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2월 성탄절 무렵부터 1월 초에 예년과 다름없이 많은 연하장을 받았다. 전에는 예쁜 그림이나 사진을 인쇄한 카드에 감사의 말과 새해를 축하하는 글을 정성껏 적어 우편으로 보낸 카드 연하장이 많았다. 그런데 요즈음에는 이메일 또는 스마트폰의 카카오톡이나 문자메시지로 보내는 사이버 연하장이 많다. 카드 연하장이든 사이버 연하장이든 한 해를 보내고 새해를 맞으면서, 부족한 나를 잊지 않고 보내준 것임을 생각하면 반갑고, 기쁘고, 고맙기 그지없다.

 

  연하장은 신년을 축하하면서 소원이 이루어지기를 비는 마음을 주고받은 데서 시작되었다. 서양의 연하장은 15세기 독일에서 아기 예수의 모습과 신년을 축복하는 글이 담긴 카드를 동판(銅版)으로 인쇄한 것이 시초이다. 18세기 말에 명함에 그림을 넣는 풍습이 생겨났는데, 독일·오스트리아·프랑스 등지에서는 이를 친지들에게 보내는 새해 인사장으로 사용하였다. 19세기 후반부터 영국과 미국에서 크리스마스카드를 주고받는 일이 널리 퍼지면서, 성탄 축하와 신년 인사를 함께 인쇄하여 썼다.

 

  동양의 경우, 한(漢)나라 때 명첩(名帖, 또는 拜帖)이라 하여, 처음 방문하는 사람이 상대에게 자신의 이름, 고향, 직함 따위를 적어 건네는 풍습이 있었다. 신년에는 거기에다 안부를 묻거나 덕담을 담은 간략한 문구를 추가했다. 이것이 연하장의 시초라 할 수 있다. 명첩은 한나라 때에는 대나무 조각을 평평하게 다듬어 썼고, 종이가 발명된 뒤에는 붉은 색 종이에 썼다. 명나라 때에는 사대부집 대문에 연하장을 받는 봉투까지 매달아 두었다고 한다.

 

  조선의 연하장에 관하여는 정조·순조 때의 학자 홍석모(洪錫謨)가 쓴 《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의 기록을 눈여겨 볼만하다. 설날에 의정대신은 모든 관원을 거느리고 대궐에 가서 새해 문안을 드리고, 신년을 하례하는 내용의 전문(箋文)을 지어 바쳤다. 각 관청의 벼슬아치들은 이름을 쓴 명함을 관원이나 선생의 집에 들였다. 그 집에서는 대문 안에 옻칠한 쟁반을 두고 이를 받아들였는데, 이를 세함(歲銜)이라고 하였다. 각 지방의 관청에서도 그렇게 하였다고 한다. 문 밖 출입이 자유롭지 못한 중류 이상 가정의 부인들은 자기 집의 여종을 곱게 차려 입혀 인사드려야 할 어른들을 찾아뵙도록 하였다. 이를 ‘문안비(問安婢)’라고 불렀다. 문안비를 맞은 집에서는 자기 집의 종을 보내 답례하였다. 이 때 문안비는 새해를 축하하며 축원하는 서장(書狀)을 들고 다녔다고 한다. 여기에 나오는 신년하례 전문과 세함, 서장에서 연하장의 연원을 찾을 수 있다.

 

  이러한 풍속은 이어서 행해지다가 대한제국 말기에 우편제도가 생겨나면서 점차 사라지고, 연하전보(年賀電報)와 연하우편(年賀郵便)이 등장하였다. 여기에 서양 문화의 영향이 겹쳐 성탄카드와 연하장을 주고받는 풍속이 생겨 널리 퍼졌다. 처음에는 본인의 글씨나 그림에 인사말을 적어 보내더니, 얼마 뒤에는 예쁜 그림이나 사진에 축하의 말을 적은 카드를 인쇄하여 사용하였다. 카드 연하장이 성행하던 때에는 예쁘게 만들어서 파는 연하장, 우체국에서 만든 연하장, 각 기업이나 대학에서 자체적으로 만든 연하장이 있었다. 이 시기의 연하장에는 국내외의 아름다운 풍경이나 문물(文物)의 사진, 예쁜 그림, 정성껏 쓴 글씨, 축원의 뜻을 담은 인사말 등이 망라되어 있었고, 모양이나 종이의 질도 좋은 것이 많았다. 이때에는 연하장을 주고받는 일이 빼놓을 수 없는 연례행사였다. 이 시기의 우체국 직원들은 ‘연하장 홍수’를 처리하느라 수고가 많았다.

 

  산업사회가 지식정보사회로 바뀌면서 종이 연하장은 사이버 연하장에게 자리를 넘겨주었다. 사이버 연하장은 선명한 사진이나 그림·글과 함께 음향도 넣어 입체감을 살릴 수 있다. 보내는 것도 아주 간편하고, 비용이 들지 않으며, 동시에 여러 사람에게 보낼 수 있다. 그래서 요즈음에는 많은 사람들이 사이버 연하장을 주고받는다. 그에 따라 연말연시가 되면 우편함에 넘쳐나던 연하장은 자취를 감추고, 청구서나 광고물만이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다.

 

  연하장을 받으면―사이버 연하장이든 종이 연하장이든 관계없이― 보낸 사람을 만난 듯 반갑고, 기쁘고, 고맙다. 그런데 사이버 연하장의 경우, 그림이나 문구·배경음악이 눈에 익고, 이미 들은 것 같은 느낌이 들 때가 있었다. 그래서 자세히 살펴보니, 인터넷 공간에 떠도는 것이었다. 이것은 다른 사람한테 받은 파일을 다시 나에게 보낸 것이리라. 이럴 때에는 연하장을 보내준 것은 고맙지만, 지극히 형식적인 것이어서, 그 기쁨과 반가움이 반으로 줄었다.

