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초등학교와 중학교 교사로 10여 년, 대학 교수로 30여 년 간 학생을 가르치는 일을 하였다. 그래서 나에게는 초등학교와 중학교, 대학·대학원에서 가르친 제자가 많이 있다. 그중에는 가끔씩 만나는 사람도 있고, 자주 만나는 사람도 있다. 이를 아는 지인 중에는 나를 ‘제자 잘 둔 사람’이라고 하는 사람도 있다. 그런데 나보다 제자를 잘 둔 사람도 많이 있다. 나를 보고 제자 잘 둔 사람을 꼽으라고 한다면, 나는 주저하지 않고 내 제자인 김 교수를 꼽는다.

 

  나와 김 교수는 그가 대학 2학년 때 내 강의를 수강하면서 학연을 맺었다. 그 뒤에 옮겨간 대학교의 대학원에서 박사과정 지도교수와 학생으로 다시 만나 학문의 동반자가 되었다. 김 교수는 대학에서 정년퇴임을 하였고, 이제는 나와 함께 늙어가는 사이가 되었다. 그런데도 그가 나를 대하는 태도는 전과 다름없이 깍듯하다. 나는 그와 자주 만나 학문·신앙에 관하여 이야기하기도 하고, 부부동반으로 국내·외를 여행하기도 한다. 이를 아는 사람들은 부럽고 존경스럽다고 입을 모은다.

 

   김 교수는 진실한 마음으로 제자들을 대하고, 자상하게 지도하는 교육자이므로, 그를 따르는 제자들이 많이 있다. 그 중에서 나의 관심을 끄는 사람은 그가 초등학교 교사 시절에 가르친 제자들이다. 젊은 교사 시절에 어린 학생과 맺은 사제의 인연이 40여 년이 지난 오늘까지 이어오고 있다니, 정말 특이하고 귀한 일이다. 그 중에는 의사들도 있고, 사업가와 회사 생활을 하는 사람도 있다고 한다. 의사 제자들은 “선생님의 건강은 저희들이 책임지겠습니다.”라고 하면서, 그의 건강을 정성으로 보살펴준다고 한다. 그가 50대 후반이 된 이들과 나누는 정은 ‘아름다운 사제의 정’이라 칭송할 만하다. 나는 그의 제자 두 사람에게 신세를 졌다.

 

   몇 년 전의 일이다. 아내가 어깨 통증이 심하여 동네 병원에 다녔으나 차도가 없었다. 이 말을 들은 김 교수는, 종합병원 정형외과에 근무하는, 초등학교 시절의 제자 K 교수를 소개해 주었다. 그는 내 아내를 ‘존경하는 김 선생님의 사모님’이라면서 정성스레 진찰하고, 치료해 주었다. 그 덕으로 아내는 병이 나아 지금까지 큰 불편 없이 지내고 있다. 그 일이 있은 뒤에 아내는 두 차례나 K 교수의 도움을 받았다. 한 번은 가슴의 통증 때문에, 또 한 번은 시신경(視神經)에 문제가 생겨 K 교수를 다시 찾았다. 그는 먼저는 순환기내과, 그 다음에는 신경과 의사에게 진료를 받도록 주선해 주었다. 그의 부탁을 받은 두 교수는 ‘K 교수 은사의 사모님’이라는 말을 듣고, 아주 친절하게 대하며 정성껏 진료해 주었다. 제자를 잘 둔 김 교수 덕으로, 아내는 의사를 신뢰하면서 편안한 마음으로 진료를 받고 건강을 회복하였다. 고맙기 그지없는 일이다.

 

   2년 전의 일이다. 김 교수는 스위스에 살고 있는 초등학교 교사 시절의 제자가 여러 곳을 안내해 준다고 하니, 함께 가자고 하였다. 그래서 아내와 함께 김 교수 부부를 따라 스위스에 갔다. 공항에 마중 나온, 김 교수의 제자 P씨는 50대 중반으로, 스위스에서 20년째 살고 있으며, 보험회사 임원으로 일하고 있다고 하였다. 그는 존경하는 김 선생님을 위해 1주일 휴가를 얻었다면서, 자기 승용차로 우리를 태우고 스위스의 여러 곳을 탐방하였다. 그가 아주 세밀하게 일정을 짜서 안내하였으므로, 우리는 아주 알찬 여행을 하였다. 여행 중에 그가 김 교수를 대하는 말과 행동은 진정한 사랑과 존경에서 나오는 것이어서 내 마음을 흐뭇하게 해주었다.

 

   지난달에는 김 교수 내외와 함께 오스트리아와 독일, 체코를 여행하였다. 이번에도 스위스에 사는 P씨가 일주일 휴가를 얻어, 우리를 자기의 승용차에 태워 자연경관이 아름다운 곳과 유서 깊은 곳을 안내하였다. 그래서 체코의 크룸로프 성, 오스트리아의 미라벨 궁전·잘츠부르크 성·볼프 강·스와로브스키 크리스탈 월드, 독일의 히틀러 별장과 소금산 작업장 등을 탐방하였다. 세계적인 음악가 모차르트의 생가와 기념관, 영화 <사운드 오브 뮤직>의 촬영지도 가 보았다. 이런 여행을 할 수 있었던 것은 김 교수와 P씨 사이에 오가는 아름다운 사제의 정이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이번 여행에서 큰 기쁨과 보람, 감동과 함께 P씨에게 감사한 마음을 가득 안고 돌아왔다.

 

   나는 제자를 잘 둔 김 교수 덕에 K 교수를 만나 아내의 건강을 되찾게 하였다. 그리고 P씨를 만나 두 차례나, 알차게 유럽여행을 하였다. 나는 K씨와 P씨가 40년의 세월이 흐른 오늘에도 김 교수에게 존경과 사랑을 표하는 것을 보면서 사제 간에 흐르는 따뜻한 정을 느낄 수 있어서 좋았다. 젊은 시절에 사랑과 정성을 기울인 스승과 나이 들어서도 사랑과 존경의 마음을 간직한 제자의 관계는 정말 귀하고, 고결하게 느껴진다.

