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해 9월 북경에 있는 J대학교 초빙교수로 가 있을 때의 일이다. 북경에 있는 동안 백두산과 연변 지역을 다시 가보고 싶어서 여행사에 연락을 해보니, 시기적으로 늦은 때라 손님을 모으지 않는다고 하였다. 좋은 기회를 살리지 못하는 것 같아 안타까워하고 있는데, 한국에 있을 때 나에게 중국어를 가르쳐 준 이 선생이 연길에 오면 안내해 줄 터이니 오라는 이메일(e-mail)을 보내왔다. 기쁜 마음으로 4박 5일 일정의 여행을 계획하고, 이 선생 남편의 친구가 운영하는 여행사를 통해 밤 8시에 출발하는 항공권을 예약하였다.

  오후 4시에 아내와 함께 숙소를 나섰다. 길 설고, 말이 통하지 않는 중국에 와서 우리 둘이 여행하는 것은 처음이어서 매우 긴장되었다. 택시 기사에게 서툰 중국어로 수도공항을 가자고 말하고서 혹 다른 곳으로 가면 어쩌나 걱정을 하고, 길이 막혀 비행기 시간에 늦으면 어쩌나 걱정을 하였다. 공항에 도착하여 중국어 단어를 꿰맞추고, 손짓으로 물어 항공권 발급 장소를 찾아가서 탑승권을 받고, 탑승 수속을 마친 뒤에야 긴장을 풀고,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국내 항공기를 타고 두 시간쯤 비행하여 연길 공항에 도착하니, 이 선생이 남편과 함께 기다리고 있었다. 이 선생의 시누이 남 선생의 아파트에서 도착하여 여장을 풀고, 환담하였다. 연길에 온 둘째 날에는 이 선생 내외와 함께 택시를 전세 내어 타고 도문, 훈춘 지역을 둘러보았다. 
 
   셋째 날에는 이 선생의 안내로 백두산에 가기로 하였는데, 마침 휴일이어서 초등학교 4학년인 이 선생의 딸도 함께 가기로 하였다. 우리 일행 네 사람은 새벽 5시에 집을 나와 승용차를 타고 백두산으로 향하였다. 이 선생 남편의 주선으로 중국 교포 A씨가 개인 사업을 하는 동생의 차를 가지고 왔다. 그는 운전도 잘 하고, 이야기도 잘하였다. 나는 앞자리에 앉아 그와 여러 가지 이야기를 하였다. 화제가 자동차에 미치자, 그는 현대자동차 중국 공장에서 만든 소나타와 엘란트라가 중국에서 매우 인기가 높다고 하였다. 우리가 타고 가는 차 역시 현대에서 만든 엘란트라였다. 나는 1990년에 중국에 처음 왔을 때 한국의 차가 한 대로 없는 것을 보고 아쉬워하였던 기억을 떠올리면서 그 후 15년 동안에 많은 변화가 있었음을 실감하였다.

   백두산을 가는 길은 잘 포장되어 있어서 대부분의 길에서 80km 정도로 달릴 수 있었다. 전날 밤부터 내리던 비는 그쳤지만, 가끔씩 빗방울이 차창을 때리곤 하였다. 안도(安圖)에서 아침 식사를 하고, 잠시 쉰 뒤에 다시 달렸다. 오전 9시 40분경에 백두산 산문(山門)에 도착하니, 우리보다 먼저 온 자동차와 사람들로 붐볐다. 이 선생이 입장권을 사 왔는데, 표가 여러 장이었다. 받아서 보니, 1인당 입장료가 60원, 상해 보험료가 5원, 그리고 차량 통행료와 주차료가 있었다. 조금 더 차를 타고 올라가니, 넓은 주차장이 나왔다. 그곳에 타고 온 차를 세우고, 천지를 왕복하는 전용 짚차의 승차권을 사서 타고 가야 한다고 하였다. 매표소 앞에 가서 상황을 알아보니, 차들이 모두 산에 올라갔기 때문에 20분 이상을 기다려야 한다고 하였다. 기사 A씨는 조금 전에 만났던 공안원과 이야기한 뒤에 공안원의 차를 타라고 하였다. 우리는 한 시라도 빨리 천지를 보고 싶은 마음에 그 차를 탔다.

   천지가 내려다보이는 기상대쪽 높은 봉우리로 올라가는 길은 소형차 두 대가 겨우 다닐 수 있는 좁은 길인데 굴곡이 심하였다. 1990년에 왔을 때 많은 사람들이 괭이와 삽을 가지고 도로 공사를 하던 길인데, 이제는 완전히 포장 되었다. 우리를 태운 차량의 기사는 아주 능숙하게 차를 몰았다. 그런데 굴곡이 심한 길을 어찌나 빨리 달리는지, 앞자리에 앉은 나는 차가 옆으로 미끄러질 것만 같아 조마조마하였다. 불안한 마음을 억제하며 차창 밖을 보니, 구름이 걷히기 시작하는 하늘 아래로 내려다보이는 산들의 모습이 정말 아름다웠다. 차가 위쪽으로 올라갈수록 나무와 풀의 키가 작아졌다. 한참을 오르니, 우리는 구름과 안개 속에 싸이게 되었다.

   기상대 앞쪽에 도착하여 차에서 내리니, 구름과 안개 때문에 앞이 잘 보이지 않았다. 천지의 모습을 볼 수 없겠다는 생각에 실망스러웠지만, 혹시나 하는 마음에 산봉우리로 올라갔다. 숨이 차서 쉬어가면서 10분쯤 걸어 봉우리 끝에 섰다. 그러나 천지는 운무(雲霧)에 싸인 채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몇 년을 별러서 아내와 함께 이곳에 왔는데, 천지의 모습을 볼 수 없다니 참으로 안타까웠다. 나는 천지가 있는 곳을 바라보며, 전에 왔을 때 보았던 천지의 모습을 떠올려 보았다. 그곳에 온 사람들은 대부분이 한국인 단체관광객인데, 모두 아쉬운 마음을 달래며 발길을 돌렸다. 아내에게 그만 내려가자고 하니, 아내는 조금만 더 기다려보자고 하였다. 우리는 이슬비를 피하려고 찢어진 우의(雨衣) 자락을 당기며 기다렸다. 잠시 후, 햇빛이 비치는 것 같아 크게 기뻐하며 기다렸지만, 천지 위를 덮은 운무는 변함이 없었다. 단체관광객 몇 팀이 실망을 안고 발길을 돌리는 것을 본 뒤에야 우리도 발길을 돌렸다. 여기까지 와서 천지를 보지 못하고 간다고 생각하니 안타깝고 아쉽다 못하여 속이 상하였다. 그러나 ‘자연의 섭리인 것을 어쩌겠는가! 우리는 참으로 참 복이 없구나!’ 하며 다시 차를 타고 내려왔다.

