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에 교일산우회 회원들과 인왕산 숲길을 걸었다. 사직동 황학정(黃鶴亭, 활쏘기 연습장) 뒤에서 윤동주문학관까지 인왕산 아랫자락 숲속으로 난, 2.5km의 길이다. 나는 3주 전에 국제대학 제자들과 함께 처음으로 이 길을 걸었는데, 자연경관의 아름다움을 느끼면서 전설과 역사, 자연과 예술혼에 관해 생각할 수 있어 좋았다. 그래서 회원들에게 권하여 함께 걸었다.

  인왕산은 높이 338m인 그리 높지 않은 산으로, 풍수지리설에 의하면 우백호(右白虎)에 해당한다. 조선 개국 초기에 도성의 서쪽에 있다하여 서산(西山)이라고 하다가 세종 때부터 인왕산(仁王山)이라고 하였다. ‘인왕(仁王)은 불법을 수호하는 금강신(金剛神)의 이름이다. ‘어진 임금이란 뜻을 지닌 이 말이 조선왕조를 수호하려는 뜻과 일치함으로 이 이름으로 바꿨다고 한다. 일제강점기에 일제는 이 산의 한자 표기를 仁旺山으로 바꿨다. 그래서 한동안 그대로 쓰다가 1995년에 본래의 표기인 仁王山으로 바꿨다. 일제는 우리 민족의 민족정신과 자부심을 없애기 위해 경복궁 앞에 조선총독부 건물을 세우고, 창경궁(昌慶宮)을 창경원(昌慶苑)으로 바꿨으며, 창씨개명(創氏改名)을 강요하였다. 그것도 모자라 산 이름의 표기마저 바꿨다. 우리는 산 이름을 적어놓은 안내판을 보면서 일제의 간교함과 악랄함에 분노를 느꼈다.

  숲길을 걷다가 산 위쪽을 쳐다보니, 나무들 사이로 넓고 평평한 바위가 보였다. 조선 제11대 임금 중종과 부인 신() 씨의 애달픈 사랑 이야기가 서린 치마바위이다. 신 씨의 아버지 신수근(愼守勤)은 연산군의 처남이면서 진성대군의 장인이다. 반정(反正)을 계획한 박원종(朴元宗), 성희안(成希顏) 등은 이를 반대하는 신수근과 그의 동생들을 살해하였다. 반정에 성공하여 진성대군을 왕으로 옹립한 그들은 죄인 신수근의 딸이 왕비가 될 수 없다 하며, 신 씨의 왕비 책봉을 반대하였다. 힘이 없는 중종은 즉위한 지 일주일 만에 신 씨를 인왕산 아래 사직골에 있는 옛 거처로 보냈다. 중종은 조강지처(糟糠之妻)를 잊을 수 없어 경회루(慶會樓)에 올라 인왕산 기슭을 바라보곤 하였다. 이 말을 전해들은 신 씨는 경회루가 보이는 이 바위에 붉은 치마를 걸쳐놓음으로써 남편을 그리는 간절한 마음을 전하였다. 이 일로 인해 사람들은 이 바위를 치마바위라고 하였다 한다. 치마바위 전설은 권력의 횡포로 헤어진 중종과 신 씨의 애틋한 사랑과 아픔을 말해 준다.

  나무로 만든 계단을 오르고 내리기를 몇 차례 반복한 뒤에 수성동 계곡에 이르렀다. ‘물소리가 유명한 계곡이라 하여 수성동(水聲洞)으로 불리게 된 이곳은 조선 시대에 선비들이 여름철에 모여 쉬면서 즐기던 계곡이다. 종로구 옥인동과 누상동의 경계에 자리한 이 계곡은 조선 후기에 겸재(謙齋) 정선(鄭敾)이 그린 <장동팔경첩(壯洞八景帖)>에 수성동이 등장하면서 더욱 유명해졌다. 서울시에서는 2011년에 이곳에 있던 옥인아파트를 철거하고 복원하였다. 그래서 수성동은 옛 모습을 되찾아 맑고 아름다운 소리를 내며 물이 흐르는 계곡이 되었다. 청계천의 발원지인 이곳에는 서울특별시 보호동물인 도롱뇽을 비롯하여 가재, 개구리, 버들치 등이 서식하고 있다.