 

   나는 김 교수와 그의 제자 덕으로 아내의 건강을 회복하였고, 즐겁고 알찬 여행도 하였다. 이 일을 생각하면, 나도 모르게 고마운 마음과 함께 흐뭇한 미소가 피어오른다. 제자를 잘 둔 김 교수와 사제의 정을 나누며 살 수 있게 해 주신 하나님께 감사한다.(2019. 11. 18.)

'자료실 > 산문' 카테고리의 다른 글

영화 <사랑의 선물>을 보고  (0) 2020.01.06
우애 깊은 형제 이야기의 현장  (0) 2019.12.10
세면대 마개와 물컵  (0) 2019.10.29
합죽선(合竹扇)의 멋과 아름다움  (0) 2019.08.21
스님이 된 제자 상봉  (2) 2019.07.19

˙   한국인이 사는 집 세면대에는 대개 배수구를 막는 마개가 있다. 그래서 그것으로 배수구를 막아 물을 받아놓고 손이나 얼굴을 씻는다. 마개는 전에는 고무로 만든 것을 사용하였으나, 요즈음에는 쇠에 도금하거나 스테인리스로 된 것을 많이 사용한다. 마개를 닫고 여는 방식을 보면, 전에는 고무마개를 손으로 눌러 막고, 잡아 올려 열곤 하였다. 요즈음에는 수전 뒤쪽에 있는 막대를 이용하거나, 손으로 직접 마개를 눌러 닫고 연다. 세면대에 물을 받아놓고 세수를 하면, 수도꼭지를 틀어놓고 하는 것보다 편하고, 씻는 동작을 하는 동안 물을 그대로 흘려보내지 않아 물을 절약할 수 있다. 그래서 우리나라는 물론 미국이나 유럽에서도 이를 널리 활용하고 있다.

 

   그러나 모든 나라의 세면대에 마개가 있는 것이 아니고, 이를 아예 설치하지 않는 나라도 있다. 대표적인 예로 터키를 들 수 있다. 내가 터키 에르지예스대학교 한국어문학과 객원교수로 근무할 때 터키인의 가정에 가 보니, 세면대의 설계 자체가 마개를 막을 수 없게 만들었다. 처음에는 오래된 개인주택이라서 그런가 하였다. 그러나 나중에 새로 지은 아파트에 가서 보아도, 역시 마찬가지였다. 세면대의 배수구를 막을 수 없으니, 수도꼭지를 틀어 놓은 채 흘러내리는 물에 손을 씻거나, 두 손을 모아 물을 받아 올려 얼굴을 씻어야 한다. 얼굴이나 손을 씻는 동작이 끝날 때까지 수도를 틀어놓고 있어야 하니, 물의 소비가 많을 수밖에 없다.

 

   이를 처음 본 나는 이상하게 생각하였다. ‘이곳 사람들은 물을 아낀다는 의식이 전혀 없나?’, ‘유럽화 경향을 보이는 나라에서 이런 불합리한 현상을 보이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왜 이런 문화가 형성되었지?’ 하는 의문이 일었다. 나는 궁금한 것을 풀기 위해 터키 문화에 관한 책을 읽으며, 이런 문화가 형성된 배경과 이유는 무엇일까를 생각해 보았다.

 

   터키의 주류를 이루는 민족은 튀르크(Türk) 족으로, 우리 역사서에 돌궐(突厥)로 표현된 민족이다. 이들은 일찍이 중앙아시아 지역에 살면서 소와 양을 키우던 유목민족이다. 고대에 이들은 중국 북방지역에 거주하면서 우리 한민족과 싸우기도 하고, 협력하기도 하였다. <<삼국사기>> 19 <고구려본기> 7의 양원왕(24대) 7년(551년)조를 보면, “가을에 돌궐이 고구려에 쳐들어와 신성을 포위하였으나 승리하지 못하자, 군대를 이동하여 백암성을 공격하였다. 왕이 장군 고흘(高紇)에게 병사 1만을 주어 그들을 물리치고, 1천여 명의 머리를 베었다.”는 기사가 있다. 이로 보아 돌궐은 고구려와 다퉜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수나라가 중국을 통일한 뒤에는 고구려와 동맹을 맺어 협력하였다. 이때를 생각하면, 한민족과 튀르크 족은 형제 관계라는 말이 헛말이 아니라고 하겠다. 터키에서는 역사교과서에서 한국을 형제국이라고 가르치고 있다.

 

   튀르크 족은 전성기에 유라시아 지역 동서와 남북에 걸쳐 대제국을 형성했다. 이들은 중원이 수나라에 이어 당나라에 의해 통일된 데다 내부 분열이 생기면서 동돌궐과 서돌궐로 나눠졌다. 동돌궐은 630년, 서돌궐은 651년 당나라에 의해 멸망했다. 그 뒤에 후돌궐이 일어나 전성기를 이루었고, 고유의 문자를 개발하여 사용하면서 ‘돌궐비문’에 강성기(强盛期) 왕의 사적을 기록하였다. 현재 중국 신장의 위구르족이 동돌궐의 후손이라면, 터키는 서돌궐의 분파다. 서돌궐은 동남쪽으로 이동하여 지금의 아나톨리아 반도에 자리 잡아 셀주크 튀르크(Seljuk Türk)를 세웠다. 이 나라는 뒤에 오스만 튀르크(Osman Türk)로 이어져 크게 세력을 떨쳤다. 지금의 터키공화국은 오스만 튀르크를 이은 나라이다.

