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에 고향친구들과 대화하던 중 선산(先山)의 관리와 성묘, 납골묘 조성 등이 화제에 올랐다. 그 중 한 친구는 나의 부모님 산소에 관해서도 물었다. 나는 친구들과 헤어진 뒤에 부모님 산소의 성묘와 이장(移葬)에 관해 생각해 보았다.
선친께서는 내가 아홉 살 때 별세하셔서 마을 건너편에 있는 이종형님의 산에 모셨다. 그리고 매일 아침저녁 상복 차림으로 산소에 가서 곡하며 절하였다. 한 달쯤 되던 어느 날, 성묘하고 돌아올 때 갑자기 천둥이 치는 듯한 소리가 들리면서 소름이 돋고, 온몸이 떨렸다. 집에 와서 어머니께 그 말씀을 드리니, “아버지께서 아홉 살짜리 어린 아들이 매일 성묘하러 오는 것이 안쓰러워 정을 떼려고 그러시는 것 같다”라고 하시면서, 매일 성묘하는 일을 그만두라고 하셨다. 그 뒤로는 가끔씩 성묘하고, 때맞추어 벌초하였다.
서울로 올라온 뒤에는 외종형님이 때맞추어 벌초해 주셨고, 나는 방학 때에 성묘하였다. 성묘할 때마다 선친을 모실 자리를 허락해 준 이종형님께 감사하였다. 그런데 이종형님이 다른 곳으로 이사하시면서 그 산을 팔았다. 나는 선친의 묘가 남의 산에 있는 것이 마음에 걸려 선친을 모실 산을 구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얼마 뒤에 삽교에 사시는 큰댁 형님의 주선으로 홍성군 홍북면 신정리에 있는 산(1,270평)을 매입하였다. 그곳으로 이장하고 나니, 선친을 내 산에 모셨다는 생각에 마음이 가벼웠다.
나는 전과 다름없이 명절을 전후하여 가족들과 함께 성묘하고, 9월 첫째 토요일에는 벌초하였다. 처음 몇 년은 낫과 호미로, 예초기가 보급된 뒤에는 예초기로 벌초하였다. 선친 산소를 벌초한 뒤에는 보령 천북으로 가서 친척들과 선대묘소를 벌초하고, 함께 식사하였다. 벌초하는 일을 계기로 친척들을 만나니 좋았다.
2003년 1월에 어머니께서 돌아가셨다. 나는 어머니를 아버지와 합장하고, 전과 다름없이 성묘하고, 벌초하러 다녔다. 그런데 차량이 널리 보급되면서 명절이나 벌초하는 때가 되면, 고속도로 정체가 극심해졌다. 새벽 6시에 출발하여 갈 때에는 두 시간 남짓 걸리지만, 서울로 돌아올 때에는 대여섯 시간 걸리곤 하였다. 나는 내 고향이니까 멀고 힘들어도 다니지만, 내가 없으면 아들들이 이 먼 곳을 힘들게 다닐까? 손자가 어른이 된 뒤에는 성묘와 벌초를 할까? 이런 저런 생각 끝에 부모님의 산소를 서울에서 가까운 공원묘지로 이장하는 일을 고려하기 시작하였다.
2000년대에 들어서면서 정부에서는 묘지가 늘어 산림 훼손이 심각하다면서 화장을 적극 권장하였다. 그에 발맞춰 사회분위기도 차츰 화장 쪽으로 바뀌었다. 젊은이들이 도시로 떠난 농촌에서는 선산 관리가 큰 문제였다. 그에 따라 고향에서도 선산의 묘를 파묘하여 봉안당(또는 봉안담)을 조성하는 집안이 점점 늘어갔다.