   우리는 장백폭포 뒤쪽으로 걸어서 올라가면 천지의 물에 손을 담글 수 있다는 말을 듣고, 우리의 승용차로 바꿔 타고 장백폭포 쪽으로 올라갔다. 날씨는 구름이 많이 걷혀 파란 하늘을 보이기 시작하였다. 다시 입장권을 사서 폭포 쪽으로 올라가니 폭포 아래에서 뜨거운 온천물이 솟아 흐르고 있는데, 섭씨 83도나 된다고 하였다. 장엄한 폭포를 보고 탄성을 연발하다가 위에서 내려다보지 못한 천지의 물을 손으로 만져보겠다는 생각으로 폭포 뒤쪽으로 난 계단 길을 한 시간쯤 걸어 올라갔다. 수천 개가 되는 듯한 계단을 올라가니, 평평한 길이 나오고, 조금 더 올라가니, 꿈에도 그리던 백두산 천지가 보였다. 천지 둘레의 산봉우리는 아직도 안개와 구름이 감싸고 있었으나, 호수 위에는 햇빛이 반짝이고 있었다. 발걸음을 재촉하여 물가에 이르러 보니, 둘레가 4~5km쯤 되어 보이는 넓고 푸른 천지의 모습이 한눈에 들어왔다. 구름 덮인 험한 산봉우리들이 에워싸고 있는 파란 호수는 정말 아름다웠다. 해발 2,000m가 훨씬 넘는 높은 산 위의 험한 산봉우리들이 이렇게 아름다운 호수를 품고 있다는 사실이 신비스러웠다. 조물주가 만들어 깊은 산속에 숨겨놓은 비경(秘境)이란 생각이 들었다. 물가에는 콩알 만한 작은 돌과 모래가 곱게 밀려오는 작은 파도를 맞이하였다가 밀어 보내곤 하였다. 나는 메고 있던 가방과 사진기를 뒤로 젖히고, 물에 손을 담갔다. 그리던 천지의 물에 손을 담그고 있으니, 태고의 비밀을 간직한 비경을 보았다는 벅찬 감격과 함께 자연의 신비감이 온몸에 느껴졌다. 마음이 평안해지고, 산봉우리에서 천지를 내려다보지 못하여 섭섭했던 마음도 풀렸다. 아내 역시 아주 감격스러워하면서 물에 손을 담가 보기도 하고, 물을 튕겨보기도 하였다. 그리고 작은 돌을 골라 깨끗이 씻어 주머니에 넣었다.

   단체로 온 관광객들이 시간에 쫓겨 서둘러 내려가고 나니, 넓은 천지에 우리 일행 5명만 남게 되었다. 우리는 느긋한 마음으로 천지 둘레의 아름다운 경관을 차례차례 살펴보았다. 맑고 파란 물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고, 천지 표석 앞과 백두산 괴물의 형상 앞에서도 사진을 찍었다. 우리가 서 있는 맞은편에는 산봉우리에서 내려오는 계단이 보였다. 함께 간 A씨의 말에 의하면, 그 길이 북한 사람들이 천지로 내려오는 길이라고 하였다. 나는 비디오카메라를 줌으로 당기며 그 곳을 살펴보았으나 계단을 오르내리는 사람은 보이지 않아 관광객으로 붐비는 이쪽의 상황과는 판이하였다. 우리나라가 남북으로 갈리지 않았다면, 저 길로 천지를 왔을 터인데, 제3국인 중국 땅으로 와서 건너다보고 있는 현실이 참으로 안타까웠다. 천지에서 더 오래 머물고 싶었지만, 연길로 돌아갈 시간을 계산하고는 통일이 된 뒤에 저 편의 길로 다시 천지를 보러 오리라 다짐하면서 발길을 돌렸다.

  폭포 아래로 내려와서 온천수에 삶은 계란을 사서 시장 요기를 하고 온천장으로 들어갔다. 전에 왔을 때는 천으로 사방을 둘러친 노천 온천장이었는데, 지금은 제대로 시설을 갖춘 온천장이 있었다. 실내 온천장 밖에는 자연스레 흐르는 물을 받아놓은 노천탕이 있었다. 나는 노천탕으로 가서 몸을 담그고 앉아서 자연의 오묘함을 새삼 느꼈다. 천지의 모습을 본 감동과 온천수의 따스함이 나의 마음을 뿌듯하게 하면서 편안함을 주었다. 그리고 잠을 설치고 새벽부터 일어나 차를 타고 와서 힘든 산길을 왕복하느라고 쌓인 피로를 말끔히 씻어주었다.  

  오후 8시경에 숙소로 돌아와서 서울에 있는 아들과 딸에게 전화를 걸어 오늘의 감격과 기쁨을 이야기하였다. 그 다음날은 연변 지역 동표들이 추석을 지내는 모습을 보면서 연길 시내의 이곳저곳을 둘러보았다. 그 다음날은 용정(龍井) 지역을 둘러본 뒤에 북경행 비행기에 올랐다. 우리 두 사람의 마음에는 백두산 천지를 본 감격과 기쁨, 숙소를 제공하고 불편하지 않도록 세심하게 배려하면서 여러 곳을 안내해 준 이 선생과 그 가족의 따스한 정이 가득 담겨 있었다.

  이 글은 <충청문학 제17호, 서울 : 충청문인협회, 2006>에 실려 있음.
       

  2007년은 정해년(丁亥年)으로, 돼지의 해이다. 동양에서는 12지(支)에 동물의 이름을 하나씩 붙여 쓰기도 한다. 이 동물들은 각기 특성을 지니고 있는데, 그 동물의 특성으로 그 해나 그 달, 그 날의 운수를 판단하기도 한다.

  한국에서 돼지는 오래 전부터 신에게 바치는 제물이었고, 도읍지를 정해 주거나 왕자를 낳을 여인을 만나게 해 주는 신이한 능력을 가진 동물로 신성시하였다. <삼국사기(三國史記)>에는 다음의 두 이야기가 실려 있다. 고구려 유리왕 때 하늘에 제물로 바치기 위해 기르던 돼지[郊豕]가 달아났는데, 그 돼지를 찾으러 갔다가 도읍지로 적합한 곳을 발견하고 도읍을 옮겼다고 한다. 고구려 산상왕(山上王) 때 하늘에 제사 지낼 때 제물로 바칠 돼지가 달아났는데, 한 처녀가 그 돼지를 붙잡아 주었다. 왕이 이상히 여겨 미복(微服) 차림으로 그 여자를 찾아가 관계하여 아들을 낳았는데, 그 아이가 산상왕의 뒤를 이은 동천왕(東川王)이라고 한다.

   돼지와 관련된 이야기는 비범한 인물인 최치원(崔致遠)을 잉태하게 한 <금돼지>, 머슴살이하는 총각을 장가들게 하였다는 <머슴을 장가보낸 돼지>, 돼지꿈을 꾸었다고 거짓말하는 젊은이의 꿈을 해몽해 준 <돼지꿈의 해몽> 등 많이 있다. 

   돼지는 오늘날에도 무당들의 굿상이나 동제(洞祭)의 제사상, 각종 고사(告祀)의 제사상에서 빼놓을 수 없는 제물이다. 전에는 통돼지를 제물로 바쳤으나, 요즈음에는 머리만 바치기도 한다. 제상에 올려놓는 돼지는 웃는 모습이어야 좋다고 하여 입을 벌리고 죽은 것을 골라 올려놓는다. 요즈음에는 제상(祭床)에 놓은 돼지머리의 입에 돈을 끼우고 소원을 빌기도 한다. 

   돼지는 잘 먹고 잘 자라며, 한꺼번에 8마리 안팎의 새끼를 낳아 기른다. 그래서 각 가정에서는 돼지를 길러 살림을 일으키는 밑천으로 삼았다. 이에 따라 돼지는 복스러운 동물, 다산(多産)의 동물로 매우 소중하게 여겨 왔다. 돼지는 한자로 ‘돈(豚)’이라고 하는데, 이것은 우리말의 ‘돈[金]과 음이 같다. 그래서 돼지를 재물과 관련지어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각 가정에서는 돼지 모양의 저금통을 마련해 놓고, 수시로 돈을 넣어 저금한다. 전에는 다른 사람에게 자기 아들을 낮춰서 말할 때 돈아(豚兒)’라고 하였다. 수명이 짧은 집 아이의 이름을 ‘돼지’라고 부르기도 하였다. 이러한 것은 돼지가 복스러운 동물로 살림의 밑천이 된다는 의식, 돼지같이 잘 먹고 잘 자라라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다. 

