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을 비롯한 여러 나라에는 기독교 교회가 참으로 많다. 나는 여행을 하면서 교회를 볼 때마다 ‘이 세상에서 가장 먼저 생긴 교회는 어디에 있는, 어느 교회일까?’를 생각한 적이 있다. 그런데 터키에 와서 여행 안내서를 보던 중 ‘터키 안타키야(Antakya)에 있는 성 베드로 동굴교회가 세계 최초의 교회’라는 글을 읽었다. 그래서 얼른 지도를 펴고 안타키아를 찾아보니, 터키의 남동쪽 해안 끝에 있다. 학생들에게 물으니, 버스를 타고 12~13 시간 걸려야 갈 수 있다고 하였다. 주말을 이용하여 갔다 오기에는 먼 곳이어서 방학에 가기로 하고 미뤄 두었다.

   2010년 봄 학기 강의가 끝난 6월 하순에 우리 부부는 양 교수, 김 교수와 함께 밤에 출발하는 버스를 타고 10여 시간을 달려 이른 아침에 이스켄데룬(Iskenderun)에 도착하였다. 이스켄데룬은 옛날에 알렉산더 대왕이 이곳을 지난 것을 기념하여 붙인 이름이라고 한다. 버스 터미널로 마중 나온 2학년 학생 일카이 양을 만나 그곳에서 하루를 지내며 이스켄데룬 시내와 박물관을 구경하고, 지중해 바닷가에 난 길을 따라 산책하였다. 지중해의 물에 손을 담가 보기도 하고, 남국의 정취가 물씬 풍기는 바닷가 길을 걸으며 아름다운 경치를 마음껏 감상하였다.

  그 다음날 오전 10시쯤 일카이 양 언니의 약혼자가 운전하는 차를 타고 안타키아로 향하였다. 이스켄데룬에서 안타키아는 차로 3시간 쯤 걸린다. 좀 가파른 산길을 달리며 보니, 길 양편 산에 올리브 나무가 숲을 이루고 있다. 더 남쪽으로 가니, 끝없이 펼쳐지는 넓은 밭에 옥수수가 자라고 있다. 시리아와의 국경에 쳐 놓은 철조망을 지나 달리니, 옥수수밭과 목화밭이 번갈아가며 이어진다. 올리브나무가 숲을 이루고, 끝없이 펼쳐지는 농토를 가진 터키가 부럽다.

   안타키아(Antakya)는 터키의 남동쪽 해안에 위치한 도시로, 인구는 약 20만 2천명이라고 한다. 안타키아는 성경에 나오는 ‘안디옥’이다. 옛 이름이 ‘하타이(Hatay)’여서 지금도 하타이라고 부르는 사람이 많다고 한다. 성경에 나오는 안디옥은 두 군데이다. 하나는 비시디아 안디옥인데, 터키 내륙 지방에 있는 지금의 얄바치(Yalvaç)로, 아피욘카라히사르(Afyonkarahisar)와 콘야(Konya)의 중간쯤에 있다. 다른 하나는 수리디아 안디옥으로 지금의 안타키야이다.

   이곳은 기원전 2,000년경까지 시리아의 아무트 왕국이 통치하였다. 기원전 17세기경에는 히타이트의 지배를 받았는데, 히타이트가 망한 뒤에는 앗시리아와 페르시아가 다스렸다. 기원전 333년 이 곳에 왔던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더 대왕은 물맛에 감동하여 이곳에 도시를 건설하고 싶어 하였다. 알렉산더 대왕이 세상을 떠난 후 그의 무장(武將)이었던 셀레우코스 1세(Seleukos I Nikator, B.C. 304~280 재위)가 이곳을 지배하였다. 그는 이곳에 안티오키아 왕국을 건설하고, 안타키아를 수도로 정하였다. 그는 이곳의 이름을 그의 아버지 안티오코스를 기념하는 뜻에서 안티오케이아로 명명하였다. 이곳은 물이 풍부한 다프네(하르비예)에 가깝고, 오론테스(Orontes, 아시) 강을 끼고 있어서 크게 발전하였다. 그러나 소왕국의 난립과 전쟁으로 피폐해졌고, 1세기 중반에 로마에 병합되었다. 그 후 시저에 의해 재건되어 상업, 교육, 문화의 도시로 발전하였다.

   안디옥은 예수의 수제자로 로마에 기독교를 전파한 성 베드로가 포교(布敎)의 거점으로 삼았던 곳이다. 바울 사도와 바나바가 와서 생활하고, 선교 여행을 떠난 곳이기도 하다. 이곳에서 A.D 252~300년에 10여 차례의 기독교 공의회가 열렸다. 이곳은 신약성경의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을 쓴 누가의 고향이다. 요한 사도의 수제자인 폴리갑도 이곳 출신이다. 그는 아시아 일곱 교회 중 하나인 서머나 교회 감독으로 있다가 순교하였다. 카파도키아에서 중세 수도원 운동을 이끌던 시몬 성인도 이곳 출신이다. 이처럼 이곳은 기독교 포교의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곳으로, 기독교에서 예루살렘, 로마 다음으로 중요하게 여기는 도시이다.

   오후 1시 40분경에 도심에서 북쪽으로 2km정도 떨어진 곳에 있는 성 베드로 동굴교회에 도착하였다. 이 동굴교회는 1963년 교황 바오로 6세에 의해 성지(聖地)로 선포된 곳이다. 성 베드로의 축일인 6월 29일에는 세계 각지에서 순례단이 찾아와 미사가 행해진다고 한다. 성 베드로 동굴교회는 기독교 발달사에서 매우 중요한 곳이라 생각되어 꼭 가보려고 하였던 곳이어서 이곳에 도착하니, 좀 긴장되기도 하고 흥분도 되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다가 부활하여 승천한 후 제자들은 예수님의 말씀과 가르침을 열심히 전도하였다. 그러나 예수를 부정하는 유대교인들의 박해가 매우 심하였다. 예루살렘에서 박해를 받던 베드로 사도는 배를 타고 이곳으로 왔다. 그를 따르던 신도 중 일부가 이곳으로 와서 이 교회를 세우고, 베드로 사도와 함께 하나님께 예배를 드렸다. ‘베드로’란 이름은 예수로부터 받은 것인데, 교회의 초석으로 ‘바위’를 뜻하는 말이다. 성 베드로 동굴교회가 바위 안에 세워지고, 그 뒤를 이어 많은 교회가 세워진 것은 ‘반석 위에 교회를 세우리라.’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실천한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예수님의 말씀을 믿고 따르던 사람들은 스테반의 순교 이후에 더욱 심해진 박해를 피해 사방으로 흩어졌다. 그 중 일부 사람들은 페니기아와 키프로스와 안디옥으로 가서 유대 사람들에게만 말씀을 전하다가 후에 그리스 사람들에게도 말씀을 전하였다. 그러자 많은 사람들이 믿고 예수를 받아들였다(사도행전 11 : 19). 예루살렘 교회가 이 소식을 듣고 바나바를 안디옥으로 보냈다. 이곳에 온 바나바는 여기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는 바울 사도의 고향 다소(Tarsus)로 가서 바울을 데리고 와 이 교회에서 1년 동안 함께 지내면서 많은 사람들을 가르쳤다. 당시에 예수를 믿고 따르던 사람들을 ‘크리스쳔(Christian)’이라 불렀다(사도행전 11 : 22~26). 이렇게 보면, 이 교회는 이 세상에 세워진 최초의 교회이다. 그리고 이 교회의 신도들은 처음으로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리어진 사람들이다.

