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에 초등학교 동창인 친구가 택배로 보낸 쌀을 받았다. 서울에 살면서 고향에 있는 논을 친척에게 농사짓게 하여 수확한 쌀을 보낸 것이다. 작년에도 보내주어 잘 먹었는데, 금년에도 또 보내주니 고맙기도 하고, 미안하기도 하다. 현관 앞에 놓여 있던 쌀 포대를 들여놓고 바라보며 여러 가지 생각을 하였다.

 

   나는 쌀을 선물로 받은 적이 여러 번 있다. 도시에 사는 제자가 자기 부모님께서 농사지은 쌀을 보내주어 받기도 하였고, 은퇴하여 농촌으로 간 제자가 그 지역에서 나는 쌀을 보내주어 받은 적도 있다. 보내는 사람의 정성이 담겨 있는 선물을 받으면 고맙고 기쁘다. 그런데 나는 쌀을 선물로 받으면 다른 선물을 받았을 때보다 기쁘고 고마운 마음이 한결 더 크게 느껴진다.

 

  오래 전에 쌀 도매상을 하는 분한테 들은 말에 따르면, 서울에서는 경기미(여주, 이천, 포천 등)를 일등급으로 치고, 충청도에서 나는 쌀은 이등급으로 여긴다고 한다. 그러나 나는 충청남도 홍성, 그 중에서도 갈산에서 나는 쌀을 제일로 여긴다. 《동의보감(東醫寶鑑)》에 ‘신토불이(身土不二)’라는 말이 있다. 몸과 땅은 둘이 아니라는 뜻으로, 자신이 사는 땅에서 나는 것을 먹어야 체질에 잘 맞는다는 말이다. 내가 태어나 자란 곳에서 나는 쌀을 먹는 것이 나의 건강에 제일 좋을 것이라는 생각에서 나는 홍성 쌀을 제일로 꼽는다.

 

   고향의 산과 논밭은 내가 어렸을 때 늘 대하던 자연환경이다. 아침에 일어나서 마루에 서면 보이는 것이 넓은 들의 논이었다. 학교에 오갈 때 걷는 오솔길 양편에도, 자동차가 다니던 신작로의 좌우에도 논이 이어졌다. 나는 논의 모습이 계절에 따라 바뀌는 것을 보며 자랐다. 이른 봄에는 두엄을 져다 부어 놓은 모습을 보았고, 얼마 뒤에는 두엄을 흩은 뒤에 물을 대고 쟁기질을 하고, 이어서 써레질한 뒤에 모내기를 하는 모습을 보았다. 모를 심은 뒤에는 벼가 자라는 모습을 보며 즐거워하였고, 벼이삭이 나와 고개를 숙일 때에는 흐뭇한 마음으로 논두렁을 쏘다니며 메뚜기를 잡았다. 겨울철에는 물을 대 놓은 논의 얼음판에서 썰매를 타며 즐거워하였다. 나는 중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두엄을 져 나르는 일, 모를 심는 일, 벼를 베는 일을 하였다. 논은 내 생활의 터전이었고, 삶의 일부였으며, 아름다운 추억을 간직한 공간이다. 이런 논에서 수확한 쌀이 나와 정서적으로 유대감이 있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신 우리 집은 가난하였으므로, 쌀이 넉넉하지 못하였다. 그래서 늘 쌀을 아껴 먹어야 했다. 쌀을 아끼기 위해 겨울철에는 고구마로 한 끼를 때우기도 하였고, 보릿고개를 앞두고는 채소를 넣고 죽을 쑤어서 끼니를 해결하기도 하였다. 이런 과정을 겪다 보니, 자연히 쌀을 소중하게 여기게 되었다. 이런 마음이 내 의식 속에 잠재되었으므로, 아이들을 키울 때에는 가을에 일 년 먹을 쌀을 사다가 방에 쌓아놓아야 마음이 놓이기도 하였다. 이런 쌀을 선물로 받았으니, 어찌 기쁘고 고맙지 않겠는가!

 

  나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고향을 떠날 때 논밭을 다 정리하였다. 고향에는 누님 한 분을 빼고는 가까운 친척이 없다. 그런데다가 학생 때에는 공부하느라고 바빠서, 교수가 된 뒤에는 가르치고 연구하는 일에 몰두하느라 고향에 자주 찾아가지 못하였다. 그러나 마음만은 농사지으며 학교 다니던 때를 잊지 않고 있다. 고향의 산과 들은 따스한 마음을 느끼게 해 주는 아련한 그리움의 공간이고, 아름다운 추억이 서린 곳이다. 그래서 고향의 논에서 수확한 쌀은 몸에 영양을 주는 동시에 고향에 대한 추억과 그리움을 일깨워주는 보약이다. 나의 몸과 정신의 기능을 조절하고, 저항 능력을 키워 주며 기력을 보충해 주는 보약을 보내주는 친구가 있다는 것은 참으로 복되고 귀한 일이다. 이런 친구가 있다는 것에 뿌듯함과 함께 자랑스러움을 느낀다.

 

   서울에서 초등학교를 다닌 지인 중에는 내가 초등학교 동창 모임 갖는 것을 희한한 일로 여기기도 하고, 부러워하기도 한다. 그들은 어린 시절부터 서울에서 살았으니, 서울에서 자리 잡고 사는 데에 큰 어려움이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농촌 출신들은 서울에 와서 자리 잡을 때까지 온갖 시련과 고통을 견디고 이겨내야 했다. 이를 이기지 못한 사람들은 다시 고향으로 내려갔다. 따라서 서울서 자리 잡은 초등학교 동창들은 온갖 역경을 이겨낸 용사들로, 보람과 자부심을 지니기에 부족함이 없는 사람들이다. 이런 사람들이 동창회를 만들어 노년이 되도록 자주 만나며 정을 나누는 것은 자연스럽고, 자랑스러운 일이라 하겠다.

