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에 교일산우회 회원들과 함께 서울 동작구 상도동에 있는 지덕사부묘소(至德祠附墓所)를 찾았다. 조선 태종의 장남이자 세종의 큰형인 양녕대군(讓寧大君)의 사당과 묘소가 있는 곳이다. 이곳에는 11,888평의 대지에 9평의 사당과 서고 및 제기고 등 세 동의 건물이 있다. 사당의 후면에 양녕대군과 정경부인 광산 김씨를 합장한 묘소가 자리하고 있다. 묘소 앞에는 장명등과 묘비 및 문인석이 좌우에 2기씩 서 있다. 이곳은 1972년 8월 30일 서울특별시의 유형문화재 제11호로 지정되어 재단법인 지덕사에서 관리하고 있다.
나는 잘 정돈된 이곳을 찬찬히 둘러보며 양녕대군의 삶을 생각해 보았다.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을 보면, 양녕대군은 1394년(태조 4년) 3대 태종이 된 이방원(李芳遠)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의 이름은 제(禔)이고, 자는 후백(厚伯), 시호는 강정(剛靖)이다. 그는 10세 때인 1404년(태종 4년)에 세자로 책봉되었고, 13세 때 김한로(金漢老)의 딸과 혼인하였다. 그는 15세에 명나라에 사신으로 가서 황제의 환대를 받았고, 그 뒤에 일 년 동안 아버지 태종의 대리청정(代理聽政)을 하였다. 그는 일 처리에 부족함이 없었고, 시와 서예에도 뛰어났으며, 아버지 태종의 사랑도 깊었다. 그래서 다음 왕위에 오르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는 대세였다. 이러한 그가 세자 자리에서 밀려난 까닭은 무엇일까?
그는 자유분방(自由奔放)한 성격 탓에 부왕 태종의 기대에 어긋나는 행동을 하곤 하였다. 그는 대궐을 벗어나 사냥을 즐기고, 여색에 빠져 많은 문제를 일으켰다. 그 중 특이할 만한 것은 곽선(郭璇)의 첩 어리(於里)와 정을 통한 일이다[《조선왕조실록》 태종 17년(1417) 2월 15일조]. 이 일을 안 태종은 크게 노하여 세자를 장인 김한로의 집으로 쫓아 보냈다. 이에 세자는 즉시 개과천선(改過遷善)하겠다는 긴 맹세의 글을 올렸다. 태종은 이를 받아들여 세자를 환궁하게 하고, 이 일과 연루된 구종수와 이오방 등은 참수하였다[태종 17년(1417) 2월 22일조].
그 이듬해에 세자가 다시 어리를 대궐로 불러들여 아이까지 갖게 한 일이 알려졌다[태종 18년(1418년) 5월 10일조]. 또 태종이 늦둥이 아들 성령대군(誠寜大君)이 죽어 슬픔에 잠겨 있을 때 세자가 궁중에서 활쏘기놀이를 하였다는 사실도 알려졌다. 이에 분노를 느낀 태종은 세자의 출궁과 알현(謁見)을 금한다는 명을 내렸다. 그리고 어리의 궁중 출입을 도운 장인 김한로의 직첩을 거둔 뒤 죽산(竹山, 경기도 안성)에 부처(付處, 벼슬아치에게 어느 곳을 지정하여 머물러 있게 하던 형벌)하였다. 그런데 근신하고 있어야 할 세자가 자신에게 내린 부왕의 처벌이 부당하다는 글을 직접 작성해 올렸다[태종 17년(1417) 5월 30일조]. 이 항명으로 태종은 세자를 바꿀 마음을 굳혔다. 그러자 조정 대신들이 세자를 폐위하라는 상소를 올렸다. 그래서 양녕대군은 14년 만에 세자의 자리에서 밀려났고, 그 자리는 셋째 아우인 충녕대군에게 돌아갔다[태종 18(1418) 6월 3일조]. 이러한 사실로 보아 양녕대군이 세자 자리에서 밀려난 것은 그의 일탈(逸脫)된 행동 때문이었다.
《조선왕조실록》 선조 34년 2월 10일조에는 선조가 신하들과 여섯째아들 순화군(順和君)이 함경도에 가서 행패를 부린 일을 논의하는 대목이 나온다. 이 때 선조는 “옛날에 양녕대군이 매우 광패(狂悖, 미친 사람처럼 말과 행동이 사납고 막됨.)하였으므로 외방(外方)에 두었으나 제어하지 못하였다.”고 말한다. 이것은 사실에 기초한 양녕대군에 대한 부정적 평가가 선조 때까지 이어졌음을 말해 준다.
