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에 교회에서 예배 끝날 무렵에 목사님께서 “이 장로님이 나이 드신 분들께 드리려고 지팡이를 가져오셨으니, 필요하신 분은 받아 가십시오”라고 광고하셨다. 나와 아내는 언덕이나 계단을 오르거나 내려갈 때에 지팡이를 짚으면 훨씬 편하다. 그래서 산에 갈 때에는 등산용 지팡이를 꼭 가지고 간다. 그러나 평지에서는 지팡이가 없어도 괜찮으므로, 지팡이를 달라고 할까 말까 망설였다. 그러다가 언제 필요할지 모르니 준비해 두자는 생각에서 용기를 내어, 이 장로님께 말씀드려 둘이 하나씩 받아가지고 왔다.

   지팡이는 이 장로님이 경영하시는 ‘현대의료산업’에서 고령자용으로 만든 제품이다. 플라스틱 손잡이에 알루미늄 합금으로 만든 대를 고정시켰고, 길이는 쓰는 사람이 신장에 맞춰 조절할 수 있게 만들었다. 국가통합인증마크(KC)를 획득한 제품으로, 안전 동작 하중은 100kg이다. 나이 든 교인들을 배려하는 마음에서 안전하고, 품위가 있어 보이는 지팡이를 선물로 주신 이 장로님께 마음 깊이 감사한다.

   지팡이는 노약자나 다리가 불편한 사람이 걷거나 서 있을 때 몸을 의지할 수 있는 보조기구이다. 지팡이는 본인에게 도움을 주기도 하지만, 타인에게 넌지시 도움을 청하는 역할도 한다. 특히 시각장애인의 흰 지팡이는 혼자 걸을 때 더듬이 역할을 하여 보행의 안전을 기하게 하며, 타인에게 시각장애인이라는 것을 알림으로써 위험으로부터 보호받을 수 있게 해 준다.

   지팡이가 보행의 보조기구 이상의 기능과 의미를 수행하는 경우도 있다. 지팡이는 유목민의 목자에게는 양떼를 인도할 때 쓰는 도구이다. 마법사에게는 마법을 행할 때 꼭 있어야 하는 소품이다. 장로나 족장, 스님, 도인과 같은 사람에게는 권위의 상징물이다. 특히 스님에게는 걸을 때에 도움을 주는 도구이면서 법문(法問, 불법에 대하여 묻고 대답함)할 때나 좌선(坐禪, 고요히 앉아서 참선함)할 때, 그리고 경책(警策, 주의가 산만하거나 조는 사람을 깨우침)할 때에도 손에서 놓지 않는 도반(道伴)이다.

   어떤 사물이 바로 서려면 최소한 세 개의 다리가 있어야 한다. 삼발이도, 세발솥의 다리도 셋이다. 사진기를 받치는 삼각대 역시 다리가 셋이다. 지게를 세울 때에는 작대기로 받쳐서 세 발이 되게 해야 한다. 이 원리는 사람의 삶에도 그대로 적용된다고 생각한다.

   그리스 신화에서 스핑크스(Sphinx, 상반신은 여자이고 하반신은 날개가 돋친 사자의 모습)는 바위산 길목에서, 행인에게 수수께끼를 내어 풀지 못하면 죽이곤 한다. 어느 날, 스핑크스는 이곳을 지나던 오이디푸스(Oedipus)에게 “목소리는 하나인데, 네 다리, 두 다리, 세 다리로 되는 것이 무엇인가?”라고 묻는다. 오이디푸스가 “그것은 인간이다.”라고 대답하자, 스핑크스는 분노를 내뿜으며 절벽으로 떨어져 죽고, 오이디푸스는 괴물을 물리친 영웅이 된다. 이 수수께끼는 삶의 여정을 말해 주는 것으로, 어린아이 때 네 발로 기는 것처럼 나이든 뒤에 지팡이를 짚는 것도 순리임을 일깨워 준다.

   지인 중에 보행이 불편한데도 지팡이를 짚지 않으려 하는 분이 있다. 늙게 보여서 얻을 것이 없다는 생각에서일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옳은 생각이 아니다. 나이든 사람이 조심할 일 중 가장 큰 것이 낙상(落傷)하지 않도록 조심하는 일이다. 노인은 낙상하면 골절하기 쉽고, 골절로 병상에 눕게 되면 온갖 병이 몰려와서 다시는 땅에 서지 못하고 생을 마감하게 된다. 종합병원 입원 환자의 절반이 노인이고, 그 절반이 낙상환자라고 한다. 낙상사고를 당한 뒤에 지팡이를 짚지 않은 것을 후회해도 소용이 없다. 나이 들어서도 젊어 보이려고 지팡이를 짚지 않는 것은 허세일 뿐이다.

   나는 금년에 한국 나이로 팔순이 되었다. 이 장로님한테서 선물로 받은 지팡이는 잘 보관해 두었다가 보행이 불편하다 싶으면 꺼내어 짚어야겠다. 지팡이를 짚는데 따르는 장점도 있을 것이다. 부실한 다리에 쏠리는 체중을 분산시켜 주므로 무릎이 덜 아플 것이다. 그리고 걷다가 지치면 의지해서 잠시 쉬면서 자연과 인생을 관조할 수 있을 것이다. 혼자 걷게 되어 손도 마음도 허전할 때 지팡이는 좋은 친구가 되어 줄 것이다. 지팡이를 짚고 지하철이나 버스를 타면, 자리를 양보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를 따지며 눈치를 보던 사람도 ‘보행이 불편한 어른’으로 보고, 자리를 양보해 줄 것이다. 나이든 것이 큰 벼슬은 아니어도, 그 정도 대접은 받아도 괜찮지 않을까 생각한다.

