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1022일을 맞는 나의 마음은 나도 모르게 숙연하다. 이 날은 내 생애에서 가장 의미 있는 결혼 50주년이 되는 날이기 때문이다. 나는 결혼기념일을 따지는 것은 서양의 문화라는 생각에서 지금까지 별 의미를 부여하지 않고 지내왔다. 그러나 결혼 50주년을 맞고 보니, 매우 뜻 깊게 느껴진다. 그것은 50년이란 긴 세월을 아내와 함께 살아온 나의 삶의 무게와 소중함이 새삼 크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거기에 우리의 전통문화에서 중히 여기는 회혼(回婚) 때까지 우리 부부가 건강하게 살 것이라고 장담할 수 없는 마음도 작용하기 때문이리라.

 

   나와 아내는 결혼 50주년 기념으로 3남매의 가족과 함께 여행을 하고 싶었다. 그래서 지난해에 두 아들과 딸에게 201612월 겨울방학 때 함께 해외여행을 가자고 하였다. 아들과 딸, 손자 손녀가 모두 좋다고 하여 그대로 추진하려고 하였다. 그런데 내년에 대학에 진학해야 할 고등학교 2학년짜리 손녀의 학습 문제, 미국에 가 있는 딸과 사위의 영주권과 직장 문제, 작은아들의 이사 문제 등이 겹쳐 떠날 수 없게 되었다. 가족여행을 내년으로 미루고 보니, 허전하기 짝이 없었다. 그래서 우리 둘이 국내여행을 하기로 하고, 10월에는 34일 일정으로 강원도 정선태백삼척 지역, 11월에는 45일의 일정으로 제주도 여행을 하였다. 우리는 여행하면서 50년을 함께 사는 동안 겪은 기쁘고 즐거웠던 일, 보람 있고 행복했던 일, 힘들고 슬펐던 일들을 돌이켜 보았다. 지금에 와서 생각해 보니, 그 때의 일들은 우리의 삶을 한 단계씩 발전시키고, 성숙하게 해 주었던 것 같다.

 

   나와 아내는 서울교육대학교 동기동창이다. 대학에 다닐 때는 얼굴과 이름을 겨우 아는 데면데면한 사이였다. 그런 우리가 졸업 후에 서울 동대문구 제기동에 있는 홍파초등학교 교사로 발령을 받아 함께 근무하게 된 것이 인연이 되어 사랑을 나누게 되었다. 나는 아내와 1년을 함께 근무한 뒤에 군에 입대하였는데, 멀리 떨어져 지내는 것이 우리 사이를 갈라놓지는 못하였다. 나는 군 복무를 마치고 복직하던 해인 19661022일에 결혼하였다.

 

   나와 아내는 결혼한 뒤 50년 동안 서로 아끼고 사랑하며 아무 탈 없이 살아왔다. 작은 일로 다툰 적은 있지만, 그것은 오히려 우리의 사랑을 더욱 돈독하게 해 주었다. 그래서 우리를 아는 사람들은 천생연분(天生緣分)이라고 하면서 본받을 만한 모범적인 부부라고 부러워하기도 한다. 이런 평을 받게 된 것은 전적으로 아내의 덕이라 생각한다. 나는 아내와 결혼한 것을 큰 복으로 여긴다. 내가 아내에게 다시 태어나도 당신과 만나고 싶다고 하니, 아내 역시 그렇다고 한다. 그 마음이 참으로 고맙다.

 

   그 동안 아내의 수고와 고생은 너무나 커서 말로 다 표현하기 어렵다. 그런데도 나는 아내에게 수고하였다는 말이나 고맙다는 말을 제대로 하지 못하였다. 늦게나마 아내의 수고를 치하하며 고마운 마음을 정리해 본다. 우리는 단간 전세방에서 신혼살림을 시작하였다. 아내는 결혼한 후 35년 간 초등학교 교사로 근무하면서 집안 살림을 하였다. 매사를 계획적으로 짜임새 있게 처리하면서 근검절약하니, 집안 형편은 조금씩 나아지게 되었다. 그 덕에 결혼 1년 후에 셋방 신세를 면하고, 작은 집을 사서 이사를 하였다. 그 뒤로는 형편이 되는 대로 집을 늘려 이사를 하여 오늘에 이르렀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맨몸으로 서울에 올라온 내가 이만큼 살게 된 것은 아내가 알뜰하게 살림하고, 근검절약한 결과이다.

 

   나는 7남매의 다섯째로 태어나, 위로 형님과 누님 셋, 아래로 남동생과 여동생이 하나씩 있었다. 그러나 625전쟁 때 형님을 잃고, 해군에서 제대한 남동생이 사고로 세상을 떠나는 바람에 외아들이 되었다. 아내는 일찍 홀로되신 어머니를 96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나실 때까지 36년 동안 지성으로 모셨다. 그리고 여동생을 고등학교와 대학에 보내고, 졸업한 뒤에 시집을 보냈다. 그동안 아내가 겪은 마음고생과 수고로움은 이루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을 만큼 컸을 것이다. 그러나 이를 내색하거나 불평하지 않고 가정의 평화를 지켜왔다.

 

   나는 3남매를 두었는데, 국문학을 전공한 큰아들은 박사학위를 받고, 대학의 교수가 되었다. 딸은 음악을 전공하고 국내에서 활동하다가 지금은 미국에 가서 살고 있다. 국문학을 전공한 작은아들은 대학원을 마치고 고등학교 교사로 재직하고 있다. 세 아이가 잘 자라 대학원까지 공부를 하고, 자립하여 잘 살고 있는 것은 아내의 세심하고 정성스런 육아와 가정교육 덕이라 생각한다.

 

  서울에서 초등학교 교사로 사회생활을 시작한 나는 결혼한 뒤에 중학교 교사와 고등학교 교사를 거쳐 대학의 교수가 되었다. 내가 야간대학에 편입학하여 공부하고, 대학원에 진학하여 박사학위를 받고 교수가 된 것, 교수가 된 뒤에 연구에 전념할 수 있었던 것은 아내의 내조 덕이다. 아내는 내가 공부에 전념할 수 있도록 집안일과 경조사를 비롯한 친척 사이의 일을 도맡아 하였다. 아이들의 학습이나 생활지도에도 내가 마음을 쓰지 않도록 해 주었다. 아내의 헌신적인 내조가 없었다면 나는 사회적으로 성장할 수 없었을 것이다.

