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 친구들과 서울시 성북구 아리랑로 19길 116(정릉동)에 있는 정릉(貞陵)을 찾았다. 정릉은 조선의 태조 이성계의 계비(繼妃)인 신덕왕후(神德王后) 강씨(康氏)의 능이다. 서울 강남구 삼성동에 있는 정릉(靖陵)은 조선 11대 중종의 능으로, 한글 음은 같으나 한자가 다르다. 정릉(貞陵)에 들어가 보니, 토요일 오전인데도 탐방객이 많지 않아 조용하였다. 능은 입구부터 정결하게 정리되어 있고, 능 둘레의 나무와 풀은 새잎이 돋아 연초록의 아름다움을 자랑하고 있다. 신록(新綠)이 꽃보다 아름답다는 말을 실감하게 하였다. 나는 신록 사이로 난 능 둘레의 산책로(2.5km)를 걸으며 능의 주인공인 신덕왕후 강씨와 태조 이성계(李成桂), 태조의 다섯째 아들로 나중에 왕위에 올라 태종이 된 방원(芳遠) 사이에 얽힌 사랑과 미움에 관해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정릉에 묻힌 신덕왕후 강씨는 태조 이성계의 경처(京妻)이다. 고려 시대의 벼슬아치들은 첩은 인정하지 않고, 고향에 둔 향처(鄕妻)와 개성에 둔 경처(京妻)를 똑같이 처로 인정하였다. 이성계는 고려 조정에 벼슬하기 전에 함경도 영흥에서 한씨와 결혼하였다. 그리고 벼슬을 한 뒤에 권문세가(權門勢家)인 강윤성(康允成)의 딸과 혼인하여 경처를 두었다. 이성계가 강씨와 만나게 된 일화가 전해 온다. 이성계가 몹시 목이 말라 우물로 가서 우물가에 있는 처녀에게 물을 청하였다. 그녀는 바가지에 물을 뜨더니, 버들잎을 훑어 띄워 주었다. 그가 이상히 여겨 연유를 물으니, 그녀는 갈증이 심할 때 급히 물을 마시다가 체할까 봐 그리 하였노라고 하였다. 그는 그녀의 지혜롭고 사려(思慮) 깊은 언행에 마음이 끌려 혼인하였다고 한다. 이성계는 한씨와의 사이에서 6남 2녀, 강씨와의 사이에서 2남 1녀를 두었다.

 

  함경도 영흥 출신인 이성계가 고려를 뒤엎고 조선을 건국하는 데에는 당시 권문세족(權門世族)이었던 강씨 일족의 도움이 컸다. 이성계의 여섯 아들도 창업을 도왔지만, 가장 큰 역할을 한 것은 총명하고 재능이 있으며 정치적 욕망이 큰 다섯째 아들 방원이었다. 방원은 지혜롭고 정치적 감각이 뛰어난 강씨와 힘을 합하여 이성계의 조선 창업에 많은 공을 세웠다. 이성계가 창업에 성공하여 왕위에 오르자 강씨는 왕비로 책봉되어 신덕왕후가 되었다. 한씨는 조선을 개국하기 한 해 전인 고려 공양왕 3년(1391)에 사망하였으므로, 신덕왕후는 조선의 첫 왕비가 되었다.

 

  왕후가 된 신덕왕후는 자기가 낳은 아들이 왕위를 계승하게 하려고 하였다. 방원은 자기가 아버지의 뒤를 이어 왕이 되려고 하였다. 두 사람은 지향하는 목표가 상충되었기에 맞부딪힐 수밖에 없었다. 태조의 사랑을 받고 있는 왕후는 조정의 실세인 정도전의 도움을 받아 자기가 낳은 아들 방석(芳碩)을 세자의 자리에 앉혔다. 이것은 생사의 길을 넘나들며 공을 세우고, 정치적 욕망을 키워온 방원으로서는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 앞길을 막는 장애물을 제거하지 않고는 자기의 뜻을 펼 수 없게 된 방원은 제1차 왕자의 난을 일으켜 세자로 책봉된 방석을 비롯한 비호세력을 제거하였다.

 

  신덕왕후가 1396년 병으로 세상을 떠나자 태조는 크게 슬퍼하며 능역(陵域)을 황화방(皇華坊, 지금의 정동)에 정하였다. 그는 왕후의 봉분 오른쪽에 자신의 수릉(壽陵, 죽기 전에 미리 만들어 두는 임금의 무덤)을 정하고, 능호(陵號)를 ‘정릉’으로 정하였다. 그리고 그 동쪽에 재궁(齋宮) 흥천사(興天寺)를 세워 자주 행차했다. 둘째 형인 방과(芳果, 제2대 정종)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방원(제3대 태종)은 아버지인 태조가 세상을 떠나자, 신덕왕후에게 품고 있던 미움과 원망을 드러냈다. 그래서 1409년(태종 9) 정릉을 사을한(沙乙閑) 골짜기로 옮겼다. 그리고 종묘에 부묘(祔廟, 삼년상이 지난 뒤에 그 신주를 종묘에 모심)하지 않고, 왕비의 제례를 폐했다. 1410년 태종은 정릉의 정자각(丁字閣)을 헐고, 정릉의 병풍석과 십이지신상(十二支神像) 등 석물을 큰비로 유실된 토교(土橋) 광통교(廣通橋)를 석교(石橋)로 개축하는 데에 사용했다. 그 밖의 석재나 목재들은 태평관(太平館)을 지을 때 부속재로 이용했다. 그래서 정릉은 일반인의 묘와 다를 바 없게 되었고, 200여 년 동안 아무도 찾지 않는 묘가 되었다.

 

  신덕왕후가 자기의 아들을 세자에 앉혀 다음 왕위를 물려받게 하려고 한 것은 인지상정(人之常情)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그 앞에는 장성한 한씨 소생의 아들들이 여섯이나 버티고 있었다. 특히 총명하고, 정치적 욕망이 클 뿐 아니라, 많은 지지 세력과 사병(私兵)을 가지고 있는 방원이 있었다. 그녀는 이러한 엄연한 현실을 가볍게 생각하고, 욕심을 부린 것이다. 그녀가 방원의 존재를 제대로 인식하였더라면, 방석을 세자로 삼는 일을 자제하거나, 더 세심한 배려를 했어야 한다. 그렇지 못하였기 때문에 그녀는 비록 자기가 죽은 뒤이기는 하지만, 어린 두 아들과 딸을 비명에 죽게 만들었다. 그리고 자기의 무덤이 옮겨지고, 왕비의 제례도 받지 못하는 수모를 당하였다. 이것은 그녀의 지나친 정치적 욕망이 가져온 비극이다.

