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터키 에르지예스대학교 한국어문학과 객원교수로 와서 한국어와 한국문학, 한국문화를 강의하고 있다. 이곳에서 3년을 지내는 동안 틈이 나는 대로 여러 곳을 여행하고, 많은 사람들을 만났다. 그 중 한국전 참전용사들과 만난 일은 잊을 수 없다.

   지난해 6월 서울장위교회 교우들과 함께 터키의 에게해 연안에 있는 작은 도시 셀축(Selçuk)에 갔을 때의 일이다. 안내자가 한국음식을 먹을 수 있다고 하여 크게 기뻐하며 식당 안으로 들어갔다. 그 식당은 터키인이 운영하는 곳인데, 한국의 비빔밥을 만들어 주었다. 며칠 동안 터키 음식만 먹어 한국 음식이 그립던 차에 비빔밥을 먹으니 아주 맛있었다. 점심 식사 후에 에페스(성경에 나오는 에베소) 유적을 돌아보려면 시간이 많이 걸리니 빨리 차에 오르라는 안내자의 독촉이 있어서 숟가락을 놓기가 무섭게 식당 밖으로 나왔다. 버스에 오르려고 하는데, 한 터키 노인이 다가와 한국어로 안녕하세요?’ 하고 인사를 하였다. 나는 시간에 쫓기기는 하지만, 반가운 마음에 얼른 한국어와 터키어로 인사를 하고, 말을 주고받았다.

   그 분은 한국어도 영어도 잘 못하셔서 터키어로 대화를 해야 하는데, 나의 터키어 실력이 엉망이니, 난감하였다. 서로 아는 단어를 총동원하여 대화를 시도하였다. 한국어, 영어, 터키어 단어를 섞어가며 말하여 그 분이 말하려는 뜻을 대강 짐작하였다.

나는 한국전쟁에 참전하였던 터키 군인이다. 나는 젊은 시절에 목숨을 걸고 싸우며 지킨 한국을 잊지 않고 있다. 그 당시에는 한국의 상황이 매우 처참하였는데, 60여 년이 지난 오늘 전쟁의 상처를 씻고 발전한 한국이 매우 자랑스럽다. 한국인들이 보고 싶어서 한국인이 많이 오는 한국음식점 앞에 왔다. 한국인을 만나니 참 기쁘다.”

그 분은 이렇게 말하면서 한국전쟁 당시에 한국에서 찍은 자기의 사진을 보여주었다. 빛바랜 흑백 사진 속에는 군복을 입은 한 젊은이가 서 있는데, 정말 미남으로 의젓하고, 듬직해 보였다. 그 분의 얼굴과 사진을 다시 보니, 그 분의 옛 모습이 그대로 보였다. 그 분은 한국에 있을 때의 일을 조금 이야기하였다. 그 때 배운 민요 <아리랑>도 안다고 하였다. 우리가 불러 보라고 하니 큰 소리로 부르는데, 음정과 박자를 맞춰 아주 잘 불렀다. 우리들이 <아리랑>을 함께 부르니, 그 분은 신명이 나서 더 힘껏 불렀다. 우리는 그 분과 함께 <아리랑>에 이어 <도라지 타령>도 불렀다. 그 분은 흥이 나서 가볍게 춤을 추면서 노래를 불렀다. 그 분의 표정엔 흥분과 기쁨, 흐뭇함과 감동이 교차되어 나타났다. 내가 그 당시에 터키 군인들이 불러서 한때 한국에서 유행하였던 터키 민요 <위스크다르>를 시작하니, 그 분은 그 노래를 어찌 아느냐는 표정을 지으면서 큰 소리로 불렀다. 나는 그 노래를 어렸을 때 많이 들었는데, 처음 부분만 알고 중간 이후는 잘 몰라 함께 부르지는 못하고, 손뼉을 치며 흥을 돋우었다. 식당 앞에서 노랫소리가 들리니 지나가던 사람들이 발걸음을 멈추고 서서 구경하였다. 우리는 함께 사진을 찍고 나서 한국인은 한국전쟁 때 우리를 도와준 터키를 잊지 않고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오래 오래 건강하세요.” 하는 인사를 하고, 버스에 올랐다. 그 분은 만나서 반가웠다는 말과 고맙다는 말을 되풀이하면서 내게 작게 접은 종이쪽지를 주었다.

    버스에 올라 그 분이 내게 준 종이쪽지를 펴 보았다. 그것은 자기의 이름과 주소를 서툰 글씨로 써서 복사한, 명함 두 배 크기의 종이였다. 거기에는 두르무쉬 알리 지빌(Durmuş Ali Civil)’이라는 자기의 이름과 ‘Belediye Huzur Evi Md. Selçuk İzmir’라는 집 주소가 씌어 있었다. 나는 그 종이를 보며 나이 들어 한국전쟁에 참전하였던 일을 생각하며 한국인을 만나보고 싶어 한국음식점 앞으로 나온 그 분의 심정을 조금은 알 것 같았다. 오후 일정에 쫓겨 그분과 시간을 더 나누지 못하고 작별한 것이 아쉽고, 미안하다. 우리를 만난 기쁨과 바로 헤어져야 하는 아쉬움을 얼굴 가득 보이며 우리가 탄 버스가 멀어질 때까지 손을 흔들며 서 있던 그 분의 모습이 자꾸만 눈에 어린다.

    서기 1950625일에 북의 남침으로 시작된 한국 전쟁은 참혹하기 짝이 없었고, 대한민국의 존립 자체를 위협하였다. 이 때 우리를 도와주어 나라를 지키게 한 것은 유엔군이었다. 유엔군을 파견한 나라는 16개국인데, 그 중에 미국,영국,캐나다에 이어 네 번째로 많은 군인을 보내준 나라가 터키이다. 한국전쟁에 참전한 터키 군인의 수는 15,090명이다. 그 중 741명이 전사하였고, 2,068명이 부상을 당하였으며, 407명이 실종되었거나 포로가 되었다. 그래서 모두 3,216명의 인명 피해를 입었다(터키 문화원 자료 참조). 한국과 터키의 거리는 약 8,000km로 아주 먼 나라이다. 먼 곳에서 한국을 도와준 터키는 정말 고마운 나라이다.

   한민족과 터키 민족(한자어로 돌궐족)은 아주 먼 옛날 중앙아시아 지역에서 이웃하여 살던 민족이다. 삼국 시대만 하여도 돌궐족은 고구려와 이웃하여 살면서 중국이 침략할 때에는 서로 돕던 민족이다. 그 후 돌궐족은 서남쪽으로 이동하여 일부는 중국의 신강 지방에 정착하고, 일부는 이동을 계속하여 아나톨리아 반도(지금의 터키)에 자리 잡았다. 먼 옛날에 이웃하여 서로 도우며 살던 한민족과 터키 민족이 현대에는 대한민국과 터키공화국을 세우고 살고 있다. 한국에 전쟁이 일어나자 터키는 먼 길을 마다하지 않고 달려와 도와주었다. 이런 점을 생각하면, 한국과 터키는 형제의 나라라고 하는 말이 빈 말이 아닌 것 같다.

   나는 터키에 와서 지내면서 한국전쟁에 참전하였던 분들이나, 그 가족들이 어떻게 지내는가 알고 싶고, 그 분들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하고 싶었다. 그래서 참전용사회관을 방문하고, 한국전쟁 참전용사를 만났으며, 참전용사 자손들도 만나 보았다. 참전용사 중에는 한국의 초청으로 한국에 다녀온 분들도 있고, 한국에 가보지 못한 분들도 계셨지만, 전쟁 당시의 참혹하였던 모습과 함께 한국의 발전상을 아는 대로 이야기하였다. 그분들은 한국전쟁에 참전하였던 것을 큰 자랑으로 여기고 있으며, 한국의 눈부신 발전에 놀라움과 함께 큰 보람을 느낀다고 하였다. 참전용사들은 한국 정부로부터 받은 감사장을 소중히 간직하고, 자손들에게 한국은 형제의 나라임을 강조한다고 하였다. 그분들은 한국인들과 만나 이야기하는 것을 좋아하였는데, 그 분들과 정겨운 대화를 나누지 못한 것이 아쉽고 미안하다.

