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512일에 성동문인협회 회원들과 충청북도 옥천에 있는 정지용문학관과 육영수 생가를 둘러본 뒤에 진천 농다리에 갔다. 한국교원대학교 교수로 재직할 때 학부의 고전문학반 학생 및 대학원생들과 자주 찾던 곳인데, 퇴직 후에 다시 찾으니 감회가 새로웠다.

 

농다리는 충청북도 진천군 문백면 구곡리 구산동(굴티마을) 앞 세금천(洗錦川)에 놓은 돌다리이다. 상산지(常山誌)(1825년에 정재경이 편찬한 것을 1932년에 다시 간행한 향토지)에는 이 다리가 고려 초엽 굴티 임씨의 선조인 임 장군이 별자리 28수를 응용하여 만들었다고 하였다. 1910년부터 1937년 무렵의 인문지리 현황을 담은 지리서인 조선환여승람(朝鮮寰輿勝覽)에는 농다리의 모습을 호랑이가 버티고, 용이 서린 것 같다.”고 하였다.

 

농다리는 19761220일 충청북도 지방유형문화재 제28호로 지정되었다. 이 다리는 구조적으로 징검다리와 형교(桁橋, 다리의 주체가 되는 부분이 들보로 된 다리)의 중간 형태이다. 총 길이는 94m인데, 폭은 3.6m, 두께는 1.2m, 교각과 교각 사이는 0.8m 정도 이다. 사암(砂巖) 성질의 돌을 마치 물고기 비늘처럼 안으로 차곡차곡 들여쌓기 하여 교각을 만들었다. 크기가 다른 돌을 적절히 배합해 서로 물리게 하여 쌓았는데, 위로 갈수록 폭이 좁아져 빠른 유속(流速)을 견딜 수 있도록 했다. 교각의 양쪽은 유선형으로 만들어 구조적으로 흐르는 물의 압력에 저항할 수 있게 하였다. 교각부터 상판석까지 붉은 색을 띤 돌을 이용했다. 애초에 28칸이었던 교각은 유실되어 25칸만 남아 있었으나, 2008년에 원형 복원사업을 완료하여 지금은 28칸 다 있다.

 

  농다리는 마치 지네가 물을 건너가는 것 같은 모양으로 보이기도 한다. 장마가 지면 물이 다리 위로 넘어가게 되어 있어 자동으로 큰 규모의 수월교(水越橋, 장마 때면 물이 다리 위로 넘어가는 다리)가 된다. 해마다 한두 차례씩 물이 넘어갈 때에는 다리에 놓인 돌들이 덜컹거린다고 한다. 돌들이 자연스럽게 움직이지 않으면, 다리가 물살에 떠내려간다고 하니, 물 흐름의 이치를 잘 알아 만든 것이다.

 

천 년이란 긴 세월을 견뎌온 농다리에는 몇 가지 전설이 전해 온다. <농다리를 놓은 임 장군> 이야기를 보면, 고려 시대에 굴티에 사는 임 장군은 매일 아침 세금천에서 세수를 하였다. 어느 추운 겨울날, 임 장군은 한 젊은 여인이 세금천 건너편에서 이쪽으로 건너려고 하는 것을 보고, 무슨 일로 차가운 물을 건너려고 하는가 물었다. 여인은 아버지가 돌아가시어 친정으로 가는 길이라고 하였다. 장군은 여인의 지극한 효심과 딱한 처지를 생각하여 용마를 타고 돌을 날라 다리를 놓았다고 한다. 이 이야기에 등장하는 임 장군은 고려 때의 무신 임연(林衍)인 듯하다. 임연은 고려 때 쳐들어온 몽골군을 고향 사람들과 함께 물리쳐 대정(隊正, 고려 시대 최하위 지휘관)이 된 뒤에 벼슬이 올라 큰 권력을 잡았던 인물이다. 이 이야기서는 이 지역 사람들의 추앙을 받는 임 장군이 용마를 타고 순식간에 놓은 다리라 하여 농다리에 신비성을 부여하였다.

 

<오누이 힘내기와 농다리> 이야기를 보면, 옛날에 굴티 임씨네 집안에 힘이 센 장사(壯士) 남매가 살았다. 어느 날, 남매는 서로 목숨을 걸고 내기를 하였다. 오빠는 굽 높은 나막신을 신고, 목매기송아지를 끌고서 서울에 갔다 오고, 누이동생은 다리를 놓기로 하였다. 어머니가 보니, 딸이 치마로 돌을 날라 다리를 놓는데, 거의 마무리 단계가 되었다. 그런데 아들은 올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어머니는 아들을 살릴 요량으로 팥죽을 쑤어 가지고 가서 딸에게 주면서 먹고 하라고 하였다. 딸이 어머니의 강권에 못 이겨 팥죽을 먹기 시작할 때 아들이 돌아왔다. 내기에 진 딸은 나머지 한 칸을 놓지 못한 채 치마에 있던 돌을 내던지고 죽었다. 여자 장사가 미처 놓지 못한 나머지 한 칸은 일반인이 놓았는데, 장마가 지면 여자 장사가 놓은 다리는 그대로 있지만, 일반인이 놓은 다리는 떠내려가곤 하였다고 한다. 이 이야기에서 임 장군이나 임 장군 여동생은 힘이 장사일 뿐만 아니라 비범한 능력을 지닌 이인(異人)이다. 이 이야기는 전국적인 분포를 보이고 있는 <오뉘 힘내기> 전설을 농다리와 관련지은 것으로, 농다리 건설의 내력을 매우 흥미롭게 설명한다.

 

농다리를 보면, 한두 사람이, 짧은 기간에 놓을 수 있는 다리가 아니다. 오랜 기간에 걸쳐 물의 흐름에 대한 연구를 깊이 하면서 축적한 기술로, 여러 사람이 힘을 합해서 놓은, 규모가 큰 다리이다. 그런데 위와 같은 전설이 전해 오는 것은 무슨 까닭일까? 이것은 농다리를 신이(神異)한 인물과 관련지어 신비스럽게 이야기함으로써 농다리의 유용성과 우수성을 강조하려는 민중의식 때문일 것이다.

 

농다리 옆에는 힘이 빠져 죽은 용마에서 굴러 떨어진 돌이 바닥에 박혔다는 용바위(쌍바위)’, 어머니의 계략으로 내기에서 진 임 장군 여동생이 내던졌다고 하는 돌이 있다. 살고개에는 임 장군과 용마의 발자국인 장수발자국말발자국이 있다. 이러한 증거물들은 위 전설의 진실성과 사실성을 강조하는 구실을 한다.

 

오래 전에 만난 노인의 말에 따르면, 농다리는 능구렁이 울음소리 비슷한 소리를 내어 운 적이 있는데, 그 해에 625 한국전쟁이 일어났다고 한다. , 예로부터 장마에 농다리 상판이 뜨면 나라에 큰 재앙이 일어나고, 훌륭한 인물이 죽거나 기상이변이 일어난다는 말이 전해 온다. 농다리는 두 번 상판이 움직였는데, 1894년 동학혁명이 일어나던 해와 1979년 박정희 대통령이 서거하던 해였다고 한다. 이것은 인근 주민들이 천 년을 지켜온 농다리를 국가의 중대사를 미리 알려주는 신비스런 존재로 인식하고 있었음을 말해 준다.

 

농다리를 28칸으로 세운 것은 하늘의 별자리 28수를 응용한 것이라고 한다. 이것은 천체의 움직임을 깊이 연구하고, 이를 생활에 적용하는 선조들의 동양철학 사상에 의한 것이다. 농다리는 석회를 바르지 않고 자연석을 그대로 쌓아 만들었는데도 28칸 중 25칸이 오랫동안 유실되지 않고 유지되어 왔다. 이것은 농다리의 축조 기술이 매우 뛰어났음을 말해 준다. 토목공학적인 측면에서도 그 유례(類例)가 드문 특이한 돌다리라 하겠다. 이처럼 농다리에는 자연의 원리에 순응하면서 이를 극복하고 생활에 편리하도록 이용하려고 하는 우리 조상들의 지혜가 스며 있다.

