들이 새하얀 눈 모자를 쓰고 서 있는 모습은 아주 멋있게 보였다. 한강을 남북으로 가로질러 놓은 교량의 교각 역시 눈 모자를 쓰고 우뚝 서 있고, 그 밑을 흐르는 물은 푸른빛을 자랑하며 유유히 흐른다. 우리는 눈 덮인 공원 언덕과 억새를 배경으로 사진을 찍은 뒤에 앉아 쉴 곳을 찾았다. 모두 눈에 덮여 있는데, 지붕이 있는 그네에는 눈이 없었다. 두 사람이 그네에 앉자 나머지 사람들은 자연스레 그 둘레에 섰다. 우리는 거기서 준비해 간 간식을 나누어 먹었다. 눈 덮인 공원에서 멋진 풍경을 내려다보며 마시는 커피와 과자는 정말 맛있었.

 

   내려올 때에는 눈 녹은 물이 흘러 걷기에 불편하였다. 공원 입구로 내려오니, 그 때 마침 관광객을 실어 나르는 맹꽁이차가 올라왔다. 맹꽁이차 탑승료를 물으니, 1인당 2000원이라고 하였다. 우리는 승차권 발매기에서 승차권을 구입하여 맹꽁이차를 타고 내려왔다. 우리는 산 물고기를 파는 곳으로 가서 광어와 농어를 사서 회를 떠 달라고 부탁하고, 2층으로 올라가서 자리를 잡았다. 맛있는 회를 안주로, 내가 미국에서 사가지고 온 양주를 마신 뒤에 청하와 소주를 마시며 정담을 나누었다.

 

  

  

   눈길을 걸은 오늘은 다리도 좀 아프고 피곤하였다. 신발이 젖어 양말까지 축축하게 되었다. 그러나 70대 중반을 넘긴 나이에 첫눈을 즐기며 걸은 뜻깊은 날이어서 그런지 마냥 즐겁기만 하였다. 나이가 들면서 감성(感性)이 무뎌진 탓에 그동안 눈이 내려도 별 감흥을 느끼지 못하곤 하였다. 그러나 오늘은 첫눈이 8.8cm나 내렸고, 초등학교 동창들과 하늘공원을 걸은 특별한 날이다. 그래서 그동안 무뎌졌던 감성이 조금은 되살아난 듯하다. 첫눈이 쌓인 길을 걸으며 느낀 감동과 기쁨은 어린 시절의 아련한 추억과 함께 오래오래 마음속에 남을 것이다. (2018. 11.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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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또한 지나가리라

 

  전국을 펄펄 끓게 하는 가마솥더위가 계속되고 있다. 서울의 기온이 지난주에 38까지 올라갔고오늘과 내일은 39까지 올라 111년에 오는 최강 폭염이 될 것이라고 한다. 서울의 경우 16일째 폭염이 계속되니, 밖에 나가면 숨이 턱턱 막힌다. 실내에서도 냉방기기가 없으면 견디기 어렵다. 낮에 올라간 기온은 밤이 되어도 떨어질 줄 몰라 열대야 현상이 8일째 계속되니, 잠을 제대로 이루기 어렵다. 이런 날씨가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라고 하니, 하루하루 지낼 일이 걱정이다. 폭염이 이어지면서 온열환자가 2,000명을 넘었고, 사망한 사람도 27명이나 된다고 한다. 온힘을 기울여 기르던 가축과 어패류(魚貝類)가 떼죽음을 하고, 무와 배추의 작황도 나빠 가격이 올랐다고 한다. 폭염이 장기화하면, 사과 등의 과일도 피해가 우려된다고 한다.

 

  눈을 돌려 사회 현실을 보면, 정부가 내걸은 소득주도 성장론을 비웃듯이 서민들의 소득은 늘지 않았는데, 물가는 오르기만 한다. 한국경제는 정부의 반기업적 정서와 최저임금 문제 등이 겹쳐 점점 나빠져서 북한도 비아냥거릴 만큼 위기상황이 되었다. 북한의 비핵화는 진전되지 않았는데, 비핵화가 다 된 듯이 앞서가는 말과 행동들이 곳곳에서 나오고, 병력 감축과 군비축소가 논의되어 군사력이 약화될 조짐을 보이고 있다. 그래서 경제와 국가안보에 대한 국민의 불안은 점점 커지고 있는 실정이다. 그런데도 정부나 정치권에서는 사태의 본질에는 눈을 감은 채 엉뚱한 말만 하고 있으니, 소시민의 한 사람으로서 답답하고, 걱정스럽기 짝이 없다.

