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에 교일산우회 회원들과 인왕산 숲길을 걸었다. 사직동 황학정(黃鶴亭, 활쏘기 연습장) 뒤에서 윤동주문학관까지 인왕산 아랫자락 숲속으로 난, 2.5km의 길이다. 나는 3주 전에 국제대학 제자들과 함께 처음으로 이 길을 걸었는데, 자연경관의 아름다움을 느끼면서 전설과 역사, 자연과 예술혼에 관해 생각할 수 있어 좋았다. 그래서 회원들에게 권하여 함께 걸었다.

  인왕산은 높이 338m인 그리 높지 않은 산으로, 풍수지리설에 의하면 우백호(右白虎)에 해당한다. 조선 개국 초기에 도성의 서쪽에 있다하여 서산(西山)이라고 하다가 세종 때부터 인왕산(仁王山)이라고 하였다. ‘인왕(仁王)은 불법을 수호하는 금강신(金剛神)의 이름이다. ‘어진 임금이란 뜻을 지닌 이 말이 조선왕조를 수호하려는 뜻과 일치함으로 이 이름으로 바꿨다고 한다. 일제강점기에 일제는 이 산의 한자 표기를 仁旺山으로 바꿨다. 그래서 한동안 그대로 쓰다가 1995년에 본래의 표기인 仁王山으로 바꿨다. 일제는 우리 민족의 민족정신과 자부심을 없애기 위해 경복궁 앞에 조선총독부 건물을 세우고, 창경궁(昌慶宮)을 창경원(昌慶苑)으로 바꿨으며, 창씨개명(創氏改名)을 강요하였다. 그것도 모자라 산 이름의 표기마저 바꿨다. 우리는 산 이름을 적어놓은 안내판을 보면서 일제의 간교함과 악랄함에 분노를 느꼈다.

  숲길을 걷다가 산 위쪽을 쳐다보니, 나무들 사이로 넓고 평평한 바위가 보였다. 조선 제11대 임금 중종과 부인 신() 씨의 애달픈 사랑 이야기가 서린 치마바위이다. 신 씨의 아버지 신수근(愼守勤)은 연산군의 처남이면서 진성대군의 장인이다. 반정(反正)을 계획한 박원종(朴元宗), 성희안(成希顏) 등은 이를 반대하는 신수근과 그의 동생들을 살해하였다. 반정에 성공하여 진성대군을 왕으로 옹립한 그들은 죄인 신수근의 딸이 왕비가 될 수 없다 하며, 신 씨의 왕비 책봉을 반대하였다. 힘이 없는 중종은 즉위한 지 일주일 만에 신 씨를 인왕산 아래 사직골에 있는 옛 거처로 보냈다. 중종은 조강지처(糟糠之妻)를 잊을 수 없어 경회루(慶會樓)에 올라 인왕산 기슭을 바라보곤 하였다. 이 말을 전해들은 신 씨는 경회루가 보이는 이 바위에 붉은 치마를 걸쳐놓음으로써 남편을 그리는 간절한 마음을 전하였다. 이 일로 인해 사람들은 이 바위를 치마바위라고 하였다 한다. 치마바위 전설은 권력의 횡포로 헤어진 중종과 신 씨의 애틋한 사랑과 아픔을 말해 준다.

  나무로 만든 계단을 오르고 내리기를 몇 차례 반복한 뒤에 수성동 계곡에 이르렀다. ‘물소리가 유명한 계곡이라 하여 수성동(水聲洞)으로 불리게 된 이곳은 조선 시대에 선비들이 여름철에 모여 쉬면서 즐기던 계곡이다. 종로구 옥인동과 누상동의 경계에 자리한 이 계곡은 조선 후기에 겸재(謙齋) 정선(鄭敾)이 그린 <장동팔경첩(壯洞八景帖)>에 수성동이 등장하면서 더욱 유명해졌다. 서울시에서는 2011년에 이곳에 있던 옥인아파트를 철거하고 복원하였다. 그래서 수성동은 옛 모습을 되찾아 맑고 아름다운 소리를 내며 물이 흐르는 계곡이 되었다. 청계천의 발원지인 이곳에는 서울특별시 보호동물인 도롱뇽을 비롯하여 가재, 개구리, 버들치 등이 서식하고 있다.

  겸재 정선은 인왕산 아래에서 태어나 평생을 그 부근에서 살면서 인왕산을 자주 오갔다. 그는 영조 27(1751)에 비온 뒤에 개는 날의 인왕산 모습을 동쪽에서 바라보며 <인왕제색도(仁王霽色圖)>를 그렸다. 그가 인왕산에서 받은 인상과 감흥을 실감나게 표현한 이 그림은 국보 216호로 지정되었다.

  한 곳에 이르니, 돌로 쌓은 축대에 나막신을 매달아놓았다. 이곳은 조선 후기의 대금명인(大笒名人) 정약대(鄭若大)가 대금 수업(修業)을 하던 곳이다. 어영청(御營廳) 세악수(細樂手)를 지냈고, 가곡 반주에 뛰어났던 그는 대금 수업을 위해 10년 동안 이곳에 와서 연습을 하였다. 그는 <도드리곡>을 한 번 연주할 때마다 나막신에 모래알 하나씩을 넣어 가득 찬 뒤에야 산에서 내려왔다. 그 뒤에 나막신의 모래에서 풀이 나와 자랐다고 한다. 명인이 되려면 타고난 재능도 있어야 하지만, 피나는 노력이 있어야 함을 일깨워주는 일화이다.

