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이나 사물을 부르는 말을 ‘호칭어(呼稱語)’ 또는 ‘부름말’이라고 한다. 우리말의 호칭어는 다양하므로, 바로 알고 써야 한다. 호칭어의 뜻과 용례를 바로 알고 쓰는 사람을 보면, 그에게서 교양미를 느끼게 된다. 그러나 이를 잘못 쓰는 사람의 말이나 글을 대하게 되면 신경에 거슬리고, 그 사람의 어휘력 부족에 안타까움을 느끼게 된다. 이런 경우는 잊히지 않고 오래 기억에 남는다. 내 기억에 남은 여러 사례 가운데 몇 가지만 적어본다.

   얼마 전에 유명인사와 그의 친족이 관련된 사건이 신문과 방송에 오르내린 적이 있다. 그 때 언론은 ‘유명인사 사촌형의 아들’을 ‘5촌 조카’라고 하였다. 사촌형의 아들을 이르는 ‘당질(堂姪)’ 또는 ‘종질(從姪)’이라는 두 음절의 말이 있는데, 왜 언론에서는 그 말을 쓰지 않고 ‘5촌 조카’라고 쓰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형제의 아들딸은 ‘조카[또는 질아(姪兒)]’라고 하고, 사촌형제의 자녀는 ‘당질’이라고 한다. 아버지의 형제자매는 ‘백부(또는 큰아버지)․숙부(또는 작은아버지)’, 고모이다. 아버지의 사촌형제자매는 당숙(堂叔), 당고모(堂姑母)이다. 나와 아버지 형제의 자녀는 종형제로 4촌이고, 아버지 사촌형제의 자녀는 재종(再從)으로 6촌이다. 남자는 누이의 아들딸을 생질(甥姪)이라 하고, 여자는 언니나 여동생의 아들딸을 이질(姨姪)이라고 한다. 이렇게 적절한 호칭어가 있는데, 요즈음에는 이런 말을 잘 쓰지 않고 길게 풀어서 말한다. 한자말이어서 어렵기도 하지만, 핵가족 시대가 되어 이런 호칭어를 쓸 친족이 없기 때문에 잊혀가는 것 같아 씁쓸한 느낌이 든다.

   얼마 전에 온라인 서비스(SNS)에 올린 글 중에 ‘저의 부인이 소천하였습니다’라는 글이 눈에 띄었다. 나는 의아하여 다시 들여다보았으나, 분명 그렇게 적혀 있었다. ‘부인(夫人)’이란 말은 ‘남의 아내를 높여 이르는 말’이다. 예전에는 사대부 집안의 남자가 자기 아내를 부인이라고 부르기도 하였지만, 남에게 말할 때는 쓰지 않았다. 부인은 고대 중국에서는 천자의 비(妃) 또는 제후의 아내를 이르던 말이다. 고려ㆍ조선 시대에는 외명부의 봉작(封爵) 가운데 하나로, 남편이나 아들의 품계에 따라 그 아내와 어머니를 봉하였다. 이런 점을 따져 볼 때 다른 사람에게 자기 아내를 이르는 말로 부인이라고 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 ‘저의 부인’이라기보다는 ‘저의 아내(처, 내자)’라고 쓰는 것이 좋았을 터인데, 황망 중에 실수를 하여 여러 사람에게 교양 없음을 드러내고 말았다.

   호칭어를 잘못 쓴 일을 이야기하다 보니, 어느 교회에서 담임목사의 목회 30주년 기념식을 할 때의 일이 떠오른다. 식순에 그 자리에 참석하신 담임목사의 아버님께 꽃다발을 드리는 순서가 있었다. 그 때 기념식을 진행하는 부담임목사가 “다음은 담임목사님의 ‘선친(先親)’께 꽃다발을 드리는 순서입니다.”라고 말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나는 등에서 땀이 흐를 정도로 민망하고, 얼굴이 화끈거렸다. 선친이란 ‘남에게 돌아가신 자기 아버지를 이르는 말’이다. [남에게 돌아가신 자기 어머니를 이를 때에는 ‘선비(先妣)’라고 한다.] 그러므로 제삼자인 젊은 목사가, 살아계셔서 기념식에 참석하신 담임목사의 아버지를 ‘선친’이라고 하는 것은 아주 부적절한 표현이다. 진행을 맡은 젊은 목사는 ‘선친’이란 말을 남의 아버지를 높여 부르는 말로 알았던 모양이다. 모르면 용감하다는 말이 헛말이 아님을 느끼게 하였다. 담임목사의 아버지를 높여 말하려면, 한자말로 ‘목사님의 춘부장’이라고 하든지, 쉬운 말로 ‘목사님의 아버님(또는 어르신)’이라고 하였으면 좋았을 것이다.

   TV에서 대정부 질문에 나선 국회의원이 “00당 00지역구 국회의원 ‘000 의원’입니다.”라고 자기소개 하는 것을 보았다. 또, 목사가 여러 사람이 모인 자리에서 자기소개 하기를 “00교회 담임목사 ‘000 목사’입니다.”라고 하는 말을 들었다. 한국인은 상대방을 높이는 뜻에서 이름 뒤에 직명을 붙이고, 끝에 ‘님’자를 붙여 부른다. 이것은 상대방을 높여 부르려는 마음에서 생긴 것으로, 오래 전부터 전해 오는 관습이다. 그러나 자기 자신을 말할 때에 위에 적은 국회의원이나 목사처럼 자기 이름 뒤에 직명을 말하면, 자기 스스로를 높이는 것이 되어 실례가 된다. 따라서 남에게 자기를 말하면서 직명을 밝힐 필요가 있을 때에는 직명을 앞에, 이름을 뒤에 두어 ‘의원 000’, ‘목사 000’라고 해야 자기를 낮추는 겸손한 표현이 된다. 상대방이 직위를 알 경우에는 직명은 생략하고 이름만 말하면 된다. 이를 지키지 않으면 겸손을 모르는 교만한 사람으로 인식되기 쉽다.