 

  계속되는 더위와 싸우느라 힘들고, 이어지는 우울한 소식에 짜증이 나서 속이 답답함을 느낀다. 이런 때에 불현 듯 떠오르는 말은 다윗 왕의 반지에 새겼다는 이 또한 지나가리라는 말이다. 다윗 왕이 전쟁에서 이기고 돌아와 궁중의 보석 세공사(細工師)에게 반지를 만들라고 하면서, “반지에는 내가 승전해 기쁨이 넘칠 때 교만하지 않게 하고, 절망에 빠졌을 때 좌절하지 않고 용기와 희망을 줄 수 있는 글귀를 새겨 넣으라.”고 하였다. 반지를 만든 세공사는 적당한 글귀가 생각나지 않아 고민하다가 지혜로운 솔로몬 왕자에게 의견을 구했다. 솔로몬 왕자는 이 또한 지나가리라라는 말을 넣으라고 하였다. 다윗 왕은 흡족해 하면서 세공사에게 큰 상을 내렸다고 한다. 유대교 경전의 주석서인 <<미드라시(Midrash)>>에 나오는 이 말은 정반대의 두 가지 상황을 직관적으로 조합시킨 명언이다. 성공했거나 승리하였을 때 자만하지 말며, 실패하였거나 상황이 나쁠 때 낙심하지 말고 용기와 희망을 가지라는 뜻을 담고 있다.

 

  어제 교회에서 만난 어른들께 더위에 어떻게 지내십니까?” 하고 인사를 건넸다. 한 분은 선풍기와 에어컨을 끼고 지낸다면서, “더워서 죽겠다고 하였다. 다른 한 분은 이른 아침과 늦은 저녁 시간에 운동을 하고, 낮에는 실내에서 생활한다. 이 더위를 잘 이겨내고 가을을 맞으면, 더 건강해 질 것이라고 하였다. 계속되는 폭염을 자연현상으로 치부하고, 이를 이겨내려고 노력하는 이 분의 생활 태도는 매우 긍정적이다. 이 분은 더욱 건강해진 몸으로 시원한 가을을 맞을 것이다.

 

  ‘이 또한 지나가리라란 말의 뜻과 통하는 고사성어(故事成語)로는 중국문헌 <<회남자(淮南子)>> <인생훈(人生訓)>에 나오는 새옹지마(塞翁之馬)를 들 수 있다. 중국 변방에 사는 노인의 말이 오랑캐 땅으로 달아났다. 사람들이 위로의 말을 하자, 그는 이것이 무슨 복이 될는지 어찌 알겠소?” 하였다. 몇 달 지난 뒤에 달아났던 말이 오랑캐의 준마(駿馬)를 데리고 돌아왔다. 사람들이 이를 축하하자, 노인은 이것이 무슨 화가 될는지 어찌 알겠소?” 하였다. 그의 아들이 그 좋은 말을 타다가 떨어져 다리가 부러졌다. 사람들이 위로하자, 노인은 이것이 혹시 복이 될는지 어찌 알겠소?” 하였다. 1년 뒤에 전쟁이 일어나자 변방의 장정들이 모두 싸움터에 나가 싸우다가 거의 다 전사하였다. 그러나 그의 아들은 다리가 부러졌으므로 싸움터에 나가지 않아 무사하였다. 이것은 화가 복이 되고, 복이 변하여 화가 될 수 있음을 말해주는 고사(故事)이다.

 

  70대 중반의 나이에 들어 지난 일들을 돌아보면, 힘들고 어려운 일도 있었고, 기쁘고 즐거운 일도 있었다. 힘들고 어려운 일을 이겨내고 나면, 기쁘고 즐거운 일이 찾아왔다. 그 뒤에 다시 괴롭고 슬픈 일이 생겼고, 이를 견뎌내면 다시 기쁘고 보람된 일이 다가왔다. 이것은 기쁘고 즐거운 일이 생겼을 때 자만하지 않고, 실패하였거나 상황이 나쁠 때에 좌절하지 않고 용기와 희망을 가지고 극복한 덕이라 생각한다. 연일 계속되는 찜통더위를 겪으면서, 오늘 한국이 처한 암담한 현실을 보면서 이 또한 지나가리라는 말과 새옹지마란 말을 되뇌어 본다. 며칠 뒤에는 시원한 바람이 부는 가을이 올 것이다. 우리의 경제가 좋아지고, 한반도 비핵화와 함께 안보에 대한 불안 없이 평화를 누리면서 더욱 발전하는 날이 올 것이다. 눈앞의 일에 실망하거나 좌절하지 말고, 희망의 끈을 든든히 잡고 어려움을 이겨내야겠다. (2018. 08. 01) 