   한국인은 꿈에 돼지를 보면 복이 온다거나 음식을 얻는다고 하고, 돼지를 잡으면 아주 좋다고 한다. 그래서 요즈음에도 돼지꿈을 꾼 뒤에 복권을 사거나 경마장을 찾는다고 한다. 윷놀이를 할 때에 도가 나오면 한 밭밖에 가지 못한다. 그런데도 처음에 도가 나오면 ‘살림 밑천’이라고 하면서 ‘개’나 ‘걸’이 나온 것보다 좋아한다. 돼지혈[豚穴]에 묘(墓)를 쓰면 후손이 발복하여 부자가 된다고 한다. 이것 역시 돼지는 복스럽고, 재수가 좋은 동물이라는 의식에서 나온 것이다.     

   돼지[亥]에 해당하는 방위와 시각, 날, 달, 해를 보면, 해방(亥方)은 24방위 중 북서북(北西北)이다. 해시(亥時)는 오후 9~11시이고, 해일(亥日)은 일진(日辰)이 돼지에 해당하는 날이다. 해월(亥月)은 월건(月建)이 돼지로 된 달 곧 10월이다. 해년(亥年)은 60갑자 중에서 해(亥)가 든 해이다. 해(亥)가 들어가는 해는 을해(乙亥), 정해(丁亥), 기해(己亥), 신해(辛亥), 계해(癸亥)로 12년 만에 한 번씩 돌아온다.

   돼지해에 태어난 사람을 돼지띠라고 하는데, 돼지띠는 일반적으로 음력 1월 1일부터 12월 말일에 태어난 사람이라고 알고 있다. 그러나 사주(四柱) 명리학(命理學)에서는 절기력으로 한 해를 구분하여 그 해 입춘 시각부터 그 다음 입춘 전 시각 사이에 태어난 사람을 돼지띠라고 한다. 돼지띠는 복이 많아 부자가 되어 건강하게 오래 산다고 믿는다. 돼지띠는 대체적으로 성정이 진솔한데, 남성은 일단 목표를 정하면 그 일을 꾸준히 밀고 나가므로 성공 확률이 높고, 여성은 마음먹은 일을 끝까지 철저하게 수행하면서도 자상한 엄마로서 가정에도 충실하다고 한다. 이것은 돼지에 대한 여러 의식이 결집된 것이라 하겠다.

   정해년(丁亥年)의 정(丁)은 오행으로 보아 불인데, 불은 붉은 색이다. 그러므로 2007년 정해년은 ‘붉은 돼지해’라고 할 수 있다. 붉은 색은 활활 타는 불꽃의 색으로 귀신이 싫어하는 색이다. 그래서 붉은 색은 축귀(逐鬼)․축사(逐邪)의 뜻을 지니고 있어서 재수가 있는 색, 재물 운이 따르는 색으로 여긴다. 붉은 색에 대한 이런 의식은 중국인도 매우 강하다. 이렇게 볼 때 돼지해인 2007년은 재운(財運)이 따르는 복된 해라고 할 수 있다. 이를 근거로 꿈과 기대를 안고 새해를 맞이하고, 꿈을 이루기 위해 노력하는 것은 좋은 일이다. 

   요즈음 일부 역술인이 2007년을 ‘600년에 한 번 오는 황금 돼지해’라고 하고, 일부 상인들이 이를 부추기고 있다. 이를 일부 언론이 여과 없이 보도함에 따라 2007년에 출산을 하겠다고 서두르며, 유아용품에 관심을 갖는 사람이 늘고 있다고 한다. 정해년은 ‘붉은 돼지해’이지 ‘황(금)색 돼지해’가 아니다. 황색 돼지해는 황색을 뜻하는 토(土)가 들어간 기해년(己亥年)이어야 한다. 2007년은 ‘600년에 한 번 오는 황금 돼지해’라고 하는 것은 근거가 없는 말이다. 이런 말에 부화뇌동(附和雷同)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이 글은 홍성신문 제1008호, 2007년 1월 1일자에 실려 있음.>


   중국 북경에 있는 대학의 초빙교수로 와서 북경 생활을 시작할 때의 일이다. 학교안의 작은 아파트에 가방을 풀고 나니, 학술대회에 참가하거나 관광을 왔을 때와는 달리 모든 문제를 안내자 없이 스스로 해결해야 한다는 점에서 걱정이 앞섰다. 큰 문제는 학과 교수나 조교에게 말하여 해결한다지만, 작은 문제는 혼자서 해결해야 하는데, 모든 것이 낯설고 말이 통하지 않으니, 답답하다 못해 막막하였다. 그렇다고 방안에만 앉아 있을 수도 없는 일이어서 아내와 함께 용기를 내어 바깥출입을 시작하였다. 먼저 학교 안을 거닐어 숙소의 위치를 확인한 뒤에 교문 밖으로 나가서 학교 둘레의 지리를 익혔다. 그 다음에는 이곳 교수님들이 알려준 대로 가까운 공원, 쇼핑센터를 걸어서 갔다 오기도 하고, 식당에 들어가 음식을 사먹기도 하였다. 좀 먼 곳을 갈 때에도 처음에는 택시를 타고 다녔으나, 뒤에는 지도를 보고 대강의 방향을 살핀 뒤에 시내버스를 타고 다녔다. 이렇게 생활하는 동안 나는 문화의 차이를 느꼈다. 

  거리에 나가서 제일 먼저 색다르게 느껴지는 것은 자전거의 행렬이었다. 몇 년 전에 왔을 때보다는 덜하지만, 차도 양편의 자전거 전용도로에는 자전거 행렬이 끊이지 않았다. 특히 출퇴근 시간에는 남녀노소 구분 없이 자전거를 탄 사람이 자전거 전용도로를 가득 메우며 달렸다. 자전거 행렬을 보고 있으면, 한 방향으로 움직이는 큰 힘이 느껴졌다. 그 힘은 내게로 밀려와 작은 충격과 전율을 안겨 주었다. 저 힘이 바로 중국을 움직이는 힘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중국의 서민들은 자전거를 유용한 교통수단으로 이용하고 있다. 지금 자전거로 출퇴근하는 사람들이 모두 자전거를 집에 두고 승용차나 버스를 이용한다면, 교통 혼잡으로 시내는 마비될 것이다. 그러고 보면, 자전거는 대도시의 교통 혼잡을 덜어주는 데에 큰 몫을 하고 있다. 중국 사람들이 기름진 음식을 먹는 데도 비만으로 보기 흉한 사람이 적은 것은 녹차를 많이 마시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자전거를 많이 타기 때문이라고도 한다. 한국에서도 서울을 비롯한 대도시에 자전거 도로를 많이 만들어 출퇴근 때에 이용하게 함으로써 교통의 혼잡을 덜고, 유류를 절약하며, 대기 오염을 막고, 운동량을 늘려 건강 증진에 도움이 되게 하였으면 좋겠다.
 
   좁은 계단을 오르내릴 때, 또는 넓지 않은 인도를 걸을 때 나는 습관적으로 왼편으로 걷거나 비켜서곤 하였다. 그런데, 반대편에서 오는 사람 역시 나와 같은 방향으로 걷거나 비켜섰다. 그래서 길싸움을 하느라고 서로 길을 막아서는 사람처럼 이쪽저쪽으로 옮겨 다닌 적이 몇 번 있다. 그 때마다 나는 속으로 “여기 사람들은 왜 좌측통행을 하지 않지? 일본 사람들은 잘 하던데.” 하고 생각하였다. 그런데, 알고 보니, 이곳은 ‘우측통행’이라고 한다. 그러고 보면, 그 때 나와 마주쳤던 사람들은 나를 보고, ‘우측통행’도 모르는 교양 없는 사람이라고 하였을 것이다.

