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의 일이다. 서재에 앉아 책을 읽고 있는데, 아내의 비명소리가 들렸다. 깜짝 놀라 달려 나가니, 아내가 거실에서 손을 흔들고 발을 동동 거리며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무슨 일이야? 왜 그래?”라고 물으니, 아내는 손가락으로 거실 바닥을 가리켰다. 탁자에 올려놓은 화분 아래의 마룻바닥에 작은 지렁이 한 마리가 꿈틀거리고 있었다. 사태를 파악한 나는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며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몇 겹으로 겹친 휴지로 지렁이를 집어다가 화장실 변기에 넣고 물을 내렸다.
지렁이는 환형동물(環形動物)로, 몸의 길이는 작은 종류가 2~3mm, 큰 종류는 2m 정도이다. 긴 원통형으로 가늘며, 많은 마디로 이루어져 있다. 재생력이 강하여 몸이 반으로 잘라지는 심각한 손상을 겪고도 몸을 복원할 수 있는 특이한 능력을 갖고 있다. 세계에 분포되어 있는 지렁이는 3,100여 종이나 된다. 그 중에 한국에 사는 지렁이는 60여 종이라고 한다.
지렁이는 유기물이 많은 흙속에서 산다. 나뭇잎, 동물의 시체나 분변 등 유기물을 먹을 때 많은 양의 흙과 모래, 작은 자갈 따위도 함께 섭취하였다가 내보낸다. 그래서 토양을 비옥하게 하며, 흙을 부드럽게 만든다. 지렁이의 분변은 그 자체로도 천연비료가 된다. 지렁이가 땅속에 길을 내어 뭉친 흙을 풀어주면, 빗물이 땅 속 깊이 스며들게 되어 식물이 수분을 충분히 흡수할 수 있게 된다. 그래서 지렁이가 많은 땅은 건강한 땅이라고 한다.
지렁이는 우리의 생활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다. 물고기를 잡는 미끼로 사용하기도 하고, 양어용 사료로 이용하기도 한다. 지렁이의 몸에서 나오는 액체는 피부 보습에 효과가 있다. 그래서 이를 원료로 각종 약품을 섞어 립스틱을 만든다. 지렁이를 혐오하는 여성이, 매일 입술에 바르는 립스틱의 원료가 지렁이라는 사실을 알면 놀랄 것이다. 《동의보감》에는 지렁이가 찬 성질이 있어 해열에 탁월하다. 이뇨(利尿)를 돕고, 황달을 다스리며, 회충을 박멸하는 데에 효능이 있다고 하였다. 또 어린이의 뇌전증(腦電症)을 치료하는 데에도 효과가 있다고 한다. 토룡탕은 보양식으로도 알려져 있다.
지렁이는 우리의 속담이나 설화의 제재가 되기도 하였다. 우리 속담 중에 ‘지렁이도 밟으면 꿈틀 한다’, ‘지렁이 갈비다’라는 말이 있다. 앞의 것은 아무리 눌려 지내는 미천한 사람이나, 순하고 좋은 사람이라도 너무 업신여기면 가만있지 아니한다는 말이다. 뒤의 것은 전혀 터무니없는 것을 비유적으로 이르거나, 아주 부드럽고 말랑말랑한 것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이다.
《삼국유사》에는 견훤의 출생담이 실려 있다. 광주 부잣집 딸의 방에 밤마다 청의동자(靑衣童子)가 찾아오므로, 그 정체를 알려고 옷자락에 실을 꿴 바늘을 꽂아두었다. 이튿날 아침에 실을 따라가 보니, 담 밑에 사는 커다란 지렁이였다. 그 처녀가 낳은 아이가 견훤이라고 한다. 후백제를 세운 비범한 인물 견훤이 지렁이의 아들이었다고 하니, 놀랍기 짝이 없다. 이 이야기에는 지렁이를 달의 속성을 지닌 ‘달동물(lunar animal)’, ‘생생력(生生力)을 지닌 신이한 동물’로 보는 의식이 드러난다. 지렁이를 가리키는 한자어는 ‘토룡(土龍)’, 또는 ‘지룡(地龍)’이다. 이 말에는 지렁이를 용으로 보는 의식이 바탕에 깔려 있다.
