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4월 초에 아내와 함께 남산에 벚꽃을 보러 갔다. 남산 북쪽 순환로에서 타워 쪽으로 올라가는 길 양편에는 꽃을 활짝 피운 벚나무들이 줄지어 서 있다. 벚나무 사이사이에 피어 있는 진달래와 개나리를 비롯하여 키 작은 봄꽃들도 이에 질세라 아름다운 자태를 뽐낸다. 바람 한줄기가 다가와 벚나무를 흔들고 지나가니, 꽃잎들이 눈송이처럼 날려 흰 눈이 내리는 겨울을 연상케 한다.

   아름다운 풍경과 맑은 공기를 마음껏 즐기며 걷다보니, 어느새 남산타워 아래에 당도하였다. 팔각정에 올라 잠시 쉰 뒤에 남산타워 옆과 봉수대 아래쪽을 보니, 소원하는 바를 적은 기원문을 걸어두는 판넬이 설치되어 있다. 여러 가지 색의 예쁜 모양 필름이나 플라스틱판에 적은 기원문은 자물쇠에 채워진 채 설치대에 걸려 있다. 겹겹이 걸린 기원문을 보니, 걸은 지 얼마 안 되는 것은 예쁜 색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고, 글자도 선명하였다. 그러나 안쪽에 걸려 있는 것은 판이 퇴색하였고, 글자도 지워졌으며, 자물쇠는 녹이 슬었다.

   기원문의 내용은 아주 다양하였다. “우리가 함께 한 1주년, 그리고 함께 할 100, 영원히 오늘 같기를!”이라고 쓴 글은 연인이 사귄 지 1년을 기념하며 사랑이 영원하기를 기원한다. “우리 할머니 할아버지 돼서도 남산에 이거 보러 오자는 글은 친구 또는 연인이 노인이 될 때까지 건강하여 남산에 다시 와서 이 글을 보자는 다짐이다. “00 사랑해요. 큰 거 하나 당첨되게 해 주세요.”는 사랑을 다짐하면서 행운을 기원하는 내용이다. “백반증이 빨리 낫게 해 주세요.”는 피부에 백색반이 나타나는 질환을 낫게 해 달라는 간절한 마음의 표현이다. 자녀의 이름을 쓰고 그 뒤에 입학 축하해. 사랑해, 건강하기를!”이라고 적은 것이나, “우리 가족 영원히 행복하기를!”은 온 가족의 행복을 기원하는 내용이다. 그 외에도 여러 가지 기원하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모두 가정의 평안과 가족의 건강, 사랑의 결실과 지속, 입시·입사 시험 합격 등 일상적 소망을 적은 것이다. 기원문의 대부분은 한글이지만, 영어 또는 낯선 외국어로 쓴 글도 있는 것으로 보아 외국인도 있는 것 같다.

   기원문을 쓰는 일은 아주 오래 전부터 있었다. 집을 새로 짓거나 고쳐 지을 때 쓰는 상량문에는 새로 짓거나 고친 집의 내력, 공역 일시 등과 함께 집을 지은 뒤에 좋은 일이 이어지기를 바라는 축원의 말을 적었다. 입춘에는 대문이나 기둥에 한 해의 행운과 건강을 기원하며 복을 바라는 입춘축을 써서 붙였다. 정월 대보름에 하는 달집태우기에서는 마을의 평안과 풍년 기원 등 축원의 글을 써서 붙이고 제를 올린 뒤에 태웠다. 액연(厄鳶) 날리기에서는 재액을 멀리 쫓아 버리고, 복을 부르기 위하여 정월 대보름을 기해 연에 송액영복(送厄迎福)이라 써서 날려 보냈다. 양초에 소원문 쓰고 태우기, 꽃바구니에 발원문 쓰기, 달님 기도문 작성 등도 기원문 쓰기의 풍습이었다.

   이처럼 우리의 전통문화에서는 기원문을 써서 붙이거나 불에 태우고, 멀리 보내거나 간직하였다. 기원문을 작성하여 태우는 것은 신에게 그 뜻이 전달되기를 바라는 마음의 표현이다. 기원문을 써서 사람이 많이 모이는 유명 장소에 자물쇠를 채워 거는 것과 같은 일은 없었다. 이것은 다른 나라에서 널리 행해지는 풍습이 들어온 것 같다.