   호칭어는 자기의 말이나 글이 언론에 노출되는 경우는 말할 것도 없고, 온라인 서비스에 올리는 글에도 잘못 쓰는 일이 없어야 한다. 호칭어를 잘못 사용하면, 자기의 무교양을 드러냄은 물론, 국어 실력을 의심받게 된다. 그에 더하여 대인관계가 불편하게 될 수도 있다. 그러므로 호칭어의 뜻과 용례를 바로 알고 쓰려는 노력을 게을리 해서는 안 된다. 이런 노력은 올바른 국어생활을 위해, 원만한 인간관계 지속을 위해 필요한 일이다. 잘 모를 때에는 알 만한 사람에게 묻거나, 국어사전을 찾아보며 익히면 된다. 호칭어를 바르게 알고 쓰는 것을 사소한 일이라고 무시하지 말고, 늘 관심을 기울여 실수함이 없도록 해야겠다. (2020. 11.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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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10월 둘째 주에 아내와 함께 경기도 오산시 지곶동에 있는 독산성(禿山城)을 찾았다. 그 안에 세마대(洗馬臺)와 보적사(寶積寺)가 있다. 사적 140호로 지정된 이 성은 둘레가 약 3.6㎞인데, 현재 약 400m 정도의 성벽과 성문 다섯 곳이 남아 있다. 백제 시대에 쌓은 이 성은 임진왜란 때 권율(權慄, 1537∼1599) 장군이 이곳에서 왜적과 싸워 크게 이긴 것을 계기로 그 중요성이 부각되었다.

  늦은 나이에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의주목사로 있던 권율은 선조 25(1592)년 4월에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광주목사로 자리를 옮겼다. 임금이 북으로 피난을 떠나고, 한양 도성이 함락되자, 전라도 방어사(防禦使) 곽영(郭嶸) 휘하에 있던 권율은 한양 수복을 위해 군사를 이끌고 북상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전라도 순찰사 이광(李洸)이 수원과 용인에서 무모한 공격을 하다가 대패하자, 뜻을 이루지 못하고 광주로 돌아왔다.

   광주에 돌아온 권율은 지원병을 모집하여 1,500여 명의 군사를 이끌고 북상하다가 금산의 이치(梨峙)에서 고바야가와 다카카게(小早川隆景)가 이끄는 일본 정예군과 싸워 크게 이겼다. 그 공으로 전라도 관찰사로 승진한 그는 일만여 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도성을 수복하기 위해 북진하던 중 독산성에 주둔하게 되었다.

  권율은 훈련도 되지 않았고, 전투 경험도 부족한 군사를 이끌고 공격적인 전투를 벌일 수는 없었다. 그래서 독산성의 지리적 이점을 살려 성을 지키며 지구전을 펼쳤다. 일본군 총사령관은 후방이 차단되어 남방의 일본군과의 연락이 단절될 것을 우려하여 가토오 기요마사(加藤淸正)에게 독산성 공격을 명하였다. 독산성을 포위한 가토오 기요마사는 성 안에 물이 부족한 것을 알고, 성안으로 흐르는 물줄기를 끊은 뒤에 물 한 지게를 성안으로 들여보내며 조롱하였다.

  왜군의 의도를 꿰뚫어 본 권율 장군은 군사들을 조련하는 한편, 병사들에게 가장 높은 곳에 백마를 세워놓고서 흰 쌀을 끼얹으라 하였다. 멀리서 이를 지켜본 왜군은 성 안에 물이 부족하기는커녕 말을 씻길 만큼 넉넉하다고 판단하였다. 이에 기가 꺾인 왜군이 철수하기 시작하자, 그는 퇴각하는 왜군을 추격하여 수많은 왜병을 살상하였다. 권율 장군이 독산성에서 승리하자 조선군의 사기는 크게 올랐고, 각 지역의 의병들이 권율 장군에 합류하였다. 이러한 기세를 업은 권율 장군은 행주산성으로 옮겨가서 왜군과 싸워 큰 승리를 거두었다. 이 싸움이 그 유명한 행주대첩(1593)이다.   

  중국 춘추 시대의 병법가 손무(孫武)는 《손자병법》에서 ‘전쟁은 속임수[兵者詭道也]’라고 하였다. 그의 후손인 손빈(孫矉)은 손자병법 36계에서 ‘무중생유(無中生有, 없는 것에서 새로운 것을 만들어냄)’, ‘수상개화(樹上開花, 나무에 꽃을 피게 함)’의 전술을 말하였다. 왜군을 속여 스스로 물러나게 한 권율 장군의 세마전술은 고도의 심리전으로, 손자병법의 계책을 능가하는 지혜로운 전술이었다. 왜군이 물러간 다음에 선조는 이곳에 ‘세마대’라는 장대를 지어 독산성의 승리를 기리게 하였다고 한다.

  이러한 기만전술은 해전에서도 보인다. 이순신 장군은 유달산 노적봉의 바위를 이엉으로 덮어서 노적가리처럼 꾸몄다. 그리고 주민들에게 군복을 입혀서 노적봉 주위를 계속 돌라고 하여 마치 대군이 있는 것처럼 보이게 하였다. 또, 영산강에 백토가루를 뿌려 바다로 흘러드는 물줄기가 쌀뜨물로 보이게 하였다. 이를 본 왜적들은 조선군은 군세가 대단하고, 군량이 넉넉한 것으로 알고 후퇴하였다고 한다. 당시 노적봉을 돌던 전술은 훗날 문화예술로 승화되어, ‘강강술래’로 발전하였다. 이것은 1954년에 발행된 초등학교 국어 3-2 교과서에 <8. 노적봉과 영산강>이라는 제목으로 수록되었으므로, 나이든 사람에게는 익숙한 이야기이다.

  권율 장군의 세마전술은 임진왜란의 전세를 바꿔 놓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그리고 독산성이 도성 수비에 매우 중요한 전략적 요충지임을 일깨워 주었다. 그래서 임진왜란 중인 선조 27년(1594)에 경기도 관찰사 유근은 이 성을 고쳐 쌓았고, 임란 후인 선조 35년(1602)에 방어사 변응성은 석성으로 고쳐지었다. 정조의 아버지인 사도세자는 온양온천에 행차했다가 환궁하던 중 장마 때문에 독산성에서 하루를 묵고 갔다. 그로부터 30년 뒤 풍수지리 문제로 독산성을 없애야 한다는 논란이 일어났다. 효심이 깊었던 정조는 아버지의 뜻을 기리기 위해 이를 무시하고, 정조 16년(1792)에 새로 짓는 것과 비슷하게 큰 규모로 공사하여 지금의 모습을 갖추었다.

