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 나와 아내는 김 교수 부부와 함께 문학관장으로 일하고 있는 제자 교수의 초청을 받고 충남 당진에 갔다. 나는 당진에 간 김에 전에 맛본 적이 있는 면천 두견주에 관해 더 알고 싶어서 면천에 갔다. 면소재지에서 들른 식당 아주머니께 두견주에 관해 물으니, 면천두견주보존회관에 가서 알아보는 것이 좋겠다고 하였다. 그래서 두견주보존회관에 가니, 아주머니 한 분이 진달래꽃의 꽃잎과 꽃술을 분리하고 있었다. 꽃술에는 독이 있어 이를 제거한다고 하였다. 잠시 뒤에 출근한 면천두견주보존회원 한 분이 친절하게 맞으며 두견주를 시음(試飮)해 보라고 하였다. 나는 두견주를 맛보며 면천두견주에 관한 여러 이야기를 들었다.

  면천두견주는 밑술을 만들고 덧술과 혼합하여 11주의 숙성 기간을 거쳐 발효시켜 담그는 술이다. 밑술을 빚는 날로부터 발효와 숙성에 이어 침전(沈澱)과 저장에 이르기까지 100일이 걸린다. 진달래꽃과 찹쌀을 섞어 만들어 향기가 부드럽고, 감칠맛이 난다. 끈적거릴 정도의 단맛이 있고, 진달래꽃의 빛깔이 그대로 술에 녹아들어 진한 담황색을 띠며, 독특한 향취를 간직하고 있다. 진해(鎭咳, 기침을 그치게 하는 일) 작용과 신경통, 부인냉증, 류마치즘 등의 성인병 예방에 효과가 있다고 한다. 이런 효과는 진달래꽃의 아지라인성분에 의한 것이라 한다. , 에탄올을 중심으로 유기산(有機酸), 각종 비타민, 미네랄 등의 여러 영양소가 함유되어 있어 혈액순환촉진과 피로회복에도 특별한 효과가 있다고 한다. 그래서 오래 전부터 민간에서 치료약으로 쓰이기도 하였다. 두견주는 찹쌀과 누룩에 진달래꽃을 가미하여 빚는 발효주이므로, 장기 보존이 어렵다. 그래서 빚은 뒤 반드시 냉장보관을 해야 하며, 일주일 이내에 마셔야 참맛을 느낄 수 있다고 한다.

  술은 각 지방에서 그 지역의 특성에 맞는 방식으로 빚어 맛과 향이 다르다. 이를 가려 각 시·도에서는 그 지방의 특성을 드러내는 전통민속주를 지정하였다. 시·도가 지정한 전통민속주로는 서울삼해주, 한산소곡주, 김제송순주, 전주이강주, 진도홍주, 안동소주, 제주오메기술 등 많이 있다. 정부는 그 중에서 전통과 특성이 뚜렷한 술 세 가지를 골라 국가지정 전통민속주로 지정하였다. 면천두견주는 1986년에 국가문화재지정 전통민속주 제86-나호로 지정되었다. 그래서 경주법주, 서울문배주와 함께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세 가지 전통술의 하나가 되었다.

  면천 지방에서는 약 1,100년 전부터 두견주를 빚어왔다고 한다. 그런데 일제강점기와 1963년 정부의 양곡주 제조금지령으로 인해 한때 중단되었다. 1986년 정부의 민속주 개발계획에 따라, 4대에 걸쳐 그 기능을 계승하여 두견주를 빚어 오던 박승규(朴昇逵) 씨를 중요무형문화재 기능보유자로 지정하면서 재생산되었다. 2001년 박승규 씨가 세상을 떠나자 또다시 생산이 중단되었다. 그러다가 2003년 당진시가 면천두견주 재생산 프로젝트를 진행하여 20079월부터 다시 생산되기 시작했다. 지금은 면천두견주보존회가 두견주 생산과 관리 및 판매를 하고 있다.

  두견주는 중국 당나라 시인 이백(李白)과 두보(杜甫)도 즐겨 마셨다는 고사가 전해온다. 두견주에 관한 기록은 홍만선(洪萬選, 1674~1720)산림경제(山林經濟), 서유구(徐有榘, 1764~1845)임원경제지(林園經濟志), 빙허각(憑虛閣) 이 씨(1759~1824)규합총서(閨閤叢書), 작자가 알려지지 않은 조선 말기의 요리책 시의전서(是議)에 기록되어 있다. 조선 말기의 문신 김윤식(金允植, 1835~1922)의 시문집인 <운양집(雲養集)>에는 면천두견주가 고려 개국공신인 태사(太師) 복지겸(卜智謙)이 이름 모를 병으로 면천에 와서 휴양할 때 빚어졌다고 하였다. 복지겸이 병이 깊어 오랜 동안 자리에 누워 있게 되자 그의 딸 영랑이 가까이에 있는 아미산(峨眉山)에 가서 백일기도를 드렸다. 산기도가 끝날 무렵에 산신령이 영랑의 꿈에 나타나 “‘아미산의 진달래꽃잎을 따다가 안샘의 물로 술을 빚어 100이 지난 뒤에 먹고, 은행나무 두 그루를 심어놓고 정성을 드리면 아버지의 병이 나을 것이라고 하였다. 그래서 그 말대로 하였더니, 아버지의 병이 나았다고 한다. 그 때부터 진달래꽃잎으로 술을 빚기 시작한 것이 오늘의 면천두견주가 되었다고 한다. 이에 따르면 면천두견주는 고려 태사 복지겸 딸의 효성에서 유래된 것이다.

  나는 면천두견주 전설의 주인공인 복지겸과 증거물의 현장을 찾아가 보고 싶었다. 그래서 면천두견주보존회원에게 들은 대로 전 면천초등학교 앞으로 갔다. 학교가 이전하여 지금은 비어 있는 전 면천초등학교 교정에 들어서니, 복지겸의 딸이 심었다는 은행나무 두 그루가 서 있다. 천연기념물 제551호로 지정하여 보호하고 있는 이 은행나무의 나이는 1,100년쯤 된다고 한다. 나는 그 은행나무 앞에 서서 이 은행나무를 심어 놓고, 그 앞에서 아버지의 병 낫기를 간절히 기도하던 영랑 소저의 모습을 상상해 보았다.

