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옛이야기를 분석하여, 우리 조상들이 지니고 살아온 행복한 삶에 대한 열망과 의지, 용기와 노력 등을 살펴보고, 이를 바탕으로 행복한 삶을 살기 위해 가져야 할 지혜와 마음가짐을 찾아 정리한 책을 출간하였다.

 

  사람은 행복을 추구하는 존재이기에, 스스로 행복을 얻기 위해 노력한다. 그러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여러 가지 고난을 극복하고 행복을 얻어 잘 사는 사람의 이야기에 관심을 갖고, 재미를 느끼며 이야기하게 된다. 그래서 우리의 조상들은 고난과 불행을 극복하고 행복을 쟁취하는 사람의 이야기를 많이 꾸며냈다. 이들 이야기의 주인공들은 각양각색의 인물들인데, 각자가 처한 처지에서 자기 나름의 지혜와 용기를 발휘하여 고난을 극복하고, 원하는 것을 얻어 행복하게 산다. 옛사람들은 이런 이야기를 즐겨 듣고 이야기하면서, 이를 통해 불행을 극복하고 행복을 얻는 지혜와 용기를 배우고, 때로는 대리만족을 얻기도 하였을 것이다.

 

  옛이야기의 주인공을 보면, 가난한 사람은 재물을 얻어잘 살고, 배우자가 없는 사람은 배우자를 만나 혼인하여잘 산다. 자녀가 없어 애를 태우던 사람은 나중에 자녀를 얻어기르며 행복을 누린다. 부모나 자녀 또는 배우자가 건강하지 못해 힘들어하던 사람은 온갖 정성과 노력을 기울인 끝에 건강을 회복하여 수명대로살게 한다. 벼슬이나 명성을 구하는 사람은 지위와 명예를 얻어 행복하게 산다. 부모형제나 친척 또는 친구와 문제가 있어 속을 태우던 사람은 원만한 인간관계를 회복하여 즐겁게 산다. 이처럼 옛날이야기의 주인공들이 추구(追求)하여 얻고자 하는 삶의 조건은 그가 처한 상황에 따라 다르나, ‘재물, 배우자, 자녀, 건강과 수명, 지위와 명예, 원만한 인간관계로 요약할 수 있다. 이 여섯 가지는 우리 조상들이 용기와 지혜를 발휘하고, 정성과 노력을 기울여서 얻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행복한 삶의 조건이다. 이는 현대인이 추구하는 행복한 삶의 조건과 다를 바 없다.

 

  이 책에서는 옛이야기의 주인공이 행복한 삶을 얻기 위해 겪는 시련과 고통, 굳은 의지와 노력, 그를 돕는 사람이나 신이한 존재의 따뜻한 도움의 손길 등 다양한 모습을, 위에서 말한 여섯 가지 행복의 조건별로 나누어 살펴보았다. 160여 편의 옛이야기를 한 편씩 소개하면서 그 이야기의 주제와 특징, 재미있는 이야기 속에 담겨 있는 교훈적 의미를 분석하였다. 이 책은 우리 조상들이 지녔던 행복관(幸福觀)과 바른 삶의 자세를 알게 해 주고, 현대를 사는 우리가 행복한 삶의 길을 찾는 데에 큰 도움을 줄 것이다.

우리나라에는 떡의 종류가 참으로 많다. 그 많은 떡 중에서 나는 인절미를 제일 좋아한다. 내가 인절미를 좋아하게 된 것은 어렸을 때부터 자주 먹었기 때문일 것이다. 어머니는 내가 어렸을 때부터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객지 생활을 시작할 때까지 내 생일에는 꼭 인절미를 해 주셨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로 생활이 어려울 때에도 내 생일에는 빠지지 않고 인절미를 해 주셨다. 결혼한 뒤에는 이를 아는 아내가 생일에 잊지 않고 인절미를 해 준다. 전에는 꼭 집에서 만들었으나, 요즈음에는 떡집에서 사 오기도 한다. 그러다 보니, 인절미는 자연스레 내 생일떡이 되었다. 그래서 나는 인절미를 먹어야 생일을 제대로 지낸 기분이 든다. 올해도 생일날 아침 식탁에 여러 음식과 함께 인절미가 올라왔다.

 

인절미는 잘 불린 찹쌀을 쪄서 안반(떡을 칠 때에 쓰는 두껍고 넓은 나무 판)이나 절구에 담고 떡메로 친 다음, 네모나게 썰어 고물을 묻혀 만든다. 주재료가 찹쌀이므로, 멥쌀이 하나도 섞이지 않은 순 찹쌀이어야 차지고 보드랍다. 쪄낸 지에밥(찹쌀이나 멥쌀을 물에 불려서 시루에 찐 밥)은 질지 않아야 한다. 지에밥을 안반이나 절구에 넣고 힘 있게, 오래 쳐서 밥알이 흔적 없이 으깨어져야 한다. 지에밥을 메로 칠 때 살짝 데친 연한 쑥을 같이 넣으면 쑥의 향기가 좋고 색도 곱다. 잘 친 것을 젖은 도마 위에 놓고 길게 늘인 뒤에 적당한 크기로 썰어 갖은 고물을 묻힌다. 고물로는 노란 콩이나 파란 콩을 볶아 만든 콩고물, 껍질을 벗긴 팥녹두 등을 쪄서 어레미에 내린 팥고물과 녹두고물, 흰깨 또는 검정깨고물 등을 쓴다. 인절미는 고물에 따라 맛이 조금씩 다른데, 나는 콩고물 인절미를 가장 좋아한다. 인절미의 모양은 지방에 따라 조금씩 다르다. 남쪽에서는 작고 맵시 있게 만드는데 비하여 북쪽에서는 크고 소담하게 만든다.

 

현대에 와서 인절미는 한국의 떡을 대표한다고 할 만큼 널리 퍼졌다. 그에 따라 인절미는 속담이나 관용구에도 오르내린다. 온통 더버기(한군데에 무더기로 쌓이거나 덕지덕지 붙은 상태)로 뒤집어쓰거나 씌우는 모양을 비유적으로 이를 때에 인절미 팥고물 묻히듯이란 말을 많이 쓴다. 구미에 딱 맞고 마음에 드는 경우를 비유적으로 이를 때에는 인절미에 조청 찍은 맛이라고 한다. 인절미 생각을 하니 군침이 돌면서, 먹고 싶어진다.

