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은 예로부터 가택(家宅)의 요소마다 신이 존재하면서 집안을 보살펴 준다고 믿고 그 신에게 정기적, 또는 필요에 따라 의례를 행하며 신앙하여 왔다. 이를 가신 신앙(家神信仰)이라고 한다. 가택 신앙, 가정 신앙, 집안 신앙이라고 하기도 한다. 일부에서는 가신(家神)이라는 용어가 일제 강점기에 사용하던 일본식의 용어라 하여 비판적으로 보기도 한다. 그러나 집안 신앙이나 가정 신앙이라 할 경우, 집안에 존재하는 가신뿐만 아니라, 가정에서 신앙하는 종교 전반을 포함하는 뜻으로 확대 해석할 가능성이 있다. 가신(家神)은 가택신(家宅神)의 준말로 볼 수 있고, 집신은 가(家) 대신 집으로 쓴 것인데 익숙하지 않은 데다 쉽게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그래서 종전의 용어대로 가신 신앙이란 말을 많이 쓴다.  가신은 집안 곳곳에 존재하므로, 가신 신앙은 다신 신앙(多神信仰)이다. 가신에는 성주·조상·조왕·삼신·터주·업·철륭·우물신·우마신 등이 있다.

   성주신

  성주신은 그 집안의 으뜸 신으로, 집안의 길흉화복(吉凶禍福)을 관장한다. 집안의 으뜸 신답게 그 자리도 그 집의 중심이 되는 곳이다. 집의 모양에 따라 차이는 있지만, 대개 마루의 대들보 밑이나 상기둥의 윗부분과 같은 집안의 중심부가 성주신의 자리다.

  성주신을 상징하는 신체(神體)는 대청의 대들보 밑이나 상기둥의 윗부분에 백지, 또는 무명을 접어서 실타래로 묶거나 한지를 반구형(半球形)이 되게 만들어 붙인다. 한지를 직사각형으로 접어 붙인 다음 실타래나 띠풀로 매고, 대청 한 편에는 성주단지나 성주독을 놓기도 한다. 

  성주신의 신체를 봉안하는 것은 집을 새로 짓거나 이사한 뒤에 성주맞이굿을 하고 봉안하기도 하고, 대주(大主, 남자주인)의 나이가 7 또는 3이 드는 해에 봉안하기도 한다. 성주단지나 성주독에는 쌀이나 다른 곡식을 담는데, 이것은 농경 문화의 반영이다. 이 단지의 쌀은 주로 음력 10월 가을 추수 때 갈아넣는다. 이 속에 넣었던 곡물은 집밖으로 내보내지 않고, 밥을 지어 가족들만 먹는다. 그 곡물을 복이 담긴 신성물(神聖物)로 여겨 이를 내보내는 것은 복을 내보내는 것으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가신제는 설날·추석과 같은 명절에도 지내지만, 예전에는 특히 햇곡을 천신(薦新)하는 음력 10월 상달에 가신 단지에 들어있는 곡물을 갈면서 크게 고사를 지냈다.

                      충북 옥천군 동이면 적하리 박씨 댁 성주

 

                   충남 홍성군 갈산면 기산리 김씨 댁 성주

 

     경북 안동시 이천동 조씨 댁 성주

      조상신
  조상신은 후손을 보살펴 주는 신으로 자리는 안방의 윗목 벽 밑인데, 대체로 신체가 없다. 신체가 없이 모시는 가신을 '건궁'이라 하는데, 조상신은 건궁으로 모시는 경우가 흔하다. 조상신이 제석신(帝釋神)·세존단지 등 불교적인 명칭으로 불려지기도 한다.

  각 가정에서는 명절이나 기일(忌日)에 돌아가신 조상께 제사를 지내므로, 가신을 모시지 않는 가정에도 조상신이 있는 셈이다. 그러나 가신으로서의 조상과 제사를 받는 조상과는 차이가 있다. 유교식 제사를 받는 조상은 서열이 명확하다. 종가(宗家)의 경우에는 집에서 4대조까지 제사를 지내고, 5대 이상의 조상에게는 음력 10월에 묘에 가서 시향(時享)을 올린다. 그러나 가신으로 모시는 조상은 서열이 확연하게 정해져 있지 않다. 가신의 자리에 앉고자 하는 조상은 가족들에게 현몽(現夢)하거나, 현몽하기 전에 우환이 있다든지 혹은 좋지 않은 일이 계속되어 그 일로 점복자를 찾아가 점을 하고, 점사(占辭)에 따라 모셔지게 된다.

  조상신으로는 주로 한(恨)이 많거나 무언가 색다르게 살다가 돌아가신 분이 들어앉는다. 이들은 아주 윗대 조상부터 최근에 세상을 떠난 조상에 이르기까지 가정마다 다르다.

      조왕신
  조왕신(王神)은 부엌에 있는 신으로, 그 자리는 부뚜막이다. 삼신과 더불어 육아(育兒)를 담당한다. 간혹 재산신으로 여기기도 한다. 이는 부엌에 불이 있기 때문으로 보인다. 불은 재산을 상징한다. 그래서 화재가 난 꿈을 꾸면 재산이 생기는 것으로 여긴다. 새로 이사간 집에 성냥이나 양초를 가지고 가는 것도 불이 타듯 재산이 불어나라는 의미가 있다. 예전에 불씨를 꺼뜨리는 며느리는 집안을 망하게 할 것이라 하여 쫓아내기도 하였다. 이것은 불과 재산을 직접적으로 관련시키는 의식 때문일 것이다.

  조왕의 신체로는 '조왕중발'이라 하여 사기 종지에 정화수(井華水)를 떠올리기도 하지만, 신체가 없는 건궁 조왕도 흔하다. 조왕중발의 물을 매일 아침 갈아 올리고, 별식이 나도 올리는 것으로 신앙 의례를 표현한다. 부뚜막은 조왕신의 자리여서 주부들이 부엌에서 일할 때 아무리 피곤해도 부뚜막에는 걸터앉지 않는다. 꼭 앉아야 한다면 바닥에 나무토막 따위를 깔고 앉는 것이 고작이었다.
 

  조왕신은 섣달 그믐 무렵 하늘에 계신 옥황상제를 찾아가서 지난 일 년 간의 일을 고한다는 말이 있다. 그래서 이 때 각별히 말조심을 한다. 때로는 부뚜막에 엿을 붙여두기도 한다. 혹 하늘에 가더라도 옥황상제에게 좋지 않은 말을 전하지 말아달라고 미리 입을 막는 것이다. 


  조왕신이 자녀들을 지켜준다고 믿기 때문에 경북 안동에서는 평소 조왕을 모시지 않는 가정에서도 아들이 군대에 가거나, 그밖에 자녀들에게 커다란 변화가 생기면 조왕을 모셔 정화수를 올리며 기도한다. 그러다가 아들이 무사하게 제대를 하게 되면 조왕중발을 거둔다. 매우 실리적이고 공리적(功利的)이라 할 수 있는데, 이러한 공리성은 조왕신에 대한 신앙 뿐 아니라 우리의 민간신앙 전반에 걸쳐 공통되는 요소이기도 하다.

             부뚜막 위 작은 선반에 정화수를 떠 놓는다. (왼쪽 사진은 온양민속박물관, 오른쪽 사진은 한국민속촌에서 찍은 것임)


        삼신
   삼신[胎神, 産神]은 자녀의 출생·육아·성장 등을 관장하는 신(神)이다. 그 자리는 안방 아랫목이다. 신체는 삼신자루라 하여 한지로 만든 자루 속에 쌀을 넣어 아랫목 구석의 벽에 높직이 달아 매 놓는다. 또는 쌀을 바가지나 동이에 담고, 시렁을 만들어 거기에 얹어놓기도 한다. 이를 각기 삼신바가지 또는 삼신동이라고 한다.

  삼신은 일반적으로 '삼신할머니'로 통칭되고 있으나, 지역에 따라서 달리 부르기도 한다. 전라도 지역에서는 삼신을 '지앙'이라 하고, 경상도와 강원도 일부 지역에서는 '세존할매'라 일컫는다. 집안에 따라서는 삼신할머니와 삼신할아버지 부부를 상정(想定)하기도 한다.

  삼신의 점지를 받아 아이가 태어나면 일곱 살 때까지 보호를 받는다. 그 후부터의 수명은 칠성신이 관장한다. 삼신은 아이를 관장하는 가신이기 때문에 아이를 낳으면 삼신상을 차린다. 유달리 깨끗한 신이라고 생각하여 정화수만을 올리는 경우도 있지만, 대체로 쌀밥과 미역국, 그리고 물을 떠올린다. 또 설·정월 대보름·추석·동지 등 주요 명절에도 삼신제를 지낸다. 다른 가신과 마찬가지로 새 밥을 올리는데, 특히 삼신에게는 비린 음식을 올리지 않는다.

  삼신은 그 가계(家系)의 여자 조상이 좌정(坐定)한 것이라고 하기도 하는데, 이 때에는 현몽, 또는 점사에 따라 삼신을 모신다. 삼신은 아이 갖기를 빌며 모시는 것이 보통이지만, 아이가 있더라도 섬기는 예가 있다. 

  삼신바가지 혹은 삼신단지에 담긴 쌀은 일 년에 한 번씩 햇곡이 나면 갈아넣는다. 묵은 쌀은 집안 식구끼리만 먹으며 절대 남에게 주지 않는 것은 다른 가신과 마찬가지다.

