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 집 가까이에 있는 공원에 갔을 때의 일이다. 한 엄마가 4살과 6살쯤 되어 보이는 여자아이 둘을 데리고 약간 비탈진 길을 올라오고 있었다. 엄마 앞에서 걷던 작은 아이가 갑자기 넘어졌다. 엄마가 일으켜주니 그는 울면서 언니 때문에 넘어졌다고 하였다. 내가 마주 걸어오며 본 바로는 그 아이는 언니와 상관없이 넘어진 것이 확실하였다. 그런데도 언니 탓을 하는 것을 볼 때 나는 충격을 받았다. 저 어린아이는 왜 자기보다 한발 앞서 가던 언니 탓을 할까? 이 생각을 할 때 오래전에 들은 옛날이야기 내 탓이오가 떠올랐다.

   옛날에 나이 어린 색시가 시집을 갔다. 하루는 시어머니가 시키는 대로 빨래 앉힌 솥에 불을 땠다. 얼마 뒤에 밑에 깔린 빨래가 누렇게 탄 것을 본 색시는 어쩔 줄을 몰라 울고 있었다. 밖에 나갔다가 들어와서 이를 본 시어머니는 자기가 빨래를 잘못 앉힌 탓, 신랑은 자기가 물을 조금 길어다 놓은 탓, 시아버지는 자기가 근력이 부쳐 장작을 굵게 패 놓은 탓이라며 어린 색시를 위로하였다.

   위 이야기에서 가족들은 빨래를 태우고 우는 색시를 향하여 자기 탓이니 울지 말라고 달랜다. 가족이 서로 이해하고 잘못을 감싸줄 때 가정은 화목해지고, 하는 일마다 잘될 것이다. 우리 선조들은 재미있는 이야기를 통해 잘못을 자기의 탓으로 돌리면서 남을 배려하는 이타심을 갖게 하여 화해와 평화의 정신을 전파전승해 왔다. 이처럼 옛날이야기는 재미와 함께 그 속에 담겨 있는 교훈적인 의미를 내면화하게 하는 훌륭한 인성교육 자료였다.

   우리 민족의 심층부를 이루는 민중들이 옛날이야기를 통해 이러한 가치관을 공유할 때 통치자들은 어떠하였을까? 중국 당나라 태종은 황충의 피해가 극심하자 모두 나의 부덕 때문이다. 차라리 내 심장을 갉아 먹거라라고 외친 뒤에 신하들의 만류를 무릅쓰고 황충 두 마리를 삼켜버렸다. 신하들은 그가 병이 날가 걱정하였지만 아무 일이 없었다. 그 뒤에 황충의 재해가 멈췄다고 한다[《정관정요(貞觀政要)》무농(務農)].

   조선 태종 때 경상도 앞바다에서 조운선이 침몰하여 사람 수백 명과 세곡 1만 석이 물에 가라앉은 사고가 일어났다. 이 보고를 받은 태종은 책임은 나에게 있다.”고 선언하였다. 그리고 쌀은 아깝지 않지만, 사람이 죽은 것이 너무나 안타깝다.”라고 하였다[《조선왕조실록》태종 355일조]. 이것은 태종이 자신의 부덕함이 해난사고의 원인이라 하며 책임을 인정하는 진솔함과 지도력을 보여주는 기록이다.

   조선의 영조는 가뭄과 해충 피해가 계속되자 당 태종의 황충 일화를 인용하며 모두 나의 부덕 때문이라고 자책하였다. 그런 뒤에 과인이 태종처럼 할 수 있을지 걱정이다.”라고 하면서 백성을 위한 정치를 다짐하였다고 한다[《조선왕조실록》영조 41(1765) 63일 기사]. 조선의 왕들은 당 태종이나 조선 태종의 일화를 인용하면서 백성을 위하는 마음을 가다듬곤 하였다고 한다. 이러한 이야기는 지도자의 무한책임론을 보여주는 것으로, 동양의 정치철학과 윤리관을 반영하고 있다.

