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의 일이다. 서재에 앉아 책을 읽고 있는데, 아내의 비명소리가 들렸다. 깜짝 놀라 달려 나가니, 아내가 거실에서 손을 흔들고 발을 동동 거리며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무슨 일이야? 왜 그래?”라고 물으니, 아내는 손가락으로 거실 바닥을 가리켰다. 탁자에 올려놓은 화분 아래의 마룻바닥에 작은 지렁이 한 마리가 꿈틀거리고 있었다. 사태를 파악한 나는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며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몇 겹으로 겹친 휴지로 지렁이를 집어다가 화장실 변기에 넣고 물을 내렸다.

   지렁이는 환형동물(環形動物)로, 몸의 길이는 작은 종류가 2~3mm, 큰 종류는 2m 정도이다. 긴 원통형으로 가늘며, 많은 마디로 이루어져 있다. 재생력이 강하여 몸이 반으로 잘라지는 심각한 손상을 겪고도 몸을 복원할 수 있는 특이한 능력을 갖고 있다. 세계에 분포되어 있는 지렁이는 3,100여 종이나 된다. 그 중에 한국에 사는 지렁이는 60여 종이라고 한다.

   지렁이는 유기물이 많은 흙속에서 산다. 나뭇잎, 동물의 시체나 분변 등 유기물을 먹을 때 많은 양의 흙과 모래, 작은 자갈 따위도 함께 섭취하였다가 내보낸다. 그래서 토양을 비옥하게 하며, 흙을 부드럽게 만든다. 지렁이의 분변은 그 자체로도 천연비료가 된다. 지렁이가 땅속에 길을 내어 뭉친 흙을 풀어주면, 빗물이 땅 속 깊이 스며들게 되어 식물이 수분을 충분히 흡수할 수 있게 된다. 그래서 지렁이가 많은 땅은 건강한 땅이라고 한다.

   지렁이는 우리의 생활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다. 물고기를 잡는 미끼로 사용하기도 하고, 양어용 사료로 이용하기도 한다. 지렁이의 몸에서 나오는 액체는 피부 보습에 효과가 있다. 그래서 이를 원료로 각종 약품을 섞어 립스틱을 만든다. 지렁이를 혐오하는 여성이, 매일 입술에 바르는 립스틱의 원료가 지렁이라는 사실을 알면 놀랄 것이다.  동의보감에는 지렁이가 찬 성질이 있어 해열에 탁월하다. 이뇨(利尿)를 돕고, 황달을 다스리며, 회충을 박멸하는 데에 효능이 있다고 하였다. 또 어린이의 뇌전증(腦電症)을 치료하는 데에도 효과가 있다고 한다. 토룡탕은 보양식으로도 알려져 있다.

   지렁이는 우리의 속담이나 설화의 제재가 되기도 하였다. 우리 속담 중에 ‘지렁이도 밟으면 꿈틀 한다’, ‘지렁이 갈비다’라는 말이 있다. 앞의 것은 아무리 눌려 지내는 미천한 사람이나, 순하고 좋은 사람이라도 너무 업신여기면 가만있지 아니한다는 말이다. 뒤의 것은 전혀 터무니없는 것을 비유적으로 이르거나, 아주 부드럽고 말랑말랑한 것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이다.

  《삼국유사》에는 견훤의 출생담이 실려 있다. 광주 부잣집 딸의 방에 밤마다 청의동자(靑衣童子)가 찾아오므로, 그 정체를 알려고 옷자락에 실을 꿴 바늘을 꽂아두었다. 이튿날 아침에 실을 따라가 보니, 담 밑에 사는 커다란 지렁이였다. 그 처녀가 낳은 아이가 견훤이라고 한다. 후백제를 세운 비범한 인물 견훤이 지렁이의 아들이었다고 하니, 놀랍기 짝이 없다. 이 이야기에는 지렁이를 달의 속성을 지닌 ‘달동물(lunar animal)’, ‘생생력(生生力)을 지닌 신이한 동물’로 보는 의식이 드러난다. 지렁이를 가리키는 한자어는 ‘토룡(土龍)’, 또는 ‘지룡(地龍)’이다. 이 말에는 지렁이를 용으로 보는 의식이 바탕에 깔려 있다.

   <지렁이 고기 먹고 눈뜬 시어머니>에서는 가난한 며느리가 눈먼 시어머니께 드릴 것이 없어 지렁이를 잡아 국을 끓여 드렸다. 이를 알게 된 시어머니가 놀라면서 눈을 떴다고 한다. <지렁이가 된 며느리>에서는 남편이 준 돈은 자기가 다 써 버리고, 눈먼 시어머니께는 지렁이를 잡아서 드린 며느리가 벼락을 맞아 죽어 지렁이가 되었다고 한다. 두 이야기에서 며느리가 시어머니께 드린 것은 똑같은 지렁이다. 그런데 지렁이를 드린 것이 효심의 발로인가 아닌가에 따라 그 결말이 전혀 다르게 나타난다.

   나는 아내에게 지렁이는 예로부터 우리 생활과 밀접한 관련을 맺으며 살아왔다. 약용으로도 쓰이고, 농사에 도움을 주는 유익한 동물로, 옛날에는 신이한 동물로 여기기도 하였다. 지렁이가 사는 것으로 보아 우리 집 화분의 흙은 건강한 흙임을 알 수 있다. 매일 바르는 립스틱은 지렁이 추출물로 만든 것이다. 이러한 지렁이를 보고 뭘 그리 놀라 소리를 질렀느냐고 물었다. 아내는 지렁이를 보는 순간 징그럽고, 놀라워 자신도 모르게 소리를 질렀노라고 하였다. 지렁이에 대한 잠재적 혐오감이 폭발한 것이리라.

   나는 아내에게 셋째 아이가 어렸을 때에 토룡탕을 끓여 먹인 일이 있지 않느냐고 물었다. 아내는 지난 일을 이야기하였다. 셋째 아들이 초등학교 1학년 때 감기만 걸리면 편도선이 붓고, 체온이 40도 가까이 올라 고통을 겪느라 학교에 가지 못하였다. 셋째 아이가 결석하게 된 까닭을 안 담임선생님이 지렁이를 끓여서 국물을 먹이면 나을 것이라고 하였다. 이 말을 들은 아내는, 한 번은 낚시점에 가서 지렁이를 사다가, 한번은 화단과 화분에서 지렁이를 잡아서 약탕관에 넣고 끓여서 먹였다. 그 뒤로 셋째 아이는 신통하게도 편도선이 부어 고생하는 일이 없어졌다고 한다. 그때는 아이를 낫게 하려는 일념에서 징그럽고 싫은 것도 참고 그 일을 하였다고 한다. 아이를 위하는 엄마의 마음이 징그럽고 혐오스런 일도 거뜬히 하게 하였나 보다.

