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3월 하순에 아내·김 교수 부부와 함께 영월 지역을 탐방하였다. 영월 여행에서 빼놓을 수 없는 곳이 단종의 원한이 서려 있는 청령포와 장릉(莊陵)이다. 두 곳을 찾기에 앞서 강원도와 경계인 충북 제천시(송학면 장곡리 산 14-2)에 있는 관란정(觀瀾亭)을 찾았다. 관란정은 생육신의 한 사람인 원호(元昊) 선생의 충정(忠情, 충성스럽고 참된 정)을 기리기 위해 지은 정자이다.
승용차를 타고 중앙고속도를 달리다가 신림 요금소(Tol Gate)에서 빠져 나가 네비게이션의 안내를 따라 20분쯤 달리니, 관란정 안내 표지판이 나왔다. 차에서 내려 비탈진 산길을 걸어 올라가니, 그리 높지 않은 산등성이의 자연암반 위에 동향으로 지은 관란정이 서 있다. 팔작지붕에 기와를 얹고, 모로단청(부재의 두 끝 부분에만 하는 단청)을 하였다. 바로 앞에 있는 비각 안에는 관란 선생을 기리는 유허비(遺墟碑)가 있다. 눈을 들어 앞을 보니, 나지막한 산들이 멀리까지 펼쳐 있고, 그 뒤를 큰 산들이 에워싸고 있다. 산 아래에는 주천강과 평창강이 합수한 서강이 산들을 에둘러 흐르고 있다.
원호 선생은 1397년(태조 5)에 원주에서 별장 원헌(元憲)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자는 자허(子虛), 호는 무항(霧巷)·관란(觀瀾)이다. 그는 열다섯 살 때 사서삼경(四書三經)을 통달하였고, 한시와 산문을 좋아하였다. 세종 4년(1422)에 문과에 급제하여 문종 때 집현전 직제학(종3품 벼슬)이 되었다. 그러나 수양대군이 조카인 단종의 왕위를 찬탈하는 것을 보고, 벼슬을 버리고 고향인 원주로 내려가 숨어 지냈다.
그는 단종이 노산군으로 강봉(降封, 작위나 작품의 등급이 낮아짐)되어 영월에 유배당하자, 지금 관란정이 있는 산등성이에 단을 세우고, 아침·저녁으로 눈물을 흘리며 영월을 향해 절을 올렸다. 그리고 손수 가꾼 채소와 과일을 박통에 담아 영월로 흐르는 서강에 띄워 보냈다. 청령포에 있던 단종은 노산대 아래에서 떠내려 온 박통을 받았다고 한다. 그의 깊고 절절한 충정을 아는 서강물이 이를 고이 품어 어린 단종에게 전해 주었나 보다. 어린 왕과 충신이 애틋한 정을 나누는 장면을 그려보니, 눈물이 날 만큼 가엾고 애처롭다. 사실을 따지자면, 서강물이 박통을 품고 수십 리를 흘러가서 단종에게 온전히 전해 주었을 가능성은 그리 높지 않다. 그러나 민중은 그의 충정이 물길을 따라 무난히 전해 졌다고 이야기해 왔다. 이것은 그의 충정과 이를 기리는 민중의 마음이 전적으로 공감하였음을 말해 준다.
그는 단종이 죽자 영월에서 3년상을 마치고, 원주로 돌아가 치악산 아래 초막에서 지냈다. 그의 충절에 탄복한 세조가 각별한 마음으로 호조참의 벼슬을 내리고 불렀으나, 그는 이를 거절하였다. 사관(史官)으로 있던 손자 숙강(叔康)이 직필로 화를 당하자, 그는 자신이 저술한 책과 상소문을 모두 불태웠다. 그리고 아들들에게 책을 읽어 세상의 명리를 구하지 말 것을 엄하게 경계하였다. 그는 단종의 장릉이 자기 집의 동쪽에 있음을 생각하여 앉을 때에는 항상 동쪽을 향해 앉았고, 누울 때에도 항상 머리를 동쪽으로 두었다고 한다. 이것은 단종에 대한 그의 충절이 매우 깊고 절절하였음을 알 수 있게 해 주는 일화이다.