        터주신
  터주는 지신(地神)이라고도 하는데 집터를 맡아보며 집안의 액운을 걷어주고, 재복(財福)을 주는 신이다. 가정에 따라서는 터주대감, 또는 터대감이라고도 한다. 터주를 상징하는 신체는 집의 뒤뜰 장독대 옆에 '터주가리'를 만들어 신체로 모신다. 터주가리는 서너 되들이 옹기나 질그릇 단지에 벼(요즈음에는 주로 쌀)를 담고 뚜껑을 덮은 다음, 짚을 원추형으로 덮는다. 이 터주가리에 담았던 곡물은 해마다 추수 때에 갈아넣는다. 묵은 곡식은 집밖으로 내보내지 않고 가족들이 먹으며 복을 빈다. 가을에 햅쌀로 갈아넣을 때 메를 지어 올리는 경우도 있다.

  터주신에 대한 제의는 특별히 지신제(地神祭)를 올리는 경우가 있고, 정초나 그 밖의 명절에 떡을 한 접시 올리고, 별식(別食)이 있을 때에 한 그릇 올린다. 이것은 다른 가신에 대한 의례와 대동소이(大同小異)하다.

        업신(神)
  업신은 광이나 곳간과 같은 은밀한 곳에 머물러 있으면서 재복(財福)을 준다는 가신이다. 업·업왕신·업왕·업위신이라고도 하지만, 민간에서는 '업'이라는 말과 함께 '지킴이·집지킴이' 등으로 부른다.

  업신의 대상으로 구렁이·족제비·두꺼비 그리고 사람을 들고 있다. 업이 그 집을 나가면 패가망신(敗家亡身)하거나, 커다란 변화가 생긴다고 한다.

  업신은 대체로 신체가 봉안되지 않고 건궁으로 모시지만, 다른 가신과는 달리 업구렁이라든가 업족제비·업두꺼비와 같은 동물을 업신으로 상정한다. 또 사람에게 붙어 다닌다는 인업을 업신으로 삼기도 한다. 인업은 사람에게 붙어 다니면서 그 사람에게 복을 주는 신으로, 형상은 그 사람과 같다고 한다. 그래서 인업과 인업을 달고 있는 사람과는 별개의 존재인데도, 그 사람 자신이 인업으로 인식되기도 한다.

  업의 자리는 광·곳간과 같이 재물을 보관하는 곳이다. 이는 바로 업신이 재복신임을 말해준다. 업신을 대접하는 의례는 정기적으로 지내거나 필요에 따라서 수시로 지낸다. 정기 의례는 설날·추석·동지 등 주로 큰 명절에 다른 가신과 함께 올리고, 그밖에 사람 눈에 띄었을 때에는 단독으로 올리기도 한다. 업신이 눈에 띄는 것을 예사롭게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용단지
  경북 안동·예천·풍기·상주 등 경북 북부 지역에서는 용단지를 섬긴다. 특히 안동 지역에서는 용단지 신앙이 가장 보편적인 가신 신앙이다.

  용단지는 신체(神體)의 모양을 따서 붙인 이름이다. 원래 용신(龍神)은 바람과 비·물 등을 관장하고 있는 신으로, 하늘과 땅을 오가는 전능한 신인데, 가신으로 모실 때에는 농경신·재산신의 성격을 띤다. 재산을 맡고 있다는 점에서는 업신 또는 터주신의 성격을 지니고 있다. 그래서 안동 사람들은 용단지를 터주신이라고도 하고, 업신과 동일한 개념으로 보는 경우도 있는데, 후자의 경우가 더 많다.

  용단지는 용이 드는 곳에 자리잡고 있다고 하는데, 용이 든다는 말은 재산이 들고 가정을 잘 수호해 준다는 의미가 있다. 그래서 그 자리는 곡물이 드나드는 부엌·고방, 또는 돈궤를 두는 다락 등이다. 용단지에는 쌀이나 다른 곡식의 나락을 담아둔다.

   용단지를 위하는 까닭은 농경신인 용신을 받듦으로써 집안의 평안과 농사의 풍작을 빌고, 집과 재물을 보살펴주기를 기원하기 위해서다. 가신은 저마다 고유의 기능이 있지만, 다른 가신의 기능이 뒤섞여 있다. 가신은 대체적으로 농경신으로서의 성격을 지니고 있는데, 용단지는 보다 농경성이 강하다.

        기타 가신
  위에서 설명한 가신 외에도 여러 가신이 있다. 호남에서는 터주신으로 섬기지만, 장독신의 성격도 지니고 있는 '철륭'을 비롯하여 수명을 관장하는 '칠성신', 물을 마르지 않게 하는 '우물신', 소와 말을 지켜주는 '우마신(牛馬神)'을 섬긴다. 또 대문에는 '문신(門神)'이 있어 액살(厄煞)이 접근하는 것을 막아준다고 한다. 변소에는 '측간신(厠間神)'이 있어 항시 조심해야 한다고 한다. 가신은 대체로 집안의 평안을 돌보는 착한 신이지만, 측간신은 좀 사악한 성정이 있다 하여 우리 스스로 조심해야 한다고 믿는다. 충남에서는 '왕신단지'라는 사나운 가신을 모시기도 한다.

  가신은 생업과 관련된 직능신이기 때문에 필요에 따라 생성되기도 하고, 사라지기도 한다. 인삼 농사를 하는 경북 풍기 지역에서는 생업과 관련된 인삼신(人蔘神)을 상정하여 인삼 고사를 지내기도 한다.

  가신 신앙은 흔히 여성 신앙이라고도 한다. 전 시대(全時代)에 걸쳐 해당되는 것은 아니지만, 조선 시대부터 근대 초기까지도 여성은 대체로 유교적인 이념에 묶여 사회적인 제약이 많았다. 이는 가신 신앙이 여성 신앙화 할 수 있는 한 요소가 되기도 했다.

  가신 신앙에는 현실적인 고난과 결핍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생존적 욕구, 나아가서 인간답게 살려는 욕구가 투영되어 있다. 전통 사회에서 가신 신앙은 여성들의 힘든 삶을 극복하는 심리적 기제의 기능을 하기도 하였다. 여성들은 가신 신앙을 통해 현실에서의 고통스러운 상황을 극복하고 '풍요로운 삶을 영위하고자 하였던 것이다. 참고문헌   최운식 외, 한국 민속학 개론(서울:민속원, 2004)

 

 

     무속(巫俗)과 무교(巫敎
  무속(巫俗)은 민간 층에서 무(巫)를 중심으로 하는 종교 현상으로, 민간신앙의 한 형태인데, 무교(巫敎)라고 하기도 한다. '무속'이란 말은 이를 민속의 하나로 보는 용어이고, 무교(巫敎)는 이를 종교의 하나로 보는 용어이다. 

  무속을 종교로 보는 견해가 적절한가는 무속이 종교의 기본 요건을 갖추었는가를 따져 보면 알 수 있다. 종교의 기본 요건은 교리(敎理), 사제자(司祭者), 신도(信徒)라고 할 수 있다. 불교에는 불교의 교리를 적은 불경이 있고, 사제자인 승려가 있으며, 이를 믿고 따르는 많은 신도들이 있다. 기독교 역시 교리를 적은 성경이 있고, 사제자인 천주교의 신부나 개신교의 목사가 있고, 많은 기독교 신자가 있다. 이슬람교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무속의 경우에는 어떠한가?

  무속의 사제자는 우리가 흔히 '무당'이라고 하는 '무(巫)'인데, 현재 우리 나라에는 약 10만여 명의 무가 있다. 이들 무당에게는 1년에 한 번 정도 굿을 하고, 수시로 연락하며, 그들의 말을 믿고 따르면서 유대(紐帶) 관계를 유지하는 사람들이 있다. 무당들은 이런 사람을 '단골손님' 또는 '신도'라고 한다. 단골손님의 수는 무당의 영적(靈的) 능력에 따라 다른데, 많으면 수백에서 수천 명, 적어도 수십 명의 단골손님을 거느리고 있다. 그러므로, 무속의 신도는 대단히 많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교리는 체계를 갖추지 못한 채 관습(慣習) 또는 구전(口傳)으로 전해 오고 있다. 그래서 종교의 요건을 갖추고 있기는 하지만, 현대 종교와 같은 체제를 갖춘 종교로 보는 데에는 문제가 있다. 그래서 민속학자들은 '무교'라 하지 않고 '무속'이라는 명칭을 흔히 쓴다.

        무(巫)의 성격과 구분
  흔히 '무당'이라고 부르는 무(巫)는 '신병(神病)'이라는 종교 체험을 통하여 신의 영력(靈力)을 흭득하여 신과 교통하는 신권자(神權者)로, 신의 영력에 의해 인간의 길흉화복(吉凶禍福)을 굿으로 조절하는 능력을 가진, 민간 층의 종교적 지도자이다. 이들이 겪는 신병은 며칠씩 음식을 먹지 못하고, 몸이 (대개는 몸의 한쪽이) 아파 움직이지 못하고 며칠 또는 몇 달씩 누워 있으며, 꿈 또는 환상 속에서 신을 만난다. 이들의 병은 약으로는 고치지 못하고, 내림굿을 하여 신을 받아 모시고 무당이 되면 씻은 듯이 낫는다. 

