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중국 산동성에 있는 태산에 오른 감동을 소재로 한 글임.

                                태산(泰山)에 올라  

   지난 7월 17일에는 <1930년대 항일문학 연구>를 주제로 한 제5회 국제문학 심포지엄이 중국 길림성 연길 시에서 열렸다. 나는 여기에 참가하여 <근대민요에 나타난 항일의식>을 발표하여 좋은 반응을 얻었다. 심포지엄을 마친 뒤에 항공편으로 북경으로 가서 하루를 쉰 뒤에 다시 비행기를 타고 제남을 거쳐 공자의 고향인 곡부(曲阜)로 갔다. 곡부에서 하루를 묵으며 공자의 무덤이 있는 공림(孔林), 공자의 사당이 있는 공묘(孔廟), 공자의 후손들이 업무를 처리하였다는 공부(孔府)를 본 우리 일행 13명은 이튿날 아침 버스를 타고 태산으로 향했다.

  내가 태산이란 이름을 처음 들은 것은 "태산이 높다하되 하늘 아래 뫼이로다." 하는 양사언의 시조를 배우던 초등학교 시절이다. 태산은 중국에 있는 산 이름이지만, 우리 나라에서는 '크고 높은 산을 상징하는 말'로 더 많이 쓰고 있다. 태산이 들어가는 말로는 '티끌 모아 태산', '갈수록 태산', '태산명동서일필(泰山鳴動鼠一匹)' 등이 있는데, 여기서의 태산 역시 '크고 높은 산'이란 의미를 지니고 있다.

  나는 우리 나라가 중국과 수교하기 직전인 1990년 여름에 북경의 자금성, 만리장성, 서안, 상해, 소주를 돌아보고, 연길을 거처 백두산에 가 보았다. 그 무렵에 나는 말로만 듣던 태산이 중국 산동성 태안 시(泰安市)에 있는 산으로, 공자의 고향인 곡부의 북쪽에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 때 나는 도대체 태산이 어떤 산이기에 우리 나라 사람들까지 태산을 노래하고, 속담에까지 인용하여 썼을까, 공자의 고향과는 얼마나 떨어져 있는가 궁금하였다. 그래서 태산을 한 번 가보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하였다. 그 후 기회가 없어 가지 못했는데, 이번 여행에서 태산을 올라갈 수 있다고 하니 정말 기쁘고, 약간 긴장되기도 하였다.

  중국에는 동서남북과 중앙의 오방(五方)에 있는 여러 산 중 큰산을 하나씩 뽑아 오악(五嶽)으로 꼽고 있다. 동악은 산동성에 있는 태산, 서악은 협서성에 있는 화산(華山), 남악은 호남성에 있는 형산(衡山), 북악은 산서성에 있는 항산(恒山)이고, 중앙은 직예성에 있는 숭산(崇山)이다. 이 산들은 중국의 오방을 대표하는 산인데, 그 중 동쪽에 있는 태산을 가장 신성시하여 역대 제왕들이 이곳에 와서 천제(天祭)를 지내곤 하였다고 한다. 

  태안 시내에서 점심을 먹고 버스로 20분쯤 달리니, 태산 입구 안내 표지판이 나왔다. 버스가 산 속으로 난 길을 달릴 때 계곡을 흐르는 맑은 물과 기묘한 바위, 우뚝우뚝 솟은 산줄기 등이 장관을 이루고 있었다. 어찌 보면, 설악산 백담사 계곡을 지나는 것 같기도 하고, 한계령을 넘을 때 좌우로 보이던 산과 기암괴석을 보는 것 같기도 하였다. 그러나 자세히 보면, 그와는 다른 굵은 선과 면을 느끼게 하였다.

  아름다운 산과 계곡을 이지 저리 돌던 버스는 한참만에 도화원(桃花源) 케이블카 승강장 앞에 정차하였다. 케이블카 승강장에 가니, 6인승 케이블카 여러 대가 자동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케이블카 안에서 바라보는 태산의 모습은 웅장하면서도 아름다웠다. 조금 오르니, 발 아래에 수십 길이 되는 폭포수가 멋진 자태를 뽐내며 흐르는 모습이 보였다.