한국인은 ‘명당(明堂)’에 집을 짓고 살거나, 조상의 묘를 쓰면 자손이 발복하여 잘 된다는 의식이 있다. 이것은 생기론(生氣論)과 감응론(感應論)을 바탕으로 한 풍수설에 따라 형성된 의식이다. 우주에는 인간과 만물의 운명을 지배하는 생기가 있다. 이것은 바람·구름·비로 나타나기도 하지만, 그 주류는 땅속에 흘러들어서 지맥을 따라 흐른다. 흐르던 생기가 멈추는 곳이 명당이다. 그곳에 집을 짓거나 묘를 쓰면 자손이 잘 된다고 한다. 풍수설은 신라 말기에 중국에서 들어와 깊이 연구되었고, 민간에 퍼져 풍수신앙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나 역시 이런 의식을 지니고 살아왔다. 그런데 현실은 어떠한가? 풍수설에 맞는 명당을 고를 수도 없고, 성묘하고 벌초하는 데 드는 시간과 노력을 무시할 수도 없지 않은가? 이 문제로 고민하던 때에 풍수에 관한 옛날이야기가 떠올랐다. 명당은 착한 사람이라야 얻을 수 있고, 선행을 한 사람의 후손에게만 감응한다. 악행을 한 사람은 명당을 얻을 수 없거나, 얻었을지라도 명당의 생기가 스스로 파괴되어 효험이 없다고 한다. 나의 선친은 농부로 착하게 사시다가 45세에 병으로 돌아가셨으니, 악업을 쌓았을 리 없다. 어머니는 독실한 기독교인으로 신앙생활을 잘 하시고, 남을 위해 기도를 많이 하신 분이다. 이런 분들을 모신 곳이면 그곳이 바로 명당일 것이고, 명당의 생기가 감응하여 나와 내 자손이 잘 될 것 아닌가!
공원묘지의 경우 묘지법이 바뀌어 매장묘는 사용 기간이 15년(15년씩 세 번 연장 가능)이고, 봉안묘(납골묘)는 영구적이라고 한다. 이런 저런 생각 끝에 부모님의 유해를 봉안묘에 모시기로 마음을 정하였다. 이것은 바뀐 사회 분위기와 국가 시책에 따르면서 성묘에 따르는 자손들의 불편을 덜어주기 위한 것이다. 유골을 강물이나 나무 밑에 뿌리는 것도 생각해 보았다. 그러나 생각날 때 찾아가서 추모할 수 있도록 유골은 남겨 두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하였다.
그 무렵에 경기도 광주시 오포읍에 있는 ‘시안가족추모공원’에 안장한 동서의 묘를 찾게 되었다. 그곳은 봉안묘, 평장묘, 봉안담, 매장묘가 있는 대규모 추모공원이었다. 묘지를 주택에 비유하면, 자기 산에 홀로 있는 묘는 단독주택이고, 시안 같은 공원묘지는 대규모 아파트단지라 할 수 있다. 단독주택도 좋지만, 대단지 아파트가 살기에 편리한 점이 많다. 나는 아내와 아들과 상의한 끝에 부모님을 시안으로 옮겨 모시기로 하였다.
시안가족추모공원은 전체적으로 보아 배산임수(背山臨水) 지형에 자리 잡고 있다. 나를 안내해 준 분양담당 이사는 추모공원 전체와 개별 봉안묘의 위치를 풍수설을 기반으로 설명하였다. 나는 풍수상으로 좋다는 위치의 봉안묘(학1-12-24, 24위형)를 선택하였다. 그리고 2012년 7월에 부모님 묘를 파묘하여 유해를 홍성화장장으로 모시고 가서 화장한 뒤에 유골을 항아리에 담아 모시고 왔다. 봉안묘의 윗돌을 열고 석실의 첫째와 둘째 자리에 두 분을 모셨다. 부모님의 함자와 출생일·사망일은 밖의 돌판에 새겼다.
부모님을 시안으로 모시고 나니, 설과 추석 전날에 온 가족이 함께 성묘하는 데에 따르는 부담이 없다. 집에서 40~50분밖에 걸리지 않으니, 몇 시간씩 차를 몰고 오가던 수고를 하지 않아도 된다. 관리비만 내면 알아서 다 해 주니, 벌초하느라 땀을 흘릴 일도, 벌에 쐬지 않을까 걱정하는 일도 없다. 온 가족이 부모님을 추모하며 기도한 뒤에 넓은 공원을 거닐면서 맑은 공기를 마신다. 그리고 맛집을 찾아가 식사를 한 뒤에 집으로 돌아온다. 이제 성묘 길은 돌아가신 부모님을 추모하면서 가족들이 친목을 도모하는 나들이 길이 되었다.(2021. 1. 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