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년 99일에는 서울교대 1회 동기들이 경기도 파주시 월농면 도내리에 자리 잡고 있는 도감농원에서 밤 줍기를 한다. 2017년에 시작한 이 행사는 코로나 19로 모임이 중단되던 시기를 제외하곤 해마다 계속되어 금년으로 다섯 번째이다.

   도감농원은 심언녕 동기의 고향 마을 앞동산이다. 1970년대 초에 정부에서는 산림녹화 사업으로 산에 소나무, 잣나무, 낙엽송, 밤나무 심기를 권장하였다. 서울에서 교사로 근무하던 그는 부모님과 상의하여 밤나무 400주를 심었다. 그 뒤 밤나무는 잘 자라서 밤송이가 열리기 시작하였으나, 연만하신 부모님들이 잘 관리하지 못해 마을 사람들의 밤나무가 되었다. 1998년에 교직에서 명예퇴임을 하고 고향집으로 돌아온 그는 앞동산을 관리하기 시작하였다. 체험학습을 하러 오겠다는 학교가 늘어가자 도감농원이라는 간판을 걸고, 농원을 잘 관리하였다.

   현장답사를 왔던 산림청 직원들은 산을 잘 가꾸고 있다면서 몇 가지 혜택이 있으니 임업경영인등록을 하라고 하였다. 등록한 뒤에는 생산품 판매 영수증을 제출하라고 하였다. 몇 년 동안은 밤을 주워서 금촌시장에 내다 팔았으나 밤을 줍는 일이 힘들고, 시장에 가지고 가서 파는 일도 쉽지 않았다. 그래서 임업경영인 재등록을 하지 않겠다고 하였다. 산림청에서는 생산실적이라도 기록해 제출하라고 하였다. 그는 궁리 끝에 밤을 친구, 친척, 마을 사람들에게 주워가도록 하고, 그 장면을 사진 찍어 어림잡은 생산기록과 함께 제출하였다.

   이런 과정을 거치면서 그는 서울교대 1회 동기들이 밤 줍기 체험을 하면서 친목을 도모하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였다. 그래서 동기회 회장에게 밤 줍기 행사를 제안하였다. 그러자 많은 동기들이 호응하여 밤 줍기 행사가 시작되었다. 땀 흘려 가꾼 농원의 밤을 동기들에게 아낌없이 내주고 점심 대접까지 하는 그의 동기애와 희생의 정신이 고맙고 고귀하기 짝이 없다.

   나는 신금호역에서 지하철 5호선을 이용하여 공덕역으로 가서 경의중앙선 문산행 열차로 바꿔 타고 가다가 월롱역에 내렸다. 약속한 1130분이 되니, 남자 10, 여자 6명으로 모두 16명이 모였다. 월롱역 앞에서 마을버스를 타고 도내 4리 버스 정류장에서 내리니, 그가 나와서 기다리고 있다가 일일이 악수하며 환영하였다. 200m쯤 걸어서 그의 집에 도착한 우리는 매실차를 마시며 담소한 뒤에 동산으로 올라갔다.

   도감농원 간판이 달린 곳에 있는 출입문을 열고 들어가니, 자란 풀을 모두 베어 밤 줍기에 편하도록 해 놓았다. 밤송이를 발릴 때 쓸 막대기도 넉넉히 준비해 놓았다. 그는 산모기가 많으니 상의 소매를 장갑 안으로 넣으라고 하였다. 그리고 미끄러지지 않도록 조심하고, 뱀이 나타나면 놀라 소리치지 말고 옆으로 피하라고 하였다. 밤나무 밑에는 밤송이 밖으로 튀어나온 알밤도 있고, 밤송이 속에 들어 있는 것도 있다. 밤송이 안에 있는 밤은 밤송이 옆을 두 발로 밟고 막대기로 발린 뒤에 주워서 비닐봉지 안에 넣었다.