              <서울문단 제7호(한국문인협회 서울지회, 2018>에 수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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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며칠 전에 교일산우회 회원들과 인왕산 숲길을 걸었다. 사직동 황학정(黃鶴亭, 활쏘기 연습장) 뒤에서 윤동주문학관까지 인왕산 아랫자락 숲속으로 난, 2.5km의 길이다. 나는 3주 전에 국제대학 제자들과 함께 처음으로 이 길을 걸었는데, 자연경관의 아름다움을 느끼면서 전설과 역사, 자연과 예술혼에 관해 생각할 수 있어 좋았다. 그래서 회원들에게 권하여 함께 걸었다.

  인왕산은 높이 338m인 그리 높지 않은 산으로, 풍수지리설에 의하면 우백호(右白虎)에 해당한다. 조선 개국 초기에 도성의 서쪽에 있다하여 서산(西山)이라고 하다가 세종 때부터 인왕산(仁王山)이라고 하였다. ‘인왕(仁王)은 불법을 수호하는 금강신(金剛神)의 이름이다. ‘어진 임금이란 뜻을 지닌 이 말이 조선왕조를 수호하려는 뜻과 일치함으로 이 이름으로 바꿨다고 한다. 일제강점기에 일제는 이 산의 한자 표기를 仁旺山으로 바꿨다. 그래서 한동안 그대로 쓰다가 1995년에 본래의 표기인 仁王山으로 바꿨다. 일제는 우리 민족의 민족정신과 자부심을 없애기 위해 경복궁 앞에 조선총독부 건물을 세우고, 창경궁(昌慶宮)을 창경원(昌慶苑)으로 바꿨으며, 창씨개명(創氏改名)을 강요하였다. 그것도 모자라 산 이름의 표기마저 바꿨다. 우리는 산 이름을 적어놓은 안내판을 보면서 일제의 간교함과 악랄함에 분노를 느꼈다.

  숲길을 걷다가 산 위쪽을 쳐다보니, 나무들 사이로 넓고 평평한 바위가 보였다. 조선 제11대 임금 중종과 부인 신() 씨의 애달픈 사랑 이야기가 서린 치마바위이다. 신 씨의 아버지 신수근(愼守勤)은 연산군의 처남이면서 진성대군의 장인이다. 반정(反正)을 계획한 박원종(朴元宗), 성희안(成希顏) 등은 이를 반대하는 신수근과 그의 동생들을 살해하였다. 반정에 성공하여 진성대군을 왕으로 옹립한 그들은 죄인 신수근의 딸이 왕비가 될 수 없다 하며, 신 씨의 왕비 책봉을 반대하였다. 힘이 없는 중종은 즉위한 지 일주일 만에 신 씨를 인왕산 아래 사직골에 있는 옛 거처로 보냈다. 중종은 조강지처(糟糠之妻)를 잊을 수 없어 경회루(慶會樓)에 올라 인왕산 기슭을 바라보곤 하였다. 이 말을 전해들은 신 씨는 경회루가 보이는 이 바위에 붉은 치마를 걸쳐놓음으로써 남편을 그리는 간절한 마음을 전하였다. 이 일로 인해 사람들은 이 바위를 치마바위라고 하였다 한다. 치마바위 전설은 권력의 횡포로 헤어진 중종과 신 씨의 애틋한 사랑과 아픔을 말해 준다.

  나무로 만든 계단을 오르고 내리기를 몇 차례 반복한 뒤에 수성동 계곡에 이르렀다. ‘물소리가 유명한 계곡이라 하여 수성동(水聲洞)으로 불리게 된 이곳은 조선 시대에 선비들이 여름철에 모여 쉬면서 즐기던 계곡이다. 종로구 옥인동과 누상동의 경계에 자리한 이 계곡은 조선 후기에 겸재(謙齋) 정선(鄭敾)이 그린 <장동팔경첩(壯洞八景帖)>에 수성동이 등장하면서 더욱 유명해졌다. 서울시에서는 2011년에 이곳에 있던 옥인아파트를 철거하고 복원하였다. 그래서 수성동은 옛 모습을 되찾아 맑고 아름다운 소리를 내며 물이 흐르는 계곡이 되었다. 청계천의 발원지인 이곳에는 서울특별시 보호동물인 도롱뇽을 비롯하여 가재, 개구리, 버들치 등이 서식하고 있다.