  무는 종교 의식을 집행하는 사제자의 역할, 신도들의 병을 고치는 의사의 역할, 점으로 앞일을 알아맞히는 점복(占卜) 예언자(豫言者)의 역할을 하는 외에 예능 오락적인 기능을 하기도 한다. 앞의 세 가지는 모든 종교의 사제자가 갖는 기능이다. 그런데 뒤의 예능 오락적 기능은 한국 무당만이 지니는 기능이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은 '굿 구경한다'는 말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굿이 신과 인간을 즐겁게 하는 내용이 많음을 말해 준다. 

  한국의 무는 ①무당형, ②단골형, ③심방형, ④명두형으로 구분한다. 무당형은 타고난 무당이 아니라 사는 동안에 신병을 앓다가 강신(降神) 체험을 하고, 내림굿을 통하여 된 무당이다. 주로 중부 이북 지방에 분포되어 있다. 이들은 노래와 춤을 배워 정통 굿을 주관할 뿐만 아니라, 몸주로 모신 신의 영력에 의해 점복도 한다. 이들이 무당 노릇을 하다가 그만두면 또다시 신병을 앓아 고통을 받게 되므로, 한 번 강신하여 무당이 된 사람은 자기 마음대로 그만둘 수가 없다. 

  단골형은 혈통을 따라 대대로 사제권(司祭權)이 계승되어 인위적으로 된 세습무(世襲巫)이다. 주로 호남 지역에 분포되어 있었다. 단골들은 사제권에 의한 일정 지역의 관할권을 계승해 왔다. 단골의 관할 지역을 '단골판'이라 한다. 사제권은 아버지에서 큰아들로 계승되지만, 실제 단골 노릇은 그 아내가 한다. 그래서 굿의 진행이나 가무(歌舞)는 시어머니에서 며느리로 계승된다. 이들은 어려서부터 친정어머니한테 노래와 춤을 배우고, 시집와서 시어머니를 따라 굿을 익히므로 굿은 잘 진행한다. 그러나 영력(靈力)이 약하여 점복은 하지 않는다. 이들은 무업(巫業)을 그만두어도 병이 나서 앓는 일이 없으므로, 무업을 그만두고, 자기가 단골이라는 사실을 속이는 사람이 많다. 그래서 최근에는 단골을 만나기가 쉽지 않다.   

  심방형은 단골형과 같이 무의 사제권이 혈통을 따라 대대로 계승되는 세습무이다. 이들은 무속에서 제도화된 일면을 보이면서, 영력을 중시하여 구체적인 신관(神觀)이 확립되어 있다. 이들은 가무로 굿을 주관할 뿐만 아니라, 무구(巫具)를 이용하여 점을 하기도 한다. 이들은 주로 제주도 지방에 분포되어 있다.

  명두형은 죽은 아이의 영혼이 강신(降神)하여 된 점복 전문의 점장이로, 가무(歌舞)에 의한 정통굿의 주관은 불가능한 무이다. 이들을 '명도', '명두'라고도 하고, '태주'라고 하기도 한다. 
요즈음에는 무당형의 무 중에 죽은 아이의 영혼이 내린 사람이 많아 ①의 무당형이 ④의 명두형을 겸하는 경우가 많다.

  요즈음 우리들이 흔히 볼 수 있는 무는 대개 무당형이다. 그런데 그 숫자를 정확히 알 수는 없다. 그러나 그들의 친목단체인 경신연합회에 가입한 회원이 전국 151,236명이고, 서울에만 37,500명이 있다는 것으로 보아 그 세(勢)를 짐작할 수 있다.  
   
        무속의 신과 제의의 종류
  무속에서 신앙되는 신은 성주신·조상신·조왕신·삼신·업신과 같은 가신(家神), 산신·서낭신·당신·부군신과 같은 동신(洞神), 천신·칠성신·시준신·제석신·용신·장군신·군웅신·신장신·손님신·창부신 같은 외계신(外界神) 등 민간신앙에서 신앙되는 모든 신들이다.

  한국 전역에서 전승되고 있는 무속 제의인 굿은 그 목적에 따라 무신제(巫神祭), 가제(家祭), 동제(洞祭)로 나눌 수 있다. 무신제는 무당 자신의 굿으로, 신이 내릴 때 하는 강신제(降神祭, 내림굿·신굿·명두굿이라고도 함)와 무의 영력을 강화시키기 위해 봄·가을에 주기적으로 하는 축신제(祝神祭, 꽂맞이굿·단풍맞이굿·진적굿·대택굿이라고도 함)가 있다.

  가제는 각 가정에서 가족의 안녕과 행운을 위해서 하는 제의로, 생전 제의(生前祭儀)와 사후 제의(死後祭儀)가 있다. 생전 제의는 주기적으로 하는 주기제(週期祭)와 수시로 하는 수시제(隨時祭)로 구분된다. 생전 제의로는 아들 낳기를 빌거나 아기가 건강하게 자라기를 비는 기자(祈子)·육아 기원(育兒祈願) 제의, 병 낫기를 기원하는 치병 기원(治病祈願) 제의, 혼인 축원 제의, 가옥 신축(또는 이사) 제의, 행운(幸運)·기풍(祈豊) 제의, 해상 안전·풍어(豊漁) 기원 제의 등이 있다. 사후 제의로는 장례를 치른 뒤에 하는 상가 정화 (喪家淨化) 제의, 죽은 사람의 영혼을 저승으로 보내는 망인 천도(亡人遷度) 제의, 물에 빠져 죽은 사람의 영혼을 건져 저승으로 보내는 익사자 천도(溺死者遷度) 제의 등이 있다.

  동제는 마을에서 공동으로 마을을 수호하는 동신(洞神)에게 해가 바뀔 때마다 봄·가을에 날을 잡아 올리는 주기적 제의이다. 내륙 지방에서는 제액(除厄)·기풍(祈豊) 제의가, 해안 지역에서는 제액·풍어 제의가 행하여진다.

        무속 제의의 구성
  무속 제의는 언어 위주의 '비손'과 행동 위주의 '굿'이 있다. 먼저, 비손의 절차를 간단히 적어보면 다음과 같다.

  '비손'은 제의를 올릴 사람이 무당을 찾아가 점을 치거나 상담하여 제일(祭日)을 잡는다. 날이 잡히면 제주(祭主, 제의를 올릴 사람)는 1∼3일 전에 출입문에 금줄을 치고 황토를 펴서 부정(不淨)을 가리며, 음식을 가려먹고 언행을 삼간다. 제일이 되면 무당의 말에 따라 제물을 장만하여 간단한 제상을 차린다. 무당은 밤이 되면 정결한 옷을 입고 제상 앞에 앉아 부정을 친다. 그런 뒤에 제상으로 신을 청하여 모셔놓고, 제주의 소원을 비는 축원(祝願)을 한다. 축원이 끝나면 소지(燒紙, 종이를 태우며 소원을 비는 것)를 올리고, 밖으로 나가 뒤풀이를 하여 모여든 잡귀를 돌려보낸다. 이렇게 하여 비손이 끝난 뒤에도 제주는 3∼7일 간 출입이나 다른 사람과의 접촉을 삼가며 근신한다. 이것이 비손의 전 과정인데, 비손은 노래나 춤 없이 무당이 신과 마주 앉아 언어 위주의 축원으로 진행하므로 '앉은 굿'이라고 하기도 한다. 

  '굿' 역시 제의를 올릴 사람이 무당을 찾아가 점을 치거나 상담하여 제일(祭日)을 잡는다. 날이 잡히면 제주(祭主, 제의를 올릴 사람)는 1∼3일 전에 출입문에 금줄을 치고 황토를 펴서 부정(不淨)을 가리며, 음식을 가려먹고 언행을 삼간다. 제일이 되면 무당의 말에 따라 제물을 장만하여 제상을 차린다. 무당은 밤이 되면 정결한 옷을 입고 제상 앞에 앉아 장고를 치며 부정굿 무가를 부르며 소지를 올리고 사방에 부정물을 뿌려 부정을 쳐낸다. 그 다음에는 각 신을 개별적으로 초청하여 그 신을 대접하면서 소원을 빈다. 소원을 빌 때에는 비손과는 달리 무당이 해당 신의 의복을 의미하는 무복(巫服)을 입고, 서서 노래 부르고 춤을 추면서 신의 동작을 흉내내기도 한다. 그러다가 신이 몸에 실리면, 무당은 신성(神聖)으로 몰입되어 자기를 잃고 신으로 화하여 황홀경(
惚境)에서 신의 말인 '공수'를 내린다. 이렇게 무당이 신과 하나가 된 뒤에 다시 자기 자신으로 돌아와 제주의 소원을 축원한다. 축원이 끝나면 소지(燒紙, 종이를 태우며 소원을 비는 것)를 올리고, 밖으로 나가 뒤풀이를 하여 모여든 잡귀를 돌려보낸다. 이렇게 하여 굿이 끝난 뒤에도 제주는 3∼7일 간 출입이나 다른 사람과의 접촉을 삼가며 근신한다. 그래서 굿은 '춤'과 '모의 동작', '공수'로 행동 위주의 형식이 된다. 이것은 강신무가 행하는 굿의 구성인데, 세습무의 굿은 '공수'가 없다. 그래서 공수 없이 무당이 신을 향해 일방적으로 기원하기만 한다.    

