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6월 말경에 아내와 함께 영주 부석사를 찾았다. 무량수전을 오른쪽으로 돌아 조금 올라가니, 이 절을 창건한 의상 대사(625~702)의 상을 모신 조사당(祖師堂)이 있었다. 국보 19호로 지정된 이 건물은 정면 3칸, 측면 1칸의 목조건물이다. 고려 우왕 3년(1377)에 세웠고, 조선 성종 21년(1490)에 다시 고쳤다고 한다. 그러나 고려 신종 4년(1201)에 단청을 하였다는 기록도 있는 것을 보면, 조사당이 세워진 때는 더 거슬러 올라갈 수 있을 것 같다.

  조사당의 처마 밑에는 손가락 굵기의 줄기 몇 개가 곧추선 선비화(禪扉花)가 있다. 이 나무는 부석사를 창건한 신라의 의상 대사(625~702)가 방문 앞 추녀 밑에 꽂아 둔 지팡이에서 뿌리가 생기고, 가지와 잎이 나서 꽃을 피우며 지금까지 살고 있다고 한다. 의상 대사가 “내가 간 뒤에 이 지팡이에서 반드시 가지와 잎이 날 것이다. 이 나무가 말라 죽지 않으면 나도 죽지 않은 줄로 알아라.”라고 한 말이 실현된 것이다. 이 나무는 처마 밑에 있어 비와 이슬을 맞지 않으면서 천 년의 세월을 지나 오늘에 이르렀다고 하니, 참으로 놀라운 일이다.

  조선 후기의 실학자 이중환(1690~1756) 선생은 《택리지》(「卜居總論 山水」)에 선비화를 두고, “지팡이에 싹이 터서 자란 이 나무는 햇빛과 달빛은 받을 수 있으나 비와 이슬에는 젖지 않는다. 지붕 밑에서 자라고 있으나 지붕은 뚫지 아니한다. 키는 한 길 남짓하지만, 천년 세월을 지나도 한결같다.”고 적었다. 그리고 이어서 광해군 때 경상감사 정조(鄭造)가 지팡이를 만들겠다며 이 나무를 잘라간 일을 이야기하였다. 이 나무는 곧 두 줄기가 다시 뻗어나서 전과 같이 자랐지만, 정조는 인조 계해년에 역적으로 몰려 참형을 당하였다고 한다. 그는 이어서 퇴계 이황(1501~1570) 선생이 이 나무를 두고 지은 시를 소개하였다. “옥을 뽑은 듯 정정하게 절 문에 의지했는데(擢玉亭亭倚寺門), 스님의 말은 지팡이가 신령스러운 나무로 화했다 한다(僧言錫杖化靈根). 지팡이 머리에 스스로 조계수가 있는가(杖頭自有曺溪水). 하늘이 내리는 비와 이슬의 은혜를 힘입지 않는구나(不借乾坤雨露恩). 이 글은 선비화가 의상대사의 지팡이에서 싹이 나서 자란 나무이고, 비와 이슬의 은혜 없이 자라고 있는 신령스러운 나무라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옛사람들은 신이한 힘을 지니고 있다고 믿는 사물을 접촉하거나 먹으면, 신이한 힘이 자기에게 전이된다고 믿는 주술적(呪術的) 심성을 지니고 있었다. 그래서 신이한 물건을 접촉하거나 몸에 지니기도 하고, 그 일부를 먹기도 하였다. 부적이나 주물(呪物)을 몸에 지니기, 돌미륵의 코를 갈아 먹기, 특정 식물의 줄기나 잎을 따다가 끓여 먹기 등은 이러한 주술적 심성에서 나온 것이다. 사람들은 이러한 의식을 가졌기에 신이한 힘을 지니고 있다고 믿는 선비화의 잎을 따거나 줄기를 잘라가는 일이 빈번해 졌다. 이를 막기 위해 절에서는 오래 전부터 선비화 둘레에 철망을 둘러 이 나무를 보호하고 있다. 지금도 이 나무는 너비 3m, 폭 1.4m, 높이 2m 가량의 촘촘한 스테인리스 철망 안에 갇혀 있다.

  선비화는 낙엽관목으로, ‘골담초(骨擔草)’라고도 한다. 뿌리가 생약으로 뼈를 다스린다는 뜻으로 부르는 이름이다. 한국과 중국 등의 아시아가 원산지여서 우리나라의 산에서 쉽게 볼 수 있는 나무이다. 뿌리혹박테리아를 가진 콩과 식물이라 척박한 땅에서도 잘 자란다. 이는 몇 개의 줄기가 모여서 곧추서 있고, 가시가 있으며 껍질은 어두운 녹색이다. 4~5월에 나비 모양의 꽃이 노랗게 피어 붉게 변한다. 열매는 원주형으로 9~10월에 익는다. 관상용으로 재배하고, 뿌리와 꽃은 약재(해수, 대하, 고혈압, 타박상, 신경통 등)로 쓰인다. 꽃말은 겸손, 청초, 관심이다. 의상 대사는 우리나라에 많이 자라고 있는 골담초로 지팡이를 만들어 짚고 다녔던 모양이다.

  지팡이의 주된 기능은 노약자나 다리가 불편한 사람이 걷거나 서 있을 때 몸을 의지할 수 있는 보조기구이다. 시각장애인의 흰 지팡이는 혼자 걸을 때 더듬이 역할을 하여 보행의 안전을 기하게 한다. 지팡이가 보행의 보조기구 이상의 기능과 의미를 지니는 경우도 있다. 유목민의 목자에게는 양떼를 인도할 때 쓰는 도구이고, 마법사에게는 마법을 행할 때 꼭 있어야 하는 소품이다. 장로나 족장, 스님, 도인과 같은 사람에게는 권위의 상징물이기도 하다.

  특히 스님의 지팡이는 주장자(拄杖子)라고도 한다. 주장자는 걸을 때에 도움을 주는 도구이면서, 법문(法問, 불법에 대하여 묻고 대답함)․좌선(坐禪, 고요히 앉아서 참선함)․경책(警策, 주의가 산만하거나 조는 사람을 깨우침)을 할 때에도 손에서 놓지 않는다. 그러므로 주장자는 스님과 희로애락을 같이하면서 도의 길을 함께 하는 도반(道伴)이다. 그러므로 주장자는 스님의 사상과 감정이 응집되어 있는, 분신과 같은 존재이다. 또, 높은 도의 경지에 이른 스님의 권위를 상징하는 물건이다. 따라서 선비화는 도가 깊고 법력이 높은 의상대사의 도력(道力)과 높은 정신이 깃들어 있는 신령스런 나무이다.