   나는 조금 긴장되고 흥분된 마음으로 교회를 살폈다. 교회는 하비브 낫자르산 기슭의 큰 바위를 깎아 만든 동굴 안에 있었다. 교회 안은 100㎡ 쯤 되어 보이는 직사각형의 방인데, 전면의 중앙에는 돌로 쌓은 단이 있고, 그 가운데에 돌로 된 제단이 있다. 제단 앞의 벽 위쪽에는 천국의 열쇠와 두루마리 성서를 든 베드로 사도의 상이 있다. 제단 오른 쪽에는 병을 낫게 하는 효능이 있다고 하는 약수가 있다. 사람들은 이를 성수(聖水)라고 한다. 제단 왼쪽에는 도피처로 사용하였던 터널이 있다. 지금 있는 석조 제단은 12~13세기의 것이고, 모자이크 바닥은 4~5세기 것이라고 한다. 나는 교회 안의 이곳저곳을 둘러보고 성수를 한 모금 마시면서 초기 기독교인들의 경건한 생활 모습을 그려 보았다. 그 때 서양 사람으로 보이는 남녀 30여 명이 들어와 둘러서자 안내자가 이 교회에 대한 설명을 하였다. 설명이 끝나자 일행 중 한 사람이 앞으로 나와 무어라고 하니, 모두 손을 잡고 찬송을 하였다. 찬송이 끝나자 그 사람이 대표로 기도하였다. 일행 모두 나이가 들어 보이는 사람들이었는데, 찬송을 부르고 기도하는 모습이 아주 진지하고 경건하였다. 기도가 끝난 뒤에 어디서 왔느냐고 물으니, 이탈리아에서 성지순례를 왔다고 하였다.

   동굴교회에서 나와 왼쪽 산 능선을 따라 가파른 길을 올라가니 우뚝우뚝 솟은 큰 바위가 여럿 있다. 거기에 베드로와 성모 마리아상이 있는데, 크게 파손되어 있어 자세한 모습을 볼 수 없어 안타까웠다. 그 위에 사람의 얼굴 모양을 한 바위가 있다. 이 바위가 ‘저승의 강’의 사공인 ‘키론의 상(像)’이라고 한다. 이 상(像)은 기원전 2세기에 셀레우코스 왕조의 안티코스 4세 때에 역병(疫病)을 가라앉히기 위해 만들었다고 한다. 그런데 훼손이 심하여 자세한 모습은 알 수 없었다. 키론의 상 옆에 자연동굴이 하나 있는데, 전에 교회로 사용되었다고 한다. 그곳을 보니, 카파도키아에 있는 지하 동굴교회가 떠올랐다.

   다시 성 베드로 동굴교회 앞으로 온 나는 교회를 다시 한 번 둘러보았다. 예수님의 수제자인 베드로가 세운 세계 최초의 교회, ‘크리스쳔’이라는 말이 처음 생긴 교회를 와 보았다는 감격을 가라앉히며 조용히 감사의 기도를 올렸다. 그리고 기념품 가게로 가서 3리라(한화 2,300원 정도)를 주고 성 베드로 동굴교회 사진을 넣고 구워 만든 도자기판 하나를 샀다. 손바닥 반 정토 크기의 이 도자기는 장식용으로 장식장에 넣어 두든지, 서진(書鎭, 책장이나 종이쪽이 바람에 날리지 아니하도록 눌러두는 물건)으로 쓰면서 이곳에 왔던 일을 오래오래 기억해야겠다.  <성동문단 제11호(성동문인협회, 20011>에도 실려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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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터키에 오기 전까지 ‘터키는 자연 경관이 빼어난 곳이 많고, 역사 유적과 기독교 성지(聖地)가 많은 나라’라는 것밖에는 아는 것이 없었다. 그래서 아내와 함께 앞으로 여행할 나라로 꼽고 있었을 뿐이었다. 그러한 내가 뜻하지 않게 터키에 와서 1년 가까이 지내게 되었다. 나는 대학교수로 30여 년 간 근무하다가 정년퇴임을 한 뒤에 제자 교수의 권유로 한국국제교류재단에서 해외 대학에 개설된 한국어문학과에 파견하는 객원교수 초빙 공고를 보았다. 객원교수를 파견할 여러 나라 중 터키가 가장 마음에 들어 응모하였더니, 다행히 선발되었다. 그래서 터키의 중부 지역 카이세리에 있는 에르지예스대학교 한국어문학과 객원교수로 오게 되었다.

   내가 터키에 간다고 하니, 잘 되었다고 기뻐하면서 격려해 주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매우 걱정을 하면서 다시 생각해 보라는 사람도 있었다. 걱정하는 이유는 이슬람 국가에 가서 안전에 문제가 생기면 어떻게 하느냐는 것이었다. 그 말을 들으니, 은근히 겁이 나기도 하였다. 이슬람 국가이기 때문에 안전을 염려하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나는 고등학교 때 세계사 시간에 이슬람교는 ‘한 손에 코란을 들고, 한 손에는 칼을 들고’ 선택을 강요하며 선교(宣敎)한다는 말을 들었다. 이 말을 들은 뒤부터 이슬람교는 ‘무서운 종교’라는 생각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최근에는 미국의 9․11 테러를 비롯하여 세계 여러 곳에서 일어나는 자살폭탄 테러의 배후에 이슬람교도가 있다는 뉴스를 여러 번 접하였다. 또, 몇 년 전에는 이슬람교도에게 인질로 잡혀 있던 한국의 기독교 선교사가 살해되었다는 보도가 있었다. 이러한 일로 이슬람교도는 종교가 다른 사람을 해치기도 하는 무서운 사람들이라는 인식을 갖게 되었다. 이것은 나뿐만 아니라 많은 한국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는 인식일 것이다. 그래서 나는 인구의 98%가 이슬람교도인 터키에 간다는 것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을 떨쳐버릴 수 없었다.

   나는 터키를 소개한 책을 읽으면서 터키는 종교의 자유를 헌법에 보장한 나라라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한국전쟁 때 세 번째로 많은 군인을 파견한 나라, 한국을 형제의 나라로 생각하고 한국인에게 매우 친절한 나라, 우리와 같은 우랄알타이어 계통의 언어를 사용하며, 한국인과 정서면에서 통하는 점이 있는 나라라는 것을 알았다. 서울에 있는 터기문화원에 가서 젊은 터키인 교사한테 터키어를 배우면서 터키 사람에 대해 친근감을 느끼게 되었다. 그러는 동안에 이슬람 국가에 가는 것에 대한 두려움과 불안이 조금씩 누그러졌다.

   터키 카이세리에 와서 처음 만난 사람은 한국어문학과 학과장인 터키인 G 교수이다. 나는 G 교수를 비롯한 여러 교수와 학생들을 접하면서 터키에 대하여 조금씩 알게 되었다. 터키는 이슬람교의 수니파가 주종을 이루고 있고, 종교의 세속화(世俗化) 운동을 한 나라여서 중동 이슬람 국가의 분위기와는 좀 다르다고 한다. 터키에 와서 보고 들은 것 중에서 다음의 몇 가지 일은 나의 이슬람에 대한 생각을 되돌아보게 하였다. 

  내가 터키에 온 것은 2009년 9월 15일인데, 그 때는 라마단 기간이었다. 이슬람력으로 아홉 번째 달은 금식(禁食)하는 달로, 해가 떠 있는 동안에는 음식은 물론 물도 마시지 않는다. 한 달 동안 금식하는 것은 가난한 사람의 고통을 몸으로 느끼고,  신앙심을 키우게 하기 위함이라고 한다. 금식하여 절약한 비용은 가난한 사람에게 직접 주거나 자선 단체에 기부한다. 해가 있는 동안에는 금식을 하고, 해가 진 후 저녁 식사를 할 때에는 가난한 사람을 초대하여 함께 식사한다. G 교수에게 물으니, 아침 5시 전에 아침을 먹고, 저녁 7시 30분경에 자미나 TV에서 금식 해제 신호가 울리면 그 때서야 저녁을 먹는다고 한다. 무려 14시간 30분 동안을 물도 마시지 않고 견디는 일이 얼마나 힘들고 괴로울까! 기독교에서도 금식을 하며 기도하는 사람이 있는데, 물은 마시면서 한다. 자기의 뜻을 펴기 위해 단식(斷食) 투쟁을 하는 사람도 물은 마시면서 한다. 그런데 이슬람교의 금식 시간에는 물도 마지지 못하게 한다니, 참으로 가혹하다는 느낌이 든다. 나는 식사 시간이 조금만 늦어도 참기 어려워 쩔쩔매곤 하는데, 그 긴 시간을 어떻게 참을까! 이것은 깊은 신앙심과 인내심을 갖지 않고는 할 수 없는 일이라 생각한다. 그런데 어린이나 노약자, 임신부 등을 제외한 대부분의 신도들이 금식에 참여한다고 하니, 이들의 신앙심은 정말 대단하다.