  이러한 무속 제의는 인간 존재의 영구 지속 욕구를 실현시키는 수단으로 행해진다. 이것은 존재를 영원한 것으로 보고, 영원한 존재가 미분적(未分的) 순환을 계속하며 지속된다는 '원본사고(原本思考)'에 기반을 두고 있다. 무속의 신관(神觀), 우주관, 영혼관, 내세관 역시 이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

        무속의 신관(神觀)
  무속의 신관은 다신적(多神的) 자연신관(自然神觀)이라 할 수 있다. 무속의 신은 자연신·인간신 모두 인격을 갖추고 있는 것으로 나타난다. 그런데 분담된 직능 분야에 관해서는 무한한 능력을 지닌 전능한 존재자이며, 공포의 대상이 된다.

  무속의 신도라고 할 수 있는 한국인은 인간의 삶과 죽음, 흥망(興亡), 화복(禍福), 질병 등의 운명 일체가 신의 의사에 의한 것이라 생각하고, 신에게 발원(發願)하여 복을 얻으려고 한다. 그런데 그 발원의 방법이 정신적이기보다는 물질적이어서 신에게 제물을 바치고, 그 제물의 양과 질에 비례하는 신의 보살핌이 있다고 믿는 공리적(功利的) 신앙이다. 또 현실에서 복을 받으려는 현실기복(現實祈福) 신앙이다. 

  한국인은 유일신이 아니라 여러 신을 믿는다. 그런데 모든 것을 신의 뜻이라면서 신에게 많이 바치고, 잘 위하면 큰복을 받을 수 있다고 믿는다. 그리고 착한 일을 많이 하면 신의 감응(感應)을 받아 복을 받고, 악한 일을 하면 신의 노여움을 사서 화를 당한다고 믿는다. 또, 점복을 통해 앞일을 미리 알아서 복을 맞이하고 화를 예방하려고 한다. 이것은 모두 무속적 사고에 바탕을 두고 있는데, 이것은 무속이 현대 한국인의 의식과 신앙에 중요한 기능을 하고 있음을 말해 준다.




   지금으로부터 10여 전의 일이다. 은행에 볼일이 있어 갔다가 기다리는 동안 객장(客場) 안에 준비해 놓은 주간지를 보다가 '성업(盛業) 중인 사혼 예식장(死婚禮式場)'이라는 기사를 읽었다. 기사의 내용은 서울 우이동 도봉산 기슭에 죽은 처녀와 총각의 혼인을 주선하여 주고, 식을 올리는 사혼예식장이 있는데, 성업 중이라고 하면서 허름한 건물의 사진까지 실려 있었다. 나는 이 기사를 읽고 사혼(死婚)의 민속이 지금도 행하여지고 있음을 알았다. 주간지는 일반 독자들의 흥미 위주로 제작되기 때문에 기사 내용의 신빙성에 문제가 있기도 하고, 과장(誇張)하여 표현하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이러한 점을 감안하더라도, 이 기사는 사혼의 민속이 요즈음에도 행하여지고 있다는 사실을 말해 주고 있어서 나의 흥미를 끌었다. 그 후 사혼에 관심을 갖게 되었는데, 내가 만난 무당 한 사람은 몇 차례 사혼을 주관해 주었다고 하였다.

  사혼은 죽은 사람의 영혼끼리의 혼인을 뜻하는 말로, '명혼(冥婚)'이라고도 한다. 이것은 한국인의 영혼관(靈魂觀)을 바탕으로 하여 생긴 민속이다. 한국인의 전통적인 사고에서는 인간의 존재를 육신(肉身)과 영혼(靈魂)의 결합으로 본다. 이에 의하면 육신은 형체가 있어서 눈으로 볼 수 있는 가시적(可視的) 존재인데, 얼마 후에는 죽어야 하는 유한(有限)한 존재이다. 영혼은 형체가 없어서 눈으로 볼 수 없는 불가시적(不可視的) 존재인데, 오래도록 없어지지 않는 영원한 존재이다. 이러한 육신과 영혼이 결합되어 있는 상태가 삶이고, 육신에서 영혼이 벗어난 상태가 죽음이다. 육신은 이승에서 영혼이 거처하는 집이다.

  영혼은 편의상 생령(生靈)과 사령(死靈)으로 나눌 수 있다. 생령은 살아 있는 사람의 몸에 깃들어 있는 영혼이고, 사령은 사람이 죽은 후에 그 사람의 육신을 벗어난 영혼이다. 생령의 존재를 말해 주는 자료로는 [혼(魂)쥐 이야기]가 있다. 이 이야기에서는 아내가 낮잠을 자고 있는 남편의 코에서 콩알 만한 하얀 쥐가 들락날락하다가 방바닥으로 내려선 다음, 밖으로 나가는 것을 보고 그 뒤를 따르며 쥐의 행동을 눈여겨보았다. 얼마 후 남편이 잠에서 깨어나 꿈 이야기를 하는데, 그것은 쥐의 행동과 일치하였다고 한다. 또 다른 이야기에서는 아내가 잠자는 남편의 코에서 나온 작은 쥐를 자막대기로 때려서 죽였더니, 남편이 잠에서 깨어나지 못하고 그대로 죽어버려 그 여자는 과부가 되었다고 한다. 이러한 이야기는 사람의 몸에는 영혼이 깃들어 있는데, 그 영혼은 잠잘 때에 잠시 육체를 벗어나 돌아다닐 수 있다는 사고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

  사령은 선령(善靈)과 악령(惡靈)으로 나눌 수 있다. 선령은 수명대로 살다가 죽은 사람의 영혼으로 내세(來世)에 가서 평안히 지내는데, 가끔씩 세상에 나와서  자손이나 친척·친지들을 도와주기도 한다. 악령은 비명횡사(非命橫死)한 사람의 영혼으로, 생전의 원한이 남아서 저승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떠돌아다니며 살아있는 사람을 괴롭힌다. [아랑 전설]이나 고소설 [장화홍련전]·[김인향전]에서 사또 앞에 나타나 원한을 풀어줄 것을 청원하는 영혼은 비명에 죽은 원한을 풀지 못하여 저승에도 가지 못하고 떠도는 처녀의 영혼이다.

  악령의 대표적인 예는 시집·장가를 가지 못하고 죽은 '처녀 귀신', '총각 귀신(몽달귀신)'이다. 이들은 젊은 나이에 죽어 시집·장가도 가지 못한 한(恨) 때문에 가족들에게 나타나기도 하지만, 특히 행복하게 사는 옛 친구나 친척에게 나타나 이들을 못살게 군다고 한다. 그래서 전에는 처녀나 총각이 죽으면, 네 갈래 길의 가운데를 파고 이들의 시신을 엎거나 세운 다음, 그 위에 가시를 얹고 흙을 덮어 평평하게 해 놓아 오가는 사람들이 밟고 다니도록 했다고 한다. 이것은 한을 품고 죽은 처녀나 총각의 영혼이 육신을 벗어나 떠도는 것을 막기 위해 행한 비정한 매장법(埋葬法)이라 하겠다. 그러나 이렇게 한다 하여 이들의 한이 풀리는 것도 아니고, 이들의 떠돌음을 막을 수 있는 것도 아니므로, 이들의 한을 풀어줄 수 있는 방안이 강구되어야 했다. 그래서 찾아낸 방법이 이들의 영혼을 혼인시키는 사혼이었다.   

  사혼은 전국적으로 행하여 졌는데, 정혼(定婚)하는 과정이나 예식의 진행 절차는 지방에 따라 차이가 있다. 그러나 기본적인 것은 큰 차이가 없는 듯하다. 맨 먼저 죽은 처녀나 총각의 가족이나 친척이 중매쟁이이게 적당한 혼처(婚處)를 알아봐 달라고 부탁한다. 이 때 중매쟁이는 무당인 경우가 흔하다. 부탁 받은 중매쟁이는 이들의 나이를 알아서 궁합을 보아 중매를 서는데, 이들의 나이는 죽은 지 몇 년이 되었건 간에 죽을 때의 나이를 기준으로 한다고 한다. 혼처가 정해지면, 예식을 맡은 무당은 택일(擇日)을 하고, 신랑과 신부의 인형을 준비한다. 신랑과 신부의 인형에는 각각의 사주(四柱)를 써서 가슴에 붙이고 옷을 입힌다. 옷은 그 사람이 살았을 때에 입던 옷이 있으면 그 옷을 가져다 입히고, 없을 때에는 새 옷을 마련하여 입힌다. 준비가 되면 양가의 가족이 모인 자리에서 이들의 원한을 풀어주는 해원(解寃)굿을 한다. 해원굿이 끝나면 신랑 인형에는 사모관대(紗帽冠帶)를, 신부 인형에는 원삼 족두리를 입히고 혼인굿을 한다. 혼인굿을 마치면 신방을 차려 이들이 한 이불 속에서 하룻밤을 지내게 한 다음, 이들을 한 곳에 묻는다. 이렇게 하여 이들은 총각과 처녀로 죽은 한을 풀고, 저승으로 가서 함께 편안히 거하게 된다. 절에서 스님의 주관으로 하는 경우에는 불교식으로 진행한다.

  사혼에 의해 맺어진 사돈끼리는 아주 사이좋게 지낸다고 한다. 살아 있는 아들과 딸에 의해 맺어진 사돈의 경우에는 아들과 며느리(또는 딸과 사위)가 금실 좋게 살 때에는 사이가 좋다. 그러나 이들의 결혼생활에 문제가 생기면 자연히 그 부모들의 관계도 나빠지게 된다. 그러나 사혼에 의해 맺어진 사돈의 경우에는 죽은 아들과 며느리(딸과 사위)의 금실이 나빠져 속을 썩일 일이 없고, 참척(아들과 딸이 앞서 죽음)을 당한 슬픔과 고통을 서로 이해하고 위로하며 나눌 수 있기 때문에 아주 의좋게 지낸다고 한다. 