 

  방원은 신덕왕후가 왕후의 지위를 이용하여 자기의 오랜 꿈을 짓밟고, 이복동생을 죽이지 않고는 꿈을 이룰 수 없는 상황을 만들어 놓은 데 대한 미움과 원망이 컸을 것이다. 그리고 이복동생을 죽였다는 오명(汚名)을 쓰고 살아야 하는 괴로움, 태조로부터 동생을 죽인 패륜아 취급을 당한 아픔은 그녀에 대한 미움과 원망을 더욱 깊게 만들었을 것이다. 그는 태조가 세상을 떠나자, 왕후의 능을 파서 옮기고, 왕후의 직첩을 빼앗았으며, 제례도 올리지 못하게 하였다. 이러한 그의 처사는 사감(私感)에서 나온 것으로, 도를 넘은 것이고, 나라의 정통성을 훼손하는 일이라는 비판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당대에는 아무도 말을 못하다가 72년이 지난 1581년(선조 14)에 드디어 삼사(三司, 임금에게 직언하던 세 관아. 사헌부, 사간원, 홍문관)에서 신덕왕후 강씨의 시호(諡號)와 존호(尊號)를 복귀하고, 정릉을 회복하자는 논의가 있었다. 그 뒤로 88년이 지난 1669년(현종 10) 송시열(宋時烈) 등이 다시 신덕왕후 강씨를 종묘에 배향해야 한다는 차자(箚子, 일정한 격식을 갖추지 않고 사실만을 간략히 적어 올리던 상소문)를 올렸다. 그래서 본격적인 복구 작업을 하여 오늘에 이르게 되었다. 장명등(長明燈, 무덤 앞에 세운 석등)과 혼유석(魂遊石, 넋이 나와 놀도록 한 돌이라는 뜻으로, 상석과 무덤 사이에 놓는 직사각형의 돌) 앞의 받침돌인 둥근 고석(鼓石)은 옛것이나 나머지는 현종 때 새로 세워진 것이다.

 

  나는 정릉 산책로를 걸은 뒤에 홍살문을 나서면서 권력을 탐하는 사람의 말로가 어떠한가를 다시 한 번 생각하였다. 신덕왕후는 자기가 낳은 아들을 무리하게 왕위에 앉히려다가 아들을 죽게 만들었을 뿐만 아니라, 자기의 무덤이 파헤쳐지고, 왕후의 봉호가 없어졌으며, 제사가 끊기는 수모를 당했다. 방원은 왕좌를 차지하였지만, 역사에 이복동생을 죽였다는 오명(汚名)을 남기게 되었고, 아버지 태조로부터 동생을 죽인 패륜아 취급을 당하였다. 권력을 탐하는 사람은 여생이 평안할 수 없다는 평범한 이치는 예나 지금이나 다를 것이 없다. 욕심을 자제하고, 성실하게 사는 것이 말년의 평안함을 보장하는 일임을 잊지 말아야겠다. (2019. 5.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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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4월의 마지막 날 아내, 강 여사와 함께 경기도 남양주시 조안면 송촌리 운길산에 자리 잡고 있는 수종사를 찾았다. 산 밑에서 절까지 올라가는 길은 시멘트로 거칠게 포장한 비탈길인데, 경사가 심하고 굴곡이 많아 좀 긴장하여 차를 몰았다. 도로 폭이 좁아서 마주 오는 차가 있을 때에는 좀 넓은 곳에 비켜 서 있기도 하였다. 꼬불꼬불한 길을 달려 절문 앞 주차장에 당도하니, 아내는 안도의 한숨을 쉬며 오래 전에 왔을 때 산 밑에 승용차를 세우고 걸어 올라오느라 힘들었던 일을 말하였다.

 

  수종사는 신라 때 지은 절이라고 하지만, 확실하지 않다. 전해 오는 이야기에 따르면, 고려 태조 왕건이 산위에서 솟아나는 이상한 기운을 보고 가 보니, 우물 속에 동종(銅鐘)이 있어서 그곳에 절을 짓고 수종사라고 하였다고 한다. 또 다른 이야기도 전해 온다. 1459년(세조 5) 부스럼을 앓던 세조가 상원사에서 문수보살을 만나 깨끗이 나은 뒤에 한강을 따라 환궁(還宮)하던 중 이수두(二水頭·양수리)에서 하룻밤을 묵게 되었다. 그런데 한밤중 난데없는 종소리가 들리므로 이상하게 여겨 물으니, 운길산에 옛 절터가 있다고 하였다. 이튿날 자세히 살펴보게 하였더니, 절터 근처의 바위굴에 18나한(羅漢)이 있는데, 굴 안에서 물방울 떨어지는 소리가 마치 종소리처럼 울려나왔다고 하였다. 왕은 이를 기이하게 여겨 그곳에 절을 세우고, 수종사라고 하였다고 한다. 그런데 이 절에 1439년(세종 21)에 세운 태종의 딸 정의옹주(貞懿翁主)의 부도(浮屠, 사리를 안치한 탑)가 있다. 이로 보아 이 절의 창건은 그 이전이며, 세조연간에 크게 중창한 것이라 하겠다.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산을 보니, 나무에서 갓 피어난 새 잎으로 산은 온통 연두 빛인데, 곳에 따라 농도(濃度)의 차이를 보인다. 연두 빛의 산색은 파란 하늘과 조화를 이루어 참으로 아름답다. 나뭇잎은 기름을 바른 것처럼 야들야들하며 매끄러움과 싱그러움을 자랑한다. 첫째 문을 지나 절로 향하는 길의 좌우에는 온갖 꽃들이 저만의 자태로 아름다움을 자랑한다. 길옆에 피어 있는 꽃 중에는 라일락․철쭉․좁쌀나무꽃․죽단화(황매화)․페튜니아․팬지와 같이 이름을 아는 꽃도 있지만, 이름을 모를 꽃도 많다. 그래서 스마트폰으로 사진을 찍어 검색하여 산괴불주머니, 붉은병꽃, 폐튜니아, 말발도리, 지면패랭이꽃, 도깨비부채, 한련화, 독활 등의 꽃 이름을 알아냈다. 꽃들은 이름이 다른 것처럼 모양과 색을 달리하여 각기 자태를 뽐내고 있다.