 

   현재 터키는 유목민족의 후예답게 목축을 많이 하지만, 다양한 산업이 발달한 산업국가이다. 그러나 이들은 선조들이 유목생활을 하면서 이룩한 문화를 잊지 않고 이어가고 있다. 이들의 선조는 유목민이었으므로, 물과 풀이 있는 곳을 찾아 옮겨 다니며 살았다. 그래서 흐르는 물에 세수하고, 몸을 씻는 문화가 형성되었다. 이에 비하여 일찍부터 농사를 지으며 정주생활(定住生活)을 한 우리 민족은 집집마다 샘이나 우물을 팔 수 없기에 두멍에 물을 길어다 놓고, 아껴가며 썼다. 이런 생활 방식이 세면대에 마개를 막는 문화를 형성하였다. 그런데 터키 사람들은 집안에 세면대를 설치하면서 마개를 막는 한국이나 유럽의 문화를 따르지 않고, 자기 선조들의 문화적 전통을 이어 가고 있다. 그래서 집안에 세면대를 설치하면서 마개를 쓰지 않고, 수도꼭지를 틀어 물이 흐르게 한 뒤에 그 물로 손이나 얼굴을 씻는다.

 

   나는 터키에 있을 때 터키인의 집에 가서 묵은 일이 있다. 저녁을 먹은 뒤에 세면실에서 칫솔질을 하고, 물로 입안을 가시려고 컵을 찾았으나 컵이 없었다. 하는 수 없어 손을 오그린 뒤에 물을 받아 입을 가셨다. 집 주인에게 컵이 없다는 말을 하니, 터키인은 컵을 쓰지 않고 손을 오그려 물을 담아 올려 입을 가신다고 하였다. 이것 역시 유목생활을 하던 선조가 흐르는 물가에서 양치질을 하고 입을 가시던 생활습관에서 형성된 문화이리라. 양치질을 할 때 컵을 사용하지 않는 것 역시 이런 문화적 전통에서 연유된 것이라 하겠다.

 

   문화는 오랜 동안 한 지역에서, 같은 언어를 쓰며 살아온 사람들(민족)이 생활 속에서 형성하여 전해오는 유형·무형의 것들이다. 이것은 그 민족이 사는 곳의 생활환경과 역사성을 바탕으로, 그들의 공동심성에서 형성된 것이다. 그러므로 각기 다른 습관이나 문화는 그 나름의 형성 배경과 이유가 있다. 이를 알아야 그 문화를 바르게 이해할 수 있다. 다른 문화의 형성 배경과 의미를 알지 못한 채 자기 문화의 잣대로 그 문화를 폄하하거나, 자기 문화의 우월성을 강조하면, 관규여측(管窺蠡測, 대롱으로 하늘을 보고 표주박으로 바닷물의 양을 잰다는 뜻으로 사물에 대한 이해나 관찰이 매우 좁거나 단편적임을 비유한 말)의 어리석음을 범할 수 있다. 다른 문화의 형성 배경과 이유를 알고 이해할 때 그 문화와 교류할 수 있고, 그 문화를 지닌 사람들과도 교감하게 될 것이다.(2019. 10. 28.)

'자료실 > 산문' 카테고리의 다른 글

우애 깊은 형제 이야기의 현장  (0) 2019.12.10
제자를 잘 둔 제자  (0) 2019.11.19
합죽선(合竹扇)의 멋과 아름다움  (0) 2019.08.21
스님이 된 제자 상봉  (2) 2019.07.19
원칙 지키기와 융통성  (2) 2019.07.06

   오늘은 기온이 34°C까지 오른, 아주 더운 날이다. 오후에 볼일이 있어 낙원동에서 인사동을 지나 조계사 쪽으로 걸어갔다. 그 길은 승용차 두 대가 겨우 지날 정도의 이면도로(裏面道路)로 가로수가 없고, 동서로 뻗은 길이어서 빌딩들이 만들어 주는 그늘도 없었다. 그래서 뜨거운 열기를 내뿜는 해를 정면으로 바라보며 걸어야 했다. 챙이 넓은 모자를 쓴 나는 고개를 좀 숙이고 걸으며, 오가는 사람들을 살펴보았다. 양산이나 넓은 모자챙으로 해를 가리며 걷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신문지·책·서류봉투·손수건·부채 등을 높이 들어 해를 가리며 걷는 사람도 있다. 휴대용 선풍기를 얼굴 정면이나 목 부분에 대면서 걷는 젊은이도 있다. 그 중에서 나의 흥미와 관심을 끈 것은 합죽선(合竹扇)을 펴서 해를 가리고 걷는 사람을 여럿 본 것이다.

 

   합죽선(合竹扇)은 얇게 깎은 대나무 껍질로 살을 만들고, 그 위에 한지를 붙여 접었다 폈다 할 수 있도록 만든 부채이다. 부채고리에는 장식을 매다는데, 전에는 신분의 차이에 따라 다르게 매달았다고 한다. 고려 때부터 지금까지 전승되는 합죽선은 최고 수준의 정교함과 세련미를 갖추었다. 따라서 합죽선은 단순히 바람을 일으키는 물건을 넘어 멋과 예술을 담은 특별한 예술품이라 하겠다.

 

  부채는 오래 전부터 사용해 왔다. 부채에 관한 오래된 기록은 후백제의 왕 견훤이 고려 태조 왕건의 즉위 소식을 듣고, 선물로 공작선(孔雀扇, 공작의 깃으로 만든 부채)을 보냈다는 《삼국사기(三國史記)》의 기록이다. 이 부채가 단선(團扇, 둥글게 만든 부채)인지 접선(摺扇, 접었다 폈다 하게 된 부채)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합죽선은 더위를 식히는 것 외에도 여러 용도로 사용하였다. 선비들은 합죽선을 가지고 다니다가 내외하거나(남의 남녀 사이에 서로 얼굴을 마주 대하지 않고 피함.) 예의를 지켜야 할 경우에는 펴서 얼굴을 가려 실례를 범하지 않으려 하였다. 손잡이 부분에 있는 지압점(指壓點)을 눌러 건강 증진의 도구로도 활용하였다. 길을 가다가 불량배나 강도를 만났을 때에는 합죽선으로 막아 화를 면하였다. 시조나 가곡을 부를 때에는 장단을 맞추는 데에 사용하였다. 민요나 판소리를 부르는 소리판이나 무당의 굿판, 전통무용에서는 없어서는 안 되는 소품(小品, 연극이나 영화 따위에서, 무대 장치나 분장에 쓰는 작은 도구류)이다.

