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 친구들과 서울시 성북구 아리랑로 19길 116(정릉동)에 있는 정릉(貞陵)을 찾았다. 정릉은 조선의 태조 이성계의 계비(繼妃)인 신덕왕후(神德王后) 강씨(康氏)의 능이다. 서울 강남구 삼성동에 있는 정릉(靖陵)은 조선 11대 중종의 능으로, 한글 음은 같으나 한자가 다르다. 정릉(貞陵)에 들어가 보니, 토요일 오전인데도 탐방객이 많지 않아 조용하였다. 능은 입구부터 정결하게 정리되어 있고, 능 둘레의 나무와 풀은 새잎이 돋아 연초록의 아름다움을 자랑하고 있다. 신록(新綠)이 꽃보다 아름답다는 말을 실감하게 하였다. 나는 신록 사이로 난 능 둘레의 산책로(2.5km)를 걸으며 능의 주인공인 신덕왕후 강씨와 태조 이성계(李成桂), 태조의 다섯째 아들로 나중에 왕위에 올라 태종이 된 방원(芳遠) 사이에 얽힌 사랑과 미움에 관해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정릉에 묻힌 신덕왕후 강씨는 태조 이성계의 경처(京妻)이다. 고려 시대의 벼슬아치들은 첩은 인정하지 않고, 고향에 둔 향처(鄕妻)와 개성에 둔 경처(京妻)를 똑같이 처로 인정하였다. 이성계는 고려 조정에 벼슬하기 전에 함경도 영흥에서 한씨와 결혼하였다. 그리고 벼슬을 한 뒤에 권문세가(權門勢家)인 강윤성(康允成)의 딸과 혼인하여 경처를 두었다. 이성계가 강씨와 만나게 된 일화가 전해 온다. 이성계가 몹시 목이 말라 우물로 가서 우물가에 있는 처녀에게 물을 청하였다. 그녀는 바가지에 물을 뜨더니, 버들잎을 훑어 띄워 주었다. 그가 이상히 여겨 연유를 물으니, 그녀는 갈증이 심할 때 급히 물을 마시다가 체할까 봐 그리 하였노라고 하였다. 그는 그녀의 지혜롭고 사려(思慮) 깊은 언행에 마음이 끌려 혼인하였다고 한다. 이성계는 한씨와의 사이에서 6남 2녀, 강씨와의 사이에서 2남 1녀를 두었다.
함경도 영흥 출신인 이성계가 고려를 뒤엎고 조선을 건국하는 데에는 당시 권문세족(權門世族)이었던 강씨 일족의 도움이 컸다. 이성계의 여섯 아들도 창업을 도왔지만, 가장 큰 역할을 한 것은 총명하고 재능이 있으며 정치적 욕망이 큰 다섯째 아들 방원이었다. 방원은 지혜롭고 정치적 감각이 뛰어난 강씨와 힘을 합하여 이성계의 조선 창업에 많은 공을 세웠다. 이성계가 창업에 성공하여 왕위에 오르자 강씨는 왕비로 책봉되어 신덕왕후가 되었다. 한씨는 조선을 개국하기 한 해 전인 고려 공양왕 3년(1391)에 사망하였으므로, 신덕왕후는 조선의 첫 왕비가 되었다.
왕후가 된 신덕왕후는 자기가 낳은 아들이 왕위를 계승하게 하려고 하였다. 방원은 자기가 아버지의 뒤를 이어 왕이 되려고 하였다. 두 사람은 지향하는 목표가 상충되었기에 맞부딪힐 수밖에 없었다. 태조의 사랑을 받고 있는 왕후는 조정의 실세인 정도전의 도움을 받아 자기가 낳은 아들 방석(芳碩)을 세자의 자리에 앉혔다. 이것은 생사의 길을 넘나들며 공을 세우고, 정치적 욕망을 키워온 방원으로서는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 앞길을 막는 장애물을 제거하지 않고는 자기의 뜻을 펼 수 없게 된 방원은 제1차 왕자의 난을 일으켜 세자로 책봉된 방석을 비롯한 비호세력을 제거하였다.