  《구약》 「민수기」에는 모세와 함께 이스라엘 민족을 가나안으로 인도한 지도자 아론의 지팡이에 싹이 난 이야기가 실려 있다. 선비화와 아론의 지팡이 이야기는 신라와 이스라엘의 종교 지도자이고, 사제자인 두 사람의 지팡이에 싹이 나고 자라서 꽃을 피웠다는 점에서 일치한다. 아론의 지팡이에서 싹이 난 것은 하나님의 권능을 드러낸 것이고, 의상 대사의 지팡이에서 싹이 난 것은 의상 대사의 법력이 깊고 높았음을 드러낸다.

  유명 인사가 짚고 다니던 지팡이가 싹이 나서 자란 나무는 선비화 외에도 많이 있다. 강원도 정선의 태백산 정암사 주목은 신라 시대 자장 율사가, 경기도 양평 용문사의 은행나무는 신라 마지막 왕자인 마의태자의 지팡이가 자란 것이라고 한다. 전남 순천 송광사 천자암의 쌍향수(곱향나무)는 고려 시대 보조국사 지눌 스님, 전남 장성 백양사 이팝나무는 고려 때 각진 국사가 짚고 다니던 지팡이를 꽂아둔 것이라고 한다.

  부석사의 선비화는 의상 대사가 짚고 다니던 골담초 지팡이에 뿌리가 생기고, 가지와 잎이 나서 꽃을 피우며 천 년을 살고 있는 신령스런 나무이다. 이 나무는 의상 대사의 깊은 도와 법력이 깃들어 있는 신령스런 나무임을 드러내면서 부석사가 신성한 사찰임을 강조한다. 선비화는 한국 사람들에게 잘 알려진 골담초이다. 이것은 일반 민중과 친숙한 골담초에 신이성을 부여한 것으로, 민중들에게 의상 대사를 추앙하면서 불심을 돈독히 할 것을 권면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 (2022. 01. 01.)

부석사 조사당 오른쪽 추녀밑 스테인리스 철망 안에 있는 선비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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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 달 전쯤에 도로교통공단에서 보낸 운전면허 갱신 통지서를 받았다. 1979년 2월에 2종보통 운전면허증을 받은 뒤에 몇 차례 갱신을 하였다. 2종 면허 갱신 주기가 전에는 10년이었던 것 같다. 그런데 2016년 11월에는 70세가 넘은 관계로 5년짜리 면허증을 받았다. 면허증을 꺼내어 보니, 유효기간이 금년 12월 31일까지이다. 통지서에는 ‘고령운전자 면허 갱신’이라는 말과 함께 준비물이 씌어 있다. 지난번까지와는 달리 ‘치매검사 결과지’, ‘건강검진 결과지’, ‘교통안전교육 이수증’을 준비하라고 하였다. 이 세 서류는 고령운전자 면허 갱신 여부를 판정하는 데에 필요한 서류인 것 같다.

  통지서에 적힌 치매안심센터로 전화를 하니, 집에서 가까운 치매안심센터 전화번호를 알려 주었다. 그래서 성동구 보건소 치매안심센터에 전화를 하니, 검사예약이 많아 금년 내에 검사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고 하였다. 금년 내에 운전면허 갱신 신청을 해야 한다고 사정을 하여 3주 후에 검사를 받기로 예약을 하였다. 예약 당일에 성동구 성수동의 공공복합청사 5층에 있는 치매안심센터에 갔다. 치매검사를 받으러 오는 분들이 많았다. 이를 보면서 치매에 관해 관심을 갖지 않고 지내온 것이 후회스러웠다. 그와 동시에 진단검사 대상이 되어 운전면허 갱신을 하지 못함을 물론, 감별검사를 받게 되면 어쩌나 하는 생각이 들어 불안하였다.

  검사실에 들어가니, 검사원(임상심리사?)은 생년월일과 주소, 학력을 물었다. 그리고 ‘오늘은 몇 월 며칠인가요?’, ‘이곳은 어디인가요?’ 등을 묻고 답하게 하였다. 그런 뒤에 긴 문장 따라 말하기, 조금 전에 말한 문장을 기억하여 말하기, 과일과 채소의 이름 말하기, 섞인 그림 찾기 등의 검사를 하였다. 기억력, 주의집중력, 언어능력, 계산능력, 시공간 감각 등을 알아보는 기초검사였다. 약 30분 동안 테스트한 뒤에 검사원은 ‘양호’ 판정을 하였다. 검사실 밖으로 나오니, 한 남자 어른이 선별검사를 통과하지 못하여 진단검사를 받아야 한다는 말을 듣고, 함께 온 부인과 함께 풀이 죽어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갔다. 두 분의 모습을 보는 본 순간 나는 가슴이 짠하였다. 다른 방에서 검사를 하고 ‘양호’ 판정을 받은 아내와 함께 치매검사 결과지를 받아 들고 안도의 한숨을 쉬며 밖으로 나왔다.

  고령자 교통안전교육을 받기 위해 컴퓨터를 켜고, 강남운전면허시험장에 교육 예약을 하였다. 그런데 거리가 멀고, 시간도 맞지 않아 온라인 교육이 있는가 살펴보니, 도로교통공단 이러닝센터에서 하는 온라인 교육이 있었다. 그래서 교육장 예약을 취소하고, 온라인 교육을 신청하였다. 신청 즉시 시작할 수 있어서 교통법규와 안전 문제, 상황별 안전운전기법, 음주 및 약물 복용 직후 운전의 위험성 등에 대한 교육을 받았다. 매우 유익한 내용을 짜임새 있고, 알기 쉽게 강의하였다. 밤 9시경에 시작하여 꼬박 두 시간 가량 수강하였다. 강의가 끝난 뒤에 교육이수증을 출력하여 인쇄하였다.

