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 하순의 어느 날 아침 외출하려고 아파트 단지 안의 벚나무 아래를 지나다가 매미 소리를 들었다. 금년 들어 처음 듣는 매미 소리로, 다른 해보다 이른 시기여서 의아하면서도 반가웠다. 그로부터 23일 뒤에 집 앞의 공원에 가니, 여러 종류의 매미들이 떼를 지어 노래한다. 여러 종류 매미들의 합창 소리를 들은 아내는 시끄럽다고 하였으나, 나는 어린 시절의 추억이 떠오르며 아주 정겹게 느껴졌다.

    어린 시절 여름에 매미가 울면 매미 소리를 흉내 내면서 맨손으로 매미를 잡으려고 뛰어다니던 기억이 새롭다. 맨손으로 매미를 잡은 적도 있기는 하지만, 내 손이 닿지 않는 곳에 있는 매미는 잡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나뭇가지를 휘어 원형 또는 4각의 틀을 만들어 장대에 고정시킨 뒤에 거기에 거미줄을 묻혀 매미채를 만들었다. 나뭇가지에서 울고 있는 매미에게 매미채를 대면 매미의 날개가 거미줄에 붙어 바로 잡을 수 있었다.

   거미줄 묻힌 매미채를 만든 것이 전적으로 내 아이디어였는지, 형들이나 어른들의 귀띔이 있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매미채는 잠자리를 잡는 데에도 아주 유용하였다. 잡은 매미는 실로 묶은 뒤에 집 앞의 나무에 올려놓기도 하고, 날려 보내기도 하였다. 여름방학 숙제로 곤충표본을 만들어 학교에 제출한 적도 있다. 그늘에 깔아놓은 밀짚방석에 누워 매미 소리를 자장가 삼아 낮잠을 즐기기도 하였다. 매미와 함께 했던 어린 시절의 추억이 아련하다.

   매미의 수컷은 사랑을 나눌 상대를 부르기 위해 자기만의 소리를 낸다. 다른 개체의 소리와 구별되는 소리를 내기 위해 온 힘을 기울여 발성한다. 그 소리가 나에게는 맴맴’, ‘쓰름 싸름’, ‘--’, ‘지르르르등으로 들린다. 매미가 사랑의 노래를 부르며 나뭇가지에서 사는 기간은 23주밖에 되지 않는다고 한다. 수컷의 노래 소리에 마음이 끌린 암컷은 수컷에게 다가가서 짝짓기를 한다. 수컷은 짝짓기를 한 뒤에 죽고, 암컷은 나무껍질 속이나 틈새에 알을 낳은 뒤에 죽는다.

   알은 나무껍질 속에서 추운 겨울을 나고 여름이 되면 애벌레가 되어 땅으로 내려간다. 그리고 여러 차례 허물을 벗으며 보통 5~6, 길게는 17년 가량 산다. 그런 뒤에 다시 나무위로 올라가 우화(羽化)하여 성충 매미가 된다. 길게는 17년을 사는 매미가 나무 위에서 노래를 부르는 기간은 고작 23주밖에 되지 않는다고 하니 안타깝기 짝이 없다. 이렇게 짧은 기간을 노래하는 매미의 한살이를 생각하면, 어린 시절에 매미를 잡아 죽게 하거나 곤충표본을 만들었던 일이 부끄러워진다. 매미가 사랑의 노래를 마음껏 부른 뒤에 상대를 만나 소원을 이루도록 도와주고 싶다.

   3세기경 중국 진()나라 시인 육운(陸雲)은 매미를 유심히 관찰한 뒤에 다섯 가지 특성을 들어 매미의 오덕(五德)’이라 하였다. 머리 모양과 곧게 뻗은 입 모양이 선비의 갓끈과 유사하니 선비와 같다(). 여느 곤충들과는 달리 이슬과 나무의 진을 먹으니 청렴하다(). 곡식이나 채소, 나무에 해를 끼치지 않으니 염치가 있다(). 자기의 집을 짓지 않으니 검소하다(). 때에 맞추어 울며 살다가 때를 맞추어 죽으니 신의가 있다().

   조선 시대를 배경으로 한 역사극을 보면, 왕과 왕세자는 곤룡포를 입고 집무할 때에 익선관(翼善冠)을 쓴다. 앞 꼭대기에 턱이 져서 앞이 낮고 뒤가 높은데, 뒤에는 두 개의 뿔을 날개처럼 달았으며 검은빛의 사() 또는 나()로 둘렀다. 이것은 매미의 날개를 본 뜬 것이다. 매미의 오덕(五德)을 생각하며 백성을 다스린다는 의지를 담은 모자라 하겠다. 익선관은 고려와 조선은 물론, 명나라와 베트남에서도 사용하였다고 한다. 이로 보아 왕은 매미의 오덕을 생각하며 나라를 다스려야 한다는 의식이 오래 전부터 널리 퍼져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는 매미는 그리스인의 진귀한 음식이라고 하였다. 중국이나 동남아시아, 중앙아프리카와 라틴아메리카의 몇몇 지역에서는 매미의 애벌레를 튀겨 먹는다고 한다. 일본 도쿄의 한 공원에서는 매미를 즐겨 먹은 사람들이 매미를 쓸어가므로 포획금지 명령을 내린 적도 있다고 한다. 굼벵이가 허물을 벗고 매미로 날아간 뒤에 남은 껍질은 선태(蟬蛻), 또는 선퇴(蟬退)라고 한다. 한의학에서는 이를 한약재로 쓴다. 그러고 보면 매미의 오덕에 식용, 또는 약재로 자기 몸을 내어주는 희생의 덕을 추가해야겠다.