   나는 얼마 전에 셀축에서 아리랑을 함께 부르던 어르신께 우리 일행과 함께 찍은 사진을 인화하여 그 분이 적어준 주소로 우송하였다. 그 분은 그 사진을 보며, 우리와 함께 부르던 한국민요 <아리랑><도라지 타령>, 한국에서 부르던 터키 민요 <위스크다르>를 다시 흥얼거리며 한국을 마음속에 떠올릴 것이다. 그분이 오래오래 건강하게 사시면서 한국에 대한 좋은 소식을 많이 들으시기를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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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을 비롯한 여러 나라에는 기독교 교회가 참으로 많다. 나는 여행을 하면서 교회를 볼 때마다 ‘이 세상에서 가장 먼저 생긴 교회는 어디에 있는, 어느 교회일까?’를 생각한 적이 있다. 그런데 터키에 와서 여행 안내서를 보던 중 ‘터키 안타키야(Antakya)에 있는 성 베드로 동굴교회가 세계 최초의 교회’라는 글을 읽었다. 그래서 얼른 지도를 펴고 안타키아를 찾아보니, 터키의 남동쪽 해안 끝에 있다. 학생들에게 물으니, 버스를 타고 12~13 시간 걸려야 갈 수 있다고 하였다. 주말을 이용하여 갔다 오기에는 먼 곳이어서 방학에 가기로 하고 미뤄 두었다.

   2010년 봄 학기 강의가 끝난 6월 하순에 우리 부부는 양 교수, 김 교수와 함께 밤에 출발하는 버스를 타고 10여 시간을 달려 이른 아침에 이스켄데룬(Iskenderun)에 도착하였다. 이스켄데룬은 옛날에 알렉산더 대왕이 이곳을 지난 것을 기념하여 붙인 이름이라고 한다. 버스 터미널로 마중 나온 2학년 학생 일카이 양을 만나 그곳에서 하루를 지내며 이스켄데룬 시내와 박물관을 구경하고, 지중해 바닷가에 난 길을 따라 산책하였다. 지중해의 물에 손을 담가 보기도 하고, 남국의 정취가 물씬 풍기는 바닷가 길을 걸으며 아름다운 경치를 마음껏 감상하였다.

  그 다음날 오전 10시쯤 일카이 양 언니의 약혼자가 운전하는 차를 타고 안타키아로 향하였다. 이스켄데룬에서 안타키아는 차로 3시간 쯤 걸린다. 좀 가파른 산길을 달리며 보니, 길 양편 산에 올리브 나무가 숲을 이루고 있다. 더 남쪽으로 가니, 끝없이 펼쳐지는 넓은 밭에 옥수수가 자라고 있다. 시리아와의 국경에 쳐 놓은 철조망을 지나 달리니, 옥수수밭과 목화밭이 번갈아가며 이어진다. 올리브나무가 숲을 이루고, 끝없이 펼쳐지는 농토를 가진 터키가 부럽다.

   안타키아(Antakya)는 터키의 남동쪽 해안에 위치한 도시로, 인구는 약 20만 2천명이라고 한다. 안타키아는 성경에 나오는 ‘안디옥’이다. 옛 이름이 ‘하타이(Hatay)’여서 지금도 하타이라고 부르는 사람이 많다고 한다. 성경에 나오는 안디옥은 두 군데이다. 하나는 비시디아 안디옥인데, 터키 내륙 지방에 있는 지금의 얄바치(Yalvaç)로, 아피욘카라히사르(Afyonkarahisar)와 콘야(Konya)의 중간쯤에 있다. 다른 하나는 수리디아 안디옥으로 지금의 안타키야이다.

   이곳은 기원전 2,000년경까지 시리아의 아무트 왕국이 통치하였다. 기원전 17세기경에는 히타이트의 지배를 받았는데, 히타이트가 망한 뒤에는 앗시리아와 페르시아가 다스렸다. 기원전 333년 이 곳에 왔던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더 대왕은 물맛에 감동하여 이곳에 도시를 건설하고 싶어 하였다. 알렉산더 대왕이 세상을 떠난 후 그의 무장(武將)이었던 셀레우코스 1세(Seleukos I Nikator, B.C. 304~280 재위)가 이곳을 지배하였다. 그는 이곳에 안티오키아 왕국을 건설하고, 안타키아를 수도로 정하였다. 그는 이곳의 이름을 그의 아버지 안티오코스를 기념하는 뜻에서 안티오케이아로 명명하였다. 이곳은 물이 풍부한 다프네(하르비예)에 가깝고, 오론테스(Orontes, 아시) 강을 끼고 있어서 크게 발전하였다. 그러나 소왕국의 난립과 전쟁으로 피폐해졌고, 1세기 중반에 로마에 병합되었다. 그 후 시저에 의해 재건되어 상업, 교육, 문화의 도시로 발전하였다.

   안디옥은 예수의 수제자로 로마에 기독교를 전파한 성 베드로가 포교(布敎)의 거점으로 삼았던 곳이다. 바울 사도와 바나바가 와서 생활하고, 선교 여행을 떠난 곳이기도 하다. 이곳에서 A.D 252~300년에 10여 차례의 기독교 공의회가 열렸다. 이곳은 신약성경의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을 쓴 누가의 고향이다. 요한 사도의 수제자인 폴리갑도 이곳 출신이다. 그는 아시아 일곱 교회 중 하나인 서머나 교회 감독으로 있다가 순교하였다. 카파도키아에서 중세 수도원 운동을 이끌던 시몬 성인도 이곳 출신이다. 이처럼 이곳은 기독교 포교의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곳으로, 기독교에서 예루살렘, 로마 다음으로 중요하게 여기는 도시이다.

   오후 1시 40분경에 도심에서 북쪽으로 2km정도 떨어진 곳에 있는 성 베드로 동굴교회에 도착하였다. 이 동굴교회는 1963년 교황 바오로 6세에 의해 성지(聖地)로 선포된 곳이다. 성 베드로의 축일인 6월 29일에는 세계 각지에서 순례단이 찾아와 미사가 행해진다고 한다. 성 베드로 동굴교회는 기독교 발달사에서 매우 중요한 곳이라 생각되어 꼭 가보려고 하였던 곳이어서 이곳에 도착하니, 좀 긴장되기도 하고 흥분도 되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다가 부활하여 승천한 후 제자들은 예수님의 말씀과 가르침을 열심히 전도하였다. 그러나 예수를 부정하는 유대교인들의 박해가 매우 심하였다. 예루살렘에서 박해를 받던 베드로 사도는 배를 타고 이곳으로 왔다. 그를 따르던 신도 중 일부가 이곳으로 와서 이 교회를 세우고, 베드로 사도와 함께 하나님께 예배를 드렸다. ‘베드로’란 이름은 예수로부터 받은 것인데, 교회의 초석으로 ‘바위’를 뜻하는 말이다. 성 베드로 동굴교회가 바위 안에 세워지고, 그 뒤를 이어 많은 교회가 세워진 것은 ‘반석 위에 교회를 세우리라.’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실천한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예수님의 말씀을 믿고 따르던 사람들은 스테반의 순교 이후에 더욱 심해진 박해를 피해 사방으로 흩어졌다. 그 중 일부 사람들은 페니기아와 키프로스와 안디옥으로 가서 유대 사람들에게만 말씀을 전하다가 후에 그리스 사람들에게도 말씀을 전하였다. 그러자 많은 사람들이 믿고 예수를 받아들였다(사도행전 11 : 19). 예루살렘 교회가 이 소식을 듣고 바나바를 안디옥으로 보냈다. 이곳에 온 바나바는 여기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는 바울 사도의 고향 다소(Tarsus)로 가서 바울을 데리고 와 이 교회에서 1년 동안 함께 지내면서 많은 사람들을 가르쳤다. 당시에 예수를 믿고 따르던 사람들을 ‘크리스쳔(Christian)’이라 불렀다(사도행전 11 : 22~26). 이렇게 보면, 이 교회는 이 세상에 세워진 최초의 교회이다. 그리고 이 교회의 신도들은 처음으로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리어진 사람들이다.

