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수직에서 정년퇴임을 한 이듬해에 국제교류재단에서 선발하는 해외파견 교수로 터키에 가게 되었다. 내가 터기에 간다고 하니, 기뻐하면서 격려해 주는 사람이 있었다. 그런가 하면, 이슬람 국가에 가서 안전문제가 생기면 어떻게 하느냐고 걱정하는 사람도 있었다. 이슬람 국가에 체류할 때에 안전을 염려하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나는 고등학교에서 세계사를 배울 때 “이슬람교는 한 손에 《코란》을 들고, 다른 한 손에 칼을 들고 선택을 강요하며 선교한다.”는 말이 떠올랐다. 미국의 9․11 테러를 비롯하여 세계 여러 곳에서 일어나는 폭탄 테러의 배후에 이슬람교도가 있다는 뉴스를 여러 번 접하였다. 얼마 전에는 이슬람교도에게 인질로 잡혀 있던 한국의 선교사가 살해되었다는 보도도 있었다. 이슬람 국가의 대학에 자리 잡은 한국인 교수가 이슬람교로 개종하지 않으면, 안전을 보장할 수 없다는 학생들의 협박을 받고 되돌아왔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나는 책을 읽으면서 터키는 6․25 전쟁 때 네 번째로 많은 군인을 파견한 나라, 한국을 형제의 나라로 생각하고 한국인에게 매우 친절한 나라라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비교적 온건한 수니파가 주종을 이루고 있고, 종교의 세속화를 선언한 나라여서 중동의 이슬람 국가와는 사회적 분위기가 다르다는 것을 알았다. 그러나 터키는 인구의 98%가 이슬람교도라는 것 때문에 막연한 두려움과 불안을 떨쳐버릴 수 없었다.

  나는 터키에 한국어와 한국문학, 한국문화를 가르치러 가는 교수이다. 선교사로 가는 것은 아니지만, 무슬림 학생들에게 종교 문제를 어떻게 대할 것인가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생각 끝에 ‘학생들에게 기독교인임을 밝히고, 기독교에 대한 이해의 폭을 넓혀 서로 존중하는 마음을 갖게 한다. 그리고 여건이 성숙되면 전도한다’라고 마음을 정했다.

  터키의 에르지예스 대학교 한국어문학과에 부임한 뒤에 3·4학년 학생들과 대학원생이 찾아와 자주 대화하였다. 그 중 한 학생이 “교수님은 종교가 무엇입니까?”라고 물었다. 나는 기독교라고 말한 뒤에, 기독교를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었다. 종교 문제에 관해 이야기하던 학생들 대부분은 잘 모른다고 하였다. 나는 기독교의  성경과 이슬람교의  코란은 서로 통하는 점이 많다고 하며 예를 들어 말하였다.

  그 무렵에 터키의 명절인 ‘아쉬레의 날’이 되었다. 나는 학생들에게 이 명절이 ‘노아가 방주에서 마지막으로 남은 곡식을 함께 넣어 끓여 먹은 일을 기념’하는 데서 연원되었음을 이야기하였다. 또 터키인이 큰 명절로 꼽는 '쿠르반 바이람(희생명절)'은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아들을 제물로 바치려고 한 사건에 연원을 두고 있다. 그러나 아브라함이 바치려고 한 아들의 이름은 ‘이삭’과 ‘이스마엘’로 다르다고 하였다. 그리고 모세나 예수를 성인으로 모시는 점은 두 종교가 같음을 이야기하였다. 이렇게 하는 동안 학생들은 기독교의 장로라고 하는 나의 말과 행동을 보면서 기독교에 대한 경계심을 풀기 시작하였다.

  내가 방학이 되어 서울에 와 있을 때에나 완전 귀국한 뒤에 어학연수나 대학원에 진학하여 한국에 온 터키 학생들을 서울에서 만났다. 나는 그들에게 맛있는 한국 음식을 사 주며 한국문화를 알려주었다. 주일에 만나는 학생은 우리 교회로 데리고 가서 주일 예배를 함께 드렸다. 목사님은 광고 시간에 전 교인에게 그 학생을 소개하였다. 예배가 끝난 뒤에는 애찬실에 가서 함께 점심을 먹으며 대화하기도 하였다.