   밤알은 나무에서 떨어진지 얼마 되지 않아 싱싱한 것도 있고, 오래 되어 좀 마른 것도 눈에 띈다. 밤알은 작년에 줍던 것보다 큰 것이 더 많았다. 눈에 띄는 밤알 중에서 튼실하고 싱싱한 것만 주워서 비닐봉지에 담으면서 수확의 기쁨과 함께 뿌듯함을 느꼈다. 허리를 굽히면 땅에서 지열이 올라와 후끈하며 땀이 흐른다. 밤 줍는 일을 되풀이하다 보니, 허리가 아프고, 무릎도 아프기 시작하였다. 내가 일어서서 허리를 만지며 아이구 허리야!’라고 하니 옆에 있던 동기도 같은 말을 되풀이한다.

   3040분쯤 지나고 보니 들고 있는 비닐봉지가 꽤 무겁게 느껴졌다. 이제 그만 주워야겠다고 생각하고 관리사 쪽을 바라보니, 동기들이 모이기 시작한다. 모두 얼굴은 땀에 젖었지만 흡족한 표정이었다. 밤 주머니를 들어 보이며 주운 양을 자랑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직접 밤나무를 가꾸지 않고도 수확의 기쁨을 만끽하게 해준 그의 배려심에 감사를 표하였다.

   밤 줍기를 끝낸 우리는 그의 안내로 집 앞에 있는 한식 뷔페식당으로 갔다. 일반 손님들이 지나간 뒤여서 자리도 많았고, 차린 음식도 맛깔스러워 보였다. 그의 제안으로 건배한 뒤에 식사를 시작하였다. 달걀은 손님이 각자 프라이를 해서 먹어야 하는데, 그의 딸이 직접 프라이를 해서 가져다주어 무척 고마웠다.

   시간에 맞춰 버스 정류장으로 나오면서 뜻깊은 밤 줍기 행사를 하도록 초청해 준 그에게 진심어린 감사의 인사를 하였다. 작별할 때에 그의 얼굴에는 만날 때 짓던 환한 미소가 사라지고 아쉬움과 허전함이 스치는 것 같았다. 그가 마음을 쓰고 있는 가정의 일들이 모두 해소되어 평안하고 건강하기를 기원한다. 내년에도 또 오라는 그의 말에 하루가 다르게 건강 상태가 변하는 80대의 동기들이 다 호응할 수 있을까 생각하며 모두 건강하기를 기원한다. (2024. 9.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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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96일 금요일에 교일산우회 회원들과 경기도 구리시에 있는 장자호수공원에 갔다. 금년 810일에 지하철 8호선이 암사역에서 남양주시 별내까지 연장 개통되었으므로 장자호수역까지 편히 갈 수 있었다. 전동차에서 내려 보니, 에스컬레이터와 엘리베이터가 적소에 설치되어 있어 이용하기 편하고, 역사 안이 넓고 깨끗하여 기분이 좋았다. 대합실에서 만난 회원들은 삼복더위를 피하기 위해 한 달 쉬었다가 만나는 첫 모임이어서 모두 반가워하였다.

   장자호수공원역 6번 출입구로 나와 200m쯤 걸으니 공원야외공연장이다. 야외공연장 한쪽에 길게 친 천막 안에서는 내일 열리는 장자못축제를 준비하는 사람들이 바쁘게 움직인다. 바로 이어지는 잔디밭에 장자못의 유래를 적은 큰 비석이 서 있다. 비석에는 장자못 전설이 적혀 있어 이곳을 장자호수공원이라고 하는 연유를 적어 놓았다.

   비석에 적혀 있는 전설의 내용은 다른 여러 지방에서 전해 오는 이야기와 별 차이가 없다. 나는 회원들에게 장자못 전설의 줄거리를 간단히 이야기하였다. 그리고 이와 비슷한 이야기가 전해 오는 지역의 호수와 바위 이름을 열거했다. 또 비슷한 이야기가 성경에 기록되어 있음도 말하였다. 그런 뒤에 산책길을 걸으며 이 전설의 의미를 정리해 보았다.

   옛날 이곳에 욕심 많고 인색한 장자(長者. 부자)가 살았다. 어느 날 이른 아침 장자가 외양간을 치우고 있을 때 스님이 와서 시주를 청하였다. 그는 스님에게 땀 흘려 일하지 않고 시주를 받으러 다닌다고 꾸짖으며 쇠똥을 퍼서 바랑에 넣어 주었다. 아침밥을 지으려고 쌀을 가지고 나오던 며느리가 이 모습을 보고, 자기와 아들의 아침밥 지을 쌀을 시주하며 시아버지의 잘못을 용서해 달라고 하였다.