  독산성에서 가장 높은 곳에 있던 장대는 일제강점기와 6․25를 거치면서 파괴되었다. 지금 보는 팔작지붕의 세마대는 1957년에 새로 지은 것이다. 세마대의 남쪽과 북쪽에 ‘洗馬臺’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 그 중 남쪽의 현판은 이승만 대통령이 쓴 것이라고 한다. 이곳에서 이승만 대통령의 필적을 보니, 감회가 새롭다.

  독산성 동문 안의 세마대 동쪽에는 보적사가 있다. 이 절은 백제 아신왕 10년(401)에 전승을 기원하기 위하여 세웠다고 한다. 이 절에는 “옛날에 노부부가 가난을 이기지 못하여 죽기로 결심하고, 남아 있는 쌀 두 되를 부처님께 공양하고 기도한 뒤에 집에 돌아와 보니, 곳간에 쌀이 가득 하였다”는 이야기가 전해 온다. 이런 일이 있은 뒤에 열심히 공양하면 보화가 쌓이는 신통력 있는 절이라는 소문이 퍼져서 절 이름을 ‘보적사’라고 하였다고 한다.

  나는 세마대와 보적사를 둘러본 뒤에 동문에서 출발하여 성곽을 따라 걸으면서 사방을 살펴보았다. 오산, 수원, 화성에 걸쳐 펼쳐진 평야의 한 가운데에 우뚝 솟은 산위에 있어 사면이 환히 내려다 보였다. 군사에 문외한인 내가 보아도 이 성은 전략적 요충지인 것을 알겠다.  

  독산성에서 보인 권율 장군의 세마전술은 보통사람의 상식을 뛰어넘는 지혜에서 나온 고도의 지략이다. 문과에 급제하여 문신으로 출사한 권율이 장군의 칭호를 얻고, 혁혁한 전공을 세울 수 있었던 것은 뛰어난 전략과 전술, 원만한 대인관계, 탁월한 지도력 등을 갖추고 있었기 때문이라 하겠다. 이런 인물은 현대에도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이런 지도자가 출현하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2020. 10. 30.)

독산성 동문
세마대
보적사 대웅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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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금년 봄은 코로나19 감염증 때문에 사회적 거리두기를 하고 있다. 그래서 집 가까이에 있는 공원을 걷거나, 집 뒤에 있는 금호산을 거쳐 매봉산 팔각정까지 다녀오는 일 외에는 현관문을 나서는 일이 없게 되었다. 이렇게 답답한 생활이 두 달째 계속되다 보니, 무미건조한 일상에서 탈출하기 위한 궁리를 하게 되었다. 그래서 사람이 적게 모이고, 멀지 않은 곳으로, 평소에 바쁘다는 핑계로 가지 못한 곳이 어디인가를 생각해 보았다.

  그 때 문득 떠오른 곳이 최영 장군 묘다. 내 고향인 충남 홍성에 ‘최영 장군 활터’가 있고, 애마인 ‘금말’이 화살보다 늦게 달린 줄 알고 목을 벤 직후에 자기의 실수인 것을 알고 울면서 말을 묻었다는 ‘금마총(金馬塚)’이 있다. 그리고 최영 장군의 사당인 기봉사(奇峰祀)가 있다. 나는 이런 곳은 찾아가 보았으나, 묘는 찾아보지 못하여 아쉬운 마음을 간직하고 있던 터라 이곳을 탐방하기로 하였다.

  지난 4월 2일 오전에 아내와 함께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대자동에 있는 최영 장군의 묘를 찾았다.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최영 장군 묘소 입구’라고 쓴 표석에 표시된 방향으로 계단을 올라갔다. 길 좌우에 몇 그루씩 모여서 피어 있는 진달래가 나를 반겨주었다. 그곳을 둘러보는 동안 7~8명의 탐방객도 보았다. 외출을 자제하는 이때에 최영 장군을 추모하기 위해 찾아오는 분들이 있는 것이 귀하게 여겨졌다.

  장군 묘는 단분(單墳)으로, 부인 문화 유씨와 합장한 묘였다. 곡장(曲墻)을 두른 봉분의 바로 앞에는 혼유석(魂遊石)ㆍ상석ㆍ향로석이 있고, 그 좌우와 뒤쪽에 묘비가 하나씩 서 있다. 묘비 앞에는 망주석과 문인석 각 한 쌍이 배열되어 있다. 이 묘의 뒤편의 한 계단 위에는 장군의 부친 최원직(崔元直)의 묘가 있다.

  최영(1316~1388) 장군은 동주(凍州, 강원도 철원의 옛 이름) 최씨로, 강원도 철원에서 태어났다고 하기도 하고, 충남 홍성에서 태어났다고 하기도 한다. 그는 공민왕 1(1352)년 조일신의 난을 평정하고, 1358년 400여 척의 배를 타고 오예포에 침입한 왜구를 격파한 것을 비롯하여 왜구 토벌에 큰 공을 세웠다. 1361년에는 개경까지 침입한 홍건적을 물리치고 수도를 수복하였다. 이후 여러 차례에 걸쳐 왜구의 침입을 격퇴하고, 반란을 평정하였다. 그래서 고려 백성들의 열렬한 지지와 존경을 받았다. 1384년 문하시중(門下侍中)을 거쳐 판문하부사(判門下府使)가 되었다. 명나라가 청령위(鐵嶺衛)를 설치하고 그 이북, 이서, 이동의 땅을 요동에 예속시키려 하자, 요동 정벌을 단행하였다. 그러나 이성계의 위화도 회군으로 뜻을 이루지 못하고, 개성에서 이성계 일파에게 붙잡혔다. 이후 고양ㆍ마산ㆍ충주 등지에 유배되었다가 1388년에 개성에서 처형되어 이곳에 안장되었다.

