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9월 27일부터 29일까지 북측 금강산 해금강 호텔에서 열린 전국 국·공립대학 교수협의회 제3차 임시총회에 참석하기 위해 북쪽에 가서 꿈에도 그리던 금강산을 둘러보았다.

   아침 일찍 집을 나서 관광버스를 타고 강원도 고성군 간성에 있는 금강산콘도로 가서 '현대금강산' 직원들에게 신분증을 보이고 금강산 관광증을 받은 뒤에 다시 버스를 타고 통일전망대 아래에 있는 출입국 검사소로 가서 소지품 검사를 받고, 신분증과 관광증을 제시하여 확인 받으면서 출국 신고를 하였다. 건물 밖으로 나오니, 현대금강산 버스가 기다리고 있었다. 출국 심사를 마치고 나온 사람은 국·공립대학 교수협의회 회원 80명을 비롯하여 600여 명이나 되었는데, 모두 19개 조로 나누어 버스에 타고 3시 50분에 출발하였다. 

   남쪽 통문(通門)을 지나 금강산 임시도로를 천천히 달려 북쪽으로 가면서 보니, 왼쪽에는 군인들이 금강산으로 통하는 고속화도로 공사를 하고 있었고, 그 옆에는 강원도 양양과 함경남도 안변을 잇는 동해북부선 철로 기반공사를 하고 있었다. 비포장 도로를 달려 조금 가니 군사분계선임을 나타내는 녹슨 팻말이 외롭게 서 있었다. 그 팻말을 지나 북으로 달리면서 '지금은 50년 동안 넘지 못하던 군사분계선을 넘어 북으로 가는 역사적 순간이구나!', '지척(咫尺)인 이 곳을 왕래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어려움이 있었는가!' 하는 생각에 가슴이 뭉클하였다. 우리는 북측 통문을 통과하여 북으로 달렸다. 비포장 도로이다 보니, 천천히 달리건만 앞차가 일으킨 흙먼지 때문에 앞이 안 보일 지경이었다.

   장전항 가까이 오니, 현대에서 건설하였다는 포장도로가 나왔고, 조금 더 가서 작은 고개를 넘으니 장전항이 보였다. 항구의 왼편에는 온갖 모양의 바위들이 멋스럽게 솟아 있는 산이 있는데, 불쑥 튀어나온 넓고 큰 바위에 붉은 글씨로 '천출명장 김정일 장군'이라고 쓰여 있었다. 글자의 크기가 가로 1m, 세로 1.5m나 되는 데다가 바위의 모양이나 위치가 시선을 끌기 좋은 곳이어서 항구로 가는 동안은 물론, 항구에 도착한 뒤에도 잘 보였다. 바위에 글씨를 새겨 놓은 것은 이곳 외에도 여러 곳에 있었는데, 하나같이 크고 잘 생긴 바위에 큰 글씨로 썼기 때문에 멀리서도 잘 보였다. 한국에서 그런 일을 하였다면 자연을 훼손하였다고 지탄받을 일인데, 이곳 사람들은 이것을 매우 자랑스럽게 여긴다고 한다.

   오후 5시에 장전항의 넓은 마당에 도착한 우리는 북측 출입국관리소 건물 안으로 들어가서 휴대품을 검사 받고, 관광증에 도장을 받았다. 활에 화살을 장전한 것과 같다고 하여 장전항이라고도 하고, 고성항이라고도 한다는 항구를 바라보니, 삼면으로 산들이 큰 원을 그리며 둘러싸고 있고, 한쪽만 바다로 열려 있는데, 거기에 방파제를 쌓았으므로 잔잔한 호수처럼 보였다. 천혜(天惠)의 항구라고 하는 말이 허언(虛言)이 아님을 알 수 있었다. 넓은 마당 끝에 '호텔 해금강'이라고 쓴 6층 건물이 있는데, 자세히 보니 밑바닥이 편평한 배 위에 지은 건물이었다. 배정된 방으로 들어가 보니, 방이 깨끗하고 아담하였다.

   숙소에 짐을 두고 나온 우리는 다시 버스에 올라 8km쯤 떨어진 곳에 있는 온정각으로 가서 저녁을 먹고, 다시 해금강 호텔로 돌아와 전국 국·공립대학 교수협의회 총회를 하였다. 오후 8시에 시작한 총회는 활동 상황 보고, 협의 안건 처리, 연구 주제 발표 등으로 10시 30분까지 진행되었는데, 짧은 시간이었지만 알차고 진지하게 진행하였다.     

   둘째 날(9월 28일)은 구룡연(九龍淵)을 가는 날이다. 아침 6시경에 잠이 깨었는데, 꿈에도 그리던 금강산에 올라 구룡폭포의 장관(壯觀)과 함께 <나무꾼과 선녀> 전설이 깃들어 있는 팔선담(八仙潭)을 볼 수 있다는 생각에 좀 흥분이 되었다. 아침 6시 50분경에 해금강호텔 1층 식당에서 한식 뷔페로 아침 식사를 한 후 버스를 타고 온정각으로 가서 잠시 휴식을 취한 뒤에 다시 버스를 타고 구룡연 산행길에 올랐다. 버스는 오른쪽에 있는, 한 마리의 매가 앉은 모습의 응암(鷹岩, 일명 매바위산)과 왼쪽의 너럭바위 위에 집채 같은 달걀 모양의 바위가 놓여 있는 난봉(蘭峰, 일명 달걀바위산) 사이로 난 길을 따라 달리기 시작하였다. 미인송 또는 홍송이라고 부르는 줄기가 약간 붉은 빛을 띤 미끈한 아름드리 소나무들이 즐비하게 선 '술기넘이 고개'를 넘으며 약 6km의 산길을 달린 뒤에 주차장에 닿았다.

   등산로를 따라 조금 걸어 올라가니 신계천(神溪川) 맑은 물위에 '기역 자(ㄱ)' 모양으로 놓은 목란다리가 있고, 그 다리를 건너자마자 북측에서 운영하는 식당 '목란관'이 있었다. 목란관을 지나 울창한 나무 사이로 난 길을 따라 올라가며 주위를 보니, 오른쪽에는 맑고 깨끗한 계곡 물이 즐겁고 기쁜 듯이 큰 소리를 내며 흐르다가 쪽빛 못[潭]을 이루고 있고, 집채 같은 바위들과 좌우로 늠름한 봉우리들이 어우러져 장관을 이루고 있었다. 산굽이를 돌아 오르니, 회상다리가 나왔다. 다시 200m 정도를 오르니 넓고 평평한 바위가 있는데, 거기서 위쪽을 보니 아름답고 황홀한 경치가 한눈에 들어왔다. 이곳을 예로부터 '앙지대(仰止臺)'라고 하였는데, 현재 북한에서는 '회상대(回想臺)'라고 부른다고 한다. 거기서 '거북선 바위'를 보고, 다시 한 구비를 돌아 오르니 '개구리 바위'가 보인다. 또 한 구비를 돌아 오르니, 산삼과 녹용이 녹아 내린다는 '삼록수(三鹿水)'가 흐르고 있었다.

  삼록수를 마시고 만경다리를 건너서 세존봉을 바라보니, 산 중턱에 맨머리로 앉아 있는 사람 모양의 바위가 있었다. 사람들은 이 바위를 '옥황상제 바위'라고 하는데, 여기에는 다음과 같은 전설이 전해 온다. 옛날에 하늘의 옥황상제가 금강산의 경치가 아름답다는 말을 듣고 금강산으로 내려와 이곳 저곳 경치를 보다가 세존봉 아래에 왔다. 상제는 구룡연에서 흘러내리는 시원한 물을 보고 더위를 식히기 위해 목욕을 하였다. 그 때 금강산 산신령이 와서 '사람들이 먹는 신령한 물에서 목욕을 하여 물을 더럽혔으니 천벌을 받아야 한다.'고 꾸짖으며 상제의 관을 가져갔다. 관을 빼앗긴 상제는 다시 하늘에 오르지 못하고 맨머리로 굳어져 바위가 되었다고 한다. 나는 '옥황상제 바위'를 다시 보며, 이런 이야기를 꾸며낸 선인들의 문학적 상상력이 뛰어났음과 금강산 절경에 대한 자부심과 긍지가 대단하였음을 새삼스럽게 느꼈다.         

