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기온이 34°C까지 오른, 아주 더운 날이다. 오후에 볼일이 있어 낙원동에서 인사동을 지나 조계사 쪽으로 걸어갔다. 그 길은 승용차 두 대가 겨우 지날 정도의 이면도로(裏面道路)로 가로수가 없고, 동서로 뻗은 길이어서 빌딩들이 만들어 주는 그늘도 없었다. 그래서 뜨거운 열기를 내뿜는 해를 정면으로 바라보며 걸어야 했다. 챙이 넓은 모자를 쓴 나는 고개를 좀 숙이고 걸으며, 오가는 사람들을 살펴보았다. 양산이나 넓은 모자챙으로 해를 가리며 걷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신문지·책·서류봉투·손수건·부채 등을 높이 들어 해를 가리며 걷는 사람도 있다. 휴대용 선풍기를 얼굴 정면이나 목 부분에 대면서 걷는 젊은이도 있다. 그 중에서 나의 흥미와 관심을 끈 것은 합죽선(合竹扇)을 펴서 해를 가리고 걷는 사람을 여럿 본 것이다.

 

   합죽선(合竹扇)은 얇게 깎은 대나무 껍질로 살을 만들고, 그 위에 한지를 붙여 접었다 폈다 할 수 있도록 만든 부채이다. 부채고리에는 장식을 매다는데, 전에는 신분의 차이에 따라 다르게 매달았다고 한다. 고려 때부터 지금까지 전승되는 합죽선은 최고 수준의 정교함과 세련미를 갖추었다. 따라서 합죽선은 단순히 바람을 일으키는 물건을 넘어 멋과 예술을 담은 특별한 예술품이라 하겠다.

 

  부채는 오래 전부터 사용해 왔다. 부채에 관한 오래된 기록은 후백제의 왕 견훤이 고려 태조 왕건의 즉위 소식을 듣고, 선물로 공작선(孔雀扇, 공작의 깃으로 만든 부채)을 보냈다는 《삼국사기(三國史記)》의 기록이다. 이 부채가 단선(團扇, 둥글게 만든 부채)인지 접선(摺扇, 접었다 폈다 하게 된 부채)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합죽선은 더위를 식히는 것 외에도 여러 용도로 사용하였다. 선비들은 합죽선을 가지고 다니다가 내외하거나(남의 남녀 사이에 서로 얼굴을 마주 대하지 않고 피함.) 예의를 지켜야 할 경우에는 펴서 얼굴을 가려 실례를 범하지 않으려 하였다. 손잡이 부분에 있는 지압점(指壓點)을 눌러 건강 증진의 도구로도 활용하였다. 길을 가다가 불량배나 강도를 만났을 때에는 합죽선으로 막아 화를 면하였다. 시조나 가곡을 부를 때에는 장단을 맞추는 데에 사용하였다. 민요나 판소리를 부르는 소리판이나 무당의 굿판, 전통무용에서는 없어서는 안 되는 소품(小品, 연극이나 영화 따위에서, 무대 장치나 분장에 쓰는 작은 도구류)이다.

 

  옛날부터 ‘하선동력(夏扇冬曆)’이라 하여 더위가 시작되는 단오에는 부채를, 동짓날에는 새해의 농사준비에 도움이 되는 달력을 나눠주었다. 조선시대에는 단오가 되면 공조(工曹)에서 부채를 만들어 임금께 바치고, 임금은 이를 신하들에게 나눠 주었다. 단오에는 일반인들도 부채를 선물로 주고받았다고 한다. 이것은 여름을 맞아 더위를 이기고 건강을 지키라는 뜻이 담긴 풍습이라 하겠다. 《조선왕조실록》에는 단오에 부채를 진상(進上)하게 한 뒤에 임금이 이를 신하들과 군병들에게 나누어 주었다는 기사가 있다.

 

  합죽선은 경상도와 전라도 지방에서 많이 만들었는데, 조선 후기에는 대나무와 한지의 품질이 우수한 전라도 지방에서 만든 것이 호평을 받았다. 전주감영에서는 선자청(扇子廳)을 두어 합죽선을 만들었다. 최근에 와서 합죽선은 역사성‧예술성 면에서 전승‧보존 가치가 높다 하여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하고, 이를 만드는 기술과 기능을 보유한 선자장(扇子匠)을 지명하였다. 합죽선 장인(匠人)의 전승계보를 보면, 제1대는 라경옥 씨이고, 제2대는 그의 아들 라학천 씨이다. 제3대는 라학천 씨의 다섯 아들이고, 제4대는 라학천 씨의 외손자인 김동식 씨이다. 김동식 씨는 외할아버지인 라학천 씨와 셋째 외숙인 라태순 씨의 기술을 이어받은 제4대 선자장이다. 합죽선은 2007년에 전라북도중요무형문화재로, 2015년에는 국가중요무형문화재(제128호)로 지정되었다. 김동식 씨는 전라북도 지정 선자장에 이어 국가지정 선자장이 되었다. 제5대는 아들 김대성 씨로 이어지고 있다.

 

  나는 합죽선 세 개를 가지고 있다. 둘은 전주 지방에 사는 제자가 선물로 준 것이고, 다른 하나는 필리핀에 여행 갔던 제자가 사다 준 것이다. 그 중 하나는 고종황제께 합죽선을 만들어 바친 제2대 합죽선 장인 라학천 씨의 다섯째 아들 고 라태용 선생이 만든 명품(名品)이다. 이 부채는 잔손을 많이 들여 정밀하게 만든 37개의 살에 기름먹인 한지를 붙여 만들었다. 부채를 펴면 3분의 2쯤 되는 선면(扇面)에 굽은 노송을 그린 묵화(墨畫)가 있고, 그 옆에 송나라 왕안석(王安石, 1021~1086)의 시 「고송(古松)」이 적혀 있다. 끝에는 ‘崔雲植 敎授. 000 拜上/ 丁丑年 元旦 無等)’이라 쓰고 낙관이 찍혀 있다. 부채고리에는 청․홍색 실로 정성껏 만든, 고상하면서도 호사스러운 느낌을 주는 매듭이 달려 있다. 제3대 선자장인 라태용 선생이 만든 부채를 보고 있으면, 아주 자랑스럽고 소중하게 느껴진다. 선자장인 라 선생께 특별히 부탁하여 얻은 작품을 나에게 선물한 000 선생께 감사한다. 나는 이 부채를 받은 정축년(1997)부터 지금까지 연구실에 두고, 냉방 시설이 가동되지 않아 더울 때에는 더위를 식히고, 심심할 때에는 지압을 하는 소품으로 활용한다. 부채에 적힌 시를 읽으며 고송을 스쳐온 듯한 바람을 느껴보기도 한다.