 

  꽃 이름을 검색하며 걷다 보니, 불이문(不二門)이 나왔다. ‘불이(不二)’는 진리 그 자체를 표현한 말로, 둘이 아니라는 말이다. 이 문을 통해야만 진리의 세계인 불국토(佛國土)에 들어갈 수 있음을 의미한다. 조금 더 올라가니, 해탈문(解脫門)이 서 있다. 모든 괴로움과 헛된 생각의 그물을 벗어나 아무 거리낌이 없는 진리의 깨달음을 얻는 문이다. 이 문은 정진(精進)을 촉진시키는 중대한 의미를 갖고 있다. 계단을 올라 해탈문 안으로 들어가니 대웅보전(大雄寶殿)을 중심으로 응진전(應眞殿), 약사전(藥師殿), 산신각, 범종각, 경학원(經學院), 요사(寮舍) 등이 가지런히 서 있다. 아침 예불 시간이므로, 대웅전에서 독경하는 스님의 목소리가 경내에 울려 퍼져 경건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범종각 아래에는 세조가 심었다는 은행나무 두 그루가 버티고 서서 수종사가 고찰(古刹)임을 말해주고 있다.

 

  대웅전 앞의 넓고 평평한 공간은 아래에 있는 집의 옥상인데, 전망대의 구실을 한다. 거기서 앞을 보니, 먼 산줄기를 휘돌아 내려오는 북한강과 남한강이 합해지는 광경과 함께 두 강 인근의 아름다운 경관이 확연히 눈에 들어온다. 북한강은 북한 지역인 강원도 금강군의 옥발봉에서 발원하여 금강산 비로봉 부근에서 발원하는 금강천과 합류한 뒤 천 리를 넘게 달려온 강이다. 남한강은 강원도 태백시 창죽동 금대봉골 검룡소에서 발원하여 역시 천여 리를 흘러 온 물줄기이다. 이 두 강물은 두물머리에서 합수하여 팔당댐을 넘어 서울을 지나 한강 하류를 거쳐 서해로 들어간다.​ 천 리가 넘는 먼 길을 달려온 두 물이 합수하는 광경을 내려다보니, 참으로 경이롭고 장대하다. 한 동안 앞을 보다가 눈을 감고 서서 계절에 따라 변하는 신록․단풍․설경(雪景)을 떠올려 보았다. 또 일출․일몰․구름이 덮인 한강의 모습도 떠올려 보았다. 계절이나 날씨에 따라 변하는 광경이 아름답고, 멋지고, 신비롭기 짝이 없다. 조선의 문장가인 서거정(徐居正, 1420~1488)이 ‘동방 사찰 중 전망이 제일 좋은 곳’이라고 극찬한 말이 허언(虛言)이 아님을 알겠다.

 

  이곳은 또 다른 유명인사와도 관련이 깊은 곳이다. 조선 선조 때 영의정을 지낸 한음(漢陰) 이덕형(李德馨, 1561~1613)은 이곳에서 가까운 남양주시 조안면 송촌리에 별서(別墅)를 두었다. 그는 산수가 빼어난 운길산을 사랑하여 틈이 나는 대로 들길을 걸어 수종사에 와서 주지인 덕인(德仁) 스님과 교유하였다고 한다. 이곳에서 멀지 않은 경기 남양주시 조안면 능내리에서 태어나고 자란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 1762~1836년)은 수종사를 즐겨 찾았다. 그는 일생 중 수종사에서 지낸 즐거움을 ‘군자유삼락(君子有三樂)’에 비교하였다. 당시에 다선(茶仙)으로 꼽히는 초의선사(艸衣禪師)는 이곳으로 다산을 찾아와 한강의 아름다운 풍광을 즐기며 차를 마셨다고 한다.

 

  수종사에서는 차 문화와 깊은 인연이 있는 이곳에 ‘삼정헌(三鼎軒)’이라는 다실을 지어 차 문화를 계승하고 있다. 나는 스님의 독경 소리를 들으며 경내를 찬찬히 둘러본 뒤에 삼정원으로 들어가 찻상 앞에 앉았다. 찻상에는 녹차와 다기(茶器)가 가지런히 놓여 있다. 이곳에서 봉사하는 젊은 보살은 친절하게 차를 우려 마시는 요령을 설명하며 차를 우려 주었다. 잘 우러난 녹차의 색은 연두색으로 삼정헌 아래로 보이는 산색과 비슷하여 신비로움을 느끼게 한다. 함께 간 아내․강 여사와 마주 앉아 아름답고 경이로운 풍경을 바라보며 마시는 녹차의 맛과 향은 그윽하고 부드러웠다.

  녹차를 마시며 환담하던 찻상을 정리하고 주차장으로 내려왔다. 전후좌우의 경관을 찬찬히 살펴보면서 발걸음을 옮길 때 ‘함께 영원히 있을 수 없음을 슬퍼 말고/ 잠시라도 같이 있을 수 있음을 기뻐하라.’고 한, 찻상에 깔아놓은 하얀 천에 적혀 있던 ‘인연설(因緣說)’의 첫 구절이 떠올랐다. 오늘 세 사람이 함께 ‘국가지정문화재 명승’으로 지정될 수종사를 탐방한 것은 참으로 기쁘고 감사한 일이다. 우리의 인연이 영원할 수는 없으나, 오래오래 이어졌으면 좋겠다. (2019. 5.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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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천 의림지(義林池)

   지난 4월 9일에 아내, 김 교수 내외와 함께 충북 제천시 모산동에 있는 의림지(義林池)를 다시 찾았다. 의림지 입구에 들어서니, 의림지 상징 캐릭터인 ‘물의 요정 방울이’가 활짝 웃는 얼굴로 우리를 맞는다. 그 옆에는 제천시 상징 캐릭터인 ‘박달 신선과 금봉 선녀’가 자애로운 표정으로 지켜보고 있다. 이 캐릭터를 보는 순간 대중가요 「울고 넘는 박달재」가 떠올랐다. 나는 이 노래를 흥얼거리며 의림지 제방을 걷기 시작하였다.

 

   의림지는 용두산에서 내려오는 물줄기를 막아 만든 저수지로, 김제의 벽골제(碧骨堤)․밀양의 수산제(守山堤)와 함께 고대에 축조된 것으로 전해 온다. 제천을 고구려 때에는 ‘奈吐(내토)’라 하고, 통일신라 때에는 ‘奈堤(내제)’라 하였다. 이 말은 ‘큰 제방(둑)’이란 말로, 의림지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한다. 충청남․북도를 호서(湖西)라고 한다. 이것은 의림지의 서쪽이라는 말로(<<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별집 16권 참조), 의림지가 충청도 지역을 가리키는 이름을 붙이는 기준이 되었음을 말해 준다. 이것은 농업이 경제의 중심이던 시대에 넓은 제천 평야에 물을 공급하여 농사를 짓게 한 의림지의 위상이 매우 높았음을 말해 준다.