  넓은 운동장 동편을 보니, 학교 울타리 밖에 영랑효공원이 있었다. 공원 안쪽에 복지겸의 딸이 떠다가 술을 빚었다는 안샘이 있다. 안샘은 아미산(해발 349.5m) 줄기를 따라 해발 225m의 몽산이 이어지고, 그 아래로 펼쳐지는 들의 시작 부분에 자리하고 있다. 안샘은 아무리 심한 가뭄에도 마르지 않고, 섭씨 14~15도의 잔잔한 물이 흐르며, 물맛이 좋았다고 한다. 두견주를 빚는 데에 알맞은 샘물이었던 모양이다. 이 샘은 원래 노천에 있었을 터인데, 지금은 전각을 지어 보호하고 있다. 이 이야기는 효는 만물을 감동하게 한다는 한국인의 의식을 바탕으로 꾸며진 이야기이다. 면천두견주 이야기의 증거물인 은행나무안샘을 한곳에서 볼 수 있어서 참 좋았다.

  차를 타고 서산 쪽으로 조금 가다 보니, ‘고려 개국공신 태사 복지겸 사당과 묘안내판이 서 있었다. 가까이 가서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복지겸의 사당과 묘를 살펴보았다. 사당에는 복 태사의 영정이 걸려 있다. 묘로 올라가 보니, 커다란 봉분 앞 중앙에 상석(床石)을 놓고, 문인석(文人石)과 산양(山羊石), 그리고 망주석(望柱石) 좌우에 1개씩 세워놓았다. 그 앞에는 장명등(長明燈)이 서 있다.

  서산 쪽으로 2km쯤 더 가니, ‘면천진달래공원이 있었다. 면에서 계획하여 아름답게 조성한 공원으로, 진달래꽃이 곱게 피어 있고, 정상에는 정자가 있다. 산에는 진달래가 듬성듬성 있는 곳이 많고, 진달래나무의 크기가 그리 크지 않은 것으로 보아 공원을 조성한 지 얼마 되지 않는 것 같았다. 복지겸의 딸이 100일기도를 하고, 진달래꽃을 따라가 술을 빚었다는 아미산에 가보고 싶었으나, 시간이 맞지 않아 발길을 돌렸다.

  당진 면천은 고려 태조 왕건이 건국에 공이 큰 복지겸에게 하사한 땅이다. 면천 복씨의 시조인 복지겸의 출생지인 이곳은 지금은 당진시에 속한 일개 면이지만, 당시엔 혜성(槥城)이라는 큰 고을이었다. 조선조에서도 당진현()’보다 격이 높은 면천군()’이었다. 조선 정조 때에는 연암(燕巖) 박지원(朴趾源)1797년부터 1800년까지 4년 동안 면천군수로 부임하여 백성을 다스린 곳이기도 하다. 이렇게 유서 깊은 곳에서 1,100여 년 전부터 빚어온 두견주가 2018427일에 열릴 남북정상회담 만찬의 건배주로 선정되었다는 것은 참으로 뜻깊은 일이다. 후삼국을 통일하여 통일국가를 건설하는 데에 큰 공을 세운 복지겸에서 유래된 면천두견주를 마시며 남과 북이 하나가 됨을 자축하는 날이 속히 왔으면 좋겠다. (2018. 4. 20)


'자료실 > 산문'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인왕산 숲길  (0) 2018.06.16
기지시줄다리기박물관  (0) 2018.06.02
전업주부 체험  (0) 2018.03.25
하나님의 계획  (0) 2018.02.07
인절미의 유래  (0) 2017.11.28

  요즈음 나는 집안일을 도맡아 하고 있다. ‘집안일은 살림을 꾸려 나가면서 하여야 하는 여러 가지 일로, 밥하기빨래청소를 비롯하여 크고 작은 일들을 말한다. 다른 일은 하지 않고 집안일을 도맡아 하는 사람을 흔히 전업주부라고 한다. 이 말을 받아들여 사용한다면내가 전업주부가 된 것이다. 내가 전업주부가 된 데에는 아내의 시력(視力)에 문제가 생겨서이다.

   지난 125일의 일이다. 아내는 친구들과 만나 무슨 강의를 들으러 간다면서 일찍 집을 나섰고, 나는 연구실로 나갔다. 오후에 ㄱ교수 내외와 만나기로 한 약속을 지키기 위해 연구실에 온 아내는 뜻밖의 말을 하였다. 오전에 강의를 듣는 중에 속이 거북하고, 강사의 얼굴이 둘로 보이더란다. 그래서 점심도 안 먹고 전에 다니던 내과의원에 가니, 내과의사는 소화제 이틀 분을 처방해 주면서 이 약을 먹고 낫지 않으면 안과에 가서 진료를 받으라.”고 하더란다. 아내는 내과의원에서 준 약을 먹고 속이 편안해진 것 같다고 하였다. 그래서 아내와 나는 추운 날씨에 찬바람을 쐬고 돌아다녀서 아침 먹은 게 탈이 났었나 보다.”고 하면서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ㄱ교수 내외와 담소하다가 함께 저녁식사를 하고 집으로 왔다.

   이튿날인 126(금요일) 오전 11시에 교회에 가서 은빛섬김예배 겸 연합속회예배를 드렸다. 돌아오는 차안에서 아내는 예배 끝날 무렵부터 물건이 둘로 보이는 현상이 다시 나타난다고 하였다. 이 말을 들은 나는 소화기에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고, 안과에 가보라고 하였다는 내과 의사의 말이 떠올랐다. 그래서 차를 돌려 미아리에 있는 ㅎ안과에 갔다. 안과에서는 여러 가지 검사를 한 뒤에 안과진료에는 별 문제가 없다면서 먼저 큰 병원 신경과, 그 다음에 신경안과에 가보라고 하였다. 모든 병은 초기에 진료를 받아야 하는데, 진료가 없는 주말이 다가오니, 걱정스럽고 불안하였다. 그래서 큰 병원에 서둘러 진료 예약을 하였다.