   어제 아내와 함께 집에서 가까운 공원에 갔다. 소나기가 내린 뒤라서 그런지, 커다란 지렁이 몇 마리가 포장된 길 위에서 꿈틀거리고 있었다. 지렁이가 비오는 날에 지상으로 올라오는 이유는, 피부로 숨을 쉬는 지렁이가 물에 찬 구멍에서 숨을 쉬기 위해 밖으로 나오거나, 짝짓기를 위해서라고 한다. 나는 저 지렁이가 ‘숨쉬기 좋은 곳을 찾아 나온 것일까, 짝짓기를 위해서 나온 것일까?’, ‘지렁이는 우리 집 화분에서 왜 마루로 나왔을까?’라는 생각을 하며 그대로 지나쳤다. 집에 와서 가만히 생각하니, 지렁이가 넓은 포장도로를 무사히 건너 흙이 있는 곳으로 가지 못하고 햇볕에 말라 죽었을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나뭇가지로 젓가락을 만들어 지렁이를 집어다가 흙이 있는 곳에 놓아주었으면 좋았을 것을. 만물을 사랑하는 마음을 실천하지 못한 것이 부끄럽기도 하다. 《주간 한국문학신문》 549, 2022. 6.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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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3월 하순에 아내·김 교수 부부와 함께 영월 지역을 탐방하였다. 영월 여행에서 빼놓을 수 없는 곳이 단종의 원한이 서려 있는 청령포와 장릉(莊陵)이다. 두 곳을 찾기에 앞서 강원도와 경계인 충북 제천시(송학면 장곡리 산 14-2)에 있는 관란정(觀瀾亭)을 찾았다. 관란정은 생육신의 한 사람인 원호(元昊) 선생의 충정(忠情, 충성스럽고 참된 정)을 기리기 위해 지은 정자이다.

   승용차를 타고 중앙고속도를 달리다가 신림 요금소(Tol Gate)에서 빠져 나가 네비게이션의 안내를 따라 20분쯤 달리니, 관란정 안내 표지판이 나왔다. 차에서 내려 비탈진 산길을 걸어 올라가니, 그리 높지 않은 산등성이의 자연암반 위에 동향으로 지은 관란정이 서 있다. 팔작지붕에 기와를 얹고, 모로단청(부재의 두 끝 부분에만 하는 단청)을 하였다. 바로 앞에 있는 비각 안에는 관란 선생을 기리는 유허비(遺墟碑)가 있다. 눈을 들어 앞을 보니, 나지막한 산들이 멀리까지 펼쳐 있고, 그 뒤를 큰 산들이 에워싸고 있다. 산 아래에는 주천강과 평창강이 합수한 서강이 산들을 에둘러 흐르고 있다.

   원호 선생은 1397년(태조 5)에 원주에서 별장 원헌(元憲)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자는 자허(子虛), 호는 무항(霧巷)·관란(觀瀾)이다. 그는 열다섯 살 때 사서삼경(四書三經)을 통달하였고, 한시와 산문을 좋아하였다. 세종 4년(1422)에 문과에 급제하여 문종 때 집현전 직제학(종3품 벼슬)이 되었다. 그러나 수양대군이 조카인 단종의 왕위를 찬탈하는 것을 보고, 벼슬을 버리고 고향인 원주로 내려가 숨어 지냈다.

   그는 단종이 노산군으로 강봉(降封, 작위나 작품의 등급이 낮아짐)되어 영월에 유배당하자, 지금 관란정이 있는 산등성이에 단을 세우고, 아침·저녁으로 눈물을 흘리며 영월을 향해 절을 올렸다. 그리고 손수 가꾼 채소와 과일을 박통에 담아 영월로 흐르는 서강에 띄워 보냈다. 청령포에 있던 단종은 노산대 아래에서 떠내려 온 박통을 받았다고 한다. 그의 깊고 절절한 충정을 아는 서강물이 이를 고이 품어 어린 단종에게 전해 주었나 보다. 어린 왕과 충신이 애틋한 정을 나누는 장면을 그려보니, 눈물이 날 만큼 가엾고 애처롭다. 사실을 따지자면, 서강물이 박통을 품고 수십 리를 흘러가서 단종에게 온전히 전해 주었을 가능성은 그리 높지 않다. 그러나 민중은 그의 충정이 물길을 따라 무난히 전해 졌다고 이야기해 왔다. 이것은 그의 충정과 이를 기리는 민중의 마음이 전적으로 공감하였음을 말해 준다.

   그는 단종이 죽자 영월에서 3년상을 마치고, 원주로 돌아가 치악산 아래 초막에서 지냈다. 그의 충절에 탄복한 세조가 각별한 마음으로 호조참의 벼슬을 내리고 불렀으나, 그는 이를 거절하였다. 사관(史官)으로 있던 손자 숙강(叔康)이 직필로 화를 당하자, 그는 자신이 저술한 책과 상소문을 모두 불태웠다. 그리고 아들들에게 책을 읽어 세상의 명리를 구하지 말 것을 엄하게 경계하였다. 그는 단종의 장릉이 자기 집의 동쪽에 있음을 생각하여 앉을 때에는 항상 동쪽을 향해 앉았고, 누울 때에도 항상 머리를 동쪽으로 두었다고 한다. 이것은 단종에 대한 그의 충절이 매우 깊고 절절하였음을 알 수 있게 해 주는 일화이다.

   정조 때 그의 후손 원경적이 그에게 시호(諡號, 죽은 뒤에 조정에서 그의 공덕을 칭송하여 붙이는 이름)를 내려줄 것을 조정에 청했다. 왕은 이를 받아들여 이조판서를 증직(贈職, 죽은 뒤에 품계와 벼슬을 추증함.)하고 ‘정간(貞簡)’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정’은 청렴결백하고 절의를 지킨다는 뜻이고, ‘간’은 정직하고 사악함이 없다는 뜻이다. 여기에는 그의 올곧은 선비정신과 절의를 높이고 기림으로써 후세 사람들에게 좋은 본보기가 되도록 하려는 뜻이 담겨 있다고 하겠다.

   그의 후손과 유학자들은 그의 충의를 기리고자 1845년(헌종 11) 이곳에 비석과 정자를 세우고, 그의 호를 따서 ‘관란정’이라 하였다. 정자 앞에 있는 유허비는 정조 8년에 대학자인 홍양호(洪良浩, 1724~1802)가 세웠다. 자연석 위에 세운 비석에는 일반적인 비문과 달리 붉은색 글씨로 새겼다. 관란정은 1941년에 개축하였으며 1970년, 2013년에 보수하였다.