   이곳 사람들은 옷차림이 매우 검박(儉朴)하다. 9월 중순부터 하순까지 거리에서 넥타이를 맨 남자, 화려한 옷차림을 한 여자를 만난 적이 그리 많지 않다. 강의를 하는 교수들 역시 편한 복장이고, 대학생들의 옷차림 역시 수수하다. 이것은 한국 사람들의 깔끔하면서도 다양한 옷차림과 차이가 있다. 2년 전 9월에 일본 후쿠오카에 갔을 때 더운 날씨인데도 정장을 한 사람, 양복의 윗저고리는 입지 않았더라도 와이셔츠 차림에 넥타이를 맨 사람이 많았던 것과는 대조적이다. 이것은 겉으로 꾸미기보다는 내실을, 형식이나 명분보다는 실용성을 중시하는 중국 사람들의 의식 때문이 아닐까 생각한다.

   양력 10월 1일은 국경절인데, 국경절 휴일이 며칠이냐고 물으니, 3일 또는 5일, 또는 7일로 대답이 각각 달랐다. 대학의 경우 7일을 쉬는 대학도 있고, 9일을 쉬는 대학도 있었다. 내가 있는 학교를 보니, 10월 1일부터 7일까지 쉬고, 토요일과 일요일인 8일과 9일에 강의를 하였다. 휴일이 닷새인데, 이틀을 앞당겨 7일을 연이어 쉬었기 때문에 토요일과 일요일에 강의를 하는 것이라 하였다. 7일까지 쉰 은행이 8일과 9일에 영업을 한 것도 같은 이유에서 일 것이다. 국경절이나 춘절(음력 설)에 쉬는 기간은 단위 기관마다 실정에 맞게 탄력적으로 운용하여 연휴를 만들어 쉬고 있다고 한다. 이것 역시 중국인들의 실용적인 사고의 표현이라 하겠다.
학교 안에서 대학생들이 생활하는 모습을 보면, 기숙사에서 강의실로, 식당으로 옮겨갈 때에는 삼삼오오 짝을 지어 걸으며 담소하는 것, 이성의 친구와 손을 잡거나 허리를 껴안고 다니는 것은 한국 학생들과 다를 바 없다. 그런데, 한적한 그늘 밑의 벤치에 앉아 있는 학생들의 모습은 아주 달랐다. 이른 아침, 낮, 오후를 가릴 것 없이 한국 학생들처럼 몇 사람씩 모여 앉아 담소하는 모습은 거의 찾아볼 수 없었다. 대개는 혼자, 또는 두세 명이 조금 거리를 두고 앉아 책을 읽거나 무엇을 쓰고, 영어 회화 연습을 한다. 식당이나 샤워장 앞에 줄을 서 있는 경우에도 앞뒤 사람과 담소하지 않고 각자 무엇을 읽거나 외우고 있다. 한국 학생들이 친구와 이야기하기를 좋아하여서, 또는 공부한다고 티내지 않으려고 시험 시간 직전이 아니면 남이 보는 데서 무엇을 읽거나 외우지 않는 것과 대조를 이룬다.

  중국에서 한국에 유학 온 대학원생이 한국과 중국의 대학생이 공부하는 모습을 ‘칼로 두부 자르기식’과 ‘스폰지식’이라고 말한 것이 생각난다. 한국 학생은 실컷 놀다가도 시험 때가 되거나 과제를 할 때에는 남이 보지 않는 곳에서 밤을 새워 공부한다. 그러나 중국 학생은 조각나는 시간까지 활용하면서 꾸준히 공부한다고 한다. 대학생들의 공부하는 태도로 어떤 것이 좋을까 생각해 볼 문제이다.   

  이곳에서는 자동차도, 사람도 교통 신호를 엄수하기보다는 눈치껏 움직이는 것 같다. 길을 건너려고 신호를 기다리고 서 있으면, 보행자 신호등에 빨간 불이 켜졌는데도 사람들이 건너간다. 파란불로 바뀌기를 기다려 건너가려고 하면, 우회전하는 차가 길을 건너는 사람들 사이를 뚫고 지나간다. 유턴하는 차와 좌회전하는 차가 밀고 오기도 하고, 자전거가 달려오기도 한다. 그래서 길을 건너려면 겁부터 났다. 차들도 신호가 바뀌지 않았는데, 눈치를 보며 진행한다. 운전자나 보행자 모두 기 싸움에서 이기지 않으면 자기가 가려는 방향으로 갈 수 없는 것 같다.   

   이곳에서는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자동차가 경적을 울려댄다. 앞서가는 자동차나 사람에게 경고의 뜻으로 울리는 경우에도 필요 이상으로 자주, 길게 울린다. 앞의 버스가 손님을 내리고 있어서 움직일 수 없는 것을 알면서도 그 차가 움직일 때까지 경적을 울린다. 주택가나 학교 안에서도 걷다가 경음기 소리 때문에 깜짝 놀라는 일이 많다. 숙소 안에서도 경음기 소리에 짜증이 나기 일쑤이다.   

  내가 강의하는 학교 앞에 육교가 있는데, 얼마 전에 육교의 바닥면을 뜯어내고 다시 입히는 공사를 하였다. 공사가 끝난 다음날에 그 육교를 올라가며 보니, 육교 바닥이 광고판이나 되는 듯이 명함 크기의 광고 스티커가 덕지덕지 붙어 있었다. 글자가 작아 허리를 굽히고 자세히 보거나 앉아서 살펴보기 전에는 광고 내용을 볼 수 없는 데도 새로 만든 육교 바닥에 셀 수 없이 많은 광고 스티커를 붙이는 것은 정말 광고의 효과가 있기 때문일까?

  버스 정류장에 가면 아치 모양의 표지판이 있다. 표지판의 위쪽에는 그 정류장의 이름이 적혀 있고, 그 아래에는 노선표가 붙어 있어서 이용하기 편리하게 해 놓았다. 그런데, 정류장 이름을 적어놓은 곳에는 대부분 광고지가 붙어 있어서 그 정류장의 이름을 볼 수 없다. 길을 잘 아는 사람에게는 그게 필요 없을지 모른다. 그러나 나처럼 중국말이 서툴러 물을 수도 없고, 차장들의 말을 잘 알아들을 수도 없어서 버스 노선표에 적힌 정류장 이름을 적어가지고 다니면서 길을 익히고, 내릴 곳을 판단해야 하는 사람이나, 길이 선 사람에게는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다. 그런데도 대부분의 정류장 이름이 광고지로 덮여 있거나 떨어져 버렸으니, 시설을 해 놓은 취지가 무색해졌다.

   버스 안에서 큰 소리로 말하는 사람, 귀가 따가울 만큼 큰 소리로 휴대전화를 받는 사람, 담배꽁초를 아무 데나 버리는 사람, 길가다 가래침을 뱉는 사람도 한둘이 아니다. 이런 것은 모두 남을 배려하지 않는 자기중심적인 사고가 행동으로 나타난 것이리라.   

   중국 사람들 사이에서 한국 음식은 기름기가 적고 담백하면서도 맛이 있으며 위생적이라 하여 점점 인기가 높아가고 있다고 한다. 북경 시내에는 한국 요리 전문식당이 많이 있다. 내가 간 식당은 하나같이 손님들이 많아 식사 시간에는 자리 나기를 기다려야 했다. 이름 있는 한국 식당에 처음 가서 불고기를 먹을 때의 일이다. 값이 싸고 맛도 좋았는데, 식후에 계산서를 보니, 불고기 1인분 값은 18위앤인데, 젓가락과 물수건 값이 2위앤, 숯불 값이 6위앤, 상추를 추가로 시킨 것이 6위앤이었다. 차나 생수 값을 따로 받는다는 것은 이미 알고 있었으므로 크게 이상하지 않았으나, 밥을 먹는데 필요한 젓가락, 불고기를 굽는데 필요한 불 값을 따로 받는 것은 아주 생소하였다. 한국에서 불고기를 먹을 때 불 값이나 추가로 시킨 김치나 상추의 값을 따로 받지 않는 습관에 젖은 나로서는 선뜻 이해하기 어려웠다.