 

  연하장을 받으면, 나는 빠뜨리지 않고 바로 답장을 보낸다. 사이버 공간에 떠도는 연하장을 받아 기쁨이 반감되었던 경우를 몇 번 경험한 나는, 답장을 보낼 때에는 그 사람에게 맞는 말을 적어 보내거나, 내 손으로 직접 연하장을 만들어 보낸다. 컴퓨터를 켜서 지난해에 찍은 사진 중에서 적합 것을 고른 뒤에 거기에 새해를 축하하며 축원하는 말을 쓰고, 내 이름을 적어 연하장 파일을 만든다. 이 파일을 프린터로 인쇄하여 우편으로 보내거나, 사진으로 찍어 카카오톡이나 문자메시지로 보낸다.

 

  답장을 할 때, 사이버 연하장일 경우에는 받은 문자메시지나 카카오톡의 창을 열고 바로 답장을 보낸다. 그러나 우편으로 받은 연하장은 인쇄하여 봉투에 넣고, 주소와 우편번호를 써야 한다. 그리고 우체국에 가서 우표를 사서 붙인 뒤에 부쳐야 하므로, 좀 번거롭게 느껴진다. 우편물을 자주 보내던 몇 년 전만 하여도 연하카드나 우표를 미리 사다놓고 썼으므로 불편함을 느끼지 않았다. 그러나 요즈음에는 우편으로 서신을 주고받는 일이 드물기 때문에 카드나 우표를 사다 놓지 않는다. 그래서 좀 번거롭게 느껴지기도 하지만, 즐거운 마음으로 답장을 보낸다.

 

  새해를 축하하는 전문이나 세함에서 시작된 신년 축하의 글이 손수 그림을 그리거나 글을 써서 정성껏 만드는 연하장으로 바뀌었다. 이것이 인쇄술과 우편제도의 발달에 힘입어 아름다운 사진이나 그림을 넣고 복된 글을 적어 인쇄한 카드 연하장 시대를 열었다. 카드 연하장은 지식정보사회를 맞으면서 사이버 연하장으로 바뀌었다. 나는 이런 연하장의 변화를 보면서 풍속이나 문화는 그 사회의 변화와 함께 하는 것임을 실감하였다. 앞으로 연하장이 어떻게 진화할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새해를 맞는 기쁨과 복된 새해를 축원하는 마음을 나누는 것은 변함이 없으리라 생각한다.(2020. 01. 16.)

  지난 연말에 친구들이 모여 점심을 먹은 뒤에 다음 달 모임을 언제 할 것인가를 상의하였다. 그때 한 친구가 1월 넷째 주는 ‘구정’이 낀 주여서 복잡하니, 한 주 전이나 뒤에 만나자고 하였다. 이 말이 나오자마자 옆에 있던 다른 친구가 웃으며 “‘구정’이 뭐야. ‘설’이라고 해야지!” 하면서 나를 쳐다보았다. 이 일이 있은 뒤에 만난 사람이나 TV에 나오는 사람 중에도 우리의 전통명절인 ‘설’을 ‘구정’이라고 하는 사람이 많았다.

 

  설은 음력 1월 1일로, 한 해의 건강과 풍요를 기원하는, 우리나라 최대 명절이다. 새해의 첫날이란 뜻으로, 한자어로는 원일(元日)·원단(元旦)·원정(元正)·정일(正日)·세수(歲首)·연수(年首)라고 한다. 또, 새로운 해의 첫날이니, 말이나 행동을 삼가고 조심하여 맞이해야 한다는 뜻으로 신일(愼日) 또는 달도(怛忉)라고도 한다.

 

설의 어원에 대하여는 몇 가지 설이 있다. 설은 ‘설다’에서 파생한 말로, ‘익숙하지 않은 새해의 첫날’이란 뜻이 있다고 한다. ‘섧다’에서 온 말로, 한 살 더 먹어 점차 늙어가는 처지를 서글퍼하는 뜻이 담겨 있다고도 한다. ‘사리다’에서 파생한 말로, ‘삼가고 조심하는 날’이라는 의견도 있다. 이와는 달리 설을 쇠면 한 살 더 먹게 되므로, ‘설’이 사람의 나이를 헤아리는 단위로 정착하여 ‘살’로 바뀌게 된 것이라고 하기도 한다. 그러나 확실하지는 않다.

 

   설에 대한 기록을 보면, 7세기에 나온 중국의 역사서인 수서(隋書)》와 당서(唐書)에 “신라에서는 매년 원단(元旦)에 서로 경하(慶賀)한다. 왕이 연희를 베풀고, 여러 손님과 관원들이 모인다. 이날 일월신(日月神)에게 배례(拜禮)한다.”라고 하였다. 삼국유사(三國遺事) 권1 「사금갑(射琴匣)」조에는 신라 21대 비처왕(毗處王, 炤知王이라고도 함.)이 쥐·까마귀·돼지의 도움으로 받은 서찰에 적힌 대로 거문고의 집을 쏴서 궁주(宮主)와 정을 통한 중을 죽였다. 그 후 해마다 상해(上亥)·상자(上子)·상오(上午)일에는 만사를 꺼려 근신하였다. 정월 보름에는 찰밥을 지어 까마귀에게 주었다. 이를 민간에서는 ‘달도(怛忉)’라고 하였다고 한다. 달도는 설의 다른 이름이기도 하므로, 이 기록에서 설의 유래를 알 수 있다. 그 후 고려 시대와 조선 시대를 거쳐 오면서, 설은 추석과 함께 우리 민족의 큰 명절로 지켜왔다.