   나는 터키에서 살면서 이슬람교와 관련된 큰 명절을 두 번 지냈다. 한 번은 금식 기간이 끝난 다음날부터 3일 간 이어지는 ‘라마단 바이람(금식 명절)’이다. 이때에는 가족과 친지가 서로 만나 금식 기간을 잘 넘겼는가, 건강을 해치지는 않았는가를 확인하면서 명절 음식과 함께 단 것을 나누어 먹는다. 그래서 이를 ‘셰케르 바이람(설탕 명절)’이라고도 한다. 또 한 번은 라마단 바이람이 끝난 뒤 두 달쯤 되는 때에 4일 간 쉬는 ‘쿠루반 바이람(희생 명절)’이다. 코란에 보면, 알라께서 아브라함에게 사랑하는 아들을 제물로 바치라고 명한다. 아브라함은 알라의 뜻에 순종하여 아들을 산으로 데리고 가서 죽여 제물로 바치려고 한다. 그의 믿음을 확인한 알라께서는 아들 대신 양으로 제사하게 하였다는 이야기가 실려 있다. 이것은 기독교의 구약 성경에 나오는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의 이야기와 같다. 희생 명절은 여기에서 연유된 것이다.

   셰케르 바이람을 지내고 한 달 뒤에 성지순례를 떠난 사람은 마호메트(Mahomet)의 탄생지인 메카(Mecca)에서 쿠루반 바이람을 맞이하고, 그렇지 않은 사람은 자기 집에서 명절을 맞는다. 희생 명절에는 각 가정에서 양이나 소를 잡는다. 가족이 많지 않은 집에서는 양을 잡고, 가족이 많은 집에서는 소를 잡는다. 친척이나 이웃이 뜻을 모아 소를 잡기도 한다. 그래서 희생명절에는 온 나라에서 수많은 양과 소가 제물로 목숨을 잃는다. 각 가정에는 메카를 향하여 절하고 기도하는 곳이 있는데, 대개 벽에 코란의 구절을 써 붙인다. 양이나 소를 잡을 준비가 되면 가족 모두 또는 가족 대표가 그 자리에서 또는 집안의 기도처로 가서 기도하고, 양이나 소를 잡는다. 양이나 소를 잡은 후에 다시 예배를 드린다. 잡은 양이나 소의 고기 중 3분의 1은 가족, 3분의 1은 친척 몫이고, 나머지 3분의 1은 불우한 사람에게 나누어 준다. 불우한 사람은 희생명절에 양을 잡지 못하는 사람이다. 자기 둘레에 양을 잡지 못한 사람이 없을 때에는 구호 단체나 기관에 의뢰하여 고기를 나누어 준다고 한다. 셰케르 바이람과 쿠루반 바이람에는 흩어져 살던 가족들이 만나서 명절 음식을 먹으며 즐거운 시간을 갖는다. 가족을 만나기 위해 객지에서 살던 사람은 거의 다 고향을 찾는다. 그래서 전국적으로 교통의 혼잡이 극심하고, 교통사고도 많이 난다. 한국의 설과 추석에 귀성객으로 교통의 혼잡을 이루는 것과 다름없는 현상이다. 
  
   이슬람교도들은 하루에 다섯 번씩 기도를 한다. 해 뜰 무렵, 정오, 오후 4시 경, 해질 무렵, 잠자기 전에 기도를 한다. 마을마다 있는 자미(이슬람사원)에서는 기도 시간을 알리는 방송을 한다. 이를 ‘에잔(ezan)’이라고 하는데, ‘알라는 위대하시다. 모두 자미에 나와서 기도합시다.’는 뜻의 말을 길게 뽑아서 방송한다. 기독교에서 종을 울리는 것과 대조를 보인다. 에잔이 울리면 자기가 있는 곳에서 기도를 한다. 금요일 낮에는 신도들이 자미에 가서 함께 기도한다. 이슬람교인들의 기도 내용은 한국의 기독교인이나 불교 신자들이 기도하는 내용과 별 차이가 없는 듯하다. 이들 역시 서원(誓願) 기도를 한다. 내가 만난 초등학교 교사 한 분은 10년 전에 자가용 승용차를 갖게 해 달라고 기도하면서, ‘차를 사게 되면 자동차 값의 3분의 1을 이웃을 위해 기부하겠다고 서원하였다고 한다. 그는 자동차를 산 뒤에 약속한 대로 차 값의 3분의 1을 ‘불우한 어린이를 위한 기금’으로 기부하였다고 한다. 쿠루반 바이람에 잡은 소나 양의 고기 3분의 1을 불우한 이웃에게 나눠 주는 것이나 소원을 빌면서 불우한 이웃을 돕겠다고 약속하고 이를 이행하는 것을 보면서, 이슬람교는 이웃사랑을 실천하는 종교라는 생각을 하였다.

  이슬람 교리는 이자를 받지 말라고 가르친다. 그래서 남에게 돈을 빌려 줄 때에 이자를 받지 않는다. 은행에 돈을 맡길 때에도 이자를 받지 않는 예금에 가입하는 사람이 많다고 한다. 이슬람교인은 술을 마시지 않는다. 그래서 음식점은 물론, 규모가 큰 슈퍼마켓에서도 술을 팔지 않는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회식을 하여도 술을 마시지 않고, 차나 다른 음료수를 마신다. 한국 사람들처럼 저녁식사 자리에서 반주를 하고, 1차나 2차를 가는 일은 없다. 그래서 시내의 상점이나 식당들도 비교적 이른 시간에 문을 닫으며, 밤늦도록 흥청거리는 일이 없다. 이곳이라고 하여 술이 아예 없고, 모두가 술을 마시지 않는 것은 아니다. 술을 파는 슈퍼마켓이나 술집이 따로 있어서 그곳에 가야만 술을 사거나 마실 수 있다. 술집에 가지 않는 사람은 자기 집에서 술을 마신다.

  이슬람교에서는 돼지고기 먹는 것을 금한다. 돼지고기를 먹지 않으니, 돼지를 기르지도 않으므로 이곳에서는 돼지를 볼 수 없다. 한국어 연수나 교환학생으로 한국에 갔던 학생들 중에는 기숙사에서 주는 된장찌개를 맛있게 먹었다고 한다. 그런데 거기에 돼지고기가 들어 있는 것을 알고는 먹을 수 없어서 밥과 김치만 먹은 날도 있다고 한다. 한국에서 라면을 맛있게 먹었다는 학생에게 한국에서 파는 라면에는 돼지고기 성분이 들어있다고 하니, 깜짝 놀라면서 그런 줄 알았으면 먹지 않을 것이라고 하였다. 이곳 사람들 중에는 한국 라면을 좋아하는 사람이 많이 있다. 그런데 여기에서 파는 한국 라면은 돼지고기 성분을 빼고 만들은 것이다. 이슬람교에서는 살인을 금하고, 자살도 죄악시한다. 따라서 다른 사람을 죽이거나 자살 폭탄 테러(terror)를 하여 많은 사람을 해치는 것은 이슬람 교리에 어긋나는 일이다. 테러 집단이 이슬람교도로 알려진 것은 그들이 이슬람교의 교리에 어긋난 행동을 하면서 이슬람교를 빙자(憑藉)한 때문이라고 한다. 

  이곳 학생들은 신앙심이 깊은 학생도 있고, 좀 약한 학생도 있는데, 대체적으로 순박하고, 친절하다. 한국어과 학생들은 한국을 좋아하고, 한국어를 열심히 공부한다. 카이세리 시내에서 만난 시민들은 아주 친절하고 우호적이다. 내가 아내와 함께 시내에 나가면, 이상하게 보이는지,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우리들을 유심히 쳐다본다. 어린이들은 ‘헬로우’ 하고 부르기도 하고, 고등학교 학생들은 짧은 영어로 말을 걸기도 한다. 어른들은 어디서 왔느냐고 묻고, 한국에서 왔다고 하면 ‘아르카다쉬(친구)’라고 하면서 악수를 청한다. 견과류나 빵과 과자 종류를 파는 가게에서는 맛이 어떨지 몰라 선뜻 사지 못하는 우리에게 맛을 보라고 권하고, 열심히 좋은 점을 설명한다.

