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에 초등학교 동창인 박 형을 만나니, 묵직한 꾸러미를 건네주었다. 의정부에서 농장을 하는 친구가 보내준 은행을 덜어서 가지고 온 것이라고 하였다. 몇 년 전에는 겉껍질을 까서 주었으나, 올해는 까지 못하였다고 하였다. 나는 박 형의 따뜻한 마음에 감사하면서 점심 대접을 하고 헤어졌다.

   집에 돌아와 아내와 식탁에 마주 앉아 은행을 깠다. 내가 은행, 밤, 호두 등을 깔 수 있도록 만들어 놓은 펜치 모양의 기구로 겉껍질을 깨뜨려 놓으면, 아내는 깨진 겉껍질을 벗겨내고 알맹이를 꺼냈다. 은행의 크기에 맞는 홈에 은행을 물리고, 알맞게 힘을 주는 일이 서툴러서 처음에는 알맹이가 깨지기도 하였다. 그러나 시행착오를 거듭한 뒤에 요령을 터득하여 제대로 하였다. 은행 껍질을 까는 일이 쉽지 않은데, 전에 박 형이 많은 양의 은행을 까서 준 일을 생각하니, 새삼 고맙게 느껴졌다. 나는 박 형의 따뜻한 마음에 재삼 감사하면서 은행에 대해 생각하였다.

   은행은 사과나 배와 같은 과일이 아니고, 은행나무에서 열리는 종자(씨앗)이다. 은행은 ‘은빛 나는 살구’라는 뜻에서 은행이라고 하였다고 한다. 은행과 살구씨의 모양이 비슷하기 때문일 것이다. 은행나무는 ‘공손수(公孫樹)’라고도 한다. 20년 이상 자라야 열매를 맺으므로, 할아버지가 심으면 손자가 수확한다는 뜻에서 나온 이름이다. 은행나무를 ‘압각수(鴨脚樹)’라고도 한다. 이것은 은행잎이 오리발을 닮았다 하여 붙인 이름이다.

   은행나무는 예로부터 사찰, 향교, 서원이나 마을 어귀에 많이 심었다. 은행은 수명이 길므로, 수령 1,000년 내외의 은행나무가 많이 있다. 마을 어귀에 서 있는 은행나무는 마을을 수호하는 신목(神木)으로 여겨 마을신앙의 대상이 되기도 하였다. 이런 마을에서는 은행나무의 잎이 싹트는 모양에 따라 그 해 농사의 풍흉을 점친다. 이런 나무에는 “은행나무가 밤에 울면 마을에 재앙이 온다.”거나, “은행나무에 도끼질을 하면 피가 나온다.”는 말이 전해 온다.

   은행나무를 생각하면, 세 곳의 은행나무가 떠오른다. 첫째는 성균관대학교 캠퍼스에 있는 대성전과 명륜당 앞의 은행나무이다. 대학원에 다닐 때 이 나무 앞을 지나노라면 숙연해지곤 하였다. 옛날에 공자가 은행나무 아래에 단을 만들고 제자를 가르쳤다는 고사에서 유래하여 학문을 닦는 곳을 ‘행단(杏壇)’이라고 한다. 뿌리가 무성하여 잘 자라고, 수명이 긴 은행나무의 특성과 이 고사가 결합하여 ‘기초가 튼튼해야 학문을 크게 이루듯 유생들이 이를 본받아 열심히 공부할 것을 당부’하는 의미에서 대성전과 명륜당에 앞에 은행나무를 심었다고 한다. 이런 연유로 은행나무는 학문과 교육 기관을 상징하는 나무가 되었다. 성균관대학교, 일본의 도쿄대학교가 은행잎 문양을 학교의 상징으로 삼은 것이 그 예이다.

   그 다음은 천연기념물 제30호인 용문사 은행나무이다. 대학생일 때 처음 본 뒤로 몇 차례 가 보았다. 수령 1,100년으로 추정되는 이 노거수(老巨樹)를 보면, 그 자태가 웅장하여 신비감마저 든다. 용문사는 신라 진덕여왕 3(649)년에 원효대사가 세웠고, 은행나무는 그 뒤에 중국을 왕래하던 스님이 가져다가 심은 것이라고 한다. 이 나무에는 신라의 마지막 임금인 경순왕의 아들 마의태자(麻衣太子)가 나라를 잃은 설움을 안고 금강산으로 가다가 심었다는 전설과, 의상대사가 짚고 다니던 지팡이를 꽂은 것이 자랐다는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앞 이야기에는 천년을 이어온 신라의 멸망에 대한 아쉬움이 묻어 있고, 뒤 이야기에는 원효대사의 법력을 찬양하는 마음이 담겨 있다.

   그 다음은 인천시 강화군 석모도 낙가산에 있는 보문사의 은행나무이다. 수령 400여 년이 되는 이 은행나무는 암나무로, 이곳에 홀로 서 있다. 그런데도 열매를 맺으니 의아스러웠다. 30여 년 전에 한국교원대학교 대학원생들과 전설 조사 갔을 때 만난 이지훈(당시 67세, 고졸, 전 공무원)씨는 석모도 서쪽 섬에 있는 수나무와 마주 보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십리 넘게 떨어진 섬에 있는 수나무의 꽃가루가 바다를 건너 날아와 가루받이를 한다니, 풍매화(風媒花)인 은행나무의 번식력이 놀랍기 그지없다.