 

   나이 75세로, 결혼 50주년을 맞은 나는 지금까지 있었던 일을 돌이켜본다. 잘했다고 생각하는 일이 있는가 하면, 잘못하여 후회되는 일도 있다. 기쁘고 즐거웠던 일이 있는가 하면, 힘들고 슬펐던 일도 있다. 그 많은 일 중에서 내가 잘하였고, 의미 있는 일은 무엇일까? 그것은 서울교육대학에 진학한 일이다. 고등학교 1학년 때 담임선생님은 나에게 “2년만 공부하면 서울시내 초등학교 교사로 발령받을 수 있으니, 빨리 졸업하고 취직할 수 있을 것이다. 가정적으로 안정을 취한 후 어머님을 모시면서 야간대학에 진학하여 더 공부하라.”고 하시며 서울교육대학 진학을 권하셨다. 그래서 눈물을 삼키며 법조인이 되겠다던 꿈을 접고 서울교대에 진학하였다. 지나고 보니, 그것은 가난하기 짝이 없는 촌놈으로서는 최선의 선택이었고, 아주 잘한 일이었다. 그것이 인연이 되어 아내를 만나 결혼하고, 아내의 도움으로 대학의 교수가 되었다. 그러고 보면, 서울교육대학에 진학한 일과 아내와 결혼한 일은 내 일생에서 가장 잘하고 의미 있는 일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요즈음 나는 읽고 싶은 책을 읽으며, 글 쓰는 일에 열중한다. 주일에는 아내와 함께 교회에 나가 예배드린다. 시간이 되는 대로 아내와 함께 탁구를 하고, 공원을 걸으며 많은 대화를 한다. 틈이 나면 함께 연극이나 영화, 음악회나 전시회에 가서 감상하며 즐기고, 이름난 맛집도 찾아간다. 기회가 되는 대로 국내나 국외 여행을 하며 즐거운 시간을 보낸다. 주말에는 아들과 며느리, 손자 손녀와 함께 식사하며 즐거운 시간을 갖기도 한다. 모든 일이 즐겁고, 감사하다. 나는 매일 부족한 나에게 좋은 배우자를 허락해 주시고, 노후를 편안하게 살 수 있게 해 주신 하나님께 감사의 기도를 드린다<성동문학 제17, 서울 : 성동문인협회, 2017. 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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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토요일에는 충남 보령시 오천면 소성리에 있는 도미부인 유적지를 다시 찾았다. 이곳에는 <<삼국사기(三國史記)>>에 백제시대에 뛰어난 정절을 보인 여인으로 기록되어 있는 도미부인의 사당과 묘, 상사정(相思亭)이 있다. 먼저 도미부인 정절사(貞節祀)와 묘를 살펴보고, 도미부인이 산에 올라 남편이 실려 간 뱃길을 바라보고 그리워하며 통곡하였다는 상사봉의 상사정을 찾아 올라갔다. 정상에 오르는 가파른 길 양편에는 진달래꽃이 군데군데 무리지어 곱게 피어 있다. 진달래꽃을 살펴보니, 대부분은 땅에 뿌리를 박고 있는데, 몇 포기는 바위틈에 뿌리를 박고 서 있다. 바위틈에 뿌리를 내렸으나 온전한 땅에 뿌리를 내린 진달래 못지않게 자라 예쁜 곳을 피우고 있는 모습이 퍽 인상적이었다. 위치를 바꿔가며 사진을 찍을 때 문득 광릉수목원에서 갔을 때의 일이 떠올랐다.

 

   오랜만에 광릉에 있는 국립수목원에 갔는데, 수목을 특성에 맞게 단지를 조성하여 잘 관리하는 모습이 놀라움과 함께 큰 감동을 주었다. 흥미와 관심을 가지고 풀과 나무를 살펴보면서 전나무숲 쪽으로 가다가 보니, 뿌리 채 뽑힌 전나무들이 땅바닥에 누워 있다. 작은 나무도 아닌 아름드리나무 몇 그루가 뿌리 채 뽑혀 땅바닥에 누워 있는 것을 보는 순간, 나는 놀라움과 함께 충격을 받았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 궁금하여 둘레를 보니, <태풍 콘파스 피해 현장>이란 작은 표지판이 서 있다. 쓰러진 나무들은 201092일에 순간풍속 19~25/sec으로 부는 태풍의 피해를 입은 것이라고 한다. 땅위로 드러나 말라버린 뿌리를 보니, 깊게 뻗었던 굵은 뿌리는 없고, 잔뿌리만 잔뜩 엉켜 있다. 이 나무들은 땅속 깊숙이 뿌리를 뻗지 못해 강풍을 이기지 못하고 쓰러진 것이 분명하다. 피해 입은 나무들을 제거하지 않은 것은 자연 상태로 보존하여 생태적 변화를 관찰하려는 뜻에서라고 한다.

 

   태풍 피해 현장을 지나 조금 올라가니, 넓게 조성된 전나무숲이 있다. 이곳의 전나무들은 피해를 입은 나무들만큼 큰 나무들인데, 전혀 피해를 입지 않고 반듯하게 서서 위용(偉容)을 자랑하고 있다. 같은 수목원에서 자란 비슷한 크기의 전나무가 한쪽은 피해를 입고, 한쪽은 피해를 입지 않았는데, 그 까닭은 무엇일까? 그것은 나무가 서 있는 곳의 환경의 차이 때문인 것 같다. 피해를 입지 않은 나무들이 서 있는 곳은 비스듬한 언덕으로, 습기가 많지 않아 땅속으로 뿌리를 깊이 뻗지 않으면 수분과 양분을 취할 수 없는 곳이다. 이곳의 나무들은 생존을 위해 땅속으로 깊고 넓게 뿌리를 뻗었을 것이다. 그래서 잘 자랄 수 있었고, 태풍에도 끄떡없이 버틸 수 있었다. 이에 비해 피해를 입은 나무들이 있는 곳은 골짜기의 낮은 지대로 습기가 많은 곳이다. 이곳의 나무들은 뿌리를 땅속으로 깊이 뻗지 않아도 수분과 양분을 취할 수 있었으므로, 힘들여 땅속으로 뿌리를 뻗지 않고, 옆으로 잔뿌리만 뻗었을 것이다. 당장의 편함에 스스로 만족하여 뿌리를 땅속으로 깊이 뻗지 않았다가 변을 당한 것이다. 피해를 입지 않은 나무들은 쓰러진 나무들이 땅속으로 깊이 뿌리를 내리지 않아 태풍의 피해를 입은 것을 안타까워하는 듯하였다.

 

   이 나무들을 보면서 자연스레 <용비어천가> 2장이 떠올랐다.

 

   뿌리 깊은 나무는 바람에 흔들리지 않으므로, 꽃이 예쁘고 열매를 많이 맺는다.

샘이 깊은 물은 가뭄에도 마르지 아니 하므로, 내를 이루어 바다에 간.

 

<용비어천가>는 조선 세종 27(1445)에 정인지, 안지, 권제 등이 지어 세종 29(1447)에 간행한 악장(樂章)의 하나이다. 훈민정음으로 쓴 최초의 작품으로, 조선 건국의 초석(礎石)을 놓은 목조익조도조환조태조태종의 공덕을 기리기 위해 지었다. 모두 125장인데, 대부분은 여섯 선조의 사적(事跡)을 중국 고사(故事)에 비유하여 그 공덕을 기리는 형식으로 지었다. 그러나 제2장은 뿌리 깊은 나무샘이 깊은 물처럼 가까운 것에서 비유를 취하여 여섯 선조의 공덕을 칭송하면서, 새로 세운 조선이 흔들림 없이 이어지기를 바라는 마음을 아주 잘 표현하였다.