 

  요즈음 아내는 오죽을 깎아 만든 살에 종이를 붙여 만든 접이식 작은 부채[烏竹扇]를 가지고 다닌다. 서예를 공부한 친구가 써준 글귀가 적혀 있어 매우 아끼며 사용한다. 그러나 나는 부채를 가지고 다니지는 않는다. 어디를 가든 실내는 냉방이 잘 되어 있고, 승용차는 물론 지하철이나 버스를 타면 차안에 에어컨이 있어 덥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 오늘은 밖이 워낙 더웠기 때문에 냉방을 한 은행에 들어가서도 시원함을 느낄 수 없었다. 나는 순번을 기다리는 동안 내내 A4 용지로 부채질을 하면서 합죽선을 가지고 오지 않은 것을 아쉬워하였다.

 

  요즈음에 사람들이 들고 다니는 부채를 보면, 전통부채 외에 현대부채도 있다. 현대부채는 전체를 플라스틱으로 만들었거나 플라스틱으로 살을 만들어 양쪽에 종이를 접착한 살부채, 종이에 인쇄를 하여 필름으로 코팅을 하고 자루를 끼운 부채 등 다양하다. 이들은 바람을 내는 데는 별 문제가 없겠지만, 가지고 다니기에는 불편한 일회용품이다. 합죽선이나 오죽선은 오래 사용할 수 있고, 가지고 다니기에 좋으며, 품위가 있어 보인다.

 

  얼마 전에 만난 선배가 가방에서 합죽선을 꺼내 부채질을 하고, 거기에 쓰인 한시를 풀어주던 모습이 떠오른다. 합죽선을 애용하는 것은 각자의 건강을 챙기면서 무형문화재의 전승과 보존에 도움을 주는 일이기도 하다. 합죽선을 가지고 다니면서 더위를 식히는 한편, 옛사람들의 정취를 느끼는 사람이 많았으면 좋겠다. (2019. 8.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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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주에 경남 고성군 하이면의 와룡산 낙서암에서 수행하고 있는 스님을 만났다. 그와 나는 오래 전에 사제의 연을 맺은 사이이다. 그동안 만나고 싶으면서도 차일피일 미루며 몇 년을 흘려보냈다. 그것은 먼 곳까지 갈 시간을 내기 어려웠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불교 신자도 아닌 내가, 세상과 인연을 끊고 출가한 스님을 만나는 일이 수행(修行)에 방해가 되는 것은 아닐까 저어하는 마음 때문이었다. 그러다가 더 이상 미루다가는 아주 못 만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 용기를 냈다.

 

   그와 어렵사리 통화하여 만날 날을 정한 뒤에 조용히 앉아 그와의 인연을 생각하였다. 그는 45년 전, 내가 서울에 있는 중학교 교사로 재직할 때 담임했던 반의 학생이다. 그는 근면 · 성실하고 책임감이 강하며, 지도력도 있는 학생이었다. 그는 나를 잘 따랐고, 2학년 때와 3학년 때에 반장으로 반을 잘 이끌었다. 반장 역할을 잘 하여 담임교사인 내가 자질구레한 일에 마음을 쓰지 않도록 해주었다. 나는 그를 사랑하고, 신뢰하였다. 꽃을 좋아하는 그는, 우리 집에 올 때에는 가정 형편이 좋지 않아 용돈이 부족할 터인데도, 꽃다발이나 작은 화분을 사서 들고 왔다. 시를 좋아하는 그는 2학년 때부터 시를 써서 보여주곤 하더니, 3학년 때에는 《잎을 모아서》라는 시 모음집을 들고 왔다. 펜으로 꼬박꼬박 눌러 쓴 시 모음집에는 따뜻하고 고운 마음을 담은 시들이 가득하였다. 나는 국어과 교사로, 시를 읽고 써보라고 권장은 하였지만, 능력이 부족하여 시 쓰기 지도는 제대로 하지 못해 미안하였다.

 

   그는 중학교를 졸업할 때 대광고등학교에 배정받았다. 나는 교회에 열심히 다니는 그가 기독교학교에 진학하게 된 것을 기뻐하며 진심으로 축하해 주었다. 그가 고등학교를 졸업할 무렵, 나는 가정 형편이 어려운 그가 대학에 진학하는지 궁금하였다. 그러나 소식을 알 길이 없어 답답하였다. 얼마 뒤에 그가 긴 글을 보냈는데, 세상을 비관하고, 모든 인연이 끝이라고 하는 말이 이어졌다. 나는 그 편지가 유서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어 가슴이 철렁하고, 눈물이 앞을 가렸다. 그런데 편지 맨 끝에 “세상 어딘가에 살아 있겠습니다.”라는 말이 적혀 있었다. 그래서 안도의 한숨을 쉬었지만, 궁금한 마음은 금할 수 없었다.

 

   몇 년 뒤에 다시 편지가 왔다. 출가하여 행자(行者) 노릇을 한 뒤에 승가대학을 마치고, 계(戒)를 받아 스님이 되었다며 법명(法名)을 적어 보냈다. 얼마 뒤에는 군에 입대하여 군종사병으로 근무하다가 휴가 나왔다면서 내가 근무하는 대학으로 찾아왔다. 그날 간단히 식사를 하고 헤어진 뒤로 한동안 소식이 없더니, 1984년에는 잎을 모아서 제2집을 보내왔다. 군 생활 3년 동안 쓴 작품들을 타자기로 쓴 시 모음집이었다. 맨 뒷면에 ‘스승님의 은덕을 기리며—제자 000 드림’이라고 쓰여 있었다.

 

   그 후 몇 년 동안 소식이 없었다. 나는 그가 수행의 정도가 깊어지면서 나를 잊은 것이라 생각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 그가 죽로차(竹露茶) 한 통을 보내왔다. 그 통 속에는 ‘스님들이 마시려고 댓잎에 맺힌 이슬을 먹고 자란 찻잎을 따서 만든 차’라는 쪽지가 들어 있었다. 나는 그가 나와 인연을 끊은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 흐뭇하였다. 이 일로 나는 녹차의 맛을 알게 되었다.