   잘못을 남의 탓으로 돌리는 심리에는 꽤 복잡하고 다양한 심리적 기제가 숨어 있다. 자기의 잘못을 인정하면 자존감이 손상될 수 있기 때문에, 타인을 탓함으로써 자신을 방어하려고 한다. 받아들이기 어려운 자신의 결점이나 욕망을 타인에게 전가함으로써 자기를 방어하려고 한다. 타인의 기대나 평판을 의식해 실수를 인정하지 않고, 타인을 탓함으로써 자신의 이미지를 유지하려고 한다. 이러한 일들이 평범한 사람들 사이에서 일어나면 사소한 개인의 문제로 그치고 만다. 그러나 사회 지도층에 있는 사람의 경우에는 나라에 큰 문제를 야기한다.

   요즈음 사회 지도층 인사들 가운데 자기의 잘못을 남의 탓으로 돌리는 사람이 많다. 법을 어긴 일로 기소되어 재판을 받게 되면 검찰의 조작 수사에 의한 것이라고 검찰 탓을 한다. 불법이나 비행이 드러나면 언론의 악의적 보도 때문이라고 얼론 탓을 한다. 사회적 관행이었다고 변명하며 책임을 회피하려 한다. 사회 지도층 인사가 이러한 태도를 보임으로써 법치 질서가 혼란해지고 상식과 가치관이 전도되는 현상을 보면 화가 치밀어오른다. 그러다가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없다는 것을 깨닫고는 무력감에 빠진다.

   이러한 풍조를 바로잡는 방법은 없을까? 1990년대 초반 가톨릭교회에서 전개한 내 탓이오운동은 하나의 해결책일 수 있다. 국민의 존경을 받던 고 김수환 추기경의 삶과 신앙에서 시작된 이 운동은 사회 갈등과 분열 속에서 책임을 남에게 돌리기보다 스스로 반성하고 화해를 추구하자는 메시지를 담고 있었다. 당시에 박정훈 전 한국 평신도 사도직 협의회장은 1990내 탓이오운동을 적극적으로 전개하며 사회 윤리 회복 운동을 이끌었다. 이 운동이 오래 지속되지 못한 것이 아쉽다.

   우리의 선조들은 일상생활 중 옛날이야기를 통해서까지 민중의 마음속에 책임과 배려 정신을 일깨웠다. 우리도 교육, 언론, 매스컴을 통해 내 탓이오운동을 활발하게 전개하여 사회 윤리를 회복했으면 좋겠다.(2025. 7.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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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즈음 나이가 든 남성들은 밖에 나갈 때 대부분 모자를 쓴다. 모자는 대개 운동모자(야구모자 베레모 · 중절모 등으로, 그 모양이나 색상 · 재질 등이 다양하다. 나 역시 외출할 때에는 모자를 쓴다. 그날 가는 곳, 날씨, 모임의 성격, 입을 옷이나 신발 등에 맞게 골라서 쓴다.

   내가 모자를 쓰기 시작한 것은 나이 50대 후반부터이다. 50대 초부터 머리가 빠지기 시작하더니 50대 중반을 지나니 머리숱이 많이 줄었다. 그에 따라 추운 날에는 머리가 시리고, 햇볕이 쬐는 날에는 머리가 따가웠다. 이런 사정을 들은 선배 교수가 모자를 쓰라고 권하였다. 그래서 추운 날씨에는 머리숱이 적어짐에 따라 느끼는 추위를 막고, 더운 날에는 머리에 햇볕이 직접 쬘 때 따가운 것을 막기 위해 모자를 쓰기 시작하였다. 그 뒤에 자외선이 얼굴에 비치는 것을 차단하고, 흰머리가 드러나는 것을 가리려는 뜻을 추가하여 모자를 쓰곤 한다.

   처음에는 체육행사 때 받아다 두었던 운동모자를 썼다. 이를 본 아내가 옷차림과 어울리지 않는 날이 있다며 베레모를 사다 주어 즐겨 썼다. 그 뒤에 대학원 제자들이 중절모를 선물로 주었다. 그러나 작아서 백화점에 가서 제일 큰 것으로 바꿔 왔다. 그래도 작아서 불편하였지만, 이를 선물로 준 대학원생들의 정성을 생각하여 가끔씩 썼다. 아내는 내 머리가 커서 기성품 중에서는 맞는 모자를 찾기 어려우므로 따로 주문해야 한다고 하였다.