   만경교를 건너 금강문을 빠져 나가니, 왼쪽에 긴 성처럼 생긴 '성벽 바위'가 있는데, 머리는 토끼 같고, 몸통은 거북 같은 '토끼 바위(일명 거북 바위)'가 성벽 바위로 기어오르는 모양을 하고 있었다. 달에서 약방아를 찧던 토끼가 금강산의 절경을 보러 왔다가 경치에 취해 돌아갈 시각을 지키지 못하여서 벌을 받아 바위로 변했다는 전설이 담겨 있는 바위이다. 

   한 굽이를 꺾어들어 금문교와 백석담을 지나자, 앞이 확 트이면서 '옥류동(玉流洞)'의 아름다운 경치가 한눈에 들어왔다. 옥류동은 예로부터 수정같이 맑은 물이 구슬이 되어 흘러내린다 하여 붙인 이름이다. 갓 피어난 연꽃이 하늘로 향한 듯한 천화대(天華臺)와 그 뒤에 둘러서 있는 옥녀봉의 모습이 아름답고, 계곡에는 숫돌처럼 닦이고 닦인 너럭바위가 반원을 그리며 휘어져 내리고, 그 위를 구슬 같은 물살이 흰 비단을 편듯 소리 없이 미끄러져 내리고 있었다. 그 아래에 넓고 길쭉한 옥류담(玉流潭)이 쪽빛 수정을 녹여 편듯 맑은 물을 담고 있었다. 옥류담의 물 깊이는 5∼6m이고, 넒이는 약 600㎡인데, 금강산의 소(沼)중 가장 큰 소(沼)라고 한다. 그 앞에 '돛대 바위'가 우뚝 서 있었는데, 지금은 홍수에 넘어져 누워  있었다.

   옥류동 물길을 따라 왼쪽 모롱이를 도니, 쌍둥이 소(沼)가 맑고 고운 물을 담고 있었다. 이곳이 '연주담'인데, 아래에 있는 소가 위에 있는 소보다 커 보였다. 연주담을 지나 가파른 길을 오르니, 휴식처가 나왔다. 거기 서서 건너편을 보니, 하늘에 닿은 듯한 산봉우리가 있는데, '세존봉'이라고 한다. 세존봉 중턱에서 아래로 뻗은 바위벽을 타고 흰 물줄기가 흐르고 있었다. 이곳이 구룡폭포, 십이폭포, 옥영폭포와 함께 금강산 4대 폭포로 꼽히는 '비봉폭포(飛鳳瀑布)'인데, 수직 높이가 139m이고, 폭포 길이가 166m라고 한다. 세존봉에서 샘솟아 기화요초(琪花瑤草)를 씻어내리며 벼랑을 따라 내려가기도 하고, 절벽이 안으로 오므라드는 데를 만나면 갈래갈래 갈라져 실을 드리운 듯하다가 '봉황담'으로 떨어지고 있었다.

  비봉폭포와 직각을 이루는 봉황담 위쪽에 '무봉폭포(舞鳳瀑布)'가 있다. 이 폭포는 길이는 약 20m밖에 되지 않으나, 수량이 풍부하고, '기역 자(ㄱ)' 모양으로 꺾이며 물보라를 뿌리는 모습이 봉황이 춤을 추는 듯하다고 하여 '무봉폭포'라고 하였다 한다.

  무봉폭포 휴식장에서 250m 정도를 굽이돌아 오르면, '무룡교(舞龍橋)'가 나온다. 무룡교를 건너니 서북쪽 옥녀봉 계곡에서 은실과 같이 곱게 흐르는 '은사류(銀絲流)'가 보였다. 조금 더 올라가니, 구슬을 엮어 발을 드리운 듯한, 길이 10m 정도의 '수렴폭포(水簾瀑布)'가 보였다. 거기서 구룡연 쪽을 향해 서서 보니, 마치 수십 권의 책을 쌓아놓은 것처럼 결이 가로로 평평하게 난 돌이 차곡차곡 포개져 있었다. 이 바위를 예로부터 '책바위'라고 불렀다 한다.

  주렴폭포에서 150m정도 오르니, 갑자기 계곡을 뒤흔드는 굉음(轟音)이 들리고, 그 소리를 뒤쫓아 큰 물줄기가 무서운 속도로 내리쏟는 모습이 보였다. 이곳이 구룡폭포이다. 폭포의 위와 아래, 좌와 우 모두가 한 장의 거대한 바위로 이루어졌는데, 쉼 없이 내리쏟는 물이 아래에 큰 확을 파 놓았으니, 그 곳이 '구룡연(九龍淵)'이다. 수직 깊이가 13m나 되는 구룡연에서 솟구친 폭포수는 다시 곡선을 이루며 내달려 아래의 못을 출렁인다. 구룡폭포는 비로봉에서 시작한 물이 굽이 잦은 '구담곡(九潭曲, 일명 아홉소골)'을 지나, '상팔담(上八潭)'을 흐르는 동안 수량이 더욱 늘어 웅대하고 아름다운 폭포가 되었는데, 만물상과 더불어 금강산의 절승(絶勝)으로 꼽힌다. 구룡폭포의 수직 높이는 74m이고, 구룡연까지의 폭포 길이는 84m, 아랫못까지의 폭포 길이는 120m라고 한다. '구룡연'·'구룡폭포'는 아홉 용이 아홉 가지 재주를 부린다 하여 붙인 이름이라고 하는데, 벼락치는 듯한 물소리와 소용돌이치는 시퍼런 물의 움직임을 용의 조화라고 생각하였음 직하다.

  폭포 옆 너럭바위에는 불심을 드러낸 '彌勒佛'이란 큰 글자가 새겨져 있고, 그 아래에는 "天丈白練 萬斛眞珠(천 길 흰 비단이 내려 드리운 듯하고, 만 섬 진주알이 쏟아지는 듯하다.)"라는 신라 문장가 최치원(857∼?)의 시 <구룡폭포>가 새겨져 있다. 구룡폭포의 절경(絶境)을 잘 드러낸 이 시구는 최치원의 시적 혜안(慧眼)을 느끼게 하였다.

   관폭정(觀瀑亭, 구룡각이라고도 함)에서 구룡폭포의 장관을 보며 땀을 식힌 나는 다시 조금 내려와 연담교(淵潭橋)를 건너 '구룡대(九龍臺)'로 향하였다. 급경사 쇠사다리[鐵梯] 14개, 370여 계단을 오르느라니, 숨이 차고, 땀이 비오듯 하였다. 약 700m를 걸어올라 해발 약 880m의 구룡대에 이르니, 150여 미터가 되는 낭떠러지 아래에 삼각추(三角錐) 같은 삿갓봉을 휘돌아 흐르는 물줄기가 보였다. 맑고 깨끗한 물은 넓고 큰 바위로 된 물길을 따라 휘돌아 흐르며 못[潭]을 만들어 놓고, 거기에 잠시 멈췄다가 다시 흐르고 있었다. 푸르다 못해 쪽빛으로 보이는 못은 여덟 개나 되는데, 지세(地勢)에 따라 몇 미터 또는 몇십 미터 간격으로, 여러 가지 모양을 하고 있었다. 금강산에는 팔담(八潭)이 두 곳이 있는데, 이곳의 팔담을 구룡폭포 위에 있다 하여 상팔담(上八潭)이라 하고, 내금강의 만폭동 구역에 있는 팔담을 내팔담(內八潭)이라고 한다. 

   구룡폭포 위에 솟은 산봉우리와 능선 아래의 깊은 골짜기를 흐르는 물줄기와 팔담은 급경사의 계곡 양편에 솟은 각양각색의 바위들과 조화를 이루어 장관(壯觀)을 이루고 있었다. 이곳을 바라보고 있느라니까, 골짜기 아래에서 들려오는 물소리가 마치 신비한 음악인 듯하다. 이곳은 신이 깊은 산속에 비밀스럽게 감추어 놓은 비경(秘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곳에 안개와 구름이 감돌아 온갖 조화를 부린다면, 더 더욱 신비감을 줄 터이니, 이곳을 배경으로 <나무꾼과 선녀> 전설이 꾸며져 전해 오는 것은 아주 자연스러운 일이라 하겠다.

  상팔담과 둘레의 아름다운 경관에 취해 시간가는 줄 모르고 앉아 있던 나는 그만 내려가라는 조장의 말을 듣고서야 하산길을 서둘렀다. 내려오다가 목란관에서 맛있게 먹은 평양 냉면의 국물은 산행 뒤에 오는 갈증을 풀어주었다.