  겸재 정선은 인왕산 아래에서 태어나 평생을 그 부근에서 살면서 인왕산을 자주 오갔다. 그는 영조 27(1751)에 비온 뒤에 개는 날의 인왕산 모습을 동쪽에서 바라보며 <인왕제색도(仁王霽色圖)>를 그렸다. 그가 인왕산에서 받은 인상과 감흥을 실감나게 표현한 이 그림은 국보 216호로 지정되었다.

  한 곳에 이르니, 돌로 쌓은 축대에 나막신을 매달아놓았다. 이곳은 조선 후기의 대금명인(大笒名人) 정약대(鄭若大)가 대금 수업(修業)을 하던 곳이다. 어영청(御營廳) 세악수(細樂手)를 지냈고, 가곡 반주에 뛰어났던 그는 대금 수업을 위해 10년 동안 이곳에 와서 연습을 하였다. 그는 <도드리곡>을 한 번 연주할 때마다 나막신에 모래알 하나씩을 넣어 가득 찬 뒤에야 산에서 내려왔다. 그 뒤에 나막신의 모래에서 풀이 나와 자랐다고 한다. 명인이 되려면 타고난 재능도 있어야 하지만, 피나는 노력이 있어야 함을 일깨워주는 일화이다.

  인왕산에는 호랑이와 관련된 이야기가 많이 전해 온다. 이를 반영하듯 숲길에 인왕산의 상징 호랑이조형물이 서 있다. 그 옆의 나무판에는 강하고 부드러운 호랑이는 인()의 동물이라고 씌어 있다. 그 이유로, 호랑이는 재미 삼아 사냥을 하지 않고, 배가 부르면 먹잇감이 제 발로 와도 신경 쓰지 않으며, 수호랑이는 사냥을 하면 어린 새끼와 암컷부터 챙겨 먹이고, 자기는 맨 나중에 먹는다고 하였다. 이렇게 보면, 호랑이는 인()의 동물임이라고 할 수 있다. ()의 상징인 인왕산 호랑이가 멸종된 까닭은 무엇일까? 그것은 호랑이가죽을 탐낸 인간의 남획(濫獲)이 큰 원인일 것이다. 거기에다가 호랑이는 다른 수컷의 새끼들을 죽여 공생(共生)을 용납하지 않는 습성이 있다. 또 살던 터를 버리지 못하는 습성이 있어 살기 좋은 곳으로 옮겨가지 않았다. 그리고 공격해서는 안 될 사람을 공격함으로써 멸종을 자초하였다. 인왕산 호랑이의 멸종은 우리들에게 더불어 살 생각을 하지 않고, 남의 탓으로 돌려 공격하며, 옛것만을 고집하다가는 큰일 난다는 것을 일깨워 준다.

  인왕산 아래 마을은 세종 임금이 태어나 자란 곳이다조선 시대에 이곳은 경복궁 서쪽에 있다 하여 서촌(西村)이라 하였다. 이곳에는 역관(驛官), 의관(醫官)을 비롯한 전문 지식인들이 많이 살았다. 그 중 중인(中人)인 천수경(千壽慶, 17581818)은 시사(詩社, 시인들이 조직한 문학단체)를 열고, 송석원(松石園)을 지어 활발하게 활동하였다. 그래서 위항문학(委巷文學, 중인ㆍ서얼ㆍ서리ㆍ평민과 같은 여항인 출신 문인들이 이룬 문학)의 꽃을 피웠다. 화가 이중섭(李重燮)과 구본웅(具本雄), 시인 이상(李箱)은 예술혼이 서려 있는 이곳을 자주 찾으며 예술성을 함양하였다고 한다. 산 아랫마을에 하숙하였던 윤동주 시인 역시 이곳에서 시심(詩心)을 가다듬었을 것이다. 이 길은 숲과 계곡의 물이 어우러져 자아내는 아름다움을 보며 역사와 전설의 숨결을 느낄 수 있어 참 좋다. (2018. 6.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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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4월 중순에 충남 당진문학관장으로 일하는 최 교수의 초청으로 당진에 가서 송악읍에 있는 기지시줄다리기박물관을 찾았다. 2011411일에 개관한 이 박물관은 국가중요무형문화재 제75호인 기지시줄다리기를 비롯하여 국내외 줄다리기 관련 자료 및 각종 체험 시설을 갖추고 있었다. 우리나라에서 행해지는 줄다리기 중 <기지시줄다리기>와 <영산줄다리기>는 국가문화재로, <삼척기줄다리기>․<밀양감내게줄당기기>․<의령큰줄땡기기>․<남해선구줄긋기> 등은 지방문화재로 지정하여 전승과 보존에 힘쓰고 있다. 기지시줄다리기는 2015년에 베트남, 캄보디아, 필리핀과 함께 <줄다리기 의례와 놀이>로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에 등재되었다. 그래서 우리나라에서 18번째로 유네스코에 등재된 인류무형문화재가 되었다. 박물관은 지상 3층의 규모로 상설전시실과 기획전시실, 체험관과 회의실, 보존회사무실 및 실제 크기의 줄을 전시해 놓은 줄 전시관과 매년 4월에 하는 줄다리기 시연장을 갖추었다.