  건강검진 결과지는 가지고 가지 않아도 인테넷으로 검색하여 확인한 뒤에 발급해 준다는 말을 들었다. 그러나 면허 발급 업무를 하는 분들께 번거로움을 끼치지 않겠다는 생각에서 건강검진센터에 가서 작년에 받은 건강검진 결과지를 받아왔다. 전에는 관심을 기울이지 않던 기본검사 항목을 보니, 시력은 좌우 1.0과 1.5, 청력은 좌우 정상이라고 적혀 있다. 2종보통 면허는 좌우 둘 중 하나의 시력이 0.5 이상(1종면허는 한쪽이 0.8 이상, 다른 한쪽 0.5이상)이면 된다고 하고, 청력은 정상이니 걱정하지 않아도 되겠다.

  나는 성동경찰서 민원실로 가서 적성검사원서를 작성하고, 3주에 걸쳐 준비한 세 가지 서류와 사진을 수수료(13,000원)와 함께 제출하였다. 민원실 면허 담당자는 서류를 살펴보고 접수한 뒤에 접수증을 주면서, 2주 뒤에 면허증을 찾으러 오라고 하였다. 세 가지 서류를 준비하여 접수하고 나니, 마음이 홀가분하여 가벼운 발걸음으로 민원실을 나왔다.

  그동안 나는 75세가 넘었지만, 운전에 필요한 시력과 청력·기억력·주의집중력·언어능력·계산능력·시공간 감각, 교통법규 기억 등에 문제가 없다고 자신하며 지내왔다. 그래서 운전면허 갱신 통지서를 받던 날에는 모든 사람에게 치매검사 결과지, 건강검진 결과지, 교통안전교육 이수증을 제출하라는 것이 지나친 부담을 주는 일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하였다. 그러나 면허 갱신을 하기 위해 치매검사를 받고, 시력과 청력 및 건강상태를 확인하면서 이는 유익할 뿐더러 필요한 일이라는 생각을 하였다. 또 교통안전교육을 받으면서 교통안전에 대한 주의와 경각심을 갖게 되었다. 그러므로 고령운전자의 면허를 갱신할 때 세 가지 서류를 제출하도록 한 것은 잘한 일이라 하겠다.

  접수증에 적힌 날짜 며칠 전에 면허증이 발급되었으니 찾으러 오라는 문자 메시지가 왔다. 그래서 그 다음날 성동경찰서 민원실에 가서 새로 발급된 면허증을 받았다. 앞으로 3년 동안 자동차를 운전할 수 있게 되어 기쁘다. 고령자의 운전면허증은 건강하다는 증명서와도 같다. 내 또래의 지인 중에는 운전면허증을 반납한 사람이 여럿 있다 그런가 하면, 나이가 나보다 일곱 살이나 많은데도 운전을 하면서 즐겁게 지내는 분도 있다. 그 분은 많은 사람의 부러움을 사고 있다. 이제 나의 바람은 3년 뒤에도, 그 다음 3년 뒤에도 운전면허증을 받아 운전하는 것이다. 안전운전을 하면서 건강에 유의하면 이런 바람도 이루어지리라 믿는다. (2021. 11. 25.) <성광일보, 2022. 2. 11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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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산에서 휴전선까지 동해안을 따라 이어지는 7번 국도는 주변의 풍광이 아름답기로 이름나 있다. 속초에서 이 도로를 타고 북쪽으로 약 20km를 가면 송지호가 있다. 송지호를 조금 지나 왼쪽으로 난 도로를 따라 1.5km 쯤 들어가면, 강원도 고성군 죽왕면 오봉 1리에 자리 잡고 있는 왕곡(旺谷) 마을이 나온다. 이 마을은 오음산을 비롯한 다섯 개의 산봉우리로 둘러싸여 있고, 송지호에 의해 분리되어 있어 동해안가에서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6․25전쟁 때에도 대부분의 집들이 폭격을 피할 수 있었다. 그러므로 고택들이 고스란히 보존되어 있고, 전통마을 분위기를 잘 간직하고 있어 국가 민속 문화재 제235호로 지정되었다.

   이 마을은 고려 말 두문동 72현의 한 분인 함부열(咸傅烈)이 조선 건국에 반대하여 인근 간성 지역에 낙향하였고, 그의 손자 함영근이 이 마을에 와서 살면서 마을의 역사가 시작되었다. 이후 임진왜란으로 폐허가 되었다가 다시 마을의 기능을 하게 되었다. 지금 이 마을에는 양근 함씨 및 강릉 김씨를 비롯하여 다양한 성씨 100여 명이 거주하고 있다. 고려 왕조에 대한 충심과 절의로 시작된 이 마을이 600여 년의 역사를 이어올 수 있었던 것은, 밖으로 잘 드러나지 않는 입지 조건과 주변의 바다와 호수, 논과 밭 등 생존에 필요한 요건이 갖추어졌기 때문이다.

   이 마을에는 19세기 전후에 건립된 북방식 전통 한옥과 초가집 50여 채가 원형을 간직한 채 옹기종기 모여 있다. 가옥은 안방․사랑방․마루․부엌이 한 건물에 있고, 부엌에 외양간이 붙어 있는 겹집구조로, 강원 북부 지방의 고유 가옥 구조를 보여주고 있다. 눈이 지붕 위에 쌓이지 않고 최대한 흘러내리도록 지붕을 최대한 낮게 드리웠다. 굴뚝은 진흙과 기와를 한 켜씩 쌓아올리고, 맨 위에 항아리를 엎어놓았다. 이것은 굴뚝을 통해 나온 불길이 초가에 옮겨 붙지 않게 하는 한편, 항아리 안에서 열기를 집 내부로 다시 들여보내려는 뜻에서 나온 지혜로운 조치라 하겠다.