 

   이번에 쌀을 보내준 친구는 초등학교를 졸업한 뒤에 서울에 와서 공부를 하였다. 직장 생활을 하다가 건설회사를 설립하여 많은 어려움과 실패를 겪기도 하였으나 마침내 성공한 의지의 한국인이다. 주관이 뚜렷하고, 생각이 바르며, 다른 사람을 배려하는 마음도 넉넉한 사람이다. 그는 부모님의 유산으로 받은 논에서 생산한 쌀을 혼자 차지하는 것이 미안하다며 고향 친구들에게 나누어 준다. 그의 정겹고 따뜻한 마음이 고맙기 그지없다. 이 친구가 얼마 전부터는 하루에 몇 가지씩 약을 먹고, 지팡이를 짚고 다닌다. 그렇지만 그는 매사를 긍정적으로 생각하며 초등학교 친구들의 모임에 빠지지 않고 참여하고, 소모임을 주관하기도 한다. 이 친구가 건강관리를 잘 하여 오래도록 우정을 나눌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2020. 12.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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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코로나19의 만연으로 사회적 거리두기가 강화된 요즈음 나의 일과는 매우 단조롭다. 지하철을 타야하고, 식당에 가서 점심을 사먹는 일이 부담스러워 연구실에도 자주 나가지 않는다. 그러다 보니, 집에서 책을 읽다가 오후에 집 앞에 있는 응봉공원에 가서 걷는 일이 내 일과의 전부이다.

   숲속에 자리 잡은 공원의 타원형 보행로(둘레 1,100m 가량) 좌우의 평지와 언덕에 있는 나무들의 모습이 달라졌다. 얼마 전까지만 하여도 상록수가 아닌 나무들의 잎은 단풍이 들어 곱더니, 이제는 누렇게 변한 잎을 떨어뜨리고 맨 가지를 드러내기 시작하였다. 내가 공원을 걷는 시간과 새들이 움직이는 시간이 다르기 때문인지 자주 눈에 띄던 까치와 비둘기는 보이지 않고, 참새가 떼를 지어 날아와 먹이를 찾는다.

   오랜만에 참새를 보니, 참으로 반가웠다. 통통하게 살이 찐 참새들은 가벼운 몸놀림으로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먹이를 찾다가는 후루룩 소리를 내며 날아올라 나무에 앉는다. 조금 뒤에는 다시 내려와 가벼운 몸놀림으로 먹이를 찾는다. 이런 참새의 모습을 보니, 귀엽고 사랑스럽다. 어린아이처럼 만져보고 싶은 마음이 들어 가까이 다가가니, 또 후루룩 소리를 내며 날아간다.

   어린아이 주먹보다 작은 참새들이 떼를 지어 내려와 촐싹대는 모습을 보니, 어린 시절에 덫을 놓아 참새를 잡던 일이 떠오른다. 그 시절에는 참새가 참으로 많았다. 숲에서 작은 벌레나 풀씨를 찾아먹던 참새들이 겨울철이면 농가로 찾아들었다. 참새들은 안마당은 물론 토방, 헛간까지 다가오고, 닫힌 문의 틈새로 부엌에 들어가 먹이를 찾기도 하였다.

   이때 나는 참새를 잡을 궁리를 하였다. 참새들이 자주 오는 안마당에 싸리로 만든 발채(짐을 싣기 위하여 지게에 얹는 소쿠리 모양의 물건)를 놓고, 아래쪽은 돌이나 통나무로 눌러놓는다. 발채 밑에는 벼나 쌀을 조금 뿌려 놓고, 발채 머리를 한 뼘쯤 되는 막대기로 받쳐 세운다. 그 막대기의 아래쪽에 가늘고 질긴 실을 매어 방안으로 가지고 들어간다. 그리고는 방문에 붙인 유리에 눈을 대고, 발채 주변을 주시한다. 참새가 날아와 발채 근처를 서성이면, 나는 바짝 긴장되어 가슴이 콩닥거렸다. 정신을 집중하여 그곳을 응시하다가 참새가 곡식을 먹으려고 발채 밑으로 들어가면, 얼른 실을 잡아당긴다. 그래서 발채가 앞으로 수그러질 때 참새 한두 마리가 발채 밑에 깔린다.

   나는 기뻐 소리를 지르며 달려 나가 발채를 조심스레 들어 올리며 참새를 붙잡았다. 참새의 가슴이 팔짝팔짝 뛰는 것이 손에 느껴졌다. 참새의 발에 실을 묶은 뒤에 방안에 놓으면, 이리저리 날아다니다가 멈춘다. 방바닥에 놓으면 이리저리 폴짝폴짝 뛰어다닌다. 이렇게 촐싹거리는 참새의 몸짓은 아주 귀엽고 정겹게 느껴졌다. 나는 참새가 배가 고플 것이라 생각하여 쌀을 물과 함께 주었으나, 통 먹지 않았다. 참새를 빈 방에 두고 하룻밤을 지낸 뒤에 아침에 가보니, 참새는 숨을 거두었다. 나는 죽은 참새가 불쌍하여 눈물을 흘리며 땅에 묻어주었다. 그 뒤로도 한두 번 더 참새를 잡아서 가지고 놀다가 놓아주었다. 그 때 내 손을 벗어나는 참새의 날갯짓은 힘이 넘쳤다.