 

   또 몇 년 동안 소식이 없던 그가, 서울예술대학 문예창작과에 진학하여 시 공부를 한 뒤에 시인으로 등단하였고, 시집도 출판했다면서 시집 出出家를 보내왔다. 그 뒤에는 한동안 선원(禪院)에 들어가 참선(參禪)하였고, 태국에 가서 1년 동안 수행을 하였다는 소식을 전해 왔다. 얼마 뒤에는 낙서암에 자리를 잡았다는 소식과 함께 그 동안 사찰을 옮겨 다니느라 자주 소식을 전하지 못했다고 하였다. 그 뒤로는 매년 스승의 날이면 녹차를 선물로 보내왔다. 나는 그에게 나의 정년기념문집과 수필집 등을 보내 근황을 알리며 오늘에 이르렀다.

 

   서울에서 승용차를 몰고 5시간을 달려 고성의 약속 장소에 가니, 그가 먼저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군복 입은 모습을 본 뒤로 35년만의 상봉이다. 반갑고 떨리는 마음으로 악수를 하고, 얼굴을 자세히 살펴보았다. 곱던 얼굴과 천진하던 표정은 온화하고, 너그러운 표정으로 변해 있었다. 그리고 환갑을 맞이한 스님답게 긴 세월 수행하여 얻은 고상한 품격이 보였다. 마주 앉아 그동안 지내온 일과 근황을 이야기하다 보니 아주 정겹고, 흐뭇하였다. 함께 간 아내와 김 교수 내외가 옆에서 거드는 바람에 분위기는 더욱 훈훈하였다. 기독교인인 나는 그와 종교가 달랐지만, 전에 맺은 인연의 끈이 분위기를 어색하지 않게 감싸 주었다.

 

   한 시간쯤 대화하던 우리는 차에 올라 그가 홀로 수행하고 있는 낙서암으로 향하였다. 와룡산 중턱에 있는 천진암에 차를 세우고, 산길을 오르기 시작하였다. 경사가 심한 데다가 바위와 돌이 많아 걷기 힘든 길이었다. 김 교수 내외는 그를 잘 따라 올라갔지만, 나와 아내는 숨을 몰아쉬며 천천히 걸었다. 아내는 끝내 오르기를 포기하였고, 나는 30분 이상 걸려 낙서암에 도착하였다. 그는 이렇게 힘든 길을, 필요한 물건을 등에 지고 오르내린다고 하였다. 이 길을 걸어 암자에 오르는 일만도 고된 수행이라 하겠다.

 

   와룡산 향로봉 아래에 자리 잡고 있는 낙서암의 풍광(風光)은 아주 좋았다. 뜰에 활짝 피어 있는 흰색․보라색 수국을 비롯한 여러 꽃과 나무들은 이 암자의 분위기를 아주 안정되고, 고즈넉하게 하였다. 부처님을 모신 법당 앞에서 사진을 찍은 뒤에 그가 거처하는 산방(山房)에 들어가 보았다. 잘 정돈된 방에는 책이 쌓여 있고, 그 옆에는 LP판이 가득 꽂힌 장과 턴테이블(turntable)이 놓여 있다. 선(禪)과 음악 감상은 마음을 닦는 데에 상승작용을 할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창문 밖에 놓인 의자에 앉아보니, 멀리 보이는 남해바다와 그 앞의 산들이 조화를 이루어 조망이 환상적이다. 아름다운 자연 속에서 마음을 닦고, 음악을 들으며 시상을 가다듬어 시를 쓰는 그의 모습을 생각하니, 아주 고상하고 멋스럽게 느껴진다. 깊은 산속에서 혼자 지내며 수행하는 지금의 생활에 만족한다는 그의 말이 허언이 아닌 것 같다.

 

   빗방울이 떨어지는 것을 본 나는 하산을 서둘렀다. 나는 그가 우리를 배웅하러 산을 내려갔다가 비를 맞으며 올라올 일을 걱정하며 낙서암 앞에서 작별 인사를 하려 하였다. 그러나 그는 산을 내려가 식사대접을 하겠다며 앞장서서 내려갔다. 우리는 천진암으로 와서 차를 타고 연꽃단지 앞에 있는 식당 <연담>으로 가서 연잎정식을 먹으며 담소하였다. 저녁을 먹은 뒤에 다시 차를 타고 천진암으로 와서 작별하였다. 그가 잡아준 숙소로 돌아와 그가 준 시집 산색(山色)과 선물꾸러미(죽로차와 황진단)를 열어보니, 45년 전에 맺은 인연의 끈이 예쁘게 서려 있다. 나는 그의 얼굴을 떠올리며 연꽃단지에서 본 ‘이제염오(離諸染汚)’란 말을 넣어 기원하였다. 진흙탕에서 자라는 연꽃이 진흙에 물들지 않고 예쁜 꽃을 피우듯이 주변의 환경이나 부조리에 물들지 말고 정진(精進)하여 덕이 높은 스님이 되소서!(2019. 07.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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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떤 일을 할 때에는 일관되게 지켜야 하는 원칙이 있다. 이 원칙은 상황에 따라 법으로 정하기도 하고, 사회적인 관습이나 규범, 또는 종교적인 교리로 행해지기도 한다. 이 원칙은 보다 나은 생활환경을 만들고, 다수의 이익이나 공동의 선을 추구하기 위한 것이 대부분이다. 그러므로 원칙은 철저하게 지켜져야 그 원칙을 정한 본래의 뜻을 살릴 수 있다.

 

   그러나 원리원칙 만을 내세우면, 그에 따른 부작용이 생길 수도 있다. 그러므로 원칙을 지키되, 그 일의 형편에 따라 적절하게 처리하는 지혜를 발휘해야 한다. 이를 ‘융통성’이라고 한다. 원칙만을 고집하면 ‘융통성 없는 사람’이 되고, 융통성이 지나치면 ‘줏대 없는 사람’, 또는 ‘이중적인 사람’이 된다.

 

   친구가 카톡으로 보낸 글 <원칙과 배려 사이에서>는 원칙을 지키는 일과 융통성을 발휘하는 일에 관해 생각하는 계기를 마련해 주었다. 70세 노인이 생일날 차를 몰고 치과에 가서 치료를 받고 나와 보니, 경찰관이 주차위반 범칙금 고지서를 쓰고 있었다. 그가 경찰관에게 치통이 심하여 제대로 주차를 하지 못한 사정을 말하고, “오늘이 내 생일인데 ‘재수 없는 70회 생일’이 되지 않도록 좀 봐 주세요.” 하였다. 이때 사람들이 모여들어 이 일을 어떻게 처리하나 지켜보고 있었다. 경찰관은 무표정한 얼굴로 그에게 범칙금 고지서를 써서 주고 떠났다. 그는 법이 그러니 어쩔 수 없다는 마음으로, 고지서를 받아들고 차에 올랐다. 그가 벌금이 얼마인가 보려고 고지서를 펴보니, ‘생신을 축하합니다. 어르신!’ 하고 적혀 있었다.