 

   뿌리 깊은 나무가 바람에 흔들리지 않고, 예쁜 꽃과 좋은 열매를 맺는다는 것은 지극히 상식적인 일이기도 하다. 이것을 사람의 경우에 대응시키면 어떨까? 뿌리 깊은 나무와 같은 사람은 심지(心地)가 굳고, 바르며, 인격적으로 훌륭한 사람이다. 이런 사람은 바람에 흔들리지 않는 나무처럼 나쁜 환경이나 어려움, 또는 유혹에 흔들리지 않고 바르게 판단하고, 바르게 행동하여 큰일을 성취한다. 나무를 가꿀 때 뿌리가 튼튼하도록 하는 것처럼 사람을 기를 때에는 심지가 굳고 바르게 키워야 한다. 심지가 굳은 사람, 올바른 인격을 갖춘 사람을 기르는 데 중요한 요인은 환경과 교육이다. 좋은 가정환경과 사회적 환경에서 부모, 교사, 어른으로부터 바른 가르침을 받아야 한다. 좋은 환경에서 바른 교육을 받으며 자라면, 예의와 염치 체면을 아는 사람, 선악에 대한 분별력과 남을 배려하는 마음이 있는 사람으로 성장할 것이다. 여기에 종교적인 신념이 합해지면 더욱 좋을 것이다.

 

좋은 환경에서 자랄지라도 바른 교육을 받지 못하면, 이기적이고, 독선적인 사람이 된다. 과잉보호를 받으면, 온실의 화초가 자생력이 부족한 것처럼 자주성이 부족하고, 의타심이 강해진다. 기를 살려줘야 한다는 생각에서 선악의 기준도 없이 무엇이든지 들어주며 키운 자녀는 남을 배려하는 마음이나 협동심을 기를 수 없고, 바른 가치 판단력을 가질 수 없다. 성적이 오르지 않으면 좌절하는 학생, 어머니로부터 독립하지 못하는 마마보이, 어려움이 닥치면 쉽게 포기하는 젊은이가 된다.

 

환경이 좋지 않을지라도 바른 교육을 받으면, 매사에 긍정적이고 적극적이며, 고난극복의 의지를 가지고 자기 운명을 개척해 나갈 수 있다. 바위틈에 뿌리를 박은 나무는 환경이 나쁘지만, 삶의 의지가 강하기 때문에 잘 자라서 꽃을 피운다. 환경이 좋지 않은 사람에게는 바른 교육을 받을 수 있도록 배려해야 한다. 그렇지 못하면 사회적 낙오자가 되기 쉽다. 상사봉의 진달래는 환경이 좋지 않은 사람일지라도 자립의 의지를 가지고 스스로 노력하고, 옆에서 도와주면, 바르고 튼튼하게 자라 큰일을 할 수 있다는 것을 말해 준다.

 

상사봉 바위틈에 핀 진달래와 광릉수목원의 뿌리 뽑힌 전나무는 환경과 교육의 중요성과 함께 스스로 생존의 의지를 가지고 노력하는 것이 매우 중요함을 말해 준다. 자연 현상을 보면서 배운 것을 삶의 현장에서 실천하는 지혜를 가져야겠다 <성동문학 제17, 서울 : 성동문인협회, 2017. 09.에 수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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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몇 년 전 초여름에 서울 동대문구 회기로에 자리 잡은 홍릉수목원에 갔을 때의 일이다. 숲 해설사의 설명을 들으며 수목원을 둘러보니, 싱그러움을 자랑하고 있는 나무와 풀들이 아주 정겹게 느껴졌다. 밤나무와 나도밤나무에 대한 이야기를 재미있게 듣고, 자리를 옮겨 가던 중 하얀 풀꽃 두 포기가 나의 눈길을 끌었다. 꽃 이름을 몰라 해설사에게 물으니, ‘개망초라고 하면서, “이 꽃에는 일제강점기에 일본인이 우리나라를 망하게 하려는 뜻에서 퍼뜨린 꽃이라 하여 나라를 망하게 하는 꽃이라는 말이 전해 온다.”고 하였다. 그 때부터 나는 이 꽃에 관심을 갖고, 예쁜 꽃에 왜 이런 이야기가 전해 오는가를 생각하게 되었다.

 

   개망초는 국화과의 두해살이풀로, 키는 50~100cm이다. 잎은 어긋나고, 피침(披針, 양쪽 끝에 날이 있는 곪은 데를 째는 침) 모양 또는 타원형이다. 6~8월에 흰색 꽃이 아래쪽 가장자리에서부터 위쪽으로 올라가며 핀다. 잎이 연하고 부드러워 한창 자라나는 초여름까지 새순을 뜯어 나물이나 국을 끓여 먹기도 한다. 한방에서는 약용으로 쓰는데, 감기학질전염성 감염위염장염설사 등의 치료에 효과가 있다고 한다. 이 꽃은 북아메리카 원산의 귀화(歸化) 식물인데, 번식력이 매우 강하여 우리나라 전국 각지의 길가나 빈터에서 흔하게 볼 수 있다. 꽃의 한가운데에 있는 노란 꽃술과 이를 중심으로 동그랗게 퍼진 하얀 꽃잎의 모양이 마치 계란 프라이와 같다고 하여 계란꽃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이 꽃은 우리나라를 비롯하여 전 세계 온대지방에 널리 퍼져 자라고 있다.

 

   북아메리카 원산인 개망초가 우리나라에 들어온 것은 경인선 철도 공사 때라고 한다. 경인선 철도는 1896(고종 33) 329일 미국인 J.R.모스가 대한제국 정부로부터 부설권을 얻어, 1897329일 인천 우각현(牛角峴, 지금의 도원역 부근)에서 공사에 착수하였으나, 자금 부족으로 중단하였다. 그 후 일본인이 경영하는 경인철도회사가 부설권을 인수하여 18994월부터 다시 공사를 시작하여 1900년에 완공하였다. 철도공사 때 레일을 괴는 굄목(침목)을 아메리카에서 들여왔는데, 굄목에 개망초의 씨앗이 붙어 들어와 철로 주변에 피기 시작하였다. 그 때는 일본의 침략 야욕이 드러나기 시작하였고, 철도 공사에 따른 많은 폐해가 생겼으므로, 철도 공사를 보는 한국인의 마음은 매우 불편하였다. 그런 한국인의 눈에 철도 공사 현장 주변에 수없이 피는 개망초는 무척 밉고, 원망스러웠을 것이다. 그래서 나라를 망하게 하는 망국초(亡國草)라고 하며 일본에 대한 미움과 원망을 토로하였다. 거기에 더하여 개망초는 당시 일본의 군국주의를 상징하는 욱일승천기(旭日昇天旗)를 닮았다 하여 더욱 미워하였다. 그 뒤로 개망초의 효용이나 꽃의 아름다움은 뒷전으로 밀려나고, 망국초라고 하는 부정적인 이미지가 강하게 전해 왔다.