  최영 장군은 고려를 지키지 못한 한을 품고, 죽임을 당하였다. 그는 처형당할 때 ‘만약 내가 평생 동안 한 번이라도 사사로운 욕심을 품었다면 내 무덤에 풀이 날 것이고, 그렇지 않다면 풀이 나지 않을 것’이라고 하였다고 한다.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의 기록에 따르면, 실제로 그의 묘에 풀이 나지 않아 ‘적분(赤墳)’이라 불렀다고 한다. 사람들은 그의 무덤에 풀이 나지 않는 것은, 그가 사심이 없었음을 증명해 주는 것이라고 믿었다. 그의 묘에는 1970년대까지 풀이 나지 않았으나, 호우로 인한 흙의 유실을 염려한 후손들이, 흙과 잔디를 계속 갈아줘서 1976년부터 풀이 자라기 시작했다고 한다. 600여 년이 지나서야 원한이 풀려서 풀이 자라게 되었나 보다.

  장군의 억울한 죽음을 애통해 하던 민중들은 그를 추앙하는 마음과 그가 생전에 이룬 영웅적인 업적이 뒤엉키면서 상승작용을 일으켜 그를 신격화하게 되었다. 그래서 장군의 위패와 초상을 모시는 집을 짓고, 영검한 신으로 받들기 시작하였다. 그래서 개성 덕물산의 장군당을 비롯하여 충남 홍성 홍북면 노은리, 제주시 추자면 대서리, 제주시 애월읍 하귀리, 경남 통영시 사량면 금평리 등에 사당이 생겼다. 전국의 강신무(降神巫)들은 내림굿을 할 때 대부분 최영(최일이라고도 함) 장군신이 내린다고 한다.

  무당에게 내리는 인격신(人格神)은 김부 대왕신(신라 경순왕), 최영 장군신, 남이 장군신, 임경업 장군신 등 원한을 품고 죽은 인물들이다. 그 중 최영 장군신의 영검이 가장 뛰어나다고 한다. 이것은 민중의 한과 기대와 열망이 크게 응집된 때문이라 하겠다. 무당에게 내린 최영 장군신은 그 무당의 몸주(무당의 몸에 처음으로 내린 신. 무당은 그 신을 주신으로 모신다)가 되어 가장 낮은 곳․아픈 곳․어두운 곳에 있는 서민들의 상처와 아픔을 위로하고, 문제를 해결해 주는 기능을 해 왔다.

  이성계는 역성혁명(易姓革命)에 방해가 되는 최영을 반역자로 몰아 처형하였다. 그러나 조선을 건국한 지 6년 만에 최영 장군에게 ‘무민(武愍)’이라는 시호를 내려 넋을 위로하였다. 이성계도 최영의 사심 없는 충성심만은 믿어 의심하지 않았던 모양이다. 최영 장군은 ‘황금을 보기를 돌같이 하라’는 아버지의 가르침을 평생의 생활신조로 삼고, 이를 실천하며 청렴개결(淸廉介潔)한 삶을 살았다고 한다.

  최영 장군 부자의 묘가 있는 대자산 주변에는 조선 왕족들의 묘가 여럿 있다. 장군의 묘 아래쪽에 성녕대군(誠寧大君) 이종(李種, 태종의 4남, 세종대왕의 동생), 경안군(慶安君) 이회(李檜, 인조의 손자, 소현세자의 3남), 임창군(臨昌君) 이혼(李焜, 인조의 증손, 경안군의 장남), 임성군(臨城君) 이엽(李熀, 경안군의 차남, 임창군의 동생)의 묘가 자리 잡고 있다. 그리고 그 건너편 산에 경혜공주(敬惠公主, 문종의 장녀, 단종의 누이) 내외와 성종의 서자 이성군(利城君) 이관(李慣)의 묘가 있다. 조선 왕족들이 최영 장군을 호위하고 있는 것 같아 아이러니하다.

   나는 최영 장군의 묘를 살펴보고 내려오면서 최영 장군이 지은 시조를 읊조려 보았다. “녹이상제(綠駬霜蹄, 빠르고 좋은 말. ‘녹이’와 ‘상제’는 모두 중국 주나라 목왕이 타던 준마) 살찌게 먹여 시냇물에 씻겨 타고/ 용천설악(龍泉雪鍔, 용천은 보검의 이름이고, 설악은 날카로운 칼날)을 들게 갈아 둘러메고/ 장부의 위국충절(爲國忠節)을 세워 볼가 하노라.” 이 시는 장군의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과 패기를 느끼게 한다.

  지금은 최영 장군 같이 사심 없이 나라를 위해 일하고, 일신을 바칠 각오를 가진 패기 있는 인물의 출현이 기대되는 시기이다. 하루 속히 코로나 감염병 사태가 진정되어 많은 사람들이 최영 장군 묘소를 참배하면서 장군을 추모하고, 애국정신을 본받았으면 좋겠다.(2020. 4.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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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는 나이, 연도, 날짜, 시간, 가격, 운동경기의 득점 등을 말할 때 숫자로 표현한다. 또, 중요한 문제나 일의 계획과 실천 등을 말할 때에도 숫자와 관련지어 설명한다. 이렇게 우리 생활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는 숫자 중에서 가장 많이 쓰이는 숫자는 어느 것일까? 아마도 3일 것이다. 3과 관련된 말은 하루 세 끼, 삼합, 술 석 잔(중매를 잘하면), 3요소, 3원칙, 삼총사, 삼일천하,서당개 3년, 삼청동, 삼년고개,  세 번의 기회, 스리 아웃(three out, 야구), 스리 고(three go, 고 스톱) 등 아주 많다.

 

   3은 1과 2가 만나서 된 수이다. 1은 ‘모든 수의 시작’, ‘만물의 시초’, ‘만사의 근원’이라고 여기는, 양(陽)의 수이다. 2는 ‘짝수의 시작’, ‘길(吉)한 수’로 여기는, 음(陰)의 수이다. 이렇게 보면, 3은 양과 음이 만나 새로운 생명체를 만들어내는 힘[生産力]을 지닌 수로, ‘신성한 수[聖數]’가 된다. 서양의 심리학자 프로이트는 3을 남자의 튼튼한 두 다리와 성기의 상징으로 보아 생산력을 지닌 수라고 하였다. 그에 따르면, 3은 ‘성수(性數, sexual number)’이면서 동시에 ‘성수(聖數, sacred number)’가 된다.