   오래 전에 튀르키예에 갔을 때의 일이다. 기기묘묘한 바위들이 솟아 있어 절묘한 지형을 자랑하는 카파도키아의 산언덕에 세운 신나무에 수많은 기원문을 걸어놓은 것을 보았다. 이곳에 신나무를 세운 것은 기묘한 지형의 산언덕을 신이한 장소로 본 때문이리라. 에페스(성경에 나오는 에베소) 근처의 뷜뷜산에 있는 성모 마리아의 집앞에 기원문을 거는 판넬이 서 있다. 이곳에는 소원을 적은 종이와 헝겊이 잔뜩 걸려 있었다. 그 중에는 외국인이 걸어놓은 것도 있지만, 무슬림인 튀르키예인들이 걸어 놓은 것이 더 많다고 한다. 무슬림이 이곳에 와서 소원을 비는 것은 이슬람교 경전인 《코란》에 마리아를 선지자 예수의 어머니로 기록하였으므로, 마리아를 거룩한 여인으로 숭배하기 때문이라 하겠다.

   기원문을 써서 거는 이유는 무엇일까? 옛사람들은 언어는 주술적인 힘을 지니고 있다고 믿었다. 이러한 언어주술관은 현대인에게도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설날 축원의 뜻을 담아 덕담을 하는 것도 이런 의식의 표현이다. ‘말이 씨가 된다는 말 역시 말은 현실화한다는 의식을 바탕에 깔고 있다. 종교적인 신심을 가진 신앙인은 물론, 일반 사람들도 자기가 믿는 신에게 정성들여 기도한다. 이것은 인간이 소원하는 바를 말이나 글로 표현하면 신이 이를 받아들여 그것을 이루어 줄 것이라는 믿음을 바탕으로 한 것이다.

   요즈음에는 자물쇠를 채운 소원의 글을 명소에 거는 일이 국내외에서 낯설지 않게 되었다. 이 일이 전통문화이든, 외래문화이든 탓할 일이 아니다. 개인적인 소원을 여러 사람이 모이는 명소에 거는 것은 장난기를 겻들인 행위일 수도 있다. 그러나 이는 소원하는 일이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소박한 마음의 발로인 것은 변함없는 사실이다. 다만 퇴색되고, 녹이 슨 기원문은 주기적으로 철거하여 보는 이의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일은 없었으면 좋겠다. (2023. 5.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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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의 서재에는 삼익가구에서 튼튼하게 만든 책장이 여러 개 있다. 책을 넣는 칸에는 옆으로 밀어 열고 닫을 수 있는 유리가 끼워 있다. 그래서 책장은 책에 먼지가 끼지 않을 뿐더러 보기에도 좋다. 그런데 그 위에 서류봉투, 문구 용품을 넣은 쇼핑백, 기념패·감사패, 서화 두루마리, 카메라 가방, 앨범 등이 수북이 쌓여 있어 지저분해 보인다. 이들을 둘 데가 마땅치 않으므로 책장 위에 쌓아놓은 탓이다. 아내는 오래 전부터 책장 위의 잡동사니들을 좀 정리하라고 하였지만, 어찌해야 좋을지 몰라 대답만 하고 그대로 지내왔다.

   삶의 노를 저어 세월의 강을 80여 년을 달려오고 보니, 영원의 바다에 이를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주변을 정리하기로 마음먹었다. 먼저 책장 위에 쌓아두었던 논문 및 저서를 집필할 때 참고했던 자료, 강의 자료, 방송 출연 자료, 설화 채록 원고, 해외여행 관련 자료, 편지 뭉치 등을 며칠 동안 검토한 뒤에 과감하게 폐기하였다. 그런데 디지털 카메라가 보급되기 전에 필름에 찍어 인화한 사진을 정리한 앨범과 미처 정리하지 못해 책장 아래의 서랍에 넣어둔 사진들을 폐기하려니 만감이 교차하였다.

   사진들을 살펴보니, 초등학교와 중학교 졸업사진이 한 장씩 있다. 그 뒤에 고등학교, 대학과 대학원을 다닐 때 찍은 사진을 비롯하여 아내와 연애하고, 결혼하던 때에 찍은 사진이 이어진다. 삼남매가 자라던 때의 모습, 가정의 대소사를 찍은 사진도 보인다. 또 초등학교와 중학교 교사 시절의 모습, 대학 교수가 된 뒤에 있었던 일, 크고 작은 상을 받는 장면을 찍은 사진이 보인다. 국내는 물론 해외여행을 하면서 찍은 사진도 많이 있다. 이것들은 모두 내 삶의 일부를 압축해서 보여주는 기록물이다.