   우리나라에서는 신라 시대부터 고려, 조선에 이르기까지 70세 이상의 원로대신들에게 임금이 궤장(几杖, 벽에 세워 놓고 앉을 때 몸을 기대는 방석과 지팡이)을 내렸다. 이때 임금이 주는 지팡이는 명아주로 만든 청려장(靑藜杖)이었다. 명아주는 밭이나 들에서 자라는 한해살이 풀이다. 어린 싹은 봄날에 나물로 먹고, 다 자란 뒤에는 지팡이를 만든다. 명아주는 줄기가 가볍고 단단하며, 손에 쥐는 느낌이 좋고, 구불구불 생긴 모습이 멋스러워 예로부터 지팡이의 재료로 쓰여 왔다. 《본초강목(本草綱目》에는 청려장을 짚고 다니면 중풍에 걸리지 않고, 신경통이 좋아진다고 해서 귀한 지팡이로 여겼다고 한다. 청려장의 표면이 손바닥을 자극하여 뇌에 자극을 주기 때문이라 하겠다. 그런데 청려장은 쉽게 얻을 수 없다. 지팡이를 만들만큼 한 해 동안 크게 자라는 명아주를 얻기가 힘들기 때문이다. 그래서 요즈음에는 자연산 명아주 대신 재배한 명아주로 청려장을 만든다. (대표적인 산지는 경상북도 문경시 호계면임.) 지금 남아 있는 청려장 중 가장 오래된 것은 퇴계 선생이 사용하던 것으로, 도산서원에 보존되어 있다.

   10월 2일은 ‘노인의 날’이다. 유엔이 정한 노인의 날인 10월 1일이 ‘국군의 날’이어서 하루 뒤인 10월 2일을 ‘노인의 날’로 정하여, 1997년부터 법정기념일이 되었다. 이날 정부에서는 100세가 된 노인에게 청려장를 주어 축하한다. 이것은 전에 임금님이 원로대신에게 내리던 청려장 못지않게 영광스러운 선물이다. 나는 이 청려장을 선물로 받을 수 있을까? 이 장로님한테 받은 지팡이를 짚으면서 열심히 걸으면 가능할지도 모른다. 그러고 보면, 이 장로님이 주신 지팡이는 나를 청려장 받는 날까지 건강으로 이끌어 갈 매우 귀한 선물이다. 뜻깊은 지팡이를 선물로 주신 이 장로님께 감사하며, 사업이 크게 번창하기를 기도한다. (2021. 3. 1.) 《청하문학》 제20호, 서울: 청하문학회, 2021, 08.

 

내가 선물로 받은 지팡이
지인의 부친이 받은 청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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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얼마 전에 고향친구들과 대화하던 중 선산(先山)의 관리와 성묘, 납골묘 조성 등이 화제에 올랐다. 그 중 한 친구는 나의 부모님 산소에 관해서도 물었다. 나는 친구들과 헤어진 뒤에 부모님 산소의 성묘와 이장(移葬)에 관해 생각해 보았다.

 

  선친께서는 내가 아홉 살 때 별세하셔서 마을 건너편에 있는 이종형님의 산에 모셨다. 그리고 매일 아침저녁 상복 차림으로 산소에 가서 곡하며 절하였다. 한 달쯤 되던 어느 날, 성묘하고 돌아올 때 갑자기 천둥이 치는 듯한 소리가 들리면서 소름이 돋고, 온몸이 떨렸다. 집에 와서 어머니께 그 말씀을 드리니, “아버지께서 아홉 살짜리 어린 아들이 매일 성묘하러 오는 것이 안쓰러워 정을 떼려고 그러시는 것 같다”라고 하시면서, 매일 성묘하는 일을 그만두라고 하셨다. 그 뒤로는 가끔씩 성묘하고, 때맞추어 벌초하였다.

 

  서울로 올라온 뒤에는 외종형님이 때맞추어 벌초해 주셨고, 나는 방학 때에 성묘하였다. 성묘할 때마다 선친을 모실 자리를 허락해 준 이종형님께 감사하였다. 그런데 이종형님이 다른 곳으로 이사하시면서 그 산을 팔았다. 나는 선친의 묘가 남의 산에 있는 것이 마음에 걸려 선친을 모실 산을 구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얼마 뒤에 삽교에 사시는 큰댁 형님의 주선으로 홍성군 홍북면 신정리에 있는 산(1,270평)을 매입하였다. 그곳으로 이장하고 나니, 선친을 내 산에 모셨다는 생각에 마음이 가벼웠다.

 

  나는 전과 다름없이 명절을 전후하여 가족들과 함께 성묘하고, 9월 첫째 토요일에는 벌초하였다. 처음 몇 년은 낫과 호미로, 예초기가 보급된 뒤에는 예초기로 벌초하였다. 선친 산소를 벌초한 뒤에는 보령 천북으로 가서 친척들과 선대묘소를 벌초하고, 함께 식사하였다. 벌초하는 일을 계기로 친척들을 만나니 좋았다.

 

  2003년 1월에 어머니께서 돌아가셨다. 나는 어머니를 아버지와 합장하고, 전과 다름없이 성묘하고, 벌초하러 다녔다. 그런데 차량이 널리 보급되면서 명절이나 벌초하는 때가 되면, 고속도로 정체가 극심해졌다. 새벽 6시에 출발하여 갈 때에는 두 시간 남짓 걸리지만, 서울로 돌아올 때에는 대여섯 시간 걸리곤 하였다. 나는 내 고향이니까 멀고 힘들어도 다니지만, 내가 없으면 아들들이 이 먼 곳을 힘들게 다닐까? 손자가 어른이 된 뒤에는 성묘와 벌초를 할까? 이런 저런 생각 끝에 부모님의 산소를 서울에서 가까운 공원묘지로 이장하는 일을 고려하기 시작하였다.

 

  2000년대에 들어서면서 정부에서는 묘지가 늘어 산림 훼손이 심각하다면서 화장을 적극 권장하였다. 그에 발맞춰 사회분위기도 차츰 화장 쪽으로 바뀌었다. 젊은이들이 도시로 떠난 농촌에서는 선산 관리가 큰 문제였다. 그에 따라 고향에서도 선산의 묘를 파묘하여 봉안당(또는 봉안담)을 조성하는 집안이 점점 늘어갔다.

