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에 초등학교 교장을 지낸 지인을 만났다. 그는 독실한 기독교인으로, 우 ‘리말 바로 알고 쓰기’에 관심이 많은 분이다. 그는 주일예배에 빠지지 않음은 물론, 매일 새벽에 영상을 통해 유명 목사님의 설교를 듣고 많은 은혜를 받는다고 한다. 그런데 목사님들이 우리말 어휘를 잘못 쓰시는 것을 듣고, 마음이 상하곤 하여 나한테 하소연하러 왔다고 하였다. 교회에서 목사님이나 교인들이 쓰는 말 중에는 잘못된 것이 많다. 그와의 대화를 계기로 교회에서 잘못 쓰는 말 몇 가지를 정리해 본다.

   먼저 ‘축복’이란 말의 쓰임에 관해 생각해 보겠다. 축복은 ‘빌 축(祝)’ 자와 ‘복 복(福)’ 자가 합해진 한자말로, ‘복을 빎’의 뜻이다. 그러므로 “하나님, 성도들에게 축복해 주십시오.”와 같은 말은 잘못된 표현이다. 이 말은 더 높은 존재자에게 복을 빌어 달라고 하나님께 비는 말이 된다. 하나님은 복을 주시는 절대자로, 하나님보다 더 높은 분이 없다. 그런데 하나님께 복을 빌어 달라고 하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 이 경우에는 ‘축복’이라는 말 대신에 ‘복(은총, 은혜)을 내려 주십시오’라고 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창세기> 12장 3절을 보면,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개역개정성경》)라고 적혀 있다. 여기서 ‘너를 축복하는 자’는 아브람에게 ‘복을 내려 주실 것을 비는 사람’을 뜻한다.

   한국인들은 상대방을 부를 때 높이는 뜻에서 이름 뒤에 직명을 붙이고, 끝에 ‘님’자를 붙여 부른다. ‘000 사장님(장관님, 선생님)’이라고 부르는 것이 좋은 예이다. 그리고 남이 나를 부를 때에도 그렇게 불러주기를 기대한다. 이러한 의식은 교회 안에도 널리 퍼져 있다. 그래서 ‘000 목사님(전도사님)’, ‘000 장로님(권사님, 집사님)’이라고 부른다. 이것은 상대방을 높여 부르려는 마음에서 생긴 것으로, 오래 전부터 전해 오는 관습이다. 

   남에게 자기를 말하면서 직명을 밝힐 필요가 있을 때에는 ‘목사(전도사) 000’, ‘장로(권사, 집사) 000’라고 직명을 먼저 말하고, 그 뒤에 자기 이름을 말해야 한다. 그래야 자기를 낮추는 겸손한 표현이 된다. 자기 이름 뒤에 직명을 말하면 자기 스스로를 높이는 것이 되어 실례가 된다. 상대방이 나의 직분을 알 경우에는 직명을 생략하고 이름만 말해도 된다. 이를 지키지 않으면 겸손을 모르는 교만한 사람으로 인식되기 쉽다. 이것은 제삼자를 화제에 올릴 때에도 마찬가지이다. 성경의 인물인 ‘바울’을 말할 때에 ‘사도 바울’이라고 하는 것보다는 ‘바울 사도’라고 하는 것이 좋겠다. 목사님의 말씀을 인용할 때 ‘목사 아무개가 말하기를’이라고 하는 것보다는 ‘아무개 목사님께서 말씀하시기를’이라고 말하는 것이 존경의 뜻을 담은 표현이 된다.

   요즈음에는 상대방의 아내를 높이는 말로 ‘사모님’이 널리 쓰인다. ‘사모’는 스승의 부인을 가리키는 말이다. 우러러 존경하는 스승을 아버지에 비겨 ‘사부(師父)’라 하고, 스승의 부인을 어머니에 비겨 ‘사모(師母)’라고 한다. 그에 따라 기독교인들은 목사나 전도사의 부인을 ‘사모님’이라고 부른다. 목사나 전도사는 신앙적으로 스승 격이니, 나이의 많고 적음에 관계없이 존경의 대상이다. 그러므로 존경하는 분의 부인을 ‘사모님’이라고 부르는 것은 적절하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사모’란 말이 ‘목사의 아내’를 가리키는 말처럼 잘못 쓰이고 있다. 그래서 목사가 다른 사람에게 자기 아내를 소개하면서 ‘제 사모입니다.’란 말을 예사로 하기도 한다. 이것은 언어 예절에서 벗어난 표현이다. 목사도 자기 아내를 가리킬 때에는 ‘제 처(아내, 내자, 안식구)입니다’라고 말하는 것이 좋겠다.