 

   개망초가 나라를 망하게 한 꽃이라는 이야기는 중국 초나라와 관련되어 전해 오기도 한다. 초나라의 한 농부가 아내와 함께 열심히 밭농사를 지으며 살다가 군에 입대하였다. 아내는 밭일을 열심히 하며 남편이 돌아오기를 기다렸다. 얼마 후, 그녀는 초나라가 전쟁에 져서 나라가 망할 것이라는 소문을 듣고 실망하여 병이 났다. 그러나 그녀는 남편이 돌아왔을 때 잡초가 무성한 밭을 보여줄 수 없다.’는 생각에서 병든 몸을 돌보지 않고 밭에 나가 풀을 뽑다가 지쳐서 죽고 말았다. 전쟁이 끝난 뒤에 남편이 돌아와 보니, 아내 없는 밭에 잡초만 무성하였다. 남편은 혼자서 밭에 무성한 풀을 뽑아 개같이 망할 놈의 풀이라고 하며 던졌다. 그래서 개망초또는 초나라가 망할 때의 풀이란 뜻으로 망초라고 하였다고 한다. 이 이야기는 번식력이 매우 강하여 자주 뽑지 않으면 무성한 개망초의 특성과 관련지어 꾸며낸 이야기일 것이다.

 

   개망초는 길가나 밭가, 담장 밑, 산자락을 가리지 않고 틈만 있으면 어디든지 자리를 잡고 자란다. 한두 포기가 외롭게 자라 꽃이 피기도 하고, 몇 포기가 함께 자라 꽃이 피기도 한다. 거름기가 있고 햇빛이 잘 드는 곳에서 자라면 꽃이 탐스럽고 예쁘다. 그러나 척박한 땅에서 자란 것은 키도 작고, 꽃도 작다. 그러나 개망초꽃은 어디서 자라 피든, 화려하지 않으면서 맑고 깨끗한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다. 개망초는 꽃이 예쁘니 화초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화단에 심어 가꿀 만도 한데, 이 꽃을 화단에 심어 가꾸는 것은 아직까지 보지 못하였다.

 

   몇 년 전 일자산에 갔을 때의 일이다. 산등성이로 난 길을 따라 걷다가 하남시 서부면 감곡동 쪽으로 내려가면서 보니, 길 양편 산자락에 개망초가 군락(群落)을 이루고 있다. 노란 얼굴(꽃술)에 하얀 꽃잎을 예쁘게 단 개망초가 떼를 지어 피어 있는 모양은 정말 예뻤다. 몇 그루씩 피어 있어도 예쁜데, 넓은 면적에 군락을 이루고 있는 모습은 정말 아름답고, 멋졌다. 씨를 부리고 가꾼 사람이 없건만, 보는 사람도 많지 않은 산자락에서 아름다움을 자랑하고 있는 모습은 참으로 대견하였다. 이런 광경은 다시 보기 어려울 것이라는 생각에서 사진을 찍은 뒤에 산길을 내려갔다. 얼마 뒤에 춘천 문배마을에 갔을 때에도 개망초 군락지를 보았다. 그곳에는 개망초가 마을 입구의 길 뒤쪽 빈터에 군락을 이루고 있는데, 길가에 심어 가꾼 여러 가지 꽃들과 어우러져 아주 예쁘고 멋졌다.

 

   개망초는 잎이 식용 또는 약용으로 쓰이고, 꽃이 매우 예뻐서 사람들의 관심과 사랑을 받음 직하다. 그러나 미움의 대상이 아니면, 잡초 취급을 당하고 있다. 충남 천안에 근무하는 한 초등학교 여교사가 하던 말이 떠오른다. 그녀가 담임한 반 어린이들과 함께 화단을 정리하는데, 봄에 심지 않은 개망초 몇 포기가 피어 있었다. 그녀가 개망초를 뽑으려 하자, 한 어린이가 이렇게 예쁜 꽃을 왜 뽑아요?” 하면서 뽑으면 안 된다고 하였다. 그녀가 교장선생님의 말씀이니 뽑아야 한다고 하자, 그 어린이는 울면서 그 꽃을 뽑지 말라고 하여 매우 난감하였다고 한다. 이 말을 들으며 나는 농작물 또는 관상용 화초와 잡초를 구분하는 기준이 무엇일까를 잠시 생각해 보았다. 잡초는 가꾸지 않아도 저절로 나서 자라는 여러 가지 풀로, 농사꾼의 입장에서 보면 농작물 아닌 것은 모두 잡초이다. 화단을 가꿀 때 사람들은 자기의 취향에 맞는 화초는 심어 가꾸지만, 자기 취향에 맞지 않으면 잡초라 하여 뽑아버린다. 개망초는 예쁜 꽃이지만, 나라를 망하게 하는 꽃이라는 누명을 벗지 못하였기에 많은 사람들에게 잡초 취급을 당하고 있다.

 

   개망초는 우리나라에 와서 사람을 해친 적도 없고, 나라를 망하게 한 일도 없다. 한국에 들어오는 과정과 시기 때문에 나라를 망하게 한 꽃이라는 누명을 썼다. 이제 누명을 벗겨줄 때가 되었다. 개망초는 식용과 약용의 유용성과 함께 예쁜 꽃을 피운다. 작고 가벼운 씨로 멀리 퍼져 나가고, 기름진 땅이나 메마른 땅을 가리지 않고 틈만 있으면 그곳에 자리를 잡고 자라 꽃을 피우는 강한 번식력이 있다. 그래서 우리에게 생존에 대한 열망과 의욕을 북돋워 준다. 개망초의 꽃말은 화해이다. 편견(偏見)과 아집(我執) 때문에 편 가르기가 심한 우리 사회에서 화해는 정말 필요한 화두(話頭)이다. 우리는 어디서든 볼 수 있는 개망초가 나라를 망하게 한 꽃이라는 그릇된 선입관을 버리고, 보이는 그대로 예쁘게 보았으면 좋겠다. 그리고 이 꽃의 꽃말처럼 우리 모두 화해의 길로 나아갈 수 있도록 마음의 문을 열었으면 좋겠다. <청하문학 15, 서울: 청하문학회, 2016.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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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512일에 성동문인협회 회원들과 충청북도 옥천에 있는 정지용문학관과 육영수 생가를 둘러본 뒤에 진천 농다리에 갔다. 한국교원대학교 교수로 재직할 때 학부의 고전문학반 학생 및 대학원생들과 자주 찾던 곳인데, 퇴직 후에 다시 찾으니 감회가 새로웠다.

 

농다리는 충청북도 진천군 문백면 구곡리 구산동(굴티마을) 앞 세금천(洗錦川)에 놓은 돌다리이다. 상산지(常山誌)(1825년에 정재경이 편찬한 것을 1932년에 다시 간행한 향토지)에는 이 다리가 고려 초엽 굴티 임씨의 선조인 임 장군이 별자리 28수를 응용하여 만들었다고 하였다. 1910년부터 1937년 무렵의 인문지리 현황을 담은 지리서인 조선환여승람(朝鮮寰輿勝覽)에는 농다리의 모습을 호랑이가 버티고, 용이 서린 것 같다.”고 하였다.