 

  농다리를 건넌 뒤에 오르는 나지막한 고갯길은 초평저수지 둘레길과 이어진다. 이 길의 이름은 초평저수지농다리의 머리글자를 따서 지은 초롱길이다. 국토해양부에서는 우리나라 도로의 아름다움과 우수성을 널리 알리기 위하여 2006년에 <한국의 아름다운 길 100>을 발표하였는데, 17번째에 ‘1000년 세월의 농다리가 들어 있다. 아름다운 길은 3개월간 인터넷 공모를 통해 신청을 받은 뒤에, 도로예술사진 등 각 분야의 전문가와 시민단체 등으로 구성된 선정위원회가 미관역사성기능성 등을 종합적으로 검토해 선정한 것이다. 여기에 농다리가 선정된 것은 그 의미가 매우 크다 하겠다.

 

  농다리를 천천히 건너며 보니, 많은 양의 물이 교각에 부딪혀 소리를 내며 힘차게 흐른다. 이 다리를 왕래하는 수많은 사람들의 애환(哀歡)을 지켜보면서 1,000여 년 동안 말없이 자리를 지키고 있는 농다리가 신비스럽게 느껴진다. 농다리를 건너 나지막한 고개를 넘으니, 넓은 가슴에 초록빛 물을 가득 담은 초평저수지가 눈앞에 펼쳐진다. 나는 저수지 둘레의 산자락을 잘 다듬어 만든 초롱길을 걸으며, 5월의 신록과 초록빛 물이 조화를 이룬 멋진 경관을 감상하였다. 한참 걸으니, 마음이 편안해지고, 머리가 맑아지는 것 같다. 이런 길을 걸을 기회를 마련해 준 성동문인협회 임원들께 감사한다. <성동문학 16(서울:성동문인협회, 2016)에 수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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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터키 에르지예스대학교 한국어문학과 객원교수로 와서 한국어와 한국문학, 한국문화를 강의하고 있다. 이곳에서 3년을 지내는 동안 틈이 나는 대로 여러 곳을 여행하고, 많은 사람들을 만났다. 그 중 한국전 참전용사들과 만난 일은 잊을 수 없다.

   지난해 6월 서울장위교회 교우들과 함께 터키의 에게해 연안에 있는 작은 도시 셀축(Selçuk)에 갔을 때의 일이다. 안내자가 한국음식을 먹을 수 있다고 하여 크게 기뻐하며 식당 안으로 들어갔다. 그 식당은 터키인이 운영하는 곳인데, 한국의 비빔밥을 만들어 주었다. 며칠 동안 터키 음식만 먹어 한국 음식이 그립던 차에 비빔밥을 먹으니 아주 맛있었다. 점심 식사 후에 에페스(성경에 나오는 에베소) 유적을 돌아보려면 시간이 많이 걸리니 빨리 차에 오르라는 안내자의 독촉이 있어서 숟가락을 놓기가 무섭게 식당 밖으로 나왔다. 버스에 오르려고 하는데, 한 터키 노인이 다가와 한국어로 안녕하세요?’ 하고 인사를 하였다. 나는 시간에 쫓기기는 하지만, 반가운 마음에 얼른 한국어와 터키어로 인사를 하고, 말을 주고받았다.

   그 분은 한국어도 영어도 잘 못하셔서 터키어로 대화를 해야 하는데, 나의 터키어 실력이 엉망이니, 난감하였다. 서로 아는 단어를 총동원하여 대화를 시도하였다. 한국어, 영어, 터키어 단어를 섞어가며 말하여 그 분이 말하려는 뜻을 대강 짐작하였다.

나는 한국전쟁에 참전하였던 터키 군인이다. 나는 젊은 시절에 목숨을 걸고 싸우며 지킨 한국을 잊지 않고 있다. 그 당시에는 한국의 상황이 매우 처참하였는데, 60여 년이 지난 오늘 전쟁의 상처를 씻고 발전한 한국이 매우 자랑스럽다. 한국인들이 보고 싶어서 한국인이 많이 오는 한국음식점 앞에 왔다. 한국인을 만나니 참 기쁘다.”

그 분은 이렇게 말하면서 한국전쟁 당시에 한국에서 찍은 자기의 사진을 보여주었다. 빛바랜 흑백 사진 속에는 군복을 입은 한 젊은이가 서 있는데, 정말 미남으로 의젓하고, 듬직해 보였다. 그 분의 얼굴과 사진을 다시 보니, 그 분의 옛 모습이 그대로 보였다. 그 분은 한국에 있을 때의 일을 조금 이야기하였다. 그 때 배운 민요 <아리랑>도 안다고 하였다. 우리가 불러 보라고 하니 큰 소리로 부르는데, 음정과 박자를 맞춰 아주 잘 불렀다. 우리들이 <아리랑>을 함께 부르니, 그 분은 신명이 나서 더 힘껏 불렀다. 우리는 그 분과 함께 <아리랑>에 이어 <도라지 타령>도 불렀다. 그 분은 흥이 나서 가볍게 춤을 추면서 노래를 불렀다. 그 분의 표정엔 흥분과 기쁨, 흐뭇함과 감동이 교차되어 나타났다. 내가 그 당시에 터키 군인들이 불러서 한때 한국에서 유행하였던 터키 민요 <위스크다르>를 시작하니, 그 분은 그 노래를 어찌 아느냐는 표정을 지으면서 큰 소리로 불렀다. 나는 그 노래를 어렸을 때 많이 들었는데, 처음 부분만 알고 중간 이후는 잘 몰라 함께 부르지는 못하고, 손뼉을 치며 흥을 돋우었다. 식당 앞에서 노랫소리가 들리니 지나가던 사람들이 발걸음을 멈추고 서서 구경하였다. 우리는 함께 사진을 찍고 나서 한국인은 한국전쟁 때 우리를 도와준 터키를 잊지 않고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오래 오래 건강하세요.” 하는 인사를 하고, 버스에 올랐다. 그 분은 만나서 반가웠다는 말과 고맙다는 말을 되풀이하면서 내게 작게 접은 종이쪽지를 주었다.

    버스에 올라 그 분이 내게 준 종이쪽지를 펴 보았다. 그것은 자기의 이름과 주소를 서툰 글씨로 써서 복사한, 명함 두 배 크기의 종이였다. 거기에는 두르무쉬 알리 지빌(Durmuş Ali Civil)’이라는 자기의 이름과 ‘Belediye Huzur Evi Md. Selçuk İzmir’라는 집 주소가 씌어 있었다. 나는 그 종이를 보며 나이 들어 한국전쟁에 참전하였던 일을 생각하며 한국인을 만나보고 싶어 한국음식점 앞으로 나온 그 분의 심정을 조금은 알 것 같았다. 오후 일정에 쫓겨 그분과 시간을 더 나누지 못하고 작별한 것이 아쉽고, 미안하다. 우리를 만난 기쁨과 바로 헤어져야 하는 아쉬움을 얼굴 가득 보이며 우리가 탄 버스가 멀어질 때까지 손을 흔들며 서 있던 그 분의 모습이 자꾸만 눈에 어린다.

    서기 1950625일에 북의 남침으로 시작된 한국 전쟁은 참혹하기 짝이 없었고, 대한민국의 존립 자체를 위협하였다. 이 때 우리를 도와주어 나라를 지키게 한 것은 유엔군이었다. 유엔군을 파견한 나라는 16개국인데, 그 중에 미국,영국,캐나다에 이어 네 번째로 많은 군인을 보내준 나라가 터키이다. 한국전쟁에 참전한 터키 군인의 수는 15,090명이다. 그 중 741명이 전사하였고, 2,068명이 부상을 당하였으며, 407명이 실종되었거나 포로가 되었다. 그래서 모두 3,216명의 인명 피해를 입었다(터키 문화원 자료 참조). 한국과 터키의 거리는 약 8,000km로 아주 먼 나라이다. 먼 곳에서 한국을 도와준 터키는 정말 고마운 나라이다.