   이런 사진을 폐기처분하는 것은 내 삶의 기록을 지워버리는 것과 같다. 그런데 왜 나는 이 사진들을 폐기하려고 하나? 그 이유의 하나는 책장 위에 쌓여 있는 앨범과 서랍 속의 많은 사진들을 폐기하여 80대 노인의 주변을 정리하기 위함이다. 다른 하나는 내 아들이나 딸의 짐을 덜어주어야 한다는 생각 때문이다. 내가 죽은 뒤에 내 아들이나 딸은 내가 쓰던 물건들을 정리할 것이다. 그 때 우리 부부 얼굴이 들어간 사진들은 선뜻 버리기 어려울 것이다.

   나의 경우, 선친께서는 사진을 많이 찍지 않던 시대에, 조금 사시고 일찍 돌아가셨으므로 사진을 한두 장밖에 남기지 않으셨다. 그러나 어머니는 95세까지 사시면서 많은 사진을 찍으셨고, 이를 정리·보관하고 계셨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지 20여 년이 지났으나, 나는 어머니의 앨범을 지금도 보관하고 있다. 그 까닭은 어머니의 모습이 담긴 사진들을 차마 버릴 수 없어서이다. 이렇게 부모의 사진을 버리는 일이 쉽지 않음을 생각하면, 내 사진을 내가 폐기하는 것은 내 아들이나 딸의 짐을 덜어주는 것이라 생각한다.

   내가 정리해야 할 사진은 모두 1990년대 말까지 찍은 사진이다. 2000년대 초 디지털 카메라가 보급되면서부터 찍은 사진은 파일로 컴퓨터 하드디스크와 USB에 저장해 놓았다. 이들은 인화한 사진처럼 많은 공간을 차지하지도 않을뿐더러 폐기할 때에도 파일을 삭제하면 되기 때문에 많은 수고를 요하지도 않는다. 이런 점에 착안하여 남은 세월 동안 보관해 두고 싶은 사진만을 골라 디지털 파일로 만들어 두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하였다.

   가지고 있는 사진을 모두 파일로 만드는 일은 시간과 노력이 너무 많이 든다. 그래서 앨범의 사진들을 모두 뗀 뒤에 보관해 두고 싶은 사진만을 골라 따로 놓았다. 고를 때에는 기념이 될 만하고, 구도가 좋으며 초점이 잘 맞은 사진을 골랐다. 선택된 사진은 스마트폰 카메라로 찍어 파일로 만들었다. 그런 다음에 이를 컴퓨터에 옮긴 뒤에 찍은 날짜와 이름을 적었다. 날짜를 적어 놓지 않은 사진은 여러 가지 정황을 고려하여 추정하였다. 그랬더니 사진 파일들이 날짜순으로 정리되었다. 이런 작업을 한 뒤에 파일을 몇 시기로 구분하여 저장하였다. 그 결과 꼭 보관하고 싶은 사진들이 시기별 날짜순으로 정리되었다.

   사진을 떼어낸 빈 앨범을 보니, 두꺼운 판지에 비닐이 덮여 있고, 이를 철선으로 묶었다. 이를 그대로 버리는 것은 쓰레기 분리수거 기준에 맞지 않았다. 그래서 비닐을 찢어내고, 이를 묶은 철선을 펜치로 끊어서 해체하였다. 그래서 종이, 비닐, 철선을 따로따로 쓰레기 수거 용기에 넣었다. 이 일은 손이 많이 가고, 힘도 들었다.

   이제 사진을 버리는 일이 남았다. 많은 사진을 한 장 한 장 찢어 버리자니 손이 많이 가기도 하지만, 나와 사진 속 인물의 몸을 찢는 것 같아 마음이 편치 않다. 전에 사다 놓은 수동식 서류 파쇄기에 넣어 부수자니, 일이 너무 많고, 잔인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생각해 낸 것이 불에 태워 흔적을 남기지 않는 방법이다. 친척이나 친지 중에 아궁이가 있는 집을 알아보아 가지고 가서 태워야겠다.

   책장 위에 얹어 놓았던 앨범과 잡동사니들을 정리하고 보니, 서재가 정돈된 듯하다. 컴퓨터를 켜고 저장한 파일을 여니, 어린 시절부터 2000년대 초까지의 사진이 컴퓨터 화면 에 차례로 펼쳐진다. 이 작업을 하는 며칠 동안은 힘이 들기도 하였지만, 내 삶의 기록들을 다시 한 번 살펴보는 시간이 되었다. 앨범을 없애야 하는 이유 두 가지를 해소하였다는 생각에 마음이 홀가분하다. (2023. 05. 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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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 30여 년 전에 헤어진 후로 소식을 몰라 궁금하던 시골 아가씨(지금은 47세의 중년이 된)가 찾아왔다. 며칠 전에 그가 내 블로그를 검색하여 전화번호를 알았다며 전화를 하였다. 그 때 알려준 집 주소를 들고 청주에서 자기 차를 운전하여 찾아왔다. 뜻밖의 방문에 놀랍고, 반갑고, 기뻐서 하나님께 감사의 기도를 드렸다.

