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묵칼레는 데니즐리(Denizli)l에서 북쪽으로 약 20km 들어간 곳에 있는, 인구가 2,500 명 정도 되는 작은 도시이다. 이곳은 자연이 만들어놓은 신기한 경치와 함께 고대 유적을 볼 수 있으며, 온천수에 목욕을 하고 쉴 수 있는 곳이어서 터키를 여행하는 사람에게 아주 인기가 있는 곳이다.

   파묵칼레(Pamukkale)‘Pamuk(목화)’‘kale()’가 합해진 말로, ‘목화의 성()’이란 뜻이다. 아주 오랜 옛날부터 칼슘 성분이 많은 온천물이 언덕 아래로 흘러내리는 동안 석회 성분이 침전되고 응고되어 장관(壯觀)을 이루고 있는데, 그 모습이 목화송이가 피어 있는 성()과 같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파묵칼레의 옛 이름은 히에라폴리스(Hierapolis), 성경 <골로새서> 416절에서 언급되는 고대 도시 히에라볼리이다. 히에라폴리스는 기원전 190년경에 페르가몬 왕국의 에우메네스 2(B.C. 197~159년 재위)가 세웠다. 이 도시의 이름은 페르가몬 왕가의 시조인 텔레포스(Telephos)의 부인 히에로(Hiero)’에서 따온 것이라고 한다. 한편, 이 도시에 유난히 신전이 많아 성스러운 도시라는 뜻으로 히에라폴리스라고 불렀다고 하기도 한다. 히에라폴리스는 B.C. 129년에 로마의 속주가 되었다. B.C. 17년에 지진이 있었고, 네로 황제가 다스리던 A.D. 60년에 더 큰 지진이 있어 크게 파괴되었다. 네로 황제는 재정적으로 지원하여 이 도시를 새로 건설하다시피 하였다. 지금 볼 수 있는 폐허의 유적들은 이 시대의 것들이다.

   히에라폴리스의 온천수는 심장병, 소화기장애, 신경통 등에 특수한 효과가 있다고 전해 온다. 그래서 로마 시대에는 황제를 비롯한 귀족층과 부유층의 휴양지로 이름을 날렸다. 로마의 황제들도 이곳을 찾았는데, A.D. 129년에는 하드리아누스 황제, 215년에는 카라칼라 황제, 370년에는 발렌스 황제가 이곳을 다녀갔다고 한다. 로마의 정치가이며 웅변가였던 키케로로 이곳에 와서 서사시와 연설문을 썼다고 한다.

   이곳은 온천 외에 구리 세공과 양모 산업, 카펫 산업, 염색 공업, 대리석 산지로 유명하였다. 그래서 비잔틴 시대에 크게 번영하였는데, 당시 인구가 약 10만 명이나 되었다고 한다. 그 후 아랍인의 침입, 비잔틴 제국과 셀주크 투르크 사이의 전투 등으로 쇠퇴하기 시작하였다. 12세기에 이곳을 점령한 셀주크 투르크는 이곳의 이름을 파묵칼레로 바꾸었다. 그리고 주민들을 이웃 도시인 데니즐리로 강제 이주시켰다. 1334년에 대지진이 일어나 도시가 파괴되고, 남아 있던 주민들마저 떠났다. 그래서 이곳은 완전히 폐허가 되어 잊혀졌었는데, 19세기에 시작된 발굴 작업으로 폐허는 다시 빛을 보게 되었다.


     석회붕(石灰棚)

   마을 뒤편에 계단처럼 형성된 하얀 석회층이 있는데, 이곳이 파묵칼레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이 석회층은 진 델리이라고 하는 굴에서 흘러내리는 온천수가 비탈진 언덕 아래 바위로 흘러내리면서 석회분이 침전되고 응고되어 바위 표면을 덮어 버렸다. 석회 성분이 많은 섭씨 33~36도의 온천수가 바위를 적시며 흐르는 동안 석회가 침전되고 응고되어 형성된 석회층이 마치 하얀 목화꽃이 겹겹이 피어 있는 것과 같다. 이 석회층은 약 4.9를 덮고 있는데, 해마다 1mm 정도 증가한다고 한다. 지금 있는 석회층의 두께를 거꾸로 계산해 보면, 14천년 정도 되었다고  한다.