   문종이 죽고 어린 단종이 왕위에 오를 무렵에는 단종의 숙부들(모두 7명)이 매우 강성하였다. 당시에 집현전에 근무하던 그는 <탄세사(歎世詞)>를 지어 앞날에 대한 불안과 걱정, 자기의 결연한 의지를 나타냈다. “마음은 어둡고 침침하며 구름은 하늘을 가득히 덮었구나(懷黯黯兮雲五光).”는 불안한 당시의 상황을 드러낸다. 그는 백이(伯夷)·숙제(叔弟)의 절의를 따르는 사람이 없음을 탄식하며, “세상사람 모두 다 의를 저버리고 녹을 따르나(世皆忘義洵祿兮), 나는 홀로 몸을 더럽히지 않고 깨끗하게 노닐겠다(我獨潔身而徜徉).”라고 하여 혼자서라도 절의를 지키겠다는 강한 의지를 드러냈다. 이 시의 원문과 번역문이 관란정 앞 오른 쪽에 세운 ‘관란 원호 선생 유고비’(2014년 건립)에 적혀 있다.

   관란정 왼편에는 한국문인협회 여강시가회에서 세운(2017년 건립) 시비가 있다. 거기에 《청구영언》에 실려 있는, “간밤에 우던 여울 슬피 울어 지나가다./ 이제와 생각하니 님이 울어 보내도다./ 저 물아 거슬러 흐르고저 나도 울어 보내도다.”라는 시조가 씌어 있다. 밤 새워 흐르는 여울물 소리가 슬픈 것은 임이 울어 보내기 때문이다. 여울물이 거꾸로 흐른다면 나의 충심을 실어 보낼 수 있겠다고 하였다. 이 시를 읽으니, 어린 임금을 유배지로 압송하는 임무를 맡았던 의금부도사 왕방연의 시조, “천만리 머나먼 길에 고운 임 여의옵고, 내 마음 둘 데 없어 시냇가에 앉았으니, 저 물도 내안 같도다. 울어 밤길 예놋다(가도다).”가 떠오른다. 두 작품은 단종에 대한 충정을 여울물에 투사하여 절실하게 표현하였다는 점에서 일치한다.

   관란정을 찬찬히 살펴보고 산길을 걸어 내려오면서 관란 선생의 행적을 생각하니, 그의 충성스런 마음과 절의가 새삼 절절하게 느껴진다. 그는 순리에 따라 즉위한 왕이 다스리는 나라, 상식이 통하는 나라에서 충성을 다하며 살고 싶었을 것이다. 그러나 왕위를 찬탈하는 수양대군을 본 그는 단종에 대한 절의를 지키기 위해 고난의 길을 선택하였다. 그는 절의를 지킨 원천석(제자인 태종의 부름에도 나가지 않고 숨어 지냈음.)의 후손답게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절의를 지켜 많은 선비의 사표가 되었다. 요즈음에도 관란 선생처럼 충의를 지키는 사람이 있을까? 명리를 위해 양심과 의리를 저버리는 사람, 출세를 위해 삶의 행로를 손바닥 뒤집듯 하는 사람, 당리당략에 따라 행동하며 남의 탓하기를 일삼는 사람 들이 권력을 잡고 큰소리치는 세태를 보니, 관란 선생의 절의가 더욱 소중하고 두텁게 느껴진다. (2021. 05. 30.)

관란정
관란정과 유허비(각) 
관란 원호 선생 유고비 앞면(시의 원문)
관란 원호 선생 유고비 뒷면(시의 번역문)
한국문인협회 여강시가회에서 세운 원호 선생 시비
관란정 앞에서 본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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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해부터 코로나 19의 창궐로 사회적 거리두기가 강화되고 있으므로,관광명소나 유적지 중에서 사람이 비교적 적게 모이는 곳을 골라 탐방하고 있다.지난3월10일에는 경기도 파주에 있는 장릉(長陵, 16대 인조와 인열왕후의 무덤)을 둘러본 뒤에 파주시 파평면 화석정로에 있는 화석정(花石亭)을 찾았다.

   화석정은 원래 고려 말기의 문신 길재(吉再)가 조선 개국 후에 벼슬을 버리고 와서 후학을 양성하던 곳이다. 그가 세상을 떠난 뒤에 그를 추모하여 이곳에 서원을 세웠다고 한다. 그 후 폐허가 되었던 이곳에 율곡(栗谷) 이이(李珥) 선생의 5대조인 이명신(李明晨) 선생이 세종 25(1443)년에 정자를 세웠다. 그리고 성종 9(1478)년에 이숙함(李淑瑊) 선생이 화석정(花石亭)이라 명명하였다. 이 정자를 율곡 선생이 중수하여 벼슬에서 물러난 뒤에 이곳에서 여생을 보내면서 시를 지으며 학문을 논하고, ()를 연구하였다. 그 때에 중국의 칙사 황홍헌(黃洪憲)이 율곡 선생을 찾아와 경관이 빼어난 이 정자에서 시를 읊으며 놀았다고 한다.

   화석정은 임진강가 절벽 위에 장단 쪽을 향하여 서 있다. 정자에서는 바로 밑을 흐르는 임진강을 볼 수 있다. 난간에 기대어 바라보면 서울의 삼각산과 개성의 오관산이 아득하게 보인다. 전에는 화석정 주변에 느티나무가 울창하였고, 그 아래 임진강에는 밤낮으로 배들이 오락가락 하였으며, 밤에는 고기 잡는 배의 등불이 호화찬란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지금은 바로 밑에 도로가 나 있고, 그 아래에 철조망이 임진강을 가로막고 있다. 정자 주변에는 느티나무 몇 그루만이 서 있어 옛날의 정취는 느낄 수 없다.

   정자에는 화석정중건상량문을 비롯하여 여러 개의 현판이 걸려 있다. 현판 중에는 율곡 선생이 여덟 살 때(1543) 지었다는 화석정시도 결려 있다. 이 시는 정자 옆에 세워놓은 돌비석에도 번역문과 함께 적혀 있다.

 林亭秋已晩  숲 속 정자엔 가을이 이미 깊어
  騷客意無窮 시인의 시상이 끝이 없구나.
  遠水連天碧 멀리 보이는 강물은 하늘에 잇닿아 푸르고
  霜楓向日紅 서리 맞은 단풍은 해를 향해 붉구나.
  山吐孤輪月 산은 외로운 둥근 달을 토해 내고
  江含萬里風 강은 만리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머금었네.
  塞鴻何處去 변방의 기러기는 어디로 날아가는고
  聲斷暮雲中 울고 가는 소리 저녁 구름 속으로 사라지네.