   내 머리가 보통 사람들보다 큰 편이어서 기성품 중에는 맞는 모자를 찾기가 쉽지 않다는 것은 군에 입대하였을 때 처음 알았다. 논산훈련소에서 훈련을 마치고 강원도 인제에 있는 부대에 배속되어 일등병으로 진급했을 때의 일이다. 이등병 계급장이 달린 찌그러진 모자를 버리고 새 군모를 사려고 부대 PX에 가서 골랐으나 내 머리에 맞는 것이 없었다. 이를 본 PX 근무병이 내 머리를 재어 보고는 최 일병 머리통은 특제라고 놀리면서 주문해 주어 며칠 뒤에 받아서 썼다.

   튀르키예에 근무할 때 이스탄불에 있는 그랜드파자르(국제시장)에 가니 양가죽으로 만든 베레모와 방한모가 눈에 띄었다. 가죽의 품질과 촉감, , 모양이 좋고 가격도 적절하여 사고 싶었으나 좀 작아서 망설였다. 이를 본 모자점 주인이 계속 쓰면 늘어날 것이라며 권유하는 말을 듣고 사 왔다. 그러나 몇 년을 써 보았지만 늘어나지 않아 불편하여 지인에게 주었다.

   그 뒤에 아내와 나는 큰 모자 도매상이나 백화점에 가면 내 머리에 맞는 모자가 있는가 살피고, 눈에 띄면 사 왔다. 몇 년 전에는 작은아들이 영국에서 크기가 넉넉하고, 색과 천이 좋은 베레모를 사 왔다. 작년 미국에 사는 딸의 집에 갔을 때 규모가 큰 쇼핑몰에 갔다가 내 머리에 맞고 챙이 넓은 등산모와 통풍이 잘되는 중절모를 발견하였다. 나는 모자가 많은데 또 사려느냐며 만류하는 아내의 말도 아랑곳하지 않고 사서 가지고 왔다.

   이제 우리 집에는 챙이 넓은 야구모자와 등산모자, 귀마개가 있는 방한모, 색과 질감이 다른 베레모와 중절모 등 여러 개의 모자가 있다. 작게 느껴지거나 마음에 들지 않는 모자 여러 개를 지인에게 주었어도 20여 개가 남아 있어 외출할 때마다 골라서 쓴다. 편한 복장으로 산책을 나갈 때에는 운동모자를 쓰고, 친구들과 야외에 나가서 낮은 산을 오르거나 둘레길을 걷는 날에는 챙이 넓은 등산모를 쓴다. 시내에서 지인들을 만나거나 격식을 갖춰야 하는 자리에 양복 차림으로 갈 때에는 베레모나 중절모 중에서 천의 색상과 재질이 분위기에 맞는 것을 골라 쓴다.

   지금 내가 가지고 있는 모자들은 나의 삶이 다하는 날까지 나와 함께 할 필수품이다. 이들을 용도에 맞게 잘 활용하며 이것들과 오래오래 함께 할 수 있도록 건강관리에 힘써야겠다. (2025. 6. 28.)

   515일은 스승의 날이다. 이날은 대한적십자사 중앙청소년적십자가 1963526일을 스승의 날로 제정한 것이 그 시작이다. 이에 대한 국민적 지지가 높아지자 정부는 2년 뒤인 1965년에 스승의 날을 공식기념일로 인정하고, 날짜를 세종대왕이 탄생하신 515일로 변경하였다. 그 까닭은 세종대왕이 한글을 창제하여 온 백성에 가르침을 주어 존경을 받는 것처럼 스승을 존경하는 시대가 왔으면 좋겠다는 뜻에서였다.

   해마다 스승의 날이 되면 나에게 감사의 마음을 담아 전화하는 제자, 정성 어린 선물을 보내는 제자, 직접 찾아와 함께 식사하며 담소하는 제자들이 있다. 이런 제자를 대할 때마다 잊지 않고 찾아주는 그 마음에 감사한다. 그러면서 학창 시절에 그에게 더 많은 정성과 사랑을 기울이지 못한 것이 아쉽고 후회가 되기도 한다. 그러나 돌이킬 수 없는 일이니 고마우면서 미안할 뿐이다.

   스승의 날이 되면 많은 사람들이 스승의 은혜를 생각하며 스승의 은혜(강소천 작사, 권길상 작곡) 노래를 부른다. 50년 가까이 교직에 있었던 나 역시 이 노래를 스승 앞에서 부르기도 하였고, 스승의 위치에서 듣기도 하였다. 그런데 교직을 떠난 지 20년 가까이 된 내가 나이 든 제자들이 부르는 이 노래를 들으니 만감이 스쳤다. 올해에는 이런 일이 두 차례나 있었다.