 

   경찰관이 주차위반 차량에 범칙금을 부과하는 것은 법으로 정한 원칙이다. 그러나 경찰관은 70번째 생일을 맞이한 노인이 치통으로 급한 마음에 길가에 차를 세웠으니 좀 봐 달라는 말을 못 들은 체하기 어려웠다. 그는 노인이 주차위반을 하여 교통의 흐름을 크게 방해한 것도 아니어서, 그대로 보내주고 싶었다. 그러나 이를 어떻게 처리하나 보려고 지켜보고 있는 주위 사람들 때문에 그럴 수가 없었다. 그래서 범칙금 고지서를 발부하면서, 범칙금 액수 대신 생일을 축하한다는 말을 써서 주었다. 그가 융통성을 발휘함으로써 지방자치단체는 범칙금을 받지 못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는 노인과 구경꾼들에게 주차위반을 하면 범칙금을 내야 한다는 강한 메시지를 주면서도, 노인과 그 가족들이 즐거운 마음으로 생일을 보낼 수 있게 해 주었다. 그의 훈훈한 마음은 노인과 그 가족들의 마음에 전달되어 경찰관을 신뢰하는 마음을 갖게 하였을 것이다. 이것은 주차위반 범칙금 수입을 올리는 것 이상의 긍정적인 효과를 거둔 것이라 하겠다.

 

   내가 채록한 옛날이야기 중에 <며느리의 효성을 알아준 판결>이 있다. 효성이 지극한 며느리가 시아버지의 생일에 술을 담갔다가 드렸다. 시아버지는 이웃집에 사는 친구 생각이 나서 그를 청하였다. 술을 본 이웃노인은 금주령을 위반하였다고 꾸짖고, 이를 원님에게 고변(告變)하였다. 원님은 세 사람을 불러 문초하였다. 며느리는, 약주를 좋아하시는 시아버지가 연로하셔서 내년 생신을 맞이할 수 없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에서 금주령을 위반하였으니, 처벌하여 달라고 하였다. 시아버지는, 약주를 좋아하는 자기 때문에 생긴 일이니, 자기를 벌하고 며느리는 용서해 달라고 하였다. 이웃노인은, 금주령을 위반한 것을 보고, 그대로 있을 수 없어서 고변하였다고 하였다. 조사를 마친 원님은, 시아버지에게는 무죄를 선고하였다. 며느리에게는 금주령을 위반한 죄로 벌금 천 냥을 선고한 뒤에, 효성을 치하하는 상금 천 냥을 내린다고 하였다. 이웃노인에게는 충성심이 높다고 칭찬한 뒤에, “준법정신을 발휘하여 금주령 위반 사례를 하루에 세 건씩 고변하라. 그렇지 못하면 볼기 석 대를 때리겠다.”고 하였다. 이 이야기에서는 융통성 있는 판결을 한 원님의 지혜가 돋보인다.

 

   유가(儒家)에서는 ‘남녀칠세부동석(男女七歲不同席, 일곱 살 이상의 남녀는 한 자리에 앉지 않음)’과 ‘남녀는 물건을 주고받을 때에도 직접 손을 맞대지 않는 것’을 성인 남녀가 지켜야 할 예(禮)라고 하였다. 이를 곧이곧대로 지킨다면, 형수가 물에 빠져도 손을 잡아 건질 수 없다. 이에 대해 맹자는 물에 빠진 형수의 손을 잡아 건지는 것은 ‘권도(權道)’로 잘못된 것이 아니라고 하였다. 이 역시 원칙 지키기와 융통성에 대한 좋은 가르침이라 하겠다.

 

   신약 성경을 보면, 이스라엘 사람들은 안식일에는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일 외에는 어떤 일도 해서는 안 된다고 하였다. 예수께서는 안식일에 찾아온 병자를 고쳐 주시면서, 원리주의자들인 바리새파 사람들에게 ‘안식일에 선한 일을 하는 것, 목숨을 구하는 일을 하는 것’이 잘못된 일이냐고 따져 묻는다. 이에 바리새파 사람들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한다.[마가복음 3:1~6] 이 역시 교리의 준수도 좋지만, 상황에 따라 융통성을 발휘해야 함을 말해 준다.

 

   모든 일에는 원칙이 있고, 그 원칙은 지켜야 한다. 그러나 때로는 주변 상황을 살펴 법이나 규범, 교리의 실천을 잠시 뒤로 물리고, 상황에 맞게 처리하는 융통성도 있어야 한다. 이럴 경우에 융통성은 재량의 범위를 크게 벗어나지 말아야 하고, 원칙을 뒤로 물리더라도 큰 문제가 발생하지 않으면서, 그에 못지않은 유익이나 긍정적인 효과를 가져 올 수 있어야 한다. 이런 원칙을 지키지 않는 융통성은 불법을 저지르게 되기도 하고, 더 큰 부작용을 낳게 할 수도 있다. 원칙 지키기와 융통성 사이에는 이런 원칙이 지켜져야 한다.(2019. 07. 06.)

 

  

   얼마 전에 한 친구가 경기도에 백두산 천지를 연상케 하는 호수가 있다고 하였다. 호기심이 생겨 어디냐고 물으니, 경기도 가평군 청평면 상천리에 있는 호명호수라고 하였다. 약속한 날에 상봉역에서 그 친구를 만나 함께 경춘선 열차를 타고 가다가 상천역에서 내렸다. 등산로로 걸어 올라가는 것은 힘들 것 같아 상천역에서 버스를 타고 올라갔다.

 

   산 아래에 있는 제1주차장에서 호명호수까지 올라가는 길은 약 3.8km이다. 버스 운전기사는 익숙한 솜씨로 경사가 심하고 꼬불꼬불한 산길을 달려 올라갔다. 호젓한 길 좌우에는 온갖 나무와 풀이 저마다의 멋진 자태를 뽐내고 있어 매우 훌륭하고 멋졌다. 관광버스 기사들이 이 길을 환상의 드라이브 코스로 꼽는다는 말이 실속이 없는 빈말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10분쯤 달려 호수 앞 광장에 내리니, 앞이 탁 트이며 넓은 호수가 보였다. 해발 538m나 되는 산의 꼭대기에 이런 호수가 있다는 것이 놀라웠다.