   예스런 분위기를 간직한 이 마을은 드라마나 영화의 촬영 무대가 되기도 하였다. 국군 홍보 방송물 《배달의 기수》 등 다수의 반공 영화와 TV 문학관 홍어가 이곳에서 촬영되었다. 2016년에는 독립운동가이면서 시인인 ‘윤동주’와 고종사촌인 ‘송몽규’를 모델로 한 영화 동주가 이 마을에서 촬영되었다. 이 영화를 만든 이준익 감독은 주인공인 ‘동주’와 ‘몽규’가 태어나서 자란 북간도 명동촌 일대와 흡사한 장소를 찾기 위해 사극 세트장부터 한옥촌, 민속마을 등 방방곡곡을 돌아다녔다. 그러다가 북방식 한옥이 고스란히 보존되어 있는 이곳을 촬영지로 선정하였다고 한다. 하나의 지붕 아래 부엌, 마루, 방들이 존재하는 독특한 가옥 구조는 ‘동주’와 ‘몽규’를 둘러싼 가족관계 및 시대상, 지역적 특색까지 한눈에 보여주기에 안성맞춤이었기 때문이다.

   이 마을에는 다른 마을에서는 보기 드문 효자각이 두 개나 있다. 하나는 마을 입구 쪽에 있는 ‘양근 함씨 4세 효자각’(1820년 건립)이다. 어린이들을 가르치는 ‘몽학교관(蒙學敎官)’을 지내던 함성욱은 부친의 병환이 위독하자 손가락을 잘라 피를 부친께 먹여 7일을 더 살 수 있게 하였다. 나라에서 그에게 ‘조봉대부(朝奉大夫, 종사품 하 문관의 품계)’의 칭호를 내렸다. 그의 아들 인흥과 인홍, 손자 덕우, 증손자 희용도 자기 아버지의 병환에 손가락을 잘라 피를 먹여 며칠을 연명하게 하였다. 그리고 각각 시묘 3년을 하였다. 조정에서는 이 보기 드문 효자 집안에 벼슬을 내리고, 이를 기리는 비를 건립하게 하였다.

   다른 하나는 통정대부 돈령부도정을 지낸 함희석(咸熙錫)의 효행을 기리는 ‘강릉 함씨 효자각’(1869년에 건립)으로, 마을 안쪽에 있다. 함희석은 부모가 병환으로 눕게 되자 바다에 헤엄쳐 나가 귀한 고기를 잡아 부모를 봉양하였다. 그리고 부모가 화상을 입어 움직일 수 없게 되자 지성으로 부모를 보살피는 등 효성을 다하였다. 부모의 상을 당하여서는 3년 동안 범의 보호 아래 시묘를 하였다고 한다.

   두 효자비에는 각각 양근 함씨와 강릉 함씨로 다르게 적혀 있다. 강릉 함씨의 원조는 함혁(咸赫)으로, 삼한 초부터 양근(지금의 양평) 지역에 살았다. 그런데 15세손 신(信)이 785년(신라 원성왕 1) 김주원(金周元: 강릉 김씨의 시조)을 따라 강릉에 와서 살게 되어 본관을 강릉으로 하였다고 한다(강릉 함씨 관향 유래 족보참조). 그러므로 양근 함씨나 강릉 함씨는 동성동본의 씨족이라 하겠다. 따라서 두 효자각의 효자는 같은 집안의 효행에 관한 이야기이다.

   옛사람들은 부모님의 뜻을 살피며 정성으로 봉양하는 외에 조문효도(蚤蚊孝道, 옷을 벗고 누워 자면서 벼룩과 모기에 물려 부모님이 편히 주무시게 하는 효도), 상분(嘗糞, 부모의 병세를 살피려고 그 대변을 맛봄), 단지(斷指, 손가락을 잘라 피를 내어 입에 흘려 넣거나 살을 태워 먹임), 할고(割股, 허벅지 살을 베어 굽거나 삶아서 드림) 등의 극단적인 방법으로 효도를 하였다. 이런 이야기는 신라 경덕왕 때 향덕(向德)이 자신의 넓적다리 살을 베어 아버지를 봉양하였다는 삼국사기(신라본기 9 경덕왕조, 권48열전)와 삼국유사(권5 孝善)의 기록을 비롯하여 조선 세종 때 간행된 삼강행실도에 여러 편 기록되어 있다. 단지․할고한 사람은 대부분 자식이지만, 손자나 아내도 있다. 종이 상전을 위해 단지하는 이야기도 전해 온다. 단지․할고를 한 경우에는 조정에서 관직, 재물을 내리거나 정려를 세워 표창하였다. 이 마을의 두 효자각 중 ‘양근 함씨 4세 효자각’은 단지한 효자 이야기이다.

   단지는 부모를 위해 자기를 희생하는 갸륵한 정신이고, 범할 수 없는 숭고한 정신이라는 점에서 크게 표창하고, 권장해 왔다. 이러한 효자 표창은 효를 강조하는 사회적 분위기 조성에 효과적인 방법이었다. 그러나 후대로 내려오면서 단지가 부모님의 병을 고치는 데에 효험이 있는 방법인가를 따져 보게 되었다. 그 결과 이것은 합리적 사고에 의한 것이 아니라, 효 윤리를 강조하기 위한 수단으로 이용되어 왔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일찍이 이상(1910~1937)은 수필 조춘점묘(早春點描)의 「단지한 처녀」에서 이를 비판적인 안목으로 다루었다.

   왕곡마을에 있는 두 개의 효자각은 그 동안 함씨를 비롯한 인근 지역 주민에게 효행마을에 산다는 자부심과 긍지를 갖게 해 주었을 것이다. 그러나 효에 대한 관념이 변화된 오늘날에는 함씨의 단지 효행이 별다른 감흥을 주지 못하는 옛이야기가 되고 말았다. 단지가 효험이 없는 불합리한 행위로, 효 이념 강화의 도구로 이용되었던 점은 있다. 그러나 부모님의 은덕을 기리고 효도하는 마음만은 존중하고, 이를 비판과 조롱의 대상으로 삼지는 않았으면 좋겠다.(2021. 11.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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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단오 무렵부터 휴대용 선풍기를 들고 다니는 사람이 눈에 뜨이기 시작하더니, 7월 들어 기온이 30°c를 웃도는 날씨가 계속되자 부쩍 많아졌다. 부채를 들고 다니는 사람은 어쩌다 볼 수 있다.