정조 때 그의 후손 원경적이 그에게 시호(諡號, 죽은 뒤에 조정에서 그의 공덕을 칭송하여 붙이는 이름)를 내려줄 것을 조정에 청했다. 왕은 이를 받아들여 이조판서를 증직(贈職, 죽은 뒤에 품계와 벼슬을 추증함.)하고 ‘정간(貞簡)’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정’은 청렴결백하고 절의를 지킨다는 뜻이고, ‘간’은 정직하고 사악함이 없다는 뜻이다. 여기에는 그의 올곧은 선비정신과 절의를 높이고 기림으로써 후세 사람들에게 좋은 본보기가 되도록 하려는 뜻이 담겨 있다고 하겠다.
그의 후손과 유학자들은 그의 충의를 기리고자 1845년(헌종 11) 이곳에 비석과 정자를 세우고, 그의 호를 따서 ‘관란정’이라 하였다. 정자 앞에 있는 유허비는 정조 8년에 대학자인 홍양호(洪良浩, 1724~1802)가 세웠다. 자연석 위에 세운 비석에는 일반적인 비문과 달리 붉은색 글씨로 새겼다. 관란정은 1941년에 개축하였으며 1970년, 2013년에 보수하였다.
문종이 죽고 어린 단종이 왕위에 오를 무렵에는 단종의 숙부들(모두 7명)이 매우 강성하였다. 당시에 집현전에 근무하던 그는 <탄세사(歎世詞)>를 지어 앞날에 대한 불안과 걱정, 자기의 결연한 의지를 나타냈다. “마음은 어둡고 침침하며 구름은 하늘을 가득히 덮었구나(懷黯黯兮雲五光).”는 불안한 당시의 상황을 드러낸다. 그는 백이(伯夷)·숙제(叔弟)의 절의를 따르는 사람이 없음을 탄식하며, “세상사람 모두 다 의를 저버리고 녹을 따르나(世皆忘義洵祿兮), 나는 홀로 몸을 더럽히지 않고 깨끗하게 노닐겠다(我獨潔身而徜徉).”라고 하여 혼자서라도 절의를 지키겠다는 강한 의지를 드러냈다. 이 시의 원문과 번역문이 관란정 앞 오른 쪽에 세운 ‘관란 원호 선생 유고비’(2014년 건립)에 적혀 있다.
관란정 왼편에는 한국문인협회 여강시가회에서 세운(2017년 건립) 시비가 있다. 거기에 《청구영언》에 실려 있는, “간밤에 우던 여울 슬피 울어 지나가다./ 이제와 생각하니 님이 울어 보내도다./ 저 물아 거슬러 흐르고저 나도 울어 보내도다.”라는 시조가 씌어 있다. 밤 새워 흐르는 여울물 소리가 슬픈 것은 임이 울어 보내기 때문이다. 여울물이 거꾸로 흐른다면 나의 충심을 실어 보낼 수 있겠다고 하였다. 이 시를 읽으니, 어린 임금을 유배지로 압송하는 임무를 맡았던 의금부도사 왕방연의 시조, “천만리 머나먼 길에 고운 임 여의옵고, 내 마음 둘 데 없어 시냇가에 앉았으니, 저 물도 내안 같도다. 울어 밤길 예놋다(가도다).”가 떠오른다. 두 작품은 단종에 대한 충정을 여울물에 투사하여 절실하게 표현하였다는 점에서 일치한다.
관란정을 찬찬히 살펴보고 산길을 걸어 내려오면서 관란 선생의 행적을 생각하니, 그의 충성스런 마음과 절의가 새삼 절절하게 느껴진다. 그는 순리에 따라 즉위한 왕이 다스리는 나라, 상식이 통하는 나라에서 충성을 다하며 살고 싶었을 것이다. 그러나 왕위를 찬탈하는 수양대군을 본 그는 단종에 대한 절의를 지키기 위해 고난의 길을 선택하였다. 그는 절의를 지킨 원천석(제자인 태종의 부름에도 나가지 않고 숨어 지냈음.)의 후손답게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절의를 지켜 많은 선비의 사표가 되었다. 요즈음에도 관란 선생처럼 충의를 지키는 사람이 있을까? 명리를 위해 양심과 의리를 저버리는 사람, 출세를 위해 삶의 행로를 손바닥 뒤집듯 하는 사람, 당리당략에 따라 행동하며 남의 탓하기를 일삼는 사람 들이 권력을 잡고 큰소리치는 세태를 보니, 관란 선생의 절의가 더욱 소중하고 두텁게 느껴진다. (2021. 05. 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