 

   역법에는 지구가 태양의 둘레를 한 바퀴 도는 데 걸리는 시간을 1년으로 정한 태양력(太陽曆), 달이 지구를 한 바퀴 도는 시간을 기준으로 만든 태음력(太陰曆), 달과 태양의 움직임을 모두 고려하여 만든 태양태음력(太陽太陰曆, 음력이란 말은 이를 가리키는 것임.)이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오래 전부터 태양태음력을 써 왔으므로, 음력 1월 1일이 설날이었다. 1896년 1월 1일(음력으로는 1895년 11월 17일, 고종 32년)에 태양력을 받아들여 쓰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설은 전과 다름없이 음력으로 쇠었다. 일본은 메이지유신(1868년) 이후 음력을 폐지하고 양력을 사용하면서, 양력 1월 1일을 새해의 첫날로 정하였다.

 

   일제강점기에 일본은 우리의 전통문화 말살 정책의 일환으로, 음력 1월 1일에 설을 쇠지 못하게 하고, 양력 1월 1일에 설을 쇠도록 강요하였다. 이때 양력 1월 1일을 '신정(新正)'이라 하고, 그에 대응하는 음력 1월 1일을 '구정(舊正)'이라고 하였다. 그 결과 신정을 쇠는 사람이 생겨나서 그 수가 조금씩 늘어갔다. 일제는 우리 민족이 설에 떡국을 비롯한 명절음식을 만들어 먹고, 설빔을 입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겨 설 무렵이면 떡 방앗간을 폐쇄하고, 설빔으로 입고 나오는 어린이들의 새 옷에 먹칠을 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전통적인 설을 지키려는 우리 민족의 뜻을 꺾지는 못하였다.

 

  이런 사회적 분위기는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뒤에도 이어졌다. 그래서 우리의 전통적인 설과 신정을 명절로 쇠는 이중과세(二重過歲) 풍속이 생겨났다. 정부에서는 이중과세는 낭비가 많다는 이유로 설을 금하고, 신정을 권장하였다. 국제적 추세에 맞추어서 신정에 쉬고, 설에는 다른 나라와 마찬가지로 일해야 국제수지에 차질이 생기지 않는다는 것이 그 명분이었다. 그러면서 신정 3일간을 공휴일로 지정하였다.

 

   그러나 절대다수의 국민들은 음력 1월 1일을 전통적인 명절로 지켰다. 그래서 세찬을 준비하여 차례를 지내고 성묘하며, 설빔을 입고 세배하며 덕담을 나누었다. 그리고 설날을 전후한 여러 가지 민속도 행하였다. 많은 사람들이 고향을 찾는 귀성(歸省) 행렬이 전국으로 퍼지는, 이른바 ‘민족대이동’도 변함없이 이어졌다. 정부는 국민 다대수가 명절로 여기는 설을 외면할 수 없었다.

 

  오랫동안 공휴일 또는 비공휴일 지정 문제로 몇 차례 오락가락하던 정부는 1985년에 설날을 ‘민속의 날’이라 하고, 하루를 공휴일로 지정하였다. 그러나 이 명칭은 어색하고 궁색하여 국민의 호응을 얻지 못하였다. 그러다가 1989년 음력 정월 초하루부터 본명인 ‘설날’을 공식적으로 사용하고, 사흘을 공휴일로 지정하였다. 이에 맞춰 신정 공휴일은 하루로 축소되었다. 이때 각종 언론매체에서는 70∼80년 만에 설날을 되찾았다며 떠들썩했었다. 그에 따라 설날에 대한 국민의 인식이 달라지고, 설은 추석과 함께 2대 전통명절로 자리매김을 확실히 하였다.

 

  이처럼 구정으로 일컬어졌던 ‘설·설날’이 오늘날과 같이 본명을 찾기까지는 우리 민족 수난의 역사와 함께 진통을 겪었다. 어렵게 찾은 이름인 ‘설·설날’을 일제에 의해 신정(新正)의 상대적 개념으로 쓰던 구정(舊正)이라고 말하는 것은 우리의 전통명절 설을 폄하하는 뜻이 담겨 있다. 그런데도 아직도 설을 구정이라고 하는 사람을 보면 안타깝기 그지없다. 이제는 ‘설·설날’이라는 본래의 이름을 두고 구정이라고 하는 사람이 없었으면 좋겠다.(2020. 1.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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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8월 20일에 아내와 함께 ‘명보아트시네마’에 가서 영화 <사랑의 선물>을 관람하였다. 이 영화는 탈북자 출신의 김규민 감독이, 북한 황해도에서 있었던, 한 가족의 사랑을 다룬 슬픈 이야기이다. 나는 며칠 전에 우연히 김 감독이 TV에 출연하여 이 영화에 관해 말하는 것을 들었다. 그 순간 북한 출신 감독이, 북한에서 실제로 있었던 일을 다룬 영화라면, 북한의 실상을 제대로 알릴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인터넷에서 상영관을 알아내어 극장을 찾아갔다.