 

  옛날부터 ‘하선동력(夏扇冬曆)’이라 하여 더위가 시작되는 단오에는 부채를, 동짓날에는 새해의 농사준비에 도움이 되는 달력을 나눠주었다. 조선시대에는 단오가 되면 공조(工曹)에서 부채를 만들어 임금께 바치고, 임금은 이를 신하들에게 나눠 주었다. 단오에는 일반인들도 부채를 선물로 주고받았다고 한다. 이것은 여름을 맞아 더위를 이기고 건강을 지키라는 뜻이 담긴 풍습이라 하겠다. 《조선왕조실록》에는 단오에 부채를 진상(進上)하게 한 뒤에 임금이 이를 신하들과 군병들에게 나누어 주었다는 기사가 있다.

 

  합죽선은 경상도와 전라도 지방에서 많이 만들었는데, 조선 후기에는 대나무와 한지의 품질이 우수한 전라도 지방에서 만든 것이 호평을 받았다. 전주감영에서는 선자청(扇子廳)을 두어 합죽선을 만들었다. 최근에 와서 합죽선은 역사성‧예술성 면에서 전승‧보존 가치가 높다 하여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하고, 이를 만드는 기술과 기능을 보유한 선자장(扇子匠)을 지명하였다. 합죽선 장인(匠人)의 전승계보를 보면, 제1대는 라경옥 씨이고, 제2대는 그의 아들 라학천 씨이다. 제3대는 라학천 씨의 다섯 아들이고, 제4대는 라학천 씨의 외손자인 김동식 씨이다. 김동식 씨는 외할아버지인 라학천 씨와 셋째 외숙인 라태순 씨의 기술을 이어받은 제4대 선자장이다. 합죽선은 2007년에 전라북도중요무형문화재로, 2015년에는 국가중요무형문화재(제128호)로 지정되었다. 김동식 씨는 전라북도 지정 선자장에 이어 국가지정 선자장이 되었다. 제5대는 아들 김대성 씨로 이어지고 있다.

 

  나는 합죽선 세 개를 가지고 있다. 둘은 전주 지방에 사는 제자가 선물로 준 것이고, 다른 하나는 필리핀에 여행 갔던 제자가 사다 준 것이다. 그 중 하나는 고종황제께 합죽선을 만들어 바친 제2대 합죽선 장인 라학천 씨의 다섯째 아들 고 라태용 선생이 만든 명품(名品)이다. 이 부채는 잔손을 많이 들여 정밀하게 만든 37개의 살에 기름먹인 한지를 붙여 만들었다. 부채를 펴면 3분의 2쯤 되는 선면(扇面)에 굽은 노송을 그린 묵화(墨畫)가 있고, 그 옆에 송나라 왕안석(王安石, 1021~1086)의 시 「고송(古松)」이 적혀 있다. 끝에는 ‘崔雲植 敎授. 000 拜上/ 丁丑年 元旦 無等)’이라 쓰고 낙관이 찍혀 있다. 부채고리에는 청․홍색 실로 정성껏 만든, 고상하면서도 호사스러운 느낌을 주는 매듭이 달려 있다. 제3대 선자장인 라태용 선생이 만든 부채를 보고 있으면, 아주 자랑스럽고 소중하게 느껴진다. 선자장인 라 선생께 특별히 부탁하여 얻은 작품을 나에게 선물한 000 선생께 감사한다. 나는 이 부채를 받은 정축년(1997)부터 지금까지 연구실에 두고, 냉방 시설이 가동되지 않아 더울 때에는 더위를 식히고, 심심할 때에는 지압을 하는 소품으로 활용한다. 부채에 적힌 시를 읽으며 고송을 스쳐온 듯한 바람을 느껴보기도 한다.

 

  요즈음 아내는 오죽을 깎아 만든 살에 종이를 붙여 만든 접이식 작은 부채[烏竹扇]를 가지고 다닌다. 서예를 공부한 친구가 써준 글귀가 적혀 있어 매우 아끼며 사용한다. 그러나 나는 부채를 가지고 다니지는 않는다. 어디를 가든 실내는 냉방이 잘 되어 있고, 승용차는 물론 지하철이나 버스를 타면 차안에 에어컨이 있어 덥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 오늘은 밖이 워낙 더웠기 때문에 냉방을 한 은행에 들어가서도 시원함을 느낄 수 없었다. 나는 순번을 기다리는 동안 내내 A4 용지로 부채질을 하면서 합죽선을 가지고 오지 않은 것을 아쉬워하였다.

 

  요즈음에 사람들이 들고 다니는 부채를 보면, 전통부채 외에 현대부채도 있다. 현대부채는 전체를 플라스틱으로 만들었거나 플라스틱으로 살을 만들어 양쪽에 종이를 접착한 살부채, 종이에 인쇄를 하여 필름으로 코팅을 하고 자루를 끼운 부채 등 다양하다. 이들은 바람을 내는 데는 별 문제가 없겠지만, 가지고 다니기에는 불편한 일회용품이다. 합죽선이나 오죽선은 오래 사용할 수 있고, 가지고 다니기에 좋으며, 품위가 있어 보인다.