   한민족과 터키 민족(한자어로 돌궐족)은 아주 먼 옛날 중앙아시아 지역에서 이웃하여 살던 민족이다. 삼국 시대만 하여도 돌궐족은 고구려와 이웃하여 살면서 중국이 침략할 때에는 서로 돕던 민족이다. 그 후 돌궐족은 서남쪽으로 이동하여 일부는 중국의 신강 지방에 정착하고, 일부는 이동을 계속하여 아나톨리아 반도(지금의 터키)에 자리 잡았다. 먼 옛날에 이웃하여 서로 도우며 살던 한민족과 터키 민족이 현대에는 대한민국과 터키공화국을 세우고 살고 있다. 한국에 전쟁이 일어나자 터키는 먼 길을 마다하지 않고 달려와 도와주었다. 이런 점을 생각하면, 한국과 터키는 형제의 나라라고 하는 말이 빈 말이 아닌 것 같다.

   나는 터키에 와서 지내면서 한국전쟁에 참전하였던 분들이나, 그 가족들이 어떻게 지내는가 알고 싶고, 그 분들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하고 싶었다. 그래서 참전용사회관을 방문하고, 한국전쟁 참전용사를 만났으며, 참전용사 자손들도 만나 보았다. 참전용사 중에는 한국의 초청으로 한국에 다녀온 분들도 있고, 한국에 가보지 못한 분들도 계셨지만, 전쟁 당시의 참혹하였던 모습과 함께 한국의 발전상을 아는 대로 이야기하였다. 그분들은 한국전쟁에 참전하였던 것을 큰 자랑으로 여기고 있으며, 한국의 눈부신 발전에 놀라움과 함께 큰 보람을 느낀다고 하였다. 참전용사들은 한국 정부로부터 받은 감사장을 소중히 간직하고, 자손들에게 한국은 형제의 나라임을 강조한다고 하였다. 그분들은 한국인들과 만나 이야기하는 것을 좋아하였는데, 그 분들과 정겨운 대화를 나누지 못한 것이 아쉽고 미안하다.

   나는 얼마 전에 셀축에서 아리랑을 함께 부르던 어르신께 우리 일행과 함께 찍은 사진을 인화하여 그 분이 적어준 주소로 우송하였다. 그 분은 그 사진을 보며, 우리와 함께 부르던 한국민요 <아리랑><도라지 타령>, 한국에서 부르던 터키 민요 <위스크다르>를 다시 흥얼거리며 한국을 마음속에 떠올릴 것이다. 그분이 오래오래 건강하게 사시면서 한국에 대한 좋은 소식을 많이 들으시기를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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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을 비롯한 여러 나라에는 기독교 교회가 참으로 많다. 나는 여행을 하면서 교회를 볼 때마다 ‘이 세상에서 가장 먼저 생긴 교회는 어디에 있는, 어느 교회일까?’를 생각한 적이 있다. 그런데 터키에 와서 여행 안내서를 보던 중 ‘터키 안타키야(Antakya)에 있는 성 베드로 동굴교회가 세계 최초의 교회’라는 글을 읽었다. 그래서 얼른 지도를 펴고 안타키아를 찾아보니, 터키의 남동쪽 해안 끝에 있다. 학생들에게 물으니, 버스를 타고 12~13 시간 걸려야 갈 수 있다고 하였다. 주말을 이용하여 갔다 오기에는 먼 곳이어서 방학에 가기로 하고 미뤄 두었다.

   2010년 봄 학기 강의가 끝난 6월 하순에 우리 부부는 양 교수, 김 교수와 함께 밤에 출발하는 버스를 타고 10여 시간을 달려 이른 아침에 이스켄데룬(Iskenderun)에 도착하였다. 이스켄데룬은 옛날에 알렉산더 대왕이 이곳을 지난 것을 기념하여 붙인 이름이라고 한다. 버스 터미널로 마중 나온 2학년 학생 일카이 양을 만나 그곳에서 하루를 지내며 이스켄데룬 시내와 박물관을 구경하고, 지중해 바닷가에 난 길을 따라 산책하였다. 지중해의 물에 손을 담가 보기도 하고, 남국의 정취가 물씬 풍기는 바닷가 길을 걸으며 아름다운 경치를 마음껏 감상하였다.

  그 다음날 오전 10시쯤 일카이 양 언니의 약혼자가 운전하는 차를 타고 안타키아로 향하였다. 이스켄데룬에서 안타키아는 차로 3시간 쯤 걸린다. 좀 가파른 산길을 달리며 보니, 길 양편 산에 올리브 나무가 숲을 이루고 있다. 더 남쪽으로 가니, 끝없이 펼쳐지는 넓은 밭에 옥수수가 자라고 있다. 시리아와의 국경에 쳐 놓은 철조망을 지나 달리니, 옥수수밭과 목화밭이 번갈아가며 이어진다. 올리브나무가 숲을 이루고, 끝없이 펼쳐지는 농토를 가진 터키가 부럽다.

   안타키아(Antakya)는 터키의 남동쪽 해안에 위치한 도시로, 인구는 약 20만 2천명이라고 한다. 안타키아는 성경에 나오는 ‘안디옥’이다. 옛 이름이 ‘하타이(Hatay)’여서 지금도 하타이라고 부르는 사람이 많다고 한다. 성경에 나오는 안디옥은 두 군데이다. 하나는 비시디아 안디옥인데, 터키 내륙 지방에 있는 지금의 얄바치(Yalvaç)로, 아피욘카라히사르(Afyonkarahisar)와 콘야(Konya)의 중간쯤에 있다. 다른 하나는 수리디아 안디옥으로 지금의 안타키야이다.

   이곳은 기원전 2,000년경까지 시리아의 아무트 왕국이 통치하였다. 기원전 17세기경에는 히타이트의 지배를 받았는데, 히타이트가 망한 뒤에는 앗시리아와 페르시아가 다스렸다. 기원전 333년 이 곳에 왔던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더 대왕은 물맛에 감동하여 이곳에 도시를 건설하고 싶어 하였다. 알렉산더 대왕이 세상을 떠난 후 그의 무장(武將)이었던 셀레우코스 1세(Seleukos I Nikator, B.C. 304~280 재위)가 이곳을 지배하였다. 그는 이곳에 안티오키아 왕국을 건설하고, 안타키아를 수도로 정하였다. 그는 이곳의 이름을 그의 아버지 안티오코스를 기념하는 뜻에서 안티오케이아로 명명하였다. 이곳은 물이 풍부한 다프네(하르비예)에 가깝고, 오론테스(Orontes, 아시) 강을 끼고 있어서 크게 발전하였다. 그러나 소왕국의 난립과 전쟁으로 피폐해졌고, 1세기 중반에 로마에 병합되었다. 그 후 시저에 의해 재건되어 상업, 교육, 문화의 도시로 발전하였다.

   안디옥은 예수의 수제자로 로마에 기독교를 전파한 성 베드로가 포교(布敎)의 거점으로 삼았던 곳이다. 바울 사도와 바나바가 와서 생활하고, 선교 여행을 떠난 곳이기도 하다. 이곳에서 A.D 252~300년에 10여 차례의 기독교 공의회가 열렸다. 이곳은 신약성경의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을 쓴 누가의 고향이다. 요한 사도의 수제자인 폴리갑도 이곳 출신이다. 그는 아시아 일곱 교회 중 하나인 서머나 교회 감독으로 있다가 순교하였다. 카파도키아에서 중세 수도원 운동을 이끌던 시몬 성인도 이곳 출신이다. 이처럼 이곳은 기독교 포교의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곳으로, 기독교에서 예루살렘, 로마 다음으로 중요하게 여기는 도시이다.

