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년 전 튀르키예 에르지예스대학교 객원교수로 근무할 때 안타키아(Antakya)성 베드로 동굴교회를 찾아갔다. 안타키아는 튀르키예 남동쪽 지중해 연안에 위치한 인구 약 202천명의 도시이다. 이곳은 성경에 나오는 안디옥으로, 옛 이름이 하타이(Hatay)여서 하타이로 표기된 지도도 있다. 성경에 나오는 안디옥은 두 군데이다. 하나는 비시디아 안디옥으로, 튀르키예 내륙 지방에 있는 얄바츠(Yalvaç)이다. 다른 하나는 수리디아 안디옥으로, 지금의 안타키아이다.

   이곳은 기원전 2,000년경까지 시리아의 아무트 왕국이 통치하였다. 그 뒤를 이어 히타이트, 앗시리아, 페르시아가 다스렸다. 기원전 333년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더 대왕은 물맛이 좋은 이곳에 도시를 건설하고 싶어 하였다. 그가 죽은 뒤에 그의 무장이었던 셀레우코스 1세가 이곳에 안티오키아 왕국을 건설하고, 안타키아를 수도로 정하였다. 그 뒤에 로마에 병합되었고, 시저에 의해 재건되어 상업·교육·문화의 도시로 발전하였다.

   안디옥은 베드로 사도가 기독교를 로마 여러 곳으로 전파하는 포교의 거점으로 삼았던 곳이다. , 바울 사도와 바나바가 와서 생활하고, 선교 여행을 떠난 곳이다. <누가복음><사도행전>을 쓴 누가의 고향이고, 요한 사도의 수제자로 아시아 일곱 교회 중 하나인 서머나 교회 감독으로 순교한 폴리갑의 고향이다. 이곳은 신약시대 포교의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곳으로, 기독교에서 예루살렘·로마 다음으로 중요하게 여기는 도시이다. 교황 바오로 6세는 1963년에 이곳을 성지로 선포하였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여 승천하신 뒤에 제자들은 예수님의 말씀과 가르침을 열심히 전파하였다. 예수님의 말씀을 믿고 따르는 사람이 늘어가자 이를 믿지 않는 유대인들의 박해가 심해졌다. 신도들은 스테반의 순교 이후에 박해가 더욱 심해지자 사방으로 흩어졌다. 예루살렘에서 박해를 받던 베드로 사도는 배를 타고 이곳으로 왔다. 그를 따르던 신도들 중 일부가 이곳으로 와서 교회를 세우고, 베드로 사도와 함께 하나님께 예배를 드렸다. 이 교회의 신도가 늘어가자 예루살렘 교회는 바나바를 이곳으로 보냈다. 이곳에 온 바나바는 여기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는 바울 사도의 고향 다소로 가서 바울을 데리고 와 이 교회에서 1년 동안 함께 지내면서 많은 사람들을 가르쳤다. 그 당시에 예수를 믿고 따르던 사람들을 크리스천(Christian)’이라 불렀다(11:2226). 이렇게 보면, 이 교회는 이 세상에 세워진 최초의 교회이고, 이 교회의 신도들은 처음으로 크리스천이라고 불렸던 사람들이다.

   나는 조금 긴장되고 흥분된 마음으로 하비브 낫자르산 기슭의 큰 바위를 깎아 만든 동굴 안으로 들어갔다. 성 베드로 동굴교회가 바위 안에 세워진 것을 보면서 반석 위에 교회를 세우리라.’고 한 예수님의 말씀이 실현된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교회 안은 100쯤 되어 보이는 직사각형의 방인데, 전면의 중앙에는 돌로 쌓은 단이 있고, 그 가운데에 돌로 된 제단이 있다. 제단 앞의 벽 위쪽에는 천국의 열쇠와 두루마리 성서를 손에 든 베드로 사도의 상이 서 있다. 제단 오른 쪽에는 병을 낫게 하는 효능이 있다고 하는 약수가 있다. 사람들은 이를 성수라고 한다. 제단 왼쪽에는 도피처로 가는 터널이 있다. 돌로 만든 제단은 12∽13세기의 것이고, 모자이크 바닥은 45세기 것이라고 한다. 나는 교회 안의 이곳저곳을 둘러보고, 성수를 한 모금 마시면서 초기 기독교인들의 경건한 생활 모습을 그려 보았다.