 

   호수 앞에 세운 받침대에는 하늘을 나는 거북이 앉아 있다. 호수에는 크게 만든 거북 한 마리와 오리 한 쌍이 정겹게 떠 있다. 거북은 물에 사는 신령스러운 존재로, 신의 사자(使者)장수(長壽)를 상징하는 동물이다. 오리는 물로 인한 재앙에서 인간을 구원하고, 가뭄에 물을 가져다주어 풍요를 이루게 하며, 변치 않는 애정을 보여주는 신이한 존재로 믿는 새이다. 이런 상징성을 지닌 거북과 오리는 호수를 찾는 사람에게 신비로우면서도 편안한 분위기를 느끼게 해 주는 것 같다. 가지런히 쌓은 돌둑에 안겨 있는 푸른 물은 일렁일 때마다 햇빛을 반사하여 반짝인다. 호수를 감싸고 있는, 느긋하고 부드러우면서도 장엄한 산은 자기 모습의 일부를 호수 가장자리에 띄우고 있다. 파란 하늘에 떠 있는 뭉게구름도 이에 질세라 멋진 모습을 호수에 드리우고 있다. 산 정상에서 수려한 산세와 어우러져 빼어난 경관을 보여주는 호수를 보니, 놀라움과 함께 감탄의 말이 절로 나왔다.

 

   이 호수는, 깊은 밤에 남아도는 전기를 이용해 청평호 인근의 물을 산꼭대기로 끌어올려 저장하였다가, 전기 수요가 많을 때 그 물을 흘려보내어 전기를 일으키는 양수발전소(揚水發電所)의 상부에 만든 인공저수지이다. 이 저수지는 높이 62m, 길이 290m, 수심은 55m이며, 호수 둘레는 1.6km이다. 1975년에 착공하여 1980년에 준공하였다. 만수(滿水) 면적은 149,400(45,000), 총 저수량은 267만 톤이다. 이 물을 730m 아래에 있는 지하발전소로 보내어 일으킬 수 있는 전기의 양은 약 40라고 한다.

 

   호명산은 예로부터 산세가 빼어나고 조망이 좋기로 이름난 산이다. 여기에 큰 호수가 만들어졌으니, 그 경관이 멋지고 아름다운 것은 당연하다. 자연경관이 수려한 곳에는 많은 사람들이 찾아오게 마련이다. 가평군에서는 경관이 빼어난 이곳을 여러 사람들에게 휴식처로 제공하려는 뜻에서 한국수력원자력()와 업무 협약을 맺고, 2008년부터 호명호수공원으로 개방운영하고 있다. 지금 이곳은 가평 8경 중 제2경으로 선정되었고, 많은 사람들이 찾는 관광명소가 되었다.

 

   호명호수공원 안내도를 본 뒤에 오른쪽으로 발길을 옮겼다. 잘 정돈된 소나무 숲에 호랑이 형상의 커다란 조형물이 있고, 그 옆에 호명산의 유래를 적은 표지판이 서 있다. 호명산의 유래를 읽은 뒤에 호수의 맑은 물을 바라보며 둑길을 조금 걸어가니, 산위에 전망대가 있다. 전망대에 올라 산 아래를 바라보니, 청평호 주변의 물과 산이 어우러진 풍경이 정말 장관이다. 아름답고 멋진 풍경을 바라보고 있으니, 마음이 시원하고 평온해 진다.

 

   멋진 광경을 본 뒤에 커피로 그림 그리는 화가 최달수 씨가 운영하는 호명갤러리로 들어갔다. 안에는 판매하는 음료와 케이크가 있고, 안쪽에 최씨의 여러 작품이 전시되어 있다. 작품은 모두 커피로 그린 그림인데, 커피의 색깔과 농도를 잘 조절하여 여러 모양과 분위기를 섬세하게 묘사하여 신비하고 이채롭다. 작품을 보고 있노라니, 다채로운 커피의 향이 그림에서 풍겨 나오는 듯하였다.

 

   갤러리에서 나와 호수 둘레의 길을 걸으며 주변의 경관, 잘 가꾼 꽃과 나무, 내방객을 위한 휴식처, 각종 시설물 들을 찬찬히 살펴보았다. 높이 세워놓은 자원개발의 새 기원탑을 볼 때에는 첩첩산중에 저수지를 마련하여 자원개발의 기원(紀元)을 이룬 일이 자랑스럽고 뿌듯하게 느껴졌다. 한국전력 순직사원 기념탑 앞에서는 전력보국(電力報國)의 큰 뜻을 펼치다가 순국하신 사원들의 숭고한 정신을 기리며 머리를 숙였다.

 

   이 산에는 산 이름과 관련된 전설이 전해 온다. 옛날에 한 스님이 계곡의 물에 몸을 씻고 있는데 수캉아지 한 마리가 오더니, 그 곁을 떠나지 않았다. 스님은 이 산에 암자를 짓고 수행하면서, 그 강아지와 함께 지냈다. 강아지는 자라면서 호랑이의 모습이 나타났다. 다 자란 호랑이가 정상에 있는 큰 바위에 올라 크게 울자 근처에 살던 암호랑이가 찾아왔다. 둘은 바위 밑 동굴로 들어가 사랑을 나누었다. 그 뒤로 나라에 큰 일이 있을 때마다 동네 사람들은 이 동굴로 피신하여 화를 면하였다. 사람들은 이 산을 호랑이가 우는 산이라 하여 호명산(虎鳴山)’이라고 하였다. 아기 갖기를 원하는 여인들이 호랑이의 정기를 받아 수태(受胎)하려고, 이 동굴에 와서 백일기도를 드리면 효험이 있었다고 한다. 호랑이가 울던 바위와 동굴은 호명호수를 만들 때 파헤쳐져서 지금은 그 흔적조차 볼 수 없다.