 

농다리는 19761220일 충청북도 지방유형문화재 제28호로 지정되었다. 이 다리는 구조적으로 징검다리와 형교(桁橋, 다리의 주체가 되는 부분이 들보로 된 다리)의 중간 형태이다. 총 길이는 94m인데, 폭은 3.6m, 두께는 1.2m, 교각과 교각 사이는 0.8m 정도 이다. 사암(砂巖) 성질의 돌을 마치 물고기 비늘처럼 안으로 차곡차곡 들여쌓기 하여 교각을 만들었다. 크기가 다른 돌을 적절히 배합해 서로 물리게 하여 쌓았는데, 위로 갈수록 폭이 좁아져 빠른 유속(流速)을 견딜 수 있도록 했다. 교각의 양쪽은 유선형으로 만들어 구조적으로 흐르는 물의 압력에 저항할 수 있게 하였다. 교각부터 상판석까지 붉은 색을 띤 돌을 이용했다. 애초에 28칸이었던 교각은 유실되어 25칸만 남아 있었으나, 2008년에 원형 복원사업을 완료하여 지금은 28칸 다 있다.

 

  농다리는 마치 지네가 물을 건너가는 것 같은 모양으로 보이기도 한다. 장마가 지면 물이 다리 위로 넘어가게 되어 있어 자동으로 큰 규모의 수월교(水越橋, 장마 때면 물이 다리 위로 넘어가는 다리)가 된다. 해마다 한두 차례씩 물이 넘어갈 때에는 다리에 놓인 돌들이 덜컹거린다고 한다. 돌들이 자연스럽게 움직이지 않으면, 다리가 물살에 떠내려간다고 하니, 물 흐름의 이치를 잘 알아 만든 것이다.

 

천 년이란 긴 세월을 견뎌온 농다리에는 몇 가지 전설이 전해 온다. <농다리를 놓은 임 장군> 이야기를 보면, 고려 시대에 굴티에 사는 임 장군은 매일 아침 세금천에서 세수를 하였다. 어느 추운 겨울날, 임 장군은 한 젊은 여인이 세금천 건너편에서 이쪽으로 건너려고 하는 것을 보고, 무슨 일로 차가운 물을 건너려고 하는가 물었다. 여인은 아버지가 돌아가시어 친정으로 가는 길이라고 하였다. 장군은 여인의 지극한 효심과 딱한 처지를 생각하여 용마를 타고 돌을 날라 다리를 놓았다고 한다. 이 이야기에 등장하는 임 장군은 고려 때의 무신 임연(林衍)인 듯하다. 임연은 고려 때 쳐들어온 몽골군을 고향 사람들과 함께 물리쳐 대정(隊正, 고려 시대 최하위 지휘관)이 된 뒤에 벼슬이 올라 큰 권력을 잡았던 인물이다. 이 이야기서는 이 지역 사람들의 추앙을 받는 임 장군이 용마를 타고 순식간에 놓은 다리라 하여 농다리에 신비성을 부여하였다.

 

<오누이 힘내기와 농다리> 이야기를 보면, 옛날에 굴티 임씨네 집안에 힘이 센 장사(壯士) 남매가 살았다. 어느 날, 남매는 서로 목숨을 걸고 내기를 하였다. 오빠는 굽 높은 나막신을 신고, 목매기송아지를 끌고서 서울에 갔다 오고, 누이동생은 다리를 놓기로 하였다. 어머니가 보니, 딸이 치마로 돌을 날라 다리를 놓는데, 거의 마무리 단계가 되었다. 그런데 아들은 올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어머니는 아들을 살릴 요량으로 팥죽을 쑤어 가지고 가서 딸에게 주면서 먹고 하라고 하였다. 딸이 어머니의 강권에 못 이겨 팥죽을 먹기 시작할 때 아들이 돌아왔다. 내기에 진 딸은 나머지 한 칸을 놓지 못한 채 치마에 있던 돌을 내던지고 죽었다. 여자 장사가 미처 놓지 못한 나머지 한 칸은 일반인이 놓았는데, 장마가 지면 여자 장사가 놓은 다리는 그대로 있지만, 일반인이 놓은 다리는 떠내려가곤 하였다고 한다. 이 이야기에서 임 장군이나 임 장군 여동생은 힘이 장사일 뿐만 아니라 비범한 능력을 지닌 이인(異人)이다. 이 이야기는 전국적인 분포를 보이고 있는 <오뉘 힘내기> 전설을 농다리와 관련지은 것으로, 농다리 건설의 내력을 매우 흥미롭게 설명한다.

 

농다리를 보면, 한두 사람이, 짧은 기간에 놓을 수 있는 다리가 아니다. 오랜 기간에 걸쳐 물의 흐름에 대한 연구를 깊이 하면서 축적한 기술로, 여러 사람이 힘을 합해서 놓은, 규모가 큰 다리이다. 그런데 위와 같은 전설이 전해 오는 것은 무슨 까닭일까? 이것은 농다리를 신이(神異)한 인물과 관련지어 신비스럽게 이야기함으로써 농다리의 유용성과 우수성을 강조하려는 민중의식 때문일 것이다.

 

농다리 옆에는 힘이 빠져 죽은 용마에서 굴러 떨어진 돌이 바닥에 박혔다는 용바위(쌍바위)’, 어머니의 계략으로 내기에서 진 임 장군 여동생이 내던졌다고 하는 돌이 있다. 살고개에는 임 장군과 용마의 발자국인 장수발자국말발자국이 있다. 이러한 증거물들은 위 전설의 진실성과 사실성을 강조하는 구실을 한다.

 

오래 전에 만난 노인의 말에 따르면, 농다리는 능구렁이 울음소리 비슷한 소리를 내어 운 적이 있는데, 그 해에 625 한국전쟁이 일어났다고 한다. , 예로부터 장마에 농다리 상판이 뜨면 나라에 큰 재앙이 일어나고, 훌륭한 인물이 죽거나 기상이변이 일어난다는 말이 전해 온다. 농다리는 두 번 상판이 움직였는데, 1894년 동학혁명이 일어나던 해와 1979년 박정희 대통령이 서거하던 해였다고 한다. 이것은 인근 주민들이 천 년을 지켜온 농다리를 국가의 중대사를 미리 알려주는 신비스런 존재로 인식하고 있었음을 말해 준다.

 

농다리를 28칸으로 세운 것은 하늘의 별자리 28수를 응용한 것이라고 한다. 이것은 천체의 움직임을 깊이 연구하고, 이를 생활에 적용하는 선조들의 동양철학 사상에 의한 것이다. 농다리는 석회를 바르지 않고 자연석을 그대로 쌓아 만들었는데도 28칸 중 25칸이 오랫동안 유실되지 않고 유지되어 왔다. 이것은 농다리의 축조 기술이 매우 뛰어났음을 말해 준다. 토목공학적인 측면에서도 그 유례(類例)가 드문 특이한 돌다리라 하겠다. 이처럼 농다리에는 자연의 원리에 순응하면서 이를 극복하고 생활에 편리하도록 이용하려고 하는 우리 조상들의 지혜가 스며 있다.