   이 영화의 내용은 1998~1999년 대기근 때 북한 황해도에서 실제로 있었던 일이라고 한다. 당을 위해 열심히 일을 하다가 하반신이 마비된 상이군인 남편 김강호(출연배우 문영동)와 헌신적인 아내 이소정(출연배우 김소민), 그리고 열 살 된 딸 효심(출연배우 김려원) 등 세 명의 가족이 겪는 비극적인 사건이다. 아내는 가족의 생계와 아픈 남편의 병 치료를 위해 힘든 일·궂은일을 가리지 않고 몸이 으스러지도록 일을 한다. 그러나 남편의 약값을 댈 수 없어 여기저기에서 돈을 꾸어 쓰고, 마침내는 자기 몸까지 팔게 된다. 그러다가 매춘행위를 단속하는 경찰에게 잡혀 어려움을 겪는다. 그녀에게 돈을 빌려준, 그 지역의 핵심 당 간부는 이 일을 약점으로 그녀를 위협하여, 남편이 상이군인이 되면서 받은 집을 빼앗으려고 한다. 아내는 딸 효심의 생일날, 어렵게 마련한 돈으로 쌀밥에 계란국을 마련한다. 남편이 돈이 어디서 났느냐고 추궁하자, 아내는 둘러대다가 나중에 ‘장군님 접견자’가 되어 상을 받았다고 거짓말을 한다. 이 말을 들은 남편은 장군님이 주신 ‘사랑의 선물’이라며 감격한다. 그러나 삶에 지친 아내와 남편은 서로에게 부담이 되지 않기 위해, 각자 쥐약을 사서 먹고 생을 마감한다.

   영화에서 남편은 돈의 출처를 바로 말하지 못하는 아내에게 “비사회주의자로 낙인찍히면 누가 거들떠볼 것 같으냐?”고 힐난한다. 참다못한 아내는, “당신이 쓰러질 때마다, 아파서 병원에 입원할 때마다 맞는 주사랑 약들은 다 어디서 나는데요?” 하고 따진다. 남편이 “그거야 다 병원에서······.” 라고 말끝을 흐리자 아내는, “요즘 어느 병원에서 주사를 주고 약을 주느냐?”고 소리친다. 그리고 “죽을 만큼 힘들어요. 하루하루가 지옥 같아요. 절약이요? 뭐가 있어야 절약을 하죠!” 하고 울부짖는다. 이 말은 살아보려고 몸부림쳐보았지만, 어찌 할 수 없는 아내의 절규(絶叫)이면서, 동시에 배고픔을 달랠 길 없는 주민들의 외침일 것이다. 북한에서는 ‘고난의 행군’을 강조하면서 자력갱생(自力更生, 남의 힘에 의지하지 않고 자기 힘으로 어려움을 타파한다)과 간고분투(艱苦奮鬪, 고난과 시련을 이겨내면서 있는 힘을 다해 싸운다)로 ‘사회주의 낙원’을 건설하자고 하였다. 이런 선동의 말에 나오는 ‘낙원’은 독재자 김씨 일가와 그의 추종자들이 ‘권력을 독점하며 잘 먹고 잘 사는 곳’으로, 북한 주민에게는 허황한 구호일 뿐이다. 또 다른 장면에서 아내는 “남조선이 ‘갖다 바친 쌀’을 배급받은 적이 없다”고 한다. 이 말은 남한에서 그동안 보낸 쌀이 주민들에게는 배급되지 않았음을 말해 준다.

   나는 영화를 보면서 국민을 먹여 살리지 못하는 북한의 암담한 현실에 절망감을 느꼈다. 입으로는 고난의 행군과 당에 대한 충성을 말하면서 주민의 약점을 이용하여 자기 잇속을 챙기는 당 간부의 파렴치한 행동에 분노하였다. 그들이 말하는 구호나 약속이 허황된 선동의 말인 줄 알면서도 따르겠다고 서약할 수밖에 없는 무기력한 남편의 처지에는 연민을 금할 수 없었다. 아내의 가족에 대한 사랑과 헌신, 순진무구한 딸의 말과 행동에는 측은지심(惻隱之心)을 넘어 슬픔이 엄습하였다.

   김 감독에 따르면, 이 영화는 북한의 인권문제를 다룬다는 이유로 호응을 얻지 못해 배우 캐스팅(연극이나 영화에서 배역을 정함)부터 국내 개봉까지 어려움이 많았다고 한다. 투자자가 나서지 않아 최소의 비용으로 만들어야 했으므로, 제작비가 3억 원밖에 들지 않은 초저예산 영화가 되었다. 어린이의 배역을 정할 때에는 촬영 현장에 보호자가 따라옴에 따르는 비용을 줄이기 위해 고심하다가 자기의 딸을 캐스팅하였다고 한다. 어렵게 제작을 마치고 국내에서 상영하려고 하니, 정부의 친북정책과 이에 따른 사회 분위기 때문에 상영관을 구할 수 없었다. 그래서 먼저 해외 영화제에 출품하여 영국독립영화제에서 최우수 작품상을, 퀸즈국제인권영화제에서 여우주연상을 받았다. 아울러 밀라노국제영화제, 홍콩 PUFF영화제, 보스턴국제영화제, 런던국제영화감독축제, 오클랜드국제영화제 등에서 공식 상영되거나 수상후보작에 뽑혔다. 이렇게 해외에서 상을 받고, 작품성을 인정받은 뒤에 국내로 들어와 일부의 극장에서 상영하게 되었다고 한다. 이것은 북한의 인권문제를 다룬 영화는 발붙일 곳이 없는 우리의 현실을 단적으로 말해 준다.

   북한의 식량난이나 인권문제가 심각한 것은 세계가 다 아는 일이다. 그런데도 북한은 허세를 부리며 한국의 식량 지원을 거절하고 있다. 주민의 먹고 사는 문제도 해결하지 못하며 인권을 탄압하는 북한 집권층의 태도에 실망과 분노를 느끼지 않을 수 없다. 이를 대하는 대한민국 정부는 북한의 비위를 맞추려고 북한의 인권 문제에 입을 다물고 있고, 탈북민을 돕는 일에도 소홀히 하고 있다. 이런 사회적 분위기 때문에 탈북 모자가 굶어 죽는 사건이 일어났고, 그에 따른 대처도 제대로 되지 않고 있다. 이러고도 대한민국이 인권을 존중하는 나라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많은 사람이 이 영화를 보면서 북한의 실상을 제대로 알았으면 좋겠다. (2019. 08. 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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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달에 친구들과 ‘우애 깊은 형제 이야기’의 현장 두 곳을 찾았다. 한 곳은 <의좋은 형제>, 다른 한 곳은 <금덩이를 강물에 던진 형제> 이야기의 배경이 된 곳이다. 두 이야기는 오랜 동안 초등학교 교과서에 실려 있어서 널리 알려진 이야기이다. 오래 전에 왔던 곳을 다시 찾으니, 감회가 새로웠다.

