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교회에서 나와 같은 선교회 회원으로 활동하는 김 권사님은 전도를 열심히 하시는 분으로 소문나 있다. 그는 80세가 되었는데도 젊은이 못지않은 건강을 유지하며 개인택시 운전을 한다. 나는 그와 대화하는 중에 그의 독실한 신앙과 전도에 힘쓰는 삶에 감동을 받았다. 그래서 그의 하루 생활과 전도에 관해 알아보았다.

   그는 일을 하러 나갈 때에 집에서 기도하고, 운행을 시작할 때 운전석에 앉아서 사고 없이 운행하게 해 달라고 기도한다. 일을 하면서도 틈틈이 기도하고, 일을 마치면 사고 없이 무사히 일을 끝나게 해 주신 하나님께 감사기도를 하고 귀가한다. 그는 차를 운행할 때 극동방송국의 라디오를 켜고, 찬송과 설교, 기도와 간증을 듣는다. 그는 극동방송의 전파선교사로 전도활동을 하는 중에 방송 PD와 대담방송을 하기도 하였다.

   그는 승객이 타면 인사를 하고, 행선지를 물은 뒤에 머릿속에 갈 길을 그리며 출발한다. 그는 차가 방향을 잡아 달리기 시작한 뒤에 손님에게 부드러운 말씨로 “교회에 나가십니까?”하고 묻는다. 그리고 대답을 들은 뒤에 그에 맞는 대화를 이어간다. 어떤 손님은 라디오 방송을 듣고 먼저 “교회에 다니는군요. 어느 교회에 다니세요?” 하고 묻기도 한다. 그러면 “예, 저는 장위감리교회 권사입니다.”라고 힘주어 말한다.

   그는 교회에 나가지 않는다는 사람에게는 “교회에 나가면, 마음이 평안해 지고, 하는 일이 잘 되며 구원을 받습니다. 저는 교회에 나가면서 편안한 마음으로 즐겁게 삽니다.”라고 말한다. 이렇게 하여 대화가 시작되고 나면 기분이 좋아진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지내온 일을 말하면서 신앙 간증을 하기도 한다.

   그는 강원도 시골 교회에서 청년회장을 맡아 열심히 교회 일을 하던 중 담임목사님의 추천으로 1969년 서울에 와서 학원 버스를 운전하였다. 그 뒤에 회사에 들어가 근무하다가 1986년에 택시 운전을 시작하였다. 그는 36년간 택시 운전을 하면서 매사에 감사하며 즐거운 마음으로 일하였다. 그러자 하는 일이 잘 되어 사고 없이 운전을 하였고, 결혼한 뒤에 자녀를 잘 키워 남부럽지 않게 살게 해 주었다. 그는 손님에게 오늘까지 하나님을 믿음으로 힘을 얻어 행복한 삶을 살고 있다고 한다. 이런 말을 하면 어떤 손님은 나이보다 젊게 보이고, 행복해 보인다고 한다. 그러면 그는 “예수를 믿으면 젊게 보이고, 행복해 보입니다”라고 힘주어 말한다.

   이런 대화를 하면, 안 믿는 사람도 긍정적 반응을 보인다. 믿는 사람은 애쓴다면서 격려의 말을 한다. 하는 일이 잘 안 되어 마음의 고통을 느끼고 있는 사람에게는 힘들 때 기도하면 힘이 난다고 하면서, 강원도 촌놈이 맨몸으로 서울에 올라와서 어려움을 겪었던 일을 이야기한다. 어떤 사람은 예수가 공자나 석가와 다른 점이 무엇이냐고 따져 묻기도 한다. 그러면 그는 공자나 석가는 부활을 하지 못하였는데, 예수는 부활하셨다고 힘주어 말한다. 그리고 죽음의 문제를 해결하신 분은 예수뿐이라고 한다.

   한번은 종로에서 타신 중년의 남자 손님에게 전도의 말을 건네자, 그 분은 “왜 예수를 믿으라고 하시오? 예수를 믿으면 좋은 점이 무엇이오?”라고 물었다. 그는 평소에 생각하는 바를 차근차근 대답하였다. 그리고 그동안 주님의 은혜로 잘 살았고, 지금도 건강하여서 평안한 마음으로 운전을 하고 있다고 하였다. 한남동에 이르자 그 손님은 내리면서 “나는 00교회 목사입니다. 전도활동을 잘 하십니다.”라고 칭찬하면서 격려의 말씀을 해 주셨다. 그는 목사님인 줄 모르고 전도의 말을 한 자기 자신이 부끄럽기도 하고, 자랑스럽기도 하였다고 한다.