   나는 조금 긴장되고 흥분된 마음으로 교회를 살폈다. 교회는 하비브 낫자르산 기슭의 큰 바위를 깎아 만든 동굴 안에 있었다. 교회 안은 100㎡ 쯤 되어 보이는 직사각형의 방인데, 전면의 중앙에는 돌로 쌓은 단이 있고, 그 가운데에 돌로 된 제단이 있다. 제단 앞의 벽 위쪽에는 천국의 열쇠와 두루마리 성서를 든 베드로 사도의 상이 있다. 제단 오른 쪽에는 병을 낫게 하는 효능이 있다고 하는 약수가 있다. 사람들은 이를 성수(聖水)라고 한다. 제단 왼쪽에는 도피처로 사용하였던 터널이 있다. 지금 있는 석조 제단은 12~13세기의 것이고, 모자이크 바닥은 4~5세기 것이라고 한다. 나는 교회 안의 이곳저곳을 둘러보고 성수를 한 모금 마시면서 초기 기독교인들의 경건한 생활 모습을 그려 보았다. 그 때 서양 사람으로 보이는 남녀 30여 명이 들어와 둘러서자 안내자가 이 교회에 대한 설명을 하였다. 설명이 끝나자 일행 중 한 사람이 앞으로 나와 무어라고 하니, 모두 손을 잡고 찬송을 하였다. 찬송이 끝나자 그 사람이 대표로 기도하였다. 일행 모두 나이가 들어 보이는 사람들이었는데, 찬송을 부르고 기도하는 모습이 아주 진지하고 경건하였다. 기도가 끝난 뒤에 어디서 왔느냐고 물으니, 이탈리아에서 성지순례를 왔다고 하였다.

   동굴교회에서 나와 왼쪽 산 능선을 따라 가파른 길을 올라가니 우뚝우뚝 솟은 큰 바위가 여럿 있다. 거기에 베드로와 성모 마리아상이 있는데, 크게 파손되어 있어 자세한 모습을 볼 수 없어 안타까웠다. 그 위에 사람의 얼굴 모양을 한 바위가 있다. 이 바위가 ‘저승의 강’의 사공인 ‘키론의 상(像)’이라고 한다. 이 상(像)은 기원전 2세기에 셀레우코스 왕조의 안티코스 4세 때에 역병(疫病)을 가라앉히기 위해 만들었다고 한다. 그런데 훼손이 심하여 자세한 모습은 알 수 없었다. 키론의 상 옆에 자연동굴이 하나 있는데, 전에 교회로 사용되었다고 한다. 그곳을 보니, 카파도키아에 있는 지하 동굴교회가 떠올랐다.

   다시 성 베드로 동굴교회 앞으로 온 나는 교회를 다시 한 번 둘러보았다. 예수님의 수제자인 베드로가 세운 세계 최초의 교회, ‘크리스쳔’이라는 말이 처음 생긴 교회를 와 보았다는 감격을 가라앉히며 조용히 감사의 기도를 올렸다. 그리고 기념품 가게로 가서 3리라(한화 2,300원 정도)를 주고 성 베드로 동굴교회 사진을 넣고 구워 만든 도자기판 하나를 샀다. 손바닥 반 정토 크기의 이 도자기는 장식용으로 장식장에 넣어 두든지, 서진(書鎭, 책장이나 종이쪽이 바람에 날리지 아니하도록 눌러두는 물건)으로 쓰면서 이곳에 왔던 일을 오래오래 기억해야겠다.  <성동문단 제11호(성동문인협회, 20011>에도 실려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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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8년을 아쉬운 마음으로 보내고, 희망과 기대 속에 2009년을 맞이하였다. 동양에서는 오래 전부터 육십갑자(六十甲子)로 햇수를 세었는데, 12간지(干支)에 열두 동물을 배치시켜 그 해를 그 동물의 특성과 관련지어 생각해 왔다. 이에 따르면 2008년은 무자년(戊子年)으로 쥐해이고, 2009년은 기축년(己丑年)으로 소해이다.

  <<삼국유사(三國遺事)>> 고구려 유리왕 조를 보면, 3~4세기 경에 쟁기를 만들어 논밭을 갈고, 수레를 만들어 탔다고 한다. <<삼국사기(三國史記)>> 신라 지증왕 조에는 소를 농사에 이용한 기록이 보인다. 이로 보아 소는 2000여 년 전부터 우리 민족과 함께 생활해 왔음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한국인의 소에 대한 의식이 어떠하였는가를 생각하면서, 소해를 어떻게 맞이할 것인가를 생각해 보는 것도 뜻있는 일이라 생각한다.

  한국인의 의식 속에서 소는 첫째, 매우 부지런하고 성실하다. 어떠한 어려움이 있어도 참고 견디며 자기의 있는 힘을 다하여 일한다. <소가 된 게으름쟁이> 이야기를 보면, 일하기 싫어하는 젊은이에게 소머리 탈을 씌우자 소가 되었다. 그는 소가 되어 쉴 새 없이 일을 하다가 먹으면 죽는다고 한 무를 먹었더니, 다시 사람이 되었다. 그는 자기의 잘못을 깨닫고 부지런히 일을 하여 부자가 되었다고 한다. 이 이야기에서 소는 게으른 사람을 깨우쳐 부지런한 사람이 되게 한다. 우리 속담에는 ‘종은 믿고 살지 못해도 소는 믿고 산다.’, ‘아내에게 한 말은 나도 소에게 한 말은 안 난다.’는 말이 있다. 이것은 소의 변함없는 마음과 성실성을 말해 주는 말이다.
   
  둘째, 소는 충직하고 의리가 있다. 경북 구미시 산동면 인덕리 문수마을에 전해 오는 「의우총(義牛塚) 전설」을 보면, 김기년이라는 농부가 산 밑에 있는 밭에서 일을 하는데, 갑자기 호랑이가 나타나 소를 물려고 하였다. 그가 소를 구하기 위해 작대기를 들고 호랑이한테 덤비니, 호랑이는 소를 놔두고 그에게 달려들었다. 이것을 본 소가 호랑이와 싸워 물리치고, 주인을 구하였다. 그는 호랑이한테 물린 상처 때문에 얼마 살지 못하고 죽었다. 소는 주인이 살았을 때에는 전과 다름없이 일을 하였는데, 주인이 죽자 무덤 옆에 와서 눈물을 흘리며 울부짖다가 죽었다고 한다.

  그의 아들들은 아버지의 유언대로 그 소를 아버지의 무덤 옆에 묻었다고 한다. 서기 1630년에 선산 부사로 부임한 조찬한(趙纘韓)은 이 이야기를 듣고 「의우기(義牛記)」를 짓고, 화공을 시켜 8폭의 ‘의우도(義牛圖)」를 그리게 하여 지금까지 전해 온다. 구미 지역에는 ‘먼 곳으로 팔려간 소가 자기를 길러준 할머니가 세상을 떠나자 그 집으로 달려와 울부짖다가 뒤따라 죽었다.’는 이야기도 전해 온다. 이것은 소가 충직하고 의리가 있음을 말해 준다.