 

  한국인은 ‘명당(明堂)’에 집을 짓고 살거나, 조상의 묘를 쓰면 자손이 발복하여 잘 된다는 의식이 있다. 이것은 생기론(生氣論)과 감응론(感應論)을 바탕으로 한 풍수설에 따라 형성된 의식이다. 우주에는 인간과 만물의 운명을 지배하는 생기가 있다. 이것은 바람·구름·비로 나타나기도 하지만, 그 주류는 땅속에 흘러들어서 지맥을 따라 흐른다. 흐르던 생기가 멈추는 곳이 명당이다. 그곳에 집을 짓거나 묘를 쓰면 자손이 잘 된다고 한다. 풍수설은 신라 말기에 중국에서 들어와 깊이 연구되었고, 민간에 퍼져 풍수신앙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나 역시 이런 의식을 지니고 살아왔다. 그런데 현실은 어떠한가? 풍수설에 맞는 명당을 고를 수도 없고, 성묘하고 벌초하는 데 드는 시간과 노력을 무시할 수도 없지 않은가? 이 문제로 고민하던 때에 풍수에 관한 옛날이야기가 떠올랐다. 명당은 착한 사람이라야 얻을 수 있고, 선행을 한 사람의 후손에게만 감응한다. 악행을 한 사람은 명당을 얻을 수 없거나, 얻었을지라도 명당의 생기가 스스로 파괴되어 효험이 없다고 한다. 나의 선친은 농부로 착하게 사시다가 45세에 병으로 돌아가셨으니, 악업을 쌓았을 리 없다. 어머니는 독실한 기독교인으로 신앙생활을 잘 하시고, 남을 위해 기도를 많이 하신 분이다. 이런 분들을 모신 곳이면 그곳이 바로 명당일 것이고, 명당의 생기가 감응하여 나와 내 자손이 잘 될 것 아닌가!

 

  공원묘지의 경우 묘지법이 바뀌어 매장묘는 사용 기간이 15년(15년씩 세 번 연장 가능)이고, 봉안묘(납골묘)는 영구적이라고 한다. 이런 저런 생각 끝에 부모님의 유해를 봉안묘에 모시기로 마음을 정하였다. 이것은 바뀐 사회 분위기와 국가 시책에 따르면서 성묘에 따르는 자손들의 불편을 덜어주기 위한 것이다. 유골을 강물이나 나무 밑에 뿌리는 것도 생각해 보았다. 그러나 생각날 때 찾아가서 추모할 수 있도록 유골은 남겨 두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하였다.

 

  그 무렵에 경기도 광주시 오포읍에 있는 ‘시안가족추모공원’에 안장한 동서의 묘를 찾게 되었다. 그곳은 봉안묘, 평장묘, 봉안담, 매장묘가 있는 대규모 추모공원이었다. 묘지를 주택에 비유하면, 자기 산에 홀로 있는 묘는 단독주택이고, 시안 같은 공원묘지는 대규모 아파트단지라 할 수 있다. 단독주택도 좋지만, 대단지 아파트가 살기에 편리한 점이 많다. 나는 아내와 아들과 상의한 끝에 부모님을 시안으로 옮겨 모시기로 하였다.

 

  시안가족추모공원은 전체적으로 보아 배산임수(背山臨水) 지형에 자리 잡고 있다. 나를 안내해 준 분양담당 이사는 추모공원 전체와 개별 봉안묘의 위치를 풍수설을 기반으로 설명하였다. 나는 풍수상으로 좋다는 위치의 봉안묘(학1-12-24, 24위형)를 선택하였다. 그리고 2012년 7월에 부모님 묘를 파묘하여 유해를 홍성화장장으로 모시고 가서 화장한 뒤에 유골을 항아리에 담아 모시고 왔다. 봉안묘의 윗돌을 열고 석실의 첫째와 둘째 자리에 두 분을 모셨다. 부모님의 함자와 출생일·사망일은 밖의 돌판에 새겼다.

 

  부모님을 시안으로 모시고 나니, 설과 추석 전날에 온 가족이 함께 성묘하는 데에 따르는 부담이 없다. 집에서 40~50분밖에 걸리지 않으니, 몇 시간씩 차를 몰고 오가던 수고를 하지 않아도 된다. 관리비만 내면 알아서 다 해 주니, 벌초하느라 땀을 흘릴 일도, 벌에 쐬지 않을까 걱정하는 일도 없다. 온 가족이 부모님을 추모하며 기도한 뒤에 넓은 공원을 거닐면서 맑은 공기를 마신다. 그리고 맛집을 찾아가 식사를 한 뒤에 집으로 돌아온다. 이제 성묘 길은 돌아가신 부모님을 추모하면서 가족들이 친목을 도모하는 나들이 길이 되었다.(2021. 1.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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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얼마 전에 초등학교 동창인 박 형을 만나니, 묵직한 꾸러미를 건네주었다. 의정부에서 농장을 하는 친구가 보내준 은행을 덜어서 가지고 온 것이라고 하였다. 몇 년 전에는 겉껍질을 까서 주었으나, 올해는 까지 못하였다고 하였다. 나는 박 형의 따뜻한 마음에 감사하면서 점심 대접을 하고 헤어졌다.

   집에 돌아와 아내와 식탁에 마주 앉아 은행을 깠다. 내가 은행, 밤, 호두 등을 깔 수 있도록 만들어 놓은 펜치 모양의 기구로 겉껍질을 깨뜨려 놓으면, 아내는 깨진 겉껍질을 벗겨내고 알맹이를 꺼냈다. 은행의 크기에 맞는 홈에 은행을 물리고, 알맞게 힘을 주는 일이 서툴러서 처음에는 알맹이가 깨지기도 하였다. 그러나 시행착오를 거듭한 뒤에 요령을 터득하여 제대로 하였다. 은행 껍질을 까는 일이 쉽지 않은데, 전에 박 형이 많은 양의 은행을 까서 준 일을 생각하니, 새삼 고맙게 느껴졌다. 나는 박 형의 따뜻한 마음에 재삼 감사하면서 은행에 대해 생각하였다.

   은행은 사과나 배와 같은 과일이 아니고, 은행나무에서 열리는 종자(씨앗)이다. 은행은 ‘은빛 나는 살구’라는 뜻에서 은행이라고 하였다고 한다. 은행과 살구씨의 모양이 비슷하기 때문일 것이다. 은행나무는 ‘공손수(公孫樹)’라고도 한다. 20년 이상 자라야 열매를 맺으므로, 할아버지가 심으면 손자가 수확한다는 뜻에서 나온 이름이다. 은행나무를 ‘압각수(鴨脚樹)’라고도 한다. 이것은 은행잎이 오리발을 닮았다 하여 붙인 이름이다.