   스님은 며느리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한 뒤에 말했다. “오늘 정오가 되기 전에 저 산 너머 친정으로 가시오. 누구에게도 말하지 말고, 뒤에서 어떤 소리가 나더라도 뒤를 돌아보지 마시오.” 며느리가 스님의 말대로 아기를 업고 고개를 올라갈 때 장대비가 쏟아지며 천둥 번개와 함께 벼락이 치는 소리가 들렸다. 자기도 모르게 뒤를 돌아보니 집이 폭삭 꺼져 가라앉더니 큰 연못이 되었다. 그는 뒤를 돌아보지 말라는 금기를 깨뜨렸으므로 바위가 되었다.

   권선징악적(勸善懲惡的)인 의미를 지닌 이 이야기는 여러 곳에 있는 연못과 바위의 유래를 설명하는 이야기로 전해 온다. 이 전설이 전해 오는 곳 중 널리 알려진 곳으로는 강원도 태백시의 황지고성의 송지호와 화진포호강릉의 경포호, 충북 제천의 의림지, 충남 논산의 장자못공주의 용못 등이 있다.

   이와 비교되는 이야기가 《구약 성경》 「창세기에도 전해 온다. 하나님은 소돔과 고모라 주민들의 악행을 보다 못해 이곳을 멸망시키려고 한다. 그래서 두 천사를 보내어 롯의 착한 마음과 신앙심을 확인한 뒤에 그에게 가족을 데리고 성을 떠나라고 하면서 절대로 뒤를 돌아보지 말라고 한다. 두 성이 유황불로 불탈 때 롯은 두 딸과 함께 소알성으로 도피하여 살았지만, 롯의 아내는 뒤를 돌아보았으므로 소금기둥이 되고 말았다.

   「소돔과 고모라의 멸망장자못 이야기는 초월적인 힘을 지닌 분이 악인을 징벌한다는 점에서 일치하지만, 부분적인 면에서는 차이를 보인다. 앞 이야기에서는 초월적인 존재가 하나님이고, 주민의 악함을 확인하고 벌을 내리는 것은 사람의 모습으로 온 두 천사이다. 뒤 이야기에서는 초월적인 존재가 부처님이고, 그 뜻을 받들어 벌을 내리는 것은 스님이다. 이런 차이는 앞 이야기가 이스라엘 민족의 유일신 신앙을 바탕으로 형성되었고, 뒤 이야기는 불교를 기저로 한 한국인의 신앙심을 바탕으로 형성되었기 때문이리라.

   악인을 징벌하는 전설을 배경으로 생긴 장자호수 주변에 생태공원을 조성하여 시민들이 공원의 유래를 생각하며 체력을 단련하고 휴식을 취할 수 있게 한 것은 아주 잘한 일이라 생각한다. 공연장 안쪽으로 들어가니 호수를 끼고 길게 이어지는 산책로가 있고, 공원 외곽에도 산책로가 있어 사람과 자전거가 통행하도록 하였다. 산책로를 걷는 동안 좌우로 이어지는 잘 가꾼 꽃과 잔디, 정원수는 마음을 상쾌하게 해 주었다. 조금 더 가니 생태체험관이 있었지만, 계단을 올라가야 하므로 들어가지 않았다.

   조금 더 가니 통나무를 여러 간격으로 세워 놓은 뱃살통과 테스트장이 있다. 위쪽에 홀쭉(17cm), 날씬(20cm), 표준(23cm), 통통(25cm), 마음만은 홀쭉(27cm), 이러시면 안 됩니다(29cm), 당신은 외계인(32cm)’ 등이 씌어 있다. 이 말들이 퍽 애교스럽게 느껴진다. 자기 몸에 맞는 공간을 옆으로 통과해 보면서 자기의 건강과 몸매를 측정해 봄직하다.