   하나님은 온 인류를 보살피시는 분이다. 그런데 한국인에게는 한국어로, 영국인에게는 영어로, 스페인인에게는 스페인어로 역사하신다. 그러므로 한국인은 바른 한국어로 찬양하고,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것이다. 사람의 귀에 거슬리는 어휘나 문장을 쓰면 하나님께서도 언짢아하실 것이다. 어떤 사람은 “하나님은 너그러운 분이셔서 그 사람의 마음을 아시고 응답해 주실 것이므로, 어휘 사용이나 문장이 잘못되었다고 지적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이것은 잘못된 생각이다. 어휘나 문장을 바로 알고 써야 말하는 뜻을 바르게 전달할 수 있다. 그리고 언어 예절을 지키는 바른 태도를 가진 사람으로 인정받을 수 있다. <기독교연합신문 제1659호(2023. 2.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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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크리스마스가 가까워지면 어린이들은 선물을 가져다준다는 산타클로스 할아버지를 기다린다. 요즈음 어린이들이 알고 있는 산타클로스는 하얀 수염에 흰 깃을 단 빨간 외투를 입고, 썰매를 타고 다닌다. 그래서 산타의 고향은 추운 북유럽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에 부응하여 핀란드 로바니에미에는 산타마을을 조성하고, 산타우체국을 세웠다. 세계 각국의 어린이들이 산타에게 보내는 편지는 이곳으로 와서 보관된다. 그리고 보낸 사람의 요청이 있는 편지는 씌어 있는 주소로 보내기도 한다.

   그러나 자세히 살펴보면, 원조 산타의 고향은 북유럽이 아니라 튀르키예 뎀레이다. 《표준국어대사전》에는 산타클로스는 “4세기경 미라의 주교였던 성인 니콜라스의 이름에서 유래한다.”고 적혀 있다. 두산백과사전이나 네이버 지식백과사전 등에도 같은 내용이 실려 있다. ‘미라(Myra)’는 4세기경에 지금의 튀르키예 남부 ‘뎀레(Demre)’에 있던 도시국가이다.

   나는 10여 년 전에 튀르키예의 지중해 연안에 있는 뎀레를 찾았다. 고대 리키아 동맹 여섯 도시국가 중의 하나인 미라가 있던 곳이다. ‘칼레(Kale)’라고도 하는 이 도시의 인구는 지금 15,000명쯤 된다. 이곳에는 산타클로스의 실제 인물인 성 니콜라스(St. Nicholas, A.D. 270~346)가 주교로 시무하던 니콜라스 교회가 있다. 지금 이곳은 ‘성 니콜라스 박물관(Noel Baba Müzesi)’이라고 하여 입장료를 받으며 공개하고 있다. 이 자리에는 A.D. 3세기부터 교회가 있었다고 한다. 지금 있는 건물은 6세기에 세워지고, 8세기 이후에 여러 차례에 걸쳐 증축된 것이라고 한다. 교회 뜰과 교회 입구에는 니콜라스 주교의 상이 서 있다. 교회 안의 벽에는 이곳저곳에 성경의 내용을 바탕으로 한 성화가 그려져 있다. 가장 넓은 방은 예배를 드리던 곳인데, 그 옆의 작은방에는 니콜라스의 석관묘(石棺墓)가 있었다.