   참새와 관련된 옛날이야기 중에 「볍씨 한 알」이 있다. 옛날에 부자 노인이 세 며느리에게 선물이라면서 봉투 하나씩을 주었다. 세 며느리가 열어 보니, 볍씨가 한 알씩 들어 있었다. 이를 대수롭지 않게 여긴 첫째와 둘째 며느리는 버리거나 까서 먹었다. 셋째며느리는 곰곰이 생각한 끝에 발채로 새덫을 만들고, 볍씨 한 알을 놓아 참새 한 마리를 잡았다. 그 때 이웃집 노파가 약에 쓴다면서 참새를 달걀 하나와 바꾸자고 하여 바꿨다. 시아버지가 병아리를 깨려고 어미닭에게 알을 품게 할 때, 그 달걀에 표시를 하여 함께 품게 하였다. 그 알에서 깬 병아리가 자라 암탉이 되어 달걀을 낳았다. 달걀을 모아 팔아서 암탉 한 마리를 더 사서 길러 알을 낳게 하였다. 그 뒤에 암탉과 달걀을 팔아 새끼돼지를 사서 기르고, 돼지의 숫자가 늘어나자 이웃에 수내(수나이, 가축을 기르게 하고, 이익을 나눔)를 주어 길렀다. 그 돼지를 팔아 송아지를 사서 기르고, 소가 늘자 이웃에 수내를 주어 길렀다. 그래서 10년 뒤에는 논 열 마지기를 샀다. 이를 본 시아버지는 셋째며느리를 크게 칭찬하고, 재산을 셋째 아들․며느리에게 물려주었다고 한다.

   볍씨 한 알과 작은 참새를 연결시킨 이 이야기는 작은 일에 충실하고, 매사를 계획을 세워 철저히 하라는 교훈을 내포하고 있다. 공원에서 참새 떼를 보는 순간 나는 참새를 잡아 가지고 벗 삼아 놀던 어린 시절의 아련한 추억과 함께 이 옛이야기가 떠올랐다. 이런 추억을 떠올리니, 오랜만에 보는 참새가 더욱 반갑고, 정겹게 느껴졌다.

   참새는 우리 선조들의 생활과 관련이 깊은 새였으므로, 참새와 관련된 관용구나 속담이 많다. 음식을 조금씩 여러 번 먹는 모양을 비유적으로 이를 때에는 ‘참새 물 먹듯’이라고 한다. 그만그만한 것들 가운데에서 굳이 크고 작음이나 잘잘못을 가리려고 할 때나, 자질구레한 말을 하기 좋아하는 사람을 비꼴 때에는 ‘참새가 기니 짧으니 한다.’라고 한다. 욕심 많은 사람이 이끗(재물의 이익이 되는 실마리)을 보고 가만있지 못하거나, 자기가 좋아하는 곳은 그대로 지나치지 못함을 비유적으로 말할 때에는 ‘참새가 방앗간을 그저 지나랴’라고 한다. 아무리 약한 것이라도 너무 괴롭히면 대항한다는 것을 말할 때에는 ‘참새가 죽어도 짹 한다.’라고 한다. 몸은 비록 작아도 능히 큰일을 감당함을 비유적으로 이를 때에는 ‘참새가 작아도 알만 잘 깐다’라고 한다. 실력이 없고 변변치 아니한 무리들이 아무리 떠들어 대더라도 실력이 있는 사람은 이와 맞붙어 함께 다투지 아니한다는 뜻을 드러낼 때에는 ‘참새가 아무리 떠들어도 구렁이는 움직이지 않는다’라고 한다. 참새가 작다는 것을 전제로 하여 만든 이 말들은, 참새가 우리 조상들의 삶과 밀접한 관계를 맺으며 살아왔음을 말해 준다.

   참새는 텃새로 우리의 생활과 밀접한 관계를 맺으며 살아왔다. 가을에는 농작물에 피해를 주지만, 여름에는 해로운 곤충을 잡아먹어 사람에게 도움을 주는 이로운 새이기도 하다. 어린 시절에 농촌에서 정겹게 보던 참새를 서울의 공원에서 보니 감회가 새롭다. 요즈음에는 술꾼들이 즐기던 ‘참새구이’가 사라져서 다행이다. 참새가 도시에서도 사람과 친밀하게 지낼 수 있도록 잘 보호하였으면 좋겠다.(2020. 12.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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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며칠 전에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원당동에 있는 고려 제34대 공양왕릉(恭讓王陵)을 찾았다. 이 능은 쌍릉 형식이며, 두 봉분 앞에 ‘고려 공양왕’, ‘순비 노씨(順妃盧氏)’라는 묘표가 있다. 두 봉분 앞 가운데에 조선 고종 때 세운 ‘고려공양왕고릉(高麗恭讓王高陵)’이란 표석이 있고, 그 앞에 석등과 석호·문인석·무인석이 서 있다. 조금 더 앞에는 ‘개와 먹이그릇’ 석상이 있고, 아래쪽에 작은 연못이 있다. 이 능은 《조선왕조실록》, 고양군지 등의 기록을 근거로, 1970년 2월 28일에 사적 191호로 지정되었다. 고양시 향토문화보존회에서는 고양시의 지원을 받아 매년 공양왕고릉제를 봉행하고 있다. 왕릉 뒤에는 공양왕의 외손인 정(鄭)씨와 신(申)씨의 무덤들이 있다.

   공양왕릉은 강원도 삼척시 근덕면 궁촌리에도 있다. 석축으로 굽을 돌린 무덤 세 기 중 큰 것은 공양왕의 능이고, 작은 것은 두 아들의 무덤이라고 한다. 공양왕은 삼척에서 교살되어 이곳에 묻혔다가 고양으로 옮겨갔다고도 한다. 이 무덤에 관하여는 민간에서 구전되어 오다가 현종 3년(1662)에 허목이 쓴 척주지와 철종 6년(1855)에 김구혁이 쓴 척주선생안에 기록되었다. 이 능은 조선 현종 3년 가을에 삼척 부사 이규현이 개축하였고, 그 뒤에 지방 유지들이 봉축(封築)하였다. 1995년 9월 18일에 강원도 기념물 제71호로 지정되었다. 이곳 사람들은 3년마다 제를 올려 공양왕을 추모하고 있다.

  고려 말에 위화도회군을 계기로 실권을 장악한 이성계 중심의 개혁세력은, 공민왕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우왕과 창왕이 왕씨가 아니고, 요승 신돈의 자식이라 하여 폐위하고, 강릉과 강화로 쫓아냈다. 그리고 1389년에 20대 신종의 6대손인 왕요(王瑤)를 왕위에 앉히니, 그가 고려의 마지막 왕인 공양왕이다.