  그러는 동안 나와 친해진 졸업생 몇 명은 기독교에 대해 친근감을 갖게 되었다. 어느 선교학 전공 교수께 이런 말을 하니, “최 교수님은 이슬람국가에 가서 그 나라 학생들과 교류하는 것만으로도 선교적으로 의미가 있어요.”라고 말하였다. 그 말을 들은 나는 마음속으로 선교사 아닌 선교사의 역할을 조금은 했다고 생각하였다. <기독교연합신문 1649호, 2022. 12.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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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얼마 전에 40평형 아파트에서 작은 아파트로 이사하였다. 먼저 살던 집으로 이사하여 얼마 동안은 어머니와 막내아들이 함께 살았으므로, 넓은 집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전철을 타려면 신금호역까지 15~20분 걸어가야 하지만, 운동 삼아 걷는다는 생각으로 전혀 부담을 느끼지 않았다. 그런데 막내아들이 혼인하여 나가고, 어머니께서 돌아가시고 나니, 두 식구가 살기에는 넓은 집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또 나이 70을 넘으면서 승용차보다 전철을 이용하는 횟수가 많아지다 보니, 언덕길을 오르내리면서 전철역까지 걸어 다니는 것이 무척 부담스러웠다. 그래서 전철역 가까운 곳의 작은 아파트로 이사하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였다.

  전부터 알고 지내는 부동산중개인을 만나 재개발이 확정된 금호 제15구역으로 이사하면 어떻겠느냐고 물었다. 그는 그곳보다 빨리 입주할 수 있는 금호 제13구역이 좋겠다고 하였다. 그곳은 금호산 아랫자락에 싸여 있는 1천 세대가 넘는 단지로, 신금호역과 붙어 있는 초역세권이어서 마음에 들었다. 건축 공사가 진행 중인 그곳은 40평형은 몇 세대 되지 않고, 24·32평형을 주로 짓는 단지였다. 매물로 나온 물건을 보니, 32평형보다 24평형의 위치와 구조가 아내의 마음에 들었다. 그래서 처음에 생각했던 32평형을 포기하고, 24평형을 골라 계약하였다.

   그로부터 2년이 지나 건축공사가 끝나고, 입주일이 다가왔다. 이사할 아파트에 가서 보니, 전용면적이 살고 있는 집의 반밖에 되지 않았다. 2년 전에 두 식구 살 집이니 좁아도 괜찮겠다는 생각에서 용기를 내어 24평형을 골랐다. 그런데 막상 이사할 생각을 하니, 위치와 구조가 마음에 덜 들더라도 32평형을 고르지 않은 것이 후회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것은 돌이킬 수 없는 일로, 때늦은 후회였다. 그대로 이사를 해야 할 터인데, 많은 세간살이를 어떻게 처분해야 할까가 큰 문제였다.

   아내가 애지중지하며 매일 사용하던 자개장롱과 화장대, 문갑 등은 방이 좁아 놓을 자리가 없었다. 고추장·된장을 담그고, 김장김치를 담가 먹던 크고 작은 항아리 역시 가지고 가야 놓을 자리가 없었다. 그 외에도 필요에 따라 장만한, 크고 작은 세간살이를 놓을 자리가 없었다. 50년 가까이 정들여 사용하던 세간살이를 그냥 버리자니 너무나 아깝고, 마음이 아팠다. 그래서 넘겨주면 고마운 마음으로 받아 쓸 사람이 있는가를 찾기 시작하였다. 우리의 뜻을 전해들은 사람 중에는 가져가고 싶지만, 놓을 자리가 마땅하지 않아 아쉬워하는 이도 있었다.

나와 아내는 전북 정읍의 제자 김문선 교장을 떠올렸다. 그 무렵 그는 살던 집을 헐고 새로 지었다. 그리고 그 옆에 넓은 건물을 지어 ‘샘소리터’를 운영하고 있었다. 우리의 말을 들은 그는 미처 새 가구를 준비하지 못하였다고 하면서 고맙게 받아 잘 간직하며 쓰겠다고 하였다. 그래서 정읍에서 가축을 싣고 서울에 왔다가 빈차로 돌아가는 트럭을 교섭하여 장롱, 화장대, 문갑, 항아리 등 부피가 큰 세간과 장서의 일부를 그의 집으로 보냈다. 그는 새살림을 차린 것 같다며 좋아하였다.