   매미는 변온동물로 보통 15이상 되면 울기 시작하여 더운 여름에 마음껏 울어대다가 가을이 되면 사라진다. 예상보다 일찍 울거나 여름철이 지나 늦가을에도 우는 것은 기후 변화로 기온이 일찍 오르고, 늦게까지 내려가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주광성(走光性)인 매미는 대부분 낮에 울고, 밤에는 울지 않는다. 그런데 밤에도 우는 이유는 가로등 등 환한 인공 빛 때문에 밤을 낮으로 착각한 때문이라 하겠다. 얼마 전에 매미가 11층인 우리 아파트의 방충망에 붙어 갑자기 우는 바람에 깜짝 놀란 적이 있다. 이것은 매미가 방향을 잃어 급한 대로 방충망에 앉아 있다가 울음소리를 낸 것이리라.

   오늘도 공원의 숲에서는 매미들이 땅속에서 인고의 시간을 보냈음을 알리면서 사랑을 나눌 상대를 부르는 노래를 목청껏 부른다. 나는 공원 숲속의 벤치에 앉아 매미의 노랫소리를 즐기며 잠시 추억에 젖어본다. 이때 갑자기 위급함을 알리는 매미 소리가 들리더니 멀어지니, 매미가 까치에게 잡혀가는 모양이다. 매미채로 매미를 잡아 통에 넣으며 좋아하는 아이와 그 부모가 보인다. 매미의 한살이를 설명하고 날려 보내라고 하고 싶었지만, 나의 어린 시절이 생각나서 그만두었다. 매미가 까치에게든 사람에게든 잡히지 않고 마음껏 노래하며 짧은 여생을 즐겼으면 좋겠다.(2024. 8.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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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4일 고등학교 동창 L 목사와 62년 만에 해후했다. 그가 강원도 원주에서 목회를 한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각자의 일에 열중하느라 차일피일 미루다가 이제야 만났다. 며칠 전에 나는 문득 그가 생각나서 연락할 방법을 찾던 중이었다. 그런데 이심전심이라고 할까 그가 먼저 전화를 걸어와서 반갑게 통화하였다.

   그가 내 전화번호를 안 것은 나의 중·고·대학 후배이면서 제자인 C 교수를 통해서라고 한다. 그는 1년 후배인 C 교수와 고등학교 때 홍성제일감리교회에서 학생부 활동을 함께 한 사이였다. 나는 그와 통화 중에 셋이 함께 만나면 좋겠다고 하였다. 그는 C 교수가 서울과 원주의 중간 지점인 양평에 살고 있으니, 그곳이 어떻겠느냐고 말했다.

   나는 아내와 함께 왕십리에 용문행 전동열차를 탔다. 가는 동안 그가 어떻게 변했을까, 첫눈에 알아볼 수 있을까, 어떤 말을 먼저 할까를 생각하니 마음이 설레었다. 양수역에 내리니, 최 교수 부부가 마중 나와 있었다. 그와 만나기로 약속한 시간 전이었으므로 네 사람은 먼저 C 교수가 예약한 넓고 깨끗한 식당으로 가서 대화하였다. 약속 시간이 되자 C 교수가 문밖으로 나가 L목사를 맞아 함께 들어왔다. 부인은 몸살로 기침이 심해 혼자 왔다고 하였다.

   C 교수의 뒤를 따라 들어오는 그는 예대로 작은 체구였지만 건강해 보였다. 그의 손을 잡자 고등학교 때의 추억이 떠올라 더욱 정다운 모습으로 다가왔다. 약속한 장소에서 만났으니 바로 알아보았지만, 만약 길에서 만났다면 그냥 스쳐 지났을 것 같다. 그와 C 교수도 고등학교 졸업 후 처음 만난다고 했다.

   세 사람은 고등학교 시절의 일을 시작으로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나는 그가 서울감리교신학대학에 진학한 것을 어머니께서 몹시 부러워하셨다는 이야기를 시작으로 지난 일을 풀었다. C 교수는 서울감리교신학대학 기숙사에서 그와 하룻밤 같이 보내고 온 뒤에 입학원서를 보내주었지만, 아버지의 반대로 교육대학에 진학할 수밖에 없었던 과거를 고백했다. 그는 대학 시절 미국 선교회에서 전액 지급하는 장학금을 받아 졸업할 수 있었다고 한다. 세 사람의 화제가 종횡무진이었지만 학창 시절 얘기라서 옆에서 듣는 아내와 C 교수 부인도 재미있는 표정이었다.

   그는 신학대학 재학 중에 군에 입대하여 제대하고 복학해 졸업한 뒤에 여러 곳에서 목회하다가 원주감리교회로 와서 23년 동안 시무한 뒤에 은퇴하였다. C 교수는 공주교육대학을 졸업한 뒤에 고향에서 교사로 근무하다가 입대하여 월남전에 참전했고, 현지에서 미국방성 군무원으로 근무한 뒤 귀국하여 중등교사 자격검정고시, 서울시 순위교사에 합격하여 중학교 교사로 근무하면서 공부하여 대학 교수가 되었다. 나 역시 서울교육대학을 졸업한 뒤에 군 복무 후에 초·중등학교 교사를 거쳐 대학의 교수가 되었다. 세 사람의 젊은 날이 마치 하나님의 각본대로 펼쳐진 것처럼 대화가 이어져 그 계획과 섭리가 온 몸으로 느껴졌다.

