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4월 중순에 충남 당진문학관장으로 일하는 최 교수의 초청으로 당진에 가서 송악읍에 있는 기지시줄다리기박물관을 찾았다. 2011년 4월 11일에 개관한 이 박물관은 국가중요무형문화재 제75호인 기지시줄다리기를 비롯하여 국내외 줄다리기 관련 자료 및 각종 체험 시설을 갖추고 있었다. 우리나라에서 행해지는 줄다리기 중 <기지시줄다리기>와 <영산줄다리기>는 국가문화재로, <삼척기줄다리기>․<밀양감내게줄당기기>․<의령큰줄땡기기>․<남해선구줄긋기> 등은 지방문화재로 지정하여 전승과 보존에 힘쓰고 있다. 기지시줄다리기는 2015년에 베트남, 캄보디아, 필리핀과 함께 <줄다리기 의례와 놀이>로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에 등재되었다. 그래서 우리나라에서 18번째로 유네스코에 등재된 인류무형문화재가 되었다. 박물관은 지상 3층의 규모로 상설전시실과 기획전시실, 체험관과 회의실, 보존회사무실 및 실제 크기의 줄을 전시해 놓은 줄 전시관과 매년 4월에 하는 줄다리기 시연장을 갖추었다.
‘기지시줄다리기’의 ‘기지시’는 마을 이름에서 따온 것이다. 전에 이 마을은 선녀가 베를 짜는 지형이라 하여 ‘틀모시’ 또는 ‘틀무시’라고 하였다. 이것을 한자로 기록할 때 베틀을 뜻하는 ‘틀 기(機)’ 자, 길쌈을 할 때 필요한 물이 고여 있는 연못의 ‘못 지(池)’ 자를 합쳐서 ‘기지(機池)’라 하였다. 그리고 이곳에 저자거리[市場]가 형성되어 있었기에 ‘시(市)’를 합쳐 ‘기지시(機池市)’라고 하였다. 그 뒤로 한자 이름인 ‘기지시’가 널리 알려졌다. 지금도 이 지역 사람들은 이곳을 ‘틀모시’ 또는 ‘틀무시’라고 한다.
기지시줄다리기의 유래에 관하여는 두 가지 설이 전해 온다. 하나는 조선 선조 때 ‘한나루[牙山灣]’가 터져 많은 곳에 물이 차고, 전염병이 퍼져 민심이 흉흉하였다. 이때 이곳을 지나던 한 풍수지리학자가 “이곳은 지형이 옥녀(玉女, 선녀)가 베틀을 놓고 베를 짜는 형상이기 때문에 윤년마다 마을사람들이 극진한 정성으로 줄을 당기면, 모든 재난이 예방되고 안정될 것”이라고 하였다. 그때부터 줄다리기가 시작되었다고 한다. 줄을 당기는 것은 베를 짜서 마전(피륙을 바래는 일)을 할 때에, 짠 베를 양쪽에서 마주잡고 잡아당기는 형상을 나타내는 것이라 한다. 그래서 처음에는 부녀자들이 줄을 당기다가 나중에 남자들이 하게 되었다고 한다. 이를 ‘옥녀직금형설(玉女織錦形說)’이라고 한다.
다른 하나는 ‘지네형국설’이다. 옛날에 기지시리에 사는 선비가 과거만 보면 낙방하곤 하였다. 그가 과거에 또 낙방하고 돌아오는 길에 국수봉(국사봉)에 올라 신세를 한탄하다가 잠이 들었다. 그 때 그의 꿈에 구름 속에서 나온 용이 노인으로 변신하여, “네가 거듭 낙방하고, 윤년마다 마을에 재난이 드는 것은 오래 묵은 지네의 심술 때문이다. 내가 시키는 대로 하면 좋은 일이 있을 것”이라고 하였다. 그가 꿈에서 만난 노인의 말대로, 정월 보름날 국수봉에 올라가 꽃이 피어 있는 고목나무에서 나온 아가씨의 입에 불을 붙인 솜을 넣었다. 그러자 아가씨는 간 곳이 없고, 큰 구렁이와 지네가 나타나 싸웠다. 얼마 뒤 싸움에 진 지네가 죽자 노인이 나타나, “심술을 부리던 지네는 죽었지만, 지형이 지네형국이기 때문에 지네 모양의 밧줄을 만들어 줄다리기를 하면 재난이 없을 것”이라고 하였다. 이 말에 따라 윤달(閏月)이 드는 해마다 지네 모양의 밧줄을 만들어 줄다리기를 하였다고 한다.
