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부터 코로나 19의 창궐로 사회적 거리두기가 강화되고 있으므로,관광명소나 유적지 중에서 사람이 비교적 적게 모이는 곳을 골라 탐방하고 있다.지난3월10일에는 경기도 파주에 있는 장릉(長陵, 16대 인조와 인열왕후의 무덤)을 둘러본 뒤에 파주시 파평면 화석정로에 있는 화석정(花石亭)을 찾았다.
화석정은 원래 고려 말기의 문신 길재(吉再)가 조선 개국 후에 벼슬을 버리고 와서 후학을 양성하던 곳이다. 그가 세상을 떠난 뒤에 그를 추모하여 이곳에 서원을 세웠다고 한다. 그 후 폐허가 되었던 이곳에 율곡(栗谷) 이이(李珥) 선생의 5대조인 이명신(李明晨) 선생이 세종 25(1443)년에 정자를 세웠다. 그리고 성종 9(1478년)년에 이숙함(李淑瑊) 선생이 화석정(花石亭)이라 명명하였다. 이 정자를 율곡 선생이 중수하여 벼슬에서 물러난 뒤에 이곳에서 여생을 보내면서 시를 지으며 학문을 논하고, 이(理)를 연구하였다. 그 때에 중국의 칙사 황홍헌(黃洪憲)이 율곡 선생을 찾아와 경관이 빼어난 이 정자에서 시를 읊으며 놀았다고 한다.
화석정은 임진강가 절벽 위에 장단 쪽을 향하여 서 있다. 정자에서는 바로 밑을 흐르는 임진강을 볼 수 있다. 난간에 기대어 바라보면 서울의 삼각산과 개성의 오관산이 아득하게 보인다. 전에는 화석정 주변에 느티나무가 울창하였고, 그 아래 임진강에는 밤낮으로 배들이 오락가락 하였으며, 밤에는 고기 잡는 배의 등불이 호화찬란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지금은 바로 밑에 도로가 나 있고, 그 아래에 철조망이 임진강을 가로막고 있다. 정자 주변에는 느티나무 몇 그루만이 서 있어 옛날의 정취는 느낄 수 없다.
정자에는 ‘화석정중건상량문’을 비롯하여 여러 개의 현판이 걸려 있다. 현판 중에는 율곡 선생이 여덟 살 때(1543년) 지었다는 「화석정시」도 결려 있다. 이 시는 정자 옆에 세워놓은 돌비석에도 번역문과 함께 적혀 있다.
林亭秋已晩 숲 속 정자엔 가을이 이미 깊어
騷客意無窮 시인의 시상이 끝이 없구나.
遠水連天碧 멀리 보이는 강물은 하늘에 잇닿아 푸르고
霜楓向日紅 서리 맞은 단풍은 해를 향해 붉구나.
山吐孤輪月 산은 외로운 둥근 달을 토해 내고
江含萬里風 강은 만리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머금었네.
塞鴻何處去 변방의 기러기는 어디로 날아가는고
聲斷暮雲中 울고 가는 소리 저녁 구름 속으로 사라지네.
이 시는 주변의 아름다운 풍광과 시인의 정취를 잘 드러낸다. 율곡 선생이 여덟 살 때 이런 시를 지었다니, 어린 시절부터 시적 감각이 뛰어났음을 알 것 같다.
율곡 선생은 틈이 날 때마다 정자의 마루와 기둥을 기름걸레로 닦도록 하였다. 율곡이 세상을 떠난 지 8년 뒤에 임진왜란이 일어났다. 선조는 북쪽으로 피난하던 중 임진강가에 이르렀다. 그런데 폭풍우가 심해 앞을 볼 수 없었다. 그 때 임금을 모시던 이항복이, 어려움이 닥치면 열어보라고 한 율곡 선생의 봉서 생각이 났다. 그 봉서를 열어보니, “화석정에 불을 지르라”고 씌어 있었다. 기름을 잘 먹은 화석정에 불이 붙자, 불길이 솟아올라 나루 근처가 대낮같이 밝혀졌다. 그 불빛 덕에 선조가 무사히 강을 건넜다고 한다.
이 이야기에는 율곡의 예지(叡智, 사물의 이치를 꿰뚫어 보는 지혜롭고 밝은 마음)가 잘 드러난다. 나는 이 이야기의 현장을 보고 싶어 전에 찾아왔던 이곳을 오늘 다시 찾아왔다. 정자 앞에 잠시 눈을 감고 서서, 당시의 상황을 떠올려 보았다. 도성을 버리고 파천(播遷)하는 임금과 수행하는 신하들의 마음은 몹시 급하고 당황하여 허둥지둥 이곳까지 왔을 것이다. 그런데 임진강이 앞을 가로막고 있고, 거기에 더하여 폭풍우가 겹쳐 좌우를 분간할 수 없으니, 참담하기 짝이 없었다. 이 때 율곡 선생이 임종 무렵에 남긴 봉서대로, 그가 사랑하며 아끼던 화석정에 불을 질러 파천길을 밝히게 하였다고 한다. 율곡 선생은 자신의 사후에 임금이 이 길로 파천할 것을 예측하고, 정자의 마루와 기둥에 기름칠을 하고, 불을 지르라고 하는 봉서를 남겼던 것이다. 율곡 선생의 충성된 마음과 신묘한 예지에 놀라움과 감탄을 금할 수 없다.