   소장하던 책 중에서 문학작품을 비롯하여 청소년에게 필요한 책은 나의 모교인 갈산중학교 도서관에 기증하기로 하고, 택배로 보냈다. 월간지나 비전공 서적은 폐지 수집 장소에 내놓았다. 벽에 걸어 두었던 서화 액자, 장식장에 넣어 두었던 감사패·상패·기념패도 문제였다. 궁리 끝에 일부 액자는 글씨와 그림을 떼어낸 뒤에 부숴서 버렸다. 감사패·상패·기념패 역시 일부는 사진을 찍어 파일로 만든 뒤에 버렸다. 또 어머니 환갑연, 아이들 3남매의 결혼식, 나의 결혼식·출판기념회·환갑기념논문집 봉정식·정년퇴임기념문집 봉정식 등 행사 때 받은 방명록은 사진을 찍어 파일로 만든 뒤에 버렸다. 온갖 사연이 깃들어 있고, 기념이 될 만한 것들이기에 오래 오래 소장하고 싶은 것들이었다. 그러나 뾰족한 수가 없으니 눈물을 머금고 아픈 가슴 쓸어내리며 처분하였다.

  내 주변에는 정년퇴임할 때 소장하던 책들을 대학도서관이나 연구소에 기증한 교수도 있고, 감사패 대신 종이로 된 감사장을 받던 출판사 사장님도 계시다. 이분들은 버릴 것을 미리 정리한 지혜로운 분들이다. 지인 중에 오래 산 넓은 아파트에서 좀 작은 집으로 이사하고 싶은 이들이 있다. 그런데 많은 세간살이를 정리할 일이 엄두가 나지 않아 실행에 옮기지 못하고 있다. 그는 자녀들에게 무거운 짐을 떠넘기게 되어 마음이 편치 않다고 한다. 그러면서 나와 아내의 용기와 실천력에 찬사를 보낸다고 하였다.

   이사하면서 처분한 것들에는 온갖 사연과 함께 애정이 깃들어 있었기에 새록새록 생각이 난다. 그러나 없어서 큰 불편을 느끼지는 않는다. 그러고 보니, 없어도 괜찮은 물건에 집착하였던 것 같다. 우리는 살면서 소유하고 집착하는 것들이 많다. 그러나 이것들은 어느 시기에 이르면 일부 또는 전부를 버려야 한다. 이제 얼마 남지 않은 생애에 없어도 괜찮은 것들에 집착하지 말고, 미리 정리하는 지혜를 발휘해야겠다. 그래야 버리는 데 따르는 서운함과 아쉬움이 아픔으로 변하여 힘들어 하는 일을 겪지 않게 될 것이다. (2022. 11.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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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독교인의 본분은 매일 기도하고, 성경을 읽으며 하나님의 뜻을 실천하는 일이다. 그런데 성경 읽기는 마음을 다잡고 시간을 내어 읽지 않으면 실천하기 어렵다. 그래서 목사님 설교의 본문 말씀과 특별히 권장하는 부분만을 읽고 통독하지 못하는 교인이 많다. 그렇게 되면, 성경 전체의 짜임이나 각 절에 담긴 의미를 잘 알지 못하게 된다.

  나는 늦은 나이에 담임목사님과 교인들에게 떠밀려 장로가 되었다. 장로 임직을 앞두고, 나는 성경을 얼마나 읽었는가 생각해 보았다. 대학과 대학원 공부를 하는 동안에는 학교에 근무하면서 석사, 박사 학위 논문을 써 내느라고 여념이 없었다. 교수가 된 뒤에는 강의하면서 연구하고, 학생지도를 하는 일에 온힘을 기울이느라 정신이 없었다. 그러다 보니, 매일 잠깐씩 시간을 내어 기도하고, 성경을 읽었지만, 여러 번 통독하지 못한 것이 부끄러웠다.