  터키에서 1년 가까이 지내는 동안에 이곳에 오기 전에 가졌던 이슬람에 대한 두려움이나 불안감은 없어졌다. 이슬람교도의 독실한 신앙심과 이웃 사랑을 실천하는 모습을 보면서 내가 이슬람교에 대해 그릇된 선입관을 가지고 있었음을 알았다. 이슬람교도 중에 테러 분자가 많다고 알고 있었던 것은 무장 테러 단체들이 이슬람교를 빙자한 때문이라는 것도 알았다.

  모든 종교는 교리(敎理)에 따라 추구하는 지향 가치가 있다. 그것은 교리에 따라 다르게 표현되지만, 포괄적으로 말하면 ‘선(善)’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모든 종교는 선을 추구한다는 공통점을 지니고 있으니, 선교할 때에도 다른 사람의 종교를 인정해 주고, 자기 종교의 좋은 점을 자랑하면서 자기 종교를 믿도록 유도하는 것이 올바른 선교의 방법이라 생각한다. 또, 종교를 정치적 목적이나 주의(主義)․주장(主張)을 실현하는 도구로 삼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러면 다른 종교에 대한 비방(誹謗)이나 배척(排斥)도 없어질 것이고, 다른 종교를 그릇되게 인식하거나 편견(偏見)을 갖게 하는 일도 없어질 것이다. 

  이 글은 <<성동문학 10>>, 성동문인협회, 2010에 실린 것임.



  한 해를 보내고 새해를 맞이할 준비를 하는 12월이 되면 여러 가지 감회가 있기 마련이다. 그런데 머나먼 땅 터키에서 연말을 보내는 금년에는 그 감회가 좀 유별나다.

  나는 터키 카이세리에 있는 에르지예스대학 한국어과에 객원교수로 와서 한국어와 한국문학을 강의하고 있다. 한국에서 비행기로 12시간을 날아 이스탄불에 도착한 뒤에 다시 국내선으로 바꿔 타고 1시간 30분을 날아야 올 수 있는 이곳 대학에 한국어문학과가 개설된 것은 매우 뜻 깊은 일이다. 나는 이 대학에 객원교수로 와서 한국어와 한국문학을 강의하게 된 것에 보람을 느낀다. 우리와 얼굴 모습이 전혀 다른 이곳 젊은이들이 한국어를 열심히 공부하는 것을 보면 아주 대견스럽다. 그들이 서툰 한국말로 ‘한국은 크게 발전한 나라입니다’, ‘한국을 좋아합니다.’, ‘한국에 어학연수를 가거나 유학을 가고 싶어요.’, ‘한국에 가서 살았으면 좋겠어요.’ 하는 말을 들으면 가슴이 뿌듯해진다.

  전 세계 유명 자동차회사 제품의 전시장과 같은 터키 거리에서 현대자동차와 기아자동차, 대우자동차 마크를 단 차가 달리는 것을 보면 어깨가 으쓱해진다. 한국 자동차나 삼성․LG의 전자제품을 써 보니 정말 좋은 제품이라면서 자랑하는 터키 사람을 만나면, 친근감을 느끼게 되고, 이국 생활의 외로움도 잊게 된다. TV를 켜면, 터기의 국영방송에서 한국의 드라마가 방송된다. 그 동안 <대장금>을 비롯한 많은 드라마가 방영되었다고 한다. 이곳에 온 금년 9월 이후 내가 잠깐씩 본 것만 하여도 <이산>, <해신>이 방송되었고, 요즈음은 <선덕여왕>을 방송한다. 터키어로 더빙(dubbing)하였으므로 대사는 알아듣지 못해도 화면을 보면서 한류의 바람이 이곳까지 온 것을 실감한다. 이러한 뿌듯함이나 만족감을 느낄 수 있게 된 것은 한국이 국력이 신장되고, 경제적으로 크게 발전하였기 때문이다. 한국이 선진국의 대열에 합류할 수 있게 된 것은 한국인들이 진취적인 기상과 도전 정신을 가지고, 부지런하고 성실하게 일하였기 때문일 것이다. 전쟁으로 폐허가 되었던 나라를 이만큼 발전시킨 한국인이 자랑스럽다.

  터키는 국토가 대한민국의 8배쯤 되고, 인구는 약 7,500만 명이다. 땅이 넓은 만큼 지하자원도 풍부하다고 한다. 곡식․채소․과일을 가꾸고, 소와 양 등을 많이 길러 온 국민이 먹을거리 걱정을 하지 않는다고 한다. 여행을 하면서 곡식과 채소밭, 과수원이 끝없이 펼쳐지고, 산 전체를 뒤덮은 올리브나무숲이 이어지는 것을 보면 놀라움과 부러움이 교차한다. 터키는 전 국토가 ‘살아 있는 역사박물관’이라고 할 정도로 유적이 많고, 자연 경관이 뛰어난 곳이 많아 세계 여러 나라에서 1년에 1,000만 명 이상이 찾는 관광대국이어서 관광 수입이 엄청나다고 한다. 이런 것을 보니 이 나라의 넓은 땅과 자원, 역사 유적, 자연환경이 부럽기 만하다.

  터키의 거리에는 가는 곳마다 터키공화국 초대대통령이었던 ‘무스타파 케말 아타튀르크’의 동상이 서 있다. 관공서의 사무실이나 학교 강의실은 말할 것도 없고, 가정집에도 아타튀르크 전 대통령의 사진이 걸려 있다. 이것은 터키 사람들이 제1차 세계대전에서 패한 터키의 여러 가지 어려움을 극복하고, 개혁을 단행하여 터키 공화국의 기틀을 마련한 그의 공을 기리고 깊이 존경하기 때문일 것이다. 아타튀르크는 세상을 떠난 지 70여 년이 지난 오늘까지 국부(國父)로 추앙받으며, 터키 사람들의 마음을 잡아주는 구심점 역할을 하고 있다. 정신적 지주로 모시는 대통령이 없는 한국인으로서는 정말 부러운 일이다. 

  터키는 출산율이 높은 편이고, 젊은이들이 많아 국민의 평균 연령이 아주 젊은 나라라고 한다. 출산율이 낮아 인구도 늘지 않고, 노령화가 빠르게 진행되고 있는 한국의 현실과는 아주 대조적이다. 
   
  이곳에서는 인터넷으로 밖에는 한국의 소식을 접할 길이 없다. 인터넷 신문을 열면, 진보와 보수가 서로 다른 주장을 하는 바람에 국론이 분열되어 국력을 한 곳으로 모으지 못하고 있다. 국회는 국가의 장래나 국민들의 삶은 뒤로 하고 당리당략(黨利黨略)을 앞세우면서 입법 활동을 제대로 하지 않아 역대 최악의 성적표를 내놓았다고 한다. 충청권을 비롯하여 온 나라가 세종시 문제로 들끓고 있고, 4대강 문제도 논란이 끊이지 않고 있다. 국토, 자연환경, 자원 등 여러 면에서 부족한 것이 많은 한국이 살 길은 온 국민이 국력을 기르는 일에 뜻을 모아야 한다는 것을 잊고 있는 것만 같아 안타깝다. 그동안 어렵게 이룩한 경제발전의 기틀이 흔들리고, 국가적 신인도가 떨어지지 않을까 매우 걱정된다.
       
