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나이, 연도, 날짜, 시간, 가격, 운동경기의 득점 등을 말할 때 숫자로 표현한다. 또, 중요한 문제나 일의 계획과 실천 등을 말할 때에도 숫자와 관련지어 설명한다. 이렇게 우리 생활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는 숫자 중에서 가장 많이 쓰이는 숫자는 어느 것일까? 아마도 3일 것이다. 3과 관련된 말은 하루 세 끼, 삼합, 술 석 잔(중매를 잘하면), 3요소, 3원칙, 삼총사, 삼일천하,서당개 3년, 삼청동, 삼년고개,  세 번의 기회, 스리 아웃(three out, 야구), 스리 고(three go, 고 스톱) 등 아주 많다.

 

   3은 1과 2가 만나서 된 수이다. 1은 ‘모든 수의 시작’, ‘만물의 시초’, ‘만사의 근원’이라고 여기는, 양(陽)의 수이다. 2는 ‘짝수의 시작’, ‘길(吉)한 수’로 여기는, 음(陰)의 수이다. 이렇게 보면, 3은 양과 음이 만나 새로운 생명체를 만들어내는 힘[生産力]을 지닌 수로, ‘신성한 수[聖數]’가 된다. 서양의 심리학자 프로이트는 3을 남자의 튼튼한 두 다리와 성기의 상징으로 보아 생산력을 지닌 수라고 하였다. 그에 따르면, 3은 ‘성수(性數, sexual number)’이면서 동시에 ‘성수(聖數, sacred number)’가 된다.

 

   옛사람들은 우주와 자연에 대한 오랜 관찰과 깊은 사유(思惟)를 거쳐 하늘과 땅이 사람과 연계되어 있음을 깨달았다. 이것은 삼재(三才) 사상의 기초가 되었을 것이다. 또 3은 ‘완전수’의 의미를 지닌다. 전에 쓰던 세발솥이나, 지게를 작대기로 받쳐놓은 모습은 3이 완전수임을 실감하게 한다. 그래서 3은 고대로부터 ‘성수(聖數)’, ‘완전수’로 인식되었다. 이런 인식은 생활 속에 스며들어 3은 신성함과 함께 친근감을 갖는 숫자가 되었다. 그에 따라 3은 우리 민족을 비롯한 여러 민족의 문화 속에 녹아들어 다양한 모습으로 나타난다.

 

   「단군신화」를 보면, 환인(桓因) 천제의 아들인 환웅(桓雄)은 인간계로 내려와 곰의 변신체인 웅녀(熊女)와 관계하여 단군을 낳는다. 이것은 하늘과 땅이 화합하여 단군을 낳았다는 것으로, 3이 성수라는 인식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이러한 수 관념은 환웅이 가지고 온 천부인(天符印) 세 개, 데리고 내려온 풍백(風伯)·우사(雨師)·운사(雲師)와 3천의 무리에도 나타난다. 3천은 성수·완전수의 의미를 지닌 3과 ‘많은 수’, ‘완성의 수’의 의미를 지닌 ‘백·천’을 결합한 숫자이다. 따라서 3천은 꼭 3,000이라는 뜻보다는 ‘매우 많은 수’의 의미라 하겠다. 백제가 망할 때 낙화암에서 물에 빠져 죽은 삼천궁녀의 삼천도 같은 의미일 것이다.

 

   고구려인은 삼족오(三足烏)를 수호신으로 믿으며 신성시하였다. 이것은 각저총(角觝冢), 쌍영총(雙楹冢), 천왕지신총(天王地神冢) 등의 고구려 고분 벽화에 삼족오가 많이 그려져 있는 것으로 보아 알 수 있다. 까마귀는 매우 영리하고, 늙은 어미를 봉양하는(反哺) 새이다. 그래서 옛사람들은 까마귀를 영험한 새, 신의 사자 역할을 하는 새로 여겨 신성시하였다. 다리가 셋이라고 한 것은 성스럽게 여기는 까마귀에 성스럽고 완전하다는 숫자 3의 의미가 더해져서 형상화된 것이다. 삼족오가 태양 속에 산다고 한 것은 이를 신성한 태양과 연계하여 더욱 성화(聖化)한 것이라 하겠다.

 

   3을 성수·완전수로 보는 인식이 민간에 널리 퍼져 일상생활에 깊이 자리 잡으면서 3은 친숙한 숫자가 되었다. 옛날이야기에서 환상적인 자녀의 수는 아들·딸 3형제로, 어려움을 극복하고 가정을 일으키거나 효성이 지극한 자녀는 셋째로 표현된다. 또, 고난을 당한 주인공은 세 번의 시련을 극복한 뒤에 성공하고, ‘참을 인(忍) 자 셋으로 살인을 면했다’고 한다. 이것은 3에 대한 민간의 의식을 바탕으로 한 것이다.

 

   어린아이를 점지하고, 산모와 아기를 돌보는 신을 ‘삼신’, 또는 ‘삼신할머니’라고 한다. 《표준국어대사전》을 보면, ‘삼’은 ‘태아를 싸고 있는 막과 태반’, ‘삼 가르다’는 ‘아이를 낳은 뒤에 탯줄을 끊다’로 풀이하였다. 이로 보아 삼신은 ‘산신(産神)’ 또는 ‘태신(胎神)’을 뜻하는 말임이 분명하다. 그런데 3을 성수로 여기면서도 친숙하게 느끼는 마음이 작용하여 삼신을 삼신(三神)으로 인식하게 되었다. 그래서 삼신상을 차릴 때에도 밥과 미역국을 세 그릇 올려놓는다.

 

   전에는 부모님이 세상을 떠나면 초혼(招魂)한 뒤에 사자상(使者床)을 차려 놓았다. 초혼은 육신을 떠난 영혼이 돌아오기를 비는 의식으로, 망인의 주소와 이름을 말한 뒤에 ‘복! 복! 복!’하고 세 번 외친다. 사자상 위에는 밥 세 그릇과 돈을 놓고, 그 옆에 신발 세 켤레를 놓는다. 이것은 죽은 이의 영혼을 저승으로 데려가는 저승사자가 셋이라고 여기는 의식 때문이다. 반함(飯含, 염습할 때에 죽은 사람의 입에 구슬이나 쌀을 물림) 때에도 ‘백 석이요, 천 석이요, 만석이요!’ 하면서 물에 불린 쌀알을 버드나무 숟가락으로, 죽은 사람의 입에 세 번 떠 넣는다.

