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란은 산르우르파에서 남쪽으로 45km 떨어진 곳에 있는 작은 도시로 인구는 약 1,500명이다. 이곳은 아주 오래 전부터 사람이 살았는데, 기원전 2,000년경에도 상업이 발달한 도시였다고 한다. 기원전 1,100년경에는 달을 숭배하는 아시리아인이 지배하였고, 뒤에 로마 영토가 되었다

  하란은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이 고향인 우르(산르우르파)를 떠나 하나님이 복을 주겠다고 약속한 땅 가나안으로 가다가 머물러 산 땅이다. 그러므로 이곳은 기독교, 유대교, 이슬람교에서 믿음의 조상으로 받들어 모시는 아브라함의 제2고향이다.

  전통가옥

  하란에는 햇볕에 말린 흙벽돌로 지붕을 원뿔 모양으로 지은 집이 있다. 이 집은 이 지방의 기후와 환경에 맞는 건축 양식으로, 여름에는 시원하고 겨울에는 따뜻하다고 한다. 이것은 기원전 6,000~3,000년 사이의 메소포타미아에서 전해온 주거 양식인데, 지금 볼 수 있는 것은 200여 년 전에 세운 것이다.

  하란에서는 독특한 건축 양식인 고깔 모양의 집을 관광객을 위하여 개방하고 있다. 우리는 하란 문화의 집으로 가서 집 안팎을 둘러보았다. 한 단지 안에 여러 집을 연달아 지어놓았는데, 집 밖에는 여러 가지 생활도구가 전시되어 있다

  집안으로 들어가 보니, 연달아 지은 집들이 안으로 연결되어 있다. 돔 부분은 흙벽돌로 30∼40단을 쌓아올렸는데, 높이가 5m쯤 되어 보인다. 그 안에서 기념품도 팔고, 차와 음료수도 팔고 있는데, 그곳 사람들은 모두 전통의상을 입고 있었다. 우리가 간 날은 맑은 날씨에 바깥 기온이 섭씨 38도가 넘어 무척 더운 날이었는데, 집안에 들어가니 시원하였다

  문화의 집에서 멀지 않은 곳에도 전통가옥들이 있고, 옛 성터도 보였다. 전통가옥이나 성벽 모두 흙과 돌을 섞어 만든 벽돌로 쌓은 것 같았다. 나는 이곳을 둘러보며 목재를 구하기 어려운 이곳 사정을 고려하여 일찍부터 흙벽돌로 원추형 집을 짓고 산 이곳 주민들의 지혜가 대단하였음을 알았다.

  

야곱의 샘

  전통가옥에서 2km쯤 떨어진 곳에 야곱의 샘으로 알려진 샘이 있다. 지금은 물이 나오지 않지만, 예전에는 이 지역 사람들에게 물을 공급해 주는 좋은 우물이었던 같다. 구약 성경에는 이 샘이 두 번 나온다먼저 아브라함의 아들 이삭의 아내감을 구하는 이야기부터 살펴보겠다

  고향인 우르를 떠난 아브라함은 아버지 데라와 함께 이곳 하란에서 와서 살았다. 그는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에 하나님께서 지시한 가나안으로 가서 살았다. 아브라함은 가나안에서 낳은 아들 이삭의 신부감을 가나안 여자 중에서 고르지 않고, 자기의 고향에 사는 친척 중에서 고르기로 결심한다. 그래서 하인을 하란으로 보내어 신부감을 구해 오게 한다. 구약 시대에는 민족과 가문의 혈통과 문화를 지키기 위해 근친혼(近親婚)을 하던 때였다. 아브라함의 종은 하란으로 와서 이 우물가에서 물을 길러 나오는 사람을 기다린다. 그는 여기서 맨 먼저 물을 길러 나온 리브가를 만난다. 그는 리브가가 아브라함의 동생 나홀의 손녀이고, 인물과 성품이 훌륭한 여인임을 확인한 뒤에 청혼하여 이삭과 혼인하게 하였다

  그 다음에는 이삭의 아들 야곱 이야기가 나온다. 이삭과 리브가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 야곱은 가나안 여인과 혼인하지 말고, 어머니의 고향인 하란으로 가서 외가의 여인과 혼인하라는 아버지 이삭의 말에 따라 하란으로 왔다. 그는 이 우물가에 앉아 있다가 양떼를 이끌고 물을 먹이려고 온 외삼촌 라반의 딸 라헬을 만나 혼인하였다.

  이처럼 이 샘은 리브가와 이삭, 야곱과 라헬이 혼인하도록 인연을 맺어준 의미 있는 장소이다. 지금은 물도 나오지 않고 메마른 밭 가운데에 방치되어 있지만, 아브라함의 아들과 손자가 배우자를 얻는 데에 중요한 몫을 한 뜻 깊은 장소이다 하란에서 멀지 않은 곳에 선지자 엘리야의 무덤과 욥의 가족 무덤이 있고, 달의 신 (Sin)’의 신전이 있다고 하나 시간이 없어 가보지는 못하였다.

 

 * 이 글은 2012년 8월 25일에 도서출판 '민속원'에서 간행한 <<터키 1000일의 체험>> 중 <터키 여행의 즐거움과 보람>에 실려 있음.


  산르우르파는 터키 남동부에 자리 잡고 있는 인구 약 65만명의 도시이다. 이곳은 성경에 나오는 우르, 기독교에서 믿음의 조상으로 받드는 아브라함의 탄생지이고, 동방의 의인 욥이 살았던 곳이다. 그래서 예로부터 이곳을 예언자의 도시라고 하였다산르우르파는 신석기 시대부터 사람들이 살았던 곳으로, 기원전 3,000년경에는 후르리인이 이 지역을 통치하였다. 그 뒤에는 히타이트 왕국이 이곳을 지배하였다. 히타이트 왕국의 핫투샤가 함락된 뒤에는 신 히타이트가 주변에 소왕국을 건설하여 이 지역을 다스렸다. 기원전 6세기에는 페르시아가 이 지역을 점령하여 다스렸다.

  알렉산더 대왕은 이곳을 점령하고, 이름을 에데싸(Edessa)’라고 하였다. 이곳은 지중해와 메소포타미아를 잇는 요충지이므로, 로마와 아랍이 이곳을 차지하기 위해 전쟁을 벌이곤 하였다. 1098년 십자군은 셀주크의 영토였던 에데싸를 빼앗아 에데싸 백령(伯領)’을 세웠으나, 50년밖에 지속하지 못하였다이곳은 1516년에 오스만제국의 영토가 되었는데, 오스만제국은 이곳의 지명을 우르파(urfa)’라고 하였다. 그래서 20세기까지 우르파로 불렸는데, 1차 세계대전 후 영국과 프랑스군이 이곳을 점령하였을 때 시민들이 맞서 싸워서 물리친 것을 기려 1984년에 도시 이름 앞에 산르(명예로운)’를 붙여 산르우르파가 되었다. 그러나 전과 같이 우르파라고 부르는 사람도 많이 있다.