  먼 나라에서 연말을 맞으니, 한국에 있는 가족과 친척, 친구, 친지들이 그리워진다. 한국에서 생활하던 때의 편리함과 편안함도 생각난다. 새해에는 온 국민이 뜻을 모아 여러 선진국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기 위해 애쓰는 모습을 소개하는 기사가 넘쳐났으면 좋겠다. 그러면 머나먼 나라에 와 있는 외로움도 잊고 신바람이 나서 맡은 일을 더 잘 할 수 있을 것 같다.
                            <청원군민신문 제157호, 2009. 12. 25일자 제5면>


   지난 7월 하순에 아내와 함께 고향인 홍성에 갔다. 정년퇴직을 한 뒤에도 강의와 출판사와 약속한 원고 집필 때문에 바빠서 벼르기만 하고 가지 못하다가 겨우 시간을 내어 갔다. 먼저 부모님 산소에 성묘를 하고, 누님 댁과 외종형 댁을 방문한 뒤에 친구의 집을 찾아갔다. 

  친구와 반가운 인사를 나눈 뒤에 여러 이야기를 나누며 잘 가꿔 놓은 정원의 나무와 꽃들을 둘러보았다. 마당가와 마당과 이어진 야트막한 언덕에는 여러 가지 과일나무와 정원수, 꽃들이 자라고 있는데, 주인 내외의 성품처럼 정갈하면서도 품위가 있어 보였다. 많은 나무와 꽃 중에서 나의 눈길을 끄는 것은 마당가에 활짝 피어 있는 능소화(凌霄花)였다. 능소화는 마당가에 세워놓은 사람 키 정도의 통나무를 이리저리 감으며 타고 올라간 줄기의 마디마디에서 뻗어 나온 꽃대에 다닥다닥 붙어 피어 있었다. 나팔꽃과 비슷한 깔때기 모양의 주황색 통꽃이 100여 송이 피어 있는데, 아주 화려하면서도 기품이 있고, 생기가 있어 보였다. 꽃이 하도 예뻐 만져보려고 손을 대니, ‘내 몸에는 어느 누구도 손을 댈 수 없다.’는 듯이 톡 떨어져 버렸다. 그 밑을 보니, 시들지 않고 싱싱한 꽃들이 수없이 땅에 떨어져 있었다.

   나는 능소화를 어렸을 때부터 보아왔으나, 별로 관심을 갖지 않고 지내왔다. 그러다가 20여 년 전에 고등학교 선배님 댁 바깥 정원에 흐드러지게 피어 있는 능소화의 예쁜 모습에 마음이 끌려 관심을 갖기 시작하였다. 그래서 사진을 찍어 보관하기도 하고, 꽃말과 전설을 수집하기도 하였다. 그러는 동안에 능소화가 아주 좋아졌다. 내가 친구에게 능소화를 언제 심었는가 물으니, 10여 년 전에 아는 사람의 집에 피어 있는 능소화가 예뻐서 뿌리를 조금 얻어다가 심은 것이 이렇게 자랐다고 하였다. 나는 친구와 함께 능소화의 특성, 꽃말과 전설 등을 이야기하였다. 

   능소화는 쌍떡잎 통꽃식물목 능소화과에 속하는 낙엽성 덩굴나무인데, 높이는 10m정도이며, 잎은 깃모양 겹잎이다. 여름에 깔때기 모양의 주황색 꽃이 피고, 열매는 네모진 삭과(蒴果, 익으면 과피(果皮)가 말라 쪼개지면서 씨를 퍼뜨리는, 여러 개의 씨방으로 된 열매)로 가을에 익는다. ‘금등화(金藤花)’, ‘자위(紫葳)’, ‘능소화나무’라고도 한다. 중국이 원산지로 우리나라 중부 이남에 분포하는데, 옆에서 보면  트럼펫을 닮아서 외국에서는 ‘Chinese trumpet creeper’라고 부르기도 한다.

   능소화는 바람이 불면 마치 여인의 치맛자락처럼 너울너울 흔들거린다. 옛사람들도 이 꽃을 예사로 보지 않고 무척 사랑했던 것 같다. 지금으로부터 약 3000여 년 전에 널리 전해 오는 시를 모은, 동양 최초의 시집인 <시경(詩經)> 속에도 능소화 그림이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오래 전부터 정원수로 길렀는데, 양반집 마당에만 심었고, 상민의 집에서는 심지 않았다. 이 꽃을 상민의 집에서 심으면 양반들한테 불려가 벌을 받았다. 그래서 ‘양반꽃’이라고도 한다. 

   능소화는 분위기가 동양적이라 사찰꽃(절꽃)이라고도 한다. 꽃가루에 독이 있어 유독식물로 알려져 있으며, 꽃속에 생기는 꿀이 눈에 들어가면 실명(失明)한다는 말이 전해 오기도 하나, 확실하지 않다. 내한성(耐寒性)이 약하여 중부 이북보다는 중남부 지방의 건조하지 않은 양지바른 곳에 잘 자라며, 해안 지방에 주로 서식한다. 공해에도 강하고, 뱀의 근접을 막아준다고 하여 별장 및 개인주택 조경에 많이 심는다. 

   꽃에는 꽃의 특징에 따라 상징적인 의미를 부여한 ‘꽃말’이 전해 온다. 장미는 사랑․아름다움, 백합은 순결, 월계수는 영광, 클로버는 행운을 나타낸다. 능소화의 꽃말은 ‘명예’이다. 이것은 능소화에서 느껴지는 화려함과 기개, 싱싱한 채 떨어져 시들은 모습을 보이지 않는 자존심 등을 감안하여 붙인 꽃말이라 하겠다. 화려함과 기개를 느끼게 하는 능소화에는 슬픈 전설들이 전해 온다. 하나는 임금을 기다리다 죽은 궁녀의 넋이 능소화가 되었다는 이야기이다. 

   옛날에 ‘소화’라는 궁녀가 임금의 눈에 띄어 성은(聖恩)을 입고, 빈(嬪)에 봉해졌다. 그녀는 궁궐 안에 마련된 처소에서 지내면서 임금님이 다시 찾아주기를 간절히 기다렸다. 그녀는 매일 담장 밑을 서성이기도 하고, 담장너머를 바라보며 임금을 기다렸다. 그러나 임금은 그녀의 처소를 한 번도 찾지 않았다. 그녀는 기다림에 지쳐서 병이 들어 죽었다. 시녀들은 ‘나는 담장 밑에 묻혀 임금이 오기를 기다리겠다.’는 그녀의 뜻을 따라 시신을 궁궐 담 밑에 묻어 주었다. 이듬해 여름에 그녀의 무덤에서 풀이 자라 꽃이 피었는데, 담장을 휘어 감고 밖을 내다보는 듯하였다. 그래서 이 꽃 이름을 ‘능소화’라고 하였다 한다.

  위 이야기에서 능소화는 임금님의 방문을 간절히 기다리다 죽은 궁녀 소화의 넋이 변하여 핀 꽃인데, 담장에 피어 임금이 오는가를 살피고 있다고 한다. 이렇게 보면, 이 꽃에는 오직 한 분이신 임을 기다리는 여인의 간절한 소원과 기대가 담겨 있다.