 

   유교에서는 삼강(三綱)을 강조한다. 공자는 때때로 글을 읽고 배우는 것, 멀리서 친구가 찾아오는 것, 남이 나를 몰라주더라도 개의치 않는 것을 ‘군자의 세 가지 즐거움[君子三樂]’이라고 하였다. 맹자는 하늘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는 것, 부모형제가 평안한 것, 천하 인재를 가르치는 것을 ‘세 가지 즐거움’이라 하였다. 또 공자는 덕이 되는 친구[익자삼우(益者三友)]와 손해를 끼치는 친구[손자삼우(損者三友)]를 셋씩 말하였다. 삼고초려(三顧草廬) 고사에서도 3은 깊은 뜻을 지닌다.

 

   불교에서는 불보(佛寶, 석가모니불과 모든 부처), 법보(法寶, 깊고 오묘한 불교의 진리를 적은 불경), 승보(僧寶, 부처의 가르침을 받들어 실천하는 사람들)를 삼보(三寶)라 하여 매우 중요하게 여긴다. 불교에서 쓰는, 3과 관련된 말은 삼계(三界), 삼겁(三劫), 삼도(三道), 삼생(三生), 삼업(三業), 삼재(三災), 삼천불(三千佛) 등 많이 있다.

 

   기독교에서도 3은 매우 중요하고, 성스러운 숫자이다. 성부(聖父)·성자(聖子)·성령(聖靈)의 삼위일체는 교리의 중심이다. 예수는 광야로 가서 악마의 시험을 세 번 당한다.(마태 4:1~11). 예수는 자신이 사흘 만에 부활할 것을 비유적으로 말하며, “이 성전을 허물어라. 그러면 내가 사흘 만에 다시 세우겠다”(요한복음 2:19)고 한다. 예수는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뒤에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났다. 예수가 잡혔을 때, 베드로는 예수의 말대로 닭이 울기 전에 예수를 세 번 모른다고 한다.

 

   이처럼 3은 우리 문화는 물론, 다른 나라 문화나 종교의 바탕에 자리 잡고 있다. 이제 내가 살면서 중요하게 여기고, 지켜야 할 일 몇 가지를 세 가지로 정리해 본다. 인생에서 한번 무너지면 다시 쌓을 수 없는 세 가지는 존경, 신뢰, 우정이다. 내가 진정 사랑해야 할 사람은 현명한 사람, 덕 있는 사람, 순수한 사람이다. 남에게 주어야 할 세 가지는 필요한 이에게 도움을, 슬퍼하는 이에게 위안을, 가치 있는 일을 하는 이에게 올바른 평점을 주는 일이다. 지켜야 할 일 세 가지는 젊었을 때 일을 자랑하지 말고, 젊은이들 틈에 끼어들려 하지 않으며, 입은 다물고 주머니는 여는 일이다. 이렇게 살면, ‘참을 걸, 베풀 걸, 즐길 걸’ 하는 후회를 하지 않아도 될 것 같다.(2020. 3.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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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며칠 전 텔레비전 채널을 돌리다가, 어머니가 아들의 ‘서자의 굴레’를 벗겨주기 위해 자결하는 장면을 보았다. 채널A에서 방영하는 사극 《천일야사》 중 <첩의 운명-서자의 굴레>의 끝 부분이었다. 우연히 본 사극의 끝부분이 나의 관심을 끈 것은 두 가지 이유에서다. 하나는 이 이야기가 시조 '태산이 높다 하되 하늘 아래 뫼이로다'의 작자로 널리 알려진 양사언에 관한 이야기란 점이고, 다른 하나는 아들의 ‘서자의 굴레’를 벗겨 주기 위해 목숨을 버리는 뜨거운 모성애가 비장하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래서 양사언과 그의 어머니에 관해 살펴보았다.

 

   양사언(楊士彦, 1517년~1584년)은 조선의 문신이며 서예가로, 경기도 포천시 신북면 기지리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돈녕주부(敦寧主簿)를 지낸 양희수(楊希洙)이다. 1546년(명종 1) 문과에 급제하여 삼등현감, 평양군수, 강릉부사, 함흥부윤, 회양군수, 철원군수, 안변군수를 지냈다. 회양군수로 있을 때 금강산에 자주 가서 아름다운 경관을 감상하곤 하였다. 여름 금강산의 이름인 봉래(蓬萊)를 자신의 호로 정한 것은 그가 금강산을 매우 사랑하였음을 말해 준다. 그는 해서(楷書)와 초서(草書)를 잘 쓰는 명필로, 안평대군(安平大君)·김구(金絿)·한호(韓濩)와 함께 조선 전기의 4대 서예가(명필)로 꼽힌다. 문집으로 《봉래집(蓬萊集)》이 있고, 가사 작품으로는 여인의 아름다움을 읊은 <미인별곡(美人別曲)>과 을묘왜란 때 군을 따라 전쟁에 나갔다가 지은 <남정가(南征歌)>가 있다. 우리가 잘 아는 시조 ‘태산이 높다 하되’ 역시 그의 작품이다.

 

   양사언과 그의 어머니에 관한 이야기는 《계서야담(溪西野談)》에 2편, 《청구야담(靑丘野談)》·《해동야서(海東野書)》·《동야휘집(東野彙輯)》·《기문총화(記聞叢話)》·《선언편(選諺篇)》에 각각 1편씩 수록되어 있다. 조선 시대에 전해 오던 이야기를 적은 이들 문헌의 기록은 양사언 어머니의 사람됨과 지혜, 뜨거운 모성애를 알게 해준다.

