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 나와 아내는 김 교수 부부와 함께 문학관장으로 일하고 있는 제자 교수의 초청을 받고 충남 당진에 갔다. 나는 당진에 간 김에 전에 맛본 적이 있는 면천 두견주에 관해 더 알고 싶어서 면천에 갔다. 면소재지에서 들른 식당 아주머니께 두견주에 관해 물으니, 면천두견주보존회관에 가서 알아보는 것이 좋겠다고 하였다. 그래서 두견주보존회관에 가니, 아주머니 한 분이 진달래꽃의 꽃잎과 꽃술을 분리하고 있었다. 꽃술에는 독이 있어 이를 제거한다고 하였다. 잠시 뒤에 출근한 면천두견주보존회원 한 분이 친절하게 맞으며 두견주를 시음(試飮)해 보라고 하였다. 나는 두견주를 맛보며 면천두견주에 관한 여러 이야기를 들었다.
면천두견주는 밑술을 만들고 덧술과 혼합하여 11주의 숙성 기간을 거쳐 발효시켜 담그는 술이다. 밑술을 빚는 날로부터 발효와 숙성에 이어 침전(沈澱)과 저장에 이르기까지 100일이 걸린다. 진달래꽃과 찹쌀을 섞어 만들어 향기가 부드럽고, 감칠맛이 난다. 끈적거릴 정도의 단맛이 있고, 진달래꽃의 빛깔이 그대로 술에 녹아들어 진한 담황색을 띠며, 독특한 향취를 간직하고 있다. 진해(鎭咳, 기침을 그치게 하는 일) 작용과 신경통, 부인냉증, 류마치즘 등의 성인병 예방에 효과가 있다고 한다. 이런 효과는 진달래꽃의 ‘아지라인’ 성분에 의한 것이라 한다. 또, 에탄올을 중심으로 유기산(有機酸), 각종 비타민, 미네랄 등의 여러 영양소가 함유되어 있어 혈액순환촉진과 피로회복에도 특별한 효과가 있다고 한다. 그래서 오래 전부터 민간에서 치료약으로 쓰이기도 하였다. 두견주는 찹쌀과 누룩에 진달래꽃을 가미하여 빚는 발효주이므로, 장기 보존이 어렵다. 그래서 빚은 뒤 반드시 냉장보관을 해야 하며, 일주일 이내에 마셔야 참맛을 느낄 수 있다고 한다.
술은 각 지방에서 그 지역의 특성에 맞는 방식으로 빚어 맛과 향이 다르다. 이를 가려 각 시·도에서는 그 지방의 특성을 드러내는 전통민속주를 지정하였다. 시·도가 지정한 전통민속주로는 서울삼해주, 한산소곡주, 김제송순주, 전주이강주, 진도홍주, 안동소주, 제주오메기술 등 많이 있다. 정부는 그 중에서 전통과 특성이 뚜렷한 술 세 가지를 골라 국가지정 전통민속주로 지정하였다. 면천두견주는 1986년에 국가문화재지정 전통민속주 제86-나호로 지정되었다. 그래서 경주법주, 서울문배주와 함께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세 가지 전통술의 하나가 되었다.
면천 지방에서는 약 1,100년 전부터 두견주를 빚어왔다고 한다. 그런데 일제강점기와 1963년 정부의 양곡주 제조금지령으로 인해 한때 중단되었다. 1986년 정부의 민속주 개발계획에 따라, 4대에 걸쳐 그 기능을 계승하여 두견주를 빚어 오던 박승규(朴昇逵) 씨를 중요무형문화재 기능보유자로 지정하면서 재생산되었다. 2001년 박승규 씨가 세상을 떠나자 또다시 생산이 중단되었다. 그러다가 2003년 당진시가 면천두견주 재생산 프로젝트를 진행하여 2007년 9월부터 다시 생산되기 시작했다. 지금은 ‘면천두견주보존회’가 두견주 생산과 관리 및 판매를 하고 있다.
두견주는 중국 당나라 시인 이백(李白)과 두보(杜甫)도 즐겨 마셨다는 고사가 전해온다. 두견주에 관한 기록은 홍만선(洪萬選, 1674~1720)의 《산림경제(山林經濟)》, 서유구(徐有榘, 1764~1845)의 《임원경제지(林園經濟志)》, 빙허각(憑虛閣) 이 씨(1759~1824)의 《규합총서(閨閤叢書)》, 작자가 알려지지 않은 조선 말기의 요리책 《시의전서(是議全書)》에 기록되어 있다. 조선 말기의 문신 김윤식(金允植, 1835~1922)의 시문집인 <운양집(雲養集)>에는 면천두견주가 고려 개국공신인 태사(太師) 복지겸(卜智謙)이 이름 모를 병으로 면천에 와서 휴양할 때 빚어졌다고 하였다. 복지겸이 병이 깊어 오랜 동안 자리에 누워 있게 되자 그의 딸 영랑이 가까이에 있는 아미산(峨眉山)에 가서 백일기도를 드렸다. 산기도가 끝날 무렵에 산신령이 영랑의 꿈에 나타나 “‘아미산’의 진달래꽃잎을 따다가 ‘안샘’의 물로 술을 빚어 100이 지난 뒤에 먹고, 은행나무 두 그루를 심어놓고 정성을 드리면 아버지의 병이 나을 것”이라고 하였다. 그래서 그 말대로 하였더니, 아버지의 병이 나았다고 한다. 그 때부터 진달래꽃잎으로 술을 빚기 시작한 것이 오늘의 면천두견주가 되었다고 한다. 이에 따르면 면천두견주는 고려 태사 복지겸 딸의 효성에서 유래된 것이다.