 

  농다리를 건넌 뒤에 오르는 나지막한 고갯길은 초평저수지 둘레길과 이어진다. 이 길의 이름은 초평저수지농다리의 머리글자를 따서 지은 초롱길이다. 국토해양부에서는 우리나라 도로의 아름다움과 우수성을 널리 알리기 위하여 2006년에 <한국의 아름다운 길 100>을 발표하였는데, 17번째에 ‘1000년 세월의 농다리가 들어 있다. 아름다운 길은 3개월간 인터넷 공모를 통해 신청을 받은 뒤에, 도로예술사진 등 각 분야의 전문가와 시민단체 등으로 구성된 선정위원회가 미관역사성기능성 등을 종합적으로 검토해 선정한 것이다. 여기에 농다리가 선정된 것은 그 의미가 매우 크다 하겠다.

 

  농다리를 천천히 건너며 보니, 많은 양의 물이 교각에 부딪혀 소리를 내며 힘차게 흐른다. 이 다리를 왕래하는 수많은 사람들의 애환(哀歡)을 지켜보면서 1,000여 년 동안 말없이 자리를 지키고 있는 농다리가 신비스럽게 느껴진다. 농다리를 건너 나지막한 고개를 넘으니, 넓은 가슴에 초록빛 물을 가득 담은 초평저수지가 눈앞에 펼쳐진다. 나는 저수지 둘레의 산자락을 잘 다듬어 만든 초롱길을 걸으며, 5월의 신록과 초록빛 물이 조화를 이룬 멋진 경관을 감상하였다. 한참 걸으니, 마음이 편안해지고, 머리가 맑아지는 것 같다. 이런 길을 걸을 기회를 마련해 준 성동문인협회 임원들께 감사한다. <성동문학 16(서울:성동문인협회, 2016)에 수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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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터키 에르지예스대학교 한국어문학과 객원교수로 와서 한국어와 한국문학, 한국문화를 강의하고 있다. 이곳에서 3년을 지내는 동안 틈이 나는 대로 여러 곳을 여행하고, 많은 사람들을 만났다. 그 중 한국전 참전용사들과 만난 일은 잊을 수 없다.

   지난해 6월 서울장위교회 교우들과 함께 터키의 에게해 연안에 있는 작은 도시 셀축(Selçuk)에 갔을 때의 일이다. 안내자가 한국음식을 먹을 수 있다고 하여 크게 기뻐하며 식당 안으로 들어갔다. 그 식당은 터키인이 운영하는 곳인데, 한국의 비빔밥을 만들어 주었다. 며칠 동안 터키 음식만 먹어 한국 음식이 그립던 차에 비빔밥을 먹으니 아주 맛있었다. 점심 식사 후에 에페스(성경에 나오는 에베소) 유적을 돌아보려면 시간이 많이 걸리니 빨리 차에 오르라는 안내자의 독촉이 있어서 숟가락을 놓기가 무섭게 식당 밖으로 나왔다. 버스에 오르려고 하는데, 한 터키 노인이 다가와 한국어로 안녕하세요?’ 하고 인사를 하였다. 나는 시간에 쫓기기는 하지만, 반가운 마음에 얼른 한국어와 터키어로 인사를 하고, 말을 주고받았다.

   그 분은 한국어도 영어도 잘 못하셔서 터키어로 대화를 해야 하는데, 나의 터키어 실력이 엉망이니, 난감하였다. 서로 아는 단어를 총동원하여 대화를 시도하였다. 한국어, 영어, 터키어 단어를 섞어가며 말하여 그 분이 말하려는 뜻을 대강 짐작하였다.

나는 한국전쟁에 참전하였던 터키 군인이다. 나는 젊은 시절에 목숨을 걸고 싸우며 지킨 한국을 잊지 않고 있다. 그 당시에는 한국의 상황이 매우 처참하였는데, 60여 년이 지난 오늘 전쟁의 상처를 씻고 발전한 한국이 매우 자랑스럽다. 한국인들이 보고 싶어서 한국인이 많이 오는 한국음식점 앞에 왔다. 한국인을 만나니 참 기쁘다.”

그 분은 이렇게 말하면서 한국전쟁 당시에 한국에서 찍은 자기의 사진을 보여주었다. 빛바랜 흑백 사진 속에는 군복을 입은 한 젊은이가 서 있는데, 정말 미남으로 의젓하고, 듬직해 보였다. 그 분의 얼굴과 사진을 다시 보니, 그 분의 옛 모습이 그대로 보였다. 그 분은 한국에 있을 때의 일을 조금 이야기하였다. 그 때 배운 민요 <아리랑>도 안다고 하였다. 우리가 불러 보라고 하니 큰 소리로 부르는데, 음정과 박자를 맞춰 아주 잘 불렀다. 우리들이 <아리랑>을 함께 부르니, 그 분은 신명이 나서 더 힘껏 불렀다. 우리는 그 분과 함께 <아리랑>에 이어 <도라지 타령>도 불렀다. 그 분은 흥이 나서 가볍게 춤을 추면서 노래를 불렀다. 그 분의 표정엔 흥분과 기쁨, 흐뭇함과 감동이 교차되어 나타났다. 내가 그 당시에 터키 군인들이 불러서 한때 한국에서 유행하였던 터키 민요 <위스크다르>를 시작하니, 그 분은 그 노래를 어찌 아느냐는 표정을 지으면서 큰 소리로 불렀다. 나는 그 노래를 어렸을 때 많이 들었는데, 처음 부분만 알고 중간 이후는 잘 몰라 함께 부르지는 못하고, 손뼉을 치며 흥을 돋우었다. 식당 앞에서 노랫소리가 들리니 지나가던 사람들이 발걸음을 멈추고 서서 구경하였다. 우리는 함께 사진을 찍고 나서 한국인은 한국전쟁 때 우리를 도와준 터키를 잊지 않고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오래 오래 건강하세요.” 하는 인사를 하고, 버스에 올랐다. 그 분은 만나서 반가웠다는 말과 고맙다는 말을 되풀이하면서 내게 작게 접은 종이쪽지를 주었다.

    버스에 올라 그 분이 내게 준 종이쪽지를 펴 보았다. 그것은 자기의 이름과 주소를 서툰 글씨로 써서 복사한, 명함 두 배 크기의 종이였다. 거기에는 두르무쉬 알리 지빌(Durmuş Ali Civil)’이라는 자기의 이름과 ‘Belediye Huzur Evi Md. Selçuk İzmir’라는 집 주소가 씌어 있었다. 나는 그 종이를 보며 나이 들어 한국전쟁에 참전하였던 일을 생각하며 한국인을 만나보고 싶어 한국음식점 앞으로 나온 그 분의 심정을 조금은 알 것 같았다. 오후 일정에 쫓겨 그분과 시간을 더 나누지 못하고 작별한 것이 아쉽고, 미안하다. 우리를 만난 기쁨과 바로 헤어져야 하는 아쉬움을 얼굴 가득 보이며 우리가 탄 버스가 멀어질 때까지 손을 흔들며 서 있던 그 분의 모습이 자꾸만 눈에 어린다.