 

   호명산은 신령스러우면서 무서운 호랑이가 살고, 마을사람들이 난리를 피하던 동굴이 있던, 깊고 험한 산이다. 이런 산에 양수발전소의 상부 저수지를 만든 것은 자연과 과학을 아우르는 놀라운 발상이었다. 이러한 발상이 자원개발의 성과를 이루고, 호명호수공원이라는 관광명소를 만들어냈다. 이 공원이 널리 알려져 많은 사람이 자연과 과학이 조화를 이룬 현장을 보면서, 이러한 일을 이루기 위해 애쓴 사람들의 노고를 되새겼으면 좋겠다.(2019. 6.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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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며칠 전에 교일산우회 회원들과 함께 서울 동작구 상도동에 있는 지덕사부묘소(至德祠附墓所)를 찾았다. 조선 태종의 장남이자 세종의 큰형인 양녕대군(讓寧大君)의 사당과 묘소가 있는 곳이다. 이곳에는 11,888평의 대지에 9평의 사당과 서고 및 제기고 등 세 동의 건물이 있다. 사당의 후면에 양녕대군과 정경부인 광산 김씨를 합장한 묘소가 자리하고 있다. 묘소 앞에는 장명등과 묘비 및 문인석이 좌우에 2기씩 서 있다. 이곳은 1972년 8월 30일 서울특별시의 유형문화재 제11호로 지정되어 재단법인 지덕사에서 관리하고 있다.

 

   나는 잘 정돈된 이곳을 찬찬히 둘러보며 양녕대군의 삶을 생각해 보았다.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을 보면, 양녕대군은 1394년(태조 4년) 3대 태종이 된 이방원(李芳遠)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의 이름은 제(禔)이고, 자는 후백(厚伯), 시호는 강정(剛靖)이다. 그는 10세 때인 1404년(태종 4년)에 세자로 책봉되었고, 13세 때 김한로(金漢老)의 딸과 혼인하였다. 그는 15세에 명나라에 사신으로 가서 황제의 환대를 받았고, 그 뒤에 일 년 동안 아버지 태종의 대리청정(代理聽政)을 하였다. 그는 일 처리에 부족함이 없었고, 시와 서예에도 뛰어났으며, 아버지 태종의 사랑도 깊었다. 그래서 다음 왕위에 오르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는 대세였다. 이러한 그가 세자 자리에서 밀려난 까닭은 무엇일까?

 

   그는 자유분방(自由奔放)한 성격 탓에 부왕 태종의 기대에 어긋나는 행동을 하곤 하였다. 그는 대궐을 벗어나 사냥을 즐기고, 여색에 빠져 많은 문제를 일으켰다. 그 중 특이할 만한 것은 곽선(郭璇)의 첩 어리(於里)와 정을 통한 일이다[조선왕조실록 태종 17년(1417) 2월 15일조]. 이 일을 안 태종은 크게 노하여 세자를 장인 김한로의 집으로 쫓아 보냈다. 이에 세자는 즉시 개과천선(改過遷善)하겠다는 긴 맹세의 글을 올렸다. 태종은 이를 받아들여 세자를 환궁하게 하고, 이 일과 연루된 구종수와 이오방 등은 참수하였다[태종 17년(1417) 2월 22일조].

 

   그 이듬해에 세자가 다시 어리를 대궐로 불러들여 아이까지 갖게 한 일이 알려졌다[태종 18년(1418년) 5월 10일조]. 또 태종이 늦둥이 아들 성령대군(誠寜大君)이 죽어 슬픔에 잠겨 있을 때 세자가 궁중에서 활쏘기놀이를 하였다는 사실도 알려졌다. 이에 분노를 느낀 태종은 세자의 출궁과 알현(謁見)을 금한다는 명을 내렸다. 그리고 어리의 궁중 출입을 도운 장인 김한로의 직첩을 거둔 뒤 죽산(竹山, 경기도 안성)에 부처(付處, 벼슬아치에게 어느 곳을 지정하여 머물러 있게 하던 형벌)하였다. 그런데 근신하고 있어야 할 세자가 자신에게 내린 부왕의 처벌이 부당하다는 글을 직접 작성해 올렸다[태종 17년(1417) 5월 30일조]. 이 항명으로 태종은 세자를 바꿀 마음을 굳혔다. 그러자 조정 대신들이 세자를 폐위하라는 상소를 올렸다. 그래서 양녕대군은 14년 만에 세자의 자리에서 밀려났고, 그 자리는 셋째 아우인 충녕대군에게 돌아갔다[태종 18(1418) 6월 3일조]. 이러한 사실로 보아 양녕대군이 세자 자리에서 밀려난 것은 그의 일탈(逸脫)된 행동 때문이었다.

 

  조선왕조실록 선조 34년 2월 10일조에는 선조가 신하들과 여섯째아들 순화군(順和君)이 함경도에 가서 행패를 부린 일을 논의하는 대목이 나온다. 이 때 선조는 “옛날에 양녕대군이 매우 광패(狂悖, 미친 사람처럼 말과 행동이 사납고 막됨.)하였으므로 외방(外方)에 두었으나 제어하지 못하였다.”고 말한다. 이것은 사실에 기초한 양녕대군에 대한 부정적 평가가 선조 때까지 이어졌음을 말해 준다.

 

  이러한 부정적 평가는 임진왜란 이후에 ‘양녕대군은 세종에게 왕위를 양보한 지혜롭고 덕이 넘치는 인물’로 바뀐다. 인조 때의 문신 김시양(金時讓, 1581~1643)은 자해필담(紫海筆談)에서 “세자가 된 양녕대군이 태종의 뜻이 충녕에게 있는 것을 알고, 일부러 미친 체하고 사양하니, 태종이 그를 폐하고 충녕을 세자로 세웠다.”고 하였다. 실학자 이긍익도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에서 “양녕대군은 뛰어난 문장가였지만, 스스로 미친 척하고 방탕한 생활을 하였다. 이러한 양녕대군의 진심을 아는 이는 없었다.”고 하였다. 양녕대군에 대한 평가가 긍정적으로 바뀌는 것은 조선 왕실의 입장에서 보면, 조상의 이미지를 좋게 하는 일이므로 적극 지원하였을 것이다.

 

   지덕사는 1675년 숙종의 명으로 서울 남대문 밖 도저동(桃渚洞)에 세운 것이다. 이를 1912년 일제의 압박으로 묘소가 있는 현재의 위치로 옮겼다. 지덕이란 이름은 논어(論語) 권8 <태백편(太白篇)>에서 따온 것이다. 중국 주(周)나라 태왕(太王)이 셋째아들 계력(季歷)에게 왕위를 물려주려고 하였다. 이를 안 맏아들 태백(太伯)이 둘째 동생 중옹(仲雍)과 함께 형만(荊蠻)으로 달아나 왕위를 사양하였다. 훗날 이를 두고 공자는 태백을 ‘지덕(至德, 더할 수 없이 훌륭한 덕)’이라고 칭송하였다. 여기서 따다가 사당 이름을 붙인 것 역시 양녕대군에 대한 긍정적 평가의 소산이다.