   그는 쉬는 날인 매주 주일과 수요일에는 예배에 참석하는 것 외에 교통정리 봉사활동을 하고, 교회 전도대원으로 활동한다. 개인택시 운전자 선교모임 임원으로 적극적인 활동을 하기도 한다. 어떤 협박이나 위험이 와도 예수를 믿겠다는 김 권사님,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전도에 힘쓰시는 김 권사님, 사랑하고 존경합니다. 앞으로도 오늘처럼 건강하셔서 전도하며 보람 있는 일 많이 하시기를 기도합니다.<기독교연합신문 1625호, 2022. 5.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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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보관해 둔 서류를 찾느라고 책장 서랍들을 열어 보았다. 한 서랍에 사진들을 넣어둔 비닐 봉투가 있었다. 그 안에 손자의 사진 몇 장이 들어 있었다. 아기가 온 가족과 함께 찍은 사진도 있고, 돌잡이 사진도 있었다. 돌상 앞에 앉은 손자의 천진스러운 모습을 보니, 저절로 웃음이 나왔다. 그 때 문득 서울에 있는 신학대학에 가서 「한국의 전통문화」 강의를 할 때의 일이 떠올랐다.

  일생의례 중 출생의례에 관해 설명하였다. 출생의례 중 지금도 행해지는 것은 돌잡이이다. 돌상에 신성의 의미를 지닌 흰무리떡과 축귀(逐鬼)·축사(逐邪)의 의미를 지닌 수수팥단자를 비롯하여 여러 가지 음식과 과일을 차려놓는다. 아기가 앉을 자리 앞의 돌상에 돈···공책··연필··총 등을 놓는다. 요즈음에는 컴퓨터 마우스나 악기 등을 놓기도 한다. 그리고 아기가 맨 먼저 어떤 물건을 잡는가를 보고 아기의 장래를 점친다. 이를 ‘돌잡이[시주(試周), 시아(試兒), 시수(試晬)]라고 한다. 돈이나 쌀을 잡은 아이는 부자가 되고, 실을 잡은 아이는 수명이 길다고 한다. 붓이나 연필을 잡은 아이는 학자가 되고, 활이나 총을 잡은 아이는 장군이 된다고 한다.

  이렇게 설명하자, 한 학생이 질문을 하였다. 그는 “돌잡이는 미신 아닌가요?”라고 물은 뒤에 이것은 없어져야 할 풍습이라고 하였다. 나는 다른 학생들에게 돌잡이를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었다. 다른 학생들은 ‘옛날부터 해 오는 우리의 문화’라고 하였다. 나는 문화는 같은 언어, 역사를 가진 사람들이 같은 지역에 살면서 이루어 놓은 유형 또는 무형의 것이다. 돌잡이는 한국인이 이 땅에 살면서 형성한 문화이다. 그러므로 밑바탕에 한국인의 의식이 깔려 있지만, 종교나 신앙심이 바탕이 된 것은 아니다.

  부모나 조부모는 돌을 맞는 아이가 커서 어떤 사람이 될 것인가 궁금하여 알고 싶어 한다. 그래서 돌잡이로 아이의 장래를 점쳤을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점치다’는 ‘앞일을 내다보아 미리 판단하다’의 뜻이지, 길흉과 화복을 판단하기 위하여 ‘점괘를 내어 보다’는 뜻은 아니다. 돌잡이의 장래 예측이 맞는다고 하는 것은 아기를 그 방향으로 키웠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붓이나 연필을 잡은 아기에게는 장차 학자가 될 것이라고 한다. 권총을 잡은 아기에게는 장차 장군이 될 것이라고 한다. 이런 말을 수없이 반복하며 그 방향으로 키운다. 그러면 아이는 어른들의 말을 유념하며 자랐고, 그에 맞춰 진로를 생각하게 될 것이다. 그래서 대학에 진학할 때 사범계대학 또는 사관학교에 진학한다. 그래서 교사나 교수 또는 군인 장교가 될 것이니 돌잡이가 맞았다고 할 것이다. 이것은 점괘를 내어 보거나 신앙행위를 하는 것이 아니라 재미삼아 하는 풍습일 뿐이다. 이런 설명에 많은 학생이 이해하고 공감하였다.