  오후에는 삼일포를 둘러본 뒤에 평양 모란봉 교예단의 공연을 관람하였다. 셋째날인 9월 29일에는 오전에 만물상(萬物相)을 구경하고, 점심을 먹은 뒤에 출입국 수속을 하고 통일전망대로 돌아와 해산하였다.

  전국 국·공립대학교 교수협의회 총회 참석을 위한 2박 3일 간의 여행 중에 각 회원 대학교 교수협의회의 활동 상황을 알 수 있었고, 회원들의 총회에 임하는 진지한 태도와 각자의 학교에서 학교 발전을 위해 애쓰는 모습을 확인할 수 있었던 것은 매우 좋았다. 거기에 육로로 그리던 금강산에 올라 '신이 만든 예술품'이라고 할 수 있는 아름다운 경관을 직접 볼 수 있었던 것은 참으로 뜻 있는 일이라 하겠다. 신의 예술품이라고 극찬하는 금강산에 가보고 싶어하는 사람은 우리 둘레에 많이 있다. 내 아내 역시 금강산을 가보고 싶어하는데, 지금까지 갈 기회를 얻지 못하였다. 어서 속히 남북통일이 되어 우리가 설악산이나 지리산 또는 한라산을 찾아가는 것처럼 금강산도 마음대로 다닐 수 있었으면 좋겠다. 통일이 되기 전이라도 북에 달러로 지불하는 관광비가 너무 비싸다든가, 그 돈이 핵무기 개발이나 군비 확충에 쓰이는 것 같아 마음이 내키지 않는다는 등의 뒷말이 없도록 하고, 복잡한 절차를 간소화하여 가벼운 마음으로 금강산을 찾을 수 있도록 하였으면 좋겠다. 

    <수필문학 통권 158호(서울 : 수필문학사, 2003. 11), 131~137쪽에 수록되어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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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5월 4일에 막내아이가 장가를 갔다. 막내가 혼인예식을 마치고 신혼여행을 떠난 뒤에 집에 돌아왔을 때에는 큰아들 내외와 손녀, 미국에 가서 살고 있는 딸과 외손주가 집에 있어서 잘 몰랐는데, 이들마저 떠나고 나니, 어쩐지 집안이 썰렁하고 허전하였다. 큰아들과 딸은 살림을 난 지가 6∼7년이나 되었으니 그러려니 하지만, 늘 함께 지내던 막내가 없으니, 허전할 수밖에 없었다. 막내가 쓰던 방을 들여다보니, 전과 다른 것이 없었고, 4박 5일의 신혼여행을 마치면 돌아올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 허전한 마음을 달래며 방문을 닫았다.

  신혼여행에서 돌아온 막내아들과 며느리가 집에 오던 날은 큰아들 내외와 손녀까지 와 있어서 집안에 기쁨과 웃음이 가득하였다. 그러나 큰아들 내외가 떠나고, 이튿날 막내 내외가 새 보금자리를 찾아 총총히 떠난 뒤에는 집안이 적막하였다.

  며칠 뒤의 어느 날, 내가 학교에 가서 강의를 마치고 돌아오니, 막내가 자기 방에 있던 물건을 꺼내어 트럭에 싣고 있었다. 자기가 입던 옷이며 일상용품, 책, 컴퓨터, 장식장 등을 모두 자기의 보금자리로 옮겨가는 것이었다. 현관 앞에서 잘 가라고 인사한 뒤에 집안으로 들어와 그가 쓰던 방문을 열어보니, 방안이 휑하였다. 서른한 살이 되도록 함께 살던 막내마저 떠났구나 생각하니, 갑자기 가슴 한 구석에 구멍이 뚫린 듯하고, 공허한 바람이 휘휘 부는 듯하였다. 감정 면에서 둔한 내가 이럴진대 마음이 여린 아내의 마음은 어떨까 생각하니, 울컥 눈물이 솟아오르는 것을 간신히 참았다. 말없이 그 방 청소를 하는 아내의 모습을 보며 나는 어린 시절의 기억을 떠올렸다.

  충청도 시골에서 자라던 어린 시절, 나는 봄에 뒷산에 올라가 나지막한 소나무 포기나 덤불 속에서 산새의 둥지를 찾아내곤 하였다. 둥지에서 꺼낸 산새 알이나 어린 새끼를 집에까지 가지고 왔다가 어른들한테 꾸중을 듣고 다시 가져다 놓은 적도 여러 번 있었다. 초등학교 고학년이 된 뒤에는 이른봄에 보아둔 산새의 둥지를 가끔씩 찾아보며 산새가 알을 낳아 품는 모습과 새끼를 까서 기르는 모습을 지켜보았고, 새끼가 다 자라서 나는 연습을 할 때에는 새끼 새를 잡아보려고 쫓아다니기도 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 다 자란 새끼 새가 어디론가 가 버리고, 둥지에 어미 새만 남아 있는 것을 보았다. 그 둥지에 남아 있는 새가 어미 새가 아니라 새끼 새였는지도 모르지만, 그 때 나는 어미 새라고 생각하면서, '새끼를 떠나보낸 어미 새가 얼마나 외롭고 쓸쓸할까?' 생각하며 홀로 안타까워하였다. 그 안타까움은 매우 컸지만, 어쩔 수 없는 것이기에 어린 마음에 깊은 자국을 남긴 채 세월의 뒤안길로 잦아들었다. 그 후로 나는 바쁘게 생활하느라고 새끼를 떠나보낸 어미 새의 심정 같은 것은 잊고 살았다. 그런데, 오늘 50여 년 전의 기억이 떠오른 것은 나와 내 아내의 지금의 심정이 어릴 때 보았던 새끼를 떠나보낸 어미 새의 심정과 같을 것이라는 연상 작용 때문이다.

  충청도 촌놈인 나는 서울에 와서 직장을 잡고, 1966년에 혼인하여 전세방을 얻어 새 둥지를 틀었다. 부부 교사인 우리는 학교에 근무하는 한편 못다 한 공부를 하면서 아들 둘, 딸 하나를 낳아 기르느라 여념이 없었다. 어린 새끼를 기르느라 혼신의 노력을 하던 산새처럼 힘들고 고달픈 것도 잊고, 하루하루의 일과에 충실하였다. 우리의 정성과 노력을 아는지 3남매는 무럭무럭 자랐고, 남부럽지 않게 성장하여 우리에게 큰 기쁨과 보람을 안겨 주었다.

  큰아들은 학사장교로 군복무를 마치고 대학원 석사과정을 마치던 1995년에 혼인하여 살림을 났다. 큰아들이 분가하였을 때에도 매우 섭섭하였지만, 그 때만 하여도 내 나이가 지금보다 젊었고, 대학에서 강의하면서 논문 쓰고 책을 내는 일에 바빴으며, 아직 두 아이가 남았다는 생각에 섭섭한 마음을 다스릴 수 있었다. 주말마다 찾아오는 큰아들과 며느리를 보면서 섭섭하고 허전한 마음은 차츰 수그러들었다.

  그 다음 해에 딸을 시집보내고 나서는 텅 빈 마음을 주체할 수 없었다. 막내아들마저 군에 가 있던 때였으므로 더 그랬던 것 같다. 딸이 쓰던 방문 앞을 지나 서재에 드나들 때에 딸이 쓰던 방에 들어가 남아 있는 딸의 체취를 느껴보기도 하고, 막내가 곧 돌아올 것이라는 생각을 하면서 스스로를 위로하곤 하였다. 가끔씩 찾아오는 딸과 사위를 대하면서 세월이 흐르니, 섭섭함하고 허전하던 마음도 많이 사그라졌다.