   오후 1시 40분경에 도심에서 북쪽으로 2km정도 떨어진 곳에 있는 성 베드로 동굴교회에 도착하였다. 이 동굴교회는 1963년 교황 바오로 6세에 의해 성지(聖地)로 선포된 곳이다. 성 베드로의 축일인 6월 29일에는 세계 각지에서 순례단이 찾아와 미사가 행해진다고 한다. 성 베드로 동굴교회는 기독교 발달사에서 매우 중요한 곳이라 생각되어 꼭 가보려고 하였던 곳이어서 이곳에 도착하니, 좀 긴장되기도 하고 흥분도 되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다가 부활하여 승천한 후 제자들은 예수님의 말씀과 가르침을 열심히 전도하였다. 그러나 예수를 부정하는 유대교인들의 박해가 매우 심하였다. 예루살렘에서 박해를 받던 베드로 사도는 배를 타고 이곳으로 왔다. 그를 따르던 신도 중 일부가 이곳으로 와서 이 교회를 세우고, 베드로 사도와 함께 하나님께 예배를 드렸다. ‘베드로’란 이름은 예수로부터 받은 것인데, 교회의 초석으로 ‘바위’를 뜻하는 말이다. 성 베드로 동굴교회가 바위 안에 세워지고, 그 뒤를 이어 많은 교회가 세워진 것은 ‘반석 위에 교회를 세우리라.’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실천한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예수님의 말씀을 믿고 따르던 사람들은 스테반의 순교 이후에 더욱 심해진 박해를 피해 사방으로 흩어졌다. 그 중 일부 사람들은 페니기아와 키프로스와 안디옥으로 가서 유대 사람들에게만 말씀을 전하다가 후에 그리스 사람들에게도 말씀을 전하였다. 그러자 많은 사람들이 믿고 예수를 받아들였다(사도행전 11 : 19). 예루살렘 교회가 이 소식을 듣고 바나바를 안디옥으로 보냈다. 이곳에 온 바나바는 여기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는 바울 사도의 고향 다소(Tarsus)로 가서 바울을 데리고 와 이 교회에서 1년 동안 함께 지내면서 많은 사람들을 가르쳤다. 당시에 예수를 믿고 따르던 사람들을 ‘크리스쳔(Christian)’이라 불렀다(사도행전 11 : 22~26). 이렇게 보면, 이 교회는 이 세상에 세워진 최초의 교회이다. 그리고 이 교회의 신도들은 처음으로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리어진 사람들이다.

   나는 조금 긴장되고 흥분된 마음으로 교회를 살폈다. 교회는 하비브 낫자르산 기슭의 큰 바위를 깎아 만든 동굴 안에 있었다. 교회 안은 100㎡ 쯤 되어 보이는 직사각형의 방인데, 전면의 중앙에는 돌로 쌓은 단이 있고, 그 가운데에 돌로 된 제단이 있다. 제단 앞의 벽 위쪽에는 천국의 열쇠와 두루마리 성서를 든 베드로 사도의 상이 있다. 제단 오른 쪽에는 병을 낫게 하는 효능이 있다고 하는 약수가 있다. 사람들은 이를 성수(聖水)라고 한다. 제단 왼쪽에는 도피처로 사용하였던 터널이 있다. 지금 있는 석조 제단은 12~13세기의 것이고, 모자이크 바닥은 4~5세기 것이라고 한다. 나는 교회 안의 이곳저곳을 둘러보고 성수를 한 모금 마시면서 초기 기독교인들의 경건한 생활 모습을 그려 보았다. 그 때 서양 사람으로 보이는 남녀 30여 명이 들어와 둘러서자 안내자가 이 교회에 대한 설명을 하였다. 설명이 끝나자 일행 중 한 사람이 앞으로 나와 무어라고 하니, 모두 손을 잡고 찬송을 하였다. 찬송이 끝나자 그 사람이 대표로 기도하였다. 일행 모두 나이가 들어 보이는 사람들이었는데, 찬송을 부르고 기도하는 모습이 아주 진지하고 경건하였다. 기도가 끝난 뒤에 어디서 왔느냐고 물으니, 이탈리아에서 성지순례를 왔다고 하였다.

   동굴교회에서 나와 왼쪽 산 능선을 따라 가파른 길을 올라가니 우뚝우뚝 솟은 큰 바위가 여럿 있다. 거기에 베드로와 성모 마리아상이 있는데, 크게 파손되어 있어 자세한 모습을 볼 수 없어 안타까웠다. 그 위에 사람의 얼굴 모양을 한 바위가 있다. 이 바위가 ‘저승의 강’의 사공인 ‘키론의 상(像)’이라고 한다. 이 상(像)은 기원전 2세기에 셀레우코스 왕조의 안티코스 4세 때에 역병(疫病)을 가라앉히기 위해 만들었다고 한다. 그런데 훼손이 심하여 자세한 모습은 알 수 없었다. 키론의 상 옆에 자연동굴이 하나 있는데, 전에 교회로 사용되었다고 한다. 그곳을 보니, 카파도키아에 있는 지하 동굴교회가 떠올랐다.

   다시 성 베드로 동굴교회 앞으로 온 나는 교회를 다시 한 번 둘러보았다. 예수님의 수제자인 베드로가 세운 세계 최초의 교회, ‘크리스쳔’이라는 말이 처음 생긴 교회를 와 보았다는 감격을 가라앉히며 조용히 감사의 기도를 올렸다. 그리고 기념품 가게로 가서 3리라(한화 2,300원 정도)를 주고 성 베드로 동굴교회 사진을 넣고 구워 만든 도자기판 하나를 샀다. 손바닥 반 정토 크기의 이 도자기는 장식용으로 장식장에 넣어 두든지, 서진(書鎭, 책장이나 종이쪽이 바람에 날리지 아니하도록 눌러두는 물건)으로 쓰면서 이곳에 왔던 일을 오래오래 기억해야겠다.  <성동문단 제11호(성동문인협회, 20011>에도 실려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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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터키에 오기 전까지 ‘터키는 자연 경관이 빼어난 곳이 많고, 역사 유적과 기독교 성지(聖地)가 많은 나라’라는 것밖에는 아는 것이 없었다. 그래서 아내와 함께 앞으로 여행할 나라로 꼽고 있었을 뿐이었다. 그러한 내가 뜻하지 않게 터키에 와서 1년 가까이 지내게 되었다. 나는 대학교수로 30여 년 간 근무하다가 정년퇴임을 한 뒤에 제자 교수의 권유로 한국국제교류재단에서 해외 대학에 개설된 한국어문학과에 파견하는 객원교수 초빙 공고를 보았다. 객원교수를 파견할 여러 나라 중 터키가 가장 마음에 들어 응모하였더니, 다행히 선발되었다. 그래서 터키의 중부 지역 카이세리에 있는 에르지예스대학교 한국어문학과 객원교수로 오게 되었다.

   내가 터키에 간다고 하니, 잘 되었다고 기뻐하면서 격려해 주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매우 걱정을 하면서 다시 생각해 보라는 사람도 있었다. 걱정하는 이유는 이슬람 국가에 가서 안전에 문제가 생기면 어떻게 하느냐는 것이었다. 그 말을 들으니, 은근히 겁이 나기도 하였다. 이슬람 국가이기 때문에 안전을 염려하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나는 고등학교 때 세계사 시간에 이슬람교는 ‘한 손에 코란을 들고, 한 손에는 칼을 들고’ 선택을 강요하며 선교(宣敎)한다는 말을 들었다. 이 말을 들은 뒤부터 이슬람교는 ‘무서운 종교’라는 생각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최근에는 미국의 9․11 테러를 비롯하여 세계 여러 곳에서 일어나는 자살폭탄 테러의 배후에 이슬람교도가 있다는 뉴스를 여러 번 접하였다. 또, 몇 년 전에는 이슬람교도에게 인질로 잡혀 있던 한국의 기독교 선교사가 살해되었다는 보도가 있었다. 이러한 일로 이슬람교도는 종교가 다른 사람을 해치기도 하는 무서운 사람들이라는 인식을 갖게 되었다. 이것은 나뿐만 아니라 많은 한국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는 인식일 것이다. 그래서 나는 인구의 98%가 이슬람교도인 터키에 간다는 것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을 떨쳐버릴 수 없었다.