 

우리나라에서 떡을 언제부터 만들어 먹기 시작하였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아마도 원시농경을 시작하던 때부터 먹기 시작하였을 것이다. 삼국사기(三國史記)유리왕 조에는 []을 물어 잇자국을 시험하였더니, 유리의 잇금이 많았다. 이를 본 군신들이 유리를 받들어 임금으로 모셨다.”는 기록이 있다. 신라 제2대 남해왕의 아들 유리와 사위 탈해 중 누가 왕위를 이을 것인가를 논의할 때, 탈해가 지혜가 많은 사람은 잇금이 많다고 하니, 잇금이 많은 사람이 왕위를 잇도록 하자.”고 하였다. 그래서 떡을 물어 시험하였더니, 유리의 잇금이 더 많았으므로 왕위에 올랐다고 한다. 이 기록에서 잇자국이 선명하게 남을 수 있는 떡이라면 인절미나 절편과 같은 떡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인절미는 한자로 引切餠(인절병),印切餠(인절병),引截米(인절미)’, 또는 粉餈(분자)라고 적었다. 앞의 것은 잡아 당겨 자르는 떡이라는 뜻에서 붙인 이름인 것 같다. 인절미에 대한 문헌 기록을 보면, 중국의 주례(周禮)에는 인절미가 떡 중에서 가장 오래되었다고 하였다.고려사(高麗史)에는 粉餈(분자, 인절미)白餠(백병, 쌀떡), 黑餠(흑병, 수수떡), 酏食(이식, 술떡) 등과 함께 종묘대제(宗廟大祭)에 올리는 떡으로 기록되어 있다. 조선 시대의 종묘대제에서도 역시 인절미를 제상에 올렸다. 조선 영조 때 유중임이 엮은 증보산림경제(增補山林經濟), 성호 이익이 쓴 성호사설(星湖僿說)에도 콩고물을 묻힌 인절미가 기록되어 있다. 1795(정조 19)에 정조가 연 어머니 혜경궁(惠慶宮) 홍씨의 회갑연을 기록한 원행을묘정리의궤(園幸乙卯整理儀軌)에는 팥고물을 묻힌 대추인절미와 잣가루고물을 묻힌 석이인절미, 깨고물을 묻힌 건시인절미가 나온다. 1809(순조 9)에 빙허각(憑虛閣) 이씨가 엮은규합총서(閨閤叢書)에는 인절미 만드는 방법에 대한 설명이 보인다. 이런 기록은 인절미가 고려 시대부터 지금까지 만들어 먹는 떡임을 말해 준다.

 

우리나라의 각 지방에는 제주 오메기떡, 의령 망개떡처럼 그 지역과 관련이 있는 떡을 내세워 자랑하고 있다. 충청남도 공주에서는 인절미를 공주떡이라고 하여 크게 자랑한다. 그 이유는 역사적 사실과 관련되어 있어 매우 흥미롭다. 공주에는 백제 때 쌓은 성인 공산성(公山城)이 있다. 공산성의 진남루(鎭南樓)에서 금서루(錦西樓) 쪽으로 언덕길을 조금 올라가면, 쌍수정(雙樹亭)과 쌍수정사적비(雙樹亭史蹟碑)가 있다. 그 옆에 인절미의 고향 공주안내판이 서 있다. 여기에는 인절미라는 이름이 붙여진 내력이 적혀 있다. 서기 1624(인조 2) 이괄(李适)의 난을 피하여 공산성에 온 조선 16대 인조 임금은 이곳에 서 있던 두 그루의 나무[雙樹] 밑에서 반란이 진압되기를 기다렸다. 그 때 공주시 우성면 목천리에 사는 임()씨가 콩고물에 무친 떡을 진상(進上)하였다. 왕은 시장한 참에 연거푸 몇 개를 먹고 나서, 떡 이름이 무어냐고 물었다. 그러나 떡 이름을 아는 사람이 없었다. 왕은 맛있는 떡을 임씨가 진상하였다는 말을 듣고, “그 맛이 빼어나 절미(絶味, 뛰어난 맛)이니, ‘임절미(任絶味)라고 하는 것이 좋겠다.”고 하였다. 세월이 지나면서 임절미는 발음하기 편하게 인절미로 바뀌고, 공주 사람들의 입으로 전해져서 공주떡이 되었다.

 

  쌍수정사적비에는 이괄의 반란, 인조가 난을 피하게 된 사실, 공산성에 머물렀던 6일간의 행적, 공산성의 모습 등이 적혀 있다. 이 비는 1708(숙종 34)년에 세운 것인데, 인조 때 영의정을 지낸 신흠이 비문을 짓고, 숙종 때 영의정을 지낸 남구만이 글씨를 썼다. 여기에는 이괄의 난을 피하여 공주에 온 인조가 공산성에 있는 두 나무에 의지하여 6일을 지낸 일, 반란이 평정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기뻐한 인조가 자신이 기대고 있었던 쌍수(雙樹)에 정삼품의 작위(爵位) 내리고, 한양으로 돌아간 일 등이 기록되어 있다. 충청관찰사로 부임한 이수항은 1734(영조10) 인조를 기리는 뜻에서 나무가 늙어 없어진 자리에 쌍수정을 지었다.

 

  이로 보아 인조의 공주 피난은 역사적 사실임이 틀림없다. 인조가 피난지에서 제대로 먹지도 못하고, 고난을 겪을 때 진상 받은 인절미의 맛은 정말 좋았을 것이다. 그래서 그 맛을 빼어난 맛절미(絶味)라고 하고, 임씨가 진상하였으니 임절미라고 하였다고 한다. 사물의 이름 중에는 역사적 사실과 연관된 것도 있고, 그렇지 않은 민간어원(民間語源)도 있다. 인절미의 경우는 인조의 공주 피난이라는 역사적 사실과 관련이 있으니, 개연성(蓋然性)이 있어 보인다. 인절미는 오래 전부터 만들어 먹던 떡이니, 그 전에도 이름이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 당시에 그 이름이 널리 알려지지 않았거나, 알려진 이름이 있었다하더라도 인조 임금과 관련된 이름인 인절미가 전의 이름을 누르고 널리 퍼졌을 것이다. 그래서 인절미는 한국의 떡을 대표하는 이름으로 자리 잡게 된 것이라 생각한다.