  공양왕(1345~1394)은 왕손이긴 하지만, 왕위 승계에서 멀어진 지 오래인지라 왕위에 뜻을 두지 않고 안락한 생활을 하였다. 그런데 그가 45세 되었을 때, 개혁세력인 이성계 쪽에서 왕위에 오를 것을 제의하였다. 그는 처음에는 사양하였으나, 그들의 강권을 뿌리치지 못해 왕위에 올랐다. 왕좌는 수년간 온갖 노력을 하고, 수단과 방법을 다 동원하고서도 뜻을 이루지 못하는 경우가 많은, 오르기 힘든 자리이다. 그런데 그는 뜻하지 않았는데도 절대 권력을 가진 지존(至尊)의 자리에 올랐다. 이것은 영광스럽고 복된 일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행운이라기보다는 비운의 시작이었다.

  개혁세력은 전왕과 고려 충신들을 숙청하는 한편, 이성계의 공적을 선양하려 하였다. 이것이 명분과 민심을 얻어 역성혁명(易姓革命)을 완성하는 길이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이 일을 대신해 줄 해결사로 왕요를 선택하여 왕좌에 앉혔다. 조선왕조실록 <태조실록>을 보면, 신흥세력의 윤회종(尹會宗)이 우왕과 창왕의 목을 베야 한다는 소(疏)를 올린다. 그러자 힘이 없는 공양왕은 이를 허락하여 왕명으로 목을 베게 하였다. 그리고 이성계의 공적을 기리는 교지를 내리고, 이성계를 고려 개국 공신인 배현경의 예로 중흥공신에 책록한다. 또 이방원이 고려 충신 정몽주를 살해한 일도 적당히 얼버무려 매듭짓는다. 이처럼 개혁세력은 허울뿐인 공양왕의 왕명을 빙자(憑藉)하여 반대파들을 처단하였다. 이것은 자기들의 손에 피를 묻히지 않고 반대파를 척결하는 차도살인(借刀殺人)의 음험한 계략이었다.

  공양왕은 신변에 위험이 닥칠 것을 예감하고, 이성계와 동맹을 맺어 안전을 도모하려고 하였다. 그래서 사예(司藝) 조용(趙庸)을 시켜 이성계와 맹약을 맺는 문서의 초안을 잡게 하였다. 그리고 이성계의 집으로 거둥하여 술자리를 베풀고, 이성계와 더불어 동맹을 맺으려고 하였다. 그러나 세력을 굳히고, 장애물을 완전히 제거한 이성계는 1392년 백관의 추대를 받아 수창궁에서 왕위에 올랐다. 이렇게 되니, 공양왕은 토끼를 잡은 뒤의 사냥개 신세가 되었다. 그는 곧바로 폐위되었고, ‘공양군(恭讓君)’으로 강등되었다. 그리고 원주와 간성을 거쳐 삼척에 안치(安置)되었다가 두 아들과 함께 교살되었다.

  개혁세력은 공양왕을 앞세워 우왕과 창왕을 죽이고, 고려 충신들을 제거하였다. 그런 뒤에 공양왕을 두 아들과 함께 죽여 제대로 된 무덤도 없는 비운의 주인공으로 만들었다. 이를 미안하게 생각한 조선 태종은 예조의 건의를 받아들여 고양에 있는 그의 무덤에 ‘고려공양왕고릉’이라는 능호를 내렸다. 그 뒤에 세종은 안성의 청룡사에 봉안했던 공양왕의 어진(御眞)을 고양의 무덤 곁에 있는 암자에 이안(移安)하라고 명하였다. 이것은 태조 이성계가 공양왕을 이용만하고 버린 것에 대한 미안함을 조금이나마 가볍게 하려는 뜻에서 취한 조치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고양의 공양왕릉에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해 온다. 공양왕은 개혁세력이 자신을 죽일 것을 예감하고, 몰래 궁을 빠져나와 남쪽으로 도망쳤다. 산속에서 불빛을 보고 찾아가 작은 절에 이르렀다. 그가 왕임을 알아차린 스님은 크게 놀라면서, 동쪽으로 십리 쯤 떨어진 곳에 있는 누각에 가 있으라고 하였다. 왕과 왕비는 그 누각에서 스님이 날라다 주는 음식으로 연명하였다. 여기에서 ‘식사동(食寺洞)’이란 마을 이름이 생겨났다. 어느 날, 이웃사람이 보니 왕이 귀여워하던 청삽살개가 연못가에서 한참을 짖은 뒤에 물속으로 들어가 나오지 않았다. 이상히 여겨 연못의 물을 품고 보니, 왕과 왕비가 죽어 있었다. 사람들이 애석히 여겨 두 사람을 땅에 묻고, 봉분을 만들어 주었다. 그리고 무덤 앞에 충성과 의리를 지킨 개의 석상을 만들어 세웠다고 한다.

  공양왕의 비극적인 최후를 안타까워하는 백성들의 마음이 담긴 이 이야기는 세 가지 의문점을 풀어 준다. 첫째 이곳에 공양왕릉이 있게 된 내력을 설명해 준다. 둘째 다른 왕릉과 달리 문인석과 무인석 앞에 개의 석상을 세워놓은 까닭을 해명해 준다. 셋째 무덤 아래에 작은 연못이 있는 이유를 말해 준다.