  20011622일 하란을 경유하여 산르우르파에 도착한 우리는 점심에 우르파케밥을 먹었다. 우르파케밥은 이 지역에서 자랑하는 요리로, 토마토와 가지, 고기완자를 번갈아 큰 꼬치에 꽂아서 구운 것인데, 아주 맛이 좋았다점심 식사 후에 우르파 중심가에 자리 잡고 있는 아브라함 공원으로 들어섰다. 공원 안에는 많은 사람들이 오가는데, 터키 전통복장을 한 사람들과 검은색 차도르를 쓴 사람들이 많이 눈에 뜨였다. 모두 터키 사람인지, 이웃나라에서 온 사람인지는 분간하기 어려웠지만, 대화를 해 보면 이웃나라에서 온 사람도 꽤 많았다.

아브라함 탄생지(Hz İbrahim Makammı/ Dergah)

  우리는 맨 먼저 아브라함 탄생 동굴을 찾았다. 아브라함이 탄생하여 자랐다는 동굴은 우르파 성채 바로 아래의 큰 바위산에 있는데, 건물을 지어 보호하고, 출입문도 만들어 놓았다. 출입문은 남자가 들어가는 문과 여자가 들어가는 문이 다른데, 안에 들어가면 합해진다. 거기에는 손발을 씻을 수 있도록 수도 시설을 해 놓았다. 여러 사람들이 이곳에서 손과 발을 깨끗이 씻은 뒤에 동굴을 들여다보는 모습이 진지해 보였다. 지면 아래에 자리 잡은 동굴은 시멘트로 벽을 싸서 보호하고, 유리를 통해 그 안을 들여다볼 수 있게 해 놓았다. 동굴 안에서는 물 떨어지는 소리가 들리는데, 이곳 사람들은 이 물을 성수(聖水)로 여긴다고 한다.

  아브라함 탄생 동굴은 무슬림들이 매우 신성하게 여기는 곳이다. 무슬림들은 아브라함 탄생 동굴 옆에 메블리드 할릴 자미(Mevlidi Halil Camii)를 지어 이곳을 성지로 만들었다. 이 동굴에는 다음과 같은 전설이 전해 온다.

   옛날에 이곳을 다스리던 아시리아의 님로트왕의 꿈에 한 신인이 나타나 그 해에 태어나는 아이가 나라를 망하게 할 것이라고 하였다. 꿈에서 깨어난 왕은 그 해에 태어나는 남자아이를 모두 죽이라고 명하였다.

  이 명령이 내려진 직후에 한 임신한 여인이 이 동굴로 와서 남자 아이를 낳았다. 그녀는 이곳에 숨어 지내면서 아이가 일곱 살 먹을 때까지 기른 뒤에 아이의 아버지가 있는 집으로 돌아갔다. 이 아이가 아브라함이라고 한다.

  아브라함은 기독교와 유대교, 그리고 이슬람교에서 믿음의 조상으로, 또는 성인으로 받들어 모시는 인물이다. 그러나 성경이나 코란의 어디에서 아브라함의 탄생에 관련된 이야기는 없다. 그러나 이슬람교에서는 아브라함의 출생과 관련된 위의 전설을 진실되고 신성하다고 여겨 이곳을 성지(聖地)로 만들고 경배하고 있다.

성스러운 물고기 연못(Halilür Rahman Gölü)

  아브라함 탄생 동굴에서 나와 넓은 광장을 조금 걸어가니 폭이 약 10m, 길이가 약 100m쯤 되는 직사각형 모양의 연못이 있었다. 맑고 깨끗한 물에는 수많은 잉어 모양의 커다란 물고기들이 떼를 지어 오가고 있었다. 이 연못에는 다음과 같은 전설이 전해 온다.

   옛날에 청년 아브라함이 유일신인 하나님을 믿으며 해와 달과 별의 신을 믿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을 믿으라고 전도하였다. 그는 월신(月神)의 상()을 만들어 파는 아버지께도 우상을 숭배하지 말고 하나님을 믿으라고 전도하였다. 이를 안 님로트 왕은 전통신앙을 부정하도록 백성을 선동하는 아브라함을 그대로 둘 수 없었다. 왕은 그를 불러 지금까지 이 지역 사람들이 믿어온 다신교로 복귀할 것을 명하였다. 아브라함이 말을 듣지 않자, 왕은 그를 죽이기로 마음먹었다.

왕은 아브라함을 형틀에 묶은 다음, 그 밑에 장작을 높이 쌓고 불을 붙였다. 불길이 아브라함에게 가까이 이르렀을 때에 하나님이 아브라함의 몸을 튕겨 오르게 하고, 천둥·번개와 함께 비를 내렸다. 잠시 후에 아브라함이 떨어진 곳에 연못이 생기고, 타던 장작은 물고기가 되었다. 사람들은 이 연못을 성스러운 연못이라 하고, 물고기를 성스럽게 여겨 잡지 않는다.

  성경에는 아브라함이 신앙적인 이유 때문에 화형(火刑)을 당할 뻔한 이야기가 전해 오지 않는다. 그러나 코란에는 왕이 아브라함을 화형에 처하려고 할 때에 하나님이 그를 불 가운데에서 건져냈다는 구절이 있고(2169절과 379798), 이 구절에 대한 주석에 위와 같은 이야기기 실려 있다. 무슬림들은 연못의 북쪽에는 르드바니예 자미(Rıdvaniye Camii), 서쪽에는 할릴뤼르 라흐만 자미(Halilür Rahman Camii)를 지어 이 지역을 성역(聖域)으로 만들었다.

  아브라함과 관련된 내용 중 성경과 코란이 다른 예를 하나 적어 보겠다. 성경을 보면, 하나님이 아브라함의 믿음을 시험하기 위해 아들을 제물로 바치라고 한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명을 따라 아들을 산으로 데리고 가서 제물로 바치려고 한다. 아브라함의 믿음이 확고한 것을 확인한 하나님은 아들의 몸에 손대지 말고, 준비해 놓은 양을 제물로 바치라고 한다. 이것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아브라함의 믿음이 절대적이었음을 말해주는 사건이다. 종교사적으로 보면, 이 이야기는 사람을 제물로 바치던 관습에서 동물을 제물로 바치는 관습으로 바뀌는 전환점이 되었음을 말해 준다. 이 이야기가 구약 성경에도 실려 있고, 코란에도 실려 있다. 그러나 두 경전의 내용을 비교해 보면, 제물로 바치려는 아들이 성경에서는 '이삭'으로 되어 있는데 비하여 코란에서는 '이스마엘'로 되어 있다. 이것은 이스라엘 민족은 아브라함의 두 아들 중 사라의 몸에서 난 이삭을, 아랍 민족은 하갈에게서 난 이스마엘을 조상으로 받드는 때문이라 하겠다.