이러한 부정적 평가는 임진왜란 이후에 ‘양녕대군은 세종에게 왕위를 양보한 지혜롭고 덕이 넘치는 인물’로 바뀐다. 인조 때의 문신 김시양(金時讓, 1581~1643)은 《자해필담(紫海筆談)》에서 “세자가 된 양녕대군이 태종의 뜻이 충녕에게 있는 것을 알고, 일부러 미친 체하고 사양하니, 태종이 그를 폐하고 충녕을 세자로 세웠다.”고 하였다. 실학자 이긍익도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에서 “양녕대군은 뛰어난 문장가였지만, 스스로 미친 척하고 방탕한 생활을 하였다. 이러한 양녕대군의 진심을 아는 이는 없었다.”고 하였다. 양녕대군에 대한 평가가 긍정적으로 바뀌는 것은 조선 왕실의 입장에서 보면, 조상의 이미지를 좋게 하는 일이므로 적극 지원하였을 것이다.
지덕사는 1675년 숙종의 명으로 서울 남대문 밖 도저동(桃渚洞)에 세운 것이다. 이를 1912년 일제의 압박으로 묘소가 있는 현재의 위치로 옮겼다. 지덕이란 이름은 《논어(論語)》 권8 <태백편(太白篇)>에서 따온 것이다. 중국 주(周)나라 태왕(太王)이 셋째아들 계력(季歷)에게 왕위를 물려주려고 하였다. 이를 안 맏아들 태백(太伯)이 둘째 동생 중옹(仲雍)과 함께 형만(荊蠻)으로 달아나 왕위를 사양하였다. 훗날 이를 두고 공자는 태백을 ‘지덕(至德, 더할 수 없이 훌륭한 덕)’이라고 칭송하였다. 여기서 따다가 사당 이름을 붙인 것 역시 양녕대군에 대한 긍정적 평가의 소산이다.
왕위를 동생에게 물려준 양녕대군은 격식이나 관습에 얽매이지 아니하고 자유롭게 행동하며 살았다. 내가 채록한 <살아서는 왕의 형, 죽어서는 부처님의 형> 이야기는 그러한 삶의 단면을 말해 준다. 불심이 두터운 그의 아우 효령대군이 절에 가서 재를 올리면서 절 둘레에 황토를 놓고, 금줄을 쳐 놓았다. 그런데 양녕대군이 시종들과 함께 바로 그 절 마당에 와서 화톳불을 피우고, 사냥한 고기를 구워 먹었다. 이를 본 효령대군이 마당으로 나와 형에게 절을 하고, 그 이유를 물었다. 양녕대군은 크게 웃고 나서 말했다. “지금 도(祹, 세종)가 왕 노릇을 하고 있으니, 나는 살아서는 왕의 형이다. 너는 불심이 지극하니, 성불(成佛)하여 부처님이 될 것 아니냐? 그러니, 나는 죽어서는 부처님의 형이 될 것이다. 그래서 죽기 전에 내 모습을 부처님께 보이려고 왔다.”고 하였다.
지덕사 사당 안에는 세조 어제(御製)의 금자현액(金字懸額), 허목(許穆)의 <지덕사기(至德祠記)>, 정조 어제 지덕사기, 양녕대군이 친필로 쓴 소동파(蘇東坡)의 후적벽부(後赤壁賦)·팔곡병풍 목각판·숭례문(崇禮門) 현판의 탑본 등이 보관되어 있다. 도난당해 소재를 모르던 숭례문 현판을 2019년 5월에 찾았다고 한다. 2008년에 방화로 소실되었던 숭례문이 2013년 5월에 복원되었다. 그 때 이 현판이 있었더라면 제 자리에 걸 수 있었을 터인데, 그러지 못한 것이 아쉽다.
지덕사 뒤에는 양녕대군이 올라 멀리 경복궁을 바라보며 나라와 세종의 일을 걱정하였다는 국사봉(國思峰)이 있다. 지덕사에서 나온 나는 국사봉을 향해 걸으며 양녕대군의 처신에 관해 생각해 보았다. 세자의 자리에서 밀려나게 한 그의 일탈된 행동이 동생에게 세자 자리를 양보하려는 마음에서 나온 것인지, 아닌지는 알 수 없다. 그런 행동을 할 만큼 자유분방한 성품을 지닌 그가 왕이 되었다면, 행복할 수 있었을까? 백성을 보살펴야 한다는 중압감과 여러 가지 격식과 제약을 견뎌내며 선정을 베풀 수 있었을까? 이에 대한 나의 대답은 부정적이다. 그는 이러한 틀을 벗어 던졌기에 세종 때에는 왕의 형으로, 그 뒤에는 왕실의 어른으로 대접을 받으며, 타고난 성품대로 자유롭게 살다가 68세에 세상을 떠났다. 세 살 아래인 세종보다 12년을 더 살았다. 왕의 자리보다는 타고난 성품대로 사는 길을 택한 그의 처신은 잘한 일이라는 생각이 든다.(2019. 06. 07.)
'자료실 > 산문' 카테고리의 다른 글
원칙 지키기와 융통성 (2) | 2019.07.06 |
---|---|
자연과 과학이 아우른 호명호수 (0) | 2019.06.27 |
정릉(貞陵)에 얽힌 사랑과 미움 (0) | 2019.05.18 |
수종사(水鐘寺)를 찾아서 (0) | 2019.05.08 |
제천 의림지(義林池) (0) | 2019.04.2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