  권좌에 뜻이 없던 공양왕은 이성계 세력에 떠밀려 왕위에 올라 약 3년 동안 역성혁명을 꾀하는 그들의 꼭두각시가 되어 반대 세력을 척결하는 해결사 역할을 하였다. 악역을 마친 그는 두 아들과 함께 죽임을 당하는 비운을 맞았다. 무덤이 둘인 것도 그의 비운을 말해 준다. 세월이 흐르고 보니, 그를 이용하던 세력도, 이용을 당한 그도 한줌의 흙이 되고 말았다. 참으로 무상한 것이 정치권력이다. (2020. 11.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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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람이나 사물을 부르는 말을 ‘호칭어(呼稱語)’ 또는 ‘부름말’이라고 한다. 우리말의 호칭어는 다양하므로, 바로 알고 써야 한다. 호칭어의 뜻과 용례를 바로 알고 쓰는 사람을 보면, 그에게서 교양미를 느끼게 된다. 그러나 이를 잘못 쓰는 사람의 말이나 글을 대하게 되면 신경에 거슬리고, 그 사람의 어휘력 부족에 안타까움을 느끼게 된다. 이런 경우는 잊히지 않고 오래 기억에 남는다. 내 기억에 남은 여러 사례 가운데 몇 가지만 적어본다.

   얼마 전에 유명인사와 그의 친족이 관련된 사건이 신문과 방송에 오르내린 적이 있다. 그 때 언론은 ‘유명인사 사촌형의 아들’을 ‘5촌 조카’라고 하였다. 사촌형의 아들을 이르는 ‘당질(堂姪)’ 또는 ‘종질(從姪)’이라는 두 음절의 말이 있는데, 왜 언론에서는 그 말을 쓰지 않고 ‘5촌 조카’라고 쓰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형제의 아들딸은 ‘조카[또는 질아(姪兒)]’라고 하고, 사촌형제의 자녀는 ‘당질’이라고 한다. 아버지의 형제자매는 ‘백부(또는 큰아버지)․숙부(또는 작은아버지)’, 고모이다. 아버지의 사촌형제자매는 당숙(堂叔), 당고모(堂姑母)이다. 나와 아버지 형제의 자녀는 종형제로 4촌이고, 아버지 사촌형제의 자녀는 재종(再從)으로 6촌이다. 남자는 누이의 아들딸을 생질(甥姪)이라 하고, 여자는 언니나 여동생의 아들딸을 이질(姨姪)이라고 한다. 이렇게 적절한 호칭어가 있는데, 요즈음에는 이런 말을 잘 쓰지 않고 길게 풀어서 말한다. 한자말이어서 어렵기도 하지만, 핵가족 시대가 되어 이런 호칭어를 쓸 친족이 없기 때문에 잊혀가는 것 같아 씁쓸한 느낌이 든다.

   얼마 전에 온라인 서비스(SNS)에 올린 글 중에 ‘저의 부인이 소천하였습니다’라는 글이 눈에 띄었다. 나는 의아하여 다시 들여다보았으나, 분명 그렇게 적혀 있었다. ‘부인(夫人)’이란 말은 ‘남의 아내를 높여 이르는 말’이다. 예전에는 사대부 집안의 남자가 자기 아내를 부인이라고 부르기도 하였지만, 남에게 말할 때는 쓰지 않았다. 부인은 고대 중국에서는 천자의 비(妃) 또는 제후의 아내를 이르던 말이다. 고려ㆍ조선 시대에는 외명부의 봉작(封爵) 가운데 하나로, 남편이나 아들의 품계에 따라 그 아내와 어머니를 봉하였다. 이런 점을 따져 볼 때 다른 사람에게 자기 아내를 이르는 말로 부인이라고 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 ‘저의 부인’이라기보다는 ‘저의 아내(처, 내자)’라고 쓰는 것이 좋았을 터인데, 황망 중에 실수를 하여 여러 사람에게 교양 없음을 드러내고 말았다.

   호칭어를 잘못 쓴 일을 이야기하다 보니, 어느 교회에서 담임목사의 목회 30주년 기념식을 할 때의 일이 떠오른다. 식순에 그 자리에 참석하신 담임목사의 아버님께 꽃다발을 드리는 순서가 있었다. 그 때 기념식을 진행하는 부담임목사가 “다음은 담임목사님의 ‘선친(先親)’께 꽃다발을 드리는 순서입니다.”라고 말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나는 등에서 땀이 흐를 정도로 민망하고, 얼굴이 화끈거렸다. 선친이란 ‘남에게 돌아가신 자기 아버지를 이르는 말’이다. [남에게 돌아가신 자기 어머니를 이를 때에는 ‘선비(先妣)’라고 한다.] 그러므로 제삼자인 젊은 목사가, 살아계셔서 기념식에 참석하신 담임목사의 아버지를 ‘선친’이라고 하는 것은 아주 부적절한 표현이다. 진행을 맡은 젊은 목사는 ‘선친’이란 말을 남의 아버지를 높여 부르는 말로 알았던 모양이다. 모르면 용감하다는 말이 헛말이 아님을 느끼게 하였다. 담임목사의 아버지를 높여 말하려면, 한자말로 ‘목사님의 춘부장’이라고 하든지, 쉬운 말로 ‘목사님의 아버님(또는 어르신)’이라고 하였으면 좋았을 것이다.

   TV에서 대정부 질문에 나선 국회의원이 “00당 00지역구 국회의원 ‘000 의원’입니다.”라고 자기소개 하는 것을 보았다. 또, 목사가 여러 사람이 모인 자리에서 자기소개 하기를 “00교회 담임목사 ‘000 목사’입니다.”라고 하는 말을 들었다. 한국인은 상대방을 높이는 뜻에서 이름 뒤에 직명을 붙이고, 끝에 ‘님’자를 붙여 부른다. 이것은 상대방을 높여 부르려는 마음에서 생긴 것으로, 오래 전부터 전해 오는 관습이다. 그러나 자기 자신을 말할 때에 위에 적은 국회의원이나 목사처럼 자기 이름 뒤에 직명을 말하면, 자기 스스로를 높이는 것이 되어 실례가 된다. 따라서 남에게 자기를 말하면서 직명을 밝힐 필요가 있을 때에는 직명을 앞에, 이름을 뒤에 두어 ‘의원 000’, ‘목사 000’라고 해야 자기를 낮추는 겸손한 표현이 된다. 상대방이 직위를 알 경우에는 직명은 생략하고 이름만 말하면 된다. 이를 지키지 않으면 겸손을 모르는 교만한 사람으로 인식되기 쉽다.