   그 때 서양 사람으로 보이는 남여 30여 명이 들어와 둘러서자 안내자가 교회에 대한 설명을 하였다. 설명이 끝나자 일행 중 한 사람이 앞으로 나와 말한 뒤에 모두 손을 잡고 찬송을 하였다. 찬송이 끝나자 그 사람이 대표로 기도하였다. 찬송을 부르고 기도하는 모습이 아주 진지하고 경건하였다. 기도가 끝난 뒤에 어디서 왔느냐고 물으니, 이탈리아에서 성지순례를 왔다고 하였다. 나는 예수님의 수제자인 베드로 사도가 세운 세계 최초의 교회, ‘크리스천이라는 말이 처음 생긴 교회를 와 보았다는 감격을 가라앉히며 조용히 감사의 기도를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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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4월 초에 아내와 함께 남산에 벚꽃을 보러 갔다. 남산 북쪽 순환로에서 타워 쪽으로 올라가는 길 양편에는 꽃을 활짝 피운 벚나무들이 줄지어 서 있다. 벚나무 사이사이에 피어 있는 진달래와 개나리를 비롯하여 키 작은 봄꽃들도 이에 질세라 아름다운 자태를 뽐낸다. 바람 한줄기가 다가와 벚나무를 흔들고 지나가니, 꽃잎들이 눈송이처럼 날려 흰 눈이 내리는 겨울을 연상케 한다.

   아름다운 풍경과 맑은 공기를 마음껏 즐기며 걷다보니, 어느새 남산타워 아래에 당도하였다. 팔각정에 올라 잠시 쉰 뒤에 남산타워 옆과 봉수대 아래쪽을 보니, 소원하는 바를 적은 기원문을 걸어두는 판넬이 설치되어 있다. 여러 가지 색의 예쁜 모양 필름이나 플라스틱판에 적은 기원문은 자물쇠에 채워진 채 설치대에 걸려 있다. 겹겹이 걸린 기원문을 보니, 걸은 지 얼마 안 되는 것은 예쁜 색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고, 글자도 선명하였다. 그러나 안쪽에 걸려 있는 것은 판이 퇴색하였고, 글자도 지워졌으며, 자물쇠는 녹이 슬었다.

   기원문의 내용은 아주 다양하였다. “우리가 함께 한 1주년, 그리고 함께 할 100, 영원히 오늘 같기를!”이라고 쓴 글은 연인이 사귄 지 1년을 기념하며 사랑이 영원하기를 기원한다. “우리 할머니 할아버지 돼서도 남산에 이거 보러 오자는 글은 친구 또는 연인이 노인이 될 때까지 건강하여 남산에 다시 와서 이 글을 보자는 다짐이다. “00 사랑해요. 큰 거 하나 당첨되게 해 주세요.”는 사랑을 다짐하면서 행운을 기원하는 내용이다. “백반증이 빨리 낫게 해 주세요.”는 피부에 백색반이 나타나는 질환을 낫게 해 달라는 간절한 마음의 표현이다. 자녀의 이름을 쓰고 그 뒤에 입학 축하해. 사랑해, 건강하기를!”이라고 적은 것이나, “우리 가족 영원히 행복하기를!”은 온 가족의 행복을 기원하는 내용이다. 그 외에도 여러 가지 기원하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모두 가정의 평안과 가족의 건강, 사랑의 결실과 지속, 입시·입사 시험 합격 등 일상적 소망을 적은 것이다. 기원문의 대부분은 한글이지만, 영어 또는 낯선 외국어로 쓴 글도 있는 것으로 보아 외국인도 있는 것 같다.

   기원문을 쓰는 일은 아주 오래 전부터 있었다. 집을 새로 짓거나 고쳐 지을 때 쓰는 상량문에는 새로 짓거나 고친 집의 내력, 공역 일시 등과 함께 집을 지은 뒤에 좋은 일이 이어지기를 바라는 축원의 말을 적었다. 입춘에는 대문이나 기둥에 한 해의 행운과 건강을 기원하며 복을 바라는 입춘축을 써서 붙였다. 정월 대보름에 하는 달집태우기에서는 마을의 평안과 풍년 기원 등 축원의 글을 써서 붙이고 제를 올린 뒤에 태웠다. 액연(厄鳶) 날리기에서는 재액을 멀리 쫓아 버리고, 복을 부르기 위하여 정월 대보름을 기해 연에 송액영복(送厄迎福)이라 써서 날려 보냈다. 양초에 소원문 쓰고 태우기, 꽃바구니에 발원문 쓰기, 달님 기도문 작성 등도 기원문 쓰기의 풍습이었다.