    서기 1950625일에 북의 남침으로 시작된 한국 전쟁은 참혹하기 짝이 없었고, 대한민국의 존립 자체를 위협하였다. 이 때 우리를 도와주어 나라를 지키게 한 것은 유엔군이었다. 유엔군을 파견한 나라는 16개국인데, 그 중에 미국,영국,캐나다에 이어 네 번째로 많은 군인을 보내준 나라가 터키이다. 한국전쟁에 참전한 터키 군인의 수는 15,090명이다. 그 중 741명이 전사하였고, 2,068명이 부상을 당하였으며, 407명이 실종되었거나 포로가 되었다. 그래서 모두 3,216명의 인명 피해를 입었다(터키 문화원 자료 참조). 한국과 터키의 거리는 약 8,000km로 아주 먼 나라이다. 먼 곳에서 한국을 도와준 터키는 정말 고마운 나라이다.

   한민족과 터키 민족(한자어로 돌궐족)은 아주 먼 옛날 중앙아시아 지역에서 이웃하여 살던 민족이다. 삼국 시대만 하여도 돌궐족은 고구려와 이웃하여 살면서 중국이 침략할 때에는 서로 돕던 민족이다. 그 후 돌궐족은 서남쪽으로 이동하여 일부는 중국의 신강 지방에 정착하고, 일부는 이동을 계속하여 아나톨리아 반도(지금의 터키)에 자리 잡았다. 먼 옛날에 이웃하여 서로 도우며 살던 한민족과 터키 민족이 현대에는 대한민국과 터키공화국을 세우고 살고 있다. 한국에 전쟁이 일어나자 터키는 먼 길을 마다하지 않고 달려와 도와주었다. 이런 점을 생각하면, 한국과 터키는 형제의 나라라고 하는 말이 빈 말이 아닌 것 같다.

   나는 터키에 와서 지내면서 한국전쟁에 참전하였던 분들이나, 그 가족들이 어떻게 지내는가 알고 싶고, 그 분들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하고 싶었다. 그래서 참전용사회관을 방문하고, 한국전쟁 참전용사를 만났으며, 참전용사 자손들도 만나 보았다. 참전용사 중에는 한국의 초청으로 한국에 다녀온 분들도 있고, 한국에 가보지 못한 분들도 계셨지만, 전쟁 당시의 참혹하였던 모습과 함께 한국의 발전상을 아는 대로 이야기하였다. 그분들은 한국전쟁에 참전하였던 것을 큰 자랑으로 여기고 있으며, 한국의 눈부신 발전에 놀라움과 함께 큰 보람을 느낀다고 하였다. 참전용사들은 한국 정부로부터 받은 감사장을 소중히 간직하고, 자손들에게 한국은 형제의 나라임을 강조한다고 하였다. 그분들은 한국인들과 만나 이야기하는 것을 좋아하였는데, 그 분들과 정겨운 대화를 나누지 못한 것이 아쉽고 미안하다.

   나는 얼마 전에 셀축에서 아리랑을 함께 부르던 어르신께 우리 일행과 함께 찍은 사진을 인화하여 그 분이 적어준 주소로 우송하였다. 그 분은 그 사진을 보며, 우리와 함께 부르던 한국민요 <아리랑><도라지 타령>, 한국에서 부르던 터키 민요 <위스크다르>를 다시 흥얼거리며 한국을 마음속에 떠올릴 것이다. 그분이 오래오래 건강하게 사시면서 한국에 대한 좋은 소식을 많이 들으시기를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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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을 비롯한 여러 나라에는 기독교 교회가 참으로 많다. 나는 여행을 하면서 교회를 볼 때마다 ‘이 세상에서 가장 먼저 생긴 교회는 어디에 있는, 어느 교회일까?’를 생각한 적이 있다. 그런데 터키에 와서 여행 안내서를 보던 중 ‘터키 안타키야(Antakya)에 있는 성 베드로 동굴교회가 세계 최초의 교회’라는 글을 읽었다. 그래서 얼른 지도를 펴고 안타키아를 찾아보니, 터키의 남동쪽 해안 끝에 있다. 학생들에게 물으니, 버스를 타고 12~13 시간 걸려야 갈 수 있다고 하였다. 주말을 이용하여 갔다 오기에는 먼 곳이어서 방학에 가기로 하고 미뤄 두었다.

   2010년 봄 학기 강의가 끝난 6월 하순에 우리 부부는 양 교수, 김 교수와 함께 밤에 출발하는 버스를 타고 10여 시간을 달려 이른 아침에 이스켄데룬(Iskenderun)에 도착하였다. 이스켄데룬은 옛날에 알렉산더 대왕이 이곳을 지난 것을 기념하여 붙인 이름이라고 한다. 버스 터미널로 마중 나온 2학년 학생 일카이 양을 만나 그곳에서 하루를 지내며 이스켄데룬 시내와 박물관을 구경하고, 지중해 바닷가에 난 길을 따라 산책하였다. 지중해의 물에 손을 담가 보기도 하고, 남국의 정취가 물씬 풍기는 바닷가 길을 걸으며 아름다운 경치를 마음껏 감상하였다.

  그 다음날 오전 10시쯤 일카이 양 언니의 약혼자가 운전하는 차를 타고 안타키아로 향하였다. 이스켄데룬에서 안타키아는 차로 3시간 쯤 걸린다. 좀 가파른 산길을 달리며 보니, 길 양편 산에 올리브 나무가 숲을 이루고 있다. 더 남쪽으로 가니, 끝없이 펼쳐지는 넓은 밭에 옥수수가 자라고 있다. 시리아와의 국경에 쳐 놓은 철조망을 지나 달리니, 옥수수밭과 목화밭이 번갈아가며 이어진다. 올리브나무가 숲을 이루고, 끝없이 펼쳐지는 농토를 가진 터키가 부럽다.

   안타키아(Antakya)는 터키의 남동쪽 해안에 위치한 도시로, 인구는 약 20만 2천명이라고 한다. 안타키아는 성경에 나오는 ‘안디옥’이다. 옛 이름이 ‘하타이(Hatay)’여서 지금도 하타이라고 부르는 사람이 많다고 한다. 성경에 나오는 안디옥은 두 군데이다. 하나는 비시디아 안디옥인데, 터키 내륙 지방에 있는 지금의 얄바치(Yalvaç)로, 아피욘카라히사르(Afyonkarahisar)와 콘야(Konya)의 중간쯤에 있다. 다른 하나는 수리디아 안디옥으로 지금의 안타키야이다.

   이곳은 기원전 2,000년경까지 시리아의 아무트 왕국이 통치하였다. 기원전 17세기경에는 히타이트의 지배를 받았는데, 히타이트가 망한 뒤에는 앗시리아와 페르시아가 다스렸다. 기원전 333년 이 곳에 왔던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더 대왕은 물맛에 감동하여 이곳에 도시를 건설하고 싶어 하였다. 알렉산더 대왕이 세상을 떠난 후 그의 무장(武將)이었던 셀레우코스 1세(Seleukos I Nikator, B.C. 304~280 재위)가 이곳을 지배하였다. 그는 이곳에 안티오키아 왕국을 건설하고, 안타키아를 수도로 정하였다. 그는 이곳의 이름을 그의 아버지 안티오코스를 기념하는 뜻에서 안티오케이아로 명명하였다. 이곳은 물이 풍부한 다프네(하르비예)에 가깝고, 오론테스(Orontes, 아시) 강을 끼고 있어서 크게 발전하였다. 그러나 소왕국의 난립과 전쟁으로 피폐해졌고, 1세기 중반에 로마에 병합되었다. 그 후 시저에 의해 재건되어 상업, 교육, 문화의 도시로 발전하였다.