이렇게 하여 시작된 기지시줄다리기는 500여 년 동안 이어져 왔다. 전에는 물위 마을과 물아래 마을로 나누어 줄을 당겼다. 물위 마을이 이기면 나라가 평안하고, 물아래 마을이 이기면 풍년이 든다고 하였다. 전에는 정월 대보름에 행하였는데, 요즘에는 4월에 날을 잡아 민속축제로 줄다리기를 한다. 축제는 축제위원회와 줄다리기 전수회원들이 주관한다.
요즈음 행하는 줄다리기에 쓸 줄은 한 달 전부터 제작한다고 한다. 일반농가의 볏짚은 길이가 짧으므로, 줄 제작이 용이하도록 농가와 계약하여 키가 큰 벼를 재배하고, 벨 때에도 기계로 베지 않고 낫으로 베어 볏짚의 길이를 길게 한다. 줄은 암줄과 수줄을 나누어 꼰다. 가는 줄을 먼저 꼰 뒤에 가는 줄 70개 가닥을 합하여 큰줄 3개를 만드는데, 이때에는 줄틀로 꼰다. 길이는 약 100m, 둘레는 1.8m나 된다. 본줄에 많은 새끼줄을 연결하여 줄을 당길 때 잡기 쉽게 한다.
줄다리기는 마을사람들이 마을의 평안과 풍요를 기원하면서 협동하고, 결속을 다지는 민속놀이이다. 조선 후기에 홍석모(洪錫謨)가 쓴 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1849)를 보면, 줄다리기는 논농사의 비중이 큰 중부이남 지역에서 행해졌다고 한다. 짚으로 엮는 줄다리기의 줄은 농사의 신인 용신(龍神) 상징으로 볼 수 있다. 용을 상징하는 줄을 당기는 것은 기후를 조절하여 풍년이 들도록 하는 일을 맡은 용신이 게으름을 피우거나, 낮잠을 자지 않도록 자극하여 제대로 역할을 해 줄 것을 기원하는 뜻을 내포하고 있다. 암줄과 수줄을 결합하는 것은 용신의 성적 결합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만물은 음양이 조화를 이룰 때 결실을 맺고, 평안과 풍요를 누릴 수 있다는 사고를 반영한 것이다. 줄다리기의 줄은 용신을 상징하는 것이기에 신성하게 여겼다. 그래서 줄을 뛰어 넘으면 아이를 못 가진 사람이 임신하게 되는 등 좋은 일이 생긴다고 믿었다. 줄다리기가 끝난 뒤에는 줄을 잘라다가 논에 뿌리며 농사가 잘 되게 해 달라고 빌거나, 집에 간직하고 소원을 빈다고 한다. 박물관에서 만난 기지시줄다리기축제위원회 위원장은 자제가 몇 년 전에 줄을 잘라다가 집에 보관하였는데, 그 뒤로 하는 일이 잘 되었다고 한다.
기지시줄다리기는 단절의 위기도 있었다. 그런데 1970년에 대동한약을 운영하던 한의사가 기지시줄다리기의 지속을 위해 애써서 지금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 박물관에서 만난 축제위원회위원장과 보존회원들은 기지시줄다리기에 대한 자부심과 애정을 바탕으로, 줄다리기의 대중화와 세계화를 위해 힘쓰고 있다고 한다. 이분들의 애정과 열정이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어 튼실한 열매를 맺기 바란다. 줄다리기의 자료 수집과 보존, 전승과 전파, 연구에 구심점이 될 기지시줄다리기박물관이 줄다리기박물관으로는 처음으로 이곳에 설립된 것은 참으로 뜻깊은 일이다. 이곳에 박물관을 개관하였다는 소식을 듣고서도 찾지 못하여 아쉬웠던 마음을 뒤늦게나마 풀 수 있도록 초청해 준 최 교수, 동행한 김 교수 내외와 아내에게 감사한다.(2018. 4. 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