   이처럼 우리의 전통문화에서는 기원문을 써서 붙이거나 불에 태우고, 멀리 보내거나 간직하였다. 기원문을 작성하여 태우는 것은 신에게 그 뜻이 전달되기를 바라는 마음의 표현이다. 기원문을 써서 사람이 많이 모이는 유명 장소에 자물쇠를 채워 거는 것과 같은 일은 없었다. 이것은 다른 나라에서 널리 행해지는 풍습이 들어온 것 같다.

   오래 전에 튀르키예에 갔을 때의 일이다. 기기묘묘한 바위들이 솟아 있어 절묘한 지형을 자랑하는 카파도키아의 산언덕에 세운 신나무에 수많은 기원문을 걸어놓은 것을 보았다. 이곳에 신나무를 세운 것은 기묘한 지형의 산언덕을 신이한 장소로 본 때문이리라. 에페스(성경에 나오는 에베소) 근처의 뷜뷜산에 있는 성모 마리아의 집앞에 기원문을 거는 판넬이 서 있다. 이곳에는 소원을 적은 종이와 헝겊이 잔뜩 걸려 있었다. 그 중에는 외국인이 걸어놓은 것도 있지만, 무슬림인 튀르키예인들이 걸어 놓은 것이 더 많다고 한다. 무슬림이 이곳에 와서 소원을 비는 것은 이슬람교 경전인 《코란》에 마리아를 선지자 예수의 어머니로 기록하였으므로, 마리아를 거룩한 여인으로 숭배하기 때문이라 하겠다.

   기원문을 써서 거는 이유는 무엇일까? 옛사람들은 언어는 주술적인 힘을 지니고 있다고 믿었다. 이러한 언어주술관은 현대인에게도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설날 축원의 뜻을 담아 덕담을 하는 것도 이런 의식의 표현이다. ‘말이 씨가 된다는 말 역시 말은 현실화한다는 의식을 바탕에 깔고 있다. 종교적인 신심을 가진 신앙인은 물론, 일반 사람들도 자기가 믿는 신에게 정성들여 기도한다. 이것은 인간이 소원하는 바를 말이나 글로 표현하면 신이 이를 받아들여 그것을 이루어 줄 것이라는 믿음을 바탕으로 한 것이다.

   요즈음에는 자물쇠를 채운 소원의 글을 명소에 거는 일이 국내외에서 낯설지 않게 되었다. 이 일이 전통문화이든, 외래문화이든 탓할 일이 아니다. 개인적인 소원을 여러 사람이 모이는 명소에 거는 것은 장난기를 겻들인 행위일 수도 있다. 그러나 이는 소원하는 일이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소박한 마음의 발로인 것은 변함없는 사실이다. 다만 퇴색되고, 녹이 슨 기원문은 주기적으로 철거하여 보는 이의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일은 없었으면 좋겠다. (2023. 5.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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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얼마 전 주일예배 시간에 목사님께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인생이란 제목의 설교를 하셨다. 예수님께서 실로암에서 날 때부터 앞 못 보는 장님을 고쳐주신 기사이적(9:111)을 바탕으로 하신 설교 말씀으로, 아주 은혜로웠다. 그 뒤에 함께 부른 복음성가 실로암은 설교 말씀과 연관되어 큰 감동을 느끼게 하였으므로 힘차게 불렀다. 그런데 옥에도 티가 있듯이 가사 중에 주여 당신께라는 표현이 마음에 걸렸다.

   실로암은 예루살렘에 있는, ‘보냄을 받았다라는 뜻을 지닌 연못이다. 구약 성경(열왕기하 18:17, 역대하 32:34)을 보면, 유다의 히스기야왕은 앗시리아 산헤립왕이 침공하여 예루살렘을 포위하면 성 안에 물이 끊길 것을 염려한다. 그래서 예루살렘 성 밖의 수원지 기혼샘에서부터 533m의 수로를 만들어 성 안의 실로암 연못까지 물이 흐르게 하였다(기원전 701). 그래서 실로암은 그 당시 성 안 사람들에게 물을 공급해 준 생명의 샘이 되었다. 신약 시대에는 예수님께서 장님의 눈에 침으로 갠 진흙을 발라준 뒤에 실로암 물에 씻게 하여 눈을 뜨게 한 곳이다. 이로써 실로암은 장님이 눈을 뜨게 한 기적의 연못, 어두움을 밝힐 빛을 비쳐주는 신성한 연못을 상징하는 말이 되었다.