   안디옥은 예수의 수제자로 로마에 기독교를 전파한 성 베드로가 포교(布敎)의 거점으로 삼았던 곳이다. 바울 사도와 바나바가 와서 생활하고, 선교 여행을 떠난 곳이기도 하다. 이곳에서 A.D 252~300년에 10여 차례의 기독교 공의회가 열렸다. 이곳은 신약성경의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을 쓴 누가의 고향이다. 요한 사도의 수제자인 폴리갑도 이곳 출신이다. 그는 아시아 일곱 교회 중 하나인 서머나 교회 감독으로 있다가 순교하였다. 카파도키아에서 중세 수도원 운동을 이끌던 시몬 성인도 이곳 출신이다. 이처럼 이곳은 기독교 포교의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곳으로, 기독교에서 예루살렘, 로마 다음으로 중요하게 여기는 도시이다.

   오후 1시 40분경에 도심에서 북쪽으로 2km정도 떨어진 곳에 있는 성 베드로 동굴교회에 도착하였다. 이 동굴교회는 1963년 교황 바오로 6세에 의해 성지(聖地)로 선포된 곳이다. 성 베드로의 축일인 6월 29일에는 세계 각지에서 순례단이 찾아와 미사가 행해진다고 한다. 성 베드로 동굴교회는 기독교 발달사에서 매우 중요한 곳이라 생각되어 꼭 가보려고 하였던 곳이어서 이곳에 도착하니, 좀 긴장되기도 하고 흥분도 되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다가 부활하여 승천한 후 제자들은 예수님의 말씀과 가르침을 열심히 전도하였다. 그러나 예수를 부정하는 유대교인들의 박해가 매우 심하였다. 예루살렘에서 박해를 받던 베드로 사도는 배를 타고 이곳으로 왔다. 그를 따르던 신도 중 일부가 이곳으로 와서 이 교회를 세우고, 베드로 사도와 함께 하나님께 예배를 드렸다. ‘베드로’란 이름은 예수로부터 받은 것인데, 교회의 초석으로 ‘바위’를 뜻하는 말이다. 성 베드로 동굴교회가 바위 안에 세워지고, 그 뒤를 이어 많은 교회가 세워진 것은 ‘반석 위에 교회를 세우리라.’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실천한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예수님의 말씀을 믿고 따르던 사람들은 스테반의 순교 이후에 더욱 심해진 박해를 피해 사방으로 흩어졌다. 그 중 일부 사람들은 페니기아와 키프로스와 안디옥으로 가서 유대 사람들에게만 말씀을 전하다가 후에 그리스 사람들에게도 말씀을 전하였다. 그러자 많은 사람들이 믿고 예수를 받아들였다(사도행전 11 : 19). 예루살렘 교회가 이 소식을 듣고 바나바를 안디옥으로 보냈다. 이곳에 온 바나바는 여기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는 바울 사도의 고향 다소(Tarsus)로 가서 바울을 데리고 와 이 교회에서 1년 동안 함께 지내면서 많은 사람들을 가르쳤다. 당시에 예수를 믿고 따르던 사람들을 ‘크리스쳔(Christian)’이라 불렀다(사도행전 11 : 22~26). 이렇게 보면, 이 교회는 이 세상에 세워진 최초의 교회이다. 그리고 이 교회의 신도들은 처음으로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리어진 사람들이다.

   나는 조금 긴장되고 흥분된 마음으로 교회를 살폈다. 교회는 하비브 낫자르산 기슭의 큰 바위를 깎아 만든 동굴 안에 있었다. 교회 안은 100㎡ 쯤 되어 보이는 직사각형의 방인데, 전면의 중앙에는 돌로 쌓은 단이 있고, 그 가운데에 돌로 된 제단이 있다. 제단 앞의 벽 위쪽에는 천국의 열쇠와 두루마리 성서를 든 베드로 사도의 상이 있다. 제단 오른 쪽에는 병을 낫게 하는 효능이 있다고 하는 약수가 있다. 사람들은 이를 성수(聖水)라고 한다. 제단 왼쪽에는 도피처로 사용하였던 터널이 있다. 지금 있는 석조 제단은 12~13세기의 것이고, 모자이크 바닥은 4~5세기 것이라고 한다. 나는 교회 안의 이곳저곳을 둘러보고 성수를 한 모금 마시면서 초기 기독교인들의 경건한 생활 모습을 그려 보았다. 그 때 서양 사람으로 보이는 남녀 30여 명이 들어와 둘러서자 안내자가 이 교회에 대한 설명을 하였다. 설명이 끝나자 일행 중 한 사람이 앞으로 나와 무어라고 하니, 모두 손을 잡고 찬송을 하였다. 찬송이 끝나자 그 사람이 대표로 기도하였다. 일행 모두 나이가 들어 보이는 사람들이었는데, 찬송을 부르고 기도하는 모습이 아주 진지하고 경건하였다. 기도가 끝난 뒤에 어디서 왔느냐고 물으니, 이탈리아에서 성지순례를 왔다고 하였다.

   동굴교회에서 나와 왼쪽 산 능선을 따라 가파른 길을 올라가니 우뚝우뚝 솟은 큰 바위가 여럿 있다. 거기에 베드로와 성모 마리아상이 있는데, 크게 파손되어 있어 자세한 모습을 볼 수 없어 안타까웠다. 그 위에 사람의 얼굴 모양을 한 바위가 있다. 이 바위가 ‘저승의 강’의 사공인 ‘키론의 상(像)’이라고 한다. 이 상(像)은 기원전 2세기에 셀레우코스 왕조의 안티코스 4세 때에 역병(疫病)을 가라앉히기 위해 만들었다고 한다. 그런데 훼손이 심하여 자세한 모습은 알 수 없었다. 키론의 상 옆에 자연동굴이 하나 있는데, 전에 교회로 사용되었다고 한다. 그곳을 보니, 카파도키아에 있는 지하 동굴교회가 떠올랐다.

   다시 성 베드로 동굴교회 앞으로 온 나는 교회를 다시 한 번 둘러보았다. 예수님의 수제자인 베드로가 세운 세계 최초의 교회, ‘크리스쳔’이라는 말이 처음 생긴 교회를 와 보았다는 감격을 가라앉히며 조용히 감사의 기도를 올렸다. 그리고 기념품 가게로 가서 3리라(한화 2,300원 정도)를 주고 성 베드로 동굴교회 사진을 넣고 구워 만든 도자기판 하나를 샀다. 손바닥 반 정토 크기의 이 도자기는 장식용으로 장식장에 넣어 두든지, 서진(書鎭, 책장이나 종이쪽이 바람에 날리지 아니하도록 눌러두는 물건)으로 쓰면서 이곳에 왔던 일을 오래오래 기억해야겠다.  <성동문단 제11호(성동문인협회, 20011>에도 실려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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