   은행나무는 파란 잎이 돋아있을 때에도 보기 좋지만, 노랗게 단풍이 든 잎이 가을 햇살에 나부끼는 모습은 참으로 곱고 예쁘다. 은행나무는 병해충에 강하고 미세먼지를 저감시키는 등 대기정화 효과가 있다. 그리고 빌로불, 은행산 등을 함유하고 있어 천적들로부터 자기를 지키므로, 병충해에 강하여 잘 자란다. 그래서 여러 곳에서 가로수로 심어 낭만적인 은행나무길을 만들었다. 그러나 은행이 익어 떨어질 즈음에는 육질 외종피에서 나는 악취가 심하다. 그래서 암나무를 수나무로 교체하는 곳도 있다.

   은행에는 카로틴 성분이 있어 기침을 멈추게 하고, 가래를 없애주는 효능이 있다. 비타민, 베타카로틴, 플라보노이드, 미네랄 성분이 있어 각종 질병과 노화를 예방해 주고, 항산화 작용을 하여 활력을 증진시켜 준다. 그리고 뇌기능을 강화하여 기억력, 집중력, 인지능력 향상에 도움을 주어 뇌와 관련된 퇴행성 질환을 완화시켜 준다. 또 징코플라톤, 플라보노이드 성분이 들어 있어 혈액순환을 도와 혈관의 노폐물을 청소하고, 콜레스톨 수치 감소시켜 동맥경화 같은 심혈관질환 예방에 도움을 준다. 레시틴, 엘고스테린 성분은 체내에서 칼슘의 흡수를 도와 뼈를 튼튼하게 해 준다.

   은행은 이런 효능만 있는 것이 아니라 부작용도 있다. 은행에 들어 있는 아미그달린이란 성분은 체내에서 효소에 의해 분해되면서 시안화수소를 생성하여 청색증을 유발하고, 두통을 일으키기도 한다. 심할 경우에는 호흡곤란이 일어나기도 한다. 따라서 은행은 반드시 익혀서 먹어야 하고, 한꺼번에 많이 먹지 말아야 한다. 은행의 하루 섭취량은 어린이 3알, 어른은 10알 이내가 좋다고 한다.

   나는 오래 전에 은행의 효능에 관한 글을 읽고, 은행을 하루에 다섯 알씩 굽거나 쪄서 먹는다. 겉껍질을 까는 일이 번거로워 주로 깐 것을 사다 먹는다. 그런데 은행은 크기, 건조 정도에 따라 맛이 조금씩 다르다. 맛 좋은 은행으로 기억에 남은 것은, 몇 년 전에 공주 갑사 입구에서 할머니한테 산 은행이다. 알이 굵고, 바짝 마르지 않아 부드럽고 맛이 아주 좋았다. 그 다음은 몇 년 전에 박 형이 준 은행이다. 그 은행에는 박 형의 따뜻한 사랑과 정성이 묻어 있어서 더욱 맛이 좋았다.

   아내와 함께 이런 이야기를 하며 은행을 까니, 은행 까는 일이 힘들거나 지루하지 않았다. 깐 은행은 몇 개의 작은 비닐봉지에 나눠 담아 냉동실에 넣었다. 하루에 열 알씩 먹으면 몇 달을 먹을 것 같다. 은행을 깐 날로부터 몇 주 지난 뒤에 한라봉 한 상자가 택배로 왔다. 박 형이 제주도에 사는 지인에게 부탁하여 보낸 것이다. 그래서 오늘은 은행과 한라봉을 먹으며 박 형의 따뜻하고 고마운 마음을 되새겼다. 월남전 참전용사로, 수술을 받은 적도 있는 박 형이 건강관리를 잘 하여 오래도록 따뜻한 우정을 나눌 수 있기를 간절히 기도한다.(2021. 1.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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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며칠 전에 초등학교 동창인 친구가 택배로 보낸 쌀을 받았다. 서울에 살면서 고향에 있는 논을 친척에게 농사짓게 하여 수확한 쌀을 보낸 것이다. 작년에도 보내주어 잘 먹었는데, 금년에도 또 보내주니 고맙기도 하고, 미안하기도 하다. 현관 앞에 놓여 있던 쌀 포대를 들여놓고 바라보며 여러 가지 생각을 하였다.

 

   나는 쌀을 선물로 받은 적이 여러 번 있다. 도시에 사는 제자가 자기 부모님께서 농사지은 쌀을 보내주어 받기도 하였고, 은퇴하여 농촌으로 간 제자가 그 지역에서 나는 쌀을 보내주어 받은 적도 있다. 보내는 사람의 정성이 담겨 있는 선물을 받으면 고맙고 기쁘다. 그런데 나는 쌀을 선물로 받으면 다른 선물을 받았을 때보다 기쁘고 고마운 마음이 한결 더 크게 느껴진다.

 

  오래 전에 쌀 도매상을 하는 분한테 들은 말에 따르면, 서울에서는 경기미(여주, 이천, 포천 등)를 일등급으로 치고, 충청도에서 나는 쌀은 이등급으로 여긴다고 한다. 그러나 나는 충청남도 홍성, 그 중에서도 갈산에서 나는 쌀을 제일로 여긴다. 《동의보감(東醫寶鑑)》에 ‘신토불이(身土不二)’라는 말이 있다. 몸과 땅은 둘이 아니라는 뜻으로, 자신이 사는 땅에서 나는 것을 먹어야 체질에 잘 맞는다는 말이다. 내가 태어나 자란 곳에서 나는 쌀을 먹는 것이 나의 건강에 제일 좋을 것이라는 생각에서 나는 홍성 쌀을 제일로 꼽는다.