  주말을 그대로 보내고, 129(월요일)에 어렵게 예약한 강북삼성병원 신경과에 가서 ㅁ교수의 진찰을 받았다. ㅁ교수는 아내의 병은 복시(複視)’인데, 여러 가지 검사를 해 봐야 그 원인을 알 수 있겠다면서 입원을 하는 것이 좋겠다고 하였다. 그날로 입원하여 3일 동안 X-Ray 촬영혈액검사MRI, MRA,척수검사를 받고, 안과에서 하는 여러 가지 검사를 받았다. 검사가 끝난 뒤에 ㅁ교수는 뇌졸중이나 순환기에는 문제가 없다면서, 안구를 움직이는 여섯 개의 근육 중 하나가 마비되었거나 시신경(視神經)의 일부에 염증이 생긴 것 같다고 하였다. 아내는 의사에게 하나인 남편이 둘로 보이고, 두 아들이 넷으로 보이니, 빨리 낫게 해 달라고 하였다. ㅁ교수는 입원한 상태에서 5일간 주사 치료를 하고, 그 뒤에 약물 치료를 해야 한다면서 말했다. “이 병은 올 때는 급하게 왔으나, 갈 때는 천천히 떠나는 병이니 조급하게 마음먹지 마세요. 빠르면 3개월, 늦으면 6개월 정도 되어야 회복될 것이라고 하였다. 병원에 입원해 있는 동안 아내는 앞을 볼 수 없으니, 모든 것을 옆에서 보살펴주어야 했다. 그래서 나와 아들 둘이 번갈아 아내 옆에서 자면서 간호하였다.

  아내는 25일에 8일간의 병원 생활을 마치고 퇴원하였다. 그러나 두 눈을 다 뜨면 사물이 둘로 보이므로, 어지러워서 마음대로 움직일 수가 없다. 음식을 먹거나 움직일 때에는 안대나 거즈로 한쪽 눈을 가려야 한다. 많이 움직일 때에는 옆에서 부축해 주어야 한다. 그런데 한쪽 눈을 가리면 다른 눈의 피로가 심하므로, 긴 시간 안대를 하고 있을 수도 없다. 그러니 집에 온 그 시간부터 집안일은 모두 내 몫이 되었다. 세 끼 식사 준비, 장보기, 청소, 세탁, 쓰레기 버리기 등을 모두 내가 해야 한다. 그런데 집안일을 해본 적이 없는 나는 할 줄 아는 일이 하나도 없다. 그래서 일일이 아내에게 물으며 식사를 준비를 하고, 세탁기를 돌리고, 마트에 가서 식품을 사온다. 반찬은 며느리가 만들어다 준 것과 사다 준 것, 여동생과 처제아내의 친구가 갖다 준 것을 고마운 마음으로 먹는다. 집안일을 도맡아 하는 날이 늘어감에 따라 식사 준비, 사용한 그릇을 씻어 말리는 일, 행주를 빨아 햇볕에 말리는 일, 가스레인지압력밥솥프라이팬 활용 방법 등에 어느 정도 익숙해 졌다. 빨래를 할 때 세탁물을 세탁주머니에 넣어 세탁기에 넣기, 세제 넣기, 헹굼 횟수와 세탁 시간 조절 등도 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아침을 먹은 뒤에는 점심에 무엇을 해서 먹을까를 생각하고, 점심을 먹은 뒤에는 저녁에 무엇을 해서 먹어야 하나를 생각하며 답을 찾는 일도 낯설지 않게 되었다. 아내는 내가 생각보다 집안일을 잘한다면서 전업주부 자격증을 주어야겠다고 농담을 한다.

   집안일을 도맡아 한 지도 어언 두 달이 지났다. 그동안 나는 외출을 자제하고 24시간을 아내와 함께 지내며 시중을 들고 있다. 집안일을 함은 물론, 아내의 전화기로 오는 카카오톡이나 문자메시지와 우편물을 읽어 준다. 매일 아내를 승용차에 태우고 한의원에 가서 침을 맞게 한다. 그리고 강북삼성병원 신경과와 안과에 가서 검사를 받고, 약 처방을 받아 온다. 또 전에 한 갑상선 결절 검사 결과를 보러 다른 병원에도 다녀왔다. 이렇게 지내다 보니, 내 나름의 시간 활용 계획은 언감생심(焉敢生心) 할 수 없다. 그래서 글 쓰는 일과 <한국구전설화집-서울편> 원고 정리하던 일을 멈추었고, 독서 계획도 보류하였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잠깐씩 성경을 읽고, 신문 제목을 살피는 일뿐이다. 아내는 내가 자기 시중을 들고, 집안일을 하며 운전기사 역할을 하는 것을 보며 고맙고 미안하다고 한다. 내가 이 말을 받아 당신은 이 일을 52년이나 하였는데, 나는 이제 겨우 두 달 하였을 뿐이야. 미안해 할 것 없어.” 하니, 아내는 그래도 미안하다고 한다.