   산책로를 걷다가 둑 아래로 난 데크길로 내려가니 가까워진 호수 수면에 물오리들이 한가로이 놀고 있다. 호수 곳곳에 물속으로 산소를 공급하는 장치가 서 있는 것을 보니, 물고기를 위한 배려가 고맙게 느껴진다. 호수 가운데에 있는 작은 섬에는 버드나무가 서 있다. 길게 뻗은 호수 양편에 조성해 놓은 황톳길에서는 시민들이 맨발로 걷고 있었다. 장미정원, 어린이 놀이터, 숲속놀이터, 농구장, 반려견 놀이터 등 다양한 시설들을 바라보며 2시간 가까이 걸었다. 이슬비가 오락가락하였지만, 덥지 않아 산책하기에 좋았다.

    잔디밭 가운데에 원형으로 지붕을 덮은 긴 벤치가 여럿 있다. 우리는 그 중 한곳에 앉아 각자 준비해 온 커피, 과자, 바나나, 떡 등의 간식을 나누어 먹으며 가볍고 즐거운 대화를 하였다. 길게 뻗은 호수 양편에 잘 다듬고 가꾼 잔디와 수목 사이로 난 산책길을 걸은 뒤에 환담을 하노라니 한 달 내내 계속되던 폭염을 견뎌내느라고 힘들었던 몸과 마음이 가벼워진 듯하다. 한 달 동안 쉬었다가 다시 모인 우리 모임의 힘찬 출발을 자축하며 회원 모두의 건강을 기원한다. (2024. 09. 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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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얼마 전에 서울 광진구와 경기도 구리시에 자리한 아차산에 갔다. 이 산에는 백제가 쌓은 아차산성도 있고, 고구려가 쌓은 보루도 있다. 나는 홍련봉 1, 2 보루를 보면서 온달 장군이 전사한 곳이 여기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온달과 평강」 이야기는 바보 온달울보 평강 공주와 혼인하여 출세한 이야기로 매우 흥미롭다.

   온달은 정말 바보였을까? 그가 정말 바보였다면 평강 공주가 아무리 특별한 방법으로 그의 잠재력을 계발하며 가르쳤다 하여도 온 나라의 장정이 모이는 사냥대회에서 우승하고, 외적이 쳐들어왔을 때 전공을 세우지 못하였을 것이다. 이 이야기가 실려 있는 《삼국사기》 권제45 「열전」을 보면, 온달은 몹시 가난하여 해진 옷과 낡은 신발을 신고 다니는 데다가 얼굴이 기이하게 생겨 우스웠다. 그래서 사람들이 그를 바보 온달이라고 불렀다. 그러나 그의 마음은 맑고 깨끗하였다고 하였다. 이 기록을 잘 살펴보면 그는 옷차림이 허름하고, 얼굴 모습이 좀 이상하게 생겼으므로 사람들이 놀리는 말로 바보 온달이라고 하였을 뿐이고, 실은 뛰어난 자질을 지닌 청년이었다.

   역사학계에서는 몇 년 전에 온달(溫達, ?590) 장군은 우즈베키스탄 사마르칸트에서 건너온 왕족의 아들일 가능성이 크다는 주장이 나왔다. 연세대학교 지배선(역사문화학) 교수는 그의 논문 「사마르칸트와 고구려 관계에 대하여」에서 온달 장군은 서역인과 고구려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다문화가정의 자녀로, 고구려 장군의 지위에까지 오른 입지전적 인물이라고 하였다. 이에 따르면 온달은 당시에 상업이 발달했던 사마르칸트의 왕족이 정치적 이유로 피신하여 고구려에 와서 고구려 여인과 산 사람의 아들이었다. 그는 평강 공주와 혼인하고 공주의 내조 덕에 타고난 자질과 능력을 마음껏 발휘하여 고구려 상류층으로 진출한 인물이다.

   온달은 산 밑에 살면서 밥을 얻어다가 어머니를 봉양하고, 느릅나무 껍질을 벗겨 연명하는 하층민이었다. 평강 공주가 최고의 귀족인 상부 고씨와 혼인을 마다하고 온달과 혼인한다는 것은 당시의 신분제도와 관습에서는 용납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평강왕은 어렸을 때 울기를 잘하는 공주를 놀리는 말로 너는 늘 울기만 하여 사대부의 아내가 될 수 없으니 바보 온달에게나 시집보내야겠다.”라고 말하곤 하였다. 이 말을 마음에 새기며 자란 평강 공주는 왕의 명령을 따르지 않고 궁을 나와 온달과 혼인하였다. 정상적인 방법으로는 당시의 신분제와 관습을 깰 수 없었다. 평강 공주는 비정상적인 방법으로 당시의 신분제도와 관습을 깨고 온달과 혼인하였다.