   그와의 인연은 30여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충북 진천에서 목회하시는 전도사님께서 그 마을에 사는 불우한 여자아이를 가사도우미로 데리고 있으면서 사람을 만들어 달라고 하셨다. 우리는 아내가 교사로 재직하고 있어 수년 간 가사도우미를 데리고 살았다. 그러나 그때는 삼남매가 모두 성장하였으므로 가사도우미를 두지 않아도 되는 때였다. 아내는 망설이다가 어머니 시중들 사람이 필요하므로, 막내딸을 기르는 심정으로 그를 받아들이기로 하였다.

   그는 열네 살 먹은 작은 체구의 소녀로, 촌티가 지르르하였다. 60세가 넘은 아버지와 시각 장애인 어머니 슬하에서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중학교에도 잠시 다녔다고 한다. 그러나 구구단도 외우지 못하였고, 생활습관도 제대로 익히지 못하였으며, 부엌일 역시 할 줄 아는 것이 없었다. 아내는 틈나는 대로 바른 생활 습관을 갖도록 일러주었다. 또 구구단을 외우게 하고, 생활에 필요한 계산법을 가르쳤다. 그리고 영어의 알파벳도 가르쳤다. 그러나 진척이 늦어 같은 말을 되풀이하곤 하였다. 그러나 어머니 시중을 드는 일이 중하므로 속을 썩이며 데리고 살았다.

   그러는 동안 생활습관이나 말씨가 많이 좋아졌다. 부엌일도 차츰 익혀 아내를 도와줄 수 있게 되었다. 딸한테 배워 피아노도 조금 칠 줄 알게 되었다. 4년 7개월을 함께 사는 동안 우리 가족과는 고운 정 미운정이 들었다. 그런데 그의 부모님의 건강이 좋지 않다고 하여 진천 집으로 데려다 주었다. 그 뒤로 몇 번 편지가 오간 뒤로는 소식을 모른 채 30여 년을 지냈다.

   나와 아내는 그가 지내온 일을 들었다. 그는 우리 집에서 가지고 간 돈으로 쓸어져가는 집을 수리하고, 수도를 놓았다. 그리고 건강이 좋지 않은 부모님을 지성으로 봉양하였다. 그는 열아홉 살에 진천여자중학교 1학년에 입학하였다. 학교에서는 부모님을 잘 모시면서 학업 성적이 우수하다고 추천하여 교육부장관상을 받았다. 22세에 진천상고에 입학하여 공부하는 동안 교육부장관이 주는 효녀상을 받고, 전산기능사자격증을 취득하였다.

   그는 고등학교 졸업 후 모교에 사무원으로 취직하여 근무하였다. 그 때 학교에 컴퓨터를 납품하고, 전산시스템 설치 운영을 돕던 회사원을 만나 결혼을 약속하였다. 결혼식 날 시어머니는 며느리의 부모님 자리에 노쇠한 아버지와 시각장애인 어머니가 앉는 것을 반대하였다. 그래서 그의 부모님은 내빈석에 앉아 딸의 결혼식을 지켜봐야 했다. 그는 결혼한 뒤에 시집살이의 모진 고통을 기도하며 참고 견뎠다. 그러나 시어머니는 결혼한 지 5년이 된 두 사람을 강제로 이혼하게 하였다. 그래서 다섯 살 된 아들을 남편에게 맡긴 채 혼자 살다가 3년 뒤에 시어머니의 유언을 따라 다시 결합하였다. 지금은 고등학교 3학년이 된 아들과 세 식구가 잘 살고 있다고 한다.

   공부에 자신을 얻은 그는 어려운 중에도 학점은행제를 이용하여 대학 2년 과정을 수료한 뒤에 방송통신대학에 편입학하여 학사학위를 받았다. 그 뒤에 한남대학교 대학원에서 상담심리학 석사학위를 받고, 상담사 자격증을 받았다. 그 뒤 교육청에서 뽑는 무기 계약직 상담사 선발 시험에 합격하여 A고등학교에서 5년을 근무한 뒤에 B고등학교로 옮겨 근무하고 있다고 한다. 그는 혼자 피아노 치는 연습을 하여 200여 명 모이는 교회에서 반주를 한다고 한다.