   니콜라스는 A.D. 270년경에 이곳 미라의 이웃 도시인 파타라(Patara)에서 태어나 알렉산드리아에서 공부하고, 미라로 와서 주교로 임명되었다. 니콜라스는 주교로 있으면서 불쌍하고 힘없는 사람들을 도와주고, 기도가 영검하였으므로 ‘구원의 성인’, ‘기적의 성인’, ‘선물을 주는 성인’으로 깊은 존경을 받았다. 그가 죽은 뒤에는 그를 존경하는 사람들이 니콜라스의 이름으로 어려운 사람들에게 선물을 주었다. 그가 세상을 떠나자 신도들은 그를 석관에 넣어 교회에 안치하였다. 그런데 11세기에 이탈리아 상인들이 석관을 파괴하고, 유골을 가지고 가버렸다고 한다. 이들이 가져가고 남은 유골은 지금 안탈랴 고고학 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당시 아나톨리아 지역에서 두 번째로 비중이 큰 교회의 주교였던 니콜라스의 언행과 명성은 러시아, 독일, 이탈리아 등 유럽 지역에 널리 알려졌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깊이 존경하고 숭배하는 인물이 되었다. 가톨릭에서는 그를 성인으로 숭배하였는데, 그의 이름은 라틴어로 ‘상투스 니콜라우스’이다. 네덜란드 사람들은 그를 ‘산 니콜라우스’라고 불렀다. 그런데 아메리카 신대륙에 이주한 네덜란드인들은 그를 ‘산테 클라스’라고 불렀다. 이 발음이 미국어화 하여 ‘산타클로스’가 되었다. 산타클로스는 19세기에 크리스마스가 전 세계에 알려지면서 착한 어린이들에게 선물을 주는 상상의 인물이 되었다.

   독일을 비롯한 게르만 신화에서 선물을 주는 신은 ‘오딘(odin)’인데, 오딘은 하얀 수염을 달고, 순록이 끄는 썰매를 타고 다녔다. 게르만 민족이 기독교를 받아들이고, 산타클로스가 널리 알려지면서 신화에 나오는 오딘의 역할이 산타클로스로 바뀌었다. 그래서 산타클로스가 하얀 수염을 달고 썰매를 타고 다니게 되었다. 산타클로스가 흰 깃을 단 빨간 외투를 입고 뚱뚱한 모습으로 변한 것은 1931년 미국의 해돈 선드블롬이 코카콜라 광고에서 그린 그림에서 유래한 것이다.

   그에게는 재미있는 일화가 전해 온다. 미라의 한 귀족이 갑작스럽게 몰락하여 세 딸의 결혼 지참금을 마련할 수 없었다. 그래서 딸들을 명문가에 시집보내지 못하게 되었다. 이 사실을 안 그는 밤에 몰래 금화 주머니 3개를 가지고 가서 창 너머로 던져 주려고 하였다. 그러나 창문이 굳게 닫혀 있어서 할 수 없이 금화 주머니를 굴뚝 안으로 던졌다. 이튿날 아침에 금화 주머니를 발견한 귀족은 딸들에게 지참금으로 주어 좋은 집으로 시집보냈다고 한다. 산타클로스가 선물을 굴뚝으로 준다고 하는 것은 이 일에서 유래한 것이라고 한다.

   성 니콜라스와 같이 착한 일을 하는 사람은 현대에도 많이 있을 것이다. 이들의 선행을 널리 알리고 치하하여야 한다. 그래서 더 많은 사람들이 선행에 가담하게 해야 한다. 제2, 제3의 산타클로스 출현을 기대한다. <기독교연합신문 제1652호(2022. 12.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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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교수직에서 정년퇴임을 한 이듬해에 국제교류재단에서 선발하는 해외파견 교수로 터키에 가게 되었다. 내가 터기에 간다고 하니, 기뻐하면서 격려해 주는 사람이 있었다. 그런가 하면, 이슬람 국가에 가서 안전문제가 생기면 어떻게 하느냐고 걱정하는 사람도 있었다. 이슬람 국가에 체류할 때에 안전을 염려하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나는 고등학교에서 세계사를 배울 때 “이슬람교는 한 손에 《코란》을 들고, 다른 한 손에 칼을 들고 선택을 강요하며 선교한다.”는 말이 떠올랐다. 미국의 9․11 테러를 비롯하여 세계 여러 곳에서 일어나는 폭탄 테러의 배후에 이슬람교도가 있다는 뉴스를 여러 번 접하였다. 얼마 전에는 이슬람교도에게 인질로 잡혀 있던 한국의 선교사가 살해되었다는 보도도 있었다. 이슬람 국가의 대학에 자리 잡은 한국인 교수가 이슬람교로 개종하지 않으면, 안전을 보장할 수 없다는 학생들의 협박을 받고 되돌아왔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나는 책을 읽으면서 터키는 6․25 전쟁 때 네 번째로 많은 군인을 파견한 나라, 한국을 형제의 나라로 생각하고 한국인에게 매우 친절한 나라라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비교적 온건한 수니파가 주종을 이루고 있고, 종교의 세속화를 선언한 나라여서 중동의 이슬람 국가와는 사회적 분위기가 다르다는 것을 알았다. 그러나 터키는 인구의 98%가 이슬람교도라는 것 때문에 막연한 두려움과 불안을 떨쳐버릴 수 없었다.