  인왕산에는 호랑이와 관련된 이야기가 많이 전해 온다. 이를 반영하듯 숲길에 인왕산의 상징 호랑이조형물이 서 있다. 그 옆의 나무판에는 강하고 부드러운 호랑이는 인()의 동물이라고 씌어 있다. 그 이유로, 호랑이는 재미 삼아 사냥을 하지 않고, 배가 부르면 먹잇감이 제 발로 와도 신경 쓰지 않으며, 수호랑이는 사냥을 하면 어린 새끼와 암컷부터 챙겨 먹이고, 자기는 맨 나중에 먹는다고 하였다. 이렇게 보면, 호랑이는 인()의 동물임이라고 할 수 있다. ()의 상징인 인왕산 호랑이가 멸종된 까닭은 무엇일까? 그것은 호랑이가죽을 탐낸 인간의 남획(濫獲)이 큰 원인일 것이다. 거기에다가 호랑이는 다른 수컷의 새끼들을 죽여 공생(共生)을 용납하지 않는 습성이 있다. 또 살던 터를 버리지 못하는 습성이 있어 살기 좋은 곳으로 옮겨가지 않았다. 그리고 공격해서는 안 될 사람을 공격함으로써 멸종을 자초하였다. 인왕산 호랑이의 멸종은 우리들에게 더불어 살 생각을 하지 않고, 남의 탓으로 돌려 공격하며, 옛것만을 고집하다가는 큰일 난다는 것을 일깨워 준다.

  인왕산 아래 마을은 세종 임금이 태어나 자란 곳이다조선 시대에 이곳은 경복궁 서쪽에 있다 하여 서촌(西村)이라 하였다. 이곳에는 역관(驛官), 의관(醫官)을 비롯한 전문 지식인들이 많이 살았다. 그 중 중인(中人)인 천수경(千壽慶, 17581818)은 시사(詩社, 시인들이 조직한 문학단체)를 열고, 송석원(松石園)을 지어 활발하게 활동하였다. 그래서 위항문학(委巷文學, 중인ㆍ서얼ㆍ서리ㆍ평민과 같은 여항인 출신 문인들이 이룬 문학)의 꽃을 피웠다. 화가 이중섭(李重燮)과 구본웅(具本雄), 시인 이상(李箱)은 예술혼이 서려 있는 이곳을 자주 찾으며 예술성을 함양하였다고 한다. 산 아랫마을에 하숙하였던 윤동주 시인 역시 이곳에서 시심(詩心)을 가다듬었을 것이다. 이 길은 숲과 계곡의 물이 어우러져 자아내는 아름다움을 보며 역사와 전설의 숨결을 느낄 수 있어 참 좋다. (2018. 6.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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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4월 중순에 충남 당진문학관장으로 일하는 최 교수의 초청으로 당진에 가서 송악읍에 있는 기지시줄다리기박물관을 찾았다. 2011411일에 개관한 이 박물관은 국가중요무형문화재 제75호인 기지시줄다리기를 비롯하여 국내외 줄다리기 관련 자료 및 각종 체험 시설을 갖추고 있었다. 우리나라에서 행해지는 줄다리기 중 <기지시줄다리기>와 <영산줄다리기>는 국가문화재로, <삼척기줄다리기>․<밀양감내게줄당기기>․<의령큰줄땡기기>․<남해선구줄긋기> 등은 지방문화재로 지정하여 전승과 보존에 힘쓰고 있다. 기지시줄다리기는 2015년에 베트남, 캄보디아, 필리핀과 함께 <줄다리기 의례와 놀이>로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에 등재되었다. 그래서 우리나라에서 18번째로 유네스코에 등재된 인류무형문화재가 되었다. 박물관은 지상 3층의 규모로 상설전시실과 기획전시실, 체험관과 회의실, 보존회사무실 및 실제 크기의 줄을 전시해 놓은 줄 전시관과 매년 4월에 하는 줄다리기 시연장을 갖추었다.

기지시줄다리기기지시는 마을 이름에서 따온 것이다. 전에 이 마을은 선녀가 베를 짜는 지형이라 하여 틀모시또는 틀무시라고 하였다. 이것을 한자로 기록할 때 베틀을 뜻하는 틀 기(), 길쌈을 할 때 필요한 물이 고여 있는 연못의 못 지()자를 합쳐서 기지(機池)라 하였다. 그리고 이곳에 저자거리[市場]가 형성되어 있었기에 ()를 합쳐 기지시(機池市)라고 하였다. 그 뒤로 한자 이름인 기지시가 널리 알려졌다. 지금도 이 지역 사람들은 이곳을 틀모시또는 틀무시라고 한다.

기지시줄다리기의 유래에 관하여는 두 가지 설이 전해 온다. 하나는 조선 선조 때 한나루[牙山灣]가 터져 많은 곳에 물이 차고, 전염병이 퍼져 민심이 흉흉하였다. 이때 이곳을 지나던 한 풍수지리학자가 이곳은 지형이 옥녀(玉女, 선녀)가 베틀을 놓고 베를 짜는 형상이기 때문에 윤년마다 마을사람들이 극진한 정성으로 줄을 당기면, 모든 재난이 예방되고 안정될 것이라고 하였다. 그때부터 줄다리기가 시작되었다고 한다. 줄을 당기는 것은 베를 짜서 마전(피륙을 바래는 일)을 할 때에, 짠 베를 양쪽에서 마주잡고 잡아당기는 형상을 나타내는 것이라 한다. 그래서 처음에는 부녀자들이 줄을 당기다가 나중에 남자들이 하게 되었다고 한다. 이를 옥녀직금형설(玉女織錦形說)이라고 한다.

다른 하나는 지네형국설이다. 옛날에 기지시리에 사는 선비가 과거만 보면 낙방하곤 하였다. 그가 과거에 또 낙방하고 돌아오는 길에 국수봉(국사봉)에 올라 신세를 한탄하다가 잠이 들었다. 그 때 그의 꿈에 구름 속에서 나온 용이 노인으로 변신하여, “네가 거듭 낙방하고, 윤년마다 마을에 재난이 드는 것은 오래 묵은 지네의 심술 때문이다. 내가 시키는 대로 하면 좋은 일이 있을 것이라고 하였다. 그가 꿈에서 만난 노인의 말대로, 정월 보름날 국수봉에 올라가 꽃이 피어 있는 고목나무에서 나온 아가씨의 입에 불을 붙인 솜을 넣었다. 그러자 아가씨는 간 곳이 없고, 큰 구렁이와 지네가 나타나 싸웠다. 얼마 뒤 싸움에 진 지네가 죽자 노인이 나타나, “심술을 부리던 지네는 죽었지만, 지형이 지네형국이기 때문에 지네 모양의 밧줄을 만들어 줄다리기를 하면 재난이 없을 것이라고 하였다. 이 말에 따라 윤달(閏月)이 드는 해마다 지네 모양의 밧줄을 만들어 줄다리기를 하였다고 한다.