  그 학기 강의가 끝난 뒤에 성적을 제출하기 위해 신학대학 교무처에 들렀다. 교무처 직원은 내 강의에 대한 학생들의 평가가 매우 좋았다고 하면서, 40여 명의 학생들이 써낸 강의평가서를 주었다. 강의평가서를 보니, 교무처 직원의 말대로 항목별 평가와 특기사항 모두 아주 좋은 평가가 나왔다. 그런데 딱 한 학생이 ‘돌잡이를 미신이 아니라고 하는 교수는 신학대학에 와서 강의할 자격이 없다’라고 하였다. 강의 시간에 질문을 하였던 그 학생일 것이라고 짐작되었다. 돌잡이가 전통문화가 된 경위와 의미를 설명하였건만, 이 학생은 수긍하지 않았던 것이다.

  돌잡이는 미신이니 없애야 할 풍습이라고 생각하는 젊은이가 있는 것은 신앙의 어른들이 잘못 가르친 결과라 생각한다. 어른들이 한국의 전통문화를 헛된 것을 믿는 신앙을 바탕으로 형성된 저급한 문화라고 생각하고, 청소년들이 이런 생각을 은연중에 갖도록 가르친 때문일 것이다. 어른들은 우리의 전통문화는 그 나름의 형성 배경이 있고, 그 안에 한국인의 의식이 스며있다는 것을 자각하고, 우상이나 미신으로 폄하하지 말아야 한다. 기독교인으로 신앙을 바르게 지켜 나가되 한국인과 한국문화에 대한 자부심과 긍지를 버리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리고 종교와 문화를 혼동하는 일이 없었으면 좋겠다. <기독교연합신문 1621호, 2022. 4.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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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래 전의 일이다. 백령중·종합고등학교 B교감이 찾아와서, 백령도에 전해오는 ‘심청 전설’과 <심청전>의 관계를 밝혀 달라고 하였다. 그는 <심청전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은 내가 꼭 해주어야 한다고 하였다. 나는 전에 이 이야기를 듣고 조사해 봐야겠다고 생각하고 있던 참이었으므로, 그와 함께 이 일을 하기로 하였다. 그래서 옹진군에 조사비 지원 요청을 하였다.

  이듬해 여름방학에 백령도에 가서 자료 조사를 하던 중 주일을 맞았다. B교감은 백령도에서 가장 큰 J교회의 집사였다. 그런데 그는 J교회가 아닌 군인교회로 나를 인도하였다. J교회 목사님이 몇 주 전 주일예배 설교 중에 “요즈음 우리 교회의 뒷산에 심청각을 짓는다는 말이 돌고 있다. 심청각은 우상의 전당이므로, 그 일을 추진하는 사람은 사탄”이라고 하였다고 한다. 그 일을 추진하는 사람이 B집사라는 것은 백령도 사람이 다 아는 사실이다. 그는 자기를 앉혀놓고 사탄이라고 하는 목사가 주관하는 예배에 나를 데리고 갈 수 없어 군인교회로 간다고 하였다.

  나는 몇 차례에 걸쳐 백령도와 인근 지역의 지리적 특성과 전설, 민속을 철저히 조사하였다. 그 결과 ‘심청 전설’에 나오는 ‘인당수’는 백령도와 장산곶 사이에, ‘연봉’은 백령도 남쪽에, ‘연화리’는 백령도 서쪽에 실제로 존재하고, 이 지역 조류의 흐름과도 일치한다. 또, 백령도는 중국을 왕래하는 상선들의 중간 기착지였고, 항해의 안전을 위해 사람을 제물로 바치는 습속이 남아 있던 지역임을 확인하였다. 이를 바탕으로 오래 전부터 ‘심청 전설’이 전해 오는 백령도는 <심청전>의 배경이 된 곳이라고 하였다.

  옹진군에서는 내가 주도하여 제출한 보고서를 바탕으로 심청각 건립을 구체화하였다. 그러자 J교회 목사는 예배 시간에 “심청각은 우상의 집이므로, 짓지 못하도록 막겠다. 만일 우리 교회 뒷산에 심청각을 짓는다면 할복자살하겠다.”라고 선포하였다. 그리고 백령도 기독교연합회 이름으로 청와대, 문화공보부, 인천시에 심청각 건립 반대 진정서를 제출하였다. 심청각 건립은 사라져가는 샤머니즘 문화의 정착이고, 허구적인 이야기를 실제로 있었던 일인 것처럼 꾸미는 것이므로 반대한다고 하였다. 진정서를 받은 세 기관에서는 ‘적절히 처리하고 보고하기 바람’이라는 공문을 옹진군청으로 보냈다. 이 공문을 처리해야 하는 옹진군청 문화계장은 답변서를 어떻게 써야 하느냐며 나에게 하소연하였다.