   「실로암1981년에 신상근 목사가 작사 작곡한 복음성가이다. 이 곡은 신 목사가 젊은 시절에 고난과 좌절을 겪다가 주님의 은혜로 삶의 희망을 찾고, 그 은혜에 대한 벅찬 감동을 표현한 곡이다. 이 곡은 사람들에게 장님이 눈을 뜨게 한 실로암처럼 희망과 용기를 갖게 해준 은혜로운 찬양이다. 40여 년 동안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으며 불려 왔다. 아주 오래 전에 아코디언을 가르쳐 주시던 장로님이 악보를 주셔서 처음 알게 되었다. 나는 이 곡을 아코디언으로 연주하며 많은 은혜와 감동을 체험하였다.

   이런 곡을 은혜로운 설교 말씀에 이어서 부르니 가슴에 큰 울림이 왔다. 그래서 높은 음이 잘 나오지 않지만, 목청을 돋우어 큰 소리로 불렀다. 그런데 이 곡의 클라이맥스라고 할 수 있는 후렴 부분의 오 주여 당신께 감사하리라 실로암 내게 주심을이라는 대목에서는 크게 부를 수 없었다. ‘오 주여 당신께란 표현은 현대인의 언어감각에 맞지 않을 뿐더러 바른 표현이라고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전에 아코디언으로 연주할 때의 느낌도 되살아났다. 주님께 무례한 표현이라고 생각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주여에서 ‘-는 호격조사이다. 호격조사는 고유명사나 인칭대명사가 누구를 부를 때 쓰일 수 있도록 해 주는 조사로, ‘/가 있다. ‘는 자음 뒤에, ‘는 모음 뒤에 쓰인다. 호격조사는 대개의 경우 친구 사이에서나 아랫사람에게 사용할 수 있다. ‘/의 존대형으로 /이여이시여가 쓰이기도 한다. 그러나 일상 대화에서는 잘 쓰이지 않고, 기도문이나 시적 표현 등에서 쓰인다(국립국어원, 한국어 문법1, 432쪽 참조). 이렇게 볼 때 주여라는 표현은 문법적으로 틀린 것은 아니나, 일상의 언어로는 어색한 표현이다. 자기의 아버지나 어머니를 부를 때 아버지여’, 또는 어머니여라고 부르지 않은 것과 같다. 여기서는 ‘-라고 하는 호격 조사를 써서 주여하는 것보다는 주님이라고 하는 것이 더 좋을 것 같다.

   ‘당신이란 말은 2인칭대명사로 쓰일 때와 3인칭 재귀대명사로 쓰일 때에 상대방을 높이는 정도에 차이가 있다(국립국어원, 한국어문법1, 380쪽 참조). 당신은 누구십니까?”라고 할 때에는 조금 높이는 뜻이 있다. “당신 요즘 피곤하시죠?”라고 할 경우에는 부부 사이에 상대방을 높여 부르는 뜻이 있다. “당신이 뭔데 남의 일에 참견하는 거야.”는 상대방과 싸우면서 상대방을 낮추어 말할 때 쓴다.

   ‘당신3인칭 재귀대명사로 쓸 때에는 아주 높이는 뜻이 있다. 재귀대명사란 체언을 도로 나타내는 삼인칭 대명사로, ‘자기당신따위가 있다. “할아버지께서는 생전에 당신의 책을 소중히 다루셨다.”라고 할 때에는 할아버지를 아주 높여 이르는 말이다. 실로암에서 하나님을 향하여 주여하고 불렀으니, ‘당신2인칭 대명사로, 낮추거나 조금 높이는 표현이다. ‘, 주님은 하나님 또는 예수님을 이르는 말이다. 따라서 주여 당신께는 아주 높여야 할 주님에 대한 표현으로 적합하지 않다. ‘주님, 주님께라고 하면 좋을 것이다.

   전해 오는 말 중에 아는 게 병, 모르는 게 약이라는 말이 있다. 국어에 대한 지식이 전혀 없어 몰랐더라면 주여 당신께란 표현이 마음에 걸리지 않았을 것이다. 감동적인 찬송을 부르면서도 적절하지 않은 표현이 마음에 걸리는 것은 어법에 관해 조금 아는 게 병이 된 탓이리라. 많은 사람들은 이 구절을 아무 저항감 없이 부를 것이다. 그런데 이 찬송 구절에 마음을 쓰는 것은 내가 편협한 때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기도 한다. 그러면서도 작사자는 조금 더 유의하여 가사를 쓰고, 그 곡을 부르는 사람은 잘못된 부분을 고쳐서 부르는 기본 지식을 가졌으면 좋겠다는 희망은 버리지 못한다