   호칭어는 자기의 말이나 글이 언론에 노출되는 경우는 말할 것도 없고, 온라인 서비스에 올리는 글에도 잘못 쓰는 일이 없어야 한다. 호칭어를 잘못 사용하면, 자기의 무교양을 드러냄은 물론, 국어 실력을 의심받게 된다. 그에 더하여 대인관계가 불편하게 될 수도 있다. 그러므로 호칭어의 뜻과 용례를 바로 알고 쓰려는 노력을 게을리 해서는 안 된다. 이런 노력은 올바른 국어생활을 위해, 원만한 인간관계 지속을 위해 필요한 일이다. 잘 모를 때에는 알 만한 사람에게 묻거나, 국어사전을 찾아보며 익히면 된다. 호칭어를 바르게 알고 쓰는 것을 사소한 일이라고 무시하지 말고, 늘 관심을 기울여 실수함이 없도록 해야겠다. (2020. 11.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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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10월 둘째 주에 아내와 함께 경기도 오산시 지곶동에 있는 독산성(禿山城)을 찾았다. 그 안에 세마대(洗馬臺)와 보적사(寶積寺)가 있다. 사적 140호로 지정된 이 성은 둘레가 약 3.6㎞인데, 현재 약 400m 정도의 성벽과 성문 다섯 곳이 남아 있다. 백제 시대에 쌓은 이 성은 임진왜란 때 권율(權慄, 1537∼1599) 장군이 이곳에서 왜적과 싸워 크게 이긴 것을 계기로 그 중요성이 부각되었다.

  늦은 나이에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의주목사로 있던 권율은 선조 25(1592)년 4월에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광주목사로 자리를 옮겼다. 임금이 북으로 피난을 떠나고, 한양 도성이 함락되자, 전라도 방어사(防禦使) 곽영(郭嶸) 휘하에 있던 권율은 한양 수복을 위해 군사를 이끌고 북상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전라도 순찰사 이광(李洸)이 수원과 용인에서 무모한 공격을 하다가 대패하자, 뜻을 이루지 못하고 광주로 돌아왔다.

   광주에 돌아온 권율은 지원병을 모집하여 1,500여 명의 군사를 이끌고 북상하다가 금산의 이치(梨峙)에서 고바야가와 다카카게(小早川隆景)가 이끄는 일본 정예군과 싸워 크게 이겼다. 그 공으로 전라도 관찰사로 승진한 그는 일만여 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도성을 수복하기 위해 북진하던 중 독산성에 주둔하게 되었다.

  권율은 훈련도 되지 않았고, 전투 경험도 부족한 군사를 이끌고 공격적인 전투를 벌일 수는 없었다. 그래서 독산성의 지리적 이점을 살려 성을 지키며 지구전을 펼쳤다. 일본군 총사령관은 후방이 차단되어 남방의 일본군과의 연락이 단절될 것을 우려하여 가토오 기요마사(加藤淸正)에게 독산성 공격을 명하였다. 독산성을 포위한 가토오 기요마사는 성 안에 물이 부족한 것을 알고, 성안으로 흐르는 물줄기를 끊은 뒤에 물 한 지게를 성안으로 들여보내며 조롱하였다.

  왜군의 의도를 꿰뚫어 본 권율 장군은 군사들을 조련하는 한편, 병사들에게 가장 높은 곳에 백마를 세워놓고서 흰 쌀을 끼얹으라 하였다. 멀리서 이를 지켜본 왜군은 성 안에 물이 부족하기는커녕 말을 씻길 만큼 넉넉하다고 판단하였다. 이에 기가 꺾인 왜군이 철수하기 시작하자, 그는 퇴각하는 왜군을 추격하여 수많은 왜병을 살상하였다. 권율 장군이 독산성에서 승리하자 조선군의 사기는 크게 올랐고, 각 지역의 의병들이 권율 장군에 합류하였다. 이러한 기세를 업은 권율 장군은 행주산성으로 옮겨가서 왜군과 싸워 큰 승리를 거두었다. 이 싸움이 그 유명한 행주대첩(1593)이다.   

  중국 춘추 시대의 병법가 손무(孫武)는 《손자병법》에서 ‘전쟁은 속임수[兵者詭道也]’라고 하였다. 그의 후손인 손빈(孫矉)은 손자병법 36계에서 ‘무중생유(無中生有, 없는 것에서 새로운 것을 만들어냄)’, ‘수상개화(樹上開花, 나무에 꽃을 피게 함)’의 전술을 말하였다. 왜군을 속여 스스로 물러나게 한 권율 장군의 세마전술은 고도의 심리전으로, 손자병법의 계책을 능가하는 지혜로운 전술이었다. 왜군이 물러간 다음에 선조는 이곳에 ‘세마대’라는 장대를 지어 독산성의 승리를 기리게 하였다고 한다.

  이러한 기만전술은 해전에서도 보인다. 이순신 장군은 유달산 노적봉의 바위를 이엉으로 덮어서 노적가리처럼 꾸몄다. 그리고 주민들에게 군복을 입혀서 노적봉 주위를 계속 돌라고 하여 마치 대군이 있는 것처럼 보이게 하였다. 또, 영산강에 백토가루를 뿌려 바다로 흘러드는 물줄기가 쌀뜨물로 보이게 하였다. 이를 본 왜적들은 조선군은 군세가 대단하고, 군량이 넉넉한 것으로 알고 후퇴하였다고 한다. 당시 노적봉을 돌던 전술은 훗날 문화예술로 승화되어, ‘강강술래’로 발전하였다. 이것은 1954년에 발행된 초등학교 국어 3-2 교과서에 <8. 노적봉과 영산강>이라는 제목으로 수록되었으므로, 나이든 사람에게는 익숙한 이야기이다.