 

   왕위를 동생에게 물려준 양녕대군은 격식이나 관습에 얽매이지 아니하고 자유롭게 행동하며 살았다. 내가 채록한 <살아서는 왕의 형, 죽어서는 부처님의 형> 이야기는 그러한 삶의 단면을 말해 준다. 불심이 두터운 그의 아우 효령대군이 절에 가서 재를 올리면서 절 둘레에 황토를 놓고, 금줄을 쳐 놓았다. 그런데 양녕대군이 시종들과 함께 바로 그 절 마당에 와서 화톳불을 피우고, 사냥한 고기를 구워 먹었다. 이를 본 효령대군이 마당으로 나와 형에게 절을 하고, 그 이유를 물었다. 양녕대군은 크게 웃고 나서 말했다. “지금 도(祹, 세종)가 왕 노릇을 하고 있으니, 나는 살아서는 왕의 형이다. 너는 불심이 지극하니, 성불(成佛)하여 부처님이 될 것 아니냐? 그러니, 나는 죽어서는 부처님의 형이 될 것이다. 그래서 죽기 전에 내 모습을 부처님께 보이려고 왔다.”고 하였다.

 

   지덕사 사당 안에는 세조 어제(御製)의 금자현액(金字懸額), 허목(許穆)의 <지덕사기(至德祠記)>, 정조 어제 지덕사기, 양녕대군이 친필로 쓴 소동파(蘇東坡)의 후적벽부(後赤壁賦)·팔곡병풍 목각판·숭례문(崇禮門) 현판의 탑본 등이 보관되어 있다. 도난당해 소재를 모르던 숭례문 현판을 2019년 5월에 찾았다고 한다. 2008년에 방화로 소실되었던 숭례문이 2013년 5월에 복원되었다. 그 때 이 현판이 있었더라면 제 자리에 걸 수 있었을 터인데, 그러지 못한 것이 아쉽다.

 

   지덕사 뒤에는 양녕대군이 올라 멀리 경복궁을 바라보며 나라와 세종의 일을 걱정하였다는 국사봉(國思峰)이 있다. 지덕사에서 나온 나는 국사봉을 향해 걸으며 양녕대군의 처신에 관해 생각해 보았다. 세자의 자리에서 밀려나게 한 그의 일탈된 행동이 동생에게 세자 자리를 양보하려는 마음에서 나온 것인지, 아닌지는 알 수 없다. 그런 행동을 할 만큼 자유분방한 성품을 지닌 그가 왕이 되었다면, 행복할 수 있었을까? 백성을 보살펴야 한다는 중압감과 여러 가지 격식과 제약을 견뎌내며 선정을 베풀 수 있었을까? 이에 대한 나의 대답은 부정적이다. 그는 이러한 틀을 벗어 던졌기에 세종 때에는 왕의 형으로, 그 뒤에는 왕실의 어른으로 대접을 받으며, 타고난 성품대로 자유롭게 살다가 68세에 세상을 떠났다. 세 살 아래인 세종보다 12년을 더 살았다. 왕의 자리보다는 타고난 성품대로 사는 길을 택한 그의 처신은 잘한 일이라는 생각이 든다.(2019. 06. 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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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며칠 전 친구들과 서울시 성북구 아리랑로 19길 116(정릉동)에 있는 정릉(貞陵)을 찾았다. 정릉은 조선의 태조 이성계의 계비(繼妃)인 신덕왕후(神德王后) 강씨(康氏)의 능이다. 서울 강남구 삼성동에 있는 정릉(靖陵)은 조선 11대 중종의 능으로, 한글 음은 같으나 한자가 다르다. 정릉(貞陵)에 들어가 보니, 토요일 오전인데도 탐방객이 많지 않아 조용하였다. 능은 입구부터 정결하게 정리되어 있고, 능 둘레의 나무와 풀은 새잎이 돋아 연초록의 아름다움을 자랑하고 있다. 신록(新綠)이 꽃보다 아름답다는 말을 실감하게 하였다. 나는 신록 사이로 난 능 둘레의 산책로(2.5km)를 걸으며 능의 주인공인 신덕왕후 강씨와 태조 이성계(李成桂), 태조의 다섯째 아들로 나중에 왕위에 올라 태종이 된 방원(芳遠) 사이에 얽힌 사랑과 미움에 관해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정릉에 묻힌 신덕왕후 강씨는 태조 이성계의 경처(京妻)이다. 고려 시대의 벼슬아치들은 첩은 인정하지 않고, 고향에 둔 향처(鄕妻)와 개성에 둔 경처(京妻)를 똑같이 처로 인정하였다. 이성계는 고려 조정에 벼슬하기 전에 함경도 영흥에서 한씨와 결혼하였다. 그리고 벼슬을 한 뒤에 권문세가(權門勢家)인 강윤성(康允成)의 딸과 혼인하여 경처를 두었다. 이성계가 강씨와 만나게 된 일화가 전해 온다. 이성계가 몹시 목이 말라 우물로 가서 우물가에 있는 처녀에게 물을 청하였다. 그녀는 바가지에 물을 뜨더니, 버들잎을 훑어 띄워 주었다. 그가 이상히 여겨 연유를 물으니, 그녀는 갈증이 심할 때 급히 물을 마시다가 체할까 봐 그리 하였노라고 하였다. 그는 그녀의 지혜롭고 사려(思慮) 깊은 언행에 마음이 끌려 혼인하였다고 한다. 이성계는 한씨와의 사이에서 6남 2녀, 강씨와의 사이에서 2남 1녀를 두었다.

 

  함경도 영흥 출신인 이성계가 고려를 뒤엎고 조선을 건국하는 데에는 당시 권문세족(權門世族)이었던 강씨 일족의 도움이 컸다. 이성계의 여섯 아들도 창업을 도왔지만, 가장 큰 역할을 한 것은 총명하고 재능이 있으며 정치적 욕망이 큰 다섯째 아들 방원이었다. 방원은 지혜롭고 정치적 감각이 뛰어난 강씨와 힘을 합하여 이성계의 조선 창업에 많은 공을 세웠다. 이성계가 창업에 성공하여 왕위에 오르자 강씨는 왕비로 책봉되어 신덕왕후가 되었다. 한씨는 조선을 개국하기 한 해 전인 고려 공양왕 3년(1391)에 사망하였으므로, 신덕왕후는 조선의 첫 왕비가 되었다.