   석회붕에 가는 길은 마을의 아래쪽에서 올라가는 길도 있고, 위쪽에서 내려가는 길도 있다고 하는데, 나는 마을 위쪽에 있는 매표소를 거쳐 들어갔다. 석회층 가까이 가니, 안내자가 신발을 벗으라고 한다. 신발과 양말을 벗은 뒤에 바지를 걷어 올리고 물에 들어가니, 넉넉하게 흐르는 물이 아주 따뜻하게 느껴진다. 아래쪽을 내려다보니, 하얀 석회층이 연이어 보이고, 온천수가 모여 이룬 파란 연못이 여러 군데 보였다. 석희층이 끝나는 곳에는 농작물이 자라는 밭이 있고, 그 끝에 집들이 보인다. 물길을 따라 내려가다가 뒤로 눈을 돌려 급경사를 이룬 언덕을 보니, 높고 긴 절벽이 빙벽(氷壁)처럼 보인다. 자세히 보니, 햇빛을 받아 반사하면서 온갖 모양을 자랑한다. 건너편을 보니, 흰빛의 석회암들이 정말 목화꽃이 만발한 성과 같다. 지금까지 여러 가지 모양의 바위들과 절벽을 보았지만, 하얀 석회층으로 이루어진 이런 장관은 처음 본다. 유네스코에서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할 만한 곳이다.

   서쪽으로 기운 해가 비친 석회층은 푸르스름한 빛을 띠며 아름다움을 자랑하였다. 우리는 아름다운 경관을 놓칠세라 사진기에 담고, 아내와 함께 온천수에 발을 담그고 앉아 쉬면서 경관의 아름다움을 이야기를 하였다. 호텔로 들어와 저녁 식사를 한 뒤에 호텔의 온천장에서 낮에 본 석회층의 광경을 떠올려 보며 온천물에 몸을 담갔다.


   로마의 목욕탕

   히에라폴리스 유적지로 들어서는 입구에 B.C. 2세기경에 지은 로마 시대의 목욕탕이 있다. 이 목욕탕에는 성스러운 샘이라고 불렸던 샘이 있는데, 깨끗한 온천수가 고여 있는 곳에 옛 건물의 잔해가 잠겨 있다. 이곳의 온천수가 심장병, 소화기장애, 신경통 등에 특수한 효과가 있다고 전해 왔으므로 많은 사람들이 모였을 것이다. 목욕탕은 이를 감안하여 많은 사람이 동시에 이용할 수 있도록 크게 지었던 것 같다. 현재는 목욕탕의 일부가 복원되어 박물관으로 활용되고 있다.

   로마의 개선문

   목욕탕 바로 앞에는 A.D. 84~85년에 세워진 도미티아누스(Domitianus, 재위기간 A.D. 81~96) 황제의 개선문이 있다. 개선문은 아치를 이룬 세 개의 통로와 두 개의 둥근 탑으로 되어 있다. 개선문 안으로 들어가면, 대리석으로 만들어진 중앙 도로가 있고, 도로의 좌우에 대리석 기둥들이 한 줄로 늘어서 있다. 그 옆에 중요 관공서와 건물들이 늘어서 있었던 것 같다. 개선문의 보존 상태는 비교적 좋은 편이다.

   공동묘지

   개선문 너머에는 1,200여 기()의 석관들이 있는 헬레니즘 시대의 공동묘지가 있다. 석관을 땅에 묻은 것이 아니라 단을 쌓고 그 위에 올려놓거나 건물을 짓고 그 안에 석관을 모셨다. 이것은 히에라폴리스에서만 볼 수 있는 무덤 양식으로, 다른 지방에서는 보기 어렵다.

   아폴로 신전과 플루토니온

   로마 목욕탕 뒤에 2세기에 건축된 아폴로 신전이 있었다. 아폴로 신전은 히에라폴리스의 주민들이 주신으로 모시던 태양신인 아폴로의 신전이다. 지금은 허물어져 기단(基壇)만 남아있지만, 당시에는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다. 히에라폴리에서는 아폴로신 외에도 아폴로와 쌍둥이 남매인 아르테미스(Artemis) 여신과 그들의 어머니인 레토(Leto), 지진을 관장하는 포세이돈(Poseidon) 등도 중요한 신으로 받들어 모셨다.

   아폴로 신전의 오른쪽 아래에는 지하세계의 신 하데스(hades)에게 바쳐진 플루토니온(Plutonion) 신전이 있다. 이 신전은 고대인들이 하데스의 왕국 즉, 지하세계로 통한다고 믿는 동굴에 세웠다. 이 동굴에서는 플루토니온(플루토니움)’이라고 불리는 유독가스가 솟아나왔다. 신관(神官)은 이 동굴에서 나오는 가스를 마시고 최면 상태에서 사람들에게 신의 계시를 전했다고 한다.