 

   양사언의 아버지가 고을 원님이 되어 부임하러 가는 길에 어느 농촌마을을 지나게 되었다. 점심때가 되어 한 농가에 들르니, 혼자 집을 보던 소녀가 맞이하였다. 점심을 먹게 해줄 수 있느냐는 양공의 말을 들은 소녀는, 들로 일하러 나간 부모를 부르지 않고, 혼자서 점심밥을 지어 일행을 대접하고, 말에게 먹이를 주었다. 양공은 그녀의 지혜롭고 반듯한 말과 행동에 감탄하였다. 양공은 고마운 마음의 표시로 가지고 있던 빨강·파랑 부채를 주면서, 농담으로 ‘채단(采緞, 혼인 때에, 신랑 집에서 신부 집으로 미리 보내는 푸른색과 붉은색의 비단) 대신 주는 것’이라고 하였다. 소녀는 양공의 이 말을 진담으로 받아들여 마음에 품었다. 그래서 시집가라는 부모의 명을 거역하고, 양공을 모시겠다고 고집하였다.

 

   그녀의 아버지는 양공을 찾아가서, 지난해에 한 소녀에게 빨강·파랑 부채를 준 일이 있는가를 물었다. 양공이 이를 인정하자, 그는 그 일로 자기 딸이 다른 사람에게는 시집가지 않겠다고 하니, 어찌하면 좋겠는가를 물었다. 양공은 한참을 생각한 뒤에, 그녀를 소실로 맞이하였다. 그녀는 양공의 소실이 되어 남편을 지성으로 모시면서 아들 사언과 사기를 낳아 길렀다. 그리고 일찍 세상을 떠난 본부인을 대신하여 살림을 도맡아 하면서 본부인이 낳은 아들 사준을 사랑으로 양육하였다. 그래서 그녀는 양공의 신뢰와 사랑을 받았고, 사준의 존경을 받았다. 그러나 당시의 신분질서로 보아 농민의 딸인 그녀는 양공의 정실부인이 될 수 없어 소실로 살았다. 따라서 그녀가 낳은 두 아들은 서자로, 집안에서는 아들 대접을 받지 못하고, 장성한 뒤에는 벼슬길에 나갈 수 없는 신세였다. 그녀는 이러한 적서(嫡庶)의 차별제도를 타파하고 싶었지만, 그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래서 아들이 그 굴레를 벗을 수 있는 방도를 강구하였다.

 

   위 문헌에 실린 이야기에서는 아들의 ‘서자 굴레’를 벗기려는 그녀의 노력이 두 가지로 이야기된다. 그녀는 남편을 졸라 서울로 올라와 사대문 밖에 아담한 집을 지어놓고, 좋은 선생을 모셔서 아들들이 경서(經書)와 시문(詩文)에 능하게 하고, 선비의 몸가짐을 익히게 한다. 어느 날, 미행(微行)을 나왔다가 비를 만난 임금이 비를 피하려고 그 집에 들렀다가 소년 형제의 접대를 받는다. 임금은 경서와 시문에 능하고, 언행이 반듯한 소년 형제의 비범함에 크게 감복한다. 그래서 소년 형제를 대궐로 데리고 가서 세자의 친구 겸 스승으로 함께 지내게 한다. 그녀는 서자인 아들이 세자의 친구 겸 스승이 되게 함으로써 그들의 앞길을 열어 준다. 이 이야기에서는 그녀의 예지(叡智)와 지모가 돋보인다.

 

   또 다른 이야기도 있다. 양공이 세상을 떠나자, 그녀는 양공의 시신을 입관(入棺)한 뒤에 친족들이 모두 모인 자리에서 장남에게 말한다. “너는 나를 친어미처럼 따랐고, 사언과 사기를 친동생처럼 대하였다. 그러나 이번에 삼년상을 치른 뒤에 내가 죽으면, 나는 서모이니 반년상(半年喪)을 치를 것이다. 그러면 사언과 사기가 서자인 것이 널리 알려질 것이다. 지금 내가 죽어 아버지와 함께 삼년상을 치르면, 두 아이가 서자인 것이 드러나지 않게 된다. 두 아이가 서자인 것이 세상에 드러나지 않게 해 주겠다고 약속하면, 내가 지금 마음 편히 아버지 곁에 눕겠다.” 사준과 친족들이 그녀의 말을 받아들이겠다고 약속하자, 그녀는 여러 사람의 만류를 뿌리치고, 그 자리에서 자결하였다. 사준은 서모와의 약속을 지켜 두 아우를 족보에 올리고, 친동생으로 대하여 서출의 굴레를 벗게 하였다. 본부인의 아들을 친자식처럼 기르고, 친족의 인정을 받은 뒤에 자기의 목숨을 바쳐 아들의 장래를 열어준 그녀의 행동은 모성애의 극치를 보여준다.

 

   양사언은 이런 어머니를 두었기에 서자임에도 불구하고 경서와 시문, 글씨에서 뛰어난 인물이 되었다. 그리고 지혜와 능력을 갖춘, 청렴한 목민관이 되어 칭송을 받았다. 소실이라는 어려운 처지에서 아들을 훌륭하게 키운 양사언의 어머니는 이율곡, 한석봉의 어머니 못지않게 훌륭한 어머니였다. 자녀를 실력 있고, 반듯하게 기른 뒤에 스스로 앞길을 열어가게 한 양사언 어머니의 교육 방법과 태도는 현대의 어머니들이 본받아야 할 일이라 생각한다.(2020. 2.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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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12월 성탄절 무렵부터 1월 초에 예년과 다름없이 많은 연하장을 받았다. 전에는 예쁜 그림이나 사진을 인쇄한 카드에 감사의 말과 새해를 축하하는 글을 정성껏 적어 우편으로 보낸 카드 연하장이 많았다. 그런데 요즈음에는 이메일 또는 스마트폰의 카카오톡이나 문자메시지로 보내는 사이버 연하장이 많다. 카드 연하장이든 사이버 연하장이든 한 해를 보내고 새해를 맞으면서, 부족한 나를 잊지 않고 보내준 것임을 생각하면 반갑고, 기쁘고, 고맙기 그지없다.