  나는 <심청각이 우상인가>라는 제목의 글을 써서 월간지에 실었다. <심청전>은 조선 후기에 꾸며낸 소설이다. 소설의 배경이 된 곳에 그 작품의 내용과 관련되는 상징물이나 자료관을 세우고, 그 지역을 홍보하는 것은 국내는 물론 다른 나라에도 흔히 있는 일이다. 남원을 유명 관광지로 각광을 받게 한 것은 <춘향전>이다. 광한루원에는 춘향각이 있고, 그 안에 춘향의 초상화가 있지만, 춘향을 신앙의 대상으로 삼는 사람은 없다. 마찬가지로 <심청전>의 배경이 된 백령도에 심청각을 세워 심청의 효행을 기리고, 백령도를 효원의 섬으로 홍보하는 것은 관광의 효과를 극대화하는 작업의 하나일 뿐이다. 심청각을 우상숭배의 표상이라고 하는 것은 문학이나 문화를 종교와 혼동하는 것이라는 내용이었다. 옹진군청 문화계장은 이 글을 참고하여 답변서를 써서 보고하였다.

  B교감은 이 글을 백령도에서 발간하는 《백령도지》에 옮겨 실어 많은 백령도 주민이 읽게 하였다. 지역 유지가 된 B교감의 제자들은 자기들이 존경하는 은사가 추진하는 이 일이 옳다고 여기면서도 출석하는 교회 목사님들의 말씀을 거역할 수 없어 반대 진정서에 서명을 한 상황이었다. 이들이 문화와 종교를 혼동하지 말라는 내 글을 읽고, 목사를 찾아가 진정서에서 자기 이름을 빼달라고 하였다. 그래서 많은 수의 주민이 빠져나가자 탄원서는 힘을 잃고 말았다.

  심청각 건립이 구체화된 뒤에 만난 B교감은 J교회 목사가 육지의 아주 먼 시골 교회로 쫓겨 갔다고 하였다. 이 말을 듣는 순간 나는 하나님의 섭리는 참으로 오묘하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목사를 그대로 두면 할복자살하거나, 목사의 언행에 실망한 교인들이 교회를 떠나는 일이 생길 것이다. 하나님은 이를 그대로 두고 보실 수 없어 그가 오래 전에 저지른 잘못을 드러나게 하여 먼 곳으로 가게 만든 것이리라.

  지금 인당수와 연봉바위, 연화리가 보이는 J교회 뒷산 정상에는 심청각이 서 있다. 그 안에는 <심청전> 관련 자료와 작품의 주요 장면을 그린 그림이 전시되어 있다. 그리고 판소리 <심청가>가 은은하게 울려 퍼진다. 그래서 백령도를 찾는 많은 관광객들은 심청의 효행을 기리면서 마음을 가다듬는다. 사탄으로 몰렸던 B집사는 그때 바로 누명을 벗었다. 그리고 백령도 주민의 소원을 풀어준 고마운 분으로 칭송을 받다가 얼마 전에 하나님 품으로 가셨다. 옳고 보람 있는 일을 한 B집사는 하나님 나라에서 안식을 취하고 계시리라 믿는다. <기독교연합신문 1617호, 2022년 3월 27일자>

인당수와 연봉바위가 보이는 산 위에 세운 심청각
심청각 옆에 세운 효녀 심청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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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은 어머니께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우리 곁을 떠나신 지 19주년이 되는 날이다. 나는 가족과 함께 추도예배를 드리고, 잠시 어머니 생전의 일을 회고하였다. 어머니 생전의 일들이 주마등처럼 스친다. 그 중에서 어머니를 서운하게 해 드린 일이 선하게 떠오른다.

  내가 아홉 살이던 1950년에는 6․25 전쟁이 일어났고, 열두 살 위의 형이 의용군으로 끌려가 소식이 끊겼다. 몸이 약하셨던 아버지는 큰아들을 잃은 충격이 겹쳐 세상을 떠나셨다. 그래서 어머니는 마흔세 살에 큰아들을 잃고 홀로 되셔서 6남매를 데리고 넉넉지 못한 살림을 꾸려가야 했다.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힘들고 고단한 나날을 보내셨을 것이다.

  그 해에 어머니는 지인의 전도를 받아 교회에 나가기 시작하였다. 약 2km 떨어진 교회의 예배와 새벽기도회에 빠지지 않고 다니셨다. 천막을 치고 시작한 예배당 건축을 위해 흙벽돌 찍는 일을 시작으로 크고 작은 교회 일을 앞장서서 하셨다. 뜨거운 믿음을 가지고 열정적으로 기도하는 어머니에게 성령님이 함께 하셨다.