  이렇게 하여 시작된 기지시줄다리기는 500여 년 동안 이어져 왔다. 전에는 물위 마을과 물아래 마을로 나누어 줄을 당겼다. 물위 마을이 이기면 나라가 평안하고, 물아래 마을이 이기면 풍년이 든다고 하였다. 전에는 정월 대보름에 행하였는데, 요즘에는 4월에 날을 잡아 민속축제로 줄다리기를 한다. 축제는 축제위원회와 줄다리기 전수회원들이 주관한다.

  요즈음 행하는 줄다리기에 쓸 줄은 한 달 전부터 제작한다고 한다. 일반농가의 볏짚은 길이가 짧으므로, 줄 제작이 용이하도록 농가와 계약하여 키가 큰 벼를 재배하고, 벨 때에도 기계로 베지 않고 낫으로 베어 볏짚의 길이를 길게 한다. 줄은 암줄과 수줄을 나누어 꼰다. 가는 줄을 먼저 꼰 뒤에 가는 줄 70개 가닥을 합하여 큰줄 3개를 만드는데, 이때에는 줄틀로 꼰다. 길이는 약 100m, 둘레는 1.8m나 된다. 본줄에 많은 새끼줄을 연결하여 줄을 당길 때 잡기 쉽게 한다.

  줄다리기는 마을사람들이 마을의 평안과 풍요를 기원하면서 협동하고, 결속을 다지는 민속놀이이다. 조선 후기에 홍석모(洪錫謨)가 쓴 󰡔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1849)를 보면, 줄다리기는 논농사의 비중이 큰 중부이남 지역에서 행해졌다고 한다. 짚으로 엮는 줄다리기의 줄은 농사의 신인 용신(龍神) 상징으로 볼 수 있다. 용을 상징하는 줄을 당기는 것은 기후를 조절하여 풍년이 들도록 하는 일을 맡은 용신이 게으름을 피우거나, 낮잠을 자지 않도록 자극하여 제대로 역할을 해 줄 것을 기원하는 뜻을 내포하고 있다. 암줄과 수줄을 결합하는 것은 용신의 성적 결합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만물은 음양이 조화를 이룰 때 결실을 맺고, 평안과 풍요를 누릴 수 있다는 사고를 반영한 것이다. 줄다리기의 줄은 용신을 상징하는 것이기에 신성하게 여겼다. 그래서 줄을 뛰어 넘으면 아이를 못 가진 사람이 임신하게 되는 등 좋은 일이 생긴다고 믿었다. 줄다리기가 끝난 뒤에는 줄을 잘라다가 논에 뿌리며 농사가 잘 되게 해 달라고 빌거나, 집에 간직하고 소원을 빈다고 한다. 박물관에서 만난 기지시줄다리기축제위원회 위원장은 자제가 몇 년 전에 줄을 잘라다가 집에 보관하였는데, 그 뒤로 하는 일이 잘 되었다고 한다.

  기지시줄다리기는 단절의 위기도 있었다. 그런데 1970년에 대동한약을 운영하던 한의사가 기지시줄다리기의 지속을 위해 애써서 지금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 박물관에서 만난 축제위원회위원장과 보존회원들은 기지시줄다리기에 대한 자부심과 애정을 바탕으로, 줄다리기의 대중화와 세계화를 위해 힘쓰고 있다고 한다. 이분들의 애정과 열정이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어 튼실한 열매를 맺기 바란다. 줄다리기의 자료 수집과 보존, 전승과 전파, 연구에 구심점이 될 기지시줄다리기박물관이 줄다리기박물관으로는 처음으로 이곳에 설립된 것은 참으로 뜻깊은 일이다. 이곳에 박물관을 개관하였다는 소식을 듣고서도 찾지 못하여 아쉬웠던 마음을 뒤늦게나마 풀 수 있도록 초청해 준 최 교수, 동행한 김 교수 내외와 아내에게 감사한다.(2018. 4.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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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며칠 전 나와 아내는 김 교수 부부와 함께 문학관장으로 일하고 있는 제자 교수의 초청을 받고 충남 당진에 갔다. 나는 당진에 간 김에 전에 맛본 적이 있는 면천 두견주에 관해 더 알고 싶어서 면천에 갔다. 면소재지에서 들른 식당 아주머니께 두견주에 관해 물으니, 면천두견주보존회관에 가서 알아보는 것이 좋겠다고 하였다. 그래서 두견주보존회관에 가니, 아주머니 한 분이 진달래꽃의 꽃잎과 꽃술을 분리하고 있었다. 꽃술에는 독이 있어 이를 제거한다고 하였다. 잠시 뒤에 출근한 면천두견주보존회원 한 분이 친절하게 맞으며 두견주를 시음(試飮)해 보라고 하였다. 나는 두견주를 맛보며 면천두견주에 관한 여러 이야기를 들었다.