  이제 딸이 시집간 뒤로 6년여를 홀로 남아 함께 살던 막내가 떠나고 보니, 셋 다 자기 둥지를 마련해 떠나보냈다는 안도의 한숨과 함께 엄습해 오는 섭섭함과 허전함을 주체할 길 없다. 저녁이 되어도 기다릴 사람이 없고, 늦게 왔다고 핀잔할 사람도 없다. 아내는 아침 일찍 일어나 아침밥을 지어놓고 출근을 독촉할 일도 없어졌다. 부모로서 할 일을 다 하였다는 안도감이나 자질구레한 일에서 벗어났다는 해방의 기쁨보다 쓸쓸하고 허전함이 더 큰 것은 무슨 연유일까? 큰아들과 딸을 보냈을 때 섭섭함과 아쉬움을 경험하여 이제는 면역이 되었을 거라 생각하였는데, 공허감이 더 큰 이유는 무엇일까? 셋 다 떠나보내고 나니, 이제는 자식과도 함께 산다는 기대가 없어졌고, 막내와 함께 산 기간이 위의 두 아이보다 길었으므로 애틋한 정이 더 많기 때문이라는 점도 있겠지만, 우리 부부가 이제는 누군가에게 의지하고 싶은 나이가 되었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식물의 일생을 보면, 봄철에 아름다운 꽃을 피우고, 그 꽃이 지면서 탐스런 열매를 맺는다. 열매를 맺은 뒤에는 단풍으로 옷을 갈아입고 있다가 가을 바람에 떨어지고 겨울을 맞는다. 이것은 어려서부터 수없이 보아온 일인데, 근래에 와서 이러한 자연 현상의 오묘함을 새삼 느끼고, 인간의 삶 또한 이와 다를 바 없음을 절실하게 느끼곤 한다. 이 역시 나이가 든 탓이리라.

  내가 어린 시절에 보았던 산새의 삶 역시 그렇다. 다 자란 산새는 어미 품을 떠나 새 둥지를 마련하여 새끼를 치고, 새끼를 길러 다 자란 뒤에는 떠나보낸다. 새끼를 떠나보낸 어미 새는 묵은 둥지를 지키며 힘이 남았을 때에는 다시 알을 낳아 새기를 기르지만, 그렇지 못할 때에는 그 둥지에서 조용히 살다가 다시 자연으로 돌아가리라. 이 일은 내 고향 뒷산에서 지금도 계속되고 있을 터인데, 새끼 새를 떠나보내는 어미 새는 새끼 새가 탈없이 자연의 섭리에 순응하며 살기를 간절히 바랄 것이다.

  막내를 떠나보내고 허전한 마음을 주체하지 못해 애쓰면서, '현대인은 자식들을 독립시킴과 동시에 부모 스스로가 자식들로부터 독립하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고 힘주어 말하던 인구학 전공 동료 교수의 말이 자꾸만 떠오른다. 세 아이를 독립시켰으니, 이제는 내가 독립하여야겠다. 이제 떠난 막내를 끝으로 새 둥지를 마련하여 떠난 세 아이는 모두 내가 밟은 길을 다시 밟을 것이고, 그 길은 자기 자식들에게 물려줄 것이다. 이것이 자연의 섭리이니 이를 따르는 것이 순리이리라. 이제 자기 둥지를 마련하여 자기 삶을 시작한 세 아이가 아무 탈없이, 뜻한 바를 이루면서 행복하게 살기를 기도하면서, 아내와 함께 묵은 둥지를 지키려 한다.
<수필문학 통권 143호(서울 : 수필문학사, 2002. 7)에 수록하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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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며칠 전, 종로에서 친구와 저녁 식사를 하고, 집으로 오려고 시내버스를 탔을 때의 일이다. 동대문을 지나 안암동에 오니, 손님이 많이 내려 버스 안에는 손님이 별로 없었다. 고려대학교 앞에 오니, 한 중년 남자가 비틀거리며 버스로 올라왔다. 그를 본 나는 밤이 깊지도 않았는데, 비틀거릴 정도로 취한 것을 보니, 일찍부터 술판을 벌였던 모양이라고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였다. 그 사람은 빈 자리가 있는데도 앉지 않고, 자리에 앉아 있는 손님을 찾아다니며 혀꼬부라진 소리로 뭐라고 말을 걸었다. 손님들이 대꾸를 하지 않으니까 뭐라고 욕을 하더니, 앞으로 가서 운전 기사에게 말을 걸었다. 기사가 좋은 말로 빈 자리에 가서 앉으라고 하였으나 듣지 않고, 그 사람은 듣기는켜녕 욕을 하며 기사의 옷을 잡아 흔들었다. 운전을 제대로 할 수 없을 정도로 기사를 흔들어 대니, 불안을 느낀 손님들이 그만두라고 소리쳤지만, 그 사람은 그에 아랑곳하지 않고, 더 세게 흔들어댔다. 화를 참고 다음 정류장에 온 기사는 차를 세우고, 그 사람을 차에서 끌어내린 뒤에 출발하였다. 

  다음 정류장에서 내린 나는 집으로 오며, 그 사람에 관해 잠시 생각해 보았다. 잠깐 동안이기는 하지만, 오늘의 행동으로 보아 그 사람은 술만 먹으면 아무에게나 시비를 걸어 싸우는 '술버릇'을 가진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그 사람이 곱게 집으로 갔으면 좋으련만, 길가는 사람에게 시비를 걸어 싸우다가 얻어맞거나 제풀에 넘어져 다치지는 않았을까 걱정되었다.

  술버릇에 생각이 미치자, 사병으로 군에 있을 때의 일이 생각이 난다. 내가 군 생활을 하던 소대에는 술버릇이 유별난 사람 둘이 있었다. 한 사람은 술만 먹으면 우는 사람이다. 내가 그 부대에 배속된 지 얼마 되지 않은 토요일 밤의 일이다. 오후에 외출한 그는 술이 얼근하여 들어와서 동기생들과 재미있게 이야기하다가 노래를 부르곤 하였다. 신병인 나는 그의 이야기 소리와 노랫가락을 들으며 잠이 들었다. 한참을 자다가 깨어보니, 그가 소리내어 엉엉 울고 있었다. 나는 무슨 슬픈 일이 있어서 울겠거니 하고, 다시 잠이 들었다. 그 후에도 그는 자주 술을 마셨는데, 술에 취하기만 하면 처음에는 재미있게 이야기하고, 노래를 부르지만, 끝에 가서는 엉엉 울곤 하였다. 그래서 나는 그를 술만 먹으면 우는 사람으로 기억하고 있다. 또 한 사람은 술만 먹으면, 싸우는 사람이다. 그는 외출하여 술을 먹기만 하면 민간인이나 다른 부대 사병들과 싸움을 하고, 부대에 들어와서는 부대원들과 싸움을 하여 상대방을 때리거나 매를 맞곤 하였다. 그래서 그로 인한 말썽이 끊이지 않았다.

  나는 사회생활을 하면서도 주사(酒邪)가 있는 사람을 여럿 보았다. 이들을 보면서, 나는 이런 술버릇은 왜 생기는 것일까를 곰곰 생각해 보았다. 우리의 설화 중 [술이 생긴 내력] 이야기는 옛사람들이 이를 어떻게 생각하였는가를 말해 준다.

  옛날에 한 효자가 병으로 누워 계신 아버지를 위해 온갖 약을 다 구하여 써 보았으나 효험이 없었다. 어느 날, 그는 먼 곳에 있는 용한 의원을 찾아가 아버지의 병세를 자세히 설명하고, 약을 지어 달라고 하였다. 그런데, 그 의원은 '약이 있기는 하나 구할 수가 없다.'면서 말을 하지 않았다. 그가 여러 가지 수단과 방법을 동원하여 알아 본 결과 아버지의 병에는 세 사람의 간이 특효약이라고 하였다.

  그는 고심 끝에 약을 구해 드리기고 결심하고, 집에서 멀리 떨어진 산 고개로 갔다. 해진 뒤에야 산마루에 도착한 그는 길옆에 숨어서 사람이 올라오기를 기다렸다. 잠시 후, 선비 차림의 남자가 올라왔다. 그는 갑자기 내달아 선비를 칼로 찌르고 간을 꺼내 그릇에 담은 뒤에 시신을 절벽 아래로 굴렸다. 뛰는 가슴을 진정하고 있느라니까, 스님 한 분이 불경을 외우며 올라왔다. 그는 다시 달려들어 전과 같이 하였다. 얼마 후, 한 남자가 혼자 중얼거리다가 소리를 지르고, 다시 노래를 부르다가는 춤을 추면서 올라오는데, 미친 사람이 분명하였다. 그는 미친 사람의 간이 약이 될 것인가를 생각하며 주저하다가 미친 사람의 간도 사람의 간이니 효험이 있을 것이라는 생각에 달려들어 간을 취하였다. 그는 자기의 손에 억울하게 죽은 이의 시신을 그대로 두면 안 된다는 생각에서 절벽 아래로 내려가 세 사람의 시신을 잘 묻어 주고 집으로 왔다. 그 약을 잡수신 아버지의 병은 씻은듯이 나았다.