  몇 년 전에 대한항공 여객기가 소련 상공에서 격추되어 많은 사람이 불의의 죽음을 당한 일이 있었고, 괌도에서 사고를 당하여 많은 사람이 아까운 목숨을 잃은 불행한 일도 있었다. 두 사고가 있은 지 얼마 지나지 않아 그 때 그 비행기에 탔다가 세상을 떠난 처녀와 총각의 영혼을 혼인시킨다는 방송과 신문의 보도가 있었다. 그 기사의 제목을 보고 처음에는 두 사람이 서로 사귀던 사람들이겠거니 하였다. 그러나 그 기사를 자세히 읽어 보니, 두 사람이 전혀 모르는 사람이었는데, 대한항공 직원의 중매로 사혼을 한 경우도 있고, 혼인을 약속한 사람들이 예식을 올리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으므로 양가에서 협의하여 사혼예식을 한 경우도 있었다. 그보다 몇 년 전에도 겨울 산행을 하다가 눈사태가 나서 죽은 남녀 대학생이 사혼을 하였다는 기사가 신문에 실렸었다. 그 때 사혼을 한 젊은이 역시 전혀 모르는 사람들로 각각 산행을 하다가 불행을 당한 사람들인데, 어느 친지가 중매를 서서 사혼을 하였다고 한 것으로 기억한다.

  얼마 전에 100여 명의 어른을 대상으로 한 강의에서 자기 둘레에서 사혼하는 것을 보았거나, 들은 사람은 손을 들어보라고 하였더니, 20여 명이 손을 들었다. 이것은 지금도 사혼이 행하여지고 있음을 말해 준다. 요즈음에도 사혼이 행하여지고 있는데, 이 일이 눈에 뜨이거나 많은 사람의 관심을 끌지 못하는 것은 무슨 까닭일까? 이것은 사혼을 할 때 청첩장을 돌려 널리 알리지 않고, 아주 가까운 친족만 모여 하기 때문이다.

  사혼 민속의 시작은 처녀나 총각 귀신한테 괴롭힘을 당하지 않으려고 하는 산 자의 이기심(利己心)의 작용이 전혀 없다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보다는 죽은 자의 한을 풀어줌으로써 그들이 더 이상 이승과 저승 사이를 떠돌지 아니하고, 저승으로 가서 편안히 거하게 해 주려는 따뜻한 마음에서 나온 것이라 생각한다. 이것은 산 자와 죽은 자를 확연히 구별하기보다는 더불어 사는 우리 민족의 심성을 반영한 것이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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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즈음은 그리 많지 않지만, 전에는 마을 앞 정나나무 밑이나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곳에 무게가 150근(90Kg) 내외의 둥근 모양의 돌이 놓여 있는 마을이 많이 있었다. 이 돌이 사람들이 '들어올리는 돌'이란 뜻의 '들돌'이다.

  전에는 음력 정월 대보름이나 2월 초하룻날 마을 사람들이 많이 모인 자리에서 젊은이가 이 돌을 들어올리면, 그 때부터 그는 어른으로 인정받았다. 그래서 어른들의 품앗이에 끼게 됨은 물론, 품값을 받을 때에도 어른의 품값을 받을 수 있었다. 머슴들의 경우에는 들돌을 들어올리면, 어른 몫의 사경(농가에서 머슴에게 주는 일년치 품값)을 받을 수 있었다. 나이가 스물이 채 안 되었어도 들돌을 들어올린 사람은 어른 품값을 받았으나, 스물이 훨씬 넘었어도 들돌을 들지 못한 사람은 반품값밖에는 받지 못하였다.

  마을의 젊은이들은 자기 마을에서 들돌 들어올리기를 하는 정월 대보름이나 2월 초하루 전에 그 돌을 수없이 들어올려 보며 힘을 길렀을 것이다. 그래서 자신 있는 사람은 그 날 들돌 들기에 나서고, 그렇지 못한 사람은 그 자리에 참석하지 않거나, 참석은 하여도 들돌 들기에 나서지 않았을 것이다. 들돌 들기에 성공한 사람은 나이가 적어도 어른 대접을 받았지만, 그렇지 못한 사람은 평생 힘쓰는 일과 관련하여서는 어른 대접을 받지 못하였을 것이다. 이것은 일종의 농사꾼이나 머슴들의 성년식이었다. 이것은 요즈음 흔히 쓰는 말로 표현하면 성과급 제도였다고 할 수 있다. 이것은 체력을 매우 중요시하는 농경사회의 일면을 짐작하게 해 준다. 
   
  서울 경복궁 안에 있는 국립민속박물관에는 들돌이 전시되어 있고, 그 뒤에 그림이 붙어 있다. 그 그림에는 마을 사람들이 모여 있는 자리에서 한 젊은이가 들돌을 들어올리고 있고, 그 옆에는 젊은이의 어머니와 여동생인 듯한 여인이 마을 사람들에게 술을 따라 주는 모습이 보인다. 들돌을 들어올리는 젊은이의 아버지와 어머니를 비롯한 가족들은 체력 면에서 당당한 어른이 된 그의 모습을 보면서 자랑스럽게 여겼을 것이다. 아마도 젊은이의 애인은 나무 뒤에 숨어서 자기 애인이 그 돌을 들어올리는가를 지켜보며 가슴을 조이다가 성공하는 순간에 벅찬 감격을 느꼈을 것이다.

  세월이 변하면서 농사꾼이나 머슴들의 성년식의 성격을 지닌 들돌 들기 풍습도 사라졌다. 그에 따라 들돌의 의미도 퇴색하여 들돌은 담쌓기나 둑쌓기, 집짓기 등의 공사를 할 때 다른 잡석들과 함께 파묻혀 버려 지금은 찾아보기 어렵게 되었다. 그러나 들돌 들기의 의미를 되새기며 '들돌놀이'를 하는 마을이 있는가 하면, 들돌이 질병을 물리쳐 준다는 주술적 의미를 지니게 되어 '들돌제'를 지내는 마을도 있다.

  전남 보성군 노동면 거석리에서는 매년 정월 대보름날 당제를 마치고 들돌놀이를 한다. 이것은 전부터 해 오던 놀이인데, 한 때 중단되었다가 1986년 군민의 날에 재현되었다. 이것은 직경 50cm, 무게 80Kg 정도 되는 돌을 들어 넘기는 놀이인데, 장원으로 뽑힌 사람에게는 상으로 황소를 준다. 놀이가 끝나면 술과 음식을 나누어 먹고 노래부르고 춤을 추면서 마을 사람의 건강과 풍년을 기원한다. 이런 놀이는 전북 부안에도 있다.

  제주도에서는 청년들이 힘을 겨루기 위해서 들어올리는 돌을 '뜽돌'이라고 한다. 이 돌은 동네 어귀에 있어서 누구나 자유롭게 들어올릴 수 있다. 특히 추운 겨울에 젊은이들이 뜽돌이 있는 '뜽돌거리'에 모여 제각기 힘 자랑을 한다. 그 방법에는 두 손으로 잡아 들어올리기, 들고 허리를 펴기, 들고 일어서기, 땅에서 조금만 들기, 돌을 들고 몇 걸음 걷기 등이 있다. 이 중 뜽돌을 들고 가슴과 허리를 완전히 편 채 두 다리를 꿋꿋이 디디는 방식을 제일로 친다. 다른 마을의 청년이 지나다가 뜽돌을 보고 클 경우에는 '이 마을 청년은 힘이 세다.'고 한다. 그러나 작을 경우에는 '이것도 뜽돌이냐!'고 비아냥거리면서 집어던진다. 이를 본 그 마을 청년들은 그에게 뜽돌을 들어보라고 한다. 그가 뜽돌을 들어올리면 괜찮으나, 들어올리지 못하면 그는 마을 청년들에게 실컷 두들겨 맞고 빌거나, 술을 사서 대접하고서야 그 마을을 빠져나갈 수 있다. 이것은 들돌 들기가 마을 청년들이 신체를 단련하고, 힘을 겨루는 구실을 하였을 뿐만 아니라, 마을과 마을의 젊은이들이 힘을 드러내 보이는 잣대의 역할도 하였음을 말해 준다.

  충남 홍성군 구항면 황곡리 하대 마을에서는 '들돌제'를 지낸다. 이 마을 어귀에는 고려 때 심었다는 큰 정자나무가 있다. 이 정자나무 밑으로 난 길을 따라 마을 쪽으로 10미터쯤 가면 길 왼쪽에 높이 약 1.2미터, 밑 둘레 약 2미터, 위쪽 둘레 약 1미터쯤 되는 '선돌'이 있고, 50미터쯤 더 들어가면 길 왼쪽에 시멘트로 만든 받침대 위에 힘 센 장정이 들어올릴 수 있는 크기의 둥근 돌이 있는데, 이 돌이 '들돌'이다. 이 마을에서는 이 선돌과 들돌 앞에서 음력 2월 초하룻날 새벽 6시에 마을 공동제의를 올린다. 마을의 평안과 풍년 기원에 목적을 둔 이 제의는, 선돌은 마을을 지켜주는 남성신, 들돌은 여성신을 상징한다는 의식에서 나온 것이다.