  단오의 풍습을 보면, 조선 시대에는 단옷날에 공조(工曹)에서 부채를 만들어 임금께 진상하고, 임금은 이를 신하들에게 나눠 주었다. 또 일반인들 사이에도 부채를 선물로 주고받았다. 청년에게는 푸른 부채를, 노인이나 상제에게는 흰 부채를 주었다고 한다. 부채 선물은 더위 타지 말고 건강하게 지내라는 뜻이 담겨있다. 단오에는 더위를 식히는 부채를, 동지에는 농사에 도움을 주는 책력을 선물하는 ‘하선동력(夏扇冬曆)’은 오랜 동안 전해 오는 관습이었다.

  요즈음에는 집이나 각 건물의 실내는 말할 것도 없고, 승용차나 버스·지하철·열차·항공기 등의 교통수단에도 냉방 시설이 잘 되어 있다. 그래서 긴 시간 더운 곳에 있는 경우는 그리 많지 않다. 그러나 가까운 거리를 걸어서 이동할 때나 냉방 시설이 없는 곳에 있게 될 경우에는 더위를 식히는 도구가 필요하다. 이런 때에 전에는 부채를 즐겨 사용하였지만, 요즈음에는 많은 사람들이 휴대용 선풍기를 선호한다. 휴대용 선풍기를 가지고 다니는 사람들을 보면, 이를 얼굴 정면과 옆, 뒷목 부분에 번갈아 대곤 한다. 이것은 몇 년 전만 하여도 청소년들이 주로 들고 다녔으나, 요즈음에는 중년의 여성은 물론, 나이든 할머니들까지도 들고 다닌다. 외국에서 온 관광객들도 이것을 들고 다닌다.

  지난해에 중학생인 손녀가 왔을 때의 일이다. 손녀는 다른 아이들이 들고 다니는 것보다 좀 큰 휴대용 선풍기를 들고 왔다. 바람을 쐬어보니, 제법 시원하다. 더위를 타는 손녀는 작은 것은 시원하지 않아 큰 것을 골라 샀다고 하였다. 휴대용 선풍기는 제품에 따라 크기가 다르고, 배터리의 사용 시간도 차이가 있다. 가격은 5천원에서 3만원까지로 다양하다. 손녀는 자기 용돈 2만원을 주고 샀다고 하였다. 손녀의 말에 따르면, 휴대용 선풍기는 자기 용돈으로 산 친구가 있는가 하면, 친구끼리 선물로 주고받은 친구도 있고, 부모님이 사 주신 친구도 있다고 하였다.

  휴대용 선풍기는 바람을 일으키는 날개 부분이 있는 것과 없는 것이 있다. 날개가 있는 것은 날개의 숫자와 크기, 배터리의 성능에 따라 바람의 세기가 다르다. 날개 부분이 없는 제품은 바람이 균일하고, 부드러우며, 보관과 청소가 간편하다. 손잡이만 있는 제품도 있고, 받침이 있어 세울 수 있는 제품도 있다.

  최근에는 목걸이형 선풍기도 나왔다. 이 제품은 목에 걸므로 손을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고, 잃어버릴 염려도 적다. 그리고 안전 날개로 되어 있어 손이 닿아도 다칠 위험이 없으므로 인기를 끌고 있다. 또 뒷주머니에 걸어 등을 시원하게 하는 허리 선풍기, 반으로 접어 휴대하고, 접으면 밑 부분은 거치대가 되는 폴더형도 있다. 이처럼 휴대용 선풍기는 다양한 제품이 개발되었다.

  휴대용 선풍기를 구입할 때에는 바람의 성능, 배터리의 충전과 사용 시간, 사용할 때의 편의성, 소음(騷音) 유무, 가성비 등을 따져봐야 한다. 휴대용 선풍기가 처음 나올 무렵에는 배터리가 폭발하여 화상을 입는 사고가 발생하기도 하였으나, 요즈음에는 품질이 좋아져서 그런 일이 거의 없다고 한다. 그러나 리튬전지가 포함된 제품을 살 때에는 KC 마크, 전자파 적합등록번호, 안전인증번호 등을 확인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한다.

  휴대용 선풍기에서는 매우 높은 수치의 전자파가 발생한다. 그런데 바람개비 팬으로부터 조금만 떨어져도 전자파의 세기가 크게 낮아진다고 한다. 그러므로 머리와 얼굴로부터 25cm 이상 떨어뜨린 상태에서 사용하는 것이 좋다고 한다. 국립전파연구원이 최근에 전자파 강도를 측정한 바에 따르면, 대부분의 제품은 인체보호기준을 만족한다고 한다. 이것은 휴대용 선풍기의 품질이 매우 좋아졌음을 말해 준다.

  며칠 전에 지하철역에서 만난 남자 어른은 하얀 밴드를 목에 걸고, 부채를 들고 있었다. 앞서서 걸어가는 것을 보니, 목 뒤에서 불이 번쩍거렸다. 나는 목에 건 것이 헤드폰인지, 넥 밴드 선풍기인지 궁금하여 그게 무엇이냐고 물었다. 그는 선풍기라고 하면서, 자기 목에 걸었던 선풍기를 나에게 대 주었다. 정말 바람이 잘 나와 시원하였다. 시원한 선풍기를 목에 걸고서 부채는 왜 들고 있느냐고 물으니, 그는 얼굴을 시원하게 하려고 부채질도 한다고 하였다. 그는 외국에 사는 딸이 선물로 보내준 것이라면서 한껏 자랑하였다. 지하철역에서 만난 할머니 한 분은 딸이 선풍기를 사 주었다면서, 처음에는 들고 다니는 것이 번거로웠지만, 지금은 필수 휴대품이 되었다고 하였다.

  인터넷을 보니, 인천 계양구의 주민센터에서는 저소득층 노인과 어린이에게, 농협 서울지역본부에서는 고령, 취약 여성 농업인에게 휴대용 선풍기를 선물로 주었다고 한다. 모 디지털 가전그룹에서는 자기 회사 제품을 구입하는 고객에게 이를 사은품으로 준다고 한다. 이처럼 휴대용 선풍기는 여름철이면 개인 또는 단체에서 선물로 주고받는 인기 품목이 되었다.