  담임목사님께서는 성경은 구약 39권 929장, 신약 27권 260장으로, 모두 1,189장이다. 이를 1년 365일로 나누면, 3.3장이 된다. 하루에 3~4장을 읽으면, 1년에 한 번을 통독할 수 있으니, 이를 이행하라고 전교인에게 권고하셨다. 그 무렵 나는 성경을 하루에 석 장 이상 읽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래서 우리 교회에서 쓰고 있는 《한글개역 성경》을 가지고 구약 「창세기」부터 차례로 읽기 시작하였다.

  그런데 성경을 읽다 보니, 현대국어의 어법에 맞지 않는 곳이 많고, 뜻을 알기 어려운 곳도 있었다. 한 가지 예를 들면,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바 되었는데, 그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 이름은 기묘자라(이사야 9장 6절).”라는 구절이다. ‘어깨에 정사를 메었다’는 말이 무엇이며, ‘기묘자’는 무슨 뜻인가? 나는 국어 실력 부족을 탓하다가 교보문고에 가서 《현대인의 성경》을 사다가 읽고서야  그 뜻을 알았다.

  성경은 번역에 문제가 있음을 안 나는 좋은 번역 성경이 나왔으면 좋겠다고 생각하였다. 그런데 1993년에 《표준번역 성경》이 대한성서공회에서 나왔으므로, 이 성경을 사다가 읽었다. 2004년에는 이 성경의 개정판이 《새번역 성경》이란 이름으로 발행되었다. 이 성경은 원문의 뜻을 한국어를 사용하는 독자들이 이해할 수 있도록 ‘정확하게 번역하되, 쉬운 현대어로, 우리말 어법에 맞게, 한국교회에서 사용할 수 있도록 번역’한 성경이다. 우리 교회에서는 이 성경을 사용하고 있고, 나 역시 이 성경책을 몇 번 통독하였다.

  얼마 전에 담임목사님은 ‘성경 읽기표’를 전 교인에게 나눠 주시면서 성경 통독을 권면하셨다. 그 표에는 신․구약 성경 장수와 절수가 적혀 있어 각자 읽은 장과 절을 표시할 수 있었다. 한 번 통독이 끝나면 기록한 읽기표는 교회에 제출하고, 새 읽기표를 받는다. 사무간사는 「전교인 성경 통독 현황표」에 통독한 이의 이름과 통독 횟수를 누가 기록한다.

  이 일을 시작한 지 5년여의 세월이 흘렀다. 이번 주일(2022. 5. 29.)에 나눠준 「전교인 성경 통독 현황표」를 유심히 살펴보았다. 400여 명의 교인 중 성경 읽기에 참여한 인원은 181명으로, 모두 1213독을 하였다. 개인별 성경 통독 횟수를 보면, 1~5회 통독한 사람이 87명, 6~10회 통독한 사람이 66명, 11~20회 통독한 사람이 5명, 21~30회 통독한 사람이 5명, 31~40회 통독한 사람이 3명, 41회~49회 통독한 사람이 3명이다. 성경을 30회 이상 통독한 분은 원로장로님과 원로권사님으로, 하루 시간의 대부분을 성경을 읽으면서 지내신다고 한다. 100독을 목표로 하는 분도 계시고, 자기 나이만큼 통독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분도 계시다.

  나는 하루에 성경 다섯 장 이상을 읽기로 하고, 이를 실천하려고 애쓰고 있다. 그렇게 해서 이 일을 시작한 뒤로 일곱 번을 통독하였다. 성경을 통독하는 동안 성경 전체의 짜임과 연계성을 파악하면서 각 편과 절이 담고 있는 깊은 뜻을 조금씩 깨닫게 되었다. 성경 통독 횟수를 늘려갈수록 성경에 담긴 하나님의 사랑과 은총을 깨닫고, 바른 삶의 자세를 가다듬어 나갈 수 있으리라 믿는다. <기독교연합신문, 제1645호. 2022년 11월 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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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프리카에 선교사로 파견되어 26년 동안 수고하시던 J 선교사님이 얼마 전에 귀국하셨다. 장위교회에서 나와 함께 신앙생활을 하던 그는 1996년에 남들이 부러워하는 직장인 KBS에 사표를 내고 아프리카로 떠났다. 이러한 신앙적 결단을 지켜본 나는 놀라움과 함께 존경의 마음을 가졌었다. 그가 들려준 아프리카 선교 사역 중의 수고와 보람은 매우 감동적이었다.