 

   의림지의 축조(築造) 연대에 관하여는 삼한시대 축조설, 신라 진흥왕 때 우륵이 쌓았다는 설, 조선시대 현감 박의림이 쌓았다는 설이 있다. 그런데 지명 분석에 근거하여 삼한시대 축조설이 일반적으로 수용되고 있다.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의 「의림제(義林堤)」 항에는 정인지가 두 차례나 수리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그 뒤 항일운동기인 1914~1918년에 대대적으로 수축하였다고 한다. 지금 보는 모습은 1972년 장마에 무너진 둑을 복구한 것이다.

 

   나는 의림지 둑을 시계 반대 방향으로 걸으며 찬찬히 살펴보았다. 잘 다듬어진 흙길을 지난 뒤에 나무판으로 만든 계단을 올라 호수의 서쪽으로 가니, 소나무가 우거진 산이 나왔다. 그 산의 소나무 숲에서 세 줄기의 폭포수가 바위를 타고 흘러내린다. 시원한 물소리를 내며 흘러내린 폭포수는 잔잔한 수면에 파문(波紋)을 일으키며 원래 있던 저수지의 물과 뒤섞인다. 폭포 앞의 저수지에 설치한 분수에서는 힘차게 솟아오르다가 포물선을 그리며 떨어지는 큰 물줄기 세 개와 여러 개의 작은 물줄기가 떨어지며 예쁜 파문을 일으킨다. 참으로 평온하고, 아름다운 풍경이다.

 

   의림지는 둘레가 1.8km이고, 수심은 약 8m가 된다. 제방에는 오래된 소나무와 버드나무가 숲을 이루어 ‘제림(堤林)’이 되었다. 제림은 초록빛을 띤 잔잔한 물결과 어우러져서 아름답고 그윽한 정취를 느끼게 해 준다. 제방을 따라 걷다 보니, 1948년에 세운 경호루(鏡湖樓)와 순조 7년(1807)에 세운 영호정(映湖亭)이 있다. 물과 숲이 어우러진 곳에 서 있는 누각과 정자는 조화를 이루어 아름답고 멋진 경관을 보여준다. 이처럼 이곳은 명승지의 면모를 두루 갖추고 있어 2006년 12월 4일에 국가명승 제20호로 지정되었다.

 

   나는 영호정을 지나 동쪽 둑길을 걸으며 아내에게 안내문에 간단히 씌어 있는 의림지 전설 세 가지를 이야기하였다. 옛날 의림지가 생기기 전에 이곳에 부자가 살았다. 어느 날, 스님이 와서 시주를 청하자 인색한 부잣집 영감은 쌀 대신 두엄을 퍼서 주었다. 이를 본 그 집 며느리가 몰래 쌀독에서 쌀을 퍼다 스님에게 주면서, 시아버지의 잘못을 용서해 달라고 하였다. 스님은 며느리에게 고맙다고 하면서, “비가 내리거든 속히 산 위로 피하되 절대로 뒤를 돌아보지 말라.”고 하였다. 얼마 뒤 장대비가 내리는 것을 본 며느리는 스님의 말이 생각나서 급히 산으로 달렸다. 그때 천둥 번개와 함께 벼락이 치는 소리가 들렸다. 그녀가 얼떨결에 뒤를 돌아보니, 자기 집이 벼락에 무너지고, 그 자리에 물이 고였다. 그 때 물이 고인 집터가 의림지이며, 그녀는 뒤를 돌아보지 말라는 금기(禁忌)를 어겼기 때문에 바위가 되었다고 한다. 이것은 의림지의 유래를 설명하기 위해 전국에 널리 퍼져 있는 「장자못 전설」을 끌어다가 꾸민 이야기이다.

 

   또 다른 이야기도 있다. 옛날에 의림지 동편에 큰 부자가 살았는데, 그 집 앞에는 집의 반대 방향으로 머리를 둔 거북 모양의 바위가 있었다. 그 집 며느리는 끊임없이 찾아오는 손님 접대에 힘이 들어 몸도 마음도 지쳐 있었다. 어느 날, 시주를 받으러 온 스님이 며느리의 안색이 좋지 않음을 보고, 그 연유를 물었다. 그녀는 손님이 많아 고되어 못살겠다고 하였다. 스님은 손님이 끊어지게 하려면 집 앞에 있는 거북바위의 꼬리가 집 쪽으로 향하도록 돌려놓으라고 하였다. 그녀가 어른들 몰래 하인을 시켜 거북바위의 방향을 틀어놓은 뒤로 손님이 끊어지기 시작하였다. 그 뒤에 그 집이 망하고, 그 집터에 물이 괴어 의림지가 되었다고 한다. 이것은 풍수설화의 ‘거북 모티프’를 받아들여 의림지의 유래를 설명하는 이야기이다.

 

   위의 두 이야기처럼 의림지의 유래를 설명하는 이야기가 있는가 하면, 이 저수지의 영검성을 설명하는 이야기도 있다. 옛날에 의림지에 사는 큰 이무기가 이웃 마을에 나타나서 사람이나 가축을 해치는 일이 일어나곤 하였다. 조선 선조 때에 제천에 장사인 어(魚) 씨 오형제가 살았다. 어느 날, 이들이 의림지 이쪽에서 놀다가 담배를 피우려고 하는데, 불이 없었다. 그때 의림지 건너편 산기슭에 나무꾼이 앉아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이를 본 맏형이 담뱃대에 담배를 담아 상투머리에 꽂고 헤엄쳐 건너갔다. 그가 담뱃대에 불을 붙여 다시 머리에 꽃은 뒤에 헤엄쳐 건너올 때 물속에서 커다란 이무기가 솟아올라 그를 쫓아왔다. 그가 요리조리 피하며 헤엄쳐서 뭍으로 올라오자, 이무기는 꼬리로 그를 쳤다. 그는 잽싸게 몸을 피한 뒤에 동생들과 힘을 합하여 이무기를 죽였다. 그 뒤로 이무기가 가축이나 사람을 해치는 일이 없어졌다. 이를 노래한 김이만(金履萬)의 「어장사 참사가(魚壯士斬蛇歌)」가 전해지고 있다(제천시홈페이지 참조). 이것은 의림지의 영검성을 드러내려고 ‘사신(蛇神) 모티프’를 받아들여 꾸민 이야기이다. 이런 이야기를 나누며 걷다 보니, 전설 시대에 온 듯한 기분이 들었다.