이 시는 주변의 아름다운 풍광과 시인의 정취를 잘 드러낸다. 율곡 선생이 여덟 살 때 이런 시를 지었다니, 어린 시절부터 시적 감각이 뛰어났음을 알 것 같다.

    율곡 선생은 틈이 날 때마다 정자의 마루와 기둥을 기름걸레로 닦도록 하였다. 율곡이 세상을 떠난 지 8년 뒤에 임진왜란이 일어났다. 선조는 북쪽으로 피난하던 중 임진강가에 이르렀다. 그런데 폭풍우가 심해 앞을 볼 수 없었다. 그 때 임금을 모시던 이항복이, 어려움이 닥치면 열어보라고 한 율곡 선생의 봉서 생각이 났다. 그 봉서를 열어보니, “화석정에 불을 지르라고 씌어 있었다. 기름을 잘 먹은 화석정에 불이 붙자, 불길이 솟아올라 나루 근처가 대낮같이 밝혀졌다. 그 불빛 덕에 선조가 무사히 강을 건넜다고 한다.

   이 이야기에는 율곡의 예지(叡智, 사물의 이치를 꿰뚫어 보는 지혜롭고 밝은 마음)가 잘 드러난다. 나는 이 이야기의 현장을 보고 싶어 전에 찾아왔던 이곳을 오늘 다시 찾아왔다. 정자 앞에 잠시 눈을 감고 서서, 당시의 상황을 떠올려 보았다. 도성을 버리고 파천(播遷)하는 임금과 수행하는 신하들의 마음은 몹시 급하고 당황하여 허둥지둥 이곳까지 왔을 것이다. 그런데 임진강이 앞을 가로막고 있고, 거기에 더하여 폭풍우가 겹쳐 좌우를 분간할 수 없으니, 참담하기 짝이 없었다. 이 때 율곡 선생이 임종 무렵에 남긴 봉서대로, 그가 사랑하며 아끼던 화석정에 불을 질러 파천길을 밝히게 하였다고 한다. 율곡 선생은 자신의 사후에 임금이 이 길로 파천할 것을 예측하고, 정자의 마루와 기둥에 기름칠을 하고, 불을 지르라고 하는 봉서를 남겼던 것이다. 율곡 선생의 충성된 마음과 신묘한 예지에 놀라움과 감탄을 금할 수 없다.

   명나라와 일본의 움직임을 살핀 율곡 선생은, 일찍이 경연에서 ‘10만의 군사를 양성하여 앞으로 뜻하지 않은 변란에 대비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유성룡을 비롯한 신하들이 군사를 양성하는 것은 화단(禍端, 화를 일으킬 실마리)을 키우는 것이라며 강력히 반대하였으므로 국론으로 채택되지 못하였다(󰡔조선왕조실록󰡕  선조수정실록 16권 선조 15 9 1일조). 10만 양병을 주장한 율곡의 의견을 국론으로 채택하여 대비하였더라면, 국토가 왜병에게 유린되고, 수많은 백성이 도륙을 당하는 일이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임금이 허둥지둥 파천하는 일도 없었을 것이다. 임진왜란으로 나라가 위태롭게 되었을 때 군무를 총괄한 유성룡은 율곡의 의견을 반대하고 무시하였던 일을 후회하며 이이는 선견지명(先見之明, 어떤 일이 일어나기 전에 미리 앞을 내다보고 아는 지혜)이 있고 충근(忠勤, 충성스럽고 부지런함)한 절의가 있었으니, 그가 죽지 않았다면 반드시 오늘날에 도움이 있었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한다. 때늦은 후회인 것이다.

   당시에 율곡의 의견에 반대한 이유는 평화로운 때에 백성들에게 전쟁에 대한 불안을 주고, 생업에 종사할 장정을 차출하여 훈련을 하는 것은 생산력을 축소하는 것으로 매우 부적절하다는 것이었다. 이 대목은 요즈음 우리가 처한 상황과 겹쳐 보인다. 625전쟁을 겪은 대한민국은 정전 상태에서 북의 위협을 안고 살고 있다. 북은 남을 무력으로 적화통일 하겠다는 야욕을 버리지 않고 있으며, 핵을 개발하여 핵보유국 행세를 하고 있다. 그런데도 일부 국민은 북이 한반도비핵화의 의지를 가지고 있다고 믿으며, “북이 설마 같은 민족인 우리에게 핵무기를 사용하겠어? 미국에 대한 협상력을 기르려는 것이야!”라고 말한다. 그리고 정부에서는 929 남북합의서를 들먹이며 북한에 대한 경계를 풀어 놓았다.

   미국과 중국이 세계질서를 재편하려고 경쟁을 벌이고 있고, 북은 남침야욕을 버리지 않고 있다 이런 때에 우리는 눈을 크게 뜨고 국제정세를 살펴야 한다. 그리고 북의 야욕이 어떠한가를 주시하면서 국가 안보 태세를 강화해야 한다. 그런데도 국가 안보를 소홀히 하고 있고, 북의 비위를 맞추려고 눈치를 살피고 있다. 경계태세를 늦추고 있고, 한미연합훈련마저 탁상훈련으로 대체하고 있다. 안보 태세를 강화하라는 국민의 목소리는 마이동풍(馬耳東風, 동풍이 말의 귀를 스쳐 간다는 뜻으로, 남의 말을 귀담아듣지 아니하고 지나쳐 흘려버림), 우이독경(牛耳讀經, 쇠귀에 경 읽기라는 뜻으로, 아무리 가르치고 일러 주어도 알아듣지 못함을 이르는 말)과 같이 되어 버린 지 오래 되었다. 율곡 선생의 양병설을 무시하였다가 임진왜란이라는 처참한 일을 당한 조선의 역사를 되풀이하지 않을까 걱정이다. 역사는 자기 성찰의 거울이고, 희망의 미래는 여는 열쇠임을 잊지 않았으면 한다.

