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교회에는 목사 아들을 둔 가정이 여럿 있다. 그 중 내가 가끔씩 만나 대화하는 가정은 셋이다. 한 가정은 장로와 권사 부부, 둘은 권사 부부 가정이다. 이 중 한 가정은 아들 둘이 다 목사가 되었고, 다른 두 가정은 한 아들만 목사가 되었다. 이들의 아들들이 목사가 되기 전과 후의 마음을 이들이 《장위교회 50년사》에 쓴 글과 나와 대화한 내용을 바탕으로 살펴본다. 이들은 처음에 아들이 목사 되는 것을 바라지 않았다. 목사는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는 경우가 있고, 교인들에게 절제와 모범을 보이는 신앙인으로 고난의 길을 걸어야 한다. 그래서 아들이 평신도로 신앙생활 잘 하면서 살기를 바랐다. 한 권사님은 처녀 시절에 목회자의 아내가 되는 것이 싫어서 청년 전도사의 사랑을 뿌리쳤다. 그런데 두 아들 목사의 어머니가 되었다면서 하나님의 뜻은 알 수 없다고 하였다.

   이들의 아들들은 부모의 권유는 없었지만, 부모의 신앙생활에서 보고 배운 것이 목사가 될 결심을 하는 바탕이 되었다. 형제 목사의 아버지는 아들들이 초등학교, 중학교 다닐 때까지 주일에는 무슨 일이 있어도 교회에 나가 예배드리게 하였다. 또 다른 한 아버지는 교회의 잡다한 일을 도맡아 하고, 증개축 공사를 할 때에는 뒤처리를 마다하지 않았다. 어머니는 여선교회 회장으로 교회 안의 일은 물론, 교회 밖에 나가 봉사하는 일도 열심히 하였다.

   K 목사는 어린 시절 아버지를 따라 교회에 갔다가 아버지를 따라 교육관 지하에서 벽에 묻은 콘크리트 자국을 긁어내는 일을 하였다. 또 교회 바닥에 떨어진 휴지 줍기, 교육관 바닥 청소, 넘어졌거나 삐뚤어진 의자 바로 세우기 등도 하였다. 그는 이런 일을 한 것이 모세가 시내산에서 하나님을 만난 것과 같은 체험이었다. 그리고 소중한 추억이 되었다고 한다.

   A 목사는 청년 시절에 지하 교육관에서 여러 분이 늘 기도하는 모습을 보았다. 매일 저녁에 와서 기도하다가 난로 옆에서 자고, 새벽기도를 드린 뒤에 귀가하는 권사님들도 보았다. 그는 금요기도회의 모습도 잊을 수 없다고 하였다. 무릎을 꿇고 조용히 기도하는 분이 있는가 하면 큰 소리로 부르짖어 기도하는 분이 있었다. 혼자 흐느끼다 일어서는 분, 한 시간 내내 찬양을 하는 분, 기도하고 성경을 읽는 분도 있었다. 이런 모습들은 그에게 큰 감동을 주었다.

   B 목사는 고등학교 학생 때 학생부 예배에 빠짐없이 참석하면서 교사들의 따뜻한 사랑을 받았다. 학생부 담당 교육목사는 학생들에게 제자훈련을 시켰다. 1년 넘게 매 주일 저녁 예배 후 교육관에서 밤 12시가 되도록 말씀을 가르치고 훈련하였다. 그 때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났고, 앞으로 살아야 할 길을 찾았다고 한다.

   네 사람이 부모님의 적극적인 권유가 없었는데도 목사가 되겠다고 결심한 것은 먼저 하나님의 선택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 다음은 어려서부터 부모님의 믿음 생활을 보면서 받은 교훈, 그리고 담임목사님 또는 교육목사님의 기도와 훈련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고등학교를 졸업한 뒤에 바로 신학대학에 진학하기도 하고, 일반대학을 다니다가 또는 졸업한 뒤에 신학대학에 가서 공부하고 목사가 되었다.

   K 권사님 부부는 아들이 교회를 개척할 때 아들 내외가 거의 노숙자와 같은 생활을 하는 모습을 보고 마음이 아팠다. 건축기금에 보태기 위해 며느리가 상품 외판원 노릇을 하는 것도 알았다. 교회를 건축할 때에는 아들이 벽돌을 쌓고, 며느리가 리어카에 벽돌을 나르며 고생하는 모습도 보았다. 김 장로 부부는 아들 목사가 산골교회에 부임하여 산에서 낙석이 굴러 내릴 것 같은 길, 홍수로 패여 무너져 내릴 것 같은 길을 하루에도 몇 번씩 왕래하는 아들 걱정이 떠나지 않았다. 장마철에는 사택의 축대가 무너질까 염려되어 깊은 잠을 이루지 못하기도 하였다. 아침과 저녁으로 연탄을 가는 아들 목사의 모습, 서재에 들어온 뱀을 잡지 못해 그대로 밤을 새운 며느리의 모습이 어른거려 괴로운 시절도 있었다.