 

  공주와 부여 지방에서는 해마다 백제문화제가 열린다. 2015926일부터 104일까지 열린 제61회 공주백제문화제에서는 여러 가지 축제 행사를 하였다. 그 중 흥미로운 것은 929일 오후 3시에 공주시 금상동 금강교 앞 광장무대에서 열린 공주인절미 만들기행사이다. 이날 만든 인절미의 길이가 자그마치 610m나 되었다고 하니, 참으로 장관이었을 것이다. 이 행사는 공주 시민이나 관광객의 흥미와 관심을 끌고, 인절미를 공주의 떡으로 널리 알리는 계기가 되었을 것이다. 공주시에서는 특허청에 공주인절미의 지리적표시단체표장(지리적 표시를 상품에 붙이는 부호나 휘장) 출원(出願)하였다고 한다. 공주인절미의 브랜드 가치를 상승시켜 시장 경쟁력을 높이고, 유통망을 확대하기 위한 것이리라. 많은 사람들이 공주인절미를 즐겨 먹으면서 인절미와 관련된 역사적 사실도 알았으면 좋겠다.

 

요즈음 어린이들은 떡보다는 빵이나 케이크를 더 좋아한다고 한다. 동요 중에 인절미와 관련된 <인절미와 총각김치>가 있다.

 

여러분 인절미가 시집간대요./ 팥고물과 콩고물로 화장을 하고

동그란 쟁반 위에 올라앉아서/ 시집을 간다네. 입 속으로 쏙.

 

여러분 총각김치 장가간대요./ 새빨간 고춧물에 목욕을 하고

기다린 나무 위에 올라앉아서/ 장가를 간다네. 입 속으로 쏙.

 

이 동요를 들으면, 인절미를 총각김치와 곁들여 먹는 장면이 눈에 선하게 떠오른다. 이 노래가 어린이들의 흥미를 불러 일으켜 빵보다 떡을 더 즐겨 먹도록 하는 계기가 되었으면 좋겠다

                            <청하문학 제16, 서울: 청하문학회, 2017. 12.>

   

              이괄의 난을 피해 온 인조가 의지하였던 두 나무가 있던 자리에 지은 쌍수정 

           

 피난 온 인조의 행적과 공산성의 모습을 적은 쌍수정사적비 

                            쌍수정 아래에 있는 인절미의 고향 안내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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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올해 1022일을 맞는 나의 마음은 나도 모르게 숙연하다. 이 날은 내 생애에서 가장 의미 있는 결혼 50주년이 되는 날이기 때문이다. 나는 결혼기념일을 따지는 것은 서양의 문화라는 생각에서 지금까지 별 의미를 부여하지 않고 지내왔다. 그러나 결혼 50주년을 맞고 보니, 매우 뜻 깊게 느껴진다. 그것은 50년이란 긴 세월을 아내와 함께 살아온 나의 삶의 무게와 소중함이 새삼 크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거기에 우리의 전통문화에서 중히 여기는 회혼(回婚) 때까지 우리 부부가 건강하게 살 것이라고 장담할 수 없는 마음도 작용하기 때문이리라.

 

   나와 아내는 결혼 50주년 기념으로 3남매의 가족과 함께 여행을 하고 싶었다. 그래서 지난해에 두 아들과 딸에게 201612월 겨울방학 때 함께 해외여행을 가자고 하였다. 아들과 딸, 손자 손녀가 모두 좋다고 하여 그대로 추진하려고 하였다. 그런데 내년에 대학에 진학해야 할 고등학교 2학년짜리 손녀의 학습 문제, 미국에 가 있는 딸과 사위의 영주권과 직장 문제, 작은아들의 이사 문제 등이 겹쳐 떠날 수 없게 되었다. 가족여행을 내년으로 미루고 보니, 허전하기 짝이 없었다. 그래서 우리 둘이 국내여행을 하기로 하고, 10월에는 34일 일정으로 강원도 정선태백삼척 지역, 11월에는 45일의 일정으로 제주도 여행을 하였다. 우리는 여행하면서 50년을 함께 사는 동안 겪은 기쁘고 즐거웠던 일, 보람 있고 행복했던 일, 힘들고 슬펐던 일들을 돌이켜 보았다. 지금에 와서 생각해 보니, 그 때의 일들은 우리의 삶을 한 단계씩 발전시키고, 성숙하게 해 주었던 것 같다.

 

   나와 아내는 서울교육대학교 동기동창이다. 대학에 다닐 때는 얼굴과 이름을 겨우 아는 데면데면한 사이였다. 그런 우리가 졸업 후에 서울 동대문구 제기동에 있는 홍파초등학교 교사로 발령을 받아 함께 근무하게 된 것이 인연이 되어 사랑을 나누게 되었다. 나는 아내와 1년을 함께 근무한 뒤에 군에 입대하였는데, 멀리 떨어져 지내는 것이 우리 사이를 갈라놓지는 못하였다. 나는 군 복무를 마치고 복직하던 해인 19661022일에 결혼하였다.

 

   나와 아내는 결혼한 뒤 50년 동안 서로 아끼고 사랑하며 아무 탈 없이 살아왔다. 작은 일로 다툰 적은 있지만, 그것은 오히려 우리의 사랑을 더욱 돈독하게 해 주었다. 그래서 우리를 아는 사람들은 천생연분(天生緣分)이라고 하면서 본받을 만한 모범적인 부부라고 부러워하기도 한다. 이런 평을 받게 된 것은 전적으로 아내의 덕이라 생각한다. 나는 아내와 결혼한 것을 큰 복으로 여긴다. 내가 아내에게 다시 태어나도 당신과 만나고 싶다고 하니, 아내 역시 그렇다고 한다. 그 마음이 참으로 고맙다.

 

   그 동안 아내의 수고와 고생은 너무나 커서 말로 다 표현하기 어렵다. 그런데도 나는 아내에게 수고하였다는 말이나 고맙다는 말을 제대로 하지 못하였다. 늦게나마 아내의 수고를 치하하며 고마운 마음을 정리해 본다. 우리는 단간 전세방에서 신혼살림을 시작하였다. 아내는 결혼한 후 35년 간 초등학교 교사로 근무하면서 집안 살림을 하였다. 매사를 계획적으로 짜임새 있게 처리하면서 근검절약하니, 집안 형편은 조금씩 나아지게 되었다. 그 덕에 결혼 1년 후에 셋방 신세를 면하고, 작은 집을 사서 이사를 하였다. 그 뒤로는 형편이 되는 대로 집을 늘려 이사를 하여 오늘에 이르렀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맨몸으로 서울에 올라온 내가 이만큼 살게 된 것은 아내가 알뜰하게 살림하고, 근검절약한 결과이다.