나는 면천두견주 전설의 주인공인 복지겸과 증거물의 현장을 찾아가 보고 싶었다. 그래서 면천두견주보존회원에게 들은 대로 전 면천초등학교 앞으로 갔다. 학교가 이전하여 지금은 비어 있는 전 면천초등학교 교정에 들어서니, 복지겸의 딸이 심었다는 은행나무 두 그루가 서 있다. 천연기념물 제551호로 지정하여 보호하고 있는 이 은행나무의 나이는 1,100년쯤 된다고 한다. 나는 그 은행나무 앞에 서서 이 은행나무를 심어 놓고, 그 앞에서 아버지의 병 낫기를 간절히 기도하던 영랑 소저의 모습을 상상해 보았다.
넓은 운동장 동편을 보니, 학교 울타리 밖에 ‘영랑효공원’이 있었다. 공원 안쪽에 복지겸의 딸이 떠다가 술을 빚었다는 ‘안샘’이 있다. 안샘은 아미산(해발 349.5m) 줄기를 따라 해발 225m의 몽산이 이어지고, 그 아래로 펼쳐지는 들의 시작 부분에 자리하고 있다. 안샘은 아무리 심한 가뭄에도 마르지 않고, 섭씨 14~15도의 잔잔한 물이 흐르며, 물맛이 좋았다고 한다. 두견주를 빚는 데에 알맞은 샘물이었던 모양이다. 이 샘은 원래 노천에 있었을 터인데, 지금은 전각을 지어 보호하고 있다. 이 이야기는 ‘효는 만물을 감동하게 한다’는 한국인의 의식을 바탕으로 꾸며진 이야기이다. 면천두견주 이야기의 증거물인 ‘은행나무’와 ‘안샘’을 한곳에서 볼 수 있어서 참 좋았다.
차를 타고 서산 쪽으로 조금 가다 보니, ‘고려 개국공신 태사 복지겸 사당과 묘’ 안내판이 서 있었다. 가까이 가서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복지겸의 사당과 묘를 살펴보았다. 사당에는 복 태사의 영정이 걸려 있다. 묘로 올라가 보니, 커다란 봉분 앞 중앙에 상석(床石)을 놓고, 문인석(文人石)과 산양(山羊石), 그리고 망주석(望柱石)을 좌우에 1개씩 세워놓았다. 그 앞에는 장명등(長明燈)이 서 있다.
서산 쪽으로 2km쯤 더 가니, ‘면천진달래공원’이 있었다. 면에서 계획하여 아름답게 조성한 공원으로, 진달래꽃이 곱게 피어 있고, 정상에는 정자가 있다. 산에는 진달래가 듬성듬성 있는 곳이 많고, 진달래나무의 크기가 그리 크지 않은 것으로 보아 공원을 조성한 지 얼마 되지 않는 것 같았다. 복지겸의 딸이 100일기도를 하고, 진달래꽃을 따라가 술을 빚었다는 아미산에 가보고 싶었으나, 시간이 맞지 않아 발길을 돌렸다.
당진 면천은 고려 태조 왕건이 건국에 공이 큰 복지겸에게 하사한 땅이다. 면천 복씨의 시조인 복지겸의 출생지인 이곳은 지금은 당진시에 속한 일개 면이지만, 당시엔 혜성(槥城)이라는 큰 고을이었다. 조선조에서도 ‘당진현(縣)’보다 격이 높은 ‘면천군(郡)’이었다. 조선 정조 때에는 연암(燕巖) 박지원(朴趾源)이 1797년부터 1800년까지 4년 동안 면천군수로 부임하여 백성을 다스린 곳이기도 하다. 이렇게 유서 깊은 곳에서 1,100여 년 전부터 빚어온 두견주가 2018년 4월 27일에 열릴 남북정상회담 만찬의 건배주로 선정되었다는 것은 참으로 뜻깊은 일이다. 후삼국을 통일하여 통일국가를 건설하는 데에 큰 공을 세운 복지겸에서 유래된 면천두견주를 마시며 남과 북이 하나가 됨을 자축하는 날이 속히 왔으면 좋겠다. (2018. 4. 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