   목사 부모는 아들이 개척교회에서 고생하는 것을 보고 마음 아파하면서도 도와줄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는 것이 한스러웠다. 그래서 밤낮으로 하나님께 매달려 울부짖으며 기도하였다. 이러한 기도의 응답을 받아 아들들의 고난은 시나브로 해소되었다. 이들 중 한 목사는 경기도에서 목회에 가장 성공한 목사가 되었다. 젊은 세 목사 중 한 분은 자립교회를 담임하였고, 두 분은 교인이 늘어가고 있어 전과 같이 고생은 하지 않게 되었다.

   이들은 아들 목사가 초심을 잃지 않고 하나님 중심의 선한 목자가 되기를 기도한다. 물질과 명예가 믿음보다 앞서는 세태에 흔들리지 않고, 하나님 앞에서나 자기 자신에게 부끄럽지 않은 목회자가 되기를 간절히 기도한다. 이제 이들은 아들이 목사가 된 것을 가장 잘된 일이라며 자랑스럽게 여기고 감사하며 살고 있다. 나는 이분들이 부럽고 존경스럽다. <기독교연합신문 제1700, 2023. 12. 24.>

   내 연구실에는 한자로 斷金如蘭(단금여란)이라고 쓴 작은 액자가 걸려 있다. 은사이신 구용 김영탁 교수님께서 써 주신 휘호이다. 《주역(周易)》 「계사전(繫辭傳)에 나오는 二人同心其利斷金 同心之言其臭如蘭(이인동심기리단금 동심지언기취여란)에서 따온 말이다. 두 사람이 마음을 같이 하면 그 날카로움이 쇠도 끊고, 마음을 같이 하여 하는 말은 그 향기가 난초와 같다는 뜻이다.

   이와 같은 뜻을 지닌 말이 성경에도 있다. “땅에서 너희 가운데 두 사람이 합심하여 무슨 일이든지 구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그들에게 이루어 주실 것이다.”(마태복음18:19). 가족이나 어느 집단의 구성원이 합심협력하여 기도하면, 다 이루어질 것이라고 한다. 합심협력의 중요성을 주역》보다 더 구체적이고 적극적인 표현으로 일깨워 준다.

   우리 교회 여자 권사님이 오래 전에 쓴 글을 읽고 감명을 받았다. 그는 시부모님과 시누이, 시동생과 함께 잘 살았다. 그런데 몸이 아프기 시작하여 여러 병원을 다니며 유명한 의사의 진료를 받고, 좋다는 약과 식품을 다 먹었지만 효험이 없었다. 어느 날 아침에는 피를 토하기까지 하였다. 서울대학병원의 간() 전문의에게 오랫동안 진료를 받았으나, 역시 효험이 없었다. 그런데 얼마 뒤에는 담당 의사가 약도 주지 않고, 공기 좋은 곳에 가서 좀 쉬라고 했다.

   그는 이제 내 병은 고칠 수 없구나!’ 하는 생각에 눈앞이 아득하고, 하늘이 무너지는 듯하였다. 그는 병원 앞에서 통곡하였다. 그는 절망적인 마음을 추스르고 큰 교회 전도사로 일하고 있는 언니에게 전화를 하였다. 언니는 가까운 교회에 나가 새벽기도를 하라고 하였다. 교회에 다니지 않는 그는 그날부터 집에서 가까운 교회에 가서 새벽기도를 드렸다. 기도할 줄 몰라 하나님, 제 병을 낫게 해 주세요.”하고 간절히 기도하였다. 주일 낮에는 언니가 섬기는 교회에 가서 예배를 드렸다. 어느 날 새벽에 인사도 드린 적이 없는 목사님께서 안수기도를 해 주시고, 우리 교회에 나오면 특별히 기도해 주겠다고 하였다. 그래서 망설이지 않고 그 교회에 등록하였다. 그날부터 목사님은 매일 교인 한 분과 함께 그의 집에 오셔서 기도해 주셨다. 병원에는 일주일 간격으로 다니면서 검사를 받고 약을 먹었다.