 

   나는 7남매의 다섯째로 태어나, 위로 형님과 누님 셋, 아래로 남동생과 여동생이 하나씩 있었다. 그러나 625전쟁 때 형님을 잃고, 해군에서 제대한 남동생이 사고로 세상을 떠나는 바람에 외아들이 되었다. 아내는 일찍 홀로되신 어머니를 96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나실 때까지 36년 동안 지성으로 모셨다. 그리고 여동생을 고등학교와 대학에 보내고, 졸업한 뒤에 시집을 보냈다. 그동안 아내가 겪은 마음고생과 수고로움은 이루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을 만큼 컸을 것이다. 그러나 이를 내색하거나 불평하지 않고 가정의 평화를 지켜왔다.

 

   나는 3남매를 두었는데, 국문학을 전공한 큰아들은 박사학위를 받고, 대학의 교수가 되었다. 딸은 음악을 전공하고 국내에서 활동하다가 지금은 미국에 가서 살고 있다. 국문학을 전공한 작은아들은 대학원을 마치고 고등학교 교사로 재직하고 있다. 세 아이가 잘 자라 대학원까지 공부를 하고, 자립하여 잘 살고 있는 것은 아내의 세심하고 정성스런 육아와 가정교육 덕이라 생각한다.

 

  서울에서 초등학교 교사로 사회생활을 시작한 나는 결혼한 뒤에 중학교 교사와 고등학교 교사를 거쳐 대학의 교수가 되었다. 내가 야간대학에 편입학하여 공부하고, 대학원에 진학하여 박사학위를 받고 교수가 된 것, 교수가 된 뒤에 연구에 전념할 수 있었던 것은 아내의 내조 덕이다. 아내는 내가 공부에 전념할 수 있도록 집안일과 경조사를 비롯한 친척 사이의 일을 도맡아 하였다. 아이들의 학습이나 생활지도에도 내가 마음을 쓰지 않도록 해 주었다. 아내의 헌신적인 내조가 없었다면 나는 사회적으로 성장할 수 없었을 것이다.

 

   나이 75세로, 결혼 50주년을 맞은 나는 지금까지 있었던 일을 돌이켜본다. 잘했다고 생각하는 일이 있는가 하면, 잘못하여 후회되는 일도 있다. 기쁘고 즐거웠던 일이 있는가 하면, 힘들고 슬펐던 일도 있다. 그 많은 일 중에서 내가 잘하였고, 의미 있는 일은 무엇일까? 그것은 서울교육대학에 진학한 일이다. 고등학교 1학년 때 담임선생님은 나에게 “2년만 공부하면 서울시내 초등학교 교사로 발령받을 수 있으니, 빨리 졸업하고 취직할 수 있을 것이다. 가정적으로 안정을 취한 후 어머님을 모시면서 야간대학에 진학하여 더 공부하라.”고 하시며 서울교육대학 진학을 권하셨다. 그래서 눈물을 삼키며 법조인이 되겠다던 꿈을 접고 서울교대에 진학하였다. 지나고 보니, 그것은 가난하기 짝이 없는 촌놈으로서는 최선의 선택이었고, 아주 잘한 일이었다. 그것이 인연이 되어 아내를 만나 결혼하고, 아내의 도움으로 대학의 교수가 되었다. 그러고 보면, 서울교육대학에 진학한 일과 아내와 결혼한 일은 내 일생에서 가장 잘하고 의미 있는 일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요즈음 나는 읽고 싶은 책을 읽으며, 글 쓰는 일에 열중한다. 주일에는 아내와 함께 교회에 나가 예배드린다. 시간이 되는 대로 아내와 함께 탁구를 하고, 공원을 걸으며 많은 대화를 한다. 틈이 나면 함께 연극이나 영화, 음악회나 전시회에 가서 감상하며 즐기고, 이름난 맛집도 찾아간다. 기회가 되는 대로 국내나 국외 여행을 하며 즐거운 시간을 보낸다. 주말에는 아들과 며느리, 손자 손녀와 함께 식사하며 즐거운 시간을 갖기도 한다. 모든 일이 즐겁고, 감사하다. 나는 매일 부족한 나에게 좋은 배우자를 허락해 주시고, 노후를 편안하게 살 수 있게 해 주신 하나님께 감사의 기도를 드린다<성동문학 제17, 서울 : 성동문인협회, 2017. 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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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토요일에는 충남 보령시 오천면 소성리에 있는 도미부인 유적지를 다시 찾았다. 이곳에는 <<삼국사기(三國史記)>>에 백제시대에 뛰어난 정절을 보인 여인으로 기록되어 있는 도미부인의 사당과 묘, 상사정(相思亭)이 있다. 먼저 도미부인 정절사(貞節祀)와 묘를 살펴보고, 도미부인이 산에 올라 남편이 실려 간 뱃길을 바라보고 그리워하며 통곡하였다는 상사봉의 상사정을 찾아 올라갔다. 정상에 오르는 가파른 길 양편에는 진달래꽃이 군데군데 무리지어 곱게 피어 있다. 진달래꽃을 살펴보니, 대부분은 땅에 뿌리를 박고 있는데, 몇 포기는 바위틈에 뿌리를 박고 서 있다. 바위틈에 뿌리를 내렸으나 온전한 땅에 뿌리를 내린 진달래 못지않게 자라 예쁜 곳을 피우고 있는 모습이 퍽 인상적이었다. 위치를 바꿔가며 사진을 찍을 때 문득 광릉수목원에서 갔을 때의 일이 떠올랐다.

 

   오랜만에 광릉에 있는 국립수목원에 갔는데, 수목을 특성에 맞게 단지를 조성하여 잘 관리하는 모습이 놀라움과 함께 큰 감동을 주었다. 흥미와 관심을 가지고 풀과 나무를 살펴보면서 전나무숲 쪽으로 가다가 보니, 뿌리 채 뽑힌 전나무들이 땅바닥에 누워 있다. 작은 나무도 아닌 아름드리나무 몇 그루가 뿌리 채 뽑혀 땅바닥에 누워 있는 것을 보는 순간, 나는 놀라움과 함께 충격을 받았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 궁금하여 둘레를 보니, <태풍 콘파스 피해 현장>이란 작은 표지판이 서 있다. 쓰러진 나무들은 201092일에 순간풍속 19~25/sec으로 부는 태풍의 피해를 입은 것이라고 한다. 땅위로 드러나 말라버린 뿌리를 보니, 깊게 뻗었던 굵은 뿌리는 없고, 잔뿌리만 잔뜩 엉켜 있다. 이 나무들은 땅속 깊숙이 뿌리를 뻗지 못해 강풍을 이기지 못하고 쓰러진 것이 분명하다. 피해 입은 나무들을 제거하지 않은 것은 자연 상태로 보존하여 생태적 변화를 관찰하려는 뜻에서라고 한다.