  또 다른 이야기에서는 기생 능소화가 죽어 이 꽃이 되었다고 한다.  옛날 어느 고을에 덕망 있는 벼슬아치가 일찍 아내를 여의고 딸과 함께 살았다. 그는 상대편 당파의 세력에 밀려 급히 몸을 피해야 할 지경에 이르렀다. 그는 딸과 사윗감으로 점찍어 두었던 젊은 선비를 데리고 급히 몸을 피하다가 갈림길에 이르렀다. 그는 젊은이와 딸의 손을 모아잡고, 부부의 인연을 맺을 것을 서약하게 한 뒤에 젊은이를 다른 길로 가게 하였다. 그는 딸과 함께 이리저리 떠돌던 중에 병이 들어 위독하게 되었다. 딸은 기적(妓籍)에 이름을 올리고 돈을 받아다가 약을 썼으나, 아버지는 소생하지 못하고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그 후 그녀는 기녀(妓女)가 되었는데, 인물이 예쁘고, 글을 잘하며 가야금에 능했기 때문에 많은 사람의 눈길을 끌었다. 그녀는 많은 남성들이 유혹하였지만, 정절을 지켰다. 한 선비가 그녀의 청초한 모습을 보고, ‘차가운 기운이 서린 꽃’이란 뜻으로 ‘얼음 릉(凌)’ 자, ‘하늘 기운 소(霄)’ 자를 써서 ‘능소화’라고 이름 지어 불렀다.
   몇 년 후 능소화의 아버지가 속했던 당파가 다시 정권을 잡게 되었다. 젊은 선비는 과거에 급제하고, 능소화가 기생 노릇을 하고 있는 고을 원으로 오게 되었다. 능소화의 소문을 들은 원님이 그녀를 찾아가는데, 귀에 익은 가야금 소리가 들렸다. 원님이 능소화를 만나보니, 자기와 정혼한 여인이었다. 능소화가 겪은 일을 들은 원님은 지난 일을 다 잊고, 부부의 연을 이어가자고 하였다. 그녀는 서방님의 뜻이 그러하다면 기꺼이 따르겠다면서, 며칠간의 말미를 달라고 하였다.
   원님은 만나기로 약속한 날에 날에 능소화를 찾아갔다. 그녀는 준비해 두었던 비상(砒霜)을 먹고 죽어가면서, “자신을 정갈하게 지키지 못한 제가 어찌 서방님과 혼인할 수 있겠습니까? 그간의 허물을  탓하지 않으시는 마음만으로도 저는 여한이 없습니다.” 하고 말했다.  
   그 후 그 여인의 무덤에서 덩굴진 줄기가 솟아났고, 퍼져가는 줄기 끝마다 주황빛 꽃들이 피어났다. 품위와 기개가 느껴지고, 활짝 피었는가 싶으면 이내 지고 마는 그 꽃을 사람들은 ‘능소화’라고 불렀다.

   당파 싸움이 한창이던 때를 배경으로 꾸며진 이 이야기에는 한 여인의 지고(至高)한 사랑과 기품이 나타난다. 

   우리나라에는 살았을 때에 간절히 바라고 원하던 일을 이루지 못하고 죽은 사람의 영혼이 그 소원과 관련이 있는 식물이나 동물로 변하였다는 전설이 많이 전해 온다. 그 중 꽃과 관련된 이야기를 ‘꽃유래담’ 또는 ‘꽃전설’이라고 하는데, 이것은 한국인의 환생(還生)에 관한 의식을 바탕으로 꾸며진 것이다.
 
   능소화는 개화 기간이 80일 정도 이어지는데, 색상이 화려하고 기품이 있으며, 젊고 생기가 있다. 많은 꽃들이 다투어 피는 따뜻한 봄을 다 보내고, 뜨거운 태양이 작열(灼熱)할 때에야 자태를 뽐내는데, 아름다움과 도도함이 있다. 손을 대면 떨어지고 말아 마음에 맞지 않는 누구의 손길도 허락하지 않는 절개가 있다. 시들지 않고 떨어져 지는 순간까지도 활짝 피었을 때의 싱싱함을 유지하다가 그 모습 그대로 땅에 떨어져 추한 모습은 보이지 않는 자존심이 있다. 통나무나 담장을 타고 올라가 밖을 살피는 조심성이 있다. 능소화의 이러한 특성이 어디서 유래되었는가는 위의 전설이 잘 설명해 주고 있다.

   화려한 자태를 뽐내는 능소화를 보고 있노라면, 옛날 선비와 같이 함부로 범접하기 어려운 품위와 한번 뜻을 세우면 어떠한 시련이 와도 굽히지 않는 기개가 느껴진다. 많은 남성의 유혹이 있어도 임을 향한 일편단심으로 정절을 지키는 명기(名妓)의 결연함을 생각하게 한다. 능소화 전설은 이런 느낌을 더욱 강하게 해 준다.

    얼마 전에 아는 분이 암으로 세상을 떠났는데, 그 분은 돌아가시기 몇 달 전부터 아는 분들의 면회를 일체 사양하였다고 한다. 아는 분들에게 쇠잔(衰殘)한 모습을 보이지 않아 건강할 때 만났던 모습을 기억해 주기를 바라는 마음에서였을 것이다. 내가 능소화를 보면서 그 분을 떠올린 것은 그 분이 떠날 때의 마음이 시들기 전에 지는 능소화의 본성과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내가 친구에게 그 분의 이야기를 하면서 능소화처럼 품위와 기개를 지니고 살다가 홀연히 떠났으면 좋겠다고 하니, 그 친구 역시 동감이라고 하였다. 나이가 더 들더라도 지금처럼 건강하게 살면서 남에게 추한 모습 보이지 않고 훌쩍 떠났으면 좋겠다. 아름답고 화려한 꽃을 보면서 이런 생각을 하는 것을 보니, 나도 이제 나이가 많이 들었나 보다.

* 이 글은 <충청문학> 19, 서울 : 충청문인협회, 2008에 실려 있음.


   이번 2월에 정년(定年)을 맞아 44년 간 근무하던 교단을 떠나게 되었다. 초․중등학교 교사로 14년, 대학 교수로 30년을 근무한 교단을 떠나게 되니 여러 가지 감회가 떠오른다. 그동안 많은 학생들과 함께 공부하면서 기쁨과 보람을 나누었는데, 이제 떠나야 한다니 참으로 섭섭하고, 허전한 마음이 든다. 44년 근무하는 동안 나와 학연을 맺은 사람이 아주 많은데, 이들 중 나를 참 스승으로 생각한다는 많이 있다. 이것을 보며 나는 참으로 제자 복이 많은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어 흐뭇하고, 자랑스럽다. 

   제자들 중 몇몇이 나의 정년을 아쉬워하면서도, 축하하고 기념하려는 뜻에서 정년 기념 문집 간행위원회를 구성하였다. 그리고 제자, 동료, 친구, 선배, 스승, 친족 등에게 나와의 관계나 교유(交遊)한 내용을 중심으로 글을 써 달라는 부탁을 하였다. 그에 따라 93명이 글을 써 주었는데, 이를 <푸른 향기 길게 드리우니>라는 책으로 묶었다. 이 책에 실린 글은 최근에 있었던 일을 소재로 한 것도 있고, 아주 오래 전의 일을 소재로 한 것도 있다. 나와 생활하면서 기쁘고 즐거웠던 일을 적기도 하고, 섭섭하고 아쉬웠던 일을 적기도 하였다. 그 중에는 내가 기억하고 있는 내용도 있지만, 까맣게 잊어버린 내용도 들어 있다. 이 글들을 읽으면서 나는 90여 명의 마음속에 비친 나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여러 사람의 마음에 비친 내 모습은 각양각색(各樣各色)이었다. 원만한 보습이 보이는가 하면 모난 모습도 보였다. 다른 사람에게 기쁘고 보람을 느끼게 한 모습이 있는가 하면, 마음을 아프게 한 나쁜 모습도 보였다. 그 중에는 다른 사람을 섭섭하게 하거나 마음 아프게 하여서 미안하다고 사과해야 할 일도 있었다. 이 자리를 빌려 사과하면서 용서를 빈다.

   아내는 ‘돈을 꿔서 승용차를 산 이야기’를 썼다. 혼인한 뒤에 야간대학과 대학원 학생 노릇을 7년이나 하고, 시간 강사 노릇을 하다가 전임 교수가 된 이듬해에 돈을 꿔 오라고 하여 승용차를 사겠다는 가장(家長)의 처신을 보면서 아내는 정말 난감하였을 것이다. 철없는 사람, 셈속 모르는 책상물림이라고 서운해 하면서 한탄하였을 것이다. 나는 누구에게 단돈 1만원도 꾸지 못하는 사람이다. 그러니 아내가 돈을 꿀 데가 없다고 거절하였으면 나는 승용차를 살 수 없었을 터인데, 긴 토를 달지 않고 내 말을 따라준 아내가 고맙다. 이렇게 하여 구입한 승용차는 설화와 민속 자료 수집에 큰 도움이 되었다. 아내는 집안일과 아이들 교육 등에 관심을 기울이지 못하고 연구에만 몰두하는 나를 보면서 ‘한 지붕 밑에서 숨 쉬고 있는 것으로 안도하였다.’고 하였다. 이 말은 참으로 미움과 한숨을 거친 뒤에 정리한 사려(思慮) 깊은 말이다. 부족함이 많은 남편의 모습을 보여 부끄러울 뿐이다. 