   나는 집안일을 도맡아 하면서 이 일이 매우 힘들고 어려운 일이라는 것을 새삼 느꼈다. 아내가 이렇게 힘들고 어려운 일을 군소리 없이 도맡아 해 준 덕에 나는 연구하고 가르치며, 글 쓰는 일에만 전념할 수 있었다. 그동안의 아내의 노고에 감사한다. 아내의 발병은 나에게 이런 깨달음을 주는 계기가 되었다. 요즈음 하루하루의 일이 힘들고 어려운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동안 아내의 노고에 조금이나마 보답한다는 생각에서 즐거운 마음으로 집안일을 하며 아내의 시중을 들고 있다. 아내가 쾌차한 뒤에도 요즈음에 익힌 대로 집안일을 하여 아내를 돕고, 삼식이(하루 세끼를 집에서 먹는 사람)는 하지 말아야겠다. 그래서 아내가 가끔씩은 가사노동에서 해방되는 기쁨을 맛볼 수 있게 해 주어야겠다. 아내의 복시 현상이 없어져서 마음대로 활동하고, 책을 읽을 수 있는 날이 속히 오기를 기도한다. <2018. 3. 25>

'자료실 > 산문' 카테고리의 다른 글

기지시줄다리기박물관  (0) 2018.06.02
면천두견주  (0) 2018.05.07
하나님의 계획  (0) 2018.02.07
인절미의 유래  (0) 2017.11.28
잘한 일 두 가지  (0) 2017.11.28

   지난 해 12월에 우리 부부는 교수 내외와 함께 전북 정읍에 사는 교장 댁에 갔다. 세 부부가 정읍에서 만나 교장의 차를 타고 남쪽 지방을 여행하기로, 한 달 전에 한 약속을 이행하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사정이 생겨 남쪽으로 떠나지 못하고, 교장 댁에서 묵으면서 정읍 지역을 여행하였다.

 

   ㄱ 교장이 운전하는 차를 타고 전북 고창군 흥덕면 소재지를 지나게 되었다. 그 때 교수는 아끼는 제자가 담임목사로 시무하고 있는 교회가 이 근처에 있다면서 전화를 하였다. 교수의 전화를 받은 목사가 바로 차를 몰고 달려왔다. 우리는 반갑게 인사를 나눈 뒤에 목사가 담임한 교회의 신축공사장에 갔다. 외부 공사를 마치고 내부 공사가 진행 중인데, 건물의 규모와 방 배정을 볼 때 지역 실정에 맞고, 앞을 내다보는 설계여서 아주 좋았다. 우리는 본당 자리에 둘러서서 공사가 순조롭게 진행되고, 공사비 때문에 어려움을 겪는 일이 없게 해 달라고 간절히 기도하였다. 헤어질 때 교장은 목사를 저녁식사에 초대하였다.

 

   ㅅ 목사는 교수가 재직한 대학교 재학 시절에 나이 많은 학생으로, 학업에 매우 열중하였고, 기숙사 학생 대표를 맡아 모든 일에 솔선수범(率先垂範)하였다. 그래서 교수를 비롯한 몇몇 교수와 직원으로부터 사랑을 받았고, 학생들로부터는 큰형님으로 존경을 받았다고 한다. 나는 19941학기에 그 대학에 강사로 가서 선교학과와 신학과 학생들에게 한국의 전통문화를 강의한 적이 있다. 그는 그 때 내 강의를 들은 학생인데, 과대표로 강의 분위기 조성에 앞장섰던 노학생(老學生)이어서 기억에 남는 학생이었다.

 

   그 해 여름방학이 끝날 무렵에 교수는 나에게 잘 포장된 선물을 건넸다. 웬 선물이냐고 물으니, 선교학과의 노학생이 여름방학에 학교에서 보내는 선교여행단의 일원으로 필리핀에 다녀오면서, 나를 주려고 사온 선물이라고 하였다. 큰 합죽선(合竹扇)인데, 필리핀 특유의 그림이 그려 있어 멋스러웠다. 나는 강사로 나가 강의한 대학의 학생한테 선물을 받은 적이 없었던 터라 받기를 주저하였다. 그러나 교수가 그 학생이 나에게 감사하는 마음으로 주는 것이니 받으라고 권하여, 고마운 마음으로 받았다. 그 뒤에 나는 가끔 교수에게 그 학생의 안부를 물었고, 목회를 잘 하고 있다는 말을 들었다.

 

   오후 5시가 되자, 목사 내외가 교장 댁으로 왔다. 우리는 반갑게 맞이하여 담소하였다. 그 때 나는 목사에게 담임하고 있는 교회의 교회 형편을 묻고, 목회에 성공하기까지 겪은 일들을 이야기해 달라고 하였다. 그는 그 동안 지내온 일들은 간략하게 이야기하였다.

 

   그는 군산에서 자랐는데, 어렵사리 중학교를 졸업하였으나, 가정 형편상 고등학교에 진학할 수 없었다. 그래서 생활전선에 뛰어들어 여러 가지 물건을 가지고 다니며 팔아 돈을 벌어 어머니를 봉양하였다. 나이가 좀 든 뒤에는 전기와 설비 기술을 익혀 건축현장을 누비며 열심히 일하였다. 그는 20세에 아는 사람의 전도로 교회에 다니기 시작하였는데, 그 때부터 새벽기도를 하였다. 어느 날, 그는 기도 중에 너는 공부를 더 하여라.” 하는 음성을 들었다. 그러나 그는 내 형편에 어떻게 공부를 하나?’ 하는 마음이 들어 그 말씀을 무시하고, 먹고 살기 위해 일을 하였다. 군에서 제대한 뒤에는 서울에 있는 작은 회사에서 일하며 교회를 다녔다. 그 때에도 새벽기도회에는 빠지지 않았다고 한다. 심신이 몹시 피곤하여 병원에 가서 진찰을 받으니, 폐결핵이라고 하였다. 그는 외로운 객지 생활에, 당시에 불치병이라고 여기는 폐결핵에 걸렸다는 말을 듣고, 세상이 무너지는 듯한 절망감에 빠졌다. 그는 약을 먹으며 기도하는 길밖에는 다른 방법이 없음을 깨닫고, 더욱 열심히 기도하였다. 그 무렵, 그가 다니는 교회의 처녀 전도사가 그에게 사랑의 손길을 내밀었다. 그는 처음에는 중졸의 학력을 가진 사람이 대학을 졸업한 전도사와 결혼할 수 없다는 생각에 망설였다. 그러나 서로의 진심이 통하여 어른들의 허락을 얻어 29세에 결혼하였다. 신혼에 투병하는 일이 쉽지 않았으나, 굳은 의지와 믿음으로 이겨냈다.