   장군이 된 온달은 한강 유역의 땅을 신라에게 빼앗긴 것을 원통하게 여겨 이를 다시 찾을 결심을 한다. 그는 영양왕의 허락을 받고 출정하면서 계립현(문경)과 죽령(경상도와 충청도 경계)의 서쪽 땅을 되찾지 못하면 돌아오지 않겠다고 맹세한다. 이것은 당시 고구려의 남방정책을 적극 지지하면서 실천하려는 온달의 굳은 의지와 결의를 말해 준다. 이런 마음은 당시 고구려인이 지녔던 기상과 애국심의 발로였을 것이다.

   충주 지방에는 평강공주가 가난하고 무식했던 온달과 혼인하는 과정, 온달이 평강 공주의 내조를 받아 장군이 되어 나라에 큰 공을 세우고 전사하는 과정 등이 《삼국사기》의 내용보다 훨씬 더 다채롭고 흥미롭게 구성된 전설이 전해 온다. 나는 이 이야기를 1997년에 채록하여 《함께 떠나는 이야기 여행》에 수록한 바 있다. 한때 고구려가 점령하였던 충주시 상모면에는 온달 장군이 가지고 놀았다는 공깃돌과 말무덤이 있다. 말무덤은 온달 장군이 이곳에서 전사하였다는 것을 전제로 한 전설의 증거물이다.

  《삼국사기》의 기록을 보면, 온달 장군은 아단성(阿旦城) 전투에서 신라군의 화살을 맞아 전사하였다고 한다. 온달 장군이 전사한 아단성이 충북 단양의 온달산성이라는 설이 있지만, 서울 광진구와 구리시에 있는 아차산이라는 설이 유력하다. 온달 장군의 관은 운구하려고 하니 움직이지 않았다. 공주가 와서 관을 어루만지면서 죽고 사는 것은 이미 결판이 났으니 마음 놓고 돌아가시오.”라고 하니 비로소 움직였다고 한다. 관이 움직이지 않은 것은 그의 국토 회복을 이루지 못한 한이 깊었음을 말해 준다. 공주의 위로를 받은 뒤에야 관이 움직였다는 것은 그의 공주에 대한 사랑과 신뢰가 극진하였음을 말해 준다.

   이 이야기에 담긴 뜻을 보면, 먼저 말조심할 것을 일깨워 준다. 특히 어른의 말은 어린이의 마음에 큰 영향을 끼치므로, 항상 조심하여야 한다. 귀족과의 혼인을 마다하고 하층민인 온달을 찾아가는 평강 공주의 행위는 당시의 관습을 깨고 자아를 실현하는 쾌거였다. 공주가 온달에게 말 고르는 법을 비롯하여 고구려 젊은이가 갖춰야 할 지식과 교양을 가르쳐 출세하게 한 것은 내조의 공을 쌓는 여인의 전범을 보여주었다.

   온달은 평강공주의 내조를 받으며 심신을 수련하여 실력을 기름으로써 전국사냥대회에서 우승을 하고, 후주가 쳐들어왔을 때 전공을 세움으로써 왕으로부터 네가 과연 내 사위로구나!”라고 인정을 받는다. 이는 자기 계발을 위한 노력을 통해 성공한 젊은이의 전형을 보여준다. 혼인을 할 때에는 양가의 문벌이나 학식, 재산 등에서 넘치거나 처지는 경우가 종종 있다. 그 중 신랑의 형편과 처지가 신부의 그것만 못할 때에는 처가로부터 인정을 받지 못하지만, 신부와 힘을 합하여 무언가를 보여주면 인정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을 일깨워준다.