  충남 예산군 대흥면사무소 앞에는 ‘이성만(李成萬)·이순(李淳) 형제 효제비’가 있다. 이 지역에 살던 형제가 부모님이 살아계실 때에는 정성을 다하여 모시고, 돌아가시자 형은 어머니의 묘소, 동생은 아버지의 묘소에서 여묘(廬墓, 무덤 근처에서 여막을 짓고 살면서 무덤을 지킴)하였다. 이들은 아침에는 형이 동생의 집에 가고, 저녁에는 동생이 형의 집에 가서 조석으로 함께 식사하였는데, 국 한 그릇이 있어도 함께 하지 않으면 먹지 않았다. 이들의 지극한 효성과 우애를 기리기 위해 1497년(연산군 3년) 2월에 왕명으로 이 비를 세웠다고 한다. 이들의 효행과 우애에 관하여는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권20 <대흥현조(大興縣條)>에도 실려 있다. 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102호인 이 비 옆에 ‘의좋은 형제 공원’이 조성되어 있다. 이곳에서는 여러 가지 행사를 하면서 이들 형제의 효행과 우애를 기리고 있다.

   이 지역에는 오래 전부터 이들 형제를 모델로 한 이야기가 전해 온다. 옛날에 의좋은 형제가 아래위 마을에 살았다. 어느 해 가을, 벼 베기를 끝낸 뒤에 형은 새살림을 차린 동생에게 많은 벼를 주려고 하였다. 그러나 동생이 조상의 제사를 받드는 형이 더 많이 가져야 한다고 해서 좀처럼 해결이 되지 않았다. 하루는 밤에 형이 볏단을 져다가 동생의 낟가리에 놓았다. 그날 밤 동생도 몰래 볏단을 져다가 형의 낟가리에 놓았다. 이튿날 아침, 형이 낟가리를 보니, 볏단이 그대로여서 이상하게 생각하였다. 동생 역시 낟가리를 보니, 그 수가 줄지 않았으므로 이상하게 여겼다. 두 사람은 이상하게 여기면서 밤마다 볏단을 형은 동생의 낟가리에, 동생은 형의 낟가리에 져다 놓곤 하였다. 어느 어두운 밤, 전과 같이 각각 볏단을 지고 가던 형과 아우는 마을 앞 다리에서 서로 부딪혀 넘어지게 되었다. 그제야 두 사람은 볏단이 줄지 않은 까닭을 알았다고 한다. 초등학교 교과서에 실려 있던 이 이야기에는 아우를 사랑하며 배려하는 형의 마음과 형을 공경하며 사랑하는 동생의 마음이 잘 나타나 있다.

   한강 하류에 놓인 방화대교 남단의 북쪽 강변에는 ‘서서 금덩이를 던지려는 사람과 앉아서 이를 지켜보는 남자가 탄 배’가 있다. 그 옆의 안내판에는 이를 설명하는 ‘투금탄(投金灘) 이야기’가 적혀 있다. 이 이야기는 《고려사 열전》 권34 <효우정유전(孝友鄭愈傳)>에 처음 전하는 것으로,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와 《신증동국여지승람》권10 <양천현산천(陽川縣山川) 공암진조(孔巖津條)>에도 실려 있다.

   고려 공민왕 때 형과 함께 길을 가던 동생이 황금 덩어리 두 개를 주웠다. 아우는 그것을 형과 한 덩이씩 나누어 가졌다. 공암나루에 이르러 배를 타고 강을 건너는데, 별안간 아우가 금덩어리를 강물에 던졌다. 형이 그 이유를 물으니, 동생은 “내가 평소에는 형을 사랑하였으나, 지금 금덩어리를 나누고 보니 형을 미워하는 마음이 생겼습니다. 이것은 상서롭지 못한 물건이니, 차라리 강물에 던지고 잊어버리는 것이 좋겠어서 그랬습니다.”라고 말했다. 이 말은 들은 형은 “네 말이 과연 옳구나.” 하면서 역시 금덩어리를 강물에 던졌다. 이 이야기에는 황금보다 우애를 더 중요하게 여기는 형제의 마음이 잘 나타나 있다.

   초등학교 교과서에 실려 있던 두 이야기는 형제 우애의 소중함을 일깨우고, 실천을 강조하는 기능을 해 왔다. 나는 우애의 극치를 보여주는 두 이야기의 현장을 돌아보면서 우애에 관해 잠시 생각해 보았다. 옛 사람들은 형제간의 우애를 효 다음으로 지켜야 할 덕목으로 꼽으면서, 우애의 실천을 강조하였다. 그래서 전에는 우애로운 가정이 많았고, 우애 관련 미담도 널리 전하여 왔다. 그러나 요즈음에는 자녀의 수가 적은 데다가 개성을 존중하는 의식이 팽배(澎湃)하여 자기 본위의 이기적인 생각을 가지고 살고 있다. 그래서 우애를 강조하는 사람을 보수적인 사람, 또는 세상 물정을 모르는 사람으로 여기게 되었다.