 

  얼마 전에 만난 선배가 가방에서 합죽선을 꺼내 부채질을 하고, 거기에 쓰인 한시를 풀어주던 모습이 떠오른다. 합죽선을 애용하는 것은 각자의 건강을 챙기면서 무형문화재의 전승과 보존에 도움을 주는 일이기도 하다. 합죽선을 가지고 다니면서 더위를 식히는 한편, 옛사람들의 정취를 느끼는 사람이 많았으면 좋겠다. (2019. 8. 13)

 

 

'자료실 > 산문' 카테고리의 다른 글

제자를 잘 둔 제자  (0) 2019.11.19
세면대 마개와 물컵  (0) 2019.10.29
스님이 된 제자 상봉  (2) 2019.07.19
원칙 지키기와 융통성  (2) 2019.07.06
자연과 과학이 아우른 호명호수  (0) 2019.06.27

   며칠 전 ‘의재서실(宜齋書室)’이라고 새긴 현판(懸板)을 선물로 받았다. 정년퇴임을 한 뒤에 서각(書刻)을 익혔다는 H 교수가 정성껏 새겨 만든 작품이다. 내 연구실이 있는 종로오피스텔에는 각 방문에 호실이 쓰여 있고, 그 위에 표찰(標札)을 붙일 수 있는 A4용지 크기의 사각 판이 붙어 있을 뿐이다. 그래서 그 현판을 걸 자리는 없다. 나는 궁리 끝에 현판 사진을 A4용지에 인화하여 사각 판에 붙였다. ‘의재’는 나의 호이고, ‘서실’은 ‘서적을 갖추어 두고 책을 읽거나 글을 쓰는 방’이라는 말이니, 깊은 뜻을 담고 있는 것은 아니다.

 

   종로오피스텔에는 290여 개의 크고 작은 방이 있다. 복도를 지나면서 보면, 각 방문에는 회사, 출판사, 연구실, 변호사·세무사 사무실, 목회상담실, 서예실 이름 등 각양각색의 표찰이 붙어 있다. 그런데 그동안 내 연구실 문에는 표찰을 붙이는 자리에 흰 종이를 붙여 놓았었다. 그래서 나를 찾는 사람은 방 번호를 기억해야 찾아올 수 있었다. 방 번호를 깜빡하였거나, 잘못 기억한 사람은 다른 방문을 두드리기도 하고, 내게 전화를 걸어 묻거나 1층 경비실로 가서 확인하고 찾아오는 불편을 겪기도 하였다. 그런데 이제 표찰을 붙였으니, 이런 불편을 조금은 덜 수 있을 것 같다. 그동안 표찰을 붙이지 않아 불편을 겪은 분들께 미안한 마음이 든다.

 

   내가 종로오피스텔에 연구실을 마련한 것은 2007년 10월의 일이다. 그것은 2008년 2월에 있을 교수 정년퇴임을 앞두고 대학의 연구실에 있는 많은 책을 어디로 옮겨 놓고, 연구 활동을 이어갈 것인가를 고민하던 때였다. 그 무렵에 먼저 퇴임한 선배 교수의 연구실이 있는 종로오피스텔을 찾게 되었다. 그 일이 계기가 되어 나도 이곳에 개인 연구실을 마련해야겠다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부동산 중개인에게 부탁하였고, 순조롭게 진행되어 작은 방을 매입하여 정년퇴임과 동시에 대학 연구실에 있던 책을 옮겨 놓았다.

 

   나는 연구실을 기도와 독서·연구의 공간, 사람을 만나 교양을 넓히고 업무를 처리하는 사무실, 건강을 증진시켜 주는 곳으로 활용하고 있다. 아침에는 외출복으로 갈아입고 가벼운 마음으로 집을 나선다. 갈 곳도 없고, 할 일이 없어 무료하다는 생각을 하지 않아도 되니, 참으로 좋다. 연구실에 와서 기도드린 뒤에 홀로 앉아 책을 읽거나 글을 쓰고 있으면, 대학의 연구실에 앉아 있는 것과 같아서 퇴직하였다는 기분이 들지 않을 때가 있다. 나는 이 연구실에서 연구 활동을 계속하여 단독 저서와 공동 저서 몇 권을 집필하였다.

 

   내 연구실은 교통이 좋은 종로 3가의 전철역 가까운 곳에 있어서 지인을 만나기에 편하다. 내가 이곳에서 만나는 사람은 인사차 오는 사람, 함께 담소하며 즐거운 시간을 보낼 사람, 연구하고 토론을 하여 보람을 얻으려는 사람, 출판이나 방송과 관련된 일을 하는 사람 등 다양하다. 연구실이 없으면 이런 사람들을 집에서 만나야 한다. 교통이 좋은 곳에 연구실이 있기 때문에 찾아오는 사람은 집까지 찾아오는 수고를 덜 수 있고, 아내에게는 손님 접대의 부담을 주지 않는다. 점심은 물론 저녁식사도 연구실 근처에서 하는 일이 많으니, 아내에게 이식(二食)·삼식(三食)의 수고를 끼치지 않아서 좋다.

 

   나는 많은 비용을 들여 유지하는 연구실에 나가지 않으면 안 된다는 마음의 부담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특별한 일이 없는 한 연구실에 나온다. 연구실에 오고갈 때에는 대중교통을 이용한다. 연구실 밖에 나와 점심을 먹은 뒤에는 가까운 곳에 있는 창덕궁을 산책하기도 하고, 인사동이나 종로에 있는 전시장이나 서점을 방문하기도 한다. 이렇게 걷는 일은 운동량이 부족한 나에게 건강 증진의 계기가 된다. 이러한 일들은 연구실을 유지하는 데 따른 장점으로, 연구실 개설과 유지에 따른 비용을 상쇄하고도 남는다고 생각한다.

 

   내가 연구실을 마련하려고 할 때, “정년퇴임을 하면 쉬는 게 순리인데, 많은 돈을 들여 연구실을 만들려고 하느냐?”고 하면서, 욕심을 부리지 말라고 만류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 때 만류하는 말을 듣고 연구실을 마련하지 않았더라면, 어찌 되었을까? 책을 읽고 글을 쓰는 일은 집의 서재에서 할 것이다. 그러나 만나는 사람은 집에까지 와야 하는 번거로움 때문에 지금보다 적을 것이다. 매일 출근하는 마음으로 집을 나설 일이 없으니, 게으름을 피우는 날이 많아져서 활동량이 적을 것이다. 그리고 정년퇴직을 하던 해에 책을 모두 기증하고 홀가분해 하던 교수가, 연구를 계속하기 위해 도서관을 찾아다니는 것과 같은 불편을 겪고 있을 것이다.