 

   고향의 산과 논밭은 내가 어렸을 때 늘 대하던 자연환경이다. 아침에 일어나서 마루에 서면 보이는 것이 넓은 들의 논이었다. 학교에 오갈 때 걷는 오솔길 양편에도, 자동차가 다니던 신작로의 좌우에도 논이 이어졌다. 나는 논의 모습이 계절에 따라 바뀌는 것을 보며 자랐다. 이른 봄에는 두엄을 져다 부어 놓은 모습을 보았고, 얼마 뒤에는 두엄을 흩은 뒤에 물을 대고 쟁기질을 하고, 이어서 써레질한 뒤에 모내기를 하는 모습을 보았다. 모를 심은 뒤에는 벼가 자라는 모습을 보며 즐거워하였고, 벼이삭이 나와 고개를 숙일 때에는 흐뭇한 마음으로 논두렁을 쏘다니며 메뚜기를 잡았다. 겨울철에는 물을 대 놓은 논의 얼음판에서 썰매를 타며 즐거워하였다. 나는 중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두엄을 져 나르는 일, 모를 심는 일, 벼를 베는 일을 하였다. 논은 내 생활의 터전이었고, 삶의 일부였으며, 아름다운 추억을 간직한 공간이다. 이런 논에서 수확한 쌀이 나와 정서적으로 유대감이 있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신 우리 집은 가난하였으므로, 쌀이 넉넉하지 못하였다. 그래서 늘 쌀을 아껴 먹어야 했다. 쌀을 아끼기 위해 겨울철에는 고구마로 한 끼를 때우기도 하였고, 보릿고개를 앞두고는 채소를 넣고 죽을 쑤어서 끼니를 해결하기도 하였다. 이런 과정을 겪다 보니, 자연히 쌀을 소중하게 여기게 되었다. 이런 마음이 내 의식 속에 잠재되었으므로, 아이들을 키울 때에는 가을에 일 년 먹을 쌀을 사다가 방에 쌓아놓아야 마음이 놓이기도 하였다. 이런 쌀을 선물로 받았으니, 어찌 기쁘고 고맙지 않겠는가!

 

  나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고향을 떠날 때 논밭을 다 정리하였다. 고향에는 누님 한 분을 빼고는 가까운 친척이 없다. 그런데다가 학생 때에는 공부하느라고 바빠서, 교수가 된 뒤에는 가르치고 연구하는 일에 몰두하느라 고향에 자주 찾아가지 못하였다. 그러나 마음만은 농사지으며 학교 다니던 때를 잊지 않고 있다. 고향의 산과 들은 따스한 마음을 느끼게 해 주는 아련한 그리움의 공간이고, 아름다운 추억이 서린 곳이다. 그래서 고향의 논에서 수확한 쌀은 몸에 영양을 주는 동시에 고향에 대한 추억과 그리움을 일깨워주는 보약이다. 나의 몸과 정신의 기능을 조절하고, 저항 능력을 키워 주며 기력을 보충해 주는 보약을 보내주는 친구가 있다는 것은 참으로 복되고 귀한 일이다. 이런 친구가 있다는 것에 뿌듯함과 함께 자랑스러움을 느낀다.

 

   서울에서 초등학교를 다닌 지인 중에는 내가 초등학교 동창 모임 갖는 것을 희한한 일로 여기기도 하고, 부러워하기도 한다. 그들은 어린 시절부터 서울에서 살았으니, 서울에서 자리 잡고 사는 데에 큰 어려움이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농촌 출신들은 서울에 와서 자리 잡을 때까지 온갖 시련과 고통을 견디고 이겨내야 했다. 이를 이기지 못한 사람들은 다시 고향으로 내려갔다. 따라서 서울서 자리 잡은 초등학교 동창들은 온갖 역경을 이겨낸 용사들로, 보람과 자부심을 지니기에 부족함이 없는 사람들이다. 이런 사람들이 동창회를 만들어 노년이 되도록 자주 만나며 정을 나누는 것은 자연스럽고, 자랑스러운 일이라 하겠다.

 

   이번에 쌀을 보내준 친구는 초등학교를 졸업한 뒤에 서울에 와서 공부를 하였다. 직장 생활을 하다가 건설회사를 설립하여 많은 어려움과 실패를 겪기도 하였으나 마침내 성공한 의지의 한국인이다. 주관이 뚜렷하고, 생각이 바르며, 다른 사람을 배려하는 마음도 넉넉한 사람이다. 그는 부모님의 유산으로 받은 논에서 생산한 쌀을 혼자 차지하는 것이 미안하다며 고향 친구들에게 나누어 준다. 그의 정겹고 따뜻한 마음이 고맙기 그지없다. 이 친구가 얼마 전부터는 하루에 몇 가지씩 약을 먹고, 지팡이를 짚고 다닌다. 그렇지만 그는 매사를 긍정적으로 생각하며 초등학교 친구들의 모임에 빠지지 않고 참여하고, 소모임을 주관하기도 한다. 이 친구가 건강관리를 잘 하여 오래도록 우정을 나눌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2020. 12.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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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근에 최운식 교수(한국교원대학교 명예교수)가 쓴『성경 이야기와 한국 이야기』가 보고사에서 출간되었다. 이 책에서는 성경 이야기와 대응되는 한국 이야기를 비교하여 공통점과 차이점을 찾아보고, 이들 이야기가 지닌 교훈적・신앙적 의미를 정리하였다.

   이야기는 어떤 사물이나 사실, 현상에 대하여 일정한 줄거리를 가지고 하는 말이나 글이다. 이야기는 사실을 바탕으로 만들어질 수도 있고, 이야기를 만드는 사람의 상상력이나 영감에 의해 꾸며질 수도 있다. 

  성경에는 많은 이야기가 수록되어 있다. 이들 이야기 중에는 이스라엘에서 오래 전부터 전해오는 것도 있고, 성경을 기록할 당시에 일어난 일을 적은 것도 있을 것이다. 이들 이야기에는 하나님의 인간에 대한 사랑과 은총, 우주 만물을 주관하시는 깊은 뜻과 계획이 녹아 있다.