    임진왜란 때 불에 타 없어졌던 화석정은 80여 년간 빈터만 남아 있다가 현종 14(1673)년에 율곡 선생의 증손인 이후지(李厚址)·이후방(李厚坊)이 복원하였다. 그러나 1950 6·25전쟁 때 다시 소실되었다. 현재의 정자는 1966년 경기도 파주시 유림들이 다시 복원하고, 1973년 정부가 실시한 율곡 선생 및 신사임당 유적 정화사업의 일환으로 단청되고 주위도 정화되었다. 건물의 정면에는 박정희 전 대통령이 쓴 花石亭 현판이 걸려 있다. 화석정을 바라보는 나의 마음은 걱정스럽기 짝이 없다. 역사에서 교훈을 얻지 못하면 불행한 일을 당하게 된다. 화석정이 불에 타는 것과 같은 국가적 불행이 되풀이 되지 않기를 바라면서 발길을 돌려 집으로 향하였다. (성동문학 21, 성동문인협회,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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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얼마 전에 교회에서 예배 끝날 무렵에 목사님께서 “이 장로님이 나이 드신 분들께 드리려고 지팡이를 가져오셨으니, 필요하신 분은 받아 가십시오”라고 광고하셨다. 나와 아내는 언덕이나 계단을 오르거나 내려갈 때에 지팡이를 짚으면 훨씬 편하다. 그래서 산에 갈 때에는 등산용 지팡이를 꼭 가지고 간다. 그러나 평지에서는 지팡이가 없어도 괜찮으므로, 지팡이를 달라고 할까 말까 망설였다. 그러다가 언제 필요할지 모르니 준비해 두자는 생각에서 용기를 내어, 이 장로님께 말씀드려 둘이 하나씩 받아가지고 왔다.

   지팡이는 이 장로님이 경영하시는 ‘현대의료산업’에서 고령자용으로 만든 제품이다. 플라스틱 손잡이에 알루미늄 합금으로 만든 대를 고정시켰고, 길이는 쓰는 사람이 신장에 맞춰 조절할 수 있게 만들었다. 국가통합인증마크(KC)를 획득한 제품으로, 안전 동작 하중은 100kg이다. 나이 든 교인들을 배려하는 마음에서 안전하고, 품위가 있어 보이는 지팡이를 선물로 주신 이 장로님께 마음 깊이 감사한다.

   지팡이는 노약자나 다리가 불편한 사람이 걷거나 서 있을 때 몸을 의지할 수 있는 보조기구이다. 지팡이는 본인에게 도움을 주기도 하지만, 타인에게 넌지시 도움을 청하는 역할도 한다. 특히 시각장애인의 흰 지팡이는 혼자 걸을 때 더듬이 역할을 하여 보행의 안전을 기하게 하며, 타인에게 시각장애인이라는 것을 알림으로써 위험으로부터 보호받을 수 있게 해 준다.

   지팡이가 보행의 보조기구 이상의 기능과 의미를 수행하는 경우도 있다. 지팡이는 유목민의 목자에게는 양떼를 인도할 때 쓰는 도구이다. 마법사에게는 마법을 행할 때 꼭 있어야 하는 소품이다. 장로나 족장, 스님, 도인과 같은 사람에게는 권위의 상징물이다. 특히 스님에게는 걸을 때에 도움을 주는 도구이면서 법문(法問, 불법에 대하여 묻고 대답함)할 때나 좌선(坐禪, 고요히 앉아서 참선함)할 때, 그리고 경책(警策, 주의가 산만하거나 조는 사람을 깨우침)할 때에도 손에서 놓지 않는 도반(道伴)이다.

   어떤 사물이 바로 서려면 최소한 세 개의 다리가 있어야 한다. 삼발이도, 세발솥의 다리도 셋이다. 사진기를 받치는 삼각대 역시 다리가 셋이다. 지게를 세울 때에는 작대기로 받쳐서 세 발이 되게 해야 한다. 이 원리는 사람의 삶에도 그대로 적용된다고 생각한다.

   그리스 신화에서 스핑크스(Sphinx, 상반신은 여자이고 하반신은 날개가 돋친 사자의 모습)는 바위산 길목에서, 행인에게 수수께끼를 내어 풀지 못하면 죽이곤 한다. 어느 날, 스핑크스는 이곳을 지나던 오이디푸스(Oedipus)에게 “목소리는 하나인데, 네 다리, 두 다리, 세 다리로 되는 것이 무엇인가?”라고 묻는다. 오이디푸스가 “그것은 인간이다.”라고 대답하자, 스핑크스는 분노를 내뿜으며 절벽으로 떨어져 죽고, 오이디푸스는 괴물을 물리친 영웅이 된다. 이 수수께끼는 삶의 여정을 말해 주는 것으로, 어린아이 때 네 발로 기는 것처럼 나이든 뒤에 지팡이를 짚는 것도 순리임을 일깨워 준다.

   지인 중에 보행이 불편한데도 지팡이를 짚지 않으려 하는 분이 있다. 늙게 보여서 얻을 것이 없다는 생각에서일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옳은 생각이 아니다. 나이든 사람이 조심할 일 중 가장 큰 것이 낙상(落傷)하지 않도록 조심하는 일이다. 노인은 낙상하면 골절하기 쉽고, 골절로 병상에 눕게 되면 온갖 병이 몰려와서 다시는 땅에 서지 못하고 생을 마감하게 된다. 종합병원 입원 환자의 절반이 노인이고, 그 절반이 낙상환자라고 한다. 낙상사고를 당한 뒤에 지팡이를 짚지 않은 것을 후회해도 소용이 없다. 나이 들어서도 젊어 보이려고 지팡이를 짚지 않는 것은 허세일 뿐이다.

   나는 금년에 한국 나이로 팔순이 되었다. 이 장로님한테서 선물로 받은 지팡이는 잘 보관해 두었다가 보행이 불편하다 싶으면 꺼내어 짚어야겠다. 지팡이를 짚는데 따르는 장점도 있을 것이다. 부실한 다리에 쏠리는 체중을 분산시켜 주므로 무릎이 덜 아플 것이다. 그리고 걷다가 지치면 의지해서 잠시 쉬면서 자연과 인생을 관조할 수 있을 것이다. 혼자 걷게 되어 손도 마음도 허전할 때 지팡이는 좋은 친구가 되어 줄 것이다. 지팡이를 짚고 지하철이나 버스를 타면, 자리를 양보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를 따지며 눈치를 보던 사람도 ‘보행이 불편한 어른’으로 보고, 자리를 양보해 줄 것이다. 나이든 것이 큰 벼슬은 아니어도, 그 정도 대접은 받아도 괜찮지 않을까 생각한다.