  친척들은 어머니가 예수에 미쳤다며 비웃고, 빈정대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에 개의치 않고 열심히 교회에 나가 예배드리고, 교회에 나가지 않는 날에는 가정예배를 드렸다. 어머니는 농사일과 길쌈을 열심히 하고, 삯바느질도 하면서 살림을 꾸리셨다. 몇 년 뒤에 누님 두 분은 결혼을 하고, 셋째 누님은 취직하였다. 나는 고등학교에 입학하였으나 휴학하고 취직하였다가 복학하여 친척집에서 고등학교를 다녔다.

  그 무렵 어머니는 기독교 대한감리회 충서지방 감리사의 파송을 받아 농촌의 개척교회 담임 전도사가 되어 막내딸만 데리고 부임하셨다. 어머니는 교회 일을 충실히 하는 한편, 성경학교에 다니시며 신학공부도 열심히 하셨다. 그 교회가 부흥되자 또 다른 개척교회로 옮겨가서 교회 부흥에 힘쓰셨다.

  내가 고등학교 3학년이 되자, 어머니는 나에게 신학대학에 가서 공부한 뒤에 목사가 되면 좋겠다고 하셨다. 그러나 나는 어머니가 목회자로 고생하시는 모습을 익히 보아왔기에 싫다고 하였다. 그리고 평신도로 교회를 잘 받들면 되지 않느냐고 하였다. 이 말은 어머니의 권유를 뿌리치기 위해 한 말이었는데, 어머니는 이 말을 잊지 않으셨다,

  서울교육대학에 진학한 나는 졸업과 동시에 서울의 초등학교 교사가 되었다. 야간대학에 편입학하여 학부 과정을 마친 뒤에 대학원에 진학하여 석사학위를 받고, 박사과정을 밟던 중 대학의 교수가 되었다. 몇 년이 지난 뒤에 문학박사 학위를 받게 되자, 졸업생과 재학생이 주관하여 박사학위 영득 축하회를 열어주었다. 축하회장에서 어머니는 많은 친척과 친지로부터 축하를 받으시며 기뻐하셨다. 그 때 한 분이 어머니께 소감을 묻자, ‘아들이 문학박사 아닌 신학박사 학위를 받았으면 더 좋았을 것’이라고 하셨다. 신학박사를 더 소중하게 생각하시는 어머니의 마음이 드러난 말이었다.

  교수가 된 나는 강의와 연구, 학생 지도, 외부 강의와 글쓰기, 방송 출연 등으로 그야말로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나날을 보냈다. 그 무렵에 나는 ‘시간은 돈’이 아니라 ‘생명’이라고 힘주어 말하곤 하였다. 그것은 생활 체험에서 나온 절실한 말이었다. 교회에서는 집사, 교회학교 교사, 권사의 직분을 맡았으나, 열심히 일하지는 못하였다.

  어느 날, 담임목사님께서 나를 장로로 추천하겠다고 하셨다. 나는 장로 자격이 없는 사람이라며 강하게 사양하였다. 그러자 목사님은 어머니가 ‘아들이 장로 되는 것이 소원’이라고 하셨다고 하시면서, 어머니 돌아가시기 전에 소원을 이뤄드리라고 설득하셨다. 그 이듬해에 나는 장로가 되었다. 그때 어머니는 여든아홉 살, 나는 쉰다섯 살이었다. 장로취임식에 참석하신 어머니는 정말 기뻐하셨다. 그 날에 만족해하시던 어머니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어머니께서 평생의 소원으로 삼고 기도하셨던 소원을 온전히 이루어드리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쉽고 죄송스럽다. 그러나 한 가지는 이루어 드린 것을 다행으로 생각하며 죄송스러운 마음을 눌러두려고 한다. 어머니의 사진을 찬찬히 들여다보며 어머니의 기대에 어긋나지 않는 삶을 살 것을 다짐한다. 어머니, 하늘나라에서 편히 쉬세요. 곧 뒤 따라 가서 뵙겠습니다. <기독교연합신문 1613호, 2022. 2.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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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KBS TV의 역사 드라마 《태종 이방원에서 이성계와 이방원이 불화하는 것을 보다가 문득 「살곶이다리 전설」이 떠올랐다. 이 다리에는 두 차례에 걸친 왕자의 난을 일으킨 뒤에 왕위에 오른 이방원(태종)에 대한 이성계(태조)의 미움과 분노, 용서와 화해와 얽힌 전설이 전해 온다. 서울시 성동구 성동교 동쪽 중랑천에 있는 이 다리를 다시 찾았다. 지하철 2호선 한양대역 3번 출구로 나가 50미터쯤 직진한 뒤 왼쪽으로 조금 가니 이 다리가 보였다.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는 향처(鄕妻)인 한씨에게서 방우·방과·방의·방간·방원·방연 여섯 아들을 두고, 경처(京妻)인 강씨에게서 방번·방석 두 아들을 두었다. 왕위에 오른 태조는 한씨 소생의 여섯 왕자를 제쳐 두고, 강씨 소생의 여덟째 왕자 방석을 세자로 책봉하였다. 그래서 한씨 소생의 왕자들은 불만을 품게 되었다. 특히 왕조 창업에 공이 큰 다섯째 왕자 방원은 세자 책봉뿐만 아니라, 방석의 보도를 책임지고 있는 정도전과 남은·심효생 등이 권력을 쥐고 있는 것에 큰 불만을 품었다.