   한국의 이야기는 한국인이 오래 전부터 생활 속에서, 공동의 의식에 의해 형성된, 일정한 구조를 가진 이야기이다. 그 중에는 진실하고 신성하다고 믿는 ‘신화’도 있고, 실제로 있었다고 주장하며 증거물을 제시하는 ‘전설’도 있으며, 흥미 위주의 ‘민담’도 있다. 그 속에는 흥미와 함께 우리 민족의 역사・신앙・관습・세계관, 꿈과 낭만・웃음과 재치, 또는 생활을 통해서 얻은 교훈이나 역경을 이겨내는 슬기와 용기 등이 문학적으로 형상화되어 있다. 이들 이야기는 전해 오는 동안 민족적 자부심과 긍지도 갖게 해 주었을 것이다.

   성경 이야기와 한국 이야기를 비교하는 것은, 성경 이야기의 내용을 바르게 이해하고, 이질감을 해소하는 데에 큰 도움을 줄 수 있다. 외래종교인 기독교의 성경 이야기를 바르게 이해하는 데에는 한국 이야기에 대한 이해가 전제될 때 더욱 효과적이기 때문이다. 두 이야기를 잘 이해하고, 공통점과 차이점을 알게 되면, 성경 이야기가 지니고 있는 신앙적 의미와 가치 이해에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을 것이다.

   이 책은 다음의 세 가지 요령으로 집필하였다. 첫째, 성경에 나오는 이야기를 바르게 이해할 수 있도록 『새번역 성경』의 내용을 원문 그대로 적고, 이해를 돕기 위한 설명을 곁들였다. 둘째, 한국 이야기를 소개하고, 한국설화 연구의 성과를 압축하여 설명함으로써 이를 바르게 이해할 수 있게 하였다. 셋째, 두 이야기를 비교하여 공통점과 차이점, 이야기가 지니고 있는 신앙적․교훈적 의미를 정리하였다. 이 과정에서 성경 이야기가 지니고 있는 신성성과 신앙적 의미도 정리하였다.

   저자는 이 책을 집필하면서 많은 교회에서 사용하고 있는 『성경전서 개역개정판』을 제쳐두고 『새번역 성경』을 텍스트로 한 까닭을 다음과 같이 적었다. “『성경전서 개역개정판』은 어려운 한자어와 모호한 표현, 쉼표와 마침표도 없이 길게 쓴 문장, 잘못 이해할 소지가 있는 표현, 뜻을 분명하게 드러내지 못하는 표현, 현대에 쓰지 않는 표현, 표현이 적절하지 않은 문장이 많아 읽기에 불편하고, 내용 이해에 어려움이 많다. 그래서 일반 교양인의 경우에는 이해하기 어려운 글이 될 수 있으므로, 이런 문제가 없는 『새번역 성경』을 텍스트로 삼았다”라고 하였다.

   이 책에서 다룬 이야기는 구약에서 천지창조와 한국의 개벽신화, 노아의 홍수와 홍수 이야기, 소돔과 고모라의 멸망과 장자못 이야기, 아들을 제물로 바친 아브라함과 인신공희 이야기, 요셉의 해몽과 해몽 이야기, 버려진 아이 모세와 주몽, 문설주에 바르는 양의 피와 동지팥죽, 홍해를 건넌 모세와 주몽, 아론의 싹 난 지팡이와 부석사 선비화, 도피성과 소도, 남의 아내를 빼앗은 다윗과 관탈민녀 이야기, 나병을 고친 나아만과 송시열, 숨겨진 왕자 요아스와 궁예, 니느웨로 간 요나와 거타지 이야기 등이다. 신약에서는 예수 탄생과 건국 시조, 아기 예수 살해 기도와 아기장수 이야기, 부자와 거지 나사로와 저승재물 차용 이야기, 회심한 삭개오와 자린고비, 귀신을 쫓은 예수와 처용, 성경의 부활과 재생 이야기 등이다.

   저자는 평생 한국 설화와 민속을 연구한 분으로, 이 분야의 최고 권위자이며, 어려서부터 신앙생활을 해 왔고, 현재는 원로장로로 봉사하고 있다. 저자는 한국 이야기를 공부한 기독교인 중 누군가는 해야 할 일이라는 사명감으로 이 책을 집필하였다고 한다.

   이 책은 한국 이야기의 이해를 바탕으로, 성경 이야기를 바르게 이해하는 데에 큰 도움을 줄 것으로 확신한다. 혹 성경 이야기에 대응되는 한국 이야기가 있는 것을 몰랐던 기독교인에게는 한국 이야기를 통해 한국인의 의식과 가치관을 이해함으로써 이를 기독교 선교에 활용하는 지혜를 얻을 수도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관심 있는 분들의 일독을 권한다.

     *글쓴이-김기창(전 백석대학교 국문과 교수, 백석대학교회 원로장로)

   코로나19의 만연으로 사회적 거리두기가 강화된 요즈음 나의 일과는 매우 단조롭다. 지하철을 타야하고, 식당에 가서 점심을 사먹는 일이 부담스러워 연구실에도 자주 나가지 않는다. 그러다 보니, 집에서 책을 읽다가 오후에 집 앞에 있는 응봉공원에 가서 걷는 일이 내 일과의 전부이다.

   숲속에 자리 잡은 공원의 타원형 보행로(둘레 1,100m 가량) 좌우의 평지와 언덕에 있는 나무들의 모습이 달라졌다. 얼마 전까지만 하여도 상록수가 아닌 나무들의 잎은 단풍이 들어 곱더니, 이제는 누렇게 변한 잎을 떨어뜨리고 맨 가지를 드러내기 시작하였다. 내가 공원을 걷는 시간과 새들이 움직이는 시간이 다르기 때문인지 자주 눈에 띄던 까치와 비둘기는 보이지 않고, 참새가 떼를 지어 날아와 먹이를 찾는다.