  그 일이 있은 지 1년이 되는 날, 그는 사죄하는 마음으로 세 사람의 무덤을 찾아갔다. 그가 준비해 간 음식을 차려놓고 절한 뒤에 무덤을 살펴보니, 지금껏 보지 못하던 풀이 수북하게 자라고 있었다. 그는 세 사람의 영혼이 풀로 자란 것이라고 생각하고, 가까이 두고 위하려는 뜻에서 그 풀을 뽑아 가지고 와서 밭가에 심었다. 그 풀은 자라 이삭이 나오고, 씨앗이 여물었다. 사람들은 이를 신기하게 여겨 다투어 그 씨앗을 가져다 심었다. 이렇게 하여 이 식물은 널리 퍼지게 되었는데, 그게 밀이라고 한다. 사람들은 밀로 누룩을 만들어 술을 빚어 먹었다. 

  이 이야기에서 밀은 억울하게 죽은 세 사람의 영혼이 깃들어 있는 곡식이라고 한다. 그래서 밀로 만든 누룩을 넣어 술을 빚어 먹으면, 처음에는 선비처럼 점잖지만, 그 다음에는 혼자 염불을 외는 중처럼 묻지 않아도 말을 많이 하고, 그 다음에는 미친 사람처럼 날뛴다고 한다. 이 이야기는 술의 속성과 술 취한 사람이 보이는 행동의 변화를 빗대어 표현하고 있어 매우 흥미롭다.

  술은 혈액 순환을 촉진하고, 억제되었던 감정을 풀어내어 기분을 좋게 한다. 그래서 예로부터 '술은 적즉보명 과즉손명(適則保命 過則損命, 적당하면 건강에 좋고, 과하면 건강에 해롭다.)'이라고 한다. 그런데 술은 먹기 시작하면 자꾸 더 먹게 되어 주량을 초과하게 된다. 그러면 술버릇이 나와 실수를 하게 되고, 건강도 해치게 된다. 술을 먹을 때 '제1단계는 사람이 술을 먹고, 제2단계는 술이 술을 먹고, 제3단계는 술이 사람을 먹는다.'고 한다. 고약한 술버릇은 제1단계에서는 나타나지 않고, 제2단계를 지나면서 나타나는 것이니, 제1단계에서 술자리를 털고 일어나면 아무 문제가 없을 것이다.

  '술버릇은 죽어야 고친다.'는 말이 있다. 이것은 한번 몸에 밴 술버릇은 고치기 어렵다는 것을 나타내는 말일 것이다. 술버릇은 술을 배울 때 생긴다고 한다. 어린 나이에 친구끼리 몰래 술을 마시며 감정을 발산하곤 하면, 자기도 모르게 나쁜 술버릇이 생길 것이다. 그러나 어른들 앞에서 술을 배운 사람은 고약한 술버릇이 생기지 않을 것이다. 제사 지낸 뒤에 음복(飮福) 할 때 어른들이 따라 주는 술을 마시면서 술을 배우거나, 아버지나 어려운 선배와 술을 마시면서 술을 배운 사람은 술버릇이 곱다고 한다. 그래서 옛 어른들은 제사 지낸 뒤에 음복이라는 이름으로 어린아이에게도 술을 따라 주며 마시게 하였고, 관례(冠禮) 때에는 초례(醮禮)라 하여 술 마시는 예절을 가르쳤던 것이다.

  '술이 생긴 내력'에서 말한 것처럼 술은 선비와 중과 미친 이의 속성을 지니고 있으니, 술을 마시지 않으면 고약한 술버릇을 걱정할 필요가 없다. 그러나 술은 우리 생활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어서 술을 먹지 않으며 사회생활을 하기란 그리 쉽지 않다. 그렇다면, 술은 마시되 자제할 줄 알고, 고약한 술버릇을 갖지 말아야 한다. 그래서 나는 기회가 있을 적마다 가정에서 부모가 자녀에게 술 마시는 예절과 요령을 가르칠 것을 권하고 있다. 이것은 건전한 음주문화를 형성하기 위해서 필요한 일이라 생각한다. 

  <이 글은 한국수필사에서 발행안 "한국수필" 제106호(2000년 9월, 10월 합병호)에 수록한 것임.>

  며칠 전 한국관광공사 관광교육원 중국어 통역안내원 연수 교육에 강의하러 갔을 때의 일이다. 수강생은 모두 한국에 사는 화교(華僑)들로, 전에 나의 민속문화 강의를 들은 적이 있어 낯익은 얼굴들이었다. 쉬는 시간에 한 수강생이 지름 5mm 정도로 둥글게 뭉친 찻잎을 더운물에 넣어 잘 우러난 뒤에 건네주면서, 중국에서 제일로 꼽는 모리차(茉莉茶) 맛을 보라고 하였다. 냄새와 맛에 예민하지 못하여 무어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향과 맛이 부드럽고 그윽하면서도 특이하였다. 음식을 잘 만들어 호텔 주방장을 하기도 하였다는 그는 차를 매우 좋아하여 차의 맛과 향에 관심이 많다고 한다. 나는 그가 준 차를 마시며, 중국의 차(茶)에 관한 이야기를 들었다.

  중국에는 모리, 철관음, 보이, 오룡, 천노, 천룡 등 8대 명차(名茶)가 있는데, 그 중에서 제일로 꼽는 것은 모리차라고 한다. 이 차는 맛과 향이 특이하여 예로부터 사람들이 좋아하였는데, 당(唐)나라 양귀비가 특히 좋아하였다고 한다. 양귀비는 이 차를 즐겨 마셨으므로, 그녀의 땀에서도 이 차의 향기와 같은 냄새가 났는데, 현종(玄宗)이 그녀를 특별히 좋아한 것은 그녀의 몸에서 나는 이 향내 때문이었다고 한다. 모리 나무는 양자강 중상류 지역에 자생하는데, 줄기가 4∼5m 자라야 잎이 나온다. 그 잎을 따다가 젊은 여인이 침을 뱉아가며 둥글게 말아 환(丸)을 만드는데, 찻잎이 많이 나지 않고, 손이 많이 가므로 생산량이 적어 매우 귀하고 값이 비싸서 그 값은 금값에 버금간다고 한다.   

  오래 전의 일이라고 한다. 어떤 사람이 향이 좋은 모리 잎으로 차를 만들기 위해 잎을 따려고 하였으나, 손이 닿지 않았다. 나무 위로 올라가려고 하였으나, 그것도 그리 쉽지 않았다. 그 사람은 여러 가지로 궁리한 끝에 나무를 베어 넘어뜨린 뒤에 잎을 따서 차를 만들었다. 그 사람은 그곳에 있는 나무를 하나씩 벤 다음에 잎을 따서 차를 만들어 팔아 많은 돈을 벌었다. 그러나 나무를 다 베고 난 뒤에는 더 이상은 차 잎을 딸 수 없었다. 이 차의 맛과 향이 좋다는 것을 안 사람들이 잎을 따려 하였으나, 소용이 없었다. 그로부터 150년이 지난 뒤에야 다시 나무가 자라서 차를 생산할 수 있었다.

  그 후에 사람들은 모리 나무를 베지 않고 잎을 딸 수 있는 방법을 여러 가지로 궁리하였다. 궁리 끝에 한 사람이 배에 과일을 싣고, 모리 나무 밑으로 가서 나무 위에서 놀고 있는 원숭이를 향해 던졌다. 그러자 던질 것이 없는 원숭이는 나뭇잎을 따서 아래로 던졌다. 그 사람은 그 잎을 모아 가지고 와서 차를 만들었다. 지금도 모리차는 원숭이를 이용해 딴 잎을 말린 뒤에 여인들이 손으로 환을 만든다고 한다.   

  나는 이 이야기를 듣고, 진짜 현명한 사람이 누구인가를 생각해 보았다. 모리 나무 잎을 따고 싶지만, 손이 닿지도 않고, 올라갈 수 없어서 잎 따기를 포기한 사람도 많았을 것이다. 그런데 한 사람은 나무를 베고 잎을 따서 많은 돈을 벌었다. 그 사람은 잎 따기를 포기한 사람에 비해 적극적이고 현명한 사람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그 사람은 나무를 다 벤 뒤에는 그 잎을 딸 수 없었고, 그 후 150년 동안 그 차를 생산할 수 없게 하였다. 그는 눈앞의 이익만을 생각하고, 그 뒤에 생길 일에는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원숭이를 이용하여 잎을 딴 사람은 오늘은 말할 것도 없고, 내일도, 내년에도 잎을 딸 수 있었다. 오늘의 이익과 함께 내일의 이익도 챙길 수 있었으니, 그 사람이야말로 진짜 현명한 사람이라 하겠다. 