   나의 서재에는 삼익가구에서 튼튼하게 만든 책장이 여러 개 있다. 책을 넣는 칸에는 옆으로 밀어 열고 닫을 수 있는 유리가 끼워 있다. 그래서 책장은 책에 먼지가 끼지 않을 뿐더러 보기에도 좋다. 그런데 그 위에 서류봉투, 문구 용품을 넣은 쇼핑백, 기념패·감사패, 서화 두루마리, 카메라 가방, 앨범 등이 수북이 쌓여 있어 지저분해 보인다. 이들을 둘 데가 마땅치 않으므로 책장 위에 쌓아놓은 탓이다. 아내는 오래 전부터 책장 위의 잡동사니들을 좀 정리하라고 하였지만, 어찌해야 좋을지 몰라 대답만 하고 그대로 지내왔다.

   삶의 노를 저어 세월의 강을 80여 년을 달려오고 보니, 영원의 바다에 이를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주변을 정리하기로 마음먹었다. 먼저 책장 위에 쌓아두었던 논문 및 저서를 집필할 때 참고했던 자료, 강의 자료, 방송 출연 자료, 설화 채록 원고, 해외여행 관련 자료, 편지 뭉치 등을 며칠 동안 검토한 뒤에 과감하게 폐기하였다. 그런데 디지털 카메라가 보급되기 전에 필름에 찍어 인화한 사진을 정리한 앨범과 미처 정리하지 못해 책장 아래의 서랍에 넣어둔 사진들을 폐기하려니 만감이 교차하였다.

   사진들을 살펴보니, 초등학교와 중학교 졸업사진이 한 장씩 있다. 그 뒤에 고등학교, 대학과 대학원을 다닐 때 찍은 사진을 비롯하여 아내와 연애하고, 결혼하던 때에 찍은 사진이 이어진다. 삼남매가 자라던 때의 모습, 가정의 대소사를 찍은 사진도 보인다. 또 초등학교와 중학교 교사 시절의 모습, 대학 교수가 된 뒤에 있었던 일, 크고 작은 상을 받는 장면을 찍은 사진이 보인다. 국내는 물론 해외여행을 하면서 찍은 사진도 많이 있다. 이것들은 모두 내 삶의 일부를 압축해서 보여주는 기록물이다.

   이런 사진을 폐기처분하는 것은 내 삶의 기록을 지워버리는 것과 같다. 그런데 왜 나는 이 사진들을 폐기하려고 하나? 그 이유의 하나는 책장 위에 쌓여 있는 앨범과 서랍 속의 많은 사진들을 폐기하여 80대 노인의 주변을 정리하기 위함이다. 다른 하나는 내 아들이나 딸의 짐을 덜어주어야 한다는 생각 때문이다. 내가 죽은 뒤에 내 아들이나 딸은 내가 쓰던 물건들을 정리할 것이다. 그 때 우리 부부 얼굴이 들어간 사진들은 선뜻 버리기 어려울 것이다.

   나의 경우, 선친께서는 사진을 많이 찍지 않던 시대에, 조금 사시고 일찍 돌아가셨으므로 사진을 한두 장밖에 남기지 않으셨다. 그러나 어머니는 95세까지 사시면서 많은 사진을 찍으셨고, 이를 정리·보관하고 계셨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지 20여 년이 지났으나, 나는 어머니의 앨범을 지금도 보관하고 있다. 그 까닭은 어머니의 모습이 담긴 사진들을 차마 버릴 수 없어서이다. 이렇게 부모의 사진을 버리는 일이 쉽지 않음을 생각하면, 내 사진을 내가 폐기하는 것은 내 아들이나 딸의 짐을 덜어주는 것이라 생각한다.

   내가 정리해야 할 사진은 모두 1990년대 말까지 찍은 사진이다. 2000년대 초 디지털 카메라가 보급되면서부터 찍은 사진은 파일로 컴퓨터 하드디스크와 USB에 저장해 놓았다. 이들은 인화한 사진처럼 많은 공간을 차지하지도 않을뿐더러 폐기할 때에도 파일을 삭제하면 되기 때문에 많은 수고를 요하지도 않는다. 이런 점에 착안하여 남은 세월 동안 보관해 두고 싶은 사진만을 골라 디지털 파일로 만들어 두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하였다.