 

   옛사람들은 우주와 자연에 대한 오랜 관찰과 깊은 사유(思惟)를 거쳐 하늘과 땅이 사람과 연계되어 있음을 깨달았다. 이것은 삼재(三才) 사상의 기초가 되었을 것이다. 또 3은 ‘완전수’의 의미를 지닌다. 전에 쓰던 세발솥이나, 지게를 작대기로 받쳐놓은 모습은 3이 완전수임을 실감하게 한다. 그래서 3은 고대로부터 ‘성수(聖數)’, ‘완전수’로 인식되었다. 이런 인식은 생활 속에 스며들어 3은 신성함과 함께 친근감을 갖는 숫자가 되었다. 그에 따라 3은 우리 민족을 비롯한 여러 민족의 문화 속에 녹아들어 다양한 모습으로 나타난다.

 

   「단군신화」를 보면, 환인(桓因) 천제의 아들인 환웅(桓雄)은 인간계로 내려와 곰의 변신체인 웅녀(熊女)와 관계하여 단군을 낳는다. 이것은 하늘과 땅이 화합하여 단군을 낳았다는 것으로, 3이 성수라는 인식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이러한 수 관념은 환웅이 가지고 온 천부인(天符印) 세 개, 데리고 내려온 풍백(風伯)·우사(雨師)·운사(雲師)와 3천의 무리에도 나타난다. 3천은 성수·완전수의 의미를 지닌 3과 ‘많은 수’, ‘완성의 수’의 의미를 지닌 ‘백·천’을 결합한 숫자이다. 따라서 3천은 꼭 3,000이라는 뜻보다는 ‘매우 많은 수’의 의미라 하겠다. 백제가 망할 때 낙화암에서 물에 빠져 죽은 삼천궁녀의 삼천도 같은 의미일 것이다.

 

   고구려인은 삼족오(三足烏)를 수호신으로 믿으며 신성시하였다. 이것은 각저총(角觝冢), 쌍영총(雙楹冢), 천왕지신총(天王地神冢) 등의 고구려 고분 벽화에 삼족오가 많이 그려져 있는 것으로 보아 알 수 있다. 까마귀는 매우 영리하고, 늙은 어미를 봉양하는(反哺) 새이다. 그래서 옛사람들은 까마귀를 영험한 새, 신의 사자 역할을 하는 새로 여겨 신성시하였다. 다리가 셋이라고 한 것은 성스럽게 여기는 까마귀에 성스럽고 완전하다는 숫자 3의 의미가 더해져서 형상화된 것이다. 삼족오가 태양 속에 산다고 한 것은 이를 신성한 태양과 연계하여 더욱 성화(聖化)한 것이라 하겠다.

 

   3을 성수·완전수로 보는 인식이 민간에 널리 퍼져 일상생활에 깊이 자리 잡으면서 3은 친숙한 숫자가 되었다. 옛날이야기에서 환상적인 자녀의 수는 아들·딸 3형제로, 어려움을 극복하고 가정을 일으키거나 효성이 지극한 자녀는 셋째로 표현된다. 또, 고난을 당한 주인공은 세 번의 시련을 극복한 뒤에 성공하고, ‘참을 인(忍) 자 셋으로 살인을 면했다’고 한다. 이것은 3에 대한 민간의 의식을 바탕으로 한 것이다.

 

   어린아이를 점지하고, 산모와 아기를 돌보는 신을 ‘삼신’, 또는 ‘삼신할머니’라고 한다. 《표준국어대사전》을 보면, ‘삼’은 ‘태아를 싸고 있는 막과 태반’, ‘삼 가르다’는 ‘아이를 낳은 뒤에 탯줄을 끊다’로 풀이하였다. 이로 보아 삼신은 ‘산신(産神)’ 또는 ‘태신(胎神)’을 뜻하는 말임이 분명하다. 그런데 3을 성수로 여기면서도 친숙하게 느끼는 마음이 작용하여 삼신을 삼신(三神)으로 인식하게 되었다. 그래서 삼신상을 차릴 때에도 밥과 미역국을 세 그릇 올려놓는다.

 

   전에는 부모님이 세상을 떠나면 초혼(招魂)한 뒤에 사자상(使者床)을 차려 놓았다. 초혼은 육신을 떠난 영혼이 돌아오기를 비는 의식으로, 망인의 주소와 이름을 말한 뒤에 ‘복! 복! 복!’하고 세 번 외친다. 사자상 위에는 밥 세 그릇과 돈을 놓고, 그 옆에 신발 세 켤레를 놓는다. 이것은 죽은 이의 영혼을 저승으로 데려가는 저승사자가 셋이라고 여기는 의식 때문이다. 반함(飯含, 염습할 때에 죽은 사람의 입에 구슬이나 쌀을 물림) 때에도 ‘백 석이요, 천 석이요, 만석이요!’ 하면서 물에 불린 쌀알을 버드나무 숟가락으로, 죽은 사람의 입에 세 번 떠 넣는다.

 

   유교에서는 삼강(三綱)을 강조한다. 공자는 때때로 글을 읽고 배우는 것, 멀리서 친구가 찾아오는 것, 남이 나를 몰라주더라도 개의치 않는 것을 ‘군자의 세 가지 즐거움[君子三樂]’이라고 하였다. 맹자는 하늘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는 것, 부모형제가 평안한 것, 천하 인재를 가르치는 것을 ‘세 가지 즐거움’이라 하였다. 또 공자는 덕이 되는 친구[익자삼우(益者三友)]와 손해를 끼치는 친구[손자삼우(損者三友)]를 셋씩 말하였다. 삼고초려(三顧草廬) 고사에서도 3은 깊은 뜻을 지닌다.