<지렁이 고기 먹고 눈뜬 시어머니>에서는 가난한 며느리가 눈먼 시어머니께 드릴 것이 없어 지렁이를 잡아 국을 끓여 드렸다. 이를 알게 된 시어머니가 놀라면서 눈을 떴다고 한다. <지렁이가 된 며느리>에서는 남편이 준 돈은 자기가 다 써 버리고, 눈먼 시어머니께는 지렁이를 잡아서 드린 며느리가 벼락을 맞아 죽어 지렁이가 되었다고 한다. 두 이야기에서 며느리가 시어머니께 드린 것은 똑같은 지렁이다. 그런데 지렁이를 드린 것이 효심의 발로인가 아닌가에 따라 그 결말이 전혀 다르게 나타난다.
나는 아내에게 지렁이는 예로부터 우리 생활과 밀접한 관련을 맺으며 살아왔다. 약용으로도 쓰이고, 농사에 도움을 주는 유익한 동물로, 옛날에는 신이한 동물로 여기기도 하였다. 지렁이가 사는 것으로 보아 우리 집 화분의 흙은 건강한 흙임을 알 수 있다. 매일 바르는 립스틱은 지렁이 추출물로 만든 것이다. 이러한 지렁이를 보고 뭘 그리 놀라 소리를 질렀느냐고 물었다. 아내는 지렁이를 보는 순간 징그럽고, 놀라워 자신도 모르게 소리를 질렀노라고 하였다. 지렁이에 대한 잠재적 혐오감이 폭발한 것이리라.
나는 아내에게 셋째 아이가 어렸을 때에 토룡탕을 끓여 먹인 일이 있지 않느냐고 물었다. 아내는 지난 일을 이야기하였다. 셋째 아들이 초등학교 1학년 때 감기만 걸리면 편도선이 붓고, 체온이 40도 가까이 올라 고통을 겪느라 학교에 가지 못하였다. 셋째 아이가 결석하게 된 까닭을 안 담임선생님이 지렁이를 끓여서 국물을 먹이면 나을 것이라고 하였다. 이 말을 들은 아내는, 한 번은 낚시점에 가서 지렁이를 사다가, 한번은 화단과 화분에서 지렁이를 잡아서 약탕관에 넣고 끓여서 먹였다. 그 뒤로 셋째 아이는 신통하게도 편도선이 부어 고생하는 일이 없어졌다고 한다. 그때는 아이를 낫게 하려는 일념에서 징그럽고 싫은 것도 참고 그 일을 하였다고 한다. 아이를 위하는 엄마의 마음이 징그럽고 혐오스런 일도 거뜬히 하게 하였나 보다.
어제 아내와 함께 집에서 가까운 공원에 갔다. 소나기가 내린 뒤라서 그런지, 커다란 지렁이 몇 마리가 포장된 길 위에서 꿈틀거리고 있었다. 지렁이가 비오는 날에 지상으로 올라오는 이유는, 피부로 숨을 쉬는 지렁이가 물에 찬 구멍에서 숨을 쉬기 위해 밖으로 나오거나, 짝짓기를 위해서라고 한다. 나는 저 지렁이가 ‘숨쉬기 좋은 곳을 찾아 나온 것일까, 짝짓기를 위해서 나온 것일까?’, ‘지렁이는 우리 집 화분에서 왜 마루로 나왔을까?’라는 생각을 하며 그대로 지나쳤다. 집에 와서 가만히 생각하니, 지렁이가 넓은 포장도로를 무사히 건너 흙이 있는 곳으로 가지 못하고 햇볕에 말라 죽었을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나뭇가지로 젓가락을 만들어 지렁이를 집어다가 흙이 있는 곳에 놓아주었으면 좋았을 것을. 만물을 사랑하는 마음을 실천하지 못한 것이 부끄럽기도 하다. 《주간 한국문학신문》 제549호, 2022. 6.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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