기지시줄다리기기지시는 마을 이름에서 따온 것이다. 전에 이 마을은 선녀가 베를 짜는 지형이라 하여 틀모시또는 틀무시라고 하였다. 이것을 한자로 기록할 때 베틀을 뜻하는 틀 기(), 길쌈을 할 때 필요한 물이 고여 있는 연못의 못 지()자를 합쳐서 기지(機池)라 하였다. 그리고 이곳에 저자거리[市場]가 형성되어 있었기에 ()를 합쳐 기지시(機池市)라고 하였다. 그 뒤로 한자 이름인 기지시가 널리 알려졌다. 지금도 이 지역 사람들은 이곳을 틀모시또는 틀무시라고 한다.

기지시줄다리기의 유래에 관하여는 두 가지 설이 전해 온다. 하나는 조선 선조 때 한나루[牙山灣]가 터져 많은 곳에 물이 차고, 전염병이 퍼져 민심이 흉흉하였다. 이때 이곳을 지나던 한 풍수지리학자가 이곳은 지형이 옥녀(玉女, 선녀)가 베틀을 놓고 베를 짜는 형상이기 때문에 윤년마다 마을사람들이 극진한 정성으로 줄을 당기면, 모든 재난이 예방되고 안정될 것이라고 하였다. 그때부터 줄다리기가 시작되었다고 한다. 줄을 당기는 것은 베를 짜서 마전(피륙을 바래는 일)을 할 때에, 짠 베를 양쪽에서 마주잡고 잡아당기는 형상을 나타내는 것이라 한다. 그래서 처음에는 부녀자들이 줄을 당기다가 나중에 남자들이 하게 되었다고 한다. 이를 옥녀직금형설(玉女織錦形說)이라고 한다.

다른 하나는 지네형국설이다. 옛날에 기지시리에 사는 선비가 과거만 보면 낙방하곤 하였다. 그가 과거에 또 낙방하고 돌아오는 길에 국수봉(국사봉)에 올라 신세를 한탄하다가 잠이 들었다. 그 때 그의 꿈에 구름 속에서 나온 용이 노인으로 변신하여, “네가 거듭 낙방하고, 윤년마다 마을에 재난이 드는 것은 오래 묵은 지네의 심술 때문이다. 내가 시키는 대로 하면 좋은 일이 있을 것이라고 하였다. 그가 꿈에서 만난 노인의 말대로, 정월 보름날 국수봉에 올라가 꽃이 피어 있는 고목나무에서 나온 아가씨의 입에 불을 붙인 솜을 넣었다. 그러자 아가씨는 간 곳이 없고, 큰 구렁이와 지네가 나타나 싸웠다. 얼마 뒤 싸움에 진 지네가 죽자 노인이 나타나, “심술을 부리던 지네는 죽었지만, 지형이 지네형국이기 때문에 지네 모양의 밧줄을 만들어 줄다리기를 하면 재난이 없을 것이라고 하였다. 이 말에 따라 윤달(閏月)이 드는 해마다 지네 모양의 밧줄을 만들어 줄다리기를 하였다고 한다.