  2월 초하룻날 새벽에 마을 사람들이 마을 회관 앞에 용대기를 세운 뒤에 풍물을 치고 한 바탕 논 뒤, 용대기 앞에 흰무리떡과 삼색실과와 포를 놓고 술잔을 올린 뒤에 제관이 재배한다. 그 다음에 용대기를 앞세우고 풍물을 울리며 선돌 앞으로 가서 흰무리떡과 삼색실과와 포를 놓고 술잔을 올린 뒤에 제관이 재배한다. 다시 들돌 앞으로 와서 흰무리떡과 삼색실과와 포를 놓고 술잔을 올린 뒤에 제관이 재배한다. 그 뒤에 그 앞에서 간단히 음복을 하는데, 날씨가 추운 때이므로 가까이에 있는 마을회관으로 와서 음복하기도 한다. 제관은 한복 두루마기를 입으며, 축문이나 소지(燒紙)는 하지 않는다.

  전에는 정월 대보름날 4∼5미터쯤 되는 나무에 짚을 묶어 세우고, 세 가운데 말뚝을 박고 동아줄로 매어 볏가릿대를 세운 뒤에 풍물패가 집집마다 다니며 걸립을 하여 제의 비용을 마련하였으나, 요즈음은 볏가릿대 세우는 일도, 걸립하는 일도 하지 않는다. 이 마을은 모두 40여 호가 되는데, 들돌제에 참여하는 사람은 20명 내외이다. 마을 사람들은 오래 전부터 들돌제를 지내왔는데, 그래서 그런지 마을에 큰 일 없이 잘 지내고 있다고 한다. 전에는 아침밥을 먹고 나서 들돌제를 지냈는데, 일제 말기에 이를 못하게 하였으므로 몰래 하느라고 새벽 미명에 조용히 지냈다고 한다. 그 때부터 지금까지 새벽에 제를 지낸다고 한다.

  들돌제의 대상신인 선돌과 들돌에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해 온다.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에 의하면, 선돌과 들돌은 수백 년 전부터 있었다고 한다. 그 유래를 살펴보면 선돌의 경우, 이 마을에 아주 힘센 장사(壯士)가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그 장사가 전염병에 걸려 오랫동안 앓다가 완쾌한 후 자기의 힘을 시험해 보기 위해 나무로 만든 신을 신고 이 돌을 들다가 댕기가 발에 밟혀 뒤로 넘어지는 바람에 이 돌에 눌려 죽었다고 한다. 그 이후 죽은 장사의 영혼을 위로하고자 선돌을 위했다고 한다. 

  들돌은 모양이 둥글고 무게가 150근 정도 나가는 돌로서, 옛날에 오봉 마을 청년들과 하대 마을 청년들이 서로 돌 들기 놀이를 할 때, 서로 돌을 들어다가 자기 마을 앞으로 갖다 놓아야 질병이 없어진다 해서 서로 빼앗고 빼앗기는 놀이를 하였다. 그런데 하대 마을의 한 힘센 장사가 그 돌을 들어다가 하대 마을에 갖다 놓았다. 그 이후 오봉 마을에서는 이 돌을 들을 만한 장사가 나타나지 않아 지금껏 하대 마을에 있다고 한다. 그 이후 하대에서는 이 선돌과 들돌을 매년 음력 2월 1일 아침에 성의를 다하여 위하고 있다.

  위 이야기는 하대 마을 들돌이 마을 공동제의의 대상신이 된 유래를 설명하고 있어 흥미롭다. 하대 마을의 들돌 역시 전에는 젊은이들이 성년식에 쓰던 들돌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 후 이 돌이 질병을 물리치는 기능을 지니고 있다고 믿게 되어 두 마을의 장정들이 그 돌을 자기 마을 앞으로 가져다 놓곤 하였을 것이다. 마을 사람들이 모두 이 돌을 들 수 있을 정도로 건강하다면, 질병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될 것이니, 이 돌이 질병을 물리치는 주술적인 힘을 지니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었을 것이다.  옛사람들은 오래도록 변하지 않아 영속성을 지니고 있고, 특이한 모양이어서 특이성을 지닌 돌을 신성시하였다. 황곡리의 들돌은 암석을 신성시하는 암석 신앙과 질병을 물리칠 수 있다는 주술적 심성에 의해 신앙의 대상이 되었다.     

  마을 젊은이들이 신체를 단련하고, 힘을 겨루는 구실을 하였을 뿐만 아니라, 마을과 마을의 젊은이들이 힘을 드러내 보이며 화합을 강조하던 들돌 들기 풍습은 사라졌다. 이를 다시 돌이킬 수는 없지만, 들돌놀이나 들돌제가 행해지는 마을이 있다는 것은 다행스런 일이다. 이를 통해 그 의미를 되새겨 보는 것은 뜻 있는 일이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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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옛날이야기에 나타난 도깨비의 모습은 다양한데, 얼굴 생김은 괴물형이고 머리에는 뿔이 하나 돋아 있다. 눈과 코와 입이 특히 크고, 큰 송곳니 두 개가 빠져 나왔으며, 수염은 붉은 색이고, 몸에는 털이 숭숭 돋아있다. 그러나 언제나 이런 모습으로 나타나는 것은 아니고 때로는 동물의 모습, 선비나 농부 또는 여인의 모습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때로는 신이한 모자나 감투를 쓰거나 등거리를 입어 모습을 감추기도 한다.
 
    도깨비는 어둡고 조용한 곳의 동굴이나 빈 집, 빈 절, 우물, 옛 성, 계곡, 고목 나무, 공동묘지 등에 자주 나타난다. 도깨비가 나타나는 시간은 주로 밤인데, 동이 트거나 새벽을 알리는 종소리 또는 닭 우는 소리가 나면 사라진다.
 
    도깨비는 타고난 장난꾸러기이다. 그래서 남의 제사 음식을 먹어치우는가 하면, 하룻밤 사이에 잔칫집을 뒤집어 놓기도 한다. 또 남의 집 쇠솥 뚜껑을 종이처럼 꾸겨서 솥 안에 넣어 넣어놓기도 한다.  도깨비는 고지식하고, 생각하는 바가 단순하며 건망증이 심하다. 도깨비의 모습이 드러나는 이야기를 살펴본다. 

   옛날에 한 농사꾼이 열심히 일하며 돈이 생기면 항아리에 넣곤 하였다. 몇 년 뒤에는 모은 돈이 꽤 많았다. 그는 밤이면 벽장에 감춰둔 항아리를 꺼내어 돈을 세어보곤 하였다.  어느 날, 그가 돈을 세고 있는데, 창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그가 창문을 열고 내다보니, 한 남자가 자기는 건너 마을에 사는 김 서방인데, 돈 한 냥만 꿔 주면 다음 날 밤에 갚겠다고 하였다. 그는 방바닥에 돈이 있었으므로 거절하지 못하고 김 서방에게 한 냥을 꾸어주었다.
   이튿날 밤, 김 서방은 전날 밤에 꾼 돈이라면서 그에게 한 냥을 주었다. 그 다음 날 밤에도, 또 그 다음 날 밤에도 김 서방은 꾼 돈이라면서 한 냥을 가져왔다. 이 일이 몇 년 동안 계속되었다. 그는 김 서방이 도깨비일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그 돈으로 좋은 논을 샀다.
    어느 날, 김 서방이 전과 같이  돈 한 냥을 주고 가자 그는 혼잣말로, 돈 한 냥을 꾸어갔으니 이자를 열 배로 쳐도 한 냥씩 열흘만 갚으면 되는데, 몇 년 동안 갚는 것을 보면 김 서방의 건망증도 보통이 아니라고 하였다. 잠시 후, 다시 창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나서 내다보니, 김 서방이 창문 앞에 서서, 자기가 건망증이 심하여 돈을 매일 갚았으니, 이자를 열 배로 쳐서 열 냥만 받고, 나머지 돈은 돌려 달라고 하였다. 그가 논을 샀기 때문에 돈이 없으니, 논을 떠갈 테면 떠가라고 하였다.
   그날 밤, 도깨비들이 떼로 몰려와 그 논을 떠가려고 네 귀퉁이 말뚝을 박고 별 짓을 다 해 보았으나, 논을 떠 갈 수는 없었다. 동이 터 오자, 화가 난 도깨비들은 논에 돌멩이를 잔뜩 던져놓고 가 버렸다. 이를 본 그가 "논에 돌멩이 넣으면 내가 무서워할 줄 아나보군. 쇠똥이라면 몰라도 돌멩이는 무섭지 않다."고 하면서 집으로 돌아왔다. 그 다음 날 아침에 그가 논에 가 보니, 돌멩이는 하나도 없고 쇠똥이 가득하였다. 그 후 그는 부자가 되었다.

   위 이야기에서 주인공이 부자가 된 것은 도깨비의 건망증과 단순한 사고 방식 때문이라고 한다. 그러나 그 밑바탕에는 주인공이 부지런하고, 근검·절약하며 저축을 많이 하였기 때문이라고 하는 의식이 깔려 있다. 도깨비는 주인공이 부지런하고, 근검·절약하며 저축을 많이 하는 사람이기에 자기의 건망증과 단순 사고를 빙자하여 그를 도와 부자가 되게 해 준 것이다. 이 이야기에서 땅은 도깨비도 못 떠간다는 말이 나왔다.