  권율 장군의 세마전술은 임진왜란의 전세를 바꿔 놓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그리고 독산성이 도성 수비에 매우 중요한 전략적 요충지임을 일깨워 주었다. 그래서 임진왜란 중인 선조 27년(1594)에 경기도 관찰사 유근은 이 성을 고쳐 쌓았고, 임란 후인 선조 35년(1602)에 방어사 변응성은 석성으로 고쳐지었다. 정조의 아버지인 사도세자는 온양온천에 행차했다가 환궁하던 중 장마 때문에 독산성에서 하루를 묵고 갔다. 그로부터 30년 뒤 풍수지리 문제로 독산성을 없애야 한다는 논란이 일어났다. 효심이 깊었던 정조는 아버지의 뜻을 기리기 위해 이를 무시하고, 정조 16년(1792)에 새로 짓는 것과 비슷하게 큰 규모로 공사하여 지금의 모습을 갖추었다.

  독산성에서 가장 높은 곳에 있던 장대는 일제강점기와 6․25를 거치면서 파괴되었다. 지금 보는 팔작지붕의 세마대는 1957년에 새로 지은 것이다. 세마대의 남쪽과 북쪽에 ‘洗馬臺’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 그 중 남쪽의 현판은 이승만 대통령이 쓴 것이라고 한다. 이곳에서 이승만 대통령의 필적을 보니, 감회가 새롭다.

  독산성 동문 안의 세마대 동쪽에는 보적사가 있다. 이 절은 백제 아신왕 10년(401)에 전승을 기원하기 위하여 세웠다고 한다. 이 절에는 “옛날에 노부부가 가난을 이기지 못하여 죽기로 결심하고, 남아 있는 쌀 두 되를 부처님께 공양하고 기도한 뒤에 집에 돌아와 보니, 곳간에 쌀이 가득 하였다”는 이야기가 전해 온다. 이런 일이 있은 뒤에 열심히 공양하면 보화가 쌓이는 신통력 있는 절이라는 소문이 퍼져서 절 이름을 ‘보적사’라고 하였다고 한다.

  나는 세마대와 보적사를 둘러본 뒤에 동문에서 출발하여 성곽을 따라 걸으면서 사방을 살펴보았다. 오산, 수원, 화성에 걸쳐 펼쳐진 평야의 한 가운데에 우뚝 솟은 산위에 있어 사면이 환히 내려다 보였다. 군사에 문외한인 내가 보아도 이 성은 전략적 요충지인 것을 알겠다.  

  독산성에서 보인 권율 장군의 세마전술은 보통사람의 상식을 뛰어넘는 지혜에서 나온 고도의 지략이다. 문과에 급제하여 문신으로 출사한 권율이 장군의 칭호를 얻고, 혁혁한 전공을 세울 수 있었던 것은 뛰어난 전략과 전술, 원만한 대인관계, 탁월한 지도력 등을 갖추고 있었기 때문이라 하겠다. 이런 인물은 현대에도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이런 지도자가 출현하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2020. 10. 30.)

독산성 동문
세마대
보적사 대웅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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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금년 봄은 코로나19 감염증 때문에 사회적 거리두기를 하고 있다. 그래서 집 가까이에 있는 공원을 걷거나, 집 뒤에 있는 금호산을 거쳐 매봉산 팔각정까지 다녀오는 일 외에는 현관문을 나서는 일이 없게 되었다. 이렇게 답답한 생활이 두 달째 계속되다 보니, 무미건조한 일상에서 탈출하기 위한 궁리를 하게 되었다. 그래서 사람이 적게 모이고, 멀지 않은 곳으로, 평소에 바쁘다는 핑계로 가지 못한 곳이 어디인가를 생각해 보았다.

  그 때 문득 떠오른 곳이 최영 장군 묘다. 내 고향인 충남 홍성에 ‘최영 장군 활터’가 있고, 애마인 ‘금말’이 화살보다 늦게 달린 줄 알고 목을 벤 직후에 자기의 실수인 것을 알고 울면서 말을 묻었다는 ‘금마총(金馬塚)’이 있다. 그리고 최영 장군의 사당인 기봉사(奇峰祀)가 있다. 나는 이런 곳은 찾아가 보았으나, 묘는 찾아보지 못하여 아쉬운 마음을 간직하고 있던 터라 이곳을 탐방하기로 하였다.

  지난 4월 2일 오전에 아내와 함께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대자동에 있는 최영 장군의 묘를 찾았다.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최영 장군 묘소 입구’라고 쓴 표석에 표시된 방향으로 계단을 올라갔다. 길 좌우에 몇 그루씩 모여서 피어 있는 진달래가 나를 반겨주었다. 그곳을 둘러보는 동안 7~8명의 탐방객도 보았다. 외출을 자제하는 이때에 최영 장군을 추모하기 위해 찾아오는 분들이 있는 것이 귀하게 여겨졌다.

  장군 묘는 단분(單墳)으로, 부인 문화 유씨와 합장한 묘였다. 곡장(曲墻)을 두른 봉분의 바로 앞에는 혼유석(魂遊石)ㆍ상석ㆍ향로석이 있고, 그 좌우와 뒤쪽에 묘비가 하나씩 서 있다. 묘비 앞에는 망주석과 문인석 각 한 쌍이 배열되어 있다. 이 묘의 뒤편의 한 계단 위에는 장군의 부친 최원직(崔元直)의 묘가 있다.