  나는 터키에 한국어와 한국문학, 한국문화를 가르치러 가는 교수이다. 선교사로 가는 것은 아니지만, 무슬림 학생들에게 종교 문제를 어떻게 대할 것인가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생각 끝에 ‘학생들에게 기독교인임을 밝히고, 기독교에 대한 이해의 폭을 넓혀 서로 존중하는 마음을 갖게 한다. 그리고 여건이 성숙되면 전도한다’라고 마음을 정했다.

  터키의 에르지예스 대학교 한국어문학과에 부임한 뒤에 3·4학년 학생들과 대학원생이 찾아와 자주 대화하였다. 그 중 한 학생이 “교수님은 종교가 무엇입니까?”라고 물었다. 나는 기독교라고 말한 뒤에, 기독교를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었다. 종교 문제에 관해 이야기하던 학생들 대부분은 잘 모른다고 하였다. 나는 기독교의  성경과 이슬람교의  코란은 서로 통하는 점이 많다고 하며 예를 들어 말하였다.

  그 무렵에 터키의 명절인 ‘아쉬레의 날’이 되었다. 나는 학생들에게 이 명절이 ‘노아가 방주에서 마지막으로 남은 곡식을 함께 넣어 끓여 먹은 일을 기념’하는 데서 연원되었음을 이야기하였다. 또 터키인이 큰 명절로 꼽는 '쿠르반 바이람(희생명절)'은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아들을 제물로 바치려고 한 사건에 연원을 두고 있다. 그러나 아브라함이 바치려고 한 아들의 이름은 ‘이삭’과 ‘이스마엘’로 다르다고 하였다. 그리고 모세나 예수를 성인으로 모시는 점은 두 종교가 같음을 이야기하였다. 이렇게 하는 동안 학생들은 기독교의 장로라고 하는 나의 말과 행동을 보면서 기독교에 대한 경계심을 풀기 시작하였다.

  내가 방학이 되어 서울에 와 있을 때에나 완전 귀국한 뒤에 어학연수나 대학원에 진학하여 한국에 온 터키 학생들을 서울에서 만났다. 나는 그들에게 맛있는 한국 음식을 사 주며 한국문화를 알려주었다. 주일에 만나는 학생은 우리 교회로 데리고 가서 주일 예배를 함께 드렸다. 목사님은 광고 시간에 전 교인에게 그 학생을 소개하였다. 예배가 끝난 뒤에는 애찬실에 가서 함께 점심을 먹으며 대화하기도 하였다.

  그러는 동안 나와 친해진 졸업생 몇 명은 기독교에 대해 친근감을 갖게 되었다. 어느 선교학 전공 교수께 이런 말을 하니, “최 교수님은 이슬람국가에 가서 그 나라 학생들과 교류하는 것만으로도 선교적으로 의미가 있어요.”라고 말하였다. 그 말을 들은 나는 마음속으로 선교사 아닌 선교사의 역할을 조금은 했다고 생각하였다. <기독교연합신문 1649호, 2022. 12.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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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얼마 전에 40평형 아파트에서 작은 아파트로 이사하였다. 먼저 살던 집으로 이사하여 얼마 동안은 어머니와 막내아들이 함께 살았으므로, 넓은 집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전철을 타려면 신금호역까지 15~20분 걸어가야 하지만, 운동 삼아 걷는다는 생각으로 전혀 부담을 느끼지 않았다. 그런데 막내아들이 혼인하여 나가고, 어머니께서 돌아가시고 나니, 두 식구가 살기에는 넓은 집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또 나이 70을 넘으면서 승용차보다 전철을 이용하는 횟수가 많아지다 보니, 언덕길을 오르내리면서 전철역까지 걸어 다니는 것이 무척 부담스러웠다. 그래서 전철역 가까운 곳의 작은 아파트로 이사하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였다.