   원형극장

   히에라폴리스의 북동쪽 산자락에 12,000 명 정도를 수용할 수 있는 원형극장 터가 있다. 로마 셉티미우스 세베루스(Septimius Seberus, 재위기간 A.D. 193~211) 황제 때 건축된 이 극장은 일부 장식판, VIP를 위한 앞줄 박스 좌석과 함께 무대 대부분이 아직 그대로 남아 있다. 무대의 벽에는 아르테미스, 아폴로 등의 신상이 조각되어 있었다고 한다. 이 조각품은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고대 원형극장 가운데 아스펜도스의 극장 다음으로 보존상태가 좋아 지금도 여름 축제나 연극공연, 음악회를 열기도 한다.

   빌립 사도 순교 추모관

원형극장의 길 건너편 산 중턱에 빌림 사도 순교 추모관이 있다. 예수의 제자 중의 한 사람인 빌립 사도가 만년에 히에라폴리스에 와서 포교하다가 A.D. 80년에 딸과 함께 순교하였다. 기독교가 공인된 후인 A.D. 5세기경에 빌립이 딸과 함께 순교한 것으로 추정되는 자리에 빌립의 순교를 기념하기 위해 8각형의 건물을 지었다. 이것이 빌립 사도 순교 추모관이다. 빌림의 무덤은 발견되지 않았다.

   * 이 글은 2012년 8월 25일에 도서출판 '민속원'에서 간행한 <<터키 1000일의 체험> > 중 <터키 여행의 즐거움과 보람>에 실려 있음.



   라오디제아는 라오디키아(Laodikya)라고도 하는데, 데니즐리(Denizli)와 파묵칼레(Pamukkale)의 사이에 있다. 데니즐리에서 파묵칼레로 가는 길에 있는 코루주크(Korucuk) 마을에 라오디제아(Laodicea)행 표지판이 있었다. 그 표지판을 따라 1km쯤 가니 라오디제아 유적지가 나왔다. 이곳이 성경에 나오는 라오디게아, 요한 계시록에 나오는 초대 일곱 교회 중 하나인 라오디아교회가 있던 곳이다.

   라오디게아에는 기원전 2,000년경에 이오니아인들이 살았는데, 그들은 이곳을 디오스폴리스(Diospolis), 또는 로아스(Lhoas)라고 불렀다. 기원전 261~253년에 시리아의 셀레우코스 왕조의 안티오쿠스 2세는 이 지역에 도시를 건설하고, 아내의 이름을 따서 도시 이름을 라오디케아라고 하였다. 그 말의 뜻은 백성의 정의라고 한다. 라오디케아는 기원전 190년부터 페르가뭄의 통치를 받다가 A.D. 133년에 로마의 속주(屬州)가 되었다.

   옛날의 라오디케아는 리쿠스 강이 흐르는 산골짜기에 넓고 기름진 평야를 끼고 있었다. 이곳은 동서남북에 있는 도시들과 통하는 교통의 요지여서 경제적으로나 군사적으로 중요시되었다. 이곳 주민들은 넓은 평원에서 농사를 짓고, 양을 기르는 한편 인근 산에서 금을 캐내어 거래하였다.

   라오디게아에는 약 9km 떨어진 히에라볼리에서 온천수가 흘러오고, 바바 산의 만년설(萬年雪)이 녹아 흘러내리는 곳이었다. 이들 온천수와 냉천수(冷泉水)는 질병을 치료하는 데에 도움을 주었다. 인근에는 좋은 약재가 나는 곳이 많아 이를 이용하여 약을 생산하는 데에 힘을 기울였다 이곳에서 만든 귓병과 눈병 치료약은 치료 효과가 뛰어나서 아주 유명하였다. 그래서 이곳은 일찍부터 농업, 상업과 함께 의약이 발달하고, 은행과 고리대금업이 성행하였다.

   라오디게아는 A.D. 17년과 60년에 일어난 대지진으로 도시가 크게 파괴되었는데, 로마의 재정적 지원 없이 자체적으로 재건하였다고 한다. 이것은 라오디게아가 품질 좋은 흑양모 생산과 직조(織造), 염색업, 목화 재배와 면직물 생산, 의약품 생산, 금 생산 등을 통해 축적한 자본과 기술이 넉넉하였음을 말해 준다. 당시 이곳 사람들은 풍요로운 생활을 하면서 삶에 대한 자부심과 긍지를 가지고 살았다. 그러나 세속적인 만족에 이끌리어 영적인 문제에는 깊은 관심을 갖지 않았던 것 같다.