   그는 삶의 고비마다 하나님께 기도하며 의지하였고, 매사를 긍정적으로 생각하며 희망을 간직하고 살았다고 한다. 그리고 오늘의 자기가 있게 해 준 것은 청소년 시절에 반듯하게 자랄 수 있도록 잘 이끌어 주신 아저씨와 아주머니 덕택이라는 것을 한시도 잊은 적이 없다고 하였다. 그가 부모님을 위해 애쓴 이야기를 할 때에는 감동의 눈물을 흘렸고, 시어머니께 겪은 일을 말할 때에는 분노를 느끼기도 하였다. 지난 일을 이야기하는 그의 언변이 어찌 좋은지 나는 속으로 감탄을 하였다. 학습부진아였던 그의 성장과 변화된 모습이 놀라웠다. 그를 이렇게 반듯한 중년부인으로 길러주신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며 어려움을 이겨낸 그의 앞날에 기쁨과 평안이 있기를 기도한다. <기독교연합신문 제1663호, 2023. 3.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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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몇 년 전부터 2주에 한 번씩 초등학교 동창들과 탁구 모임을 갖고 있다. 모임을 시작할 때에는 여러 명이었으나 차츰 줄어 네 명이 모이는 소모임이 되었다. 그런데 그 중 한 명이 건강 때문에 잘 나오지 않아 세 명만 모이는 날이 많다. 이 모임은 고향 친구들과 탁구를 할 수 있어서 좋고, 탁구 실력이 비슷하므로 게임을 할 때 아주 재미있다.

    네 명이 모일 때에는 두 사람씩 단식 게임을 한 뒤에 복식 게임을 한다. 그러나 세 명만 모일 때에는 두 사람은 게임을 하고, 한 사람은 심판을 본다. 심판을 보는 사람은 지는 사람이 나간 자리에 들어가서 게임을 한다. 두 시간 가량 즐겁게 운동을 한 뒤에 식당으로 가서 점심을 먹으며 담소하다가 헤어지곤 한다.

    충남 홍성군 갈산초등학교 수도권 동창 모임은 1995년에 결성되어 30여 명이 모였다. 몇 번 정기 모임을 가진 뒤에 고향 동창생들을 서울로 오게 하여 합동 모임을 가졌다. 그 날 38년 만에 처음 만나는 회원도 있어서 반가운 마음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그 다음 해에는 고향의 경관이 좋은 곳으로 가서 만났다. 이를 계기로 해마다 수도권과 고향을 번갈아 오가며 합동모임을 갖곤 하였다.

    이렇게 동창 모임을 계속하는 동안 세월이 흘러 회원들의 나이가 80이 넘었다. 그러자 건강이 좋지 않은 회원이 늘고, 세상을 떠나는 회원도 늘어갔다. 그래서 얼마 전에 공식적인 동창회 모임은 해체하였다. 지금은 동창회 해산을 아쉬워하는 회원 몇 사람이 한 달에 한 번씩 모여 점심 식사를 하고, 담소하곤 한다. 또 취미에 따라 탁구 모임, 동양화 연구 모임 등을 갖는다. 세 모임에 모두 참여하는 사람도 있지만, 나는 점심 모임과 탁구 모임에만 참여한다.

    내가 어렸을 때에는 탁구가 널리 보급되지 않았던 때였으므로, 탁구를 익힐 기회가 없었다. 대학을 졸업하고 교사가 된 뒤에 잠깐씩 몇 번 라켓을 잡아보았을 뿐이다. 교수가 된 뒤에는 강의하는 일 외에 연구 논문을 쓰고 저서를 펴내는 일에 몰두하느라 라켓을 잘아볼 기회를 갖지 못하였다. 그러다가 회갑을 지낸 뒤에 아내의 권유로 탁구를 배우기 시작하였다.

    회갑 이듬해인 2003년 2월에 나는 아내와 함께 탁구장에 갔다. 탁구 실력이 좋은 사람들 사이에서 치는 것이 부끄러웠지만, 나보다 실력이 좋은 아내가 연습 상대가 되어 격려해 주는 바람에 용기를 내어 탁구대 앞에 서기 시작하였다. 며칠 뒤에 나는 아내의 권유대로 정식으로 회원 등록을 하고, 하루에 20분씩 지도를 받기 시작하였다. 쉐이크핸드 라켓을 라운드형으로 바꾸고, 기본자세부터 차근차근 익혔다. 지도를 맡은 분은 80년대에 국가대표 선수를 지낸 황남숙 선생인데, 아주 친절하게 가르쳐 주었다. 코치한테 렛슨을 받은 뒤에는 아내와 연습하곤 하였다.