   오랜만에 참새를 보니, 참으로 반가웠다. 통통하게 살이 찐 참새들은 가벼운 몸놀림으로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먹이를 찾다가는 후루룩 소리를 내며 날아올라 나무에 앉는다. 조금 뒤에는 다시 내려와 가벼운 몸놀림으로 먹이를 찾는다. 이런 참새의 모습을 보니, 귀엽고 사랑스럽다. 어린아이처럼 만져보고 싶은 마음이 들어 가까이 다가가니, 또 후루룩 소리를 내며 날아간다.

   어린아이 주먹보다 작은 참새들이 떼를 지어 내려와 촐싹대는 모습을 보니, 어린 시절에 덫을 놓아 참새를 잡던 일이 떠오른다. 그 시절에는 참새가 참으로 많았다. 숲에서 작은 벌레나 풀씨를 찾아먹던 참새들이 겨울철이면 농가로 찾아들었다. 참새들은 안마당은 물론 토방, 헛간까지 다가오고, 닫힌 문의 틈새로 부엌에 들어가 먹이를 찾기도 하였다.

   이때 나는 참새를 잡을 궁리를 하였다. 참새들이 자주 오는 안마당에 싸리로 만든 발채(짐을 싣기 위하여 지게에 얹는 소쿠리 모양의 물건)를 놓고, 아래쪽은 돌이나 통나무로 눌러놓는다. 발채 밑에는 벼나 쌀을 조금 뿌려 놓고, 발채 머리를 한 뼘쯤 되는 막대기로 받쳐 세운다. 그 막대기의 아래쪽에 가늘고 질긴 실을 매어 방안으로 가지고 들어간다. 그리고는 방문에 붙인 유리에 눈을 대고, 발채 주변을 주시한다. 참새가 날아와 발채 근처를 서성이면, 나는 바짝 긴장되어 가슴이 콩닥거렸다. 정신을 집중하여 그곳을 응시하다가 참새가 곡식을 먹으려고 발채 밑으로 들어가면, 얼른 실을 잡아당긴다. 그래서 발채가 앞으로 수그러질 때 참새 한두 마리가 발채 밑에 깔린다.

   나는 기뻐 소리를 지르며 달려 나가 발채를 조심스레 들어 올리며 참새를 붙잡았다. 참새의 가슴이 팔짝팔짝 뛰는 것이 손에 느껴졌다. 참새의 발에 실을 묶은 뒤에 방안에 놓으면, 이리저리 날아다니다가 멈춘다. 방바닥에 놓으면 이리저리 폴짝폴짝 뛰어다닌다. 이렇게 촐싹거리는 참새의 몸짓은 아주 귀엽고 정겹게 느껴졌다. 나는 참새가 배가 고플 것이라 생각하여 쌀을 물과 함께 주었으나, 통 먹지 않았다. 참새를 빈 방에 두고 하룻밤을 지낸 뒤에 아침에 가보니, 참새는 숨을 거두었다. 나는 죽은 참새가 불쌍하여 눈물을 흘리며 땅에 묻어주었다. 그 뒤로도 한두 번 더 참새를 잡아서 가지고 놀다가 놓아주었다. 그 때 내 손을 벗어나는 참새의 날갯짓은 힘이 넘쳤다.

   참새와 관련된 옛날이야기 중에 「볍씨 한 알」이 있다. 옛날에 부자 노인이 세 며느리에게 선물이라면서 봉투 하나씩을 주었다. 세 며느리가 열어 보니, 볍씨가 한 알씩 들어 있었다. 이를 대수롭지 않게 여긴 첫째와 둘째 며느리는 버리거나 까서 먹었다. 셋째며느리는 곰곰이 생각한 끝에 발채로 새덫을 만들고, 볍씨 한 알을 놓아 참새 한 마리를 잡았다. 그 때 이웃집 노파가 약에 쓴다면서 참새를 달걀 하나와 바꾸자고 하여 바꿨다. 시아버지가 병아리를 깨려고 어미닭에게 알을 품게 할 때, 그 달걀에 표시를 하여 함께 품게 하였다. 그 알에서 깬 병아리가 자라 암탉이 되어 달걀을 낳았다. 달걀을 모아 팔아서 암탉 한 마리를 더 사서 길러 알을 낳게 하였다. 그 뒤에 암탉과 달걀을 팔아 새끼돼지를 사서 기르고, 돼지의 숫자가 늘어나자 이웃에 수내(수나이, 가축을 기르게 하고, 이익을 나눔)를 주어 길렀다. 그 돼지를 팔아 송아지를 사서 기르고, 소가 늘자 이웃에 수내를 주어 길렀다. 그래서 10년 뒤에는 논 열 마지기를 샀다. 이를 본 시아버지는 셋째며느리를 크게 칭찬하고, 재산을 셋째 아들․며느리에게 물려주었다고 한다.

   볍씨 한 알과 작은 참새를 연결시킨 이 이야기는 작은 일에 충실하고, 매사를 계획을 세워 철저히 하라는 교훈을 내포하고 있다. 공원에서 참새 떼를 보는 순간 나는 참새를 잡아 가지고 벗 삼아 놀던 어린 시절의 아련한 추억과 함께 이 옛이야기가 떠올랐다. 이런 추억을 떠올리니, 오랜만에 보는 참새가 더욱 반갑고, 정겹게 느껴졌다.