   우리나라에서는 신라 시대부터 고려, 조선에 이르기까지 70세 이상의 원로대신들에게 임금이 궤장(几杖, 벽에 세워 놓고 앉을 때 몸을 기대는 방석과 지팡이)을 내렸다. 이때 임금이 주는 지팡이는 명아주로 만든 청려장(靑藜杖)이었다. 명아주는 밭이나 들에서 자라는 한해살이 풀이다. 어린 싹은 봄날에 나물로 먹고, 다 자란 뒤에는 지팡이를 만든다. 명아주는 줄기가 가볍고 단단하며, 손에 쥐는 느낌이 좋고, 구불구불 생긴 모습이 멋스러워 예로부터 지팡이의 재료로 쓰여 왔다. 《본초강목(本草綱目》에는 청려장을 짚고 다니면 중풍에 걸리지 않고, 신경통이 좋아진다고 해서 귀한 지팡이로 여겼다고 한다. 청려장의 표면이 손바닥을 자극하여 뇌에 자극을 주기 때문이라 하겠다. 그런데 청려장은 쉽게 얻을 수 없다. 지팡이를 만들만큼 한 해 동안 크게 자라는 명아주를 얻기가 힘들기 때문이다. 그래서 요즈음에는 자연산 명아주 대신 재배한 명아주로 청려장을 만든다. (대표적인 산지는 경상북도 문경시 호계면임.) 지금 남아 있는 청려장 중 가장 오래된 것은 퇴계 선생이 사용하던 것으로, 도산서원에 보존되어 있다.

   10월 2일은 ‘노인의 날’이다. 유엔이 정한 노인의 날인 10월 1일이 ‘국군의 날’이어서 하루 뒤인 10월 2일을 ‘노인의 날’로 정하여, 1997년부터 법정기념일이 되었다. 이날 정부에서는 100세가 된 노인에게 청려장를 주어 축하한다. 이것은 전에 임금님이 원로대신에게 내리던 청려장 못지않게 영광스러운 선물이다. 나는 이 청려장을 선물로 받을 수 있을까? 이 장로님한테 받은 지팡이를 짚으면서 열심히 걸으면 가능할지도 모른다. 그러고 보면, 이 장로님이 주신 지팡이는 나를 청려장 받는 날까지 건강으로 이끌어 갈 매우 귀한 선물이다. 뜻깊은 지팡이를 선물로 주신 이 장로님께 감사하며, 사업이 크게 번창하기를 기도한다. (2021. 3. 1.) 《청하문학》 제20호, 서울: 청하문학회, 2021, 08.

 

내가 선물로 받은 지팡이
지인의 부친이 받은 청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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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얼마 전에 고향친구들과 대화하던 중 선산(先山)의 관리와 성묘, 납골묘 조성 등이 화제에 올랐다. 그 중 한 친구는 나의 부모님 산소에 관해서도 물었다. 나는 친구들과 헤어진 뒤에 부모님 산소의 성묘와 이장(移葬)에 관해 생각해 보았다.

 

  선친께서는 내가 아홉 살 때 별세하셔서 마을 건너편에 있는 이종형님의 산에 모셨다. 그리고 매일 아침저녁 상복 차림으로 산소에 가서 곡하며 절하였다. 한 달쯤 되던 어느 날, 성묘하고 돌아올 때 갑자기 천둥이 치는 듯한 소리가 들리면서 소름이 돋고, 온몸이 떨렸다. 집에 와서 어머니께 그 말씀을 드리니, “아버지께서 아홉 살짜리 어린 아들이 매일 성묘하러 오는 것이 안쓰러워 정을 떼려고 그러시는 것 같다”라고 하시면서, 매일 성묘하는 일을 그만두라고 하셨다. 그 뒤로는 가끔씩 성묘하고, 때맞추어 벌초하였다.

 

  서울로 올라온 뒤에는 외종형님이 때맞추어 벌초해 주셨고, 나는 방학 때에 성묘하였다. 성묘할 때마다 선친을 모실 자리를 허락해 준 이종형님께 감사하였다. 그런데 이종형님이 다른 곳으로 이사하시면서 그 산을 팔았다. 나는 선친의 묘가 남의 산에 있는 것이 마음에 걸려 선친을 모실 산을 구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얼마 뒤에 삽교에 사시는 큰댁 형님의 주선으로 홍성군 홍북면 신정리에 있는 산(1,270평)을 매입하였다. 그곳으로 이장하고 나니, 선친을 내 산에 모셨다는 생각에 마음이 가벼웠다.

 

  나는 전과 다름없이 명절을 전후하여 가족들과 함께 성묘하고, 9월 첫째 토요일에는 벌초하였다. 처음 몇 년은 낫과 호미로, 예초기가 보급된 뒤에는 예초기로 벌초하였다. 선친 산소를 벌초한 뒤에는 보령 천북으로 가서 친척들과 선대묘소를 벌초하고, 함께 식사하였다. 벌초하는 일을 계기로 친척들을 만나니 좋았다.

 

  2003년 1월에 어머니께서 돌아가셨다. 나는 어머니를 아버지와 합장하고, 전과 다름없이 성묘하고, 벌초하러 다녔다. 그런데 차량이 널리 보급되면서 명절이나 벌초하는 때가 되면, 고속도로 정체가 극심해졌다. 새벽 6시에 출발하여 갈 때에는 두 시간 남짓 걸리지만, 서울로 돌아올 때에는 대여섯 시간 걸리곤 하였다. 나는 내 고향이니까 멀고 힘들어도 다니지만, 내가 없으면 아들들이 이 먼 곳을 힘들게 다닐까? 손자가 어른이 된 뒤에는 성묘와 벌초를 할까? 이런 저런 생각 끝에 부모님의 산소를 서울에서 가까운 공원묘지로 이장하는 일을 고려하기 시작하였다.

 

  2000년대에 들어서면서 정부에서는 묘지가 늘어 산림 훼손이 심각하다면서 화장을 적극 권장하였다. 그에 발맞춰 사회분위기도 차츰 화장 쪽으로 바뀌었다. 젊은이들이 도시로 떠난 농촌에서는 선산 관리가 큰 문제였다. 그에 따라 고향에서도 선산의 묘를 파묘하여 봉안당(또는 봉안담)을 조성하는 집안이 점점 늘어갔다.