    일주일에 두 번을 가겠다고 하였지만, 한 번밖에 못 가는 주도 있었고, 아예 못 가는 주도 있었다. 나와 아내의 건강 형편 때문에 몇 주씩 거르기도 하였다. 그러나 사정이 허락되는 대로 탁구장에 가서 열심히 연습하였다. 그렇게 몇 년을 지내고 보니, 기본자세도 어느 정도 몸에 익었고, 상대방의 자세에 따른 공의 움직임과 방향을 조금 읽을 수 있게 되었다. 그 뒤로 가끔씩 아내와 게임을 하기도 하고, 교회에 가서 교인들과 게임을 하기도 하였다. 그런데 몇 년 전부터 아내의 시력에 문제가 생겨 함께 탁구를 하지 못한다. 그렇게 몇 년을 지나고 보니, 탁구 실력도 많이 줄었다.

     몇 년 전에 초등학교 동창 모임에서 탁구 이야기가 나와 탁구 모임을 갖기 시작하였다. 종로에 있는 탁구장에서 시작하였으나, 지금은 한 친구가 사는 아파트 단지의 탁구 연습실을 이용한다. 코로나 사태 때에는 이곳도 정부의 방침에 맞춰 연습실을 개방하기도 하고, 폐쇄하기도 하였다. 요즈음에는 쉬지 않고 문을 여니 다행스럽다. 나는 이 모임에 참여할 때마다 기쁘고 즐겁다. 80이 넘은 고향 친구들이 모여 탁구를 할 수 있도록 건강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한다. 노년의 건강 증진에 도움이 되고, 우정을 돈독히 할 수 있는 이 모임이 오래 계속될 수 있도록 모두 건강하기를 기원한다. (2003. 3.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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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며칠 전에 초등학교 교장을 지낸 지인을 만났다. 그는 독실한 기독교인으로, 우 ‘리말 바로 알고 쓰기’에 관심이 많은 분이다. 그는 주일예배에 빠지지 않음은 물론, 매일 새벽에 영상을 통해 유명 목사님의 설교를 듣고 많은 은혜를 받는다고 한다. 그런데 목사님들이 우리말 어휘를 잘못 쓰시는 것을 듣고, 마음이 상하곤 하여 나한테 하소연하러 왔다고 하였다. 교회에서 목사님이나 교인들이 쓰는 말 중에는 잘못된 것이 많다. 그와의 대화를 계기로 교회에서 잘못 쓰는 말 몇 가지를 정리해 본다.

   먼저 ‘축복’이란 말의 쓰임에 관해 생각해 보겠다. 축복은 ‘빌 축(祝)’ 자와 ‘복 복(福)’ 자가 합해진 한자말로, ‘복을 빎’의 뜻이다. 그러므로 “하나님, 성도들에게 축복해 주십시오.”와 같은 말은 잘못된 표현이다. 이 말은 더 높은 존재자에게 복을 빌어 달라고 하나님께 비는 말이 된다. 하나님은 복을 주시는 절대자로, 하나님보다 더 높은 분이 없다. 그런데 하나님께 복을 빌어 달라고 하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 이 경우에는 ‘축복’이라는 말 대신에 ‘복(은총, 은혜)을 내려 주십시오’라고 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창세기> 12장 3절을 보면,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개역개정성경》)라고 적혀 있다. 여기서 ‘너를 축복하는 자’는 아브람에게 ‘복을 내려 주실 것을 비는 사람’을 뜻한다.

   한국인들은 상대방을 부를 때 높이는 뜻에서 이름 뒤에 직명을 붙이고, 끝에 ‘님’자를 붙여 부른다. ‘000 사장님(장관님, 선생님)’이라고 부르는 것이 좋은 예이다. 그리고 남이 나를 부를 때에도 그렇게 불러주기를 기대한다. 이러한 의식은 교회 안에도 널리 퍼져 있다. 그래서 ‘000 목사님(전도사님)’, ‘000 장로님(권사님, 집사님)’이라고 부른다. 이것은 상대방을 높여 부르려는 마음에서 생긴 것으로, 오래 전부터 전해 오는 관습이다. 