   자기의 운명을 개척한 평강 공주, 아내의 내조를 받으며 잠재력을 계발하고 실력을 길러 출세한 온달 장군의 이야기는 매우 재미있고 흥미로운 이야기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흥미와 재미만을 좇을 것이 아니라 이 이야기가 내포하고 있는 의미를 생각하며 감상해야 한다. 그러면 재미와 흥미로움에 더하여 삶의 지혜와 교훈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이 우리의 이야기문학 유산을 대하는 바른 자세일 것이다. (2024. 8. 19.)

   신앙 에세이 《은혜의 샘물》이 기독교연합신문사 도서출판(도서출판 UCN)에서 202475일에 간행되었다. 이 책은 필자가 김기창, 이복규, 임문혁 장로와 돌아가며 써서 20222월부터 202312월까지 기독교연합신문 <은혜의 샘물> 난에 실은 글들을 한데 모아 엮은 책이다.

   이 책에 실린 글은 4명의 필자가 각자의 생활 영역에서 경험하고 느낀 것을 글감으로 하여 쓴 신앙 속 삶의 이야기이다. 독자들의 감성을 자극하여 잃어버린 영성을 회복하는 글을 200자 원고지 10장 분량으로 풀어내는 일은 쉽지 않았다. 필자 스스로 은혜를 느끼는 글이어야 독자들과 공감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에 무척 부담스럽고, 긴장된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 필자는 글을 쓰면서 그야말로 샘물같이 솟아나는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했고, 지난 삶에서 역사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여 정리하면서 감사하였다. 그러다 보니 독자에게 감동을 주기에 앞서 필자가 먼저 감동을 받게 되었다. 필자가 받은 은혜가 독자들에게도 흘러넘치기를 기도하고, 그러리라 믿는다.

   필자 네 사람은 모두 장로, 문인, 박사, 학자이며 30년 이상 교직에서 후학들을 길러낸 사람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글이 연재되는 동안 다음엔 어떤 감동적인 글을 읽을 수 있을까?’ 하는 기대감으로 신문을 기다리기도 했고, 쓴 글들을 서로 읽어보면서 각자가 일상적인 삶에서 선한 영향력을 미치고 있다는 점을 확인하며 새로운 은혜를 나누기도 하였다.

필자가 쓴 글 25편의 제목은 다음과 같다.

* 어머니의 소원

* 사탄으로 몰린 집사

* 돌잡이는 미신인가

* 전도에 힘쓰는 택시기사

* 신병을 앓는 이에게 전도를

* 딸을 위한 기도

* 목사 아내의 길

* 아프리카 파견 선교사의 헌신과 보람

* 성경 읽기

* 선교사 아닌 선교사가 되어

* 산타클로스의 고향

* 교회에서 쓰는 말 바로 알고 쓰기

* 시골 아가씨의 놀라운 성장과 변신

* 세계 최초의 교회를 찾아서

* 하나님의 계획

* 기도하고 시작한 강의

* 말보다 행동으로

* 문설주에 바르는 양의 피와 팥죽

* 「실로암」과 ‘주여 당신께’

* 합심 기도

* 목사 아들을 둔 부모

* 교도소까지 전해진 「은혜의 샘물」

* 고향 친구의 소천

* 어느 스님의 분노

* 성모 마리아의 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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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앙 에세이 《은혜의 샘물》이 기독교연합신문사 도서출판(도서출판 UCN)에서 202475일에 간행되었다. 이 책은 필자가 김기창, 이복규, 임문혁 장로와 돌아가며 써서 20222월부터 202312월까지 《기독교연합신문 》  「은혜의 샘물난에 실은 글들을 한데 모아 엮은 책이다.

   이 책에 실린 글은 4명의 필자가 각자의 생활 영역에서 경험하고 느낀 것을 글감으로 하여 쓴 신앙 속 삶의 이야기이다. 독자들의 감성을 자극하여 잃어버린 영성을 회복하는 글을 200자 원고지 10장 분량으로 풀어내는 일은 쉽지 않았다. 필자 스스로 은혜를 느끼는 글이어야 독자들과 공감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에 무척 부담스럽고, 긴장된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 필자는 글을 쓰면서 그야말로 샘물같이 솟아나는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했고, 지난 삶에서 역사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여 정리하면서 감사하였다. 그러다 보니 독자에게 감동을 주기에 앞서 필자가 먼저 감동을 받게 되었다. 필자가 받은 은혜가 독자들에게도 흘러넘치기를 기도하고, 그러리라 믿는다.