  겸재 정선은 인왕산 아래에서 태어나 평생을 그 부근에서 살면서 인왕산을 자주 오갔다. 그는 영조 27(1751)에 비온 뒤에 개는 날의 인왕산 모습을 동쪽에서 바라보며 <인왕제색도(仁王霽色圖)>를 그렸다. 그가 인왕산에서 받은 인상과 감흥을 실감나게 표현한 이 그림은 국보 216호로 지정되었다.

  한 곳에 이르니, 돌로 쌓은 축대에 나막신을 매달아놓았다. 이곳은 조선 후기의 대금명인(大笒名人) 정약대(鄭若大)가 대금 수업(修業)을 하던 곳이다. 어영청(御營廳) 세악수(細樂手)를 지냈고, 가곡 반주에 뛰어났던 그는 대금 수업을 위해 10년 동안 이곳에 와서 연습을 하였다. 그는 <도드리곡>을 한 번 연주할 때마다 나막신에 모래알 하나씩을 넣어 가득 찬 뒤에야 산에서 내려왔다. 그 뒤에 나막신의 모래에서 풀이 나와 자랐다고 한다. 명인이 되려면 타고난 재능도 있어야 하지만, 피나는 노력이 있어야 함을 일깨워주는 일화이다.

  인왕산에는 호랑이와 관련된 이야기가 많이 전해 온다. 이를 반영하듯 숲길에 인왕산의 상징 호랑이조형물이 서 있다. 그 옆의 나무판에는 강하고 부드러운 호랑이는 인()의 동물이라고 씌어 있다. 그 이유로, 호랑이는 재미 삼아 사냥을 하지 않고, 배가 부르면 먹잇감이 제 발로 와도 신경 쓰지 않으며, 수호랑이는 사냥을 하면 어린 새끼와 암컷부터 챙겨 먹이고, 자기는 맨 나중에 먹는다고 하였다. 이렇게 보면, 호랑이는 인()의 동물임이라고 할 수 있다. ()의 상징인 인왕산 호랑이가 멸종된 까닭은 무엇일까? 그것은 호랑이가죽을 탐낸 인간의 남획(濫獲)이 큰 원인일 것이다. 거기에다가 호랑이는 다른 수컷의 새끼들을 죽여 공생(共生)을 용납하지 않는 습성이 있다. 또 살던 터를 버리지 못하는 습성이 있어 살기 좋은 곳으로 옮겨가지 않았다. 그리고 공격해서는 안 될 사람을 공격함으로써 멸종을 자초하였다. 인왕산 호랑이의 멸종은 우리들에게 더불어 살 생각을 하지 않고, 남의 탓으로 돌려 공격하며, 옛것만을 고집하다가는 큰일 난다는 것을 일깨워 준다.

  인왕산 아래 마을은 세종 임금이 태어나 자란 곳이다조선 시대에 이곳은 경복궁 서쪽에 있다 하여 서촌(西村)이라 하였다. 이곳에는 역관(驛官), 의관(醫官)을 비롯한 전문 지식인들이 많이 살았다. 그 중 중인(中人)인 천수경(千壽慶, 17581818)은 시사(詩社, 시인들이 조직한 문학단체)를 열고, 송석원(松石園)을 지어 활발하게 활동하였다. 그래서 위항문학(委巷文學, 중인ㆍ서얼ㆍ서리ㆍ평민과 같은 여항인 출신 문인들이 이룬 문학)의 꽃을 피웠다. 화가 이중섭(李重燮)과 구본웅(具本雄), 시인 이상(李箱)은 예술혼이 서려 있는 이곳을 자주 찾으며 예술성을 함양하였다고 한다. 산 아랫마을에 하숙하였던 윤동주 시인 역시 이곳에서 시심(詩心)을 가다듬었을 것이다. 이 길은 숲과 계곡의 물이 어우러져 자아내는 아름다움을 보며 역사와 전설의 숨결을 느낄 수 있어 참 좋다. (2018. 6. 14.)

 

'자료실 > 산문' 카테고리의 다른 글

첫눈을 맞으며 오른 하늘공원  (0) 2018.12.01
이 또한 지나가리라  (0) 2018.07.31
기지시줄다리기박물관  (0) 2018.06.02
면천두견주  (0) 2018.05.07
전업주부 체험  (0) 2018.03.25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