  그는 아프리카의 이디오피아에서 2년, 케냐에서 5년, 탄자니아에서 5년을 사역한 뒤에 잠비아로 가서 15년 동안 헌신하였다. 잠비아는 1964년 영국 식민지에서 독립한 농업국가로, 면적은 한반도의 약 3.3배이고, 인구는 약 1,840만 명이다. 국민 1인당 GDP는 1,400달러 정도로, 세계 150위이다. 그는 수도인 루샤카의 중심부에서 약 20km 떨어진 곳에 위치한 ‘모닝스타 바이블 신학교’에서 헌신하였다.

  이 학교는 설립자이자 학장인 P 선교사와 J 선교사 내외가 운영한다. 이 학교에는 세 분 선교사 외에는 전임 교수가 없으므로, 강의는 전국에서 실력이 있는 분을 초빙하여 진행한다. 정규 직원이 없고, 연세가 많으신 한국인 여성 P 선교사가 학장이므로, 학교의 크고 작은 일은 모두 J 선교사와 그의 부인 선교사의 몫이다. 100여 명의 재학생은 모두 기숙사 생활을 한다. 그는 새벽예배 시간에 설교하는 일로 일과를 시작하여 눈코 뜰 사이 없이 바쁜 하루를 보내곤 한다.

  학생들의 세끼 식사 재료와 땔감을 구입하는 일, 식사 준비하는 일을 직접 챙긴다. 식수와 생활용수를 얻기 위해 우물을 파기도 하고, 건물에 문제가 생겨 비가 샐 때에는 손수 지붕에 올라가 손질을 한다. 학생의 고민과 불편을 해소하기 위해 상담을 하고, 병이 나면 병원으로 데려가 치료를 받게 한다. 은행 관련 업무나 재학생의 학비 융자와 같은 문제도 그가 처리해야 한다. 이처럼 학교 안팎의 허드렛일부터 사무적인 일, 신앙적인 일 등 그의 손을 거치지 않는 일이 없다. 그래서 그는 농담 삼아 자신을 ‘소사(小使) 선교사’라고 하였다.

  학생들과 24시간 함께 생활하다 보니, 개개 학생의 건강 문제, 가정의 문제는 물론 신앙에 관한 일까지 알게 된다. 그러면 그에 맞게 상담하고 지도하며 보살핀다. 학생들은 그와 고운 정 미운 정을 나누며 생활한다. 그래서 졸업한 뒤에도 끈끈한 정을 이어간다. 졸업생이 개척한 교회의 건축비가 모자란다고 하면 백방으로 노력하여 도와주곤 하였다.

  이 학교는 명망 있는 강사님들을 초빙하여 강의하고, 건실하게 운영하는 것으로 정평이 나 있다. 그래서 국가에서는 군종과 원목, 경목 양성 기관으로 지정하였다. 2006년에 첫 졸업생을 배출한 이래 약 200여 명의 졸업생이 나왔다. 그들의 대부분은 전국에 흩어져 목회활동을 하고 있다. 군목과 경목이 되어 군대와 경찰에서 복음을 전하는 일을 하는 이도 있다. 지금 잠비아 경목 중 최고의 지위인 경목감은 이 학교 출신이다. 군목 중에 군종감에 오른 이는 아직 없지만, 앞으로 나올 것이다. 졸업생의 일부는 이웃나라인 짐바브웨와 말라위에 가서 선교사로 활동하는 이도 있다. 이로 보아 잠비아 ‘모닝스타 바이블 신학교’는 잠비아의 복음화에 큰 성과를 거두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는 졸업생이 개척한 교회의 헌당예배에 초청받았을 때의 감격을 잊을 수 없다고 하였다. 그는 이런 자리에 참석할 때마다 밤낮으로 수고한 보람을 느낄 수 있어 눈물을 흘리며 감사의 기도를 드렸다고 한다. 그는 공항이나 다른 지역 여행 중에 졸업생이 달려와 반갑게 인사하고 감사의 말을 할 때에도 큰 보람을 느꼈다고 한다. 또 수단, 탄자니아, 이디오피아 등의 전쟁지역에 평화유지군으로 파견된 졸업생 몇 명이 그곳에 예배 처소를 만들어 예배드리며 활동하고 있다는 말을 들을 때 더할 수 없는 감격과 감동을 느꼈다고 한다.