   한번은 대학원 석사과정에서 지도한 여제자 세 명이 나와 아내를 인사동의 한식집으로 초대한 날의 일이다. 한 사람은 초등학교 교장 출신으로 노래 지도에 특출한 기량을 지녔고, 다른 한 사람은 시인이면서 성악에 재능을 가졌으며, 또 다른 한 사람은 시인이면서 고소설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은 학구적인 인물이다. 모두 교직에서 은퇴한 뒤에 각자의 재능을 살리며 제2의 삶을 사는 사람들이다. 세 사람이 카네이션과 선물을 준 뒤에 스승의 은혜노래를 불렀다. 세 사람이 화음을 맞춰 3절까지 부르는 동안 나는 세 사람의 정성스런 마음에 감사하면서 부족했던 점들이 떠올라 미안하고 아쉬운 마음 가득하였다. 노래를 들은 뒤에 대화하면서 먹는 점심은 어디에서도 느낄 수 없을 만큼 정겹고 맛이 있었다.

   다른 한 번은 1982학번 학부 제자 8명과 함께 12일 일정으로 여행을 갔을 때의 일이다. 퇴직 교수인 K가 세종시 금강변에 별장처럼 쓰는 전원주택을 마련하였다며 동기생들을 초청하여 함께 갔다. 공주 갑사를 탐방하고 저녁에 전원주택 정원에서 바비큐 파티를 하였다. 돼지고기와 양갈비를 K 부부가 직접 가꾼 여러 가지 채소와 함께 먹으며 포도주를 곁들이니 정말 흥겨운 잔치 자리가 되었다. 여러 대화 중에 재학 시절에 있었던 일이 화제에 올랐을 때에는 서로 말을 보태며 즐거워하였다. 30여 년 전에 미국으로 가서 살고 있는 B 부부도 귀국하여 함께 자리하니 더욱 뜻깊고 정겨웠다.

   한 시간쯤 지난 뒤에 K가 친구들을 일어서게 한 뒤에 하모니카로 스승의 은혜노래를 연주하자 모두 제창하였다. K의 부인은 작은 화분에 담긴 예쁜 꽃을 주면서 손수 씨앗을 심어 싹을 틔우고 기른 것이라고 하였다. 70세 전후의 이 동기들은 몇 년 전부터 철마다 한 번씩 나를 불러 함께 트레킹을 하며 담소하곤 한다. 이일만도 고맙고 과분하게 생각하며 지내는데, 오늘은 모두 뜻을 모아 스승의 은혜노래까지 불러주니 깊은 감동이 밀려왔다.

   나는 전에도 그랬지만 이번에도 이 노래를 들으며 내가 스승의 역할을 제대로 하였는가 되돌아보았다. 강의와 연구에 전념하느라 시간에 쫓겨 학생들에게 사랑과 보살핌을 제대로 베풀지 못하였고, 함께 시간을 나누지도 못하였다. 그런데도 학연을 맺은 지 3040년이 지났고, 나이 70세가 넘어 같이 늙어가는 오늘까지 나를 스승으로 기억하고 칭송해 준다. 나에 대한 과분한 대접에 미안하고 부끄러우면서도 고맙고, 자랑스럽다.

   오래전에 맺은 학연을 잊지 않고 이어오는 제자들을 보면서 교육자가 되어 많은 제자를 둔 것을 감사한다. 오늘 따라 전에 모임을 같이하던 판사와 검사가 하던 말이 생각난다. “우리는 사회의 병든 자들과 상대하며 사는데, 교수는 몸도 마음도 건강한 젊은이들과 생활하니 좋겠다.”라고 하던 말. 이제 제자들에게 재학 시절에 더 잘해 주지 못한 것을 아쉬워하는 마음을 접어야겠다. 그리고 오래오래 우리 곁에 있어 달라는 제자들의 말처럼 오래 사제의 정을 나누며 살 수 있도록 건강 유지에 힘써야겠다. (2025. 5.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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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 후기에 3대 야담집으로 꼽히는중 《계서야담(溪西野談, 이희준 편) , 《 동야휘집(東野彙輯, 이원명 편) , 《청구야담(靑邱野談, 편자 미상) 이 나왔다. 야담은 야사를 바탕으로 흥미 있게 꾸민 이야기로,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으며 입에 오르내리다가 기록되었을 것이다. 앞의 두 권은 편자가 알려져 있으나   청구야담 1843년경 금릉군수로 재직하고 있던 김경진(金敬鎭)이 펴낸 것이라고도 하지만, 확실하지 않다. 《청구야담  실려 있는 은항아리를 다시 묻은 어머니이야기는 자녀 교육 문제에 시사하는 바가 크다.