 

  왕후가 된 신덕왕후는 자기가 낳은 아들이 왕위를 계승하게 하려고 하였다. 방원은 자기가 아버지의 뒤를 이어 왕이 되려고 하였다. 두 사람은 지향하는 목표가 상충되었기에 맞부딪힐 수밖에 없었다. 태조의 사랑을 받고 있는 왕후는 조정의 실세인 정도전의 도움을 받아 자기가 낳은 아들 방석(芳碩)을 세자의 자리에 앉혔다. 이것은 생사의 길을 넘나들며 공을 세우고, 정치적 욕망을 키워온 방원으로서는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 앞길을 막는 장애물을 제거하지 않고는 자기의 뜻을 펼 수 없게 된 방원은 제1차 왕자의 난을 일으켜 세자로 책봉된 방석을 비롯한 비호세력을 제거하였다.

 

  신덕왕후가 1396년 병으로 세상을 떠나자 태조는 크게 슬퍼하며 능역(陵域)을 황화방(皇華坊, 지금의 정동)에 정하였다. 그는 왕후의 봉분 오른쪽에 자신의 수릉(壽陵, 죽기 전에 미리 만들어 두는 임금의 무덤)을 정하고, 능호(陵號)를 ‘정릉’으로 정하였다. 그리고 그 동쪽에 재궁(齋宮) 흥천사(興天寺)를 세워 자주 행차했다. 둘째 형인 방과(芳果, 제2대 정종)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방원(제3대 태종)은 아버지인 태조가 세상을 떠나자, 신덕왕후에게 품고 있던 미움과 원망을 드러냈다. 그래서 1409년(태종 9) 정릉을 사을한(沙乙閑) 골짜기로 옮겼다. 그리고 종묘에 부묘(祔廟, 삼년상이 지난 뒤에 그 신주를 종묘에 모심)하지 않고, 왕비의 제례를 폐했다. 1410년 태종은 정릉의 정자각(丁字閣)을 헐고, 정릉의 병풍석과 십이지신상(十二支神像) 등 석물을 큰비로 유실된 토교(土橋) 광통교(廣通橋)를 석교(石橋)로 개축하는 데에 사용했다. 그 밖의 석재나 목재들은 태평관(太平館)을 지을 때 부속재로 이용했다. 그래서 정릉은 일반인의 묘와 다를 바 없게 되었고, 200여 년 동안 아무도 찾지 않는 묘가 되었다.

 

  신덕왕후가 자기의 아들을 세자에 앉혀 다음 왕위를 물려받게 하려고 한 것은 인지상정(人之常情)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그 앞에는 장성한 한씨 소생의 아들들이 여섯이나 버티고 있었다. 특히 총명하고, 정치적 욕망이 클 뿐 아니라, 많은 지지 세력과 사병(私兵)을 가지고 있는 방원이 있었다. 그녀는 이러한 엄연한 현실을 가볍게 생각하고, 욕심을 부린 것이다. 그녀가 방원의 존재를 제대로 인식하였더라면, 방석을 세자로 삼는 일을 자제하거나, 더 세심한 배려를 했어야 한다. 그렇지 못하였기 때문에 그녀는 비록 자기가 죽은 뒤이기는 하지만, 어린 두 아들과 딸을 비명에 죽게 만들었다. 그리고 자기의 무덤이 옮겨지고, 왕비의 제례도 받지 못하는 수모를 당하였다. 이것은 그녀의 지나친 정치적 욕망이 가져온 비극이다.

 

  방원은 신덕왕후가 왕후의 지위를 이용하여 자기의 오랜 꿈을 짓밟고, 이복동생을 죽이지 않고는 꿈을 이룰 수 없는 상황을 만들어 놓은 데 대한 미움과 원망이 컸을 것이다. 그리고 이복동생을 죽였다는 오명(汚名)을 쓰고 살아야 하는 괴로움, 태조로부터 동생을 죽인 패륜아 취급을 당한 아픔은 그녀에 대한 미움과 원망을 더욱 깊게 만들었을 것이다. 그는 태조가 세상을 떠나자, 왕후의 능을 파서 옮기고, 왕후의 직첩을 빼앗았으며, 제례도 올리지 못하게 하였다. 이러한 그의 처사는 사감(私感)에서 나온 것으로, 도를 넘은 것이고, 나라의 정통성을 훼손하는 일이라는 비판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당대에는 아무도 말을 못하다가 72년이 지난 1581년(선조 14)에 드디어 삼사(三司, 임금에게 직언하던 세 관아. 사헌부, 사간원, 홍문관)에서 신덕왕후 강씨의 시호(諡號)와 존호(尊號)를 복귀하고, 정릉을 회복하자는 논의가 있었다. 그 뒤로 88년이 지난 1669년(현종 10) 송시열(宋時烈) 등이 다시 신덕왕후 강씨를 종묘에 배향해야 한다는 차자(箚子, 일정한 격식을 갖추지 않고 사실만을 간략히 적어 올리던 상소문)를 올렸다. 그래서 본격적인 복구 작업을 하여 오늘에 이르게 되었다. 장명등(長明燈, 무덤 앞에 세운 석등)과 혼유석(魂遊石, 넋이 나와 놀도록 한 돌이라는 뜻으로, 상석과 무덤 사이에 놓는 직사각형의 돌) 앞의 받침돌인 둥근 고석(鼓石)은 옛것이나 나머지는 현종 때 새로 세워진 것이다.

 

  나는 정릉 산책로를 걸은 뒤에 홍살문을 나서면서 권력을 탐하는 사람의 말로가 어떠한가를 다시 한 번 생각하였다. 신덕왕후는 자기가 낳은 아들을 무리하게 왕위에 앉히려다가 아들을 죽게 만들었을 뿐만 아니라, 자기의 무덤이 파헤쳐지고, 왕후의 봉호가 없어졌으며, 제사가 끊기는 수모를 당했다. 방원은 왕좌를 차지하였지만, 역사에 이복동생을 죽였다는 오명(汚名)을 남기게 되었고, 아버지 태조로부터 동생을 죽인 패륜아 취급을 당하였다. 권력을 탐하는 사람은 여생이 평안할 수 없다는 평범한 이치는 예나 지금이나 다를 것이 없다. 욕심을 자제하고, 성실하게 사는 것이 말년의 평안함을 보장하는 일임을 잊지 말아야겠다. (2019. 5.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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