  전부터 알고 지내는 부동산중개인을 만나 재개발이 확정된 금호 제15구역으로 이사하면 어떻겠느냐고 물었다. 그는 그곳보다 빨리 입주할 수 있는 금호 제13구역이 좋겠다고 하였다. 그곳은 금호산 아랫자락에 싸여 있는 1천 세대가 넘는 단지로, 신금호역과 붙어 있는 초역세권이어서 마음에 들었다. 건축 공사가 진행 중인 그곳은 40평형은 몇 세대 되지 않고, 24·32평형을 주로 짓는 단지였다. 매물로 나온 물건을 보니, 32평형보다 24평형의 위치와 구조가 아내의 마음에 들었다. 그래서 처음에 생각했던 32평형을 포기하고, 24평형을 골라 계약하였다.

   그로부터 2년이 지나 건축공사가 끝나고, 입주일이 다가왔다. 이사할 아파트에 가서 보니, 전용면적이 살고 있는 집의 반밖에 되지 않았다. 2년 전에 두 식구 살 집이니 좁아도 괜찮겠다는 생각에서 용기를 내어 24평형을 골랐다. 그런데 막상 이사할 생각을 하니, 위치와 구조가 마음에 덜 들더라도 32평형을 고르지 않은 것이 후회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것은 돌이킬 수 없는 일로, 때늦은 후회였다. 그대로 이사를 해야 할 터인데, 많은 세간살이를 어떻게 처분해야 할까가 큰 문제였다.

   아내가 애지중지하며 매일 사용하던 자개장롱과 화장대, 문갑 등은 방이 좁아 놓을 자리가 없었다. 고추장·된장을 담그고, 김장김치를 담가 먹던 크고 작은 항아리 역시 가지고 가야 놓을 자리가 없었다. 그 외에도 필요에 따라 장만한, 크고 작은 세간살이를 놓을 자리가 없었다. 50년 가까이 정들여 사용하던 세간살이를 그냥 버리자니 너무나 아깝고, 마음이 아팠다. 그래서 넘겨주면 고마운 마음으로 받아 쓸 사람이 있는가를 찾기 시작하였다. 우리의 뜻을 전해들은 사람 중에는 가져가고 싶지만, 놓을 자리가 마땅하지 않아 아쉬워하는 이도 있었다.

나와 아내는 전북 정읍의 제자 김문선 교장을 떠올렸다. 그 무렵 그는 살던 집을 헐고 새로 지었다. 그리고 그 옆에 넓은 건물을 지어 ‘샘소리터’를 운영하고 있었다. 우리의 말을 들은 그는 미처 새 가구를 준비하지 못하였다고 하면서 고맙게 받아 잘 간직하며 쓰겠다고 하였다. 그래서 정읍에서 가축을 싣고 서울에 왔다가 빈차로 돌아가는 트럭을 교섭하여 장롱, 화장대, 문갑, 항아리 등 부피가 큰 세간과 장서의 일부를 그의 집으로 보냈다. 그는 새살림을 차린 것 같다며 좋아하였다.

   소장하던 책 중에서 문학작품을 비롯하여 청소년에게 필요한 책은 나의 모교인 갈산중학교 도서관에 기증하기로 하고, 택배로 보냈다. 월간지나 비전공 서적은 폐지 수집 장소에 내놓았다. 벽에 걸어 두었던 서화 액자, 장식장에 넣어 두었던 감사패·상패·기념패도 문제였다. 궁리 끝에 일부 액자는 글씨와 그림을 떼어낸 뒤에 부숴서 버렸다. 감사패·상패·기념패 역시 일부는 사진을 찍어 파일로 만든 뒤에 버렸다. 또 어머니 환갑연, 아이들 3남매의 결혼식, 나의 결혼식·출판기념회·환갑기념논문집 봉정식·정년퇴임기념문집 봉정식 등 행사 때 받은 방명록은 사진을 찍어 파일로 만든 뒤에 버렸다. 온갖 사연이 깃들어 있고, 기념이 될 만한 것들이기에 오래 오래 소장하고 싶은 것들이었다. 그러나 뾰족한 수가 없으니 눈물을 머금고 아픈 가슴 쓸어내리며 처분하였다.