   가지고 있는 사진을 모두 파일로 만드는 일은 시간과 노력이 너무 많이 든다. 그래서 앨범의 사진들을 모두 뗀 뒤에 보관해 두고 싶은 사진만을 골라 따로 놓았다. 고를 때에는 기념이 될 만하고, 구도가 좋으며 초점이 잘 맞은 사진을 골랐다. 선택된 사진은 스마트폰 카메라로 찍어 파일로 만들었다. 그런 다음에 이를 컴퓨터에 옮긴 뒤에 찍은 날짜와 이름을 적었다. 날짜를 적어 놓지 않은 사진은 여러 가지 정황을 고려하여 추정하였다. 그랬더니 사진 파일들이 날짜순으로 정리되었다. 이런 작업을 한 뒤에 파일을 몇 시기로 구분하여 저장하였다. 그 결과 꼭 보관하고 싶은 사진들이 시기별 날짜순으로 정리되었다.

   사진을 떼어낸 빈 앨범을 보니, 두꺼운 판지에 비닐이 덮여 있고, 이를 철선으로 묶었다. 이를 그대로 버리는 것은 쓰레기 분리수거 기준에 맞지 않았다. 그래서 비닐을 찢어내고, 이를 묶은 철선을 펜치로 끊어서 해체하였다. 그래서 종이, 비닐, 철선을 따로따로 쓰레기 수거 용기에 넣었다. 이 일은 손이 많이 가고, 힘도 들었다.

   이제 사진을 버리는 일이 남았다. 많은 사진을 한 장 한 장 찢어 버리자니 손이 많이 가기도 하지만, 나와 사진 속 인물의 몸을 찢는 것 같아 마음이 편치 않다. 전에 사다 놓은 수동식 서류 파쇄기에 넣어 부수자니, 일이 너무 많고, 잔인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생각해 낸 것이 불에 태워 흔적을 남기지 않는 방법이다. 친척이나 친지 중에 아궁이가 있는 집을 알아보아 가지고 가서 태워야겠다.

   책장 위에 얹어 놓았던 앨범과 잡동사니들을 정리하고 보니, 서재가 정돈된 듯하다. 컴퓨터를 켜고 저장한 파일을 여니, 어린 시절부터 2000년대 초까지의 사진이 컴퓨터 화면 에 차례로 펼쳐진다. 이 작업을 하는 며칠 동안은 힘이 들기도 하였지만, 내 삶의 기록들을 다시 한 번 살펴보는 시간이 되었다. 앨범을 없애야 하는 이유 두 가지를 해소하였다는 생각에 마음이 홀가분하다. (2023. 05. 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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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 30여 년 전에 헤어진 후로 소식을 몰라 궁금하던 시골 아가씨(지금은 47세의 중년이 된)가 찾아왔다. 며칠 전에 그가 내 블로그를 검색하여 전화번호를 알았다며 전화를 하였다. 그 때 알려준 집 주소를 들고 청주에서 자기 차를 운전하여 찾아왔다. 뜻밖의 방문에 놀랍고, 반갑고, 기뻐서 하나님께 감사의 기도를 드렸다.

   그와의 인연은 30여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충북 진천에서 목회하시는 전도사님께서 그 마을에 사는 불우한 여자아이를 가사도우미로 데리고 있으면서 사람을 만들어 달라고 하셨다. 우리는 아내가 교사로 재직하고 있어 수년 간 가사도우미를 데리고 살았다. 그러나 그때는 삼남매가 모두 성장하였으므로 가사도우미를 두지 않아도 되는 때였다. 아내는 망설이다가 어머니 시중들 사람이 필요하므로, 막내딸을 기르는 심정으로 그를 받아들이기로 하였다.

   그는 열네 살 먹은 작은 체구의 소녀로, 촌티가 지르르하였다. 60세가 넘은 아버지와 시각 장애인 어머니 슬하에서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중학교에도 잠시 다녔다고 한다. 그러나 구구단도 외우지 못하였고, 생활습관도 제대로 익히지 못하였으며, 부엌일 역시 할 줄 아는 것이 없었다. 아내는 틈나는 대로 바른 생활 습관을 갖도록 일러주었다. 또 구구단을 외우게 하고, 생활에 필요한 계산법을 가르쳤다. 그리고 영어의 알파벳도 가르쳤다. 그러나 진척이 늦어 같은 말을 되풀이하곤 하였다. 그러나 어머니 시중을 드는 일이 중하므로 속을 썩이며 데리고 살았다.