   나는 터키를 소개한 책을 읽으면서 터키는 종교의 자유를 헌법에 보장한 나라라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한국전쟁 때 세 번째로 많은 군인을 파견한 나라, 한국을 형제의 나라로 생각하고 한국인에게 매우 친절한 나라, 우리와 같은 우랄알타이어 계통의 언어를 사용하며, 한국인과 정서면에서 통하는 점이 있는 나라라는 것을 알았다. 서울에 있는 터기문화원에 가서 젊은 터키인 교사한테 터키어를 배우면서 터키 사람에 대해 친근감을 느끼게 되었다. 그러는 동안에 이슬람 국가에 가는 것에 대한 두려움과 불안이 조금씩 누그러졌다.

   터키 카이세리에 와서 처음 만난 사람은 한국어문학과 학과장인 터키인 G 교수이다. 나는 G 교수를 비롯한 여러 교수와 학생들을 접하면서 터키에 대하여 조금씩 알게 되었다. 터키는 이슬람교의 수니파가 주종을 이루고 있고, 종교의 세속화(世俗化) 운동을 한 나라여서 중동 이슬람 국가의 분위기와는 좀 다르다고 한다. 터키에 와서 보고 들은 것 중에서 다음의 몇 가지 일은 나의 이슬람에 대한 생각을 되돌아보게 하였다. 

  내가 터키에 온 것은 2009년 9월 15일인데, 그 때는 라마단 기간이었다. 이슬람력으로 아홉 번째 달은 금식(禁食)하는 달로, 해가 떠 있는 동안에는 음식은 물론 물도 마시지 않는다. 한 달 동안 금식하는 것은 가난한 사람의 고통을 몸으로 느끼고,  신앙심을 키우게 하기 위함이라고 한다. 금식하여 절약한 비용은 가난한 사람에게 직접 주거나 자선 단체에 기부한다. 해가 있는 동안에는 금식을 하고, 해가 진 후 저녁 식사를 할 때에는 가난한 사람을 초대하여 함께 식사한다. G 교수에게 물으니, 아침 5시 전에 아침을 먹고, 저녁 7시 30분경에 자미나 TV에서 금식 해제 신호가 울리면 그 때서야 저녁을 먹는다고 한다. 무려 14시간 30분 동안을 물도 마시지 않고 견디는 일이 얼마나 힘들고 괴로울까! 기독교에서도 금식을 하며 기도하는 사람이 있는데, 물은 마시면서 한다. 자기의 뜻을 펴기 위해 단식(斷食) 투쟁을 하는 사람도 물은 마시면서 한다. 그런데 이슬람교의 금식 시간에는 물도 마지지 못하게 한다니, 참으로 가혹하다는 느낌이 든다. 나는 식사 시간이 조금만 늦어도 참기 어려워 쩔쩔매곤 하는데, 그 긴 시간을 어떻게 참을까! 이것은 깊은 신앙심과 인내심을 갖지 않고는 할 수 없는 일이라 생각한다. 그런데 어린이나 노약자, 임신부 등을 제외한 대부분의 신도들이 금식에 참여한다고 하니, 이들의 신앙심은 정말 대단하다.

   나는 터키에서 살면서 이슬람교와 관련된 큰 명절을 두 번 지냈다. 한 번은 금식 기간이 끝난 다음날부터 3일 간 이어지는 ‘라마단 바이람(금식 명절)’이다. 이때에는 가족과 친지가 서로 만나 금식 기간을 잘 넘겼는가, 건강을 해치지는 않았는가를 확인하면서 명절 음식과 함께 단 것을 나누어 먹는다. 그래서 이를 ‘셰케르 바이람(설탕 명절)’이라고도 한다. 또 한 번은 라마단 바이람이 끝난 뒤 두 달쯤 되는 때에 4일 간 쉬는 ‘쿠루반 바이람(희생 명절)’이다. 코란에 보면, 알라께서 아브라함에게 사랑하는 아들을 제물로 바치라고 명한다. 아브라함은 알라의 뜻에 순종하여 아들을 산으로 데리고 가서 죽여 제물로 바치려고 한다. 그의 믿음을 확인한 알라께서는 아들 대신 양으로 제사하게 하였다는 이야기가 실려 있다. 이것은 기독교의 구약 성경에 나오는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의 이야기와 같다. 희생 명절은 여기에서 연유된 것이다.

   셰케르 바이람을 지내고 한 달 뒤에 성지순례를 떠난 사람은 마호메트(Mahomet)의 탄생지인 메카(Mecca)에서 쿠루반 바이람을 맞이하고, 그렇지 않은 사람은 자기 집에서 명절을 맞는다. 희생 명절에는 각 가정에서 양이나 소를 잡는다. 가족이 많지 않은 집에서는 양을 잡고, 가족이 많은 집에서는 소를 잡는다. 친척이나 이웃이 뜻을 모아 소를 잡기도 한다. 그래서 희생명절에는 온 나라에서 수많은 양과 소가 제물로 목숨을 잃는다. 각 가정에는 메카를 향하여 절하고 기도하는 곳이 있는데, 대개 벽에 코란의 구절을 써 붙인다. 양이나 소를 잡을 준비가 되면 가족 모두 또는 가족 대표가 그 자리에서 또는 집안의 기도처로 가서 기도하고, 양이나 소를 잡는다. 양이나 소를 잡은 후에 다시 예배를 드린다. 잡은 양이나 소의 고기 중 3분의 1은 가족, 3분의 1은 친척 몫이고, 나머지 3분의 1은 불우한 사람에게 나누어 준다. 불우한 사람은 희생명절에 양을 잡지 못하는 사람이다. 자기 둘레에 양을 잡지 못한 사람이 없을 때에는 구호 단체나 기관에 의뢰하여 고기를 나누어 준다고 한다. 셰케르 바이람과 쿠루반 바이람에는 흩어져 살던 가족들이 만나서 명절 음식을 먹으며 즐거운 시간을 갖는다. 가족을 만나기 위해 객지에서 살던 사람은 거의 다 고향을 찾는다. 그래서 전국적으로 교통의 혼잡이 극심하고, 교통사고도 많이 난다. 한국의 설과 추석에 귀성객으로 교통의 혼잡을 이루는 것과 다름없는 현상이다. 
  
   이슬람교도들은 하루에 다섯 번씩 기도를 한다. 해 뜰 무렵, 정오, 오후 4시 경, 해질 무렵, 잠자기 전에 기도를 한다. 마을마다 있는 자미(이슬람사원)에서는 기도 시간을 알리는 방송을 한다. 이를 ‘에잔(ezan)’이라고 하는데, ‘알라는 위대하시다. 모두 자미에 나와서 기도합시다.’는 뜻의 말을 길게 뽑아서 방송한다. 기독교에서 종을 울리는 것과 대조를 보인다. 에잔이 울리면 자기가 있는 곳에서 기도를 한다. 금요일 낮에는 신도들이 자미에 가서 함께 기도한다. 이슬람교인들의 기도 내용은 한국의 기독교인이나 불교 신자들이 기도하는 내용과 별 차이가 없는 듯하다. 이들 역시 서원(誓願) 기도를 한다. 내가 만난 초등학교 교사 한 분은 10년 전에 자가용 승용차를 갖게 해 달라고 기도하면서, ‘차를 사게 되면 자동차 값의 3분의 1을 이웃을 위해 기부하겠다고 서원하였다고 한다. 그는 자동차를 산 뒤에 약속한 대로 차 값의 3분의 1을 ‘불우한 어린이를 위한 기금’으로 기부하였다고 한다. 쿠루반 바이람에 잡은 소나 양의 고기 3분의 1을 불우한 이웃에게 나눠 주는 것이나 소원을 빌면서 불우한 이웃을 돕겠다고 약속하고 이를 이행하는 것을 보면서, 이슬람교는 이웃사랑을 실천하는 종교라는 생각을 하였다.