   얼마 후에 온몸에 멍이 생겼다. 그날로 병원에 가서 검사를 하니, 간수치가 1,000이 넘는다고 하면서(간수치 정상은 40미만) 바로 입원하라고 하였다. 그 날이 1231일이었는데, 입원하려고 하니 병실이 없을 뿐더러 13일까지 공휴일이라서 14일에 입원하기로 하고 집으로 왔다. 그날 밤 꿈에 한 노인이 그의 몸에 나쁜 못이 많이 있다고 하면서 다 뽑아주었다. 밤중에 언니한테 전화를 하였더니, 언니가 말했다. “너를 위하여 우리 교회 형제자매 여러분이 작정하고 철야기도를 하였는데, 오늘이 마지막 날이야. 이제 너는 다 나았다!”

   14일에 다시 서울대학병원에 입원하고 검사하였다. 의사 선생님은 검사 결과를 보시고, 그동안 무슨 일을 하였느냐면서 퇴원하라고 하였다. 그 말에 놀라 항의하면서 이 병원에서 할 수 있는 검사와 치료를 다 해 달라고 졸랐다. 그래서 1주일 동안 다시 모든 검사를 받은 뒤에 병이 다 나았다는 판정을 받았다. 그는 기도를 들어주신 하나님의 은혜에 깊이 감사하며 날아갈 듯이 가벼운 마음으로 집에 돌아왔다.

   그 뒤로 그는 새벽기도회는 물론 모든 예배에 빠지지 않고 참석하였고, 여러 교회의 부흥회에도 다니면서 은혜를 받았다. 그 뒤로 그가 교회에 나가는 것을 못마땅해 하시던 시부모님이 교회 출석을 허락하심과 동시에 분가하라고 하셨다. 그 뒤로 그는 마음 놓고 교우들과 함께 봉사전도활동을 하였다. 얼마 후에 그의 기도가 이루어져 남편도 복음을 받아들였다. 합심 기도의 위력을 안 그는 집안에 어려운 일이 있을 때마다 온 가족이 합심하여 기도함으로써 어려움을 타개하며 살아왔다고 한다.

   며칠 전에 척추 수술로 3개월간 입원 치료를 받고 퇴원한 남자 권사님과 식사를 하면서 이야기를 하였다. 수술하기 전 집도 의사는 그 수술의 성공 확률이 그리 높지 않다면서 결과가 좋으면 휠체어를 타고 움직일 수 있을 것이라고 하였다. 그의 수술을 전후하여 그의 부인 권사님과 두 아들 목사님은 물론, 전 교인이 합심하여 수술의 성공을 위해 기도하였다. 그 결과 지팡이를 짚고 걸어서 교회에 출석할 수 있게 되었다. 집도 의사는 기적과 같은 일이라고 놀라며 어찌된 일인지 모르겠다고 하더란다. 이것은 많은 사람들이 합심하여 기도한 결과라 생각하고 감사한다. 그가 지팡이를 던져버릴 날이 속히 오기를 기도한다. <기독교연합신문, 1696호, 2023. 11.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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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람들은 먼 옛날부터 크고 작은 재난이나 질병을 겪으며 살아왔다. 옛 사람들은 이것을 신의 노여움이나 징벌에 의한 것이라고 여겼다. 그래서 신에게 제물을 바치며 재난이 없도록 해 달라고 빌었다. 또 해를 끼치는 신들이 아예 접근하지 못하게 하려고, 여러 가지 방책을 강구하기도 하였다. 그 예를 보면, 이스라엘 민족은 유월절에 양의 피를 문설주와 상인방에 바른다. 한국에서는 동짓날 팥죽을 쑤어 대문에 바르고, 대문 앞에 뿌리는 풍습이 있다.

   <출애굽기>를 보면, 이집트 총리가 된 요셉은 7년씩 이어지는 풍년과 흉년을 슬기롭게 대처하여 이집트의 구원자로 칭송을 받는다. 요셉의 인도로 이집트에 이주한 야곱의 가족 70명은 430년을 사는 동안 번성하여 큰 세력을 이루었다. 요셉을 알지 못하는 후세의 이집트 왕들은 이스라엘 민족을 종으로 부렸다. 이스라엘 민족이 고통을 호소하자, 하나님은 모세에게 이스라엘 민족을 이끌고 가나안 땅으로 가라는 명을 내린다. 모세는 이집트 왕에게 이스라엘 민족이 광야로 나가 하나님께 제사를 지낼 수 있도록 허락해 달라고 한다. 이집트 왕이 이를 거절하자, 모세는 이집트에 아홉 가지 재앙을 내렸지만, 허락하지 않는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열 번째 재앙을 내릴 것을 예고하고, 할 일을 알려준다. 이스라엘 백성은 모세의 명에 따라 일 년 된 수컷 양이나 염소를 잡아 그 피를 문설주와 상인방에 발랐다. 그리고 길을 떠날 차림으로, 그 고기를 불에 구워서 무교병을 쓴 나물과 함께 먹었다. 그날 밤 하나님의 사자가 이집트 사람의 집을 찾아다니며 사람과 짐승의 처음 난 것을 치셨다. 그러나 문설주와 상인방에 양의 피가 묻어 있는 이스라엘 사람의 집에는 아무런 해가 없었다. 열 번째 재앙을 당한 이집트 왕이 이스라엘 민족의 출발을 허락함으로써 이스라엘 민족은 탈출에 성공하였다. 유월절은 이를 기념하는 명절이다.