  태조 7년(1398) 태조의 병이 위중하자 왕자들이 모두 궁중에 모이게 되었다. 이를 기회로 방원은 정도전 등이 한씨 소생의 왕자들을 제거하려고 한다고 트집을 잡아 먼저 이들을 습격하여 죽였다. 그리고 세자 방석은 변란의 책임을 물어 귀양 보내는 도중에 죽이고, 세자의 동복형인 방번도 죽였다. 방원은 둘째형인 방과가 세자가 되도록 하였다. 사랑하던 강씨 소생의 왕자와 총신을 잃은 태조는 정사에 뜻을 잃었다. 그래서 왕위를 세자(정종)에게 물려주고 고향인 함흥으로 갔다.

  정종 2년(1400) 태조의 넷째왕자 방간이 왕위에 뜻을 두고, 바로 밑의 동생인 방원을 시기하고 의심하였다. 박포의 충동질에 넘어간 방간이 군사를 동원하여 방원을 치려 하니, 방원도 군사를 일으켜 싸움이 벌어졌다. 이 싸움에서 방간은 패하여 귀양을 갔고, 박포는 처형되었다. 난이 끝난 뒤에 정종은 상왕(태조)의 허락을 얻어 방원을 세자로 삼았다. 그리고 얼마 뒤에 왕위를 세자에게 물려주니, 그가 제3대 태종이다. 태종은 왕위에 오른 뒤에 성석린을 보내어 태조를 한양으로 모셔 왔다.

  그런데 태조는 태종 2년(1402)에 다시 함흥으로 가서는 돌아오지 아니하였다. 이에 태종은 태조가 노여움을 풀고 한양으로 돌아오도록 하려고 여러 번 차사를 보냈다. 태조는 태종의 편이 되어 자기를 설득하러 오는 차사를 모두 죽이고 돌려보내지 않았다. 이 일로 한 번 가고 다시 돌아오지 않는 사람을 ‘함흥차사(咸興差使)’라고 하였다. 태종이 함흥에 차사로 갈 사람을 찾을 때 판중추부사 박순(朴淳)이 자청하였다. 그는 새끼 달린 말을 타고 가서는 일부러 새끼 말을 나무에 매어 놓고 어미 말을 타고 갔다. 그러자 새끼 말이 어미를 부르고, 어미 말은 뒤를 돌아보며 머뭇거렸다. 말의 행동을 괴이히 여긴 태조가 그에게 연유를 물으니, 그는 어미 말과 새끼 말이 서로 떨어지는 것을 참지 못하여 그런다고 하였다. 태조는 그의 숨은 뜻을 알아차렸지만, 잠저(潛邸)에 있을 때 사귄 옛 친구로서 머물러 있게 하였다.

  태조가 박순과 장기를 두고 있을 때 쥐가 지붕 밑에서 새끼를 안고 떨어졌다. 쥐는 죽을 지경에 이르렀는데도 서로 떨어지지 아니하였다. 이를 본 박순이 눈물을 흘리며 간절하게 아뢰니, 태조가 한양으로 돌아갈 것을 약속하였다. 박순이 떠나니, 옆의 신하들이 그를 죽일 것을 극력 주장하였다. 태조는 그가 용흥강을 이미 건넜으리라고 생각하고, 그가 강을 건넜으면 쫓지 말라고 하였다. 박순이 중도에 병이 나서 지체하다가 겨우 강에 도착하여 배에 올랐을 때 사자가 와서 그의 허리를 베었다.