   그 동안 나는 문화의 차이에서 오는 충격을 여러 번 받았다. 나는 이것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적응하느냐를 놓고 곰곰이 생각하여 보았다. 그러던 중 30여 년 전에 판소리 감상회에 갔을 때의 일이 떠올랐다. 얼마 전에 돌아가신 박동진 명창이 무대에 나와 허두가를 불렀는데, 관객들이 모두 얌전하게 앉아 있었다. 이를 본 박 명창은 마이크를 빼어 들고서, “아니, 요 잡것들 요렇게 가만히 자빠져 있으려면 뭐 하러 왔당가? 집에서 낮잠이나 자지. 내가 소리를 하면 ‘얼씨구!’, ‘잘한다!’ 하고 추임새를 해야 신명이 나지.” 하면서 관객들을 놀린 뒤에 추임새 하는 요령을 가르쳐 주었다. 관객들이 추임새를 하자, 박 명창은 신명이 났다. 그래서 그 날 소리판은 소리꾼과 관객이 한 덩어리가 되어 아주 흥겨워졌다. 우리는 서양 음악 연주회에 가서는 정숙하게 앉아 있어야 하고, 판소리 감상회에 가서는 추임새을 해야 한다. 서양 음악 감상회에 가서 ‘얼씨구’ 하고 추임새를 하였다가는 미친 사람 취급을 받을 것이고, 판소리 감상회에 가서 얌전하게 앉았다가는 ‘잡것’ 취급을 받게 될 것이다.

   중국의 문화를 한국의 문화의 잣대로 평가하여 이를 폄하하거나 추켜올리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 이것은 판소리 감상회에 간 서양 음악가가 “한국의 음악 청중은 듣는 태도가 나쁘다.”고 불평하였다는 것과 같을 것이다. 이런 생각 끝에 나는 이곳 문화에 적응하려고 애를 쓰기 시작하였다. 

   이제 이곳에서 생활한 지도 어언 한 달이 지났다. 이제 이곳 문화에 적응하기 시작하여 이곳 사람들처럼 큰 두려움 없이 길을 건넌다. 그리고 음식점에 가서도 물 값, 불 값, 젓가락 값을 따로 청구하여도 그러려니 하고 돈을 낸다. 복식으로 된 아파트 복도가 컴컴하여 앞이 안 보이면, 발을 굴러서 소리로 감지하는 전등의 센서를 작동시켜 전등을 켜고 드나드는 일에도 익숙하게 되었다. 이러한 일들은 나도 모르게 이곳 문화에 적응되고 있는 것이리라.

  <수필문학 통권 184호, 서울 : 수필문학사, 2006. 4. 1에 실린 글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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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국 북경의 중앙민족대학 객원교수로 와서 북경 생활을 시작한 지 18일이 되던 날이다. 점심 식사 후에 향산(香山)에 가려고 아내와 함께 숙소를 나섰다. 향산은 북경 서북의 하이디앤취(海澱區) 서산 기슭에 위치한 삼림공원인데, 북경 중심부에서 약 20km 떨어져 있다. 북경에 관해서 별로 아는 것이 없는 내가 향산을 처음 알게 된 것은 내가 공부한 중국어 교재에 향산 이야기가 나왔기 때문이다.

   중앙민족대학 정문 건너편에서 904번 시내버스를 타고 서툰 발음으로 두 사람이 ‘시양산’에 간다고 하니, ‘쓰 콰이(3元)’를 내라고 하였다. 버스를 타고 1시간 쯤 가니, 향산이 보였다. 버스에서 내려 사람들을 따라가니, 벌써 산을 내려오는 사람들도 많았다. 10원의 입장료를 내고 북문으로 들어서서 사방을 살펴보니, 숲이 우거진 큰 산이 보였다. 넓은 평지만 보이던 북경 시내에 이런 산이 있었던가 싶을 정도로 울창한 숲이 있는 높은 산이었다. 산기슭에는 작은 호수가 푸른 숲과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산 중턱에는 절이 있고, 탑이 보였다. 이곳 사람들의 휴일인 토요일 오후라서 많은 사람들이 이곳에 왔지만, 워낙 산이 넓고 길이 많아 혼잡하지는 않았다.
 
  길을 걷다 보니, 케이블카 타는 곳 표지판이 있었다. 시계를 보니 오후 2시가 지났다. 산을 걸어 오르기에는 늦은 시간이어서 케이블카를 타려고 승강장으로 갔다. 케이블카 이용 요금은 평일에는 30원이고, 국경절과 공휴일에는 40원인데, ‘단행(單行)’이라고 쓰여 있었다. 주 5일제 근무가 완전히 정착되지 않은 나라에서 살아온 나는 토요일이 휴일이라는 생각을 하지 않고, 60원을 냈더니, 나이가 들어 보이는 여자 매표원이 80원이라고 하였다. 그제서야 이곳은 토요일도 휴일임을 생각하고 20원을 더 내고 표를 샀다.

   케이블카는 가는 방향으로 두 사람씩 앉게 되어 있었다. 나는 아내와 함께 천천히 올라가는 케이블카에 앉아 사방을 둘러보았다. 발 아래에는 울창한 숲이 우거져 있고, 산의 남쪽에는 사원인 듯한 큰 건물과 탑이 숲속에 자리 잡고 있었다. 높이 오를수록 산은 험하였고, 뒤편으로는 산줄기가 끝없이 이어지고 있었다. 발밑에는 등산로가 보이는데, 많은 사람들이 계단을 오르고 있었다. 어떤 사람은 더위를 참지 못하겠다는 듯이 웃옷을 벗어들고 오르고 있었다. 우리는 케이블카를 타고 가는 19분 동안 주변의 아름다운 경치를 둘러보며, 중국 산동에 있는 태산에 갔을 때와 이탈리아의 카프리 섬에 갔을 때에 이와 비슷한 케이블카를 탔던 일을 이야기하기도 하였다.

   케이블카에서 내려 조금 올라가니, 산 정상이었다. 거기에는 ‘향로봉(香爐峰) 해발 557m’라는 표석이 서 있었다. 산 정상에는 두 개의 거대한 바위가 있는데, 그 형상이 솥과 같고, 운무(雲霧)가 바위 주위를 감돌 때에는 마치 향로가 자색 연기를 내뿜는 듯하다고 한다. 그래서 산봉우리를 향로봉이라고 하였다 한다. 이곳을 ‘귀지앤초우(鬼見愁)’라고도 하는데, 그 까닭은 산이 높아 귀신이 보아도 근심한다는 뜻이라 한다. 