  셋째, 소는 자기의 모든 것을 주는 희생적인 삶을 산다. 소는 살았을 때에는 사람에게 노동력을 제공하면서 젖을 주고, 죽어서는 고기와 뼈와 가죽을 유용하게 이용하게 해 준다.

  넷째, 소는 부의 징표(徵表)가 된다. 소는 경제적 가치가 매우 높았으므로 소를 기르는 일은 재산 증식의 수단이 되었고, 부의 척도가 되었다. 이러한 이유로 해서 사람들은 소가 살았을 때에는 생구(生口)라 하여 가족처럼 대하였다. 죽은 뒤에는 소고기를 최고의 식품으로 여겼다. 그래서 일상의 식생활에서는 최고의 손님을 접대할 때 쓰고, 의례에서는 신에게 바치는 제물로 썼다.

  2008년은 쥐해였다. 쥐는 아주 부지런하고, 먹을 것을 깊은 곳에 저장하는 습성을 가지고 있다. 또 땅에서 일어날 일을 미리 알아차리고 안전한 곳으로 대피하는 능력을 지니고 있다. 우리는 쥐해를 맞이할 때 쥐처럼 부지런히 일하면서 저축하고, 앞일을 예견하여 대비하며 한 해를 살 것을 결심하고 다짐하였다. 우리는 연초의 다짐대로 부지런히 일하고, 절약하며 저축하는 생활하였다. 그러나 앞일을 예견하고, 이에 맞는 대응책을 세우는 일은 제대로 하지 못하였다. 그래서 미국에서 시작한 경제위기에 발목이 잡혀 경제적인 어려움을 겪고 있다. 미국의 경제위기가 세계로 퍼질 것을 예견하고 미리 준비하지 못한 것이 후회스러울 뿐이다.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경제 위기는 반드시 극복해야 한다. 위기는 좌절이나 파멸의 늪에 빠지는 계기가 되기도 되지만, 잘 극복하면 한 단계 더 발전할 수 있는 기회가 되기도 한다. 위기 극복의 의지를 가지고 노력하면, 반드시 극복할 수 있다. 하느님은 인간에게 이기지 못할 시련은 주시지 않는다고 한다.

  새해에는 소처럼 근면하고 성실하게 살아야 한다. 그리고 나만을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남을 배려하는 마을을 가지고 살면서 인연을 맺은 사람과 의리를 지키는 생활을 해야겠다. 이렇게 생활하면 새해에는 반드시 어려움을 극복하고, 복을 누리며 살 수 있게 될 것이다.

  * 이 글은 <홍성신문 2009. 1. 5.>에 실려 있음.



  2007년은 정해년(丁亥年)으로, 돼지의 해이다. 동양에서는 12지(支)에 동물의 이름을 하나씩 붙여 쓰기도 한다. 이 동물들은 각기 특성을 지니고 있는데, 그 동물의 특성으로 그 해나 그 달, 그 날의 운수를 판단하기도 한다.
 
  한국에서 돼지는 오래 전부터 신에게 바치는 제물이었고, 도읍지를 정해 주거나 왕자를 낳을 여인을 만나게 해 주는 신이한 능력을 가진 동물로 신성시하였다.

  <삼국사기(三國史記)>에는 다음의 두 이야기가 실려 있다. 고구려 유리왕 때 하늘에 제물로 바치기 위해 기르던 돼지[郊豕]가 달아났는데, 그 돼지를 찾으러 갔다가 도읍지로 적합한 곳을 발견하고 도읍을 옮겼다고 한다. 고구려 산상왕(山上王) 때 하늘에 제사 지낼 때 제물로 바칠 돼지가 달아났는데, 한 처녀가 그 돼지를 붙잡아 주었다. 왕이 이상히 여겨 미복(微服) 차림으로 그 여자를 찾아가 관계하여 아들을 낳았는데, 그 아이가 산상왕의 뒤를 이은 동천왕(東川王)이라고 한다.

  돼지와 관련된 이야기는 비범한 인물인 최치원(崔致遠)을 잉태하게 한<금돼지>, 머슴살이하는 총각을 장가들게 하였다는 <머슴을 장가보낸 돼지>, 돼지꿈을 꾸었다고 거짓말하는 젊은이의 꿈을 해몽해 준 <돼지꿈의 해몽> 등 많이 있다.
 
  돼지는 오늘날에도 무당들의 굿상이나 동제(洞祭)의 제사상, 각종 고사(告祀)의 제사상에서 빼놓을 수 없는 제물이다. 전에는 통돼지를 제물로 바쳤으나, 요즈음에는 머리만 바치기도 한다. 제상에 올려놓는 돼지는 웃는 모습이어야 좋다고 하여 입을 벌리고 죽은 것을 골라 올려놓는다. 요즈음에는 제상(祭床)에 놓은 돼지머리의 입에 돈을 끼우고 소원을 빌기도 한다. 

  돼지는 잘 먹고 잘 자라며, 한꺼번에 8마리 안팎의 새끼를 낳아 기른다. 그래서 각 가정에서는 돼지를 길러 살림을 일으키는 밑천으로 삼았다. 이에 따라 돼지는 복스러운 동물, 다산(多産)의 동물로 매우 소중하게 여겨 왔다. 돼지는 한자로 ‘돈(豚)’이라고 하는데, 이것은 우리말의 ‘돈[金]과 음이 같다. 그래서 돼지를 재물과 관련지어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각 가정에서는 돼지 모양의 저금통을 마련해 놓고, 수시로 돈을 넣어 저금한다. 전에는 다른 사람에게 자기 아들을 낮춰서 말할 때 ‘돈아(豚兒)’라고 하였다. 수명이 짧은 집 아이의 이름을 ‘돼지’라고 부르기도 하였다. 이러한 것은 돼지가 복스러운 동물로 살림의 밑천이 된다는 의식, 돼지같이 잘 먹고 잘 자라라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다.

  한국인은 꿈에 돼지를 보면 복이 온다거나 음식을 얻는다고 하고, 돼지를 잡으면 아주 좋다고 한다. 그래서 요즈음에도 돼지꿈을 꾼 뒤에 복권을 사거나 경마장을 찾는다고 한다. 윷놀이를 할 때에 도가 나오면 한 밭밖에 가지 못한다. 그런데도 처음에 도가 나오면 ‘살림 밑천’이라고 하면서 ‘개’나 ‘걸’이 나온 것보다 좋아한다. 돼지혈[豚穴]에 묘(墓)를 쓰면 후손이 발복하여 부자가 된다고 한다. 이것 역시 돼지는 복스럽고, 재수가 좋은 동물이라는 의식에서 나온 것이다.
   
  돼지[亥]에 해당하는 방위와 시각․날․달․해를 보면, 해방(亥方)은 24방위 중 북서북(北西北)이다. 해시(亥時)는 오후 9~11시이고, 해일(亥日)은 일진(日辰)이 돼지에 해당하는 날이다. 해월(亥月)은 월건(月建)이 돼지로 된 달 곧 10월이다. 해년(亥年)은 60갑자 중에서 해(亥)가 든 해이다. 해(亥)가 들어가는 해는 을해(乙亥), 정해(丁亥), 기해(己亥), 신해(辛亥), 계해(癸亥)로 12년 만에 한 번씩 돌아온다.

  돼지해에 태어난 사람을 돼지띠라고 하는데, 돼지띠는 일반적으로 음력 1월 1일부터 12월 말일에 태어난 사람이라고 알고 있다. 그러나 사주(四柱) 명리학(命理學)에서는 절기력으로 한 해를 구분하여 그 해 입춘 시각부터 그 다음 입춘 전 시각 사이에 태어난 사람을 돼지띠라고 한다. 
돼지띠는 복이 많아 부자가 되어 건강하게 오래 산다고 믿는다. 돼지띠는 대체적으로 성정이 진솔한데, 남성은 일단 목표를 정하면 그 일을 꾸준히 밀고 나가므로 성공 확률이 높고, 여성은 마음먹은 일을 끝까지 철저하게 수행하면서도 자상한 엄마로서 가정에도 충실하다고 한다. 이것은 돼지에 대한 여러 의식이 결집된 것이라 하겠다.