젤리하의 연못(Aynı Zeliha)

  성스러운 물고기의 연못 남쪽에 젤리하의 연못(Aynı Zeliha)’이 있다. 이 연못은 아브라함을 홀로 연모하던 님로트 왕의 딸 젤리하가 아브라함을 화형하려는 것을 보고, 슬픔을 이기지 못하여 몸을 던진 연못이라고 한다. 공주가 조금만 더 참고 기다렸더라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구하시는 이적(異蹟)을 볼 수 있었을 터인데,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성스러운 물고기의 연못과 젤리하의 연못의 물은 좁은 수로로 연결되어 있어 서로 통한다. 물고기들은 수로를 따라 두 연못을 오가면서 이곳을 찾는 사람들에게 제리하 공주의 슬픈 사연을 이야기해 주고 있는 듯하다.


우르파 성채(Şanlı Urfa Kalesi)

  성스러운 물고기 연못 남쪽 돌산에 우르파 성채가 있다. 이 성채는 고대 히타이트 시대부터 있었다고 하는데, 지금 전해 오는 것은 서기 815년에 재건한 것이다. 언덕 위에 높이 17m의 돌기둥이 두 개 있는데, 이것은 기원전 3세기경에 조성된 것이라고 한다. 이곳에 오르면, 아브라함의 탄생지와 성스러운 물고기 연못을 비롯하여 시내를 한눈에 내려다 볼 수 있다.

욥의 동굴(Hz Eyyüb Peygamber Makamı)

  우르파 성채에서 버스를 타고 15분쯤 가면 욥이 은거(隱居)하던 동굴이 있다. 구약 성경 <욥기>에 나오는 욥은 우스 사람으로, 흠이 없고 정직하며, 악을 멀리하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이었다. 그는 동방에서 으뜸가는 부자로, 아들 일곱과 딸 셋과 함께 행복하게 살았다어느 날, 사탄이 하나님 앞에 나타나자, 하나님은 욥의 믿음을 칭찬하며 자랑하였다. 사탄은, 욥의 믿음은 하나님께서 부족함 없는 재물과 하는 일마다 잘되는 복을 주셨기 때문이므로, 그에게서 복을 거두면 하나님을 저주할 것이라고 하였다. 하나님은 사탄에게 그가 가진 모든 것을 다 네게 맡겨 보겠다. 다만, 그의 몸에는 손을 대지 말라(욥기 1 : 12).”고 하셨다. 사탄은 그에게서 자녀, 재물을 모두 빼앗고, 그의 몸에 악성 종기가 생기게 하였다. 모든 것을 다 잃고 갈 곳이 없게 된 욥은 병든 몸을 이끌고 이 동굴로 와서 지냈다고 한다.

  욥은 이 동굴에서 지내면서도 하나님을 원망하거나 저주하지 않고, 신실한 믿음을 지켰다. 이를 확인한 하나님은 그에게 건강을 회복시켜 주시고, 전보다 더 예쁜 자녀와 더 많은 재물을 허락해 주셨다.

  이곳에는 욥이 기거했던 동굴과 욥의 병을 치료하기 위해 천사가 팠다는 우물이 있다. 출입구 옆에 있는 수도에서 나오는 물이 그 우물물이라고 한다. 이 물은 병 치료에 효험이 있다고 알려져 왔다. 요즈음에도 많은 사람들이 이곳에 와서 참배한다.

 * 이 글은 2012년 8월 25일에 도서출판 '민속원'에서 간행한 <<터키 1000일의 체험>> 중 <터키 여행의 즐거움과 보람>에 실려 있음.


 

  넴루트산에서 내려온 우리는 호텔에서 아침 식사를 하고, 오전 730분에 산르우르파로 향하였다. 버스가 1시간 남짓 달리니, 유유히 흐르는 강물이 보였다. 가이드에게 강 이름을 물으니, 유프라테스 강이라고 하였다. 물줄기를 따라 20여 분을 달려 오전 915분경에는 아타튀르크 댐의 쉼터에 도착하였다쉼터에는 댐의 완공을 기념하는 조각품이 서 있고, 그 안쪽에 댐의 모습을 볼 수 있는 조망대가 있었다. 조망대에서 보니, 강물이 흐르는 산과 산 사이를 막은 높은 둑이 있고, 둑에 만들어 놓은 수문을 통해 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이곳이 유프라테스 강에 만든 아타튀르크 댐이다.

   유프라테스 강은 터키에서 발원하여 시리아와 이라크를 거쳐 페르시아 만으로 흘러가는, 길이 약 2,800km의 긴 강이다. 이 강은 터키 동부의 에르주름(Erzurm) 북서쪽 산맥에서 시작한 카라수(Karasu) 강과 아르메니아 고원에 있는 아라랏 산(Ararat Dağı) 부근의 반(Van) 호수 근처에서 발원한 무랏 강(Murat Nehir)이 합류하여 본류를 이룬다. 터키에서는 1년에 25억 톤의 물이 흐르는 이 강에 높이 약 169m, 길이 약 1,600m, 두께는 맨 아래가 약 800m이고, 맨 위가 약 15m나 되는 거대한 댐을 쌓았다. 이 댐은 최대 저수량이 500억 톤에 이르는, 세계에서 세 번째로 큰 댐이다.

  이 댐은 남동부 아나톨리아 개발계획(Güneydoğu Anatolu Project)’에 의한 것이다. GAP는 관개시설(灌漑施設)과 수력발전시설 건설을 위한 프로젝트로, 이 프로젝트가 시작된 후에 물이 없던 계곡에 물고기가 가득한 호수가 생겼고, 먼지만 날리던 마을에 시장이 들어서고, 공장이 들어섰다. 이 프로젝트의 규모는 엄청나게 큰 것이어서 9개의 도와 2개의 강(유프라테스 강과 티그리스 강)이 포함되어 있다. 모두 22개의 댐이 계획되어 있는데, 그 중 17개가 2008년 이전에 이미 완공되었다. 이 프로젝트가 끝나는 2012년 무렵에는 19개의 수력발전소가 건설되어 터키 전력의 22%를 공급할 예정이다.