   향로봉에서 동쪽을 바라보니, 북경 시내의 모습이 한눈에 들어왔다. 크고 작은 건물들과 도로, 녹지대 등이 조화를 이루어 아름답게 보였다. 길을 따라 달리는 차들이 열을 지어 움직이는 개미떼의 움직임처럼 보였다. 뒤편을 보니, 첩첩히 싸인 산의 능선들이 겹겹으로 이어져 있었다. 산허리에 감긴 구름 뒤로 또 이어지는 산, 그 뒤에 아득히 보이는 먼 산. 그 동안 중국의 산수화에서 흔히 보던 아름다운 풍경이 실제로 내 눈앞에 펼쳐져 있는 것을 보니, 정말 장엄하고도 아름다웠다. 옛사람들이 일찍부터 향산에 맑은 구름이 떠 있는 모습을 ‘서산청운(西山晴雲)’이라고 찬탄하며 연경(燕京, 북경의 옛이름) 팔경(八景)의 하나로 꼽은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여러 산줄기에는 산행할 수 있는 넓은 길이 나 있고, 봉우리에는 정자가 서 있다. 나는 능선으로 이어지는 길을 보면서 아침 일찍 산에 올라 능선에 난 길을 따라 이쪽 봉우리의 정자에 앉아 쉬다가 싫증이 나면 다시 저편 봉우리에 있는 정자로 옮겨가 쉬고, 또 그 다음 정자로 옮겨가 쉬면서 며칠을 지내면 속세를 떠난 신선과 다름없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그렇게 해보고 싶은 생각이 불현듯 일었지만, 길도 잘 모르는 데다가 그럴 만한 체력이 없으니 어쩌랴. 신선과 같은 생활도 의욕이 왕성하고, 그를 뒷받침할 만한 체력이 있을 때라야 가능한 것이라는 생각으로 자제할 수밖에 없었다. 

   향로봉 표석 앞에는 사진을 찍으려는 사람들이 많아 차례를 기다려야 했다. 나는 한참을 기다려 사진을 찍고 조금 조용한 곳으로 가서 벤치에 앉아 물을 마시고 쉬었다. 아내는 산 아래에서 사 가지고 온 군고구마를 먹으며 ‘맛있다.’는 말을 연발하더니, 나에게도 먹어보라고 하였다. 나는 평소에 군고구마를 즐기지 않았지만, 아내가 하도 맛있다고 하기에 받아 먹어보니 질척하면서도 달콤한 것이 정말 맛있었다. 군고구마 장수가 ‘티앤(甛. 달다)’이라고 하면서 봉지에 넣어주던 자신만만한 표정이 떠올랐다. 향산에서 먹은 군고구마의 맛은 오래오래 잊을 수 없을 것 같다.

   우리는 케이블카가 운행 마감을 하면 어쩌느냐면서 서둘러 승강장으로 와서 케이블카를 탔다. 올라올 때와 반대 방향으로 앉아 올라갈 때 보지 못한 산의 이모저모를 내려다보니, 정말 좋았다. 보행로에는 많은 사람들이 산을 내려가고 있었다. 케이블카를 타고 오르내리는 사람을 유심히 보니, 중국 사람도 있지만, 외국인이 많이 눈에 띠었다.
내려오는 케이블카를 타는 승강장에는 ‘표를 사지 않은 손님은 그대로 타고 내려가서 표를 사면 된다.’고 써 있었다. 우리는 그 말의 해석을, 걸어서 올라간 사람이 내려올 때 케이블카를 타는 경우에 해당하는 것이라 생각하고, 올라올 때 표를 샀으니, 그 표를 보이면 될 것이라 생각하였다. 그런데 내려서 보니, 다시 40원짜리 표를 사서 보여주어야 밖으로 나올 수 있었다. 나는 밖으로 나온 뒤에야 ‘단행(單行)’이란 말의 뜻을 바로 알았다. 그러고 보니, 케이블카 탑승 요금은 1인당 왕복 80원이다. 이것은 중국 물가로는 꽤 비싼 요금이다. 이런 요금을 낼 수 있는 사람은 외국인 관광객이나 주머니 사정이 좋은 중국 사람일 것이다. 케이블카 시설을 해 놓고, 외국 관광객이나 형편이 좋은 내국인들에게 좋은 구경을 시켜주면서 주머니를 열게 하는 것은 관광 수입 면에서도 큰 보탬이 될 것이라 생각하였다. 

  내가 짧은 시간에 이렇게 아름다운 풍광을 볼 수 있었던 것은 케이블카의 덕이었다. 나는 케이블카가 시간이 넉넉하지 않은 관광객과 체력에 자신이 없는 관광객에게 아름다운 풍광을 볼 수 있게 해 주고, 많은 관광객을 유치하여 관광 수입을 올릴 수 있다는 점에서 긍정적인 면도 있음을 실감하였다. 나는 케이블카를 타고 중국 산동의 태산을 오를 때와 이탈리아 카프리 섬을 올라갈 때에도 같은 생각을 한 적이 있다. 나는 이런 경험을 하면서 한국에서 북한산을 비롯한 풍광이 좋은 산에 케이블카를 설치하는 것은 자연을 훼손하는 것이라며 반대하는 것이 정말 잘하는 일인가를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케이블카를 설치하고서도 자연을 훼손하지 않고 보호할 수 있는 방안을 강구하는 것이 더 필요하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케이블카 승강장 동편으로 와서 이곳저곳을 둘러보는 동안에 해는 뉘엿뉘엿 지고 있었다. 향산은 여행사의 관광 상품의 일정에는 들어 있지 않은 곳이다. 그래서 북경 관광 여행을 한 사람들로부터 향산에 관해 말하는 것을 들어본 적이 없다. 이런 곳을 와 본 것이 참으로 기쁘고, 다행스럽게 느껴졌다. 향산은 10월 중순에서 11월 초 사이에 단풍이 아름답다고 한다. 우리는 단풍이 아름다울 때, 휴일을 피하여 다시 와서 단풍 구경도 하고, 북경 식물원도 구경하자면서 버스 정류장으로 향하였다. 향산의 명물이라는 대추를 한 봉지 사서 들고.

        <문예운동 제89호, 서울 : 문예운동사, 2006. 3. 1.에 실린 글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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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틈이 나면 아내와 함께 아파트 가까이에 있는 대현산에 올라갔다 오곤 한다. 이 산은 우리 집에서 한 시간이면 갔다 올 수 있는 곳으로, 높고 큰 산은 아니지만, 운동 부족인 나에게 운동 공간을 제공해 주고, 아내와 대화할 시간을 마련해 준다. 또, 온갖 나무들과 꽃이 있어 계절의 변화를 느끼게 해 준다. 봄에는 개나리와 진달래, 벚꽃과 이름 모를 꽃들이 만발하고, 새들이 분주히 날며 지저귀어 교외로 나가지 않고도 봄의 정취를 맛보게 해 준다. 여름이면 소나무, 은행나무, 팽나무, 단풍나무, 아카시아 등이 해를 가리어 시원한 그늘을 만들어 준다. 가을이면 곱게 물든 단풍나무와 은행나무 잎이 밝은 햇살아래 자태를 뽐낸다. 눈이 내린 날 산에 오르면, 눈꽃이 핀 나무들이 정겹게 느껴진다. 그래서 우리 부부는 새로 조성한 넓고 시원스런 대현산 공원이나 응봉산보다 이 산을 즐겨 찾곤 한다.

   우리는 이 산에 아침에 간 적도 있고, 대낮이나 해질 무렵에 간 적도 있다. 그런데 그 때마다 우리의 눈길을 끄는 것은 산자락에 자리 잡은 몇 곳의 배드민턴장에서 배드민턴을 하는 사람들이었다. 젊은 사람도 있고, 나이가 꽤 들어 보이는 사람도 있다. 그 중에는 부부가 함께 하는 사람도 있는데, 그들은 무척 행복해 보였다. 부부가 함께 와서 배드민턴을 하는 사람은 최소한 먹고 입는 일에 궁색한 사람, 뜻하는 일이 잘 안 되어 정신적 스트레스가 많은 사람, 일에 쫓기어 시간을 낼 수 없는 사람, 건강이 좋지 않은 사람, 게으른 사람은 아닐 것이다. 그들은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건강한 사람들이고, 공기 맑은 산자락에 와서 땀을 흘리며 운동하니 더욱 건강해 질 것이다. 건강한 몸과 마음으로 열심히 일하면 그에 따른 성과도 좋아질 것이요, 가정도 화목해 질 것이니, 더욱 행복해 질 것이다. 