  정해년(丁亥年)의 정(丁)은 오행으로 보아 불인데, 불은 붉은 색이다. 그러므로 2007년 정해년은 ‘붉은 돼지해’라고 할 수 있다. 붉은 색은 활활 타는 불꽃의 색으로 귀신이 싫어하는 색이다. 그래서 붉은 색은 축귀(逐鬼), 축사(逐邪)의 뜻을 지니고 있어서 재수가 있는 색, 재물 운이 따르는 색으로 여긴다. 붉은 색에 대한 이런 의식은 중국인도 매우 강하다. 이렇게 볼 때 돼지해인 2007년은 재운(財運)이 따르는 복된 해라고 할 수 있다. 이를 근거로 꿈과 기대를 안고 새해를 맞이하고, 꿈을 이루기 위해 노력하는 것은 좋은 일이다.
 
  요즈음 일부 역술인이 2007년을 ‘600년에 한 번 오는 황금 돼지해’라고 하고, 일부 상인들이 이를 부추기고 있다. 이를 일부 언론이 여과 없이 보도함에 따라 2007년에 출산을 하겠다고 서두르며, 유아용품에 관심을 갖는 사람이 늘고 있다고 한다. 정해년은 ‘붉은 돼지해’이지 ‘황(금)색 돼지해’가 아니다. 황색 돼지해는 황색을 뜻하는 토(土)가 들어간 기해년(己亥年)이어야 한다. 2007년은 ‘600년에 한 번 오는 황금 돼지해’라고 하는 것은 근거가 없는 말이다. 이런 말에 부화뇌동(附和雷同)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이 글은 <홍성신문> 제1008호, 2007. 1. 1.에 실려 있음.>



  상장례(喪葬禮)는 사람의 죽음을 맞아, 주검[屍]을 절차에 맞게 처리하고, 근친(近親)들이 슬픔으로 근신(謹愼)하는 기간의 의식 절차를 정한 예절이다. 상장례는 한국인의 생사관(生死觀)을 바탕으로 하여 형성되었다. 상장례의 절차는 대개 다음의 네 단계로 진행된다.

        초종(初終)
 
  부모의 병이 위독하여 운명할 기미가 보이면, 부모가 쓰던 방으로 모시고 집 안팎을 조용하게 하고, 부모의 손을 잡고 숨을 거두는 것을 지켜보는데, 이를 임종(臨終)이라고 한다. 우리 나라에서는 임종을 못 보는 것을 큰 불효로 여긴다. 임종할 방으로 모신 부모는 동쪽으로 머리를 두게 하고, 새 옷으로 갈아 입힌다. 혹 유언이 있으면, 이를 머리맡에 앉아 받아 적는다. 마지막 숨이 단절되는 것을 분명히 알기 위해 솜을 입 위에 놓고 숨이 그치는 것을 지켜보기도 하는데, 이를 속광(屬 )이라고 한다. 사망이 확인되면, 모여 앉았던 자손들이 애곡벽용(哀哭 踊, 소리를 질러 비통하게 곡을 하고 가슴을 치며 발을 구름.)한다.
 
  임종 직후에는 밖에 나가서 떠나는 영혼을 부르는 초혼(招魂)을 한다. {예서(禮書)}에는 "죽은 사람의 웃옷을 가지고 지붕에 올라가서 왼손으로 옷깃을, 오른손으로 허리를 잡고 북쪽을 향해 흔들면서, 남자는 관직명이나 자(字)를, 여자는 이름을 부른다."는 말이 있다. 그런데 요즈음에는 죽은 사람의 와이셔츠나 속적삼을 들고 마당에 서서 지붕을 보고, "서울특별시 ㅇㅇ구 ㅇㅇ동 ㅇㅇㅇ번지 ㅇㅇㅇ(亡人의 이름) 복 복 복!" 하고 부른다. 그 옷은 지붕 위에 얹어 두었다가 나중에 내려서 시체의 가슴 위에 얹는다. 이를 초혼(招魂) 또는 고복(皐復)이라고 한다.
 
  육체를 벗어나 떠나가는 영혼을 불러 재생시키려는 초혼 의례는 영육(靈肉) 분리(分離)의 이원적 사고를 바탕으로 한 것이다. 떠나는 영혼을 붙잡기 위해서는 그 영혼과 일생을 같이 한 육신이 나가서 불러야 하겠지만, 그럴 수 없으므로 그 사람이 입었던 옷, 그 중에서도 가슴에 직접 닿았던 속적삼을 들고서 가지 말라고 부른다. 이것은 망인(亡人)의 몸에 닿았던 옷은 일정 기간 망인과 영적(靈的)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고 믿는 전염주술(傳染呪術) 심리에서 나온 것이다.   
 
  육신을 벗어난 영혼은 저승사자의 호송을 받아 저승으로 간다고 한다. 그래서 망인의 영혼을 저승까지 데리고 갈 저승사자에게 인정을 쓰는 뜻에서 사자상(使者床)을 차려 후히 대접한다. 사자상은 저승사자가 세 명이라는 생각에서 밥 세 그릇과 반찬, 돈, 짚신 세 켤레 등을 멍석이나 푼주 위에 올려놓기도 하고, 상위에 올려놓기도 한다. 이 때, 상주들은 재배하고 곡을 한다. 사자상은 {예서}에 없는 일이라 하여 하지 않는 집도 있었으나, 하는 집이 더 많았다. 요즈음에도 상장례를 장례예식장에서 하거나, 교회식으로 하지 않는 집에서는 대개 하고 있다.
 
  초혼과 사자상 차리기가 끝나면, 시신이 굳기 전에 반듯이 놓고 간단하게 묶어 놓는데, 이를 수시(收屍), 또는 소렴(小殮)이라 한다. 수시는 나무토막 또는 베개처럼 묶은 짚 뭉치 세 개 위에 칠성판을 놓은 다음, 그 위에 시체를 올려놓고 두 손을 배 위로 모아 흉사(凶事) 때에 공수(拱手)하는 것처럼 포개고, 허리까지 묶는다. 그리고 다리를 곧게 하여 엄지발가락을 끈 또는 붕대나 백지로 매고, 시체의 몇 곳을 묶는다. 그런 다음에 홑이불을 덮고, 그 앞에 병풍을 쳐 놓는다.
 
  병풍 앞에 상을 놓고, 혼백을 만들어 놓는다. 혼백은 백지를 접어 5색실로 묶어 상자에 넣어 만들었으나, 요즈음에는 망인의 사진으로 대신한다. 혼백이나 사진 앞에는 주과포혜(酒果脯醯)를 차려 놓고, 향불을 피운다.
 
  친족들은 일을 분담하여 장례 준비를 하는 한편, 상사(喪事)를 여러 사람에게 알린다. 가까운 친척에게는 직접 사람을 보내 알리나, 멀리 있는 친척이나 친구에게는 부고장을 보냈다. 요즈음에는 전화나 전보를 이용하여 알리고, 신문에 게재하여 알리기도 한다.
 
  그 다음에 습렴(襲殮)을 한다. 습(襲)은 시체를 목욕시키고 의복을 갈아 입히는 것이고, 소렴(小殮)은 시체를 임시로 묶는 것이고, 대렴(大殮)은 시체를 단단히 묶고 관에 넣는 것이다. 전에는 운명한 날에 습하고, 그 다음날에 소렴, 그 다음날에 대렴을 하기도 하였으나, 요즈음에는 이를 한 번에 하는데, 이를 '습렴한다' 또는 약하여 '염한다'고 한다.
 