  내 주변에는 정년퇴임할 때 소장하던 책들을 대학도서관이나 연구소에 기증한 교수도 있고, 감사패 대신 종이로 된 감사장을 받던 출판사 사장님도 계시다. 이분들은 버릴 것을 미리 정리한 지혜로운 분들이다. 지인 중에 오래 산 넓은 아파트에서 좀 작은 집으로 이사하고 싶은 이들이 있다. 그런데 많은 세간살이를 정리할 일이 엄두가 나지 않아 실행에 옮기지 못하고 있다. 그는 자녀들에게 무거운 짐을 떠넘기게 되어 마음이 편치 않다고 한다. 그러면서 나와 아내의 용기와 실천력에 찬사를 보낸다고 하였다.

   이사하면서 처분한 것들에는 온갖 사연과 함께 애정이 깃들어 있었기에 새록새록 생각이 난다. 그러나 없어서 큰 불편을 느끼지는 않는다. 그러고 보니, 없어도 괜찮은 물건에 집착하였던 것 같다. 우리는 살면서 소유하고 집착하는 것들이 많다. 그러나 이것들은 어느 시기에 이르면 일부 또는 전부를 버려야 한다. 이제 얼마 남지 않은 생애에 없어도 괜찮은 것들에 집착하지 말고, 미리 정리하는 지혜를 발휘해야겠다. 그래야 버리는 데 따르는 서운함과 아쉬움이 아픔으로 변하여 힘들어 하는 일을 겪지 않게 될 것이다. (2022. 11.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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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독교인의 본분은 매일 기도하고, 성경을 읽으며 하나님의 뜻을 실천하는 일이다. 그런데 성경 읽기는 마음을 다잡고 시간을 내어 읽지 않으면 실천하기 어렵다. 그래서 목사님 설교의 본문 말씀과 특별히 권장하는 부분만을 읽고 통독하지 못하는 교인이 많다. 그렇게 되면, 성경 전체의 짜임이나 각 절에 담긴 의미를 잘 알지 못하게 된다.

  나는 늦은 나이에 담임목사님과 교인들에게 떠밀려 장로가 되었다. 장로 임직을 앞두고, 나는 성경을 얼마나 읽었는가 생각해 보았다. 대학과 대학원 공부를 하는 동안에는 학교에 근무하면서 석사, 박사 학위 논문을 써 내느라고 여념이 없었다. 교수가 된 뒤에는 강의하면서 연구하고, 학생지도를 하는 일에 온힘을 기울이느라 정신이 없었다. 그러다 보니, 매일 잠깐씩 시간을 내어 기도하고, 성경을 읽었지만, 여러 번 통독하지 못한 것이 부끄러웠다.

  담임목사님께서는 성경은 구약 39권 929장, 신약 27권 260장으로, 모두 1,189장이다. 이를 1년 365일로 나누면, 3.3장이 된다. 하루에 3~4장을 읽으면, 1년에 한 번을 통독할 수 있으니, 이를 이행하라고 전교인에게 권고하셨다. 그 무렵 나는 성경을 하루에 석 장 이상 읽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래서 우리 교회에서 쓰고 있는 《한글개역 성경》을 가지고 구약 「창세기」부터 차례로 읽기 시작하였다.

  그런데 성경을 읽다 보니, 현대국어의 어법에 맞지 않는 곳이 많고, 뜻을 알기 어려운 곳도 있었다. 한 가지 예를 들면,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바 되었는데, 그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 이름은 기묘자라(이사야 9장 6절).”라는 구절이다. ‘어깨에 정사를 메었다’는 말이 무엇이며, ‘기묘자’는 무슨 뜻인가? 나는 국어 실력 부족을 탓하다가 교보문고에 가서 《현대인의 성경》을 사다가 읽고서야  그 뜻을 알았다.