 

  연하장은 신년을 축하하면서 소원이 이루어지기를 비는 마음을 주고받은 데서 시작되었다. 서양의 연하장은 15세기 독일에서 아기 예수의 모습과 신년을 축복하는 글이 담긴 카드를 동판(銅版)으로 인쇄한 것이 시초이다. 18세기 말에 명함에 그림을 넣는 풍습이 생겨났는데, 독일·오스트리아·프랑스 등지에서는 이를 친지들에게 보내는 새해 인사장으로 사용하였다. 19세기 후반부터 영국과 미국에서 크리스마스카드를 주고받는 일이 널리 퍼지면서, 성탄 축하와 신년 인사를 함께 인쇄하여 썼다.

 

  동양의 경우, 한(漢)나라 때 명첩(名帖, 또는 拜帖)이라 하여, 처음 방문하는 사람이 상대에게 자신의 이름, 고향, 직함 따위를 적어 건네는 풍습이 있었다. 신년에는 거기에다 안부를 묻거나 덕담을 담은 간략한 문구를 추가했다. 이것이 연하장의 시초라 할 수 있다. 명첩은 한나라 때에는 대나무 조각을 평평하게 다듬어 썼고, 종이가 발명된 뒤에는 붉은 색 종이에 썼다. 명나라 때에는 사대부집 대문에 연하장을 받는 봉투까지 매달아 두었다고 한다.

 

  조선의 연하장에 관하여는 정조·순조 때의 학자 홍석모(洪錫謨)가 쓴 《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의 기록을 눈여겨 볼만하다. 설날에 의정대신은 모든 관원을 거느리고 대궐에 가서 새해 문안을 드리고, 신년을 하례하는 내용의 전문(箋文)을 지어 바쳤다. 각 관청의 벼슬아치들은 이름을 쓴 명함을 관원이나 선생의 집에 들였다. 그 집에서는 대문 안에 옻칠한 쟁반을 두고 이를 받아들였는데, 이를 세함(歲銜)이라고 하였다. 각 지방의 관청에서도 그렇게 하였다고 한다. 문 밖 출입이 자유롭지 못한 중류 이상 가정의 부인들은 자기 집의 여종을 곱게 차려 입혀 인사드려야 할 어른들을 찾아뵙도록 하였다. 이를 ‘문안비(問安婢)’라고 불렀다. 문안비를 맞은 집에서는 자기 집의 종을 보내 답례하였다. 이 때 문안비는 새해를 축하하며 축원하는 서장(書狀)을 들고 다녔다고 한다. 여기에 나오는 신년하례 전문과 세함, 서장에서 연하장의 연원을 찾을 수 있다.

 

  이러한 풍속은 이어서 행해지다가 대한제국 말기에 우편제도가 생겨나면서 점차 사라지고, 연하전보(年賀電報)와 연하우편(年賀郵便)이 등장하였다. 여기에 서양 문화의 영향이 겹쳐 성탄카드와 연하장을 주고받는 풍속이 생겨 널리 퍼졌다. 처음에는 본인의 글씨나 그림에 인사말을 적어 보내더니, 얼마 뒤에는 예쁜 그림이나 사진에 축하의 말을 적은 카드를 인쇄하여 사용하였다. 카드 연하장이 성행하던 때에는 예쁘게 만들어서 파는 연하장, 우체국에서 만든 연하장, 각 기업이나 대학에서 자체적으로 만든 연하장이 있었다. 이 시기의 연하장에는 국내외의 아름다운 풍경이나 문물(文物)의 사진, 예쁜 그림, 정성껏 쓴 글씨, 축원의 뜻을 담은 인사말 등이 망라되어 있었고, 모양이나 종이의 질도 좋은 것이 많았다. 이때에는 연하장을 주고받는 일이 빼놓을 수 없는 연례행사였다. 이 시기의 우체국 직원들은 ‘연하장 홍수’를 처리하느라 수고가 많았다.

 

  산업사회가 지식정보사회로 바뀌면서 종이 연하장은 사이버 연하장에게 자리를 넘겨주었다. 사이버 연하장은 선명한 사진이나 그림·글과 함께 음향도 넣어 입체감을 살릴 수 있다. 보내는 것도 아주 간편하고, 비용이 들지 않으며, 동시에 여러 사람에게 보낼 수 있다. 그래서 요즈음에는 많은 사람들이 사이버 연하장을 주고받는다. 그에 따라 연말연시가 되면 우편함에 넘쳐나던 연하장은 자취를 감추고, 청구서나 광고물만이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다.

 

  연하장을 받으면―사이버 연하장이든 종이 연하장이든 관계없이― 보낸 사람을 만난 듯 반갑고, 기쁘고, 고맙다. 그런데 사이버 연하장의 경우, 그림이나 문구·배경음악이 눈에 익고, 이미 들은 것 같은 느낌이 들 때가 있었다. 그래서 자세히 살펴보니, 인터넷 공간에 떠도는 것이었다. 이것은 다른 사람한테 받은 파일을 다시 나에게 보낸 것이리라. 이럴 때에는 연하장을 보내준 것은 고맙지만, 지극히 형식적인 것이어서, 그 기쁨과 반가움이 반으로 줄었다.

 

  연하장을 받으면, 나는 빠뜨리지 않고 바로 답장을 보낸다. 사이버 공간에 떠도는 연하장을 받아 기쁨이 반감되었던 경우를 몇 번 경험한 나는, 답장을 보낼 때에는 그 사람에게 맞는 말을 적어 보내거나, 내 손으로 직접 연하장을 만들어 보낸다. 컴퓨터를 켜서 지난해에 찍은 사진 중에서 적합 것을 고른 뒤에 거기에 새해를 축하하며 축원하는 말을 쓰고, 내 이름을 적어 연하장 파일을 만든다. 이 파일을 프린터로 인쇄하여 우편으로 보내거나, 사진으로 찍어 카카오톡이나 문자메시지로 보낸다.

 

  답장을 할 때, 사이버 연하장일 경우에는 받은 문자메시지나 카카오톡의 창을 열고 바로 답장을 보낸다. 그러나 우편으로 받은 연하장은 인쇄하여 봉투에 넣고, 주소와 우편번호를 써야 한다. 그리고 우체국에 가서 우표를 사서 붙인 뒤에 부쳐야 하므로, 좀 번거롭게 느껴진다. 우편물을 자주 보내던 몇 년 전만 하여도 연하카드나 우표를 미리 사다놓고 썼으므로 불편함을 느끼지 않았다. 그러나 요즈음에는 우편으로 서신을 주고받는 일이 드물기 때문에 카드나 우표를 사다 놓지 않는다. 그래서 좀 번거롭게 느껴지기도 하지만, 즐거운 마음으로 답장을 보낸다.