  염할 때, 전에는 미지근한 물에 향나무를 깎아 넣은 향수(香水)로 전신을 씻겼다. 그러나 근래에는 향수를 솜에다 찍어서 시체를 씻기거나, 알코올을 묻힌 솜으로 얼굴 손등 발등을 문지르는 정도로 그치기도 한다. 그리고 머리를 빗기고, 손톱 발톱을 깎는다. 깎은 손톱 발톱과 머리카락은 베헝겊으로 만든 작은 주머니에 넣는데, 이 주머니를 조발낭(爪髮囊)이라고 한다. 조발낭은 대개 5개를 만들어 1개에는 머리카락을, 나머지 4개에는 좌우 손가락·발가락에서 자른 손톱과 발톱을 각각 1개씩 넣어 습의(襲衣) 소매나 버선 등에 넣거나, 관 귀퉁이에 넣는다. 이것은 죽은 사람의 몸의 일부였던 머리카락이나 손톱·발톱을 시신과 함께 잘 모셔야 한다는 생각과 이것을 함부로 다루면 죽은 사람이나 그 가족에게 큰 화가 미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서 나온 것이라 생각한다. 이러한 생각 역시 전염주술 심리에서 나온 것이다.
 
  그 다음에 수의(壽衣)를 입힌다. 전에는 소렴에 입히는 염의(殮衣)가 따로 있었으나, 요즈음에는 염의를 쓰지 않는 것이 보통이다. 수의로는 남자의 경우, 적삼·고의·두루마기·도포를 입히고, 버선을 신기고, 행전과 대님을 친다. 손에는 주머니 모양의 악수(幄手)를 끼고, 얼굴에는 면건(面巾)을 덮는다. 옷을 입힐 때에는 모두 포개어 한 번에 입히는데, 이불을 덮고 홑이불의 네 귀를 사방에서 잡아서 시신이 보이지 않도록 한다. 
  습이 끝나면 반함(飯含)이라 하여 물에 불린 쌀을 버드나무 수저로 세 번 입에 떠 넣는다. 쌀을 넣을 때에는 오른쪽과 왼쪽, 그리고 가운데에 모두 세 번을 넣는데, 첫 번 숟가락을 넣으면서 '백 석이요.' 하고, 그 다음에는 '천 석이요.', '만 석이요.' 한다. 다음에는 동전이나 주옥(珠玉)을 입에 물리기도 한다. 이것은 저승에 가서 먹고 쓸 양식과 용돈이라고 한다.
  반함할 때 버드나무 수저를 쓰는 이유는 무엇일까? 민간에는 생생력(生生力)을 지녔다고 생각되는 동물이나 식물을 신성시하는 의식이 있었다. 버드나무는 물가에서 살고, 이른봄에 싹이 돋으며, 번식력이 강하여 매우 잘 자라므로 신성시하였다. 이런 버드나무로 수저를 만들어 반함하는 것은 죽은 사람이 저 세상에 가서 재생하여 잘 살라는 뜻에서일 것이다.   
 
  반함에 이어 교포(絞布, 시체를 묶는 베)로 시체를 묶는다. 묶을 때에는 세로로 묶은 위에 가로로 묶는다. 가로의 매수는 시체의 크기에 따라 다섯 매 또는 일곱 매로 묶는데, 매듭을 짓지 않고 틀어서 끼운다.
  그 다음에 입관(入棺)을 한다. 어깨나 허리 다리 등이 있는 빈 곳은 짚이나 종이 또는 헌 옷으로 채우는데, 이를 보공(補空)이라 한다. 보공하여 시체가 흔들리지 않게 한 뒤, 그 위에 다른 홑이불인 천금(天衾)을 덮고 관 뚜껑을 덮은 다음, 나무못을 친다. 입관하면 다시는 망인을 볼 수 없으므로, 자녀들은 슬피 운다. 혹 멀리 나가 돌아오지 않은 자녀가 있을 때에는 망인의 마지막 모습이라도 볼 수 있도록 입관을 늦추기도 한다.
 
  입관이 끝나면, 널 위에 남자는 '某官(無官이면 學生)ㅇㅇㅇ公ㅇㅇ之柩'라 쓰고, 여자는 '某封(無封이면 孺人) ㅇㅇㅇ氏ㅇㅇ之柩'라 쓴다. 그리고 짚과 종이를 섞어서 외로 꼰 밧줄로 관을 묶는다.
 
  입관이 끝나면 복인(服人)들은 상복(喪服)을 입고, 2m 정도로 자른 빨간 천 온 폭에 흰 분가루를 접착제에 개어 붓으로 널에 쓴 것과 같이 쓴 명정(銘旌)을 영좌(靈座) 오른쪽에 걸쳐놓고, 제수를 차린 다음, 성복제(成服祭)를 지낸다. 기독교식으로 하는 가정에서는 입관 예배를 드린다.
그리고 정식으로 조객을 맞이한다.
 
  조객의 경우, 전에는 자기 집을 떠나 상가에 오기까지 다른 사람과 이야기하지 않는 것을 예의로 생각하였으나, 요즈음에는 이러한 생각이 많이 약화되었다. 전에는 조객이 영좌 앞에 분향(焚香)하고, 곡(哭)을 한 다음 재배하고, 상주에게 절하면서 "상사 말씀 무른 말씁입니까." 또는, "갑자기 변고를 당하여 망극하십니다." 하고 조의를 표하면, 상주는 곡하면서 맞절을 하였다. 그러나 요즈음에는 상주도, 조객도 곡을 하지 않는 것이 보통이다.

                    치장(治葬)

  주검(시신)을 처리하는 방법에는 시신을 땅 위에 버리는 풍장(風葬), 땅 속에 묻거나 돌 등으로 덮는 매장(埋葬), 불에 태우는 화장(火葬), 물 속에 버리는 수장(水葬) 등의 방법이 있다. 그러나 우리 나라에서는 대개 매장을 하고, 일부에서 화장을 하고 있다. 여기서는 가장 많이 행해지고 있는 매장을 중심으로 간단히 살펴보려고 한다.

  전에는 장기(葬期)와 장일(葬日)이 사회 계층에 따라 달랐으나, 요즈음에는 3일장 (또는  5일장)이 일반적이다. 장일(葬日)이 되면 장지(葬地)를 선정하여 매장한다. 장지 선정은 대개 지관(地官)에게 부탁하고, 지관은 풍수설(風水說)에 맞추어 좋은 자리를 고른다. 풍수설에 따르면, 우주 만물을 주관하는 생기(生氣)가 지맥(地脈)을 따라 흐르다가 멈추는 곳이 좋은 자리 즉 명당(明堂)인데, 그 곳에 죽은 사람을 매장하면, 생기가 망인의 뼈에 작용하여 자손이 발복(發福)한다고 한다.

    장지가 선정되면 산역(山役)을 하는데, 일을 시작하기 전에 장지 위쪽에서 북쪽을 향해 제물을 차리고 산신제(山神祭)를 지낸다. 산역은 먼저 묘역(墓域) 주변을 표시하고, 그 중앙에 외광(外壙)과 내광(內壙)을 판다. 외광은 너비 2m에 길이 3m 정도, 깊이 1m 이상을 판다. 내광은 외광의 중앙에 너비 50cm에 길이는 망인의 키보다 20cm 정도 길게, 깊이는 50cm 정도 파고 곱게 다듬는다.

    집에서 장지로 떠나기에 앞서 발인제(發靷祭)를 지낸다. 기독교식으로 하는 가정에서는 발인 예배를 드린다. 지방에 따라 행상 도중에 상여(또는 영구차)를 세워 놓고 노전제(路奠祭)를 지내기도 한다.