   나의 둘레에는 탁구를 하는 사람, 테니스를 하는 사람, 배드민턴을 하는 사람, 골프를 하는 사람이 있다. 이들은 오래 전부터 나에게 적어도 한 가지 운동을 하라고 권하였다. 그러나 나이 들기 전에 논문 한 편이라도 더 쓰고, 저서 한 권이라도 더 내야 한다는 생각 때문에 뒤로 미루곤 하였다. 그러다 보니, 어느 것 하나 제대로 시작도 못하고 나이를 먹고 말았다. 이곳으로 이사 온 뒤에는 거리가 멀어진 데다가 더 바빠졌고, 많이 걸으면 무릎이 아프곤 하여 북한산에 가는 일이 시들해졌다. 대현산을 오르내리는 일을 열심히 하겠다고 마음먹었지만, 그 것 마저 제대로 하지 못하였다. 나의 운동 부족을 걱정하던 아내가 함께 탁구를 하자고 하였다. 이 제안을 받은 것이 2002년 봄이었는데, 그 해는 작은 아들을 장가보내는 일, 회갑 전까지 내겠다고 벼르던 저서의 집필, 제자들이 중심이 되어서 추진하는 회갑기념 논문집 두 권에 실을 논문 두 편을 쓰는 일, 95세가 된 어머니의 병을 간호하는 일 등으로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그래서 건강을 위해 산책을 하거나 운동을 하는 일은 염두에 둘 수 없었다. 

   2003년 1월에 어머니께서 세상을 떠나셨다. 어머니의 장례를 치르고 난 뒤에는 어머니를 여읜 허전함, 그 동안 쌓인 피로와 체력 소모 때문이었는지 기침을 하고, 만성 피로와 함께 무력감에 빠졌다. 병원을 찾아가 검사를 받고, 약을 먹어 기침은 멎었으나, 만성 피로와 무력감은 낫지 않았다. 전부터 다니던 한의원을 찾아가니, 한의사는 내게 보약을 먹은 뒤에 맛있는 음식을 먹으며 일주일에 두세 번씩 땀이 날 정도의 운동을 하는 것이 좋겠다고 하였다. 나 역시 그게 좋겠다고 생각하여 아내의 권유대로 탁구를 하기로 하였다.

 
   2003년 2월에 나는 아내와 함께 탁구장에 갔다. 젊었을 때 탁구를 좀 하기는 하였으나, 기본자세를 익힌 적도 없고, 흥미 위주의 마구잡이식 경기를 한 것이 전부이기 때문에 나의 탁구 실력은 형편없었다. 여러 사람 앞에서 치는 것이 부끄러웠지만, 나보다 실력이 좋은 아내가 상대하여 주며 격려해 주는 바람에 용기를 내어 탁구대 앞에 서서 치기 시작하였다. 

   며칠 뒤에 나는 아내의 권유대로 정식으로 회원 등록을 하고, 하루에 20분씩 지도를 받기 시작하였다. 그 동안 사용하던 쉐이크핸드 라켓을 라운드형으로 바꾸고 기본자세부터 새로 익혔다. 지도를 맡은 분은 80년대에 국가대표 선수를 지낸 여선생인데, 기본자세부터 차근차근 가르쳐 주었다. 코치한테 렛슨을 받기 전과 후에는 아내와 연습을 하였다. 일주일에 두 번을 가겠다고 하였지만, 한 번밖에 못가는 때도 있었고, 아예 못가는 주도 있었다. 나와 아내의 건강 형편 때문에 몇 달씩 거르기도 하였다. 그러나 사정이 허락되는 대로 탁구장에 가서 열심히 연습하였다. 그렇게 2년을 지내고 보니, 기본자세도 어느 정도 몸에 익었고, 상대방의 자세에 따른 공의 움직임과 방향을 조금 읽을 수 있게 되었다. 그래서 지금은 아내와 아주 재미있게 게임을 하기도 하고, 가끔씩 교회에 가서 교인들과 게임을 하기도 한다. 


    아내는 35년 동안 교사로 있다가 1998년에 명예퇴직을 하고, 바로 탁구를 시작하였다. 운동 부족을 자각하고 있던 아내는 퇴직 직전부터 수영을 시작하였는데, 수영장 물의 소독약 때문인지 눈병이 생기곤 하여 그만두고, 구민체육관 탁구 교실에 등록하여 탁구를 배우기 시작하였다. 일주일에 세 번씩 체육관에 가서 잠깐씩 렛슨을 받고, 회원들과 연습하기를 5년 가까이 하였다. 늦게 배운 탓에 실력이 죽죽 늘지는 않았지만, 공을 다루는 솜씨가 제법이다. 내가 탁구를 시작한 지 1년쯤 되었을 무렵에 나는 아내에게 게임을 하자고 하였다. 젊었을 때 내가 이기곤 하였으므로, 게임을 하면 크게 지지 않으리라 생각하였다. 그러나 결과는 그 반대여서 몇 점을 접어주어야 게임이 되는 형편이었다. 정식으로 배우면서 연습한 연조는 무시할 수 없는 것임을 절실히 느꼈다. 

   내가 탁구를 시작한 지 2년이 된 지금은 아내와 게임을 하면, 막상막하(莫上莫下)의 열전을 벌일 때도 있다. 이기면 기뻐하고, 지면 약이 올라 더 하자고 조르기도 한다. 이기고 지는 것은 그날의 건강 상태와 관련이 있어 건강 상태가 좋은 날은 이기지만, 그렇지 않은 날은 몇 게임을 더 하여도 지고 만다. 게임을 하고 나면 온몸이 땀으로 젖고, 피로를 느끼기도 한다. 그러나 집에 돌아와 샤워를 하고 나면, 피로가 풀리고 온 몸이 가벼워진다.

   탁구는 과격하지 않으면서 운동량이 많다. 적당히 숨이 차고, 땀이 흐르며, 재미를 느낄 수 있다. 아내는 골밀도가 낮다는 의사의 말을 듣고 무척 걱정을 하였는데, 탁구를 시작한 뒤에 골밀도가 높아져서 정상이 되었다고 하여 아주 기뻐하고 있다. 탁구는 좁은 공간을 차지하는 실내운동이므로, 테니스나 골프처럼 날씨의 제약 없이 할 수 있고, 경비가 많이 들지도 않아서 좋다. 탁구를 부부가 함께 하니, 함께 즐길 수 있어서 좋고, 다른 한 쪽을 기다리며 불평할 일이 없어 좋다. 운동 후에는 함께 외식을 하거나, 음료수를 마시며 대화할 수 있어서 좋다. 또 본인은 물론 상대방의 건강 상태를 알 수 있어서 좋다. 우리 부부는 뒤늦게나마 탁구를 시작한 것을 참으로 다행으로 여기며, 탁월한 선택을 하였다고 자부한다. 둘레 사람들도 보기에 좋다면서 부러워한다.

  나는 틈이 나는 대로 아내와 함께 대현산을 찾고, 탁구를 하며 건강을 지켜나가려고 한다. 그런데, 몇 주 전부터 아내가 허리의 통증 때문에 탁구는 물론, 대현산에도 가지 못하고 있다. 나는 아내가 속히 완쾌되어 함께 탁구도 하고, 대현산도 갈 수 있게 되기를 바라며, 열심히 아내의 수발을 들고 있다.       
     