   옛날에 젊은 나이에 남편을 잃은 여인이 아들 둘을 데리고 근근이 살았다그는 자기 밭을 매다가 은이 가득 담긴 항아리가 묻혀 있는 것을 발견하였다.

   그는 그것을 팔면 살림 걱정하지 않고 아들 둘을 잘 가르칠 수 있을 것 같아 기뻤다.  그는 그것을 꺼내어 팔려고 하다가 깊이 생각하고 다시 묻어 두었다

  그는 온갖 고생을 겪으면서 두 아들을 바르게 잘 길렀다. 잘 자란 두 아들은 벼슬을 하고, 결혼하여 자녀를 여럿 두었으므로, 그는 걱정 없이 지낼 수 있게 되었다.

    어느 날, 그가 가족들에게 밭에 있는 은항아리 이야기를 하였다. 아들들은 그것을 팔아서 썼으면 어머니께서 그런 고생을 하지 않았을 터인데 왜 다시 묻었어요?”라고 물었다. 그는 너희들이 근검절약하면서 열심히 공부하지 않거나 잘못될가 걱정되어 그대로 묻어 두었다라고 하였다. 두 아들은 생각이 깊은 어머니께 머리 숙여 감사하였다.

  이 이야기 속의 어머니는 항아리 속의 은을 팔아서 쓰려다가 다시 묻어 두고 근검절약하며 가난을 이겨냈다. 스스로 노력하여 얻은 돈이 아니면, 그 돈이 오히려 자녀 교육을 그르칠 수 있다는 바른 생각 때문이었다. 아들들은 자라면서 어머니가 근검절약하며 어려운 살림을 꾸려가는 것을 보았다. 그래서 어머니를 더욱 사랑하며 존경하고 근검절약을 생활화하며 부지런히 공부하여 실력 있고 인격적으로 훌륭하며, 어려운 사람들의 형편을 이해하는 사람이 되었다.

   요즈음 초고 학생 중 일부가 비싼 외제 물품을 쓰고, 값비싼 신발스마트폰을 좋아하며, 용돈을 물 쓰듯 한다는 이야기가 심심치 않게 나돌고 있다. 일부 어머니들은 자녀의 기를 꺾지 않고 살려 준다는 생각에서 자녀들이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다 들어준다고 한다. 자녀들에게 좋은 음식을 먹이고, 좋은 옷을 입히고, 호사스럽게 해주는 것이 어머니의 역할을 잘하는 것이라는 생각에서 나온 것이리라. 이는 자녀들에게 사치와 낭비는 가르치면서, 근검절약과 절제는 가르치지 못하는 결과를 가져오게 된다.

   근검절약하는 가정과 부유한 가정의 자녀는 자라서 어떠한 인성을 가지게 될까? 이것은 부모의 교육관이나 환경에 따라 다르겠지만, 대체적으로 예상되는 특성은 적어볼 수 있다.

   부모가 근검절약하는 모습을 보며 자란 자녀는 돈의 가치를 인식하고 경제적인 책임감을 가지게 될 것이다. 이것은 성인이 된 뒤에 경제적 목표를 세우고, 돈을 효율적으로 관리하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이다. 그래서 독립적이고 자립적인 생활 태도를 가지게 될 것이다. 어려운 상황에서도 스스로 해결책을 찾고, 자신의 능력을 믿고 실천하는 마음도 갖게 될 것이다. 자원을 소중히 여기는 마음, 물건을 잘 관리하고, 낭비를 줄이려는 마음을 갖게 될 것이다. 이는 환경 보호에도 기여할 수 있는 중요한 태도이다.