 

   태풍 피해 현장을 지나 조금 올라가니, 넓게 조성된 전나무숲이 있다. 이곳의 전나무들은 피해를 입은 나무들만큼 큰 나무들인데, 전혀 피해를 입지 않고 반듯하게 서서 위용(偉容)을 자랑하고 있다. 같은 수목원에서 자란 비슷한 크기의 전나무가 한쪽은 피해를 입고, 한쪽은 피해를 입지 않았는데, 그 까닭은 무엇일까? 그것은 나무가 서 있는 곳의 환경의 차이 때문인 것 같다. 피해를 입지 않은 나무들이 서 있는 곳은 비스듬한 언덕으로, 습기가 많지 않아 땅속으로 뿌리를 깊이 뻗지 않으면 수분과 양분을 취할 수 없는 곳이다. 이곳의 나무들은 생존을 위해 땅속으로 깊고 넓게 뿌리를 뻗었을 것이다. 그래서 잘 자랄 수 있었고, 태풍에도 끄떡없이 버틸 수 있었다. 이에 비해 피해를 입은 나무들이 있는 곳은 골짜기의 낮은 지대로 습기가 많은 곳이다. 이곳의 나무들은 뿌리를 땅속으로 깊이 뻗지 않아도 수분과 양분을 취할 수 있었으므로, 힘들여 땅속으로 뿌리를 뻗지 않고, 옆으로 잔뿌리만 뻗었을 것이다. 당장의 편함에 스스로 만족하여 뿌리를 땅속으로 깊이 뻗지 않았다가 변을 당한 것이다. 피해를 입지 않은 나무들은 쓰러진 나무들이 땅속으로 깊이 뿌리를 내리지 않아 태풍의 피해를 입은 것을 안타까워하는 듯하였다.

 

   이 나무들을 보면서 자연스레 <용비어천가> 2장이 떠올랐다.

 

   뿌리 깊은 나무는 바람에 흔들리지 않으므로, 꽃이 예쁘고 열매를 많이 맺는다.

샘이 깊은 물은 가뭄에도 마르지 아니 하므로, 내를 이루어 바다에 간.

 

<용비어천가>는 조선 세종 27(1445)에 정인지, 안지, 권제 등이 지어 세종 29(1447)에 간행한 악장(樂章)의 하나이다. 훈민정음으로 쓴 최초의 작품으로, 조선 건국의 초석(礎石)을 놓은 목조익조도조환조태조태종의 공덕을 기리기 위해 지었다. 모두 125장인데, 대부분은 여섯 선조의 사적(事跡)을 중국 고사(故事)에 비유하여 그 공덕을 기리는 형식으로 지었다. 그러나 제2장은 뿌리 깊은 나무샘이 깊은 물처럼 가까운 것에서 비유를 취하여 여섯 선조의 공덕을 칭송하면서, 새로 세운 조선이 흔들림 없이 이어지기를 바라는 마음을 아주 잘 표현하였다.

 

   뿌리 깊은 나무가 바람에 흔들리지 않고, 예쁜 꽃과 좋은 열매를 맺는다는 것은 지극히 상식적인 일이기도 하다. 이것을 사람의 경우에 대응시키면 어떨까? 뿌리 깊은 나무와 같은 사람은 심지(心地)가 굳고, 바르며, 인격적으로 훌륭한 사람이다. 이런 사람은 바람에 흔들리지 않는 나무처럼 나쁜 환경이나 어려움, 또는 유혹에 흔들리지 않고 바르게 판단하고, 바르게 행동하여 큰일을 성취한다. 나무를 가꿀 때 뿌리가 튼튼하도록 하는 것처럼 사람을 기를 때에는 심지가 굳고 바르게 키워야 한다. 심지가 굳은 사람, 올바른 인격을 갖춘 사람을 기르는 데 중요한 요인은 환경과 교육이다. 좋은 가정환경과 사회적 환경에서 부모, 교사, 어른으로부터 바른 가르침을 받아야 한다. 좋은 환경에서 바른 교육을 받으며 자라면, 예의와 염치 체면을 아는 사람, 선악에 대한 분별력과 남을 배려하는 마음이 있는 사람으로 성장할 것이다. 여기에 종교적인 신념이 합해지면 더욱 좋을 것이다.

 

좋은 환경에서 자랄지라도 바른 교육을 받지 못하면, 이기적이고, 독선적인 사람이 된다. 과잉보호를 받으면, 온실의 화초가 자생력이 부족한 것처럼 자주성이 부족하고, 의타심이 강해진다. 기를 살려줘야 한다는 생각에서 선악의 기준도 없이 무엇이든지 들어주며 키운 자녀는 남을 배려하는 마음이나 협동심을 기를 수 없고, 바른 가치 판단력을 가질 수 없다. 성적이 오르지 않으면 좌절하는 학생, 어머니로부터 독립하지 못하는 마마보이, 어려움이 닥치면 쉽게 포기하는 젊은이가 된다.

 

환경이 좋지 않을지라도 바른 교육을 받으면, 매사에 긍정적이고 적극적이며, 고난극복의 의지를 가지고 자기 운명을 개척해 나갈 수 있다. 바위틈에 뿌리를 박은 나무는 환경이 나쁘지만, 삶의 의지가 강하기 때문에 잘 자라서 꽃을 피운다. 환경이 좋지 않은 사람에게는 바른 교육을 받을 수 있도록 배려해야 한다. 그렇지 못하면 사회적 낙오자가 되기 쉽다. 상사봉의 진달래는 환경이 좋지 않은 사람일지라도 자립의 의지를 가지고 스스로 노력하고, 옆에서 도와주면, 바르고 튼튼하게 자라 큰일을 할 수 있다는 것을 말해 준다.