 

   어느 날, 그는 기도하는 중에 왜 공부하라는 내 말을 따르지 않느냐? 더 공부해라!” 하는 음성을 들었다. 그는 그 말씀을 따르기로 하고, 한국 나이로 37세가 되던 해 1월에 노량진에 있는 고입검정고시학원에 등록하였다. 20여 년 만에 다시 공부를 시작하고 보니, 전에 배운 것은 다 잊어버렸고, 정신 집중도 잘 안 되어 어려움이 많았다. 공부를 시작하고 두 달이 지난 3월에 고입검정시험이 있다고 하였다. 그는 큰 기대를 하지 않고 응시하였는데, 5월에 합격 통지서를 받았다. 그는 합격의 기쁨을 접어두고, 8월에 있을 대입검정고시를 준비하였다. 주위 사람들은 너무 욕심을 부린다며 만류하였지만, 그는 대입검정고시 준비에 매진(邁進)하여 합격하였다. 그래서 한국나이로 38세에 대학교 선교학과에 입학하였다. 늦깎이 대학생이 된 그는 한시 반때도 놀지 않고 공부에 열중하여 장학금을 받으며 학부 과정을 마치고, 대학원에 진학하였다. 대학원을 마치고 전도사로 일한 뒤에 목사 안수를 받았다.

 

   그는 지금으로부터 14년 전에 흥덕에 있는 교회에 담임목사로 부임하였다. 그 때 교인은 13명이었고, 지역 주민은 대부분 노인어른들이었다. 그는 교회차로 동네 어른을 태워다드리며 사는 형편과 어려움을 겪는 일이 있는가를 묻곤 하였다. 그가 만난 어른 중에는 수도가 잘 나오지 않아 불편을 겪고 있기도 하고, 전등TV냉장고세탁기 등의 가전제품이 고장 나서 어려움을 겪고 있는 분이 계셨다. 그는 이런 말을 듣는 즉시 달려가서, 청년 시절에 익힌 설비와 전기 기술을 발휘하여 무료로 수리해 드렸다. 이를 본 노인 어른들은 크게 감사하며 기뻐하였고, 다른 사람에게 칭찬의 말을 하였다. 이런 일이 알려지자 이웃동네 어른들도 그에게 어려움을 호소하며 그를 불렀다. 그는 동네 어른들과 친해지면서 조심스럽게 전도하였다. 그러는 동안에 그 동네는 물론 이웃동네의 어른들이 한 분씩 교회에 나오게 되었다. 그리고 다른 지역에 사는 그 분들의 자녀가 교회에 나오게 되었다. 그래서 지금은 교인이 130여 명이 되었다고 한다. 교인이 늘고 보니, 교회를 신축하는 것이 좋겠다고 하여 교인들과 뜻을 모아 신축공사를 시작하였다고 한다.

 

   그가 시골에서 목회에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그의 투철한 신앙심에 여러 가지 장사 경험, 전기와 설비의 기술, 늦깎이 학생으로 열심히 공부해 쌓은 실력 등이 함께 어우러져 꽃을 피운 덕이라 생각한다. 나는 목사의 간증을 들으며, 하나님께서는 그를 시골교회 목회자로 키우기 위해 오래 전부터 준비하셨다는 생각과 함께 구약 성경에 나오는 요셉을 떠올렸다. 형들의 미움을 사서 미디안 상인들에게 팔려간 요셉은 이집트 왕의 경호대장 보디발의 종이 되었다. 요셉은 보디발의 집에서 살림을 도맡아하고, 모함을 당하여 감옥살이를 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경험은 요셉이 이집트의 총리가 되어 7년이나 계속되는 흉년에서 이집트 사람과 자기 가족을 살릴 역량을 갖추게 하셨다. 하나님은 목사로 하여금 어린 시절에 장사를 하게 하여 남다른 친화력(親和力)과 수완을 기르게 하시고, 전기와 설비 기술을 익히게 하여 노인들이 많은 시골교회 목회를 위한 자질을 갖추게 하셨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목사를 시골교회 목회에 적합한 능력과 자질을 갖춘 목회자로 키우려는 장기 계획에 의한 것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오늘은 ㅅ 목사 교회가 입당예배를 드리는 날이다. 입당예배 시간에는 전 교인과 원근각지에서 오신 많은 분들이 입당을 축하하며 감사하는 예배를 드릴 것이다. 나는 그 교회에 가서 입당예배에 참석할 수 없어 교수 편에 입당축하헌금을 조금 보냈다. 그 교회가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 안에서 신축에 따른 후유증이나 어려움 없이 더욱 부흥하여 머지않은 날에 헌당예배를 드릴 수 있게 되기를 기도한다. (2018. 2. 3.)

'자료실 > 산문' 카테고리의 다른 글

면천두견주  (0) 2018.05.07
전업주부 체험  (0) 2018.03.25
인절미의 유래  (0) 2017.11.28
잘한 일 두 가지  (0) 2017.11.28
뿌리 깊은 나무  (0) 2017.11.28

 

 

   이 책은 우리의 옛이야기를 분석하여, 우리 조상들이 지니고 살아온 행복한 삶에 대한 열망과 의지, 용기와 노력 등을 살펴보고, 이를 바탕으로 행복한 삶을 살기 위해 가져야 할 지혜와 마음가짐을 찾아 정리한 것이다. 

 

   사람은 행복을 추구하는 존재이기에, 스스로 행복을 얻기 위해 노력한다. 그러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여러 가지 고난을 극복하고 행복을 얻어 잘 사는 사람의 이야기에 관심을 갖고, 재미를 느끼며 이야기하게 된다. 그래서 우리의 조상들은 고난과 불행을 극복하고 행복을 쟁취하는 사람의 이야기를 많이 꾸며냈다. 이들 이야기의 주인공들은 각양각색의 인물들인데, 각자가 처한 처지에서 자기 나름의 지혜와 용기를 발휘하여 고난을 극복하고, 원하는 것을 얻어 행복하게 산다. 옛사람들은 이런 이야기를 즐겨 듣고 이야기하면서, 이를 통해 불행을 극복하고 행복을 얻는 지혜와 용기를 배우고, 때로는 대리만족을 얻기도 하였을 것이다.

