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124일에는 다달이 만나는 초등학교 동창들과 마포구 상암동에 있는 하늘공원에 갔다. 원래는 단풍과 억새, 코스모스가 조화를 이루어 아름다운 모습을 뽐내는 10월에 가기로 하였었다. 그러나 공교롭게도 그 날에 비가 내려서 가지 못하고, 11월 모임으로 미루었다. 그래서 이번 모이는 날에는 날씨가 좋기를 바랐다. 그런데 전날 일기예보를 들으니, 첫눈이 내릴 것이라고 하였다. 나는 일기예보를 들으며 예년처럼 눈발이 흩날리다가 그치거나, 자국눈이 내리겠지하고 가볍게 생각하였다.

 

   그런데 아침에 일어나 보니, 뿌연 하늘에서 눈이 펑펑 쏟아지고 있었다. 현관을 나와 계단을 내려서니, 쌓인 눈이 신발의 반쯤 올라왔다. 나는 금년 들어 처음 내리는 눈이기에 가방에 있는 우산을 꺼내지 않고 그대로 맞으며 신금호역으로 걸어갔다. 아파트 단지에는 오가는 사람이 없어 내 발자국이 선명하게 남았다.

 

   지하철 6호선 월드컵경기장역에서 동창생 6명이 만났다. 두 사람은 감기가 들어 나오지 못한다고 하였다. 나는 친구들에게 눈을 맞으며 하늘공원에 갈 것인가, 아니면 찻집으로 가서 담소하다가 점심을 먹을 것인가를 물었다. 친구들은 올겨울에 내리는 첫눈을 밟으며 걷는 것도 좋고, 눈이 곧 그칠 것 같으니 하늘공원으로 가자고 하였다. 그래서 우리는 지하철역에서 나와 공원으로 향하였다. 월드컵경기장에서 공원으로 올라가는 넓은 도로에는 하얀 눈이 수북이 쌓여 있다. 길에는 우리보다 먼저 공원을 오간 사람들의 발자국이 제법 많이 나 있다. 우리는 넓은 도로에 쌓인 눈 위에 발자국을 남기며 걸어 올라갔다.

 

   도로 좌우에는 크고 작은 나무들이 흰색의 두꺼운 옷을 입고 서서 우리를 반기는 듯하였다. 한참 올라가니 누구인가가 만들어 놓은 작은 눈사람이 길가에 서서 웃으며 우리를 맞았다. 친구들과 눈길을 걷다 보니, 자연스레 어린 시절 눈을 맞으며 뛰놀던 일, 눈을 뭉쳐 던지며 눈싸움을 하던 일, 눈사람을 만들며 즐거워하던 일이 떠올랐다. 한 사람이 어린 시절의 기억을 떠올려 이야기하면, 듣는 사람 역시 아스라한 옛 기억이 떠올라 맞장구치며 즐거워하였다. 한참을 걷다 보니, 눈은 그치고 햇볕이 따사롭게 비쳤다. 그에 따라 쌓였던 눈이 녹아 흐르기 시작하였다. 우리는 눈이 적은 곳을 골라 밟으며 걸었지만, 운동화가 차츰 젖기 시작하였다. 그래서 공원의 정상 가까이 갔을 무렵에는 양말이 젖어 발이 축축해졌다. 그러나 어린 시절부터 함께 지내온 친구들과 금년 겨울의 첫눈을 밟으며 걷는 것에 감동을 느껴 발이 젖는 것에 마음을 쓰지 않았다.