 

   불교에서는 불보(佛寶, 석가모니불과 모든 부처), 법보(法寶, 깊고 오묘한 불교의 진리를 적은 불경), 승보(僧寶, 부처의 가르침을 받들어 실천하는 사람들)를 삼보(三寶)라 하여 매우 중요하게 여긴다. 불교에서 쓰는, 3과 관련된 말은 삼계(三界), 삼겁(三劫), 삼도(三道), 삼생(三生), 삼업(三業), 삼재(三災), 삼천불(三千佛) 등 많이 있다.

 

   기독교에서도 3은 매우 중요하고, 성스러운 숫자이다. 성부(聖父)·성자(聖子)·성령(聖靈)의 삼위일체는 교리의 중심이다. 예수는 광야로 가서 악마의 시험을 세 번 당한다.(마태 4:1~11). 예수는 자신이 사흘 만에 부활할 것을 비유적으로 말하며, “이 성전을 허물어라. 그러면 내가 사흘 만에 다시 세우겠다”(요한복음 2:19)고 한다. 예수는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뒤에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났다. 예수가 잡혔을 때, 베드로는 예수의 말대로 닭이 울기 전에 예수를 세 번 모른다고 한다.

 

   이처럼 3은 우리 문화는 물론, 다른 나라 문화나 종교의 바탕에 자리 잡고 있다. 이제 내가 살면서 중요하게 여기고, 지켜야 할 일 몇 가지를 세 가지로 정리해 본다. 인생에서 한번 무너지면 다시 쌓을 수 없는 세 가지는 존경, 신뢰, 우정이다. 내가 진정 사랑해야 할 사람은 현명한 사람, 덕 있는 사람, 순수한 사람이다. 남에게 주어야 할 세 가지는 필요한 이에게 도움을, 슬퍼하는 이에게 위안을, 가치 있는 일을 하는 이에게 올바른 평점을 주는 일이다. 지켜야 할 일 세 가지는 젊었을 때 일을 자랑하지 말고, 젊은이들 틈에 끼어들려 하지 않으며, 입은 다물고 주머니는 여는 일이다. 이렇게 살면, ‘참을 걸, 베풀 걸, 즐길 걸’ 하는 후회를 하지 않아도 될 것 같다.(2020. 3.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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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며칠 전 텔레비전 채널을 돌리다가, 어머니가 아들의 ‘서자의 굴레’를 벗겨주기 위해 자결하는 장면을 보았다. 채널A에서 방영하는 사극 《천일야사》 중 <첩의 운명-서자의 굴레>의 끝 부분이었다. 우연히 본 사극의 끝부분이 나의 관심을 끈 것은 두 가지 이유에서다. 하나는 이 이야기가 시조 '태산이 높다 하되 하늘 아래 뫼이로다'의 작자로 널리 알려진 양사언에 관한 이야기란 점이고, 다른 하나는 아들의 ‘서자의 굴레’를 벗겨 주기 위해 목숨을 버리는 뜨거운 모성애가 비장하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래서 양사언과 그의 어머니에 관해 살펴보았다.

 

   양사언(楊士彦, 1517년~1584년)은 조선의 문신이며 서예가로, 경기도 포천시 신북면 기지리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돈녕주부(敦寧主簿)를 지낸 양희수(楊希洙)이다. 1546년(명종 1) 문과에 급제하여 삼등현감, 평양군수, 강릉부사, 함흥부윤, 회양군수, 철원군수, 안변군수를 지냈다. 회양군수로 있을 때 금강산에 자주 가서 아름다운 경관을 감상하곤 하였다. 여름 금강산의 이름인 봉래(蓬萊)를 자신의 호로 정한 것은 그가 금강산을 매우 사랑하였음을 말해 준다. 그는 해서(楷書)와 초서(草書)를 잘 쓰는 명필로, 안평대군(安平大君)·김구(金絿)·한호(韓濩)와 함께 조선 전기의 4대 서예가(명필)로 꼽힌다. 문집으로 《봉래집(蓬萊集)》이 있고, 가사 작품으로는 여인의 아름다움을 읊은 <미인별곡(美人別曲)>과 을묘왜란 때 군을 따라 전쟁에 나갔다가 지은 <남정가(南征歌)>가 있다. 우리가 잘 아는 시조 ‘태산이 높다 하되’ 역시 그의 작품이다.

 

   양사언과 그의 어머니에 관한 이야기는 《계서야담(溪西野談)》에 2편, 《청구야담(靑丘野談)》·《해동야서(海東野書)》·《동야휘집(東野彙輯)》·《기문총화(記聞叢話)》·《선언편(選諺篇)》에 각각 1편씩 수록되어 있다. 조선 시대에 전해 오던 이야기를 적은 이들 문헌의 기록은 양사언 어머니의 사람됨과 지혜, 뜨거운 모성애를 알게 해준다.

 

   양사언의 아버지가 고을 원님이 되어 부임하러 가는 길에 어느 농촌마을을 지나게 되었다. 점심때가 되어 한 농가에 들르니, 혼자 집을 보던 소녀가 맞이하였다. 점심을 먹게 해줄 수 있느냐는 양공의 말을 들은 소녀는, 들로 일하러 나간 부모를 부르지 않고, 혼자서 점심밥을 지어 일행을 대접하고, 말에게 먹이를 주었다. 양공은 그녀의 지혜롭고 반듯한 말과 행동에 감탄하였다. 양공은 고마운 마음의 표시로 가지고 있던 빨강·파랑 부채를 주면서, 농담으로 ‘채단(采緞, 혼인 때에, 신랑 집에서 신부 집으로 미리 보내는 푸른색과 붉은색의 비단) 대신 주는 것’이라고 하였다. 소녀는 양공의 이 말을 진담으로 받아들여 마음에 품었다. 그래서 시집가라는 부모의 명을 거역하고, 양공을 모시겠다고 고집하였다.