 

   이런 점을 생각해 보니, 그때 연구실을 마련하기를 잘 하였다는 생각이 든다. 이 연구실을 언제까지 가지고 있을지는 나도 모른다. 건강이 허락하는 날까지 이곳에 와서 새로 구입하는 책이나, 쌓아두기만 하고 읽지 못한 책을 읽을 예정이다. 그런데 기억력이 떨어져 책을 읽을 때는 다 아는 것 같지만, 읽은 뒤에는 그 내용을 제대로 기억하지 못한다. 그러니 읽는 동안 희열을 느끼면서 다시 읽으면, 기억에 남는 것이 있을 것이다. 그리고 글감이 잡히는 대로 글을 쓰려고 한다. 그 중에서 수필은 따로 수필집으로 엮어 지인들에게 나눠줄 생각이다. 다만 연구실 서가를 가득 채우고 빈 공간에 쌓여 있는 책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는 풀리지 않는 숙제이다. 연구실 문에 ‘의재서실’ 현판을 붙이면서 왜 연구실을 가지고 있는가를 다시 생각해 보았다. ‘의재서실’ 현판을 만들어 주어 연구실을 지니고 있는 데 따른 장점과 행복감을 다시 느끼게 해주신 H 교수께 감사한다.(2019. 8. 8.)

 

 

   지난주에 경남 고성군 하이면의 와룡산 낙서암에서 수행하고 있는 스님을 만났다. 그와 나는 오래 전에 사제의 연을 맺은 사이이다. 그동안 만나고 싶으면서도 차일피일 미루며 몇 년을 흘려보냈다. 그것은 먼 곳까지 갈 시간을 내기 어려웠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불교 신자도 아닌 내가, 세상과 인연을 끊고 출가한 스님을 만나는 일이 수행(修行)에 방해가 되는 것은 아닐까 저어하는 마음 때문이었다. 그러다가 더 이상 미루다가는 아주 못 만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 용기를 냈다.

 

   그와 어렵사리 통화하여 만날 날을 정한 뒤에 조용히 앉아 그와의 인연을 생각하였다. 그는 45년 전, 내가 서울에 있는 중학교 교사로 재직할 때 담임했던 반의 학생이다. 그는 근면 · 성실하고 책임감이 강하며, 지도력도 있는 학생이었다. 그는 나를 잘 따랐고, 2학년 때와 3학년 때에 반장으로 반을 잘 이끌었다. 반장 역할을 잘 하여 담임교사인 내가 자질구레한 일에 마음을 쓰지 않도록 해주었다. 나는 그를 사랑하고, 신뢰하였다. 꽃을 좋아하는 그는, 우리 집에 올 때에는 가정 형편이 좋지 않아 용돈이 부족할 터인데도, 꽃다발이나 작은 화분을 사서 들고 왔다. 시를 좋아하는 그는 2학년 때부터 시를 써서 보여주곤 하더니, 3학년 때에는 《잎을 모아서》라는 시 모음집을 들고 왔다. 펜으로 꼬박꼬박 눌러 쓴 시 모음집에는 따뜻하고 고운 마음을 담은 시들이 가득하였다. 나는 국어과 교사로, 시를 읽고 써보라고 권장은 하였지만, 능력이 부족하여 시 쓰기 지도는 제대로 하지 못해 미안하였다.

 

   그는 중학교를 졸업할 때 대광고등학교에 배정받았다. 나는 교회에 열심히 다니는 그가 기독교학교에 진학하게 된 것을 기뻐하며 진심으로 축하해 주었다. 그가 고등학교를 졸업할 무렵, 나는 가정 형편이 어려운 그가 대학에 진학하는지 궁금하였다. 그러나 소식을 알 길이 없어 답답하였다. 얼마 뒤에 그가 긴 글을 보냈는데, 세상을 비관하고, 모든 인연이 끝이라고 하는 말이 이어졌다. 나는 그 편지가 유서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어 가슴이 철렁하고, 눈물이 앞을 가렸다. 그런데 편지 맨 끝에 “세상 어딘가에 살아 있겠습니다.”라는 말이 적혀 있었다. 그래서 안도의 한숨을 쉬었지만, 궁금한 마음은 금할 수 없었다.

 

   몇 년 뒤에 다시 편지가 왔다. 출가하여 행자(行者) 노릇을 한 뒤에 승가대학을 마치고, 계(戒)를 받아 스님이 되었다며 법명(法名)을 적어 보냈다. 얼마 뒤에는 군에 입대하여 군종사병으로 근무하다가 휴가 나왔다면서 내가 근무하는 대학으로 찾아왔다. 그날 간단히 식사를 하고 헤어진 뒤로 한동안 소식이 없더니, 1984년에는 잎을 모아서 제2집을 보내왔다. 군 생활 3년 동안 쓴 작품들을 타자기로 쓴 시 모음집이었다. 맨 뒷면에 ‘스승님의 은덕을 기리며—제자 000 드림’이라고 쓰여 있었다.

 

   그 후 몇 년 동안 소식이 없었다. 나는 그가 수행의 정도가 깊어지면서 나를 잊은 것이라 생각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 그가 죽로차(竹露茶) 한 통을 보내왔다. 그 통 속에는 ‘스님들이 마시려고 댓잎에 맺힌 이슬을 먹고 자란 찻잎을 따서 만든 차’라는 쪽지가 들어 있었다. 나는 그가 나와 인연을 끊은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 흐뭇하였다. 이 일로 나는 녹차의 맛을 알게 되었다.

 

   또 몇 년 동안 소식이 없던 그가, 서울예술대학 문예창작과에 진학하여 시 공부를 한 뒤에 시인으로 등단하였고, 시집도 출판했다면서 시집 出出家를 보내왔다. 그 뒤에는 한동안 선원(禪院)에 들어가 참선(參禪)하였고, 태국에 가서 1년 동안 수행을 하였다는 소식을 전해 왔다. 얼마 뒤에는 낙서암에 자리를 잡았다는 소식과 함께 그 동안 사찰을 옮겨 다니느라 자주 소식을 전하지 못했다고 하였다. 그 뒤로는 매년 스승의 날이면 녹차를 선물로 보내왔다. 나는 그에게 나의 정년기념문집과 수필집 등을 보내 근황을 알리며 오늘에 이르렀다.