    옛날에 한 남자가 내에서 게를 잡고 있었다. 그 때 한 남자가 와서 메밀묵을 먹고 싶으니, 메밀묵 한 동고리를 쒀다 주면 게를 많이 잡게 해 주겠다고 하였다. 그는 내일 메밀묵을 한 동고리 쑤어다 줄 터이니, 오늘 게를 많이 잡게 해 달라고 하였다. 그 남자는 자기가 내를 거슬러 올라가면서 게를 몰아줄 터이니, 뒤따라오면서 게를 주워담으라고 하였다. 그가 그의 뒤를 따라가니, 쇠똥 같은 것이 떠내려왔다. 그가 이상히 여겨 주워 보니, 모두 큰 게였다. 그는 그날 게를 많이 잡았다.
   이튿날, 그가 다시 게를 잡고 있는데, 그 남자가 와서 묵을 쑤어 왔느냐고 물었다. 그가 오늘 하루 더 게를 많이 잡게 해 주면 내일은 꼭 묵을 쑤어다 주겠다고 하였다. 그 남자가 대답하고 내를 거슬러 올라간 뒤에 게가 둥둥 떠내려 왔다. 그가 기뻐하며 게를 집에 바구니에 가득 담아 가지고 와서 보니 모두 쇠똥이었다.

   위 이야기에서 그 남자가 도깨비인 것을 안 주인공은 그 남자와 한 약속을 이행하지 않고 이용만 하려고 하다가 도깨비에게 골탕을 먹고 말았다. 이것은 도깨비가 약속을 이행하지 않는 사람, 의리를 지키지 않는 사람은 골탕을 먹이거나 벌을 준다는 의식을 바탕으로 한 것이다.

   도깨비는 원하는 것을 무엇이든지 얻을 수 있는 요술 방망이를 가지고 다니므로, 그것을 얻기만 하면 부자가 된다고 한다.
   옛날에 한 나무꾼이 산으로 나무를 하러 갔다. 그가 낙엽을 긁고 있는데, 개암 하나가 눈에 띄였다. 그는 그것을 아버지를 드리겠다며 주머니에 넣고, 다시 나오자 어머니를 드리겠다며 주머니에 넣었다. 다시 개암이 보이자 아내를 주겠다고 하고, 그 다음에 자기 것이라고 하며 주머니에 넣었다.
   그는 나무를 해 가지고 오다가 날이 저물어 빈 집으로 들어갔다. 밤중에 도깨비들이 떼를 지어 들어오므로, 그는 무서워서 다락에 숨었다. 그가 다락 문틈으로 내다보니, 도깨비들이 이상한 방망이를 가볍게 두드리며 "밥 나와라 똑딱!" 하면 밥이 나오고, "술 나와라 똑딱!" 하면 술이 나왔다. 도깨비들은 그 음식과 술을 배불리 먹은 뒤에 노래하며 춤을 추었다.  배가 고픈 그는 주머니에 넣어둔 개암 하나를 꺼내어 깨물었다. 개암 껍질 깨지는 소리가 크게 나니, 도깨비들은 천둥 소리라며 몹시 당황하였다. 그가 다시 개암을 깨무니, 도깨비들은 하느님이 노하셔서 천둥치는 것이라며 방망이를 그대로 두고 황급히 도망하였다. 그가 그 방망이를 가지고 집으로 돌아와서 두드리며 금과 은과 돈을 비롯하여 필요한 것을 나오라고 하니, 그것들이 쏟아져 나왔다. 그래서 그는 큰 부자가 되었다.
   이 소문을 들은 욕심쟁이 부자가 그를 찾아와 부자가 된 연유를 물었다. 그의 말을 들은 부자는 도깨비를 만나 방망이를 얻을 욕심에서 산으로 나무를 하러 갔다. 부자는 개암 하나가 나오자 "이것은 내가 먹어야지." 하고 주머니에 넣고, 그 다음에는 아내와 아이를 주겠다고 하고, 그 다음에야 아버지와 어머니께 드리겠다며 주머니에 넣었다. 부자가 날이 저문 뒤에 빈 집 다락에 숨어 있으니, 도깨비들이 와서 방망이를 두드리며 술과 음식을 나오게 한 뒤에 실컷 먹고 노래하며 춤을 추었다. 그 때, 부자가 개암을 내어 깨무니, 도깨비들은 다락으로 올라와 부자를 끌어낸 뒤,  지난번에 속아서 빼앗긴 방망이를 내놓으라며 그를 때렸다. 그래서 부자는 도깨비한테 매만 맞고 돌아왔다.

  위 이야기에서 마음씨 착하고 효성이 지극한 나무꾼은 무엇이든지 얻을 수 있는 '도깨비방망이'를 얻어 부자가 되었다. 그러나 탐욕스런 부자는 도깨비한테 매만 맞았다. 이를 보면, 도깨비는 신통력이 있는 도깨비방망이를 가지고 다니는데, 마음씨 착하고 부지런하며 효성이 지극한 사람에게는 그것을 주어 부자가 되게 해 준다. 그러나 탐욕스런 사람에게는 벌을 내린다. 이 이야기에는 도깨비가 착한 사람에게는 복을 주지만, 악한 사람에게는 벌을 준다고 하는 의식이 깔려 있다. 이런 의식은 <혹부리 영감> 이야기에도 나타난다.     
  신통력을 지닌 도깨비는 무서워하는 것이 없을까?  옛날에 한 젊은 여인이 과부가 되어 몇 년을 살고 보니, 남자 생각이 간절하였다. 어느 날 밤에 한 남자가 그녀의 집에 찾아와 하룻밤 재워 달라고 하였다. 그녀는 그 남자를 반갑게 맞이하여 술과 음식을 대접한 뒤에 즐거운 밤을 보냈다. 그 후로 그 남자는 밤마다 찾아와 그녀와 즐거운 시간을 가진 뒤에 새벽에 돌아가곤 하였다. 이런 일이 계속되자, 마을 사람들이 수군대기 시작하였다.
   그녀는 시댁 어른들이 알까보아 겁이 나기도 하고, 그 남자가 사람이 아니라 도깨비일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 그 남자를 멀리하려고 하였으나, 그 남자는 아랑곳하지 않고 밤마다 찾아왔다. 어느 날, 그녀가 그에게 무서워하는 것이 있느냐고 물었다. 그 남자는 개의 피를 무서워한다고 하면서 그녀에게 무서운 것이 무어냐고 물었다. 그녀는 떡을 무서워한다고 건성으로 대답하였다.
   이튿날, 그녀는 개를 잡아 개의 피를 대문과 방문을 비롯하여 집안 곳곳에 뿌려 놓았다. 그날 밤에 그 남자는 개의 피를 보고 집에 들어오지는 못하고 욕을 하면서 떡을 집 안으로 던졌다. 그녀가 돈이라면 몰라도 떡은 무섭지 않다고 하니, 이번에는 돈을 던졌다. 그 후로 그는 다시 찾아오지 않았다.
       
   위 이야기에서 도깨비는 여성을 좋아하고, 개의 피를 무서워한다. 다른 이야기에서는 말의 피를 무서워한다. 이 이야기에서도 도깨비는 단순한 사고 때문에 과부에게 이용당하고 만다.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도깨비는 장난을 좋아하고, 생각이 단순하며 건망증이 심하다, 그러나 신통력을 지니고 있어서 착한 사람에게 복을 주고, 악한 사람에게 벌을 준다. 이것은 민중들이 자기들의 사는 모습과 바람을 도깨비에게 투영한 것이라 하겠다.
                                       <농지개량 제186호(서울 : 농지개량조합연합회, 1999. 8)에 수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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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 나라에는 재미있는 도깨비 이야기가 많이 전해 온다. 도깨비 이야기에는 도깨비불을 본 이야기, 도깨비와 씨름한 이야기를 비롯하여 도깨비를 만나 소원을 성취하고 부자된 이야기, 거짓말을 했다가 도깨비한테 혼난 이야기 등 많이 있다.
 
  도깨비 이야기는 어른들도 좋아하지만, 어린이들도 매우 좋아한다. 지금까지 나온 360여 권의 전래동화집에 여러 번 수록된 이야기 100화를 뽑아 수록 빈도수를 조사해 보니, <도깨비방망이>, <도깨비감투>, <혹부리영감> 등이 상위권에 자리잡고 있다. 이것은 어린이들이 도깨비 이야기를 매우 좋아한다는 것을 간접적으로 말해 준다.
 
  도깨비는 신이한 능력을 지니고 있지만, 귀신들과는 달리 사람들과 가까이 지내면서 도와준다, 도깨비는 거짓말 한 사람, 탐욕스런 사람을 골탕먹이고 벌을 주기도 하지만, 착한 사람을 해치는 일은 없다. 그래서 한국인은 어린 시절에 도깨비 이야기를 재미있게 들으며 상상의 나래를 펴기도 하고, 도깨비와 만나는 꿈을 꾸기도 한다. 한국인과 친근한 도깨비의 정체는 무엇일까?
 