   한국에서는 예로부터 동짓날에 팥죽을 쑤어 성주신을 비롯한 가신들에게 바치고, 대문과 그 둘레에 뿌리는 풍습이 있다. 동짓날 팥죽을 먹는 풍습은 고려시대 이색의 《목은집》 이제현의 《익재집》에 이와 관련된 시가 있는 것으로 보아 고려 시대 이전부터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조선 후기에 홍석모가 쓴 《동국세시기》에는 동지팥죽은 역귀를 물리치기 위한 것이라 하였다.

   동지는 태양의 황경이 270° 위치에 있을 때로, 양력 1222일경이다. 밤낮의 길이는 하지로부터 낮이 차츰 짧아지고 밤이 길어지다가 동짓날에 극에 도달한다. 그리고 그 다음날부터는 차츰 밤이 짧아지고 낮이 길어지기 시작한다. 고대인들은 이날을 태양이 죽음으로부터 부활하는 날로 생각하고, 축제를 벌여 태양신에 대한 제사를 올렸다. 동짓날을 아세(亞歲)또는 작은설이라고도 하는 것은 동지가 태양의 부활을 뜻하는 깊은 의미를 지니고 있는 절기임을 말해 준다.

   팥죽의 주재료인 팥은 붉은 색을 띠는 곡식이다. 붉은 색은 밝은 태양, 활활 타는 불꽃을 상징하는 색이다. 이런 색을 귀신들은 무서워하고, 싫어한다. 그에 따라 민속에서는 붉은 색을 축귀(逐鬼)’, ‘축사(逐邪)’의 힘을 지닌 것으로 생각하였다. 옛사람들은 질병이나 재난의 원인을 잡귀잡신이 들은 때문이라 여겼다. 그래서 명절이나 특별한 날에는 붉은 색이 들어가는 음식을 만들어 신에게 바치고, 나누어 먹으면서 건강과 평안을 기원하였다.

   동지팥죽에는 쌀과 함께 새알심을 넣는다. 쌀의 흰색은 태양의 빛을 상징하는 흰색으로, 신성의 의미를 지닌다. 찹쌀이나 수수 가루로 동글동글하게 만든 새알심은 새의 알을 상징한다. 신화에서 알은 생명의 근원으로, 생산력을 상징한다. 따라서 팥죽의 쌀과 새알심은 흰색이 지닌 신성성과 새알심이 지닌 생산력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 그러므로 동지팥죽에는 팥의 붉은 색이 지닌 축귀축사의 의미, 쌀의 흰색이 지닌 신성성, 새알심이 지닌 생산력의 의미가 내포되어 있는 매우 특별한 음식이라 하겠다. 작은설인 동짓날에, 이러한 의미를 지닌 팥죽을 쑤어 성주신을 비롯한 가신들에게 바치고, 대문과 문 둘레에 뿌리는 것은 잡귀잡신이 가까이 오지 못하도록 막고, 건강과 평안을 기원하는 의미를 담고 있다.

   이스라엘 민족이 유월절에 양의 피를 문설주와 상인방에 바르는 것은 사람과 집짐승의 처음 난 것을 죽이러 다니는 천사에게 이스라엘 사람의 집임을 알려 재앙을 면하려고 하는 데서 시작된 것이다. 한국인이 동짓날 대문에 팥죽을 바르는 것은 잡귀잡신이 들어오는 것을 막기 위한 것이다. 두 가지 풍습은 재앙을 막기 위한 것이라는 점에서 일치한다. 그런데 이스라엘 민족의 풍습은 성경에 기록됨으로써 종교적 의미를 지니게 되었다. 이에 비하여 동지팥죽은 민속으로 전해 오다가 현대에는 그 의의가 약화되어 소멸의 위기를 맞고 있다.      <기독교연합신문 제1689, 2023. 10.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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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며칠 전에 아내가 동사무소에 자동차운전면허증을 반납하였다. 동에서는 노인의 운전면허증 반납을 권장하는 뜻에서 10만원이 들어 있는 교통카드를 주었다고 한다. 아내는 나에게 언제까지 자동차 운전을 할 생각이냐고 물었다. 나는 지금까지 큰 불편 없이 운전을 하고 있고, 운전면허증은 내년까지 유효하다. 그러므로 그 일은 내년에나 생각해 보려고 한다. 아내의 물음을 계기로 나의 운전 경력과 내가 탄 승용차에 관한 기억을 되돌아본다.