   남에게 자기를 말하면서 직명을 밝힐 필요가 있을 때에는 ‘목사(전도사) 000’, ‘장로(권사, 집사) 000’라고 직명을 먼저 말하고, 그 뒤에 자기 이름을 말해야 한다. 그래야 자기를 낮추는 겸손한 표현이 된다. 자기 이름 뒤에 직명을 말하면 자기 스스로를 높이는 것이 되어 실례가 된다. 상대방이 나의 직분을 알 경우에는 직명을 생략하고 이름만 말해도 된다. 이를 지키지 않으면 겸손을 모르는 교만한 사람으로 인식되기 쉽다. 이것은 제삼자를 화제에 올릴 때에도 마찬가지이다. 성경의 인물인 ‘바울’을 말할 때에 ‘사도 바울’이라고 하는 것보다는 ‘바울 사도’라고 하는 것이 좋겠다. 목사님의 말씀을 인용할 때 ‘목사 아무개가 말하기를’이라고 하는 것보다는 ‘아무개 목사님께서 말씀하시기를’이라고 말하는 것이 존경의 뜻을 담은 표현이 된다.

   요즈음에는 상대방의 아내를 높이는 말로 ‘사모님’이 널리 쓰인다. ‘사모’는 스승의 부인을 가리키는 말이다. 우러러 존경하는 스승을 아버지에 비겨 ‘사부(師父)’라 하고, 스승의 부인을 어머니에 비겨 ‘사모(師母)’라고 한다. 그에 따라 기독교인들은 목사나 전도사의 부인을 ‘사모님’이라고 부른다. 목사나 전도사는 신앙적으로 스승 격이니, 나이의 많고 적음에 관계없이 존경의 대상이다. 그러므로 존경하는 분의 부인을 ‘사모님’이라고 부르는 것은 적절하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사모’란 말이 ‘목사의 아내’를 가리키는 말처럼 잘못 쓰이고 있다. 그래서 목사가 다른 사람에게 자기 아내를 소개하면서 ‘제 사모입니다.’란 말을 예사로 하기도 한다. 이것은 언어 예절에서 벗어난 표현이다. 목사도 자기 아내를 가리킬 때에는 ‘제 처(아내, 내자, 안식구)입니다’라고 말하는 것이 좋겠다.

   하나님은 온 인류를 보살피시는 분이다. 그런데 한국인에게는 한국어로, 영국인에게는 영어로, 스페인인에게는 스페인어로 역사하신다. 그러므로 한국인은 바른 한국어로 찬양하고,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것이다. 사람의 귀에 거슬리는 어휘나 문장을 쓰면 하나님께서도 언짢아하실 것이다. 어떤 사람은 “하나님은 너그러운 분이셔서 그 사람의 마음을 아시고 응답해 주실 것이므로, 어휘 사용이나 문장이 잘못되었다고 지적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이것은 잘못된 생각이다. 어휘나 문장을 바로 알고 써야 말하는 뜻을 바르게 전달할 수 있다. 그리고 언어 예절을 지키는 바른 태도를 가진 사람으로 인정받을 수 있다. <기독교연합신문 제1659호(2023. 2.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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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크리스마스가 가까워지면 어린이들은 선물을 가져다준다는 산타클로스 할아버지를 기다린다. 요즈음 어린이들이 알고 있는 산타클로스는 하얀 수염에 흰 깃을 단 빨간 외투를 입고, 썰매를 타고 다닌다. 그래서 산타의 고향은 추운 북유럽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에 부응하여 핀란드 로바니에미에는 산타마을을 조성하고, 산타우체국을 세웠다. 세계 각국의 어린이들이 산타에게 보내는 편지는 이곳으로 와서 보관된다. 그리고 보낸 사람의 요청이 있는 편지는 씌어 있는 주소로 보내기도 한다.

   그러나 자세히 살펴보면, 원조 산타의 고향은 북유럽이 아니라 튀르키예 뎀레이다. 《표준국어대사전》에는 산타클로스는 “4세기경 미라의 주교였던 성인 니콜라스의 이름에서 유래한다.”고 적혀 있다. 두산백과사전이나 네이버 지식백과사전 등에도 같은 내용이 실려 있다. ‘미라(Myra)’는 4세기경에 지금의 튀르키예 남부 ‘뎀레(Demre)’에 있던 도시국가이다.