  성경은 번역에 문제가 있음을 안 나는 좋은 번역 성경이 나왔으면 좋겠다고 생각하였다. 그런데 1993년에 《표준번역 성경》이 대한성서공회에서 나왔으므로, 이 성경을 사다가 읽었다. 2004년에는 이 성경의 개정판이 《새번역 성경》이란 이름으로 발행되었다. 이 성경은 원문의 뜻을 한국어를 사용하는 독자들이 이해할 수 있도록 ‘정확하게 번역하되, 쉬운 현대어로, 우리말 어법에 맞게, 한국교회에서 사용할 수 있도록 번역’한 성경이다. 우리 교회에서는 이 성경을 사용하고 있고, 나 역시 이 성경책을 몇 번 통독하였다.

  얼마 전에 담임목사님은 ‘성경 읽기표’를 전 교인에게 나눠 주시면서 성경 통독을 권면하셨다. 그 표에는 신․구약 성경 장수와 절수가 적혀 있어 각자 읽은 장과 절을 표시할 수 있었다. 한 번 통독이 끝나면 기록한 읽기표는 교회에 제출하고, 새 읽기표를 받는다. 사무간사는 「전교인 성경 통독 현황표」에 통독한 이의 이름과 통독 횟수를 누가 기록한다.

  이 일을 시작한 지 5년여의 세월이 흘렀다. 이번 주일(2022. 5. 29.)에 나눠준 「전교인 성경 통독 현황표」를 유심히 살펴보았다. 400여 명의 교인 중 성경 읽기에 참여한 인원은 181명으로, 모두 1213독을 하였다. 개인별 성경 통독 횟수를 보면, 1~5회 통독한 사람이 87명, 6~10회 통독한 사람이 66명, 11~20회 통독한 사람이 5명, 21~30회 통독한 사람이 5명, 31~40회 통독한 사람이 3명, 41회~49회 통독한 사람이 3명이다. 성경을 30회 이상 통독한 분은 원로장로님과 원로권사님으로, 하루 시간의 대부분을 성경을 읽으면서 지내신다고 한다. 100독을 목표로 하는 분도 계시고, 자기 나이만큼 통독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분도 계시다.

  나는 하루에 성경 다섯 장 이상을 읽기로 하고, 이를 실천하려고 애쓰고 있다. 그렇게 해서 이 일을 시작한 뒤로 일곱 번을 통독하였다. 성경을 통독하는 동안 성경 전체의 짜임과 연계성을 파악하면서 각 편과 절이 담고 있는 깊은 뜻을 조금씩 깨닫게 되었다. 성경 통독 횟수를 늘려갈수록 성경에 담긴 하나님의 사랑과 은총을 깨닫고, 바른 삶의 자세를 가다듬어 나갈 수 있으리라 믿는다. <기독교연합신문, 제1645호. 2022년 11월 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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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프리카에 선교사로 파견되어 26년 동안 수고하시던 J 선교사님이 얼마 전에 귀국하셨다. 장위교회에서 나와 함께 신앙생활을 하던 그는 1996년에 남들이 부러워하는 직장인 KBS에 사표를 내고 아프리카로 떠났다. 이러한 신앙적 결단을 지켜본 나는 놀라움과 함께 존경의 마음을 가졌었다. 그가 들려준 아프리카 선교 사역 중의 수고와 보람은 매우 감동적이었다.

  그는 아프리카의 이디오피아에서 2년, 케냐에서 5년, 탄자니아에서 5년을 사역한 뒤에 잠비아로 가서 15년 동안 헌신하였다. 잠비아는 1964년 영국 식민지에서 독립한 농업국가로, 면적은 한반도의 약 3.3배이고, 인구는 약 1,840만 명이다. 국민 1인당 GDP는 1,400달러 정도로, 세계 150위이다. 그는 수도인 루샤카의 중심부에서 약 20km 떨어진 곳에 위치한 ‘모닝스타 바이블 신학교’에서 헌신하였다.