   나는 19792월에 자동차운전면허증을 받았다. 후배 교사의 소개로 이웃 초등학교의 교사들이 겨울방학을 이용하여 단체로 자동차운전교육을 받는 데에 동참하게 되었다. 이론과 실기 교육을 마치고 면허시험에 응시하였다. 이론시험에는 함께 응시한 교사들 모두 합격하였다. 그러나 실기시험에는 1차로 합격한 사람이 몇 명 안 되었다. 나는 다행스럽게도 한 번에 합격하여 면허증을 받는 기쁨을 맛보았다.

   자동차운전면허증을 받고 보니, 자동차를 사서 운전하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였다. 그러나 대학 교수가 된 지 1년밖에 안 된 나로서는 경제적인 여유가 없었다. 나는 연구하고 가르치는 일은 잘 하지만, 실생활 면에서는 단돈 1만원도 융통하지 못하는 손방이다. 그래서 아내에게 승용차를 살 수 있게 200만원만 빌려다 달라고 하였다. 아내는 정신이 어떻게 된 것 아니냐면서 펄쩍 뛰었다. 나는 승용차를 사려는 이유와 빚 갚을 계획을 차근차근 설명하였다.

   그 해에 나는 시간강사 시절에 나가던 때와 같이 외부 강의를 맡았다. 그래서 두 대학에 가서 여러 시간 강의를 해야 했다. 멀리 있는 두 대학 출강을 위해 오가는 시간을 아껴서 강의 준비를 하여야 한다. 나는 두 대학 강사료를 받으면 월급 건드리지 않고 꾼 돈을 갚을 수 있을 거라고 하였다. 그리고 방학에 자료조사 여행을 갈 때 커다란 가방을 메고 다니는 고생을 하지 않아도 되므로 승용차를 사야 한다고 하였다. 아내는 내 설득에 넘어가서 동료 교사한테 돈을 꾸어다 주었다.

   그래서 그해 4월에 기아자동차에서 나온 소형승용차를 구입하였다. 지금은 누구나 승용차를 가지고 있는 시대가 되었지만, 그 당시는 각 기관의 장이나 사업하는 사람이 아니면 자가용 승용차를 사서 탈 생각을 가지지 않을 때였다. 그런데 갓 임용된 교수가 자가용을 샀으니, 주위 사람들로부터 부러움과 함께 빈축을 사기도 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사고 싶은 것을 샀고, 유용하게 이용할 계획이 있었으므로 별로 신경을 쓰지 않았다.

   처음 구입한 브리사는 1000cc 미만의 소형차였지만, 꿈에 그리던 자가용 승용차였으므로, 중형이나 대형승용차가 부럽지 않았다. 장위동 집에는 주차장이 없었으므로, 동네 유료 주차장에 차를 세웠다. 차를 탈 때에는 학원에서 배운 대로 매일 엔진오일, 브레크오일, 타이어 공기압 등을 체크하고, 기름걸레로 차체의 먼지를 제거하곤 하였다. 차에 흙물이나 빗물 자국이 있을 때에는 물수건으로 깨끗하게 닦았다. 겨울에는 물을 데워가지고 나와서 차를 닦곤 하였다. 이런 열정과 정성은 처음 가진 승용차에 기울였던 것이고, 그 다음에 구입한 승용차부터는 차츰 게을리하였다. 요즈음에는 운행에 꼭 필요한 사항만 점검하거나 그것도 미루는 때가 많다. 가끔씩 카센터에 가서 안전점검을 받고, 자동세차를 하거나 어쩌다가 돈을 주고 손세차를 한다.

   브리사를 사던 해에는 어머니와 큰누님을 모시고 가족 여행을 하였다. 소형차에 어머니와 큰누님, 그리고 우리 부부와 초등학교에 다니는 3남매가 탔으니 불편하기 짝이 없었다. 그렇지만 큰 불평 없이 즐거운 마음으로 공주 계룡산 갑사와 동학사, 부여 낙화암 등 충남의 명승지를 순례하였다. 그 뒤에는 이런 여행을 하지 못하였으니, 첫 번째 차에 기울인 사랑이었던 것 같다.