 

   하늘공원은 한강과 접한 98미터 높이에 있는 58천 평의 넓은 공원이다. 서울에서 가장 높은 곳에 있는, 매우 넓은 공원이다. 정상에 오르니, 눈에 덮인 넓은 공원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텔레비전 화면에서 보던 설원(雪原)이 펼쳐진 듯 황홀하다. 형형색색의 아름다움을 뽐내던 꽃들도, 곱게 물든 단풍잎도 눈에 덮였다. 위용(偉容)을 자랑하던 나무도, 땅을 기던 덩굴도, 많은 사람이 밟아 더러워진 땅도 눈에 덮여 하얗게 되었다. 그러고 보니, 눈은 예쁘고 추함도, 잘나고 못남도, 크고 작음도 따지지 않고 다 덮어 순수하고 순결한 외양(外樣)으로 바꿔 놓았다. 사람들도 눈에 덮인 공원의 모습처럼 자기만을 내세우지 않으면서 순수하고 착하게 살면, 설원에 햇빛이 비쳐 찬란한 것처럼 살기 좋은 세상이 될 것이다.

 

   억새 단지에 가니, 억새들의 일부는 하얀 이불을 덮고 누워 있고, 일부는 눈의 힘에 눌리지 않고 곧게 서 있다. 억새가 하얀 꽃을 달고 곧게 서서 하늘거리는 귀엽고 멋진 모습을 볼 수 없어 아쉬웠다. 공원의 동남쪽 끝으로 가서 아래를 내려다보니, 장엄한 풍경이 환하게 펼쳐졌다. 건물들이 새하얀 눈 모자를 쓰고 서 있는 모습은 아주 멋있게 보였다. 한강을 남북으로 가로질러 놓은 교량의 교각 역시 눈 모자를 쓰고 우뚝 서 있고, 그 밑을 흐르는 물은 푸른빛을 자랑하며 유유히 흐른다. 우리는 눈 덮인 공원 언덕과 억새를 배경으로 사진을 찍은 뒤에 앉아 쉴 곳을 찾았다. 모두 눈에 덮여 있는데, 지붕이 있는 그네에는 눈이 없었다. 두 사람이 그네에 앉자 나머지 사람들은 자연스레 그 둘레에 섰다. 우리는 거기서 준비해 간 간식을 나누어 먹었다. 눈 덮인 공원에서 멋진 풍경을 내려다보며 마시는 커피와 과자는 정말 맛있었.

 

   내려올 때에는 눈 녹은 물이 흘러 걷기에 불편하였다. 공원 입구로 내려오니, 그 때 마침 관광객을 실어 나르는 맹꽁이차가 올라왔다. 맹꽁이차 탑승료를 물으니, 1인당 2000원이라고 하였다. 우리는 승차권 발매기에서 승차권을 구입하여 맹꽁이차를 타고 내려왔다. 우리는 산 물고기를 파는 곳으로 가서 광어와 농어를 사서 회를 떠 달라고 부탁하고, 2층으로 올라가서 자리를 잡았다. 맛있는 회를 안주로, 내가 미국에서 사가지고 온 양주를 마신 뒤에 청하와 소주를 마시며 정담을 나누었다.

 

  

  

   눈길을 걸은 오늘은 다리도 좀 아프고 피곤하였다. 신발이 젖어 양말까지 축축하게 되었다. 그러나 70대 중반을 넘긴 나이에 첫눈을 즐기며 걸은 뜻깊은 날이어서 그런지 마냥 즐겁기만 하였다. 나이가 들면서 감성(感性)이 무뎌진 탓에 그동안 눈이 내려도 별 감흥을 느끼지 못하곤 하였다. 그러나 오늘은 첫눈이 8.8cm나 내렸고, 초등학교 동창들과 하늘공원을 걸은 특별한 날이다. 그래서 그동안 무뎌졌던 감성이 조금은 되살아난 듯하다. 첫눈이 쌓인 길을 걸으며 느낀 감동과 기쁨은 어린 시절의 아련한 추억과 함께 오래오래 마음속에 남을 것이다. (2018. 11. 25.)

'자료실 > 산문' 카테고리의 다른 글

요세미티 공원의 증기기관차  (0) 2019.03.27
신의 예술품 협곡[canyon] 탐방  (0) 2018.12.10
이 또한 지나가리라  (0) 2018.07.31
인왕산 숲길  (0) 2018.06.16
기지시줄다리기박물관  (0) 2018.06.02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