  아타튀르크 댐은 1983년에 공사를 시작하여 2005년에 완공하였는데, 공사비가 약 300억 달러나 되었다고 한다. 이 댐은 터키 남동부 지역의 농업용수 확보와 전력 생산을 위해 건설한 것인데, 교통과 관광 산업에도 좋은 영향을 끼칠 것이다. 이 댐의 물은 둘레 7.5m, 길이 26.4km의 쌍둥이 우르파 터널을 통과하여 하란 평야와 주변 지역에 공급된다. 이 물은 이 지역의 식수난을 해결하고, 목화를 비롯한 농산물 재배에 큰 도움을 주고 있다. 또 이 댐 주위에 여러 개의 수력발전소를 건설하여 많은 양의 전기를 생산하고 있다.

  유프라테스 강과 티그리스 강은 옛날 메소포타미아 문명의 젖줄이었고, 지금은 시리아와 이라크의 생명줄이다. 시리아와 이라크에서는 이 댐이 건설되면 수력 발전용수와 농업용수 확보에 어려움을 겪을 수 있고, 심하면 식수난에 직면할 수도 있음을 걱정하였다. 그래서 두 나라는 이 댐의 건설을 반대하면서 국제적으로 반대 여론을 불러일으켰다. 이에 터키는 시리아와 이라크에 초당 500톤의 물을 공급하겠다는 약속을 하였다고 한다.

  높은 둑에는 ‘DSI’라고 쓴 영문 글자가 선명하게 보였다. 나는 이 댐을 바라보면서 엄청나게 큰 규모의 공사를 한 터키인의 추진력과 뚝심, 자국의 이익을 추구하되 다른 나라의 생존을 위협하지 않고 배려하는 터키인의 넓은 마음을 생각하였다아타튀르크 댐은 오래된 문화유적지도 아니고, 경관이 빼어난 곳도 아니다. 그러나 현대의 토목기술이 배우 발달하였음을 확인할 수 있고, 터키인의 추진력과 뚝심, 남을 배려하는 넓은 마음을 확인할 수 있어서 참 좋았다.

 * 이 글은 2012년 8월 25일에 도서출판 '민속원'에서 간행한 <<터키 1000일의 체험>> 중 <터키 여행의 즐거움과 보람>에 실려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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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넴루트산은 터키 남동부에 있는 해발 2,150m의 산이다. 가까운 곳에 있는 도시 아드야만(Adıyaman)에서 90km, 카흐타(Kahta)에서는 48km 떨어진 곳에 있다. 이 산의 원추형의 산 정상에는 기원전 1세기에 만든 직경 약 150m, 높이 약 50m인 콤마게네왕국 안티오코스왕의 능묘(陵墓)가 있고, 그 앞에 커다란 석상(石像)들이 있다. 유네스코에서는 이 넴루트 유적을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하였다. 터키에는 넴루트산이 또 하나 있는데, 이 산은 동부아나톨리아 지역의 반 호수 근처에 있는 해발 2934m의 산이다.

  해발 2,150m나 되는 넴루트 산의 꼭대기에 큰 능묘와 석상들이 있는 것은 불가사의(不可思議)한 일이다. 이런 일을 한 왕은 어떤 인물일까콤마게네왕국이 있던 이 지역은 기원전 2,000년경 메소포타미아와 교역을 하였다고 한다. 이 지역은 기원전 14세기경부터는 히타이트(Hittite)의 지배 아래 있었고, 기원전 546년부터는 페르시아의 지배를 받았다. 그 뒤에 알렉산더대왕이 이 지역을 정복하여 통치하였는데, 그가 기원전 323년에 요절(夭折)하자 셀레우코스 왕조가 이 지역을 통치하였다.

  셀레우코스 왕조는 각 지방에 군주를 두고 다스렸는데, 이곳 콤마게네 지방도 그 중 하나였다. 기원전 163년 콤마게네의 군주 사모스는 쇠약해진 셀레우코스 왕조에서 이탈하여 콤마게네 왕국을 선포하였다. 사모스의 아들 미트리다데스 1세는 셀레우코스 왕조 최후의 왕인 안티오코스 13세의 딸과 결혼하고, ‘아버지는 페르시아 왕조, 어머니는 알렉산더 대왕의 후손이라 주장하며 적자에게 안티오코스란 이름을 계승하게 하였다. 그의 아들이 안티오코스 1(재위 B.C. 6931)인데, 콤마게네 왕국은 이 때 전성기를 맞게 된다. 이 안티오코스 1세가 자기의 무덤과 석상을 넴루트산 꼭대기에 만들도록 하였다.

  넴루트 유적은 1881년에 오스만제국이 도로 건설을 하려고 독일인 기술자를 고용해 비용을 계산해 보게 하였는데, 그가 이 산의 정상에서 조각상을 발견하여 세상에 알려졌다. 그 후 1953년에 미국 동양연구소가 이곳에 대한 연구를 진행하면서 고고학적 연구가 시작되었다.

정상의 능묘(陵墓)와 석상(石像)

  나는 20106월에 남동부의 아드야만에 있는 넴루트산에 가려고 하였었다. 그러나 여의치 않아 가지 못하고, 20116월에야 장위교회 성지순례단과 함께 이곳을 찾았다. 나는 621일 아침 730분에 버스를 타고 카파도키아에 있는 아브라샤(Avrasya) 호텔을 출발하여 카흐타(Kahta)로 향하였다.

  우리는 가는 도중에 테킬 계곡을 돌아보고, 카흐타를 시내를 지나 꼬불꼬불한 산길을 달려 오후 5시경에 유프라트 넴루트 호텔(Euphrat Nemrut Hotel)에 도착하였다. 우리를 안내하는 가이드는 호텔의 시설이 좋지 않으니 양해하라고 하였다. 그런데 들어가 보니 단층으로 지은 호텔은 지은 지가 오래되어 최신식 시설을 갖추지는 못하였으나, 깊은 산속에 있는 호텔답게 아담하고 조용하며 깨끗하였다. 수영장에는 맑은 물이 가득하였지만, 우리 일행은 수영보다는 건물 주변에 붉게 익은 체리가 주렁주렁 달려 있는 체리나무들에 더 마음이 끌렸다. 체리를 따려고 하여도 손이 닿지 않아 애를 쓰자, 관리인은 막대기를 들고 와서 체리를 따주었다. 나무에서 직접 체리를 따서 먹는 맛은 정말 좋았다.

  내일 아침에 넴루트산 정상에 올라 일출을 보려면 새벽 3시에 일어나야 하니, 일찍 자라는 가이드의 말을 따라 일찍 자리에 누었다. 그러나 일찍 일어나야 한다는 긴장감 때문에 잠이 깊이 들지 않고, 시계를 잘못 보는 바람에 잠을 설치고 말았다. 그래서 새벽 3시에 옷을 입고 밖으로 나오니, 몹시 피곤하였다. 그러나 넴루트산에서 보는 일출의 장관을 놓칠 수 없다는 생각에서 마음을 가다듬었다.