 

   옛이야기의 주인공을 보면, 가난한 사람은 재물을 얻어잘 살고, 배우자가 없는 사람은 배우자를 만나 혼인하여잘 산다. 자녀가 없어 애를 태우던 사람은 나중에 자녀를 얻어기르며 행복을 누린다. 부모나 자녀 또는 배우자가 건강하지 못해 힘들어하던 사람은 온갖 정성과 노력을 기울인 끝에 건강을 회복하여 수명대로살게 한다. 벼슬이나 명성을 구하는 사람은 지위와 명예를 얻어 행복하게 산다. 부모형제나 친척 또는 친구와 문제가 있어 속을 태우던 사람은 원만한 인간관계를 회복하여 즐겁게 산다. 이처럼 옛날이야기의 주인공들이 추구(追求)하여 얻고자 하는 삶의 조건은 그가 처한 상황에 따라 다르나, ‘재물, 배우자, 자녀, 건강과 수명, 지위와 명예, 원만한 인간관계로 요약할 수 있다. 이 여섯 가지는 우리 조상들이 용기와 지혜를 발휘하고, 정성과 노력을 기울여서 얻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행복한 삶의 조건이다. 이는 현대인이 추구하는 행복한 삶의 조건과 다를 바 없다.

 

   이 책에서는 옛이야기의 주인공이 행복한 삶을 얻기 위해 겪는 시련과 고통, 굳은 의지와 노력, 그를 돕는 사람이나 신이한 존재의 따뜻한 도움의 손길 등 다양한 모습을, 위에서 말한 여섯 가지 행복의 조건별로 나누어 살펴보았다. 160여 편의 옛이야기를 한 편씩 소개하면서 그 이야기의 주제와 특징, 재미있는 이야기 속에 담겨 있는 교훈적 의미를 분석하였다. 이 책은 우리 조상들이 지녔던 행복관(幸福觀)과 바른 삶의 자세를 알게 해 주고, 현대를 사는 우리가 행복한 삶의 길을 찾는 데에 큰 도움을 줄 것이다.

'책 소개' 카테고리의 다른 글

새로운 보금자리에서  (0) 2021.08.19
성경 이야기와 한국 이야기  (0) 2021.08.19
능소화처럼  (0) 2017.11.06
터키 1000일의 체험  (0) 2012.09.13
외국인을 위한 한국문학(공저, 보고사, 2010)  (0) 2011.07.11

 

 

  우리의 옛이야기를 분석하여, 우리 조상들이 지니고 살아온 행복한 삶에 대한 열망과 의지, 용기와 노력 등을 살펴보고, 이를 바탕으로 행복한 삶을 살기 위해 가져야 할 지혜와 마음가짐을 찾아 정리한 책을 출간하였다.

 

  사람은 행복을 추구하는 존재이기에, 스스로 행복을 얻기 위해 노력한다. 그러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여러 가지 고난을 극복하고 행복을 얻어 잘 사는 사람의 이야기에 관심을 갖고, 재미를 느끼며 이야기하게 된다. 그래서 우리의 조상들은 고난과 불행을 극복하고 행복을 쟁취하는 사람의 이야기를 많이 꾸며냈다. 이들 이야기의 주인공들은 각양각색의 인물들인데, 각자가 처한 처지에서 자기 나름의 지혜와 용기를 발휘하여 고난을 극복하고, 원하는 것을 얻어 행복하게 산다. 옛사람들은 이런 이야기를 즐겨 듣고 이야기하면서, 이를 통해 불행을 극복하고 행복을 얻는 지혜와 용기를 배우고, 때로는 대리만족을 얻기도 하였을 것이다.

 

  옛이야기의 주인공을 보면, 가난한 사람은 재물을 얻어잘 살고, 배우자가 없는 사람은 배우자를 만나 혼인하여잘 산다. 자녀가 없어 애를 태우던 사람은 나중에 자녀를 얻어기르며 행복을 누린다. 부모나 자녀 또는 배우자가 건강하지 못해 힘들어하던 사람은 온갖 정성과 노력을 기울인 끝에 건강을 회복하여 수명대로살게 한다. 벼슬이나 명성을 구하는 사람은 지위와 명예를 얻어 행복하게 산다. 부모형제나 친척 또는 친구와 문제가 있어 속을 태우던 사람은 원만한 인간관계를 회복하여 즐겁게 산다. 이처럼 옛날이야기의 주인공들이 추구(追求)하여 얻고자 하는 삶의 조건은 그가 처한 상황에 따라 다르나, ‘재물, 배우자, 자녀, 건강과 수명, 지위와 명예, 원만한 인간관계로 요약할 수 있다. 이 여섯 가지는 우리 조상들이 용기와 지혜를 발휘하고, 정성과 노력을 기울여서 얻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행복한 삶의 조건이다. 이는 현대인이 추구하는 행복한 삶의 조건과 다를 바 없다.

 

  이 책에서는 옛이야기의 주인공이 행복한 삶을 얻기 위해 겪는 시련과 고통, 굳은 의지와 노력, 그를 돕는 사람이나 신이한 존재의 따뜻한 도움의 손길 등 다양한 모습을, 위에서 말한 여섯 가지 행복의 조건별로 나누어 살펴보았다. 160여 편의 옛이야기를 한 편씩 소개하면서 그 이야기의 주제와 특징, 재미있는 이야기 속에 담겨 있는 교훈적 의미를 분석하였다. 이 책은 우리 조상들이 지녔던 행복관(幸福觀)과 바른 삶의 자세를 알게 해 주고, 현대를 사는 우리가 행복한 삶의 길을 찾는 데에 큰 도움을 줄 것이다.