  이렇게 하여 시작된 기지시줄다리기는 500여 년 동안 이어져 왔다. 전에는 물위 마을과 물아래 마을로 나누어 줄을 당겼다. 물위 마을이 이기면 나라가 평안하고, 물아래 마을이 이기면 풍년이 든다고 하였다. 전에는 정월 대보름에 행하였는데, 요즘에는 4월에 날을 잡아 민속축제로 줄다리기를 한다. 축제는 축제위원회와 줄다리기 전수회원들이 주관한다.

  요즈음 행하는 줄다리기에 쓸 줄은 한 달 전부터 제작한다고 한다. 일반농가의 볏짚은 길이가 짧으므로, 줄 제작이 용이하도록 농가와 계약하여 키가 큰 벼를 재배하고, 벨 때에도 기계로 베지 않고 낫으로 베어 볏짚의 길이를 길게 한다. 줄은 암줄과 수줄을 나누어 꼰다. 가는 줄을 먼저 꼰 뒤에 가는 줄 70개 가닥을 합하여 큰줄 3개를 만드는데, 이때에는 줄틀로 꼰다. 길이는 약 100m, 둘레는 1.8m나 된다. 본줄에 많은 새끼줄을 연결하여 줄을 당길 때 잡기 쉽게 한다.

  줄다리기는 마을사람들이 마을의 평안과 풍요를 기원하면서 협동하고, 결속을 다지는 민속놀이이다. 조선 후기에 홍석모(洪錫謨)가 쓴 󰡔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1849)를 보면, 줄다리기는 논농사의 비중이 큰 중부이남 지역에서 행해졌다고 한다. 짚으로 엮는 줄다리기의 줄은 농사의 신인 용신(龍神) 상징으로 볼 수 있다. 용을 상징하는 줄을 당기는 것은 기후를 조절하여 풍년이 들도록 하는 일을 맡은 용신이 게으름을 피우거나, 낮잠을 자지 않도록 자극하여 제대로 역할을 해 줄 것을 기원하는 뜻을 내포하고 있다. 암줄과 수줄을 결합하는 것은 용신의 성적 결합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만물은 음양이 조화를 이룰 때 결실을 맺고, 평안과 풍요를 누릴 수 있다는 사고를 반영한 것이다. 줄다리기의 줄은 용신을 상징하는 것이기에 신성하게 여겼다. 그래서 줄을 뛰어 넘으면 아이를 못 가진 사람이 임신하게 되는 등 좋은 일이 생긴다고 믿었다. 줄다리기가 끝난 뒤에는 줄을 잘라다가 논에 뿌리며 농사가 잘 되게 해 달라고 빌거나, 집에 간직하고 소원을 빈다고 한다. 박물관에서 만난 기지시줄다리기축제위원회 위원장은 자제가 몇 년 전에 줄을 잘라다가 집에 보관하였는데, 그 뒤로 하는 일이 잘 되었다고 한다.

  기지시줄다리기는 단절의 위기도 있었다. 그런데 1970년에 대동한약을 운영하던 한의사가 기지시줄다리기의 지속을 위해 애써서 지금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 박물관에서 만난 축제위원회위원장과 보존회원들은 기지시줄다리기에 대한 자부심과 애정을 바탕으로, 줄다리기의 대중화와 세계화를 위해 힘쓰고 있다고 한다. 이분들의 애정과 열정이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어 튼실한 열매를 맺기 바란다. 줄다리기의 자료 수집과 보존, 전승과 전파, 연구에 구심점이 될 기지시줄다리기박물관이 줄다리기박물관으로는 처음으로 이곳에 설립된 것은 참으로 뜻깊은 일이다. 이곳에 박물관을 개관하였다는 소식을 듣고서도 찾지 못하여 아쉬웠던 마음을 뒤늦게나마 풀 수 있도록 초청해 준 최 교수, 동행한 김 교수 내외와 아내에게 감사한다.(2018. 4.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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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며칠 전 나와 아내는 김 교수 부부와 함께 문학관장으로 일하고 있는 제자 교수의 초청을 받고 충남 당진에 갔다. 나는 당진에 간 김에 전에 맛본 적이 있는 면천 두견주에 관해 더 알고 싶어서 면천에 갔다. 면소재지에서 들른 식당 아주머니께 두견주에 관해 물으니, 면천두견주보존회관에 가서 알아보는 것이 좋겠다고 하였다. 그래서 두견주보존회관에 가니, 아주머니 한 분이 진달래꽃의 꽃잎과 꽃술을 분리하고 있었다. 꽃술에는 독이 있어 이를 제거한다고 하였다. 잠시 뒤에 출근한 면천두견주보존회원 한 분이 친절하게 맞으며 두견주를 시음(試飮)해 보라고 하였다. 나는 두견주를 맛보며 면천두견주에 관한 여러 이야기를 들었다.