  면천두견주는 밑술을 만들고 덧술과 혼합하여 11주의 숙성 기간을 거쳐 발효시켜 담그는 술이다. 밑술을 빚는 날로부터 발효와 숙성에 이어 침전(沈澱)과 저장에 이르기까지 100일이 걸린다. 진달래꽃과 찹쌀을 섞어 만들어 향기가 부드럽고, 감칠맛이 난다. 끈적거릴 정도의 단맛이 있고, 진달래꽃의 빛깔이 그대로 술에 녹아들어 진한 담황색을 띠며, 독특한 향취를 간직하고 있다. 진해(鎭咳, 기침을 그치게 하는 일) 작용과 신경통, 부인냉증, 류마치즘 등의 성인병 예방에 효과가 있다고 한다. 이런 효과는 진달래꽃의 아지라인성분에 의한 것이라 한다. , 에탄올을 중심으로 유기산(有機酸), 각종 비타민, 미네랄 등의 여러 영양소가 함유되어 있어 혈액순환촉진과 피로회복에도 특별한 효과가 있다고 한다. 그래서 오래 전부터 민간에서 치료약으로 쓰이기도 하였다. 두견주는 찹쌀과 누룩에 진달래꽃을 가미하여 빚는 발효주이므로, 장기 보존이 어렵다. 그래서 빚은 뒤 반드시 냉장보관을 해야 하며, 일주일 이내에 마셔야 참맛을 느낄 수 있다고 한다.

  술은 각 지방에서 그 지역의 특성에 맞는 방식으로 빚어 맛과 향이 다르다. 이를 가려 각 시·도에서는 그 지방의 특성을 드러내는 전통민속주를 지정하였다. 시·도가 지정한 전통민속주로는 서울삼해주, 한산소곡주, 김제송순주, 전주이강주, 진도홍주, 안동소주, 제주오메기술 등 많이 있다. 정부는 그 중에서 전통과 특성이 뚜렷한 술 세 가지를 골라 국가지정 전통민속주로 지정하였다. 면천두견주는 1986년에 국가문화재지정 전통민속주 제86-나호로 지정되었다. 그래서 경주법주, 서울문배주와 함께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세 가지 전통술의 하나가 되었다.

  면천 지방에서는 약 1,100년 전부터 두견주를 빚어왔다고 한다. 그런데 일제강점기와 1963년 정부의 양곡주 제조금지령으로 인해 한때 중단되었다. 1986년 정부의 민속주 개발계획에 따라, 4대에 걸쳐 그 기능을 계승하여 두견주를 빚어 오던 박승규(朴昇逵) 씨를 중요무형문화재 기능보유자로 지정하면서 재생산되었다. 2001년 박승규 씨가 세상을 떠나자 또다시 생산이 중단되었다. 그러다가 2003년 당진시가 면천두견주 재생산 프로젝트를 진행하여 20079월부터 다시 생산되기 시작했다. 지금은 면천두견주보존회가 두견주 생산과 관리 및 판매를 하고 있다.

  두견주는 중국 당나라 시인 이백(李白)과 두보(杜甫)도 즐겨 마셨다는 고사가 전해온다. 두견주에 관한 기록은 홍만선(洪萬選, 1674~1720)산림경제(山林經濟), 서유구(徐有榘, 1764~1845)임원경제지(林園經濟志), 빙허각(憑虛閣) 이 씨(1759~1824)규합총서(閨閤叢書), 작자가 알려지지 않은 조선 말기의 요리책 시의전서(是議)에 기록되어 있다. 조선 말기의 문신 김윤식(金允植, 1835~1922)의 시문집인 <운양집(雲養集)>에는 면천두견주가 고려 개국공신인 태사(太師) 복지겸(卜智謙)이 이름 모를 병으로 면천에 와서 휴양할 때 빚어졌다고 하였다. 복지겸이 병이 깊어 오랜 동안 자리에 누워 있게 되자 그의 딸 영랑이 가까이에 있는 아미산(峨眉山)에 가서 백일기도를 드렸다. 산기도가 끝날 무렵에 산신령이 영랑의 꿈에 나타나 “‘아미산의 진달래꽃잎을 따다가 안샘의 물로 술을 빚어 100이 지난 뒤에 먹고, 은행나무 두 그루를 심어놓고 정성을 드리면 아버지의 병이 나을 것이라고 하였다. 그래서 그 말대로 하였더니, 아버지의 병이 나았다고 한다. 그 때부터 진달래꽃잎으로 술을 빚기 시작한 것이 오늘의 면천두견주가 되었다고 한다. 이에 따르면 면천두견주는 고려 태사 복지겸 딸의 효성에서 유래된 것이다.

  나는 면천두견주 전설의 주인공인 복지겸과 증거물의 현장을 찾아가 보고 싶었다. 그래서 면천두견주보존회원에게 들은 대로 전 면천초등학교 앞으로 갔다. 학교가 이전하여 지금은 비어 있는 전 면천초등학교 교정에 들어서니, 복지겸의 딸이 심었다는 은행나무 두 그루가 서 있다. 천연기념물 제551호로 지정하여 보호하고 있는 이 은행나무의 나이는 1,100년쯤 된다고 한다. 나는 그 은행나무 앞에 서서 이 은행나무를 심어 놓고, 그 앞에서 아버지의 병 낫기를 간절히 기도하던 영랑 소저의 모습을 상상해 보았다.

  넓은 운동장 동편을 보니, 학교 울타리 밖에 영랑효공원이 있었다. 공원 안쪽에 복지겸의 딸이 떠다가 술을 빚었다는 안샘이 있다. 안샘은 아미산(해발 349.5m) 줄기를 따라 해발 225m의 몽산이 이어지고, 그 아래로 펼쳐지는 들의 시작 부분에 자리하고 있다. 안샘은 아무리 심한 가뭄에도 마르지 않고, 섭씨 14~15도의 잔잔한 물이 흐르며, 물맛이 좋았다고 한다. 두견주를 빚는 데에 알맞은 샘물이었던 모양이다. 이 샘은 원래 노천에 있었을 터인데, 지금은 전각을 지어 보호하고 있다. 이 이야기는 효는 만물을 감동하게 한다는 한국인의 의식을 바탕으로 꾸며진 이야기이다. 면천두견주 이야기의 증거물인 은행나무안샘을 한곳에서 볼 수 있어서 참 좋았다.