   브리사는 5년 동안 큰 고장 없이 나의 발 노릇을 해 주었다. 나의 출퇴근은 말할 것도 없고, 아내의 출근에도 도움을 주었다. 방학이 되면 어김없이 학생들과 함께 설화자료 조사 여행을 하였다. 커다란 릴(reel) 녹음기를 비롯하여 여행의 필수품을 넣은 큰 가방을 메고 버스를 타고 자료조사 여행을 다니던 때에 비하면 정말 편안한 여행이었다. 시골에서 비를 만나 비포장도로를 달리며 가슴 졸이던 일, 눈이 쌓여 움직이지 못하고 여관에서 며칠씩 묵던 일 등은 이제 아련한 추억이 되었다. 그때 동행하여 고생했던 학생들(지금은 교수가 된 이가 여럿임)에 대한 고마움을 잊을 수 없다.

   이제 내가 자동차 운전을 시작한 지도 어언 44년이 되었다. 그동안 나의 발이 되어 준 승용차를 세어 본다. 1979년에 산 브리사(기아자동차, 서울14790)를 비롯하여 1984년의 맵시나(대우자동차, 서울19745), 1991년 콩코드(기아자동차, 서울29028), 1996년 소나타(현대자동차, 서울315147), 2001년 카렌스(기아자동차, 서울488424), 2006SM7(르노삼성자동차, 016097), 2014SM7(르노삼성자동차, 403987) 등이다. 이들 7대의 승용차가 지금까지 나의 발이 되어 출퇴근, 자료조사, 관광여행 등을 도와주었다. 지금까지 나의 발이 되어 준 7대의 승용차에게 고마운 마음 가득하다.

   그동안 승용차를 타고 다님으로써 출퇴근 때에 편했던 것은 물론이고, 자료조사에도 큰 도움이 되었다. 그래서 설화와 민속 연구 자료로 활용하고, 자료집도 여러 권 간행할 수 있었다. 방문이나 관광 여행에서는 큰 즐거움과 보람을 안겨 주었다. 지인 중에는 일찍부터 운전은 힘들고 피곤한 일이라며 기피하는 이도 있다. 그러나 나는 큰 부담을 느끼지 않고 차를 운행하였으니, 운전을 즐기는 편이었던 것 같다. 그동안 사고 없이 운전을 하게 해 주신 하나님께 감사한다. 앞으로 언제까지 운전을 할지는 모르겠지만, 사고 없이 운전할 수 있기를 간절히 기원한다. (2023. 09.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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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얼마 전에 큰 회사의 대리로 근무하는 조카와 조용히 앉아 여러 가지 이야기를 나누었다. 함께 이야기하는 중에 기독교인의 행동이 화제에 올랐다. 그는 다소 역정 섞인 말투로, 직장에서 예수 잘 믿는다고 떠들며 설치는 사원들 때문에 창피하고 화가 나서 교회를 못 다니겠다고 하였다. 장로의 아들로, 얼마 전에 교회 집사가 되어 바른 신앙생활을 하려고 애쓰는 그가 이런 말을 하는 것이 의아스러워 그 이유를 물어 보았다.

   그는 몇 사람의 실례를 들면서 이야기하였다. 예수를 믿는다고 떠들며 설치는 사람들이 교회에 나가지 않는 사람보다 더 이기적이고, 독선적인 행동을 하여 사람들의 빈축을 사곤 한다는 것이다. 그는 예수를 믿는 사람이라고 내세웠으면, 그에 걸맞은 행동을 하고, 그렇지 못할 바에는 예수 믿는 사람이라고 떠들지나 않았으면 좋겠다고 하였다. 사람들은 이기적이고 독선적인 그들의 말과 행동에 혐오감을 느끼고, 예수 믿는 사람은 다 저렇다고 비아냥거린다고 한다. 그런데도 장본인들은 그런 사실을 모르는지, 예수를 믿고 자기 교회에 나오라고 전도를 한단다.

   우리 둘레에는 이웃을 사랑하며 남모르게 봉사하는 사람이 많이 있다. 그런가 하면, 기독교인임을 내세워 성경의 가르침대로 살려는 선량한 기독교인들을 속이거나 바가지를 씌워 자기의 이익을 챙기는 사람도 있다. 이런 사람들도 틈만 나면,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전도하고, 예수를 믿도록 권면하는 말을 한다. 이러한 사람의 전도가 효과가 있을까? 열심히 전도하는 일보다 더 중요한 것은 내가 예수 이름을 더럽히거나 욕되게 하여 전도를 방해하고 있지 않은가?’ 하고 자신을 돌아보는 일이다.