  새벽 330분에 호텔을 나와 산 쪽으로 조금 걸어 올라가니, 작은 차들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우리가 몇 대의 차에 나눠 타니, 차는 산 정상 쪽으로 난 꼬불꼬불한 길을 곡예를 하듯 달려 올라갔다. 15분쯤 달려 올라간 뒤에 차에서 내려 가파른 언덕길을 걸어 올라갔다. 해가 뜨지 않아 어두운 데다가 바위 사이로 난 길에 크고 작은 돌들이 많아 조심조심 걸어 올라갔다산꼭대기에 올라가서 시계를 보니, 435분이었다. 길 왼쪽(서쪽)에 안티오코스 능묘와 석상들이 어렴풋이 보였다. 길 오른쪽(동쪽)으로 올라가니, 평평한 넓은 마당에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사람들은 기쁨이 넘쳐 소리를 지르기도 하고, 모르는 사람과도 악수를 한 뒤에 어깨동무를 하고 구호를 외치기도 하였다. 큰 소리로 노래를 부르는 사람도 있고, 작은 소리로 이야기하는 사람 도 있었다. 모두 넴루트산에 와서 일출을 본다는 것이 기쁘고 흥분되는 모양이었다. 나와 아내 역시 좀 흥분되고 긴장되었다. 마당에 서서 동쪽 하늘을 보니, 사방은 어둠에 덮여 있고, 해가 뜰 기미는 보이지 않는데, 바람이 차서 추위가 느껴지기 시작하였다. 그래서 언덕 밑으로 와서 바람을 피하며 해가 떠오르기를 기다렸다.

  새벽 5시 정각이 되자 저 멀리 동쪽의 타우르스산맥 너머에서 여명이 비치기 시작하였다. 1분쯤 뒤에 여명이 더 밝아지고, 잠시 후부터 해가 조금 머리를 내밀었다. 그리고 조금씩, 아주 조금씩 모습을 드러냈다. 사람들은 모두 해가 떠오르는 장엄한 모습을 지켜보며 감탄의 함성을 질렀다. 이 순간을 오래오래 간직하기 위해 캠코더의 스윗치를 누르고, 카메라의 샷터를 눌렀다. 나도 해가 떠오르는 장엄한 모습에 감탄하며 사진을 찍었다. 가끔씩 카메라의 뷰에서 눈을 떼어 둘러보니, 사방에 겹겹이 뻗혀 있는 산줄기와 산 아래의 평원에 여명이 비치는 광경이 정말 장관이었다. 멀리 터키까지 와서, 2,150m나 되는 높은 넴루트산 정상에서 해가 뜨는 장엄한 광경을 지켜보게 된 것이 정말 기쁘고, 흐뭇하며 감사하였다.

  잠시 후에 해가 모습을 모두 드러내면서 능묘와 신상들을 비추기 시작하였다. 나는 어마어마하게 큰 능묘의 모양, 능묘 앞에 있는 제단과 신상(神像), 제단 아래에 놓여 있는 신상의 얼굴을 살펴보면서 사진을 찍었다햇빛이 비스듬히 비치는 능묘의 동쪽 제단에는 왼쪽부터 아폴론, 콤마게네, 제우스, 안티오코스 1, 헤라클레스의 상()이 서 있다. 양쪽 끝에는 사자와 독수리가 대칭으로 2쌍씩 서 있다. 석상의 안쪽에는 안티오코스의 출신 관련 내용과 유언을 새긴 그리스 문자가 새겨져 있다. 석상의 얼굴들은 지진의 충격으로 몸에서 떨어져 그 아래에 있다. 단정한 얼굴과 반쯤 열린 입은 헬레니즘 양식이고, 머리 장식의 장식과 의상은 페르시아 양식이라고 한다.

  여기에 세운 석상을 보면, 아폴론과 제우스는 그리스 로마에서 숭상되던 신이다. 헤라클레스는 그리스 로마 시대의 영웅인데, 신으로 추앙되던 인물이다. ‘콤마게네행운’, ‘풍요의 뜻을 가진 여신이다. 안티오코스 1세는 이러한 신들과 나란히 서 있다. 이것은 안티오코스 1세가 신들과 같은 반열(班列)에 있음을 나타내는 것이다. 석상의 독수리는 태양에 가장 가까이 갈 수 있는 창조물로, 신과 인간의 중재자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 사자는 가장 힘센 동물로, 왕국을 보호하는 수호신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

  동쪽의 제단과 신상들을 살펴본 뒤에 능묘 북쪽으로 난 길을 따라 서쪽 제단 앞으로 갔다. 서쪽 제단에는 사자와 독수리, 안티오쿠스와 콤마게네, 안티오코스와 아폴로, 안티오코스와 제우스, 안티오코스와 헤라클레스, 아폴로, 콤마게네의 석상을 만들어 놓았다. 이곳 역시 지진의 충격으로 얼굴 부분이 몸에서 잘려 나와 아래쪽에 놓여 있다. 동쪽과 서쪽의 석상들과 부조를 보면, 동쪽은 안티오코스와 신을 각각 조각하였다. 그런데 서쪽에는 안티오코스와 신을 함께 조각하였다. 이것은 안티오코스왕이 신과 동격(同格)으로, 신들과 교류하였음을 나타낸 것이라 하겠다. 커다란 사자 부조의 가슴에 있는 초승달은 콤마게네 왕국의 상징이다. 등 뒤에 있는 3개의 별은 목성, 수성, 화성이라고 한다. 동쪽과 서쪽 제단을 연결하는 북쪽 통로에 세로로 새긴 석판을 늘어놓은 낮은 벽이 있다. 여기에는 페르시아계 부친의 내력을 기술해 놓았다.

   산을 내려오면서 나는 이 높은 산에 능묘와 신상을 만들어 놓은 이유가 무엇일까를 생각해 보았다. 콤마게네 사람들은 일찍부터 태양, , , 물을 신성시하여 신으로 받들어 모셨고, 뒤에는 산, 폭풍, 전쟁, 풍요의 신도 숭배하였다. 이들은 신을 경배하기 위해 신전(神殿)을 지었는데, 신들은 다 하늘에 있는 것으로 믿어 하늘에 가장 가까운 산에 신전을 만들었다. 안티오코스 1세가 해발 2,150m나 되는 넴루트 산의 꼭대기에 자신의 무덤과 신상을 만들게 한 것은 자신이 신의 반열에 들고자 하는 뜻에서이고, 그 뜻을 이루려면 하늘 가까운 높은 산에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안티오코스 1세는 왕으로서 부귀영화를 누린 뒤에 신이 되고 싶었던 모양이다. 사람이 신이 될 수 없다는 것은 정상적인 사고력과 판단력을 지닌 사람이라면 바로 알 수 있는 일이다. 그런데 안티오코스 1세는 자기가 죽은 뒤에 묻힐 무덤을 하늘과 가까운 높은 산에 만들고, 신들과 나란히 서 있거나 신들과 교류하는 신상을 만들어 놓으면 신이 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였다. 이것으로 보아 안티오코스 1세는 과대망상(誇大妄想)에 빠진 인물이었던 것 같다. 그의 과대망상 때문에 거대한 공사를 하느라 얼마나 많은 백성들이 노역에 시달리고, 재물과 생명을 빼앗겼을까를 생각하니, 마음이 답답해진다. 그런데 그의 과대망상이 낳은 작품이 2천여 년이 지난 뒤에 세계문화유산이 되고, 우리들에게 볼거리를 제공하여 주고 있으니, 아이러닉컬(ironical)하다이 지역에는 다음과 같은 콤마게네왕국과 로마 시대의 유적이 있다.