   참새는 우리 선조들의 생활과 관련이 깊은 새였으므로, 참새와 관련된 관용구나 속담이 많다. 음식을 조금씩 여러 번 먹는 모양을 비유적으로 이를 때에는 ‘참새 물 먹듯’이라고 한다. 그만그만한 것들 가운데에서 굳이 크고 작음이나 잘잘못을 가리려고 할 때나, 자질구레한 말을 하기 좋아하는 사람을 비꼴 때에는 ‘참새가 기니 짧으니 한다.’라고 한다. 욕심 많은 사람이 이끗(재물의 이익이 되는 실마리)을 보고 가만있지 못하거나, 자기가 좋아하는 곳은 그대로 지나치지 못함을 비유적으로 말할 때에는 ‘참새가 방앗간을 그저 지나랴’라고 한다. 아무리 약한 것이라도 너무 괴롭히면 대항한다는 것을 말할 때에는 ‘참새가 죽어도 짹 한다.’라고 한다. 몸은 비록 작아도 능히 큰일을 감당함을 비유적으로 이를 때에는 ‘참새가 작아도 알만 잘 깐다’라고 한다. 실력이 없고 변변치 아니한 무리들이 아무리 떠들어 대더라도 실력이 있는 사람은 이와 맞붙어 함께 다투지 아니한다는 뜻을 드러낼 때에는 ‘참새가 아무리 떠들어도 구렁이는 움직이지 않는다’라고 한다. 참새가 작다는 것을 전제로 하여 만든 이 말들은, 참새가 우리 조상들의 삶과 밀접한 관계를 맺으며 살아왔음을 말해 준다.

   참새는 텃새로 우리의 생활과 밀접한 관계를 맺으며 살아왔다. 가을에는 농작물에 피해를 주지만, 여름에는 해로운 곤충을 잡아먹어 사람에게 도움을 주는 이로운 새이기도 하다. 어린 시절에 농촌에서 정겹게 보던 참새를 서울의 공원에서 보니 감회가 새롭다. 요즈음에는 술꾼들이 즐기던 ‘참새구이’가 사라져서 다행이다. 참새가 도시에서도 사람과 친밀하게 지낼 수 있도록 잘 보호하였으면 좋겠다.(2020. 12.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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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며칠 전에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원당동에 있는 고려 제34대 공양왕릉(恭讓王陵)을 찾았다. 이 능은 쌍릉 형식이며, 두 봉분 앞에 ‘고려 공양왕’, ‘순비 노씨(順妃盧氏)’라는 묘표가 있다. 두 봉분 앞 가운데에 조선 고종 때 세운 ‘고려공양왕고릉(高麗恭讓王高陵)’이란 표석이 있고, 그 앞에 석등과 석호·문인석·무인석이 서 있다. 조금 더 앞에는 ‘개와 먹이그릇’ 석상이 있고, 아래쪽에 작은 연못이 있다. 이 능은 《조선왕조실록》, 고양군지 등의 기록을 근거로, 1970년 2월 28일에 사적 191호로 지정되었다. 고양시 향토문화보존회에서는 고양시의 지원을 받아 매년 공양왕고릉제를 봉행하고 있다. 왕릉 뒤에는 공양왕의 외손인 정(鄭)씨와 신(申)씨의 무덤들이 있다.

   공양왕릉은 강원도 삼척시 근덕면 궁촌리에도 있다. 석축으로 굽을 돌린 무덤 세 기 중 큰 것은 공양왕의 능이고, 작은 것은 두 아들의 무덤이라고 한다. 공양왕은 삼척에서 교살되어 이곳에 묻혔다가 고양으로 옮겨갔다고도 한다. 이 무덤에 관하여는 민간에서 구전되어 오다가 현종 3년(1662)에 허목이 쓴 척주지와 철종 6년(1855)에 김구혁이 쓴 척주선생안에 기록되었다. 이 능은 조선 현종 3년 가을에 삼척 부사 이규현이 개축하였고, 그 뒤에 지방 유지들이 봉축(封築)하였다. 1995년 9월 18일에 강원도 기념물 제71호로 지정되었다. 이곳 사람들은 3년마다 제를 올려 공양왕을 추모하고 있다.

  고려 말에 위화도회군을 계기로 실권을 장악한 이성계 중심의 개혁세력은, 공민왕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우왕과 창왕이 왕씨가 아니고, 요승 신돈의 자식이라 하여 폐위하고, 강릉과 강화로 쫓아냈다. 그리고 1389년에 20대 신종의 6대손인 왕요(王瑤)를 왕위에 앉히니, 그가 고려의 마지막 왕인 공양왕이다.

  공양왕(1345~1394)은 왕손이긴 하지만, 왕위 승계에서 멀어진 지 오래인지라 왕위에 뜻을 두지 않고 안락한 생활을 하였다. 그런데 그가 45세 되었을 때, 개혁세력인 이성계 쪽에서 왕위에 오를 것을 제의하였다. 그는 처음에는 사양하였으나, 그들의 강권을 뿌리치지 못해 왕위에 올랐다. 왕좌는 수년간 온갖 노력을 하고, 수단과 방법을 다 동원하고서도 뜻을 이루지 못하는 경우가 많은, 오르기 힘든 자리이다. 그런데 그는 뜻하지 않았는데도 절대 권력을 가진 지존(至尊)의 자리에 올랐다. 이것은 영광스럽고 복된 일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행운이라기보다는 비운의 시작이었다.