  아들과 딸의 글을 보니 내가 강조하며 실천하던 음식 골고루 먹기, 아침 체조, 일기 검사, 규칙 지키기 등이 무척 힘들고 싫었다고 한다. 그래서 무서운 아빠, 인정머리 없는 아빠라면서 원망도 많이 하였다고 한다. 그런데 장성한 뒤에 생각해 보니, 아빠가 강조하던 것들이 건강 증진, 편식 안 하기, 바르고 예쁜 글씨 쓰기, 기초적인 문장력 훈련에 크게 도움이 되었음을 알았다고 한다. 귀찮고, 힘들고, 원망스러웠던 일들을 긍정적으로 평가해 주는 삼남매가 고맙고 자랑스럽다.

  여동생은 <오빠의 눈>이란 제목으로 내가 엄격하고 무섭게 대하던 일, 까다로운 규칙을 정해 놓고 지키라고 하던 일을 적었다. 오빠가 무섭고, 섭섭하고, 힘들었다고 하면서도 아버지 노릇을 겸한 오빠의 역할을 하느라고 그런 것이라고 이해하면서 존경한다고 하니, 고맙기 그지없다.

   처남과 처제는 내가 자기들에게 본을 보이는 사람이었다고 한다. 이는 아내가 처가에 가서 내 험담이나 불평․불만을 말하지 아니하였기 때문이라 생각한다. 나의 좋은 면만을 기억해 주는 처남․처제와 나의 나쁜 점을 친정에 가서 말하지 않은 아내가 고마울 뿐이다.

   제자들의 글에 나타난 내 모습은 다양하다. 나한테 논문 지도를 받은 사람은 논문 지도의 철저함과 엄격함을 매우 고맙게 생각한다고 하였다. 나는 논문 초고에 붉은 색 펜으로 잘못된 부분을 지적하고, 수정하도록 지시하는 글을 써서 주고, 만나서 일일이 설명하면서 수정하게 하곤 하였다. 제자들 사이에서는 이를 빗대어 ‘피바다를 건너야 논문이 통과된다.’는 말이 퍼졌고, 이 말은 여러해 동안 선후배간에 대물림을 하였다고 한다. 피바다를 거친 사람들은 내가 지도하느라고 써준 초고를 ‘가보(家寶)’로 삼겠다고 하면서, 자기들도 제자들의 작문이나 논문을 지도할 때 귀감(龜鑑)으로 삼겠다고 한다. 논문 지도 과정에서 깊은 생각 없이 던진 내 말 한 마디가 비수가 되어 가슴에 꽂혀 깊은 상처를 남기기도 하였을 것이다. 그런데도 긍정적인 면만을 말하며 좋게 말해 주니 정말 고맙다. 논문 지도 과정에서 섭섭한 말을 들었던 사람은 속히 잊고 상처가 아물기를 바란다.

  나는 강의 시간이나 학생들과 대화하는 중에 어휘 사용과 발음 등 언어 습관에 관해 많은 말을 하였다. 나는 내 전공이 아니면서도 현장 상황에서 직접 지도하지 않으면 효과가 없다는 생각에서 바로 지적하곤 하였다. 지적 받은 사람은 무안해 하였고, 마음에 상처를 받기도 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고마워하면서 고치려는 노력을 계속하고 있다고 하니, 정말 고맙다.

  나는 제자들의 학교생활이나 일상생활에 관한 것을 많이 지적하였다, 그런데 지적을 받은 제자들이 고맙게 여기고 습관화하려고 애를 쓰고 있다고 한다. 나는 강의할 때 요지를 잘 정리하여서 쉽고 간단명료하게 설명하고, 논지(論旨)를 전개하면서 내용 이해에 필요한 예화(例話)를 많이 인용하곤 하였다. 이를 제자들은 잊지 않고 있으며, 본을 받아 교단에서 학생을 지도할 때 활용하고 있다고 한다. 제자들 중 현직 교사가 많은 관계로 나를 이해하고, 좋게 평가해 주는 것 같아 고맙기 그지없다.

  나는 교회 장로인데, 신앙생활 면에서 부족함이 많다. 목사님이나 다른 교우들이 기대하는 바를 제대로 이행하지 못하여 죄송스럽기 짝이 없다. 그런데 목사님이나 동료 장로는 정년퇴임 후에 잘 하라는 말로 감싸면서 격려해 주니 고맙기 그지없다.

  나는 여러 사람들의 마음의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을 보았다. 칭찬․격려․축하․감사의 말 속에 담긴 부족한 나의 모습을 보았고, 이해와 용서의 마음을 읽었다. 뒤늦게나마 여러 사람의 마음의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을 보게 된 것을 감사한다. 사랑하는 마음으로 지적해 준 나의 부족한 모습, 모난 모습, 불성실한 모습 들을 고치기 위해 노력해야겠다. 몇 년 후, 오늘 이후에 만난 사람들이 나에 관한 글을 쓴다면, 나에 대한 이해, 용서의 힘든 과정을 거치지 않고 칭찬과 격려․축하․축복의 말을 적을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하겠다. 이런 모습이 하나님께서 바라시는 모습일 것이다. 

  * 이 글은 <청하문학> 제7호, 서울 : 문예운동사, 2008에 실렸음.



   ‘빗물을 받아먹고 사는 나라’ 이야기는 먼 옛날의 이야기이거나 문명이 발달하지 못한 미개한 나라 사람들의 이야기처럼 생각할 수도 있다. 옛날의 일이라면 그 때는 다 그랬을 것이고, 미개한 나라 이야기라면 그거야 어쩔 수 없는 일일 터이니 색다른 이야기일 것도 없다. 그러나 옛날의 이야기도, 미개한 나라 사람들의 이야기도 아니고, 문명이 발달한 나라의 현재의 이야기라면 흥미와 관심이 쏠리지 않을 수 없다.
 
   지난 해 여름에 뉴질랜드에 갔을 때의 일이다. 우리 일행을 안내한 B씨는 13년 전에 이곳으로 이민을 왔는데, ‘빗물을 받아먹고 사는 나라’가 있다는 말을 듣고, 이민을 결심하였다고 한다. 한국에서 이름 있는 회사의 직원으로 근무하던 그는 ‘빗물을 받아먹고 사는 나라’는 지상의 낙원과 다름없을 것이니 그곳에 가서 살겠다는 생각에서 이곳으로 왔다고 하였다. 그의 이민 결심의 동기가 다른 사람들과 달리 매우 단순하고 낭만적이어서 매우 흥미로웠다.

   그는 뉴질랜드에 와서 맨 먼저 우산 장사를 시작하였다고 한다. 1년 중 우기(雨期)가 6개월이나 되니, 한국에서 품질 좋은 우산을 들여와 팔면 많은 이익이 남을 것이라는 생각에서였다. 그러나 우산은 전혀 팔리지 않았다. 그곳 사람들은 비가 와도 우산을 쓰지 않고 그대로 비를 맞고 다닌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고 ‘아차!’ 하고 후회하였지만, 이미 때는 늦었다. 그의 딱한 사정을 안 한국인교회 교인들이 그를 돕는 뜻에서 우산을 팔아 주어서 자금의 일부를 회수하였지만 큰 손해를 보았다. 그 후 그는 그곳의 기후와 풍토, 문화에 관심을 가지고 이것저것 살폈다고 한다.