 

  한국인은 ‘명당(明堂)’에 집을 짓고 살거나, 조상의 묘를 쓰면 자손이 발복하여 잘 된다는 의식이 있다. 이것은 생기론(生氣論)과 감응론(感應論)을 바탕으로 한 풍수설에 따라 형성된 의식이다. 우주에는 인간과 만물의 운명을 지배하는 생기가 있다. 이것은 바람·구름·비로 나타나기도 하지만, 그 주류는 땅속에 흘러들어서 지맥을 따라 흐른다. 흐르던 생기가 멈추는 곳이 명당이다. 그곳에 집을 짓거나 묘를 쓰면 자손이 잘 된다고 한다. 풍수설은 신라 말기에 중국에서 들어와 깊이 연구되었고, 민간에 퍼져 풍수신앙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나 역시 이런 의식을 지니고 살아왔다. 그런데 현실은 어떠한가? 풍수설에 맞는 명당을 고를 수도 없고, 성묘하고 벌초하는 데 드는 시간과 노력을 무시할 수도 없지 않은가? 이 문제로 고민하던 때에 풍수에 관한 옛날이야기가 떠올랐다. 명당은 착한 사람이라야 얻을 수 있고, 선행을 한 사람의 후손에게만 감응한다. 악행을 한 사람은 명당을 얻을 수 없거나, 얻었을지라도 명당의 생기가 스스로 파괴되어 효험이 없다고 한다. 나의 선친은 농부로 착하게 사시다가 45세에 병으로 돌아가셨으니, 악업을 쌓았을 리 없다. 어머니는 독실한 기독교인으로 신앙생활을 잘 하시고, 남을 위해 기도를 많이 하신 분이다. 이런 분들을 모신 곳이면 그곳이 바로 명당일 것이고, 명당의 생기가 감응하여 나와 내 자손이 잘 될 것 아닌가!

 

  공원묘지의 경우 묘지법이 바뀌어 매장묘는 사용 기간이 15년(15년씩 세 번 연장 가능)이고, 봉안묘(납골묘)는 영구적이라고 한다. 이런 저런 생각 끝에 부모님의 유해를 봉안묘에 모시기로 마음을 정하였다. 이것은 바뀐 사회 분위기와 국가 시책에 따르면서 성묘에 따르는 자손들의 불편을 덜어주기 위한 것이다. 유골을 강물이나 나무 밑에 뿌리는 것도 생각해 보았다. 그러나 생각날 때 찾아가서 추모할 수 있도록 유골은 남겨 두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하였다.

 

  그 무렵에 경기도 광주시 오포읍에 있는 ‘시안가족추모공원’에 안장한 동서의 묘를 찾게 되었다. 그곳은 봉안묘, 평장묘, 봉안담, 매장묘가 있는 대규모 추모공원이었다. 묘지를 주택에 비유하면, 자기 산에 홀로 있는 묘는 단독주택이고, 시안 같은 공원묘지는 대규모 아파트단지라 할 수 있다. 단독주택도 좋지만, 대단지 아파트가 살기에 편리한 점이 많다. 나는 아내와 아들과 상의한 끝에 부모님을 시안으로 옮겨 모시기로 하였다.

 

  시안가족추모공원은 전체적으로 보아 배산임수(背山臨水) 지형에 자리 잡고 있다. 나를 안내해 준 분양담당 이사는 추모공원 전체와 개별 봉안묘의 위치를 풍수설을 기반으로 설명하였다. 나는 풍수상으로 좋다는 위치의 봉안묘(학1-12-24, 24위형)를 선택하였다. 그리고 2012년 7월에 부모님 묘를 파묘하여 유해를 홍성화장장으로 모시고 가서 화장한 뒤에 유골을 항아리에 담아 모시고 왔다. 봉안묘의 윗돌을 열고 석실의 첫째와 둘째 자리에 두 분을 모셨다. 부모님의 함자와 출생일·사망일은 밖의 돌판에 새겼다.

 

  부모님을 시안으로 모시고 나니, 설과 추석 전날에 온 가족이 함께 성묘하는 데에 따르는 부담이 없다. 집에서 40~50분밖에 걸리지 않으니, 몇 시간씩 차를 몰고 오가던 수고를 하지 않아도 된다. 관리비만 내면 알아서 다 해 주니, 벌초하느라 땀을 흘릴 일도, 벌에 쐬지 않을까 걱정하는 일도 없다. 온 가족이 부모님을 추모하며 기도한 뒤에 넓은 공원을 거닐면서 맑은 공기를 마신다. 그리고 맛집을 찾아가 식사를 한 뒤에 집으로 돌아온다. 이제 성묘 길은 돌아가신 부모님을 추모하면서 가족들이 친목을 도모하는 나들이 길이 되었다.(2021. 1.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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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얼마 전에 초등학교 동창인 박 형을 만나니, 묵직한 꾸러미를 건네주었다. 의정부에서 농장을 하는 친구가 보내준 은행을 덜어서 가지고 온 것이라고 하였다. 몇 년 전에는 겉껍질을 까서 주었으나, 올해는 까지 못하였다고 하였다. 나는 박 형의 따뜻한 마음에 감사하면서 점심 대접을 하고 헤어졌다.

   집에 돌아와 아내와 식탁에 마주 앉아 은행을 깠다. 내가 은행, 밤, 호두 등을 깔 수 있도록 만들어 놓은 펜치 모양의 기구로 겉껍질을 깨뜨려 놓으면, 아내는 깨진 겉껍질을 벗겨내고 알맹이를 꺼냈다. 은행의 크기에 맞는 홈에 은행을 물리고, 알맞게 힘을 주는 일이 서툴러서 처음에는 알맹이가 깨지기도 하였다. 그러나 시행착오를 거듭한 뒤에 요령을 터득하여 제대로 하였다. 은행 껍질을 까는 일이 쉽지 않은데, 전에 박 형이 많은 양의 은행을 까서 준 일을 생각하니, 새삼 고맙게 느껴졌다. 나는 박 형의 따뜻한 마음에 재삼 감사하면서 은행에 대해 생각하였다.

   은행은 사과나 배와 같은 과일이 아니고, 은행나무에서 열리는 종자(씨앗)이다. 은행은 ‘은빛 나는 살구’라는 뜻에서 은행이라고 하였다고 한다. 은행과 살구씨의 모양이 비슷하기 때문일 것이다. 은행나무는 ‘공손수(公孫樹)’라고도 한다. 20년 이상 자라야 열매를 맺으므로, 할아버지가 심으면 손자가 수확한다는 뜻에서 나온 이름이다. 은행나무를 ‘압각수(鴨脚樹)’라고도 한다. 이것은 은행잎이 오리발을 닮았다 하여 붙인 이름이다.

   은행나무는 예로부터 사찰, 향교, 서원이나 마을 어귀에 많이 심었다. 은행은 수명이 길므로, 수령 1,000년 내외의 은행나무가 많이 있다. 마을 어귀에 서 있는 은행나무는 마을을 수호하는 신목(神木)으로 여겨 마을신앙의 대상이 되기도 하였다. 이런 마을에서는 은행나무의 잎이 싹트는 모양에 따라 그 해 농사의 풍흉을 점친다. 이런 나무에는 “은행나무가 밤에 울면 마을에 재앙이 온다.”거나, “은행나무에 도끼질을 하면 피가 나온다.”는 말이 전해 온다.