   그러는 동안 생활습관이나 말씨가 많이 좋아졌다. 부엌일도 차츰 익혀 아내를 도와줄 수 있게 되었다. 딸한테 배워 피아노도 조금 칠 줄 알게 되었다. 4년 7개월을 함께 사는 동안 우리 가족과는 고운 정 미운정이 들었다. 그런데 그의 부모님의 건강이 좋지 않다고 하여 진천 집으로 데려다 주었다. 그 뒤로 몇 번 편지가 오간 뒤로는 소식을 모른 채 30여 년을 지냈다.

   나와 아내는 그가 지내온 일을 들었다. 그는 우리 집에서 가지고 간 돈으로 쓸어져가는 집을 수리하고, 수도를 놓았다. 그리고 건강이 좋지 않은 부모님을 지성으로 봉양하였다. 그는 열아홉 살에 진천여자중학교 1학년에 입학하였다. 학교에서는 부모님을 잘 모시면서 학업 성적이 우수하다고 추천하여 교육부장관상을 받았다. 22세에 진천상고에 입학하여 공부하는 동안 교육부장관이 주는 효녀상을 받고, 전산기능사자격증을 취득하였다.

   그는 고등학교 졸업 후 모교에 사무원으로 취직하여 근무하였다. 그 때 학교에 컴퓨터를 납품하고, 전산시스템 설치 운영을 돕던 회사원을 만나 결혼을 약속하였다. 결혼식 날 시어머니는 며느리의 부모님 자리에 노쇠한 아버지와 시각장애인 어머니가 앉는 것을 반대하였다. 그래서 그의 부모님은 내빈석에 앉아 딸의 결혼식을 지켜봐야 했다. 그는 결혼한 뒤에 시집살이의 모진 고통을 기도하며 참고 견뎠다. 그러나 시어머니는 결혼한 지 5년이 된 두 사람을 강제로 이혼하게 하였다. 그래서 다섯 살 된 아들을 남편에게 맡긴 채 혼자 살다가 3년 뒤에 시어머니의 유언을 따라 다시 결합하였다. 지금은 고등학교 3학년이 된 아들과 세 식구가 잘 살고 있다고 한다.

   공부에 자신을 얻은 그는 어려운 중에도 학점은행제를 이용하여 대학 2년 과정을 수료한 뒤에 방송통신대학에 편입학하여 학사학위를 받았다. 그 뒤에 한남대학교 대학원에서 상담심리학 석사학위를 받고, 상담사 자격증을 받았다. 그 뒤 교육청에서 뽑는 무기 계약직 상담사 선발 시험에 합격하여 A고등학교에서 5년을 근무한 뒤에 B고등학교로 옮겨 근무하고 있다고 한다. 그는 혼자 피아노 치는 연습을 하여 200여 명 모이는 교회에서 반주를 한다고 한다.

   그는 삶의 고비마다 하나님께 기도하며 의지하였고, 매사를 긍정적으로 생각하며 희망을 간직하고 살았다고 한다. 그리고 오늘의 자기가 있게 해 준 것은 청소년 시절에 반듯하게 자랄 수 있도록 잘 이끌어 주신 아저씨와 아주머니 덕택이라는 것을 한시도 잊은 적이 없다고 하였다. 그가 부모님을 위해 애쓴 이야기를 할 때에는 감동의 눈물을 흘렸고, 시어머니께 겪은 일을 말할 때에는 분노를 느끼기도 하였다. 지난 일을 이야기하는 그의 언변이 어찌 좋은지 나는 속으로 감탄을 하였다. 학습부진아였던 그의 성장과 변화된 모습이 놀라웠다. 그를 이렇게 반듯한 중년부인으로 길러주신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며 어려움을 이겨낸 그의 앞날에 기쁨과 평안이 있기를 기도한다. <기독교연합신문 제1663호, 2023. 3.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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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몇 년 전부터 2주에 한 번씩 초등학교 동창들과 탁구 모임을 갖고 있다. 모임을 시작할 때에는 여러 명이었으나 차츰 줄어 네 명이 모이는 소모임이 되었다. 그런데 그 중 한 명이 건강 때문에 잘 나오지 않아 세 명만 모이는 날이 많다. 이 모임은 고향 친구들과 탁구를 할 수 있어서 좋고, 탁구 실력이 비슷하므로 게임을 할 때 아주 재미있다.

    네 명이 모일 때에는 두 사람씩 단식 게임을 한 뒤에 복식 게임을 한다. 그러나 세 명만 모일 때에는 두 사람은 게임을 하고, 한 사람은 심판을 본다. 심판을 보는 사람은 지는 사람이 나간 자리에 들어가서 게임을 한다. 두 시간 가량 즐겁게 운동을 한 뒤에 식당으로 가서 점심을 먹으며 담소하다가 헤어지곤 한다.