  장지에 도착하면 하관(下棺) 시간에 맞춰 시신을 광내(壙內)에 모신다. 명정을 걷고, 관묶음을 풀고, 관까지 매장할 때에는 들 끈으로 관을 들고, 관을 벗길 때에는 뚜껑을 열고 시신만을 들 끈으로 들어 내광에 반듯하게 모신다. 광중(壙中) 안의 빈 곳을 흙으로 채우고, 횡대(橫帶)로 덮는다. 주상(主喪)이 청색 홍색의 천을 횡대 위에 올려 드리면, 시신의 가슴 부위에 청색 폐백을, 다리 부위에 홍색 폐백을 횡대를 들고 얹는다.

  그 다음 고운 흙으로 외광을 채우고, 시신의 발치에 지석(誌石)을 놓고 흙으로 덮는다. 기독교식으로 하는 가정에서는 하관 예배를 드린다.

    광내가 메워지면 평토제(平土祭)를 지낸다. 지방에 따라서는 봉분(封墳)을 만든 뒤 평토제를 지내기도 한다. 평토제를 지내고 나서 상주는 혼백을 모시고 집으로 돌아온다.

                  흉제(凶祭)

  치장이 끝난 뒤 길제(吉祭)까지의 제사를 흉제라고 한다. 시체를 매장하고, 신주(神主)나 혼백만을 모시고 지내는 첫제사로 반혼제(返魂祭)를 지내는데, 초우제(初虞祭)를 겸하기도 한다. 우제(虞祭)는 시체를 보내고 영혼을 맞이하여 지내는 제사인데, 초우제(初虞祭), 재우제(再虞祭), 삼우제(三虞祭)가 있다. 초우제는 장일(葬日)에 집에 돌아와 지내는 제사인데, 전에는 장지가 멀어서 당일 영좌(靈座)가 집에 돌아오지 못하면 주막에서라도 지냈다. 재우제는 초우제를 지낸 뒤 처음 맞는 유일(柔日, 일진에 乙 丁 己 辛 癸가 드는 날)에 지낸다. 삼우제는 재우제 뒤의 첫 강일(剛日, 일진에 甲 丙 戊 庚 壬이 드는 날)에 지낸다.

  초상 후 3개월이 지난 다음에 맞는 강일을 택하여 아침에 졸곡제(卒哭祭)를 지낸다. 초상 1주년이 되는 날 올리는 제사를 소상(小喪)이라 한다. 2주년이 되는 날을 대상(大祥)이라 하여 제사를 지내고, 탈상(脫喪)한다. 대상 후 100일 되는 정일(丁日)이나 해일(亥日)에 조상의 신주를 고쳐 쓰고 제사를 지내는데, 이를 길제(吉祭)라 한다.

  위에 적은 것이 상장례의 대강인데, 이것은 지방에 따라, 씨족에 따라 많은 차이가 있다. 상장례는 좀 까다로운 편인데, 이것은 모두 망인을 보내는 지극한 정성과 효심, 민간신앙에서 나온 것이다. 이러한 상례가 오늘날에는 변하여 그 절차와 복식(服飾), 행사(行祀) 등이 많이 간소해지고, 상기(喪期)도 크게 단축되었다. 사회의 변화와 함께 상례가 간소해지고, 축소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지만, 그에 따라 고인을 애도하는 마음과 정성·효심마저도 간소해지고 작아지는 일은 없었으면 한다.


   경기도 용인에 있는 한국민속촌에 가면 초가집 앞 가늘게 높이 자란 소나무에 '농사는 천하의 근본이다.'는 뜻의 한자어인 '농자천하지대본(農者天下之大本)'이라고 쓴 천이 걸려 있고, 그 위에 가로로 묶은 막대기에 오쟁이, 바람개비, 남자 성기 모양의 나무, 수수 이삭, 곡식을 넣은 주머니 등이 매달려 있다. 그 앞에 적어 놓은 설명문에는 풍농( 農)을 기원하는 뜻에서 세운 볏가릿대[禾竿]라고 적혀 있다. 이곳을 지나는 관람객 중에는 무심히 지나가는 사람도 있지만, 유심히 살펴보고, 설명문을 읽어본 뒤에 고개를 끄덕이는 사람도 있고, 안내자나 옆에 있는 사람에게 이게 무어냐고 묻는 사람도 있다. 외국인 중에는 이를 아주 신기하게 여겨 안내자에게 설명을 부탁하기도 한다. 


  볏가릿대는 음력 정월 열나흗날이나 보름날에 세웠다가 음력 2월 초하룻날 내린다. 2월 초하루는 '머슴날'이라 하여 농사가 시작되기 직전 마지막으로 한바탕 놀 수 있는 농부들의 명절이다. 볏가릿대는 농가에서 개인적으로 세우기도 하지만, 마을에서 공동으로 세워 풍농을 기원한다. 볏가릿대 세우기는 충청남도 서산·당진·태안 지역을 비롯한 충청 서북 지역과 전라도 진도·해남 일부 지역, 그리고 경상도 일부 지역 등 한강 이남 지역에서 널리 행하여 졌으나, 일제 시대부터 급속히 소멸되어 요즈음에는 일부 지방에서만 행해지고 있다. 볏가릿대의 형태는 지방에 따라 조금씩 다르다.

          충남 서산의 볏가릿대

  충남 서산 지방에는 요즈음에도 볏가릿대를 세우는 마을이 여럿 있다. 그 중 2002년 음력 정월 대보름(양력 2월 26일)에 세웠다가 음력 2월 초하룻날(양력 3월 14일)에 철거한 서산시 지곡면 장현 2리의 볏가릿대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정월 대보름날 아침에 마을 사람들이 마을회관 옆의 밭가에 볏가릿대를 세웠다. 볏가릿대는 긴 대나무로 장대를 만들고, 장대 끝에 두 줌 정도의 수수목을 묶고, 그 아래에 벼·팥·조·수수 등의 곡식을 백지로 싸서 묶었다. 그리고 그 아래 부분에 짚으로 꼰 동아줄 세 가닥을 묶은 뒤에 장대를 세우고, 동아줄 세 가닥을 잡아당겨 땅에 박은 말뚝에 묶어 고정하였다. 
  볏가릿대는 음력 2월 1일에 내렸다. 이날 정오 무렵에 마을 사람들이 마을회관 앞에 모여 한바탕 풍물놀이를 한 뒤에 볏가릿대 앞에서 제사를 지냈다. 제물은 볏가릿대 앞에 자리를 깔고 상 두 개를 놓은 뒤에 한 상에는 돼지머리와 사과·배·귤·과줄·약과·두부 등을 진설하고, 다른 한 상에는 쌀과 팥을 넣어 찐 떡시루와 촛대를 올려놓았다. 제물 진설이 끝나자 도포를 입고 두건을 쓴 3명의 제관(祭官)이 차례로 술잔을 부어 올리고 절을 한 뒤에 역시 도포를 입고 두건을 쓴 축관(祝官)이 풍농을 기원하는 내용의 축문을 읽은 뒤에 축문을 불에 태웠다. 제관들이 음복(飮福)을 하고 옆으로 비켜서자, 마을 사람들이 차례로 만 원 짜리 지폐를 한 장 또는 두세 장씩을 돼지 입에 끼운 다음 절을 하였다.   
  제사를 마치고 땅에 고정했던 동아줄을 풀어 볏가릿대를 눕혔다. 볏가릿대를 고정하였던 동아줄은 서려서 짚으로 만든 섬에 넣었다. 종이에 싼 곡식을 차례로 풀어 싹이 텄는가를 본 뒤에 다시 싸서 동아줄을 서려 넣은 섬 안에 넣었다. 곡식의 싹이 텄으면 풍년이 들고, 그렇지 않으면 흉년이 든다고 한다. 그리고 곡식이 가득 든 섬을 묶듯이 새끼줄로 묶었다. 그 섬을 한 사람이 지게에 얹어 짊어지고 앞을 서니, 제복을 입은 제관들이 그 뒤를 따르고, 그 뒤에 풍물패가 풍물을 울리며 따라갔다. 그 뒤에 마을 사람들이 줄을 지어 따랐다. 섬을 진 사람은 자기 집으로 가서 곳간에 섬을 내려놓았다. 뒤따라온 마을 사람들은 그 사람에게 축하의 말을 하고 마을회관으로 돌아갔다. 마을 사람들은 마을회관에 모여 푸짐하게 차린 음식과 술을 나눠 먹으며 즐거운 시간을 가졌다.               
 