   며칠 전에는 돈 문제로 다투던 58세의 형이 49세의 동생을 죽인 사건이 일어나 사람들을 놀라게 하였다. 아버지의 장례를 치른 형제들이 남은 조위금 분배 문제로 크게 다퉜다는 이야기나, 유산 상속 문제로 다투던 형제자매가 왕래를 끊고 지낸다는 이야기는 이제 새삼스럽게 들리지도 않는다. 재산 문제로 형제간에 다투는 사람이 몇 년 전만 하여도 일곱 집 중 한 집 정도였는데, 요즈음에는 세 집 중 한 집 정도로 많아졌다고 한다. 이런 일로 미루어 보면, 이제 돈 앞에서는 우애를 헌신짝처럼 던져버리는 세상이 된 것 같아 마음이 어두워진다.

   나는 어렸을 때 ‘형우제공 부감원노(兄友弟恭 不敢怨怒, 형은 우애하고 아우는 공손히 하여 감히 원망하거나 성내지 말아야 한다.)’란 말을 듣고, 이를 실천하려고 애쓰며 살아왔다. 퇴계(退溪) 이황(李滉) 선생은 <퇴계가훈(退溪家訓)>에서 “형은 아우보다 먼저 태어났으니, 아우 되는 이는 형을 반드시 공경하라. 아우는 형보다 뒤에 태어났으니, 형 되는 이는 반드시 아우를 사랑해야 한다. 형제간엔 재물을 잊어버리고, 언제나 마음을 천륜(天倫)에 두어야 한다. 만약 이해를 따지면, 불화를 가져오게 될 것”이라고 하였다. 형제 사이에 재물이 끼어들고, 이해를 따지게 되면 불화할 수밖에 없으니, 천륜을 생각하며 마음을 다잡으라는 퇴계 선생의 가르침은 가슴 깊이 새겨야 할 교훈이다.

   일찍이 장자(莊子)는, “형제는 수족과 같고, 부부는 의복과 같다. 의복은 찢어지면 새 것으로 바꿔 입을 수 있으나, 수족은 끊어지면 다시 이을 수 없다.”고 하여 우애의 소중함을 강조하였다. 이 말은 부부관계를 폄하(貶下)한 듯하여 아쉬움이 있지만, 우애를 강조한 뜻은 깊이 새겨둘 만하다.

   우애하는 마음을 갖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부모는 자녀에게 우애의 소중함을 일깨우고, 이를 실천하도록 가르쳐야 한다. 그리고 스스로 자기 형제자매와 우애롭게 지내야 한다. 부모가 스스로 우애하는 모습을 보여주지 않으면, 그 가르침은 효과를 거두지 못할 것이다. 또, 자녀가 둘 이상일 때에는 편애(偏愛)하지 말아야 한다. 편애는 자녀의 마음에 불화의 씨앗을 심어놓는 것이다. 그 씨앗이 싹이 터서 자라면, 우애는 민들레 홀씨처럼 공중으로 날아가 흩어져 버리고 말 것이다. 자녀들에게 우애로운 형제의 미담을 들려주는 것도 우애하는 마음을 심어주는 데에 큰 도움이 될 것이다. 우애 깊은 형제 이야기의 현장을 찾아보며 그 이야기의 의미를 되살려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2019. 12. 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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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초등학교와 중학교 교사로 10여 년, 대학 교수로 30여 년 간 학생을 가르치는 일을 하였다. 그래서 나에게는 초등학교와 중학교, 대학·대학원에서 가르친 제자가 많이 있다. 그중에는 가끔씩 만나는 사람도 있고, 자주 만나는 사람도 있다. 이를 아는 지인 중에는 나를 ‘제자 잘 둔 사람’이라고 하는 사람도 있다. 그런데 나보다 제자를 잘 둔 사람도 많이 있다. 나를 보고 제자 잘 둔 사람을 꼽으라고 한다면, 나는 주저하지 않고 내 제자인 김 교수를 꼽는다.

 

  나와 김 교수는 그가 대학 2학년 때 내 강의를 수강하면서 학연을 맺었다. 그 뒤에 옮겨간 대학교의 대학원에서 박사과정 지도교수와 학생으로 다시 만나 학문의 동반자가 되었다. 김 교수는 대학에서 정년퇴임을 하였고, 이제는 나와 함께 늙어가는 사이가 되었다. 그런데도 그가 나를 대하는 태도는 전과 다름없이 깍듯하다. 나는 그와 자주 만나 학문·신앙에 관하여 이야기하기도 하고, 부부동반으로 국내·외를 여행하기도 한다. 이를 아는 사람들은 부럽고 존경스럽다고 입을 모은다.

 

   김 교수는 진실한 마음으로 제자들을 대하고, 자상하게 지도하는 교육자이므로, 그를 따르는 제자들이 많이 있다. 그 중에서 나의 관심을 끄는 사람은 그가 초등학교 교사 시절에 가르친 제자들이다. 젊은 교사 시절에 어린 학생과 맺은 사제의 인연이 40여 년이 지난 오늘까지 이어오고 있다니, 정말 특이하고 귀한 일이다. 그 중에는 의사들도 있고, 사업가와 회사 생활을 하는 사람도 있다고 한다. 의사 제자들은 “선생님의 건강은 저희들이 책임지겠습니다.”라고 하면서, 그의 건강을 정성으로 보살펴준다고 한다. 그가 50대 후반이 된 이들과 나누는 정은 ‘아름다운 사제의 정’이라 칭송할 만하다. 나는 그의 제자 두 사람에게 신세를 졌다.