   부유한 가정에서 자란 자녀는 부모의 넉넉한 지원을 받기 때문에 자신이 특별하다고 느끼고 특권 의식을 가질 수도 있다. 이것은 타인에 대한 배려 부족과 이기적인 행동으로 이어질 수 있다.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기 때문에 과도한 소비 습관을 가질 수 있다. 이는 물질적인 것에 대한 집착과 낭비로 이어질 수도 있고, 책임감이나 자립심이 부족할 수 있다. 부모의 높은 기대와 압박을 받게 되면 스트레스를 받고, 반항적인 행동을 보일 수 있다. 이는 알코올이나 마약 중독, 도박 등 다양한 형태로 나타날 것이다.

   부모는 자녀가 무엇을 보고 배울 것인가를 깊이 생각하면서 솔선수범하여 올바른 가치관과 책임감을 갖도록 해야 한다. ‘자녀 교육이라는 쉽고도 어려운 문제를 수행할 때 은항아리를 다시 묻은 어머니이야기는 유념해야 할 좋은 자료이다. (2025. 4.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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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35)24절기 중 세 번째 절기인 경칩()이다. 태양의 황경이 345도에 이르는 때로 동지를 지낸 뒤로 74일째 되는 날이고, 춘분을 15일 앞둔 날이다. 경칩은 추위가 풀려 만물이 약동하며 새로운 생명의 기운이 돋는 때이므로 겨울잠을 자던 벌레, 개구리 등이 깨어난다는 날이다. 한국에선 겨울잠을 자는 동물 중 유난히 개구리를 주목한다.

    《삼국유사》에는 북부여의 금와왕(金蛙王) 이야기가 실려 있고, 이수광의 《지봉유설 》 에는 이른 봄에 개구리 우는 소리로 그 해 농사의 풍흉을 점치는 풍습이 있다고 하였다. ‘경칩에 개구리 알을 먹으면 허리 통증에 좋고 허약해진 몸을 보양할 수 있다라고 하여 개구리 알을 뜨러 다니는 것을 본 적이 있다. 불치병으로 여기던 결핵 환자가 집에서 쫓겨나 냇가에 헛집을 짓고 지내면서 개구리와 뱀을 잡아 먹고 병이 나았다는 말도 들었다. 이로 보아 개구리는 오랜 옛날부터 한국인의 생활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개구리는 황새를 비롯해 몸집이 큰 새들이 무척 좋아하는 먹거리이기도 하다. 그래서 황새와 개구리를 제재로 한 이야기가 많이 있다. 그 중에서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이야기는 한무대와(恨無大蛙, 개구리 없는 것이 한)라는 이야기이다. 나는 1971년부터 조금씩 다른 이 이야기를 여러 지방에서 채록하여 설화집에 실은 바 있다.

   숙종 임금이 미복차림으로 야순을 하다가 밤늦게까지 글을 읽고 있는 선비의 집에 이르러 보니, 책상 앞 벽에 한무대와라고 쓴 종이가 붙어 있었다. 왕이 그 말의 뜻을 물으니, 그는 자기 인생의 역사라고 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어느 해 경칩 무렵에 꾀꼬리와 부엉이가 만나 누가 노래를 잘 하는가를 다투었다. 그들은 결론을 내리지 못하고 황새에게 판결을 의뢰하기로 하였다.

   꾀꼬리가 노래 연습을 할 때 부엉이는 개구리를 잡아 황새에게 갖다 주면서 자기가 이기게 해 달라고 청탁하였다. 황새가 부엉이의 소리가 힘이 있고 장부답다며 손을 들어주는 것을 본 꾀꼬리는 분하고 억울하였지만 어쩔 수 없었다. 그는 여러 차례 과거에 낙방하면서 뇌물과 뒷배가 횡행하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꾀꼬리와 같은 자기의 처지를 한탄하고 있다고 하였다.

   임금은 그에게 곧 별과가 있을 것이니 응시해 보라고 권하고 돌아와 과거가 공정하게 치러지도록 조처하고, 별과를 시행하였다. 그가 시험장에 가서 보니, 시제가 한무대와로 자기 이야기였으므로 글을 잘 지어 급제하였다.

   이 이야기에서 선비는 여러 차례 과거에 응시하였으나 번번이 낙방하였다. 그것은 실력이 모자라서가 아니라 권력자에게 뇌물로 줄 돈이 없고, 뒤를 받쳐주는 사람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인재 발굴을 목적으로 시행되는 과거가 뇌물과 청탁, 뒷배가 횡행하는 현실을 개탄한다. 그리고 자기의 처지를 꾀꼬리에 빗대어 한무대와라고 벽에 써 붙였던 것이다.