  박순의 죽음을 애석히 여긴 태조는 그와 한 약속을 지키기 위해 한양으로 돌아오기로 하였다(이긍익의 《연려실기술(練藜室記述)》 참조). 태종은 뚝섬에 큰 차일을 치고 태조를 맞이하기로 하였다. 태종은 하륜의 말을 듣고 차일의 기둥을 큰 것으로 세웠다. 가까이에 온 태조는 면복(冕服) 차림으로 서성이는 태종을 보자, 분노가 다시 치밀어 얼른 활시위를 당겼다. 태종이 재빨리 기둥 뒤로 몸을 피하니, 화살이 기둥에 꽂혔다. 태조는 천하 명궁인 자기의 화살을 피한 것은 천명(天命)이라면서 노기를 풀었다(이규태의 600년 서울》 참조). 환영 잔치를 할 때 태종은 하륜의 말에 따라 잔을 중궁에게 주어 올리게 하였다. 이를 본 태조는 소매 속에서 작은 철퇴를 내어 보이며, 태종이 가까이 오면 내리칠 생각이었다고 말했다고 한다(최상수, 한국민간전설집》 참조).

  이 일이 있은 뒤에 뚝섬을 화살이 꽂힌 벌이란 뜻으로 ‘살꽂이벌’ 또는 ‘전교(箭郊)’라고 하였다. 세종 때에 뚝섬으로 가는 중랑천에 다리를 놓기 시작하여 성종 14년(1483년)에 완공했다. 이 다리 이름을 이곳의 지명을 따서 ‘살꽂이다리’, ‘행인이 평지를 밟는 것과 같다’라는 뜻에서 ‘제반교(濟盤橋)’라고 하였다. 그런데 ‘살꽂이다리’는 음이 변하여 ‘살곶이다리’가 되었다고 한다.

  고종 때 대원군은 경복궁을 중건하면서 이 다리의 일부를 가져다가 석재로 사용했다고 한다. 일제강점기에는 여기에 콘크리트 덧칠을 했다고 한다. 1920년대에는 홍수에 다리 일부가 떠내려갔다. 이렇게 수난을 겪던 이 다리는 1972년에 서울시가 원래의 모습대로 복원하였다. 그런데 하천의 폭이 넓어져 별개의 콘크리트 교량을 연장하여 세웠다. 보물 제1738호로 지정된 이 다리는 폭 6m·길이는 76m로, 지금까지 전하는 조선 시대 석교 중 가장 길다.

  살곶이다리 이야기에서 태조는 왕조 창업에 공이 큰 다섯째 아들 방원의 공로를 무시하고, 여덟째 방석을 세자로 삼았다. 이 결정은 경처 강씨를 총애하고, 막내아들 방석을 편애한 데에서 비롯되었다. 그 결과로 골육상쟁이 일어났으니, 그 원인 제공자는 태조 자신이었다. 그런데도 태조는 방원의 무도한 행동만을 문제 삼아 분노를 품었다. 그는 자기의 분노의 결정체인 화살과 철퇴를 방원이 피하는 것을 보면서, 천명이 방원에게 있다고 생각하였다. 이 생각이 분노를 내려놓고 방원을 용서하게 하였다. 그래서 태종의 왕위를 인정하고, 태상왕으로 태종의 효도를 받았다. 그러고 보면, 이곳은 태조의 분노를 용서와 화해로 변화시킨 뜻있는 곳이라 하겠다.(2022. 2.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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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가 대학원을 다니던 1970년대 초반의 일이다. 은사이신 K 교수님은 국어학 전공의 학자로서 많은 연구 성과를 내신 분이다. 그런데 틈틈이 수필을 쓰셔서 수필집을 두 권이나 내셨다. K 교수님은 두 번째 수필집에 사인(sign)을 해서 주시면서 농담조로, “내가 수필집을 두 권이나 냈는데, 아무도 나를 수필가라고 하지 않네!”라고 말씀하셨다.

  K 교수님의 이 말씀은 농담조로 하신 말씀이지만, 나의 뇌리에서 사라지지 않았다. K 교수님의 수필은 이름난 수필가의 글 못지않게 좋은 글이 많았다. 국어학자로서 명성을 얻으신 분이 좋은 수필을 쓰신 것을 보니, 참으로 존경스럽고 부러웠다. 그런 분이 ‘구태여 수필가라는 명성까지 얻어야 하는가?’라는 생각을 하였다. 그 때까지만 하여도 나는 문단의 등단 절차에 관해 잘 몰랐고, 관심을 기울이지도 않았다.