   라오디게아 교회에 대한 성경의 기록을 보면 다음과 같다.

    나는 네 행위를 안다. 너는 차지도 않고, 뜨겁지도 않다. 네가 차든지 뜨겁든지 하면 좋겠다. 네가 이렇게 미지근하여 뜨겁지도 않고 차지도 않으니, 나는 너를 내 입에서 뱉어 버리겠다. 너는 풍족하여 부족한 것이 조금도 없다고 하지만, 실상 너는 네가 비참하고, 불쌍하고, 가난하고, 눈이 멀고,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한다. 그러므로 나는 네게 권한다. 네가 부유하게 되려거든 불에 정련한 금을 내게서 사고, 벌거벗은 수치를 가려서 드러내지 않으려거든 흰 옷을 사서 입고, 네 눈이 밝아지려거든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라. <요한계시록 31518>

   이것은 라오디게아 교인들의 신앙이 차지도 않고, 뜨겁지도 않아 주님 보시기에 매우 못마땅하여 꾸짖은 말이다. 경제적으로 안정이 안 된 다른 지역의 교인들은 순수하고 열정적인 신앙을 간직하고 있는데, 경제적으로 안정이 된 이곳 교인들은 신앙적으로 게으르고 형식적인 신앙생활을 하였다. 그래서 이를 꾸짖고, “열심을 내어 노력하고, 회개하라.”고 명하셨다.

   위에 적은 성경 말씀에는 당시 라오디게아 사람들의 생활상을 반영한 표현이 여러 군데 나온다. 당시 라오디게아는 히에라볼리스에서 흘러오는 온천물을 사용하였는데, 9km를 흘러왔기 때문에 물이 뜨겁지도 않고 차지도 않았을 것이다. “차지도 않고 뜨겁지도 않다.”고 한 표현은 이를 빗대어 표현한 것 같다. “너는 풍족하여 부족한 것이 조금도 없다고 하지만은 당시의 라오디게아 사람들의 생활상을 반영한 표현이라 하겠다. 당시 라오디게아는 목화 생산이 많았고, 면직 공업이 발달하였다. 특히 흰색 면직물이 유명하였는데, 로마 상원의원들이 입던 흰옷은 이곳에서 만들었다고 한다. “흰 옷을 사서 입으라.”고 한 것은 이러한 상황을 반영한 것이다. “네 눈이 밝아지려거든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라.”고 한 것은 이곳이 안약의 명산지임을 반영한 것이다. 이렇게 보면 위에 적은 성경의 말씀은 당시 라오디게아의 지역적 특성과 생활상을 예로 들어 표현하여 교인들의 잘못을 일깨우려한 것이다.

   라오디게아 유적지에 와 보니, 넓은 산언덕에 여러 건물의 주춧돌과 벽을 쌓았던 돌과 건물의 기둥이 널려 있다. 아치형으로 된 건물의 잔해도 보이고, 원형극장과 교회 터 등도 있다. 잘 다듬어진 대리석 기둥이 서 있는 대로 양편에는 큰 건물들이 즐비하게 서 있었던 것 같다. 나는 양옆으로 건물의 잔해들이 즐비한 옛길을 걸으며 넓은 땅에 큰 규모의 화려한 건물들이 즐비하였던 거리의 모습, 그 거리를 오가며 풍요로움을 만끽하던 당시 사람들의 모습을 상상해 보았다.

   버스를 타기 위해 언덕길을 내려올 때 차지도 덥지도 않으니 뱉어 버리리라. 너는 풍족하여 부족한 것이 조금도 없다고 하지만, 실상 너는 네가 비참하고 불쌍하고 가난하고 눈이 멀고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한다.”는 말씀이 귀에 들리는 듯하였다. 라오디게아 교인들에게 하신 이 말씀은 풍족한 생활을 하면서 신앙적으로는 게으르고 형식적인 믿음을 가진 현대인, 특히 나에게 꼭 맞는 말씀이라는 생각이 든다. 꾸중을 들은 라오디게아 교인들의 모습과 나의 모습이 별반 다를 것이 없다는 것을 깨닫게 해 주신 주님의 은혜에 감사하며 길을 내려왔다.

 * 이 글은 2012년 8월 25일에 도서출판 '민속원'에서 간행한 <<터키 1000일의 체험>> 중 <터키 여행의 즐거움과 보람>에 실려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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