   나는 10여 년 전에 튀르키예의 지중해 연안에 있는 뎀레를 찾았다. 고대 리키아 동맹 여섯 도시국가 중의 하나인 미라가 있던 곳이다. ‘칼레(Kale)’라고도 하는 이 도시의 인구는 지금 15,000명쯤 된다. 이곳에는 산타클로스의 실제 인물인 성 니콜라스(St. Nicholas, A.D. 270~346)가 주교로 시무하던 니콜라스 교회가 있다. 지금 이곳은 ‘성 니콜라스 박물관(Noel Baba Müzesi)’이라고 하여 입장료를 받으며 공개하고 있다. 이 자리에는 A.D. 3세기부터 교회가 있었다고 한다. 지금 있는 건물은 6세기에 세워지고, 8세기 이후에 여러 차례에 걸쳐 증축된 것이라고 한다. 교회 뜰과 교회 입구에는 니콜라스 주교의 상이 서 있다. 교회 안의 벽에는 이곳저곳에 성경의 내용을 바탕으로 한 성화가 그려져 있다. 가장 넓은 방은 예배를 드리던 곳인데, 그 옆의 작은방에는 니콜라스의 석관묘(石棺墓)가 있었다.

   니콜라스는 A.D. 270년경에 이곳 미라의 이웃 도시인 파타라(Patara)에서 태어나 알렉산드리아에서 공부하고, 미라로 와서 주교로 임명되었다. 니콜라스는 주교로 있으면서 불쌍하고 힘없는 사람들을 도와주고, 기도가 영검하였으므로 ‘구원의 성인’, ‘기적의 성인’, ‘선물을 주는 성인’으로 깊은 존경을 받았다. 그가 죽은 뒤에는 그를 존경하는 사람들이 니콜라스의 이름으로 어려운 사람들에게 선물을 주었다. 그가 세상을 떠나자 신도들은 그를 석관에 넣어 교회에 안치하였다. 그런데 11세기에 이탈리아 상인들이 석관을 파괴하고, 유골을 가지고 가버렸다고 한다. 이들이 가져가고 남은 유골은 지금 안탈랴 고고학 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당시 아나톨리아 지역에서 두 번째로 비중이 큰 교회의 주교였던 니콜라스의 언행과 명성은 러시아, 독일, 이탈리아 등 유럽 지역에 널리 알려졌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깊이 존경하고 숭배하는 인물이 되었다. 가톨릭에서는 그를 성인으로 숭배하였는데, 그의 이름은 라틴어로 ‘상투스 니콜라우스’이다. 네덜란드 사람들은 그를 ‘산 니콜라우스’라고 불렀다. 그런데 아메리카 신대륙에 이주한 네덜란드인들은 그를 ‘산테 클라스’라고 불렀다. 이 발음이 미국어화 하여 ‘산타클로스’가 되었다. 산타클로스는 19세기에 크리스마스가 전 세계에 알려지면서 착한 어린이들에게 선물을 주는 상상의 인물이 되었다.

   독일을 비롯한 게르만 신화에서 선물을 주는 신은 ‘오딘(odin)’인데, 오딘은 하얀 수염을 달고, 순록이 끄는 썰매를 타고 다녔다. 게르만 민족이 기독교를 받아들이고, 산타클로스가 널리 알려지면서 신화에 나오는 오딘의 역할이 산타클로스로 바뀌었다. 그래서 산타클로스가 하얀 수염을 달고 썰매를 타고 다니게 되었다. 산타클로스가 흰 깃을 단 빨간 외투를 입고 뚱뚱한 모습으로 변한 것은 1931년 미국의 해돈 선드블롬이 코카콜라 광고에서 그린 그림에서 유래한 것이다.

   그에게는 재미있는 일화가 전해 온다. 미라의 한 귀족이 갑작스럽게 몰락하여 세 딸의 결혼 지참금을 마련할 수 없었다. 그래서 딸들을 명문가에 시집보내지 못하게 되었다. 이 사실을 안 그는 밤에 몰래 금화 주머니 3개를 가지고 가서 창 너머로 던져 주려고 하였다. 그러나 창문이 굳게 닫혀 있어서 할 수 없이 금화 주머니를 굴뚝 안으로 던졌다. 이튿날 아침에 금화 주머니를 발견한 귀족은 딸들에게 지참금으로 주어 좋은 집으로 시집보냈다고 한다. 산타클로스가 선물을 굴뚝으로 준다고 하는 것은 이 일에서 유래한 것이라고 한다.

   성 니콜라스와 같이 착한 일을 하는 사람은 현대에도 많이 있을 것이다. 이들의 선행을 널리 알리고 치하하여야 한다. 그래서 더 많은 사람들이 선행에 가담하게 해야 한다. 제2, 제3의 산타클로스 출현을 기대한다. <기독교연합신문 제1652호(2022. 12.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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