 

  새해를 축하하는 전문이나 세함에서 시작된 신년 축하의 글이 손수 그림을 그리거나 글을 써서 정성껏 만드는 연하장으로 바뀌었다. 이것이 인쇄술과 우편제도의 발달에 힘입어 아름다운 사진이나 그림을 넣고 복된 글을 적어 인쇄한 카드 연하장 시대를 열었다. 카드 연하장은 지식정보사회를 맞으면서 사이버 연하장으로 바뀌었다. 나는 이런 연하장의 변화를 보면서 풍속이나 문화는 그 사회의 변화와 함께 하는 것임을 실감하였다. 앞으로 연하장이 어떻게 진화할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새해를 맞는 기쁨과 복된 새해를 축원하는 마음을 나누는 것은 변함이 없으리라 생각한다.(2020. 01. 16.)

  지난 연말에 친구들이 모여 점심을 먹은 뒤에 다음 달 모임을 언제 할 것인가를 상의하였다. 그때 한 친구가 1월 넷째 주는 ‘구정’이 낀 주여서 복잡하니, 한 주 전이나 뒤에 만나자고 하였다. 이 말이 나오자마자 옆에 있던 다른 친구가 웃으며 “‘구정’이 뭐야. ‘설’이라고 해야지!” 하면서 나를 쳐다보았다. 이 일이 있은 뒤에 만난 사람이나 TV에 나오는 사람 중에도 우리의 전통명절인 ‘설’을 ‘구정’이라고 하는 사람이 많았다.

 

  설은 음력 1월 1일로, 한 해의 건강과 풍요를 기원하는, 우리나라 최대 명절이다. 새해의 첫날이란 뜻으로, 한자어로는 원일(元日)·원단(元旦)·원정(元正)·정일(正日)·세수(歲首)·연수(年首)라고 한다. 또, 새로운 해의 첫날이니, 말이나 행동을 삼가고 조심하여 맞이해야 한다는 뜻으로 신일(愼日) 또는 달도(怛忉)라고도 한다.

 

설의 어원에 대하여는 몇 가지 설이 있다. 설은 ‘설다’에서 파생한 말로, ‘익숙하지 않은 새해의 첫날’이란 뜻이 있다고 한다. ‘섧다’에서 온 말로, 한 살 더 먹어 점차 늙어가는 처지를 서글퍼하는 뜻이 담겨 있다고도 한다. ‘사리다’에서 파생한 말로, ‘삼가고 조심하는 날’이라는 의견도 있다. 이와는 달리 설을 쇠면 한 살 더 먹게 되므로, ‘설’이 사람의 나이를 헤아리는 단위로 정착하여 ‘살’로 바뀌게 된 것이라고 하기도 한다. 그러나 확실하지는 않다.

 

   설에 대한 기록을 보면, 7세기에 나온 중국의 역사서인 수서(隋書)》와 당서(唐書)에 “신라에서는 매년 원단(元旦)에 서로 경하(慶賀)한다. 왕이 연희를 베풀고, 여러 손님과 관원들이 모인다. 이날 일월신(日月神)에게 배례(拜禮)한다.”라고 하였다. 삼국유사(三國遺事) 권1 「사금갑(射琴匣)」조에는 신라 21대 비처왕(毗處王, 炤知王이라고도 함.)이 쥐·까마귀·돼지의 도움으로 받은 서찰에 적힌 대로 거문고의 집을 쏴서 궁주(宮主)와 정을 통한 중을 죽였다. 그 후 해마다 상해(上亥)·상자(上子)·상오(上午)일에는 만사를 꺼려 근신하였다. 정월 보름에는 찰밥을 지어 까마귀에게 주었다. 이를 민간에서는 ‘달도(怛忉)’라고 하였다고 한다. 달도는 설의 다른 이름이기도 하므로, 이 기록에서 설의 유래를 알 수 있다. 그 후 고려 시대와 조선 시대를 거쳐 오면서, 설은 추석과 함께 우리 민족의 큰 명절로 지켜왔다.

 

   역법에는 지구가 태양의 둘레를 한 바퀴 도는 데 걸리는 시간을 1년으로 정한 태양력(太陽曆), 달이 지구를 한 바퀴 도는 시간을 기준으로 만든 태음력(太陰曆), 달과 태양의 움직임을 모두 고려하여 만든 태양태음력(太陽太陰曆, 음력이란 말은 이를 가리키는 것임.)이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오래 전부터 태양태음력을 써 왔으므로, 음력 1월 1일이 설날이었다. 1896년 1월 1일(음력으로는 1895년 11월 17일, 고종 32년)에 태양력을 받아들여 쓰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설은 전과 다름없이 음력으로 쇠었다. 일본은 메이지유신(1868년) 이후 음력을 폐지하고 양력을 사용하면서, 양력 1월 1일을 새해의 첫날로 정하였다.

 

   일제강점기에 일본은 우리의 전통문화 말살 정책의 일환으로, 음력 1월 1일에 설을 쇠지 못하게 하고, 양력 1월 1일에 설을 쇠도록 강요하였다. 이때 양력 1월 1일을 '신정(新正)'이라 하고, 그에 대응하는 음력 1월 1일을 '구정(舊正)'이라고 하였다. 그 결과 신정을 쇠는 사람이 생겨나서 그 수가 조금씩 늘어갔다. 일제는 우리 민족이 설에 떡국을 비롯한 명절음식을 만들어 먹고, 설빔을 입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겨 설 무렵이면 떡 방앗간을 폐쇄하고, 설빔으로 입고 나오는 어린이들의 새 옷에 먹칠을 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전통적인 설을 지키려는 우리 민족의 뜻을 꺾지는 못하였다.