  차를 타고 서산 쪽으로 조금 가다 보니, ‘고려 개국공신 태사 복지겸 사당과 묘안내판이 서 있었다. 가까이 가서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복지겸의 사당과 묘를 살펴보았다. 사당에는 복 태사의 영정이 걸려 있다. 묘로 올라가 보니, 커다란 봉분 앞 중앙에 상석(床石)을 놓고, 문인석(文人石)과 산양(山羊石), 그리고 망주석(望柱石) 좌우에 1개씩 세워놓았다. 그 앞에는 장명등(長明燈)이 서 있다.

  서산 쪽으로 2km쯤 더 가니, ‘면천진달래공원이 있었다. 면에서 계획하여 아름답게 조성한 공원으로, 진달래꽃이 곱게 피어 있고, 정상에는 정자가 있다. 산에는 진달래가 듬성듬성 있는 곳이 많고, 진달래나무의 크기가 그리 크지 않은 것으로 보아 공원을 조성한 지 얼마 되지 않는 것 같았다. 복지겸의 딸이 100일기도를 하고, 진달래꽃을 따라가 술을 빚었다는 아미산에 가보고 싶었으나, 시간이 맞지 않아 발길을 돌렸다.

  당진 면천은 고려 태조 왕건이 건국에 공이 큰 복지겸에게 하사한 땅이다. 면천 복씨의 시조인 복지겸의 출생지인 이곳은 지금은 당진시에 속한 일개 면이지만, 당시엔 혜성(槥城)이라는 큰 고을이었다. 조선조에서도 당진현()’보다 격이 높은 면천군()’이었다. 조선 정조 때에는 연암(燕巖) 박지원(朴趾源)1797년부터 1800년까지 4년 동안 면천군수로 부임하여 백성을 다스린 곳이기도 하다. 이렇게 유서 깊은 곳에서 1,100여 년 전부터 빚어온 두견주가 2018427일에 열릴 남북정상회담 만찬의 건배주로 선정되었다는 것은 참으로 뜻깊은 일이다. 후삼국을 통일하여 통일국가를 건설하는 데에 큰 공을 세운 복지겸에서 유래된 면천두견주를 마시며 남과 북이 하나가 됨을 자축하는 날이 속히 왔으면 좋겠다. (2018. 4.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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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즈음 나는 집안일을 도맡아 하고 있다. ‘집안일은 살림을 꾸려 나가면서 하여야 하는 여러 가지 일로, 밥하기빨래청소를 비롯하여 크고 작은 일들을 말한다. 다른 일은 하지 않고 집안일을 도맡아 하는 사람을 흔히 전업주부라고 한다. 이 말을 받아들여 사용한다면내가 전업주부가 된 것이다. 내가 전업주부가 된 데에는 아내의 시력(視力)에 문제가 생겨서이다.

   지난 125일의 일이다. 아내는 친구들과 만나 무슨 강의를 들으러 간다면서 일찍 집을 나섰고, 나는 연구실로 나갔다. 오후에 ㄱ교수 내외와 만나기로 한 약속을 지키기 위해 연구실에 온 아내는 뜻밖의 말을 하였다. 오전에 강의를 듣는 중에 속이 거북하고, 강사의 얼굴이 둘로 보이더란다. 그래서 점심도 안 먹고 전에 다니던 내과의원에 가니, 내과의사는 소화제 이틀 분을 처방해 주면서 이 약을 먹고 낫지 않으면 안과에 가서 진료를 받으라.”고 하더란다. 아내는 내과의원에서 준 약을 먹고 속이 편안해진 것 같다고 하였다. 그래서 아내와 나는 추운 날씨에 찬바람을 쐬고 돌아다녀서 아침 먹은 게 탈이 났었나 보다.”고 하면서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ㄱ교수 내외와 담소하다가 함께 저녁식사를 하고 집으로 왔다.

   이튿날인 126(금요일) 오전 11시에 교회에 가서 은빛섬김예배 겸 연합속회예배를 드렸다. 돌아오는 차안에서 아내는 예배 끝날 무렵부터 물건이 둘로 보이는 현상이 다시 나타난다고 하였다. 이 말을 들은 나는 소화기에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고, 안과에 가보라고 하였다는 내과 의사의 말이 떠올랐다. 그래서 차를 돌려 미아리에 있는 ㅎ안과에 갔다. 안과에서는 여러 가지 검사를 한 뒤에 안과진료에는 별 문제가 없다면서 먼저 큰 병원 신경과, 그 다음에 신경안과에 가보라고 하였다. 모든 병은 초기에 진료를 받아야 하는데, 진료가 없는 주말이 다가오니, 걱정스럽고 불안하였다. 그래서 큰 병원에 서둘러 진료 예약을 하였다.

  주말을 그대로 보내고, 129(월요일)에 어렵게 예약한 강북삼성병원 신경과에 가서 ㅁ교수의 진찰을 받았다. ㅁ교수는 아내의 병은 복시(複視)’인데, 여러 가지 검사를 해 봐야 그 원인을 알 수 있겠다면서 입원을 하는 것이 좋겠다고 하였다. 그날로 입원하여 3일 동안 X-Ray 촬영혈액검사MRI, MRA,척수검사를 받고, 안과에서 하는 여러 가지 검사를 받았다. 검사가 끝난 뒤에 ㅁ교수는 뇌졸중이나 순환기에는 문제가 없다면서, 안구를 움직이는 여섯 개의 근육 중 하나가 마비되었거나 시신경(視神經)의 일부에 염증이 생긴 것 같다고 하였다. 아내는 의사에게 하나인 남편이 둘로 보이고, 두 아들이 넷으로 보이니, 빨리 낫게 해 달라고 하였다. ㅁ교수는 입원한 상태에서 5일간 주사 치료를 하고, 그 뒤에 약물 치료를 해야 한다면서 말했다. “이 병은 올 때는 급하게 왔으나, 갈 때는 천천히 떠나는 병이니 조급하게 마음먹지 마세요. 빠르면 3개월, 늦으면 6개월 정도 되어야 회복될 것이라고 하였다. 병원에 입원해 있는 동안 아내는 앞을 볼 수 없으니, 모든 것을 옆에서 보살펴주어야 했다. 그래서 나와 아들 둘이 번갈아 아내 옆에서 자면서 간호하였다.