  이슬람 교리는 이자를 받지 말라고 가르친다. 그래서 남에게 돈을 빌려 줄 때에 이자를 받지 않는다. 은행에 돈을 맡길 때에도 이자를 받지 않는 예금에 가입하는 사람이 많다고 한다. 이슬람교인은 술을 마시지 않는다. 그래서 음식점은 물론, 규모가 큰 슈퍼마켓에서도 술을 팔지 않는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회식을 하여도 술을 마시지 않고, 차나 다른 음료수를 마신다. 한국 사람들처럼 저녁식사 자리에서 반주를 하고, 1차나 2차를 가는 일은 없다. 그래서 시내의 상점이나 식당들도 비교적 이른 시간에 문을 닫으며, 밤늦도록 흥청거리는 일이 없다. 이곳이라고 하여 술이 아예 없고, 모두가 술을 마시지 않는 것은 아니다. 술을 파는 슈퍼마켓이나 술집이 따로 있어서 그곳에 가야만 술을 사거나 마실 수 있다. 술집에 가지 않는 사람은 자기 집에서 술을 마신다.

  이슬람교에서는 돼지고기 먹는 것을 금한다. 돼지고기를 먹지 않으니, 돼지를 기르지도 않으므로 이곳에서는 돼지를 볼 수 없다. 한국어 연수나 교환학생으로 한국에 갔던 학생들 중에는 기숙사에서 주는 된장찌개를 맛있게 먹었다고 한다. 그런데 거기에 돼지고기가 들어 있는 것을 알고는 먹을 수 없어서 밥과 김치만 먹은 날도 있다고 한다. 한국에서 라면을 맛있게 먹었다는 학생에게 한국에서 파는 라면에는 돼지고기 성분이 들어있다고 하니, 깜짝 놀라면서 그런 줄 알았으면 먹지 않을 것이라고 하였다. 이곳 사람들 중에는 한국 라면을 좋아하는 사람이 많이 있다. 그런데 여기에서 파는 한국 라면은 돼지고기 성분을 빼고 만들은 것이다. 이슬람교에서는 살인을 금하고, 자살도 죄악시한다. 따라서 다른 사람을 죽이거나 자살 폭탄 테러(terror)를 하여 많은 사람을 해치는 것은 이슬람 교리에 어긋나는 일이다. 테러 집단이 이슬람교도로 알려진 것은 그들이 이슬람교의 교리에 어긋난 행동을 하면서 이슬람교를 빙자(憑藉)한 때문이라고 한다. 

  이곳 학생들은 신앙심이 깊은 학생도 있고, 좀 약한 학생도 있는데, 대체적으로 순박하고, 친절하다. 한국어과 학생들은 한국을 좋아하고, 한국어를 열심히 공부한다. 카이세리 시내에서 만난 시민들은 아주 친절하고 우호적이다. 내가 아내와 함께 시내에 나가면, 이상하게 보이는지,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우리들을 유심히 쳐다본다. 어린이들은 ‘헬로우’ 하고 부르기도 하고, 고등학교 학생들은 짧은 영어로 말을 걸기도 한다. 어른들은 어디서 왔느냐고 묻고, 한국에서 왔다고 하면 ‘아르카다쉬(친구)’라고 하면서 악수를 청한다. 견과류나 빵과 과자 종류를 파는 가게에서는 맛이 어떨지 몰라 선뜻 사지 못하는 우리에게 맛을 보라고 권하고, 열심히 좋은 점을 설명한다.

  터키에서 1년 가까이 지내는 동안에 이곳에 오기 전에 가졌던 이슬람에 대한 두려움이나 불안감은 없어졌다. 이슬람교도의 독실한 신앙심과 이웃 사랑을 실천하는 모습을 보면서 내가 이슬람교에 대해 그릇된 선입관을 가지고 있었음을 알았다. 이슬람교도 중에 테러 분자가 많다고 알고 있었던 것은 무장 테러 단체들이 이슬람교를 빙자한 때문이라는 것도 알았다.

  모든 종교는 교리(敎理)에 따라 추구하는 지향 가치가 있다. 그것은 교리에 따라 다르게 표현되지만, 포괄적으로 말하면 ‘선(善)’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모든 종교는 선을 추구한다는 공통점을 지니고 있으니, 선교할 때에도 다른 사람의 종교를 인정해 주고, 자기 종교의 좋은 점을 자랑하면서 자기 종교를 믿도록 유도하는 것이 올바른 선교의 방법이라 생각한다. 또, 종교를 정치적 목적이나 주의(主義)․주장(主張)을 실현하는 도구로 삼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러면 다른 종교에 대한 비방(誹謗)이나 배척(排斥)도 없어질 것이고, 다른 종교를 그릇되게 인식하거나 편견(偏見)을 갖게 하는 일도 없어질 것이다. 

  이 글은 <<성동문학 10>>, 성동문인협회, 2010에 실린 것임.



  한 해를 보내고 새해를 맞이할 준비를 하는 12월이 되면 여러 가지 감회가 있기 마련이다. 그런데 머나먼 땅 터키에서 연말을 보내는 금년에는 그 감회가 좀 유별나다.

  나는 터키 카이세리에 있는 에르지예스대학 한국어과에 객원교수로 와서 한국어와 한국문학을 강의하고 있다. 한국에서 비행기로 12시간을 날아 이스탄불에 도착한 뒤에 다시 국내선으로 바꿔 타고 1시간 30분을 날아야 올 수 있는 이곳 대학에 한국어문학과가 개설된 것은 매우 뜻 깊은 일이다. 나는 이 대학에 객원교수로 와서 한국어와 한국문학을 강의하게 된 것에 보람을 느낀다. 우리와 얼굴 모습이 전혀 다른 이곳 젊은이들이 한국어를 열심히 공부하는 것을 보면 아주 대견스럽다. 그들이 서툰 한국말로 ‘한국은 크게 발전한 나라입니다’, ‘한국을 좋아합니다.’, ‘한국에 어학연수를 가거나 유학을 가고 싶어요.’, ‘한국에 가서 살았으면 좋겠어요.’ 하는 말을 들으면 가슴이 뿌듯해진다.

  전 세계 유명 자동차회사 제품의 전시장과 같은 터키 거리에서 현대자동차와 기아자동차, 대우자동차 마크를 단 차가 달리는 것을 보면 어깨가 으쓱해진다. 한국 자동차나 삼성․LG의 전자제품을 써 보니 정말 좋은 제품이라면서 자랑하는 터키 사람을 만나면, 친근감을 느끼게 되고, 이국 생활의 외로움도 잊게 된다. TV를 켜면, 터기의 국영방송에서 한국의 드라마가 방송된다. 그 동안 <대장금>을 비롯한 많은 드라마가 방영되었다고 한다. 이곳에 온 금년 9월 이후 내가 잠깐씩 본 것만 하여도 <이산>, <해신>이 방송되었고, 요즈음은 <선덕여왕>을 방송한다. 터키어로 더빙(dubbing)하였으므로 대사는 알아듣지 못해도 화면을 보면서 한류의 바람이 이곳까지 온 것을 실감한다. 이러한 뿌듯함이나 만족감을 느낄 수 있게 된 것은 한국이 국력이 신장되고, 경제적으로 크게 발전하였기 때문이다. 한국이 선진국의 대열에 합류할 수 있게 된 것은 한국인들이 진취적인 기상과 도전 정신을 가지고, 부지런하고 성실하게 일하였기 때문일 것이다. 전쟁으로 폐허가 되었던 나라를 이만큼 발전시킨 한국인이 자랑스럽다.