우리나라에는 떡의 종류가 참으로 많다. 그 많은 떡 중에서 나는 인절미를 제일 좋아한다. 내가 인절미를 좋아하게 된 것은 어렸을 때부터 자주 먹었기 때문일 것이다. 어머니는 내가 어렸을 때부터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객지 생활을 시작할 때까지 내 생일에는 꼭 인절미를 해 주셨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로 생활이 어려울 때에도 내 생일에는 빠지지 않고 인절미를 해 주셨다. 결혼한 뒤에는 이를 아는 아내가 생일에 잊지 않고 인절미를 해 준다. 전에는 꼭 집에서 만들었으나, 요즈음에는 떡집에서 사 오기도 한다. 그러다 보니, 인절미는 자연스레 내 생일떡이 되었다. 그래서 나는 인절미를 먹어야 생일을 제대로 지낸 기분이 든다. 올해도 생일날 아침 식탁에 여러 음식과 함께 인절미가 올라왔다.

 

인절미는 잘 불린 찹쌀을 쪄서 안반(떡을 칠 때에 쓰는 두껍고 넓은 나무 판)이나 절구에 담고 떡메로 친 다음, 네모나게 썰어 고물을 묻혀 만든다. 주재료가 찹쌀이므로, 멥쌀이 하나도 섞이지 않은 순 찹쌀이어야 차지고 보드랍다. 쪄낸 지에밥(찹쌀이나 멥쌀을 물에 불려서 시루에 찐 밥)은 질지 않아야 한다. 지에밥을 안반이나 절구에 넣고 힘 있게, 오래 쳐서 밥알이 흔적 없이 으깨어져야 한다. 지에밥을 메로 칠 때 살짝 데친 연한 쑥을 같이 넣으면 쑥의 향기가 좋고 색도 곱다. 잘 친 것을 젖은 도마 위에 놓고 길게 늘인 뒤에 적당한 크기로 썰어 갖은 고물을 묻힌다. 고물로는 노란 콩이나 파란 콩을 볶아 만든 콩고물, 껍질을 벗긴 팥녹두 등을 쪄서 어레미에 내린 팥고물과 녹두고물, 흰깨 또는 검정깨고물 등을 쓴다. 인절미는 고물에 따라 맛이 조금씩 다른데, 나는 콩고물 인절미를 가장 좋아한다. 인절미의 모양은 지방에 따라 조금씩 다르다. 남쪽에서는 작고 맵시 있게 만드는데 비하여 북쪽에서는 크고 소담하게 만든다.

 

현대에 와서 인절미는 한국의 떡을 대표한다고 할 만큼 널리 퍼졌다. 그에 따라 인절미는 속담이나 관용구에도 오르내린다. 온통 더버기(한군데에 무더기로 쌓이거나 덕지덕지 붙은 상태)로 뒤집어쓰거나 씌우는 모양을 비유적으로 이를 때에 인절미 팥고물 묻히듯이란 말을 많이 쓴다. 구미에 딱 맞고 마음에 드는 경우를 비유적으로 이를 때에는 인절미에 조청 찍은 맛이라고 한다. 인절미 생각을 하니 군침이 돌면서, 먹고 싶어진다.

 

우리나라에서 떡을 언제부터 만들어 먹기 시작하였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아마도 원시농경을 시작하던 때부터 먹기 시작하였을 것이다. 삼국사기(三國史記)유리왕 조에는 []을 물어 잇자국을 시험하였더니, 유리의 잇금이 많았다. 이를 본 군신들이 유리를 받들어 임금으로 모셨다.”는 기록이 있다. 신라 제2대 남해왕의 아들 유리와 사위 탈해 중 누가 왕위를 이을 것인가를 논의할 때, 탈해가 지혜가 많은 사람은 잇금이 많다고 하니, 잇금이 많은 사람이 왕위를 잇도록 하자.”고 하였다. 그래서 떡을 물어 시험하였더니, 유리의 잇금이 더 많았으므로 왕위에 올랐다고 한다. 이 기록에서 잇자국이 선명하게 남을 수 있는 떡이라면 인절미나 절편과 같은 떡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인절미는 한자로 引切餠(인절병),印切餠(인절병),引截米(인절미)’, 또는 粉餈(분자)라고 적었다. 앞의 것은 잡아 당겨 자르는 떡이라는 뜻에서 붙인 이름인 것 같다. 인절미에 대한 문헌 기록을 보면, 중국의 주례(周禮)에는 인절미가 떡 중에서 가장 오래되었다고 하였다.고려사(高麗史)에는 粉餈(분자, 인절미)白餠(백병, 쌀떡), 黑餠(흑병, 수수떡), 酏食(이식, 술떡) 등과 함께 종묘대제(宗廟大祭)에 올리는 떡으로 기록되어 있다. 조선 시대의 종묘대제에서도 역시 인절미를 제상에 올렸다. 조선 영조 때 유중임이 엮은 증보산림경제(增補山林經濟), 성호 이익이 쓴 성호사설(星湖僿說)에도 콩고물을 묻힌 인절미가 기록되어 있다. 1795(정조 19)에 정조가 연 어머니 혜경궁(惠慶宮) 홍씨의 회갑연을 기록한 원행을묘정리의궤(園幸乙卯整理儀軌)에는 팥고물을 묻힌 대추인절미와 잣가루고물을 묻힌 석이인절미, 깨고물을 묻힌 건시인절미가 나온다. 1809(순조 9)에 빙허각(憑虛閣) 이씨가 엮은규합총서(閨閤叢書)에는 인절미 만드는 방법에 대한 설명이 보인다. 이런 기록은 인절미가 고려 시대부터 지금까지 만들어 먹는 떡임을 말해 준다.