  볏가릿대 세우기는 농사철이 되기 전에 미리 농사 짓는 것을 가장하여 풍년을 기원하는 농경의례(農耕儀禮)로, 가농작(假農作) 또는 내농작(內農作)이라고도 한다. 서산 지방에서 볏가릿대에 매달았던 곡식 봉지를 섬에 넣어 지고 가서 곳간에 둔 것은 곡식을 추수한 것을 의미한다. 제사의 규모나 절차를 보면, 볏가릿대를 세울 때에는 간단히 제를 올리지만, 볏가릿대를 내릴 때에는 먼저보다 규모가 큰 제사를 올린다. 이것은 곡식을 추수한 뒤에 추수 감사의 뜻으로 큰 규모의 제사를 지내는 것과 같은 것이라 하겠다.

            주술적인 힘을 지닌 볏가릿대 

  볏가릿대를 세워 풍농을 기원하는 의미는 무엇일까? 볏가릿대의 상징적인 의미는 여러 가지로 해석할 수 있지만, 다음과 같이 해석할 수 있다. 하늘로 곧게 선 장대는 신목(神木)으로, 천상의 신이 지상을 오르내리는 통로(通路)의 의미를 지닌다. 볏가릿대는 대나무나 소나무를 사용하는데, 대나무는 휘어지지 않고 곧게 뻗어 올라가므로 마을의 운수가 대나무와 같이 곧게 뻗어 가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사용한다고 한다. 소나무는 솔잎처럼 푸르고 곧은 절개를 닮으라는 의미에서 사용한다고 한다. 짚은 땅에서 자란 다산(多産)의 식물로, 우리의 주식(主食)이 되는 벼를 타작하고 남은 줄기여서 신성(神聖)의 의미를 지닌다. 그런 짚이 쭉쭉 뻗치도록 꼰 동아줄 세 가닥 역시 신성의 의미를 지닌다.
 
  신이 오르내리는 통로로 신성의 의미를 지닌 장대에 벼, 수수, 조, 팥 등을 백지에 싸서 매다는 것은 그와 같은 결과가 나타나기를 기원하는 모방주술(模倣呪術) 심리에서 나온 것이다. 이러한 모방주술 심리에서 보면, 생생력(生生力, 또는 생산력)을 지닌 최고의 존재인 달이 새해 들어 처음 뜨는 정월 대보름날 볏가릿대를 세워 풍년을 기원하면, 반드시 좋은 결과가 올 것이라고 믿는다. 그래서 정월 대보름에 볏가릿대를 세우는 것이다.

  용인 민속촌에 세운 볏가릿대에 매달은 짚으로 만든 오쟁이나 수수 이삭, 곡식을 넣은 주머니 등은 곡식 농사가 잘 되기를 비는 뜻에서일 것이다. 그런데, 바람개비나 남자 성기 모양의 나무를 매단 것은 무슨 의미일까? 바람개비는 바람을 조절하여 제 때에 비가 내리고, 햇볕이 쬐기를 비는 뜻을 담은 것이고, 남자의 성기는 생산력을 지닌 성기처럼 농작물이 번성하고 열매를 맺어 풍년이 들기를 비는 마음에서 매달은 것이라 하겠다. 이런 것을 매다는 것 역시 이들이 주술적인 힘을 발휘하여 풍년이 들게 할 것이라고 믿는 심리에서 나온 것이라 하겠다. 

  볏가릿대는 풍농을 기원하는 농경의례이므로, 물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다. 그래서 어떤 마을에서는 우물가에 볏가릿대를 세운다. 마을회관 옆에 볏가릿대를 세운 서산시 지곡면 장현 2리에서는 2월 초하룻날 제사를 지내기 직전에 맑은 물을 그릇에 담아놓고 풍물을 울리면서 "뚫어라, 뚫어라! 물구녕만 뚫어라!" 하고 고사소리를 하였다. 이것은 일 년 내내 물 걱정 없이 농사 지을 수 있기를 기원하는 것이다.         

          볏가릿대에 대한 기원

  조선 후기에 홍석모가 쓴 {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에 "시골 민가에서 보름 전날 짚을 묶어서 깃대 모양으로 만들고, 그 안에 벼·기장·피·조의 이삭을 넣어서 싸고, 또 장대 위에 매달아 집 곁에 세우고, 새끼를 내려뜨려 고정시킨다. 이것을 화적(禾積, 볏가리 또는 낟가리)이라 하는데, 풍년을 비는 것이다. 아이들이 새벽에 일어나 이 화적을 둘러싸고 노래를 부르며 빙빙 돌면서 풍년이 들라는 기원을 하다가 해가 뜨면 그만 둔다."는 기록이 있다. 이것은 조선 후기에 볏가릿대를 세우는 풍속이 있었음을 말해 준다. 조선 후기에 유득공이 쓴 {경도잡지(京都雜志)}에도 이와 비슷한 기록이 보인다.

    {동국세시기}에는 "대궐 안에서 경작(耕作)하고 수확하는 모양을 본떠서 좌우로 편을 갈라 승부를 겨루는 풍습이 있었는데, 이것도 풍년을 비는 것이다."라고 적혀 있다. 이것 역시 첫 보름달이 뜨는 정월 대보름에 농사짓는 일을 흉내내어 풍년이 들기를 기원하는 농경의례의 성격을 지닌 것이다. 

  {조선왕조실록} 세조 9년 조에 "민간에서 매년 상원(정월 대보름)에 농잠상(農蠶狀)을 만들어 놓고, 풍년의 징조를 삼았다."는 기록이 있다. 이것은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풍농을 기원하는  가농작(假農作)의 의식이었을 것이다. 이것은 뒤에 농사를 권장하는 정책에 따라 궁중의 의식이 되어 매우 다양하게 진행되었다고 한다. 이런 궁중의 의식은 그 폐해가 노출되어 뒤에 없어졌지만, 민간으로 전파되어 전국적으로 행하여 졌을 것이다. 그래서 {동국세시기}와 {경도잡지(京都雜志)}와 같은 문헌에 기록되고, 단원 김홍도의 [경직도(耕織圖)]에도 보이게 되었을 것이다. 이와 유사한 풍속이 일본에도 있는데, 이것은 우리의 볏가릿대가 일본에 영향을 끼친 것이라 하겠다. 

  새 해 들어 첫 보름달이 뜨는 정월 대보름에 농사의 핵심 절차를 미리 행하여 풍농을 기원하는 농경의례인 볏가릿대 세우기는, 비슷한 행위를 하면 그와 비슷한 결과가 온다고 믿는 모방 주술 원리를 바탕에 깔고 행하여지는 민속이다. 이것은 주술을 바탕으로 한 것이므로 과학적으로 설명할 수는 없지만, 풍농을 기원하는 농사꾼의 간절한 마음은 확인할 수 있다. 농사꾼들은 풍농을 기원하는 볏가릿대 세우기를 통하여 마을 사람들끼리 지연(地緣) 공동체의 의식을 다지고, 따뜻한 정을 나누면서 새해 농사에 전념할 것을 다짐하곤 하였다. 그러고 보면, 볏가릿대 세우기는 농촌 사람들의 축제의 한 마당이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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