  개혁세력은 전왕과 고려 충신들을 숙청하는 한편, 이성계의 공적을 선양하려 하였다. 이것이 명분과 민심을 얻어 역성혁명(易姓革命)을 완성하는 길이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이 일을 대신해 줄 해결사로 왕요를 선택하여 왕좌에 앉혔다. 조선왕조실록 <태조실록>을 보면, 신흥세력의 윤회종(尹會宗)이 우왕과 창왕의 목을 베야 한다는 소(疏)를 올린다. 그러자 힘이 없는 공양왕은 이를 허락하여 왕명으로 목을 베게 하였다. 그리고 이성계의 공적을 기리는 교지를 내리고, 이성계를 고려 개국 공신인 배현경의 예로 중흥공신에 책록한다. 또 이방원이 고려 충신 정몽주를 살해한 일도 적당히 얼버무려 매듭짓는다. 이처럼 개혁세력은 허울뿐인 공양왕의 왕명을 빙자(憑藉)하여 반대파들을 처단하였다. 이것은 자기들의 손에 피를 묻히지 않고 반대파를 척결하는 차도살인(借刀殺人)의 음험한 계략이었다.

  공양왕은 신변에 위험이 닥칠 것을 예감하고, 이성계와 동맹을 맺어 안전을 도모하려고 하였다. 그래서 사예(司藝) 조용(趙庸)을 시켜 이성계와 맹약을 맺는 문서의 초안을 잡게 하였다. 그리고 이성계의 집으로 거둥하여 술자리를 베풀고, 이성계와 더불어 동맹을 맺으려고 하였다. 그러나 세력을 굳히고, 장애물을 완전히 제거한 이성계는 1392년 백관의 추대를 받아 수창궁에서 왕위에 올랐다. 이렇게 되니, 공양왕은 토끼를 잡은 뒤의 사냥개 신세가 되었다. 그는 곧바로 폐위되었고, ‘공양군(恭讓君)’으로 강등되었다. 그리고 원주와 간성을 거쳐 삼척에 안치(安置)되었다가 두 아들과 함께 교살되었다.

  개혁세력은 공양왕을 앞세워 우왕과 창왕을 죽이고, 고려 충신들을 제거하였다. 그런 뒤에 공양왕을 두 아들과 함께 죽여 제대로 된 무덤도 없는 비운의 주인공으로 만들었다. 이를 미안하게 생각한 조선 태종은 예조의 건의를 받아들여 고양에 있는 그의 무덤에 ‘고려공양왕고릉’이라는 능호를 내렸다. 그 뒤에 세종은 안성의 청룡사에 봉안했던 공양왕의 어진(御眞)을 고양의 무덤 곁에 있는 암자에 이안(移安)하라고 명하였다. 이것은 태조 이성계가 공양왕을 이용만하고 버린 것에 대한 미안함을 조금이나마 가볍게 하려는 뜻에서 취한 조치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고양의 공양왕릉에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해 온다. 공양왕은 개혁세력이 자신을 죽일 것을 예감하고, 몰래 궁을 빠져나와 남쪽으로 도망쳤다. 산속에서 불빛을 보고 찾아가 작은 절에 이르렀다. 그가 왕임을 알아차린 스님은 크게 놀라면서, 동쪽으로 십리 쯤 떨어진 곳에 있는 누각에 가 있으라고 하였다. 왕과 왕비는 그 누각에서 스님이 날라다 주는 음식으로 연명하였다. 여기에서 ‘식사동(食寺洞)’이란 마을 이름이 생겨났다. 어느 날, 이웃사람이 보니 왕이 귀여워하던 청삽살개가 연못가에서 한참을 짖은 뒤에 물속으로 들어가 나오지 않았다. 이상히 여겨 연못의 물을 품고 보니, 왕과 왕비가 죽어 있었다. 사람들이 애석히 여겨 두 사람을 땅에 묻고, 봉분을 만들어 주었다. 그리고 무덤 앞에 충성과 의리를 지킨 개의 석상을 만들어 세웠다고 한다.

  공양왕의 비극적인 최후를 안타까워하는 백성들의 마음이 담긴 이 이야기는 세 가지 의문점을 풀어 준다. 첫째 이곳에 공양왕릉이 있게 된 내력을 설명해 준다. 둘째 다른 왕릉과 달리 문인석과 무인석 앞에 개의 석상을 세워놓은 까닭을 해명해 준다. 셋째 무덤 아래에 작은 연못이 있는 이유를 말해 준다.

  권좌에 뜻이 없던 공양왕은 이성계 세력에 떠밀려 왕위에 올라 약 3년 동안 역성혁명을 꾀하는 그들의 꼭두각시가 되어 반대 세력을 척결하는 해결사 역할을 하였다. 악역을 마친 그는 두 아들과 함께 죽임을 당하는 비운을 맞았다. 무덤이 둘인 것도 그의 비운을 말해 준다. 세월이 흐르고 보니, 그를 이용하던 세력도, 이용을 당한 그도 한줌의 흙이 되고 말았다. 참으로 무상한 것이 정치권력이다. (2020. 11.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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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람이나 사물을 부르는 말을 ‘호칭어(呼稱語)’ 또는 ‘부름말’이라고 한다. 우리말의 호칭어는 다양하므로, 바로 알고 써야 한다. 호칭어의 뜻과 용례를 바로 알고 쓰는 사람을 보면, 그에게서 교양미를 느끼게 된다. 그러나 이를 잘못 쓰는 사람의 말이나 글을 대하게 되면 신경에 거슬리고, 그 사람의 어휘력 부족에 안타까움을 느끼게 된다. 이런 경우는 잊히지 않고 오래 기억에 남는다. 내 기억에 남은 여러 사례 가운데 몇 가지만 적어본다.