   세 사람은 각자 맡은 일에 전념하여 뜻한 바를 이루었고, 지금 건강한 몸으로 편안한 은퇴생활을 한다. 이제는 하나님의 사랑과 은총에 감사하면서 뜻있는 일에 힘써야겠다. 그는 지금 감리교단에서 은퇴한 목회자 중 형편이 어려운 분들을 돕는 사마람(사마리아 사람들)’ 활동에 열심이다. C 교수는 언론계와 학계에서 활동하는 분들의 글을 분석하고 정리하여 문장의 이론을 정립하는 일에 온 힘을 기울인다. 나는 회혼기념문집을 내려고 글을 쓰고 있다. 출발은 미약했지만, 뿌린 대로 거두리라 믿고 하나님께 기도하며 감사한다.

   우리는 점심 식사를 마친 뒤에 한강변에 있는 카페로 옮겨 차를 마시며 아내들의 얘기에도 귀를 기울였다. 오늘 모임을 주선하고 환대해 준 C 교수의 부인 홍 여사께 감사한다. 우리는 다음에 원주에서 만날 것을 기약하고 헤어졌다. 돌아온 뒤에 그가 문자 메시지를 보내왔다. “까까머리 소년들이 백발이 되어서야 다시 얼굴을 보게 되었네 그려. 열심히 산 모습을 보게 된 것 같아 반가웠어. 피차 갈 날도 얼마 남지 않은 것 같은데 남은 동안 자주자주 봤으면 좋겠네.” 이 소박한 바람이 차질 없이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2024. 7. 13.)

   어제 아내와 함께 P 교장의 남편 장례식장에 다녀왔다. P 교장은 30여 년 전에 교육대학원에서 가르치고 석사논문 지도를 한 여제자이다. 그가 두 학기 강의가 끝난 뒤에 나의 지도를 받겠다고 하여 사제의 인연을 맺게 되었다. 그는 수강 태도가 좋았고, 내가 지도하는 석사·박사 과정의 재학생과 졸업생의 연구모임인 월곡회에도 열심히 참여하여 활동하였다.

   나는 그가 3년 과정을 마친 뒤에 좋은 논문을 쓰고 석사학위를 받을 거라고 생각하였다. 그런데 삼천포에서 열리는 월곡회 연구 모임에 참석하여 학업을 중단하겠다고 하였다. 깜짝 놀라 그 연유를 물으니, 남편이 뇌출혈로 쓰러져 병원에 입원하게 되어 학업을 계속할 수 없겠다고 하였다. 나는 근황을 자세히 들은 뒤에 힘주어 말했다. 남편의 병은 쉽게 낫는 병이 아닌 것 같으니 장기적인 계획을 세워야 한다. 석사학위를 받은 뒤에 승진하려던 계획과 교육계에서 펼치려던 꿈을 접고, 병간호에 매몰되어서는 안 된다. 힘들고 고생스럽겠지만, 병간호와 꿈의 실현을 위한 노력을 병행하기 바란다. 그래야 두 아들도 어려움을 견뎌내는 엄마를 보며 기죽지 않고 힘을 내어 자기 할 일을 할 것이다.

   이어서 뇌출혈로 쓰러져 오랜 기간 앓다가 세상을 떠난 사람, 오랜 기간 앓는 남편을 간호하다가 찌든 모습을 보이는 사람을 예로 들며 설득하였다. 남편의 병에 대한 걱정과 경제적인 어려움, 눈앞에 닥친 모진 현실에 대한 원망과 분노회한으로 괴로운 그에게 나의 말이 모질게 들려 그의 마음을 아프게 하였을지도 모른다. 그는 참았던 울음을 터뜨려 한동안 오열한 뒤에 울음을 그치고, 내 말을 명심하겠다고 하였다. 그 뒤로 그는 29년 동안 투병하는 남편을 간호하면서 온갖 어려움과 고통과 맞서 이겨내고 오늘을 맞이하였다.

   나는 빈소의 영정 앞에 서서 고인이 주님의 곁에서 영원한 안식을 취하게 해 달라고 간절히 기도하였다. 그런 뒤에 그의 얼굴을 대하니, 그가 한 말과 글 또는 그와 가까이 지내는 제자들을 통하여 알게 된, 그가 그 동안 겪은 일들이 떠올랐다. 30여 년 전, 그의 남편은 사업에 실패하여 살고 있던 작은 아파트마저 경매에 넘어가게 되었다. 그러자 그 충격으로 뇌출혈을 일으켜 쓰러져 의식을 잃었다. 남편은 여러 병원으로 옮겨 다니며 치료를 받은 끝에 회생하였으나 반마비로 겨우 화장실 출입을 할 수 있게 되었다. 그래서 재활치료를 받으며 투병생활을 하였다. 그런데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시아버지께서 뇌출혈로 쓰러지셨다. 그는 좁은 단간 방에 남편과 시아버지를 모시고 간호하는 한편, 고등학생중학생인 두 아들을 보살피며 학교에 근무하였다.