  나는 J 선교사 내외가 잠비아에서 몸과 마음을 바쳐 헌신한 이야기를 들으며 큰 감동을 느꼈다. 주님께서 J 선교사 부부의 노고를 치하하며 큰 상을 주시리라 믿는다. 아프리카의 낯선 풍토에서 오랜 동안 과로를 한 탓에 부인 선교사님의 건강이 좋지 않다는 말을 들으니, 참으로 마음이 아프다. 속히 쾌차하기를 간절히 기도한다. <기독교연합신문 제1643호, 2022. 10.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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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목사는 복음을 전파하고 예배를 인도하며, 교인의 신앙생활을 보살피는 성직자로, 세상 사람들처럼 물질적 풍요를 좆지 아니한다. 그래서 개척교회나 소형교회를 담임한 목사의 아내는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을 수밖에 없다. 거기에 교인들의 마음까지 살펴서 다독여야 하니, 예삿일이 아니다. 그래서 교회를 다니는 처녀들의 대부분은 어렵고 힘든 역할을 해야 하는 목사의 아내가 되는 것을 꺼린다고 한다.

   그런데 처녀 시절의 내 여동생은 목사의 아내가 되겠다고 하는 별난 아가씨였다. 신학교를 졸업한 뒤에 혼인 이야기가 나오자 여동생은 목사와 결혼하겠다고 하였다. 나는 어머니께서 개척교회 담임 전도사로 고생하시는 모습을 보아왔다. 그리고 목사 사모님이 아주 힘들고 어려운 일을 겪으시는 것을 보았다. 그래서 여동생에게 그 생각을 바꿀 것을 종용하며 설득하였다. 그러자, 여동생은 초등학교 5학년 때 체육시간에 남자 아이와 정면으로 충돌하여 의식을 잃었던 일을 이야기하였다.

   여동생은 의식을 잃은 채 병원에 입원하여 15일 만에 깨어났다. 그 때 자기가 하얀 비둘기가 되어 날개를 치면서 하늘로 오르는 것을 보고 의식을 잃었던 일이 떠올랐다. 그 날 문병 오셨던 손흥구 목사님이 여동생에게 네 꿈이 무엇이냐고 물으셔서, ‘여자 목사가 되어 널리 복음을 전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그러자 손 목사님은 “네가 의식을 잃을 때 하나님이 네 영혼을 불러가셨다. 그런데 보름 뒤에 다시 보내준 것을 보니, 너를 크게 쓰시려는가 보다.”라고 하셨다고 한다. 그 뒤에 여동생은 여자는 목사가 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목사와 혼인하여 남편을 도우며 복음을 전하는 일을 하겠다고 마음먹었다고 한다. 그러니 더 이상 자기 뜻을 꺾으려 하지 말고 도와달라고 하였다.

   여동생은 여러 혼처를 다 마다하고 경기도 농촌의 작은 교회를 담임한 목사와 혼인하였다. 그런데 그 교회를 개척한 전도사 시어머니를 모시고, 남편 목사를 섬기는 일은 참으로 힘겹고, 서러웠다. 그래서 눈물을 흘리며 기도하는 날이 많았다. 교인들은 농촌 생활에 익숙하지 못한 ‘서울댁 사모님’을 위로하고, 격려해 주었다. 그러면서 개인의 신상 문제, 가정의 일, 진로 문제 등을 상담해 왔다. 그래서 신학교에서 공부한 상담학 실력을 활용하여 상담한 뒤에 격려하며 함께 기도하였다. 어려운 문제는 아는 사람들을 움직여 해결해 주기도 하였다.

    남편 목사는 그 교회를 부흥시킨 뒤에 성남시로, 다시 고양시로 담임지를 옮겼다. 여동생은 남편을 내조하고 성도를 위해 일하겠다는 결심을 묵묵히 실천하였다. 여동생은 교인들 사이의 일, 다른 교회와 관련된 일, 목회자 사이에 생긴 일 등을 해결하였다. 좋지 않은 일이 생겼을 때에는 목사는 뒤로 물러나 있게 하고, 앞에 나서서 해결하였다.