  면천두견주는 밑술을 만들고 덧술과 혼합하여 11주의 숙성 기간을 거쳐 발효시켜 담그는 술이다. 밑술을 빚는 날로부터 발효와 숙성에 이어 침전(沈澱)과 저장에 이르기까지 100일이 걸린다. 진달래꽃과 찹쌀을 섞어 만들어 향기가 부드럽고, 감칠맛이 난다. 끈적거릴 정도의 단맛이 있고, 진달래꽃의 빛깔이 그대로 술에 녹아들어 진한 담황색을 띠며, 독특한 향취를 간직하고 있다. 진해(鎭咳, 기침을 그치게 하는 일) 작용과 신경통, 부인냉증, 류마치즘 등의 성인병 예방에 효과가 있다고 한다. 이런 효과는 진달래꽃의 아지라인성분에 의한 것이라 한다. , 에탄올을 중심으로 유기산(有機酸), 각종 비타민, 미네랄 등의 여러 영양소가 함유되어 있어 혈액순환촉진과 피로회복에도 특별한 효과가 있다고 한다. 그래서 오래 전부터 민간에서 치료약으로 쓰이기도 하였다. 두견주는 찹쌀과 누룩에 진달래꽃을 가미하여 빚는 발효주이므로, 장기 보존이 어렵다. 그래서 빚은 뒤 반드시 냉장보관을 해야 하며, 일주일 이내에 마셔야 참맛을 느낄 수 있다고 한다.

  술은 각 지방에서 그 지역의 특성에 맞는 방식으로 빚어 맛과 향이 다르다. 이를 가려 각 시·도에서는 그 지방의 특성을 드러내는 전통민속주를 지정하였다. 시·도가 지정한 전통민속주로는 서울삼해주, 한산소곡주, 김제송순주, 전주이강주, 진도홍주, 안동소주, 제주오메기술 등 많이 있다. 정부는 그 중에서 전통과 특성이 뚜렷한 술 세 가지를 골라 국가지정 전통민속주로 지정하였다. 면천두견주는 1986년에 국가문화재지정 전통민속주 제86-나호로 지정되었다. 그래서 경주법주, 서울문배주와 함께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세 가지 전통술의 하나가 되었다.

  면천 지방에서는 약 1,100년 전부터 두견주를 빚어왔다고 한다. 그런데 일제강점기와 1963년 정부의 양곡주 제조금지령으로 인해 한때 중단되었다. 1986년 정부의 민속주 개발계획에 따라, 4대에 걸쳐 그 기능을 계승하여 두견주를 빚어 오던 박승규(朴昇逵) 씨를 중요무형문화재 기능보유자로 지정하면서 재생산되었다. 2001년 박승규 씨가 세상을 떠나자 또다시 생산이 중단되었다. 그러다가 2003년 당진시가 면천두견주 재생산 프로젝트를 진행하여 20079월부터 다시 생산되기 시작했다. 지금은 면천두견주보존회가 두견주 생산과 관리 및 판매를 하고 있다.

  두견주는 중국 당나라 시인 이백(李白)과 두보(杜甫)도 즐겨 마셨다는 고사가 전해온다. 두견주에 관한 기록은 홍만선(洪萬選, 1674~1720)산림경제(山林經濟), 서유구(徐有榘, 1764~1845)임원경제지(林園經濟志), 빙허각(憑虛閣) 이 씨(1759~1824)규합총서(閨閤叢書), 작자가 알려지지 않은 조선 말기의 요리책 시의전서(是議)에 기록되어 있다. 조선 말기의 문신 김윤식(金允植, 1835~1922)의 시문집인 <운양집(雲養集)>에는 면천두견주가 고려 개국공신인 태사(太師) 복지겸(卜智謙)이 이름 모를 병으로 면천에 와서 휴양할 때 빚어졌다고 하였다. 복지겸이 병이 깊어 오랜 동안 자리에 누워 있게 되자 그의 딸 영랑이 가까이에 있는 아미산(峨眉山)에 가서 백일기도를 드렸다. 산기도가 끝날 무렵에 산신령이 영랑의 꿈에 나타나 “‘아미산의 진달래꽃잎을 따다가 안샘의 물로 술을 빚어 100이 지난 뒤에 먹고, 은행나무 두 그루를 심어놓고 정성을 드리면 아버지의 병이 나을 것이라고 하였다. 그래서 그 말대로 하였더니, 아버지의 병이 나았다고 한다. 그 때부터 진달래꽃잎으로 술을 빚기 시작한 것이 오늘의 면천두견주가 되었다고 한다. 이에 따르면 면천두견주는 고려 태사 복지겸 딸의 효성에서 유래된 것이다.