   이 이야기는 널리 구전되어 오면서 고소설 황새 결송에 수용되어 불공정한 재판을 풍자하는 작품이 되었다. 이 이야기가 고려의 문장가 이규보가 겪은 이야기라고 하기도 하고, ‘와이로(蛙利鷺)’란 말의 어원이란 말도 있다. 그러나 두 가지 다 확실하지는 않다. 이것은 오랜 동안 민간에 전해 오면서 덧붙여진 이야기인 듯하다.

   이 이야기는 과거 시험을 비롯한 인사문제에 뇌물과 청탁이 횡행하는 세태를 꼬집는다. 그러면서 공정하게 인재를 골라 쓰는 사회가 되기를 바라는 마음이 잘 나타나 있다. 선비의 한은 잠행 중이던 숙종 임금의 방문을 계기로 해결의 전기를 맞는다. 과거 부정의 현황을 파악한 임금은 과거가 공명정대하게 치러질 수 있도록 조처하는 한편 별과를 시행하여 그를 급제하게 하여 평생의 한을 풀어주었다.

   세상을 떠들썩하게 한 자녀 입시 비리문제나 선거관리위원회의 가족 채용 비리를 보면서 참담한 마음을 금할 수 없다. 개구리 없음을 한탄하던 선비가 임금을 만나 한을 푼 것처럼 불공정한 일들이 바로잡히고, 그런 일로 피해를 입는 사람이 생기지 않는 공명정대한 세상이 되기를 마음 간절하다. (2025. 3.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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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의 집 방문  (1) 2024.12.02

   우리나라 고소설 중에 <황새결송>이란 작품이 있다. 재판에서 억울한 판결을 받은 사람이 뇌물을 받고 부당한 판결을 한 재판관을 동물에 빗대어 풍자한 내용이다. 조선 헌종 때인 1948년에 간행된 목판본 《삼설기》에 실려 있다. 이 작품을 송사형 우화소설(訟事形寓話小說), 공안소설(公案小說)의 뛰어난 작품으로 꼽기도 한다.

   경상도에 사는 부자에게 한 일가친척이 찾아와 같은 조상의 자손으로 혼자만 잘 사는 것은 부당하다면서 재산의 반을 나눠주지 않으면 그대로 두지 않겠다고 협박한다. 그는 친척을 서울로 데리고 가서 형조에 고소한 뒤에 자기의 정당함을 믿고 조용히 재판하는 날을 기다렸다.

   그러나 불의한 친척은 온갖 수단과 방법을 동원하여 관원과 재판관에게 접근하여 유리한 판결을 내려줄 것을 청탁하였다. 그는 재산의 반을 나눠주라는 판결을 받고 억울하고 분하였지만 바로잡을 방법이 없었다. 그는 관원들에게 이야기 하나를 들려주겠다고 하여 허락을 받는다. 그는 <황새 재판> 이야기로 뇌물을 받아 챙기고 부당한 판결을 한 판관을 비판한다.

   어느 날, 꾀꼬리뻐꾸기따오기가 모여 자기의 목소리가 가장 좋다고 다투다가 결론을 내지 못하고 황새에게 판결을 의뢰하였다. 제 소리가 가장 좋지 않은 것을 아는 따오기는 황새에게 그가 좋아하는 개구리를 비롯한 여러 먹거리들을 잡아다가 주며 자기의 소리를 최상으로 판결해 달라고 청탁하였다.

   소리겨룸을 하는 날, 황새는 꾀꼬리의 소리는 애잔하여 쓸데없다고 내치고, 뻐꾸기의 소리는 궁상스럽고 수심이 깃들여 있다 하여 내친 다음, 따오기의 소리가 가장 웅장하다며 상성으로 처결해 주었다. 이 이야기를 들은 관원들과 재판관은 매우 부끄러워하였다.

   재판은 그 결과에 따라 원고든 피고든 어느 한쪽은 권리와 재산상의 큰 타격을 입는다. 그러므로 법관은 사건의 진실을 파헤쳐 공정한 판결을 내려야 하므로 오랜 옛날부터 강조되어 왔다. 일찍이 공자는 재판이 인과 예, 효와 충의 기본적인 원칙 아래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그러므로 재판관은 피고와 원고를 동등하게 대우하며 그들의 입장을 공정하게 해야 한다고 하였다. 성경에서도 재판에서 공정성을 잃어서도 안 되고, 사람의 얼굴을 보아주어서도 안 되며 재판관이 뇌물을 받아서도 안 된다(<신명기> 16:19)라고 하였다. 공의로운 재판을 하고, 입을 열어 억눌린 사람과 궁핍한 사람들의 판결을 바로 하라(<잠언> 31:9)고 하였다.