 

상사봉 바위틈에 핀 진달래와 광릉수목원의 뿌리 뽑힌 전나무는 환경과 교육의 중요성과 함께 스스로 생존의 의지를 가지고 노력하는 것이 매우 중요함을 말해 준다. 자연 현상을 보면서 배운 것을 삶의 현장에서 실천하는 지혜를 가져야겠다 <성동문학 제17, 서울 : 성동문인협회, 2017. 09.에 수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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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몇 년 전 초여름에 서울 동대문구 회기로에 자리 잡은 홍릉수목원에 갔을 때의 일이다. 숲 해설사의 설명을 들으며 수목원을 둘러보니, 싱그러움을 자랑하고 있는 나무와 풀들이 아주 정겹게 느껴졌다. 밤나무와 나도밤나무에 대한 이야기를 재미있게 듣고, 자리를 옮겨 가던 중 하얀 풀꽃 두 포기가 나의 눈길을 끌었다. 꽃 이름을 몰라 해설사에게 물으니, ‘개망초라고 하면서, “이 꽃에는 일제강점기에 일본인이 우리나라를 망하게 하려는 뜻에서 퍼뜨린 꽃이라 하여 나라를 망하게 하는 꽃이라는 말이 전해 온다.”고 하였다. 그 때부터 나는 이 꽃에 관심을 갖고, 예쁜 꽃에 왜 이런 이야기가 전해 오는가를 생각하게 되었다.

 

   개망초는 국화과의 두해살이풀로, 키는 50~100cm이다. 잎은 어긋나고, 피침(披針, 양쪽 끝에 날이 있는 곪은 데를 째는 침) 모양 또는 타원형이다. 6~8월에 흰색 꽃이 아래쪽 가장자리에서부터 위쪽으로 올라가며 핀다. 잎이 연하고 부드러워 한창 자라나는 초여름까지 새순을 뜯어 나물이나 국을 끓여 먹기도 한다. 한방에서는 약용으로 쓰는데, 감기학질전염성 감염위염장염설사 등의 치료에 효과가 있다고 한다. 이 꽃은 북아메리카 원산의 귀화(歸化) 식물인데, 번식력이 매우 강하여 우리나라 전국 각지의 길가나 빈터에서 흔하게 볼 수 있다. 꽃의 한가운데에 있는 노란 꽃술과 이를 중심으로 동그랗게 퍼진 하얀 꽃잎의 모양이 마치 계란 프라이와 같다고 하여 계란꽃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이 꽃은 우리나라를 비롯하여 전 세계 온대지방에 널리 퍼져 자라고 있다.

 

   북아메리카 원산인 개망초가 우리나라에 들어온 것은 경인선 철도 공사 때라고 한다. 경인선 철도는 1896(고종 33) 329일 미국인 J.R.모스가 대한제국 정부로부터 부설권을 얻어, 1897329일 인천 우각현(牛角峴, 지금의 도원역 부근)에서 공사에 착수하였으나, 자금 부족으로 중단하였다. 그 후 일본인이 경영하는 경인철도회사가 부설권을 인수하여 18994월부터 다시 공사를 시작하여 1900년에 완공하였다. 철도공사 때 레일을 괴는 굄목(침목)을 아메리카에서 들여왔는데, 굄목에 개망초의 씨앗이 붙어 들어와 철로 주변에 피기 시작하였다. 그 때는 일본의 침략 야욕이 드러나기 시작하였고, 철도 공사에 따른 많은 폐해가 생겼으므로, 철도 공사를 보는 한국인의 마음은 매우 불편하였다. 그런 한국인의 눈에 철도 공사 현장 주변에 수없이 피는 개망초는 무척 밉고, 원망스러웠을 것이다. 그래서 나라를 망하게 하는 망국초(亡國草)라고 하며 일본에 대한 미움과 원망을 토로하였다. 거기에 더하여 개망초는 당시 일본의 군국주의를 상징하는 욱일승천기(旭日昇天旗)를 닮았다 하여 더욱 미워하였다. 그 뒤로 개망초의 효용이나 꽃의 아름다움은 뒷전으로 밀려나고, 망국초라고 하는 부정적인 이미지가 강하게 전해 왔다.

 

   개망초가 나라를 망하게 한 꽃이라는 이야기는 중국 초나라와 관련되어 전해 오기도 한다. 초나라의 한 농부가 아내와 함께 열심히 밭농사를 지으며 살다가 군에 입대하였다. 아내는 밭일을 열심히 하며 남편이 돌아오기를 기다렸다. 얼마 후, 그녀는 초나라가 전쟁에 져서 나라가 망할 것이라는 소문을 듣고 실망하여 병이 났다. 그러나 그녀는 남편이 돌아왔을 때 잡초가 무성한 밭을 보여줄 수 없다.’는 생각에서 병든 몸을 돌보지 않고 밭에 나가 풀을 뽑다가 지쳐서 죽고 말았다. 전쟁이 끝난 뒤에 남편이 돌아와 보니, 아내 없는 밭에 잡초만 무성하였다. 남편은 혼자서 밭에 무성한 풀을 뽑아 개같이 망할 놈의 풀이라고 하며 던졌다. 그래서 개망초또는 초나라가 망할 때의 풀이란 뜻으로 망초라고 하였다고 한다. 이 이야기는 번식력이 매우 강하여 자주 뽑지 않으면 무성한 개망초의 특성과 관련지어 꾸며낸 이야기일 것이다.

 

   개망초는 길가나 밭가, 담장 밑, 산자락을 가리지 않고 틈만 있으면 어디든지 자리를 잡고 자란다. 한두 포기가 외롭게 자라 꽃이 피기도 하고, 몇 포기가 함께 자라 꽃이 피기도 한다. 거름기가 있고 햇빛이 잘 드는 곳에서 자라면 꽃이 탐스럽고 예쁘다. 그러나 척박한 땅에서 자란 것은 키도 작고, 꽃도 작다. 그러나 개망초꽃은 어디서 자라 피든, 화려하지 않으면서 맑고 깨끗한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다. 개망초는 꽃이 예쁘니 화초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화단에 심어 가꿀 만도 한데, 이 꽃을 화단에 심어 가꾸는 것은 아직까지 보지 못하였다.

 

   몇 년 전 일자산에 갔을 때의 일이다. 산등성이로 난 길을 따라 걷다가 하남시 서부면 감곡동 쪽으로 내려가면서 보니, 길 양편 산자락에 개망초가 군락(群落)을 이루고 있다. 노란 얼굴(꽃술)에 하얀 꽃잎을 예쁘게 단 개망초가 떼를 지어 피어 있는 모양은 정말 예뻤다. 몇 그루씩 피어 있어도 예쁜데, 넓은 면적에 군락을 이루고 있는 모습은 정말 아름답고, 멋졌다. 씨를 부리고 가꾼 사람이 없건만, 보는 사람도 많지 않은 산자락에서 아름다움을 자랑하고 있는 모습은 참으로 대견하였다. 이런 광경은 다시 보기 어려울 것이라는 생각에서 사진을 찍은 뒤에 산길을 내려갔다. 얼마 뒤에 춘천 문배마을에 갔을 때에도 개망초 군락지를 보았다. 그곳에는 개망초가 마을 입구의 길 뒤쪽 빈터에 군락을 이루고 있는데, 길가에 심어 가꾼 여러 가지 꽃들과 어우러져 아주 예쁘고 멋졌다.