   필자 네 사람은 모두 장로, 문인, 박사, 학자이며 30년 이상 교직에서 후학들을 길러낸 사람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글이 연재되는 동안 다음엔 어떤 감동적인 글을 읽을 수 있을까?’ 하는 기대감으로 신문을 기다리기도 했고, 쓴 글들을 서로 읽어보면서 각자가 일상적인 삶에서 선한 영향력을 미치고 있다는 점을 확인하며 새로운 은혜를 나누기도 하였다.

   필자가 쓴 글 25편의 제목은 다음과 같다.

   * 어머니의 소원     

   * 사탄으로 몰린 집사

    * 돌잡이는 미신인가    

   * 전도에 힘쓰는 택시기사 

   * 신병을 앓는 이에게 전도를 

   * 딸을 위한 기도  

   * 목사 아내의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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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월 하순의 어느 날 아침 외출하려고 아파트 단지 안의 벚나무 아래를 지나다가 매미 소리를 들었다. 금년 들어 처음 듣는 매미 소리로, 다른 해보다 이른 시기여서 의아하면서도 반가웠다. 그로부터 23일 뒤에 집 앞의 공원에 가니, 여러 종류의 매미들이 떼를 지어 노래한다. 여러 종류 매미들의 합창 소리를 들은 아내는 시끄럽다고 하였으나, 나는 어린 시절의 추억이 떠오르며 아주 정겹게 느껴졌다.

    어린 시절 여름에 매미가 울면 매미 소리를 흉내 내면서 맨손으로 매미를 잡으려고 뛰어다니던 기억이 새롭다. 맨손으로 매미를 잡은 적도 있기는 하지만, 내 손이 닿지 않는 곳에 있는 매미는 잡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나뭇가지를 휘어 원형 또는 4각의 틀을 만들어 장대에 고정시킨 뒤에 거기에 거미줄을 묻혀 매미채를 만들었다. 나뭇가지에서 울고 있는 매미에게 매미채를 대면 매미의 날개가 거미줄에 붙어 바로 잡을 수 있었다.

   거미줄 묻힌 매미채를 만든 것이 전적으로 내 아이디어였는지, 형들이나 어른들의 귀띔이 있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매미채는 잠자리를 잡는 데에도 아주 유용하였다. 잡은 매미는 실로 묶은 뒤에 집 앞의 나무에 올려놓기도 하고, 날려 보내기도 하였다. 여름방학 숙제로 곤충표본을 만들어 학교에 제출한 적도 있다. 그늘에 깔아놓은 밀짚방석에 누워 매미 소리를 자장가 삼아 낮잠을 즐기기도 하였다. 매미와 함께 했던 어린 시절의 추억이 아련하다.

   매미의 수컷은 사랑을 나눌 상대를 부르기 위해 자기만의 소리를 낸다. 다른 개체의 소리와 구별되는 소리를 내기 위해 온 힘을 기울여 발성한다. 그 소리가 나에게는 맴맴’, ‘쓰름 싸름’, ‘--’, ‘지르르르등으로 들린다. 매미가 사랑의 노래를 부르며 나뭇가지에서 사는 기간은 23주밖에 되지 않는다고 한다. 수컷의 노래 소리에 마음이 끌린 암컷은 수컷에게 다가가서 짝짓기를 한다. 수컷은 짝짓기를 한 뒤에 죽고, 암컷은 나무껍질 속이나 틈새에 알을 낳은 뒤에 죽는다.

   알은 나무껍질 속에서 추운 겨울을 나고 여름이 되면 애벌레가 되어 땅으로 내려간다. 그리고 여러 차례 허물을 벗으며 보통 5~6, 길게는 17년 가량 산다. 그런 뒤에 다시 나무위로 올라가 우화(羽化)하여 성충 매미가 된다. 길게는 17년을 사는 매미가 나무 위에서 노래를 부르는 기간은 고작 23주밖에 되지 않는다고 하니 안타깝기 짝이 없다. 이렇게 짧은 기간을 노래하는 매미의 한살이를 생각하면, 어린 시절에 매미를 잡아 죽게 하거나 곤충표본을 만들었던 일이 부끄러워진다. 매미가 사랑의 노래를 마음껏 부른 뒤에 상대를 만나 소원을 이루도록 도와주고 싶다.