 

   저수지의 동북쪽 끝에 이르니, 고목 곁의 큰 바위 위에 ‘우륵정(于勒亭)’이 있고, 동쪽으로 난 도로 건너편의 산기슭에는 ‘우륵샘’이 있다. 이 지역에는 옛날부터 “신라 진흥왕(534~576) 때에 우륵(于勒)이 돌봉재[石峯]에 살면서 제비바위[燕子岩]에 와서 가야금을 탔다. 유적으로는 우륵당 옛터와 우륵정이 있었다.”는 말이 전해 왔다. 그래서 “우륵정은 의림지 동북쪽 벼랑에 있다.”고 한 <<조선환여승람(朝鮮寰輿勝覽)>>의 기록을 바탕으로 하여 우륵정을 세우고, 약수가 나오는 우륵샘을 정비하였다. 부드럽고 순한 우륵샘물을 마셔 갈증을 풀고 우륵정에 올랐다. 의림지의 전경을 살펴본 뒤에 눈을 감으니, 바람 소리와 함께 옛 악성(樂聖) 우륵의 탄금(彈琴) 소리가 들리는 듯하였다.

 

   의림지는 아름다운 풍경을 감상하며 농경문화의 역사와 전설을 체험할 수 있는 곳이다. 이러한 곳을 사랑하는 아내, 학문과 인품을 존중하여 아끼는 제자 김 교수 내외와 함께 걸을 수 있어서 매우 즐겁고 흐뭇하였다. 제천 10경 중 제1경으로 꼽는 의림지의 진면목이 그윽하고 아름다운 풍광과 함께 국내외에 널리 알려져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는 관광 명소가 되었으면 좋겠다.(2019. 4.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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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봉산 개나리

 

서울 성동구 응봉동과 금호동에 걸쳐 있는 응봉산은 봄과 희망을 상징하는 개나리꽃의 명소이다. 이른 봄에 개나리가 활짝 피어 온 산을 샛노랗게 물들이는 응봉산은 강남에서 성수대교를 건너 북쪽으로 올 때에는 산의 남쪽을 보여주고, 독서당길을 지날 때에는 북쪽의 모습을 가까이에서 보여준다. 나는 1990년대 중반에 이곳을 지나다가 개나리꽃이 활짝 피어 있는 모습을 처음 보고, 감탄하고 환호(歡呼)하였다. 그 후로 가끔 이 근처를 지나게 되었는데, 꽃이 하도 예뻐서 산 밑에 차를 세우고 올라가 개나리꽃의 아름다운 모습에 취했던 적도 있다. 이것이 인연이 되어 응봉산이 보이는 금호동의 아파트로 이사를 하였다.

 

응봉산은 해발 94m의 야트막한 산이지만, 경관이 빼어난 곳이다. 산 이름은 산의 모양이 매의 머리 모양을 닮았으므로, ‘매봉또는 응봉(鷹峯)이라고 하였다고 한다. 조선 시대에 임금이 이곳에서 매를 놓아 꿩을 잡기도 하였으므로, 산 이름을 매봉 또는 응봉이라고 하였다고 전해 오기도 한다. 조선 태조는 즉위 4(1395)에 이곳에 응방(鷹坊)’이라고 하는 관아(官衙)를 설치하고, 매사냥에 쓸 매를 사육하는 일을 맡아 보게 하였다. 태종·세종도 이곳에 와서 매사냥을 즐겼다. 조선 태조 때부터 성종 때까지 100여 년 동안 이곳에 와서 151회나 매사냥을 했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이곳은 매사냥터로 이름이 있던 곳임을 알 수 있다.

 

응봉산에 개나리를 심은 것은 1980년대 개발 이후 산자락의 흙이 흘러내리는 것을 막기 위해서였다. 서울시는 1987년에 88서울올림픽을 앞두고, 조림사업의 일환으로 1만 그루의 개나리를 심었다. 응봉산은 암반층으로 이루어진 바위산이이어서 땅이 기름지지 못하고, 몹시 메마른 곳이다. 개나리는 이런 땅에서 잘 자랄 수 있는 수종(樹種)이어서 심은 것이다. 그런데 지금은 봄이면 많은 사람들에게 기쁨과 희망을 안겨주는 개나리 명산이 되었다. 응봉산 동쪽에는 석재(石材)를 채취하던 바위 절벽이 있다. 지금은 이곳을 손질하여 인공암반등반시설을 설치하였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수시로 찾아와 등반 훈련을 하면서 체력 증진에 힘쓴다.

 

서울 성동구에서는 1997년부터 응봉산에 개나리가 활짝 피는 3월 말부터 4월 초순 사이에 개나리축제를 연다. 개나리축제 때에는 어린이 그림그리기대회, 글짓기대회, 사진전시회, 노래자랑, 먹거리장터 등이 열리는데, 많은 사람들이 와서 봄기운에 마음껏 취하며 즐긴다.

 

    응봉산은 내가 사는 아파트에서 마주 보이는 산이어서 거실에서 산색(山色)이 어떻게 변하는가를 알 수 있다. 2014년은 터키에서 4년을 보내고 돌아온 후 처음 맞는 봄이어서 화신(花信)을 전해 주는 응봉산의 개나리가 어떤 모습일까 궁금하여 가끔씩 응봉산을 바라보곤 하였다. 320일 아침, 거실에서 응봉산을 바라보니, 나뭇가지에서 노란색이 조금 보이는 듯하였다. 반가운 마음에 달려가 보니, 개나리의 가지마다 노란 꽃망울이 맺혀 있다. 하루 이틀 지나는 동안 노란빛은 조금씩 짙어졌다. 꽃샘추위에 잔뜩 움츠리고 있던 꽃망울들이 예쁜 미소를 보이기 시작하였다.

 

  며칠 뒤 아내와 함께 다시 응봉산에 가니, 온 산이 샛노란 개나리와 막 피어나는 목련, 벚꽃이 어우러져 새 봄의 아름다움을 한껏 자랑하고 있다. 터키에 가 있는 4년 동안 봄이면 개나리가 활짝 핀 응봉산의 모습을 떠올리며 보고 싶어 하였다. 그동안 보지 못하였던 꽃들이 환한 미소로 반겨준다. 응봉산의 개나리는 나에게 새봄의 정취를 마음껏 느끼게 해 주고, 한국에 와서 다시 봄을 맞게 된 기쁨을 맛보게 해 주었다.