   은행나무는 예로부터 사찰, 향교, 서원이나 마을 어귀에 많이 심었다. 은행은 수명이 길므로, 수령 1,000년 내외의 은행나무가 많이 있다. 마을 어귀에 서 있는 은행나무는 마을을 수호하는 신목(神木)으로 여겨 마을신앙의 대상이 되기도 하였다. 이런 마을에서는 은행나무의 잎이 싹트는 모양에 따라 그 해 농사의 풍흉을 점친다. 이런 나무에는 “은행나무가 밤에 울면 마을에 재앙이 온다.”거나, “은행나무에 도끼질을 하면 피가 나온다.”는 말이 전해 온다.

   은행나무를 생각하면, 세 곳의 은행나무가 떠오른다. 첫째는 성균관대학교 캠퍼스에 있는 대성전과 명륜당 앞의 은행나무이다. 대학원에 다닐 때 이 나무 앞을 지나노라면 숙연해지곤 하였다. 옛날에 공자가 은행나무 아래에 단을 만들고 제자를 가르쳤다는 고사에서 유래하여 학문을 닦는 곳을 ‘행단(杏壇)’이라고 한다. 뿌리가 무성하여 잘 자라고, 수명이 긴 은행나무의 특성과 이 고사가 결합하여 ‘기초가 튼튼해야 학문을 크게 이루듯 유생들이 이를 본받아 열심히 공부할 것을 당부’하는 의미에서 대성전과 명륜당에 앞에 은행나무를 심었다고 한다. 이런 연유로 은행나무는 학문과 교육 기관을 상징하는 나무가 되었다. 성균관대학교, 일본의 도쿄대학교가 은행잎 문양을 학교의 상징으로 삼은 것이 그 예이다.

   그 다음은 천연기념물 제30호인 용문사 은행나무이다. 대학생일 때 처음 본 뒤로 몇 차례 가 보았다. 수령 1,100년으로 추정되는 이 노거수(老巨樹)를 보면, 그 자태가 웅장하여 신비감마저 든다. 용문사는 신라 진덕여왕 3(649)년에 원효대사가 세웠고, 은행나무는 그 뒤에 중국을 왕래하던 스님이 가져다가 심은 것이라고 한다. 이 나무에는 신라의 마지막 임금인 경순왕의 아들 마의태자(麻衣太子)가 나라를 잃은 설움을 안고 금강산으로 가다가 심었다는 전설과, 의상대사가 짚고 다니던 지팡이를 꽂은 것이 자랐다는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앞 이야기에는 천년을 이어온 신라의 멸망에 대한 아쉬움이 묻어 있고, 뒤 이야기에는 원효대사의 법력을 찬양하는 마음이 담겨 있다.

   그 다음은 인천시 강화군 석모도 낙가산에 있는 보문사의 은행나무이다. 수령 400여 년이 되는 이 은행나무는 암나무로, 이곳에 홀로 서 있다. 그런데도 열매를 맺으니 의아스러웠다. 30여 년 전에 한국교원대학교 대학원생들과 전설 조사 갔을 때 만난 이지훈(당시 67세, 고졸, 전 공무원)씨는 석모도 서쪽 섬에 있는 수나무와 마주 보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십리 넘게 떨어진 섬에 있는 수나무의 꽃가루가 바다를 건너 날아와 가루받이를 한다니, 풍매화(風媒花)인 은행나무의 번식력이 놀랍기 그지없다.

   은행나무는 파란 잎이 돋아있을 때에도 보기 좋지만, 노랗게 단풍이 든 잎이 가을 햇살에 나부끼는 모습은 참으로 곱고 예쁘다. 은행나무는 병해충에 강하고 미세먼지를 저감시키는 등 대기정화 효과가 있다. 그리고 빌로불, 은행산 등을 함유하고 있어 천적들로부터 자기를 지키므로, 병충해에 강하여 잘 자란다. 그래서 여러 곳에서 가로수로 심어 낭만적인 은행나무길을 만들었다. 그러나 은행이 익어 떨어질 즈음에는 육질 외종피에서 나는 악취가 심하다. 그래서 암나무를 수나무로 교체하는 곳도 있다.

   은행에는 카로틴 성분이 있어 기침을 멈추게 하고, 가래를 없애주는 효능이 있다. 비타민, 베타카로틴, 플라보노이드, 미네랄 성분이 있어 각종 질병과 노화를 예방해 주고, 항산화 작용을 하여 활력을 증진시켜 준다. 그리고 뇌기능을 강화하여 기억력, 집중력, 인지능력 향상에 도움을 주어 뇌와 관련된 퇴행성 질환을 완화시켜 준다. 또 징코플라톤, 플라보노이드 성분이 들어 있어 혈액순환을 도와 혈관의 노폐물을 청소하고, 콜레스톨 수치 감소시켜 동맥경화 같은 심혈관질환 예방에 도움을 준다. 레시틴, 엘고스테린 성분은 체내에서 칼슘의 흡수를 도와 뼈를 튼튼하게 해 준다.

   은행은 이런 효능만 있는 것이 아니라 부작용도 있다. 은행에 들어 있는 아미그달린이란 성분은 체내에서 효소에 의해 분해되면서 시안화수소를 생성하여 청색증을 유발하고, 두통을 일으키기도 한다. 심할 경우에는 호흡곤란이 일어나기도 한다. 따라서 은행은 반드시 익혀서 먹어야 하고, 한꺼번에 많이 먹지 말아야 한다. 은행의 하루 섭취량은 어린이 3알, 어른은 10알 이내가 좋다고 한다.

   나는 오래 전에 은행의 효능에 관한 글을 읽고, 은행을 하루에 다섯 알씩 굽거나 쪄서 먹는다. 겉껍질을 까는 일이 번거로워 주로 깐 것을 사다 먹는다. 그런데 은행은 크기, 건조 정도에 따라 맛이 조금씩 다르다. 맛 좋은 은행으로 기억에 남은 것은, 몇 년 전에 공주 갑사 입구에서 할머니한테 산 은행이다. 알이 굵고, 바짝 마르지 않아 부드럽고 맛이 아주 좋았다. 그 다음은 몇 년 전에 박 형이 준 은행이다. 그 은행에는 박 형의 따뜻한 사랑과 정성이 묻어 있어서 더욱 맛이 좋았다.