  이 학교는 설립자이자 학장인 P 선교사와 J 선교사 내외가 운영한다. 이 학교에는 세 분 선교사 외에는 전임 교수가 없으므로, 강의는 전국에서 실력이 있는 분을 초빙하여 진행한다. 정규 직원이 없고, 연세가 많으신 한국인 여성 P 선교사가 학장이므로, 학교의 크고 작은 일은 모두 J 선교사와 그의 부인 선교사의 몫이다. 100여 명의 재학생은 모두 기숙사 생활을 한다. 그는 새벽예배 시간에 설교하는 일로 일과를 시작하여 눈코 뜰 사이 없이 바쁜 하루를 보내곤 한다.

  학생들의 세끼 식사 재료와 땔감을 구입하는 일, 식사 준비하는 일을 직접 챙긴다. 식수와 생활용수를 얻기 위해 우물을 파기도 하고, 건물에 문제가 생겨 비가 샐 때에는 손수 지붕에 올라가 손질을 한다. 학생의 고민과 불편을 해소하기 위해 상담을 하고, 병이 나면 병원으로 데려가 치료를 받게 한다. 은행 관련 업무나 재학생의 학비 융자와 같은 문제도 그가 처리해야 한다. 이처럼 학교 안팎의 허드렛일부터 사무적인 일, 신앙적인 일 등 그의 손을 거치지 않는 일이 없다. 그래서 그는 농담 삼아 자신을 ‘소사(小使) 선교사’라고 하였다.

  학생들과 24시간 함께 생활하다 보니, 개개 학생의 건강 문제, 가정의 문제는 물론 신앙에 관한 일까지 알게 된다. 그러면 그에 맞게 상담하고 지도하며 보살핀다. 학생들은 그와 고운 정 미운 정을 나누며 생활한다. 그래서 졸업한 뒤에도 끈끈한 정을 이어간다. 졸업생이 개척한 교회의 건축비가 모자란다고 하면 백방으로 노력하여 도와주곤 하였다.

  이 학교는 명망 있는 강사님들을 초빙하여 강의하고, 건실하게 운영하는 것으로 정평이 나 있다. 그래서 국가에서는 군종과 원목, 경목 양성 기관으로 지정하였다. 2006년에 첫 졸업생을 배출한 이래 약 200여 명의 졸업생이 나왔다. 그들의 대부분은 전국에 흩어져 목회활동을 하고 있다. 군목과 경목이 되어 군대와 경찰에서 복음을 전하는 일을 하는 이도 있다. 지금 잠비아 경목 중 최고의 지위인 경목감은 이 학교 출신이다. 군목 중에 군종감에 오른 이는 아직 없지만, 앞으로 나올 것이다. 졸업생의 일부는 이웃나라인 짐바브웨와 말라위에 가서 선교사로 활동하는 이도 있다. 이로 보아 잠비아 ‘모닝스타 바이블 신학교’는 잠비아의 복음화에 큰 성과를 거두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는 졸업생이 개척한 교회의 헌당예배에 초청받았을 때의 감격을 잊을 수 없다고 하였다. 그는 이런 자리에 참석할 때마다 밤낮으로 수고한 보람을 느낄 수 있어 눈물을 흘리며 감사의 기도를 드렸다고 한다. 그는 공항이나 다른 지역 여행 중에 졸업생이 달려와 반갑게 인사하고 감사의 말을 할 때에도 큰 보람을 느꼈다고 한다. 또 수단, 탄자니아, 이디오피아 등의 전쟁지역에 평화유지군으로 파견된 졸업생 몇 명이 그곳에 예배 처소를 만들어 예배드리며 활동하고 있다는 말을 들을 때 더할 수 없는 감격과 감동을 느꼈다고 한다.

  나는 J 선교사 내외가 잠비아에서 몸과 마음을 바쳐 헌신한 이야기를 들으며 큰 감동을 느꼈다. 주님께서 J 선교사 부부의 노고를 치하하며 큰 상을 주시리라 믿는다. 아프리카의 낯선 풍토에서 오랜 동안 과로를 한 탓에 부인 선교사님의 건강이 좋지 않다는 말을 들으니, 참으로 마음이 아프다. 속히 쾌차하기를 간절히 기도한다. <기독교연합신문 제1643호, 2022. 10.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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