  우리 둘레에는 나무를 베고 잎을 따는 것과 같은 어리석은 일들이 수없이 벌어지고 있다. 지방세 수입을 늘리기 위해 보존해야 할 산림 녹지에 건축 허가를 내준 지방자치단체나, 당장의 이익을 위하여 산림을 훼손하는 사람들의 행동이 그렇다. 온천을 개발한다고 산림을 마구 훼손하고, 여기저기에 구멍을 뜷다가 방치해 두는 일이 또한 그렇다. 홍수 조절과 물 부족 예방을 이유로 동강에 댐을 건설해야 한다는 주장 역시 마찬가지인데, 이를 백지화하기로 하였다니 다행이다. 그러나 동강댐 계획은 자연 자원을 보호하기 위해 백지화하는 것이 좋겠다고 하면서도 홍수 조절용 댐은 건설해야 한다는 주장이 새로 나왔는데, 이것 역시 당장의 이익을 위하여 더 큰 것을 버리는 일이 아닌지를 깊이 생각해야 한다. 무분별한 개발로 국토가 훼손되어 복구할 길이 없다는 말을 들으면, 답답하기 그지없다.

  학교나 각급 기관에서 행하는 교육의 경우도 그렇다. 교육은 그 효과가 금방 나타나는 경우도 있지만, 일정 기간이 지난 뒤에 서서히 나타나는 것이고, 측정하기도 어려운 것이다. 그런데도 교육 기관의 경영이나 교육의 효과를 경제 논리로 가늠하고, 가시적인 효과가 나타나지 않은 교육 과정이나 기관을 구조 조정이라는 이름으로 손질하려고 한다. 이 역시 잎을 따기 위해 나무를 베는 것과 같은 어리석은 일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요즈음 젊은 어머니나 아버지가 자녀를 가르치는 것을 보면서 걱정하지 않을 수 없다. 부모들은 아이가 찡그리기만 하여도 무엇이 못마땅해 그러는가를 살피느라 여념이 없고, 자녀가 해 달라는 것이면 무엇이든지 해 주고, 잘못을 저질러도 따끔하게 꾸짖지 않는다. 그리고 모든 것을 돈으로 해결하려 한다. 그래서 자녀들로 하여금 어려움을 모르고, 자제할 줄도 모르면서 제가 제일인 줄 알고, 돈을 제일로 알며 자라게 한다. 이런 아이는 자라서 남을 배려할 줄 모르는 못하는 이기적인 사람, 모든 것을 돈으로 해결하려는 사람, 어려움에 처하면 쉽게 좌절하는 사람, 모든 것을 남의 탓으로 돌리는 사람이 될 게 뻔하다. 자녀를 사랑하면 사랑할수록 지금 하는 일이 자녀의 인성 형성에 어떤 효과를 줄 것이며, 자녀의 장래에 어떤 영향을 미칠 것인가를 생각해야 한다. '지곤자성(知困自成)'이란 말이 있다. 곤고함을 알아야 스스로 성취하기 위해 노력하고, 노력 한 뒤에 성취할 수 있다는 말이다. 자녀를 키우는 부모는 자녀를 맹목적으로 사랑하고 감싸며 자녀의 기를 죽이지 않으려고 허둥대는 것과 같은 행동이 잎을 따기 위해 나무를 베는 것과 같은 어리석은 일임을 알아야겠다.

  접객업소를 운영하는 어른들이 미성년자를 고용하여 말썽을 일으키고 있다. '영계( 鷄)가 좋다.'며 미성년자가 있는 업소를 찾는 어른들이나, 눈앞의 이익에 눈이 어두워 이들을 고용하는 업소 주인들 역시 사회와 국가의 장래를 생각하지 않는 어리석음을 범하고 있다.

  요즈음에는 외국의 값비싼 소비재 수입이 급증하고 있다고 한다. 외국산을 좋아하는 일부 사람들의 기호에 맞춰 소비 심리를 부추기면서 이익을 챙기려는 수입업자나 유통업체 운영자의 영리함이 나라의 경제를 어렵게 하고 있다. 이러한 사람들 역시 모리차 잎을 따기 위해 나무를 벤 사람과 다를 바 없다고 생각한다. 소비가 미덕인 양 소비 심리를 자극하고, 값비싼 소비재를 수입하여 무역 역조가 심화되면 한국 경제가 어려워질 것은 뻔한 일이다. 모리 나무가 다시 자라는 데 150년이 걸렸다고 하는데, 한 번 어려워진 경제를 바로잡기 위해서는 몇 년을 기다려야 할 것인가를 생각하면 답답하기 그지없다. 

  나무를 베고 잎을 따는 어리석음을 되풀이하지 않으려고 원숭이를 이용하여 모리 나무 잎을 따는 양자강 유역 사람들의 지혜로운 이야기가 우리의 생활을 돌아보는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 
                                              <조선문학 2000년 6월호에 수록하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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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국원(小菊院)은 충남 연기군 동면 합강리에 사는 고향 친구 부인의 당호인데, 지금은 조촐한 음식점 이름으로 더 많이 알려졌다. 금강과 미호강이 만나는 곳이라 하여 지명이 합강리(合江里)인 이곳에 자리잡은 소국원의 경치는 산과 강이 조화를 이루어 빼어나게 아름답다. 소국원 앞에서 북쪽을 보면, 정북(正北)에 황우산(黃牛山) 주봉이 있고, 좌우로 뻗친 이 산의 줄기가 소국원을 감싸고 있다. 남쪽을 보면 집 앞으로 난 길 아래에 금강이 유유히 흐르고 있다. 강 건너 정남(正南)으로 부용산(芙蓉山) 주봉이 보이는데, 동서로 뻗친 이 산의 줄기가 아름다운 모습을 자랑하고 있다. 그래서 소국원 자리를 멀리서 보면, 연꽃이 물위에 떠 있는 모습을 연상하게 한다. 풍수를 아는 사람이 이 자리를 '연화부수형(蓮花浮水形)'이라고 한 것은 이 곳의 풍경을 잘 드러낸 말이라 하겠다. 

  이 친구가 이곳에 와서 자리잡은 것은 몇 년 전의 일이다. 대학을 졸업한 후, 서울과 대전에서 직장 생활을 하던 그는 나이가 들면서 모든 것을 정리하고, 조용한 곳에 가서 살고 싶은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래서 오래 전부터 적당한 곳을 찾다가 아는 사람의 소개로 이 집을 사서 이사하게 되었다고 한다. 조선 시대의 선비들은 고향을 떠나 벼슬살이를 하면서 귀거래(歸去來)를 노래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한 이가 많았다. 요즈음에도 나이 들면서 전원생활을 꿈꾸는 이가 많지만, 여러 가지 사정으로 실행에 옮기지 못하는 이가 많다. 그런데, 그는 오래 살던 대전에서 멀지 않고, 고향 홍성과도 그리 멀리 않은 이곳에 와서 꿈을 펼칠 수 있게 되었으니, 실천력이 있는 사람이고, 복 받은 사람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는 처음부터 음식점을 하려고 마음먹고 이곳에 온 것이 아니다. 얼마 안 되는 밭에 철따라 채소를 가꾸고, 집 둘레에 꽃과 과수를 기르며 조용히 살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그런데, 이곳에 온 지 얼마 안 되어 부인의 음식 솜씨가 뛰어난 것을 아는 주위 사람들이 그 좋은 솜씨를 묻어두기 아깝다며 권하여 음식점을 열 생각을 하게 되었다. 

  부인은 키가 그리 크지 않고, 동그스름한 얼굴에 이목구비가 균형 잡힌 미인인데, 지성적이면서도 따스한 인상을 준다. 꽃에 비유하면 작은 국화 같다고나 할까. 그의 집에는 '소국원(小菊院)'이라고 붓으로 쓴 액자가 걸려 있는데, 이것은 그와 가깝게 지내는 분이 부인에게 당호를 지어 주면서 써 준 것이다. 부인의 외모와 개성을 잘 드러내는 당호를 지어준 그분의 성찰력과 안목이 대단하다 하겠다. 그들 부부는 음식점을 열기로 한 뒤에 당호를 지어 준 분과 상의하여 '소국원'을 상호로 쓰기로 하였다.
 