  터키는 국토가 대한민국의 8배쯤 되고, 인구는 약 7,500만 명이다. 땅이 넓은 만큼 지하자원도 풍부하다고 한다. 곡식․채소․과일을 가꾸고, 소와 양 등을 많이 길러 온 국민이 먹을거리 걱정을 하지 않는다고 한다. 여행을 하면서 곡식과 채소밭, 과수원이 끝없이 펼쳐지고, 산 전체를 뒤덮은 올리브나무숲이 이어지는 것을 보면 놀라움과 부러움이 교차한다. 터키는 전 국토가 ‘살아 있는 역사박물관’이라고 할 정도로 유적이 많고, 자연 경관이 뛰어난 곳이 많아 세계 여러 나라에서 1년에 1,000만 명 이상이 찾는 관광대국이어서 관광 수입이 엄청나다고 한다. 이런 것을 보니 이 나라의 넓은 땅과 자원, 역사 유적, 자연환경이 부럽기 만하다.

  터키의 거리에는 가는 곳마다 터키공화국 초대대통령이었던 ‘무스타파 케말 아타튀르크’의 동상이 서 있다. 관공서의 사무실이나 학교 강의실은 말할 것도 없고, 가정집에도 아타튀르크 전 대통령의 사진이 걸려 있다. 이것은 터키 사람들이 제1차 세계대전에서 패한 터키의 여러 가지 어려움을 극복하고, 개혁을 단행하여 터키 공화국의 기틀을 마련한 그의 공을 기리고 깊이 존경하기 때문일 것이다. 아타튀르크는 세상을 떠난 지 70여 년이 지난 오늘까지 국부(國父)로 추앙받으며, 터키 사람들의 마음을 잡아주는 구심점 역할을 하고 있다. 정신적 지주로 모시는 대통령이 없는 한국인으로서는 정말 부러운 일이다. 

  터키는 출산율이 높은 편이고, 젊은이들이 많아 국민의 평균 연령이 아주 젊은 나라라고 한다. 출산율이 낮아 인구도 늘지 않고, 노령화가 빠르게 진행되고 있는 한국의 현실과는 아주 대조적이다. 
   
  이곳에서는 인터넷으로 밖에는 한국의 소식을 접할 길이 없다. 인터넷 신문을 열면, 진보와 보수가 서로 다른 주장을 하는 바람에 국론이 분열되어 국력을 한 곳으로 모으지 못하고 있다. 국회는 국가의 장래나 국민들의 삶은 뒤로 하고 당리당략(黨利黨略)을 앞세우면서 입법 활동을 제대로 하지 않아 역대 최악의 성적표를 내놓았다고 한다. 충청권을 비롯하여 온 나라가 세종시 문제로 들끓고 있고, 4대강 문제도 논란이 끊이지 않고 있다. 국토, 자연환경, 자원 등 여러 면에서 부족한 것이 많은 한국이 살 길은 온 국민이 국력을 기르는 일에 뜻을 모아야 한다는 것을 잊고 있는 것만 같아 안타깝다. 그동안 어렵게 이룩한 경제발전의 기틀이 흔들리고, 국가적 신인도가 떨어지지 않을까 매우 걱정된다.
       
  먼 나라에서 연말을 맞으니, 한국에 있는 가족과 친척, 친구, 친지들이 그리워진다. 한국에서 생활하던 때의 편리함과 편안함도 생각난다. 새해에는 온 국민이 뜻을 모아 여러 선진국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기 위해 애쓰는 모습을 소개하는 기사가 넘쳐났으면 좋겠다. 그러면 머나먼 나라에 와 있는 외로움도 잊고 신바람이 나서 맡은 일을 더 잘 할 수 있을 것 같다.
                            <청원군민신문 제157호, 2009. 12. 25일자 제5면>


   지난 7월 하순에 아내와 함께 고향인 홍성에 갔다. 정년퇴직을 한 뒤에도 강의와 출판사와 약속한 원고 집필 때문에 바빠서 벼르기만 하고 가지 못하다가 겨우 시간을 내어 갔다. 먼저 부모님 산소에 성묘를 하고, 누님 댁과 외종형 댁을 방문한 뒤에 친구의 집을 찾아갔다. 

  친구와 반가운 인사를 나눈 뒤에 여러 이야기를 나누며 잘 가꿔 놓은 정원의 나무와 꽃들을 둘러보았다. 마당가와 마당과 이어진 야트막한 언덕에는 여러 가지 과일나무와 정원수, 꽃들이 자라고 있는데, 주인 내외의 성품처럼 정갈하면서도 품위가 있어 보였다. 많은 나무와 꽃 중에서 나의 눈길을 끄는 것은 마당가에 활짝 피어 있는 능소화(凌霄花)였다. 능소화는 마당가에 세워놓은 사람 키 정도의 통나무를 이리저리 감으며 타고 올라간 줄기의 마디마디에서 뻗어 나온 꽃대에 다닥다닥 붙어 피어 있었다. 나팔꽃과 비슷한 깔때기 모양의 주황색 통꽃이 100여 송이 피어 있는데, 아주 화려하면서도 기품이 있고, 생기가 있어 보였다. 꽃이 하도 예뻐 만져보려고 손을 대니, ‘내 몸에는 어느 누구도 손을 댈 수 없다.’는 듯이 톡 떨어져 버렸다. 그 밑을 보니, 시들지 않고 싱싱한 꽃들이 수없이 땅에 떨어져 있었다.

   나는 능소화를 어렸을 때부터 보아왔으나, 별로 관심을 갖지 않고 지내왔다. 그러다가 20여 년 전에 고등학교 선배님 댁 바깥 정원에 흐드러지게 피어 있는 능소화의 예쁜 모습에 마음이 끌려 관심을 갖기 시작하였다. 그래서 사진을 찍어 보관하기도 하고, 꽃말과 전설을 수집하기도 하였다. 그러는 동안에 능소화가 아주 좋아졌다. 내가 친구에게 능소화를 언제 심었는가 물으니, 10여 년 전에 아는 사람의 집에 피어 있는 능소화가 예뻐서 뿌리를 조금 얻어다가 심은 것이 이렇게 자랐다고 하였다. 나는 친구와 함께 능소화의 특성, 꽃말과 전설 등을 이야기하였다. 

   능소화는 쌍떡잎 통꽃식물목 능소화과에 속하는 낙엽성 덩굴나무인데, 높이는 10m정도이며, 잎은 깃모양 겹잎이다. 여름에 깔때기 모양의 주황색 꽃이 피고, 열매는 네모진 삭과(蒴果, 익으면 과피(果皮)가 말라 쪼개지면서 씨를 퍼뜨리는, 여러 개의 씨방으로 된 열매)로 가을에 익는다. ‘금등화(金藤花)’, ‘자위(紫葳)’, ‘능소화나무’라고도 한다. 중국이 원산지로 우리나라 중부 이남에 분포하는데, 옆에서 보면  트럼펫을 닮아서 외국에서는 ‘Chinese trumpet creeper’라고 부르기도 한다.

   능소화는 바람이 불면 마치 여인의 치맛자락처럼 너울너울 흔들거린다. 옛사람들도 이 꽃을 예사로 보지 않고 무척 사랑했던 것 같다. 지금으로부터 약 3000여 년 전에 널리 전해 오는 시를 모은, 동양 최초의 시집인 <시경(詩經)> 속에도 능소화 그림이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오래 전부터 정원수로 길렀는데, 양반집 마당에만 심었고, 상민의 집에서는 심지 않았다. 이 꽃을 상민의 집에서 심으면 양반들한테 불려가 벌을 받았다. 그래서 ‘양반꽃’이라고도 한다. 

   능소화는 분위기가 동양적이라 사찰꽃(절꽃)이라고도 한다. 꽃가루에 독이 있어 유독식물로 알려져 있으며, 꽃속에 생기는 꿀이 눈에 들어가면 실명(失明)한다는 말이 전해 오기도 하나, 확실하지 않다. 내한성(耐寒性)이 약하여 중부 이북보다는 중남부 지방의 건조하지 않은 양지바른 곳에 잘 자라며, 해안 지방에 주로 서식한다. 공해에도 강하고, 뱀의 근접을 막아준다고 하여 별장 및 개인주택 조경에 많이 심는다. 