   나는 그 곳 사람들이 정말로 빗물을 받아먹고 사는가 궁금하여서 그런 집을 보여 달라고 하였다. 차가 도심을 벗어나 교외로 가니, 넓은 초원에서 소․말․양 들이 떼를 지어 풀을 뜯고 있고, 사람이 사는 집들이 뜨문뜨문 보였다. 초원 가운데로 나 있는 도로 옆에 있는 휴게소에 들르니, 바로 옆에 빗물을 받아먹는 집이 있었다. 그 집은 골이 진 슬레이트(slate) 모양의 자재로 지붕을 덮었는데, 추녀 끝에는 지붕에 내린 빗물을 받는 물받이가 있고, 그 물을 한 곳으로 모으는 홈통이 땅위에 있는 통에 연결되어 있었다. 물을 받는 통은 지름이 4~5m쯤 되어 보이는 둥근 모양의 큰 통인데, 뚜껑이 덮여 있다. 통의 위쪽에는 통에 넘치는 물을 밖으로 흘려보내는 관이 연결되어 있었다. 통의 아래쪽에는 물이 집안으로 들어가는 수도관이 연결되어 있었다. 그 집에서는 그 통에 저장된 물을 식수로 사용함은 물론 허드렛물로도 쓴다. 통에 저장한 물을 다 쓸 무렵이면 또 비가 내리므로 물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된다. 뉴질랜드에는 이런 집이 아주 많다고 하였다. 

   뉴질랜드는 공장은 건설하지 않고, 공산품은 외국에서 사다가 쓰면서 자연 환경을 유지 보호하고 있다. 그러니 매연(煤煙) 걱정은 할 필요가 없고, 많은 숲들이 공기를 정화(淨化)해 주니 공기가 맑은 것은 당연하다. 우리나라처럼 산성비[酸性雨]가 내리지도 않고, 태평양 한 가운데에 있으니 황사(黃紗)가 섞인 비를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하늘에서 내리는 빗물은 맑고 깨끗하므로, 빗물을 받아서 먹어도 아무 탈이 없고, 비를 피하기 위해 따로 우산을 쓸 필요도 없다. 자동차의 경우도 비를 맞은 뒤에 마르면 비 맞은 자국이 없고, 세차한 것처럼 깨끗하다. 그러니 따로 세차장에 가서 세차할 필요가 없으므로, 그 곳에는 세차장이 따로 없다. 

   뉴질랜드는 무공해 청정국가(淸淨國家)를 지향하고 있으므로, 자연을 훼손하는 일은 어떤 일도 하지 않는다고 한다. 산을 보호하기 위해 산을 가로지르는 길을 내지 않으며, 터널을 뚫지 않는다. 교각(橋脚)을 많이 세우면 물의 흐름을 방해하고, 물의 흐름을 방해하면 자연이 변화하기 때문에 되도록이면 강위에 다리를 놓지 않는다. 꼭 필요한 경우에는 교각의 수를 줄이기 위해 긴 다리 대신 강폭이 좁은 곳에 짧은 다리를 놓는다고 한다. 

  B씨의 말을 들으며 맑고 깨끗한 환경에서 살고 싶어 이민을 결심한 그의 마음을 이해하였고, 이를 실천에 옮긴 그의 의지와 용기가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상황을 보니, 우리나라의 실상이 떠올랐다. 초등학교와 중학교에 다니던 1950년대에 나는 여름이면 동네 친구들과 냇가에 나가 놀곤 하였다. 친구들과 함께 미역을 감고, 물장난을 하였으며, 냇바닥의 모래로 이를 닦았다. 목이 마르면 냇물을 그대로 마셨다. 이를 본 어른들 누구도 물이 더러우니 먹지 말라는 말을 하지 않았다. 가을이면 논바닥에 파놓은 물길을 따라 미꾸라지와 송사리가 몰려다녔고, 이삭이 나온 벼 위에는 ‘메뚜기도 한 철’이란 말처럼 메뚜기들이 제 세상을 만난 듯이 날아다녔다. 우리는 그 곳에 있는 미꾸라지와 메뚜기를 잡아 가지고 가서 끓여 먹거나 구워서 먹곤 하였다. 비가 오면 변변한 우산이 없어서 그러기도 하였지만, 비를 맞아도 해롭다는 생각이 없어서 그대로 맞는 것이 예사였다.

   산업이 발달함에 따라 공장이나 자동차에서 뿜는 매연과 분진(粉塵)이 공중에 항시 떠 있게 되었다. 농약이나 방부제를 비롯한 여러 가지 약품이나 중금속의 사용이 늘고, 축산의 오폐수(汚廢水)와 생활 쓰레기가 늘었다. 이웃나라 중국에서는 가끔씩 황사가 불어온다. 이런 일이 겹치니 공기도, 토양도, 지하수도 나빠졌다. 그래서 맑은 공기를 마시기 어렵게 되었고, 아무 물이나 마실 수도 없게 되었다. 이제 공해(公害) 문제는 우리 사회의 골칫거리가 되었다. 

   1980년대만 하여도 높은 산을 오를 때에 가지고 간 물을 다 마신 뒤에는 계곡에 흐르는 물을 그대로 받아 마셨다. 서울 근교의 도봉산, 수락산, 아차산 등을 오를 때에는 계곡 곳곳에 있는 옹달샘의 물을 마음 놓고 떠서 마셨다. 그러나 지금은 큰 산의 계곡 물도 마실 수 없고, 서울 근교에 있는 산의 옹달샘물도 오염이 되어서 ‘음용 불가(飮用不可)’라고 써 붙인 곳이 늘어가고 있다. 오염된 대기, 살충제의 공중 살포(撒布), 침출수(沈出水)의 혼입(混入) 등의 이유가 있겠지만, 높은 산의 계곡 물까지 오염된 현상이 안타깝기 짝이 없다. 가정에서는 수돗물을 믿지 못하니 그대로 마실 수 없어 정수기를 설치해야 하고, 그렇지 않으면 생수를 사서 마셔야 한다. 돈을 아까운 줄 모르고 쓰는 것을 빗대어 ‘돈을 물 쓰듯 한다.’고 하였는데, 물 값이 휘발유 값 못지않게 비싼 시대가 되었으니, 이 말은 이미 옛말이 되었다. 

  공해 문제를 말하다 보니, 어느 교수의 말이 생각난다. 그 교수는 1970년대에 공해 문제를 다룬 논문을 쓴 적이 있는데, 지금의 공해 정도는 그 때의 기준치를 몇 배 초과하였다고 한다. 그러므로 그 때에 인체에 해롭다고 하던 그 기준대로라면, 지금쯤은 사람들이 다 공해에 찌들어 죽었거나 병이 들고, 기형아(畸形兒)가 많아야 하는데, 그런 심각한 문제는 발생하지 않았다. 이것은 사람들이 나쁜 환경에 적응하였기 때문이라고 한다. 

  공해의 정도가 심하여졌어도 지금까지는 인체의 적응력으로 위기를 모면하였다. 그러나 인체의 적응력에는 분명히 한계가 있을 것이다. 이 한계에 도달하기 전에 공해 문제를 깊이 연구하여 자연 파괴로 인한 피해를 입는 일이 없도록 하여야 한다. 사람은 만물의 영장으로 지혜가 뛰어난 존재이니, 자연의 섭리를 거스르면 불행이 온다는 평범한 진리를 바로 보고, 대비해야 한다. 환경 보호 단체의 주장에 귀를 기울이는 한편, 우리들 각자가 자연 보호와 오염 방지에 힘을 기울여야 한다.

  태안 앞바다의 기름 유출 사고가 우리의 자연을 멍들게 하였다. 그러나 피해를 줄이고 생태계가 속히 복원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추운 날씨에도 자원봉사를 한 국민의 노력과 여망이 헛되지 않기를 간절히 바란다. 서울의 경우를 보면, 생활오수(生活汚水)를 따로 흐르게 하고 정화하는 노력을 기울여 중랑천이나 탄천에 물고기가 살게 하였고, 청계천에 물고기와 새들이 서식하게 하였다. 서울의 공기도 조금 맑아졌고, 한강물의 탁도(濁度)도 조금 낮아졌다고 한다. 이것은 물이나 토양이 오염되지 않게 하고, 오염된 물은 정화하는 노력을 하면, 생태계가 복원될 수 있다는 것을 말해 주는 것이어서 참으로 반가운 소식이다. ‘빗물을 받아먹는 나라’ 이야기가 먼 태평양 가운데의 뉴질랜드 이야기가 아니라 대한민국의 이야기라는 소식이 매스컴을 타고 전해 왔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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