   은행나무를 생각하면, 세 곳의 은행나무가 떠오른다. 첫째는 성균관대학교 캠퍼스에 있는 대성전과 명륜당 앞의 은행나무이다. 대학원에 다닐 때 이 나무 앞을 지나노라면 숙연해지곤 하였다. 옛날에 공자가 은행나무 아래에 단을 만들고 제자를 가르쳤다는 고사에서 유래하여 학문을 닦는 곳을 ‘행단(杏壇)’이라고 한다. 뿌리가 무성하여 잘 자라고, 수명이 긴 은행나무의 특성과 이 고사가 결합하여 ‘기초가 튼튼해야 학문을 크게 이루듯 유생들이 이를 본받아 열심히 공부할 것을 당부’하는 의미에서 대성전과 명륜당에 앞에 은행나무를 심었다고 한다. 이런 연유로 은행나무는 학문과 교육 기관을 상징하는 나무가 되었다. 성균관대학교, 일본의 도쿄대학교가 은행잎 문양을 학교의 상징으로 삼은 것이 그 예이다.

   그 다음은 천연기념물 제30호인 용문사 은행나무이다. 대학생일 때 처음 본 뒤로 몇 차례 가 보았다. 수령 1,100년으로 추정되는 이 노거수(老巨樹)를 보면, 그 자태가 웅장하여 신비감마저 든다. 용문사는 신라 진덕여왕 3(649)년에 원효대사가 세웠고, 은행나무는 그 뒤에 중국을 왕래하던 스님이 가져다가 심은 것이라고 한다. 이 나무에는 신라의 마지막 임금인 경순왕의 아들 마의태자(麻衣太子)가 나라를 잃은 설움을 안고 금강산으로 가다가 심었다는 전설과, 의상대사가 짚고 다니던 지팡이를 꽂은 것이 자랐다는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앞 이야기에는 천년을 이어온 신라의 멸망에 대한 아쉬움이 묻어 있고, 뒤 이야기에는 원효대사의 법력을 찬양하는 마음이 담겨 있다.

   그 다음은 인천시 강화군 석모도 낙가산에 있는 보문사의 은행나무이다. 수령 400여 년이 되는 이 은행나무는 암나무로, 이곳에 홀로 서 있다. 그런데도 열매를 맺으니 의아스러웠다. 30여 년 전에 한국교원대학교 대학원생들과 전설 조사 갔을 때 만난 이지훈(당시 67세, 고졸, 전 공무원)씨는 석모도 서쪽 섬에 있는 수나무와 마주 보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십리 넘게 떨어진 섬에 있는 수나무의 꽃가루가 바다를 건너 날아와 가루받이를 한다니, 풍매화(風媒花)인 은행나무의 번식력이 놀랍기 그지없다.

   은행나무는 파란 잎이 돋아있을 때에도 보기 좋지만, 노랗게 단풍이 든 잎이 가을 햇살에 나부끼는 모습은 참으로 곱고 예쁘다. 은행나무는 병해충에 강하고 미세먼지를 저감시키는 등 대기정화 효과가 있다. 그리고 빌로불, 은행산 등을 함유하고 있어 천적들로부터 자기를 지키므로, 병충해에 강하여 잘 자란다. 그래서 여러 곳에서 가로수로 심어 낭만적인 은행나무길을 만들었다. 그러나 은행이 익어 떨어질 즈음에는 육질 외종피에서 나는 악취가 심하다. 그래서 암나무를 수나무로 교체하는 곳도 있다.

   은행에는 카로틴 성분이 있어 기침을 멈추게 하고, 가래를 없애주는 효능이 있다. 비타민, 베타카로틴, 플라보노이드, 미네랄 성분이 있어 각종 질병과 노화를 예방해 주고, 항산화 작용을 하여 활력을 증진시켜 준다. 그리고 뇌기능을 강화하여 기억력, 집중력, 인지능력 향상에 도움을 주어 뇌와 관련된 퇴행성 질환을 완화시켜 준다. 또 징코플라톤, 플라보노이드 성분이 들어 있어 혈액순환을 도와 혈관의 노폐물을 청소하고, 콜레스톨 수치 감소시켜 동맥경화 같은 심혈관질환 예방에 도움을 준다. 레시틴, 엘고스테린 성분은 체내에서 칼슘의 흡수를 도와 뼈를 튼튼하게 해 준다.

   은행은 이런 효능만 있는 것이 아니라 부작용도 있다. 은행에 들어 있는 아미그달린이란 성분은 체내에서 효소에 의해 분해되면서 시안화수소를 생성하여 청색증을 유발하고, 두통을 일으키기도 한다. 심할 경우에는 호흡곤란이 일어나기도 한다. 따라서 은행은 반드시 익혀서 먹어야 하고, 한꺼번에 많이 먹지 말아야 한다. 은행의 하루 섭취량은 어린이 3알, 어른은 10알 이내가 좋다고 한다.

   나는 오래 전에 은행의 효능에 관한 글을 읽고, 은행을 하루에 다섯 알씩 굽거나 쪄서 먹는다. 겉껍질을 까는 일이 번거로워 주로 깐 것을 사다 먹는다. 그런데 은행은 크기, 건조 정도에 따라 맛이 조금씩 다르다. 맛 좋은 은행으로 기억에 남은 것은, 몇 년 전에 공주 갑사 입구에서 할머니한테 산 은행이다. 알이 굵고, 바짝 마르지 않아 부드럽고 맛이 아주 좋았다. 그 다음은 몇 년 전에 박 형이 준 은행이다. 그 은행에는 박 형의 따뜻한 사랑과 정성이 묻어 있어서 더욱 맛이 좋았다.

   아내와 함께 이런 이야기를 하며 은행을 까니, 은행 까는 일이 힘들거나 지루하지 않았다. 깐 은행은 몇 개의 작은 비닐봉지에 나눠 담아 냉동실에 넣었다. 하루에 열 알씩 먹으면 몇 달을 먹을 것 같다. 은행을 깐 날로부터 몇 주 지난 뒤에 한라봉 한 상자가 택배로 왔다. 박 형이 제주도에 사는 지인에게 부탁하여 보낸 것이다. 그래서 오늘은 은행과 한라봉을 먹으며 박 형의 따뜻하고 고마운 마음을 되새겼다. 월남전 참전용사로, 수술을 받은 적도 있는 박 형이 건강관리를 잘 하여 오래도록 따뜻한 우정을 나눌 수 있기를 간절히 기도한다.(2021. 1.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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