 

   그녀의 아버지는 양공을 찾아가서, 지난해에 한 소녀에게 빨강·파랑 부채를 준 일이 있는가를 물었다. 양공이 이를 인정하자, 그는 그 일로 자기 딸이 다른 사람에게는 시집가지 않겠다고 하니, 어찌하면 좋겠는가를 물었다. 양공은 한참을 생각한 뒤에, 그녀를 소실로 맞이하였다. 그녀는 양공의 소실이 되어 남편을 지성으로 모시면서 아들 사언과 사기를 낳아 길렀다. 그리고 일찍 세상을 떠난 본부인을 대신하여 살림을 도맡아 하면서 본부인이 낳은 아들 사준을 사랑으로 양육하였다. 그래서 그녀는 양공의 신뢰와 사랑을 받았고, 사준의 존경을 받았다. 그러나 당시의 신분질서로 보아 농민의 딸인 그녀는 양공의 정실부인이 될 수 없어 소실로 살았다. 따라서 그녀가 낳은 두 아들은 서자로, 집안에서는 아들 대접을 받지 못하고, 장성한 뒤에는 벼슬길에 나갈 수 없는 신세였다. 그녀는 이러한 적서(嫡庶)의 차별제도를 타파하고 싶었지만, 그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래서 아들이 그 굴레를 벗을 수 있는 방도를 강구하였다.

 

   위 문헌에 실린 이야기에서는 아들의 ‘서자 굴레’를 벗기려는 그녀의 노력이 두 가지로 이야기된다. 그녀는 남편을 졸라 서울로 올라와 사대문 밖에 아담한 집을 지어놓고, 좋은 선생을 모셔서 아들들이 경서(經書)와 시문(詩文)에 능하게 하고, 선비의 몸가짐을 익히게 한다. 어느 날, 미행(微行)을 나왔다가 비를 만난 임금이 비를 피하려고 그 집에 들렀다가 소년 형제의 접대를 받는다. 임금은 경서와 시문에 능하고, 언행이 반듯한 소년 형제의 비범함에 크게 감복한다. 그래서 소년 형제를 대궐로 데리고 가서 세자의 친구 겸 스승으로 함께 지내게 한다. 그녀는 서자인 아들이 세자의 친구 겸 스승이 되게 함으로써 그들의 앞길을 열어 준다. 이 이야기에서는 그녀의 예지(叡智)와 지모가 돋보인다.

 

   또 다른 이야기도 있다. 양공이 세상을 떠나자, 그녀는 양공의 시신을 입관(入棺)한 뒤에 친족들이 모두 모인 자리에서 장남에게 말한다. “너는 나를 친어미처럼 따랐고, 사언과 사기를 친동생처럼 대하였다. 그러나 이번에 삼년상을 치른 뒤에 내가 죽으면, 나는 서모이니 반년상(半年喪)을 치를 것이다. 그러면 사언과 사기가 서자인 것이 널리 알려질 것이다. 지금 내가 죽어 아버지와 함께 삼년상을 치르면, 두 아이가 서자인 것이 드러나지 않게 된다. 두 아이가 서자인 것이 세상에 드러나지 않게 해 주겠다고 약속하면, 내가 지금 마음 편히 아버지 곁에 눕겠다.” 사준과 친족들이 그녀의 말을 받아들이겠다고 약속하자, 그녀는 여러 사람의 만류를 뿌리치고, 그 자리에서 자결하였다. 사준은 서모와의 약속을 지켜 두 아우를 족보에 올리고, 친동생으로 대하여 서출의 굴레를 벗게 하였다. 본부인의 아들을 친자식처럼 기르고, 친족의 인정을 받은 뒤에 자기의 목숨을 바쳐 아들의 장래를 열어준 그녀의 행동은 모성애의 극치를 보여준다.

 

   양사언은 이런 어머니를 두었기에 서자임에도 불구하고 경서와 시문, 글씨에서 뛰어난 인물이 되었다. 그리고 지혜와 능력을 갖춘, 청렴한 목민관이 되어 칭송을 받았다. 소실이라는 어려운 처지에서 아들을 훌륭하게 키운 양사언의 어머니는 이율곡, 한석봉의 어머니 못지않게 훌륭한 어머니였다. 자녀를 실력 있고, 반듯하게 기른 뒤에 스스로 앞길을 열어가게 한 양사언 어머니의 교육 방법과 태도는 현대의 어머니들이 본받아야 할 일이라 생각한다.(2020. 2.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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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12월 성탄절 무렵부터 1월 초에 예년과 다름없이 많은 연하장을 받았다. 전에는 예쁜 그림이나 사진을 인쇄한 카드에 감사의 말과 새해를 축하하는 글을 정성껏 적어 우편으로 보낸 카드 연하장이 많았다. 그런데 요즈음에는 이메일 또는 스마트폰의 카카오톡이나 문자메시지로 보내는 사이버 연하장이 많다. 카드 연하장이든 사이버 연하장이든 한 해를 보내고 새해를 맞으면서, 부족한 나를 잊지 않고 보내준 것임을 생각하면 반갑고, 기쁘고, 고맙기 그지없다.

 

  연하장은 신년을 축하하면서 소원이 이루어지기를 비는 마음을 주고받은 데서 시작되었다. 서양의 연하장은 15세기 독일에서 아기 예수의 모습과 신년을 축복하는 글이 담긴 카드를 동판(銅版)으로 인쇄한 것이 시초이다. 18세기 말에 명함에 그림을 넣는 풍습이 생겨났는데, 독일·오스트리아·프랑스 등지에서는 이를 친지들에게 보내는 새해 인사장으로 사용하였다. 19세기 후반부터 영국과 미국에서 크리스마스카드를 주고받는 일이 널리 퍼지면서, 성탄 축하와 신년 인사를 함께 인쇄하여 썼다.

 

  동양의 경우, 한(漢)나라 때 명첩(名帖, 또는 拜帖)이라 하여, 처음 방문하는 사람이 상대에게 자신의 이름, 고향, 직함 따위를 적어 건네는 풍습이 있었다. 신년에는 거기에다 안부를 묻거나 덕담을 담은 간략한 문구를 추가했다. 이것이 연하장의 시초라 할 수 있다. 명첩은 한나라 때에는 대나무 조각을 평평하게 다듬어 썼고, 종이가 발명된 뒤에는 붉은 색 종이에 썼다. 명나라 때에는 사대부집 대문에 연하장을 받는 봉투까지 매달아 두었다고 한다.