   3세기경 중국 진()나라 시인 육운(陸雲)은 매미를 유심히 관찰한 뒤에 다섯 가지 특성을 들어 매미의 오덕(五德)’이라 하였다. 머리 모양과 곧게 뻗은 입 모양이 선비의 갓끈과 유사하니 선비와 같다(). 여느 곤충들과는 달리 이슬과 나무의 진을 먹으니 청렴하다(). 곡식이나 채소, 나무에 해를 끼치지 않으니 염치가 있다(). 자기의 집을 짓지 않으니 검소하다(). 때에 맞추어 울며 살다가 때를 맞추어 죽으니 신의가 있다().

   조선 시대를 배경으로 한 역사극을 보면, 왕과 왕세자는 곤룡포를 입고 집무할 때에 익선관(翼善冠)을 쓴다. 앞 꼭대기에 턱이 져서 앞이 낮고 뒤가 높은데, 뒤에는 두 개의 뿔을 날개처럼 달았으며 검은빛의 사() 또는 나()로 둘렀다. 이것은 매미의 날개를 본 뜬 것이다. 매미의 오덕(五德)을 생각하며 백성을 다스린다는 의지를 담은 모자라 하겠다. 익선관은 고려와 조선은 물론, 명나라와 베트남에서도 사용하였다고 한다. 이로 보아 왕은 매미의 오덕을 생각하며 나라를 다스려야 한다는 의식이 오래 전부터 널리 퍼져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는 매미는 그리스인의 진귀한 음식이라고 하였다. 중국이나 동남아시아, 중앙아프리카와 라틴아메리카의 몇몇 지역에서는 매미의 애벌레를 튀겨 먹는다고 한다. 일본 도쿄의 한 공원에서는 매미를 즐겨 먹은 사람들이 매미를 쓸어가므로 포획금지 명령을 내린 적도 있다고 한다. 굼벵이가 허물을 벗고 매미로 날아간 뒤에 남은 껍질은 선태(蟬蛻), 또는 선퇴(蟬退)라고 한다. 한의학에서는 이를 한약재로 쓴다. 그러고 보면 매미의 오덕에 식용, 또는 약재로 자기 몸을 내어주는 희생의 덕을 추가해야겠다.

   매미는 변온동물로 보통 15이상 되면 울기 시작하여 더운 여름에 마음껏 울어대다가 가을이 되면 사라진다. 예상보다 일찍 울거나 여름철이 지나 늦가을에도 우는 것은 기후 변화로 기온이 일찍 오르고, 늦게까지 내려가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주광성(走光性)인 매미는 대부분 낮에 울고, 밤에는 울지 않는다. 그런데 밤에도 우는 이유는 가로등 등 환한 인공 빛 때문에 밤을 낮으로 착각한 때문이라 하겠다. 얼마 전에 매미가 11층인 우리 아파트의 방충망에 붙어 갑자기 우는 바람에 깜짝 놀란 적이 있다. 이것은 매미가 방향을 잃어 급한 대로 방충망에 앉아 있다가 울음소리를 낸 것이리라.

   오늘도 공원의 숲에서는 매미들이 땅속에서 인고의 시간을 보냈음을 알리면서 사랑을 나눌 상대를 부르는 노래를 목청껏 부른다. 나는 공원 숲속의 벤치에 앉아 매미의 노랫소리를 즐기며 잠시 추억에 젖어본다. 이때 갑자기 위급함을 알리는 매미 소리가 들리더니 멀어지니, 매미가 까치에게 잡혀가는 모양이다. 매미채로 매미를 잡아 통에 넣으며 좋아하는 아이와 그 부모가 보인다. 매미의 한살이를 설명하고 날려 보내라고 하고 싶었지만, 나의 어린 시절이 생각나서 그만두었다. 매미가 까치에게든 사람에게든 잡히지 않고 마음껏 노래하며 짧은 여생을 즐겼으면 좋겠다.(2024. 8.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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