   고양시로 옮긴 뒤에 생활비 걱정은 겨우 면하였으나, 3남매를 공부시킬 일이 막막하였다. 생각 끝에 학원에 다니며 공부하여 보육교사 자격증을 땄다. 어린이집 교사로 취직하여 몇 년 경험을 쌓은 뒤에 어린이집을 개설하여 직접 운영하였다. 어린이집을 운영하고 보니, 경제적인 면에서는 도움이 되었지만, 매우 바쁘고 힘들었다. 낮에는 어린이집에서 일하고, 저녁에는 교인들을 만나 상담하고, 기도하였다. 새벽기도회가 끝난 뒤에 방문하여 상담하고 기도하는 날도 많았다. 그러다 보니, 제때에 저녁식사를 못하는 날도 많았고, 수면 시간도 부족하였다.

여동생은 바쁘고 힘들게 지내다 보니, 피로가 쌓이고 지쳤다. 그래서 병원에 가서 진찰을 받아보니, 식도암이 심하여 6개월밖에 살지 못한다고 하였다. 이 말을 들으니, 널리 복음을 전하는 일을 제대로 못하고 죽을 일이 안타까웠다고 한다. 그래서 짧은 기간이라도 남편의 그늘을 벗어나 단독목회를 하겠다고 결심하였다. 그래서 여자에게도 목사 안수를 해 준다는 교단의 교육기관에 가서 특별교육을 받으며 하나님께 매달려 기도하였다. 그러는 중에 식도암은 시나브로 좋아졌다. 그 뒤에 목사 안수는 받았지만, 단독목회는 하지 않고, 사모의 자리에서 일하다가 남편 목사의 은퇴를 맞게 되었다. 하나님께서는 복을 주셔서 아들 딸 3남매를 대학, 대학원까지 마칠 수 있게 해 주셨다.

   여동생은 목사의 아내 노릇을 하면서 교인들과 함께 아파하며 기도하면, 교인들이 위로를 받고, 용기를 얻어 회복하는 모습을 볼 때 크게 보람을 느꼈다고 한다. 남편 목사는 아내의 덕으로 대과 없이 은퇴하게 된 것을 고마워한다. 이런 모습을 지켜본 나는 여동생이 목사의 아내 역할을 잘할 역량을 타고난 것을 모르고 반대한 것을 미안하게 생각한다. ‘고난의 십자가를 지는 길이면서 영광의 길’이란 ‘목사 아내의 길’을 묵묵히 걸어간 여동생이 자랑스럽다. <기독교연합신문 제1637호, 2022. 8.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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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며칠 전에 미국 LA에 사는 딸이 카페를 열었다며 개업예배를 드리는 광경을 찍은 사진과 동영상을 보내왔다. 반갑고 기쁜 마음에 얼른 열어보니, 생각보다 넓고 깨끗한 매장에 여러 가지 과자와 샌드위치, 과일 등이 맛깔스럽게 차려 있다. 그 앞에서 담임목사님과 교우들이 모여 찬송하고 기도하는 모습이 보였다. 감사의 기도를 드리고 나니, 그동안 많은 어려움과 고초를 겪은 딸의 모습이 떠올랐다.

   딸은 1996년에 결혼하여 한국에서 2년간 신혼생활을 한 뒤에 한국기업의 미국 주재원이 된 남편을 따라 미국에 가서 4년여를 지낸 뒤에 2002년 한국으로 돌아왔다. 그 때부터 우리는 같은 아파트 단지에서 오순도순 정을 나누며 살았다. 사위는 대기업에 근무하면서 여러 차례 승진을 하더니, 50세에 명예퇴직을 하였다. 그 뒤에 중소기업의 미국법인 책임자가 되었다. 그래서 2014년에 고등학교 2학년인 딸과 초등학교 6학년인 아들을 데리고 미국으로 떠났다. 딸이 떠나고 나니, 아파트 단지는 물론 서울이 텅 빈 것만 같아 허전하기 짝이 없었다.