 

  응봉산 정상에 있는 팔각정에 올라 북서쪽을 보니, 대현산과 금호산이 보이고, 그 뒤로 남산타워가 보인다. 남쪽으로는 바로 앞에 서울숲이 있고, 그 옆으로는 중랑천이 흘러와 한강 본류의 큰 물줄기와 만나는 모습이 보인다. 한강 건너로는 무역센터·잠실주경기장·역삼동 스타빌딩·압구정동 아파트 등의 건물이 보이고, 그 뒤로 관악산·청계산·우면산이 눈에 들어온다. 성수대교와 영동대교, 동호대교, 강변북로와 동부간선도로, 응봉교와 두무개길을 연결하는 입체도로에는 차들이 꼬리를 물고 달린다. 유유히 흐르는 물줄기와 힘차게 달리는 차들을 보니, 활기가 넘쳐나 역동적인 힘을 느끼게 한다. 팔각정에서 보는 서울의 경관은 정말 멋지고 아름답다. 응봉산을 서울 남부조망의 명소, 별자리 관찰의 명소로 꼽는 이유를 알 것 같다.

 

  집으로 오기 위해 독서당길 위에 놓은, 응봉산과 금호산을 잇는 구름다리를 건너 우리 아파트 뒤쪽에 있는 대현산으로 향했다. 독서당공원과 대현산에도 개나리꽃과 벚꽃을 비롯한 여러 꽃들이 환한 미소로 우리를 맞는다. 대현산을 거쳐 집으로 온 뒤에 거실에서 다시 응봉산을 건너다보았다. 응봉산의 개나리꽃들이 자기들의 예쁜 모습이 변하기 전에 다시 오라고 손짓하는 듯하다. 작은아들 내외와 손녀들이 오면, 이들과 함께 다시 가야겠다. 꽃이 지기 전에 애들이 와야 할 텐데······.

                            <성동문학 제19, 서울: 성동문인협회, 2019. 10.에 수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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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세미티 공원의 증기기관차

 

  지난 10월 하순에 아내와 함께 딸을 만나러 LA에 갔다가 삼호관광에서 모집하는 관광단에 끼어 요세미티(yosemite) 국립공원을 탐방하였다. 이 공원은 미국의 서부 캘리포니아 주 시에라네바다 산맥(Sierra Nevada Range) 중간에 있는 산악지대로, 빙하(氷河)의 침식으로 생성된 계곡과 폭포, 숲이 어우러져 있는 곳이다. 1984년에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이 공원은 연간 약 400만 명의 관광객이 찾는 관광명소이다. 이 공원의 면적은 약 4,046( 12 )에 이른다고 하니, 그 면적이 얼마나 넓은지를 짐작할 수 있다.

 

  요세미티 공원이 자리한 시에라네바다 산맥의 아래쪽은 초원지대로, 백인들이 이주해 오기 전에는 인디언들이 버펄로(buffalo, 아메리칸 들소)와 함께 평화롭게 살던 곳이었다. 백인 이주민들은 처음에는 원주민들과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며 살았으나, 그들이 버펄로의 가죽과 뿔을 취하기 시작하면서 사이가 나빠졌다. 그 후 백인 기병대가 와서 원주민들을 죽이기 시작하자, 원주민들은 백인을 보면, ‘요세미티!’라고 소리치면서, 산으로 도망하였다. 이로 인해 미친 곰이란 뜻을 가진 요세미티가 이 공원의 이름이 되었다고 한다.

 

  우리는 전날 오후에 이 공원과 가장 가까운 도시인 프레즈노 시로 갔다. 홀리데이 인(Holiday Inn)에서 숙박한 우리는 아침 715분에 버스에 올라 요세미티 공원으로 향하였다. 공원 가까이 오자 버스는 화강암으로 된 바위산 사이로 난 길을 따라 달렸다. 길 좌우에는 쭉쭉 뻗은 아름드리나무들이 빽빽하게 서 있는 숲이 이어졌다. 버스는 이 공원의 특색은 우거진 숲과 화강암이라고 한 가이드의 말이 실감나는 풍경을 보여주며 계속 달렸다.

 

  우리는 오전 930분에 증기기관차 승강장에 도착하였다. 이 공원에서 운행하는 증기기관차는 전에 나무를 베어 나르던 기차인데, 지금은 관광열차로 이용하고 있다. 증기기관차 한 량()이 천장을 덮지 않은 객차 두 량과 천장을 막은 객차 한 량을 끌었다. 증기기관차에 성조기와 함께 태극기가 꽂혀 있는 것을 보니, 반가웠다. 이곳을 찾는 한국인이 많은 모양이다. 객차에 올라보니, 두어 아름쯤 되는 통나무를 자로 깎아 만든 긴 의자 두 개가 마주보고 있다. 석 량의 객차에는 우리와 함께 온 한국인 90여 명과 외국인 관광객 20여 명이 탑승하였다

 

  증기기관차는 증기를 뿜어 올리면서 천천히 밀림 속으로 달리기 시작하였다. 증기기관차 특유의 소리를 내면서 달리다가 커브를 돌 때에는 기적(汽笛)을 울렸다. 굽은 길을 달릴 때에 보니, 기관차의 아래쪽에서 붉은 불꽃이 타오르고 있다. 요즈음에는 보기 드문, 증기기관차가 끄는 객차를 타고, 아름드리나무들이 빽빽하게 서 있는 밀림을 달리니, 나도 모르게 흥분이 되고 가슴이 뛰었다. 열차는 20분쯤 달린 뒤에 숲속에 정차하였다. 객차에서 내린 아내와 나는 밀림 속에서 상쾌한 공기를 마음껏 마시면서 아늑하고 평안한 분위기를 만끽(滿喫)하였다. 탑승을 알리는 기적이 울리자 밀림의 정취(情趣)에서 벗어나는 것을 아쉬워하며 객차에 올랐다. 객차는 다시 10분쯤 달려 출발지점에 도착하였다.  

 

  증기기관차 승강장 둘레의 넓은 지역에 하늘을 찌를 듯한 기세로 빽빽하게 들어서 있는 나무는 대부분 수가파인(Sugarpine)과 잎에 Y자 모양이 있는 ‘Y편백나무이다. 수가파인은 솔잎이 6개이고, 솔방울은 매우 커서 웬만한 크기의 파인애플과 비슷하다. 곧게 자란 수가파인과 와이편백나무는 둘레가 한 아름이 넘어 보이고, 키는 2030m는 족히 될 듯하다. 이런 숲속에 놓인 선로를 따라 달리는 열차를 타고 밀림을 둘러보았다는 사실이 꿈만 같다.

 

  열차 관광을 마친 우리는 승강장 앞에 있는 야외식당에서 점심식사를 하였다. 줄을 지어 서서 햄버거와 쿠키, 삼호관광에서 특별히 준비해 온 농심의 신라면을 받아 야외식탁에서 먹었다. 즉석에서 고기를 구워 넣어주는 햄버거도, 뜨거운 물을 부어 먹는 컵라면도 정말 맛있었다. 같은 식탁에 앉았던 동행들도 아주 맛이 좋다고 하였다. 세계적으로 이름난 요세미티 공원의 울창한 숲속에서, 맑은 공기를 마시며, 즐거운 마음으로 먹었기 때문에 더 맛있게 느껴진 것 같다. 식사를 마친 뒤에 마시는 커피의 그윽한 맛고 향 또한 잊을 수 없다.