 

  이런 사회적 분위기는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뒤에도 이어졌다. 그래서 우리의 전통적인 설과 신정을 명절로 쇠는 이중과세(二重過歲) 풍속이 생겨났다. 정부에서는 이중과세는 낭비가 많다는 이유로 설을 금하고, 신정을 권장하였다. 국제적 추세에 맞추어서 신정에 쉬고, 설에는 다른 나라와 마찬가지로 일해야 국제수지에 차질이 생기지 않는다는 것이 그 명분이었다. 그러면서 신정 3일간을 공휴일로 지정하였다.

 

   그러나 절대다수의 국민들은 음력 1월 1일을 전통적인 명절로 지켰다. 그래서 세찬을 준비하여 차례를 지내고 성묘하며, 설빔을 입고 세배하며 덕담을 나누었다. 그리고 설날을 전후한 여러 가지 민속도 행하였다. 많은 사람들이 고향을 찾는 귀성(歸省) 행렬이 전국으로 퍼지는, 이른바 ‘민족대이동’도 변함없이 이어졌다. 정부는 국민 다대수가 명절로 여기는 설을 외면할 수 없었다.

 

  오랫동안 공휴일 또는 비공휴일 지정 문제로 몇 차례 오락가락하던 정부는 1985년에 설날을 ‘민속의 날’이라 하고, 하루를 공휴일로 지정하였다. 그러나 이 명칭은 어색하고 궁색하여 국민의 호응을 얻지 못하였다. 그러다가 1989년 음력 정월 초하루부터 본명인 ‘설날’을 공식적으로 사용하고, 사흘을 공휴일로 지정하였다. 이에 맞춰 신정 공휴일은 하루로 축소되었다. 이때 각종 언론매체에서는 70∼80년 만에 설날을 되찾았다며 떠들썩했었다. 그에 따라 설날에 대한 국민의 인식이 달라지고, 설은 추석과 함께 2대 전통명절로 자리매김을 확실히 하였다.

 

  이처럼 구정으로 일컬어졌던 ‘설·설날’이 오늘날과 같이 본명을 찾기까지는 우리 민족 수난의 역사와 함께 진통을 겪었다. 어렵게 찾은 이름인 ‘설·설날’을 일제에 의해 신정(新正)의 상대적 개념으로 쓰던 구정(舊正)이라고 말하는 것은 우리의 전통명절 설을 폄하하는 뜻이 담겨 있다. 그런데도 아직도 설을 구정이라고 하는 사람을 보면 안타깝기 그지없다. 이제는 ‘설·설날’이라는 본래의 이름을 두고 구정이라고 하는 사람이 없었으면 좋겠다.(2020. 1.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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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8월 20일에 아내와 함께 ‘명보아트시네마’에 가서 영화 <사랑의 선물>을 관람하였다. 이 영화는 탈북자 출신의 김규민 감독이, 북한 황해도에서 있었던, 한 가족의 사랑을 다룬 슬픈 이야기이다. 나는 며칠 전에 우연히 김 감독이 TV에 출연하여 이 영화에 관해 말하는 것을 들었다. 그 순간 북한 출신 감독이, 북한에서 실제로 있었던 일을 다룬 영화라면, 북한의 실상을 제대로 알릴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인터넷에서 상영관을 알아내어 극장을 찾아갔다.

   이 영화의 내용은 1998~1999년 대기근 때 북한 황해도에서 실제로 있었던 일이라고 한다. 당을 위해 열심히 일을 하다가 하반신이 마비된 상이군인 남편 김강호(출연배우 문영동)와 헌신적인 아내 이소정(출연배우 김소민), 그리고 열 살 된 딸 효심(출연배우 김려원) 등 세 명의 가족이 겪는 비극적인 사건이다. 아내는 가족의 생계와 아픈 남편의 병 치료를 위해 힘든 일·궂은일을 가리지 않고 몸이 으스러지도록 일을 한다. 그러나 남편의 약값을 댈 수 없어 여기저기에서 돈을 꾸어 쓰고, 마침내는 자기 몸까지 팔게 된다. 그러다가 매춘행위를 단속하는 경찰에게 잡혀 어려움을 겪는다. 그녀에게 돈을 빌려준, 그 지역의 핵심 당 간부는 이 일을 약점으로 그녀를 위협하여, 남편이 상이군인이 되면서 받은 집을 빼앗으려고 한다. 아내는 딸 효심의 생일날, 어렵게 마련한 돈으로 쌀밥에 계란국을 마련한다. 남편이 돈이 어디서 났느냐고 추궁하자, 아내는 둘러대다가 나중에 ‘장군님 접견자’가 되어 상을 받았다고 거짓말을 한다. 이 말을 들은 남편은 장군님이 주신 ‘사랑의 선물’이라며 감격한다. 그러나 삶에 지친 아내와 남편은 서로에게 부담이 되지 않기 위해, 각자 쥐약을 사서 먹고 생을 마감한다.

   영화에서 남편은 돈의 출처를 바로 말하지 못하는 아내에게 “비사회주의자로 낙인찍히면 누가 거들떠볼 것 같으냐?”고 힐난한다. 참다못한 아내는, “당신이 쓰러질 때마다, 아파서 병원에 입원할 때마다 맞는 주사랑 약들은 다 어디서 나는데요?” 하고 따진다. 남편이 “그거야 다 병원에서······.” 라고 말끝을 흐리자 아내는, “요즘 어느 병원에서 주사를 주고 약을 주느냐?”고 소리친다. 그리고 “죽을 만큼 힘들어요. 하루하루가 지옥 같아요. 절약이요? 뭐가 있어야 절약을 하죠!” 하고 울부짖는다. 이 말은 살아보려고 몸부림쳐보았지만, 어찌 할 수 없는 아내의 절규(絶叫)이면서, 동시에 배고픔을 달랠 길 없는 주민들의 외침일 것이다. 북한에서는 ‘고난의 행군’을 강조하면서 자력갱생(自力更生, 남의 힘에 의지하지 않고 자기 힘으로 어려움을 타파한다)과 간고분투(艱苦奮鬪, 고난과 시련을 이겨내면서 있는 힘을 다해 싸운다)로 ‘사회주의 낙원’을 건설하자고 하였다. 이런 선동의 말에 나오는 ‘낙원’은 독재자 김씨 일가와 그의 추종자들이 ‘권력을 독점하며 잘 먹고 잘 사는 곳’으로, 북한 주민에게는 허황한 구호일 뿐이다. 또 다른 장면에서 아내는 “남조선이 ‘갖다 바친 쌀’을 배급받은 적이 없다”고 한다. 이 말은 남한에서 그동안 보낸 쌀이 주민들에게는 배급되지 않았음을 말해 준다.