아르사메이아(Arsameia, Eski kale)

  콤마게네의 수도였던 곳으로, 왕족의 선조 아르사메스가 태어난 곳이기도 하다. 이스키 갈레(Eski kale)오래된 성채의 뜻으로, 그곳 주민들이 부르는 지명이다. 158m의 땅속으로 가는 터널 입구 위쪽에 헤라클레스와 악수하는 안티오코스 1세의 아름다운 부조가 있다. 안티오코스의 아버지 미트리다테스의 무덤도 이곳에 있다.

예니 칼레(Yeni Kale)

아르사메이아 옆에 보이는 250300m의 험한 바위산의 성채이다. ‘예니 칼레새로운 성채의 뜻이다. 자미, 욕장, 왕궁의 방, 아치식 천장의 홀(hall)이 있는데, 이것은 오스만 시대의 것들이다.

젠데레 다리(Cendere Köprüsü)

젠데레 강의 가장 좁은 곳에 있는 로마 시대의 석교로 길이는 120m쯤 된다. 이 다리에 남아 있는 석판에는 2세기 말의 황제 세프티미우스 세베루스가 아내 율리아에게 바친다는 명문(銘文) 있다.

카라쿠쉬(Karakuş)

젠데레 다리 서쪽에 높이 30m의 무덤 있는데, 넴룻산의 무덤처럼 상자 모양이다. 도리스 양식의 기둥이 130m 간격으로 둘러싸고 있다. 동쪽 기둥 위에 2.5m의 독수리(Karakuş)의 상이 있다. 그래서 능 이름을 검은 독수리릉이라고 한다. 미트리다테스 2(재위 B.C. 3120) 왕이 어머니와 딸을 위해 건축한 것이라고 한다.

 * 이 글은 2012년 8월 25일에 도서출판 '민속원'에서 간행한 <<터키 1000일의 체험>> 중 <터키 여행의 즐거움과 보람>에 실려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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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중해 연안에 있는 안타키아(Antakya)를 밤 11시에 출발한 우리는 2010624일 새벽 440분에 콘야(Konya)의 동남쪽에 있는 에레일리(Ereğli)에 도착하였다. 버스에서 내리니, 한국어문학과 3학년 메르트 군이 반갑게 맞이해 주었다. 메르트 군은 우리를 승용차에 태워 자기 집으로 데리고 갔다. 메르트 군의 집은 새로 지은 널찍한 아파트였다. 그는 우리를 방으로 안내한 뒤에 버스에서 제대로 자지 못하였을 터이니 좀 자라고 하였다. 그의 말대로 침대에 누워 두어 시간을 자고 일어나니, 피로가 좀 가시는 듯하였다.

   830분쯤 자리에서 일어나 메르트 군의 부모님과 인사를 하였다. 메르트 군의 부모님은 아주 반가워하면서 친절하게 대해 주었다. 9시경에 빵과 치즈, 우유와 주스, 과일 등으로 아침 식사를 하였다. 메르트 군은 식사 후에 에레일리-광진구 자매결연 공원을 보고, 자기집 과수원에 가자고 하였다.

   10시경에 우리는 메르트 군이 운전하는 승용차에 그의 어머니와 함께 타고 집을 떠났다. 그의 어머니는 사야할 물건이 있으니, 시장에 잠깐 들르자고 하였다. 우리가 간 곳은 에레일리시에서 가장 큰 시장이라고 하는데, 물건도 많고, 사람도 많았다. 과일과 채소 파는 곳을 둘러보니, 체리, 복숭아, 사과, 살구, 자두, 포도, 바나나, 무화과, 건과, 메론, 수박 등의 과일과 채소들이 산더미 같이 쌓여 있었다. 쌓여 있는 상품들을 보니, 카이세리 시내의 시장이나 대형 마켓에서 보던 상품들과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양도 많고, 빛깔도 좋으며 튼실하여 먹음직스러워 보였다. 가격표를 보니 가격 역시 아주 저렴하였다. 그 중에서도 유난히 나의 눈을 끄는 것은 흰색 체리였다. 흰색 체리가 있다는 말을 듣기는 하였으나 직접 보는 것은 처음이어서 사진을 찍고, 자세히 보았다. 지금까지 보던 붉은 색 체리와 모양은 똑같은데, 색만 달랐다. 내가 흰색 체리를 처음 본다고 하니, 메르트 군은 이따가 과수원에 가면 흰색과 붉은색 체리가 나무에 달려 있으니, 마음껏 따먹으라고 하였다.

   우리는 다시 차를 타고 공원으로 갔다. 공원 정문 위에는 에레일리구-광진구 자매공원이라고 왼쪽에는 한글로, 오른쪽에는 터키어로 쓰여 있었다. 한글로 쓴 아랫부분에는 태극기와 광진구의 기가 그려져 있고, 터키어로 쓴 아랫부분에는 터키 국기와 에레일리구의 기가 그려져 있었다. 그 가운데에는 좀 작은 글씨로 ‘2002. 10. 16’이라고 쓰여 있다. 아마도 그것은 서울특별시의 광진구와 에레일리구가 자매결연을 맺은 날짜인 것 같다.

   공원 안에는 널찍하게 자리 잡은 1층 건물이 있는데, 건물 중앙에 아차산이라는 한글 현판이 걸려 있었다. 건물 안의 넓은 홀은 보통 때에는 레스토랑으로 쓰는데, 결혼식을 하기도 하고, 특별한 행사장으로 사용한다고 하였다. ‘아차산을 나와 잔디밭 길을 조금 걸어가니, ‘광진정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는 한국식 팔각정이 있었다. ‘광진정에 앉아 공원을 둘러보니, 정말 감개무량하다. 아나톨리아 반도에 자리잡은 터키의 남쪽 지방까지 와서 자매결연을 한 광진구의 의지와 노력이 가상하고 존경스럽다.