  <수필문학 > 통권 제172호, 2005년 3월호에 수록된 글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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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며칠 전 강의실에서의 일이다. 강의실 앞쪽은 몇 가지 시청각 기자재가 자리잡고 있어서 수강생 60명이 모두 들어오면 통로가 없을 정도로 비좁은 방인데, 수강생 중 몇 명이 교육실습을 나간 관계로 강의실 앞쪽과 뒷쪽에 빈 자리가 있었다. 그런데 한 여학생이 강의용 의자를 강의실 뒷벽에 붙이고 뒷문 쪽에 앉아 있는데, 늦게 들어오는 학생이 뒷문을 여니 문이 의자에 걸려 다 열리지 않을 뿐만 아니라 부딪는 소리가 났다. 그것을 본 나는 큰 소리로 '뒷문 앞에 앉은 학생은 출입에 방해가 되니, 옮겨 앉아요.' 하고 말한 뒤에 출석을 부르기 시작하였다. 출석 부르는 동안에도 몇 학생이 문 부딪는 소리를 내며 들어왔다. 출석을 다 부른 뒤에 그 여학생을 보니, 여전히 그 자리에 않아 있었다.

   나는 그 여학생의 태도를 의아해 하면서, "출입에 방해가 되니 옮겨 앉으라는데 왜 그대로 앉아 있는가? 남을 배려하는 마음을 가져야지." 하고 말한 뒤에, 전체 학생을 향해 '남을 배려하는 마음'을 강조하는 말을 하였다. 그러느라고 몇 분의 시간이 지났는데도, 그 여학생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나는 그 학생이 출입에 방해가 되는 것을 알면서도, 담당 교수가 옮겨 앉으라고 세 번씩이나 말을 하는데도 꼼짝도 하지 않은 이유를 이해할 수 없었다. 그래서 언성을 높여 옮겨 앉으라고 세 번을 말하였는데도 옮겨 앉지 않는 이유가 무엇이냐고 하면서 옆 자리로 옮겨 앉고, 의자를 안쪽으로 당겨 놓으라고 하자, 그제서야 옆의 책상으로 옮겨 앉았다.

   나는 그 학생이 옮겨 앉는 것을 보면서, 어째서 저런 행동을 할까? 요즈음 학생들은 형제자매가 하나 또는 둘인 집에서, 부모님이 자기만을 위해 주는 분위기에서 자라 남을 배려하는 마음을 기르지 못한 데다가 남의 말을 간섭으로 생각하고 잘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 때문이 아닐까? 요즈음 어린이나 젊은이들은 공주병과 왕자병 중증 환자라고 하니, 그들에게 남을 배려하는 마음을 기대하는 것은 나의 지나친 욕심이 아닐까? 나는 순간적으로 이런 생각을 하며 마음을 가라앉히고, 강의를 진행하였다.
   강의를 마치고 연구실에 온 뒤에는 다른 일을 하느라고 조금 전의 일을 잊고 있었는데, 그 여학생이 찾아와 강의실에서의 일을 사과하였다. 그리고 자기가 뒤에 앉은 까닭이 실은 남을 위한 배려였다고 하였다. 눈물을 흘리며 자기의 진심을 말하는 그 여학생을 보면서, '남을 배려할 줄 모르는 학생'이라고 꾸짖은 나 역시 학생의 입장을 배려하지 못하였다는 생각이 들어 미안하다고 사과하였다. 이어서 매사를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친구들과 잘 어울리며 생활할 것을 당부하자, 그 학생은 가벼운 표정으로 연구실을 나갔다. 

   이 일을 계기로 하여 나는 '남을 배려하는 마음'에 관하여 잠시 생각해 보았다. '남을 배려하는 마음'을 가진 사람은 자기만을 생각하는 이기심이나 자기만이 옳다는 독선적인 마음을 갖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얌체 같은 짓을 하지 않음은 물론, 질서를 잘 지키며, 거짓말을 하거나 남을 속이는 일을 하지 않을 것이다. 또, 남을 골탕먹이고, 남의 물건을 훔치거나 빼앗는 일을 하지 않을 것이다. 이런 사람이 많은 사회는 질서가 잘 지켜지는 밝고 명랑한 사회가 될 것이 아닌가?     
 
   승용차를 운전하다 보면, 과속으로 달리기, 급히 차로 바꾸기, 불법으로 끼어들기 등 교통 법규를 어기는 차량들이 많다. 또, 혼잡한 교차로에서 서로 먼저 가려고 찻머리를 들이미는 바람에 차들이 뒤엉켜 혼잡을 가속시키는 경우가 많다. 주차장에 가 보면, 옆 차선에 걸쳐서 세운 차가 있어 뒤에 오는 차량 역시 옆 차선에 걸쳐 세우게 되어 결국은 한 대 또는 두 대를 세울 수 없게 하는 경우가 있다. 또, 진출로에 차를 세워 다른 차량의 통행에 불편을 주는 경우도 있다. 운전자가 남을 배려하는 마음을 갖고 조금만 유의하면, 교통 질서·주차 질서가 확립되어 좀더 나은 환경에서 운전하고 주차할 수 있을 터인데, 나만을 생각하는 바람에 여러 사람이 많은 불편을 감내하지 않으면 안 된다. 

   몇 년 전에 일본에 갔을 때의 일이다. 일본 사람들이 인도를 걷는 것을 보니, 여러 사람이 걸을 때에는 반드시 종대(縱隊)로 걸었다. 그래서 뒷사람이 앞질러 가거나 반대편으로 가는 사람이 통행하는 데에 불편을 느끼지 않게 하였다. 이것은 일본인들이 지닌 남을 배려하는 예절이기도 하고, 좁은 인도를 효율적으로 통행하는 지혜라고 할 수도 있다. 그런데 우리의 현실은 어떠한가? 건물의 복도나 좁은 인도를 걸을 때 횡대(橫隊)로 걷는다. 그래서 뒷사람이 앞질러 갈 수도 없고, 반대편에서 오는 사람이 비켜가기도 불편하다. 통행 방법을 기준으로 말한다면, 일본 문화는 '종대 문화'이고, 한국 문화는 '횡대 문화'라 할 수 있다. 이것은 어려서부터 남을 배려하도록 가르치고 훈련을 하였느냐, 그렇지 않으냐에 따라 생긴 문화의 차이라고 생각한다.

  남을 배려하는 마음은 어려서부터, 생활을 통하여 기르도록 해야 한다. 내가 어렸을 때 어른들은 세수수건을 쓸 때에도 다른 식구를 배려하여 한쪽 자락만 쓰라고 하였고, 상위에 놓은 생선을 먹을 때에도 다른 사람을 생각해 한쪽 부위만 먹으라고 하였다. 그리고 학교에서 복도를 지나다닐 때에는 좌측 통행을 하고, 줄을 서서 다니라고 가르치고 훈련을 하였다. 그런데 요즈음 어른들은 자녀들에게 이런 것을 가르치기보다는 자기만을 생각하고 행동하도록 가르친다. 그래서 왕자병과 공주병에 걸린 아이들을 길러내고 있다. 이렇게 자란 어린이는 어른이 된 뒤에도 자기만을 생각하는 이기적이고 독선적인 사람이 될 것이다. 그래서 자기의 이익을 위하여는 질서를 무시하는 행동을 쉽게 하게 되고, 심할 때에는 범죄 행위도 서슴지 않게 된다.

   남을 배려하는 마음은 가정에서 부모가 가르침은 물론이고, 유치원·초·중·고교에서 교육과정에 넣어서 가르치고 훈련해야 한다. 그래서 남의 처지나 형편을 헤아려 행동하는 사람, 질서를 잘 지키는 사람을 길러내야 한다. 남을 배려하는 마음을 가진 사람이 많은 사회는 서로를 존중하는 사회, 질서가 잘 지켜지는 사회가 될 것이다. 이런 사회가 구현(具現)되기를 기대한다.   

                <조선문학 통권 152(서울 : 조선문학사, 2004. 1)에 수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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