  최영(1316~1388) 장군은 동주(凍州, 강원도 철원의 옛 이름) 최씨로, 강원도 철원에서 태어났다고 하기도 하고, 충남 홍성에서 태어났다고 하기도 한다. 그는 공민왕 1(1352)년 조일신의 난을 평정하고, 1358년 400여 척의 배를 타고 오예포에 침입한 왜구를 격파한 것을 비롯하여 왜구 토벌에 큰 공을 세웠다. 1361년에는 개경까지 침입한 홍건적을 물리치고 수도를 수복하였다. 이후 여러 차례에 걸쳐 왜구의 침입을 격퇴하고, 반란을 평정하였다. 그래서 고려 백성들의 열렬한 지지와 존경을 받았다. 1384년 문하시중(門下侍中)을 거쳐 판문하부사(判門下府使)가 되었다. 명나라가 청령위(鐵嶺衛)를 설치하고 그 이북, 이서, 이동의 땅을 요동에 예속시키려 하자, 요동 정벌을 단행하였다. 그러나 이성계의 위화도 회군으로 뜻을 이루지 못하고, 개성에서 이성계 일파에게 붙잡혔다. 이후 고양ㆍ마산ㆍ충주 등지에 유배되었다가 1388년에 개성에서 처형되어 이곳에 안장되었다.

  최영 장군은 고려를 지키지 못한 한을 품고, 죽임을 당하였다. 그는 처형당할 때 ‘만약 내가 평생 동안 한 번이라도 사사로운 욕심을 품었다면 내 무덤에 풀이 날 것이고, 그렇지 않다면 풀이 나지 않을 것’이라고 하였다고 한다.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의 기록에 따르면, 실제로 그의 묘에 풀이 나지 않아 ‘적분(赤墳)’이라 불렀다고 한다. 사람들은 그의 무덤에 풀이 나지 않는 것은, 그가 사심이 없었음을 증명해 주는 것이라고 믿었다. 그의 묘에는 1970년대까지 풀이 나지 않았으나, 호우로 인한 흙의 유실을 염려한 후손들이, 흙과 잔디를 계속 갈아줘서 1976년부터 풀이 자라기 시작했다고 한다. 600여 년이 지나서야 원한이 풀려서 풀이 자라게 되었나 보다.

  장군의 억울한 죽음을 애통해 하던 민중들은 그를 추앙하는 마음과 그가 생전에 이룬 영웅적인 업적이 뒤엉키면서 상승작용을 일으켜 그를 신격화하게 되었다. 그래서 장군의 위패와 초상을 모시는 집을 짓고, 영검한 신으로 받들기 시작하였다. 그래서 개성 덕물산의 장군당을 비롯하여 충남 홍성 홍북면 노은리, 제주시 추자면 대서리, 제주시 애월읍 하귀리, 경남 통영시 사량면 금평리 등에 사당이 생겼다. 전국의 강신무(降神巫)들은 내림굿을 할 때 대부분 최영(최일이라고도 함) 장군신이 내린다고 한다.

  무당에게 내리는 인격신(人格神)은 김부 대왕신(신라 경순왕), 최영 장군신, 남이 장군신, 임경업 장군신 등 원한을 품고 죽은 인물들이다. 그 중 최영 장군신의 영검이 가장 뛰어나다고 한다. 이것은 민중의 한과 기대와 열망이 크게 응집된 때문이라 하겠다. 무당에게 내린 최영 장군신은 그 무당의 몸주(무당의 몸에 처음으로 내린 신. 무당은 그 신을 주신으로 모신다)가 되어 가장 낮은 곳․아픈 곳․어두운 곳에 있는 서민들의 상처와 아픔을 위로하고, 문제를 해결해 주는 기능을 해 왔다.

  이성계는 역성혁명(易姓革命)에 방해가 되는 최영을 반역자로 몰아 처형하였다. 그러나 조선을 건국한 지 6년 만에 최영 장군에게 ‘무민(武愍)’이라는 시호를 내려 넋을 위로하였다. 이성계도 최영의 사심 없는 충성심만은 믿어 의심하지 않았던 모양이다. 최영 장군은 ‘황금을 보기를 돌같이 하라’는 아버지의 가르침을 평생의 생활신조로 삼고, 이를 실천하며 청렴개결(淸廉介潔)한 삶을 살았다고 한다.

  최영 장군 부자의 묘가 있는 대자산 주변에는 조선 왕족들의 묘가 여럿 있다. 장군의 묘 아래쪽에 성녕대군(誠寧大君) 이종(李種, 태종의 4남, 세종대왕의 동생), 경안군(慶安君) 이회(李檜, 인조의 손자, 소현세자의 3남), 임창군(臨昌君) 이혼(李焜, 인조의 증손, 경안군의 장남), 임성군(臨城君) 이엽(李熀, 경안군의 차남, 임창군의 동생)의 묘가 자리 잡고 있다. 그리고 그 건너편 산에 경혜공주(敬惠公主, 문종의 장녀, 단종의 누이) 내외와 성종의 서자 이성군(利城君) 이관(李慣)의 묘가 있다. 조선 왕족들이 최영 장군을 호위하고 있는 것 같아 아이러니하다.

   나는 최영 장군의 묘를 살펴보고 내려오면서 최영 장군이 지은 시조를 읊조려 보았다. “녹이상제(綠駬霜蹄, 빠르고 좋은 말. ‘녹이’와 ‘상제’는 모두 중국 주나라 목왕이 타던 준마) 살찌게 먹여 시냇물에 씻겨 타고/ 용천설악(龍泉雪鍔, 용천은 보검의 이름이고, 설악은 날카로운 칼날)을 들게 갈아 둘러메고/ 장부의 위국충절(爲國忠節)을 세워 볼가 하노라.” 이 시는 장군의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과 패기를 느끼게 한다.

  지금은 최영 장군 같이 사심 없이 나라를 위해 일하고, 일신을 바칠 각오를 가진 패기 있는 인물의 출현이 기대되는 시기이다. 하루 속히 코로나 감염병 사태가 진정되어 많은 사람들이 최영 장군 묘소를 참배하면서 장군을 추모하고, 애국정신을 본받았으면 좋겠다.(2020. 4.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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