   아내와 함께 이런 이야기를 하며 은행을 까니, 은행 까는 일이 힘들거나 지루하지 않았다. 깐 은행은 몇 개의 작은 비닐봉지에 나눠 담아 냉동실에 넣었다. 하루에 열 알씩 먹으면 몇 달을 먹을 것 같다. 은행을 깐 날로부터 몇 주 지난 뒤에 한라봉 한 상자가 택배로 왔다. 박 형이 제주도에 사는 지인에게 부탁하여 보낸 것이다. 그래서 오늘은 은행과 한라봉을 먹으며 박 형의 따뜻하고 고마운 마음을 되새겼다. 월남전 참전용사로, 수술을 받은 적도 있는 박 형이 건강관리를 잘 하여 오래도록 따뜻한 우정을 나눌 수 있기를 간절히 기도한다.(2021. 1.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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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며칠 전에 초등학교 동창인 친구가 택배로 보낸 쌀을 받았다. 서울에 살면서 고향에 있는 논을 친척에게 농사짓게 하여 수확한 쌀을 보낸 것이다. 작년에도 보내주어 잘 먹었는데, 금년에도 또 보내주니 고맙기도 하고, 미안하기도 하다. 현관 앞에 놓여 있던 쌀 포대를 들여놓고 바라보며 여러 가지 생각을 하였다.

 

   나는 쌀을 선물로 받은 적이 여러 번 있다. 도시에 사는 제자가 자기 부모님께서 농사지은 쌀을 보내주어 받기도 하였고, 은퇴하여 농촌으로 간 제자가 그 지역에서 나는 쌀을 보내주어 받은 적도 있다. 보내는 사람의 정성이 담겨 있는 선물을 받으면 고맙고 기쁘다. 그런데 나는 쌀을 선물로 받으면 다른 선물을 받았을 때보다 기쁘고 고마운 마음이 한결 더 크게 느껴진다.

 

  오래 전에 쌀 도매상을 하는 분한테 들은 말에 따르면, 서울에서는 경기미(여주, 이천, 포천 등)를 일등급으로 치고, 충청도에서 나는 쌀은 이등급으로 여긴다고 한다. 그러나 나는 충청남도 홍성, 그 중에서도 갈산에서 나는 쌀을 제일로 여긴다. 《동의보감(東醫寶鑑)》에 ‘신토불이(身土不二)’라는 말이 있다. 몸과 땅은 둘이 아니라는 뜻으로, 자신이 사는 땅에서 나는 것을 먹어야 체질에 잘 맞는다는 말이다. 내가 태어나 자란 곳에서 나는 쌀을 먹는 것이 나의 건강에 제일 좋을 것이라는 생각에서 나는 홍성 쌀을 제일로 꼽는다.

 

   고향의 산과 논밭은 내가 어렸을 때 늘 대하던 자연환경이다. 아침에 일어나서 마루에 서면 보이는 것이 넓은 들의 논이었다. 학교에 오갈 때 걷는 오솔길 양편에도, 자동차가 다니던 신작로의 좌우에도 논이 이어졌다. 나는 논의 모습이 계절에 따라 바뀌는 것을 보며 자랐다. 이른 봄에는 두엄을 져다 부어 놓은 모습을 보았고, 얼마 뒤에는 두엄을 흩은 뒤에 물을 대고 쟁기질을 하고, 이어서 써레질한 뒤에 모내기를 하는 모습을 보았다. 모를 심은 뒤에는 벼가 자라는 모습을 보며 즐거워하였고, 벼이삭이 나와 고개를 숙일 때에는 흐뭇한 마음으로 논두렁을 쏘다니며 메뚜기를 잡았다. 겨울철에는 물을 대 놓은 논의 얼음판에서 썰매를 타며 즐거워하였다. 나는 중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두엄을 져 나르는 일, 모를 심는 일, 벼를 베는 일을 하였다. 논은 내 생활의 터전이었고, 삶의 일부였으며, 아름다운 추억을 간직한 공간이다. 이런 논에서 수확한 쌀이 나와 정서적으로 유대감이 있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신 우리 집은 가난하였으므로, 쌀이 넉넉하지 못하였다. 그래서 늘 쌀을 아껴 먹어야 했다. 쌀을 아끼기 위해 겨울철에는 고구마로 한 끼를 때우기도 하였고, 보릿고개를 앞두고는 채소를 넣고 죽을 쑤어서 끼니를 해결하기도 하였다. 이런 과정을 겪다 보니, 자연히 쌀을 소중하게 여기게 되었다. 이런 마음이 내 의식 속에 잠재되었으므로, 아이들을 키울 때에는 가을에 일 년 먹을 쌀을 사다가 방에 쌓아놓아야 마음이 놓이기도 하였다. 이런 쌀을 선물로 받았으니, 어찌 기쁘고 고맙지 않겠는가!

 

  나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고향을 떠날 때 논밭을 다 정리하였다. 고향에는 누님 한 분을 빼고는 가까운 친척이 없다. 그런데다가 학생 때에는 공부하느라고 바빠서, 교수가 된 뒤에는 가르치고 연구하는 일에 몰두하느라 고향에 자주 찾아가지 못하였다. 그러나 마음만은 농사지으며 학교 다니던 때를 잊지 않고 있다. 고향의 산과 들은 따스한 마음을 느끼게 해 주는 아련한 그리움의 공간이고, 아름다운 추억이 서린 곳이다. 그래서 고향의 논에서 수확한 쌀은 몸에 영양을 주는 동시에 고향에 대한 추억과 그리움을 일깨워주는 보약이다. 나의 몸과 정신의 기능을 조절하고, 저항 능력을 키워 주며 기력을 보충해 주는 보약을 보내주는 친구가 있다는 것은 참으로 복되고 귀한 일이다. 이런 친구가 있다는 것에 뿌듯함과 함께 자랑스러움을 느낀다.