신덕왕후가 1396년 병으로 세상을 떠나자 태조는 크게 슬퍼하며 능역(陵域)을 황화방(皇華坊, 지금의 정동)에 정하였다. 그는 왕후의 봉분 오른쪽에 자신의 수릉(壽陵, 죽기 전에 미리 만들어 두는 임금의 무덤)을 정하고, 능호(陵號)를 ‘정릉’으로 정하였다. 그리고 그 동쪽에 재궁(齋宮) 흥천사(興天寺)를 세워 자주 행차했다. 둘째 형인 방과(芳果, 제2대 정종)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방원(제3대 태종)은 아버지인 태조가 세상을 떠나자, 신덕왕후에게 품고 있던 미움과 원망을 드러냈다. 그래서 1409년(태종 9) 정릉을 사을한(沙乙閑) 골짜기로 옮겼다. 그리고 종묘에 부묘(祔廟, 삼년상이 지난 뒤에 그 신주를 종묘에 모심)하지 않고, 왕비의 제례를 폐했다. 1410년 태종은 정릉의 정자각(丁字閣)을 헐고, 정릉의 병풍석과 십이지신상(十二支神像) 등 석물을 큰비로 유실된 토교(土橋) 광통교(廣通橋)를 석교(石橋)로 개축하는 데에 사용했다. 그 밖의 석재나 목재들은 태평관(太平館)을 지을 때 부속재로 이용했다. 그래서 정릉은 일반인의 묘와 다를 바 없게 되었고, 200여 년 동안 아무도 찾지 않는 묘가 되었다.
신덕왕후가 자기의 아들을 세자에 앉혀 다음 왕위를 물려받게 하려고 한 것은 인지상정(人之常情)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그 앞에는 장성한 한씨 소생의 아들들이 여섯이나 버티고 있었다. 특히 총명하고, 정치적 욕망이 클 뿐 아니라, 많은 지지 세력과 사병(私兵)을 가지고 있는 방원이 있었다. 그녀는 이러한 엄연한 현실을 가볍게 생각하고, 욕심을 부린 것이다. 그녀가 방원의 존재를 제대로 인식하였더라면, 방석을 세자로 삼는 일을 자제하거나, 더 세심한 배려를 했어야 한다. 그렇지 못하였기 때문에 그녀는 비록 자기가 죽은 뒤이기는 하지만, 어린 두 아들과 딸을 비명에 죽게 만들었다. 그리고 자기의 무덤이 옮겨지고, 왕비의 제례도 받지 못하는 수모를 당하였다. 이것은 그녀의 지나친 정치적 욕망이 가져온 비극이다.
방원은 신덕왕후가 왕후의 지위를 이용하여 자기의 오랜 꿈을 짓밟고, 이복동생을 죽이지 않고는 꿈을 이룰 수 없는 상황을 만들어 놓은 데 대한 미움과 원망이 컸을 것이다. 그리고 이복동생을 죽였다는 오명(汚名)을 쓰고 살아야 하는 괴로움, 태조로부터 동생을 죽인 패륜아 취급을 당한 아픔은 그녀에 대한 미움과 원망을 더욱 깊게 만들었을 것이다. 그는 태조가 세상을 떠나자, 왕후의 능을 파서 옮기고, 왕후의 직첩을 빼앗았으며, 제례도 올리지 못하게 하였다. 이러한 그의 처사는 사감(私感)에서 나온 것으로, 도를 넘은 것이고, 나라의 정통성을 훼손하는 일이라는 비판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당대에는 아무도 말을 못하다가 72년이 지난 1581년(선조 14)에 드디어 삼사(三司, 임금에게 직언하던 세 관아. 사헌부, 사간원, 홍문관)에서 신덕왕후 강씨의 시호(諡號)와 존호(尊號)를 복귀하고, 정릉을 회복하자는 논의가 있었다. 그 뒤로 88년이 지난 1669년(현종 10) 송시열(宋時烈) 등이 다시 신덕왕후 강씨를 종묘에 배향해야 한다는 차자(箚子, 일정한 격식을 갖추지 않고 사실만을 간략히 적어 올리던 상소문)를 올렸다. 그래서 본격적인 복구 작업을 하여 오늘에 이르게 되었다. 장명등(長明燈, 무덤 앞에 세운 석등)과 혼유석(魂遊石, 넋이 나와 놀도록 한 돌이라는 뜻으로, 상석과 무덤 사이에 놓는 직사각형의 돌) 앞의 받침돌인 둥근 고석(鼓石)은 옛것이나 나머지는 현종 때 새로 세워진 것이다.
나는 정릉 산책로를 걸은 뒤에 홍살문을 나서면서 권력을 탐하는 사람의 말로가 어떠한가를 다시 한 번 생각하였다. 신덕왕후는 자기가 낳은 아들을 무리하게 왕위에 앉히려다가 아들을 죽게 만들었을 뿐만 아니라, 자기의 무덤이 파헤쳐지고, 왕후의 봉호가 없어졌으며, 제사가 끊기는 수모를 당했다. 방원은 왕좌를 차지하였지만, 역사에 이복동생을 죽였다는 오명(汚名)을 남기게 되었고, 아버지 태조로부터 동생을 죽인 패륜아 취급을 당하였다. 권력을 탐하는 사람은 여생이 평안할 수 없다는 평범한 이치는 예나 지금이나 다를 것이 없다. 욕심을 자제하고, 성실하게 사는 것이 말년의 평안함을 보장하는 일임을 잊지 말아야겠다. (2019. 5.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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