   얼마 뒤에 시아버지는 돌아가시고, 남편은 재활 치료를 받아 조금씩 회복되었으므로 한동안 희망을 가지고 살았다. 그런데 집 앞에 나갔다가 계단에서 넘어져 대퇴부 골절로 인공관절 수술을 받고 일어나지 못하게 되었다. 그래서 남편은 장애등급을 받고 요양원에 장기 입원하였다. 천주교에서 운영하는 요양원에서는 남편을 잘 돌봐주었다. 그래서 그는 학교에 출근하면서 요양원에 있는 남편 뒷바라지를 하였다. 대학원 공부도 계속하여 좋은 논문을 쓰고 석사학위를 받았다. 학생을 가르치는 일을 열심히 하면서 현장 연구도 열심히 하였다. 그러는 동안에 그는 교감교장으로 승진을 하였고, 큰아들이 결혼하는 경사도 있었다.

   그는 몇 년 전에 40여 년 봉직하던 학교에서 교장으로 정년퇴임을 하였다. 그는 시간을 내어 성당 어르신대학, 교도소에 가서 노래 부르기와 리크레이션 지도를 하였다. 또 남편이 있는 요양병원을 비롯하여 여러 요양병원에 가서 환우들을 위한 노래 부르기 봉사활동도 아주 열심히 하였다. 그 때 남편을 비롯한 여러 환우들이 기뻐하며 고마워하던 모습은 그에게 큰 위로가 되었다.

   그는 온갖 짐을 자기에게 떠넘기고 오랜 동안 요양병원에서 생활하고 있는 남편에 대한 원망과 측은함, 아름다운 추억과 연민의 감정이 시도 때도 없이 분출하곤 하였다. 그래서 몸도 마음도 지쳐 하루하루가 지겹고, 견디기 어려울 때가 많았다. 그럴 때에는 국내의 성지를 순례하며 신앙의 선배들이 겪은 고난과 믿음을 성찰하고, 피정하며 마음을 가다듬고, 기도하며 주님께 의지하였다. 그러는 동안 신앙의 선배들이 아픔과 고통을 겪으며 남긴 신앙의 메시지를 깨닫기도 하고, 자기의 처지를 신앙의 힘으로 이겨낼 선하고 의로운 용기를 얻기도 하였다.

   그는 남편 간호하는 일에서 벗어나 틈틈이 자기 일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요양병원의 요양보호사들이 애써주는 덕임을 깨닫고 감사하는 마음이 커졌다. 그래서 72세 되던 해에 나이를 무릅쓰고 요양보호사를 양성하는 학원에 등록하여 이론 공부와 실습을 마치고, 시험에 통과하여 요양보호사 자격증을 땄다. 그리고 남편이 있는 요양병원에 가서 6개월 동안 요양보호사로 일하면서 남편을 대하는 마음으로 입원해 있는 어르신들을 보살폈다. 병원 규정상 남편을 직접 보살피지는 못하지만 일이 끝난 뒤에 면회할 수는 있었다. 남편은 매일 그를 만나는 것을 기뻐하였고, 건강 상태도 조금 좋아졌다. 그래서 음식을 스스로 섭취하지 못하여 끼웠던 콧줄을 제거할 만큼 몸이 좋아졌다.

   이런 체험을 하면서 그는 집에 가서 가족과 함께 지내다가 하나님 곁으로 가고 싶다는 남편의 마지막 소원을 들어주기로 마음먹었다. 그래서 묵은 살림살이를 처분하고, 실내 단장을 한 뒤에 남편을 집으로 모셨다. 그가 고생할 것을 염려하여 반대하던 아들들도 아버지의 귀가를 환영하고 아버지 간호를 도왔다. 그는 그로부터 몇 달 동안 주변의 일들을 모두 끊고, 오직 남편의 곁에만 있었다. 집으로 돌아온 남편은 편안하고 행복하다며 하나님께 감사하고, 그의 노고를 치하하였다. 그리고 아들들과 며느리, 손자에게 정겨운 인사를 한 뒤에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하였다고 한다.

   장례식장에서 만난 그는 그동안 병수발에 지친 때문인지 작은 체구가 더 왜소해 보였다. 문상해 주어서 고맙다는 인사를 하는 화장기 없는 그의 얼굴을 보니, 한없이 애잔한 마음이 들었다. 그러나 30년 가까이 남편 병 수발을 하고, 70이 넘은 나이에 요양병원에서 간병 체험을 한 뒤에 남편을 집으로 모셔 집에서 죽고 싶다는 마지막 소원을 들어준 그의 섬김과 희생의 마음은 그 무엇보다 넓고 크게 느껴졌다. 그는 보통 사람은 감히 엄두를 낼 수 없는 큰일을 한 작은 거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장례식장에서 교장을 지낸 서울교대 제1회 동기 두 사람을 만났다. 그가 부장교사일 때와 교감일 때 함께 근무하였다는 두 사람은 그가 학교에 근무할 때의 태도와 생활 모습을 이야기하였다. 또 그곳에서 그와 가깝게 지내는 대학원 제자 두 사람을 만나 그의 남편에 대한 사랑과 존경, 섬김과 봉사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모두 그가 교육에 대한 열정이 남달랐고, 남편과 자식을 위한 섬김과 희생이 컸음을 느끼게 하는 감동적인 이야기였다.