  도깨비는 '돗가비', '도채비' '독갑이', '귓것', '망량((魍魎)' 등으로 불리는데, 제주도에서는 '영감'·'참봉'이라고 부른다. 도깨비는 15세기에 쓰여진 《월인석보}나 《석보상절}에는 '돗가비'로 표기되어 있다. 국어학자의 해석에 의하면, 돗가비는 '돗'과 '아비'의 합성어인데, '돗'은 '도섭'을 뜻한다고 한다. '도섭'이란 능청맞고 수선스럽게 변덕을 부리는 것을 뜻하는 말이다. 이에 따르면, '돗가비'는 '돗아비'에 'ㄱ'이 첨가된 것으로, '수선스럽고 능청맞게 변덕을 부리는 아비'라는 뜻이 된다. 이것은 도깨비의 성격을 잘 드러내는 어원 해석이어서 흥미롭다.

  도깨비에 관한 문헌 기록으로 오래된 것은 《삼국유사》의<도화녀와 비형랑> 이야기이다. 신라 25대 진지왕의 영혼이 죽은 뒤에 살았을 때 좋아하던 도화(桃花)를 찾아가 7일 간 교혼(交婚)한 뒤에 비형(鼻荊)을 낳았다. 26대 진평왕이 그를 데려다 대궐에서 기르고 집사 벼슬을 주었는데, 그는 밤마다 나가서 도깨비들과 어울려 놀다가 새벽 종소리가 나면 들어오곤 하였다. 진평왕이 이를 알고 비형에게 신원사 북쪽에 있는 내에 다리를 놓으라고 하였다. 비형이 도깨비들을 데리고 하룻밤 사이에 다리를 놓으니, 이를 '귀교(鬼橋)'라고 하였다. 또, 진평왕이 비형에게 도깨비 중에서 사람으로 출현해서 조정 정사를 도울 만한 자가 있느냐고 하니, 비형은 길달(吉達)을 천거하였다. 왕은 길달에게 집사 벼슬을 주었는데, 길달은 충성스럽고 정직하였다. 길달은 흥륜사 남쪽에 문루(門樓)를 세웠는데, 이를 길달문(吉達門)이라 하였다. 뒤에 길달이 여우로 변하여 달아나니, 비형이 다른 도깨비들을 시켜 길달을 잡아 죽였다.
 
  이 이야기에서 도깨비는 밤에만 활동하는 야행성(夜行性)이 있고, 하룻밤 사이에 다리를 완성하거나 문루를 세울 수 있는 신통력을 지니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진지왕의 혼령과 과부 도화 사이에서 난 비형은 인간과 신의 양면성을 지닌 신이한 존재로, 도깨비들을 통솔하고, 죽일 수도 있는 능력을 지니고 있다.

  도깨비의 형상에 관한 기록을 보면, 성현(1436∼1509)이 쓴 《용재총화 》에는 "허리 위는 보이지 않고 허리 아래만 보이는데, 종이 옷을 둘렀고, 다리는 살이 없이 바짝 말랐는데, 검은 칠을 한 것 같다."고 하였다. 유몽인(1558∼1623)이 쓴 《어우야담 》에는 모습은 보이지 않고 목소리만 내는 도깨비의 장난에 시달리던 사람이 모습을 보여 달라고 하니, 놀랄 것이라고 하면서 그려 주었는데, 무서워서 쳐다볼 수가 없었다고 한다. 도깨비가 스스로 그린 모습은 머리가 두 개, 눈이 네 개이고, 높은 뿔에 입을 벌리고 이빨을 드러냈는데, 코와 입이 터져 있고, 입과 눈동자는 모두 시뻘겋더라고 하였다. 이런 모습은 삼국 시대 이래로 전해 오는 귀면와(鬼面瓦)의 모습과 비슷하다.
 
  지금 생존해 있는 어르신들 중에는 도깨비불을 보았다는 사람이 많이 있다. 도깨비불은 흐린 날이나 보슬비가 내리는 밤에 홀연히 나타났다가 없어지고, 없어졌다가 다시 나타나서 이리저리 옮겨 다닌다고 한다. 내가 어렸을 때 자란 마을 앞에는 넓은 들이 있는데, 궂은 날 밤이면 들판 건너 산밑에서 도깨비불이 노는 것을 보았다는 사람이 많았다. 나도 어느 여름밤에 들녘 끝자락에서 불빛이 사뭇 움직이는 것을 보았는데, 그것이 도깨비불이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도깨비와 씨름하였다는 사람도 여럿 만나보았는데, 이들의 이야기를 종합하여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전에 어떤 사람이 장에 갔다가 친구를 만나 술을 마시고 해가 진 뒤에 집에 오게 되었다. 그가 마을 가까이에 있는 상엿집 근처에 왔을 때, 숲 속에서 한 장정이 나와서 씨름을 하자고 하였다. 그가 "이 밤중에 무슨 씨름이냐?"고 핀잔을 하고 지나쳐 오려고 하니까, 그 장정이 길을 막으며, "나와 씨름을 하여 이기면 집에 갈 수 있지만, 지면 집에 못 간다."고 하였다. 씨름을 시작한 그는 있는 힘을 다해 보았지만, 생각처럼 쉽게 이길 수가 없었다. 그가 잘 쓰는 왼다리감기 기술을 거니, 장정이 넘어졌다. 그가 손을 털고 오려고 하니, 장정은 한 판 더 하자고 하였다. 그는 다시 있는 힘과 기술을 다해 그를 메치고 오려고 하니, 장정은 한 번만 더 하자고 하였다. 집으로 오려고 하는데 또 씨름을 하자고 하므로 그는 그를 다시 업어 메친 뒤에 허리띠를 끌러 옆에 있는 밤나무에 묶어놓고 집으로 왔다. 이튿날 아침에 그가 허리띠를 찾으러 그 곳에 가보니, 허리띠로 밤나무에 묶어 놓은 것은 쓰다 버린 빗자루였다.   

    위 이야기에서 남자가 씨름을 한 장정은 도깨비이고, 그 본체는 빗자루이다. 그는 밤에, 술에 취한 상태에서, 마을 가까운 곳에 있는 상엿집 근처에서 도깨비를 만났다. 다른 이야기에서도 도깨비를 만나는 시간은 해진 뒤이고, 만나는 공간은 마을 가까운 곳에 있는 작은 고개, 서낭당 앞 등 다양하다. 도깨비의 본체로는 부지깽이, 절구공이, 키로 나타나기도 한다. 씨름을 하다 보니, 도깨비는 다리가 하나더라는 이야기도 있다.

  사람과 도깨비의 사랑에 관한 이야기도 많이 있는데, 조선 연산군 때 김안로가 쓴 《용천담적기》에는 좀 색다른 이야기가 나온다.
 
  한 선비가 해진 뒤에 거리에 나섰다가 한 여인을 만났는데, 달빛에 비친 여인의 모습이 참으로 아름다웠다. 그가 여인에게 다가가 말을 거니, 여인이 상냥하게 받아주었다. 그는 여인을 따라 그녀의 집으로 갔다. 여인의 집은 골목길을 돌아 개천가에 있었는데, 흰 담장이 둘러있는 저택이었다. 방안에 들어가 보니, 단정한 병풍과 서화가 눈부시게 아름답고, 수놓은 자리와 꽃방석, 화장대와 화로 등이 세간에서 볼 수 있는 물건이 아니었다. 그는 그녀와 술을 마시며 이야기하다가 옷을 벗어 횃대에 걸고, 금침에 들어 즐거운 시간을 가졌다. 새벽녘에 천둥소리가 요란하여 잠을 깨어 보니, 호화저택은 간 곳이 없고 돌다리 아래에서 흙덩이를 베고, 가마니때기를 덮고 누워 있는데, 악취가 진동하였다. 옷을 찾으니, 돌 틈에 끼어 있었다. 
 
  이 이야기에서 선비를 홀린 여인은 도깨비인데, 남성을 홀린 것으로 보아 암도깨비였던 것 같다. 사람과 사랑을 나누는 도깨비 이야기는 대부분 여인이 남성인 도깨비를 만나 사랑을 나누고, 돈도 얻어 잘사는 숫도깨비 이야기이다. 그런데, 위 이야기는 암도깨비 이야기여서 흥미롭다.
 
  도깨비의 성정, 신이한 능력에 관한 재미있는 이야기는 많이 있는데, 이에 관해서는 다음으로 미루고, 도깨비의 정체가 무엇인가에 관해서만 잠깐 생각해 보자.
 
  도깨비의 정체를 한 마디로 말한다면, 도깨비는 한국인이 오래 전부터 내면 깊숙이 간직해 온 자신감과 열등감, 바라는 것과 한스러움 등의 복합심리가 만들어낸 관념적 형상이다. 그래서 도깨비에는 한국인의 꿈과 낭만, 생활의 멋과 지혜, 경험을 통해서 얻은 교훈, 가치관 등이 복합되어 있다. 도깨비는 풍농(풍農)과 풍어(豊漁)를 가져다주는 신으로 신앙되기도 한다. 도깨비는 먹고 마시고 춤추며 질펀하게 노는 것을 좋아하고, 가난하지만 착한 사람에게 복을 주고, 노총각이나 과부의 애인 노릇을 하기도 하며, 재물을 가져다주거나 명당 자리를 잡아 주어 잘 살게 해 준다. 신이한 능력을 발휘하여 다리를 놓아주거나 보(洑)를 막아주기도 한다. 그러나 거짓말하는 사람, 의리 없는 사람, 탐욕스런 사람에게는 벌을 준다. 이러한 도깨비의 성정은 한국인의 내면의식을 형상화한 것이라 하겠다.
          <농지개량 제185호(서울 : 농지개량조합연합회, 1999. 7)에 수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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