 

우리나라의 각 지방에는 제주 오메기떡, 의령 망개떡처럼 그 지역과 관련이 있는 떡을 내세워 자랑하고 있다. 충청남도 공주에서는 인절미를 공주떡이라고 하여 크게 자랑한다. 그 이유는 역사적 사실과 관련되어 있어 매우 흥미롭다. 공주에는 백제 때 쌓은 성인 공산성(公山城)이 있다. 공산성의 진남루(鎭南樓)에서 금서루(錦西樓) 쪽으로 언덕길을 조금 올라가면, 쌍수정(雙樹亭)과 쌍수정사적비(雙樹亭史蹟碑)가 있다. 그 옆에 인절미의 고향 공주안내판이 서 있다. 여기에는 인절미라는 이름이 붙여진 내력이 적혀 있다. 서기 1624(인조 2) 이괄(李适)의 난을 피하여 공산성에 온 조선 16대 인조 임금은 이곳에 서 있던 두 그루의 나무[雙樹] 밑에서 반란이 진압되기를 기다렸다. 그 때 공주시 우성면 목천리에 사는 임()씨가 콩고물에 무친 떡을 진상(進上)하였다. 왕은 시장한 참에 연거푸 몇 개를 먹고 나서, 떡 이름이 무어냐고 물었다. 그러나 떡 이름을 아는 사람이 없었다. 왕은 맛있는 떡을 임씨가 진상하였다는 말을 듣고, “그 맛이 빼어나 절미(絶味, 뛰어난 맛)이니, ‘임절미(任絶味)라고 하는 것이 좋겠다.”고 하였다. 세월이 지나면서 임절미는 발음하기 편하게 인절미로 바뀌고, 공주 사람들의 입으로 전해져서 공주떡이 되었다.

 

  쌍수정사적비에는 이괄의 반란, 인조가 난을 피하게 된 사실, 공산성에 머물렀던 6일간의 행적, 공산성의 모습 등이 적혀 있다. 이 비는 1708(숙종 34)년에 세운 것인데, 인조 때 영의정을 지낸 신흠이 비문을 짓고, 숙종 때 영의정을 지낸 남구만이 글씨를 썼다. 여기에는 이괄의 난을 피하여 공주에 온 인조가 공산성에 있는 두 나무에 의지하여 6일을 지낸 일, 반란이 평정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기뻐한 인조가 자신이 기대고 있었던 쌍수(雙樹)에 정삼품의 작위(爵位) 내리고, 한양으로 돌아간 일 등이 기록되어 있다. 충청관찰사로 부임한 이수항은 1734(영조10) 인조를 기리는 뜻에서 나무가 늙어 없어진 자리에 쌍수정을 지었다.

 

  이로 보아 인조의 공주 피난은 역사적 사실임이 틀림없다. 인조가 피난지에서 제대로 먹지도 못하고, 고난을 겪을 때 진상 받은 인절미의 맛은 정말 좋았을 것이다. 그래서 그 맛을 빼어난 맛절미(絶味)라고 하고, 임씨가 진상하였으니 임절미라고 하였다고 한다. 사물의 이름 중에는 역사적 사실과 연관된 것도 있고, 그렇지 않은 민간어원(民間語源)도 있다. 인절미의 경우는 인조의 공주 피난이라는 역사적 사실과 관련이 있으니, 개연성(蓋然性)이 있어 보인다. 인절미는 오래 전부터 만들어 먹던 떡이니, 그 전에도 이름이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 당시에 그 이름이 널리 알려지지 않았거나, 알려진 이름이 있었다하더라도 인조 임금과 관련된 이름인 인절미가 전의 이름을 누르고 널리 퍼졌을 것이다. 그래서 인절미는 한국의 떡을 대표하는 이름으로 자리 잡게 된 것이라 생각한다.

 

  공주와 부여 지방에서는 해마다 백제문화제가 열린다. 2015926일부터 104일까지 열린 제61회 공주백제문화제에서는 여러 가지 축제 행사를 하였다. 그 중 흥미로운 것은 929일 오후 3시에 공주시 금상동 금강교 앞 광장무대에서 열린 공주인절미 만들기행사이다. 이날 만든 인절미의 길이가 자그마치 610m나 되었다고 하니, 참으로 장관이었을 것이다. 이 행사는 공주 시민이나 관광객의 흥미와 관심을 끌고, 인절미를 공주의 떡으로 널리 알리는 계기가 되었을 것이다. 공주시에서는 특허청에 공주인절미의 지리적표시단체표장(지리적 표시를 상품에 붙이는 부호나 휘장) 출원(出願)하였다고 한다. 공주인절미의 브랜드 가치를 상승시켜 시장 경쟁력을 높이고, 유통망을 확대하기 위한 것이리라. 많은 사람들이 공주인절미를 즐겨 먹으면서 인절미와 관련된 역사적 사실도 알았으면 좋겠다.

 

요즈음 어린이들은 떡보다는 빵이나 케이크를 더 좋아한다고 한다. 동요 중에 인절미와 관련된 <인절미와 총각김치>가 있다.

 

여러분 인절미가 시집간대요./ 팥고물과 콩고물로 화장을 하고

동그란 쟁반 위에 올라앉아서/ 시집을 간다네. 입 속으로 쏙.

 

여러분 총각김치 장가간대요./ 새빨간 고춧물에 목욕을 하고

기다린 나무 위에 올라앉아서/ 장가를 간다네. 입 속으로 쏙.

 

이 동요를 들으면, 인절미를 총각김치와 곁들여 먹는 장면이 눈에 선하게 떠오른다. 이 노래가 어린이들의 흥미를 불러 일으켜 빵보다 떡을 더 즐겨 먹도록 하는 계기가 되었으면 좋겠다

                            <청하문학 제16, 서울: 청하문학회, 2017. 12.>

   

              이괄의 난을 피해 온 인조가 의지하였던 두 나무가 있던 자리에 지은 쌍수정 

           

 피난 온 인조의 행적과 공산성의 모습을 적은 쌍수정사적비 

                            쌍수정 아래에 있는 인절미의 고향 안내판



 

'자료실 > 산문' 카테고리의 다른 글

전업주부 체험  (0) 2018.03.25
하나님의 계획  (0) 2018.02.07
잘한 일 두 가지  (0) 2017.11.28
뿌리 깊은 나무  (0) 2017.11.28
개망초의 누명  (0) 2017.11.28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