 

   몇 년 전의 일이다. 아내가 어깨 통증이 심하여 동네 병원에 다녔으나 차도가 없었다. 이 말을 들은 김 교수는, 종합병원 정형외과에 근무하는, 초등학교 시절의 제자 K 교수를 소개해 주었다. 그는 내 아내를 ‘존경하는 김 선생님의 사모님’이라면서 정성스레 진찰하고, 치료해 주었다. 그 덕으로 아내는 병이 나아 지금까지 큰 불편 없이 지내고 있다. 그 일이 있은 뒤에 아내는 두 차례나 K 교수의 도움을 받았다. 한 번은 가슴의 통증 때문에, 또 한 번은 시신경(視神經)에 문제가 생겨 K 교수를 다시 찾았다. 그는 먼저는 순환기내과, 그 다음에는 신경과 의사에게 진료를 받도록 주선해 주었다. 그의 부탁을 받은 두 교수는 ‘K 교수 은사의 사모님’이라는 말을 듣고, 아주 친절하게 대하며 정성껏 진료해 주었다. 제자를 잘 둔 김 교수 덕으로, 아내는 의사를 신뢰하면서 편안한 마음으로 진료를 받고 건강을 회복하였다. 고맙기 그지없는 일이다.

 

   2년 전의 일이다. 김 교수는 스위스에 살고 있는 초등학교 교사 시절의 제자가 여러 곳을 안내해 준다고 하니, 함께 가자고 하였다. 그래서 아내와 함께 김 교수 부부를 따라 스위스에 갔다. 공항에 마중 나온, 김 교수의 제자 P씨는 50대 중반으로, 스위스에서 20년째 살고 있으며, 보험회사 임원으로 일하고 있다고 하였다. 그는 존경하는 김 선생님을 위해 1주일 휴가를 얻었다면서, 자기 승용차로 우리를 태우고 스위스의 여러 곳을 탐방하였다. 그가 아주 세밀하게 일정을 짜서 안내하였으므로, 우리는 아주 알찬 여행을 하였다. 여행 중에 그가 김 교수를 대하는 말과 행동은 진정한 사랑과 존경에서 나오는 것이어서 내 마음을 흐뭇하게 해주었다.

 

   지난달에는 김 교수 내외와 함께 오스트리아와 독일, 체코를 여행하였다. 이번에도 스위스에 사는 P씨가 일주일 휴가를 얻어, 우리를 자기의 승용차에 태워 자연경관이 아름다운 곳과 유서 깊은 곳을 안내하였다. 그래서 체코의 크룸로프 성, 오스트리아의 미라벨 궁전·잘츠부르크 성·볼프 강·스와로브스키 크리스탈 월드, 독일의 히틀러 별장과 소금산 작업장 등을 탐방하였다. 세계적인 음악가 모차르트의 생가와 기념관, 영화 <사운드 오브 뮤직>의 촬영지도 가 보았다. 이런 여행을 할 수 있었던 것은 김 교수와 P씨 사이에 오가는 아름다운 사제의 정이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이번 여행에서 큰 기쁨과 보람, 감동과 함께 P씨에게 감사한 마음을 가득 안고 돌아왔다.

 

   나는 제자를 잘 둔 김 교수 덕에 K 교수를 만나 아내의 건강을 되찾게 하였다. 그리고 P씨를 만나 두 차례나, 알차게 유럽여행을 하였다. 나는 K씨와 P씨가 40년의 세월이 흐른 오늘에도 김 교수에게 존경과 사랑을 표하는 것을 보면서 사제 간에 흐르는 따뜻한 정을 느낄 수 있어서 좋았다. 젊은 시절에 사랑과 정성을 기울인 스승과 나이 들어서도 사랑과 존경의 마음을 간직한 제자의 관계는 정말 귀하고, 고결하게 느껴진다.

 

   나는 김 교수와 그의 제자 덕으로 아내의 건강을 회복하였고, 즐겁고 알찬 여행도 하였다. 이 일을 생각하면, 나도 모르게 고마운 마음과 함께 흐뭇한 미소가 피어오른다. 제자를 잘 둔 김 교수와 사제의 정을 나누며 살 수 있게 해 주신 하나님께 감사한다.(2019. 11.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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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인이 사는 집 세면대에는 대개 배수구를 막는 마개가 있다. 그래서 그것으로 배수구를 막아 물을 받아놓고 손이나 얼굴을 씻는다. 마개는 전에는 고무로 만든 것을 사용하였으나, 요즈음에는 쇠에 도금하거나 스테인리스로 된 것을 많이 사용한다. 마개를 닫고 여는 방식을 보면, 전에는 고무마개를 손으로 눌러 막고, 잡아 올려 열곤 하였다. 요즈음에는 수전 뒤쪽에 있는 막대를 이용하거나, 손으로 직접 마개를 눌러 닫고 연다. 세면대에 물을 받아놓고 세수를 하면, 수도꼭지를 틀어놓고 하는 것보다 편하고, 씻는 동작을 하는 동안 물을 그대로 흘려보내지 않아 물을 절약할 수 있다. 그래서 우리나라는 물론 미국이나 유럽에서도 이를 널리 활용하고 있다.

 

   그러나 모든 나라의 세면대에 마개가 있는 것이 아니고, 이를 아예 설치하지 않는 나라도 있다. 대표적인 예로 터키를 들 수 있다. 내가 터키 에르지예스대학교 한국어문학과 객원교수로 근무할 때 터키인의 가정에 가 보니, 세면대의 설계 자체가 마개를 막을 수 없게 만들었다. 처음에는 오래된 개인주택이라서 그런가 하였다. 그러나 나중에 새로 지은 아파트에 가서 보아도, 역시 마찬가지였다. 세면대의 배수구를 막을 수 없으니, 수도꼭지를 틀어 놓은 채 흘러내리는 물에 손을 씻거나, 두 손을 모아 물을 받아 올려 얼굴을 씻어야 한다. 얼굴이나 손을 씻는 동작이 끝날 때까지 수도를 틀어놓고 있어야 하니, 물의 소비가 많을 수밖에 없다.