   내가 아는 교수 한 분이 들려준 이야기는 전도와 관련하여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그는 교회에 좀 다니다가 미국 유학을 갔고, 거기서 열심히 교회에 다녔다고 한다. 그가 박사학위를 받고 귀국한 지 얼마 안 되어 부인과 함께 교회에 갔을 때의 일이라고 한다. 교회 마당에 주차 공간이 있기에 후진하여 주차할 요량으로 차를 앞으로 뺐는데, 그 사품에 점잖게 차린 한 중년 남자가 잽싸게 차의 머리를 앞으로 하여 그 자리에 차를 댔다. 그는 화가 나기도 하고, 기가 막혀 멍하니 서 있다가 다른 자리에 차를 대고, 그 사람의 행동을 지켜보았다. 그런데 그 사람은 미안하다는 표정 하나 없이 차의 문을 잠그고, 바로 그 교회로 들어갔다. 그는 저렇게 뻔뻔한 사람과 한 자리에 앉아 예배드릴 수 없다.’는 생각에 부인만 예배에 참석하게 하고, 그대로 돌아왔다. 그 뒤로 그는 교회에 나가지 않는다고 하였다.

   그는 신앙은 사람을 보고 믿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잘 알고 있는 사람이다. 그런 그가 한 사람의 그릇된 행동을 구실로 교회에 나가지 않는 것은 잘한 일이라 할 수 없다. 그러나 그 교회의 임원일지도 모르는 그 중년 남자는 이기적이고 독선적인 행동을 하여 전도는커녕 제 발로 찾아온 교인을 문전에서 쫓아버리고 말았다는 비판을 면할 길이 없다. 말로 전도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전도에 방해가 되는 언행으로 전도를 방해하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할 것이다.

   전도는 말보다 행동으로 해야 한다는 말을 하다 보니, 전에 근무하던 대학에서 가르친 M군의 얼굴이 떠오른다. 그는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서울시 공무원 채용시험에 합격하여 동사무소에 근무하면서 대학입시 공부를 하여 30세가 다 되어 야간대학에 입학하였다. 그는 2학년 때부터 직장을 그만두고 공부만 하였으므로 경제적으로 어려움이 많았다. 그러나 남을 돕는 일에는 앞장서곤 하였다.

   학우들은 착하고 부지런하며 겸손한 그를 좋아하였다. 그래서 나이가 제일 많은 그를 과대표로 선임하였다. 그 때는 학교가 재단 문제로 교수와 학생들 모두 의견이 엇갈려 어려움이 많았다. 그는 서로 다른 의견을 가진 학우들에게 충고하고 설득하여 화합을 이루면서 무리 없이 과를 이끌었다. 그는 몇 학기에 걸쳐 과대표를 하면서 과의 일에 솔선수범하고, 봉사의 자세를 흐트러뜨리지 않았다. 그래서 첨예하게 대립되던 재단 문제에 그와 의견을 달리하는 학우들도 그를 욕하거나 탓하지 않았다. 그의 말에 귀를 기울임은 물론, 인간적으로 그를 좋아하기도 하였다.

   그와 친하게 지내던 한 학생이 나에게 이런 말을 하였다. “그 동안 예수 믿는다고 하는 사람 치고 좋은 사람 못 봤습니다. 그런데 그는 좀 다릅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이 모두 그와 같다면 저도 교회에 다니겠습니다.” 나는 이 말을 들으며 기독교인은 말로 전도하는 것이 아니라, 행동으로 전도해야 한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느꼈다.  <기독교연합신문 제1684호, 2023. 8.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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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학 교수는 전임으로 근무하는 대학에서 연구, 강의, 학생 지도의 임무를 수행한다. 그리고 시간이 허락하면 다른 대학에 가서 시간강사로 강의하기도 한다. 다른 대학에 가서 강의를 하다 보면, 그 대학이나 학과 나름의 특성에 따라 학생들의 수강 태도나 강의 분위기가 사뭇 다른 것을 느끼게 된다. 나는 여러 대학에 가서 강의를 하였는데, 지금도 잊히지 않는 강의가 있다.

   오래 전에 제자 김 교수의 청에 따라 백석대학교에 출강하였을 때의 일이다. 첫 강의가 있는 날, 김 교수 연구실에서 차를 마시고 강의실로 가려고 할 때 김 교수가 이렇게 말했다. “선생님, 강의 시작 전에 기도하고 시작하시지요.” 나는 뜻밖의 말이어서 조금 당황스럽게 느껴지기까지 하였다. 그래서 말은 하지 않고 속으로 기독교 관련 전공과목이 아닌 한국의 전통문화 강의 시간에 기도하고 시작하라니, 가당한 말인가!’ 라고 생각하면서 강의실로 향하였다.