 

  우리는 다시 버스에 올라 숲을 가로지르는 왕복 2차선 도로를 한참 달려 입장료를 내는 곳(Nation Park Service)에 이르렀다. 버스 1대 입장료 300 달러를 내고, 한 시간 가량을 더 달려 주차장에 도착하였다. 버스에서 내려 약 두 시간 동안 천천히 걸으며 요세미티 계곡, 세계 최대의 화강암 바위인 엘 카피탄(El Capitan), 미국 최대의 낙차를 자랑하는 요세미티 폭포 등을 둘러보았다. 바위로 이루어진 산과 골짜기의 웅장하면서도 다양한 모양의 바위와 주변의 나무들이 조화를 이루어 장엄한 아름다움을 보여주었다.

 

  공원의 곳곳에는 타다 남은 나무들이 그대로 있어 작년 여름에 있었던 산불의 흔적을 보여주고 있다. 이 공원은 수많은 나무들이 광합성작용을 하므로, 산소 농도가 매우 높아 공기가 맑고 상쾌함을 느끼게 해 준다. 그러나 기온이 올라가는 여름날에는 뜨거운 햇볕의 작용 또는 나무끼리의 마찰로 인해 산불이 일어나는 일이 잦다고 한다. 침엽수가 자라던 곳에서 불이 나서 모두 타고 나면, 그 자리에서 활엽수가 나서 자라 다시 숲을 이룬다고 한다. 이곳에서는 산불이 나면, 숲이 워낙 넓어서 진화하기 힘들 뿐만 아니라 인명 피해 걱정이 없기 때문에 진화에 온힘을 기울이지 않고, 자연의 섭리(攝理)에 맡긴다고 한다. 우리나라에서 산불이 나면 되도록 짧은 시간에, 완전히 진화하려고 온 힘을 기울이는 것과 대조를 이룬다.

 

  공원 탐방을 마친 우리는 아쉬움을 안고 다시 버스에 올랐다. 버스는 들어갈 때와는 달리 북서쪽 길을 달려 내려왔다. 차창 밖을 보니, 소나무와 편백나무는 진녹색을 자랑하며 하늘을 찌를 듯한 기상으로 서 있지만, 활엽수는 노랗게 물들어 가을이 왔음을 실감하게 한다. 나는 오늘의 탐방에서 깊은 감동과 감격을 느꼈으므로, 10여 년 전에 왔을 때 충분한 시간을 갖지 못해 아쉬웠던 마음이 다 풀렸다. 그러나 전에 왔을 때에 다음에 다시 오겠다는 다짐과 기대를 안고 발길을 돌리던 것과는 달리 인생의 가을을 맞은 내가 이곳에 다시 오기는 어려울 것 같다는 마음이 발걸음을 무겁게 하였다.(2019. 12.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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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국 서부 지역에는 경관이 빼어난 협곡 즉 캐년(Canyon)이 여러 곳 있다. 캐년은 붉은 사암층이 수만 년 동안 물의 침식작용에 의해 형성된 좁고 깊은 골짜기를 말한다. 로스앤젤레스에 있는 한인(韓人) 관광회사들은 여러 캐년 중 경관이 빼어난 다섯 곳을 골라 관광객을 모집하여 단체관광을 하고 있다. 나는 지난 10월 하순에 아내와 함께 딸을 만나러 LA에 갔다가 삼호관광에서 모집하는 관광단에 끼어 5대 캐년을 탐방하였다.

 

            그랜드 캐년(Grand Canyon)

   애리조나 주에 있는 그랜드 캐년은 미국 국립공원 중 가장 규모가 크고 웅장하다. 세계적으로 널리 알려져 있어 많은 사람들이 죽기 전에 꼭 가 볼 곳 제일순위로 꼽히는 곳이다. 그동안 한국인이 다녀간 수만 하여도 800만 명이 넘는다고 한다. 이 지역에는 원래 원주민인 아파치족이 살았는데, 스페인 사람이 이곳을 서방세계에 알렸다. 이 협곡을 처음 발견한 스페인 사람은 이곳의 웅장하고 거대한 모습을 보고, 스페인어로 그랑데(거대하다)라고 하였다. 이 말이 영어로 바뀌니 그랜드(grand)가 되어, ‘그랜드 캐년이라고 한다.

 

   그랜드 캐년은 아주 오랜 역사를 가진 협곡으로, 지질학의 교과서와 같은 곳이다. 이곳은 길이 약 470km, 평균 넓이 약 16km, 깊은 곳의 깊이 약 1,700m라고 하니, 정말 거대한 협곡이다.

 

   이곳의 탐방로는 콜로라도 강을 사이에 두고 사우스 림(South Rim)노스 림(North Rim)으로 나뉜다. 나는 남쪽 포인트로 가서 기묘한 바위들로 이루어진 협곡의 웅장하며 위엄 있는 광경을 보며 크게 감탄하였다. 20013월에 처음 갔을 때에는 장엄한 광경에 가슴이 뛰는 벅찬 감동을 느꼈었다. 이번에는 그 때처럼 가슴이 뛰는 감동을 느끼지는 못하였으나, 장대한 광경에 감탄하고, 또 감탄하였다. 더 오래 보고 싶었지만, 다음날 아침에 콜로라도 강과 그랜드 캐년의 장엄한 광경을 하늘에서 보기로 하고 발길을 돌렸다.

 

   이튿날 아침 일찍 관광용 경비행기 탑승장으로 갔다. 탑승권을 구입하여 체크인(check-in)하고, 대합실에서 김밥으로 아침 식사를 하며 대기하였다. 그런데 출발 예정시간 임박하여 날씨관계로 경비행기 운행을 중단한다고 하였다. 그래서 쉬운 마음을 안고 발길을 돌려 다음 목적지로 향했다.

 

 

                  자이언 캐년(Zion Canyon)

   자이언 캐년은 유타 주에 있는 협곡이다. 이곳에는 웅장하면서 기묘한 바위들이 많다. 그래서 신들이 노니는 곳이란 뜻으로 자이언(Zion)이라고 이름하였다.

 

   차를 타고 꼬불꼬불한 산길을 달리면서 길 양편에 이어지는 바위들의 모습을 보았다. 한참 올라간 뒤에 길옆에 차를 세우고 협곡의 장관을 내려다보면서 사진을 찍었다.