   이제 병고에 시달리던 남편은 이를 벗어나 주님 곁에서 편히 쉬면서 그동안 희생과 섬김을 실천한 그에게 감사의 미소를 보낼 것이다. 이제 그가 남편을 보낸 아쉬움과 슬픔, 더 잘 보살피지 못하였다는 회한의 마음을 훌훌 벗고, 마음의 평안과 용기를 회복하여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두 아들과 며느리, 손자와 함께 행복을 누리기를 기원한다. (2024. 6. 26.)

   수덕사는 충청남도 예산군 덕산면 수덕사안길 79에 있다. 서해를 향한 차령산맥의 낙맥이 만들어 낸 덕숭산 기슭에 자리 잡고 있다. 내가 다닌 갈산초등학교, 갈산중학교, 홍성고등학교는 10km쯤 떨어진 곳에 있다. 그래서 초·중·고교 시절에 78회 소풍을 갔던 친숙한 곳이다.

   이 절은 백제 위덕왕(554597) 때 창건되었다. 이곳에는 여러 건물과 석탑이 있지만, 가장 주의를 끄는 곳은 대웅전이다. 대웅전은 고려 충렬왕 34(1308)년에 건축된 목조 건물로, 국보 제49호로 지정되었다. 영주 부석사의 무량수전, 안동 봉정사의 극락전과 함께 고려 시대의 목조 건물로 유명하다.

   나는 얼마 전에 수덕사를 다시 찾았다. 학교를 졸업하고서도 여러 번 왔던 곳이지만, 다시 이곳저곳을 살펴본 뒤에 대웅전 뒤편에 있는 큰 바위 관음암 앞에 섰다. 그 앞에는 불상이 서 있고, 돗자리가 깔려 있다. 그 옆 축대의 벽면에 수덕 각시가 바위틈으로 들어갔다는 전설을 간략히 적은 대리석판이 붙어 있다. 이곳을 찾은 사람들의 행동을 보니, 관음암을 가리키며 이 바위가 수덕 각시가 들어간 바위라고 하면서 둘러보고 가는 사람, 대리석판에 새긴 내용을 찬찬히 읽어보고 가는 사람, 불상 앞의 돗자리에 신발을 벗고 올라서서 절하며 소원을 비는 사람이 있었다. 수덕 각시가 절을 중창하고 바위 속으로 들어간 이곳에 와서 기도를 하면 모든 소원이 성취된다는 소문이 널리 퍼져 있어 이곳에 와서 소원을 비는 사람의 발길이 끊어지지 않는다고 한다.

   나는 수덕 각시 이야기를 어렸을 때 들은 기억이 있다. 그런데 이 전설을 채록하려고 이곳에 와서 1999년에는 수덕사 포교국장 정암 스님, 2001년에는 이곳에서 사진관을 운영하는 홍순목 씨에게서 이 이야기를 채록하여 《함께 떠나는 이야기 여행》(민속원, 2001)에 수록하였다.

   정암 스님이 구연한 내용의 요지는 다음과 같다. 수덕사의 규모가 아주 작을 때 수덕이라고 하는 묘령의 아가씨가 움막에 묵으며 기도하였다. 그러자 인근 재력가의 자제인 정혜도령이 그에게 청혼하였다. 그는 절을 지어주면 혼인하겠다고 하였다. 절이 완공되기 하루 전날 밤에 정혜가 그에게 혼례를 올리고 신방을 차리자고 하였다. 그러자 그는 정혜에게 몸단장을 하고 나올 터이니 자기가 거처하는 움막에서 기다리라고 하였다. 기다리다 지친 정혜가 안으로 들어가 보니까 그가 바위틈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그래서 다급한 마음에 그를 잡았으나 다 잡지 못하고 그의 버선만 잡았다. 그는 버선만 남긴 채 바위틈으로 들어가고 말았다. 그 후로 바위틈에서 버선 모양의 꽃이 핀다. 이를 버선꽃또는 ‘골담라고 한다.

   홍순목 씨가 구연한 내용 역시 앞 이야기와 기본 줄거리는 같다. 그러나 남주인공을 부자 정혜대신 목수 덕숭도령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덕숭이 마음 깊이 사랑하고 흠모하였던 그를 잃은 뒤에 세상에 나가 결혼하지 않고 정혜사에서 도를 닦으며 일생을 보냈다고 하는 이야기가 첨가되어 있다. 남주인공의 이름을 앞 이야기에서 정혜라고 한 것은 대웅전 뒤편에 정혜사가 있는 것과 관련이 있고, 뒷이야기에서 덕숭이라고 한 것은 수덕사가 있는 산이 덕숭산인 것과 관련이 있는 것 같다.

   불심이 두터운 수덕은 이곳에 절을 짓겠다는 염원을 실현하기 위해 열심히 불공드리는 모습을 사람들에게 보인다. 그의 미모에 반한 많은 남자들이 청혼을 하자, 그는 이곳에 절을 지어주는 사람과 혼인하겠다고 한다. 그래서 앞 이야기에서는 부자인 정혜, 뒷이야기에서는 재능이 있는 목수 덕숭의 청혼을 받아들인다. 절이 완공되기 하루 전날 밤에 정혼자가 그에게 혼인예식을 올리고 신방을 차리자고 제안한다. 그는 이를 뿌리치고 버선만 남긴 채 바위 속으로 들어간다. 그래서 절은 완공되었지만, 많은 돈과 시간과 노동력을 바친 총각은 실망과 좌절을 안게 된다.