   재판은 공정성과 함께 신속하게 이루어져야 한다. 국민은 신속한 재판을 받을 권리가 있다. 제때에 판결이 나오지 않으면 회복할 수 없는 피해를 가져올 수 있다. 그래서 늦은 정의는 정의가 아니다라고 한다. 재판관은 오직 법률과 양심에 따라 판결을 해야 한다. 판사가 개인적 신념이나 정파성을 우선시하면 공정한 재판이 이루어질 수 없다. 그런데 요즈음 일부 판사들이 불공정한 판결을 하고, 판결을 지연하며 이념에 따라 공정하지 못하고 어느 한쪽으로 치우친 판결을 한다. 그에 따라 사법부 전체를 불신하는 경향이 점점 짙어지고 있다.

   요즈음에는 국민이 사법부의 공정성을 신뢰할 수 없는 일들이 잇달아 일어나고 있다. 많은 법조인들이나 상식을 가진 국민이 유죄라고 하는 사건이 괴변과 함께 무죄로 판결된 일이 있다. 국회의 구속동의까지 받은 구속영장을 야당의 대표라 하여 기각한 판사도 있다. 입시비리 사건의 판결이 5년을 넘긴 뒤에 확정되고, 선거법 위반 재판이 5년 넘게 걸리는 바람에 국회의원의 임기를 마치고, 다시 출마하여 국회의원이 되는 일도 일어났다. 야당 대표의 선거법 재판이 재판 지연작전과 판사의 늑장으로 2년 넘게 걸려 1심이 끝난 일도 일어났다. 이러한 불공정한 판결이나 지연된 재판으로 국민들의 사법부 불신이 어느 때보다 높아졌다.

   헌법재판소의 대통령 탄핵재판이 온 국민의 관심을 끌고 있다. 헌법재판소가 대통령 측과 상의 없이 일주일에 두 번씩 무더기로 변론기일을 정하고, 대통령 측이 요구하는 증인을 대부분을 기각하며, 증인신문 시간을 제한하고 발언을 막는다. 경찰이나 검찰에게 조사 중인 사건의 조서를 제출하도록 요구하여 받아낸 뒤에 이를 근거로 재판을 진행하며 증인이 동의하지 않는 검찰조서를 증거로 채택하겠다고 한다. 이것은 피의자가 된 대통령의 방어권을 박탈하는 조치이다. 그래서 탄핵재판 진행이 편파적이고 불공정하여 대통령 측과 많은 국민의 분노를 사고 있다.

   헌재는 이러한 진행을 신속한 판결을 위해서라고 한다. 재판 절차의 공정성을 담보하지 않은 신속함은 불공정을 낳는다. 이는 국민이 뽑은 대통령을 파면하는 쪽으로 결론을 내어 놓고 밀어붙이는 것이라는 비판과 더불어 헌법재판소에 대한 불신을 더하는 일이다. ‘일제치하 일본인 재판관보다 못한 헌재라는 현직 검찰청장의 비판이 이를 잘 말해준다.

   불공정한 재판 진행이나 판결, 시간 끌기 등을 자행한 판사에게 많은 법조인이나 일반 국민의 비판이 쏟아지고 있다. 위에 적은 <황새결송>의 관원들은 당사자의 동물에 빗댄 비판에 부끄러움을 느꼈다고 한다. 그러나 요즈음의 판사들은 잘못을 인정했다거나 부끄러움을 느낀다는 소식이 없다. 오늘의 재판관들은 조선 후기의 재판관에 비해 양심이 오염되고, 낯이 두꺼워진 탓일까?

   다산 정약용 선생은 그의 저서 《흠흠신서(欽欽新書)》에서 불공정한 재판을 한 판관을 반실태수(半失太守)라 하고, 판관 중에 최하위라고 하였다. 비판의 중심에 서 있는 판사님들은 최하위의 판사라는 평가를 받지 않으려면 어찌해야 할까를 깊이 생각해 보기 바란다. (2025. 2.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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