   나는 영화를 보면서 국민을 먹여 살리지 못하는 북한의 암담한 현실에 절망감을 느꼈다. 입으로는 고난의 행군과 당에 대한 충성을 말하면서 주민의 약점을 이용하여 자기 잇속을 챙기는 당 간부의 파렴치한 행동에 분노하였다. 그들이 말하는 구호나 약속이 허황된 선동의 말인 줄 알면서도 따르겠다고 서약할 수밖에 없는 무기력한 남편의 처지에는 연민을 금할 수 없었다. 아내의 가족에 대한 사랑과 헌신, 순진무구한 딸의 말과 행동에는 측은지심(惻隱之心)을 넘어 슬픔이 엄습하였다.

   김 감독에 따르면, 이 영화는 북한의 인권문제를 다룬다는 이유로 호응을 얻지 못해 배우 캐스팅(연극이나 영화에서 배역을 정함)부터 국내 개봉까지 어려움이 많았다고 한다. 투자자가 나서지 않아 최소의 비용으로 만들어야 했으므로, 제작비가 3억 원밖에 들지 않은 초저예산 영화가 되었다. 어린이의 배역을 정할 때에는 촬영 현장에 보호자가 따라옴에 따르는 비용을 줄이기 위해 고심하다가 자기의 딸을 캐스팅하였다고 한다. 어렵게 제작을 마치고 국내에서 상영하려고 하니, 정부의 친북정책과 이에 따른 사회 분위기 때문에 상영관을 구할 수 없었다. 그래서 먼저 해외 영화제에 출품하여 영국독립영화제에서 최우수 작품상을, 퀸즈국제인권영화제에서 여우주연상을 받았다. 아울러 밀라노국제영화제, 홍콩 PUFF영화제, 보스턴국제영화제, 런던국제영화감독축제, 오클랜드국제영화제 등에서 공식 상영되거나 수상후보작에 뽑혔다. 이렇게 해외에서 상을 받고, 작품성을 인정받은 뒤에 국내로 들어와 일부의 극장에서 상영하게 되었다고 한다. 이것은 북한의 인권문제를 다룬 영화는 발붙일 곳이 없는 우리의 현실을 단적으로 말해 준다.

   북한의 식량난이나 인권문제가 심각한 것은 세계가 다 아는 일이다. 그런데도 북한은 허세를 부리며 한국의 식량 지원을 거절하고 있다. 주민의 먹고 사는 문제도 해결하지 못하며 인권을 탄압하는 북한 집권층의 태도에 실망과 분노를 느끼지 않을 수 없다. 이를 대하는 대한민국 정부는 북한의 비위를 맞추려고 북한의 인권 문제에 입을 다물고 있고, 탈북민을 돕는 일에도 소홀히 하고 있다. 이런 사회적 분위기 때문에 탈북 모자가 굶어 죽는 사건이 일어났고, 그에 따른 대처도 제대로 되지 않고 있다. 이러고도 대한민국이 인권을 존중하는 나라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많은 사람이 이 영화를 보면서 북한의 실상을 제대로 알았으면 좋겠다. (2019. 08. 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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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달에 친구들과 ‘우애 깊은 형제 이야기’의 현장 두 곳을 찾았다. 한 곳은 <의좋은 형제>, 다른 한 곳은 <금덩이를 강물에 던진 형제> 이야기의 배경이 된 곳이다. 두 이야기는 오랜 동안 초등학교 교과서에 실려 있어서 널리 알려진 이야기이다. 오래 전에 왔던 곳을 다시 찾으니, 감회가 새로웠다.

  충남 예산군 대흥면사무소 앞에는 ‘이성만(李成萬)·이순(李淳) 형제 효제비’가 있다. 이 지역에 살던 형제가 부모님이 살아계실 때에는 정성을 다하여 모시고, 돌아가시자 형은 어머니의 묘소, 동생은 아버지의 묘소에서 여묘(廬墓, 무덤 근처에서 여막을 짓고 살면서 무덤을 지킴)하였다. 이들은 아침에는 형이 동생의 집에 가고, 저녁에는 동생이 형의 집에 가서 조석으로 함께 식사하였는데, 국 한 그릇이 있어도 함께 하지 않으면 먹지 않았다. 이들의 지극한 효성과 우애를 기리기 위해 1497년(연산군 3년) 2월에 왕명으로 이 비를 세웠다고 한다. 이들의 효행과 우애에 관하여는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권20 <대흥현조(大興縣條)>에도 실려 있다. 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102호인 이 비 옆에 ‘의좋은 형제 공원’이 조성되어 있다. 이곳에서는 여러 가지 행사를 하면서 이들 형제의 효행과 우애를 기리고 있다.

   이 지역에는 오래 전부터 이들 형제를 모델로 한 이야기가 전해 온다. 옛날에 의좋은 형제가 아래위 마을에 살았다. 어느 해 가을, 벼 베기를 끝낸 뒤에 형은 새살림을 차린 동생에게 많은 벼를 주려고 하였다. 그러나 동생이 조상의 제사를 받드는 형이 더 많이 가져야 한다고 해서 좀처럼 해결이 되지 않았다. 하루는 밤에 형이 볏단을 져다가 동생의 낟가리에 놓았다. 그날 밤 동생도 몰래 볏단을 져다가 형의 낟가리에 놓았다. 이튿날 아침, 형이 낟가리를 보니, 볏단이 그대로여서 이상하게 생각하였다. 동생 역시 낟가리를 보니, 그 수가 줄지 않았으므로 이상하게 여겼다. 두 사람은 이상하게 여기면서 밤마다 볏단을 형은 동생의 낟가리에, 동생은 형의 낟가리에 져다 놓곤 하였다. 어느 어두운 밤, 전과 같이 각각 볏단을 지고 가던 형과 아우는 마을 앞 다리에서 서로 부딪혀 넘어지게 되었다. 그제야 두 사람은 볏단이 줄지 않은 까닭을 알았다고 한다. 초등학교 교과서에 실려 있던 이 이야기에는 아우를 사랑하며 배려하는 형의 마음과 형을 공경하며 사랑하는 동생의 마음이 잘 나타나 있다.