 

   서울에서 초등학교를 다닌 지인 중에는 내가 초등학교 동창 모임 갖는 것을 희한한 일로 여기기도 하고, 부러워하기도 한다. 그들은 어린 시절부터 서울에서 살았으니, 서울에서 자리 잡고 사는 데에 큰 어려움이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농촌 출신들은 서울에 와서 자리 잡을 때까지 온갖 시련과 고통을 견디고 이겨내야 했다. 이를 이기지 못한 사람들은 다시 고향으로 내려갔다. 따라서 서울서 자리 잡은 초등학교 동창들은 온갖 역경을 이겨낸 용사들로, 보람과 자부심을 지니기에 부족함이 없는 사람들이다. 이런 사람들이 동창회를 만들어 노년이 되도록 자주 만나며 정을 나누는 것은 자연스럽고, 자랑스러운 일이라 하겠다.

 

   이번에 쌀을 보내준 친구는 초등학교를 졸업한 뒤에 서울에 와서 공부를 하였다. 직장 생활을 하다가 건설회사를 설립하여 많은 어려움과 실패를 겪기도 하였으나 마침내 성공한 의지의 한국인이다. 주관이 뚜렷하고, 생각이 바르며, 다른 사람을 배려하는 마음도 넉넉한 사람이다. 그는 부모님의 유산으로 받은 논에서 생산한 쌀을 혼자 차지하는 것이 미안하다며 고향 친구들에게 나누어 준다. 그의 정겹고 따뜻한 마음이 고맙기 그지없다. 이 친구가 얼마 전부터는 하루에 몇 가지씩 약을 먹고, 지팡이를 짚고 다닌다. 그렇지만 그는 매사를 긍정적으로 생각하며 초등학교 친구들의 모임에 빠지지 않고 참여하고, 소모임을 주관하기도 한다. 이 친구가 건강관리를 잘 하여 오래도록 우정을 나눌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2020. 12.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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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코로나19의 만연으로 사회적 거리두기가 강화된 요즈음 나의 일과는 매우 단조롭다. 지하철을 타야하고, 식당에 가서 점심을 사먹는 일이 부담스러워 연구실에도 자주 나가지 않는다. 그러다 보니, 집에서 책을 읽다가 오후에 집 앞에 있는 응봉공원에 가서 걷는 일이 내 일과의 전부이다.

   숲속에 자리 잡은 공원의 타원형 보행로(둘레 1,100m 가량) 좌우의 평지와 언덕에 있는 나무들의 모습이 달라졌다. 얼마 전까지만 하여도 상록수가 아닌 나무들의 잎은 단풍이 들어 곱더니, 이제는 누렇게 변한 잎을 떨어뜨리고 맨 가지를 드러내기 시작하였다. 내가 공원을 걷는 시간과 새들이 움직이는 시간이 다르기 때문인지 자주 눈에 띄던 까치와 비둘기는 보이지 않고, 참새가 떼를 지어 날아와 먹이를 찾는다.

   오랜만에 참새를 보니, 참으로 반가웠다. 통통하게 살이 찐 참새들은 가벼운 몸놀림으로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먹이를 찾다가는 후루룩 소리를 내며 날아올라 나무에 앉는다. 조금 뒤에는 다시 내려와 가벼운 몸놀림으로 먹이를 찾는다. 이런 참새의 모습을 보니, 귀엽고 사랑스럽다. 어린아이처럼 만져보고 싶은 마음이 들어 가까이 다가가니, 또 후루룩 소리를 내며 날아간다.

   어린아이 주먹보다 작은 참새들이 떼를 지어 내려와 촐싹대는 모습을 보니, 어린 시절에 덫을 놓아 참새를 잡던 일이 떠오른다. 그 시절에는 참새가 참으로 많았다. 숲에서 작은 벌레나 풀씨를 찾아먹던 참새들이 겨울철이면 농가로 찾아들었다. 참새들은 안마당은 물론 토방, 헛간까지 다가오고, 닫힌 문의 틈새로 부엌에 들어가 먹이를 찾기도 하였다.

   이때 나는 참새를 잡을 궁리를 하였다. 참새들이 자주 오는 안마당에 싸리로 만든 발채(짐을 싣기 위하여 지게에 얹는 소쿠리 모양의 물건)를 놓고, 아래쪽은 돌이나 통나무로 눌러놓는다. 발채 밑에는 벼나 쌀을 조금 뿌려 놓고, 발채 머리를 한 뼘쯤 되는 막대기로 받쳐 세운다. 그 막대기의 아래쪽에 가늘고 질긴 실을 매어 방안으로 가지고 들어간다. 그리고는 방문에 붙인 유리에 눈을 대고, 발채 주변을 주시한다. 참새가 날아와 발채 근처를 서성이면, 나는 바짝 긴장되어 가슴이 콩닥거렸다. 정신을 집중하여 그곳을 응시하다가 참새가 곡식을 먹으려고 발채 밑으로 들어가면, 얼른 실을 잡아당긴다. 그래서 발채가 앞으로 수그러질 때 참새 한두 마리가 발채 밑에 깔린다.

   나는 기뻐 소리를 지르며 달려 나가 발채를 조심스레 들어 올리며 참새를 붙잡았다. 참새의 가슴이 팔짝팔짝 뛰는 것이 손에 느껴졌다. 참새의 발에 실을 묶은 뒤에 방안에 놓으면, 이리저리 날아다니다가 멈춘다. 방바닥에 놓으면 이리저리 폴짝폴짝 뛰어다닌다. 이렇게 촐싹거리는 참새의 몸짓은 아주 귀엽고 정겹게 느껴졌다. 나는 참새가 배가 고플 것이라 생각하여 쌀을 물과 함께 주었으나, 통 먹지 않았다. 참새를 빈 방에 두고 하룻밤을 지낸 뒤에 아침에 가보니, 참새는 숨을 거두었다. 나는 죽은 참새가 불쌍하여 눈물을 흘리며 땅에 묻어주었다. 그 뒤로도 한두 번 더 참새를 잡아서 가지고 놀다가 놓아주었다. 그 때 내 손을 벗어나는 참새의 날갯짓은 힘이 넘쳤다.