 

   개망초는 잎이 식용 또는 약용으로 쓰이고, 꽃이 매우 예뻐서 사람들의 관심과 사랑을 받음 직하다. 그러나 미움의 대상이 아니면, 잡초 취급을 당하고 있다. 충남 천안에 근무하는 한 초등학교 여교사가 하던 말이 떠오른다. 그녀가 담임한 반 어린이들과 함께 화단을 정리하는데, 봄에 심지 않은 개망초 몇 포기가 피어 있었다. 그녀가 개망초를 뽑으려 하자, 한 어린이가 이렇게 예쁜 꽃을 왜 뽑아요?” 하면서 뽑으면 안 된다고 하였다. 그녀가 교장선생님의 말씀이니 뽑아야 한다고 하자, 그 어린이는 울면서 그 꽃을 뽑지 말라고 하여 매우 난감하였다고 한다. 이 말을 들으며 나는 농작물 또는 관상용 화초와 잡초를 구분하는 기준이 무엇일까를 잠시 생각해 보았다. 잡초는 가꾸지 않아도 저절로 나서 자라는 여러 가지 풀로, 농사꾼의 입장에서 보면 농작물 아닌 것은 모두 잡초이다. 화단을 가꿀 때 사람들은 자기의 취향에 맞는 화초는 심어 가꾸지만, 자기 취향에 맞지 않으면 잡초라 하여 뽑아버린다. 개망초는 예쁜 꽃이지만, 나라를 망하게 하는 꽃이라는 누명을 벗지 못하였기에 많은 사람들에게 잡초 취급을 당하고 있다.

 

   개망초는 우리나라에 와서 사람을 해친 적도 없고, 나라를 망하게 한 일도 없다. 한국에 들어오는 과정과 시기 때문에 나라를 망하게 한 꽃이라는 누명을 썼다. 이제 누명을 벗겨줄 때가 되었다. 개망초는 식용과 약용의 유용성과 함께 예쁜 꽃을 피운다. 작고 가벼운 씨로 멀리 퍼져 나가고, 기름진 땅이나 메마른 땅을 가리지 않고 틈만 있으면 그곳에 자리를 잡고 자라 꽃을 피우는 강한 번식력이 있다. 그래서 우리에게 생존에 대한 열망과 의욕을 북돋워 준다. 개망초의 꽃말은 화해이다. 편견(偏見)과 아집(我執) 때문에 편 가르기가 심한 우리 사회에서 화해는 정말 필요한 화두(話頭)이다. 우리는 어디서든 볼 수 있는 개망초가 나라를 망하게 한 꽃이라는 그릇된 선입관을 버리고, 보이는 그대로 예쁘게 보았으면 좋겠다. 그리고 이 꽃의 꽃말처럼 우리 모두 화해의 길로 나아갈 수 있도록 마음의 문을 열었으면 좋겠다. <청하문학 15, 서울: 청하문학회, 2016.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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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512일에 성동문인협회 회원들과 충청북도 옥천에 있는 정지용문학관과 육영수 생가를 둘러본 뒤에 진천 농다리에 갔다. 한국교원대학교 교수로 재직할 때 학부의 고전문학반 학생 및 대학원생들과 자주 찾던 곳인데, 퇴직 후에 다시 찾으니 감회가 새로웠다.

 

농다리는 충청북도 진천군 문백면 구곡리 구산동(굴티마을) 앞 세금천(洗錦川)에 놓은 돌다리이다. 상산지(常山誌)(1825년에 정재경이 편찬한 것을 1932년에 다시 간행한 향토지)에는 이 다리가 고려 초엽 굴티 임씨의 선조인 임 장군이 별자리 28수를 응용하여 만들었다고 하였다. 1910년부터 1937년 무렵의 인문지리 현황을 담은 지리서인 조선환여승람(朝鮮寰輿勝覽)에는 농다리의 모습을 호랑이가 버티고, 용이 서린 것 같다.”고 하였다.

 

농다리는 19761220일 충청북도 지방유형문화재 제28호로 지정되었다. 이 다리는 구조적으로 징검다리와 형교(桁橋, 다리의 주체가 되는 부분이 들보로 된 다리)의 중간 형태이다. 총 길이는 94m인데, 폭은 3.6m, 두께는 1.2m, 교각과 교각 사이는 0.8m 정도 이다. 사암(砂巖) 성질의 돌을 마치 물고기 비늘처럼 안으로 차곡차곡 들여쌓기 하여 교각을 만들었다. 크기가 다른 돌을 적절히 배합해 서로 물리게 하여 쌓았는데, 위로 갈수록 폭이 좁아져 빠른 유속(流速)을 견딜 수 있도록 했다. 교각의 양쪽은 유선형으로 만들어 구조적으로 흐르는 물의 압력에 저항할 수 있게 하였다. 교각부터 상판석까지 붉은 색을 띤 돌을 이용했다. 애초에 28칸이었던 교각은 유실되어 25칸만 남아 있었으나, 2008년에 원형 복원사업을 완료하여 지금은 28칸 다 있다.

 

  농다리는 마치 지네가 물을 건너가는 것 같은 모양으로 보이기도 한다. 장마가 지면 물이 다리 위로 넘어가게 되어 있어 자동으로 큰 규모의 수월교(水越橋, 장마 때면 물이 다리 위로 넘어가는 다리)가 된다. 해마다 한두 차례씩 물이 넘어갈 때에는 다리에 놓인 돌들이 덜컹거린다고 한다. 돌들이 자연스럽게 움직이지 않으면, 다리가 물살에 떠내려간다고 하니, 물 흐름의 이치를 잘 알아 만든 것이다.

 

천 년이란 긴 세월을 견뎌온 농다리에는 몇 가지 전설이 전해 온다. <농다리를 놓은 임 장군> 이야기를 보면, 고려 시대에 굴티에 사는 임 장군은 매일 아침 세금천에서 세수를 하였다. 어느 추운 겨울날, 임 장군은 한 젊은 여인이 세금천 건너편에서 이쪽으로 건너려고 하는 것을 보고, 무슨 일로 차가운 물을 건너려고 하는가 물었다. 여인은 아버지가 돌아가시어 친정으로 가는 길이라고 하였다. 장군은 여인의 지극한 효심과 딱한 처지를 생각하여 용마를 타고 돌을 날라 다리를 놓았다고 한다. 이 이야기에 등장하는 임 장군은 고려 때의 무신 임연(林衍)인 듯하다. 임연은 고려 때 쳐들어온 몽골군을 고향 사람들과 함께 물리쳐 대정(隊正, 고려 시대 최하위 지휘관)이 된 뒤에 벼슬이 올라 큰 권력을 잡았던 인물이다. 이 이야기서는 이 지역 사람들의 추앙을 받는 임 장군이 용마를 타고 순식간에 놓은 다리라 하여 농다리에 신비성을 부여하였다.