   이야기의 겉면만 보면, 수덕은 자기의 미모를 이용하여 정혜의 재물이나 덕숭의 기술과 노력을 절을 짓는 데에 모두 바치게 한다. 그리고는 절이 완공되자 혼인 약속을 저버린 채 사라져버린 거짓말쟁이로, 사기성이 농후한 나쁜 여인이다.

   그러나 좀 더 깊이 생각해 보면, 수덕은 불심보다는 여인의 미모를 탐하는 마음이 더 큰 정혜나 덕숭으로 하여금 탐심을 버리고 자기가 가진 재물이나 기술·노동력을 불심을 닦는 도량을 짓는 데에 바치게 하였다. 그리고 나중에는 덕숭으로 하여금 불도에 귀의하여 진정한 도를 깨우칠 수 있도록 하였다. 이런 점에서 보면, 수덕은 자기의 미모를 이용하여 보시와 각성의 도를 가르친 신앙의 여인이라 하겠다. 수덕을 관세음보살의 화신으로 보는 것 역시 같은 해석이라 하겠다.

   관음암을 버선꽃과 관련지으며 다시 보니, 별 생각 없이 그 앞을 지나다닌 젊은 날의 발걸음이 부끄럽게 느껴진다. 버선꽃이 필 때 다시 찾아와서 봐야겠다고 생각하며 발길을 돌렸다.   (2024. 6. 3.)

                     대웅전 뒤편에 있는 관음암.  위쪽에 골담초(일명 버선꽃) 가지가 보인다. 

                   

                  충남 서산시 운산면 개심사 경내에 피어 있는 골담초. 일명 버선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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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얼마 전에 아내와 함께 경북 영주시 부석면 복지리 봉황산 기슭에 자리 잡은 부석사를 찾았다. 부석사는 신라 문무왕 16(676)년에 화엄종의 종조인 의상 대사(義湘大師)가 창건한 절이다. 의상 대사는 중국 당나라로 가서 중국 화엄종의 시조인 지엄(智儼) 대사 문하에서 수학하고 돌아온 뒤에 왕의 뜻을 받들어 이 절을 창건하였다. 여기에는 고려 시대에 지은 무량수전(국보 제18)과 조사당(국보 제19), 신라 시대 유물인 무량수전 앞의 석등(국보 제17), 소조여래좌상(국보 제45), 주사당 벽화(국보 제46), 석조여래좌상(보물 제220), 삼층석탑(보물 제249), 당간지주(보물 제255) 등의 문화재가 있다.

   무량수전 서편에 큰 바위를 받침으로 깔고 앉은 넓고 큰 바위가 있다. 이 바위는 밑 부분이 받침에 완전히 닿지 않고 공중에 떠 있다고 한다. 그래서 이 바위를 부석(浮石)이라 하고, 절 이름을 부석사(浮石寺)라고 하였다고 한다. 여기에는 의상 대사가 부석사를 지을 때 이를 방해하는 이교도들을 선묘(또는 용녀)가 신통력으로 물리쳤다는 흥미로운 이야기가 전해 온다.

   의상 대사는 문무왕 1(661)년에 신라에 왔다 가는 당나라 사신의 배를 타고 중국으로 갔다. 그가 양주의 주장(州長)인 유지인(劉至仁)의 집에 머무를 때에 그의 딸 선묘(善妙)가 그에게 연정을 품게 되었다. 그는 선묘의 마음을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고, 법도로 대하여 그녀를 제자로 만들었다. 그는 안남성 종남산 지장사로 가서 지엄 대사의 문하에서 10년간 공부하였다.

   그는 일이 생겨 갑자기 귀국하게 되었다. 돌아오는 길에 양주에 들러 선묘를 만나려 하였으나 출타 중이어서 만나지 못하고, 급히 항구로 가서 배를 탔다. 이 소식을 들은 선묘가 항구로 달려가니, 배가 막 출발하였다. 선묘가 그를 위해서 준비해 두었던 가사와 법복을 배를 향해 던지니, 바람을 타고 배에 닿았다. 선묘는 자기 몸이 용이 되어서 의상 대사를 보호하게 해 달라고 발원하였다. 그래서 선묘는 용이 되어 그를 보호하며 신라에 왔다.

   의상 대사가 부석사 자리에 절을 지으려고 하자 오백여 명의 이교도들이 이곳은 우리들의 기도처이므로 절을 지을 수 없다며 막아섰다. 그래서 어쩌지 못하고 있을 때 용녀 선묘가 현신하여 커다란 바위를 공중에 세 번이나 들어 올리며 이교도들을 위협하였다. 이교도들이 놀라 겁을 먹고 물러서자 바위를 내려놓았다. 이 바위가 땅위에 떠 있으므로 부석이라 하고, 그 절을 부석사라고 하였다. (《삼국유사》. 유증선, 《 영남의 전설 》. 최운식, 《다시 떠나는 이야기 여행 》 참조)

   부석에 관하여 조선 영조 때의 실학자 이중환은 《택리지(擇里志) 》에 다음과 같이 기술하였다. 불전 뒤에 큰 바위 하나가 옆으로 섰고, 그 위에 큰 돌 하나가 지붕을 덮어 놓은 듯하다. 얼른 보면 위아래가 서로 이어진 듯하다. 그러나 자세히 살피면 두 돌 사이가 서로 눌려져 있지 않다. 약간의 빈틈이 있어 새끼줄을 건너 넘기면 나고 드는 데에 걸림이 없다. 그래서 떠 있는 돌인 줄을 알게 된다.