 

   서울에서 승용차를 몰고 5시간을 달려 고성의 약속 장소에 가니, 그가 먼저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군복 입은 모습을 본 뒤로 35년만의 상봉이다. 반갑고 떨리는 마음으로 악수를 하고, 얼굴을 자세히 살펴보았다. 곱던 얼굴과 천진하던 표정은 온화하고, 너그러운 표정으로 변해 있었다. 그리고 환갑을 맞이한 스님답게 긴 세월 수행하여 얻은 고상한 품격이 보였다. 마주 앉아 그동안 지내온 일과 근황을 이야기하다 보니 아주 정겹고, 흐뭇하였다. 함께 간 아내와 김 교수 내외가 옆에서 거드는 바람에 분위기는 더욱 훈훈하였다. 기독교인인 나는 그와 종교가 달랐지만, 전에 맺은 인연의 끈이 분위기를 어색하지 않게 감싸 주었다.

 

   한 시간쯤 대화하던 우리는 차에 올라 그가 홀로 수행하고 있는 낙서암으로 향하였다. 와룡산 중턱에 있는 천진암에 차를 세우고, 산길을 오르기 시작하였다. 경사가 심한 데다가 바위와 돌이 많아 걷기 힘든 길이었다. 김 교수 내외는 그를 잘 따라 올라갔지만, 나와 아내는 숨을 몰아쉬며 천천히 걸었다. 아내는 끝내 오르기를 포기하였고, 나는 30분 이상 걸려 낙서암에 도착하였다. 그는 이렇게 힘든 길을, 필요한 물건을 등에 지고 오르내린다고 하였다. 이 길을 걸어 암자에 오르는 일만도 고된 수행이라 하겠다.

 

   와룡산 향로봉 아래에 자리 잡고 있는 낙서암의 풍광(風光)은 아주 좋았다. 뜰에 활짝 피어 있는 흰색․보라색 수국을 비롯한 여러 꽃과 나무들은 이 암자의 분위기를 아주 안정되고, 고즈넉하게 하였다. 부처님을 모신 법당 앞에서 사진을 찍은 뒤에 그가 거처하는 산방(山房)에 들어가 보았다. 잘 정돈된 방에는 책이 쌓여 있고, 그 옆에는 LP판이 가득 꽂힌 장과 턴테이블(turntable)이 놓여 있다. 선(禪)과 음악 감상은 마음을 닦는 데에 상승작용을 할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창문 밖에 놓인 의자에 앉아보니, 멀리 보이는 남해바다와 그 앞의 산들이 조화를 이루어 조망이 환상적이다. 아름다운 자연 속에서 마음을 닦고, 음악을 들으며 시상을 가다듬어 시를 쓰는 그의 모습을 생각하니, 아주 고상하고 멋스럽게 느껴진다. 깊은 산속에서 혼자 지내며 수행하는 지금의 생활에 만족한다는 그의 말이 허언이 아닌 것 같다.

 

   빗방울이 떨어지는 것을 본 나는 하산을 서둘렀다. 나는 그가 우리를 배웅하러 산을 내려갔다가 비를 맞으며 올라올 일을 걱정하며 낙서암 앞에서 작별 인사를 하려 하였다. 그러나 그는 산을 내려가 식사대접을 하겠다며 앞장서서 내려갔다. 우리는 천진암으로 와서 차를 타고 연꽃단지 앞에 있는 식당 <연담>으로 가서 연잎정식을 먹으며 담소하였다. 저녁을 먹은 뒤에 다시 차를 타고 천진암으로 와서 작별하였다. 그가 잡아준 숙소로 돌아와 그가 준 시집 산색(山色)과 선물꾸러미(죽로차와 황진단)를 열어보니, 45년 전에 맺은 인연의 끈이 예쁘게 서려 있다. 나는 그의 얼굴을 떠올리며 연꽃단지에서 본 ‘이제염오(離諸染汚)’란 말을 넣어 기원하였다. 진흙탕에서 자라는 연꽃이 진흙에 물들지 않고 예쁜 꽃을 피우듯이 주변의 환경이나 부조리에 물들지 말고 정진(精進)하여 덕이 높은 스님이 되소서!(2019. 07. 18.)

 

 

'자료실 > 산문' 카테고리의 다른 글

세면대 마개와 물컵  (0) 2019.10.29
합죽선(合竹扇)의 멋과 아름다움  (0) 2019.08.21
원칙 지키기와 융통성  (2) 2019.07.06
자연과 과학이 아우른 호명호수  (0) 2019.06.27
양녕대군(讓寧大君)의 처신  (0) 2019.06.07

   어떤 일을 할 때에는 일관되게 지켜야 하는 원칙이 있다. 이 원칙은 상황에 따라 법으로 정하기도 하고, 사회적인 관습이나 규범, 또는 종교적인 교리로 행해지기도 한다. 이 원칙은 보다 나은 생활환경을 만들고, 다수의 이익이나 공동의 선을 추구하기 위한 것이 대부분이다. 그러므로 원칙은 철저하게 지켜져야 그 원칙을 정한 본래의 뜻을 살릴 수 있다.

 

   그러나 원리원칙 만을 내세우면, 그에 따른 부작용이 생길 수도 있다. 그러므로 원칙을 지키되, 그 일의 형편에 따라 적절하게 처리하는 지혜를 발휘해야 한다. 이를 ‘융통성’이라고 한다. 원칙만을 고집하면 ‘융통성 없는 사람’이 되고, 융통성이 지나치면 ‘줏대 없는 사람’, 또는 ‘이중적인 사람’이 된다.