 

<오누이 힘내기와 농다리> 이야기를 보면, 옛날에 굴티 임씨네 집안에 힘이 센 장사(壯士) 남매가 살았다. 어느 날, 남매는 서로 목숨을 걸고 내기를 하였다. 오빠는 굽 높은 나막신을 신고, 목매기송아지를 끌고서 서울에 갔다 오고, 누이동생은 다리를 놓기로 하였다. 어머니가 보니, 딸이 치마로 돌을 날라 다리를 놓는데, 거의 마무리 단계가 되었다. 그런데 아들은 올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어머니는 아들을 살릴 요량으로 팥죽을 쑤어 가지고 가서 딸에게 주면서 먹고 하라고 하였다. 딸이 어머니의 강권에 못 이겨 팥죽을 먹기 시작할 때 아들이 돌아왔다. 내기에 진 딸은 나머지 한 칸을 놓지 못한 채 치마에 있던 돌을 내던지고 죽었다. 여자 장사가 미처 놓지 못한 나머지 한 칸은 일반인이 놓았는데, 장마가 지면 여자 장사가 놓은 다리는 그대로 있지만, 일반인이 놓은 다리는 떠내려가곤 하였다고 한다. 이 이야기에서 임 장군이나 임 장군 여동생은 힘이 장사일 뿐만 아니라 비범한 능력을 지닌 이인(異人)이다. 이 이야기는 전국적인 분포를 보이고 있는 <오뉘 힘내기> 전설을 농다리와 관련지은 것으로, 농다리 건설의 내력을 매우 흥미롭게 설명한다.

 

농다리를 보면, 한두 사람이, 짧은 기간에 놓을 수 있는 다리가 아니다. 오랜 기간에 걸쳐 물의 흐름에 대한 연구를 깊이 하면서 축적한 기술로, 여러 사람이 힘을 합해서 놓은, 규모가 큰 다리이다. 그런데 위와 같은 전설이 전해 오는 것은 무슨 까닭일까? 이것은 농다리를 신이(神異)한 인물과 관련지어 신비스럽게 이야기함으로써 농다리의 유용성과 우수성을 강조하려는 민중의식 때문일 것이다.

 

농다리 옆에는 힘이 빠져 죽은 용마에서 굴러 떨어진 돌이 바닥에 박혔다는 용바위(쌍바위)’, 어머니의 계략으로 내기에서 진 임 장군 여동생이 내던졌다고 하는 돌이 있다. 살고개에는 임 장군과 용마의 발자국인 장수발자국말발자국이 있다. 이러한 증거물들은 위 전설의 진실성과 사실성을 강조하는 구실을 한다.

 

오래 전에 만난 노인의 말에 따르면, 농다리는 능구렁이 울음소리 비슷한 소리를 내어 운 적이 있는데, 그 해에 625 한국전쟁이 일어났다고 한다. , 예로부터 장마에 농다리 상판이 뜨면 나라에 큰 재앙이 일어나고, 훌륭한 인물이 죽거나 기상이변이 일어난다는 말이 전해 온다. 농다리는 두 번 상판이 움직였는데, 1894년 동학혁명이 일어나던 해와 1979년 박정희 대통령이 서거하던 해였다고 한다. 이것은 인근 주민들이 천 년을 지켜온 농다리를 국가의 중대사를 미리 알려주는 신비스런 존재로 인식하고 있었음을 말해 준다.

 

농다리를 28칸으로 세운 것은 하늘의 별자리 28수를 응용한 것이라고 한다. 이것은 천체의 움직임을 깊이 연구하고, 이를 생활에 적용하는 선조들의 동양철학 사상에 의한 것이다. 농다리는 석회를 바르지 않고 자연석을 그대로 쌓아 만들었는데도 28칸 중 25칸이 오랫동안 유실되지 않고 유지되어 왔다. 이것은 농다리의 축조 기술이 매우 뛰어났음을 말해 준다. 토목공학적인 측면에서도 그 유례(類例)가 드문 특이한 돌다리라 하겠다. 이처럼 농다리에는 자연의 원리에 순응하면서 이를 극복하고 생활에 편리하도록 이용하려고 하는 우리 조상들의 지혜가 스며 있다.

 

  농다리를 건넌 뒤에 오르는 나지막한 고갯길은 초평저수지 둘레길과 이어진다. 이 길의 이름은 초평저수지농다리의 머리글자를 따서 지은 초롱길이다. 국토해양부에서는 우리나라 도로의 아름다움과 우수성을 널리 알리기 위하여 2006년에 <한국의 아름다운 길 100>을 발표하였는데, 17번째에 ‘1000년 세월의 농다리가 들어 있다. 아름다운 길은 3개월간 인터넷 공모를 통해 신청을 받은 뒤에, 도로예술사진 등 각 분야의 전문가와 시민단체 등으로 구성된 선정위원회가 미관역사성기능성 등을 종합적으로 검토해 선정한 것이다. 여기에 농다리가 선정된 것은 그 의미가 매우 크다 하겠다.

 

  농다리를 천천히 건너며 보니, 많은 양의 물이 교각에 부딪혀 소리를 내며 힘차게 흐른다. 이 다리를 왕래하는 수많은 사람들의 애환(哀歡)을 지켜보면서 1,000여 년 동안 말없이 자리를 지키고 있는 농다리가 신비스럽게 느껴진다. 농다리를 건너 나지막한 고개를 넘으니, 넓은 가슴에 초록빛 물을 가득 담은 초평저수지가 눈앞에 펼쳐진다. 나는 저수지 둘레의 산자락을 잘 다듬어 만든 초롱길을 걸으며, 5월의 신록과 초록빛 물이 조화를 이룬 멋진 경관을 감상하였다. 한참 걸으니, 마음이 편안해지고, 머리가 맑아지는 것 같다. 이런 길을 걸을 기회를 마련해 준 성동문인협회 임원들께 감사한다. <성동문학 16(서울:성동문인협회, 2016)에 수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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