   강의실 가까이 가니, 여럿이 힘차게 부르는 찬송 소리가 들렸다. 바로 내가 강의할 방에서 수강생들이 찬송을 부르고 있었다. 수강생이 선교학과와 신학과 학생이라는 말을 들었기에 신앙이 돈독한 학생들일 것이라는 생각은 하였다. 그러나 강의실을 가득 메운 학생들이 강의 시작 직전에 온 힘을 다해 찬송을 부르고 있는 것을 보고, 그 분위기에 압도되고 말았다. 그래서 한국의 전통문화 강의가 한국인의 정체성을 일깨우고, 기독교의 선교와 목회 활동에 도움이 되게 해 달라는 기원의 기도를 한 뒤에 강의를 시작하였다.

   그 다음 주 강의시간에도 강의실에 들어가니 학생들이 찬송을 부르고 있었다. 그날도 학생들 앞에 서서 기도한 뒤에 강의를 시작하였다. 그 다음 주부터는 학생들이 차례를 정하여 강의 시작 전에 기도를 하게 하였다. 그래서 강의 시작 전에 기도하는 일은 한 학기 내내 계속되었다. 이 학생들의 수강 태도는 아주 진지하고 열성적이었다. 이러한 강의 분위기는 저절로 되는 것이 아니다. 과대표 학생을 중심으로 학우들이 뜻을 같이하고 호응해야 한다. 나는 이렇게 면학 분위기를 조성하는 대표가 어떤 학생인가 궁금하였다. 김 교수는 나이가 좀 든 대표와 몇몇 학우들이 분위기를 조성하고 있다고 일러 주었다.

   학생들의 수강 태도는 진지하고 열성적이었다. 나는 그에 발맞춰 강의 준비를 더 열심히 하고, 열과 성을 다하여 강의를 진행하였다. 수강생들의 호응도가 매우 높았으므로, 나 역시 열성적으로 강의에 임하였다. 강의 내용은 한국의 일생의례, 세시풍속, 민간신앙(가신신앙동신신앙점복신앙무속신앙), 구비문학, 민속놀이등 한국의 전통문화 전반이었다. 이러한 것들은 한국인으로서, 그리고 한국 전통문화의 계승과 발전을 위해서 알아야 할 내용들이다. 또 기독교의 선교나 목회 활동의 효율성 제고를 위해서 반드시 알아야 할 사항들이다.

   나는 구비문학을 전공하는 사람이지만, 학문적 필요에 따라 민속 전반의 자료를 조사하고, 연구하였다. 젊은 시절 무속 조사 현장에서 신학을 전공하는 서울의 유명대학 교수를 몇 차례 만났다. 나는 그 분에게 신학자가 굿판에 와서 무속 조사를 하는 이유를 물었다. 그는 기독교 선교를 위해서는 미신 또는 우상숭배라고 폄하하는 무당을 중심으로 한 무속을 알기 위해 열심히 현장 조사를 하고, 연구를 한다고 하였다.

   한국의 전통문화를 바로 알려고 하지 않고 무조건 미신 또는 우상이라 하여 배척하거나 타파의 대상으로 삼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 한국 전통문화의 실상과 의미를 바로 알고, 기독교의 교리에 비추어 수용 또는 변용할 수 있는 것인지, 배치되므로 타기해야 할 것인지를 판단해야 한다. 한국의 전통문화를 모르거나 무시하고서는 외래종교인 기독교를 선교하는 데에 많은 어려움이 있고, 효율성도 기대할 수 없게 된다. 외국에 선교사를 파견할 때 그 나라의 문화를 반드시 익히도록 하는 이유도 같다.

   나는 일반대학은 물론 몇몇 신학대학에도 출강하였지만, 기도하고 강의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그래서 백석대학교 강의는 특별한 체험이었다. 수강생들은 기독교 신앙과 직접 관련이 없는 강의에 임하면서도 기도하고 수강하는 태도를 보였다. 이런 학생들이라면 기독교 전공 강좌를 수강할 때에는 더 진지하고 열성적이었을 것이다. 이런 학생들은 졸업한 뒤에 선교와 목회의 현장에 가서 더욱 열성적으로 일할 것이다. 그러면 성령님이 함께 하셔서 큰 보람과 성과를 거두게 하실 것이다. 이런 학생을 배출한 대학의 학과는 아름다운 전통을 이어가면서 발전을 거듭할 것이다. 이들이 공부하고 일할 대학교, 교회, 교단에 하나님의 은총이 늘 함께 하시기를 기원한다. <기독교연합신문 제1680, 2023. 7.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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