 

   친구가 카톡으로 보낸 글 <원칙과 배려 사이에서>는 원칙을 지키는 일과 융통성을 발휘하는 일에 관해 생각하는 계기를 마련해 주었다. 70세 노인이 생일날 차를 몰고 치과에 가서 치료를 받고 나와 보니, 경찰관이 주차위반 범칙금 고지서를 쓰고 있었다. 그가 경찰관에게 치통이 심하여 제대로 주차를 하지 못한 사정을 말하고, “오늘이 내 생일인데 ‘재수 없는 70회 생일’이 되지 않도록 좀 봐 주세요.” 하였다. 이때 사람들이 모여들어 이 일을 어떻게 처리하나 지켜보고 있었다. 경찰관은 무표정한 얼굴로 그에게 범칙금 고지서를 써서 주고 떠났다. 그는 법이 그러니 어쩔 수 없다는 마음으로, 고지서를 받아들고 차에 올랐다. 그가 벌금이 얼마인가 보려고 고지서를 펴보니, ‘생신을 축하합니다. 어르신!’ 하고 적혀 있었다.

 

   경찰관이 주차위반 차량에 범칙금을 부과하는 것은 법으로 정한 원칙이다. 그러나 경찰관은 70번째 생일을 맞이한 노인이 치통으로 급한 마음에 길가에 차를 세웠으니 좀 봐 달라는 말을 못 들은 체하기 어려웠다. 그는 노인이 주차위반을 하여 교통의 흐름을 크게 방해한 것도 아니어서, 그대로 보내주고 싶었다. 그러나 이를 어떻게 처리하나 보려고 지켜보고 있는 주위 사람들 때문에 그럴 수가 없었다. 그래서 범칙금 고지서를 발부하면서, 범칙금 액수 대신 생일을 축하한다는 말을 써서 주었다. 그가 융통성을 발휘함으로써 지방자치단체는 범칙금을 받지 못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는 노인과 구경꾼들에게 주차위반을 하면 범칙금을 내야 한다는 강한 메시지를 주면서도, 노인과 그 가족들이 즐거운 마음으로 생일을 보낼 수 있게 해 주었다. 그의 훈훈한 마음은 노인과 그 가족들의 마음에 전달되어 경찰관을 신뢰하는 마음을 갖게 하였을 것이다. 이것은 주차위반 범칙금 수입을 올리는 것 이상의 긍정적인 효과를 거둔 것이라 하겠다.

 

   내가 채록한 옛날이야기 중에 <며느리의 효성을 알아준 판결>이 있다. 효성이 지극한 며느리가 시아버지의 생일에 술을 담갔다가 드렸다. 시아버지는 이웃집에 사는 친구 생각이 나서 그를 청하였다. 술을 본 이웃노인은 금주령을 위반하였다고 꾸짖고, 이를 원님에게 고변(告變)하였다. 원님은 세 사람을 불러 문초하였다. 며느리는, 약주를 좋아하시는 시아버지가 연로하셔서 내년 생신을 맞이할 수 없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에서 금주령을 위반하였으니, 처벌하여 달라고 하였다. 시아버지는, 약주를 좋아하는 자기 때문에 생긴 일이니, 자기를 벌하고 며느리는 용서해 달라고 하였다. 이웃노인은, 금주령을 위반한 것을 보고, 그대로 있을 수 없어서 고변하였다고 하였다. 조사를 마친 원님은, 시아버지에게는 무죄를 선고하였다. 며느리에게는 금주령을 위반한 죄로 벌금 천 냥을 선고한 뒤에, 효성을 치하하는 상금 천 냥을 내린다고 하였다. 이웃노인에게는 충성심이 높다고 칭찬한 뒤에, “준법정신을 발휘하여 금주령 위반 사례를 하루에 세 건씩 고변하라. 그렇지 못하면 볼기 석 대를 때리겠다.”고 하였다. 이 이야기에서는 융통성 있는 판결을 한 원님의 지혜가 돋보인다.

 

   유가(儒家)에서는 ‘남녀칠세부동석(男女七歲不同席, 일곱 살 이상의 남녀는 한 자리에 앉지 않음)’과 ‘남녀는 물건을 주고받을 때에도 직접 손을 맞대지 않는 것’을 성인 남녀가 지켜야 할 예(禮)라고 하였다. 이를 곧이곧대로 지킨다면, 형수가 물에 빠져도 손을 잡아 건질 수 없다. 이에 대해 맹자는 물에 빠진 형수의 손을 잡아 건지는 것은 ‘권도(權道)’로 잘못된 것이 아니라고 하였다. 이 역시 원칙 지키기와 융통성에 대한 좋은 가르침이라 하겠다.

 

   신약 성경을 보면, 이스라엘 사람들은 안식일에는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일 외에는 어떤 일도 해서는 안 된다고 하였다. 예수께서는 안식일에 찾아온 병자를 고쳐 주시면서, 원리주의자들인 바리새파 사람들에게 ‘안식일에 선한 일을 하는 것, 목숨을 구하는 일을 하는 것’이 잘못된 일이냐고 따져 묻는다. 이에 바리새파 사람들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한다.[마가복음 3:1~6] 이 역시 교리의 준수도 좋지만, 상황에 따라 융통성을 발휘해야 함을 말해 준다.

 

   모든 일에는 원칙이 있고, 그 원칙은 지켜야 한다. 그러나 때로는 주변 상황을 살펴 법이나 규범, 교리의 실천을 잠시 뒤로 물리고, 상황에 맞게 처리하는 융통성도 있어야 한다. 이럴 경우에 융통성은 재량의 범위를 크게 벗어나지 말아야 하고, 원칙을 뒤로 물리더라도 큰 문제가 발생하지 않으면서, 그에 못지않은 유익이나 긍정적인 효과를 가져 올 수 있어야 한다. 이런 원칙을 지키지 않는 융통성은 불법을 저지르게 되기도 하고, 더 큰 부작용을 낳게 할 수도 있다. 원칙 지키기와 융통성 사이에는 이런 원칙이 지켜져야 한다.(2019. 07. 06.)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