   얼마 전에 유명인사와 그의 친족이 관련된 사건이 신문과 방송에 오르내린 적이 있다. 그 때 언론은 ‘유명인사 사촌형의 아들’을 ‘5촌 조카’라고 하였다. 사촌형의 아들을 이르는 ‘당질(堂姪)’ 또는 ‘종질(從姪)’이라는 두 음절의 말이 있는데, 왜 언론에서는 그 말을 쓰지 않고 ‘5촌 조카’라고 쓰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형제의 아들딸은 ‘조카[또는 질아(姪兒)]’라고 하고, 사촌형제의 자녀는 ‘당질’이라고 한다. 아버지의 형제자매는 ‘백부(또는 큰아버지)․숙부(또는 작은아버지)’, 고모이다. 아버지의 사촌형제자매는 당숙(堂叔), 당고모(堂姑母)이다. 나와 아버지 형제의 자녀는 종형제로 4촌이고, 아버지 사촌형제의 자녀는 재종(再從)으로 6촌이다. 남자는 누이의 아들딸을 생질(甥姪)이라 하고, 여자는 언니나 여동생의 아들딸을 이질(姨姪)이라고 한다. 이렇게 적절한 호칭어가 있는데, 요즈음에는 이런 말을 잘 쓰지 않고 길게 풀어서 말한다. 한자말이어서 어렵기도 하지만, 핵가족 시대가 되어 이런 호칭어를 쓸 친족이 없기 때문에 잊혀가는 것 같아 씁쓸한 느낌이 든다.

   얼마 전에 온라인 서비스(SNS)에 올린 글 중에 ‘저의 부인이 소천하였습니다’라는 글이 눈에 띄었다. 나는 의아하여 다시 들여다보았으나, 분명 그렇게 적혀 있었다. ‘부인(夫人)’이란 말은 ‘남의 아내를 높여 이르는 말’이다. 예전에는 사대부 집안의 남자가 자기 아내를 부인이라고 부르기도 하였지만, 남에게 말할 때는 쓰지 않았다. 부인은 고대 중국에서는 천자의 비(妃) 또는 제후의 아내를 이르던 말이다. 고려ㆍ조선 시대에는 외명부의 봉작(封爵) 가운데 하나로, 남편이나 아들의 품계에 따라 그 아내와 어머니를 봉하였다. 이런 점을 따져 볼 때 다른 사람에게 자기 아내를 이르는 말로 부인이라고 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 ‘저의 부인’이라기보다는 ‘저의 아내(처, 내자)’라고 쓰는 것이 좋았을 터인데, 황망 중에 실수를 하여 여러 사람에게 교양 없음을 드러내고 말았다.

   호칭어를 잘못 쓴 일을 이야기하다 보니, 어느 교회에서 담임목사의 목회 30주년 기념식을 할 때의 일이 떠오른다. 식순에 그 자리에 참석하신 담임목사의 아버님께 꽃다발을 드리는 순서가 있었다. 그 때 기념식을 진행하는 부담임목사가 “다음은 담임목사님의 ‘선친(先親)’께 꽃다발을 드리는 순서입니다.”라고 말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나는 등에서 땀이 흐를 정도로 민망하고, 얼굴이 화끈거렸다. 선친이란 ‘남에게 돌아가신 자기 아버지를 이르는 말’이다. [남에게 돌아가신 자기 어머니를 이를 때에는 ‘선비(先妣)’라고 한다.] 그러므로 제삼자인 젊은 목사가, 살아계셔서 기념식에 참석하신 담임목사의 아버지를 ‘선친’이라고 하는 것은 아주 부적절한 표현이다. 진행을 맡은 젊은 목사는 ‘선친’이란 말을 남의 아버지를 높여 부르는 말로 알았던 모양이다. 모르면 용감하다는 말이 헛말이 아님을 느끼게 하였다. 담임목사의 아버지를 높여 말하려면, 한자말로 ‘목사님의 춘부장’이라고 하든지, 쉬운 말로 ‘목사님의 아버님(또는 어르신)’이라고 하였으면 좋았을 것이다.

   TV에서 대정부 질문에 나선 국회의원이 “00당 00지역구 국회의원 ‘000 의원’입니다.”라고 자기소개 하는 것을 보았다. 또, 목사가 여러 사람이 모인 자리에서 자기소개 하기를 “00교회 담임목사 ‘000 목사’입니다.”라고 하는 말을 들었다. 한국인은 상대방을 높이는 뜻에서 이름 뒤에 직명을 붙이고, 끝에 ‘님’자를 붙여 부른다. 이것은 상대방을 높여 부르려는 마음에서 생긴 것으로, 오래 전부터 전해 오는 관습이다. 그러나 자기 자신을 말할 때에 위에 적은 국회의원이나 목사처럼 자기 이름 뒤에 직명을 말하면, 자기 스스로를 높이는 것이 되어 실례가 된다. 따라서 남에게 자기를 말하면서 직명을 밝힐 필요가 있을 때에는 직명을 앞에, 이름을 뒤에 두어 ‘의원 000’, ‘목사 000’라고 해야 자기를 낮추는 겸손한 표현이 된다. 상대방이 직위를 알 경우에는 직명은 생략하고 이름만 말하면 된다. 이를 지키지 않으면 겸손을 모르는 교만한 사람으로 인식되기 쉽다.

   호칭어는 자기의 말이나 글이 언론에 노출되는 경우는 말할 것도 없고, 온라인 서비스에 올리는 글에도 잘못 쓰는 일이 없어야 한다. 호칭어를 잘못 사용하면, 자기의 무교양을 드러냄은 물론, 국어 실력을 의심받게 된다. 그에 더하여 대인관계가 불편하게 될 수도 있다. 그러므로 호칭어의 뜻과 용례를 바로 알고 쓰려는 노력을 게을리 해서는 안 된다. 이런 노력은 올바른 국어생활을 위해, 원만한 인간관계 지속을 위해 필요한 일이다. 잘 모를 때에는 알 만한 사람에게 묻거나, 국어사전을 찾아보며 익히면 된다. 호칭어를 바르게 알고 쓰는 것을 사소한 일이라고 무시하지 말고, 늘 관심을 기울여 실수함이 없도록 해야겠다. (2020. 11.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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