   꽃에는 꽃의 특징에 따라 상징적인 의미를 부여한 ‘꽃말’이 전해 온다. 장미는 사랑․아름다움, 백합은 순결, 월계수는 영광, 클로버는 행운을 나타낸다. 능소화의 꽃말은 ‘명예’이다. 이것은 능소화에서 느껴지는 화려함과 기개, 싱싱한 채 떨어져 시들은 모습을 보이지 않는 자존심 등을 감안하여 붙인 꽃말이라 하겠다. 화려함과 기개를 느끼게 하는 능소화에는 슬픈 전설들이 전해 온다. 하나는 임금을 기다리다 죽은 궁녀의 넋이 능소화가 되었다는 이야기이다. 

   옛날에 ‘소화’라는 궁녀가 임금의 눈에 띄어 성은(聖恩)을 입고, 빈(嬪)에 봉해졌다. 그녀는 궁궐 안에 마련된 처소에서 지내면서 임금님이 다시 찾아주기를 간절히 기다렸다. 그녀는 매일 담장 밑을 서성이기도 하고, 담장너머를 바라보며 임금을 기다렸다. 그러나 임금은 그녀의 처소를 한 번도 찾지 않았다. 그녀는 기다림에 지쳐서 병이 들어 죽었다. 시녀들은 ‘나는 담장 밑에 묻혀 임금이 오기를 기다리겠다.’는 그녀의 뜻을 따라 시신을 궁궐 담 밑에 묻어 주었다. 이듬해 여름에 그녀의 무덤에서 풀이 자라 꽃이 피었는데, 담장을 휘어 감고 밖을 내다보는 듯하였다. 그래서 이 꽃 이름을 ‘능소화’라고 하였다 한다.

  위 이야기에서 능소화는 임금님의 방문을 간절히 기다리다 죽은 궁녀 소화의 넋이 변하여 핀 꽃인데, 담장에 피어 임금이 오는가를 살피고 있다고 한다. 이렇게 보면, 이 꽃에는 오직 한 분이신 임을 기다리는 여인의 간절한 소원과 기대가 담겨 있다.

  또 다른 이야기에서는 기생 능소화가 죽어 이 꽃이 되었다고 한다.  옛날 어느 고을에 덕망 있는 벼슬아치가 일찍 아내를 여의고 딸과 함께 살았다. 그는 상대편 당파의 세력에 밀려 급히 몸을 피해야 할 지경에 이르렀다. 그는 딸과 사윗감으로 점찍어 두었던 젊은 선비를 데리고 급히 몸을 피하다가 갈림길에 이르렀다. 그는 젊은이와 딸의 손을 모아잡고, 부부의 인연을 맺을 것을 서약하게 한 뒤에 젊은이를 다른 길로 가게 하였다. 그는 딸과 함께 이리저리 떠돌던 중에 병이 들어 위독하게 되었다. 딸은 기적(妓籍)에 이름을 올리고 돈을 받아다가 약을 썼으나, 아버지는 소생하지 못하고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그 후 그녀는 기녀(妓女)가 되었는데, 인물이 예쁘고, 글을 잘하며 가야금에 능했기 때문에 많은 사람의 눈길을 끌었다. 그녀는 많은 남성들이 유혹하였지만, 정절을 지켰다. 한 선비가 그녀의 청초한 모습을 보고, ‘차가운 기운이 서린 꽃’이란 뜻으로 ‘얼음 릉(凌)’ 자, ‘하늘 기운 소(霄)’ 자를 써서 ‘능소화’라고 이름 지어 불렀다.
   몇 년 후 능소화의 아버지가 속했던 당파가 다시 정권을 잡게 되었다. 젊은 선비는 과거에 급제하고, 능소화가 기생 노릇을 하고 있는 고을 원으로 오게 되었다. 능소화의 소문을 들은 원님이 그녀를 찾아가는데, 귀에 익은 가야금 소리가 들렸다. 원님이 능소화를 만나보니, 자기와 정혼한 여인이었다. 능소화가 겪은 일을 들은 원님은 지난 일을 다 잊고, 부부의 연을 이어가자고 하였다. 그녀는 서방님의 뜻이 그러하다면 기꺼이 따르겠다면서, 며칠간의 말미를 달라고 하였다.
   원님은 만나기로 약속한 날에 날에 능소화를 찾아갔다. 그녀는 준비해 두었던 비상(砒霜)을 먹고 죽어가면서, “자신을 정갈하게 지키지 못한 제가 어찌 서방님과 혼인할 수 있겠습니까? 그간의 허물을  탓하지 않으시는 마음만으로도 저는 여한이 없습니다.” 하고 말했다.  
   그 후 그 여인의 무덤에서 덩굴진 줄기가 솟아났고, 퍼져가는 줄기 끝마다 주황빛 꽃들이 피어났다. 품위와 기개가 느껴지고, 활짝 피었는가 싶으면 이내 지고 마는 그 꽃을 사람들은 ‘능소화’라고 불렀다.

   당파 싸움이 한창이던 때를 배경으로 꾸며진 이 이야기에는 한 여인의 지고(至高)한 사랑과 기품이 나타난다. 

   우리나라에는 살았을 때에 간절히 바라고 원하던 일을 이루지 못하고 죽은 사람의 영혼이 그 소원과 관련이 있는 식물이나 동물로 변하였다는 전설이 많이 전해 온다. 그 중 꽃과 관련된 이야기를 ‘꽃유래담’ 또는 ‘꽃전설’이라고 하는데, 이것은 한국인의 환생(還生)에 관한 의식을 바탕으로 꾸며진 것이다.
 
   능소화는 개화 기간이 80일 정도 이어지는데, 색상이 화려하고 기품이 있으며, 젊고 생기가 있다. 많은 꽃들이 다투어 피는 따뜻한 봄을 다 보내고, 뜨거운 태양이 작열(灼熱)할 때에야 자태를 뽐내는데, 아름다움과 도도함이 있다. 손을 대면 떨어지고 말아 마음에 맞지 않는 누구의 손길도 허락하지 않는 절개가 있다. 시들지 않고 떨어져 지는 순간까지도 활짝 피었을 때의 싱싱함을 유지하다가 그 모습 그대로 땅에 떨어져 추한 모습은 보이지 않는 자존심이 있다. 통나무나 담장을 타고 올라가 밖을 살피는 조심성이 있다. 능소화의 이러한 특성이 어디서 유래되었는가는 위의 전설이 잘 설명해 주고 있다.

   화려한 자태를 뽐내는 능소화를 보고 있노라면, 옛날 선비와 같이 함부로 범접하기 어려운 품위와 한번 뜻을 세우면 어떠한 시련이 와도 굽히지 않는 기개가 느껴진다. 많은 남성의 유혹이 있어도 임을 향한 일편단심으로 정절을 지키는 명기(名妓)의 결연함을 생각하게 한다. 능소화 전설은 이런 느낌을 더욱 강하게 해 준다.

    얼마 전에 아는 분이 암으로 세상을 떠났는데, 그 분은 돌아가시기 몇 달 전부터 아는 분들의 면회를 일체 사양하였다고 한다. 아는 분들에게 쇠잔(衰殘)한 모습을 보이지 않아 건강할 때 만났던 모습을 기억해 주기를 바라는 마음에서였을 것이다. 내가 능소화를 보면서 그 분을 떠올린 것은 그 분이 떠날 때의 마음이 시들기 전에 지는 능소화의 본성과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내가 친구에게 그 분의 이야기를 하면서 능소화처럼 품위와 기개를 지니고 살다가 홀연히 떠났으면 좋겠다고 하니, 그 친구 역시 동감이라고 하였다. 나이가 더 들더라도 지금처럼 건강하게 살면서 남에게 추한 모습 보이지 않고 훌쩍 떠났으면 좋겠다. 아름답고 화려한 꽃을 보면서 이런 생각을 하는 것을 보니, 나도 이제 나이가 많이 들었나 보다.

* 이 글은 <충청문학> 19, 서울 : 충청문인협회, 2008에 실려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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