  나도 작년에 휴대용 선풍기를 손녀한테 선물로 받았다. 이것을 외출할 때에는 가지고 다니지는 않고, 집에서만 쓰고 있다. 나는 계절에 관계없이 밤에 잠들었다가 깨면 더워서 땀이 날 때가 있다. 그럴 경우 전에는 협탁에 놓아둔 합죽선을 펴서 부채질하여 땀을 식히곤 하였다. 그러나 요즈음에는 손녀가 사다준 미니 선풍기를 켜고 바람의 세기를 조절하여 땀을 식히곤 한다. 부채질을 하지 않고 누워 있어도 되니, 유용성이 부채보다 낫다 하겠다.

  이제 휴대용 선풍기는 현대인의 생활용품이 되었다. 그에 따라 단오에 부채를 선물하던 풍습은 어느새 휴대용 선풍기를 선물하는 것으로 바뀌었다. 그래서 '단오선(端午扇)’은 문헌 기록으로만 전해지게 되었다. 20~30년 전만 하여도 여름철 필수품이던 부채가 에어컨이나 선풍기에게 자리를 내준 것처럼 외출할 때 챙기던 합죽선도 휴대용 선풍기에게 자리를 물려주게 되었다. 과학 기술의 발달과 사회 변화에 따른 풍속의 변화이다. 전통문화가 시대의 변화에 따라 편의성과 효용성에 맞게 변하고 있음을 실감한다. (2021. 08.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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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령포와 장릉을 탐방한 뒤에 영월군 주천면 주천리에 있는 주천(酒泉)을 찾았다. 이곳은 전에 전설을 조사하러 갔던 곳이다. 함께 간 아내는 ‘술이 나오는 샘’이라는 뜻을 지닌 ‘주천’이 면 이름, 기관이나 학교 이름에 들어간 것이 특이하다고 하였다. 그리고 주천이라는 지명은 언제부터 썼으며, 술과 무슨 관련이 있느냐고 물었다.

  주천 고을의 이름은 고구려 때에는 ‘주연(酒淵, 술이 괴는 못)’이었다. 그런데 신라 경덕왕 때 ‘주천(酒泉, 술 나오는 샘)’으로 고쳐 불렀다고 한다(《고려사》 참조). 이 둘은 못[淵]과 샘[泉]으로, 환기(喚起)하는 대상에 차이를 보이지만, 술이 나오는 곳이라는 점에서는 일치한다. 이로 보아 술과 관련되는 이름이 이 지역의 이름이 된 것은 고구려 때부터였음을 알 수 있다. 이 지명이 전설과 함께 지금까지 전해 오고 있으니 참으로 특이한 일이다.

  예전에 서쪽 개울가에 술이 나오는 돌구유가 있었다. 그런데 고을 관원이 술을 받으러 다니는 것을 귀찮게 여겨 관청의 뜰로 옮겨 가려고 하였다. 그때 갑자기 천둥과 함께 벼락이 쳐서 구유를 세 개로 쪼개놓았다. 그 중 하나는 이곳에 남고, 하나는 연못으로 잠기고, 하나는 간 곳을 모른다고 한다. 이곳을 찾은 조선 전기의 학자 강희맹(1424~1483)과 성임(1421~1484)은 이 내용을 시로 표현하였다(신증동국여지승람, 원주목 고적). 이 기록은 ‘주천 전설’이 조선 전기부터 전해 왔음을 말해 준다.

  최근까지 민간에 전해 오는 이야기는 이와 좀 다르다. 옛날에 주천에서 술이 나왔다. 그런데 이 샘물은 양반이 떠먹으면 약주가 되고, 상민이 떠먹으면 탁주가 되었다. 그 샘물은 상민이 양반의 의관을 하고 가도 탁주가 되고, 그 반대로 양반이 상민의 복장을 하고 가도 약주가 되었다. 어느 때, 이 고을에서 농사짓던 한 젊은이가 서울로 가서 과거를 보아 급제하고 돌아왔다. 그는 양반이 되었으므로, 약주가 나올 것을 기대하고 그 샘물을 떴다. 그런데 역시 탁주였으므로, 화가 나서 그 샘에다 돌을 처넣었다. 그 뒤로는 그 샘에서 술이 나오지 아니하였다고 한다(최상수, 한국민간설집, 통문관, 1958). 지금 술샘이 있던 자리에 세워놓은 표지석에 적힌 내용도 이와 비슷하다.

  옛날에는 술이 나오는 샘이 정말 있었을까, 이런 전설이 어떻게 하여 생겼을까? 나는 「주천 전설」은 지리적 특성과 인문사회적 상황이 상호작용하여 생겼을 것이라는 생각에서 주천 인근을 살펴보았다. 그곳에는 ‘술샘공원’이 조성되어 있고, 술샘이 있던 자리에는 이를 소개하는 표지석이 서 있다. 그 아래에는 주천강이 흐르고 있다. 강변을 낀 산자락에는 ‘주천강 둘레길’이 조성되어 있었다.

  술샘은 망산의 벼랑바위 밑에 있고, 아래쪽 너럭바위 밑에는 연못이 있고, 주천강이 흐르고 있다. 이곳은 동서로는 영월에서 원주 쪽으로, 남북으로는 제천에서 평창 쪽으로 통하는 길목에 자리 잡고 있는 교통의 요지이다. 그러므로 별다른 교통수단이 없던 옛날에는 걸어서 이곳을 지나는 사람이 아주 많았을 것이다. 이곳을 지나는 사람들은 이곳에서 시원한 물을 마시고, 그늘에서 쉬어 갔을 것이다.

  그런데 이 지역은 석회암이 많은 곳이어서 석회암층을 흘러나오는 물이 언뜻 술맛을 느끼게 하였던 것이다. 갈증을 풀어주는 시원한 물에서 술맛이 난다면, 얼마나 좋은 일인가! 사람들은 이곳에서 물을 마시면서 술을 마실 때 느끼던 시원함과 쾌감을 맛보았을 것이다. 이런 일과 연관 지어 이곳 샘의 이름을 ‘술못[酒淵]’ 또는 ‘술샘[酒泉]’이라 불렀을 것이다. 이렇게 하여 생긴 특이한 이름이 고을의 이름이 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석회암층에서 흘러나와 술맛을 느끼게 하는 물은 땅속 물길의 변화에 따라 수질이 조금씩 변하기도 하였을 것이다. 그래서 맑은 물이 흐르기도 하고, 조금 흐린 물이 나오기도 하였을 것이다. 강희맹이 주천에 와서 보고 지은 시에서 ‘맑은 술 흐린 술이 저절로 나와’라고 한 것은 이를 시적으로 표현한 것이라 하겠다. 이러한 사실에 문학적 형상력이 작용하여 「주천 전설」이 형성되었고, 오랜 동안 민간에 전해 오면서 변화를 보이게 되었을 것이다.