   팔각정 앞에는 두 아주머니가 밀가루 반죽을 홍두깨와 같이 굵은 나무로 얇고 판판하게 밀어 쇠솥뚜껑 같은 것에 올려놓아 굽고 있었다. 메르트 군의 아버지는 이것을 사 가지고 와서 에레일리의 전통음식이니 먹어보라고 권하였다. 배가 부르지만, 받아서 먹어보니 맛이 좋았다.

   우리가 공원에 있을 때 한국어문학과 2학년에 다니는 휘세인 군이 오트바이를 타고 와서 반갑게 인사를 하였다. 그는 우리가 온다는 말을 듣고, 며칠 전부터 기다리고 있었다고 하면서 반가워하였다.

   우리는 메르트 군이 운전하는 승용차를 타고 그의 집 과수원으로 갔다. 메르트 군의 아버지와 휘세인 군은 각자 오트바이를 타고 뒤따라 왔다. 우리는 작은 언덕을 넘고, 누렇게 익은 밀밭을 지나 과수원에 도착하였다. 길옆에 작은 집이 한 채 있고, 꽤 넓은 밭에 체리, 살구, 사과복숭아호두 등의 나무가 서 있다. 과수원은 공무원을 하시다가 은퇴한 메르트 군의 아버지께서 은퇴한 후를 생각하여 마련한 것이라고 한다.

   차에서 내린 우리는 누런 살구를 주렁주렁 매달고 있는 살구나무와 먹음직스런 체리를 가지가 휘어질 정도로 매달고 있는 체리나무 앞으로 가서 사진을 찍었다. 그리고 메르트 군이 권하는 대로 살구와 체리를 따서 먹었다. 이렇게 열매를 한껏 달고 있는 살구와 체리 나무를 보는 것도 처음이고, 그 열매를 내 손으로 따서 바로 먹는 것도 처음이어서 조금 흥분되었다.

   살구는 신맛이 별로 없고 달콤하였다. 한국에서 살구 하면 신맛이 떠올라 먹을 엄두도 내지 못하는데, 여기 살구는 시지 않아 여러 개를 따서 먹었다. 체리는 약간 신맛이 나면서 달고 상큼한 맛을 냈다. 카이세리에서 몇 번 사다 먹던 체리보다 더 맛이 있었다. 터키에서는 체리가 1kg2리라(1,500) 정도 한다. 한국에서는 수입 체리 가격이 1kg18,000원 정도로 비싸서 마음대로 사다 먹지 못하였다. 그런 체리를 잘 익고 맛있게 생긴 것만 골라서, 나무에서 직접 따서 먹을 수 있으니, 참으로 기쁘고 흐뭇하였다.

 

   터키에서는 체리를 키라스(kiras)’비쉬네(vişine)’로 나눈다. 지금까지 한국에서나 터키에 와서 사다 먹은 것은 키라스이다. 비쉬네는 키라스와 모양은 같은데, 알이 조금 작고 신맛이 강하다. 그래서 날로 먹는 것보다는 잼이나 주스를 만드는데 주로 쓴다고 한다. 키라스는 검붉은 색도 있고, 흰 색도 있다. 지금까지 체리라고 하면 검붉은 색만 있는 줄 알았는데, 여기 오기 며칠 전에야 흰색 키라스가 있다는 말을 들었다. 흰색 키라스는 오늘 아침에 시장에서 처음 보았고, 나무에 매달린 것은 이 과수원에 와서 처음 보았다.

   나무의 줄기나 잎을 보니, 키라스와 비쉬네가 똑같아 보였다. 그러나 메르트 군 아버지의 설명을 듣고 자세히 살펴보니, 키라스와 비쉬네는 열매도, 줄기와 잎도 조금씩 달랐다. 키라스 나무 중에서도 흰색 키라스는 잎눈에 흰빛이 보였다. 키라스의 씨를 심으면 싹이 터서 자라 비쉬네의 묘목이 되는데, 여기에 키라스나무 가지를 잘라 접을 붙인다. 그러면 접붙인 가지에 의해 붉은 색 또는 흰색의 키라스 나무가 된다고 한다. 설명을 듣고 접붙인 가지가 자라는 것을 보니, 내가 어렸을 때 고욤나무 묘목에 감나무 가지를 잘라 접을 붙여 굵고 맛있는 감이 열리는 감나무가 되게 하던 일이 생각났다.

   나는 처음에는 키라스와 비쉬네를 구별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메르트 군의 아버지의 설명을 듣고 두 나무의 열매, 줄기와 잎을 비교하여 둘을 구별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키라스나무 중에서는 붉은색 키라스 나무인지 흰색 키라스나무인지를 구별할 수 있게 되었다.

   과수원집은 침대를 놓은 방 하나와 농기구, 거름흙, 비료 등을 보관하는 헛간이 있었다. 집앞에는 시멘트로 만들어 놓은 화덕이 있었다. 메르트 군의 아버지와 어머니는 아침에 시장에 들러 사가지고 온 양고기와 채소를 넣고 맛있는 요리를 하였다. 그 요리를 사 가지고 온 식빵과 함께 먹으니, 정말 맛있었다.

   음식을 먹은 후에 차를 끓여 마셨다. 차를 마신 뒤에 메르트 군의 아버지는 터키의 전통술인 라크를 권하였다. 라크는 40%나 되는 독한 술이므로 사양하다가 맛을 보기로 하고 작은 잔에 반쯤 받았다. 거기에 물을 타니, 우유처럼 색이 변하였다. 맛은 진한 향이 있어 감미로우면서도 상큼하였다.

   잠시 후에 메르트 군이 바알라마(bağlama, 기타처럼 생긴 터키의 전통 악기)를 연주하며 노래를 부르자, 메르트 군의 어머니가 일어나 춤을 추었다. 잠시 후에 아버지도 일어나서 어머니와 함께 춤을 추었다. 잠시 후에는 휘세인 군이 일어나 함께 춤을 추면서 분위기를 북돋았다. 이런 모습을 보니, 야외에 소풍 나온 기분이었다. 노래 부르고 춤추기를 좋아한다는 터키 사람들의 흥취를 직접 볼 수 있어 좋았다.

   우리는 살구와 붉은색, 흰색 키라스를 각각 운반용 물통에 하나 가득 따서 차에 싣고 메르트 군의 집으로 왔다. 메르트 군의 어머니는 가지고 온 살구와 체리를 씻어 쨈을 만들기 시작하였다. 우리는 메르트, 휘세인 군과 함께 시내 구경을 하고, 다음 날 카이세리로 돌아갈 버스표를 예매하였다.

   오늘은 메르트 군의 부모님과 하루를 지내면서 터키 중산층의 삶의 일면을 볼 수 있어서 참으로 좋았다. 처음으로 살구와 키라스가 주렁주렁 열린 나무를 가까이서 보고, 한국에서는 비싸서 자주 사먹지 못하던 키라스를 마음껏 따먹을 수 있어서 참 좋았다. 메르트 군과 그 부모님의 친절하고 따뜻한 마음에 감사한다.