   참새와 관련된 옛날이야기 중에 「볍씨 한 알」이 있다. 옛날에 부자 노인이 세 며느리에게 선물이라면서 봉투 하나씩을 주었다. 세 며느리가 열어 보니, 볍씨가 한 알씩 들어 있었다. 이를 대수롭지 않게 여긴 첫째와 둘째 며느리는 버리거나 까서 먹었다. 셋째며느리는 곰곰이 생각한 끝에 발채로 새덫을 만들고, 볍씨 한 알을 놓아 참새 한 마리를 잡았다. 그 때 이웃집 노파가 약에 쓴다면서 참새를 달걀 하나와 바꾸자고 하여 바꿨다. 시아버지가 병아리를 깨려고 어미닭에게 알을 품게 할 때, 그 달걀에 표시를 하여 함께 품게 하였다. 그 알에서 깬 병아리가 자라 암탉이 되어 달걀을 낳았다. 달걀을 모아 팔아서 암탉 한 마리를 더 사서 길러 알을 낳게 하였다. 그 뒤에 암탉과 달걀을 팔아 새끼돼지를 사서 기르고, 돼지의 숫자가 늘어나자 이웃에 수내(수나이, 가축을 기르게 하고, 이익을 나눔)를 주어 길렀다. 그 돼지를 팔아 송아지를 사서 기르고, 소가 늘자 이웃에 수내를 주어 길렀다. 그래서 10년 뒤에는 논 열 마지기를 샀다. 이를 본 시아버지는 셋째며느리를 크게 칭찬하고, 재산을 셋째 아들․며느리에게 물려주었다고 한다.

   볍씨 한 알과 작은 참새를 연결시킨 이 이야기는 작은 일에 충실하고, 매사를 계획을 세워 철저히 하라는 교훈을 내포하고 있다. 공원에서 참새 떼를 보는 순간 나는 참새를 잡아 가지고 벗 삼아 놀던 어린 시절의 아련한 추억과 함께 이 옛이야기가 떠올랐다. 이런 추억을 떠올리니, 오랜만에 보는 참새가 더욱 반갑고, 정겹게 느껴졌다.

   참새는 우리 선조들의 생활과 관련이 깊은 새였으므로, 참새와 관련된 관용구나 속담이 많다. 음식을 조금씩 여러 번 먹는 모양을 비유적으로 이를 때에는 ‘참새 물 먹듯’이라고 한다. 그만그만한 것들 가운데에서 굳이 크고 작음이나 잘잘못을 가리려고 할 때나, 자질구레한 말을 하기 좋아하는 사람을 비꼴 때에는 ‘참새가 기니 짧으니 한다.’라고 한다. 욕심 많은 사람이 이끗(재물의 이익이 되는 실마리)을 보고 가만있지 못하거나, 자기가 좋아하는 곳은 그대로 지나치지 못함을 비유적으로 말할 때에는 ‘참새가 방앗간을 그저 지나랴’라고 한다. 아무리 약한 것이라도 너무 괴롭히면 대항한다는 것을 말할 때에는 ‘참새가 죽어도 짹 한다.’라고 한다. 몸은 비록 작아도 능히 큰일을 감당함을 비유적으로 이를 때에는 ‘참새가 작아도 알만 잘 깐다’라고 한다. 실력이 없고 변변치 아니한 무리들이 아무리 떠들어 대더라도 실력이 있는 사람은 이와 맞붙어 함께 다투지 아니한다는 뜻을 드러낼 때에는 ‘참새가 아무리 떠들어도 구렁이는 움직이지 않는다’라고 한다. 참새가 작다는 것을 전제로 하여 만든 이 말들은, 참새가 우리 조상들의 삶과 밀접한 관계를 맺으며 살아왔음을 말해 준다.

   참새는 텃새로 우리의 생활과 밀접한 관계를 맺으며 살아왔다. 가을에는 농작물에 피해를 주지만, 여름에는 해로운 곤충을 잡아먹어 사람에게 도움을 주는 이로운 새이기도 하다. 어린 시절에 농촌에서 정겹게 보던 참새를 서울의 공원에서 보니 감회가 새롭다. 요즈음에는 술꾼들이 즐기던 ‘참새구이’가 사라져서 다행이다. 참새가 도시에서도 사람과 친밀하게 지낼 수 있도록 잘 보호하였으면 좋겠다.(2020. 12.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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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며칠 전에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원당동에 있는 고려 제34대 공양왕릉(恭讓王陵)을 찾았다. 이 능은 쌍릉 형식이며, 두 봉분 앞에 ‘고려 공양왕’, ‘순비 노씨(順妃盧氏)’라는 묘표가 있다. 두 봉분 앞 가운데에 조선 고종 때 세운 ‘고려공양왕고릉(高麗恭讓王高陵)’이란 표석이 있고, 그 앞에 석등과 석호·문인석·무인석이 서 있다. 조금 더 앞에는 ‘개와 먹이그릇’ 석상이 있고, 아래쪽에 작은 연못이 있다. 이 능은 《조선왕조실록》, 고양군지 등의 기록을 근거로, 1970년 2월 28일에 사적 191호로 지정되었다. 고양시 향토문화보존회에서는 고양시의 지원을 받아 매년 공양왕고릉제를 봉행하고 있다. 왕릉 뒤에는 공양왕의 외손인 정(鄭)씨와 신(申)씨의 무덤들이 있다.

   공양왕릉은 강원도 삼척시 근덕면 궁촌리에도 있다. 석축으로 굽을 돌린 무덤 세 기 중 큰 것은 공양왕의 능이고, 작은 것은 두 아들의 무덤이라고 한다. 공양왕은 삼척에서 교살되어 이곳에 묻혔다가 고양으로 옮겨갔다고도 한다. 이 무덤에 관하여는 민간에서 구전되어 오다가 현종 3년(1662)에 허목이 쓴 척주지와 철종 6년(1855)에 김구혁이 쓴 척주선생안에 기록되었다. 이 능은 조선 현종 3년 가을에 삼척 부사 이규현이 개축하였고, 그 뒤에 지방 유지들이 봉축(封築)하였다. 1995년 9월 18일에 강원도 기념물 제71호로 지정되었다. 이곳 사람들은 3년마다 제를 올려 공양왕을 추모하고 있다.