   이와 비슷한 이야기가 충청남도 서산시 부석면에 있는 부석사에도 전해 온다. 의상 대사가 도비산에 절을 지으려고 하였다. 그런데 그 산에 본거지를 둔 해적들이 방해하여 절을 지을 수 없었다. 이 때 그가 당나라에서 올 때 만났던 용녀가 도비산 꼭대기에 나타나 큰 바위를 들고 해적들에게 이 산을 떠나라고 했다. 도둑들이 떠나자 용녀는 들고 있던 바위를 앞바다에 던졌다. 그 바위는 간만의 차에 구애 없이 물에 떠 있는 것처럼 보이므로 뜬 바위’, 부석이라 하였다. 그 산에 지은 절을 부석사라고 했다. 그리고 그 산을 섬이 날아간 산이라 하여 도비산(島飛山)이라고 했다. (최운식, 《한국구전설화집 4 》).

   영주 부석사 전설과 서산 부석사 전설은 부석사의 유래를 용녀, 부석과 관련지어 설명한다는 점에서 같다. 그러나 서산 부석사 전설은 바다를 배경으로 함에 따라 이교도해적’, ‘선묘용녀로 바꾸었다. 또 충남 서산시에 부석면이라는 행정 구역, ‘부석사라는 절 이름, ‘도비산이라는 산 이름, ‘부석이라는 바위가 있다. 이로 보아 서산 부석사 전설이 민간에 끼친 영향이 더 컸던 것 같다.

   불교가 이 땅에 들어온 것은 아주 오래 전이다. 고구려는 소수림왕 2(372)년에 전진의 왕 부견이 승려 순도를 파견하여 불상과 불경을 전해 왔다. 12년 뒤에 인도의 마라난타가 백제에 불교를 전하였다. 그로부터 훨씬 뒤에 고구려의 묵호자가 신라의 서북 지방인 일선군 모례(毛禮)의 집에 기숙하면서 불법을 전하였다. 그래서 모례는 신라인으로서 최초의 불교 신도가 되었다. 그 후 소지마립간 때에 고구려에서 아도(阿道. 고구려에 왔던 중국승 아도와는 동명이인)가 와서 불법을 전도한 뒤로 신봉하는 자가 늘어났다. 신라 왕실에서는 불교 공인을 위하여 노력하였으나 귀족들과 백성의 반대로 인해 실패로 돌아갔다. 법흥왕은 527년에 이차돈(異次頓)의 순교를 계기로 배불파를 제압하고 불교공인을 선포하였다.

   모든 종교는 전도에 뜻을 두고 이를 위해 온힘을 기울인다. 한 종교가 다른 문화권에 자리를 잡으려고 할 때에는 그 지역에 전해오는 종교 또는 민간신앙과의 충돌이 불가피하다. 그 충돌을 이겨내면 전도에 승리하는 것이고, 이기지 못하면 그 종교는 그곳에 뿌리를 내리지 못하고 말 것이다. 외래종교인 불교가 신라에서 유난히 전도하기가 힘들었던 것은 신라에 민간신앙의 뿌리가 깊어 저항이 컸기 때문이다.

   위 이야기에서 이교도해적은 민간신앙의 신도들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그리고 절터는 예로부터 전해오는 민간신앙 신도들의 기도처였을 것이다. 이들이 불교의 포교를 못마땅하게 여기는 것은 당연하다 할 것이다. 그런데 자기들의 성지(聖地)를 빼앗아 절을 지으려고 하니 이에 적극 반대하였다. 이 때 선묘, 또는 용녀가 큰 바위를 번쩍 들고 위협하여 이들을 굴복하게 만든다. 이것은 불교가 포교하며 절을 지을 때 민간신앙과 충돌하여 어려움을 겪었으나 신이한 법력을 보임으로써 민간신앙을 제압하고, 승리하였음을 드러낸다.

   선묘가 바다로 던진 가사와 법복이 의상 대사가 탄 배에 닿는다. 선묘가 소원대로 용녀가 되어 대사를 호위하고 신라로 온다. 용녀가 큰 바위를 들고 이교도들을 위협한다. 또 선녀가 내려놓은 바위가 바닥에 닿지 않고 떠 있다. 이런 것들은 실제로는 있을 수 없는 일로, 불교적인 법력을 영검하게 나타내려는 의도에서 차용한 설화적 수사이다. 승려나 불심이 있는 사람들은 이러한 이야기를 만들어 퍼뜨렸다. 그래서 불교를 민간신앙보다 우월한 종교, 포교에 승리한 종교라는 인식을 갖게 하였다.  (2024. 4. 30.)

영주 부석사 무량수전
무량수전 서편에 있는 부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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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등학교 1학년 때 국어과 정 선생님은 한문 공부를 많이 하신 분이셨다. 선생님께서는 가끔 한문 명구를 칠판에 쓰시고, 뜻을 설명해 주셨다. 그 중 가장 먼저 떠오르는 말은 정신일도 하사불성(精神一到何事不成)이다. ‘정신을 한 곳에 집중하면 이루지 못할 일이 없다.’는 뜻이다.