명나라와 일본의 움직임을 살핀 율곡 선생은, 일찍이 경연에서 ‘10만의 군사를 양성하여 앞으로 뜻하지 않은 변란에 대비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유성룡을 비롯한 신하들이 ‘군사를 양성하는 것은 화단(禍端, 화를 일으킬 실마리)을 키우는 것’이라며 강력히 반대하였으므로 국론으로 채택되지 못하였다(조선왕조실록 중 「선조수정실록」 16권 선조 15년 9월 1일조). 10만 양병을 주장한 율곡의 의견을 국론으로 채택하여 대비하였더라면, 국토가 왜병에게 유린되고, 수많은 백성이 도륙을 당하는 일이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임금이 허둥지둥 파천하는 일도 없었을 것이다. 임진왜란으로 나라가 위태롭게 되었을 때 군무를 총괄한 유성룡은 율곡의 의견을 반대하고 무시하였던 일을 후회하며 “이이는 선견지명(先見之明, 어떤 일이 일어나기 전에 미리 앞을 내다보고 아는 지혜)이 있고 충근(忠勤, 충성스럽고 부지런함)한 절의가 있었으니, 그가 죽지 않았다면 반드시 오늘날에 도움이 있었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한다. 때늦은 후회인 것이다.
당시에 율곡의 의견에 반대한 이유는 평화로운 때에 백성들에게 전쟁에 대한 불안을 주고, 생업에 종사할 장정을 차출하여 훈련을 하는 것은 생산력을 축소하는 것으로 매우 부적절하다는 것이었다. 이 대목은 요즈음 우리가 처한 상황과 겹쳐 보인다. 6․25전쟁을 겪은 대한민국은 정전 상태에서 북의 위협을 안고 살고 있다. 북은 남을 무력으로 적화통일 하겠다는 야욕을 버리지 않고 있으며, 핵을 개발하여 핵보유국 행세를 하고 있다. 그런데도 일부 국민은 북이 한반도비핵화의 의지를 가지고 있다고 믿으며, “북이 설마 같은 민족인 우리에게 핵무기를 사용하겠어? 미국에 대한 협상력을 기르려는 것이야!”라고 말한다. 그리고 정부에서는 9․29 남북합의서를 들먹이며 북한에 대한 경계를 풀어 놓았다.
미국과 중국이 세계질서를 재편하려고 경쟁을 벌이고 있고, 북은 남침야욕을 버리지 않고 있다 이런 때에 우리는 눈을 크게 뜨고 국제정세를 살펴야 한다. 그리고 북의 야욕이 어떠한가를 주시하면서 국가 안보 태세를 강화해야 한다. 그런데도 국가 안보를 소홀히 하고 있고, 북의 비위를 맞추려고 눈치를 살피고 있다. 경계태세를 늦추고 있고, 한미연합훈련마저 탁상훈련으로 대체하고 있다. 안보 태세를 강화하라는 국민의 목소리는 마이동풍(馬耳東風, 동풍이 말의 귀를 스쳐 간다는 뜻으로, 남의 말을 귀담아듣지 아니하고 지나쳐 흘려버림), 우이독경(牛耳讀經, 쇠귀에 경 읽기라는 뜻으로, 아무리 가르치고 일러 주어도 알아듣지 못함을 이르는 말)과 같이 되어 버린 지 오래 되었다. 율곡 선생의 양병설을 무시하였다가 임진왜란이라는 처참한 일을 당한 조선의 역사를 되풀이하지 않을까 걱정이다. 역사는 자기 성찰의 거울이고, 희망의 미래는 여는 열쇠임을 잊지 않았으면 한다.
임진왜란 때 불에 타 없어졌던 화석정은 80여 년간 빈터만 남아 있다가 현종 14(1673)년에 율곡 선생의 증손인 이후지(李厚址)·이후방(李厚坊)이 복원하였다. 그러나 1950년 6·25전쟁 때 다시 소실되었다. 현재의 정자는 1966년 경기도 파주시 유림들이 다시 복원하고, 1973년 정부가 실시한 율곡 선생 및 신사임당 유적 정화사업의 일환으로 단청되고 주위도 정화되었다. 건물의 정면에는 박정희 전 대통령이 쓴 ‘花石亭’ 현판이 걸려 있다. 화석정을 바라보는 나의 마음은 걱정스럽기 짝이 없다. 역사에서 교훈을 얻지 못하면 불행한 일을 당하게 된다. 화석정이 불에 타는 것과 같은 국가적 불행이 되풀이 되지 않기를 바라면서 발길을 돌려 집으로 향하였다. (《성동문학》 제21, 성동문인협회,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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