  아내는 25일에 8일간의 병원 생활을 마치고 퇴원하였다. 그러나 두 눈을 다 뜨면 사물이 둘로 보이므로, 어지러워서 마음대로 움직일 수가 없다. 음식을 먹거나 움직일 때에는 안대나 거즈로 한쪽 눈을 가려야 한다. 많이 움직일 때에는 옆에서 부축해 주어야 한다. 그런데 한쪽 눈을 가리면 다른 눈의 피로가 심하므로, 긴 시간 안대를 하고 있을 수도 없다. 그러니 집에 온 그 시간부터 집안일은 모두 내 몫이 되었다. 세 끼 식사 준비, 장보기, 청소, 세탁, 쓰레기 버리기 등을 모두 내가 해야 한다. 그런데 집안일을 해본 적이 없는 나는 할 줄 아는 일이 하나도 없다. 그래서 일일이 아내에게 물으며 식사를 준비를 하고, 세탁기를 돌리고, 마트에 가서 식품을 사온다. 반찬은 며느리가 만들어다 준 것과 사다 준 것, 여동생과 처제아내의 친구가 갖다 준 것을 고마운 마음으로 먹는다. 집안일을 도맡아 하는 날이 늘어감에 따라 식사 준비, 사용한 그릇을 씻어 말리는 일, 행주를 빨아 햇볕에 말리는 일, 가스레인지압력밥솥프라이팬 활용 방법 등에 어느 정도 익숙해 졌다. 빨래를 할 때 세탁물을 세탁주머니에 넣어 세탁기에 넣기, 세제 넣기, 헹굼 횟수와 세탁 시간 조절 등도 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아침을 먹은 뒤에는 점심에 무엇을 해서 먹을까를 생각하고, 점심을 먹은 뒤에는 저녁에 무엇을 해서 먹어야 하나를 생각하며 답을 찾는 일도 낯설지 않게 되었다. 아내는 내가 생각보다 집안일을 잘한다면서 전업주부 자격증을 주어야겠다고 농담을 한다.

   집안일을 도맡아 한 지도 어언 두 달이 지났다. 그동안 나는 외출을 자제하고 24시간을 아내와 함께 지내며 시중을 들고 있다. 집안일을 함은 물론, 아내의 전화기로 오는 카카오톡이나 문자메시지와 우편물을 읽어 준다. 매일 아내를 승용차에 태우고 한의원에 가서 침을 맞게 한다. 그리고 강북삼성병원 신경과와 안과에 가서 검사를 받고, 약 처방을 받아 온다. 또 전에 한 갑상선 결절 검사 결과를 보러 다른 병원에도 다녀왔다. 이렇게 지내다 보니, 내 나름의 시간 활용 계획은 언감생심(焉敢生心) 할 수 없다. 그래서 글 쓰는 일과 <한국구전설화집-서울편> 원고 정리하던 일을 멈추었고, 독서 계획도 보류하였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잠깐씩 성경을 읽고, 신문 제목을 살피는 일뿐이다. 아내는 내가 자기 시중을 들고, 집안일을 하며 운전기사 역할을 하는 것을 보며 고맙고 미안하다고 한다. 내가 이 말을 받아 당신은 이 일을 52년이나 하였는데, 나는 이제 겨우 두 달 하였을 뿐이야. 미안해 할 것 없어.” 하니, 아내는 그래도 미안하다고 한다.

   나는 집안일을 도맡아 하면서 이 일이 매우 힘들고 어려운 일이라는 것을 새삼 느꼈다. 아내가 이렇게 힘들고 어려운 일을 군소리 없이 도맡아 해 준 덕에 나는 연구하고 가르치며, 글 쓰는 일에만 전념할 수 있었다. 그동안의 아내의 노고에 감사한다. 아내의 발병은 나에게 이런 깨달음을 주는 계기가 되었다. 요즈음 하루하루의 일이 힘들고 어려운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동안 아내의 노고에 조금이나마 보답한다는 생각에서 즐거운 마음으로 집안일을 하며 아내의 시중을 들고 있다. 아내가 쾌차한 뒤에도 요즈음에 익힌 대로 집안일을 하여 아내를 돕고, 삼식이(하루 세끼를 집에서 먹는 사람)는 하지 말아야겠다. 그래서 아내가 가끔씩은 가사노동에서 해방되는 기쁨을 맛볼 수 있게 해 주어야겠다. 아내의 복시 현상이 없어져서 마음대로 활동하고, 책을 읽을 수 있는 날이 속히 오기를 기도한다. <2018. 3.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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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해 12월에 우리 부부는 교수 내외와 함께 전북 정읍에 사는 교장 댁에 갔다. 세 부부가 정읍에서 만나 교장의 차를 타고 남쪽 지방을 여행하기로, 한 달 전에 한 약속을 이행하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사정이 생겨 남쪽으로 떠나지 못하고, 교장 댁에서 묵으면서 정읍 지역을 여행하였다.

 

   ㄱ 교장이 운전하는 차를 타고 전북 고창군 흥덕면 소재지를 지나게 되었다. 그 때 교수는 아끼는 제자가 담임목사로 시무하고 있는 교회가 이 근처에 있다면서 전화를 하였다. 교수의 전화를 받은 목사가 바로 차를 몰고 달려왔다. 우리는 반갑게 인사를 나눈 뒤에 목사가 담임한 교회의 신축공사장에 갔다. 외부 공사를 마치고 내부 공사가 진행 중인데, 건물의 규모와 방 배정을 볼 때 지역 실정에 맞고, 앞을 내다보는 설계여서 아주 좋았다. 우리는 본당 자리에 둘러서서 공사가 순조롭게 진행되고, 공사비 때문에 어려움을 겪는 일이 없게 해 달라고 간절히 기도하였다. 헤어질 때 교장은 목사를 저녁식사에 초대하였다.