앞을 건너다보니, 큰 바위를 깎아내리면서 돌로 온갖 기묘한 모양을 만들어 붙이고, 사이사이에 문양(紋樣)을 넣은 것 같은 바위비탈이 이어 서 있다. , 시루떡을 켜켜이 쌓아놓은 것처럼 보이는 바위산도 이어져 있다. 비탈진 바위를 뚫고 뿌리를 내려 살고 있는 크고 작은 나무들을 보면서 나무의 끈질긴 생명력에 감탄하였다. 이런 협곡을 바라보고 있으니, 신비스런 분위기가 느껴지는 듯하다.

 

   이곳은 아주 먼 옛날에 바위산이 바다에 잠겨 있으면서 침식작용을 일으켜 이런 장관이 되었다고 한다. 지금 해발 약 2,800m나 되는 이곳이 바닷물에 잠겼었다니, 상상하기 어렵다.

 

 

 

                   브라이스 캐년(Bryce Canyon)

        브라이스 캐년은 유타 주에 있는 계단식 분지 형태의 협곡이다. 선셋 포인트(sun set point)로 가서 협곡을 내려다보았다. 이암(泥巖)과 사암(砂巖)으로 된 붉은 색 바위들이 첨탑(尖塔)처럼 높이 솟아오르며 기묘한 모양을 뽐내고 있다. 이곳을 첨탑의 향연이 펼쳐지는 곳이라고 하는 말이 허언이 아님을 알겠다.

 

   나바흐 루프(Navajo loop)로 내려갔다가 올라오면서 기묘한 바위들의 모습을 살펴보았다. 어떤 바위는 굉장히 큰 빌딩과 같은 모습을 보이고, 어떤 것은 첨탑처럼 하늘로 뾰족하게 솟아오르며 멋진 모습을 뽐낸다. 어떤 것은 수수하고 소탈한 모습을 보이고, 어떤 것은 섬세한 조각가가 만들어 놓은 것과 같이 정교하고 아름답다. 모두 다 경이롭기 짝이 없다.

 

             

           모뉴먼트 밸리(Monument Valley)

   유타 주 남부로부터 애리조나 주 북부에 걸쳐 있는 협곡이다. ‘메사(mesa, 원래 평평한 평지였으나 단단한 표면의 지층은 부식되지 않는 반면, 부식이 잘 되는 약한 부분은 물에 씻겨 내려가면서 단단한 표면은 상대적으로 주위보다 높은 언덕)라고 하는 테이블 모양의 바위가 여러 곳에 솟아 있는 곳이다.

 

   이곳은 인디언 보호구역으로, 원주민들의 생활 모습을 보여주는 곳이다. 원주민들이 운행하는 16인승 지프(geep)차를 타고, 흙먼지가 이는 길을 15분쯤 달려 계곡 안으로 들어갔다. 거기서는 원주민들의 생활용구와 관광용품을 전시판매하고 있었다.

 

   주위에는 세 자매바위’, ‘낙타바위를 비롯하여 이름 있는 큰 바위들이 곳곳에 있다. 이곳은 이런 바위들이 마치 기념비(monument)가 줄지어 있는 듯하다 하여 모뉴먼트 밸리(Monument Valley)라고 이름하였다. 이곳에서 <추적자>를 비롯한 여러 편의 서부영화가 촬영되었다고 한다.

 

 

                   안텔로프 캐년(Antelope Canyon)

   안텔로프 개년은 애리조나 주 파웰 호(Powell Lake) 근처에 있다. 콜로라도 강이 만든 예술품으로, 붉은 사암층(砂巖層)이 수만 년 동안 물의 침식작용에 의해 형성되었다. 1980년대 말부터 사진작가들이 모여 자유롭게 사진을 찍기 시작하였는데, 그 뒤로 널리 알려져 관광객이 모여들기 시작하였다.

 

   이곳은 인디언보호구역에 위치한 지하협곡(under canyon)으로, 탐방길이 복잡하다. 그래서 원주민들이 운영하는 두 개 관광회사에 소속된 가이드의 안내를 받아야 들어갈 수 있다. 우리는 켄스 투어(kens Tour)에 탐방 신청을 하였다. 15명이 한 조가 되어 원주민인 나바오 족 청년의 안내를 받았다.

 

   나는 설레는 마음으로 평지를 300m쯤 걸어간 뒤에 동굴 입구에서 철제 계단을 밟고 지하로 내려갔다. 20여 계단을 내려간 뒤에 바위 사이로 난 좁은 길을 이리저리 돌아 걸으며 바위들의 모습을 살폈다. 건물 34층 높이의 바위들은 깎아지른 듯이 곧게 또는 비스듬히 서 있기도 하고, 소라껍질 속처럼 둥글게 파인 채 서 있기도 하였다. 사람이나 동물의 모습을 연상하게 하는 바위도 있다. 이런 바위들은 바위틈으로 들어오는 햇빛이 비치는 각도에 따라 여러 가지 색으로 보였다. 같은 바위도 바라보는 위치에 따라 색감이 다르다. 눈으로 볼 때와 사진기에 찍어서 볼 때도 색이 다르게 보인다. 참으로 신기하다. ‘자연의 신비, ‘빛의 마술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를 안내하는 인디언 가이드는 앞장서서 걷다가 사진 촬영하기 좋은 곳에서는 멈춰 서서 사진을 찍으라고 하고, 직접 찍어 주기도 하였다. 지하협곡을 탐방하는 시간은 정말 즐겁고 황홀하였다. 그런데 철판으로 된 계단을 밟고 지상으로 올라오니, 조금 전에 지하에서 보던 황홀한 광경은 어디에도 없었다. 지하로 내려가기 전에 보던 광경 그대로였다. 아쉬움이 밀려온다. 남가일몽(南柯一夢) 고사에 나오는 주인공이 꿈을 깬 뒤에 느꼈을 허망함도 이와 같았을까!

 

나는 5대 캐년의 풍광을 보는 동안 놀라움과 감탄이 연속되었다. 이런 장관은 이 세상의 예술가들이 모두 힘을 합쳐도 만들 수 없을 만큼 웅장하면서도 섬세하고 기묘하며, 아름답고 신비롭다. 이런 장관이 생긴 것은 메사 지질의 특성과 강의 침식작용에 의한 것이라고 한다. 이것은 협곡이 생긴 내력을 설명하는 이론일 뿐이다. 대자연의 예술품이 생긴 내력이 이런 말로 다 설명되지는 않는다. 나는 이를 위대한 신의 예술품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신비로운 신의 예술품을 감상할 기회를 갖게 된 것을 감사하며, 많은 사람들이 감상할 수 있도록 잘 보존되기를 바란다. (2018. 11.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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