  소국원에서 먹을 수 있는 음식은 훈제 오리고기와 민물 새우찌개 두 가지인데, 훈제 오리를 찾는 사람이 더 많다고 한다. 그 곳에서 훈제 오리를 시키면, 부인이 솜씨를 발휘하여 준비한 여러 가지 김치와 나물, 젓갈, 마늘 장아찌, 멸치볶음 등 몇 가지 밑반찬과 그가 직접 가꾼 상추, 쑥갓, 깻잎, 풋고추 등 야채를 정갈하게 담아 내온다. 그리고 맵시 있게 자른 훈제 오리고기를 큰 접시에 담아서, 그가 손수 쑥과 몇 가지 야채를 짜서 만든 소스를 겨자와 함께 가져다 준다. 보기에도 깔금하고 맛깔스러워 입에 침이 솟는다. 예쁘게 썰어 놓은 부추, 배, 양파, 당근 등을 소스에 넣었다가 오리 고기와 함께 상추나 깻잎에 싸서 먹으면 정말 맛이 있다. 오리 고기를 탐탁하게 여기지 않던 사람도 맛있다는 감탄사를 연발하며 고기를 먹는다. 
 
  소국원은 부부가 직접 운영하는데, 식탁이나 식기 관리, 상차림이 청결하여 위생적이고, 음식 맛이 좋으며, 아주 친절하다. 그는 돈 벌 욕심을 내지 않고, 자기 집을 찾는 손님을 가족처럼 진심으로 대하고, 손님의 건강을 생각한다. 그래서 자기가 가꾸는 채소에 농약을 쓰지 않는다. 채소에 키토산이 좋다는 말을 듣고, 스스로 실험을 해 본 뒤에 비싼 키토산을 거름으로 주어 맛좋은 상추와 배추를 가꾼다. 그래서 한 번 다녀간 사람은 다시 그곳을 찾는다. 그곳은 큰 길에서 2km나 떨어진 산속 강변에 자리잡고 있어서 그곳에 오는 손님은 한 번 왔던 사람 아니면, 누구의 소개로 찾아가는 사람뿐이다. 그런데도 손님이 끊이지 않는 것은 친구 내외의 맛과 청결과 친절 덕분일 것이다.     
 
  당호나 상호에 들어가는 '원' 자를 한자로 쓸 경우에는 '원(園)'이나 '원(苑)'을 쓰는 것이 보통인데, '소국원(小菊院)'은 '원(院)' 자를 쓴다. '원(院)'이란 글자에는 '옛날에 관아(官衙)에서 돈 없는 사람을 위해 무료로 운영하던 숙소'의 뜻이 들어 있다. 그는 소국원을 무료로 운영하지는 못하지만, 상호에 담긴 뜻을 살려 친절과 봉사의 정신을 가지고 운영하겠다고 한다.
 
  내가 근무하는 한국교원대학교에서 소국원은 15km 정도 떨어져 있어서 점심 시간이나 바쁠 때에는 가지 못하지만, 시간이 좀 자유스러운 저녁 시간에는 가끔씩 찾는다. 내가 찾아가면 친구가 달려나와 손을 잡고, 잔잔한 미소를 머금은 아주머니가 뒤따라 나와서 공손히 인사하며 나를 맞아준다. 나는 방으로 먼저 들어가지 않고, 집 둘레에 있는 화단의 꽃과 나무, 채소밭을 둘러본다. 친구의 자상한 손길과 땀을 먹으며 자란 꽃과 나무, 채소를 보고 있으면 계절의 변화와 함께 고향의 정취를 느끼게 된다. 그는 바쁜 일이 없으면 나와 함께 화단과 채소밭가를 거닐며 그 동안 있었던 일, 다른 친구를 만났던 이야기를 한다. 그럴 때에는 아련한 추억이 되어 버린 어린 시절 고향의 일들이 떠오르곤 한다.

  집 둘레를 살펴본 뒤에는 함께 간 사람들과 야외용 식탁 앞의 의자에 앉아 시원한 음료와 맥주를 마시며 주변의 경관을 감상한다. 그 때에는 논문을 쓰다가 풀리지 않아 골똘하던 문제나 무슨무슨 일을 해야 한다는 긴박감에서도 해방되고, 힘들고 복잡한 일로 짜증스럽던 감정도 누그러진다. 방으로 들어가 아주머니의 정성과 솜씨가 담긴 김치, 된장찌개, 젓갈, 나물, 장아찌 등을 먹을 때에는 어린 시절에 즐기던 고향의 맛을 느끼게 된다. 친구가 기른 상추, 쑥갓, 시금치, 마늘, 고추 등을 먹을 때에는 어린 시절에 내가 그것을 직접 가꿔서 온 가족이 함께 먹던 일이 생각나기도 한다.

  내가 함께 간 사람들과 어울려 화제의 꽃을 피울 때쯤 친구는 쑥의 효소를 섞어 만든 '쑥술'을 가져와 일행에게 한 잔씩 권하며 잠깐씩 우리의 화제에 끼기도 한다. 일행 중에 처음 간 손님이 있어도, 그의 말과 행동이 소박하고 진실하여 저항감을 주지 않는다. 그래서 처음 갔던 사람이 다시 갔을 때에는 그에게 친근감을 느끼게 된다. 나는 그의 언행을 보면서, 사람을 대할 때 예의를 지키며 소박하고 진실하게 대하면 곧 친근감을 느끼게 된다는 것을 새삼 느끼곤 한다.

  얼마 전부터 그는 앞치마를 두르고 주방 일을 한다. 주방 일을 도와주던 아주머니가 오지 않아 부인 혼자 하는 주방 일을 돕기 위해 시작한 일인데, 자꾸 하다 보니 요령도 터득하였고, 일하는 재미도 느끼게 되었다고 한다. 요즈음에는 일하는 아주머니를 승용차로 아침에 모셔오고, 저녁에 모셔다 드리며 받들어 모시느라 속 썩는 것보다 직접 일하는 것이 낫다는 생각에서 주방 일을 열심히 한다고 한다. 처음에는 손님이 오면, 앞치마를 벗고 밖으로 나가기도 하고, 일부러 모른 체하기도 하였는데, 요즈음에는 생각이 바뀌어 주방일과 손님 시중에 재미와 보람을 느낀다고 한다. 그가 이렇게 일하니, 장교로 군복무를 마치고 대학원을 다니는 아들과 대학에 다니는 딸도 집에만 오면 주방의 일과 손님 시중에 정성을 다한다.
 
  며칠 전, 아내와 함께 그곳을 찾았을 때, 그는 그 동안의 일을 이야기하며 이렇게 말했다.
  "우리 집에 오는 손님은 주로 점잖고 교양 있는 분인데, 내가 이런 손님들을 접대하며 시중 들다 보니, 나도 교양이 높아져서 직장 생활할 때보다 격상된 느낌이야!" 
이 말을 들은 내가 그 동안 수양 많이 했다고 하니, 그는 웃으며 이렇게 말했다.
  "나는 지금의 생활에 만족하고 있네. 왜 진작 이런 생활을 찾지 못했나 하는  생각을 해."

    그의 화단에는 국화가 많이 있는데, 잔뿌리와 줄기를 잘라 여기저기에 심고 있다. 상호가 소국원이니, 소국이 만발한 집을 만들겠다는 생각에서다. 가을이 되면 색색의 예쁜 국화꽃이 소국원을 감싸며 아름다움을 자랑할 것이다. 무럭무럭 자라는 국화처럼 그의 행복도 무럭무럭 자라 활짝 피기를 간절히 바란다. 
                  <충청문학(서울 : 충청문인협회, 2000. 8)에 수록한 작품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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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며칠 전 서울에 있는 어느 학회에서 주관하는 강습회에 가서 오전 강의를 하였는데, 마침 거기에 고향 후배가 있어 나이 든 수강생 몇 사람과 함께 점심을 먹으러 갔다. 우리는 조용한 방에 앉아 점심을 먹으며 여러 가지 이야기를 하였는데, 교육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이어서 입시 제도와 학교 교육이 자연스럽게 화제에 올랐다. 그 중 한 분이 최근에 자기가 사는 아파트에서 있었던 일이라면서 딸의 담임 교사 뺨을 때린 젊은 어머니 이야기를 하였다. 