   이 말은 중국 남송 때의 유학자 주자(朱子, 1130~1200)가 한 말이라고 한다. 이 말은 그 의미를 곱씹어 볼수록 좋은 말이어서 꿈 많던 소년 시절의 나에게 용기를 주었고, 내 마음이 산란할 때마다 나를 일깨우는 명구가 되었다. 이 말을 책상 앞 벽에 써서 붙이고, 마음에 새겼다. 그로부터 먼저 목표를 설정하고, ‘하면 된다라는 생각으로 집중력을 강화하며 마음을 다잡곤 하였다. 설정한 목표 달성을 위해 노력하며 긴장이 풀리거나 나태해질 때에는 이 말을 되뇌며 마음을 다잡곤 하였다. 그래서 이 말은 나를 일깨우는 경구(警句)가 되기도 하였다.

   교사로, 교수로 교단에 섰을 때에는 계제를 살펴 학생들에게 이 말을 써 주고, 설명하였다. 그리고는 내가 어렸을 때 들은 옛날이야기 <바위를 뚫은 화살>을 이야기해 주곤 하였다.

   옛날에 무과를 준비하는 젊은이가 산속에서 활쏘기를 비롯한 무술 훈련을 하고, 해가 진 뒤에 집으로 향하였다. 그가 어두움을 뚫고 고개를 넘으려고 하는데, 커다란 호랑이가 앞을 가로막았다. 그는 놀란 마음을 가다듬고, 호랑이를 활로 쏘아 맞히지 못하면 내가 죽는다는 생각에 혼신의 힘을 기울여 세 대의 화살을 날렸다. 화살을 맞은 호랑이가 더 이상 다가오지 않으므로 집으로 달려왔다.

   이튿날 그 곳에 가보니, 큰 바위에 자기 화살 세 대가 꽂혀 있었다. 그는 지난밤에 바위를 호랑이로 알고 화살을 쐈음을 알고 겸연쩍었다. 그러나 화살이 바위를 뚫은 것을 흡족히 여기며 다시 화살을 쏘아보았다. 그러나 화살은 바위에 튕겨나가곤 하였다. 이 이야기는 옛날부터 널리 퍼져 전해오면서 필사의 각오로 정신을 집중하고 혼신의 노력을 기울이면 이루지 못할 일이 없다는 교훈적 의미를 일깨워 주었다.

중국 사마천이 쓴 《사기(史記)》 「이광장군열전어느 날 이광(李廣, B.C. ?119)이 사냥을 나갔다가 수풀 속에 큰 호랑이가 있는 것을 보고 활을 쏘아 명중시켰다. 그런데 가까이 가서 보니 그것은 바위였다. 그리고 살촉이 바위에 깊이 박혀 있었다. 그러나 다시 한 번 활을 바위에다 대고 쏘았으나 살촉은 바위를 뚫지 못했다.”라는 이야기가 실려 있다. 내가 어렸을 때 들은 바위를 뚫은 화살이야기가 이 이야기를 모태로 하였는지는 알 수 없다.

  고등학교 때 정 선생님은 모사재인성사재천(謀事在人成事在天)’이란 말과 함께 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이란 말도 가르쳐 주셨다. 앞의 말은 계획을 세우는 것은 사람의 일이지만, 그 일의 성사 여부는 하늘에 달려 있다는 뜻이고, 뒤의 말은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을 다하고 하늘의 뜻을 기다리라는 말이다. 이 말은 계획한 일의 결과는 하늘에 맡기고 최선을 다하면 바라던 바를 이룰 수 있다는 믿음을 갖게 해준다. 혹시 일이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그냥 하늘의 뜻으로 알고 실망하거나 비관하지 말라는 뜻도 담겨 있다.

   이 말의 출처는 《삼국지연의》이다. 촉한의 제갈공명(諸葛孔明)은 유비가 사망한 뒤에 위나라와 싸울 때 계책을 세워 사마의(司馬懿)의 군사를 골짜기로 유인한 뒤에 화공(火攻)을 하였다. 그런데 뜻밖에 큰비가 내려 불이 꺼짐으로 큰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다. 이를 보고 제갈량은 모사재인 성사재천이라며 한탄하였다고 한다.

   이와 똑같은 뜻을 가진 말이 신약성경에도 있다. 잠언161절의 계획은 사람이 세우지만, 결정은 주님께서 하신다라는 말이다. 지혜의 왕으로 불리는 솔로몬의 이 가르침은 계획을 세우고 최선의 노력을 기울이면 하나님께서 이루어주신다고 한다. 계획을 세워 추진하는 일의 성격과 내용, 기울이는 노력의 정도를 보아 하나님께서 이루어 주신다는 믿음을 가지라는 뜻이 담겨 있다.

   ‘정신일도 하사불성’, ‘모사재인 성사재천’, ‘계획은 사람이 세우지만, 결정은 주님께서 하신다라는 말씀은 젊은 시절의 나를 일깨워주는 명구였다. 이런 명구를 가르쳐주시고, 진학지도를 바르게 해주신 정 선생님 생각이 간절하다. (2024. 3.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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