   한강 하류에 놓인 방화대교 남단의 북쪽 강변에는 ‘서서 금덩이를 던지려는 사람과 앉아서 이를 지켜보는 남자가 탄 배’가 있다. 그 옆의 안내판에는 이를 설명하는 ‘투금탄(投金灘) 이야기’가 적혀 있다. 이 이야기는 《고려사 열전》 권34 <효우정유전(孝友鄭愈傳)>에 처음 전하는 것으로,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와 《신증동국여지승람》권10 <양천현산천(陽川縣山川) 공암진조(孔巖津條)>에도 실려 있다.

   고려 공민왕 때 형과 함께 길을 가던 동생이 황금 덩어리 두 개를 주웠다. 아우는 그것을 형과 한 덩이씩 나누어 가졌다. 공암나루에 이르러 배를 타고 강을 건너는데, 별안간 아우가 금덩어리를 강물에 던졌다. 형이 그 이유를 물으니, 동생은 “내가 평소에는 형을 사랑하였으나, 지금 금덩어리를 나누고 보니 형을 미워하는 마음이 생겼습니다. 이것은 상서롭지 못한 물건이니, 차라리 강물에 던지고 잊어버리는 것이 좋겠어서 그랬습니다.”라고 말했다. 이 말은 들은 형은 “네 말이 과연 옳구나.” 하면서 역시 금덩어리를 강물에 던졌다. 이 이야기에는 황금보다 우애를 더 중요하게 여기는 형제의 마음이 잘 나타나 있다.

   초등학교 교과서에 실려 있던 두 이야기는 형제 우애의 소중함을 일깨우고, 실천을 강조하는 기능을 해 왔다. 나는 우애의 극치를 보여주는 두 이야기의 현장을 돌아보면서 우애에 관해 잠시 생각해 보았다. 옛 사람들은 형제간의 우애를 효 다음으로 지켜야 할 덕목으로 꼽으면서, 우애의 실천을 강조하였다. 그래서 전에는 우애로운 가정이 많았고, 우애 관련 미담도 널리 전하여 왔다. 그러나 요즈음에는 자녀의 수가 적은 데다가 개성을 존중하는 의식이 팽배(澎湃)하여 자기 본위의 이기적인 생각을 가지고 살고 있다. 그래서 우애를 강조하는 사람을 보수적인 사람, 또는 세상 물정을 모르는 사람으로 여기게 되었다.

   며칠 전에는 돈 문제로 다투던 58세의 형이 49세의 동생을 죽인 사건이 일어나 사람들을 놀라게 하였다. 아버지의 장례를 치른 형제들이 남은 조위금 분배 문제로 크게 다퉜다는 이야기나, 유산 상속 문제로 다투던 형제자매가 왕래를 끊고 지낸다는 이야기는 이제 새삼스럽게 들리지도 않는다. 재산 문제로 형제간에 다투는 사람이 몇 년 전만 하여도 일곱 집 중 한 집 정도였는데, 요즈음에는 세 집 중 한 집 정도로 많아졌다고 한다. 이런 일로 미루어 보면, 이제 돈 앞에서는 우애를 헌신짝처럼 던져버리는 세상이 된 것 같아 마음이 어두워진다.

   나는 어렸을 때 ‘형우제공 부감원노(兄友弟恭 不敢怨怒, 형은 우애하고 아우는 공손히 하여 감히 원망하거나 성내지 말아야 한다.)’란 말을 듣고, 이를 실천하려고 애쓰며 살아왔다. 퇴계(退溪) 이황(李滉) 선생은 <퇴계가훈(退溪家訓)>에서 “형은 아우보다 먼저 태어났으니, 아우 되는 이는 형을 반드시 공경하라. 아우는 형보다 뒤에 태어났으니, 형 되는 이는 반드시 아우를 사랑해야 한다. 형제간엔 재물을 잊어버리고, 언제나 마음을 천륜(天倫)에 두어야 한다. 만약 이해를 따지면, 불화를 가져오게 될 것”이라고 하였다. 형제 사이에 재물이 끼어들고, 이해를 따지게 되면 불화할 수밖에 없으니, 천륜을 생각하며 마음을 다잡으라는 퇴계 선생의 가르침은 가슴 깊이 새겨야 할 교훈이다.

   일찍이 장자(莊子)는, “형제는 수족과 같고, 부부는 의복과 같다. 의복은 찢어지면 새 것으로 바꿔 입을 수 있으나, 수족은 끊어지면 다시 이을 수 없다.”고 하여 우애의 소중함을 강조하였다. 이 말은 부부관계를 폄하(貶下)한 듯하여 아쉬움이 있지만, 우애를 강조한 뜻은 깊이 새겨둘 만하다.

   우애하는 마음을 갖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부모는 자녀에게 우애의 소중함을 일깨우고, 이를 실천하도록 가르쳐야 한다. 그리고 스스로 자기 형제자매와 우애롭게 지내야 한다. 부모가 스스로 우애하는 모습을 보여주지 않으면, 그 가르침은 효과를 거두지 못할 것이다. 또, 자녀가 둘 이상일 때에는 편애(偏愛)하지 말아야 한다. 편애는 자녀의 마음에 불화의 씨앗을 심어놓는 것이다. 그 씨앗이 싹이 터서 자라면, 우애는 민들레 홀씨처럼 공중으로 날아가 흩어져 버리고 말 것이다. 자녀들에게 우애로운 형제의 미담을 들려주는 것도 우애하는 마음을 심어주는 데에 큰 도움이 될 것이다. 우애 깊은 형제 이야기의 현장을 찾아보며 그 이야기의 의미를 되살려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2019. 12. 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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