 

   이를 처음 본 나는 이상하게 생각하였다. ‘이곳 사람들은 물을 아낀다는 의식이 전혀 없나?’, ‘유럽화 경향을 보이는 나라에서 이런 불합리한 현상을 보이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왜 이런 문화가 형성되었지?’ 하는 의문이 일었다. 나는 궁금한 것을 풀기 위해 터키 문화에 관한 책을 읽으며, 이런 문화가 형성된 배경과 이유는 무엇일까를 생각해 보았다.

 

   터키의 주류를 이루는 민족은 튀르크(Türk) 족으로, 우리 역사서에 돌궐(突厥)로 표현된 민족이다. 이들은 일찍이 중앙아시아 지역에 살면서 소와 양을 키우던 유목민족이다. 고대에 이들은 중국 북방지역에 거주하면서 우리 한민족과 싸우기도 하고, 협력하기도 하였다. <<삼국사기>> 19 <고구려본기> 7의 양원왕(24대) 7년(551년)조를 보면, “가을에 돌궐이 고구려에 쳐들어와 신성을 포위하였으나 승리하지 못하자, 군대를 이동하여 백암성을 공격하였다. 왕이 장군 고흘(高紇)에게 병사 1만을 주어 그들을 물리치고, 1천여 명의 머리를 베었다.”는 기사가 있다. 이로 보아 돌궐은 고구려와 다퉜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수나라가 중국을 통일한 뒤에는 고구려와 동맹을 맺어 협력하였다. 이때를 생각하면, 한민족과 튀르크 족은 형제 관계라는 말이 헛말이 아니라고 하겠다. 터키에서는 역사교과서에서 한국을 형제국이라고 가르치고 있다.

 

   튀르크 족은 전성기에 유라시아 지역 동서와 남북에 걸쳐 대제국을 형성했다. 이들은 중원이 수나라에 이어 당나라에 의해 통일된 데다 내부 분열이 생기면서 동돌궐과 서돌궐로 나눠졌다. 동돌궐은 630년, 서돌궐은 651년 당나라에 의해 멸망했다. 그 뒤에 후돌궐이 일어나 전성기를 이루었고, 고유의 문자를 개발하여 사용하면서 ‘돌궐비문’에 강성기(强盛期) 왕의 사적을 기록하였다. 현재 중국 신장의 위구르족이 동돌궐의 후손이라면, 터키는 서돌궐의 분파다. 서돌궐은 동남쪽으로 이동하여 지금의 아나톨리아 반도에 자리 잡아 셀주크 튀르크(Seljuk Türk)를 세웠다. 이 나라는 뒤에 오스만 튀르크(Osman Türk)로 이어져 크게 세력을 떨쳤다. 지금의 터키공화국은 오스만 튀르크를 이은 나라이다.

 

   현재 터키는 유목민족의 후예답게 목축을 많이 하지만, 다양한 산업이 발달한 산업국가이다. 그러나 이들은 선조들이 유목생활을 하면서 이룩한 문화를 잊지 않고 이어가고 있다. 이들의 선조는 유목민이었으므로, 물과 풀이 있는 곳을 찾아 옮겨 다니며 살았다. 그래서 흐르는 물에 세수하고, 몸을 씻는 문화가 형성되었다. 이에 비하여 일찍부터 농사를 지으며 정주생활(定住生活)을 한 우리 민족은 집집마다 샘이나 우물을 팔 수 없기에 두멍에 물을 길어다 놓고, 아껴가며 썼다. 이런 생활 방식이 세면대에 마개를 막는 문화를 형성하였다. 그런데 터키 사람들은 집안에 세면대를 설치하면서 마개를 막는 한국이나 유럽의 문화를 따르지 않고, 자기 선조들의 문화적 전통을 이어 가고 있다. 그래서 집안에 세면대를 설치하면서 마개를 쓰지 않고, 수도꼭지를 틀어 물이 흐르게 한 뒤에 그 물로 손이나 얼굴을 씻는다.

 

   나는 터키에 있을 때 터키인의 집에 가서 묵은 일이 있다. 저녁을 먹은 뒤에 세면실에서 칫솔질을 하고, 물로 입안을 가시려고 컵을 찾았으나 컵이 없었다. 하는 수 없어 손을 오그린 뒤에 물을 받아 입을 가셨다. 집 주인에게 컵이 없다는 말을 하니, 터키인은 컵을 쓰지 않고 손을 오그려 물을 담아 올려 입을 가신다고 하였다. 이것 역시 유목생활을 하던 선조가 흐르는 물가에서 양치질을 하고 입을 가시던 생활습관에서 형성된 문화이리라. 양치질을 할 때 컵을 사용하지 않는 것 역시 이런 문화적 전통에서 연유된 것이라 하겠다.

 

   문화는 오랜 동안 한 지역에서, 같은 언어를 쓰며 살아온 사람들(민족)이 생활 속에서 형성하여 전해오는 유형·무형의 것들이다. 이것은 그 민족이 사는 곳의 생활환경과 역사성을 바탕으로, 그들의 공동심성에서 형성된 것이다. 그러므로 각기 다른 습관이나 문화는 그 나름의 형성 배경과 이유가 있다. 이를 알아야 그 문화를 바르게 이해할 수 있다. 다른 문화의 형성 배경과 의미를 알지 못한 채 자기 문화의 잣대로 그 문화를 폄하하거나, 자기 문화의 우월성을 강조하면, 관규여측(管窺蠡測, 대롱으로 하늘을 보고 표주박으로 바닷물의 양을 잰다는 뜻으로 사물에 대한 이해나 관찰이 매우 좁거나 단편적임을 비유한 말)의 어리석음을 범할 수 있다. 다른 문화의 형성 배경과 이유를 알고 이해할 때 그 문화와 교류할 수 있고, 그 문화를 지닌 사람들과도 교감하게 될 것이다.(2019. 10.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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