    충남 홍성군 갈산초등학교 수도권 동창 모임은 1995년에 결성되어 30여 명이 모였다. 몇 번 정기 모임을 가진 뒤에 고향 동창생들을 서울로 오게 하여 합동 모임을 가졌다. 그 날 38년 만에 처음 만나는 회원도 있어서 반가운 마음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그 다음 해에는 고향의 경관이 좋은 곳으로 가서 만났다. 이를 계기로 해마다 수도권과 고향을 번갈아 오가며 합동모임을 갖곤 하였다.

    이렇게 동창 모임을 계속하는 동안 세월이 흘러 회원들의 나이가 80이 넘었다. 그러자 건강이 좋지 않은 회원이 늘고, 세상을 떠나는 회원도 늘어갔다. 그래서 얼마 전에 공식적인 동창회 모임은 해체하였다. 지금은 동창회 해산을 아쉬워하는 회원 몇 사람이 한 달에 한 번씩 모여 점심 식사를 하고, 담소하곤 한다. 또 취미에 따라 탁구 모임, 동양화 연구 모임 등을 갖는다. 세 모임에 모두 참여하는 사람도 있지만, 나는 점심 모임과 탁구 모임에만 참여한다.

    내가 어렸을 때에는 탁구가 널리 보급되지 않았던 때였으므로, 탁구를 익힐 기회가 없었다. 대학을 졸업하고 교사가 된 뒤에 잠깐씩 몇 번 라켓을 잡아보았을 뿐이다. 교수가 된 뒤에는 강의하는 일 외에 연구 논문을 쓰고 저서를 펴내는 일에 몰두하느라 라켓을 잘아볼 기회를 갖지 못하였다. 그러다가 회갑을 지낸 뒤에 아내의 권유로 탁구를 배우기 시작하였다.

    회갑 이듬해인 2003년 2월에 나는 아내와 함께 탁구장에 갔다. 탁구 실력이 좋은 사람들 사이에서 치는 것이 부끄러웠지만, 나보다 실력이 좋은 아내가 연습 상대가 되어 격려해 주는 바람에 용기를 내어 탁구대 앞에 서기 시작하였다. 며칠 뒤에 나는 아내의 권유대로 정식으로 회원 등록을 하고, 하루에 20분씩 지도를 받기 시작하였다. 쉐이크핸드 라켓을 라운드형으로 바꾸고, 기본자세부터 차근차근 익혔다. 지도를 맡은 분은 80년대에 국가대표 선수를 지낸 황남숙 선생인데, 아주 친절하게 가르쳐 주었다. 코치한테 렛슨을 받은 뒤에는 아내와 연습하곤 하였다.

    일주일에 두 번을 가겠다고 하였지만, 한 번밖에 못 가는 주도 있었고, 아예 못 가는 주도 있었다. 나와 아내의 건강 형편 때문에 몇 주씩 거르기도 하였다. 그러나 사정이 허락되는 대로 탁구장에 가서 열심히 연습하였다. 그렇게 몇 년을 지내고 보니, 기본자세도 어느 정도 몸에 익었고, 상대방의 자세에 따른 공의 움직임과 방향을 조금 읽을 수 있게 되었다. 그 뒤로 가끔씩 아내와 게임을 하기도 하고, 교회에 가서 교인들과 게임을 하기도 하였다. 그런데 몇 년 전부터 아내의 시력에 문제가 생겨 함께 탁구를 하지 못한다. 그렇게 몇 년을 지나고 보니, 탁구 실력도 많이 줄었다.

     몇 년 전에 초등학교 동창 모임에서 탁구 이야기가 나와 탁구 모임을 갖기 시작하였다. 종로에 있는 탁구장에서 시작하였으나, 지금은 한 친구가 사는 아파트 단지의 탁구 연습실을 이용한다. 코로나 사태 때에는 이곳도 정부의 방침에 맞춰 연습실을 개방하기도 하고, 폐쇄하기도 하였다. 요즈음에는 쉬지 않고 문을 여니 다행스럽다. 나는 이 모임에 참여할 때마다 기쁘고 즐겁다. 80이 넘은 고향 친구들이 모여 탁구를 할 수 있도록 건강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한다. 노년의 건강 증진에 도움이 되고, 우정을 돈독히 할 수 있는 이 모임이 오래 계속될 수 있도록 모두 건강하기를 기원한다. (2003. 3.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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