  케이블카에서 내려 계단을 오르니, 하늘에 오르는 거리라는 뜻의 '천가(天街)'가 있고, 그 위에 남천문(南天門)이 있었다. '천문(天門)'은 하늘에 오르는 문이란 뜻인데, 태산 마루의 남쪽에 있는 문이 남천문이고, 북쪽에 있는 문이 북천문이라고 한다. 수십 계단을 올라 남천문을 지나니, 동북쪽으로 태산의 정상인 옥황정(玉皇頂)이 보이고, 다른 방향은 모두 시야가 탁 트였다.

  옥황정 아래로 난 길을 따라 700미터쯤 걸어가니, 옥황상제의 딸인 태산노모(泰山老母)를 모신 벽하사(碧霞祠)가 있었다. 벽하사를 지나 100미터쯤 올라가니, 크고 웅장한 바위들이 겹겹이 서 있는데, 바위에는 태산에 올라 느낀 감회를 새긴 글귀들이 많이 있었다. 그 중 오악 중 태산이 제일이라는 뜻의 '오악독존(五嶽獨存)', 높은 곳에 올라 천지간의 장관을 본다는 뜻의 '등고장관천지간(登高壯觀天地間)', 하늘을 우러러보고, 땅을 내려다본다는 뜻의 '앙관부찰(仰觀俯察)' 등의 글귀가 특히 인상적이었다. 이러한 글귀는 내가 느끼는 감회와도 서로 통하였다.

  명승지의 바위에 글귀나 이름을 새기는 것은 우리 나라와 같은데, 우리 나라에서는 대개 검은 색인데 비해 이곳은 모두 빨간색인 점이 인상적이었다. 중국의 크고 작은 도시에 걸린 상호나 간판의 대부분은 빨간색이다. 이것은 중국인들이 빨간색을 무척 좋아한다는 것을 단적으로 말해 주는 것이다. 중국인들이 빨간 색을 좋아하는 것은 빨간 색이 귀신을 쫓는 색, 행운을 가져다주는 색이라고 믿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것은 우리의 의식과도 통하는 점이 있다.

  다시 100미터쯤 계단을 오르니 옥황정(玉皇頂) 문이 있는데, 문 아래에는 옥황정 안내문이 대리석에 새겨져 있고, 그 옆에 이곳에 왔던 진시황제가 세웠다는 무자비(無字碑)가 서 있었다. 이곳에 무자비를 세운 까닭은 태산에 오른 벅찬 감회를 글로 다 표현 할 수도 없고, 이곳에 와서 느끼는 다양한 감회를 비석에 새긴 글 때문에 훼손하지 말고 마음 속에 깊이 간직하고 가라는 뜻에서일 것이라 생각한다.

  계단 위에 있는 옥황정 문을 들어가니, 빨간색으로 '태산극정(泰山極頂) 1545미터(米)'라고 쓴 표석(標石)이 나를 맞아주었다. 표석 앞에서 사진을 찍고, 몇 발자국 걸어가니 옥황전(玉皇殿)이 있었다. 옥황전의 중앙에는 구리로 만든 옥황상(玉皇像)이 있고, 좌우에는 시위하는 선인상(仙人像)이 있었다. 중국인들은 전각 밖에서 향불을 사르며 절을 하고, 다시 전각 안의 옥황상 앞으로 가서 절을 하였다. 최고의 신으로 받드는 옥황신에게 소원이 이루어지기를 비는 이들의 태도는 매우 진지하였다. 외국 관광객들은 이들의 행동을 유심히 보고 사진을 찍기도 하였지만, 이들은 이에 전혀 아랑곳하지 않았다. 우리 일행 중에도 옥황상 앞에 가서 배례를 하는 사람이 있었다.

  옥황전에서 나와 사방을 굽어보니, 가히 일망무제(一望無際)라고 할 만하였다. 산 아래에는 높고 낮은 산들이 연이어 있고, 산자락 끝에 넓은 들이 보이기도 하였다. 우뚝 솟은 태산에서 바라보는 광경은 정말 아름답고 웅장하고 멋이 있어서 과연 천하 장관이라 할 만하였다. 동쪽을 바라보니, 멀리 낮은 산자락이 보였다. 그 곳으로 해가 뜨는 모습은 정말 장엄하고 웅장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이곳에 서서 사방을 내려다보면서, 중국인들이 태산을 '동쪽에 있는 가장 높은 산'으로 '하늘과 가장 가까운 곳',' 태양이 가장 먼저 떠오른 곳', '천신인 옥황이 거처하는 신산(神山)으로 가장 신성한 곳'으로 여기는 연유를 알 것 같았다.   