  고려 말에 위화도회군을 계기로 실권을 장악한 이성계 중심의 개혁세력은, 공민왕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우왕과 창왕이 왕씨가 아니고, 요승 신돈의 자식이라 하여 폐위하고, 강릉과 강화로 쫓아냈다. 그리고 1389년에 20대 신종의 6대손인 왕요(王瑤)를 왕위에 앉히니, 그가 고려의 마지막 왕인 공양왕이다.

  공양왕(1345~1394)은 왕손이긴 하지만, 왕위 승계에서 멀어진 지 오래인지라 왕위에 뜻을 두지 않고 안락한 생활을 하였다. 그런데 그가 45세 되었을 때, 개혁세력인 이성계 쪽에서 왕위에 오를 것을 제의하였다. 그는 처음에는 사양하였으나, 그들의 강권을 뿌리치지 못해 왕위에 올랐다. 왕좌는 수년간 온갖 노력을 하고, 수단과 방법을 다 동원하고서도 뜻을 이루지 못하는 경우가 많은, 오르기 힘든 자리이다. 그런데 그는 뜻하지 않았는데도 절대 권력을 가진 지존(至尊)의 자리에 올랐다. 이것은 영광스럽고 복된 일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행운이라기보다는 비운의 시작이었다.

  개혁세력은 전왕과 고려 충신들을 숙청하는 한편, 이성계의 공적을 선양하려 하였다. 이것이 명분과 민심을 얻어 역성혁명(易姓革命)을 완성하는 길이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이 일을 대신해 줄 해결사로 왕요를 선택하여 왕좌에 앉혔다. 조선왕조실록 <태조실록>을 보면, 신흥세력의 윤회종(尹會宗)이 우왕과 창왕의 목을 베야 한다는 소(疏)를 올린다. 그러자 힘이 없는 공양왕은 이를 허락하여 왕명으로 목을 베게 하였다. 그리고 이성계의 공적을 기리는 교지를 내리고, 이성계를 고려 개국 공신인 배현경의 예로 중흥공신에 책록한다. 또 이방원이 고려 충신 정몽주를 살해한 일도 적당히 얼버무려 매듭짓는다. 이처럼 개혁세력은 허울뿐인 공양왕의 왕명을 빙자(憑藉)하여 반대파들을 처단하였다. 이것은 자기들의 손에 피를 묻히지 않고 반대파를 척결하는 차도살인(借刀殺人)의 음험한 계략이었다.

  공양왕은 신변에 위험이 닥칠 것을 예감하고, 이성계와 동맹을 맺어 안전을 도모하려고 하였다. 그래서 사예(司藝) 조용(趙庸)을 시켜 이성계와 맹약을 맺는 문서의 초안을 잡게 하였다. 그리고 이성계의 집으로 거둥하여 술자리를 베풀고, 이성계와 더불어 동맹을 맺으려고 하였다. 그러나 세력을 굳히고, 장애물을 완전히 제거한 이성계는 1392년 백관의 추대를 받아 수창궁에서 왕위에 올랐다. 이렇게 되니, 공양왕은 토끼를 잡은 뒤의 사냥개 신세가 되었다. 그는 곧바로 폐위되었고, ‘공양군(恭讓君)’으로 강등되었다. 그리고 원주와 간성을 거쳐 삼척에 안치(安置)되었다가 두 아들과 함께 교살되었다.

  개혁세력은 공양왕을 앞세워 우왕과 창왕을 죽이고, 고려 충신들을 제거하였다. 그런 뒤에 공양왕을 두 아들과 함께 죽여 제대로 된 무덤도 없는 비운의 주인공으로 만들었다. 이를 미안하게 생각한 조선 태종은 예조의 건의를 받아들여 고양에 있는 그의 무덤에 ‘고려공양왕고릉’이라는 능호를 내렸다. 그 뒤에 세종은 안성의 청룡사에 봉안했던 공양왕의 어진(御眞)을 고양의 무덤 곁에 있는 암자에 이안(移安)하라고 명하였다. 이것은 태조 이성계가 공양왕을 이용만하고 버린 것에 대한 미안함을 조금이나마 가볍게 하려는 뜻에서 취한 조치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고양의 공양왕릉에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해 온다. 공양왕은 개혁세력이 자신을 죽일 것을 예감하고, 몰래 궁을 빠져나와 남쪽으로 도망쳤다. 산속에서 불빛을 보고 찾아가 작은 절에 이르렀다. 그가 왕임을 알아차린 스님은 크게 놀라면서, 동쪽으로 십리 쯤 떨어진 곳에 있는 누각에 가 있으라고 하였다. 왕과 왕비는 그 누각에서 스님이 날라다 주는 음식으로 연명하였다. 여기에서 ‘식사동(食寺洞)’이란 마을 이름이 생겨났다. 어느 날, 이웃사람이 보니 왕이 귀여워하던 청삽살개가 연못가에서 한참을 짖은 뒤에 물속으로 들어가 나오지 않았다. 이상히 여겨 연못의 물을 품고 보니, 왕과 왕비가 죽어 있었다. 사람들이 애석히 여겨 두 사람을 땅에 묻고, 봉분을 만들어 주었다. 그리고 무덤 앞에 충성과 의리를 지킨 개의 석상을 만들어 세웠다고 한다.

  공양왕의 비극적인 최후를 안타까워하는 백성들의 마음이 담긴 이 이야기는 세 가지 의문점을 풀어 준다. 첫째 이곳에 공양왕릉이 있게 된 내력을 설명해 준다. 둘째 다른 왕릉과 달리 문인석과 무인석 앞에 개의 석상을 세워놓은 까닭을 해명해 준다. 셋째 무덤 아래에 작은 연못이 있는 이유를 말해 준다.

  권좌에 뜻이 없던 공양왕은 이성계 세력에 떠밀려 왕위에 올라 약 3년 동안 역성혁명을 꾀하는 그들의 꼭두각시가 되어 반대 세력을 척결하는 해결사 역할을 하였다. 악역을 마친 그는 두 아들과 함께 죽임을 당하는 비운을 맞았다. 무덤이 둘인 것도 그의 비운을 말해 준다. 세월이 흐르고 보니, 그를 이용하던 세력도, 이용을 당한 그도 한줌의 흙이 되고 말았다. 참으로 무상한 것이 정치권력이다. (2020. 11.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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