  나는 1978년에 대학의 교수가 되어 한국의 고소설, 구비문학, 민속학을 연구하고 가르치면서 연구 논문과 저서를 집필하는 일 외에 일반 교양인을 대상으로 한 글을 많이 썼다. 글의 제재는 생활주변에서 취한 것도 있고, 민속과 설화에서 고른 것도 있었다. 나는 그동안 쓴 글 중에서 민속․설화와 관련된 글은 《민속적인 삶의 의미》(계명문화사, 1993. 59편 수록), 생활주변에서 제재를 취한 글은 《가을 햇빛 비치는 창가에서》(한울, 1993. 71편 수록)라는 제목의 수필집으로 출판하였다. 수필집 두 권을 낸 뒤에 ‘나는 수필가인가?’ 하고 자문해 보았다. 그 때 문득 대학원에 다닐 때에 들은 K 교수님 말씀이 떠올랐다.

  내 연구실 옆방에 계신 청하 선생님 연구실로 수필집을 가지고 가서 드리면서 K 교수님의 말씀을 화제에 올렸다. 청하 선생님은 정식으로 문단 데뷔 절차를 밟지 않으면, 훌륭한 학자(또는 명사)의 글로는 인정을 받을 수 있지만, 수필가의 글로는 인정을 받지 못한다고 하셨다. 청하 선생님은 나에게 수필가로 등단하는 절차를 밟으라고 하시면서 글 두 편을 써오라고 하셨다.

  청하 선생님은 그 전에도 나에게 수필을 쓰라고 하셨다. 그래서 내가 등단 절차를 밟기 전에도 《시와 시론》 52호(1993)에 <나의 호>라는 글을 실어 주셨다. 나의 글 솜씨를 좋게 보아 주신 덕이리라. 다른 지면에도 글을 쓰라고 하셔서 발표한 적이 여러 번 있다. 청하 선생님께서 등단 절차를 밟을 수 있도록 수필 두 편을 써오라고 하신 것은 나의 글쓰기 실력을 인정한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서 기뻤다.

  나는 그러겠다고 대답을 하고서도 연구 논문을 쓰느라 수필을 쓸 겨를이 없었다. 몇 달을 지낸 뒤에야 <개와 오륜>, <법 없어도 살 사람>이라는 제목의 글을 청하 선생님께 드렸다. 내 글을 받으신 청하 선생님은 《시와 시론》 심사위원들과 검토하신 뒤에 등단 작품으로 인정하고, 김병권 선생님의 추천사와 함께 《시와 시론》에 실어 주셨다. 그래서 나는 1995년에 발행하는 《시와 시론》(통권 52호)을 통해 ‘수필가’로 등단하였다.

  《시와 시론》은 나를 수필가로 인정해 준 종합문예지이다. 문예지 추천은 자동차 운전에 비유하면, ‘운전면허증’과 같다고 할 수 있다. 내가 운전면허증을 가졌기에 전국 어디든지 차를 몰고 갈 수 있는 것처럼, 나에게 수필가로 활동할 수 있는 자격을 공인해 준 것이다. 나는 《시와 시론》을 통해 수필가로 등단한 뒤에 한국수필문학회, 한국문인협회, 국제펜클럽 한국본부 등 문학단체 회원으로 가입하였다. 그러자 한국문인명단에 이름을 올리게 되었다.

  등단한 뒤에도 연구 논문이나 저서 집필에 힘쓰면서 틈틈이 수필을 썼다. 신문이나 잡지사의 청탁을 받고 쓴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시와 시론》에도 몇 차례 발표하였다. 이러한 글들은 교수직에서 물러난 뒤에 손질하여 수필집 《능소화처럼》(보고사, 2015)에 실어 출간하였다. 그 뒤에 쓴 글들은 수필집 《새로운 보금자리에서》(학연제, 2021)에 실어 곧 출간될 예정이다.

  문인은 신문이나 문예지를 통해 등단하는 절차를 밟아서 정식 문인으로 인정받게 된다. 그러므로 등단한 신문이나 문예지는 그 문인에게 어머니의 태와 같은 존재이다. 따라서 종합문예지인 《시와 시론》은 내 수필문학의 어머니와 다름없다. 《시와 시론》이 없어지지 않고, 《문예운동》으로 이름을 바꾸어 주옥같은 글들을 실어내고 있으니, 참으로 다행스럽고 자랑스럽다. 《문예운동》이 민족문학의 정통성을 추구하는 문예지로 크게 발전할 것이라 믿는다.

  나를 수필가로 등단할 수 있게 해 주시고, 좋은 글을 쓰도록 자극을 주고, 발표 지면을 허락해 주신 청하 선생님께 감사한다. 또 추천사를 써 주신 김병권 선생님께 감사한다. 내 문학의 어머니와 같은 《문예운동》의 무궁한 발전과 두 분 선생님의 건강을 기원하는 마음 간절하다.  <《문예운동》 150호, 서울: 문예운동사, 2021. 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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