  옥황전 바로 아래에는 동방신(東方神)을 모신 청제궁(靑帝宮)이 있는데, 문 안에 여러 전각들이 있었다. 중국에서는 예로부터 오방(五方)을 다스리는 신이 있다고 믿어왔는데, 동방은 청제(靑帝), 남방은 적제(赤帝), 서방은 백제(白帝), 북방은 흑제(黑帝), 중앙은 황제(黃帝)가 다스린다고 한다. 청제는 동방신인이이니, 오악(五嶽) 중 동악(東嶽)인 태산에 모신 것이리라. 한국 민속에서 오방을 상징하는 색은 동쪽이 청색, 남쪽이 적색, 서쪽이 백색, 북쪽이 흑색, 중앙이 황색이다. 한국에서는 요즈음에도 장승제를 지내는 마을이 있는데, 오방에 장승을 만들어 세우고 제를 지낸다. 동방의 장승에는 청제장군, 남방은 적제장군, 서방은 백제장군, 북쪽은 흑제장군, 중앙은 황제장군이라고 쓴다. 이러한 것은 중국인의 신관(神觀)이나 색채관(色彩觀)과 관련이 있는 것 같다.

  청제궁 아래에는 공자묘(公子廟)가 있었다. 공자의 상을 모신 이 곳은 몇 년 전에 건립한 것이다. 공자의 좌상(坐像) 아래에 있는 유리함에는 중국인들이 참배하면서 넣은 지전(紙錢)이 수북하였다. 이것을 보면서 나는 중국인들이 공자를 신앙의 대상으로 삼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태산은 신성시하는 산이니 정상 부에 옥황이나 청제를 모신 옥황전이나 청제궁을 세운 것은 이해가 간다. 신앙의 대상이 되는 신을 모신 옥황전이나 청제궁 바로 아래에 공자묘를 세운 것은 무슨 뜻일까? 이것은 중국인들이 공자를 신앙의 대상으로 믿는 의식을 표현하면서 동시에 이를 관광상품화 하는 상업성의 발로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공자묘를 지나 다시 남천문으로 내려왔다. 남천문 아래 천가의 왼쪽에는 2층 건물이, 오른쪽에는 3층 건물이 길게 뻗쳐 있는데, 양쪽 건물에는 기념품과 잡화를 파는 가게 몇 군데를 제외하고는 두 펼 남짓한 작은 방이 아래 윗층에 연이어 있었다. 방안을 들여다보니 침대와 침구, 텔레비젼 한 대 외에는 아무 것도 없었다. 00빈관(賓館)이란 간판이 붙은 이들 방은 우리 나라의 작은 여인숙라고 해야 할 것 같다. 이 곳에서 자고 아침 일찍 옥황정에 올라 해맞이를 하려는 사람들을 위해 지은 숙소인 것 같다. 천가의 위쪽에 호텔이 있는 것으로 보아 이곳은 서민을 위한 숙소인 모양이다. 이 역시 중국인들의 신앙심과 관련이 깊은 것 같다.

  남천문 위와 아래의 길가에는 많은 수의 푸른 색 두꺼운 옷이 길바닥에 널려 있었다. 더워서 땀을 흘리는 판에 같은 모양의 많은 옷을 햇볕에 말리는 이유가 궁금하여 안내자에게 물으니, 이것은 이른 아침에 해맞이를 가는 사람에게 빌려주었던 옷을 말리는 것이라 하였다. 이로 보아 이곳은 일교차(日較差)가 매우 큰 곳임을 알 수 있었다. 방문 앞에는 옷을 빌려준다는 내용의 글귀가 적혀 있었는데, 이것은 이런 옷을 빌려준다는 말인 것 같다.

  천가를 지나 다시 도화원 케이블카 승강장으로 온 나는 태산 남쪽의 아름다운 풍경과 아스라이 보이는 태안 시를 내려다보면서 태산에서 보고 느낀 것을 정리해 보았다. 나는 오늘 중국인들이 신성시하고, 한국 문학에도 영향을 끼친 태산에 올라 아름다운 경치를 보았고, 중국인들의 태산에 대한 인식과 민간신앙의 현장을 보았다. 이런 산을 올랐다는 벅찬 감회는 오래도록 잊지 못할 것이다. 
          <서울문학 제3호(서울 : 대한출판사, 1999년 겨울)에 실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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