 

   ㅅ 목사는 교수가 재직한 대학교 재학 시절에 나이 많은 학생으로, 학업에 매우 열중하였고, 기숙사 학생 대표를 맡아 모든 일에 솔선수범(率先垂範)하였다. 그래서 교수를 비롯한 몇몇 교수와 직원으로부터 사랑을 받았고, 학생들로부터는 큰형님으로 존경을 받았다고 한다. 나는 19941학기에 그 대학에 강사로 가서 선교학과와 신학과 학생들에게 한국의 전통문화를 강의한 적이 있다. 그는 그 때 내 강의를 들은 학생인데, 과대표로 강의 분위기 조성에 앞장섰던 노학생(老學生)이어서 기억에 남는 학생이었다.

 

   그 해 여름방학이 끝날 무렵에 교수는 나에게 잘 포장된 선물을 건넸다. 웬 선물이냐고 물으니, 선교학과의 노학생이 여름방학에 학교에서 보내는 선교여행단의 일원으로 필리핀에 다녀오면서, 나를 주려고 사온 선물이라고 하였다. 큰 합죽선(合竹扇)인데, 필리핀 특유의 그림이 그려 있어 멋스러웠다. 나는 강사로 나가 강의한 대학의 학생한테 선물을 받은 적이 없었던 터라 받기를 주저하였다. 그러나 교수가 그 학생이 나에게 감사하는 마음으로 주는 것이니 받으라고 권하여, 고마운 마음으로 받았다. 그 뒤에 나는 가끔 교수에게 그 학생의 안부를 물었고, 목회를 잘 하고 있다는 말을 들었다.

 

   오후 5시가 되자, 목사 내외가 교장 댁으로 왔다. 우리는 반갑게 맞이하여 담소하였다. 그 때 나는 목사에게 담임하고 있는 교회의 교회 형편을 묻고, 목회에 성공하기까지 겪은 일들을 이야기해 달라고 하였다. 그는 그 동안 지내온 일들은 간략하게 이야기하였다.

 

   그는 군산에서 자랐는데, 어렵사리 중학교를 졸업하였으나, 가정 형편상 고등학교에 진학할 수 없었다. 그래서 생활전선에 뛰어들어 여러 가지 물건을 가지고 다니며 팔아 돈을 벌어 어머니를 봉양하였다. 나이가 좀 든 뒤에는 전기와 설비 기술을 익혀 건축현장을 누비며 열심히 일하였다. 그는 20세에 아는 사람의 전도로 교회에 다니기 시작하였는데, 그 때부터 새벽기도를 하였다. 어느 날, 그는 기도 중에 너는 공부를 더 하여라.” 하는 음성을 들었다. 그러나 그는 내 형편에 어떻게 공부를 하나?’ 하는 마음이 들어 그 말씀을 무시하고, 먹고 살기 위해 일을 하였다. 군에서 제대한 뒤에는 서울에 있는 작은 회사에서 일하며 교회를 다녔다. 그 때에도 새벽기도회에는 빠지지 않았다고 한다. 심신이 몹시 피곤하여 병원에 가서 진찰을 받으니, 폐결핵이라고 하였다. 그는 외로운 객지 생활에, 당시에 불치병이라고 여기는 폐결핵에 걸렸다는 말을 듣고, 세상이 무너지는 듯한 절망감에 빠졌다. 그는 약을 먹으며 기도하는 길밖에는 다른 방법이 없음을 깨닫고, 더욱 열심히 기도하였다. 그 무렵, 그가 다니는 교회의 처녀 전도사가 그에게 사랑의 손길을 내밀었다. 그는 처음에는 중졸의 학력을 가진 사람이 대학을 졸업한 전도사와 결혼할 수 없다는 생각에 망설였다. 그러나 서로의 진심이 통하여 어른들의 허락을 얻어 29세에 결혼하였다. 신혼에 투병하는 일이 쉽지 않았으나, 굳은 의지와 믿음으로 이겨냈다.

 

   어느 날, 그는 기도하는 중에 왜 공부하라는 내 말을 따르지 않느냐? 더 공부해라!” 하는 음성을 들었다. 그는 그 말씀을 따르기로 하고, 한국 나이로 37세가 되던 해 1월에 노량진에 있는 고입검정고시학원에 등록하였다. 20여 년 만에 다시 공부를 시작하고 보니, 전에 배운 것은 다 잊어버렸고, 정신 집중도 잘 안 되어 어려움이 많았다. 공부를 시작하고 두 달이 지난 3월에 고입검정시험이 있다고 하였다. 그는 큰 기대를 하지 않고 응시하였는데, 5월에 합격 통지서를 받았다. 그는 합격의 기쁨을 접어두고, 8월에 있을 대입검정고시를 준비하였다. 주위 사람들은 너무 욕심을 부린다며 만류하였지만, 그는 대입검정고시 준비에 매진(邁進)하여 합격하였다. 그래서 한국나이로 38세에 대학교 선교학과에 입학하였다. 늦깎이 대학생이 된 그는 한시 반때도 놀지 않고 공부에 열중하여 장학금을 받으며 학부 과정을 마치고, 대학원에 진학하였다. 대학원을 마치고 전도사로 일한 뒤에 목사 안수를 받았다.