  서울 시내 아파트 밀집 지역에 있는 초등학교의 5학년 담임 여교사가 3교시 끝나고 쉬는 시간에 당번 역할을 잘못한 여자 어린이를 불러 꾸중을 하였다. 그 어린이는 선생님께 꾸중을 들은 것이 억울하고 분해서 식식거리고 앉아 있었으나, 선생님은 모른 체 1시간 수업을 진행하였다.
   
  점심 시간이 되었다. 그 학교에서는 점심 시간에 반별로 학교 급식실에서 밥과 반찬을 타다가 나누어 먹는데, 담임 선생님의 밥은 당번 어린이가 타다 드리게 되어 있었다. 그 어린이는 선생님의 밥을 타다 드리면서, 선생님 밥그릇에 침을 뱉었다. 이를 본 한 어린이가 이 사실을 선생님께 말씀드리자, 선생님은 화가 치밀어 올라 그 어린이를 불러 뺨을 때렸다. 그 어린이는 밥을 먹지 않고, 친구들의 만류를 뿌리친 채 울면서 집으로 갔다.
 
  점심 시간이 끝나고, 오후 수업을 시작하려고 하는데, 갑자기 교실 문이 열리더니, 성난 그 아이의 어머니가 달려 들어와 "네가 뭔데 내 딸의 뺨을 때려? 너 좀 맞아 보아라." 하고는 선생님의 뺨을 때렸다. 반 어린이들 앞에서 뺨을 맞은 선생님은 망연자실(茫然自失)하다가 울음을 터뜨렸다고 한다.
 
  이 일은 반 아이들의 입을 통해 그날로 그 반 학부모에게 알려졌고, 2∼3일 뒤에는 그 아파트 주민의 대부분이 알게 되었다. 이 일이 알려지자, 그녀를 아는 사람들은 '저 여자가 담임 선생님 뺨을 때린 무서운 여자'라고 수군대며 그녀를 멀리 하였다. 그녀와 가깝게 지내던 이웃들도 그녀를 건성으로 대할 뿐 전처럼 가까이하지 않았다.
 
  있을 수 없는 일, 있어서는 아니 되는 일이 실제로 일어나고 있다는 말을 들은 나는 기가 막혀 한동안 할말을 찾지 못하고 앉아 있었고, 우리 나라의 교육이 무너지는 것을 보는 아찔함을 느꼈다.
 
  학교 교육에서 선생님은 자애로우면서도 엄격함이 있어야 하고, 학생은 선생님을 믿고 따라야 한다. 그래야 선생님의 권위도 서고, 학습 지도의 성과와 아울러 인성 지도의 성과를 기대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그 선생님은 그 학생이 믿고 따르지 않아 교사로서의 권위가 서지 않는데, 그 학생을 불러 꾸중을 하였으니, 그 꾸중이 아이에게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그 결과 아이는 선생님에 대해 반감을 가지게 되었다. 그 학생의 반감은 마침내 선생님의 밥에 침을 뱉는 행위로 나타났고, 이를 참지 못한 선생님은 학생의 뺨을 때린 것이다. 이 때, 선생님이 조금 더 자애로운 마음으로 아이의 행동을 이해하고, 화를 자제한 후 다른 방법으로 아이의 잘못을 일깨워 주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있다.
 
  선생님께 꾸중을 들은 것이 억울하고 분해서 식식거리고 앉아 있다가 선생님의 밥에 침을 뱉은 아이의 행동은 이해하기 어렵다. 이 아이는 자기만 위해 주는 가정 분위기에서 자랐기 때문에 잘된 것은 자기의 공이고, 잘못된 것은 남의 탓으로 돌리는 버릇이 형성된 아이가 아닐까 싶다. 그래서 자기의 잘못을 지적하고 고치라고 하는 선생님의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고, 복수할 방도를 찾다가 선생님의 밥에 침을 뱉은 것이리라. 이 아이에게 이러한 성격과 행동 양식을 지니도록 한 것은 어머니일 것이라 생각한다.
 
  이 학생의 어머니는 자식을 사랑하는 마음이 지나쳐 자기 아이를 잘못 가르치고 있고, 자기 아이의 장래를 그르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그 어머니가 '미운 자식 떡 한 개 더 주고, 고운 자식 매 한 대 더 때린다.'는 속담의 의미를 제대로 알았더라면, 그런 식으로 자녀 교육을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 어머니는 자기 아이가 원하는 것이면 무엇이든지 해 주는 것이 아이를 위하는 것인 줄 잘못 알고 있는데, 이것은 아이의 기를 꺾지 않고, 개성을 살릴 수 있다는 긍정적인 면이 있다. 그러나 자녀에게 적극성과 자제력을 길러주지 못하고, 자녀로 하여금 자기를 과대평가 하게 만들어 '공주병' 또는 '왕자병'에 들게 하는 부정적인 면을 지니고 있다. 이런 병에 걸린 아이는 자라면서 상상하기조차 어려운 좌절감과 고통을 겪어야만 이 병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이다.
 
  이 어머니는 자기 딸을 제일로 인정해 주지 않는 선생님에 대한 분노를 표출하고 나서 후련함을 느꼈을 것이다. 속상해 하는 딸의 화를 대신 풀어주었으니, 딸을 위해서는 무엇이든지 해 줄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는 생각에 만족감을 느끼고, 자기 딸에게 체면이 섰다고 우쭐하였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은 잠시의 일이고, 그 뒤에는 그 어머니가 생각하기 어려운 일들이 기다리고 있었을 것이다.
 
  선생님이라 하여 도덕 군자일 수 없는데, 선생님이 그 아이를 너그럽게 받아들이지 않고 마음 속에 인성 지도를 포기해야 할 아이로 자리잡게 되면 어쩌나 걱정이다. 그 어머니는 담임을 바꿔 달라고 요구하거나, 이참에 그 선생님을 그 학교에서, 또는 교육계에서 물러나게 해야 한다고 온갖 지혜를 다 짜낼 것이다. 그러나 그게 그렇게 쉬운 일도 아니고, 또 그렇게 되어서도 아니 되는 일이다. 그 일은 그 학교에 재직하고 있는 선생님의 입을 통해 다른 학교 선생님들께도 알려질 것이니, 그 일을 아는 선생님 누가 그 아이를 따뜻한 마음으로 받아들일 것인가? 정말 딱한 일이다. 
 
  그 어머니는 반 학생의 학부모나 같은 아파트에 거주하는 어머니들로부터 따돌림을 받게 될 것이다. 반 학생들의 학부모나 이웃들로서는 학생들이 있는 자리에서 딸의 담임 교사 뺨을 때리는 거친 성격의 소유자에게 마음을 열고 대하기 어려울 것이다. 그리고 그 어머니는 같은 반 학부모나 이웃들로부터 선생님의 권위와 학교 교육의 효과를 실추시킨 인물로 지탄을 받게 될 것이다.
 
  우리 둘레에는 이 어머니와 같은 젊은 어머니들이 많이 있다고 한다. 젊은 어머니들은 자기의 자녀 사랑 방법, 자녀 교육 방법이 옳았는가를 다시 생각하고, 지금처럼 자녀를 키웠을 때, 그 아이가 어떤 모습으로 자랄 것인가를 생각하여 바르게 행동하여야 한다. 학교 선생님을 공교육의 주체로 인정하고, 자기 자녀만을 감싸며 사랑해 주는 도구적인 인물이기를 기대하지 않는 현명함이 있어야 한다. '문제 학생 뒤에 문제 부모가 있다.'는 말의 의미도 되새겨 봄직하다..
 
  요즈음에는 학교 교육이 흔들리고, 교실이 붕괴되고 있다고 개탄하는 소리가 높다. 그런데도 정치 지도자들은 국가의 백년대계(百年大計)인 교육을 경제 논리로 풀려 하고 있고, 사회에는 교사를 무시하는 경향이 확산되고 있으니, 정말 답답한 일이다. 어린이를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건강하게 기르려면, 교실을 바로 세워야 한다. 훌륭한 자질을 가진 젊은이가 교직으로 들어올 수 있도록 교사를 우대하고, 교사의 권위를 세워 주어야 한다. 자녀의 바른 성장을 위해, 교육을 바로 세우기 위해 자기 아이만을 위하는 마음을 자제할 줄 하는 현명한 어머니가 많아지기를 기대하는 마음 간절하다.   
            <수필문학 제120호(서울 : 수필문학사, 2000. 6)에 수록하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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