 

  조선의 연하장에 관하여는 정조·순조 때의 학자 홍석모(洪錫謨)가 쓴 《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의 기록을 눈여겨 볼만하다. 설날에 의정대신은 모든 관원을 거느리고 대궐에 가서 새해 문안을 드리고, 신년을 하례하는 내용의 전문(箋文)을 지어 바쳤다. 각 관청의 벼슬아치들은 이름을 쓴 명함을 관원이나 선생의 집에 들였다. 그 집에서는 대문 안에 옻칠한 쟁반을 두고 이를 받아들였는데, 이를 세함(歲銜)이라고 하였다. 각 지방의 관청에서도 그렇게 하였다고 한다. 문 밖 출입이 자유롭지 못한 중류 이상 가정의 부인들은 자기 집의 여종을 곱게 차려 입혀 인사드려야 할 어른들을 찾아뵙도록 하였다. 이를 ‘문안비(問安婢)’라고 불렀다. 문안비를 맞은 집에서는 자기 집의 종을 보내 답례하였다. 이 때 문안비는 새해를 축하하며 축원하는 서장(書狀)을 들고 다녔다고 한다. 여기에 나오는 신년하례 전문과 세함, 서장에서 연하장의 연원을 찾을 수 있다.

 

  이러한 풍속은 이어서 행해지다가 대한제국 말기에 우편제도가 생겨나면서 점차 사라지고, 연하전보(年賀電報)와 연하우편(年賀郵便)이 등장하였다. 여기에 서양 문화의 영향이 겹쳐 성탄카드와 연하장을 주고받는 풍속이 생겨 널리 퍼졌다. 처음에는 본인의 글씨나 그림에 인사말을 적어 보내더니, 얼마 뒤에는 예쁜 그림이나 사진에 축하의 말을 적은 카드를 인쇄하여 사용하였다. 카드 연하장이 성행하던 때에는 예쁘게 만들어서 파는 연하장, 우체국에서 만든 연하장, 각 기업이나 대학에서 자체적으로 만든 연하장이 있었다. 이 시기의 연하장에는 국내외의 아름다운 풍경이나 문물(文物)의 사진, 예쁜 그림, 정성껏 쓴 글씨, 축원의 뜻을 담은 인사말 등이 망라되어 있었고, 모양이나 종이의 질도 좋은 것이 많았다. 이때에는 연하장을 주고받는 일이 빼놓을 수 없는 연례행사였다. 이 시기의 우체국 직원들은 ‘연하장 홍수’를 처리하느라 수고가 많았다.

 

  산업사회가 지식정보사회로 바뀌면서 종이 연하장은 사이버 연하장에게 자리를 넘겨주었다. 사이버 연하장은 선명한 사진이나 그림·글과 함께 음향도 넣어 입체감을 살릴 수 있다. 보내는 것도 아주 간편하고, 비용이 들지 않으며, 동시에 여러 사람에게 보낼 수 있다. 그래서 요즈음에는 많은 사람들이 사이버 연하장을 주고받는다. 그에 따라 연말연시가 되면 우편함에 넘쳐나던 연하장은 자취를 감추고, 청구서나 광고물만이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다.

 

  연하장을 받으면―사이버 연하장이든 종이 연하장이든 관계없이― 보낸 사람을 만난 듯 반갑고, 기쁘고, 고맙다. 그런데 사이버 연하장의 경우, 그림이나 문구·배경음악이 눈에 익고, 이미 들은 것 같은 느낌이 들 때가 있었다. 그래서 자세히 살펴보니, 인터넷 공간에 떠도는 것이었다. 이것은 다른 사람한테 받은 파일을 다시 나에게 보낸 것이리라. 이럴 때에는 연하장을 보내준 것은 고맙지만, 지극히 형식적인 것이어서, 그 기쁨과 반가움이 반으로 줄었다.

 

  연하장을 받으면, 나는 빠뜨리지 않고 바로 답장을 보낸다. 사이버 공간에 떠도는 연하장을 받아 기쁨이 반감되었던 경우를 몇 번 경험한 나는, 답장을 보낼 때에는 그 사람에게 맞는 말을 적어 보내거나, 내 손으로 직접 연하장을 만들어 보낸다. 컴퓨터를 켜서 지난해에 찍은 사진 중에서 적합 것을 고른 뒤에 거기에 새해를 축하하며 축원하는 말을 쓰고, 내 이름을 적어 연하장 파일을 만든다. 이 파일을 프린터로 인쇄하여 우편으로 보내거나, 사진으로 찍어 카카오톡이나 문자메시지로 보낸다.

 

  답장을 할 때, 사이버 연하장일 경우에는 받은 문자메시지나 카카오톡의 창을 열고 바로 답장을 보낸다. 그러나 우편으로 받은 연하장은 인쇄하여 봉투에 넣고, 주소와 우편번호를 써야 한다. 그리고 우체국에 가서 우표를 사서 붙인 뒤에 부쳐야 하므로, 좀 번거롭게 느껴진다. 우편물을 자주 보내던 몇 년 전만 하여도 연하카드나 우표를 미리 사다놓고 썼으므로 불편함을 느끼지 않았다. 그러나 요즈음에는 우편으로 서신을 주고받는 일이 드물기 때문에 카드나 우표를 사다 놓지 않는다. 그래서 좀 번거롭게 느껴지기도 하지만, 즐거운 마음으로 답장을 보낸다.

 

  새해를 축하하는 전문이나 세함에서 시작된 신년 축하의 글이 손수 그림을 그리거나 글을 써서 정성껏 만드는 연하장으로 바뀌었다. 이것이 인쇄술과 우편제도의 발달에 힘입어 아름다운 사진이나 그림을 넣고 복된 글을 적어 인쇄한 카드 연하장 시대를 열었다. 카드 연하장은 지식정보사회를 맞으면서 사이버 연하장으로 바뀌었다. 나는 이런 연하장의 변화를 보면서 풍속이나 문화는 그 사회의 변화와 함께 하는 것임을 실감하였다. 앞으로 연하장이 어떻게 진화할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새해를 맞는 기쁨과 복된 새해를 축원하는 마음을 나누는 것은 변함이 없으리라 생각한다.(2020. 01.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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