   순탄할 것으로 믿고 미국으로 간 딸과 사위에게 어려움이 닥쳤다. 사위가 뜻하지 않게 LA 법인장을 그만두게 되니, 영주권 얻을 일이 막막함은 말할 것도 없고, 당장 체류할 비자를 얻는 것도 문제였다. 사위는 어렵사리 취직을 하여 취업비자를, 딸은 대학원에 등록하여 학생비자를 얻어 체류하면서 아이들을 학교에 보냈다. 딸과 사위는 전부터 알고 지내던 지인, 출석하는 교회 교우들의 도움을 받으며 영주권을 얻기 위해 온갖 노력을 하였다. 두 사람은 믿었던 사람의 배신, 희망과 좌절을 겪으며 정신적·육신적으로 많은 고생을 하였다. 이를 알면서도 딸의 가족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아내와 함께 하나님께 매달려 기도하는 일밖에는 없었다.

   나이 들어서 미국에 간 사람이 영주권을 얻는 일은 하늘의 별을 따는 것만큼이나 어렵다고 하였다. 그런데 딸의 가족은 3년 만에 영주권을 얻었다. 사위가 미국에 유학 와서 석사학위를 받고, 대기업 주재원으로 근무하였던 일이 도움이 되었던 것 같다. 그러나 하나님의 보살핌이 없었으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우리는 이 소식을 듣고 기쁨의 눈물을 흘리면서 감사의 기도를 드렸다.

   나는 아내와 함께 2018년 10월에 딸의 가족을 만나러 미국에 갔다. 딸과 사위는 열심히 일을 하고, 아이들은 대학교와 고등학교를 다니고 있었다. 딸은 그동안 겪은 고난과 좌절, 기쁨과 감사에 대해 이야기하였다. 그러면서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는 마음이 없었으면 이기기 어려웠을 것이라고 하였다. 우리는 그동안의 노고를 위로하고 치하하며 감사의 기도를 드렸다. 주일에는 딸과 함께 교회에 갔다. 딸은 1,000여 명의 교인이 경건한 마음으로 드리는 예배 시간에 중창단원과 함께 은혜로운 찬송을 불렀다. 감사와 기쁨이 넘치는 표정으로, 열정적으로 부르는 찬송은 참으로 감동적이고 은혜로웠다.

   우리가 귀국한 2년 뒤에 사위가 새로 시작한 일터에서 넘어져 다리에 골절상을 입었다. 그래서 6개월 동안 일을 하지 못하고 입원 및 통원 치료를 받아야 하였다. 설상가상으로 코로나 19가 창궐하니, 딸의 가정은 큰 어려움을 겪게 되었다. 딸은 일도 하지 못하고 남편의 병간호에 정성을 기울이다가 몸도 마음도 지쳐 버렸다. 그래서 실의와 좌절감으로 고생하다가 우울증을 겪게 되었다. 항공편 제한 운행으로 갈 수도, 올 수도 없으니 안타까움만 쌓일 뿐이었다. 그저 자주 통화하며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믿고, 용기를 잃지 말 것을 당부하고 권면하는 수밖에 없었다. 우리는 딸의 전화 목소리에 힘이 있는가, 밝은가 어두운가에 신경을 곤두세우며 지냈다. 얼마 뒤에 딸은 미국 정부에서 코로나로 인한 실업 수당을 주어 생활비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된다고 하였다. 그리고 전부터 말해 오던 카페를 인수하여 개업할 계획이라며 도와달라고 하였다. 딸은 지난 1월부터 석 달 동안 그 카페에 가서 일을 도우며 경영 수업을 한 뒤에 4월 초에 인수하여 개업하였다. 주님의 보살핌과 지인의 도움으로 큰일을 이루게 되었으니, 참으로 기쁘고 감사한 일이다.

   나는 개업축하 예배 사진을 본 뒤에 딸이 함께 하는 찬양팀의 동영상을 보았다. 음악대학을 나와 우리 교회의 반주자, 성가대 지휘자, 성가대 솔리스트로 활약하던 딸이 미국의 큰 교회에 가서도 활동하는 모습이 대견스럽고, 감사하였다. 딸의 가족이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도록 믿음을 주시고, 찬양의 힘을 주신 주님의 은혜에 깊이 감사한다. 이제는 좀 편안한 마음으로 딸이 시작한 카페와 사위가 하는 일이 잘 되기를, 그리고 대학생이 된 외손녀와 외손자가 공부 잘하고·튼튼하고·바르게 성장하기를 기도할 수 있게 되어 기쁘다. <기독교연합신문 1633, 2022. 7.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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