  주천의 술맛을 느끼게 하는 물이 물길의 변화에 따라 맑기도 하고, 흐리기도 하는 것은 자연현상이다. 이 전설을 전파·전승해 온 서민들은 상상력을 발휘하여 양반이 뜨면 약주가 되고, 상민이 뜨면 탁주가 된다고 하여 신분제와 연결시켜 이야기하였다. 이것은 신분제가 동요하던 조선 후기 서민들의 의식을 반영한 것이다. 이 이야기의 결말 부분에서 화가 난 젊은이가 샘에 돌을 처넣은 것은 사회가 변화하였는데도 좀처럼 바뀌지 않는 신분제에 대한 불만과 저항 심리가 반영된 것이라 하겠다.

  물은 모든 생명체의 근원이 된다. 이에 더하여 물은 더러운 것을 깨끗하게 하는 정화력, 죽어가는 것을 살리는 재생력, 홍수 때에 보이는 것과 같은 무서운 파괴력을 지니고 있다. 물이 지닌 이러한 큰 힘을 경험하며 살아온 옛사람들은 물을 매우 신성하게 여겼다. 그런데 원초적 사유 면에서 볼 때에 물과 술은 동격이다. 신에게 기도하거나 제사를 지낼 때에 정화수 또는 술을 올리는 것은 이런 의식의 표현이다.

  술맛 나는 물은 자연이 주는 혜택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욕심 때문에 특별히 내리는, 술맛 나는 물을 주는 샘을 파기하여 더 이상 얻을 수 없게 되었다. 앞의 이야기에서는 술을 받아 옮기는 수고를 하지 않으려고 술 나오는 돌구유를 관청의 뜰로 옮겨 가려다가 벼락을 맞아 깨뜨리고 말았다. 뒤 이야기에서는 상민이 양반 대접을 받으려다가 여의치 않자 화를 내며 돌을 넣어 주천을 잃고 말았다. 이것은 자연이 내린 징벌로, 인간의 이기심과 탐욕이 빚은 비극이다.

  주천은 교통수단이 발달하면서 길손이 물을 마시고 쉬어가던 쉼터의 기능이 약화되었다. 거기에 인간의 탐욕에 대한 징벌로 술이 나오는 혜택도 없어졌다. 그 결과 지금은 안내표지석만 남아 주천이 있던 자리임을 알려주고 있다. 그러나 주천이라는 지명과 함께 남아 있는 전설은 인간이 탐욕을 버리고 순리를 따를 때 자연이 주는 혜택을 누릴 수 있음을 일깨워 주고 있다. 인간이 자연에 대한 오만과 탐욕을 자제하지 않으면, 징벌을 받을 수도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겠다. (2021. 08. 07.)

주천이 있던 자리에 세운 표지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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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관란정을 둘러본 뒤에 다시 차를 타고 30분쯤 달려 단종이 노산군으로 강봉(降封)되어 유배되었던 영월 청령포에 도착하였다. 청령포는 영월군청에서 서쪽으로 약 2.3km 떨어진 곳의 서강 건너에 있다.

  청령포 나루의 높은 둑에서 강 건너편을 바라보니, 깨끗한 자갈과 흰 모래밭이 강굽이를 따라 펼쳐져 있다. 그 안으로 울창한 송림이 푸르른 빛을 자랑하고, 그 뒤에는 높은 산봉우리가 버티고 있어 강과 송림이 어우러진 아름다운 풍경이었다. 좀 더 자세히 살펴보니, 서쪽의 산봉우리에서 주먹처럼 불룩 나온 평평한 땅의 북․동․남쪽 삼면은 강으로 둘러싸여 마치 섬과 같은 형태를 이루고 있다. 그래서 나룻배를 이용하지 않고서는 오갈 수가 없는 곳이다. 이러한 천연 감옥과 같은 입지 조건 때문에 단종의 유배지로 선정되었던 것 같다.

  나룻배를 타고 강을 건너 모래와 자갈길을 조금 걸어 소나무 숲으로 들어갔다. 숲속에는 《승정원일기》의 기록에 따라 단종이 유배되었을 때의 모습을 재현하였다는 어소(御所)가 있다. 거기에는 단종이 머물던 본채(기와집)와 궁녀 및 관노들이 기거하던 행랑채(초가집)가 있다. 그 앞에 단종이 이곳에서 유배생활을 하였음을 알려주는 단묘유지비각(端廟遺址碑閣)이 있다.

  본채의 방안에는 단종이 신하를 접견하는 모습을 밀랍 인형으로 재현해 놓았다. 그것을 보면서 단종이, 세종의 장자인 문종의 맏아들로 태어나 사랑과 기대를 한껏 받으며 자라던 모습, 12세에 왕위에 오른 뒤에 두려움과 공포에 떨던 모습, 수양대군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상왕이 되었다가 노산군으로 감봉되어 17세에 이곳으로 유배되던 모습을 상상해 보았다. 이것은 드라마에서 본 적이 있는 단종의 모습과 오버랩(overlap) 되면서 처연(悽然, 애달프고 구슬픈)한 마음이 들었다. 본채를 나와 영조가 친필로 쓴 단묘재본부유지비(端廟在本府遺址碑), 금표비(禁標碑)를 살펴본 뒤에 소나무 숲으로 발길을 옮겼다.