 * 이 글은 2012년 8월 25일에 도서출판 '민속원'에서 간행한 <<터키 1000일의 체험>> 에 실려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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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탈회윅은 콘야에서 남쪽으로 45km 떨어진 곳에 있는 신석기 시대 유적지이다. 이곳은 영국의 고고학자 제임스 멜라트가 1961~1965년에 걸쳐 발굴하였다. 그는 발굴 결과 이곳을 포함하는 아나톨리아 지방이 신석기 시대 선진 문화의 중심지였다는 것을 밝혀냈다.

콘야의 메블라나 호텔에서 숙박한 우리는 호텔 사장의 소개로 승용차를 몰고온 사람에게 90리라(7만원)를 주기로 하고, 그가 운전하는 승용차를 타고 차탈회윅으로 갔다. 목적지에 도착하여 보니, 길가에 안내판이 서 있고, 그 옆에는 신석기 시대 사람들이 살던 집을 재현해 놓은 초가집과 전시관이 있다. 그 위쪽 언덕에 발굴 현장이 있는데, 높은 지붕으로 덮은 곳도 있고, 덮지 않은 곳도 있다. 아직도 발굴이 끝나지 않은 곳도 있다. 그곳의 관리인 남자는 우리를 반갑게 맞아 전시실로 안내하여 이곳의 개황을 설명하였다. 그런 뒤에 당시 사람들이 살던 집을 재현해 놓은 곳으로 안내하여 살던 집의 구조와 생활 모습 등을 설명하였다.

이곳은 기원전 7,000년경에 형성된 마을인데, 가장 오래된 건축물은 기원전 6,700년경, 그리고 가장 후기의 건축물은 기원전 5650년경의 것으로 추정한다. 이 시대 사람들은 흙벽돌로 지은 집을 짓고 살았는데, 지붕에서 나무 사다리를 타고 집안으로 들어왔다. 집안에는 벽난로와 화덕이 있고, 바닥보다 조금 높은 단은 앉거나 잠을 잘 때, 또는 일을 할 때 사용하였다. 곡식과 과일 나무를 재배하였고, 집짐승도 길렀던 흔적도 남아 있다.

이곳에의 면적은 13ha 정도인데, 5,000~10,000명 정도의 사람들이 흙벽돌집을 이어서 짓고 살았다. 집은 100년 정도 살고는 허물어 메우고, 그 위에 새로 집을 지어 살았다. 이런 일이 1,000년 정도 반복되다 보니, 집터는 다른 곳보다 20m 정도 높아져 언덕이 형성되었다고 한다.

이곳에서 발굴된 것 중에는 진귀한 것들이 많은데, 모두 앙카라에 있는 아나톨리아문명박물관으로 가져갔고, 여기에는 사진만 전시되어 있었다. 전시된 사진 중에는 여러 사람이 사슴과 물소를 사냥하는 모습을 그린 벽화, 춤추는 장면, 머리를 마주대고 있는 표범을 그린 벽화 등이 아주 선명하였다. 조각품 중에는 유난히 큰 유방과 배를 드러내고 앉아 있는 여신상이 눈에 띄었다. 이 신상은 아주 특이하여 앙카라 아나톨리아문명박물관에서 본 기억이 또렷하다. 짐승의 모양으로 다듬은 돌과 여인의 상반신 모양으로 다듬은 돌로 나의 관심을 끌었다.

 

 

  사람의 무덤에서 뼈도 발굴되었는데, 쪼그리고 앉아 있는 모습이었다. 어머니 뱃속에 있을 때의 모습 그대로 매장한 것으로 보인다. 이것은 옛사람들이 무덤을 대지어머니(지모신)의 태()로 보고, 죽은 사람이 대지어머니의 태속에서 다시 태어나기를 바라는 믿음에서 생긴 매장(埋葬) 방식이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발굴의 현장에는 마을의 형태와 구조, 옛날 집들의 위치와 구조, 신전의 위치와 구조, 무덤 등을 알 수 있게 해주는 사진과 설명이 게시되어 있었다. 안내원은 친절하게 설명해 주고, 여러 가지 출토품이 나온 곳도 말해 주었다.
 


  나는 이곳을 떠나면서 신석기 시대에 왜 사람들이 이곳에 모여 살았을까를 생각하였다. 인류문명의 발상지는 물이 있는 강가로 기후가 따뜻한 곳이다. 물과 기후 가 맞아 식량 문제가 해결된 뒤에는 희소가치(稀少價値)가 있는 물자를 쉽게 얻을 수 있는 곳에 모여 살았을 것이다. 그 대표적인 예로는 소금을 쉽게 구할 수 있는 예리코를 들 수 있다. 사람들이 곡물을 식량으로 섭취하게 되자, 체액의 균형을 유지하기 위해 소금이 필요하였다. 그래서 소금을 쉽게 얻을 수 있는 예리코에 기원전 7,000년경에 성곽도시가 형성되었다.

차탈회윅에는 어떤 물자가 있었기에 도시가 형성되었을까 궁금하였다. 나중에 안 일인데, 차탈회윅은 흑요석이 많이 나는 곳이다. 흑요석은 예리한 날을 만드는 데에 아주 귀중했다. 그래서 차탈휘익에는 예리코와 유사한 교역중심지가 생긴 것이다.

차탈회윅을 떠난 우리는 다시 차를 타고 비잔틴 시대의 교회가 있다는 실레(Sille) 마을을 찾아갔다. 20분쯤 달려 실레 마을에 갔는데, 교회는 보수공사를 하고 있었다. 그래서 사진만 찍고 돌아섰다. 공사를 하고 있는 교회의 뒷편 언덕에도 비잔틴 시대의 교회가 있었다고 하기에 살펴보니, 벽만 남아 있었다. 공사를 하고 있는 교회 앞쪽에는 바위산이 있는데, 옛날에 동굴에 교회가 있었다고 한다. 가보니, 카파도키아에 많이 있는 석굴교회와 비슷하였다.

우리는 오는 길에 로마 시대부터 있던 공동목욕탕을 수리하여 지금도 쓰고 있다는 목욕탕 앞에 쉬면서 사진을 찍고, 콘야 시내로 들어왔다. 승용차 기사는 우리를 시외버스 터미널에 내려 주었다. 우리는 터미널에 있는 식당에서 점심을 먹고, 오후 330분에 출발하는 카이세리행 버스를 타고 숙소로 돌아왔다.


* 이 글은 2012년 8월 25일에 도서출판 '민속원'에서 간행한 <<터키 1000일의 체험>> 중 <터키 여행의 즐거움과 보람>에 실려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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