 

   그는 지금으로부터 14년 전에 흥덕에 있는 교회에 담임목사로 부임하였다. 그 때 교인은 13명이었고, 지역 주민은 대부분 노인어른들이었다. 그는 교회차로 동네 어른을 태워다드리며 사는 형편과 어려움을 겪는 일이 있는가를 묻곤 하였다. 그가 만난 어른 중에는 수도가 잘 나오지 않아 불편을 겪고 있기도 하고, 전등TV냉장고세탁기 등의 가전제품이 고장 나서 어려움을 겪고 있는 분이 계셨다. 그는 이런 말을 듣는 즉시 달려가서, 청년 시절에 익힌 설비와 전기 기술을 발휘하여 무료로 수리해 드렸다. 이를 본 노인 어른들은 크게 감사하며 기뻐하였고, 다른 사람에게 칭찬의 말을 하였다. 이런 일이 알려지자 이웃동네 어른들도 그에게 어려움을 호소하며 그를 불렀다. 그는 동네 어른들과 친해지면서 조심스럽게 전도하였다. 그러는 동안에 그 동네는 물론 이웃동네의 어른들이 한 분씩 교회에 나오게 되었다. 그리고 다른 지역에 사는 그 분들의 자녀가 교회에 나오게 되었다. 그래서 지금은 교인이 130여 명이 되었다고 한다. 교인이 늘고 보니, 교회를 신축하는 것이 좋겠다고 하여 교인들과 뜻을 모아 신축공사를 시작하였다고 한다.

 

   그가 시골에서 목회에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그의 투철한 신앙심에 여러 가지 장사 경험, 전기와 설비의 기술, 늦깎이 학생으로 열심히 공부해 쌓은 실력 등이 함께 어우러져 꽃을 피운 덕이라 생각한다. 나는 목사의 간증을 들으며, 하나님께서는 그를 시골교회 목회자로 키우기 위해 오래 전부터 준비하셨다는 생각과 함께 구약 성경에 나오는 요셉을 떠올렸다. 형들의 미움을 사서 미디안 상인들에게 팔려간 요셉은 이집트 왕의 경호대장 보디발의 종이 되었다. 요셉은 보디발의 집에서 살림을 도맡아하고, 모함을 당하여 감옥살이를 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경험은 요셉이 이집트의 총리가 되어 7년이나 계속되는 흉년에서 이집트 사람과 자기 가족을 살릴 역량을 갖추게 하셨다. 하나님은 목사로 하여금 어린 시절에 장사를 하게 하여 남다른 친화력(親和力)과 수완을 기르게 하시고, 전기와 설비 기술을 익히게 하여 노인들이 많은 시골교회 목회를 위한 자질을 갖추게 하셨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목사를 시골교회 목회에 적합한 능력과 자질을 갖춘 목회자로 키우려는 장기 계획에 의한 것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오늘은 ㅅ 목사 교회가 입당예배를 드리는 날이다. 입당예배 시간에는 전 교인과 원근각지에서 오신 많은 분들이 입당을 축하하며 감사하는 예배를 드릴 것이다. 나는 그 교회에 가서 입당예배에 참석할 수 없어 교수 편에 입당축하헌금을 조금 보냈다. 그 교회가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 안에서 신축에 따른 후유증이나 어려움 없이 더욱 부흥하여 머지않은 날에 헌당예배를 드릴 수 있게 되기를 기도한다. (2018. 2.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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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책은 우리의 옛이야기를 분석하여, 우리 조상들이 지니고 살아온 행복한 삶에 대한 열망과 의지, 용기와 노력 등을 살펴보고, 이를 바탕으로 행복한 삶을 살기 위해 가져야 할 지혜와 마음가짐을 찾아 정리한 것이다. 

 

   사람은 행복을 추구하는 존재이기에, 스스로 행복을 얻기 위해 노력한다. 그러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여러 가지 고난을 극복하고 행복을 얻어 잘 사는 사람의 이야기에 관심을 갖고, 재미를 느끼며 이야기하게 된다. 그래서 우리의 조상들은 고난과 불행을 극복하고 행복을 쟁취하는 사람의 이야기를 많이 꾸며냈다. 이들 이야기의 주인공들은 각양각색의 인물들인데, 각자가 처한 처지에서 자기 나름의 지혜와 용기를 발휘하여 고난을 극복하고, 원하는 것을 얻어 행복하게 산다. 옛사람들은 이런 이야기를 즐겨 듣고 이야기하면서, 이를 통해 불행을 극복하고 행복을 얻는 지혜와 용기를 배우고, 때로는 대리만족을 얻기도 하였을 것이다.

 

   옛이야기의 주인공을 보면, 가난한 사람은 재물을 얻어잘 살고, 배우자가 없는 사람은 배우자를 만나 혼인하여잘 산다. 자녀가 없어 애를 태우던 사람은 나중에 자녀를 얻어기르며 행복을 누린다. 부모나 자녀 또는 배우자가 건강하지 못해 힘들어하던 사람은 온갖 정성과 노력을 기울인 끝에 건강을 회복하여 수명대로살게 한다. 벼슬이나 명성을 구하는 사람은 지위와 명예를 얻어 행복하게 산다. 부모형제나 친척 또는 친구와 문제가 있어 속을 태우던 사람은 원만한 인간관계를 회복하여 즐겁게 산다. 이처럼 옛날이야기의 주인공들이 추구(追求)하여 얻고자 하는 삶의 조건은 그가 처한 상황에 따라 다르나, ‘재물, 배우자, 자녀, 건강과 수명, 지위와 명예, 원만한 인간관계로 요약할 수 있다. 이 여섯 가지는 우리 조상들이 용기와 지혜를 발휘하고, 정성과 노력을 기울여서 얻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행복한 삶의 조건이다. 이는 현대인이 추구하는 행복한 삶의 조건과 다를 바 없다.

 

   이 책에서는 옛이야기의 주인공이 행복한 삶을 얻기 위해 겪는 시련과 고통, 굳은 의지와 노력, 그를 돕는 사람이나 신이한 존재의 따뜻한 도움의 손길 등 다양한 모습을, 위에서 말한 여섯 가지 행복의 조건별로 나누어 살펴보았다. 160여 편의 옛이야기를 한 편씩 소개하면서 그 이야기의 주제와 특징, 재미있는 이야기 속에 담겨 있는 교훈적 의미를 분석하였다. 이 책은 우리 조상들이 지녔던 행복관(幸福觀)과 바른 삶의 자세를 알게 해 주고, 현대를 사는 우리가 행복한 삶의 길을 찾는 데에 큰 도움을 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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