  송림에 서니, 낙락장송(落落長松)들이 서 있는 모습이 웅장하며 위엄 있게 보였다. 소나무의 품격 있고 멋진 모습에 나도 모르게 감탄의 말이 튀어나왔다. 많은 소나무 중에서 나의 관심을 끈 것은 송림 중앙의 서편에 있는 ‘관음송(觀音松)’이었다. 안내문에 적힌 것을 보니, 관음송은 높이가 30m이고, 가슴높이 줄기의 둘레가 5m라고 한다. 지상 1.2m 높이에서 갈라진 두 가지의 밑 둘레는 각각 3.3m와 2.95m이다. 나무의 나이는 확실하지 않으나, 단종(1441~1457)이 유배생활을 할 때 이 나무의 갈라진 사이에 앉아서 쉬었다는 이야기가 전해 오고 있어서 약 600년 정도로 추정한다. ‘관음(觀音)’은 불교에서 세상의 소리를 들어 알 수 있는 보살을 가리키는 말이다. 그런데 이 소나무에 관음송이라는 이름을 붙인 것은 무슨 까닭일까? 사람들은 이 소나무가 당시 단종의 비참한 모습을 보았다 하여 볼 관(觀), 들었다 하여 소리 음(音) 자를 써 관음송이라고 하였다 한다. 이 나무는 현재 천연기념물 제349호로 지정되었다.

  송림 서편의 산을 오르니, 약 80미터 높이의 절벽을 이룬 큰 바위가 있다. 단종은 자주 이곳에 와서 치밀어 오르는 분노와 슬픔을 참을 길 없어 울부짖기도 하고, 절망어린 한숨을 짓기도 하였을 것이다. 사람들은 이곳을 ‘노산대’라고 불렀다. 단종은 원호가 박속에 넣어 보낸 채소를 노산대 밑에서 받았을 것이라 한다. 분노와 슬픔이 가라앉은 뒤에는 정든 고향과 사랑하는 사람들을 생각하고, 정순왕후를 그리며 평안을 비는 간절한 마음으로 돌탑을 쌓았다. 이 탑을 ‘망향탑’이라 한다. 이곳에서 생활하던 단종의 동선은 어소와 관음송, 노산대와 망향탑으로 이어진다.

  어린 조카의 왕위를 빼앗은 세조는 그를 이곳으로 유배하면서, 그와 접촉하는 사람에게는 중벌을 내리겠다고 하였다. 그래서 어느 누구도 단종에게 다가갈 수 없었다. 그래서 단종은 슬픔, 분노, 그리움, 고독을 누구에게도 털어놓을 수 없었다. 사람들은 그의 분노에 찬 외침, 고통과 슬픔에 겨운 통곡, 적막과 고독에 지친 몸부림과 한숨을 관음송이 모두 보고 들었을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이것은 나무를 신령스럽게 여기던 당시 사람들이 단종에 대해 느끼는 연민의 정을 소나무에 투사하여 만든 이야기일 것이다. 후대로 내려오면서 민중들은 관음송을 신성시하였고, 국가의 재난을 알려주는 신이성을 지니고 있다고 믿었다. 그래서 불그스레한 나무의 껍질이 검은색으로 변하는 것을 보면, 국가에 재난이 있을 것을 알려주는 것으로 받아들였다 한다.

  단종이 청령포에 있는 동안 영월 호장(戶長, 지방관리) 엄흥도(嚴興道)는 밤마다 지키는 군사들 몰래 헤엄쳐서 강을 건너가 단종을 뵙고, 말동무가 되었다고 한다. 그가 본인과 가족의 안위를 건 모험적인 행동을 한 것은 외로운 단종을 위로하려는 충절에서 나온 것이었다. 그의 방문은 고독과 슬픔에 지친 단종에게 큰 위로와 격려가 되었을 것이다. 이곳 어소 담장 밖에는 어소를 향해 엎드리다시피 길게 뻗어 단종을 향해 90도 가까이 고개를 숙이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소나무가 있다. 사람들은 이를 ‘엄흥도 소나무’라고 불렀다. 이것 역시 엄흥도의 충심을 기리는 민중들의 절절한 마음을 소나무에 투사한 것이라 하겠다.

  단종이 청령포에서 두 달 가까이 지낸 여름에 홍수가 나서 청령포에 물이 찼다. 그래서 단종은 영월 부사의 객사인 관풍헌으로 옮겨 지내게 되었다. 그로부터 두 달쯤 지났을 때에 금성대군이 단종의 복위를 꾀한 일이 일어났다. 이를 계기로 단종은 사사(賜死)되었고, 시신은 강가에 버려졌다. 그의 시신에 손을 대는 자는 삼족을 멸한다는 세조의 엄명이 있었으므로, 시신에 손을 대는 사람이 없었다. 이때 엄흥도가 단종의 시신을 몰래 수습하여 산에 묻고, 가족과 함께 숨어버렸다. 그로부터 100여 년이 지난 중종 때 단종의 묘를 찾으라는 어명이 내려졌다. 그때 영월군수 박충원의 꿈에 단종이 나타나 알림으로써 묘를 찾게 되었다. 숙종 때에 노산군은 왕위를 회복하여 묘호(廟號, 임금이 죽은 뒤에 생전의 공덕을 기리어 붙인 이름)를 ‘단종(端宗)’이라 하였다. 그리고 신주를 종묘에 모시고, 능호를 ‘장릉(莊陵)’이라 하였다. 단종의 시신을 수습했던 엄흥도는 충성스럽고 용감한 행동을 인정받아 공조판서로 추증되고, 충의공(忠毅公)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다시 배를 타고 강을 건너온 나는 청령포에서 약 4km 떨어진 장릉(莊陵)으로 갔다. 장릉은 양지바른 곳에 자리 잡고 있었다. 엄홍도가 죽음을 각오하고 몰래 시신을 수습하여 경황 중에 묻은 곳 치고는 좋은 자리인 것 같았다. 능침을 둘러싼 소나무가 모두 봉분을 항해 절을 하듯 묘하게 틀어져 있어 이채로웠다. 조선 왕릉은 대부분 도성 가까이에 있는데, 장릉은 수 천리 떨어진 영월에 있다는 사실이 단종이 비운의 왕이었음을 말해 준다. 단종을 영월로 떠나보낸 뒤에 64년 동안 남편이 있는 영월 쪽을 향하여 매일 절을 올렸다는 정순왕후는 경기도 남양주의 사릉(思陵)에 누워 있다. 두 사람의 영혼이 구속이 없는 저 세상에서 애틋한 사랑을 이어가기를 마음속으로 빌며 발걸음을 옮겼다. (2021. 7. 31)

나루터 둑에서 바라본 청령포
단종이 머물던 어소의 본채, 단묘재본부유지비가, 엄홍도소나무
신하를 접견하는 단종
관음송
망향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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