  나는 면천두견주 전설의 주인공인 복지겸과 증거물의 현장을 찾아가 보고 싶었다. 그래서 면천두견주보존회원에게 들은 대로 전 면천초등학교 앞으로 갔다. 학교가 이전하여 지금은 비어 있는 전 면천초등학교 교정에 들어서니, 복지겸의 딸이 심었다는 은행나무 두 그루가 서 있다. 천연기념물 제551호로 지정하여 보호하고 있는 이 은행나무의 나이는 1,100년쯤 된다고 한다. 나는 그 은행나무 앞에 서서 이 은행나무를 심어 놓고, 그 앞에서 아버지의 병 낫기를 간절히 기도하던 영랑 소저의 모습을 상상해 보았다.

  넓은 운동장 동편을 보니, 학교 울타리 밖에 영랑효공원이 있었다. 공원 안쪽에 복지겸의 딸이 떠다가 술을 빚었다는 안샘이 있다. 안샘은 아미산(해발 349.5m) 줄기를 따라 해발 225m의 몽산이 이어지고, 그 아래로 펼쳐지는 들의 시작 부분에 자리하고 있다. 안샘은 아무리 심한 가뭄에도 마르지 않고, 섭씨 14~15도의 잔잔한 물이 흐르며, 물맛이 좋았다고 한다. 두견주를 빚는 데에 알맞은 샘물이었던 모양이다. 이 샘은 원래 노천에 있었을 터인데, 지금은 전각을 지어 보호하고 있다. 이 이야기는 효는 만물을 감동하게 한다는 한국인의 의식을 바탕으로 꾸며진 이야기이다. 면천두견주 이야기의 증거물인 은행나무안샘을 한곳에서 볼 수 있어서 참 좋았다.

  차를 타고 서산 쪽으로 조금 가다 보니, ‘고려 개국공신 태사 복지겸 사당과 묘안내판이 서 있었다. 가까이 가서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복지겸의 사당과 묘를 살펴보았다. 사당에는 복 태사의 영정이 걸려 있다. 묘로 올라가 보니, 커다란 봉분 앞 중앙에 상석(床石)을 놓고, 문인석(文人石)과 산양(山羊石), 그리고 망주석(望柱石) 좌우에 1개씩 세워놓았다. 그 앞에는 장명등(長明燈)이 서 있다.

  서산 쪽으로 2km쯤 더 가니, ‘면천진달래공원이 있었다. 면에서 계획하여 아름답게 조성한 공원으로, 진달래꽃이 곱게 피어 있고, 정상에는 정자가 있다. 산에는 진달래가 듬성듬성 있는 곳이 많고, 진달래나무의 크기가 그리 크지 않은 것으로 보아 공원을 조성한 지 얼마 되지 않는 것 같았다. 복지겸의 딸이 100일기도를 하고, 진달래꽃을 따라가 술을 빚었다는 아미산에 가보고 싶었으나, 시간이 맞지 않아 발길을 돌렸다.

  당진 면천은 고려 태조 왕건이 건국에 공이 큰 복지겸에게 하사한 땅이다. 면천 복씨의 시조인 복지겸의 출생지인 이곳은 지금은 당진시에 속한 일개 면이지만, 당시엔 혜성(槥城)이라는 큰 고을이었다. 조선조에서도 당진현()’보다 격이 높은 면천군()’이었다. 조선 정조 때에는 연암(燕巖) 박지원(朴趾源)1797년부터 1800년까지 4년 동안 면천군수로 부임하여 백성을 다스린 곳이기도 하다. 이렇게 유서 깊은 곳에서 1,100여 년 전부터 빚어온 두견주가 2018427일에 열릴 남북정상회담 만찬의 건배주로 선정되었다는 것은 참으로 뜻깊은 일이다. 후삼국을 통일하여 통일국가를 건설하는 데에 큰 공을 세운 복지겸에서 유래된 면천두견주를 마시며 남과 북이 하나가 됨을 자축하는 날이 속히 왔으면 좋겠다. (2018. 4.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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